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편집자의 글 – 치열한 자기비판과 성찰을 통해 해방의 전망에 다가서자!

2008년에 세계대공황이 발발하고 나서 벌써 4년차에 접어들고 있다. 대공황은 소강상태를 보이다가도 유럽의 재정 위기에서 보듯이 심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유럽의 재정위기는 자본주의의 최후의 보루인 국가의 기능이 마비된다는 것인데 이는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위기를 말하는 것이다. 더불어 공황의 조건에서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으로 말미암은 중국의 부상은 미제국주의의 패권을 심대하게 약화시키고 세계질서를 변동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공황의 상황에서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계급투쟁도 격화하고 있는데 유럽 노동자들의 투쟁에 이어 아랍에서 민중혁명이 불붙고 있다. 쏘련 붕괴 후의 기나긴 반동기가 마감되고 새로이 변혁의 시대가 시작되려는 징후로 읽힐 수 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노동사회과학≫ 4호는 특집으로 <2차 대전 후 수정주의의 득세와 노동자계급의 후퇴>를 다루고 있다. 이 특집의 문제의식은 20세기 사회주의의 실패를 수정주의의 득세로 인한 노동자계급의 후퇴로 파악한다는 것인데 비단 쏘련만이 아니라 유럽, 일본, 미국 등에서 노동자계급의 후퇴가 일어난 현상들, 그리고 그 결과들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쓰라린 역사적 패배를 다루는 것은 현실을 미화하거나 왜곡하거나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청산하는 관점을 거부하고, 현실을 직시하고 패배의 역사 속에서 승리의 전망을 찾아내기 위해서이다. 사회주의 운동은 비판과 자기비판 속에서 발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의 특집은 세계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에 대한 자기비판과 성찰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자기비판과 성찰 속에서만 오류를 정확히 발견할 수 있고 나아가 21세기의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의 전망과 건설의 계획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특집 <2차 대전 후 수정주의의 득세와 노동자계급의 후퇴>에는 5개의 원고가 실려 있다. 채만수의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 지배와 노동자계급의 후퇴”에서는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노동자계급의 후퇴를 가져온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뜨로츠끼주의자들의 왜곡,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의 왜곡, 그리고 쏘련 내에서 흐루쉬쵸프 수정주의의 왜곡 등이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노동자계급의 후퇴를 가져온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뜨로츠끼주의자들이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접근을 스딸린주의라 비판하면서 거부하고 있는 것이 노동자계급이 현대 자본주의의 본질을 인식하고 자본주의 질서와 정면 대결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다.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은 스딸린의 산물이 아니라 레닌 자신에 의해서 전개된 것으로서 국가가 사적 독점의 위기를 방어하고 사적 독점의 이윤을 위해 경제에 적극 개입하여 경제를 떠받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자본주의의 위기가 항구화되었다는 것의 표현이고 나아가 현재 유럽의 재정위기는 이러한 국가독점자본주의 자체의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뜨로츠끼주의자들이 국가독점자본주의 이론을 거부하고 왜곡하는 것은 기회주의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한편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유럽의 사민주의 또한 전 세계적으로 복지국가라는 환상을 퍼뜨리는 주범인데 실제로는 복지국가가 혁명에 대한 방어를 위한 독점자본가들의 보수적 정책의 산물에 지나지 않으며 사민주의는 독점자본가계급의 좌파로서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에 기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다. 이것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차기 대선의 쟁점으로 복지국가담론이 대두하고 있는 것에 대한 원칙적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20세기에 노동자계급의 후퇴는 사회주의 국가 쏘련에서도 발생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데 즉, 흐루쉬쵸프 수정주의의 등장으로 사회주의 국가의 후퇴가 일어났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20세기 사회주의의 후퇴, 2차 대전 후 노동자계급의 후퇴를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조명하고 이데올로기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비판적 성찰로서 의의가 있다.

