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마당] 쇼펜하우어의 우울

 

배서현 | 자료회원

 

 

 

작년 한 방송 속 연예인이 읽고 있던 책으로 알려지며 베스트셀러 목록에 여럿이나 이름을 올린 쇼펜하우어 씨는 최근의 상업적 성공이 무색하게도 우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그가 우울한 까닭은 물론, 죽은 지 너무 오래되어 실질적으로 자신의 계좌에 동전 한 닢 입금되지 않는다는 저작권법의 문제도 한몫하고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평생을 경멸했던 대중들이 자신의 작업을 세속적으로 그리고 또 너무나도 가볍게 소비하는 현실에 있다. 설령 쇼펜하우어 씨가 실제론 현재의 상황에 즐거워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러한 모습을 내보이는 것이 현명한 철학자란 상업적 이미지에 치명적인 손상을 줄 것이라는 점을 잘 파악하고 있기에, 어찌 되었건 쇼펜하우어 씨는 공식적으로 우울함을 표명하는 길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은 19세기 철학자의 마음이 아니니 쇼펜하우어 씨는 우울한 채로 머물게 두자.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은 대체 왜 지금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이 정도로 유행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누군가는 지금은 유행이 지나간 다른 유행들처럼 한때의 모습일 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사실 그렇게 주장하는 것도 나름 타당한 면을 지니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반복적으로 단순히 유명인이 보거나 추천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가를 점령했던 책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텍스트는 읽히기 위해서 언제나 텍스트의 밖에 존재하는 사회를 필요로 하고, 바로 이 비텍스트적 맥락에 의해 다르게 읽힌다는 다분히 고전적인 견해에 기대어, 우선 우리 사회의 두 흐름을 먼저 살핀 후, 다시 쇼펜하우어로 돌아가고자 한다.

 

 

‘나’라는 종교

 

정확한 시기를 기억할 수는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나’ 되기에 열광해 왔다. ‘나’를 향한 우리의 태도와 이해는 종교가 아니고서야 겨뤄 볼 대상이 없다. 이런 면에서 ‘나’는 진실로 우리 시대의 유일신 신앙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 혹은 ‘나답게(다운)’, ‘나를 찾아서’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이야기들에는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들이 존재한다.

우선 바로 여기에 있는 나에 대한 해명 문제가 있다. 소박하다면 소박한 생각이겠으나 개인적으로 나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 이외에 다른 또 무언가의 내가 어디에 존재한다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우리 사회의 ‘나’ 이야기들은 여기에 지금 존재하는 나와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알지 못하는/찾지 못하는 ‘나’가 분리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렇게 나와 ‘나’의 분리가 현재의 내가 겪고 있는 불안, 분노, 우울, 절망 등등 심리적 문제 혹은 그 이상의 현실적 문제의 원인이라 진단한다. 따라서 이야기들의 해법은 언제나 한결같다. 그것은 바로 ‘나’를 찾아 떠나는 것이다. ‘나’를 찾는 길은 다양한데, 전통적으로는 낯섦과 고됨을 표방했고, 현대적 유행은 가볍고 가능한 즐거움, 쾌락을 표방한다. 전자에 가까울수록 종교적 ―비록 종교적이란 말을 거부하지만― 색채가 진해지고, 후자에 가까울수록 부드러운 색채의 상업광고풍이 되어 가지만, 이러한 상호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길은 같은 종착점으로 향한다. 나에서 벗어나 ‘나’가 되고 일체의 부정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한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얼핏 보기에는 나라는 존재와 ‘나’로 거듭나는 것 그 자체로 충분한 보상이라 주장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수많은 ‘나’ 이야기들을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축소되고 어디에 있는지 모를 ‘나’는 커져만 간다. ‘나’가 선사하는 즐거움과 행복, 자유로움에 대한 서술에 반비례하여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는 점차로 알 수 없는 것이 되어만 간다. 결과적으로 ‘나’가 되어야 한다/‘나’가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겠다는 이야기들은 여기 존재하는 나에 대한 해명은 공백으로 남겨 둔 채로 ‘나’에 대한 환상적인 묘사를 통해 우회할 뿐이다. 여기서 단순한 의문이 생긴다. ‘나’가 그토록 행복하고 모든 것을 해결한 그 무언가로 떠받들어질수록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단지 덜 ‘나’다운, ‘나’ 되지 못한 그 무언가로 추락하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이 존재할까?

