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인 | 편집출판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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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백, “합목적성 개념의 논리적 내용에 대하여”, ≪정세와 노동≫ 제192호(2023년 6월), pp. 61-96.
1. 들어가며
지난 9월 22일(금) 진행되었던 연구토론회는 한동백이 ≪정세와 노동≫ 제192호를 통해 발표했던 “합목적성 개념의 논리적 내용에 대하여”를 주제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글에 대해서는, 토론회 이전에도 일정한 논란이 있었고, 이 주제로 토론회를 열게 된 이유도 그러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토론회에서 여러 동지들로부터 거센 비판이 있었고, 이에 한동백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23일(토) 새벽에 뒤에서도 언급될 모 인터넷 커뮤니티에 일종의 토론회 후기(?)를 남기고, 그 다음 날인 24일(일) 아침이 밝을 무렵, 탈퇴서를 제출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둘러싸고, 그간 누적되어 왔던 여러 문제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고, 이는 현재까지도 다소간의 갈등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관지 편집 책임을 맡은 사람으로서, 그동안 한동백의 글을, 촉박한 마감에 쫓겨서, 혹은 다른 일도 많아서 바쁘다는 핑계로, 또는 일일이 지적하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서 등등으로, 특별한 지적 없이 기관지에 실어 왔던 것이, 문제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것을 누적시켜 왔던 원인들 중 하나일 수는 있기에, 스스로를 반성하며, 밀린 숙제를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작성합니다.
다만, 이 글 역시 다른 원고들의 편집을 마친 후 남아 있는 약간의 시간을 할애해 쓰고 있는 것이라, 그 촉박한 시간으로 인해, 비판 대상이 되는 글의 문제를 하나하나 지적할 수는 없을 듯하고(일일이 지적한다면, 거의 대부분의 내용을 지적해야 할 듯합니다), 제가 생각하고 있던 핵심적인 문제들을 위주로 비판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비판이라는 글의 성격상 다소 많은 인용이 필요하고, 그래서 내용에 비해 길고 번잡한 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2. 내용상의 문제 (1) ― 근거의 오류
“합목적성 개념의 논리적 내용에 대하여”는, 최대한 간략하게 말한다면, 변증법적 유물론의 이름으로, 다시 말해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자연적 존재와 사회적 존재 모두가 자기목적적 운동을 한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글입니다. 한동백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연적 존재로서의 자연, 그리고 체계로서 사회적 존재가 자기목적적 운동을 이룰 수 있다는 사고는 유물론적 세계관에 있어서 매우 당연하다. 왜냐하면 유물론의 핵심은 물질의 영원성을 승인함에 있으며, 물질의 영원성은 오로지 물질의 절대적 자기운동성을 승인함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의 절대적 자기운동은 다른 말로, 물질의 절대적인 자기목적적 운동이다.[1]한동백, “합목적성 개념의 논리적 내용에 대하여”, ≪정세와 노동≫ 제192호(2023년 6월), p. 64. (강조는 원문대로.)
이 글의 주제인 목적 개념을 논함에 있어,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까지만 이야기했다면, 문제는 훨씬 덜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했다면, 이 글은 관념론의 입장에서 목적 개념을 논하는 것이 되고, 또 그렇게 하려면, 사실 철학사적으로 목적 개념의 정립에 중대한 역할을 한 칸트도 더 적극적으로 서술했어야 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도, 헤겔의 객관론도, 보다 더 정밀ㆍ정확하게 서술할 필요는 있었을 것입니다. 서양의 중세 철학도 약간은 추가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한동백 본인도 자신의 입장을 그렇게 주장하고 있고, 또 이 글에서도 엥엘스를 인용하며, 자신의 주장이 유물론의 입장이라고, 더 나아가 맑스주의(맑스-레닌주의)의 입장이라고 하고 있기에,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철저한 변증법적 유물론자이자, 투철한 맑스주의자(맑스–레닌주의자)인 한동백과 한동백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에 맑스주의(맑스–레닌주의)적인 문헌적 근거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먼저 그들이 말하고 있는 그 문헌적 근거들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문헌적 근거 (1) ― 엥엘스, ≪자연의 변증법≫
한동백은 엥엘스를 인용하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현재 우리가 다루는 주제인 합목적성에 관하여서도 엥엘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지양하여 그것을 물질의 자기운동이 표현하는 한 방식이라고 간주하였다:
[E. 헥켈은: 한동백] 한 동물이나 식물에게서 자연도태를 통해 일정한 변화가 초래된 것이면, 그것은 작용인에 의해서, 그리고 이 변화가 인위적 도태(사육과 재배)를 통해서 초래된 것이면, 그것은 목적인에 의해서 야기된 것이라는 그럴듯한 결론에 도달한다! 사육자나 재배자가 목적인이라고! 물론 헤겔과 같은 정도의 변증법의 대가가 작용인과 목적인의 협소한 대립 속에서 빙빙 맴돌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경험과 이론으로부터, 물질과 그것의 존재양식인 운동은 창조될 수 없으며 그래서 그것이 그 자신의 목적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이 대립에 관한, 빠져나갈 길 없는 실없는 소리에 끝장을 내게 되었다. (F. 엥겔스, ≪자연변증법≫, 윤형식ㆍ한승완ㆍ이재영 역, 중원문화, 1989, pp. 261-262.)[2]같은 글, p. 88. (강조는 한동백.)
주로 목적인(目的因)으로 번역되는 라틴어 Causa finalis에서 Causa는 “원인”이라는 뜻이고, finális는 형용사로 “최종의(종국적)” 또는 “목적의(목적적)”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동백이 인용한 위 문단에서 엥엘스는, 헥켈과 헤겔이 했던 말을 언급할 때는 causa finalis, causa efficiens(작용인)라고 라틴어 그대로 쓰고 있지만, 인용자가 밑줄까지 그어 강조한 부분에서는 라틴어 causa finalis라고 하지 않고, 독일어로 Endursache(최종 원인)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동백이 인용한 중원문화의 번역자도 친절하게 “목적인(Endursache)”이라고 괄호 안에 원문을 병기하고 있고, 전진 출판사의 번역자는 이것을 “궁극적 원인”[3]프리드리히 엥겔스, ≪자연의 변증법≫, 황태호 역, 전진, 1989, p. 243.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원문을 한번 확인해 봅시다. “물질과 그것의 존재 양식인 운동은 창조될 수 없으며, 그러므로 그 자신의 최종 원인이다(die Materie wie ihre Daseinsweise, die Bewegung, unerschaffbar und also ihre eigne Endursache sind).”[4]MEW, Bd. 20, S. 519. (강조는 인용자.) 이 문장 어디에, 그 무슨 ‘목적’이라는 개념이 있습니까? 수많은 언어에 정통했다고 알려진 엥엘스가 라틴어의 뜻을 몰라서, 이렇게 썼겠습니까? 그런데도, 한동백은, “합목적성에 관하여서도 엥엘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지양하여 그것을 물질의 자기운동이 표현하는 한 방식이라고 간주하였다”라고 주장하며, 그 주장의 근거로 이 문장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게 맞는 것입니까?
당연히 말도 안 됩니다! 이것은 순전히 오역(誤譯)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는데, 동시에 여기서 엥엘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니까, 그러한 오역 위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친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자연의 변증법≫에서, 위 인용문의 앞뒤 부분, 그리고 주제와 관련된 부분들을 좀 더 살펴보면, 이것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먼저,
목적인과 작용인들은 헥켈에 의해(89, 90쪽), 합목적적으로 작용하는 원인과 기계적으로 작용하는 원인들로 전화되었다(Causae finales und efficientes von Haeckel([S.] 89, 90) in zweckmäßig wirkende und mechanisch wirkende Ursachen verwandelt).[5]MEW, Bd. 20, S. 478. (강조는 원문대로.)
그리고 아래는, 앞서 한동백이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인용한 문단의 바로 앞에 있는 부분입니다. (약간의 오역이 있는 듯하지만, 모든 인용문들을 일일이 번역할 시간이 없기도 하고, 한동백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한 같은 책으로 문장을 이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기에, 중원문화의 번역을 인용합니다.)
헥켈 역시 작용인=“기계적으로 작용하는 원인들”, 그리고 목적인=“합목적적으로 작용하는 원인들”이라는 헤겔의 번역을 차용하는데, 이때 헤겔은 “기계적”=맹목적으로 작용하는,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지, 헥켈식의 기계적(역학적)이란 뜻이 아니다. 이때 헤겔 자신은 『논리학』에서의 인과성에 관한 양 서술 중 어느 하나에서도 이 대립을 언급조차도 하지 않고, 그 대립이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곳인 『철학사』에서만(따라서 천박함에서 기인한 헥켈의 순수한 오해!), 그리고 전혀 우연적으로 목적론(『논리학』, III, II, 3)에서, 옛날의 형이상학이 기계론과 목적론의 대립을 파악했던 그러한 형식으로 언급할 뿐, 그밖에는 이미 오래전에 극복된 관점이었다. 여기서 보듯 헥켈은 자신의 “역학적”(기계적) 견해의 한 확증을 발견했다는 기쁨 속에 잘못 베꼈던 것이며, 그로써 한 동물이나 식물에게서 자연도태를 통해 일정한 변화가 초래된 것이면 …[6]프리드리히 엥겔스, ≪자연변증법≫, 윤형식ㆍ한승완ㆍ이재영 역, 중원문화, 1989, p. 261.
이상에서 명확하게 알 수 있듯이, 먼저 엥엘스는 “합목적적으로 작용하는 원인들(zweckmäßig wirkende Ursachen)”이라는 말을 같은 책에서도, 그리고 심지어 한동백의 인용문의 바로 앞에서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물질과 그것의 존재 양식인 운동”을 말할 때는, 한동백의 주장처럼 “그 자신의 목적인”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최종 원인(Endursache)”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목적인’, ‘합목적적 원인’이 아닌 ‘최종 원인’이라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기에 무슨 ‘목적’ 개념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한동백이 인용한 부분의 전체적인 내용은 무엇이냐? 앞서 말한 것처럼, 한동백은 오역에 기초하여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바, 무슨 말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여, 한동백과 그 지지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찬찬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 부분은, 엥엘스가 보기에, 헥켈은 헤겔을 차용해, causa efficiens(작용인)를 “기계적으로 작용하는 원인”으로, causa finalis(목적인)를 “합목적적으로 작용하는 원인”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헤겔은 이미 이 둘의 대립을 지양하였고, 나아가 기계론과 목적론의 낡은 형이상학적 대립 역시 지양했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인용문을 보면서, 다시 정리해 보면, 헥켈은 작용인과 목적인, 기계론과 목적론에 대한 헤겔의 언급을 발견하고, “한 동물이나 식물에게서 자연도태를 통해 일정한 변화가 초래된 것이면, 그것은 작용인에 의해서, 그리고 이 변화가 인위적 도태(사육과 재배)를 통해서 초래된 것이면, 그것은 목적인에 의해서 야기된 것이라는 그럴듯한 결론에 도달”했는데, “헤겔과 같은 정도의 변증법의 대가가 작용인과 목적인의 협소한 대립 속에서 빙빙 맴돌고 있을 수는 없었다”는, 또 “게다가 이미 헤겔에게 작용인과 목적인의 대립은 상호 작용에서 지양되었다(Sonst schon bei Hegel der Gegensatz von causa efficiens und causa finalis in der Wechselwirkung aufgehoben)”[7]MEW, Bd. 20, S. 509.는 엥엘스의 언급처럼, 헤겔은 이미 그러한 대립을 지양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관념론적으로요! 이와 관련된 부분은, 한동백이 왜 자연적 존재와 사회적 존재 모두가 자기목적적 운동을 한다는 주장을 하는지, 다시 말하면, 사회적 존재가 아닌, 자연적 존재에까지, 즉 물질 일반, 만물(萬物)에 목적 개념을 적용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뒤에서 살펴볼 때, 짧게 언급될 듯합니다.) 여기까지는 헥켈이 헤겔을 가지고 와서,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적인과 작용인의 대립은, 관념적으로 지양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발달에 따른 우리의 경험과 이론에 의해 지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엥엘스는 이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물질과 그것의 존재 양식인 운동은 창조될 수 없으며, 그러므로 그 자신의 최종 원인이라는, 우리가 경험과 이론으로부터 알고 있는, 오늘날의 견해로, 이 대립에 대한 모든 출구 없는 허튼소리들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für den heutigen Standpunkt ist dem ganzen ausweglosen Gekohl über diesen Gegensatz damit ein Ende gemacht, daß wir aus Erfahrung und Theorie wissen, daß die Materie wie ihre Daseinsweise, die Bewegung, unerschaffbar und also ihre eigne Endursache sind).[8]MEW, Bd. 20, S. 519. (강조는 원문대로.)
물질과 그것의 존재 양식인 운동은 그 자신이 최종 원인입니다. 그것은 이러저러한 관념론 철학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과 이론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용된 부분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여기에 무슨 목적인이라는 말이, 또 목적인과 작용인의 대립이 들어갈 곳은 없습니다. 엥엘스는 이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한편 우주의 운동의 상호작용에서 일시적이고 국부적으로 고립되거나, 우리들의 반영하는 정신에 의하여 고립된 개별적인 원인들에 작용적 원인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오직 혼란시키는 요소를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아무런 새로운 규정도 더하지 못한다. 작용이 없는 원인은 결코 원인이 아니다.[9]프리드리히 엥겔스, ≪자연의 변증법≫, 황태호 역, 전진, 1989, p. 243. (강조는 원문대로.)
