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흐루쇼프가 거짓말했다(11)

그로버 퍼(Grover Furr)

번역: 노사과연 부산지회 연구팀

 

제10장 기만의 유형

 

흐루쇼프 기만의 유형

흐루쇼프의 독특한 왜곡 방법들에 관한 논의를 진전시키기 전에, 우리는 우리 앞에 발표된 출판물 그 자체가 날조되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일찍이 ≪이즈베스띠아 TsK KPSS≫(Izvestiia TsK KPSS)에 발표된, 흐루쇼프 보고서는 1956년 3월 1일에 열린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회에 흐루쇼프가 발표했던 문서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1956년 3월 7일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회의 결정에 의해 지방의 당 조직들에게 유포하기 위해 편집이 되고 받아들여졌다. 이 문서는 흐루쇼프가 전당대회의 연단에서 읽었던 것과 동일하지 않다. 예를 들어, 전당대회의 참가자들 모두가 전당대회를 기억하는 바에 의하면, 보고서가 낭독되고 있는 동안 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그러나 ≪이즈베스띠아 TsK KPSS≫ 에서 출판된 문서에는 청중들의 반응들이 삽입되었다: “장내에서의 동요” “장내에서의 분개” “박수” 등등은, 물론, 폐쇄된 회의의 실제 분위기를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

-V.IU. Afiani, Z.K. Vodop’ianova, “Arkheograficheskoe predislovie”[Arkheographical preface’], in Aimermakher, K. et al, Doklad N.S. Khrushcheva a Kul’te Lichnosti Stalina na XXS”ezde KPSS. Documentaty. Moscow: ROSSPEN, 2002, p.44. (강조는 그로버 퍼)

 

이러한 동일한 “청중들의 반응들”은 영어 번역본에 삽입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용에서 뿐만 아니라 발표하는 동안의 반응에 대해서조차 날조되었던 문서를 검증하고 있다. 우리는 이전의 장들(1장-9장:역자)에서 인용되었던 흐루쇼프의 비밀연설로부터의 인용구들에서, 고의적인 왜곡이 이 문서에 삽입되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암시하면서, “청중들의 반응들”의 대부분을 남겨두었다.1)

나는, 소위 말하는 “비밀연설”에서 흐루쇼프가 61개의 “폭로들”, 즉 스딸린과 베리아를 격하시키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고발을 했다고 결정지었다. 이러한 진술들은 그 연설의 내용을 구성한다. 그것이 출판되었을 때 전 세계를 경악시켰던 것이 바로 이러한 단언들이었다.

물론, 흐루쇼프의 진술들 모두가 거짓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일 수도 있다. 흐루쇼프가 했던 “폭로” 중에서 진실인 것의 극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17차 전당대회에서 선출되었던, 당중앙위원회 위원과 후보위원 139명의 70%인 98명이2) 체포되어 총살되는 것이 결정되었다(대부분 1937년에서 1938년 사이). (강당에서의 동요) 17차 전당대회의 대의원 구성은 어떠했을까? 17차 전당대회의 유권자의 80%가 혁명 전 음모의 세월 동안과 내전 동안 당에 합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1921년 전을 의미한다. 출신성분을 보면, 전당대회에 참여한 하부 대의원 대중은 노동자들이었다(유권자의 60%).

 

내가, 흐루쇼프가 비밀연설에서 주장하는 스딸린과 베리아에 대한 모든 “폭로”나 고발이3) 거짓이라고 주장할 때, 나는 위의 진술은 포함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흐루쇼프가 여기에서 스딸린이 그들 모두를 죽였다고 주장하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그가 명시적으로 이 주장을 했더라면, 이 진술은 명백하게 거짓이어서, 비밀연설에서의 다른 거짓 고발 목록에 첨가되었을 것이다.4) 흐루쇼프는 1930년대 후반 동안 처형된 중앙위원회 위원들 중 더욱 유명한 인물들을 많이 언급한다. 1934년 전기간 동안 중앙위원회 위원들 중 매우 유명한 인물 중의 하나가 니꼴라이 예조프였다. 흐루쇼프는 그도 역시 처형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흐루쇼프가 비밀연설에서 명시적으로 이름을 밝힌 모든 중앙위원회 위원에 대한 증거를 조사할 것이다.

