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맑스주의와 민족문제(하)

 

이오씨프 쓰딸린(Иосиф Сталин)

번역: 신재길(편집위원)

 

 

6. 까프까쓰인, 청산주의 대표자회의

 

위에서 민족주의 전염병에 버티지 못한 일부 까프까쓰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동요에 대해 말했다. 예상치 않게 이 동요는 까프까쓰 사회민주주의자 중 일부가 분트의 선례를 따라 문화적-민족자치를 선언하면서 드러났다.

전(全) 까프까쓰는 지방차치를, 까프까쓰의 각 민족은 문화적-민족자치를 ― 이것이 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자신의 요구를 정식화한 방침이다. 말이 난 김에 말하자면 이들은 러시아의 청산주의자들과 연결되어 있다.

까프까쓰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정평 있는 지도자이며 명성이 높은 N씨의 말을 들어 보자.

 

다 아는 바와 같이 까프까쓰는 본토의 주들과 매우 다르다. 인구를 구성하는 인종이 다르고 지역이나 농업이 발전한 정도도 다르다. 이러한 변경지역을 개발하고 구체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그 지방의 풍토와 문화에 익숙하고 지방적 특색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지역을 개발하기 위한 모든 법령은 반드시 그 지방에서 제정되고 그 지방의 힘으로 실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까프까쓰 중앙자치기관의 권한에는 지방문제에 대한 입법권이 포함되어야 한다. … 결국 까프까쓰 중앙기관이 하는 기능이란 지방 경제를 개발하고 부유하게 하는 법령을 제정하는 데 있다.1)

요컨대 이것이 까프까쓰의 지방자치이다.

만약 N씨의 다소 혼란스럽고 일관되지 못한 주장을 무시한다면 그의 결론은 올바르다. 까프까쓰의 주민구성과 생활조건의 특수성으로 인해 국가적 헌법체계(이것은 N도 부인하지 않는다) 안에서 실행되는 까프까쓰의 지방자치(regional autonomy)는 확실히 필요하다. 이것은 러시아 사회민주당도 인정한다.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제2차 대회에서 생활조건 및 주민구성이 러시아 본토와 다른 변경의 지방자치정부(regional self-government)를 승인하였다.

마르또프는 이 조항을 제2차 대회에서 토론에 회부하고는 다음과 같이 옳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광활한 지역과 중앙집권적 통치의 경험에서 볼 때 핀란드, 폴란드, 리뚜아니아, 까프까쓰와 같은 넓은 (지역)단위는 지방자치정부가 필요하고 효율적이다.

 

이로부터 지방자치는 지방자치정부로 이해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N씨는 더 나아간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지방자치는 문제의 한 측면만을 붙잡고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현지 생활의 물질적 발전에 대해서만 말해 왔다. 그러나 변경지역의 경제적 발전은 경제적 활동만이 아니라 정신적, 문화적 활동에 의해서도 촉진된다. … 문화적으로 강한 민족은 경제적 측면에서도 강하다. … 그러나 민족의 문화 발전은 오직 그 민족의 언어로만 가능하다. … 그러므로 모국어와 관련된 모든 문제는 민족문화의 문제이다. 교육, 재판, 교회, 문학, 예술, 과학, 극장 등등이 민족문화의 문제이다. 어떤 지역의 물질적 발전은 각 민족들을 하나로 단결시킨다. 반면 민족문화 사업은 각 민족을 분리시키고 분리된 영역에서 제각기 수행된다. 물질적 발전에 관한 활동은 일정한 지역과 관련되어 있다. … 민족문화 사업은 다르다. 민족문화 사업은 일정한 지역과 관련되지 않고 특정한 민족 존재와 관련되어 있다. 그루지야인은 자신이 어디에 살던 그루지야어의 운명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그루지야 문화가 단지 그루지야에 살고 있는 그루지야인에게만 관계된다고 한다면 심오한 무지(無知)이다. 아르메니아의 교회를 예로 들어보자. 교회의 사무를 처리하는 데 다양한 지역과 국가들에 살고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참가한다. 여기에서 지역은 아무런 역할도 못한다. 또 예컨대 그루지야 박물관을 설립하는 데는 찌플리쓰(Tiflis)에 사는 그루지야인뿐만 아니라 바꾸(Baku), 꾸따이쓰(Kutais), 상뜨뻬쩨르부르크(St. Petersburg) 및 기타 지방에 사는 그루지야인들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민족문화 사업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일은 관련된 민족에게 맡겨야 한다. 우리는 까프까쓰에서 각 민족의 민족문화자치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다.2)

 

간단히 말하면 문화는 지역이 아니며 지역은 문화가 아니기 때문에 민족문화자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N씨가 문화적-민족자치를 지지하면서 말할 수 있는 전부다.