명확하지 않습니까? 위 문장들 어디에서, “우리가 다루는 주제인 합목적성에 관하여서도 엥엘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지양하여 그것을 물질의 자기운동이 표현하는 한 방식이라고 간주”했다고 할 만한 곳이 있습니까?
나아가 엥겔스는 이렇게까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헤겔(V, 244쪽)에 따르면, 유기체[생명체: 인용자, 이하 특별한 언급이 없으면 [ ] 안은 인용자의 말이다]에 있어서 내적 목적은 충동을 통해 자신을 관철한다. 너무나 설득력이 없다. … 이것으로부터 모든 내적 목적 그 자체가 얼마나 이데올로기적인 규정인지 분명한 결론이 나온다(Der innere Zweck im Organismus setzt sich dann nach Hegel(V, [S.] 244) durch den Trieb durch. Pas trop fort[Nicht allzu überzeugend: MEW 편집자 주]. … Hieraus geht hervor, wie sehr der ganze innere Zweck selbst eine ideologische Bestimmung ist.)[10]MEW, Bd. 20, S. 480. (강조는 원문대로.)
뒤에서 ≪반뒤링≫을 통해, 다시 한번 살펴보겠지만, 위 인용문처럼, 엥엘스는 유기체(생명체) 일반으로도 목적 개념을 확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동백은 사람(인간)도 넘고, 유기체(생명체)도 넘어, 물질 일반에 적용되는 것으로, 목적 개념을 확대하려고 합니다. 그것도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참고로, 바로 위 인용문의 원문에서 확인하실 수 있는 것처럼, MEW의 편집자는 라틴어가 나오면, 그것을 독일어로 번역해 각주를 달고 있습니다(이 글의 각주 5와 7에서는, 일단 편집자의 각주를 생략하고 원문만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MEW 의 편집자는 앞서 여러 번 언급되었던, Causa finalis도 독일어로 번역하고 있는데, 그것을 문맥에 맞게, 최종 원인(Letzte Ursache)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또는 특정 목적추구적 원인(ein bestimmtes Ziel verfolgende Ursache)으로도 번역하여, 앞의 것과 병기해, 각주를 달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아래 한 문장만 더 살펴보려 합니다. 앞서 인용했던 각주 7번의 바로 앞 문장입니다.
Causa finalis ― 물질과 그 내재적 운동. 이 물질은 추상이 아니다. … (게다가 이미 헤겔에게 작용인과 목적인의 대립은 상호 작용에서 지양되었다.)(Causa finalis ― die Materie und ihre inhärente Bewegung. Diese Materie keine Abstraktion. … (Sonst schon bei Hegel der Gegensatz von causa efficiens[wirkende Ursache: MEW 편집자 주] und causa finalis in der Wechselwirkung aufgehoben.))[11]MEW, Bd. 20, S. 509. (강조는 원문대로.)
여기서 MEW 의 편집자는 Causa finalis를 어떻게 번역해서 각주를 달고 있을까요? 네, 당연히 엥엘스의 생각에 맞게, 최종 원인(letzte Ursache)으로 번역해 각주를 달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한동백과 그의 지지자들은 여기에서의 Causa finalis도 목적인이라고 하면서, “물질과 그 내재적 운동”에 목적 개념이 있지 않느냐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헥켈이 헤겔을 곡해한 것처럼, “자, 봐라. 이런 문헌적 근거도 있지 않느냐” 하고 왜장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엥엘스가 말하고 있는 것은, Causa finalis와 causa efficiens의 대립은 이미 지양되었고, 물질과 운동은 추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엥엘스의 생각은, 앞서 언급한 여러 부분에서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이것이 MEW의 편집자의 오류라고, 그(혹은 그의 권위, 또는 그 책의 권위 등등)를 무시하고, 그렇게 왜장친다면, 작용인과 목적인, 물질과 그것의 존재 양식인 운동, 최종 원인 등등에 관해 앞서 언급했던 꽤 많은 것들을 또다시 들려줄 수밖에요. 마이동풍(馬耳東風)이 아니길 바라면서요!
정리해 봅시다. 한동백은 이 글 외에 다른 글들에서도 꽤 자주 ≪자연의 변증법≫을 인용합니다. 그런데, “이것으로부터 모든 내적 목적 그 자체가 얼마나 이데올로기적인 규정인지 분명한 결론이 나온다”라고 하는 문장이, 한동백이 주로 인용하고 있는 중원문화의 번역으로는 “이로부터 내적 목적 그 자체가 얼마나 관념적인(공상적인) 규정인가 하는 것이 드러난다”[12]프리드리히 엥겔스, ≪자연변증법≫, 윤형식ㆍ한승완ㆍ이재영 역, 중원문화, p. 211.라고 하는 문장이, 그 책에서 이렇게 명백하게 이야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 책을 인용하면서, 앞서와 같은 주장을 할 수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사실 왜 그렇게 하는지가 핵심인데, 이것은 뒤에서 살펴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심지어 토론회 당일 한동백은, “목적은 “그 자체 내에 특수성과 외면성의 계기를 지니며, 따라서 활동적이고 더 나아가서는 스스로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밀쳐내려는 충동”(G. W. F. 헤겔, ≪대논리학≫ 제III권, 임석진 역, 자유아카데미, 2022, p. 313.)”[13]한동백, 앞의 글, p. 79.이라는 구절을 언급하며, 정확히 옮길 수는 없지만, “목적 개념을 이해하는 데,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엥엘스도 헤겔이 말하고 있는 충동이라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해, 이것을 비과학적이라고 말했다”는 취지로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한동백이 주장하고 있는 바의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뒤에서도 계속 이야기해야 하기에, 여기서 굳이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내용을 떠나서 토론회 당일 정말로 이렇게 이야기했다면, 한동백 역시 ≪자연의 변증법≫의 이 부분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닌지? 그럼에도 어떻게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모를 일입니다. 바로 그 문장에서 엥엘스는, ‘충동’을 통해서건, 아니건, 헤겔의 “내적 목적”이라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이데올로기적인 규정인지”를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상, 여기까지의 결론은 간단합니다. 자신이 인용한 번역본에 “목적인(Endursache)”이라고 괄호 안에 원문까지 병기하고 있고, 인용한 부분의 앞뒤가 자신의 주장과는 완전히 다른 말을 하고 있는데도, 모르고 그랬다면, 이해, 혹은 정확히는 이해력이 부족한 것이요, 알고도 그랬다면, 사기를 치는 것이겠지요!
2) 문헌적 근거 (2) ― 엥엘스, ≪반뒤링≫
이제, 두 번째 근거라고 하는 것도 살펴봅시다. 이번에도 인용이 꽤 길 듯합니다. 독자 여러분들께,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1) ≪반뒤링≫ (1)
청개구리나 잎을 먹는 곤충이 푸른색이고 사막의 동물이 사황색(沙黃色)이고 극지의 동물이 주로 백설같이 흰색이기는 하여도 그것들이 일부러 또 어떤 관념에 따라 그러한 빛깔을 가지게 된 것은 물론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이러한 빛깔은 다만 물리적 힘과 화학적 인소의 작용에 의하여서만 설명되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동물들이 그러한 빛깔에 의하여 자기들이 생활하는 환경에 합목적적으로 적응되어 있다는 것과 그 결과 적들의 눈에 훨씬 덜 띄게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부 식물들이 그것에 내려앉는 곤충을 잡아먹는 데 사용하는 기관도 그러한 활동에 적응되어 있으며 심지어 합목적적으로 적응되어 있기까지 하다. 그리하여 뒤링씨가 적응은 오직 관념의 작용에 의하여서만 야기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합목적적인 활동도 역시 관념을 매개로 하여 진행되어야 하며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른 말로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이리하여 우리는 현실철학에서 늘 그러하지만 다시금 자기의 목적을 실현하는 조물주, 즉 신에 도달하게 된다. (F. 엥겔스, ≪반뒤링론≫, 한철 역, 이성과현실, 1989, p. 108.)[14]같은 글, p. 92.
얼핏 보기엔 ≪자연의 변증법≫에서의 빈약한 근거와는 다르게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인용문의 앞뒤 문장, 그리고 ≪반뒤링≫의 관련 부분들을 확인해 보면, 몰이해 혹은 사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시간만 있다면, MEW, Bd. 20의 관련 부분을 직접 번역하면 좋겠지만, 그럴 여유가 없기에, 한동백과 그 지지자들도 가지고 있을 박종철 출판사의 ≪저작 선집≫ 제5권에서 인용문의 앞뒤를 살펴보고,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말씀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인용문의 앞에 있는 부분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최근에는 특히 헥켈에 의해 자연 육종이라는 표상이 확대되어 종의 변이가 적응과 유전의 상호 작용의 결과로 파악되고 있는데, 이 경우에 적응은 이 과정에 변화를 일으키는 측면으로, 유전은 이 과정을 보존하는 측면으로 서술되고 있다. 그러나 뒤링 씨가 보기에는 이것도 역시 옳지 않다.[15]프리드리히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반-뒤링)≫(≪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5권), 박종철 출판사, 1994, p. 79. (강조는 인용자.)
그래서 뒤링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연이 부여하거나 박탈하는 생활 조건들에 대한 진정한 적응은 표상을 통해 규정된 충동과 활동을 전제로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적응이란 외관에 불과하며, 그 경우에 작용하는 인과성은 물리적인 것, 화학적인 것, 식물생리학적인 것이라는 하급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다.”[16]같은 곳. “어떤 식물이 생장해 가는 과정에서 빛을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길을 취한다고 한다면, 자극의 이러한 작용은 물리학적 힘과 화학적 동인의 결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경우에 비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적응에 대해서 말하려 한다면, 이는 심령론적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 틀림없다.”[17]같은 곳. (강조는 인용자.)
뒤링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헥켈이 말하고 있는 “적응”이라는 것은, “적응”이 아닌 그것의 외관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물리학적, 화학적, 식물생리학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의 “적응”이란, 표상에 통해 규정된 충동과 활동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적응”의 개념을 자연에 적용한다면, 그것은 자연이 마치 의식을 가지고 사고하고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과 같은 심령론적인 혼란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런 뒤링에 대해, 엥엘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뒤링 씨는 화나게 하는 것은 역시 명칭이다. 그러나 그가 이 과정을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다: 여기서 문제는, 그러한 과정들에 의해 유기체의 종에 변이가 야기되는가 야기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뒤링 씨는 이번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18]같은 곳. (강조는 인용자.)
그런데 뒤링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바로 그 책(≪엄밀한 과학적 세계관 및 생활 형상으로서의 철학 코스≫)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엥엘스로부터의 인용입니다.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새로이 대상적 세계를 질서 있게 만들어야 하며,” 자연은 이와 아울러 그 밖의 많은 일들, 요컨대 “사람들이 보통 자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수준을 뛰어넘는 면밀함을 요구하는” 그러한 일들을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자연은 자신이 왜 이러저러한 것을 창조하는가를 알고 있으며, 자연은 하녀가 하는 자질구레한 봉사를 행해야 하며, 자연은 면밀함을 갖추고 있다. 이것만 하더라도 주관적인 의식적 사유에 있어서의 아주 대단한 완성이지만, 자연은 이러한 것들에 그칠 뿐만 아니라 의지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충동은 겸업으로 다음과 같은 실재적인 자연적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영양 섭취, 번식 등등. 그리고 우리는 이 겸업을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오직 간접적으로만 의욕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19]같은 책, pp. 74-75.
그래서, 엥엘스는 뒤링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연이 누구의 의지에 따라 이러저러한 일을 하는가를 아주 정확히 알고 있으며 자연의 면밀함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연의 의지에 대해서까지 운운하는 바로 그 사람이 다른 사람”, 즉 뒤링이 헥켈에 대해서는, “이렇게도 엄격하다! 확실히 심령론적 혼란임에 틀림없다 ― 그러나 그 혼란은 누구에게 있는가? 헥켈에게 있는가, 아니면 뒤링 씨에게 있는가?”[20]같은 책, p. 79.
진정한 의미의 “적응”이란, 표상에 통해 규정된 충동과 활동을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적응”의 개념을 자연에 적용하고 있는 헥켈은 심령론적 혼란에 빠져 있다는, 뒤링의 내로남불! 그런데, “의식적으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자연”[21]같은 책, p. 75., “의지도 가지고 있”는 자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다시 말해 심령론적 혼란에 빠져 있는 자는, 정작 뒤링당신이 아닌가!
이어서, 엥엘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심령론적 혼란일 뿐만 아니라 논리적 혼란이기도 하다.”[22]같은 책, p. 79. 왜냐하면, “이미 본 바와 같이, 뒤링 씨는 목적 개념이 자연에서도 통용된다고 전력을 다해 주장”하고 있고, “수단과 목적의 관계는 결코 의식적인 의도를 전제하지 않는다”고도 했다.[23]같은 책, pp. 79-80. (강조는 인용자.)
