노동사회과학연구소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25)

 

문영찬 | 연구위원장

 

 

 

제4장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철학사조에 대한 비판

 

14. 롤즈의 ≪정의론≫,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최근 한국 사회에는 정의와 관련된 논의가 유행이다. 특히 세계 대공황으로 인하여 제기된 자본주의의 영원성에 대한 의문, 그리고 2016년의 촛불시위에서 나타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등은 올바른 사회, 올바른 국가,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이런 상황에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의를 구호가 아니라 하나의 이론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정의에 대한 이론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 즉, 분배적 정의, 교환적 정의, 시정적 정의에서부터 출발하여 수천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의 롤즈의 정의론이 유행했었는데 운동진영의 상당수도 자유주의의 이론 체계 속에 사회주의적 요구를 통합1)했다는 롤즈의 정의론에 끌려 들어가기도 했다. 그런데 기존의 상당수의 정의론들은 하나의 과학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강하다. 아리스토텔레스, 공리주의, 칸트, 롤즈 등 정의에 대한 많은 이론은 엄밀한 과학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시대에 어울리는 정의에 대한 요구를 이론화했다는 성격을 갖는다. 그런데 이러한 각각의 정의론들은 정의에 대한 논리의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각각 상정하는 사회상이 있으며 따라서 어떤 사회상을 그리고 있는가를 주목하면 각각의 정의론의 사회적 성격 혹은 계급적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롤즈는 자신의 정의에 대한 이론이 기존의 다수적 입장인 공리주의를 비판하며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려 한다는 것임을 밝힌다. 나는 공리주의에 대한 합당하면서도 체계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정의관을 고안하고자 했다. 사실 공리주의는 이런저런 형태로 모습을 달리하면서 앵글로색슨의 정치사상을 지배해 왔다. 이와 같은 대안을 찾고자 한 일차적인 이유는, 내가 볼 때 공리주의적인 교설의 취약성, 즉 입헌 민주주의적 제반 제도의 기초로서의 공리주의의 취약성 때문이다. 특히 생각해 보건대, 공리주의는 민주적인 제도들을 해명하는 데 있어서 최우선적으로 중요한 요구사항인 자유롭고 평등한 인격체로서의 시민들의 기본적 권리와 자유에 대해 만족스런 해명을 제공하지 못한다.2) 이와 같이 롤즈는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을 자신의 이론의 출발점으로 삼았는데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말하는 공리주의가 시민적 자유를 일차적으로 사고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시민적 자유의 문제를 우선시하는 계약론적인 정의론을 구상했다. 공리주의에서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 소수의 자유를 희생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롤즈 또한 이러한 점을 비판하면서 누구의 자유라 할지라도 다수의 행복을 위해 희생될 수는 없다는 논리를 편다. 그리하여 시민적 자유를 일차적인 것으로 놓는 정의론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정의의 제1 원칙으로서 평등한 시민적 자유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평등한 자유는 시민들이 서로 간에 평등한 원초적 입장에서 합의를 통해 인정된다는 점에서 계약론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합의를 통해 정의의 원칙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근본적으로 계약의 성질을 갖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롤즈는 로크, 루쏘, 칸트 등의 사회계약설의 전통을 잇고 있다고 스스로 주장한다.

이러한 계약의 배경이 되는 평등한 원초적 입장이라는 것은 롤즈에게 독특한 개념인데 실은 수많은 사회계약론이 전제하고 있는 자연상태라는 개념을 현대화한 것이며 이는 롤즈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자연상태라는 개념을 현대화한 원초적 입장은 일종의 가설적 조건인데 롤즈는 이에 대해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 계급적 처지가 어떤지 전혀 모르는 상태를 상정하면서 이를 무지의 베일이라 규정한다. 자신이 자본가인지, 노동자인지, 건강한 사람인지, 쇠약한 사람인지, 남성인지, 여성인지 등을 모르는 상태에서 정의의 어떤 원칙이 합당한지 합의를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무지의 베일에 싸인 원초적 입장에서 롤즈는 평등한 자유를 정의의 제1 원칙으로 사람들이 합의하게 된다고 본다. 이렇게 보면 롤즈의 정의론은 전형적인 자유주의적 이론이 되는데 여기서 롤즈는 정의의 제2 원칙으로 차등의 원칙을 상정하며 이 점이 롤즈의 정의론의 독특한 성격을 규정한다. 차등의 원칙은 재산과 권력의 불평등을 허용하되 그것이 모든 사람, 그중에서도 특히 사회의 최소 수혜자에게 그 불평등을 보상할 만한 이득을 가져오는 경우에만 정당한 것임을 내세우는 것이다.3) 불평등을 승인하되 그러한 승인의 조건으로서 가장 처지가 열악한 사람들 혹은 집단에게 불평등을 보상하는 이득이 주어지는 것을 전제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차등의 원칙은 이중적 성격이 있는데 이는 처지가 열악한 사람들의 처지를 개선해야만 한다는 것을 사회질서의 기본조건으로 상정한다는 점에서 정의의 이론이라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최소 수혜자의 처지의 개선을 조건으로 사회질서의 하나로서 불평등을 승인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불평등이 사회질서로서 승인된다면 그것은 사회의 계급적 분열을 하나의 질서로서 승인하는 것이 된다. 바로 이 점에서 차등의 원칙의 이중적 성격이 있는 것이며 이러한 이중성은 롤즈의 정의론 전체에 걸쳐 있다.