민족적-민족자치 일반에 대해서는 다시 말하지 않겠다. 우리는 이미 그 해악에 대해서 말하였다. 다만 우리는 보통은 쓸모없던 문화적-민족자치가 까프까쓰의 조건에서는 매우 어리석고 터무니없다는 점만을 지적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문화적-민족자치는 발달한 문화와 문예(文藝)가 있는 비교적 발전한 민족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조건이 없다면 문화적-민족자치란 전혀 의미 없는 어리석은 짓이 된다. 그런데 까프까쓰에는 원시적 문화와 언어는 있으나 자신의 고유한 문예가 없는 민족이 있다. 이러한 민족들은 (민족이 생성되는) 과도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일부는 동화되고 일부는 계속 발전하고 있다. 이런 민족에게 어떻게 문화적-민족자치를 적용할 것인가? 이런 민족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의심할 바 없이 문화적-민족자치는 이런 민족을 포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민족들을 어떻게 개개의 문화적-민족연맹으로 조직할 것인가? 각자의 언어는 있지만 자신의 고유한 문예가 없는 민그렐족(Mingrelians), 압하쓰족(Abkhasians), 아자리야족(Adjarians), 쓰반족(Svanetians), 레즈긴족(Lesghian) 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느 민족에 편입시킬 것인가? 과연 민족적 연맹으로 조직할 수 있겠는가? 어떠한 문화 사업으로 조직할 것인가?

오쎄트인(Ossetian)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남(南)까프까쓰에 살고 있는 오쎄트인은 그루지야인에 흡수되고 있으나 아직 완전히 동화되지는 않았다. 북(北)까프까쓰에 사는 오쎄트인은 일부는 러시아인에 동화되고 있고 일부는 자기 문화를 만들며 계속 발전하고 있다. 이런 오쎄트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단일한 민족적 연맹으로 조직할 것인가?

아자리야인은 언어는 그루지야어를 쓰고 문화는 터키식이고 종교는 이슬람이다. 이들은 어느 민족연맹에 소속되어야 하는가? 종교문제에 관해서만 그루지야인과 별도로 조직하고 다른 문화사업과 관련해서는 그루지야인과 함께 조직할 것인가? 그리고 꼬불레트인(Kobuletians)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인구쉬인(Ingushes)은? 인길로이인(Inghilois)은?

다수의 민족이 (민족)명부에서 배제된다면 이것은 어떤 종류의 자치일까?

아니다. 이것은 결코 민족문제의 해결이 아니다. 쓸데없는 환상의 산물일 뿐이다.

좋다. 일단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의 N씨가 말하는 민족적-문화자치가 실시된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이 어떤 상태로 되며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는가? 예컨대 남(南)까프까쓰에 사는 따따르인을 보자. 따따르인은 글을 아는 사람이 극히 적고 학교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물라(mullah, 이슬람 율법학자: 역자)의 지도하에 있다. 그리고 이들의 문화는 종교적 기운으로 가득 차있다. … 따따르인을 문화적-민족 연맹으로 조직한다는 것은 물라가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족적-문화자치는 반동적인 물라가 마음대로 유린하도록 따따르인을 포기하는 것이며, 최악의 적이 따따르 대중을 정신적 노예로 만드는 근거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언제부터 반동의 물방아에 물을 대주기 시작했는가?

따따르인이 민족적-문화 연맹으로 분열되고 가장 흉악한 반동의 노예가 되는 것 ― 이보다 더 좋은 해법을 까프까쓰의 청산주의자들은 선언할 수 없었단 말인가?

문화적-민족자치는 결코 민족문제에 대한 해결이 아니다.

까프까쓰의 민족문제는 후진 민족과 종족이 고급문화의 일반 흐름에 합류해야만 해결될 수 있다. 이와 같은 해결만이 진보이고 사회민주당이 허용할 수 있다. 까프까쓰의 지방자치는 후진 민족문화가 전반적으로 발전하도록 이끌기 때문에 허용된다. 지방자치는 소수민족이 협애한 범위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며 후진 민족이 진보하고 고급문화의 혜택을 쉽게 받도록 한다. 그러나 문화적-민족자치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작용한다. 문화적-민족자치는 민족들을 낡은 테두리 안에 가두고 민족문화 발전이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게 하며 고급문화 단계에 올라서는 것을 방해한다.