그렇다면, 뒤링, 당신의 말은, 의식적인 의도를 전제하지 않고도, 목적 개념이 자연에서도 통용된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헥켈의 “의식적인 의도도 없고 표상의 매개도 거치지 않는 적응”을 진정한 적응이 아닌 외관상에 불과한 적응이라며, “그토록 반대하는”가? 헥켈이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뒤링 당신이 말하고 있는, 의식적인 의도를 전제하지 않고도, 목적 개념이 자연에서 통용된다는, 즉 자연에서의 “그러한 무의식적인 목적 활동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24]같은 책, p. 80. (강조는 인용자.) 당신은 정말, 논리적으로도 앞뒤가 하나도 안 맞는군!
이것이 뒤링의 심령론적 혼란이자, 논리적 혼란인데, 엥엘스는 바로 이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러한 뒤링의 논리적 논란을 보여 주기 위해, 자연에서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고 있는데, 이것이 한동백이 인용한 바로 그 문장입니다.
따라서, 청개구리와 잎을 먹는 곤충이 녹색을 띠고 사막의 동물이 모래의 노란색을 띠고 극지의 동물이 눈처럼 흰색을 띤다 하더라도, 이 동물들이 의도적으로 또는 그 어떤 표상에 따라 이런 색을 띠는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이와 반대로 이러한 색들은 물리학적 힘과 화학적 동인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25]같은 곳.
뒤링, 이것이 당신이 비판하는 “물리학적인 것, 화학적인 것, 식물생리학적인 것이라는 하급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물리적인 힘과 화학적 동인의 결합에 지나지 않”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적응이 아닌 외관에 불과한 적응, 다시 말해 “의식적인 의도도 없고 표상의 매개도 거치지 않은 것” 맞지?
그렇지만 이 동물들이 그러한 색들 덕분에 자신들의 생활 수단에 합목적적으로 적응되어 있다는 것, 게다가 그리하여 이 동물들이 적들의 눈에 잘 띄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식물들이 자기 위에 내려앉은 곤충을 잡아먹는 데 사용하는 기관도 그러한 활동에 적응되어 있고, 그것도 합목적적으로 적응되어 있다.[26]같은 곳. (강조는 인용자.)
그런데, 봐라. 이것은 동시에, 뒤링 당신이 말하고 있는, 의식적인 의도를 전제하지 않고도, 목적 개념이 자연에서 통용된다는, 즉 자연에서의 “그러한 무의식적인 목적 활동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잘 생각해 봐라. 당신이 비판하는 것과 당신이 말하는 것이 같은 게 아닌가? 논리적 모순이 아닌가?
그런데 이것은 또한 당신이 말한 “자연이 부여하거나 박탈하는 생활 조건에 대한 진정한 적응은 표상을 통해 규정된 충동과 활동을 전제로 한다”는 말과도, 또다시 논리적으로 모순되지 않나? 총체적 난국이군!
그런데 뒤링 씨가 적응은 표상을 통해 작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그가 합목적적 활동도 표상을 매개로,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는 것에 불과하다.[27]같은 곳.
당신의 말대로 하면, 자연에서는 무의식적(ㆍ무의지적)인 합목적적 적응이 가능하다. 그런데 당신은 이미 “적응은 표상을 통해 작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이 말한 자연에서의 무의식적(ㆍ무의지적) 목적 활동이라는 것은, 어찌되었든 앞뒤가 안 맞는 말이고, 그냥 해 본 말이거나 헛소리일 테고, 진짜 하고 싶은 말은 혹시, 자연의 합목적적 활동은 “표상을 매개로,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논리적 혼란뿐만 아니라 다시금 심령론적 혼란에 빠진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현실철학[뒤링의 철학: 인용자]에서 흔히 그랬듯이 다시금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는 창조주, 즉 신에 도달하였다.”[28]같은 곳. 그런데도, 뒤링은 끝까지 내로남불!
“이러한 방편은 전에는 이신론이라고 불리면서 별로 중시되지 않았다”(라고 뒤링 씨는 말한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이와 관련하여서도 퇴보한 것 같다.”[29]같은 곳.
그런데, 이렇게 남들을 이신론자라고 비난하고 있는 뒤링, 당신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이신론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심령론적 혼란이냐, 논리적 혼란이냐, 둘 중에 뭐냐?
이상 살펴본 대로, 한동백의 인용문 앞뒤를 살펴보면, 엥엘스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것입니다: 목적 개념이 자연에서도 통용된다고 전력을 다해 주장했던 것은 뒤링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말하는 그러한 목적 활동은 무의식적인 것인가, 의식적인 것인가? 무의식적인 것이라면 뒤링 당신은 논리적 모순에 빠지고, 의식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심령론적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
그런데 한동백은 이러한 내용을 말하기 위해 엥엘스가 사용한 “무의식적 목적 활동”이라는 말을, 앞뒤 다 자르고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엥엘스를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엥엘스 역시 뒤링을 비판하면서 생물학의 성과를 통해 합목적성이 단순히 의식, 주관적 의도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자연 자체에서 발양되는 것임을 지적하였다.[30]한동백, 앞의 글, pp. 91-92. (강조는 인용자.)
여기까지 이야기해도, 한동백과 그 지지자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주장이 맞다 왜장치겠지요? 확실히 해 두기 위해, 앞서 예고한 대로, ≪반뒤링≫의 또 다른 부분을 살펴봅시다. 이것까지 보고도, 또 이 두 부분의 내용을 합쳐 보고도, 뭐라고 할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합니다.
(2) ≪반뒤링≫ (2)
한동백은 ≪반뒤링≫의 또 다른 부분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헤겔: 인용자] 목적론에서 합리적 핵심만 거두어들인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자연의 자기목적적 운동에 관한 변증법적 해명으로 될 수 있다. 그래서 엥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헤겔의 내적 목적―즉,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제3자, 예컨대 섭리의 지혜 같은 것에 의하여 자연에 도입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 자체의 필연성에 내포되어 있는 그러한 목적―을 적용하는 것조차 철저한 철학적 훈련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엉뚱하게도 자연에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행위를 강요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심령론적 경향이 조금이라도 보이기만 하면 극도의 도덕적 분격을 금치 못하는 바로 그 뒤링씨가 “본능은 주로 그 작용과 관련된 만족감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라고 아주 명확하게 단언한다. (F. 엥겔스, ≪반뒤링론≫, 한철 역, 이성과현실, 1989, p. 103.)[31]같은 글, p. 91. (강조는 한동백.)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에 앞서, 논란의 중심이었던, 토론회 당일로 되돌아가 봅시다. 사회를 맡은 문영찬 연구위원장은 이날의 발제 내용이 토론회 참가자들이 이해하기에는 난해한 내용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마도 선의에서 토론회 참가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중간중간 꽤 자주 개입하며, 한동백이 발제한 내용을 설명했다고 합니다. 전언으로는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한동백이 주장하고 있는 바를 보충 설명까지 하면서, 그것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이런 말까지 나왔다고 합니다. 채만수: “지금 이 글을 나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한동백, 문영찬 빼고, 나머지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지?” (그런데, 이 글이 얼마나 무근거하고 비논리적인지, 내용상 심각한 오류로 가득 차 있는지, 어떻게 이런 글을 옹호할 수 있는지, 비판한 것을 두고, 한동백과 그 지지자들은, 채만수 소장은 이 글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고 스스로 이야기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합니다.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지금 문제 삼을 이 부분 역시, 문영찬 위원장이 당일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보충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정확하게 옮기는 것은 아니지만, 대략 이런 취지로 말했다고 합니다. 문영찬: “이게 핵심이죠. 엥겔스가 말한 목적 개념의 핵심은 헤겔을 인용했지만, 대상 자체의 필연성에 내포되어 있는 그러한 목적, 이게 엥겔스가 파악한 목적 개념이고, 바로 유물론적인 목적 개념이 아닌가 합니다!”, 한동백: “맞습니다. 필연성의 작용 속에서 생성되는 규정으로서의 목적, 이렇게 생각해야 유물론적으로 목적 개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죠.”
두 분께서는 대단한 철학적 대화(?)를 하고 계시다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전해 듣는 저로는, 기막힌 만담 한 편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또한 엥엘스가 말하고 있는 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늘어놓는 말(?)들이거나, 혹시라도 이해하고 있다면 진~한 사기이기 때문입니다. 둘 다 이해하지 못하고 이렇게 늘어놓는 것이면, 두 사람이 진행하는 전형적인 만담이요, 한 명이 이해하고도 저렇게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사기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인용문의 앞뒤를 살펴봅시다. 뭔가를 빠뜨리거나, 숨기고 있을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뒤링 씨에게 있어, 유기계로의 개념상의 이행의 수단이 되는 것은 목적 개념이다. 이것 역시도 헤겔에게서 빌려 온 것인바, 헤겔은 『논리학』―개념론―에서 Teleologie, 즉 목적론을 매개로 하여 화학 작용으로부터 생명으로 이행하고 있다. 우리는 뒤링 씨의 책 어디를 들추더라도 헤겔의 “조잡함”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는 조금도 거리낌 없이 이 조잡함을 뿌리를 파헤치는 그 자신의 과학이라고 부른다.[32]프리드리히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반-뒤링)≫(≪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5권), 박종철 출판사, 1994, p. 74. (강조는 인용자.)
이 문단은 ≪반뒤링≫ 중 “제1편 철학, 제7장 자연 철학. 유기계[유기적 세계](Organische Welt)”에서 인용한 것인데, 엥엘스의 말은, 바로 앞 장인 “제6장 자연 철학. 우주 생성론, 물리학, 화학”에서, “제7장 유기계”로 넘어가기 위해, 뒤링이 헤겔의 개념론 중 목적 개념을 차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 그런데 뒤링 씨, 당신은 헤겔의 철학이 “조잡하다”[33]“[뒤링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용자] … “열병적 환상들”이 나타났는바, “헤겔이라는 자”가 이것들을 정점에 끌어올렸다. 이 자는 … Continue reading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조잡하다는 그 철학을 거리낌 없이 가져다 쓰고 있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헤겔 ≪논리학≫의 내용을 대략적으로라도 살펴보고 넘어갑시다. 뒤에서 비판할 내용의 배경 지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헤겔의 ≪논리학≫ 체계는, 크게, 존재론, 본질론, 개념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대)논리학≫이든, 그것을 요약한 ≪철학 강요(엔치클로페디)≫의 제1부인 ≪(소)논리학≫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의 내용을 아주 거칠게 이야기해 보자면, 세계 전체를 통일적으로 인식하고 사고할 수 있는 절대적인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과거부터 논리학에서 사용되어 왔던 수많은 개념들이 헤겔의 머릿속에서 재해석되어, 스스로를 반성(헤겔 철학에서 반성이란,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것에 비추어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고, 이로써 자신이 정립했던 것을 부정하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을 부정(헤겔 철학에서 부정이란, 단순한 “~이 아니다”가 아니라, “~이 아니”라면, 그것은 다른 “~이다”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부정한다는 것은,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것에 비추어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이고, 이로써 또 다른 개념으로 이행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하면서, 계속해서 다른 개념으로 이행ㆍ발전해 나갑니다.
이 개념, 저 개념은, 여기까지는 통일되어 있는데(혹은 통일적으로 인식ㆍ사고할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한계가 있구나. 이렇게 헤겔 ≪논리학≫에서는, 개념이 스스로 반성하고, 자신을 부정하면서, 그 계기에서 나오는 다음 개념으로 이행ㆍ발전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들 많이 들어 보셨을 ‘지양(Aufhebung)’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해 보셔도 좋겠네요. 그리고 그 여정은, 다들 잘 알고 계시는, 절대 이념(absolute Idee)에 도달해서야 끝이 납니다: “주관적인 이념과 객관적인 이념의 통일이야말로 이념의 ‘참된 개념’이며, 이와 같은 개념에 있어서는 이념 자체가 대상이 되며, 또 객관도 이념이다. 이와 같은 객관은 모든 규정을 전부 포괄한 객관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통일이야말로 ‘절대적이며 완전한 진리’, 즉 자기 자신을 사고하는 이념이며, 특히 논리학에 있어서 ‘논리적인’ 이념이라고 하는 것은 사고하는 이념보다도 이와 같은 통일을 의미한다.”[34]G. W. F. 헤겔, ≪헤겔 논리학≫(개정판), 김계숙 역, 서문문화사, 1997, p. 329. (강조는 인용자.)
사실, 헤겔의 입장을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세계는 원래부터 통일되어 있는데, 그 세계의 통일성을 파악하는 방법이 자신이 찾은 방법, 즉 자신의 방법이라는 것이고, 또 한 번 거칠게 이야기해 보면, 방법적으로는 이것이 바로 변증법적 방법이기도 합니다. 물론 위에서 볼 수 있듯, 개념이 자기 운동하고 있는 것처럼, 순전히 관념론적이고, 신비적인 모습을 띠고 있지만요. 다시 한번 거칠게 정리해 보자면, 고래로부터의 변증법이 헤겔에 의해 관념론적으로 그 정점에 도달했고, 이것을 유물론적으로 뒤집은 것이 유물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뒤집었는지를 이야기하자면, 완전히 주제에서 벗어날 것이고, 또 헤겔의 ≪논리학≫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하자면, 존재-무-생성으로부터 시작해… 각각의 개념으로의 이행 등등… 한도 끝도 없을 듯하고… 아무튼 뒤링도 한동백도(뒤링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결국은 헤겔의 개념론 중 목적 개념을 차용하고 있기에, 개념론이라도 짧게 언급해 보려고 했는데, 일단 배경 지식은 여기까지만 하고, 뒤에서 조금 더 살펴봅시다. 앞의 인용문에서 이어집니다.
