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마당] 자본주의는 이상한 게 정상이다. 그러니까 정상적으로 이상하다

 

류홍석 | 회원

 

 

아래는 김형균 동지의 “4월 총선과 노동자계급의 태도”(≪정세와 노동≫ 제199호(2024년 2월))의 첫 문단이다.

 

세계 자본주의는 1970년대 대공황 이후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축적 전략, 금융자본의 세계적 약탈이 판치는 카지노 자본주의로 연명해 왔다. 그러나 써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가 터지면서 본격화되었던 2007년 공황 이후 금융자본을 중심으로 한 세계적 약탈경제 씨스템은 직격탄을 맞았다. 이후 미국을 비롯한 각국은 양적 완화 등 땜질 처방으로 버텨 왔으나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 세계 정세는 생산력과 생산ㆍ소유관계 간의 모순을 극복하기 힘든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해당 글 전편은 장중한 내용과 짧은 분량이 눈에 띈다. 즉 길게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객관적 정세를 짚는 이 글의 첫 문단으로서 위의 내용은 다소 부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격에 있어서는 자본 운동과 정치 지형의 거대한 변화를 조망하는 도입으로서 그 내용의 규모에 어울리는 것이리라.

 

1970년대의 대공황은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가. 1970년대는 너무도 긴 시기이다. 이것은 넘어갈 수 있다. 그 공황의 원인이나 추이 등을 적기에는 공간이 부족하고 본 글의 주 대상도 아니다. 혹은 1960년대 말의 공황을 지칭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1968년경의 공황이 깔끔하게 끝나지 못한 것은 노동계급이 계급투쟁에서 아직은 패배하지 않았다는 것,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 아직은 지리멸렬하지 않았다는 것에 부분적인 이유가 있다. 어쨌든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나 잇달은 석유파동은 확실히 1970년대를 대공황의 시기로 이해할 충분한 현상들을 제공하고 있다.

 

여하튼 그리하여 신자유주의 축적 전략이 이전의 것과 다른 새로운 무엇으로 추구되었는데, 이것이 ‘금융자본의 세계적 약탈이 판치는’, ‘카지노 자본주의’이다. 축적은 착취에 기반한 것이므로 약탈과는 관련이 없다. 신자유주의적 축적 전략이라면 이전의 ‘케인즈주의적 축적 전략’과의 차별성과 연속성이 있을 게다. 착취라는 점에서 동일하고 그 착취를 용이하게 하는 방법에 있어서 차이를 가질 것이다.

 

그런데 그 차별성이 금융적 약탈이라면, 또는 그 세계적 수준이라면, 차별성의 구체적 내용은 ‘금융적’에 있는가, ‘약탈’에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세계적’ 수준에 있는가? 혹은 세 가지 모두에 대해 해당하는가? 답이 무엇이든 핵심은 ‘약탈’일 것인데, 이 약탈의 대상이 무엇인지가 중요할 것이다. 만약 이것이 (통화를 포함한) 자본상품에 대한 투기적 거래가 커지고 만연하게 된 것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이는 자본들 사이의 문제, 즉 자본 집중의 일환이라고 말하고 싶다. 투기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자본의 이전투구는 우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투기의 광범위한 확장으로 인한 화폐영역에서 기인하는 경제 전체의 불안정성의 증대와 순수한 금융공황의 현실성이 더욱 높아지는 것 등이 있겠지만 그게 도대체 무슨 문제가 된단 말인가? 그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도 없고 통제할 필요도 없는 자본 간 운동일 뿐이다. 착취 체제의 안정성을 위해 자본 간 치킨 게임을 거두라는 것이 우리의 선전 문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제는 오직 ‘론스타 먹튀 논란’과 같은 구체적 대상에 대해서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왜 자본 간 경쟁이 생산영역 밖에서 이렇게 거칠고 공격적인 방식으로 확전되었는가에 대한 분석은 앞서 언급된 1970년대의 공황과 새로운 축적 전략으로의 전환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각설.

