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민주주의 투쟁은 계속된다 그리고 선을 넘어야 한다

 

신재길 | 편집위원

 

 

1. 촛불항쟁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일어난 민중들의 항쟁은 진정한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선출되지 않은 최순실이라는 일개인에 의해 국정이 좌지우지된 것에 민중은 분노한다. 민중은 민주주의가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찾아 광장으로 촛불을 들고 나아갔다. 3만, 20만, 100만, 200만, 그렇게.

도대체 이게 나라냐? 탄식하며, 도대체 이게 민주주의냐? 한탄하며, 진정! 민주주의는 어디에 있는가? 자문하며, 서로를 향해 촛불을 들었다.

그리고 탄핵이 국회에서 의결되었다. 이제 민주주의는 국회에 있다고 회답이 왔다.

민중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금 촛불을 켜고 광장을 떠나지 못한다. 이게 진정 민주주의인가? 이게 진정 혁명인가? 하지만 바뀐 건 하나도 없다. 박근혜 없는 박근혜 체제이다. 이게 진정 민주주의란 말인가? 이게 진정 혁명이란 말인가?

민중은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잡히지 않는다. 누구는 민주주의는 국회에 있다고 한다. 다른 누구는 민주주의는 광장에 있다고 하기도 한다. 또 다른 이는 민주주의는 인터넷에 있다고도 한다. 어떤 이는 민주주의는 의견을 수렴하는 형식적 절차라 한다. 또는 민주주의는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생활원리라고도 하고, 개인들이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견해를 수정해 가는 과정이라고도 한다.

이런 것이 진정 민주주의란 말인가?

이 모든 민주주의에 대한 말들은 <민주주의=자본주의>라는 등식을 전제로 한다. 과연 그런가?

 

 

2.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전혀 관계가 없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를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로 알고들 있다.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진보적이라는 사람들도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변혁운동의 선진활동가들조차 이렇게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이다. 자본주의의 기본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유주의는 자본가에겐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의 자유이며, 계약의 자유이고, 노동자에겐 생산수단으로부터의 분리의 자유이다. 자본가가 원하는 국가는 이런 자본주의적 자유를 법제화시키고 현실적으로 보장하는 자유주의 국가이다. 이런 자유주의 국가에는 민주주의가 불필요하며 민주주의는 어떤 면에서는 자유주의 원리와 대립되기까지 한다. 그래서 대표적인 자유주의 사상가인 존 스튜어트 밀은 민주주의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는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입법을 저지하기 위해서 1인1표제를 부정하고 자본가에게 더 많은 투표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도 어떤 부르주아 혁명도 소위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가져오지 못했다. 네덜란드 혁명이나 영국 혁명의 경우가 그러하며 프랑스 혁명조차 그렇다. 이들 부르주아 혁명은 소위 부르주아 민주제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소수의 부르주아 과두제를 결과했을 뿐이다. 그러하기에 부르주아 혁명 이후에도 노동자ㆍ민중의 참정권 운동은 피의 대가를 치루면서 수행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 결과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20세기에 와서야 자본주의 선진국의 일반적 현상이 된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나라 프랑스에서 여성의 참정권 획득이 1944년에서야 가능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 준다.

도대체 민주주의가 무엇이기에 자본가들은 이런저런 현학으로 민주주의의 본질을 흐리는가?

 

 

3. 민주주의란 다수를 이루는 계급이 소수의 계급을 지배하는 국가형태이다

 

먼저 촛불집회에 고무된 한 정치학자의 말을 들어보자.

 

민주주의란 정치의 과정을 거치면서 공적 결정을 둘러싼 시민의 의사가 형성 내지 변화되는 데 있다.1)

 

민주주의는 인간 사회 어디든 존재하는 문제와 어려움을 개선하는 데 더 많은 사람을 협력하게 하는 끝없는 노력과 긴장, 딜레마 속에서만 그 빛을 발하는, 불완전한 인간들의 끝없는 정치적 노력을 뜻할 뿐이다.2)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는 민주주의란 정치권력의 수립과 조직을 위한 순전히 형식적 절차라는 말이다. 즉 공적 권위를 구성하는 방법적 절차나 과정이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과연 이게 민주주의일까? 그렇다면 이런 절차에 의해 수립된 나찌 정권은 민주정부인가? 박상훈식의 민주주의에 의하면 나찌는 민주정부가 되고 만다.

진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저 멀리 그리스의 철학자로부터 시작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과두제와 민주제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재산의 유무를 들고 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권력의 소유가 경제적 부에 기인한다면 이는 과두제라 하였고 가난한 자들이 권력을 소유할 때 이를 민주제라 하여 경멸하였다.

이는 민주주의에 있어 그 계급성이 핵심이라는 맑스의 사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맑스의 사상을 이어받아 레닌은 다음과 같이 민주주의를 정의한다.

