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부르주아적 디플레이션 담론에 대하여

― 디플레이션은 인플레이션의 반대가 아니다

채만수 | 소장

지배적 이데올로기

일찍이 맑스와 엥엘스는, “지배계급의 사상이 어느 시대에나 지배적인 사상”, “즉 사회의 지배적인 물질적 권력인 바의 계급이 그 사회의 지배적인 정신적 권력”1)이라면서, 그 이유를 “물질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계급은 그와 동시에 정신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그 때문에 또한 정신적 생산을 위한 수단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에 종속되어”2)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오늘날에도 역시 제도권 교육은 물론 거대하고 강력한 대중매체를 소유ㆍ지배하고 있는 자들이, 소위 전문가들3)을 동원하여, 떠들어대고 있는 사상ㆍ관념이 이 시대의 지배적 사상ㆍ관념이다. 더구나 국가보안법에 의한 사상ㆍ학문의 억압ㆍ통제가 일상화되어 일방의 소리밖에는 들을 수 없는 우리 사회에서는 ‘진보적’이라고 호가 나 있는 지식인들ㆍ정치가들조차 그 상당수는 사실은 “종북주의” 운운의 관념을 발명하고 떠들어대는국가보안법의 자식들이 아니던가? 하물며, 대부분의 노동자들을 포함한 순진한 대중에 이르러서야!

어느 시대에나 지배계급의 사상ㆍ관념이 그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ㆍ관념일 때, 그 사상ㆍ관념의 내용과 성향ㆍ성격은, 특히 사회적ㆍ경제적ㆍ정치적 사상(事象)에 대한 그것은 보수적ㆍ반동적일 수밖에 없고, 오늘날에는 특히 허위적일 수밖에 없다. 기성의 소유관계, 착취관계, 지배관계와 그에 기초한 사상ㆍ관념ㆍ문화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지배계급의 이익이기 때문이고, 사회과학에 의해 밝혀진, 그리고 밝혀지고 있는 진실들은 그들의 그러한 이익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 ≪한겨레≫와 디플레이션

오늘날 국내외 부르주아지를 짓누르고 있는 공포, 디플레이션에 대한 부르주아ㆍ소부르주아적 관념ㆍ담론 역시 당연히 그러한 허위적, 나아가 반동적 관념이다. 다른 건 다 그만두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진보적인4) 언론 중의 하나 ≪한겨레≫의 한 칼럼을 보자.

그 전문(全文)을 옮기자면,

디플레이션은 올해 세계경제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열쇳말의 하나다. 이미 디플레이션에 빠졌거나 그런 위험을 맞은 나라가 한둘이 아니다. 유럽은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비롯해 9개국이 디플레이션(약한 수준)에 시달리는 가운데, 몇몇 나라가 뒤따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세계 2위 경제대국인 중국마저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일본도 디플레이션 그림자를 완전히 떨치지는 못한 상태다.

디플레이션은 물가수준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 추세를 나타내는 것으로 인플레이션과 반대되는 말이다. 디플레이션이 발생하면 불황이나 침체가 동반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디플레이션은 물가상승률이 플러스이긴 하되 둔화하는 디스인플레이션이나, 상승률이 극도로 낮은 로플레이션과도 구별된다. 로플레이션 등이 디플레이션으로 전환될 소지가 적지 않지만 말이다.

대체로 디플레이션이 빚어지면 가계와 기업은 소극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가계는 물가수준이 떨어지는 데에 대응해 소비지출을 늦추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상품 가격이 지금보다 싸질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기업은 매출 감소가 예상됨에 따라 인건비 등 비용 절감을 추진하려 하고 투자를 꺼리게 된다. 가계 소득 위축과 기업 간 거래 축소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 여파는 총수요 부진으로 나타날 개연성이 크다. 또한 물가수준의 하락으로 실질이자율이 높아져 가계와 기업의 빚 부담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이런 양상들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악순환하는 과정에서 나라경제에 큰 멍이 들게 된다.

디플레이션에 한번 빠지면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물가 하락으로 가계의 구매력 등이 일시적으로 좋아질 수 있겠지만 그 이득보다 손실이 엄청나게 큰 것이다. 여러 나라 중앙은행들이 디플레이션을 막거나, 되도록 이른 시간에 퇴치하기 위해 힘을 쏟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한국은행은 제대로 대처하고 있는 것일까?5) (강조는 인용자)

전문(全文)을 인용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다지 길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독자들에게 한 가지만은 꼭 묻고 싶어서이다. 다름 아니라, (물론 짧은 글이기는 하지만) “유레카”, 즉 “알았다, 바로 이것이다!”라고 외치고 있는 칼럼 “디플레이션”에 단 한 마디라도 (그 본질은 그만두고라도) 그 원인에 관한 언급이 있는가? 즉, “디플레이션이 발생하면 …”이라든가, “디플레이션이 빚어지면 …”, “디플레이션에 한번 빠지면 …” 운운하고 있지만, 도대체 ‘왜 디플레이션에 빠지는가’에 대한 언급이 단 한 마디라도 있는가?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다!6)

이를 묻는 이유, 그리고 그 원인에 대한 언급이 단 한 마디도 없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위 칼럼은 디플레이션의 본질에 대한 철저한 무지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그 원인을 그 “여파”, 즉 그 결과로 둔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필자인 이경 논설위원의 주관적 의도야 결코 악의(惡意)가 아니겠지만, 객관적으로는 사태의 진실을 은폐하고 환상을 조장함으로써 반동에 부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인의 자기평가 및 의도와 다른 위와 같은 무지, 그리고 반동에의 복무는, 당사자는 물론이요 어쩌면 ≪한겨레≫ 기자ㆍ편집단의 거의 전체가 결코 수긍하기 쉽지 않겠지만, 그 칼럼의 필자가 이 시대의 지배적 사상ㆍ관념으로서의 부르주아적ㆍ소부르주아적 비과학(非科學)과 헛소리를 무비판적으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포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보적’ 언론이나 지식인들ㆍ정치가들이 ‘진보’의 이름으로 사실은 반동을 설교할 때, 그 설교는, 선진적 노동자, 선진적 대중이 그들에 갖고 있을 신뢰, 따라서 그들 선진적 분자들에 대한 저들 ‘진보적 분자들’의 영향력 때문에, 반동적 언론이나 지식인들ㆍ정치가들의 노골적인 반동적 설교보다 당연히 몇 배나 더 위험하다.