 

써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는 약탈 씨스템을 붕괴시켰는가? 아니다. 지금도 소위 ‘세계적 금융 약탈’은 지속되고 있다. 우선, 논리적으로 보면 약탈 씨스템으로 전환한 위에서 발생한 사태이므로 이 사건은 약탈 씨스템의 특정 계기가 문제가 되어서 발생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써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는 약탈 씨스템에서 연원한 것이 아니다. 주택의 과잉 생산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주택담보대출의 무리한 확대, 그 확대의 폭을 넓히기 위한 낮은 금리, 그리고 대출의 영속적 확대를 위한 주담대의 채권화.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잘 맞물려 돌아가려면, 빚을 내서 집을 산 사람들이 이자를 지불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수입이 있어야 한다. 이자율이 조금만 올라도 비틀거리다가 파산하고 마는 이 주택 구매자들은 이미 위축된 재생산 수준에 떨어진 노동계급이다. 이들의 주담대가 “써브”인 이유는 수입이 적어서 빚을 갚지 못할 수도 있는 이들이라는 뜻이지 않은가.

 

이런 취약한 이들에게까지 빚을 지게 해서라도 집을 사게 한 것이 바로 “땜질 처방”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현상들은 모두 이 땜질 처방이지 않은가? 땜질과 땜질 아닌 것 사이에 차이는 없다. 착취율을 올리는 데 양반 쌍놈이 없고 자본주의에 정상적 형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땜질이 아닌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착취율을 높일 수만 있다면 짐승처럼 뜨거운 김을 내뿜으며 달려드는 것이 지고의 자유경쟁이지 않은가. 양적완화, 즉 무제한 돈풀기를 땜질이라고 하는 데는 나름 근거가 있다. 양적완화는 그네들(자본가들과 그 호교론자들)에게 있어서도 이른바 ‘비전통적’인 수단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른바 ‘전통적’ 수단이 뭐 특별할 게 있는가? 브레튼우즈 체제하에서조차도 항상적이던 인플레이션은 현대 자본주의가 인위적인 통화 증발이 없으면 그럭저럭 굴러갈 수 없는 절름발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따라서 통화 증발의 이상성이나, 인위성은 그냥 하는 말이고 인플레이션의 항상성이 보여 주는 바는 실은 현대 자본주의하 통화 증발의 내생성이며 필연성인 것이다.

 

‘약탈’이나 ‘카지노’ 같은 용어를 사용할 때,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런 ‘공정’치 못한 것에 대한 반대로서의 ‘공정’이 바로 착취 체제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생산영역 밖, 유통이나 금융영역에서 일어나는 사취, 수탈을 불의한 것으로 강조할 때, 우리는 어느덧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산업자본의 이데올로기를 왜장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 일확천금이라니, 이런 도둑놈들 하는 식이다. 써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도 산업자본의 확대가 그 문제의 근원이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위기의 전달체가 된 채권화만 악마화하였던 것이다. 정작 그 채권화가 주택산업의 확대를 지지해 주었던 것은 보지 않는다. 만약 써브프라임 모기지론의 상환 중단 ‘문제’가 ‘사태’로 된 것이 채권화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말싸움에서 이길 자신이 없다. 주의해야 한다. 자본 간 투쟁이라는 볼만한 야바위 싸움판 아래, 굳건히 지속되고 강화되는 착취는 시야 밖으로 밀려난다. 그리하여 산업자본의 정의 관념에 기반하여 ‘신자유주의’의 ‘사기성’을 나무라는 것은 이 착취의 현 상태와 전체상을 은폐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땜질 처방이 더 이상은 통하지 않고 한계에 직면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전쟁이라는 새로운 땜질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 족보 없는 열정덩어리인 자본주의에 체면도 도의도 없다. 노동계급이 지금처럼 계속해서 계급투쟁에서 패배하는 한, 자본에 한계는 없다. 마른 수건을 쥐어짜듯이 무슨 미친 짓을 해서라도 착취율을, 착취량을 올리려 한다. 노동계급의 정치적 성장을 위한 자양분, 즉 노동계급의 더욱 비참한 처지는 확고히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임계점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문명의 역사는 수많은 공멸을 보여 주지 않는가. 자본주의라고 예외일 것인가. 다만 우리에게는 운 좋게도 공산주의라는 과학적 이론과 이를 시도한 헌신의 역사가 있지 않은가.

 

김형균 동지의 글 “4월 총선과 노동자계급의 태도”에서 주장하는 거개의 진단과 그 방안에 동의하는 바이다. 이상의 내용들이 그러한 주장에 더욱 힘을 실어 주는 것이기를 바란다. 이 글의 서술이 다소 극단적인 것은 동지의 인식을 왜곡/단면화하여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이 기회에 좀 더 교육적인 측면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므로, 그 의도를 보아 넘어가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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