 

민주주의는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을 인정하는 국가, 즉 한 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해, 주민의 일부가 다른 일부에 대해 체계적 폭력을 사용하기 위한 조직이다.3)

 

민주주의는 국가형태이며 국가의 변종들 중의 하나다.4)

 

결국 민주주의란 다수의 계급이 소수의 계급을 지배하는 국가형태이다. 이렇게 볼 때 나찌가 형식적인 민주적 절차로 집권했더라도 소수의 독점자본가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다수인 노동자ㆍ민중을 억압하는 국가형태이기 때문에 민주주의 정권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민주주의를 순전히 형식적 절차로 정의하는 것은 자본의 우월성을 정당화시켜주기 위한 민주주의에 대한 자본가들의 왜곡이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민주주의자라는 외피를 쓰기 위해서 민주주의=자본주의라는 허위의식이 필요했다. 그리고 민주주의=자본주의라는 허위의식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공통적 속성을 찾아냈다. 그것이 자본주의에서의 자본의 경쟁과 민주주의에서의 의견대립의 경쟁이라는 속성이다. 그래서 자본가의 이데올로그들은 민주주의에서 의견대립(경쟁)의 형식적 해소과정과 절차를 절대시하여 민주주의로 정의한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자본주의라는 허구적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4. 민주주의는 노동자ㆍ민중의 고유한 요구이다

 

이런 민주주의=자본주의의 등식은 위에서 보았듯이 20세기의 새로운 현상이지 부르주아 혁명의 기초가 아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자유주의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그가 자유주의에 민주주의를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경부터이다. 그리고 20세기에 와서야 보통선거권이 정착된 것이다. 이렇듯 민주주의를 자본가들이 받아들이게 된 것은 민주주의=자본주의라는 허위의식이 대중적으로 헤게모니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허구적이고 형식적인 민주주의조차 자본가들의 위로부터의 은혜로운 하사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노동자ㆍ민중의 피의 저항과 참정권 투쟁의 결과였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허구적 형식적 민주주의조차도 그 실현의 동인은 부르주아가 아니라 노동자ㆍ민중이었다. 부르주아 혁명은 곧바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제한적 참정권에 기초한 자유주의 국가만을 탄생시켰을 뿐이었다. 참정권의 확대는 노동자ㆍ민중의 줄기찬 투쟁으로 이루어진 결실인 것이다.

즉, 자본주의=민주주의라는 등식은 근본적으로 허구적인 것이다. 자본주의가 노동자ㆍ민중의 투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형식적 민주주의를 수용했지만 자본주의는 파시즘, 군부독재, 천황제 등과도 수월하게 결합하고 친화성을 갖는다.

민주주의는 자본가의 요구가 아니라 처음부터 노동자ㆍ민중의 근본적 요구인 것이다.

 

 

5. 제국주의 단계에서의 민주주의

 

레닌은 제국주의 단계에서의 민주주의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독점자본주의(제국주의는 독점자본주의이다)라는 이러한 새로운 경제의 정치적 상부구조는 민주주의로부터 정치적 반동으로의 변화이다. 민주주의는 자유로운 경쟁에 조응하며, 정치적 반동은 독점에 조응한다.5)

 

이런 의미에서 제국주의는 논쟁의 여지없이 민주주의 일반의 부정, 모든 민주주의의 부정이다.6)

 

형식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자유경쟁 자본주의에 조응한다. 자본주의가 독점 단계에 들어서면 자본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형식적 외피마저도 벗어던지게 된다. 독점자본주의하에서는 독점의 수중에 정치, 경제적 모든 권력이 집중되고,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 부르주아 국가의 개입이 자행된다. 독점자본주의는 경쟁보다 독점이 중심을 이룬다. 비독점부분은 권력으로부터 배제된다. 그래서 자유경쟁에 기초한 형식적 민주주의조차도 독점자본주의에서는 거추장스럽게 된다.

결국 독점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파시즘이다. 파시즘의 노골적 형태가 독일의 나찌즘이라면, 관리되는 민주주의로서 전도된 전체주의7)가 미국이다.

미국의 평범한 시민들은 ““미국은 더 이상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가 아니다라고 토로한다. 그들은 선제공격, 광범위하게 자행된 고문, 민간 사찰, 끊이지 않는 (기업과 정부) 고위층 인사의 부패 소식을 들으며 오늘날 미국 정치가 심각하게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8)

나찌나 현재의 미국이나 독점자본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독점자본의 전체주의적 억압, 민주적 제 권리의 박탈로 가장 고통받는 세력이 노동자계급이다. 그러나 독점체(제국주의)에 의한 억압과 착취, 권리의 박탈은 노동계급에 한정되지 않고 비독점부분 전반으로 확장된다. 이것이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비독점부분이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평화 옹호, 민족독립, 민주주의 옹호라는 공통의 강령에 기초하여 단결할 수 있는 객관적 기초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주의자들에게는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동시에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인 것이다. 그래서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이와 같은 단계는 부르주아 사회의 한계를 깨뜨리고 그것을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기 시작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만일 실제로 모든 사람이 국가관리에 참여한다면 자본주의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9)

 

이러한 모든 사람이 국가관리에 참여하는 민주주의를 레닌은 ≪임박한 파국≫에서 철저한 민주주의, 완전한 민주주의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노동자ㆍ민중의 혁명적 민주주의이다.