인플레이션

 

우선 인플레이션에 대해서 보자. 칼럼의 필자가 “디플레이션은 … 인플레이션과 반대되는 말”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사실은, 인플레이션이 무엇인지 그 과학적 개념을 알아야만, 디플레이션과 관련한 헛소리들, “디플레이션은 … 인플레이션과 반대되는 말”이라는, 이 시대의 지배적 관념으로 되어 있는 헛소리들을 간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자기들 스스로 ‘주류경제학’이라면서 우쭐대며 행세(行勢)하고 있는, 비과학으로서의 현대 부르주아 경제학, 비과학자로서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어떤 경향, 어떤 학파인가를 불문하고, 단언컨대, 누구 하나 인플레이션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뿐만 아니라, 경제과학이 그 본질을 폭로하면, 그들은 그것을 왜곡ㆍ은폐하기 위해 온갖 기를 다 쓴다.)

비근하게, 현대 부르주아 경제학이라는 비과학과 그 헛소리를 그대로 답습ㆍ전제하고 있는 위 칼럼을 보자. 그에 따르자면, “디플레이션은 물가수준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그에 “반대되는 말”인 인플레이션은 필시 ‘물가수준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이 될 것이다. “… 디플레이션은 물가상승률이 플러스이긴 하되 둔화하는 디스인플레이션이나, 상승률이 극도로 낮은 로플레이션과도 구별된다”는 서술도 그가 인플레이션이란 말로써 그러한 현상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현대 부르주아 경제학은, 다시 말하지만, 어떤 경향, 어떤 학파의 학자들도 모두 인플레이션이란 개념을 이러한 의미로, 즉 ‘물가수준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이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물가의 지속적인 상승은 모두 인플레이션인 것이고, 그 지속적인 하락은 모두 디플레이션인 것이다!

그러나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의 개념을 이렇게 파악하고, 교육ㆍ선전하는 것은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의 본질과 원인을 왜곡ㆍ은폐하는 것이고, 현대 국가(독점)자본주의7)의 위기의 원인과 본질, 그 위기에 대한 현대 부르주아 국가의 대응정책의 본질과 한계를 철저히 은폐하는 것이다. 그것은, 잉여노동의 부르주아적 착취와 그 위기를 은폐하기 위하여 경제과학의 불가결의 기초 중의 기초인 가치 개념을 난폭하게 파괴하고 무시하는, 철저히 부르주아적인 폭거(暴擧)이다!

“물가수준”이니 “물가상승률”이니 할 때 물가(物價)란 어떤 시점에 어떤 국가ㆍ사회에서 매매되는 상품들의 가격의 총화(總和) 혹은 그 평균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이라고 불리는 현대의 비과학자들에 의하면, 그것이 지속적으로 오르면 모두 인플레이션이고, 지속적으로 내리면 모두 디플레이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플레이션이니 디플레이션이니 하는 현상이 사회적으로 대대적인 주목을 받으며 공포의 대상으로 된 것은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 봐도 기껏해야 1930년대 대공황 이후이고, 특히 인플레이션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이다. 그리하여 인플레이션이니 디플레이션이니 하는 말들 자체가 경제학상의 용어로써 쓰이기 시작하고 시민권을 획득한 것도 사실은 바로 그 시기 이후이다.

그렇다면 그 전에는 물가의 지속적인 상승이나 지속적인 하락 현상들이 없었던 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현상이 있긴 했지만, 현대의 비과학자들과는 달리 당시 경제학자들의 지적 수준이나 언어 감각이 그것들을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하기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던 것일까?

“미치지 못했던”의 ‘미치다’가 ‘정신에 이상이 생기다’[狂]란 뜻이 아닌 한,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즉, 그러한 현상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당시 경제학자들의 지적 수준이나 언어 감각이 모자랐던 것도 아니었다. 1930년대 대공황 이전과 이후가 달랐던 것은 유사하게 보이는 그들 현상의 원인과 성격ㆍ본질이었고, 그 양태의 격렬성ㆍ심각성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1930년대 대공황 및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그들 현상은 대대적인 주목과 공포의 대상으로 되었고,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원인과 본질을 가진 물가상승은 ‘인플레이션(inflation)’이라는, 그 원인과 본질에 어울리는 이름을. 그리고 새로운 양태를 띠며 격렬하고 심각하게 전개된 물가하락은, 사태의 원인ㆍ본질보다는 그 현상에 관심을 집중하며 그에 기초한 조어(造語) 감각이 뛰어난 현대 비과학자들의 비상한 재능 덕분에 ‘디플레이션(deflation)’이라는, 그 원인과 본질에 상응하지 못한 부적절한 이름을.

무릇 물가의 상승은 그 원인 및 성격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그 실질적 상승과 그 명목적 상승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리고, 비과학으로서의 현대 부르주아 경제학적으로가 아니라, 경제과학적으로 말하자면, 인플레이션이란 그 중 후자, 즉 물가의 명목적 상승을 의미한다.