이렇게 하여 민족자치는 지방자치의 장점을 제거하고 파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N씨가 제안한 민족-문화자치와 지방자치를 결합하는 혼합형태는 (까프까쓰에) 적합하지 않다. 이런 억지 결합으로는 사태가 개선되지 않고 도리어 악화된다. 후진 민족은 발전이 방해받고 더욱이 지방자치는 민족연맹으로 조직된 민족들이 충돌하는 무대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보통 쓸모없던 문화적-민족자치가 까프까쓰에서는 어리석고 반동적인 역할을 한다.

이것이 N씨와 까프까쓰 동조자들의 문화적-민족자치이다.

까프까쓰의 청산주의자들이 한 걸음 더 나가서 조직문제에 있어서도 분트의 뒤를 따라갈지 어떨지는 미래만이 안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의 역사에서 조직상 연방주의 강령은 항상 민족자치 강령에 선행했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은 1897년 이래 조직상의 연방주의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민족자치를 받아들인 것은 2년 후(1899년)이다. 분트분자들이 처음으로 민족자치를 분명히 표명한 것은 1901년이었으나 조직상 연방주의는 1897년부터 실행했다.

거꾸로 까프까쓰의 청산주의자들은 민족자치로부터 시작한다. 만약 까프까쓰의 청산주의자들이 계속 분트분자들을 따라가려면 국제주의적 원칙에 기초하여 90년대 말에 건립된 전(全) 조직체계를 우선 파괴해야 할 것이다.

노동자들은 민족자치를 받아들이기 쉽다. 노동자들이 아직 민족자치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직체계는 쉽게 파괴되지 않는다. 까프까쓰에 있는 모든 민족의 노동자들이 조직체계를 수년에 걸쳐 세우고 아끼며 키워왔기 때문이다. 헤로스트라투스3) 행위가 시작되기만 하면 노동자들은 문화적-민족자치가 갖는 민족주의적 실체를 간파할 것이다.

 

 

까프까쓰인이 여전히 대면이나 지면으로 민족문제를 토론하고 있는 동안 청산주의자 전(全) 러시아 대표자회의가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쉽고도 간단한 방법이다. 들어 보자.

 

민족-문화자치가 필요하다는 취지의 까프까쓰 대표단의 요구를 듣고 … (청산주의자) 대표자회의는 이 요구의 실상에 대한 어떠한 견해도 없이 이 요구가 민족자결권 강령의 정확한 의미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요컨대, 무엇보다 문제의 실상에 대한 어떠한 견해도 없다. 그런데 선언한다. 참 기발한 방법이다. …

이 기발한 대표자회의는 도대체 무엇을 선언한다는 것일까?

그것은 민족-문화자치 요구가 민족자결권을 인정하는 강령의 정확한 의미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논점을 검토해 보자.

민족자결 조항은 민족의 권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조항에 의하면 민족은 자치권뿐만 아니라 분리권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정치적 자결이다. 청산주의자들은 누군가를 속이려고 이미 국제 사회민주당 전체가 승인한 민족의 정치적 자결권을 왜곡하는가?

아니면 혹시 청산주의자들은 자기를 변호하고 곤경에서 교묘히 빠져나가려고 문화적-민족자치가 민족의 권리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궤변을 늘어놓는 것인가? 바꾸어 말하여 어떤 나라에서 모든 민족이 문화적-민족자치에 기초해서 생활하는 데 동의한다면 그들은 즉 모든 민족은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고 아무도 정치생활의 다른 형태를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새롭기도 하고 현명하기도 하다. 아마도 여기에 다음과 같은 말 ―민족, 오직 민족 자체만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으므로 민족은 자신의 헌법을 폐지할 권리를 가지며 폭압체제로 교체하고 옛 제도로 돌아갈 권리도 가진다― 이런 말을 덧붙여야 하는 것은 아니겠는가? 반복하자면 이런 의미에서는 문화적-민족자치이건 그 어떤 민족적 반동이건 민족의 권리에는 저촉되지 않는다.