사실 지금까지 민주주의에 대해 논해 왔는데 이는 무슨 지적 호기심 때문이 아니고 현 촛불항쟁의 본질을 밝히는 데 중심적 개념이 민주주의이며, 현 정세를 파악하는 데 있어 근본적 잘못이 민주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즉 민주주의를 부르주아의 허구적이고 형식적인 것으로 이해할 때 현재 진행되는 민주주의 투쟁의 의미를 오도하게 되고 투쟁을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하게 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자본주의로 이해할 때 노동자ㆍ민중의 민주주의 투쟁을 한편에서는 의회주의 내에 가두려는 우편향이 나타나고, 다른 한편에서는 현재 민중의 민주주의 요구를 개량이라고 일축하는 좌편향이 나타난다.

 

 

6. 2016년 촛불항쟁의 성격과 투쟁 전선

 

현 정세의 대립 구도는 민주 대 반민주이다. 즉 민주주의 문제이다. 민주주의 문제는 국가권력의 형태 문제이다. 국가권력의 형태 문제는 어느 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하느냐의 문제이다.

독점자본가집단 내에서는 국가권력이 독점자본가 일반을 대변하지 못할 때 민주주의 문제, 즉 국가권력의 구조 문제가 대두된다. 이것이 ≪조선일보≫ 등이 최-박 게이트를 터뜨린 본질이다.

민주주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노동자ㆍ민중의 진출을 야기한다.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주권재민의 문제이다. 그러나 민중은 국가권력으로부터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지면 국가권력에의 참여 욕구가 분출되게 마련이다. 이것이 촛불광장의 본질이다.

민중 투쟁은 두 가지 방향에서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그 하나는 노골적인 파시즘 세력에 대항하는 전선이고, 다른 하나는 전도된 전체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전선이다. 즉 한 전선은 파시즘 세력인 박근혜와 새누리당 무리로 대표되는 독점자본과 제국주의 우파 세력과의 투쟁 전선이며, 다른 전선은 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로 위장한 독점자본과 제국주의 좌파 세력과의 투쟁 전선이다.

투쟁 전선의 중심은 반파시즘 전선이다. 아직까지 국가권력을 파시즘 세력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노골적 파시즘 세력이 분열되고, 박근혜 일당은 탄핵에 몰려 약화된 상태이나 아직까지 국가권력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다. 따라서 당분간 투쟁의 예봉을 반파시즘 투쟁에 돌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로 위장한 전도된 파시즘 세력인 민주당 등에 대한 투쟁도 놓칠 수 없다. 이런 민주당 등에 대한 투쟁은 견인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이들의 본질을 폭로하고 고립시키는 투쟁이어야 한다. 그래서 이들에 포섭되어 있는 소부르주아들을 노동자ㆍ민중 진영으로 견인하는 투쟁이어야 한다.

다음으로 소부르주아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대응이다.

이들은 소위 NGO들과 민주당에 일부, 그리고 정의당, 녹색당 등에 자신의 정치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반독점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이들은 독점자본과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경제적으로 수탈당하고 정치적으로 제 권리가 박탈당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기본적으로 반독점(파쇼) 반제국주의 세력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경제적 토대에 맞는 국가권력의 전망이 없다. 이들의 중소 생산체계는 현대의 대규모 산업체계에서 독자적 상부구조를 구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현재의 독점자본주의 체제와 노동자ㆍ민중의 전망 사이에서 항상 동요한다. 이들은 자신의 전망과 비전의 부재로 말미암아 독점 세력이 강력할 때는 독점 세력의 옹호자로 되며, 노동자ㆍ민중 세력이 강력할 때는 노동자ㆍ민중의 편에 서게 된다. 이번 촛불항쟁에서도 이들이 많은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는 반독점(파쇼) 반제국주의 전선의 동맹 세력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들에 대한 비판에서도 기본적으로 동지적 애정에 기반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을 견인하는 방법도 이들의 동요를 직접적으로 공격하기보다는 이들이 포섭되어 끌리는 자유주의로 위장한 전도된 전체주의 세력의 본질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노동자ㆍ민중의 전망 속에 이들의 입지가 보장되어 있다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동맹의 대상이며, 설복의 대상임을 잊지 말자.

 

 

7. 촛불항쟁과 대중의식의 고양

 

노동자ㆍ민중은 투쟁 속에서 적들을 타격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교육하고 권력의 주체를 만들어 간다.

2016년 대중투쟁을 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투쟁 속에서 종북 이데올로기를 극복해 갔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자신을 진보라고 생각하는 입장이 과반을 넘어서는 조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데올로기 지형이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재명 시장이 반사이익을 보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민중들의 의식의 고양에 따른 부수적 현상임을 간파해야 한다.

