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신년사를 대신하여] 극반동화 시대 선진노동자들의 역할

 

채만수 | 소장

 

 

I

 

으레 이 사회의 현대 진서(眞書)인 AI라고 표기되는 ‘인공지능’을 위시하여, 매일이다시피 언론을 장식하고 있는, 과학ㆍ기술들의 가히 혁명적인 개발ㆍ발전에 관한 소식들을 듣고, 보고 있노라면, 내일에라도 인류는 그 과학ㆍ기술들이 보장하는 천년지복(千年至福)의 세상에 들 것만 같습니다. 아니, 사실은 그러한 뉘우스들이 쏟아지기 시작한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니, ― 글쎄, 무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런데 현실의 삶의 장(場)으로 눈길을 돌리면 어떻습니까?

대개의 노동자ㆍ인민대중에게는, 천년지복(千年至福)의 세상이 아니라, 실업과 빈곤의, 그리고 산재 사망자가 년간 2천수백 명에 이르는 천년지옥(千年地獄)의 세상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결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에게는 자살지복(自殺至福)의 세상이기도 하고요. 비근하게, 세계 10대 경제부국인가가 되었다고 뻐기는 이 사회를 예로 들자면, 딴 건 다 그만두고, 2020년부터 2022년까지 3년간 전 세계가 요란했던 저 역병(진서로는 pandemic),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32,156명)보다 자살자(39,453명)가 더 많았다지[1]그러나 어디 자살뿐입니까? 소위 ‘고독사’ 등등, 알게 모르게 죽어 가는 죽음들은? 그리고 만연한 범죄는? ― 이 모두 사실상 가난 때문, 혹은 … Continue reading 않습니까? 이렇게 만연한 자살은, 인구 대비 자살률에서는 나라마다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이 시대 자본주의 국가들 일반에서의 현상입니다. 물론 세계 최대 부국(富國)이라는 미국도 결코 예외가 아닙니다. 예컨대, 2022년 한 해 “미국인 자살자 수는 4만9천449명으로 잠정 집계됐다”[2]강진욱 기자, “미국 지난해 자살자 4만9천명 … 역대 최다 기록”, ≪연합뉴스≫, 2023. 8. 11. <https://www.yna.co.kr/view/AKR20230811102500009>고 보도되고 있으니까요. 인구 대비 자살률(10만 명당 14.9명)에서는 한국(2022년도, 10만 명당 25.2명)보다야 훨씬 낮지만, 결코 적은 수가 아닙니다.[3]게다가, 미국에서는 ‘COVID-19’로 인해, 공표된 숫자만도, 120만 명가량이나 죽었습니다! ― 이들의 죽음이 과연 미국 사회의 극심한 경제적ㆍ사회적 … Continue reading

이들 자살자 모두는, 혁명적으로 발전하는 과학ㆍ기술 즉 혁명적으로 발전하는 노동생산력이 천년지복(千年至福)을 보장할 것 같은 시대에, “실업과 빈곤의 천년지옥(千年地獄)보다는 차라리 자살지복(自殺至福)을 선택한 것”이라고 하면, 과연 어폐일까요?

 

 

II

 

그런데 과학ㆍ기술 혁명 시대의 자본주의가 저지르고 있는 인명 살상은 물론 여기에 머물고 있지 않습니다. 우끄라이나 전쟁, 팔레스타인에서의 이스라엘에 의한 대량학살 혹은 ‘인종청소’, 수단ㆍ리비아ㆍ이디오피아ㆍ콩고 등등 사헬지역 및 미얀마(버마) 등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들,[4]이들 내전은, 계급 간의 전쟁이 아니라, 노동자ㆍ인민으로부터 착취한 일종의 ‘전리품’의 분배를 둘러싼 착취ㆍ지배계급 내 분파들 간의 … Continue reading 기타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전쟁, 테러들 ― 이 모두도 그러한 살상이니까요.