앞에서 ‘인플레이션’을 그 원인과 본질에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평가했던 것도 바로 그것이 물가의 실질적 상승이 아니라 그 명목적 상승을 가리키기 때문이었다. 부연하자면, 인플레이션이란, 독점자본주의 하에서 항상화한 자본주의적 생산과 그 체제의 위기를 관리하기 위해서 부르주아 국가가 국가지폐화한 은행권을 유통에 필요한 화폐량 이상으로 증발함으로써 그 불환은행권의 가치가 저락해,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불환은행권이 대리하는 금량(金量)이 적어져 물가가 명목적으로 부풀려지는[inflated] 현상인데, ‘인플레이션(inflation)’이란 용어 자체가 이를 적절히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과학으로서의 현대 부르주아 경제학의 사상ㆍ교리들이 지배적인 사상ㆍ관념으로 되어 있는 오늘날에 물가상승의 이 양자의 차이, 즉 그 실질적 상승과 그 명목적 상승의 차이를 이해하기란 결코 용이하지 않은데, 유감스럽게도,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서 그것을 상세히 논할 여유도 없다.8) 그리하여 여기에서는 그것을 가능한 한 최대한 논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간단히, 그리고 통속적 어투로 논할 수밖에 없다.

우선, 1930년대의 대공황을 계기로 은행권의 금태환(金兌換)9)이 전면적ㆍ항구적으로 정지되기 전에는,10) 즉, 대공황을 계기로 은행권의 발행이 국가의 은행으로서의 중앙은행의 독점적 특권으로 되고 그 은행권의 금태환이 정지됨으로써 그것이 국가지폐화한 은행권으로 되고, 국가지폐화한 그 은행권 그것이 마치 화폐 그 자체인 양 행세하기 전에는 사실상 누구도 ‘금[은]이 곧 화폐’11)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아니, 역사적 경험을 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맑스도 지적하고12) 있듯이, 나폴레옹 전쟁에 의한 1797년부터 1817년까지의 잉글랜드은행권의 태환정지처럼, 과거에도 “불환은행권이 일반적인 유통수단으로서 전면적으로, 그것도 [상당히] 장기적으로 유통하는 상황은 화폐이론에 일대 혼란을 초래하면서 금폐화론(金廢貨論) 및 화폐국정설(貨幣國定說)이 크게 유행하는 상황을 조성”13)하긴 했지만, 그들의 목소리나 세(勢)는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보잘 것 없는 그들 소수를 제외하곤, 절대적인 다수가, 명확한 과학적 신념으로서든, 경험상 우러나오는 막연한 정서에서든, 화폐는 금이라고 믿고 생각했던 것이다. 금본위제 하에서는 설령 은행권들이 사실상 전면적으로 유통되는 경우에도 ‘금이 곧 화폐’라는 관념에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금본위제 하에서는 은행권의 금태환은 경제적으로도 법률적으로도 너무나 당연해서, 그 발권은행(發券銀行)이 파산하지 않는 한, 그 은행권의 가치, 아니, 사실은 그 은행권이 대표하는 가치는 그 은행권에 액면으로 표시된 금량(金量)의 가치와 동일했기 때문이었다. 이 가치의 동일성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은행이 발행한 자기앞수표의 가치가, 아니, 사실은 그 자기앞수표가 대표하는 가치가 한국은행권의 가치와, 아니, 한국은행권이 대표하는 가치와 동일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14) 즉, 그 태환성 때문이다.

여기에서 ‘금이 곧 화폐’인지 아닌지 그 사실 여부 대신에 그 관념만을 문제 삼는 것은, 은행권의 금태환이 법률에 의해 보장되어 있든 아니든 ‘금이 곧 화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금태환의 전면적ㆍ항구적 정지로 ‘금은 더 이상 화폐가 아니다’는 부르주아적ㆍ반과학적 금폐화론(金廢貨論)이 시대의 지배적 관념이 된 조건 하에서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것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이기 결코 쉽지 않겠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여전히 ‘금이 곧 화폐’인 것이다!15)

그런데 금본위제(金本位制) 하에서는, 즉 금이 주화(鑄貨)로서 유통하고 은행권의 금태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경우에는 물가는, 한편에서의 제 상품에 대한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화폐 곧 금의 생산에서의 노동의 생산력의 변동과, 다른 한편에서의 제 상품의 생산에서의 노동생산력의 변동 간의 상관관계, 그 변동의 방향과 비율의 관계에 의해서 규정된다. 즉, 제 상품의 생산에서의 평균적 노동생산력의 증대보다 금의 생산에서의 노동생산력의 증대가 더 큰 경우에는 동일한 양의 상품들에 대해서 과거보다 더 많은 양의 금이 대응해야 서로 등가가 되기 때문에 물가는 상승한다. 그 반대는 당연히 그 반대이다. 즉, 금의 생산에서보다 제 상품의 생산에서의 노동생산력의 발전이 빠른 경우,16) 보다 적은 양의 금으로 그 상품들의 가치가 표현될 것이기 때문에 물가는 하락한다.17) 이것이 바로 물가의 실질적 변동 혹은 그 실질적 상승과 하락이다.

한편, 앞에서 지나가는 말처럼, 1930년대 대공황 전에는 물가의 지속적인 상승이 없었던가 하고 묻고는 그랬을 리가 없다고 했지만, 실제로 16세기 한 세기에 걸쳐 물가가 약 4배[!]나 오른 유럽에서의 물가상승은 ‘가격혁명’이란 이름으로 경제사에 유명하다. 그런데 당시의 이 지속적인 물가상승은 ‘신대륙’에서의 ‘값싼’, 즉 높은 노동생산력으로서 생산된 금[은], 혹은 가치론적으로 그와 같은 의미를 갖는 약탈에 의한 금[은]의 대량 유입에 의한 것으로서 가격의 실질적 상승이었기 때문에, ‘가격혁명’이라는 이름을 얻었을지언정, ‘인플레이션’, 즉 ‘가격의 부풀림’이라는 이름은 결코 얻지 않았다.18)

그에 비해서, 인플레이션, 즉 물가의 명목적 상승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단지 국가지폐화한 중앙은행권의 증발과 그로 인한 지폐가치의 감가에 의한 물가의 상승이기 때문에, 물가의 실질적 상승과는 그 원인ㆍ본질도 그 운동법칙도 전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인플레이션이 애초에, 말하자면, ‘가격혁명’이나 ‘지속적 가격폭등’ 등으로 불리지 않고 인플레이션, 즉 ‘(가격의) 부풀림’으로 불리게 된 것도 사실은 물가의 실질적 등귀와의 그 차이성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이제 비과학으로서의 현대 부르주아 경제학은 물가의 이 실질적 상승과 인플레이션을 무차별적으로 동일시하고 있다.