 

새로운 범주(패러다임)를 도입하는 문제

조사자가 직면하는 일반적인 문제는, 자신의 논제를 증명하기 위해 필요로 되는 증거를 조합하는 것과, 그것을 논리적으로 배치하여 자신의 논제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이 글을 적고 있는 지금, 나는 훨씬 더 크고 더 처리하기 힘든 또 다른 문제가 나의 앞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은, 원칙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혹은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날 수 있는 일련의 주장은 아니다. 그것은 곧, 쏘비에뜨 역사에서 전체적인 새로운 범주(패러다임)를 위한 기초적인 문서가 되었다. 이 범주는 전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 범주는 예전의 뜨로츠끼주의자들, 멘쉐비끼, 쏘련의 현실에 대한 망명자들의 생각을 부분적으로 확인해주었고, 그들을 인용한다.

그러나 이 범주가 전 세계 공산주의운동 자체에 의해 급속하게 받아들여지고, 곧 스딸린 시대 동안 반역활동으로 유죄가 인정된 사람들에 대한 “복권”의 거대한 물결이 이어졌기 때문에, “흐루쇼프”의 범주는, 초기의 판본들이 결코 가지지 못했던 정도로 광범위하게 수용되게 되었다. 그것은 지배적인 범주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흐루쇼프 비밀연설의 진실성을 공격하는 것은 내가 소위 “반스딸린” 범주라고 부르고자 하는 것의 기초를 공격하는 것이다. 여기에 내가 의미하는 것을 예시하는 몇 가지가 있다.

 

• 나는 한 맑스주의 학술 모임의 연례회의에서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에 관한 나의 조사 결과 몇 가지를 요약해서 연설했다. 질의응답 시간 동안 오랜 동안 맑시스트였던 한 사람이 비난하는 투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스딸린을 복권시키고 있습니다!”

• 또 다른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뜨로츠끼는 어떻습니까?” 흐루쇼프는 비밀연설에서 뜨로츠끼를 언급하지 않았다.

• 한 동료가, 흐루쇼프 비밀연설에 관한 나의 연구사업을 저명한 맑시스트 잡지의 편집인에게 언급했을 때, 그의 다음과 같은 조롱하는 응답이 나왔다: “그는 굴락(GULAG:노동수용소)이 없었다고 주장합니까?” (흐루쇼프는 비밀연설에서 결코 굴락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 초고에 대해 공감을 하고 도움을 제공한 독자 한 사람은 내가 그 대신에 1930년대의 탄압의 역사에 관하여 적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 처음에 나는 이와 같은 말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 응답들이 나의 말들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신에 그들은 나의 말에 함축되어 있다고 그들이 느꼈던 것에 응답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이 쏘련 역사에서 “반스딸린 범주”에 포함된 기본적인 문서 중 유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반영했다. 그것은 그 범주의 제유법이었다; 비밀연설은 반스딸린 범주 전체를 대표하고 있었다. 내가 시도하듯이,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에서 이루어진 진술들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이 범주의 다른 모든 구성부분들, 즉 흐루쇼프가 결코 언급하지 않았던 대부분이 역시 거짓이라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진다.