특히 우끄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제국주의 전쟁과 관련해서는, 미제와 유럽연합 등 전통적인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을 대리하여 전쟁을 벌이고 있는 우끄라이나와, 제국주의 러시아는, 주지하는 바처럼, 쏘련이 붕괴ㆍ해체되어 그들 지역에 자본주의가 복구되기 전에는 우애로운 형제국가들이었음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 전쟁, 학살, 내전이 다가 아닙니다. 자본주의ㆍ제국주의 국제정세는 지금 제3차 대전을 향해서, 즉 인류의 사실상의 절멸을 향해서 줄달음치고 있으니까요.

우선, 우끄라이나 전쟁이나 이스라엘ㆍ중동ㆍ아프리카에서의 사태가, 그리고 동아시아에서의 미국과 중국의 대립과 갈등, 미ㆍ일ㆍ한의 조선에 대한 진하디진한 적대와 그로 인한 미ㆍ일ㆍ한과 조선(조ㆍ중ㆍ러) 간의 적대적 긴장이, 물론 당장 그 가능성이 높진 않지만, 제3차 대전으로 비화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만도 없지 않습니까? 사실은 조선의 그것을 포함해서, 인류를 절멸시키고도 남을 수천ㆍ수만 발의 대량의 핵무기가 제3차 대전의 현실화를 막고 있는 형국이지만, 언제 어떤 계기에, 시쳇말로 어떤 또라이가 나타나 무책임하고 파국적인 불장난을 벌일지 모를 일 아닙니까?

따라서, 오늘날 제3차 대전을 향해서, 즉 인류의 사실상의 절멸을 향해서 줄달음치고 있는 국제정세와 관련해서, 이미 가시화되어 있는 저들 전쟁ㆍ대립ㆍ갈등을 예의 주시하며, 저들 전쟁과 대립ㆍ긴장을, 그리고 제국주의의 전쟁 책동을 규탄해야 하고, 반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주목해야 할 것은, 자본주의ㆍ제국주의 주요 국가들에서 최근 급격히 전개되고 있는 정치의 극우ㆍ극반동화, 즉 오늘날 짐짓 ‘우익 포퓰리즘’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신(新)파쑈ㆍ신나찌의 급격한 득세입니다. 사회주의ㆍ인민민주주의의 해체와 자본주의 체제의 복원으로 인해 동유럽 국가들에서 신파쑈ㆍ신나찌 세력이 발호한 지 이미 오래거니와, 특히, 제2차 대전 후 대체로 비파쑈ㆍ반나찌 민주주의적이었던 서유럽 및 북유럽 국가들에서도 신파쑈ㆍ신나찌 정당들이 속속 등장하여 이미 집권했거나 집권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 최근의 추세이기 때문입니다.

저들 국가들이 대체로 비파쑈ㆍ반나찌 민주주의적이었던 주요 배경 혹은 이유는, 우선 무엇보다도, 노동자ㆍ인민대중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내닫지 않도록,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국가들과 비교되는 것을 전적으로는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해체된 지도 이미 오래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파쑈ㆍ나찌가 도발한 제2차 대전의 충격ㆍ피해ㆍ교훈 때문이었는데, 이 역시 시간에 바래 사실상 역사로서만 남아 있고, 머리속의 기억으로만 가물거릴 뿐, 그 실감이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파쑈화ㆍ나찌화의 동인(動因), 그 강력한 동인으로서의 만성적 과잉생산ㆍ공황, 그리고 재생산과정 전반을 사실상 자동화ㆍ무인화해 가고 있는 혁명적 과학ㆍ기술의 자본주의적 이용 및 그에 따른 노동자ㆍ인민대중의 실업과 빈곤의 고통의 심화뿐입니다.