왜 그럴까?

저들이 이렇게 전혀 다른 것을 동일시하는 이유는 노쇠한 독점자본주의가 처한 전반적 위기와 그에 대한 부르주아 국가의 대응의 본질을 은폐하기 위해서이다. 인플레이션은 화폐론적으로는 국가지폐화한 은행권, 현대 중앙은행권의 증발에 의한 물가의 명목적 상승이지만, 국가의 은행으로서의 중앙은행으로 하여금 그 은행권을 증발하지 않을 수 없게끔 강제하는 것, 즉 인플레이션의 발생을 불가피하게 하는 것은 만성적인 과잉생산의 위기,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의 전반적 위기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플레이션, 즉 전반적 위기와 그에 대한 부르주아 국가의 대응으로 발생하는 물가상승과,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의 전반적 위기나 그에 대한 대응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물가의 실질적 상승을 동일시하게 되면, 인플레이션 발생의 원인과 그 특수성, 즉 전반적 위기와 그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그 성격이 자연히 은폐되게 된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이 물가상승을 무차별적으로 인플레이션이라고 부르는 이유ㆍ목적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리 파렴치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라도 인플레이션이 중앙은행에 의한 불환은행권의 증발에 의한 물가상승임을 부정하지 못하지만,19) 그 증발이 만성적인 과잉생산 위기,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의 전반적 위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즉 인플레이션적 물가상승과 전반적 위기와의 연관은 은폐되게 된다.

디플레이션

앞에서 본 것처럼, 비과학으로서의 현대 부르주아 경제학은 “디플레이션은 … 인플레이션과 반대되는 말”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인플레이션이 지속적인 물가상승 혹은 불환은행권, 즉 불환통화의 증발에 의한 물가상승이기 때문에 디플레이션은 그저 지속적인 물가하락 혹은 통화의 수축에 의한 물가하락으로 된다. 이러한 터무니없는 관념이 이 시대에 얼마나 지배적인 관념으로 되어 있는가는 어느 것이든 주위에 있는 어학사전, 그러니까 ‘국어사전’에서 ‘디플레이션’을 찾아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예컨대, 내가 가진 2개의 ‘국어사전’은 각각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통화량의 축소에 의해 물가가 하락하고 경제 활동이 침체되는 현상. 또는 경기 과열이나 인플레이션의 억제를 위해 정책적으로 실시되는 금융긴축이나 재정 긴축.

인플레이션으로 떨어진 화폐 가치를 끌어올리는 수단으로 통화를 수축시키는 방법. 또는 그 현상. 통화 수축.

문제의 칼럼을 쓴 ≪한겨레≫ 논설위원의 디플레이션론, 즉 “디플레이션은 … 인플레이션과 반대되는 말”이라는 주장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바로 그대로이다.

디플레이션은 정말 인플레이션의 반대일까? 그리하여 그것은 통화량을 축소함으로써 발생하고, 그 결과 경제 활동이 침체되는 것일까?

‘디플레이션은 인플레이션의 반대’ 운운하는 것은 필시 다음과 같은 천재적 발상, 유희의 표현이다. 즉, ― 인플레이션(inflation)ㆍ인플레이트(inflate)가 의미상 바람을 불어넣거나 뭔가 액체를 채워 넣어 부풀리는 것이고, 디플레이션(deflation)ㆍ디플레이트(deflate)는 그렇게 부풀린 바람이나 액체를 빼버리는 것이니까, 디플레이션은 통화팽창에 의한 지속적인 물가상승의 반대, 곧 통화감축에 의한 지속적인 물가하락이다!

우리는 이미 1987년부터, 오늘날 강단에서 석학으로까지 평가받는 한 천재의 그러한 말장난을 지겹게 보아 왔다. 즉, 약관 20대에 이미 반(半)봉건제ㆍ반(半)프롤레타리아로부터 ‘반(半)자본제’를 유추해내 명성을 떨치시고, 보다 노숙해지셔서는 자본에 의한 노동자의 형식적ㆍ실질적 포섭에서 그 ‘기계적 포섭’을, 절대적ㆍ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서 ‘기계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유추해내신 한 천재의 비범한 솜씨ㆍ재간을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솜씨ㆍ재간은, 그것이 아무리 그럴~싸하게 들리더라도, 어디까지나 시골 저잣거리의 떠버리 만병통치 약장수와 같은 지식 야바위꾼, 지식 사기꾼의 그것일 뿐이다.

여기에 이르면 칼럼의 필자 이경 논설위원은 항변을 하고 나설지 모른다. “나는 통화량의 축소라는 얘기는 결코 하지 않았다, 통화량의 통 자도 꺼내지 않았다!”라고.

물론 그랬다. 그는 통화량의 통 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항변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그는 명문(明文)으로 “디플레이션은 … 인플레이션과 반대되는 말”이라고 쓰고 있으니까. 나아가, 앞에서 본 것처럼, 다음과 같은 말로 사실상 “디플레이션을 막거나, 되도록 이른 시간에 퇴치하기 위해” 통화량을 증대시킬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유레카’ 칼럼을 끝맺고 있으니까.