존경할 만한 대표자회의가 말하고 싶은 것이 이런 것인가?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대표자회의는 문화적-민족자치가 민족의 권리가 아니라 강령의 정확한 의미저촉되지 않는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로 되는 것은 민족의 권리가 아니라 강령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만약 어떤 민족이 청산주의자 대표자회의에 문의하였다면 대표자회의는 민족은 문화적-민족자치권을 가지고 있다고 솔직히 선언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표자회의에 문의한 것은 민족이 아니라 까프까쓰 사회민주주의자들(좋지 못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이긴 하지만 어쨌든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대표단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질문한 것은 민족의 권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민족자치가 사회민주당의 원칙과 모순되는지 어떤지, 또 그것이 사회민주당 강령의 정확한 의미저촉되는지 어떤지 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민족의 권리와 사회민주당 강령의 정확한 의미는 전혀 다르다.

민족의 권리에 저촉되지 않으면서도 강령의 정확한 의미에 저촉되는 요구가 분명히 있다.

예컨대 사회민주당의 강령에는 신앙의 자유에 대한 조항이 있다. 이 조항에 따르면 어떤 사람도 천주교, 정교 등의 종교를 믿을 권리가 있다. 사회민주당은 정교인, 천주교인, 개신교인 등을 박해하는 모든 종류의 종교 탄압에 반대하여 투쟁한다. 이것이 천주교나 개신교 및 기타 종교가 강령의 정확한 의미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다. 사회민주당은 천주교나 개신교에 대한 박해를 언제나 반대하며, 원하는 종교를 믿을 민족의 권리를 항상 옹호한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민주당은 정당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에 근거하여 사회주의 세계관의 승리를 위한 천주교, 개신교, 정교에 대한 반대선전을 수행한다.

사회민주당이 이렇게 하는 것은 개신교, 천주교, 정교 등의 종교가 의심할 바 없이 강령의 정확한 의미에 저촉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정당한 이익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자결권 문제도 이와 같다. 민족은 마음대로 문제를 풀어갈 권리가 있으며 유익하든 해롭든 간에 민족 제도를 보전할 권리가 있다. 그 누구도 민족 생활에 강제로 간섭할 수 없다. (아무도 그럴 권리는 없다!) 그러나 이것이 사회민주당이 각 민족의 해로운 제도나 불합리한 요구에 반대 투쟁하거나 선동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사회민주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에 가장 적합하게 문제를 풀어내도록 각 민족의 의지에 영향을 주며 선동할 의무가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민족자결권을 옹호하여 투쟁하고 동시에 따따르의 분리나 까프까쓰 각 민족의 문화적-민족자치에 반대하여 선동한다. 이 두 가지는 민족의 권리에 저촉되지 않으면서도 강령의 정확한 의미에는 즉 까프까쓰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에는 저촉되기 때문이다.

민족의 권리와 강령의 정확한 의미는 전혀 다른 두 개의 영역이다. 강령의 정확한 의미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과학적으로 정식화한 표현이다. 반면에 민족의 권리는 어떠한 계급(자본가, 귀족, 성직자 등)의 이익일지라도 힘과 영향력에 따라 나타낼 수 있다. 한 영역은 맑스주의자에게 주어진 의무이지만 다른 영역은 다양한 계급으로 이루어진 민족의 권리이다. 민족의 권리와 맑스주의 원칙이 서로 저촉될 수도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쿠푸(고대이집트 제4왕조 제2대 파라오: 역자)의 피라미드와 악명 높은 청산주의자 대표자회의가 저촉될 수도 않을 수도 있는 것과 같이 단순히 비교될 수는 없다.

그러나 존경스런 대표자회의는 내용이 전혀 다른 것을 뒤섞어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민족의 권리와 사회민주당의 원칙과는 서로 저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의 모든 요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과 합치되며 (민족)자결을 지향하는 민족의 어떤 요구도 다 강령의 정확한 의미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혼란시키는 것이며 용납될 수 없다.

대표자회의는 논리 따윈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이러한 황당무계한 논리에 근거하여 민족-문화자치에 대한 요구는 강령의 정확한 의미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오늘날 유명한 청산주의자 대표자회의 결정이 생겨났다.

그러나 청산주의자 대표자회의는 논리 법칙만 위반한 것이 아니다.

문화적-민족자치를 승인함으로써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대한 의무도 위반했다. 강령의 정확한 의미를 그야말로 결정적으로 위반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강령을 채택한 제2차 대회는 문화적-민족자치를 단호히 배격했기 때문이다. 대회에서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골트블라트(분트주의자):  … 나는 민족문화의 자유로운 발전을 보장할 특별한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제8항에 문화 발전의 완전한 자유를 각 민족에게 보장해 줄 제도를 창설한다라는 말을 보충할 것을 제안한다. (알다시피 이것이 문화적-민족자치에 대한 분트의 정식화이다. ― 쓰딸린.)