목적과 수단이라는 표상을 유기계에 적용하는 것이 어느 정도로 정당하며 합당한가를 여기에서 연구하는 것은 옆길로 새는 일이 될 것이다. 어쨌든 헤겔의 “내적 목적”을 적용하는 것, 즉 예를 들면 섭리의 지혜처럼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제삼자에 의해서 자연 속에 도입된 것이 아니라 사태 자체의 필연성 속에 놓여 있는 목적을 적용하는 것도 완전한 철학적 훈련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언제나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행위를 무분별하게 개입시키는 것으로 되고 만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약간의 “유심론적” 움직임만 감지하더라도 극도의 도의적 격분에 휩싸이는 바로 그 뒤링 씨가…[35]프리드리히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반-뒤링)≫(≪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5권), 박종철 출판사, 1994, p. 74. (강조는 인용자.)
먼저, 엥엘스는 말합니다. 뒤링 씨, 당신이 그렇게 비난했던 헤겔의 철학을 베껴서 당신의 철학이라고 팔아먹는 것은 알겠는데, 베끼려면 제대로 베껴야지! 내가 보기엔, 당신은 “철학적 훈련”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것 같군. 그러니까 “사태 자체의 필연성 속에 놓여 있는 목적”이라는 “헤겔의 내적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섭리의 지혜…” 뭐 이런 것들처럼,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행위”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 아니요? 다른 사람에게는 유심론, 이신론이라며, 잘도 비난하더니, 이게 바로 그런 것이요! (그리고 우리는 앞에서 이미 이러한 모습을, 즉 심령론적 혼란을 겪고 있는 뒤링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것은, 한동백이 인용한 부분, 바로 앞에 있었습니다! 무슨 뜻인지 몰라서 인용하지 않은 것일까요? 아니면 알고도 감춘 것일까요? 다시 한번 물어봅니다. 몰이해입니까? 사기입니까?
엥엘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뒤링 씨, 당신 철학의 다른 부분처럼, 유기계에 대해서도 헤겔을 베끼고 있네. 개념론의 목적 개념을 베끼고 있잖아. 아, 그런데 목적 개념을 유기계에 적용하는 게 어느 정도까지 맞을까? 다음은 상상의 나래를 한번 펼쳐 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당연히 오케이. 그럼, 동물은, 동물이라면 어디까지? 식물은? 아니 이보다 더 낮은 미생물 같은 것들은? 등등. 아, 안 그래도 바쁜데, 당에서는 뒤링을 꼭 비판해 달라고 해서, 이렇게 없는 시간에, 틈틈이 써서 보내고는 있는데… 일단 이건 주제에서 벗어나는 것이니, 제쳐 두고, 뒤링 비판에 집중하자.’ 물론 뒤에서 어쩔 수 없이 한 번 더 이야기하겠지만, 여기서는 저의 상상 속에서 유기체들을 하나씩 넣어 본 것이지, 엥엘스의 입장에서는, 식물, 미생물의 “목적” 등등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기계 일반에 대해서도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 어느 정도로 정당하며 합당한가”라고 말하고 있는 엥엘스가, 하물며 한동백이 주장하는 것처럼, 무생물에까지, 즉, 물질 일반, 만물(萬物)에 적용되는 목적 개념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아니라고요? 다시 한번 읽어 보세요. 목적 개념을 유기계에 적용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면, 엥엘스가 구태여 그것을 “여기에서 연구하는 것은…”이란 말을 왜 했겠습니까? 그런데 심지어 무기계에까지 적용해야 한다고요? 그것이 유물론이라고요?
한동백은, 이렇게 중요한 부분을 쏙 빼고, 바로 뒤에 있는 구절부터 인용하면서, 이것이 자신의 주장의 근거라고 왜장치고 있습니다: 헤겔의 목적론에서 합리적 핵심만 거두어들인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자연의 자기목적적 운동에 관한 변증법적 해명으로 될 수 있다. 엥엘스도 그렇게 말했다. … 운운.
목적 개념을 “유기계에 적용하는 것이 어느 정도로 정당하며 합당한가를 여기에서 연구하는 것은 옆길로 새는 일이 될 것”이라는 엥엘스의 말을 머릿속에 두고, 여기서 한 걸음만 앞으로 되돌아가 봅시다. 엥엘스가 뒤링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기 위해, 그에게 되돌려 주었던 ‘무의식적(ㆍ무의지적) 목적 활동’에 대해 말하고 있는, 그 구절로 말입니다.
아직도, 그 구절에서의 ‘무의식적(ㆍ무의지적) 목적 활동’이 엥엘스의 견해라고 생각되십니까? 좋습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만, 제가 백 보 천 보 뒤로 물려서, 그렇게 주장하시는 분들의 말씀이 맞다 칩시다. 그렇다면, 사막의 동물, 극지의 동물, 청개구리, 곤충, 식충식물까지는 엥엘스가 말한 것이 되겠네요. 아니, 다시 백번 양보해서, 유기계 일반의 ‘무의식적(ㆍ무의지적) 목적 활동’이라고 칩시다. 그런다고, 그것이 자연, 물질 일반의 “자기목적적 운동에 관한 변증법적 해명”이 될 수 있다, 엥엘스도 그렇다 말했다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까? 엥엘스는 명확하게, 목적 개념을 “유기계에 적용하는 것이 어느 정도로 정당하며 합당한가를 여기에서 연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백 보 천 보 물리고, 백번 양보해 보아도, 한동백이 주장하고 있는 문헌적 근거라는 것은 순전히 엉터리이고, 결국은 막다른 길이지 않습니까!
또다시 토론회 당일의 현장입니다. 두 분의 투철한 유물론자들께서는 이렇게 대화를 나누십니다. 문영찬: “이게 핵심이죠. 엥겔스가 말한 목적 개념의 핵심은 헤겔을 인용했지만, 대상 자체의 필연성에 내포되어 있는 그러한 목적, 이게 엥겔스가 파악한 목적 개념이고, 바로 유물론적인 목적 개념이 아닌가 합니다!”, 한동백: “맞습니다. 필연성의 작용 속에서 생성되는 규정으로서의 목적, 이렇게 생각해야 유물론적으로 목적 개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죠.”
본래 헤겔의 목적 개념은 이런 것인데, 뒤링은 유기계를 설명하기 위해, 헤겔의 목적론을 차용했지만, 그 개념을 잘못 이해했다는 엥엘스의 비판을 두고, 두 분께서 나누는 대화, “봐라! 이것이 엥겔스의, 유물론의 목적 개념이다!” 정말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는, 웃픈 상황입니다! 어떤 식, 어떤 이유로든, 뒤링이 헤겔을 잘못 이해하고 왜곡했다면, 한동백과 문영찬은 나아가 그 지지자들은, 이렇게 엥엘스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를, 그의 사상을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제가 왜 이 장면을 두고, 두 명의 만담 아니면,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라고 했는지, 이해하실 수 있겠지요!
기왕에 토론회로 돌아간 김에 한 장면만 더 봅시다. 앞서 검토했던,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경험과 이론으로부터, 물질과 그것의 존재양식인 운동은 창조될 수 없으며 그래서 그것이 그 자신의 목적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36]한동백, 앞의 글, p. 88. 운운하는 부분입니다. 두 분의 걸출한 맑스주의자(맑스–레닌주의자)께서는 이렇게 대화(?)를 나누십니다. 문영찬: “물질과 운동이 창조될 수 없으면, 이미 그 자체에 목적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엥겔스의 견해라는 거죠?” 한동백: “네. 맞습니다. 그러니까 엥겔스의 말은, 헥켈이 이야기하고 있는 식물은 작용인, 동물은 목적인,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이, 그러니까 애초에 동물을 이야기하기도 전에, 엥겔스는 여기서 그걸 ‘목적인’이라고 표현했는데, 개별 물질 자체에 ‘목적성’이 존재한다는 말이죠.” 맑스주의의 공동 창시자 엥엘스가 말한 것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사기를 치고 있는 맑스주의자(?)의 모습입니다. 이제는 포기. 두 분의 걸출한 입담에 그저 박수를 보낼 수밖에요. 이것이 오역에 기초한 몰이해이거나, 아니면 사기라는 것은, 앞서 이미 말한 대로입니다!
* * *
여기까지, 한동백이 엥엘스를 완전히 왜곡하고 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자신이 하지도 않은 말을 가지고, 이리저리 왜곡하고 있으니, 엥엘스는 얼마나 억울할까요? 그리고, 당일 토론회에 참석하지 않은 저로서는 기막힌 명만담을 전해 듣고 있다 했지만, 직접 참석했던 동지들께서는 얼마나 울화통이 터졌을까요? 송구할 따름입니다.
여기까지 비판을 진행한 시점에서, 철저한 변증법적 유물론자이자, 투철한 맑스주의자(맑스-레닌주의자)이신, 한동백, 문영찬, 그리고 그 지지자들에게 다시 한번 묻습니다. 몰이해입니까? 사기입니까? 다들 이해하지 못하고 계신 거라면,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마태복음, 15장 14절)라는 구절을, 누군가 누구에게 사기를 치고 있는 거라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태복음, 7장 15절)라는 성경 구절을, 지면에 띄워 보내 드립니다.
* 성경의 구절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혹시라도 표현상 언짢으신 게 있으셨다면, 양해의 말씀을 구합니다.
3) 현대 생물학에 대한 왜곡
(1) 마이어, ≪생물학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
앞서 살펴본 대로 한동백은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엥엘스를 왜곡하고 있기도 하지만, 현대 생물학에 대해서도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20세기의 다윈’이라고도 불리는 전 하버드대 교수 에른스트 마이어의 저작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2005년 출판된 이 저작, ≪생물학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What makes biology unique? )≫는, 100세를 넘게 살며(1904~2005년), 그가 남긴 25번째이자 마지막 저작입니다.
변증법적 목적 개념[?]의 타당성은 특히 자연과학 분야에서 입증되었는데, 특히 생물학의 분야에서는 그것이 독보적이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생물학자 E. W. 마이어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철학 문헌에서 목적론적 분석이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에 있는 이유는 이제 명백하다. 참으로 우리는 이러한 문헌에서 목적론의 문제들을 취급하는 것은 어떻게 과학철학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최소 50년 동안 상당히 많은 과학철학자들이 목적론에 관한 논문을 썼는데, 그들의 분석은 논리와 물리주의 방법들에 근거한 것으로, “가장 훌륭한 방법으로” 또는 최소한 그러한 분석들을 위해서는 유일하게 믿을 만한 방법들인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러한 철학자들은 비록 목적론이 대부분 또는 전적으로 생명의 세계와 관계한다고 할지라도 생물학자들의 발견을 무시해버렸다. 그들은 기능이라는 단어가 두 가지 아주 다른 현상들을 가리킨다는 것 그리고 프로그램이라는 개념이 목적–방향성(goal-directedness)의 문제에 새로운 국면을 부여한다는 것을 무시했다. 그들은 근접 원인과 진화적 원인들 간 구별과, 정적인 (적응된) 체계들과 목적–방향적인 활동들 간 차이점을 혼동했다. 목적론의 문제에 관한 엄청난 철학적 문헌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목적론을 일원적인 현상으로 취급하는 최근의 책과 논문들은 정말로 쓸모가 없다. 우주적 목적론의 의미, 적응성, 프로그램된 목적–방향성 그리고 결정론적 자연법칙들 간의 차이들을 인식하지 못했던 어떠한 저자들도 목적론의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다. (에른스트 마이어, ≪생물학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 박정희 역, 철학과 현실사, 2005, pp. 77-78.)[37]같은 글, pp. 92-93. (강조는 인용자.)
그러면서, 이 인용문 뒤로, 이런 말들(?)을 덧붙입니다. 길지만, 모두에도 말씀드렸던바, 비판이라는 이 글의 성격상, 전문을 인용합니다.
마이어는 방사성 붕괴 현상, 냉각 현상 등의 다양한 과학적 프로그램이 그것을 둘러싼 유기적 구성 요소들과의 결합에 의해 형성되며, 이러한 현상은 각자 보존력을 갖춘 체계를 이룬 목적 자동적(teleomatic) 프로그램의 전개라고 간주한다. 여기서 목적 자동적 과정이란, “종국 점을 갖고 있는 비유기적 자연에 있는 모든 과정들을 포함”하는 프로그램의 전개 양상을 의미한다. 여기서 종국 점이란, 개별적 현상 체계 내부에 설정되어 있는 목적이다. 그는 이어서 목적 법칙적(teleonomic) 과정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그것은 “목적 법칙적 과정이나 행동은 그것의 목적 방향성이 진화된 프로그램의 영향 때문인 그러한 것”으로 되며, “한 과정이나 활동의 목적 방향을 포함”하고 “엄격하게 궁극적 인과 작용들과 관계”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 유전 프로그램과 신체 프로그램 간의 대립 운동을 통해 해명한다. 마이어의 예에 따르자면, 칠면조 수컷이 암컷에게 과시할 때, 그의 과시 행동은 그의 세포핵에 있는 DNA의 직접 통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중앙 신경계에 있는 신체 프로그램의 통제를 받는다. 이러한 뉴런 프로그램은 “유전 프로그램으로부터 나온 지령들의 부분적 통제 아래에서 발달하는 동안 심어진 것”인데, 그것이 형성된 이후에는 유전 프로그램에 대해서 일정 주도적 성격을 지닌다. 즉 신체 프로그램은 이후 유전적 형성으로 이어질 사태를 세우면서, 유전 프로그램의 목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유전 프로그램의 총체는 신체 프로그램이 지시한 대로 진화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목적 법칙적 의미에서 신체 프로그램이 (유전 프로그램에) 지시하는 규정성은 유전 프로그램의 내적 전개 없이는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38]같은 글, pp. 93-94. (강조는 인용자.)