두 번째로는 투쟁에서 패배주의를 극복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노동자ㆍ민중은 2008년 촛불집회 이후 대중적으로 형성되어 있던 대중적 패배의식, 즉 촛불 든다고 변하는 게 뭐 있겠어 하는 냉소적 태도를 이번에 국회에서의 박근혜 탄핵 결의를 이끌어 내는 실질적 변화를 만들어 내면서 극복한다. 이는 부산 소녀상 설치 등 몇 가지 승리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승리감을 지속적으로 확장시켜 작은 승리들을 축적해 가야 할 것이다.

세 번째로 이런 의식의 변화가 구체적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국회의 탄핵 의결 이후에도 예상과 달리 광장의 촛불은 매번 50만을 넘어서며 이어지고 있다. 이 속에서 민중들의 스스로의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노동자ㆍ민중죽 쒀서 개 준 경험을 반복하려 하지 않는다.

노동자ㆍ민중은 2016년 대투쟁을 통해 파쇼 세력을 마비시켰고 분열시켰으며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교육하고 의식화해 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노동자ㆍ민중의 정치세력화의 주체를 만들어 내지는 못하고 있다.

이런 대중의 의식의 상태와 한계는 빅데이터 분석에서도 드러난다. YTN이 (주)타파크로스와 함께 시대정신을 조사한 분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분석 데이터는 약 3억 건이고, 기간은 2014. 7. 1.에서 2016. 6. 30.까지이다.

– 위협인식요소

세월호 진실 51.8%, 남북긴장 15.7%, 권력형비리 13.0%, 일자리 불안 11.8%, 헬조선 인식 7.7%

– 위협원인

정치분열 30.3%, 불투명한 사회 26.9%, 리더십 부재 20.3%, 윤리의식 부족 11.5%, 기득권 독식 10.9%

– 평가 및 예측 행동

비판 및 심판 47.7%, 민주주의 위기 19.7%, 국민피해 19.0%, 정부 무능 비판 8.0%, 신뢰성 하락 5.6%

– 핵심 시대정신

책임공정사회 43.9%, 사회안정 및 성장 27.7%, 국민소통 22.3%, 남북평화 4.5%, 일자리 창출 1.7%10)

 

이러한 빅데이터 분석에서 특징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먼저 국가권력의 역할에 대한 재정립의 요구가 두드러진다. 이는 사회안전과 공공복지, 민주평등의 요구로 나타나는데, 이것이 민주주의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가 실현되지 못하는 원인을 현 정치체제에서 찾고 있다는 점도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래서 현 정치체제에 대한 불신과 심판의식이 매우 높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변화의 방향에서도 공정사회 등이 높게 나타난 점은 의미심장하다.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가 근저에서 무너졌음을 말해 주는 지표가 아닌가 생각 든다. 결국 대중들의 의식은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고수하는 권력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도달해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의식에는 한계도 분명히 드러난다. 위협원인을 정치 분열이나 리더십의 부재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직까지 민중들이 스스로를 권력의 주체로 인식하지 못하고 형식적 대의제에 한정된 사고에 머물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보인다.

노동자ㆍ민중의 촛불항쟁은 이러한 시대정신의 반영이자 그 한계임을 알 수 있다.

 

 

8. 촛불항쟁의 한계와 노동자계급의 과제

 

빅데이터 분석은 현재의 상태와 어떤 요소들의 상관관계를 밝혀 주기는 하지만 그 인과관계를 분석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노동자ㆍ민중의 분출의 원인이 무엇이며 이 분출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빅데이터 분석으로는 알 수 없다.

그 원인은 2008년 이래 계속되고 있는 세계 대공황이 아직 진행 중이며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데 있다. 87년과 같이 노동자 대투쟁을 무마할 수 있는 토대가 있다면 이번 노동자ㆍ민중의 진출도 대선 국면에서 소멸되어 갈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대선 이후에도 개헌이나 실질적 민주주의적 요구로 다시 분출될 것이다.

그런데 대공황의 여파는 심화될 것이 예상되고 있다.11)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노동자ㆍ민중의 민주주의 요구 투쟁을 선두에 서서 실현해 가야 한다.

그 출발은 박근혜 정권 적폐청산 투쟁이다. 이 적폐청산 투쟁은 박근혜 정권의 근원인 박정희 유신잔당 청산으로, 그리고 유신잔당과 적폐청산 투쟁을 해방 후 70년의 친일잔당과 적폐청산 투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국가권력의 본질 즉 민주주의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선전하고 의회주의의 한계를 동시에 폭로하면서 그 대안을 노동자ㆍ민중 속에서 모색해야 한다.

이러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노동자ㆍ민중노동자ㆍ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이루어 내야 하며 노동자의 헤게모니를 관철할 수 있는 조직도 만들어 내야 한다.