 

 

III

 

만성적 과잉생산과 만성적 공황은 으레 그럴 수밖에 없지만, 특히 2008년 이래 지속되고 있는 그것은 독점자본들 간의 경쟁을 격화시키면서 재생산과정 전반을 자동화ㆍ무인화하는 과학ㆍ기술 혁명을 가속화하고 있고, 그 성과가 다시 만성적 과잉생산과 만성적 공황을, 따라서 독점자본들 간 경쟁을 격화시키고 있습니다. 일종의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데, 이는 동시에 갈수록 많은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던져지고 무수한 자영업자들과 중ㆍ소ㆍ영세자본들이 파산하면서 노동자ㆍ인민대중의 삶이 파괴되어 실업과 빈곤의 고통이 갈수록 심화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에 자연히 노동자ㆍ인민대중은, 한편으로는 절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저항하게 되고, 그러면서 무언가 ‘대안’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때 온갖 경세 방략가들이 인민을 구하고, 국민을 구하고, 국가를 구하겠다며 떠들고 나섭니다. 그런데 이때, ‘자유민주주의’ 대한미국 등에서와 같은 파쑈적 억압 때문이든, 특히 서유럽이나 북유럽에서와 같은 자본의 포섭전략 때문이든, 혹은 자본의 강력한 이데올로기 조작ㆍ지배 때문이든, 노동자계급의 명실상부한 혁명적 정치참모부, 혁명적 정당이 존재하지 못할 경우, 그리하여 혁명적이고 과학적인 사상ㆍ이론으로 무장한 선진노동자들이 헌신적 활동을 통해 노동자ㆍ인민대중의 광범한 지지를 받으며 그들의 저항을 지도하지 못하는 경우, ‘좌ㆍ우익’ 포퓰리즘이 노동자ㆍ인민대중을 사로잡습니다. 음으로 양으로 부르주아 언론의, 따라서 독점부르주아지의 지원을 받아 이런저런 화려한 언변과 기만적ㆍ환상적 경세 방략으로 노동자ㆍ인민대중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자본주의ㆍ제국주의 주요 국가들에서의 상황이 그러한 것처럼!

‘좌ㆍ우익’ 포퓰리즘? ―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때 포퓰리즘을 우리에게 익숙한 통상적인 부르주아 정치 관행 혹은 노선과는 그 성격이 현저히 다른 어떤 것으로, 그리고 특히 ‘좌익’ 포퓰리즘을 그러한 어떤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선, 부르주아 언론과 부르주아ㆍ소부르주아 논객들은, 짐짓 혹은 무지 때문에, 통상적인 부르주아 정치 관행을 무언가 과학적이고 냉정한, 말하자면, 정도적(正道的)인 것으로 전제하고, (좌ㆍ우로의) 그로부터의 일탈을 (‘좌ㆍ우익’) 포퓰리즘, 즉 (‘좌ㆍ우’) 대중영합주의라고 부르며 ‘비판’하지만, 사실은 통상적인 부르주아 정치 관행 그 자체가 포퓰리즘, 즉 기만적인 대중영합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좌ㆍ우익’) 포퓰리즘이라고 불리는 정치 조류들은, 저들에 의해서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ㆍ선전되는, 그리하여 ‘포퓰리즘’으로 불리지 않는 그 주류 포퓰리즘을 기껏해야 (좌 혹은 우측으로) 약간 일탈한 흐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부르주아 정치는 부르주아지의 지배, 현대에는 독점부르주아지의 지배여서, 통상적인 부르주아 정치 노선과 관행 그것은, 나라에 따라 사소한 차이는 있지만, 대립적인 제반 계급의 이해관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심히 우측으로 치우친 포퓰리즘입니다. 따라서 ‘좌익’ 포퓰리즘이라고 해 봤자, 사실 그것은 우측으로 크게 치우친 포퓰리즘이어서, 노동자ㆍ인민대중의 이익과는 무관한, 아니 대립적인 정치 노선일 뿐입니다. 소위 ‘좌익’ 포퓰리즘에 어떤 환상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남ㆍ북 아메리카와 유럽에서 득세하며 권력을 장악해 가고 있는 ‘우익’ 포퓰리즘이 극우 부르주아 정치 노선이며, 극반동임은 새삼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러한 성격의, 소위 ‘좌익’ 포퓰리즘 정당들과 ‘우익’ 포퓰리즘 정당들이 오늘날 근래, 그리고 특히 최근에 여러 나라에서 국가권력을 장악해 왔고, 또 장악해 가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물론,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전반적 위기에 처한 독점자본주의의 만성적 과잉, 만성적 공황에 따른 노동자ㆍ인민대중의 실업ㆍ빈곤의 격화 때문이지만, 동시에 다분히 부르주아 언론의 음양의, 이런저런 지원에 의해서입니다.