 

어떤 논문이나 책이 증명하려고 착수한 것을 증명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나의 주제에 관한 논문이나 책에 대해서, 연구과정에서 논문이 설정한 부분이 아닌 많은 막연한 ― 사실은 무한한 ― 사실이라고 주장되는 것들의 오류를 입증하면서, 역사적인 범주 전체를 반박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나의 이 책은 낯선 수사학의 상황에 직면한다. 이 책은, 당신은 “전체주의자”라는 반응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총체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은, 그것에 대한 어떠한 언급이라도 전체 범주를 상기시키게 하는 그러한 정도로, “반스딸린” 범주를 대표한다. 그 연설을 언급하면, 때때로 분개하는 반응이 초래된다: 내가 사실상 그것의 한 부분에 대해서만 오류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을 때, 어떻게 내가 전체 “반스딸린” 범주에 대한 반박을 은밀히 진행하려 의도할 수 있는가?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이 책은 단지 실망일 뿐이다. 이 논문은 굴락, 뜨로츠끼, 부하린, 까띤 대학살(Katyn Massacre),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에서 결코 특별히 밝히지 않은 어떤 것들을 다루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논문이 비록 흐루쇼프가 했던 말의 거짓을 그럭저럭 증명하는 데 얼마나 철저할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이 책은 실패작이며 실망스러운 작품이다.

나는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이 “반스딸린” 범주의 기초적인 문서라는 데 동의한다. 뿐만 아니라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이 사실상 처음부터 끝까지 날조 덩어리라는 것은 역시, 조사가 더욱 진행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스딸린의 범죄들”의 폭로라고 주장된 것이 바로 시작부터 이 정도로 날조된 것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날 것 같지는 않다. 흐루쇼프가 주재했던 다른 “폭로들” 중 적어도 몇 가지가 물론 거짓으로 판명될 수 있다고 추측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리고 “반스딸린” 범주는 죄다 잘 나간다. 로이 메드베데프(Roi Medvede-v)의 ≪역사가 판단하게 하라(Let History Judge)≫(1971)와 로버트 콘퀘스트(Robert Conquest)의 ≪대학살. 1930년대 스딸린의 숙청(The Great Terror. St-alin’s Purge of the Thirties)≫(1968)에서, 흐루쇼프 시대의 “폭로들”에 대한, 두개의 주요한 종합은 정확하게 “반스딸린” 범주의 대중화에 형태를 부여했다. 저서들은 그 작가들이 쏘련 언론, “복권” 성명들과 공적이거나 사적인 회고록에서 주워 모은 것을 요약하고 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의 설명을 보려면 주를 보라].5) 메드베데프와 콘퀘스트 두 사람 모두는 이 “폭로들”을 ―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을 포함하여, 그러나 그것보다도 훨씬 더 멀리 나아간다 ― 문자 그대로 “진실”로서 받아들인다.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이 거짓으로 판명된다면, 다른 자료들은 과연 어떨까?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에서 행해진 고발들의 정확성을 검증하려는 나의 시도와, 사실상 그 고발들 모두가 거짓이라는 나의 최종적인 결론들은, “반스딸린” 범주 전체를 분쇄하려는 직접적인 시도는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나의 작업은 이 범주의 전체 건축물을 지지하고 있는 주요 기둥들의 하나를 제거한다.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이 오랫동안 조심스럽게 계획되고 정교하게 가공된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해진다면, 그 어떤 학생도 다시는 똑 같은 방식으로 스딸린 시대의 쏘련 역사를 바라볼 수 없다.

사실에 대한 진술들은 오직 진술들의 사실성의 여부에 의해서만 평가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실성의 여부를 평가한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증거를 가지고, 그러한 진술들이, 도출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결론들인지 아닌지를 평가하는 것이다. 사실에 대한 주장들의 특정한 몇 가지가, 혹은 그 중 하나가 오류라고 입증되었다 해도, 범주 전체가 “오류라고 입증”될 수는 결코 없다. 내가 언급했던 동료들과 비평가들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수많은 다른 사람들은 ― 다른 동료들이 그렇게 평가하듯이 ― “불합리한 이야기 속에 사로잡힌 합리적인 사람들이다.” 바로 그 불합리한 이야기는 흐루쇼프의 가림막 속에 숨겨진 스딸린을 둘러싼 “개인숭배”이다. “위대한 사람에 대한 숭배” (Kul’t lichnos-ti)로 변질되는 것을 비평하고 제거하고 있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흐루쇼프가 정말로 한 일은 뒤집혀진 형태로 그것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이 선한 스딸린에 대한 개인숭배”를, 똑같이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악했던 또 다른 스딸린으로 대체하려고 노력했다. 이 점에서 흐루쇼프는 뜨로츠키를 닮았다. 그도 역시 자신의 최대의 경쟁자의 ― 그의 주장에 의하면 ― 개인적 결함에 초점을 맞추었고, 지도력, 정책들, 반대자들과 투쟁, 탄압들에 있어서 스딸린이 부각된 이유는, 그가 야비하고 무례하고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대중 매체에 대한 노암 촘스키의 비평을 요약하며, 마크 그림즐리(Mark Gri-msley)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일반적으로 수용된 세계관에 어울리는 진술은 설명을 거의 요구하지 않고, 그러므로 몇 마디 말로서 개요를 잡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수용된 세계관에 도전하는 진술은, 설득할 수 있는 기회들을 가지기 위해서, TV나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는 정치가 등의 짧은 인상적인 발언(sound bite) 그 이상이 필요하다.6)