디플레이션에 한번 빠지면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물가 하락으로 가계의 구매력 등이 일시적으로 좋아질 수 있겠지만 그 이득보다 손실이 엄청나게 큰 것이다. 여러 나라 중앙은행들이 디플레이션을 막거나, 되도록 이른 시간에 퇴치하기 위해 힘을 쏟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한국은행은 제대로 대처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그가 ‘통화량 축소’나 ‘통화 수축’의 통 자도 꺼내지 않은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건 다름 아니라,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디플레이션’은 중앙은행이 불환통화를 축소하고 있는 가운데, 혹은 축소했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국의 중앙은행이 가히 시쳇말로 천문학적 규모의, 수조 달러, 수조 유로 등등의 통화를 살포하고 있는 가운데 발생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벼룩도 낯짝이 있으렸다! 사태가 그러하니 그가 아니더라도 누가 감히 어떻게 그러한 ‘통’ 자를 꺼낼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벼룩의 낯짝은 역시 벼룩의 낯짝이다. 그렇게 각국이 앞 다투어 엄청난 금액을 살포하고 있는 가운데 문제의 디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있는데도 저들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디플레이션은 인플레이션의 반대”라고 주장하고 나서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분명 위 칼럼의 필자가 썼음에 분명한, ≪한겨레≫의 2015년 1월 8일자 ‘사설’ “디플레이션 공포에 빠진 세계경제, 남의 일 아니다”는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플레이션에 빠지면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런데도 정책적 대응은 미흡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유럽의 경우 국가부채를 줄여야 한다며 긴축정책을 밀어붙였다. 경제가 회복세를 타지 못한 채 위험에 더 노출된 것은 자연스런 결과다. 이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유럽 국가들과 중앙은행이 지혜를 짜내야 한다. …

국내로 눈길을 돌리면 메시지는 간단하다. … 디플레이션이 빚어지지 않도록 한국은행과 함께 적절한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 등도 서둘러야 한다. (강조는 인용자)

“유럽의 경우 … 긴축정책을 밀어붙였다”? 한국 사회에서 극우분자들은 사실상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모두 ‘좌파’로 취급한다. 물론 예컨대 100명이 좌에서 우로 늘어 서 있을 때, 맨 오른쪽 100번째의 인간이 볼 때 98, 99번째 인간들은 자신을 기준으로 분명 ‘좌파’다! “유럽의 경우 … 긴축정책을 밀어붙였다”는 위 사설의 논법은 바로 그런 논법이다. 지난 수년 동안 유럽중앙은행과 IMF가 수조 유로, 수조 달러의 자금을 살포해 왔는데도, 필시 소위 ‘양적완화’라는 이름으로 더 많은 자금을 살포해온 미국 등을 염두에 두고 ‘긴축긴축긴축’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억지로라도 ‘디플레이션은 인플레이션과는 반대’(?)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저들이 의미하는 바와는 정반대의 의미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저들은 디플레이션이 마치 국가지폐로서의 불환통화의 수축ㆍ축소 때문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디플레이션은 유통필요화폐[=금]량 및 국가지폐에 의한 그 대리관계―물론 저들 부르주아 비과학자들에게는 이런 개념조차 없지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굳이 말하자면, 디플레이션은 인플레이션의 반대라면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즉, 인플레이션은 물가의 명목적 상승임에 비해서 디플레이션은 그 실질적 하락이라는 의미에서, 굳이 말하자면, 디플레이션은 인플레이션의 반대라면 반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국가지폐가, 그러니까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지배 하에서 국가지폐화한 중앙은행권이 전일적(全一的)으로 유통하는 조건 하에서만 발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러한 조건 하에서 유통필요화폐량을 넘어, 오늘날 일반적으로 통화로 불리는 국가지폐가 유통에 과잉 투입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물가의 명목적인 상승이다.

그러나 디플레이션은 전혀 다르다. 그것은 지폐의 전일적 유통 같은 국가독점자본주의, 부르주아 국가의 통화정책과는 애초 아무런 관계가 없이 발생하는 물가의 실질적 하락, 그것도 지속적인 실질적 하락이다. 디플레이션 그것은 과잉생산, 그에 따른 수요부족으로 인한 지속적인 물가하락, 지속적인 상품가치의 파괴로서, 공황기의 가격 현상이다.

디플레이션은 이렇게 공황기의 가격 현상이기 때문에 사실은 1930년대 대공황기 이전에도 당연히 나타났던 현상이다. 다만 그때에는 1930년대처럼 격렬하고 심각하거나 장기적이 아니었고 순환적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당시는 금태환제 하여서 ‘인플레이션’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디플레이션’ 같은 특별한, 그리고 현상에 매몰된 이름을 얻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디플레이션은 이렇게 공황기의 가격 현상이지 결코 공황의 원인이나 그것을 심화ㆍ격화시키는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구랍(舊臘) 30일자 칼럼과 이 달 8일자 사설에서 “디플레이션이 발생하면 불황이나 침체가 동반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적인 오류이다. 나아가, 문제의 사설에서 “디플레이션은 이미 여러 나라를 어려움에 빠뜨리고 있다”라든가, 문제의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하는 것은 현 사태의 원인과 결과를 정반대로 뒤집어놓는 것이다.

그[=디플레이션의: 인용자] 여파는 총수요 부진으로 나타날 개연성이 크다. 또한 물가수준의 하락으로 실질이자율이 높아져 가계와 기업의 빚 부담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이런 양상들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악순환하는 과정에서 나라경제에 큰 멍이 들게 된다.

무엇보다도 디플레이션의 여파로, 즉 그 결과로 ‘총수요’ 부진이 나타나는 게 아니다. 거꾸로 ‘총수요’ 부진으로 디플레이션이 나타나는 것이다.

언필칭 경제학자라는, 현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 대부분에게 해당되는 말이지만, ≪한겨레≫의 칼럼리스트ㆍ논설위원이 디플레이션과 ‘총수요’의 관계, 디플레이션과 공황ㆍ불황ㆍ침체의 관계를 이렇게 거꾸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경제 칼럼’ㆍ‘경제 논설’을 쓰지만, 사실은 경제문제를 전혀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가 부르주아ㆍ소부르주아 비과학자들의 헛소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결국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의 모순, 그 전반적 위기를 은폐하는 데에 복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지 않은가?

칼럼에서:

여러 나라 중앙은행들이 디플레이션을 막거나, 되도록 이른 시간에 퇴치하기 위해 힘을 쏟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한국은행은 제대로 대처하고 있는 것일까?