롤즈의 정의론은 제1 원칙으로서 평등한 자유, 그리고 제2 원칙으로서 차등의 원칙을 골간으로 한다. 여기서 차등의 원칙이 아니라 평등한 자유를 제1 원칙으로 한다는 점에서 롤즈의 정의론은 자유주의적 성격을 띠는데 롤즈는 평등한 자유의 우선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유의 우선성을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 정의의 제2 원칙보다 우선적이라는 것이다. … 자유의 우선성이 의미하는 것은 자유란 자유 그 자체만을 위해서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이다.4) 자유 자체만을 위해서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즉, 시민의 자유의 제한은 제2 원칙에서 주로 다루는 경제적 이득, 복리의 증대를 위해서 제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혹은 경제적 이득, 복리를 대가로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제2 원칙의 사회적 복리의 증대 문제와 제1 원칙의 자유의 문제는 차원이 다르며 제1 원칙의 자유의 문제는 자유의 문제를 조건으로 해서만 제한 가능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보면 평등한 자유는 절대적인 것이 되지만 실제로는 롤즈는 그러한 자유 또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제한할 수 있다고 본다. 이 점은 롤즈가 일반적인 자유주의자들과 대동소이한 점이다.

이러한 것이 롤즈의 정의론의 대략적인 골간이다. 여기서 차등의 원칙이 평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롤즈의 정의론은 사회주의적인 요구를 수용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리고 롤즈의 정의론은 계약론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차등의 원칙은 상호 간에 무지의 베일에 싸인 원초적 입장에서는 누가 열악한 처지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만장일치로 합의가 가능하다고 상정된다. 이 점은 원초적 입장이 하나의 가설적 조건이며 또 롤즈의 이론이 하나의 계약론이라는 점에서 수긍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롤즈의 정의론은 이러한 논리적 측면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성격을 갖는데 이 점을 검토해 보자.

롤즈는 자신의 정의론이 상정하는 사회를 재산 소유 민주주의 혹은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라고 본다. 롤즈는 재산 소유 민주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재산 소유 민주주의에서 목적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 간의 장기간에 걸친 공정한 협력체계로서 사회라는 관념을 실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본적인 제도들은 처음부터 일부 소수의 수중이 아니라, 사회에 충실히 협력하는 성원이 되고자 하는 시민 일반의 수중에 생산적 자산을 두어야 한다.5) 생산적 자산 즉, 생산수단을 일부 소수의 수중이 아니라 시민 일반의 수중에 두어야 한다는 것은 자본가계급의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를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점은 실제로 롤즈가 의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민 일반의 수중에 생산적 자산을 둔다는 것이 사회주의적 공동소유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불확실하며 사회주의적 소유가 아니라면 그것은 생산수단에 대한 소부르주아들의 평등한 소유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적 산업에 대한 이러한 소부르주아적 평등 소유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며 공상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여기서 롤즈가 상정하는 사회상을 좀 더 추적해 보자.