이하, 한동백의 몰이해 또는 사기 행각을 제대로 밝히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인용과 설명이 필요할 듯합니다. 제가 이해하고 요약해서 설명드리는 마이어의 주장이 아니라, 원문 자체를 통해 마이어가 어떻게 주장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 드려야, 일말의 오해의 소지, 반박할 여지도 남기지 않고, 한동백의 주장이 얼마나 헛소리인지가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물론 마이어의 주장 전체가 아니라,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에 한정해서이긴 하지만, ‘20세기의 다윈’이 현대 생물학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번 기회에 알아 두시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상당히 많은 분량에 대해, 다시 한번 독자 여러분들의 너그러운 이해를 부탁드려 봅니다. 그리고 이하, 제가 그의 주장을 인용하고 설명을 덧붙인다고 해서, 그의 주장 전부에 동의하는 것이 아님을 미리 밝혀 둡니다.)
① 생물학의 특수성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마이어는 이 책에서, 그 제목대로, 과학으로서의 생물학이 물리학ㆍ화학 등과는 구별되는, 어떤 상대적 특수성, 마이어의 표현으로는 ‘자율성(autonomy)’을 가지고 있는지를 고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 생물학의 대상으로서의 생물계에는, 무생물계과 다른 현상ㆍ과정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생물학적 체계에는 재생산ㆍ물질 대사ㆍ복제ㆍ규제ㆍ적응ㆍ성장 그리고 위계적 조직화와 같은 능력들이 주어져 있다. 그러한 종류 중 어느 것도 무생물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 다른 생물학 특유의 개념은 진화라는 개념이다. … 아마도 지금 무생물과 생물계 간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처럼 보이는 것은 생물개체군이라는 개념… 모든 개체는 독특하다. 60억 인구 중 어떠한 두 사람도 똑같지가 않다. …
게다가 모든 생물학적 과정들은 한 가지 면에서 무생물계에서 진행되는 모든 과정들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 그것들은 이중 인과 관계(dual causation)에 종속된다. 순전히 물리적인 과정들과는 반대로, 이러한 생물학적 과정들은 자연 법칙뿐 아니라 유전 프로그램(genetic program)에 의해 통제된다. 이러한 이중성은 충분히 무생명적 과정과 생명적 과정 간에 분명한 구획을 제공해 준다.[39]에른스트 마이어, ≪생물학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 박정희 역, 철학과 현실사, 2005, pp. 52-54. (강조는 인용자.)
여기에서 우리의 주제와 관련해 특히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이중 인과’입니다. 무생물계에서의 “순전히 물리적인 과정들”과는 다르게, 생물학적 과정은 “자연 법칙뿐 아니라 유전 프로그램(genetic program)에 의해[서도] 통제된다”는 즉, 이중 인과성이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을 가진 생물을 대상으로 하는, (현대) 생물학에는 크게 두 분야가 있는데, 분자생물학으로 대표되는 역학적(기능적) 생물학과 진화생물학으로 대표되는 역사적 생물학이 그것입니다.
생물학이 실제로 두 개의 다소 다른 분야들, 역학적(기능적) 생물학과 역사적 생물학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기능적 생물학은 모든 살아 있는 유기체의 활동들의 생리 기능을 다루는데, 특히 게놈을 포함해서 모든 세포 과정들을 다룬다. 이러한 기능적 과정들은 궁극적으로 화학과 물리학에 의해 순전히 역학적으로[mechanistically, ‘기계론적으로’ 혹은 ‘기계적인 작용으로’가 더 좋은 번역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용자] 설명될 수 있다.
나머지 한 분과는 역사적 생물학이다. … 그것은 역사적 시간의 차원 … 진화를 다루는 모든 면들을 포함하는 … 이러한 분야가 진화생물학이다.
… 생물학의 본성을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생물학의 두 분야 간의 현저한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게다가 물리과학과 생물학 간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들 중 어떤 것은 이 두 분야들 중 하나, 바로 진화생물학에만 해당된다.[40]같은 책, pp. 46-47.
… 이중 인과성은 생물학의 두 분야의 속성이라 할 수 있다. … 모든 생명 과정들이 두 인과율에 복종한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그것들 중 하나는, 우연과 더불어 정밀과학의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통제하는 자연 법칙이다. 또 한 가지 다른 인과율은 생명 세계를 아주 독특하게 특징짓는 유전 프로그램들로 구성된다. 생명 세계에는 게놈에 포함된 유전 프로그램에 의해 부분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현상이나 과정은 단 하나도 없다. 그러한 프로그램에 영향받지 않는 어떤 유기체의 활동은 단 하나도 없다. 무생물계에서는 이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41]같은 책, p. 54. (강조는 인용자.)
인용문에서처럼, 분자생물학으로 대표되는 역학적(기능적) 생물학은 주로 화학과 물리학 등으로 환원될 수 있는 분야입니다. 반면에, 앞서 살펴보았던 유전 프로그램에 의해 영향을 받는(프로그램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루겠지만, 그것 이외에 신체적 프로그램 등이 있습니다. 어쨌든 자연 법칙뿐만 아니라, 프로그램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 생물학적 과정을 다루는 분야가, 진화생물학으로 대표되는 역사적 생물학입니다.
그래서 마이어는 이 ‘이중 인과’라는 생물학적 과정의 특성으로 인해(여기에서, 생물학적 과정이 자연 법칙뿐 아니라 프로그램에 의해 통제받는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물학의 철학을 물리과학의 개념적 틀에 근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생물학의 철학이 생물학의 한 분과, 말하자면 분자생물학의 설명들을 통해 표현될 수도 없다.[42]같은 책, p. 61.
그래서 마이어는 “살아 있는 자연의 모든 것을 화학과 물리학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믿음”[43]같은 책, p. 104.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생물학의 상대적 특수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물리학ㆍ화학 등과는 다른 특성을 지닌 생물학이 보편적인 과학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② 목적론의 재구성
당연히 일반적으로 “과학적이다”라고 하는 것들이 필요하겠지요. 그래서 마이어는 이 책에서, 그리고 다른 책들(예를 들면, ≪이것이 생물학이다(This Is Biology)≫ 등)에서 “과학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생물학이 왜 보편적인 과학인가를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것까지 다루는 것은 우리의 주제를 벗어나는 일이고, 주제에만 집중하려 합니다.
200년이 넘어서야, 그리고 세 가지 큰 사건들이 발생하고 나서야, 비로소 생명체를 다루는 독립적인 과학인 생물학이 인정되었다.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우리는 이 세 가지 사건들을 다음의 세 개의 다른 항목으로 분류할 수 있다. (A) 어떤 잘못된 원리들에 대한 반박 (B) 어떤 근본적인 물리학의 원리들이 생물학에 적용될 수 없는 사례들 그리고 (C) 무생물계에는 적용할 수 없는 생물의 어떤 근본적인 원리들의 독특성에 대한 깨달음.[44]같은 책, p. 42. (강조는 인용자.)
이 인용문에서 나오는 어떤 잘못된 원리들은, ‘생기론’과 ‘우주적 목적론’을 말하는 것인데, 후자가 바로 우리의 주제와 관련된 부분입니다. 이런 비과학적 이론들에 대한 논박이, 생물학이 독립적인 과학으로서 인정받게 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원리들[생기론과 우주적 목적론]이 타당치 못하다는 것이 증명되자마자, 좀 더 넓게는, 생명계의 현상들 중 어느 것도 물리주의의 법칙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자마자, 더 이상 생물학을 물리학과 동일하게 진정한 자율적인 과학으로 인정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45]같은 책, p. 43.
목적론[우주적 목적론]은 생물학이 물리학과 동등한 과학으로 인정받기 전에 생물학에서 제거되어야 했던 [생기론에 이어] 두 번째로 타당하지 못한 원리다.[46]같은 책, p. 45.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면, 이 문장의 의미는, 앞서 보았던 것과 같은 생물학의 특수성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생물계의 현상과 과정은, 무생물계와는 다른 특수성이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설명함에 있어, 생기론이나 우주적 목적론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의 주제인 ‘목적론’도 마이어에 따르면, “물리주의의 법칙과 충돌하지 않”고 과학적으로 충분히 해명할 수 있다(뒤에서 살펴보겠지만, 단, 마이어의 구분에 따르면, 기존의 다섯 가지 ‘목적론’ 중 ‘우주적 목적론’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기 때문에, 폐기되어야 합니다)는 것[47]“살아 있는 유기체에서 보이는 외관상[seemingly] 목적론적인[teleological] 과정들이 엄밀하게 물질적으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책, p. 74.) 이고, 생물학적 과정의 특성인 ‘이중 인과’에서 설명되는 암호화된(coded) ‘프로그램’ 등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 5가지의 목적론의 구분
이제 본격적으로, 마이어가 주장하는 ‘목적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그는 전통적으로(traditionally) 목적론으로 불리어 왔던 것 혹은 외견상(seemingly) 목적론적 과정으로 보이는 것을, 다섯 가지로 구분합니다.
생물학이 진정한 과학으로 인정되려면 그 이론 틀 안에서 우주적인 목적론[teleology]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목적론이라는 단어가 자연에서 다섯 개의 다른 종류의 현상과 과정들을 위해 사용되어 왔다는 것을 필히 보여 주어야 하며, 그것들은 각각으로부터 주의 깊게 구별되어야 한다. 전통적으로 목적론적인 것으로 언급되는 네 가지 종류의 현상이나 과정들을 위해서는 만족할 만한 경험적 설명을 이용할 수 있다. 이것들은 철저하게 자연 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다섯 번째의 목적론, 즉 우주적 목적론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48]같은 책, p. 25. (강조는 인용자.)
그런데, 마이어가 보기에, 지금까지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 다른 자연 현상들에 ‘목적론’이라는 하나의 이름을 적용해 왔습니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목적론[teleology]을 일원적인[unitary, ‘하나의’ 혹은 ‘단일한’: 인용자] 현상으로 취급했다. 이는 목적론이라는 용어가 근본적으로 다른 여러 가지 자연 현상들에 적용되어 왔다는 사실을 무시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목적론에 대한 일원적인 설명을 찾는 것이 지금까지 완전히 쓸모없는 짓을 한 것임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49]같은 책, p. 77. (강조는 인용자.)
예를 들면, 목적론[teleology]이란 용어는 그리스어 텔로스(τέλος)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인데, 그것은 ‘끝’, ‘목표’, ‘목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진화생물학자에게는 목적(goal)으로서의 텔로스와 종국 점(endpoint)으로서의 텔로스 간에 큰 차이점이 있다. …
텔로스(Telos)라는 단어는 두 가지 아주 다른 의미를 갖고 철학적 문헌들에서 사용되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매우 명확한 목적[goal]을 갖는 과정을 지칭하기 위해 그것을 사용하는데, 이는 그 과정이 시작될 때 보통 예상되는 것이다. 수태된 알의 텔로스는 그것이 발달해갈 성체다. 이신론적 목적론자에게는 우주적 목적론 또한 분명한 목적[goal], 말하자면 창조자가 생각한 그리고 그의 법칙에 영향을 받는 것으로서 그것의 최종적인 완전성을 실현한 세계를 갖는다.
그러나 텔로스는 또한 단순히 끝을 향한[end-directed] 과정의 종국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였다. 폭풍우의 텔로스는 비 내리는 것이 멈출 때다. 낮은 밤의 텔로스다. 모든 자연 법칙들에 의해 야기된 과정들은 조만간 종국 점을 갖지만, 일상적으로 목적 방향적인[goal-directed] 과정의 목적[goal]을 위해 사용되는 텔로스라는 똑같은 단어를 이러한 종국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말하자면 비목적론적[nonteleological] 과정의 종국 점은 귀납적인 현상이다. 피어스(1958)는 “목적론적”[teleological]이라는 용어가 무기적 세계에 있는 자연 과정들에 적용시키기에는 너무나 강한 단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는 그는 “우리가 최종의 상태를 향한 그것들의 경향을 표현하기 위해 종국적(finious)이라는 용어를 발명할 수도 있겠다”고 제안했다.[50]같은 책, p. 75-76. (강조는 인용자.)
이렇게 마이어는, 기존에 철학에서 사용된 ‘목적(텔로스)’의 의미에서, 종국 방향적인(end directed) 과정들과 목적 방향적인(goal directed) 과정들을 구분해 냅니다. 그리고 여기서 특히, 그리고 뒤에서도 누차 살펴보겠지만, 비유기적 자연(무기계)의 과정에 ‘목적(goal)’을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종국 점(endpoint)을 가질 수는 있지만, 목적(goal)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미, 마이어가 한동백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없음이 드러나고 있지 않나요? 그의 몰이해 혹은 사기의 단면들이 말입니다.