사설에서:

디플레이션에 빠지면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런데도 정책적 대응은 미흡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유럽의 경우 국가부채를 줄여야 한다며 긴축정책을 밀어붙였다. 경제가 회복세를 타지 못한 채 위험에 더 노출된 것은 자연스런 결과다. 이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유럽 국가들과 중앙은행이 지혜를 짜내야 한다. 다른 나라들과의 정책 공조 등도 고려 대상이다.

국내로 눈길을 돌리면 메시지는 간단하다. 대외 환경의 변화를 통제할 처지는 못 되지만 정부가 선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유가 하락의 긍정적 요소를 최대한 살리고 부정적 요소를 최소화하는 것은 기본이다. 디플레이션이 빚어지지 않도록 한국은행과 함께 적절한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 등도 서둘러야 한다.

결국 그에 의하면, 막바지에 달한 독점자본주의에서조차 디플레이션은 법칙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ㆍ정부와 중앙은행의 “적절한 대비책”을 통해 “빚어지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디플레이션 자체가 그러할진대, 즉 “적절한 대비책”을 통해 그것이 “빚어지지 않도록” 할 수 있을진대, 그에 “동반되는 경우가 많”고, “그 여파”이기도 한 “불황이나 침체”, “총수요 부족”이야 오죽하겠는가!

여기에 이르면, 1980년대 말부터 90년 초에 걸쳐 정건화(현재 한신대 경제학 교수님)ㆍ임휘철ㆍ정태인 등과 나 사이에 격렬하게 벌어졌던 공황 논쟁에서, “현대 자본주의의 축적위기는 국가의 개입으로 공황(Crisis)으로 전개되지 않는다”(정건화의 표현 그대로!)던, 싸구려 코미디 ‘국가독점자본주의 영구번영론’이 저절로 생각난다.20)

21세기의 디플레이션

부르주아ㆍ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은 오늘날 1930년대 대공황 초기의 디플레이션을 연상하면서 ‘그러한 디플레이션이 되풀이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러면서 짐짓 그러한 사태가 “빚어지지 않도록 … 적절한 대비책을 마련”할 것을, 그러한 ‘대비책’을 서두를 것을 국가ㆍ정부와 그 중앙은행에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21세기 초인 현재 전개되고 있는 디플레이션은, 그것을 머리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저들 부르주아ㆍ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을 공포에 떨게끔 하고 있는 저 1930년대 대공황 초기의 디플레이션보다 그 성격과 양태가 훨씬 복잡하고 심각하다.

사실 1920년대 말에서 30년대 초에 걸쳐 전개된 디플레이션은 순수한 형태로 전개된 그것이었다. 말할 나위 없이 금본위제, 즉 금태환제 하였기 때문이었고, 그 때문에 과잉생산과 그에 따른 수요부족에 의한 상품의 가치파괴가 사실 그대로 물가에 반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디플레이션은, 제국주의 각국 정부가 금태환을 정지하고, 국가지폐, 즉 국가지폐화한 은행권을 대대적으로 유통에 투입하자,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지폐의 증발에 기인하는 명목적 물가상승, 즉 인플레이션이 나타났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1930년대 대공황 이래 부르주아 국가의 지폐증발은, 그리하여 인플레이션은 부르주아 경제체제의 체질, 그 생존의 조건으로 되어 있다. 게다가 공황 및 불황기에는 수요 부족과 그에 따른 지불 불능으로 쓰러져 가는 독점자본을, 그리하여 자본주의 자체를 공황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하여 그 지폐증발이 가히 대대적인 규모로 이루어져 왔다.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대공황 속에서는, 특히 2008년 9월 리먼브라더스 파산 사태 이후, 스스로 헬리콥터로 돈을 살포한다며 소란을 떨 만큼, 미국만이 아니라 유럽ㆍ일본 등등 자본주의 주요 국가 모두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규모의 자금을 살포해왔다. 이는, 부르주아ㆍ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이 그야말로 제멋대로 말을 남용ㆍ왜곡하여 “긴축정책을 밀어붙였다”고 떠들어대는 그리스ㆍ스페인ㆍ포르투갈 등 남부유럽 국가들이라고 해서 물론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도, 즉 그렇게 엄청난 규모의 돈을 쏟아 부었고 쏟아 붓고 있는데도 디플레이션이 진행되고 있고, 디플레이션 공포에 떨고 있다.

왜 그러하며,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보다도, 1930년대 대공황에서는 금태환의 정지 및 불환은행권의 증발에 의한 인플레이션이 디플레이션을 압도했다면, 2007년 하반기에 시작된 21세기 대공황 속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태는, 그리고 사실은 일본의 경우 이미 지난 1990년대 말부터 진행되어온 사태는, 양적완화니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니 하며 역사상 그 어느 때, 어느 공황기보다 엄청나게 많은 지폐를 증발하고 있지만, 그러한 인플레이션을 디플레이션이 압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인플레이션, 즉 물가의 명목적인 상승이 전개된다고 해서, 그 내부에서 상품생산에 있어서의 노동생산성의 고도의 발전에 기인한, 인플레이션과는 반대 방향으로의 물가의 실질적 하락의 운동법칙이 작동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 하락의 운동이 인플레이션에 의해서 상쇄되고 압도될 뿐이다. 이는 당연히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태에도 해당된다. 즉, 한편에서는 엄청난 양의 지폐 투입에 의한 물가의 명목적 상승 운동이, 다른 한편에서는 과잉생산ㆍ수요부족에 의한 디플레이션과 과학기술혁명의 비약적 전개에 의한 노동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에 따른 물가의 실질적 하락 운동이 서로 경합하면서 현재의 물가 운동 추세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2007년 하반기 이후의, 특히 2008년 가을 리먼부라더스 파산 사태 이후의 주요 새로운 변수는 역시 공황과 그에 대응한 엄청난 자금의 살포이기 때문에, 강력한 디플레이션이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압도해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지배적 경향일 것이다.