그런데, 부르주아 언론의 음양의, 이런저런 지원을 받아 집권에는, 즉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에는 성공할 수 있고, 또 성공하고 있지만, 저들 ‘좌ㆍ우익’ 포퓰리즘 정권이 실업과 빈곤의 고통으로부터 노동자ㆍ인민을 구제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더 혹독한 도탄(塗炭)에 빠뜨릴 뿐입니다. 사실 이는 이미 수많은 사례들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입증되었고, 현재에도, 예컨대,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나 붸네수엘라 연합사회당(PSUV)의 소위 ‘21세기 사회주의’를 통해서, 절절히 입증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노동자ㆍ인민대중을 도탄에서 구제하기 위한 천하의 비책들이라도 가진 듯이 떠들어 대는 저들은, 사실은, 자신들이 자신들의 객관적 역할을 의식하고 있든 아니든, 독점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집단일 뿐이며, 자본주의적 생산의 구조와 운동법칙에 대해서는, 따라서 노동자ㆍ인민대중의 실업과 빈곤의 원인에 대해서는 어떤 과학적 이해(理解)도 없는, 정치적 야바위 집단들이기 때문입니다. 극우적 우익 포퓰리스트들, 그들의 정당들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진보’를 표방하는 ‘좌익’ 포퓰리스트들, 그들의 정당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르주아 언론과 논객들은 본능적으로 이를 알고 있고, 그 때문에, 주로 시끄럽게 ‘비판’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집권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ㆍ인민대중이 저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는, 맑스와 엥엘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그리고 특히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명확히 하고 있는 것처럼,[5]“어느 시대에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이다. … 물질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계급은 그것으로 동시에 정신적 … Continue reading 어느 시대에나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인 데다가, 특히 현시대에는 ‘언론’이라는 이름의,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 지배ㆍ조작 기구가 엄청나게 발달해 있어서 저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는 것이 더욱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와도 연관되어, 방금 말씀드린 시끄러운 ‘비판’을 포함한, 부르주아 언론의 이런저런 방식의 도움으로 저들 포퓰리스트들의 헛소리들이 요란하게 기세를 떨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노동자ㆍ인민대중에게 저들 좌ㆍ우익 포퓰리스트들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 저들이 장담하며 떠들어 대는 것들은 사실은 모두 기만적이고 환상적인 헛소리들이어서 노동자ㆍ인민대중을 실업과 빈곤의 고통으로부터 구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고통을 더욱 격화시킬 뿐이며, 저들의 객관적 역할은, 그들의 주관적 의도가 어떻든, 독점자본가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노동자ㆍ인민대중에게 폭로하는 것은 고스란히 이 시대 선진노동자들의 몫으로, 그리고 의무로 되어 있습니다. 선진노동자들이 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물론 선진노동자들 자신이 먼저 그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상은, 꽤 장황하게 얘기했지만, 사실은, 최근 급속도로 극반동화하고 있는 세계적 규모의 정치 상황을 간략히 요약한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상황 역시 결코 예외가 아닐 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의 정치 상황 일반, 특히 이른바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와 관련하여, ―누가 뭐라고 하든― ‘진보정치’로 포장되어 있는 ‘좌익’ 포퓰리즘의 반동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비판, 그리고 비판적 실천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선진노동자들의 그것이 절실히 중요합니다.

 

 

IV

 

혹시, “‘진보정치’로 포장되어 있는 ‘좌익’ 포퓰리즘의 반동성”이라는 규정에 쉽사리 동의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우선 우리 사회에서의 ‘진보정치’가 객관적으로 어떤 사상ㆍ이론적, 계급적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비근하게, 총선을 앞두고 이른바 진보진영에서 ‘진보정치’ 혹은 ‘진보정치연합’ 등이 꽤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인데, 그들은 대표적으로 노동자ㆍ인민대중의 빈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겠다고 주장합니까? 아니,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까?