롤즈는 사적 소유와 사회주의적 소유의 관계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사유 재산 경제와 사회주의 간의 선택은 줄곧 그대로 남겨 두었으며 정의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여러 가지 기본 구조가 그 원칙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6) 이러한 입장은 롤즈가 상정하는 정의로운 사회가 사적 소유 사회인지, 사회주의 사회인지에 대해 열려진 태도로 판단의 여지를 남겨 둔다는 것이다. 롤즈가 말하는 자유주의적 사회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이 또한 여지를 남겨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롤즈는 시장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말한다. 시장제도는 사유 재산 체제나 사회주의 체제에 공통된 것임을 인정하고 가격이 갖는 할당적 기능과 분배적 기능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 아래에서는 생산수단과 천연자원이 공유된 것이므로 분배적 기능이 상당히 제한되는 반면, 사유 재산 체제에서는 두 가지 목적을 위해 가격을 여러 가지로 이용한다. 이러한 두 체제나 여러 가지 그 중간 형태 가운데서 정의의 요구 사항에 가장 충실히 부응하는 것이 어느 것인가는 미리 결정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7) 사유 재산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는 선택의 여지가 있는 문제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이라는 제도는 공통된 것이라고 롤즈는 보고 있다. 시장을 전제하는 사회주의라는 롤즈의 주장은 사실상 자본주의화한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말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시장과 같이 가는 소부르주아 사회주의를 상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롤즈는 다음과 같이 자본가계급의 존재를 승인하고 있다. 사회가 투자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부자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자신들이 소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상을 소유할 수 있게 하는 경우는 오직 귀족 계층의 방종과는 반대되는 자본가계층의 절약정신을 내포하는 특수한 여건에서이다.8) 롤즈는 이렇게 절약정신을 조건으로 자본가계급의 존재를 승인하면서도 임금노예제를 다음과 같이 부정한다. … 시장이란 실상 이상적인 체제는 아니다. 그러나 필요한 배경적 제도가 있을 경우 소위 임금노예제라는 최악의 측면이 없어질 것은 확실하다.9) 시장이라는 제도가 있을지라도 필요한 배경적 제도 즉, 평등한 자유와 차등의 원칙 등의 정의의 원칙이 구현된 제도가 있을 경우 임금노예라는 상태는 사라질 것이라고 롤즈는 보고 있다. 그러면 이렇게 상호 모순적인 롤즈의 여러 가지 관점을 종합적으로 살펴보자.

롤즈는 시장을 사유 재산 체제와 사회주의에 공통된 것으로 보면서 전적으로 승인하고 있다. 또 절약정신이라는 것을 조건으로 자본가계급의 존재를 승인하고 있고 반면에 재산 소유 민주주의에서는 생산 자산을 시민 일반의 수중에 놓아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 시장이 있더라도 정의의 원칙이 구현된 제도가 작동하면 임금노예라는 상태는 사라질 것으로 보고 있다. 롤즈의 이러한 모순된 입장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롤즈의 입장이 말해 주는 사회상은 실제로는 시장이 지배적인 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를 가리키지만 그것은 자본가가 주도하는 사회가 아니라 시민 일반, 즉 소부르주아들이 주도하는 사회이다. 소부르주아적 자본주의! 실제로 차등의 원칙이 말하는 최소 수혜자의 이익을 증대시키는 것을 조건으로 불평등을 승인한다는 것은 가장 비참한 임금노예의 상태를 개선하는 것을 조건으로 계급 질서를 승인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롤즈의 정의론은 진보적인 외양을 띠고 있으나 실제로는 계급 질서를 영구화하는 이론이며 진보와 변혁의 이론이 아니라 질서의 이론이다.

롤즈의 정의론이 질서의 이론이라는 점은 롤즈 스스로 여러 곳에서 피력하고 있다. 이 점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롤즈는 형식적으로는 혁명까지도 승인하고 있다. 기본구조가 아주 부정의하다고 생각되거나 그 자체가 공표한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면 우리는 극단적인 변화나 혹은 혁명적인 변화를 위한 방도까지도 마련하도록 노력해야 한다.10) 기본구조는 권리와 의무를 분배하는 사회의 기본적인 제도를 말하는 것인데 롤즈가 말하는 정의의 두 원칙 즉, 평등한 자유와 차등의 원칙 등이 사회의 기본구조에서 관철되지 않는다면 혁명까지도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의 두 원칙이 관철된다고 상정되는 사회에 대해서는 롤즈는 판이한 입장을 취한다. 그러한 사회에서 롤즈가 상정하는 저항의 최대치는 비폭력적인 시민불복종, 양심적 거부이다. 부정의한 전쟁에 대한 징집거부, 종교적 양심에 따른 거부 등이 그러한 사례이다. 뿐만 아니라 정의의 두 원칙에 대한 승인은 최종적 성격을 갖는 합의, 계약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승인 이후에 사회의 기본구조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부정의한 것이 된다. 즉, (형식적으로) 평등한 자유와 차등의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에서 평화로운 시민불복종을 넘어서는 계급투쟁은 부정의한 것이 된다. 바로 이 점에서 롤즈의 정의론은 진보와 변혁의 이론이 아니라 질서의 이론이 되는 것이다.