위와 같은 목적의 의미에서 이야기된 종국 방향적인 과정들과 목적 방향적인 과정들은, (종교를 포함하여) 관념론적인 우주적 목적론을 배제한다면, 이렇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비유기적 자연에서 나타나는 외관상 종국 방향적인(end directed) 과정들과 생물계에서 나타나는 외관상 목적 방향적인(goal directed) 과정들”51).[51]같은 책, p. 70.
마이어는, 이렇게 전통적으로 단일하게 목적론으로 불렸던 것 혹은 외견상 목적론적 과정으로 보이는 것을 고찰하여, 아래의 다섯 가지로 구분합니다.[52]물론 이것은 마이어의 구분입니다. 마이어도 자신의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베크너와 우저 외에도 여러 학자들이 목적론을 구분하는 시도를 했습니다. … Continue reading
철학적 생물학적 문헌들에서 모든 목적론적이라는 용어 사용을 주의 깊게 연구한 결과 나는 이를 다섯 부분으로 제안한다. … 따라서 나는 목적론적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온 다섯 가지 다른 과정들이나 현상들을 다음과 같이 구별한다.
(1) 목적 자동적(Teleomatic) 과정들
(2) 목적 법칙적(Teleonomic) 과정들
(3) 목적적 행동(Purposive behavior)
(4) 적응 형질들[Adapted features]
(5) 우주적 목적론[Cosmic teleology]
이 각각의 다섯 가지 과정들이나 현상들은 그 나머지 네 과정이나 현상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완전히 다른 설명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목적론에 대한 일원적인 설명을 찾으려는 어떤 철학자(그들 대부분!)의 시도들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이전에 목적론적인 것으로 지목된 모든 자연 현상들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목적론이라는 주제에서 이전의 수수께끼를 벗겨 버렸다. 이제 전통적으로 목적론적이라고 불리는 다섯 가지 현상들 중 네 개가 완전히 과학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 반면에 다섯 번째 것인 우주적 목적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목적론 개념에 대한 해명은 생물학이 어떠한 신비한 속성을 갖고 있지 않은 참된 과학이라는 결론에 크게 이바지했다.[53]에른스트 마이어, 앞의 책, pp. 77-78.
○ 목적 자동적 과정들(Teleomatic processes)
이 중에서, 우리가 주로 살펴볼 것은, “목적 자동적(Teleomatic) 과정들”과 “목적 법칙적(Teleonomic) 과정들”입니다. 먼저, ‘목적 자동적 과정’에 대한 마이어의 설명입니다.
어떤 철학자들은 “다양한 조건들 하에서 종국 점을 향하여 지속”하거나 “그 과정의 종국의 상태가 처음부터 그것의 속성들에 의해 결정”되는 모든 과정들을 목적론적인 것으로 불렀다(웨딩턴, 1957). 이러한 정의들은 종국 점을 갖고 있는 비유기적 자연에 있는 모든 과정들을 포함할 것이다. [그들의 목적론의 정의에 따르면,] 강은 그것이 바다로 흘러가기 때문에 목적론적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들을 유기체에서 진행되는 참된 목적 방향적인 과정들과 같은 범주에 놓는 것은 가장 잘못된 것이다.
모든 물리적 세계의 대상들에는 상태 변화를 겪을 수 있는 수용력이 주어져 있으며, 이러한 변화들은 엄격하게 자연 법칙들을 따른다. 그것들은 단지 자동적인[automatic] 방식으로만 종국 방향적(end-directed)이다. 나는 그것들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그러한 과정들을 목적 자동적(Teleomatic)이라고 명명했다(마이어, 1974).
… 이러한 것들은 퍼어스(1958)가 종국적(finious)이라고 부른 대부분의 과정들이다. 그것들은 종국 점을 가질 수는 있어도 결코 목적[goal]을 갖지는 못한다.
방사성 붕괴는 목적 자동적 과정이다. 그것은 프로그램으로 통제되지 않는다. 아주 특수하고 종종 고유하기까지 한 프로그램들과는 반대로, 어떠한 우라늄 덩어리도 그 밖의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물리적 법칙들에 지배되는 방사성 붕괴를 겪을 것이다. … 그러나 같은 물질의 어떠한 표본에서도 똑같은 본래적인 속성들은 암호화된[coded] 프로그램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 주어진 거대 분자는 본래적인 속성들을 갖지만, 이것은 그것만으로 프로그램인 것은 아니다. 프로그램은 분자들과 다른 유기적 구성 요소들과의 결합으로 형성된다.
예측은 프로그램을 정의하는 기준이 아니다. 만약 내가 손에서 돌을 놓는다면, 나는 그것이 땅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엥겔스(1982, [동명이인이다])는 그러므로 땅으로 떨어지는 것은 프로그램되어 있으며, 목적 자동적 과정과 목적 법칙적 과정들 간에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고 말한다. …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자연 법칙에 영향을 받는 바로 그 일반적인 종국적 상황들은 프로그램에 암호화된 아주 특정한 목적(goals)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물론 프로그램의 존재는 자연 법칙들과 절대로 충돌하지 않는다. 프로그램이 번역되고 실행되는 동안 발생하는 모든 물리화학적 과정들은 엄격하게 자연 법칙을 따른다. 그러나 정보와 지령의 역할을 무시하게 되면 프로그램을 가장 잘못 기술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54]같은 책, pp. 79-81. (강조는 인용자.)
앞서 생물학적 과정의 ‘이중 인과’에서도 설명되었던 것처럼, 생물학적 과정은 자연 법칙과 프로그램에 의해 이중적으로 영향을 받습니다. 그런데 비유기적 자연은, “엄격하게 자연 법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과거에 어떤 철학자들은 어떤 종국점을 향하고 있다고 해서, 종국의 상태가 그것의 속성들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해서, 등등으로 이것을 “목적론적인 것으로 불렀”는데, 마이어가 볼 때는 그렇다면 “강은 그것이 바다로 흘러가기 때문에 목적론적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라며, 그러한 것들은, “종국 점을 가질 수는 있어도” 결코 어떤 “목적[goal]을 갖지는 못”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과정들을 유기체에서 진행되는 참된 목적 방향적인 과정들과 같은 범주에 놓는 것은 가장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연의 총체성은 스스로 목적의 조건을 형성하고, 그것을 통해 목적 정립적 활동을 하며”[55]한동백, 앞의 글, p. 95. 운운하면서, 마이어가 자신을 증거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한동백! 몰이해인가, 사기인가?)
마이어는, 과거에는 무슨 목적이 있는 것처럼 부르기도 했던 이러한 “비유기적 자연에서 나타나는 외관상 종국 방향적인(end directed) 과정”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목적론(Teleology)이라는 단어에, 자동적이라는 의미의 automatic을 합성해, Teleomatic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Tele(o)는 텔로스(τέλος)의 ‘끝’이라는 의미가 되겠지요.[56]과거에 목적론으로 불리던 혹은 외견상 목적론적으로 보이는 과정 중 하나라는 의미에서 ‘목적 자동적’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의미는 있겠으나, … Continue reading 이 책 권말의 용어 풀이에서 마이어는 “목적 자동적 과정(Teleomatic processes): 과정들, 그것의 종국 점[endpoint]은 자연 법칙들에 의해 통제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들을 “필연에 의해” 야기되는 것으로 언급했다”[57]에른스트 마이어, 앞의 책, p. 298.라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 목적 법칙적 과정들(Teleonomic processes)
다음으로 ‘목적 법칙적 과정들’에 대한 마이어의 설명입니다.
목적 법칙적이라는 용어는 다양한 의미들을 가지고 사용되어 왔다. 피텐드리그(1958)가 그 용어를 소개했을 때, 그는 그것에 엄밀한 정의를 제시하지 못했다. … 결국 다양한 저자들은 프로그램된 기능들이나 적응을 위해 그것을 사용했다. 나는 목적 법칙적이라는 용어를 프로그램된 활동들에 제한했고(마이어, 1974) 이제 다음 정의로 규정한다. 목적 법칙적 과정이나 행동은 그것의 목적 방향성[goal-directedness]이 진화된 프로그램의 영향 때문인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목적 법칙적이라는 용어는 한 과정이나 활동의 목적 방향[goal direction]을 포함한다. 그것은 엄격하게 궁극 인과 작용들과 관계한다. 그것들은 분자 발달 과정에서 발생하며 유기체들의 행동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이다. “목적 방향의 행동은 유기적인 세계에서 대단히 널리 퍼져 있다. 예를 들어, 이주와 음식 구하기ㆍ구애ㆍ개체 발생 그리고 생식의 모든 단계들과 관련된 대부분의 활동들은 그러한 목적 정하기[goal orientation]를 통해 특징지어진다. 목적 방향적 과정들의 발생은 아마도 살아 있는 유기체들의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특징일 것이다”(마이어, 1988).[58]같은 책, pp. 81-82. (강조는 인용자.)
인용문에서 읽어 보신 대로, “목적 법칙적(Teleonomic) 과정들”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비유기적 자연은, “엄격하게 자연 법칙을 따르”고 있고, 그래서 목적 자동적(Teleomatic)이라면, 앞서 생물학적 과정의 ‘이중 인과’에서도 설명되었던 것처럼, 생물학적 과정은 자연 법칙과 프로그램에 의해 이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데, 그 프로그램에 의해 어떤 goal, 즉 목적 또는 목표로, directed, 즉 방향이 설정되는, 또는 유도(지시, 통제)되는 과정들을, 마이어는 “생물계에서 나타나는 외관상 목적 방향적인(goal directed) 과정들”[59]같은 책, p. 70.이라고 하며, 이를 Teleonomic 과정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뒤에서 설명드리겠지만, 물론 이 프로그램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누가 설계한 것도 아닌, 유기체의 진화의 과정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또한 유전 프로그램 이외에 신체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권말의 용어 풀이에서, 마이어는, “목적 법칙적 과정(Teleonomic processes): 자신의 목적-방향성[goal-directedness]이 진화 프로그램의 영향 때문인 과정들”[60]같은 책, p. 298.이라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즉, 텔레오노미(Teleonomy)는, 과거에 목적론으로 불리던 혹은 외견상 목적론적으로 보이는 과정 중 ‘목적 방향적인(goal directed) 과정들’을 가리키기 위해, 목적론(Teleology)이라는 단어에서, 학(學), 론(論)이라는 의미의 어미 -(o)logy를, 학(學), 법칙(法則)이라는 의미의 어미, -(o)nomy로 바꾸어 만든 단어입니다.[61]앞서와 마찬가지로, 잠시만 번역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앞서 잠깐 언급한 마이어의 또 다른 저작 ≪이것이 생물학이다≫의 역자들은 이 … Continue reading
사람들은 때때로 피텐드리그와 내가 목적론적이라는 용어를 대체하기 위한 것으로 목적 법칙적이라는 용어를 소개했다고들 말한다. 이것은 정확하지가 않은데, 오히려 그것은 아주 이질적인 목적론적이라는 용어의 다섯 가지 다른 의미들 중 하나만을 위한 용어다.[62]에른스트 마이어, ≪생물학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 p. 82. (강조는 인용자.)
아무튼, 목적 법칙적(Teleonomic) 과정들의 핵심은 ‘프로그램’입니다. 이것은 비유기적인 자연의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생물계에서 나타나는 과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자연의 총체성은 스스로 목적의 조건을 형성하고, 그것을 통해 목적 정립적 활동을 하며”[63]한동백, 앞의 글, p. 95. 운운하면서, 마이어가 자신을 증거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한동백! 그의 몰이해 혹은 사기 행각이 자꾸자꾸 드러나고 있지요!)
이제 조금만 더 자세히 이 프로그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나는 나의 처음 제안에서(마이어, 1974) 원하는 목적을 보증하는 방식으로 준비된 인간의 인공물들의 기능도 포함시키도록 목적 법칙적이라는 용어의 적용을 확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이것은] 비판되었고 … 이제 나는 인간의 인공물들은 단지 유비적인 것들[analogs]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목적 법칙적 활동들은 유전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지에 의존한다.
모든 목적 법칙적 행동은 두 가지 요소들로 특징지어진다. 그것은 “프로그램”에 의해 유도되고, 행동이나 과정을 규제하는 프로그램에서 “예견된” 어떤 종국 점[endpoint], 목적[goal] 또는 종착점[terminus]이 있는지에 의존한다. 이러한 종국 점은 (발달에서) 구조일 수도 있고 생리적 기능일 수도 있고 (이주에서) 지리적 위치에 도달하는 것일 수도 있고 또는 행동에서 “마무리 행위”일 수도 있다(크레이크, 1916). 각각의 특정 프로그램은 완수된 종국 점의 선택적 가치에 의해 끊임없이 조절되는 자연 선택의 결과다.
목적 법칙에 대한 정의에서 핵심 단어는 유전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의 존재를 인식하는 데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이 (A) 물질적인 어떤 것이며 (B) 목적 법칙적 과정이 시작하기 전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목적 법칙과 인과성 간에 어떠한 충돌도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진화된 프로그램들에 의해 통제되는 목적 법칙적 과정들의 존재는 생물학의 이중 인과 작용들에 대한 근거다. 여기서 이중 인과 작용이란 (물리과학에서처럼) 자연 법칙들에 기인한 것이자, (물리과학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유전 프로그램들에 기인한 것이다.
프로그램은 암호화된[coded] 또는 미리 배치된[prearranged] 정보로 정의될 수 있는데, 이는 과정(또는 행동)이 목적[goal]을 향하도록 이끌어주면서 그것을 통제한다. 그러한 프로그램은 목적의 청사진뿐 아니라 그 청사진의 정보를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지령들[instructions] 또한 포함한다.[64]에른스트 마이어, ≪생물학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 pp. 82-83. (강조는 인용자.)