 

이것은 “받아들여진”, 일반적으로 인정된, 역사적인 범주에 도전하는 학문에도 역시 적용된다.

그러한 조건하에서는 “평등이 곧 불평등이다.” 그것은, 거짓을 진술하기 위해서보다, 거짓을 반박하기 위한 글에 훨씬 더 많은 시간, 노력 그리고 공간이 필요한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배적인 범주에 그의 조사를 깔끔하게 맞추는 학자는 단지 한 가지 과업을 가지는 반면에, 그의 작업이 현존하는 범주에 도전하는 학자는 두 가지 과업을 가진다는 것이다. 전자는 단지 이미 받아들여진 방법론의 규범을 따라 조사하는 것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의 작업은 승인을 받고 환영을 받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는 독자들에게 그들이 이미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들의 더 커다란 틀 안에 있는 “빈 칸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배적인 범주에 도전하는 학자는 훨씬 더 빠듯한 과업을 가진다. 그의 조사는 모든 학자들의 책무인 방법론적 요구들 ― 증거의 사용, 논리 등등 ― 만을 충족시켜서는 안 된다. 그는 역시, 독자들이 지금까지 과거 그 자체에 대해 해석하고 상을 만들게 했던, 역사적인 인과관계의 전반적 형태들에 의문을 가지도록 설득해야만 한다. 그는, 역사에 대해 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전체적 틀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도전한다. 그 도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퇴짜를 놓고, 어떤 사람들은 난폭하게 비난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응당 명백해야 하지만, 명백하게 그렇지 않은 것들을 반복해야 한다. 이 책의 주제는 출판되어 나와 있는 1956년 2월 25일 행해진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이다. 놀라운 ―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 나의 조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그 연설은 사실상 전체가 날조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 나의 목적은, 현존하는 가장 훌륭한 증거들 즉, 이전 쏘련의 문서고에서 나온 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그 결과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나는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이 적어도 약간은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리고 꼼꼼히 조사하면 적어도 이 진술들의 조금 더 많은 내용들 역시 거짓이라는 것이 발견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이 작업에 착수했다. 실질적으로 흐루쇼프의 “폭로들” 모두가 사실은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는 무척 놀랐다 ― “충격적”이라는 표현도 과하지 않다.

나는 전체가 부분들의 총계 이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흐루쇼프의 “폭로들” 모두가 거짓이라는 나의 결론은, “폭로들”의 절반이나 2/3가 거짓이라는 조금 더 완곡한 결과보다도 훨씬 더 의심을 받을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다음과 같은 원인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에 관하여 거짓말을 했던 흐루쇼프는 이미 지배적인 “반스딸린” 범주에 자신을 “적응시킨 것”이 아니다. 그는 그 범주 속에서, 타우브만(Taubman)의 표현에 의하면 “어느 정도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했고”, 그의 연설은 “위대한 공적”이 되었고, 그 범주의 필수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폭로하는 것과 진실을 확립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흐루쇼프의 기만을 분석하는 것은 두 가지의 연관되어 있지만 구분되는 작업들을 필요로 한다. 훨씬 더 쉽고 더 짧은 작업은 흐루쇼프가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의 주제이다.