특집의 또 하나의 글은 문영찬의 “쏘련 수정주의의 등장과 중-쏘 논쟁”이다. 이 글의 문제의식은 흐루쉬쵸프의 쏘련 수정주의의 등장이 세계사회주의 진영의 분열을 가져왔고 이것이 자본주의 세계의 공산당의 개량주의화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러한 입장에서 중-쏘 논쟁에 대해 평가한다. 전쟁과 평화의 문제, 평화공존에 대한 태도, 스딸린에 대한 평가,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평가, 민족해방투쟁들에 대한 평가 등이 중-쏘 논쟁의 쟁점이었는데 이러한 쟁점에 대해 쏘련 측은 수정주의의 입장에서 임했고 중국 측이 맑스-레닌주의의 입장에서 임했다고 평가한다. 이 글은 중-쏘 논쟁이라는 세계적 차원의 논쟁이 세계 변혁과 세계공산주의 운동에 미쳤던 영향에 대해 평가하는데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추상적 차원에서 접근해서는 안 되며 현실의 운동과 세계사회주의 건설의 기준으로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접근해해 한다는 것을 주문한다.

이번 호의 특집은 또한 유로꼬뮤니즘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다. 백철현은 “유로꼬뮤니즘의 배반과 타락으로부터 노동자계급이 움켜쥘 정치적 결론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유로꼬뮤니즘의 역사가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왜곡의 역사이고 공산주의라는 이름하에 개량주의로의 변절의 역사였음을 밝힌다. 유로꼬뮤니즘의 기원으로서 인민전선전술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비판하고 유로꼬뮤니즘이 쏘련의 붕괴와 더불어 같이 몰락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시퍼렇게 살아서 오늘날의 노동자계급의 운동을 왜곡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이러한 유로꼬뮤니즘이 현실적으로 발생하고 확대된 것은 스딸린을 탄핵한 쏘련 공산당 20차대회에서 흐루쉬쵸프 수정주의에서였음을 말하고 있다. 이어서 유로꼬뮤니즘에서 혁명에 대한 왜곡, 맑스-레닌주의 원칙에 대한 수정이 이루어졌는데 특히 기존의 국가기구를 분쇄하는 것이 아니라 ‘변형’하여 사용할 수 있다는 유로꼬뮤니즘의 국가기구 변형론을 비판한다. 그리하여 이들 유로꼬뮤니즘 공산당들의 왜곡된 노선이 가져온, 68혁명에서 공산당의 잘못된 모습에 대해 비판하는데 68혁명에서 공산당들은 제도적 정당으로서 역할하며 분출하는 노동자와 민중의 투쟁을 억제하는 데 주력했음을 폭로한다. 그런데 이 글은 약간의 논쟁점을 남기고 있다. 예를 들면 유로꼬뮤니즘의 반독점 전략의 오류를 비판하는 가운데 “자본주의 변혁과 사회주의 변혁 사이에 중간단계를 설정하는 잘못된 반독점 전략은 이후 한국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노선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부분은 유로꼬뮤니즘의 개량주의 노선을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노선과 등치하는 비약을 범하고 있다. 나아가 올바른 반독점전략에 대한 구체화가 결여되어 있음도 지적될 수 있다. 또한 유로꼬뮤니즘의 기원을 통일전선 전술인 인민전선 전술의 왜곡에서 찾는 가운데 꼬민테른 6차 대회와 7차 대회를 분리하여 보는 통속적인 관점에 필자가 머물러 있는 것도 지적될 수 있다. 통일전선 전술에 대한 그간의 통속적인 견해는 6차 대회와 달리 7차 대회에서 ‘전환’이 일어났다고 보는데 필자가 이러한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한편 이번 ≪노동사회과학≫ 4호에는 일본에서 글을 보내주셨다. 노동사회과학연구소와 긴밀히 교류하는 일본의 운동단체 <활동가집단 사상운동>의 회원인 야마시타 이사오(山下勇男)는 “일본 공산당의 변절”이라는 주제로 일본공산당의 개량주의화의 궤적을 추적하고 있다. 일본의 운동단체인 <사상운동>의 발생 자체가 일본 공산당의 개량주의화를 비판하면서 분리된 일부 그룹을 모태로 한다. 그런 점에서 필자의 일본공산당 비판은 아픈 스스로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이기도 하다. 필자는 일본 공산당의 개량주의화의 역사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대한 배신과 부르주아 민족주의로의 변절의 역사라는 것을 지적하고 그러한 변절을 합리화한 것이 부르주아 의회주의당으로의 전환이라는 것을 밝힌다. 이른바 건설적 야당을 내세우고 “룰(rule)이 있는 자본주의”를 목표로 하는 “민주적 개혁노선”을 일본공산당이 채택하여 사실상 혁명을 포기했다는 것, 일본공산당의 중국, 베트남, 쿠바 등의 공산당과의 교류도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한 교류가 아니라 이들 공산당이 집권당이기 때문에 건설적 야당으로서 야당외교를 하기 위해 이들과 교류한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 공산당의 이른바 자주독립 노선도 실제로는 프롤레타리아 당으로서의 국제적 의무를 방기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고 말한다. 필자는 끝으로 스스로 자기비판을 하는데 일본공산당의 개량주의화의 역사가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의 형성을 위한 토양을 일구는 <사상운동>을 전개하면서 일본공산당의 재생을 지향해 온 우리 자신의 패배이기도 했다”고 뼈저린 자기비판을 한다. 즉, <사상운동>의 정체성이 일본 공산당의 재생인데 일본공산당의 현재와 같은 타락은 <사상운동> 자신의 패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비판은 일본의 변혁적 운동의 현주소를 나타내는 것인데 그러한 아픈 자기비판 속에 일본 운동의 발전 가능성을 볼 수 있는 것은 희망적이다.