제국주의와 독점자본가 세력은 비록 촛불항쟁에 밀려 일정 정도 후퇴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정치 일정을 가지고 진행시키고 있다. 탄핵 후 조기대선→개헌→권력구조 개편→제국주의와 독점자본 지배체제 공고화라는 로드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ㆍ민중 진영은 아직 자신의 로드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주체도 형성하지 못한 상태이다. 일단 전 민중적 상설조직체 건설이 시급하다. 이는 전략 단위 전국 투쟁체의 단초가 될 것이다. 퇴진행동이 강화될 수도 있고, 해체 후 새로운 조직을 모색할 수도 있겠다.

또 민중조직 내에서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 관철을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민주주의 투쟁의 선봉에 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정치조직이 단일하게 형성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조직체의 건설은 몇 개의 조직이 모여서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투쟁 속에서 노동자ㆍ민중의 염원을 담아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입장과 견해가 다르더라도 투쟁 현장 속에서는 함께할 수 있고 있어야 한다.

당면 정세에서는 목표 설정이 중요하다. 지금 대립되는 측면은 민주개혁정부 수립이냐? 아니면 독자적 민중정치세력화의 구축이냐?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상호 배타적인 목적이 아니다. 국가권력의 개편 과정에서 현실적 목표는 개혁적 민주정부 수립, 즉 야당으로의 정권교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에 매몰될 때 의회주의적 편향에 빠지고 과거의 오류를 반복하고 말 것이다. 노동자ㆍ민중 진영이 힘써야 할 목표는 노동자ㆍ민중 진영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이다. 이런 독자적 세력화에 복무할 수 있다면 비판적 지지 전술도 보이코트 전술도 경우에 따라서 운용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ㆍ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구축은 전략적 과제이고 개혁적 민주정부 수립은 전술적 과제이기 때문에 개혁적 민주정부 수립 목표는 전략적 목표에 복무하는 한도에서만 유용할 것이다.

여기서 현 대중투쟁의 국면이 어느 단계인지 잠깐 짚고 넘어가자. 간혹 현 정세를 혁명적 정세나 혁명적 정세로 급격히 발전할 것으로 전망하는 견해가 있는 것 같다. 정세 국면은 전략적으로는 준비기와 결정적 시기로 나뉘고, 전술적으로는 대중투쟁의 고양기, 절정기, 쇠퇴기, 반동기로 나뉜다. 현 시기는 전략적 준비기에 전술적 고양기에 속하는 단계라 할 수 있다. 전략적 시기 구분의 기준은 주체역량이고, 전술적 시기 구분의 기준은 대중투쟁의 양상이다. 전략적 주체역량이란 전략적 투쟁체 즉 권력체의 존재와 그 지도체의 존재 여부이다. 전략적 구심체가 없는 상태에서 야당과의 연합정부 구성 등의 전술은 의미가 없는 개량주의 투쟁일 뿐이다. 따라서 지금은 모든 투쟁의 목표를 전략적 구심체를 건설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당면 전술적 목표가 야당으로의 정권교체일 수밖에 없더라도 야당과 연합 등의 방법이 아니라 독자적 대중투쟁을 조직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독자적 대중투쟁의 성과가 전략적 구심체의 형성에 밑거름으로 작용해야 한다. 따라서 현 정세 국면에서 노동자정부나 민중정부 구성을 요구하는 것은 전략적 준비기를 뛰어넘는 좌편향이고 민주연합정부 구성을 요구하는 것은 개량주의로 가는 우편향이다. 지금은 다양한 민주주의 쟁취 투쟁을 통해 전략적 구심체를 형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제 좌파 단위의 현 정세에 대한 몇 가지 입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자.

 

 

* 현 정세에 대한 몇 가지 입장에 대하여

 

1) 노동자 연대

 

한국의 국가 형태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이다.

국가 형태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군사독재나 파시즘 또는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국가인 사회에서는 민주주의 혁명을 전망할 수도 있다.

 

국가 형태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인데도 민주주의 혁명을 일정에 올리는 것은 실천에서는 개혁주의로 나타난다.

 

지금 노동계급은 자체의 고유한 행동을 하고 있지 않다. 철도 노동자들이 부분적 파업 행동을 했고, 다른 부문의 노동자들이 유리한 정세를 이용해 파업이나 다른 형태의 쟁의 행위를 한 적이 있지만 전혀 일반적이지 못했다. 노동계급의 자체 활동이 없는데도 노동자 혁명에 대해 얘기할 수는 없다.

 

물론 좌파와 노동단체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고유한 요구를 위해 행동(특히 파업)을 하도록 고무하는 일도 해야 할 것이다.12)

 

이것이 대략적인 <노동자 연대>의 입장이다.

이들은 민주주의에 대해서 전형적인 부르주아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노동자 연대>는 한국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민주주의 혁명을 전망할 수 없다고 한다. 민주주의 혁명은 군사독재나 파시즘에서나 가능한 전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혁명적 정세도 아니기에 노동자 혁명을 얘기할 수도 없다고 했다.

이런 사고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는 사고방식이다. 이는 민주주의=자본주의라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전형적인 반영이다. 이에 대해서는 위에서 많이 논하였으니 여기서는 다시 한 번 레닌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비판을 대신하고자 한다.