흥미를 가진 학생들은 당연히 흐루쇼프가 거짓말을 했다는 단순한 사실 이상의 것을 알고자 한다. 일단 흐루쇼프가 실제 사실을 숨기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면, 그 학생들은 진실 ― 정말로 발생했던 일 ― 을 알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조사는 그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가 없다. 각각의 사건에 해당되는 개별적인 조사가 ― 거짓말의 수에 해당되는 61개의 조사가 ― 필요할 것이다. 주로 우리가 그 사건을 규명할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것은 짧을 수도 있다.

수집하고 조사했을 때 종종 모순되는 많은 정보들이 있기 때문에, 어떤 조사들은 아주 길어져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명확한 해결책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이용할 수 있는, 자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건들, 아마도 많은 사건들에 대해서 결론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정말로 발생했던 일을 발견하려는 목표하에 ― 현존하는 증거들을 가지고, 가능한한 가까이 ― 흐루쇼프가 했던 거짓 주장들 각각에 대해, 깊이 있게 조사하는 것은 부득이하게도 이 책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다.

흐루쇼프 시대 동안, 모든 실제적인 목적 때문에 “대중의 학살자”로서 스딸린의 이미지가 생겨났다.7) 바로 그러한 최초의 고발들 즉, 그 신화(“대중의 학살자”: 역자)를 ― 그리고 바로 그 신화를 여기에서 우리가 다루고 있다 ― 위한 기초를 낳았던 고발들은 “비밀연설”에 있다. 그리고 흐루쇼프의 “폭로들” 중에서, 훨씬 가장 커다란 인상을 남겼던 것은 스딸린이 많은 저명한 볼쉐비끼를 고의적으로 괴멸시키는 것을 추동했고 승인했다는 고발들이다.

“비밀연설“이 있은 후에, 스딸린의 탓으로 돌려진 “범죄들”의 양은 계속 증가했다. 예를 들어, 얼마 지나지 않아, 스딸린은 저명한 쏘련의 군사 지도자들에 대해 죄목을 날조하여 처형했다고 비난을 받았다. 흐루쇼프가 권력을 유지하는 동안, 반관적(半官的)인 저술가들은 불공정한 선고라고 주장하며 그 희생자들의 목록을 첨가하는 데 있어 지칠 줄 모르고 계속 작업을 했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복권”되었다 ― 아무런 죄가 없다고 선언되었다.

1964년 10월 흐루쇼프는 강제로 은퇴를 했다. 그즈음 무고한 희생자들에 대한 대중의 학살자로서 스딸린의 이미지는 이미 견고하게 확립되어 있었다.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에, 쏘련 반체제 인사인 로이 메드베데프와 영국의 쏘련 연구자인 로버트 콘퀘스트의, 스딸린의 소위 “범죄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들이 실린 두꺼운 저작들이 서구에서 출판되었다. 그들은 흐루쇼프하에서 출판된 작품들에 아주 많이 의존했다.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시대 동안에는, 더더욱 그러한 경향들 즉, 피로 응결된 “역사들”에 대한 출판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에서 대규모 탄압에 관하여 그가 말했던 내용들을 주의깊게 조사하는 것은, 흐루쇼프의 거짓말들의 많은 예들을 단순히 확인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유용한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다. 그러한 조사는 “대중의 학살자”로서 스딸린 신화의 원천을 확인하는 것을 가능하도록 만들어주고, 무엇보다도 이 신화가 창조되었던 이유들의 몇 가지를 밝히기 시작한다.