특집의 또 하나의 글은 손미아의 “제2차 대전 후 미국의 계급투쟁”이다. 이 글은 미국의 공산주의 운동이 2차 대전 후에 왜 절멸하게 되었는가를 탐구하고 있다. 이 글은 그간 미국 공산주의 운동의 절멸의 원인에 대해 꼬민테른의 인민전선 전술이 원인이라는 입장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반대로 1930년대 후반과 40년대 초에 오히려 인민전선이라는 통일전선 전술로 인해 노동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이 발전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인민전선에서 미국공산주의 운동의 쇠퇴의 원인을 찾는 것은 일정하게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노동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의 성장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할 때만 가능한 것인데 30년대 후반과 40년대 초ㆍ중반의 상황은 세계적 차원에서 반파시즘 운동의 발전을 요구했고 미국의 공산주의 운동은 충실히 이에 입각하여 반파시즘 운동을 전개하고 세계적 차원에서 특히 2차 대전에서 반파시즘 동맹의 결성을 가능하게 하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2차 대전 후 미국노동운동의 쇠퇴를 매카시즘에서 찾는다. 그리고 이러한 매카시즘에 따라 미국의 주요 노동조합인 CIO에서 우파 자유주의자들의 반공주의의 득세, 공산주의자에 대한 탄압을 직접적인 원인으로 들고 있다. 2차 대전까지 반파시즘 동맹에 따라 공산주의자와 부르주아지 중 자유주의 세력과의 연합이 가능했고 필요했다면 2차 대전 후의 정세는 달라진 것이었다. 특히 한국전쟁으로 인한 매카시즘의 득세가 반공주의의 강화와 공산당의 쇠퇴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인데 필자는 이러한 조건을 제외한다면 미국 공산주의 운동의 쇠퇴는 미국공산당의 한계라고 파악하고 있다. 미국공산당의 한계는 더 연구되어야 하지만 2차 대전 후의 정세에서 미국공산당이 새로운 상황에 맞는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지체했던 것이 하나의 원인이 아닌가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특집 글 이외에 “한국 사회주의 변혁의 전망”, “대담: 노동자 문예 창작 과정에서 형식의 문제”, “다중 물신론 비판”의 글과 1개의 번역 글이 실렸다.