핵심은, 프로그램은, ‘생물’을 어떤 종국 점[endpoint], 목적[goal] 또는 종착점[terminus]으로 유도하는 암호화된 정보와 지령이라는 것입니다. 권말의 용어 풀이에서 마이어는 “프로그램(program): 한 표현형을 산출하도록 이끌어가는 과정(또는 행동)을 유도하는, 암호화되거나 미리 정해진 정보”라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프로그램의 종류에 대해서만 인용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목적 법칙적 프로그램들에 대한 연구는 그것들이 여러 종류로 구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유전형의 DNA에 완성된 지령들이 놓이는 프로그램은 닫힌 프로그램으로 불린다(마이어, 1964). 곤충들과 더 낮은 무척추 동물들의 본능적 행동들을 통제하는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대개 닫힌 프로그램들인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정보가 어느 정도까지 닫힌 프로그램들로 통합되어 들어갈 수 있는지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다른 유형의 프로그램도 있는데, 바로 열린 프로그램들이다. 그것들은 학습과 조건화 또는 다른 경험들을 통해 획득된 추가적 정보가 평생 동안에 통합될 수 있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대부분의 고등 동물의 행동은 그러한 열린 프로그램을 통해 통제된다. 열린 프로그램들은 고등 유기체의 행동 프로그램에서 아주 흔하지만, 어떤 무척추 동물들에서조차 열린 프로그램들[이] … 종종 있다.
처음에는 목적 법칙적 활동들을 통제하는 프로그램들은 오로지 게놈 DNA에 의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유전 프로그램들 이 외에 신체 프로그램(somatic programs)을 인식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 신체 프로그램에 통제를 받는 것이다. 확실히 이러한 뉴런의 프로그램은 유전 프로그램으로부터 나온 지령들의 부분적 통제 아래에서 발달하는 동안 심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독립적인 신체 프로그램이다(마이어, 1988). 신체 프로그램은 발달 과정에서 특히 중요하다. 적절한 환경적인 상황과 더불어 개체 발생의 각 단계는 말하자면 발달 과정에서 다음 단계를 위한 신체 프로그램을 나타낸다. …
다양한 종류의 프로그램들은 뚜렷하게 분리되지는 않는다. 모든 것들이 유기체가 진화하는 과거 역사 동안 작용한 근접 원인들의 결과다. 그리고 모두가 궁극 원인들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65]같은 책, pp. 85-86.
그리고 반사 작용에 대해서, 등등을 설명하는데, 프로그램의 작동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의 것만 인용해 두겠습니다.
목적 법칙적 작용의 방향성은 수많은 장치들에 영향을 받는데, 물론 무엇보다도 프로그램 자체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은 어떤 완전하게 미리 형성된 형태가 단순하게 펼쳐지도록 유도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내적 외적 방해물들을 고려해야 하는 다소 복잡한 과정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개체 발생 동안 목적 법칙적 과정들은 아무리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일탈될 위험을 갖고 있다. 웨딩턴(1957)은 아주 적절하게도 그러한 일탈들을 수정하는 평형 유지 장치들이 매우 중요하며 또 그러한 장치들이 자주 작동한 것에 주목했다. …
부정적 피드백들은 발생에서뿐 아니라 다른 많은 목적 법칙적 과정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목적 법칙적 활동의 본질은 아니다. … [중요한 것은] 목적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정밀도를 위한 메커니즘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목적에 도달하려는 행동들을 시작하게 하는, 다시 말해 ‘야기하는’ 메커니즘들이 있다는 것이다.[66]같은 책, pp. 87-88. (강조는 인용자.)
이제, 전통적으로 목적론으로 불렸던 것 혹은 외견상 목적론적 과정으로 보이는 것들 중 나머지는 세 가지는 조금 빠르게 살펴보겠습니다.
○ 생각하는 유기체들의 합목적적 행동
먼저, ‘생각하는 유기체들의 합목적적 행동(Purposive behavior in thinking organisms)’입니다. 맑스주의자인 우리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생물 일반을 대상으로 하는 진화생물학자인 마이어에게, 이것은 약간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의도들과 합목적적 행위들을 목적론적인 과정들의 전형적인 예들로 사용해 왔다. 이것은 목적[purpose], 의도[intention] 그리고 의식[consciousness]과 같은 개념들을 토론장으로 불러들이며, 그것을 인간 심리의 일면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분야는 매우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그래서 앞서 목적론을 취급할 때(마이어, 1992), 나는 합목적적 행동을 논의의 장에서 배제시켰다.[67]같은 책, p. 88. (강조는 인용자.)
그런데 마이어는, 인간뿐만 아니라, 고등 생물들도 합목적적 행동을 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것을 포함시켰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짧게나마 살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뒤에서’가 아니라 ‘다음 호’로 표현하는 게 맞을 듯합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뒤에서’ 다루기로 했었던 것들 중 아직까지 다루지 못한 것들은 다음 호에서 이어집니다.)
아무튼,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후 최근에 동물 행동을 연구하면서 나는 이것이 잘못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분명 목적 방향의 합목적적 행동은 동물들 특히 포유류와 조류 중에 널리 퍼져 있으며, 충분히 목적론적이라 불리기에 적합하다.[68]같은 책, pp. 88-89.
그러면서, 그는 어치[까마귀과의 새]들이 가을에 도토리와 소나무 열매 씨앗들을 묻고, 겨울에 숨긴 장소를 기억해서, 그것을 찾아가는 것, 그리고 암사자들이 사냥할 때, 두 무리로 나누어, 한 무리는 희생물 뒤로 가서 그것이 탈출할 통로를 미리 차단하는 것 등을 언급하고, “그러한 합목적적 계획에서는 원리상 인간과 생각하는 동물 간에 아무런 차이점도 없다”[69]같은 책, p. 89.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적응 형질들
다음은 ‘적응 형질들(Adapted features)’입니다. 마이어의 말에 따르면, “유기체의 적응에 기여하는 형질들을 철학적 문헌들에서는 대체로 목적론적 체계들 또는 기능적 체계들로 지칭”해 왔는데, 이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변화하지 않는 것인데, “목적론이라는 단어는 움직임을 수반하지 않는 현상들에는 적합”하지 않고, 오래된 철학 문헌들에서 “이러한 형질들이 자연의 어떤 목적론적 힘을 통해 시작되었다”는 가정하에서 이야기되던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윈에 의해, “외관상 목적론적인 진화적 변화와 적응 형질들의 생산은, 단지 모든 세대에서 다량의 변이 생산으로 구성되는 변이적 진화와, 가장 적합하지 못한 표현형을 제거한 후에 남아 있는 그러한 개체들의 개연적인 생존 결과”라는 것이 밝혀졌고, 따라서 “적응성은 선천적인 목적을 찾는 것이라기보다는 후천적인 결과”이며, 그렇기 때문에, “목적론적이라는 단어를 적응 형질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70]같은 책, pp. 89-90. (이것은 목적론의 제일 뒷부분인 “목적론과 진화”에서 다시 언급됩니다.)
또한 그것은 “기능적 체계”라고 불러서도 안 되는데, 이것은 “혼란을 일으키는 기능이라는 단어의 이중적 의미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마이어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많은 과학철학자들은 목적론의 문제가 기능이라는 용어로, 즉 목적론적 진술들을 기능 진술들로 번역해서 목적 방향성을 설명함으로써 풀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이러한 모든 제안들은 기능이라는 단어가 생물학에서 매우 다른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치명적인 결점을 갖고 있다. 기능이라는 단어는 어떠한 목적론 분석에서도 신중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 기능은 때로는 생리 과정들을 위해 사용되며, 때로는 유기체의 생활사에서 한 형질이 담당한 생물학적인 역할을 위해 사용[된다]. …
한 기관이나 다른 생물학적인 형질의 생리적 기능을 묘사하는 것들은 목적론적인[teleological] 것이 아니다. 게다가 더 좋은 경우에는 그것들이 대체로 물리화학적 설명들로 번역될 수도 있다. 그것들은 근접 인과 작용들 때문이다.
목적론적인 측면들에 대한 분석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구조나 활동의 생물학적 역할이다. 그러한 역할들은 진화적 인과 작용들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내 설명에서는 내 관심이 한 형질의 생물학적 역할이나 과정에 있을 때 기능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피하고 있다.[71]같은 책, pp. 76-77.
[이처럼,] 근접 인과 작용과 궁극(진화) 인과 작용들은 기능주의자들의 논의에서 자주 혼동되었다.[72]같은 책, p. 90.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기능 범주를 참된 기능적인 활동들로 나누는 것과 생물학적 역할을 갖고 있는 형질들의 역사에 따라 적응 범주를 [목적론의 구분 중 하나로] 첨가하는 것이다.[73]같은 책, pp. 77-78.적응 형질들의 특성 중 하나는 그것들이 목적 법칙적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목적 법칙적 프로그램들을 위한 집행 기관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아마도 신체 프로그램들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 제안했다.[74]같은 책, p. 90-91. (강조는 인용자.)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기능은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먼저 한 기관이나 다른 생물학적인 형질의 생리적 기능이다. 이것은 목적론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근접 인과 작용들 때문이다. 대체로 물리화학적 설명들로 번역될 수도 있다. 다음으로, 유기체의 생활사에서 한 형질이 담당한 구조나 활동의 생물학적인 역할이다. 이것은 목적론적인 측면들에 대한 분석에 포함된다. 그러한 역할들은 진화적 인과 작용들 때문이다. 이렇게 적응 형질들의 특성 중 하나는, 목적 법칙적 프로그램들을 위한 집행 기관으로, 신체 프로그램들로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는 기능, 적응, 근접 원인ㆍ진화적 원인, 신체 프로그램이라는 단어를 기억해 두시면 되실 듯합니다).
○ 우주적 목적론(Cosmic teleology)
끝으로, 우리와는 하등의 상관도 없고, 마이어도 어떤 과학적 증거도 없다고 폐기하고 있는, ‘우주적 목적론(Cosmic teleology)’입니다(그런데 혹시나, 한동백과는 상관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뒤에서 살펴봅시다). 이에 관해, 마이어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최근에 발생되지도 않았고, 항상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외관상 목적론적인 변화들에 대한 세 가지 설명이 진척되었다.
(1) 이러한 변화들은 진화를 계획한 자의 작용 때문이다(신학적 설명).
(2) 이러한 변화들은 내장된 프로그램에 지배되며, 개체의 유전자형에 있는 목적 법칙적 프로그램과 유사하다(정향 진화의 설명들). [그런데] 많은 후기–다윈주의 연구는 그러한 우주적 프로그램이 존재하지 않으며 우주적 진화의 불규칙성이 너무나 커서 프로그램의 존재와 조화될 수 없다는 증거를 제공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참으로 종합 진화설이 나올 때(1930년대에서 1940년대)쯤 모든 정향 진화설에 대한 옹호는 사라졌다.
(3) 우주적 목적론은 없다. 세계에는 진보나 완전성을 향한 경향은 없다. 세계 역사의 과정 속에서 우주에 어떠한 변화나 경향들이 관찰되든, 그것들은 자연 선택과 자연 법칙들의 작용 결과다. 이 세 번째 설명은 관찰된 사실들과 아주 잘 맞아들기 때문에 그것은 다른 두 설명들에 호소할 필요가 없었다.[75]같은 책, p. 92. (강조는 인용자.)
○ 목적론 요약
살펴본 것처럼 마이어는, 어떠한 목적론을 새롭게 주장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단일하게 목적론으로 불렸던 것 혹은 외견상 그러한 목적론적 과정으로 보이는 것을 고찰하여, 다섯 가지로 구분한 것입니다.
그중에 먼저, 비유기적 자연에서 나타나는 외관상 종국 방향적인(end directed) 과정들을 ‘목적 자동적 과정들’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생물계에서는 외관상 목적 방향적인(goal directed) 과정들이 나타나는 데, 그중 프로그램에 의해 특정 목적(목표)로 유도되는 것을 ‘목적 법칙적 과정들’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다음으로, 주로 인간 및 고등 동물들에서 나타나는 의식적(ㆍ의도적) 행동인 ‘합목적적 행동’도 목적 방향적인(goal directed) 과정이므로, 외관상 목적론적 과정에 포함시켰습니다. 유기체의 생활사에서 한 형질이 담당한 구조나 활동의 생물학적인 역할, 즉 ‘적응 형질들’의 특성 중 하나는, 목적 법칙적 프로그램을 위한 집행 기관들이라 할 수 있는 신체 프로그램으로서 역할하기 때문에, 여기에 추가했습니다.
끝으로 전통적인 목적론에는 ‘우주적 목적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었는데(사실은 대개 주류의 이론으로서), 이것은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에, 폐기하였습니다. 이것 이외의 나머지 네 가지는 모두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상, 한동백의 몰이해 또는 사기 행각을 제대로 밝히기 위해서, 다시 말해, 일말의 오해의 소지, 반박할 여지도 남기지 않고, 한동백의 주장이 얼마나 헛소리인가를 드러내기 위해, 마이어가 주장하는 바를, 원문 그대로 인용하고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독자 여러분들, 긴 글을 읽으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③ 한동백의 왜곡
마이어가 결코 한동백의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이, 중간중간 이미 드러나긴 했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서, 그의 몰이해 또는 사기 행각을 조목조목 따져 보고, 마무리합시다. 그 전에, 한동백의 목적 개념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보려 합니다.