이는 현재의 사태, 즉 현재 진행 중인 21세기 대공황이 그야말로 중대한 역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2007년 가을 영국의 노던록(Northern Rock) 은행의 파산으로부터 시작된 공황이 미국의 이른바 써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의 부실과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리만브라더스의 파산 사태로, 대공황으로 전개되는 것을 보면서 이미 말했던 것처럼,21) 이는 21세기 전반기는 대대적인 사회혁명에 의한 인류의 새로운 사회로의, 무계급 사회로의 도약의 시기이든가, 아니면 인류의 절멸을 초래할지도 모를 대전쟁의 시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1930년대의 대공황이, 부르주아ㆍ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이 거짓 선전하는 것과 같은 뉴딜정책이나 케인즈주의 혁명 따위로 극복된 것이 아니라, 유럽과 동아시아 등 주요 근대적 산업ㆍ생산기지를 초토화시키면서 5,000만 명 이상의 인간을 도륙한 제2차 대전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핵병기 시대인 지금은 일단 그러한 대전쟁이 발발하면 핵전쟁으로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으로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노사과연>


1) K. 맑스ㆍF. 엥엘스, ≪독일 이데올로기≫, MEW, Bd. 3, S. 46. (강조는 원 필자들); ≪공산당 선언≫, MEW, Bd. 4, S. 480도 참조.

2) K. 맑스ㆍF. 엥엘스, ≪독일 이데올로기≫, MEW, Bd. 3, S. 46.

3) 사실, 그 지식수준이나 떠들어대는 바의 성향ㆍ성격으로 봐서 그 대부분은 ‘전문가들’은커녕 ‘전문개들’이라는 호칭조차 과분한 자들이지만!

4) 이 시대, 특히 이 나라에서는 ‘진보(적)’이라는 말이 사실 부당하게 남용되고 있다. 기껏해야 ‘중도(적)’인 사상과 관념, 이론, 태도들이 두루 ‘진보(적)’이라고 규정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종북주의’라는 개념을 발명하고 입에 달고 사는 사실상 극우적인 지식인들 및 정치인들조차 그렇게 분류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는 필시 분명 ‘극우(적)’ㆍ‘초극우(적)’인 그것들이 단순히 ‘보수(적)’이라고 불리고 규정되는 극우적 현실의 반영일 것이다.

5) 이경 논설위원, “디플레이션”, ≪한겨레≫ 2014. 12. 30. (“유레카”라는 이름의 칼럼 란).

6) 사실, 위 칼럼에서는 디플레이션의 본질이나 원인에 대한 논급만이 아니라, 그 “반대되는 말”이라는 인플레이션의 그것에 대한 논급 역시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말이다.

7) 여기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표기하는 이유는, 즉, ‘독점’을 괄호로 묶어 표기하는 이유는, 문제의 위기 및 그에 대한 대응이 그 성격은 본질적으로 국가독점자본주의적인 것이지만, 제국주의의 자본주의 세계지배로 그 위기와 대응이 비독점자본주의 국가들에서까지 필연적인 것으로 되어 있고, 심지어 왕왕 증폭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8) 참고로 말하자면, 맑스의 ≪자본론≫ 제1권(1867), 제1편은, 특히 그 ‘제1장 상품’에서부터 ‘제3장 화폐 혹은 상품유통’의 ‘제1절 가치의 척도’까지를 숙지(熟知)한 바탕 위에서의 그 ‘제2절 유통수단’, 그 중에서도 특히 ‘c) 주화, 가치장표’는 물가의 실질적 상승ㆍ변동과 그 명목적 상승으로서의 인플레이션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데에서 가장 필수적이면서도 가장 상세한 저작이다. 물론 시대적인 이유 때문에 거기에는 ‘인플레이션’이라는 어구(語句)조차 존재하지 않지만, 화폐론적으로는 그것이, 국가지폐의 본질 및 ‘유통에 필요한 화폐[=금]량’의 개념과 함께, 가장 상세하고 과학적으로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폐론적으로는”이라고 한정하는 이유는, 현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인플레이션을, 그 원인과 기능 등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론 화폐론적 분석과 논리의 차원을 넘는 분석과 논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9) 여기에서 말하는 ‘금태환’은 물론 금본위제(金本位制) 하에서의 그것, 즉 법률적 금태환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굳이 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오늘날 맑스경제학자임을 자임할 뿐 아니라 세평(世評) 역시 그렇게 인정하는 경제학자들 중에조차 전면적 국가지폐제로서의 불환은행권제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그 국가지폐화된 은행권의 ‘경제적ㆍ사실적 금태환’을 보지 못한 채 ‘이제 더 이상 금은 화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즉 금폐화론(金廢貨論)을 주장하는 ‘경제학자들’이 숱하게 많기 때문이다.

10) 물론 1930년대 대공황 전에도 금태환이 정지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쟁과 같은 대재난을 맞아 일종의 긴급피난적인 일시적 조치로서 취해졌던 것이고, 그 사유가 해소되면 이내 금태환이 재개되었다. 당시로서는 가장 전면적ㆍ세계적이었던, 제1차 대전을 계기로 한 태환정지 역시 마찬가지였고, 심지어는 1930년대 대공황을 계기로 한 전면적ㆍ세계적 태환의 정지조차 애초에는 항구적인 정지를 의도한 것이 아니었고, 그렇게 예견된 것도 아니었다.

11) 주지하는 것처럼, 대부분의 부르주아 국가는 금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지만, 예외적으로 은본위제 혹은 금은(金銀)복본위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도 있었다. (금은복본위제는 현실적으로는 ‘복본위제’로서 기능할 수 없었는데, 여기에서 그 이유를 설명할 여유가 없으므로 그에 대해서는 ≪자본론≫ 제1권 제1편을 참조할 것.)