문영찬의 “한국 사회주의 변혁의 전망”은 종합적인 글이다. 지금 시기 운동의 현실은 변혁의 전망의 부재로 고통 받고 있으며 특히 지난 2010년의 6.2 지방선거에 대한 평가를 통해 운동이 자유주의 세력에 용해되지 않기 위해서 변혁의 전망이 제출되어야 한다는 문제제기를 한다. 이를 위해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와 21세기 사회주의의 전망에 대한 소묘를 제출하고 있고 쏘련의 붕괴를 진영테제의 소멸로 파악하여 현 단계의 세계체제는 제국주의 단일체제라는 것, 그리고 한국의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가 발전하여 이제는 변혁의 성격이 사회주의 변혁으로 바뀌었다는 제기를 한다. 이렇게 변혁의 성격이 바뀐 근거는 김대중, 노무현 등의 자유주의 세력의 집권으로 계급대립구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들고 있다. 또한 8, 90년대의 민족민주변혁이 유산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이행이 개량의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파쇼적인 국가보안법이 존재한다는 점을 들어 사회주의 변혁에 있어서 단계를 나눌 것을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민족적 과제와 민주적 과제가 당면의 사회주의 변혁과 어떻게 결합되어야 하는지를 밝히고 있는데 반제투쟁과 사회주의 변혁의 통일, 민주주주의 확장과 변혁적 과제의 통일을 주장하고 있다. 강령적인 문제로서는 노동운동에서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과제를 제기하고 있고 농민운동에서 개량주의와의 단절과 혁명적 전망과의 결합을 통한 농업과 농민운동의 재건을 제기하고 있다. 끝으로 반독점 전략을 제기하고 있는데 세계적 차원에서 반독점전략이 변혁전략으로 성공한 사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서유럽의 공산당들의 개량주의화 때문이며 이를 극복하고 독점자본에 의해 압제받는 다양한 민중과 운동들의 연합으로서 반독점 동맹을 제기하고 있다. 이렇게 변혁의 전망이 그 단초나마 제기되었는데 운동진영의 논의의 활성화에 기여하기를 기대해 본다.