 

역사적인 증거 대 사법적인 증거

역사적인 과정과 법적인 과정 ― 재판에서 증거로 채택되는 것과 역사에서 증거로 채택되는 것 ―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복권” 보고서들은, (사망한) 피고인들의 조사나 재판에서 약간의 법적 절차나 다른 절차가 준수되지 않았다는 결정에 정상적으로 의존했다. 그 보고서들은 이러한 절차상의 침해들을 주장했다; 그러므로 이 보고서들은 사망한 피고인들이 유죄를 선고받지 않았어야 했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유죄 선고가 무효가 되어야 했다고 결정했다. 때때로 그 보고서들은 절차들이 침해되었다는 증거를 제공했고, 때때로 그렇다고 단지 주장했다.

(오직 법적 절차상의 하자라는 이유만으로: 역자) 어떤 피고인에 대한 유죄 선고가 무효가 되었고, 재심을 받지 않는다면 그는 “무죄”인 것으로 간주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사망한 그 피고인은 “무죄”이다. 복권되었다! 역사학자에게는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법정은 죄수의 권리를 고려해야 하고, 그 중 몇가지는 사법적 절차와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범죄에 대한 피고인의 자백, 아무런 다른 증거의 부재, 범죄가 저질러졌다는 어떠한 다른 증거의 부재는, 정상적으로 유죄 판결을 내리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증명할 부담은 검찰에게 있다 ― 피고인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도록 요구받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는 그렇게 할 수는 있다.

고문을 통해 획득된 증거는 무효이다. 그렇게 하는 한 가지 이유는 피고인의 권리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또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서 경찰에게 죄수들을 학대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경찰은 어떤 실질적인 조사도 결코 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므로 경찰들은 의심할 바 없이 많은 유죄 판결을 얻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사건도 해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피고인이 다양한 권리들을 가지고 있는 “재판”이 아니다. 죽은 사람은 지켜져야 할 필요가 있는 권리들이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피고인들이 “공정한 재판”(그것이 어떻게 정의되든지 간에)을 받았는지에 관해서는 흥미가 없다. 우리는 피고인들이 유죄였는지 아니었는지에 관해서 흥미를 가진다.

피고인들이 “공정한 재판”을 받았는가 아니었는가 하는 것은, 조사가 필요한 독립적인 주제가 될 수 있다. 공정한 재판 여부와 유죄냐 무죄냐 여부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1886년-1887년 일리노이주 당국에 의해 합법적으로 사형을 당했던 “헤이마켓 순교자들(Haymarket Martyrs)”의 경우 중 적어도 한 명이 유죄였는가 무죄였는가 하는 문제가 최근에 몇 개의 학문적인 기사들에서 다시 부각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공정한 재판“을 받았는가 아니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 그들은 공정한 재판을 받지 않았으며 수년이 지난 후에 일리노이주 후임 주지사에 의해 사후에 사면되었다.

사코 반제티(Sacco-Vanzetti) 사건에서, 적어도 사코가 유죄였을 수 있는 몇 가지 증거가 지금은 있다. 그러나 두 명의 남자가 그 당시의 기준들에 적합한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줄리어스 로젠버그(Julius Rose-nberg)가 핵 분야의 기밀을 정말 넘겨주었는가 아니었는가 혹은 그가 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할 계획을 세웠는가 아니었는가에 관한 생생한 토론이 있었다. 그러나 그와 그의 아내 에셀(Ethel)이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역시 역사학자들은 법적 절차를 고려할 필요는 없다. 피고인이 “공정한 재판”을 받았는지 아닌지를 당신이 판단하는 것은 그 시대와 당시의 법적 절차가 무엇이었는가에 달려 있고, 그리고 그럴 경우 어떠한 절차들이 실제로 관찰되는가 하는 것과 정반대로 모든 것이 당신이 실제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교된다.