12) “잉글랜드은행이 태환을 정지하고 있던 시기에는 전황보고(戰況報告)보다도 더 많은 수의 화폐이론이 생겨났을 정도[였고] … 은행권의 감가와 금의 시장가격의 그 주조가격 이상으로의 등귀는 … 또 다시 관념적 화폐척도설을 불러일으켰다.”(K. 맑스,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MEW, Bd. 13, S. 64.)

13) 채만수, “‘금폐화론’과 현대 불환은행권”, ≪진보평론≫ 창간호(1999년 가을), p. 274.

14) 여기에서 내가 굳이 “은행권의 가치는, 아니, 사실은 그 은행권이 대표하는 가치는 …”이라든가, “자기앞수표의 가치가, 아니, 사실은 그 자기앞수표가 대표하는 가치가…”, 혹은 “한국은행권의 가치와, 아니, 한국은행권이 대표하는 가치와 …”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고 혹(惑) 많은 독자들이, ‘몰인품한 저 인간 혹시 별난 취미, 별난 병까지 앓고 있는 거 아냐?!’ 하고 빈정거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말하자면, 번쇄취미(煩瑣趣味)나 번쇄벽(煩瑣癖) 때문이 결코 아니다. 굳이 그렇게 표현하고 강조하는 이유,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서 사실상 ‘최고의 맑스경제학자’로 호가 나 있는 김수행 교수님께서조차 오늘날 국가지폐화한 은행권으로서의 불환은행권(≪자본론≫ 제3권, MEW, Bd. 25, SS. 539-540의 F. 엥엘스의 추기 참조)의 ‘가치’를, 그것이 대리ㆍ대표하는 금의 가치로 이해하시는 대신에, 현재의 “중앙은행권은 … 비록 내재적 가치를 가지지 않지만 객관적인 사회적 가치를 가지면서 가치척도의 기능도 수행하고 있다”(김수행, “자본의 금화와 현재의 중앙은행권”, ≪이론≫ 1996년 겨울/1997년 봄 통권 제16호, pp 43-44) 운운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김 교수님의 이러한 금폐화론에 대한 비판은, 채만수, “‘금폐화론’과 현대 불환은행권” 참조). 김 교수님께서 현대 불환은행권의 가치를 그렇게 이해ㆍ선전하시고 계시다는 것은, 감히 단언하거니와, 그분께서 ≪자본론≫의 번역자이시지만, 맑스가 ≪자본론≫에서 극히 과학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경제과학의 기초 중의 기초인 상품ㆍ화폐ㆍ가치 등의 문제를 교수님께서 사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셨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수님께서 정말 어이없게도 ‘쏘련은 자본주의였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계신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라, 바로 ≪자본론≫에 대한, 그리하여 경제과학에 대한 그러한 몰이해 때문인 것이다. 노동의 생산력을 반맑스주의적으로, 즉 반과학적으로 “부가가치/종원업수”로, 즉, 투하노동량에 대한 가치생산물의 비율로 이해ㆍ선전하는(정성진, ≪마르크스와 한국경제≫, 책갈피, 2005, p. 130)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수호자”(정성진 같은 책, p. 11) 정성진 교수님께서 ‘쏘련은 자본주의였다’고 왜장치시고 계신 것이, 우연이 아니라, 경제과학에 대한 그러한 몰이해 때문인 것처럼!

15) 화폐란 그 자체가 가치를 가진 상품, 즉 인간 노동의 생산물로서의 상품이며 오늘날에는 상품으로서의 금이 곧 화폐라는 사실은 ≪자본론≫ 제1권 제1편에 바늘끝 만큼의 논박도 허용하지 않을 과학적 논리로 상세하고도 치밀하게 전개되어 있다.

16) 사실, 발달한 자본주의 하에서는 이러한 상태가 일반적일 수밖에 없다.

17) 참고로 말하자면, ‘금본위제 하에서나 불환제 하에서나 상품의 가격은 그 수요ㆍ공급 관계의 변화에 의해서도 상승ㆍ하락하는 것이고, 이러한 변동도 실질적인 상승ㆍ하락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당연하다. 상품 가격의 그러한 변동 역시 실질적인 변동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문제는 ‘물가’, 즉 제 상품 가격들의 총화 혹은 그 평균이고, 따라서 개별 상품(종)들의 수요ㆍ공급에 의한 가격의 상승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 왜냐하면, 개별 상품(종)들의 수요ㆍ공급에 의한 가격의 상승과 하락은 ‘물가’, 즉 제 상품 가격들의 총화 혹은 그 평균 속에서는 서로 상쇄되기 때문이다.

18) 그리고, 한 세기 즉 약 100년간에 걸쳐 물가가 약 4배(!)나 올라 ‘가격혁명’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연평균 상승률로 치면 그것은 ‘불과’ 1.396%[ ×100]도 되지 않는[!] 상승률이다. 연평균 두 자리 수의, 그것도 수십 퍼센트의 물가상승률, 그런 것들은 금본위제 하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즉, 물가의 그러한 고율의 실질적 상승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19) 진실의 편린(片鱗)을 포함하지 않은 거짓말은 대중을 현혹할 수 없다!

20) 저들의 그 싸구려 ‘국독자 영구번영론’에 대한 간단한 비판은, 채만수, ≪노동자 교양경제학≫(제6판), 노사과연, 2013, pp. 393 이하 참조.; 참고로 말하자면, 당시 논쟁에 참가해서 “소공황” 운운하셨던 정태인 박사님을 위시한 ‘진보적 경제학자님들’께서 오늘날 칼 폴라니니, 토마스 피케티니 하는 소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을 부여잡고, 죽음의 병에 신음하는 이 자본주의를 구원하려 발버둥치고 계시는 것도, ≪한겨레≫가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움직이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 ‘국독자 영구번영론’적 신념의 반영이요 존경할 만한 실천이다! (물론 장사도 되기 때문이고!)

21) 채만수, “새로운 대공황과 그 역사적 의의”, ≪노동사회과학 제1호. 공황과 사회주의≫, 2008. 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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