마르뜨이노프는 일반적 제도는 특별한 이익도 보장하도록 제정하였음에 틀림없다고 지적한다. 각 민족의 문화적 발전을 보장할 특별한 제도의 설립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고로프: 민족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소극적 제안만을 받아들일 수 있다. 즉 우리는 민족에 대한 모든 억압을 반대한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원인 우리는 개개의 민족이 발전해 갈지 어떨지는 관심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자생(自生)의 과정이다.

꼴쪼프: 분트의 대표들은 분트의 민족주의가 언급될 때마다 억울해 한다. 그런데 분트 대표가 제출한 수정안은 순수 민족주의 성질을 띤다. 그들은 사멸해 가는 민족까지도 유지시킬 비상한 공세조치를 취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한다.

결국 골트블라트의 수정안은 세 사람만 찬성하고, 대다수가 반대하여 부결되었다.

 

청산주의자 대표자회의가 강령의 정확한 의미에 저촉된 것은 명백하다. 청산주의자 대표자회의는 당 강령을 위반했다.

이제 청산주의자들은 스톡홀름 대회가 문화적-민족자치를 승인하였다고 언급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변명한다. V. 꼬쏘프쓰끼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알다시피 스톡홀름 대회에서 채택된 협약에 따라 분트는 자신의 민족강령을 유지할 수 있다(전당대회에서 민족문제가 결정될 때까지). 이 대회는 민족적-문화자치가 적어도 당 일반강령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기록하였다.4)

 

그러나 청산주의자들의 노력은 헛수고다. 스톡홀름 대회에서 분트의 강령을 승인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단지 문제를 미해결로 잠시 남겨둔다는 데 동의하였을 따름이다. 용감한 꼬쏘프쓰끼는 진실을 다 말하기에는 용기가 부족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다. 사실은 이렇다.

 

갈린은 다음과 같이 수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민족강령에 대한 문제는 대회에서 심의되지 않았고 따라서 미해결인 채로 남겨 둔다.(찬성 50표, 반대 32표)

질문: 미해결이란 무엇인가?

의장: 민족문제를 미해결로 남겨 둔다는 것은 분트가 다음 대회 때까지 민족문제에 대한 자신의 결의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강조는 쓰딸린.)5)

 

보는 바와 같이 대회는 분트의 민족강령에 대한 문제를 심의조차 하지 않았다. ― 대회는 그것을 미해결로 남겨 두었고, 분트에게 다음 전당대회 때까지 그 강령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였을 따름이다. 달리 말하면 스톡홀름 대회는 이 문제를 회피하였다. 대회는 문화적-민족자치에 대해 좋다 나쁘다 평가하지 않았다.

그런데 청산주의자 대표자회의는 사태를 매우 확정적으로 평가한다. 문화적-민족자치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처럼 여긴다. 그리고 당 강령의 이름으로 그것을 비준하고 있다.

차이는 매우 명백하다.

청산주의자 대표자회의가 온갖 술책을 다 썼어도 민족문제는 한 걸음도 진전시키지 못했다.

대표자회의가 할 수 있는 것이란 분트와 까프까쓰의 민족주의적 청산주의자들 앞에서 알랑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7. 러시아에서의 민족문제

 

민족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해결 방안을 제안하는 것이 남아 있다. 출발점은 민족문제가 러시아의 현 정세와 밀접한 연관 속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과도기다. 정규적, 입헌적 생활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고 정치적 위기도 해결되지 않았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혼란한 시대이다. 이 와중에 정치운동이 생겨났다. 현재와 미래의 정치운동은 완전한 민주화를 목표로 한다.

민족문제는 이 운동과 관련시켜 고찰해야 한다.

나라의 완전한 민주화는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기초이며 조건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국내 정세뿐만 아니라 국제 정세도 고려해야 한다.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 오스트리아와 중국 사이에 있다. 아시아에서 민주주의가 성장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유럽에서 제국주의가 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본은 유럽이 협소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자본은 새로운 시장, 값싼 노동력,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 다른 나라에 손을 뻗치고 있다. 이것은 국제분쟁과 전쟁을 가져온다. 어느 누구도 발칸전쟁6)이 국제분쟁의 시작이 아니라 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대내외적 정세의 결합에 따라 러시아의 이런저런 민족이 독립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고자 한다. 민족독립에 장애를 조성하는 것은 맑스주의자가 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러시아 맑스주의자는 민족자결권을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민족)자결권은 민족문제 해결의 필수조건이다.