다음으로 감정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언제나 개인의 책임을 과도하게 강조한다는 점이다. 과학이라고는 상식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단순한 머리로 생각하기엔 감정은 언제나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보인다. 외부의 어떠한 자극이 먼저 존재한 뒤에야 그에 대한 반응으로써 감정이 작용한다 믿는다. 다만 외부의 무엇이 자극으로 작용하고 있는지의 상이함과 동일한 자극에 대한 반응의 크기에 다름이 있을 뿐이다. 물론 흔히 우리가 사회성이라 부르곤 하는, 사회의 특정한 방식에 감응하여 각 개인은 동일한 감정을 느끼고도 표현하거나 수긍하는 정도에 차이를 만들 수 있음을 빼놓을 수는 없다. 다만 ‘나’ 이야기들 속에서는 외부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외부―그것이 사회이건 타인이건―는 변화시킬 수 없는 불변의 무언가인 것처럼 여기는 듯 군다. 결국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나 외에 다른 것이 없는 ‘나’ 이야기들은 언제나 내가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것이 위에서 먼저 짚은 환상적인 ‘나’와 나의 분리와 합쳐지며 기이한 광경이 펼쳐진다.

‘내가 비록 스트레스와 피로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나’께선 나와 멀리 떨어져 계시고, ‘나’의 행복과 현명함으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힘듦만이 존재합니다.’

마지막으로 아주 사소한 문제가 있다. ‘나’ 그 자체에 대한 설명의 부재다. 자칫 치명적일 수도 있는 이 문제가 사소한 것이 되는 것은 설명의 부재 덕이다. ‘나’가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이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너무나 쉽게, 실존하는 우리 사회가 말을 대신하여 명확하게 그것이 무엇인지 보여 준다.

 

 

여행이 나를 자유롭게 하리라

 

오랫동안 여행만큼 자유나 혹은 자아와 함께 붙어 다닌 단어는 없다. 자본주의 발전으로 증가한 중간계급과 기술 발전에 힘입은 정보 접근성의 개선을 토양 삼아 자라난 자유 여행의 등장 이후 더더욱 여행은 자유나 나다움 같은 개념들과 밀접해졌다.

확실히 자유 여행은 이전 시기를 상징하던 패키지 여행과는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여 준다. 권위 있는 전문가들에 의해 꼭 보아야 하는 것, 꼭 가 보아야 하는 곳 등을 비교적 대규모의 인원이 한두 명의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압축적으로 소화해 내기 바빴던 것과 다르게, 자유 여행은 여유로움과 낭만, 자유로움의 이미지로 넘쳐난다. 물론 패키지 여행을 상징하는 다소 촌스럽기까지 한 원색 등산복들과도 이별했다는 점도 놓쳐선 안 될 중요한 차이점이다. 그렇지만 단순히 이러한 표면적 차이만으로 자유 여행과 패키지 여행이 구별되진 못한다.

자유 여행을 진정 자유 여행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노동으로부터의 탈출과 순수한 소비다. 최근 범람하는 각양각색의 여행 유튜버들의 영상은 이를 뒷받침한다. 잠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려도 직장으로, 학교로 가지 않아도 될 때에, 그들은 자유롭다 말한다.