논의에 참가하고 있는 ‘진보적’ 인사ㆍ단체ㆍ정당들 중에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직접적 관심조차 그다지 보여 주지 않는 인사ㆍ조직들도 있지만,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것을 분배의 불평등을 해소함으로써 해결하겠다는 것이 대체로 저들의 기본 노선 아닙니까? 저들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예컨대, “분배정의”를, 혹은 “경제민주화”를 실현함으로써! 혹은 “기본소득제도”를 도입함으로써! ― 모두 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따라서 사회적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온존시킨 채 노동자ㆍ인민대중의 실업ㆍ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그리고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ㆍ노선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두 다 그야말로 진하디진한 선의(!)에서 나오는 주장들이지요.

그런데, 우리 연구소에서 자주 강조하는 그것이지만,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격언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과학은 근 150년이나 전에 이미 이렇게 비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른바 분배란 것으로 법석을 떨고 그것에 중점을 두는 것은 무릇 잘못된 것이었다.

소비수단들의 그때그때의 분배는 단지 생산조건들 자체의 분배의 귀결일 뿐이다. 그러나 생산조건들의 분배는 생산양식 자체의 특성이다. 예컨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물적 생산조건들은 자본소유 및 토지소유라는 형태로 비(非)노동자들에게 배속되어 있는 반면에, 대중은 단지 인적 생산조건, 즉 노동력의 소유자라는 사실에 의거해 있다. 생산의 요소들이 그렇게 분배되어 있으면, 그 결과로 소비수단들의 오늘날의 분배 또한 발생한다. 물적 생산수단들이 노동자들 자신의 조합적 소유이면, 그 결과로 소비수단들의 오늘날과는 다른 분배 또한 발생한다. 속류 사회주의(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다시 물려받아, 민주주의자들의 일부)는 분배를 생산양식과 무관하게 고찰취급하는 것을, 그리하여 사회주의를 주로 분배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것을 부르주아 경제학자들로부터 물려받아 왔다. 진정한 관계가 오래전에 명백해졌는데, 도대체 왜 되돌아간단 말인가?[6]K. 맑스, “고타강령 비판”(1875), MEW, Bd. 19, S. 22. (채만수 역, “고타강령 비판”, ≪공산당 선언≫(의 부록), 노사과연, 2022, pp. 148-149.) (강조는 인용자.)

 

그렇습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따라서 사회적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온존시킨 채 노동자ㆍ인민대중의 실업ㆍ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그리고 해결할 수 있다는 저들의 주장ㆍ노선은 기껏해야 “분배를 생산양식과 무관하게 고찰ㆍ취급하는”, “그리하여 사회주의를 주로 분배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속류 사회주의”이고, (소)부르주아 지식인들의 전적으로 비과학적인 주장ㆍ노선입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주장과 노선, 그러한 정치조직들이 노는 객관적인 역할은 기만적인 언사로 노동자ㆍ인민대중을 농락함으로써 독점자본의 지배를 연장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비과학성에 의해 규정되는 저들의 필연적 실패, 즉 저들의 제반 정책에 의한 노동자ㆍ인민대중의 빈곤의 악화는, 서유럽의 사민주의에 그러한 것처럼, 저들에게 붙은 ‘좌익(left)’이라는 주문(呪文) 때문에 인민대중에게 좌익 일반의 실패로 투영되고, 또 부르주아 언론에 의해서 좌익 일반의 필연적 실패로 선전됩니다. ―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에서의 정치 상황 일반, 특히 이른바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와 관련하여, ―누가 뭐라고 하든― ‘진보정치’로 포장되어 있는 ‘좌익’ 포퓰리즘의 반동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비판, 그리고 비판적 실천이 매우 중요하다고, 특히 선진노동자들의 그것이 절실히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사회에서의 저 ‘진보정치’, ‘진보정치연합’ 등의 성격과 역할이 그러한데도 민주노총조차 그 논의와 실천에 사실상 무비판적으로, 그것도 적극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의 이른바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 논의를 간단하게나마 냉정하게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동자계급의 혁명세력화’가 아닌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 ― 그 표현 자체가 기회주의적이지만, ‘자유민주주의’적 국가보안법의 탓으로 돌립시다.