다음으로 이런저런 이유로 전체 틀 안에 남아 있는 민족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는 문화적-민족자치가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을 보았다. 첫째로, 문화적-민족자치는 인위적이고 비현실적이다. 왜냐하면 생활상의 이유로 인해 전국 각지로 흩어지고 이주한 사람들을 인위적으로 하나의 민족에 끌어들이려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문화적-민족자치는 민족주의를 활성화시킨다. 왜냐하면 민족을 기준으로 행정구역을 구획하고자 하고, 민족을 조직하고자 하고, 민족적 특색(peculiarities)보존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사회민주당에는 적합하지 않다. 모라비아 분리주의자들이 독일연방의회(Reichsrat)에서 독일 사회민주당 대의원단에서 갈라져 나와 모라비아 부르주아 대의원들과 함께 모라비아 연합체를 만든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분트 출신 분리주의자들이 안식일유대방언을 찬양하면서 민족주의에 빠진 것도 역시 우연한 일이 아니다. 두마(Duma)에는 아직 분트의 대의원은 없다. 그러나 분트가 활동하는 지역에는 교권주의적인 반동적 유대교 공동체가 있다. 분트는 그 공동체의 지도 기관에서 유대인 노동자와 유대인 부르주아의 연합체를 준비하고 있다.7) 이러한 것이 문화적-민족자치의 논리적 귀결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민족자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면 출로는 어디에 있는가?

유일하게 올바른 해결방법은 지방자치이다. 바로 폴란드, 리뚜아니아, 우끄라이나, 까프까쓰 등과 같은 일정한 지역단위의 자치이다.

지방자치의 우월성은 우선 지역기반이 없는 공중누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지역에 살고 있는 한정된 주민을 대상으로 한다는 데 있다. 다음으로 지방자치에서는 사람들이 민족별로 쪼개지지 않으며, 민족 장벽도 강하지 않다. 오히려 사람들이 민족적 장벽을 깨고 계급별로 단결한다. 마지막으로 지방자치에서는 전체 중앙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고 최적의 가능한 방법으로 그 지방의 천연자원을 이용하고 생산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 이러한 기능은 문화적-민족자치에는 없다.

요컨대 방자치야 말로 민족문제 해결의 필수조이다.

의심할 바 없이 어느 지방도 단일 민족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각 지방마다 소수민족이 뒤섞여 산다. 폴란드에서는 유대인, 리뚜아니아에서는 레트인, 까프까쓰에서는 러시아인, 우끄라이나에서는 폴란드인 등이 소수민족이다. 이 경우 다수민족이 소수민족을 압박할 거라는 우려가 생긴다. 이런 우려는 낡은 제도가 남아 있는 한 근거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라에 완전한 민주주의가 수립된다면 이런 우려는 사라질 것이다.

흩어져 살고 있는 소수민족을 단일한 민족적 연맹에 결합시키자는 제안이 있다. 그러나 소수민족에게 필요한 것은 인위적 연맹이 아니라 살고 있는 그 지방에서 실제적 권리를 갖는 것이다. 완전한 민주주의가 없다면 민족적 연맹이 민족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반대로 완전한 민주주의가 있다면 민족적 연맹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소수민족이 특히 관심을 갖는 것은 무엇인가? 소수민족이 불평하는 것은 민족적 연맹이 없다는 점이 아니라 모국어를 사용할 권리가 없다는 점이다. 소수민족에게 모국어를 쓰게 하라. 그러면 불평은 자연히 사라질 것이다.

소수민족이 불평하는 것은 민족적 연맹이 없다는 점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학교가 없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학교를 세워 줘라. 그러면 그 불평의 모든 근거는 사라질 것이다.

소수민족이 불평하는 것은 민족적 연맹이 없다는 점이 아니라 양심의 자유(신앙의 자유), 이동의 자유 등이 없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자유를 줘라. 그러면 불평은 사라질 것이다.

요컨대 든 형태(언어, 학교 등)의 민족적 평등권은 민족문제 해결에서 필수적 조건이다.

따라서 나라에 완전한 민주주의에 기초한 전 국가적 법률이 필요하다. 이 법률은 모든 민족적 특권을 예외 없이 금지하고 소수민족의 권리에 대한 어떠한 압박과 제한도 일체 금지하여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오직 이러한 점에서만 소수 민족의 권리를 탁상공론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보장할 수 있다.