최상철, 박현욱의 “대담: 노동자 문예창작 과정에서 형식의 문제”는 오랜만에 보는 문예창작에서의 쟁점을 다루는 글이다. 민중가요에서 채용되는 뽕짝풍의 형식, 재즈풍의 형식, 록의 형식 등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가져야 하는지를 논하고 있는데, 형식의 문제와 그에 담겨지는 민중성이라는 내용의 통일의 문제를 탐구하고 있다. 특히 박현욱 동지가 직접 작사한 <길 그 끝에 서서>를 둘러싼 대담은 운동과 예술적 형식의 문제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즉, 박현욱 동지가 직접 노동현장에서 부딪히며 체득한 대중의 감성을 노래에 녹여내어서 대중들로부터, 예를 든다면 장기투쟁사업장 동지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고 이에 대해 최상철 동지는 그 노래에 비판적이었던 자신을 반성하고 있다. 이는 민중가요라는 형식을 통해서 대중운동에 접근하는 하나의 전형적 사례를 보여주는데 대중사업을 고민하는 동지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몸짓 선언>의 활동 또한 하나의 분석 대상이 되고 있는데 문예도구주의에 대해 직설적으로 “혁명의 도구로 쓰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라는 박현욱 동지의 말은 진한 당파성을 보여준다. 또한 몸짓 선언의 동작 하나하나가 많은 노력 끝에 얻어진 것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운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내용을 담는 형식에 대해서도 또한 전문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보편적인 주장으로 읽힌다. 독자들은 이 글을 읽으면서 문예와 그 형식, 그리고 당파성과 민중성, 그리고 문예에 대한 변증법적 접근 등의 개념을 접하면서 오랜만에 향기가 나는 글을 읽는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박석삼의 “다중 물신론 비판”은 박석삼 동지의 지속적인 작업과 투쟁의 산물이다. 오랫동안 자율주의와 투쟁해온 박석삼 동지는 ≪배반당한 개미떼들의 꿈≫이라는 제목의 2008년 촛불항쟁에 대한 책을 썼는데, “다중 물신론 비판”은 그 책의 보론으로 실린 글이다. 원래 ≪노동사회과학≫ 4호에 먼저 실리고 나중에 책으로 출판될 예정이었는데 ≪노동사회과학≫ 4호의 출판이 늦어져서 책이 먼저 발행된 것이다. 박석삼 동지는 예전에도 자율주의의 다중 개념을 비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의 글은 촛불과 관련하여 이택광과 조정환 사이의 논쟁을 계기로 한 것이다. 조정환은 촛불이 다중이고 다중이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택광은 이에 대해 반박한 것인데 박석삼 동지는 촛불을 둘러싼 논쟁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조정환과 자율주의의 다중 개념의 반동성을 전면적으로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민중에서 다중으로, 당에서 네트워크로, 국가에서 코뮌으로”라는 조정환의 주장이 극단적인 소부르주아 개인주의라는 것인데 “다중은 특이성들의 집합이고 특이성은 그 차이가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주체, 차이로 남아 있는 차이를 뜻한다”는 다중 개념이 실은 산업노동자와 비물질 노동자를 가르고 차이와 특이성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서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해치는 것임을 말한다. 박석삼 동지의 비판은 통렬하다. “다중의 고유한 특성이란 정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데 관심이 있는 구심력적인 것이 아니라 특이성을 고집하면서 일자로 환원되지 않고 떠나는 유목민과 같은 원심력적인 특성이다. 그러나 촛불은 그러한 특성이 없었다. ‘명박 퇴진’과 ‘재협상’을 요구하는 촛불이 어떻게 원심력적일 수 있는가? 그것은 국가와 중앙정치에 관심을 갖고 변혁시키려는 전형적인 구심력적인 운동이었다. 촛불을 다중이라고 하는 것은 모욕이다.” 이러한 박석삼 동지의 비판은 다중 개념이 갖는 무정부주의적 성격을 비판한 것인데 촛불은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정치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다중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뭉치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자율주의자들은 통일성을 인정할 수 없다. 소부르주아의 절대적이고 극단적 이기주의에 기반한 그리하여 차이(개인)에 대한 어떠한 억압도 없는 민주주의가 바로 네그리가 선동하는 이상사회”라는 비판에서는 자율주의와 다중 개념이 극단적인 소부르주아적 개인주의라는 것을 폭로한다.

이번 호에는 번역 글로 벨기에 노동당의 강령적 문서를 소개하고 있다. “충격(IMPACT) 2002-2006: 우리의 사상적 방향들”이라는 제목의 이 글은 2002년 벨기에 노동당 대회에서 채택된 강령적 문서이다. 벨기에 노동당은 서유럽에서 보기 드물게 혁명적인 맑스-레닌주의 원칙을 견지하고 발전시키고 있는 당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서유럽의 조건에서 특히 벨기에라는 작은 나라라는 조건에서 맑스-레닌주의 운동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한 창조적 고민이 엿보인다. 특히 문서에서 국제화에 대한 포괄적인 전망을 제기하여 ‘일국사회주의론’에 대한 창조적 해석과 유럽적 혁명의 전망을 고민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현대화에 대한 제기에 있어서도 최신의 과학기술과 통신수단의 발달, 즉, 자본주의 생산력의 발달을 운동의 혁신에 접목하려는 데서는 창조성이 돋보인다. 이외에 직업적 운동가로서 거듭날 것, 당의 대중적 기반을 확장하는 문제, 노동자계급 외의 인민의 다른 부분과 연합하는 문제에 대해 서유럽적인 감각으로 고민하고 있는 것은 독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줄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글은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는 들어있지 않는데 그 부분은 벨기에 노동당의 다른 문서 ≪스딸린에 대한 또 하나의 시각(Another View of Stalin)≫에 담겨 있다.

2011년 5월 1일

문영찬(노동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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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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