 

민주주의의 이와 같은 단계는 부르주아 사회의 한계를 깨뜨리고 그것을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기 시작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만일 실제로 모든 사람이 국가관리에 참여한다면 자본주의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13)

 

<노동자 연대>가 민주주의=자본주의로 이해하고 있으니 이들이 스탈린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운운하기 전에 민주주의 혁명부터 완수해야 한다는 2단계 혁명론을 고수해 왔다고 하면서 소위 스탈린주의자들을 좌파적 개혁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소위 스탈린주의자들을 비난하기 전에 모든 사람이 국가관리에 참여한다좌파적 개혁주의 이외에 어떤 길을 통해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 있는지 이들은 먼저 제시해야 할 것이다. 단언컨대 모든 사람이 국가관리에 참여하는 길 이외에 이 지구 상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길은 있을 수 없다.

다음은 노동자들의 자신의 고유한 요구 문제이다. 민주주의 투쟁을 <노동자 연대>는 개혁주의적 투쟁이라고 했으니 혁명적인 <노동자 연대>에게는 민주주의 투쟁은 노동자의 고유한 투쟁이 아님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런데 민주주의 문제는 모든 사람이 국가관리에 참여하는 문제이고 이는 정치 문제이다. 결국 이들이 말하는 노동자 자신의 고유한 요구는 정치투쟁은 아닌 것이 된다. 그럼 결국 경제투쟁일 수밖에 없다. 이쯤에서 어디서 많이 보아 온 논리가 연상되는 것은 필자만의 편견일까?

경제투쟁은 노동자, 정치투쟁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라는 구호가 <노동자 연대>의 깃발에 새겨져 눈앞에서 펄럭이고 있다.

 

 

2) 사회변혁노동자당

 

이 시기에 대중투쟁을 보다 더 확대강화하고, 대중투쟁의 방향을 재벌로 집중하여 박근혜정권 퇴진투쟁을 반재벌-반자본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시민운동진영도 재벌을 게이트의 몸통으로 부각해야 한다는 데에는 크게 이견이 없다. 그러나 무엇을 중심으로 행동하느냐는 저마다 무게중심이 다르다. 즉 재벌을 주요 공격대상으로 하는 반자본투쟁 전선을 확대 강화하는 것은 의제와 주장의 문제가 아니라 오로지 실천의 문제다. 변혁당은 퇴진투쟁 1개월을 지나는 지금부터 반재벌 투쟁에 조직의 역량과 실천을 집중해야 한다.14)

 

여기서도 경제주의적 사고가 보인다. 즉 박근혜 정권 퇴진 투쟁과 반자본 투쟁을 분리하고 반자본 투쟁에 중점을 두는 방식이다. 이는 박근혜 정권 퇴진 투쟁이라는 민주주의 투쟁과 반자본 투쟁이라는 사회주의 투쟁을 분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근저에도 민주주의=자본주의라는 허위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즉 민주주의 투쟁은 아무리 혁명적이라도 자본주의 내의 투쟁이니 대중의 혁명적 열의를 반자본 투쟁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 <변혁당>의 입장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즉 박근혜 정권 퇴진 투쟁이라는 구체를 반자본 투쟁이라는 추상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혁명에서 가장 크고 가장 위험한 죄악 중의 하나(레닌)를 범하는 오류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자본 투쟁은 여러 가지 구체적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가장 집약 집중적 반자본 투쟁은 노동자의 민주주의 투쟁, 정치투쟁이다. 이는 자본 일반에 대한 투쟁이다. <변혁당>에서 주장하는 반재벌 투쟁도 반자본 투쟁의 한 형태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는 개별 자본에 대한 투쟁으로서의 반자본 투쟁일 뿐이지 자본 일반에 대한 투쟁은 아니다. 소위 반재벌 투쟁은 현실에서는 개별 재벌에 대한 투쟁이거나, 아니면 경제민주화 투쟁이나 재벌해체 등으로 나타난다. 이는 소위 자본 일반에 대한 반자본 투쟁이 아니다. 자본 일반에 대한 투쟁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언제나 자본주의 국가권력에 대한 투쟁으로 나타난다. 자본 일반은 현실의 구체적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고 국가권력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을 실현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국가권력 이외에 다른 자본 일반을 찾을 수는 없다. <변혁당>은 국가권력에 대한 투쟁을 반자본 투쟁으로 발전시키자고 한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반자본 투쟁이 자본 일반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면 이는 발전이 아니라 퇴보이다. 그리고 반자본 투쟁이 자본 일반을 말한다면 국가권력에 대한 투쟁을 반자본 투쟁으로 발전시킨다는 말은 의미 없는 말이 된다.