조직상의 연방주의와 문화적-민족자치 사이의 논리적 연관성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문화적-민족자치가 완전한 분열 즉 분리주의로 발전하는 무제한적 연방주의에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만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오스트리아에서 체코인이나 러시아에서 분트주의자가 (민족)자치로부터 시작하여 연방주의를 지나 분리주의로 끝나는 데에는 문화적-민족자치가 만들어 낸 민족주의 분위기가 큰 역할을 하였다. 민족자치와 조직상의 연방주의가 서로 손을 맞잡고 나가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명백하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사람들을 민족별로 분리하고 민족별로 조직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런 유사한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민족자치는 대개 주민들을 구분(區分)하고 조직상의 연방주의는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를 분열시키는 데 있을 뿐이다.

우리는 노동자를 민족별로 분열시킨 결과가 어떠할지 잘 알고 있다. 통일적 노동자당은 와해되고, 노동조합은 민족별로 쪼개지고, 민족분규는 첨예화되고, 민족 간의 파업 파괴행위가 감행되며, 사회민주당 내의 사기는 완전히 떨어진다. 이러한 것이 조직상의 연방주의가 가져다주는 결과들이다. 이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역사와 러시아 분트의 활동이 웅변적으로 증명해 준다.

문화적-민족자치를 방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조직의 기초를 국제주의 원칙에 두는 것이다.

러시아에 사는 모든 민족의 노동자들이 지역별로 단일하고 통일적인 집단으로 단결하고, 그 집단들을 단일한 당에 결속시키는 것 ― 이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이와 같은 당 건설은 통일적인 당 내부에서 광범한 지방자치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전제로 한다.

까프까쓰의 경험은 국제주의 원칙에 기초한 조직형태가 전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까프까쓰인은 아르메니아인 노동자들과 따따르인 노동자들 간의 민족적 충돌을 제거하여 왔다. 까프까쓰인은 주민들 간의 학살과 무력충돌을 막아 주민들을 보호하고 있다. 또 그들은 많은 민족이 모여 사는 바꾸에서 이제는 더 이상 민족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노동자들을 강력한 운동의 유일한 흐름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 모든 경우에 까프까쓰 사회민주당의 국제주의적 조직구조가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조직의 형태는 실천 활동에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의 모든 정신생활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노동자들은 조직적 삶을 산다. 조직생활은 노동자들을 정신적으로 성장시키고 교육한다. 노동자들은 조직생활을 하면서 다른 민족 출신의 동지들과 항상 만난다. 노동자들은 공동된 조직의 지도하에 함께 공동 투쟁을 수행한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은 노동자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같은 계급 가정의 일원이라는 사상, 사회주의의 통일적 군대의 일원이라는 사상으로 고취된다. 이것은 노동계급의 광범한 층에 거대한 교육적 의의를 지닌다.

그러므로 국제주의적 조직형태는 동지적 감정을 배양하는 학교이며 국제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가장 유력한 선동이다.

민족에 기초한 조직은 이와 다르다. 민족에 따라 조직될 때 노동자들은 조직적 껍데기 안에 고립되어 민족적인 협소한 테두리에 갇힌다. 노동자들은 공통점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점이 강조된다. 여기에서는 노동자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민족의 한 성원 즉 유대인, 폴란드인 등이다. 조직상의 민족적 연방주의가 노동자들을 민족적 배타주의 정신으로 교육한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민족적 형태의 조직은 민족적 편협성과 침체성의 학교이다.

이와 같이 우리 앞에는 원칙적으로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조직형태가 있다. 노동자들을 국제주의적으로 단결시키는 형태와 민족별로 분열시키는 형태이다.

이 두 형태를 조화시키려는 시도는 지금까지 쭉 헛수고였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이 1897년 빔베르거에서 작성한 타협적 규약은 이미 공중누각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당은 사분오열되었고 노동조합도 영향을 받았다. 조화는 몽상적일 뿐만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슈트라서(Strasser)가 분리주의가 빔베르거 당 대회에서 첫 승리를 쟁취했다8)고 말한 것은 옳았다.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다. 스톡홀름 대회에서 이루어진 분트의 연방주의와의 조화는 완전히 실패했다. 분트는 스톡홀름의 타협을 파괴했다. 분트는 스톡홀름 대회 이후 지방에서 노동자들이 각 민족 출신 노동자들을 포괄하는 단일한 조직체로 단결하고자 할 때 방해물이 되었다.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1907년과 1908년에 각 민족의 노동자들이 결국은 밑으로부터 단결을 실현하여야 한다고 여러 번 요구하였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트는 자기의 분리주의적 전술을 완강하게 고집하였다. 분트는 조직상의 민족자치로부터 출발하여 사실상의 연방제로 나아갔다. 이는 완전한 분열, 분리주의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러시아 사회민주당과의 관계를 깸으로써 분트는 사회민주당 내에 혼란과 조직 파괴를 가져왔다. 일례로 야겔로(Jagiello) 사건10)을 회상해 보라.