하지만, 그 기회주의적 표현의 탓도 있어,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주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모색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인 것은, 혹은 그렇게 보이는 것은 결코 적지 않은 문제입니다.[7]물론 형식적으로는 ‘국승 21’이라든가, ‘민주노동당’ 등등 ‘정당’을 앞세워 선거에 참여했고, 4월의 총선을 앞두고도 ‘… 연합정당’ 등 … Continue reading 물론 ‘전위조직’, ‘전위정당’에 대한 논의ㆍ주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과연 얼마나 힘과 의지, 실천이 실린 주장ㆍ논의인지는 사실 의문입니다.

아무튼, ‘노동자계급의 혁명세력화’든,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든,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일반적으로 말해서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그것을 생각하고 모색해서 그것이 실현될 수 있겠습니까?

저의 소견으로는 결코 실현될 수 없습니다. 노동조합은 어디까지나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고 방어하기 위한 조직이어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 혹은 나아가 ‘노동자계급의 혁명세력화’의 토대일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노동자계급의 정치활동의 중심, 하물며 그 혁명적 지도 주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노동자계급은 그 정치적 지도 주체로서의 혁명적 전위정당을 획득해야만 혁명적 정치세력이 됩니다. 그리고 그 전위정당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더구나 우리와 같은 파쑈적 억압 하에서는, 무엇보다도 선진노동자들, 즉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선진분자들의 비상한 노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비상한 노력은, 특히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해체된 이후 패배주의가 팽배하고, 선진노동자들조차 대체로 혁명 전망을 사실상 상실한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그 패배주의를 극복ㆍ청산하고, 혁명적 전망을 재건하는 작업에서부터, 그리하여 사실상 경제주의 일방의 노동운동의 기풍을 타파ㆍ혁신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다잡아 생각하면, 부르주아 사회비(非)과학이 아니라 사회과학에 약간의 식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자본주의는, 과거의 원시공산제나 노예제ㆍ봉건제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즉 경과적(經過的) 사회체제여서 역사의 진전은, 따라서 혁명은 필연적이라는 것은 명확하지 않습니까?

다만, 역사 진전의, 따라서 혁명의 이 필연성은 역사의 운동법칙에서 도출되는 일반적 결론이어서, 오늘날의 특수한 조건을 고려하여 반드시 보완되지 않으면 안 되지만 말입니다.

다름 아니라, 인류를 절멸시키고도 남을 만큼의 핵무기 시대인 데다가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순이 극도로 격화돼 가고 있는 시대이고,[8]거듭되는 얘기지만, 이 글에서 주요하게 주목하고 있는, 자본주의 주요 국가들에서의 정치정세의 극우화, 극반동화도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순이 … Continue reading 그에 따라 제국주의 열강 간의 대립, 그리고 그들의 준동이 극도로 격화되고 있는 시대여서, 현재 인류는 사실상 혁명이냐, 아니면 제3차 대전에 의한 절멸이냐 하는 기로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류가 처한 오늘날의 상황이 바로 이렇게 급박하기 때문에 진지한 학습과 교육, 토론을 통한 과학적 사상ㆍ이론 그리고 혁명 전망의 획득과 대중 속에서의 그것들의 선전ㆍ선동, 즉 대중화라는, 선진노동자들 곧 노동자계급 선진분자들의 역할, 그 임무 수행이 참으로 중차대합니다. 이러한 선전ㆍ선동 활동이 일정하게 발전하게 되면, 그와 함께 자연스럽게 현 단계의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려는, 즉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전위정당을 획득하려는 실천적 노력이 실현 가능성 있는 질과 량으로 태동할 것입니다.