롤즈는 정의를 상충하는 요구들 간의 균형으로 보고 합리적 선택으로서 정의 관념을 채택했다. 그리고 합리적 선택으로서 정의의 원칙이 수립되고 난 후의 사회는 질서 정연한 사회로 상정한다. 이렇게 합리성으로서 정의론은 결국은 질서의 이론으로 귀착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계급투쟁은 어떠한가? 계급투쟁은 합리성의 결과로서 인정될 수도 있지만 합리성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계급투쟁은 합리성을 넘어서서 계급대립과 이익의 충돌로서 필연성의 영역, 과학의 영역에 위치한다. 이렇게 볼 때 과연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정의는 무엇인가가 제기된다.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이익과 정의는 동떨어진 것인가? 아니면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사회 보편적인 혹은 역사 보편적인 정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노동자계급의 이익의 관철이 정의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이렇게 보면 정의가 과연 무엇인가가 문제로 되는데 사실 정의라는 관념 하에 논의되어 온 것의 대부분은 분배의 문제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분배적 정의를 논한 이후로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 준다는 것이 정의의 문제의 주요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계급의 폐지를 논하는 대신 지금의 상태의 약간의 개선이 정의라는 이름 하에 강요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이렇게 보면 정의는 단지 분배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진보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문제로 확대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 시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계급대립의 폐지 문제로 압축될 수 있다. 즉, 이 시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참다운 정의는 계급의 폐지 문제라고 정식화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이익의 문제와 정의의 문제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될 수 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롤즈의 자유주의적 정의관을 비판하는데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에서 비판한다. 자유주의 정치론은 정치와 법이 도덕적ㆍ종교적 논란에 휩쓸리는 일을 막기 위해 탄생했다. 칸트와 롤즈의 철학은 그러한 야심을 아낌없이, 그리고 더없이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이 야심은 성공할 수 없다. 정의와 권리에 관한 뜨거운 쟁점 중 상당수가 도덕적ㆍ종교적으로 논란이 되는 문제를 피해 가지 못한다.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할 때, 좋은 삶에 관한 여러 견해를 항상 배제할 수는 없다. 가능하다 하더라도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11) 이는 마이클 샌델이 자유주의의 오른쪽에서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자유주의, 혹은 자유주의 정치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한다. 이러한 정교분리는 근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이다. 그러나 롤즈와 달리 정의를 공동선의 입장에서 파악하는 샌델은 정의의 문제에서 도덕적 혹은 종교적 신념의 문제가 포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롤즈는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의 입장에서 권리와 의무의 할당에 관한 사회의 기본구조를 정의론의 주요 대상으로 놓았다. 이러한 롤즈의 구상은 근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진보적 측면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반면에 샌델은 도덕적, 종교적 신념의 문제를 정의론의 주요 내용으로 포괄하려 하는데 이렇게 되면 정의의 문제에서 사회제도가 초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안이 도덕적, 종교적 신념에 어긋나는가 아닌가가 초점이 된다. 그리고 이는 롤즈에 비하면 한참 후퇴한 것이 된다. 미국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롤즈가 마치 부르주아 좌파를 대변한다면 샌델은 우파를 대변하는 격이 된다.

정의의 문제는 한두 마디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정의라는 관념으로 이해하는 내용은 천양지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볼 때 정의의 문제가 분배의 문제로 좁혀지면 그것은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분배할 자산(권리와 의무들)을 쥐고 있는 것은 지배계급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롤즈의 정의론이 일정하게 진보적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결국은 질서의 이론으로 귀착되는 것은 정의의 관념을 분배의 문제 그리고 나아가 합리적 선택의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의 문제는 단지 분배의 문제로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사회의 진보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문제로 확대되어야 한다. 그럴 때만 정의의 개념, 정의론이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것을 멈추고 노동자계급의 무기가 될 수 있다. [노/사/과/연]

 

 

 


1) 황경식, 후기, ≪정의론≫, 이학사, p. 755.

2) 롤즈, ≪정의론≫, p. 16.

3) 같은 책, p. 49.

4) 같은 책, p. 329.

5) 같은 책, p. 22.

6) 같은 책, p. 349.

7) 같은 책, p. 367.

8) 같은 책, p. 397.

9) 같은 책, p. 375.

10) 같은 책, p. 480.

11)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김영사, p. 337.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1개의 댓글

  • 요즈음 어떤 후*랑 #도 ‘양&’을 언급한 바 있는데 과연 누구의 ‘양&’인지요? 그나저나 이곳에서 ‘$명정당’도 언급했는데 무엇보다 변혁파의 실천마저 보기 어려운 세상이 너무나 큰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희랍/그리스의 KKE/KNE는 특수예로 보더라도 다른 파서/브라질의 PCdoB – FV(파서/브라질 공산당 – 적색파)정도만이라도 조직력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국가 상황도 이 정도만 가도 … 그나마 다행 일지도 모를 … 입니다. 그러고보니 정의 저 단어 정말 오염 많습니다. 한국의 누구들도 자신들의 행동들중에 어느 것들은 보편적으로도 이미 이 단어의 의미를 상실한 행동을 해 놓고 이 단어를 내세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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