그러므로 조화의 방법은 몽상적이고 해로운 것으로 반드시 버려야 한다.

둘 중의 하나이다. 하나는 분트의 연방주의이다. 이 경우에 노동자들을 민족별로 분열시키는 원칙에 따라 러시아 사회민주당을 개편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국제주의적 형태의 조직이다. 이 경우에는 지방자치의 원칙에 따라 분트를 개편해야 한다. 분트는 까프까쓰나 라뜨비야 및 폴란드의 모범을 따라서 유대인 노동자들이 러시아의 다른 민족 노동자들과 직접적으로 연합하는 길을 가야 한다.

중간 길은 없다. 원칙이란 싸워 지키는 것이지 조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결국 노동자들의 국제주의적 단결의 원칙은 민족문제 해결에서 필수적 조건이다.

 

빈, 1913년 1월.

 

≪계몽≫11) 제3‒5호(1913년 3‒5월)에 처음 발표됨.

서명: K. Stalin

[노/사/과/연]

 

 

 


1) 그루지야 신문 ≪우리의 생활(Chveni Tskhovreba)≫, 1912년, 12호.

  [편집부] ≪우리의 생활≫은 그루지야 멘쉐비끼의 일간신문으로 1912년 7월 1일부터 22일까지 꾸따이쓰에서 발간되었다.

 

2) 그루지야 신문 ≪우리의 생활≫, 1912년, 12호.

 

3) [역자 주] 범죄 행위를 저지르고 그로 인한 악명을 즐기는 사람을 의미한다.

 

4) ≪우리의 서광(Nasha Zarya)≫, 1912년, 제9-10호, p. 120.

 

5) ≪우리의 말(Nashe Slovo)≫, 1906년, 제8호, p. 53.

 

6) [편집부] 제1차 발칸전쟁은 불가리아, 쎄르비아, 그리스와 몬테네그로를 한편으로 하고 터키를 다른 편으로 하여 1912년 10월에 시작되었다.

 

7) ≪제8차 분트 대표자회의에 대한 보고서≫, 유대인 단체에 관한 결정서 마지막 부분.

 

8) 슈트라서, ≪노동자와 민족(Der Arbeiter und die Nation)≫, 1912.

 

9) [편집부] 1907년 11월 5-12일간에 진행된 제4차(제3차 전 러시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대표자회의 결정서 및 1908년 12월 21-27일(1909년 1월 3-9일)간에 진행된 제5차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대표자회의(1908년 전 러시아 대표자회의)의 결정서. (≪쏘련 공산당(볼쉐비끼) 대회, 대표자회의 및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결정서 및 결의문≫, 제1부, 제6판, 1940년, pp. 118, 131.)

 

10) [편집부] E. J. 야겔로는 폴란드 사회당의 당원이다. 그는 제4차 국가두마에서 바르샤바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것은 폴란드 사회민주당을 반대한 분트와 폴란드 사회당 및 부르주아 민족주의자가 연합한 결과였다. 두마의 사회민주당 대의원단은 야겔로를 사회민주당 대의원단에 가입시킬 것인가를 놓고 표결하였다. 표결은 볼쉐비끼 대의원 6명의 반대에 멘쉐비끼와 청산주의자 대의원 7명의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11) [편집부] ≪계몽≫(월간)은 합법적 볼쉐비끼 잡지이다. ≪계몽≫은 1911년 12월 상뜨뻬쩨르부르크에서 처음 출판되었다. ≪계몽≫은 레닌에 의해 지도되었으며 레닌은 러시아에 있는 편집위원들(M. A. Savelyev, M. S. Olminsky, A. I. Elizarova)과 정기적 통신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쓰딸린이 상뜨뻬쩨르부르크에 있을 때 이 잡지발간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계몽≫은 잡지 ≪진리보≫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계몽≫은 1914년 1차 세계대전 전야에 정부의 탄압으로 폐간되었다가 1917년 가을에 하나의 합장본으로 복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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