선진노동자 여러분의 각별한 분발을 기대합니다.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그러나 어디 자살뿐입니까? 소위 ‘고독사’ 등등, 알게 모르게 죽어 가는 죽음들은? 그리고 만연한 범죄는? ― 이 모두 사실상 가난 때문, 혹은 적어도 자본주의와 그 심각한 경제적ㆍ사회적 불평등이 조장하는 ‘문화’ 때문 아닙니까?
2 강진욱 기자, “미국 지난해 자살자 4만9천명 … 역대 최다 기록”, ≪연합뉴스≫, 2023. 8. 11. <https://www.yna.co.kr/view/AKR20230811102500009>
3 게다가, 미국에서는 ‘COVID-19’로 인해, 공표된 숫자만도, 120만 명가량이나 죽었습니다! ― 이들의 죽음이 과연 미국 사회의 극심한 경제적ㆍ사회적 불평등, 광범한 빈곤과 무관하겠습니까?
4 이들 내전은, 계급 간의 전쟁이 아니라, 노동자ㆍ인민으로부터 착취한 일종의 ‘전리품’의 분배를 둘러싼 착취ㆍ지배계급 내 분파들 간의 전쟁입니다. 또한 수단 등 사헬지역 국가들에서의 내전은, 이들 지역의 자원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하고 있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기도 합니다.
5 “어느 시대에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이다. … 물질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계급은 그것으로 동시에 정신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그리하여 정신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사상은 동시에 대체로 지배계급의 사상에 종속된다.” (≪독일 이데올로기≫, MEW, Bd. 3, S. 46.; [김대웅 역, ≪독일 이데올로기≫ I, 두레, 1989, pp. 91-92.])
6 K. 맑스, “고타강령 비판”(1875), MEW, Bd. 19, S. 22. (채만수 역, “고타강령 비판”, ≪공산당 선언≫(의 부록), 노사과연, 2022, pp. 148-149.)
7 물론 형식적으로는 ‘국승 21’이라든가, ‘민주노동당’ 등등 ‘정당’을 앞세워 선거에 참여했고, 4월의 총선을 앞두고도 ‘… 연합정당’ 등 그러한 움직임이 일고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로 선거법상의 제약에 의해 동기지워진 것이고, 내용적으로 민주노총을 노동자계급의 정치활동의 중심ㆍ지도 주체로 간주하는 경향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고의 주요한 표현의 하나가 어떤 특정 정당에 대한 민주노총의 소위 ‘배타적 지지’입니다. 그러나 여러 정치적 성향을 지닌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익의 옹호 조직인 노동조합의, 특정 정당에 대한 소위 ‘배타적 지지’는 전혀 실효성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자칫 조합원 간의 갈등을 유발하여 단결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조합의 분열을 조장할 수도 있음을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8 거듭되는 얘기지만, 이 글에서 주요하게 주목하고 있는, 자본주의 주요 국가들에서의 정치정세의 극우화, 극반동화도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순이 극도로 격화되어 있기 때문이고, 더욱 격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채만수 소장

1개의 댓글

  • “그런데, 부르주아 언론의 음양의, 이런저런 지원을 받아 집권에는, 즉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에는 성공할 수 있고, 또 성공하고 있지만, 저들 ‘좌ㆍ우익’ 포퓰리즘 정권이 실업과 빈곤의 고통으로부터 노동자ㆍ인민을 구제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더 혹독한 도탄(塗炭)에 빠뜨릴 뿐입니다. 사실 이는 이미 수많은 사례들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입증되었고, 현재에도, 예컨대,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나 붸네수엘라 연합사회당(PSUV)의 소위 ‘21세기 사회주의’를 통해서, 절절히 입증되고 있습니다.”

    미국에 대한 비판은 없고…

연구소 일정

3월

4월 2024

5월
31
1
2
3
4
5
6
4월 일정

1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3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4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5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6

일정이 없습니다
7
8
9
10
11
12
13
4월 일정

7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8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9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0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1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2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3

일정이 없습니다
14
15
16
17
18
19
20
4월 일정

14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5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6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7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8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9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0

일정이 없습니다
21
22
23
24
25
26
27
4월 일정

21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2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3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4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5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6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7

일정이 없습니다
28
29
30
1
2
3
4
4월 일정

28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9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30

일정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