또 <변혁당>은 추상을 구체로 대체하는 반대의 오류를 범한다. 즉 반자본 투쟁(자본 일반에 대한 투쟁)을 반재벌 투쟁(개별 자본에 대한 투쟁)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반재벌 투쟁을 민중의 경제민주화라고 한다. 그러나 반재벌 투쟁은 개별적 재벌에 대한 투쟁이고 반자본 투쟁은 자본 일반에 대한 투쟁이다. 반자본이라는 자본 일반의 문제는 그 핵심이 생산수단의 사적소유 문제이다. 그러나 반재벌 투쟁으로 제시했던 사내유보금 환수 문제나 재벌총수 구속 문제는 자본 일반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개별 재벌의 문제이거나 자본주의 내의 개별 정책의 문제이다. 결국 말은 매우 혁명적으로 반자본주의를 외치지만 실상은 매우 개량적인 경제민주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마저도 국가권력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한에서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강화하는 것으로 귀결될 공산이 크다.

이렇듯 <변혁당>은 자본 일반과 개별 자본을 구본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러한 오류는 결국 민주주의=자본주의라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극복하지 못한 한계에서 오는 오류이다.

 

 

3) 전국노동자정치협회

 

기존 헌법질서가 아니라 새로운 제헌이 되어야 한다. 민중의 의지, 혁명의 힘으로 제헌을 해야 한다. 기존 썩어빠진 국회를 대신하여 노동자ㆍ민중의 제헌의회가 만들어져야 한다.15)

 

제헌의회란 자본주의 국가체제를 만드는 시발이다. 제헌이란 봉건적 인신지배가 아닌 법의 지배, 소위 법 앞의 평등을 말하는 것이고, 의회란 의회제 대의제를 말한다. 이는 자본주의 의회제이다. 즉 노동자ㆍ민중의 민주주의가 아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노동자 민주주의는 새로운 노동자 대의제에 의해서 실현되어야 한다.

또한 한국에서는 48년 제헌의회가 이미 있었다. 제헌의회라는 용어를 노동자ㆍ민중의 민주주의를 지칭하는 말로 쓰고자 한다면 다른 용어를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노/사/과/연]

 

 


1) 박상훈, ≪정치를 시민의 것으로―2016 촛불집회에서 제기된 민주주의의 문제들≫, p. 20.

2) 같은 책, p. 37.

3) 레닌, ≪국가와 혁명≫, 돌베개, p. 110.

4) 같은 책, p. 135.

5) 레닌, “A Caricature of Marxism and Imperialist Economism”(≪세계공산주의운동입문≫에서 재인용).

6) 같은 글.

7) 셸던 월린,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후마니타스, 2013을 참조.

8) 같은 책, p. 13.

9) 레닌, ≪국가와 혁명≫, p. 135.

10) [김형준의 대선 빅데이터] 이재명 신드롬을 말한다, YTN, 2016. 12. 2.

<http://www.ytn.co.kr/_ln/0101_201612021504506110_004>

11) 여기서는 공황의 심화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하지 않겠다. 이에 대한 논증은 다음의 논문들을 참고하길 바란다: 권정기, “한국경제의 동향과 현 단계”, ≪정세와 노동≫ 2016년 2월호(제120호); “2000년 이후 세계경제의 흐름과 현 상황”, ≪정세와 노동≫ 2016년 7/8월호(제125호); “중국의 경제위기와 세계대공황의 현 단계”, ≪노동사회과학 제9호―21세기 대공황과 레닌주의≫, 2016. 7.

12) ≪노동자 연대≫ 제189호, 2016. 12. 10.

13) 레닌, ≪국가와 혁명≫, p. 135.

14) 김태연 조직위원장, “정권퇴진투쟁 1개월…전환이 필요하다. 재벌이 몸통이다. 반자본 투쟁전선 확대가 관건”, ≪변혁정치≫ 제35호, 2016. 11. 30.

15) 전국노동자정치협회, 우리는 이제 새로운 시작인데 저들은 끝을 얘기하고 있다!, 2016. 12. 17.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7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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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쓰지 않은 것을 썼다고 하여 비판하는 것도 그렇지만, 대중 선전물에서 쓰여진 일부 문장을 선택적으로 인용해서 전체 의도와 상관없이 재구성한 후 비판하는 것을 문필조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혼란스런 주장은 차치하고라도, 지금 필자가 인용한 저 문장은 개헌을 운운하는 현 권력자와 정치세력들에게 법이란 권력투쟁의 산물이고, 권력투쟁의 승리자에 의해 계급지배를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법적환상이 아니라 지금 전개되고 있는 권력투쟁을 더 급진적으로 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당장 쏘비에트 대의제를 만들자고 대중선전을 하겠습니까? 이 글의 필자가 앞 뒤 잘라먹고 인용하는 글을 여기서 제시하도록 하죠.

    과연 이 주장이 “자본주의 의회제”를 주장하는 것입니까?
    필자의 답변을 요구합니다. 문필조작이라면 당장 사과하기 바랍니다.

