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특집: 방영환 열사의 삶과 투쟁] 방영환을 기억하며…

 

김계월 | 공공운수노조 아시아나케이오지부 지부장

 

 

어느 날 핸드폰을 열어 보니 방영환 동지가 분신했다는 내용이 텔레그램에 올라와 있었다. 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고, 추석을 하루 앞둔 날이어서 가슴은 더 미어졌다.

누군가에게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지만 방 동지와 가까운 지인들은 정신이 없겠구나 싶어 며칠을 멍하니 보냈다. 추석이 지나고 나서야 남성화 동지에게 물어볼 수 있었다. 이후로는 영등포 한강성심병원 중환자실에 있다는 것과 생명이 위중하다는 정도를 텔레그램 메시지로 접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텔의 웹자보 하나가 내 눈에 꽂혔다. 한강성심병원 앞에서 촛불문화제가 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무겁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병원 앞으로 갔다. 몇몇 아는 동지들이 와 있었고, 여러 발언이 이어졌다. 어떤 동지는 방 동지에 대해 설명하기도 하고, 또 어떤 동지는 방 동지와 함께한 기억을 소환하기도 했다. 누군가 아시아나케이오 복직 투쟁에서 방 동지를 만났던 이야기를 했다. 함께 투쟁하고 연대하던 시간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내가 방영환 동지를 만난 곳은 고용노동청 앞 아시아나케이오 천막농성장이었다. 방 동지가 아시아나케이오 부당해고 철회 투쟁에 그 누구보다 열심히 연대를 했던 건 아마 그도 해고자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합원들이 하나둘씩 농성을 접고 떠날 때도 조합원처럼 앞장서서 싸워 주는 그이가 든든했었다.

방영환은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 왔다. 그이가 들려준 삶의 이야기가 그랬다. 그 험난하고 굴곡이 심했던 인생 이야기를 거침없이 내게 들려줬던 건 공적인 자리에서는 지부장이라고 불렀지만, 사석에선 누님이라고 부르며 따르던 친근감 때문이었을 게다.

해고자로 살면서 어려운 생계문제도 토로하곤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결의는 변치 않는 그이였다.

 

 

방영환 동지는 매주 수요일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에서 주관하는 기도회에도 빠지지 않았다. 아시아나케이오 부당해고 행정소송 1심을 앞두고 행정법원 앞에서 3천배 릴레이 절투쟁을 할 때도 그이는 몸을 아끼지 않고 연대했다. 경찰과 싸우다 팔을 다쳐 깁스를 하던 상황에도 그러했다.

2021년 5월 1일 전노대를 마친 날이었다. 그날 천막지킴이였던 공공운수 최종하 동지에게서 늦은 밤 전화가 왔다. 폭우가 쏟아져 천막이 내려앉는다는 급한 전화였다. 천막 위치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동지들을 생각했는데 방영환 동지가 떠올랐다.

기꺼이 빗길을 나서 달려와 준 방영환 동지와 같이 크게 웃기도 했었다. 폭우로 내려앉은 천막에서 최종하 동지가 냄비로 물을 푸고 있어서였다.

 

 

그날 방영환 동지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노조하던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노조탄압으로 많이 힘들었는데 사측의 요구에 따라 ‘다시는 노조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던 게 너무 부끄러워서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을 못 했다는 고백도 했다. 어찌 됐든 살아 있으니 지금 노조하고 있는 거 아니냐며 격려해 줬는데 그런 방영환 동지가 우리 곁을 떠났다.

코로나19로 그 어떤 집회도, 문화제도 마음대로 할 수 없던 2021년. 그래도 해고자가 할 수 있는 건 투쟁밖에 없었는데 그 대열에 늘 함께 연대했던 방영환 동지가 세상에 없다. 그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 추석날 보름달을 보며 두 손을 모아 기도했었다.

“제발 방영환을 살려 주세요.”

 

질곡의 삶을 버티며 잘살아 보겠다고, 택시노동자로 당당하게 살아 보겠다고 늘 말했던 방영환 동지인데. 해성운수 앞에서 분신을 했고 사경을 헤매다 10월 6일 끝내 사망했다. 믿을 수 없는 그이의 죽음 앞에서 몇 날 며칠을 보냈다. 이 글을 쓰면서도 감정이 복받쳐 오른다. 투쟁하며 내 일처럼 연대하며 해고자의 삶을 살았던 그이와의 시간을 잊을 수가 없다.

 

해고되고 처음으로 장어를 먹어 본다고 좋아했던 날의 방영환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해고자인 우리는 참 가난했다. 그렇지만 그 누구보다 행복했다. 복직을 할 거라는 믿음 그리고 함께하는 연대의 힘이 있어서였다.

아시아나케이오 해고노동자들이 하루빨리 복직되길 염원하던 그이와 나는 해고자였기에 어디서든 거침없이, 매인 것 없이 투쟁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길 위의 시간을 우리는 함께 보냈다.

 

방영환 동지는 해성운수에서 해고됐었고, 부당해고 판결을 받아 복직했었다. 하지만 복직으로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악질사장 정승오는 온갖 파렴치한 짓을 다해 그이를 괴롭혔다. 그럼에도 흔들림 없이 싸살아돌아오다웠던 동지인데 왜 분신을 해야만 했는지 알 수가 없다. 방영환 동지가 우리 곁에 없다는 게 나는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

 

그를 기억하고 있는 동지들 모두가 그렇겠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 함께 연대하고 의지하며 만났던 동지이기에 더욱 마음이 아프다.

비록 그이가 우리 곁으로 살아 돌아올 수는 없지만, 그이가 꿈꾸며 이루고자 했던 택시월급제 이행은 살아 있는 우리의 몫으로 받아안는다.

오늘도 핸드폰을 열어 방영환 동지의 모습을 본다. 그가 말했던 “일하다 죽느니 싸우다 죽겠다”는 말을 떠올린다. 그이의 말은 이제, 우리의 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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