여행자인 그들은 단순히 소비만을 하기에 자신들이 어느 곳에 놓여 있건 그 어떠한 사회적 관계도 맺지 않는다. 여행 중에 만나는 인간관계가 언제나 유쾌하고 즐거운 까닭은, 그들이 여행지에선 모든 사회적 관계의 속박에서 벗어나 있기에 한없이 가볍기도 하고, 따라서 책임을 질 것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베를린을 걷는 여행자는 베를린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 또 그럴 용의조차 없다. 그에게는 오직 자신이 베를린을 ‘여행’하고 있다는 감각만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행자는 사뭇 다른 외모의 노점상에게서 케밥을 사 먹더라도 단순히 유쾌할 수 있다. 설령 여행자가 독일 사회에 대해 들어 본 바 있어 사회적 맥락 속으로 불가피하게 연루되더라도 모국의 여권이 그에게 제공해 주는 안전함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여행자의 모국이 강대하면 강대할수록 여행자가 제공받는 안전과 편안함이 배가 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러한 여행자의 태도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우리는 이미 우리 사회 속에서 상류층, 잘사는 집, 건물주 등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이런 모습들을 접해 본 경험이 많기 때문이다. 노동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이들의 삶. 여기에서 정말로 그들이 정확히 똑같이 자유로운지의 여부는 부차적이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에서 그려 내는 그들의 삶의 양식이, 자유로운 삶, 나다운 삶으로 여행지에서 재현되고 있음은 사실이다.

오늘날 여행은 소비만으로 이루어진 삶을 한시적으로 제공한다. 여행에 붙어 있는 수식어와 무관하게, 오늘날의 여행은 탈출,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여행은 모국의 연장에 가깝다. 모국에서 이룰 수 없는 계급 생활을 일시적으로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다. 여행자가 속한 모국의 경제가 부강하면 부강할수록 여행자가 누리는 일시적 계급 상승의 경험은 극적이게 된다. 따라서 여행자들은 언제나 대한민국에 감사를! 하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정신 분열

 

쇼펜하우어의 유행은 진공 상태에서 생겨나지 않았다. 자본주의적 소비가 자유와 동치된 사회에서 쇼펜하우어는 유행하고 있다. 쇼펜하우어의 유행은 일면 우리 사회의 개인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강도를 보여 준다. 한때의 자본시장 호황기가 지나간 이후 이전보다 더욱 강도 높게 시장의 압력 속에서 짓눌린 개인들의 비명이다. 이전 시기 소소한 소비로 취향을 만들고 상품을 고르는 특별한 감각을 기르며 아직 이 세상에서 내가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었던 ‘시민들’이 이젠 불황 속에서 무력하게 추락하고 있다. 여유가 없어진 시민들이 이젠 필사적으로 ‘나는 나야, 나는 나야, 나는 나야’ 하고 되뇌며 위안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확실히 이런 점에선 위안을 줄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의 장점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문제와 이로부터 기인하는 고통을 인정하면서도 문제를 해결하지 않아도 되는 논리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은 ―심지어 우주마저― 내 의지의 확장일 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기이할 정도로 현실에 무심하고, 극히 무능하면서도 대단히 자신감에 차 있는 개인의 삶을 쇼펜하우어 철학은 제공해 준다. 비록 슬프게도 우리 시대의 천박함은 저 고고한 쇼펜하우어 씨마저 상품 포장지 외엔 아무것도 아닌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지만 말이다.

쇼펜하우어 본인이 그리했던 것처럼 자본소득만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이들을 제외하고, 우리네 평범한 회사원들이 노동자들이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충실히 따른다면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정확한 날짜를 우리가 여기에서 알 길이 없다는 한계가 있지만, 정신과 초진 예약이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날로 쪼그라드는 생계와 강도가 높아져만 가는 일터에서의 스트레스에도 의연히 바이올린을 켜기 위해선, 정신 분열, 돌이킬 수 없이 중증인 정신 분열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자본과 이를 추종하는 시민계급은 우리 시대의 해결책이 바뀌었다 선포하고 있다. 이제 자본주의의 인간 학대가 가한 상처가 힐링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현실과 극도로 유리된 정신 분열을 통해 자본의 무자비한 폭력을 없는 셈 치며, 이전보다 더 잔인하고 거리낌 없는 자본주의의 야만이 이전보다 더 많은 인간을 연료 삼아 문제를 해결할 것임을, 쇼펜하우어의 입을 빌려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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