  • 위 글 필자가 앞뒤 잘라먹고 인용한 문장이 댓글에는 실리지 않은 관계로 아래 전문을 싣습니다. 우리가 과연 ‘자본주의 의회주의’를 주장하는지, 어떤 맥락에서 ‘제헌의회’가 나왔는지 직접 보시기 바랍니다.
    http://mlkorea.org/v3/?p=3204
    정치활동, 정치적 문필활동에 있어서 우리가 견지해야할 태도는 지적 양심과 정직성에 기반하고 과학적 비판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위 필자가 비판인용한 노동자연대나 변혁당의 경우에도 똑 같은 내용의 비판은 아니나 우리의 소책자 “박근혜 퇴진 투쟁과 그 이후 세상을 전망한다!’이 비판인용한 부분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위 두 단체의 광범위한 글 중에서 정확하게 우리가 이미 발표한 부분과 일치하기는 싶지 않을 것입니다. 필자는 우리의 정치적, 지적 활동의 토대 위에서 저런 비판을 할 수 있었던 것이죠.

  • 위 글 필자가 앞뒤 잘라먹고 인용한 문장이 댓글에는 실리지 않은 관계로 아래 전문을 싣습니다. 우리가 과연 ‘자본주의 의회주의’를 주장하는지, 어떤 맥락에서 ‘제헌의회’가 나왔는지 직접 보시기 바랍니다.
    http://mlkorea.org/v3/?p=3204
    정치활동, 정치적 문필활동에 있어서 우리가 견지해야할 태도는 지적 양심과 정직성에 기반하고 과학적 비판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위 필자가 비판인용한 노동자연대나 변혁당의 경우에도 똑 같은 내용의 비판은 아니나 우리의 소책자 “박근혜 퇴진 투쟁과 그 이후 세상을 전망한다!’이 비판인용한 부분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위 두 단체의 광범위한 글 중에서 정확하게 우리가 이미 발표한 부분과 일치하기는 싶지 않을 것입니다. 필자는 우리의 정치적, 지적 활동의 토대 위에서 저런 비판을 할 수 있었던 것이죠.

  • ML(M)(마극사-열령-모/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자들도 단체에 따라 의견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 ‘제헌 의회’는 토론을 요하는 내용인데 너무나 쉽게 규정한 상황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최근의 제헌의회는 일부 중남미 국가군(우파 제헌은 가륜비아/콜롬비아, 좌파 제헌은 한때 풍미하기도 했던 위내서랍/베네수엘라, 액과다/에콰도르, 파리유아/볼리비아, 니고랍과/나카라과 – 이 국가는 지도자 역시도 한때 변혁에 복무했고 국가 자체도 한대 변혁에 성공했던!!!)과 같은 다른 형태의 유산 국가로 귀결한 점이 있어 이를 연상할 수도 있겠지만 문서의 ‘제헌의회’는 이 의미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 일단 글에 대한 관심에 감사합니다.

    먼저 가장 제 입장과 가깝다고 생각했던 입장에서 문제제기가 들어와서 조금은 당황스럽군요.

    제헌의회라는 용어를 비판한 제 문제의식을 설명하는 것으로 제 견해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저도 춧불투쟁이 보다 근본적인 계급투쟁으로 육박해 들어가야 한다는 전국노동자정치협회의 입장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제 문제의식은 제헌의회라는 용어로는 그런 내용을 담아내거나 설명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러시아에서 처럼 의회자체가 없던 나라에서 제헌의회라는 구호는 그 자체가 체제를 비판하는 기능을 갖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48년에 제헌의회가 이미 있었습니다.
    따라서 전국노동자정치협회글의 필자가 의도하는 바와는 무관하게 제헌의회라는 용어는 역사적으로 제약적인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는 제 개인적 경험하고도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87년에 제헌의회전술을 구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대중선동을 수행할 때 돌아오는 반응 중 하나는 제헌의회를 48년에 있었던 제헌의회로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제헌의회소집하자는 말을 48년 제헌의회 의원들을 소집하자는 의미로 알아듣기도 했습니다. 그분은 그 노인들을 지금 소집해서 무엇을 할여고 하는야고 진지하게 질문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어떤 용어는 역사적, 객관적으로 그 내용이 제한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지금 투쟁의 방향을 설명하거나 제시하기에는 제헌의회라는 용어 자체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비판한 것입니다.

  • 예 용어의 문제 지적 당연한 점 있습니다. 그리고 어디에서 해외 문서를 보니 그 분의 현대적 적용도 확인한 바 있는데 아직 우리들에겐 너무나 한계가 많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많거나 오히려 더 복잡하리만큼 증가한 것도 있지요. 다만 지적한 문서가 언어 한계조차 호소하는 부분을 담지 못해서 이런 지적도 받은 듯 한데 이 부분은 과거 홈페이지까지 살펴보면 이 곳에서도 언어의 한계를 호소한(가령 노예의 언어; 정확하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점은 있습니다. 이 호소를 지적대상문서에서 하지 못한 이유는 지면 한계로 생각합니다. 굳이 저 역시도 이미 중남미에서도 있었던 사안에 대한 점도 있어 이 부분의 중첩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언어 한계도 극복할 방법을 생각해야 하는 데 무엇보다 이런 언어한계에 대한 내용도 나중에 토론회 등으로 취급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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