역사학자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증거들을 수집하고 평가하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결론에 도달한다. 이것은 특정한 사람이 “공정한 재판”을 받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피고인은 유죄일 수가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역사학자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하는 영역에 흥미를 가진다. 1960년대까지 미국 남부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은 흑인들은 아무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흑인 피고인들이 무죄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책은, 피고인들이 1930년대 쏘련 사법제도의 기준들에 따라서 “공정한 재판”을 받았는가 아니었는가와는 관계가 없다. 또한 재판들의 합법적인 기초를 ― 긴급 상황하에서 절차가 단축된 재판들이 “합법적”이었는가 아니었는가 ― 논하는 것과도 관련이 없다. 우리는 피고인들의 유죄나 무죄를 밝혀주는 증거에 관심이 있다.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에서 언급된 모든 피고인들의 사건들에서, 우리는 그들의 유죄를 가리키는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핵심은 다음과 같다. 이 모든 사건들에서, 우리가 흐루쇼프와 그의 보좌관들의 보고서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알고 있던 것을 안다. 흐루쇼프는 무죄를 주장했지만, 이 피고인들의 무죄를 증명하는 보고서는 이 보고서들 중에서 단 하나도 없다.

나는, 단 하나의 사건에서도 누군가가 스스로를 유죄로 만드는 것을 유일한 증거로서 제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말해서,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증거라면, 우리는 그것에 의존해야만 할 것이다 ― 그 외는 다른 아무 방법도 없다. 이와 유사하게, “다른 사람에게서 전해 들은 말(“here-say”)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증거라면, 우리는 적절한 의심과 주의를 기울이며 그것에 의존해야만 한다. (10장 후반부는 다음호에) <노사과연>


1) ≪라이프(Life)≫ 잡지에 처음 실리고, 그 다음에 책의 형식으로 출판된 그의 회고록에서, 흐루쇼프는 이러한 “청중들의 반응들”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대의원들은 완전한 침묵 속에서 경청했다. 거대한 강당 안은 파리가 윙윙거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조용했다.” Life , December 11, 1970, p. 63; Strobe Ta-lbot (trans. & ed), Khrushchev Remembers: The Last Testament. (Boston: Litt-le, Brown, 1874), 494.

2) 공식적인 잡지 ≪이즈베스띠아≫ [Izvestiia TsK KPSS NO. 12(1989), p. 86]에서 출판된 보고서에는, 대의원의 숫자가 98명이 아닌 97명(44+53)으로 나와 있다. 물론 이것이 사건의 본질을 바꾸지는 않는다.

3) 나는 “모른다(Don’t know)”로 표시했던 하나를 제외하고.

4) 인용된 진술은 나의 세 개의 “S”, 즉 “특별한 경우들”의 하나이다.

5) 솔제니친(Solzhenitsyn)의 다양한 기록들, 가장 유명하게는 ≪수용소 군도(Th-e GULAG Archipelago)≫의 여러 판본에 기록된 것들은, 엄격히 말해서, 역사적인 사실들이 아니다. 솔제니친은 소문과 출판되지 않은 회고록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다. 자료들을 사실상 무비판적으로 이용했다. 그 자신의 삶의 많은 부분에 대한 것을 포함하여, 고의적으로 상당히 많은 허위진술을 했다. 더구나, 그가 ≪수용소 군도(Th-e GULAG Archipelago)≫ 모두를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솔제니친의 삶 그 자체가 어느 정도까지 “만들어지고” 날조되었는지 충분히 연구될 필요가 있다. 솔제니친과 그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점들에 대한 아주 자세하고 높은 수준의 문서로 된 설명을 보려면, 알렉산드르 V. 오스뜨로프스끼(Aleksandr V. Ostrovskii) 의 Solzhenitsyn: proshchanie s misfom (“Solzhenitsyn: Farewell to the myth) Moscow: IAuza, 2004를 보라.

6) Mark Grimsley, “Noam Chomsky (1928- )”. At http://people. cohums. ohio-state, edu/grimsley1/h582/2001/Chomsky. htm

7) 사실은, 뜨로츠끼로부터 다른 관점들과 함께 이 관점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좋은 증거가 있다. 흐루쇼프는 여러 반스딸린적 이야기들을 뜨로츠끼로부터 확실히 받아들였다. 예를 들면 스딸린이 1934년 12월 1일 세르게이 끼로프(Se-rgei Kirov)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받아들인 것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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