자연적 존재로서의 자연, 그리고 체계로서 사회적 존재가 자기목적적 운동을 이룰 수 있다는 사고는 유물론적 세계관에 있어서 매우 당연하다. 왜냐하면 유물론의 핵심은 물질의 영원성을 승인함에 있으며, 물질의 영원성은 오로지 물질의 절대적 자기운동성을 승인함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의 절대적 자기운동은 다른 말로, 물질의 절대적인 자기목적적 운동이다.[76]한동백, 앞의 글, p. 64. (강조는 인용자.)
자연현상에서 관찰되는 합목적적 활동에는 그 어떠한 신비적 개념 따위를 둘 공간이 없다. 그것은 순전히 물질의 물질적인 운동이다. 자연의 총체성은 스스로 목적의 조건을 형성하고, 그것을 통해 목적 정립적 활동을 하며, 동시에 이 과정에서 인과성을 그대로 보존한다.[77]같은 글, p. 95. (강조는 인용자.)
그리고 다시 한번, 토론회 당일 현장으로… 문영찬: “이게 핵심이죠. 엥겔스가 말한 목적 개념의 핵심은 헤겔을 인용했지만, 대상 자체의 필연성에 내포되어 있는 그러한 목적, 이게 엥겔스가 파악한 목적 개념이고, 바로 유물론적인 목적 개념이 아닌가 합니다!”, 한동백: “맞습니다. 필연성의 작용 속에서 생성되는 규정으로서의 목적, 이렇게 생각해야 유물론적으로 목적 개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죠.”
마이어는 비유기적 자연에서의 목적 자동적 과정은 “종국 점을 가질 수는 있어도 결코 목적[goal]을 갖지는 못한다”[78]에른스트 마이어, ≪생물학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 p. 80.고 했고, “그러한 과정들을 유기체에서 진행되는 참된 목적 방향적인 과정들과 같은 범주에 놓는 것은 가장 큰 잘못된 것이다”[79]같은 책, p. 79.라고까지 했는데, 한동백은 이런 마이어가 자신의 “변증법적 목적 개념의 타당성”을 “입증”까지[80]한동백, 앞의 글, p. 92. 해 주고 있다고 주장하니, 마이어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기가 찰 노릇일까요? 그래서 마이어는 한동백이 인용한 자신의 말에 이렇게 답할 것 같습니다. (제가 마이어의 주장 전부에 동의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밝혀 둡니다. 이하, “한동백의 왜곡” 전체는, 한동백이 마이어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줄 뿐입니다.)
“철학 문헌에서 목적론적 분석이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에 있는 이유는 이제 명백하다.” (한동백 당신 같은 자들 때문이다.)
“참으로 우리는 이러한 문헌에서 목적론의 문제들을 취급하는 것은 어떻게 과학철학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한동백 바로 당신처럼!)
“이러한 철학자들은 비록 목적론이 대부분 또는 전적으로 생명의 세계와 관계한다고 할지라도 생물학자들의 발견을 무시해버렸다.” (한동백의 목적 개념은 “대부분 또는 전적으로 생명의 세계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오히려 ‘총체적 자연’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을 위해, 내 말을 인용하는 것이 바로, 내 말을 완전히 왜곡하는 것, 즉 생물학자들의 발견을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기능이라는 단어가 두 가지 아주 다른 현상들을 가리킨다는 것 그리고 프로그램이라는 개념이 목적-방향성(goal-directedness)의 문제에 새로운 국면을 부여한다는 것을 무시했다. 그들은 근접 원인과 진화적 원인들 간 구별과, 정적인 (적응된) 체계들과 목적-방향적인 활동들 간 차이점을 혼동했다.” (한동백 당신은 이것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있거나, 아는 대로 말하는 것이라면, 당신과 같은 주장을 하지 못할 것이다.)
“목적론의 문제에 관한 엄청난 철학적 문헌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목적론을 일원적인 현상으로 취급하는 최근의 책과 논문들은 정말로 쓸모가 없다. 우주적 목적론의 의미, 적응성, 프로그램된 목적-방향성 그리고 결정론적 자연법칙들 간의 차이들을 인식하지 못했던 어떠한 저자들도 목적론의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다.”[81]같은 글, pp. 92-93.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혹은 사기를 치고 있는, 당신의 글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우선 간단한 것부터 보겠습니다. 한동백은 위 인용문의 각주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목적론을 일원적인 현상으로 취급”하는 것이란, 당대 목적론에 비판적인 기계론자들이나 주관 관념론자들이 목적론을 취급하였던 방식을 의미한다. 마이어에 따르면 그들은 목적론을 해석함에서, 단지 중세 그리스도교 형이상학에서 차용된 초월적 목적론만이 존재한다거나, 또 모든 목적론은 종국적으로 이 형이상학의 구성 요인으로서 목적론으로 수렴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만 반복하였다.[82]같은 글, p. 93.
여기서 마이어가 말하고 있는 것은, (물론 마이어는 이 책에서 목적론에 대해 이야기한 수많은 철학자들을 언급했고, 그들 중에는 “목적론에 비판적인 기계론자들”이나, “주관 관념론자”들이 있겠지만,) 한동백이 상상하고 있는 그 무슨 기계론이니 목적론이니 (또는 직접 말한 것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그럴 수도 있는 일원론이니 이원론이니)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현대 생물학의 성과는, 전통적으로 목적론으로 불렸던 것 혹은 외견상 목적론적 과정으로 보이는 것을 “일원적인[unitary] 현상”이 아닌, 다음의 다섯 가지로 구분한다는 것입니다: “우주적 목적론의 의미, 적응성, 프로그램된 목적–방향성 그리고 결정론적 자연법칙들”[과 생각하는 유기체들의 합목적적 행동.][83]인용문 그대로는 네 가지. 여기서 마이어가 ‘생각하는 유기체들의 합목적적 행동’을 빼고 있는 이유는, 앞서 언급한 관련 부분을 참조하면 되실 … Continue reading 그리고, 혹시나 해서 언급해 두자면, 여기서 마이어가 말하고 있는 ‘일원적(unitary)’이라는 것은, ‘다섯 가지(혹은 인용문 그대로는 네 가지)’가 아닌, ‘하나의’ 혹은 ‘단일한’ 것으로라는 의미이지, ‘일원론(一元論, monism)’, ‘이원론(二元論, dualism)’ 할 때의, 그 ‘일원론적(monistic)’이라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마이어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섯 가지로 봐야 할 것을 하나로 봤어. 그 다섯 가지가 각각 다른 현상이나 과정을 가리키는 것인데 말이지. 그리고, 거기에서 핵심적인 것이 목적 방향성이라는 거야. 그리고 생물계의 그러한 과정 중에 프로그램으로 유도되는 목적 법칙적 과정이라는 것이 중요하고 말이지. 또, 기능이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근접 원인과 진화적 원인 간의 구별, 정적인 (적응된) 체계들과 목적 방향적인 활동 간의 차이점도 중요하지. 그런데 “(물리주의) [과학]철학자들은 살아 있는 자연과 [이런] 생물학의 발견들에 대한 연구를 무시”하고, “논리적 솜씨를 발휘하기 위해 목적론을 사용했”지.[84]에른스트 마이어, ≪생물학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 p. 71. 목적론 문제에 대해 산더미처럼 많은 책이 있다고 해도, 문제를 이렇게 보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그런데 한동백은, 여기에서 이런 것이 아니라, “기계론과 목적론의 대립”을 보고 있지요. 그것을 지양ㆍ종합하고, 통일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한동백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사활적 문제)이기 때문인데, 이것은 다음 호에서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다만, 여기에, ‘헤겔식(?) 헛소리 ①’이라고 이름을 붙여 두겠습니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이어는 전통적인 목적론자들이 과학적 현상을 이해하는 데도, 그리고 목적론을 옹호하는 데도 실패했다고 분석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생물학적 프로그램에서 목적–방향성의 내용을 무시해버리는 물리주의자들, 즉 반(反)목적론자들의 한계도 동시에 인식한다.[85]한동백, 앞의 글, p. 93.
한동백은 물리주의자도 반목적론자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역시 이것들을 “무시해 버리”고 있지요. 목적 방향성의 내용이 뭔지, 프로그램이 뭔지, 전혀 모르고 있으니까요, 아니면 사기를 치고 있거나요. 바로 이렇게 말이죠. 이어지는 문장입니다.
마이어는 방사성 붕괴 현상, 냉각 현상 등의 다양한 과학적 프로그램[?]이 그것을 둘러싼 유기적 구성 요소들과의 결합에 의해 형성되며, 이러한 현상은 각자 보존력을 갖춘 체계를 이룬 목적 자동적(teleomatic) 프로그램[?]의 전개라고 간주한다.[86]같은 글, p. 93. (강조는 인용자.)
(앞에서 냉각까지 다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방사성 붕괴, 냉각은 마이어가 언급하고 있는 대표적인 목적 자동적 과정입니다. 목적 자동적 과정이 무엇입니까? 비유기적 자연에서 나타나는 외관상 종국 방향적인(end directed) 과정들 아닙니까? 그런데 마이어가 말하고 있는 ‘프로그램’에 의해 유도되는 과정은, 생물계에서 나타나는 외관상 목적 방향적인(goal directed) 과정 중 ‘목적 법칙적 과정’이지요.
한동백은, 이 책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개념인, 생물학적 과정의 자연 법칙과 프로그램의 ‘이중 인과’도, 목적 자동적 과정이 무엇인지도, 목적 법칙적 과정이 무엇인지도, 프로그램이 뭔지도 전혀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프로그램과는 전혀 상관없는 목적 자동적 과정에서, “과학적 프로그램”, “목적 자동적 프로그램의 전개”라니요!
이게 바로, “프로그램이라는 개념이 목적–방향성(goal-directedness)의 문제에 새로운 국면을 부여한다는 것을 무시”하고 있는 게 아니고 뭡니까? 당신은 마이어가 기존의 목적론을 비판했던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런 생물학의 성과들을 무시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이전의 철학자들을, 마이어의 이름을 빌어서, 간접적으로 비판했지요? 뒤링 씨가 이신론을 비난했던 작태처럼, 내로남불이군!
이렇게 한동백의 몰이해 혹은 사기가, 첫 구절부터 밝혀지기는 했지만, 이것에 대해 마이어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래야 한동백의 이어지는 문장들에서의 몰이해 혹은 사기 행각도 낱낱이 밝힐 수 있을 테니까요. 마이어는 말합니다.
방사성 붕괴는 목적 자동적 과정이다. 그것은 프로그램으로 통제되지 않는다. 아주 특수하고 종종 고유하기까지 한 [유기체의] 프로그램들과는 반대로, [비유기체인] 어떠한 우라늄 덩어리도 그 밖의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물리적 법칙들에 지배되는 방사성 붕괴를 겪을 것이다. [앞서 살펴본, 생물학의 특수성에서, 생물개체군 개념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인용자.]
자연 법칙들은 그 법칙들이 작용하는 물질[여기서는, 무기물]의 고유한 속성들과 상호 작용한다. [그래서 유기체와는 다르게, 같은 물질은 같은 속성을,] 다른 물질들은 다른 속성들을 갖고 있으며, [그래서 당연히] 냉각 속도는 물질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물질의 어떠한 표본에서도 똑같은 본래적인 속성들은 [유기체의] 암호화된 프로그램과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것은 분자적 수준으로 내려가서도 참인 것이다. 주어진 거대 분자는 본래적인 속성들을 갖지만, 이것은 그것만으로 프로그램인 것은 아니다. 프로그램은 분자들과 다른 유기적 구성 요소들과의 결합으로, 형성된다. [즉, 분자가 본래적인 속성들을 갖는다고 해서, 그것이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프로그램과 다른 것이다.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유기체의 구성 요소들와 결합해서, 유기체로 존재할 때이다.][87]에른스트 마이어, ≪생물학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 p. 80.
한동백은 마이어가, 무생물과 생물의 차이를 이야기하며, 목적 자동적 과정은 목적 법칙적 과정과 다르다고, 그것에 본래적인 속성들은 있을지 몰라도, 생물처럼 암호화된 프로그램은 없다고 말하며, “프로그램은 분자들과 다른 유기적 구성 요소들과의 결합으로 형성된다”고 말한 것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혹은 이렇게 사기 치고 있습니다): “다양한 과학적 프로그램[?]이 그것을 둘러싼 유기적 구성 요소들과의 결합에 의해 형성되며” 운운. 유전 프로그램도 아니고 신체 프로그램도 아니고, ‘과학적 프로그램(?)이, 그것을 둘러싼 유기적 구성 요소들과 결합해서 형성된다’는 헛소리! (이 문장은 ‘형성’, ‘보존력을 갖춘 체계’, ‘전개’, ‘전개 양상’ 등으로 이어지는데, 그래서 이것이, 헤겔식 헛소리에 슬슬 시동을 거는 문장이긴 하지만, 굳이 ‘헤겔식 헛소리 ②’로 명명하진 않겠습니다. 그렇게 일일이 명명한다면, 수백 번으로도 모자랄 테니까요.)
또한, “이러한 현상은 각자 보존력을 갖춘 체계를 이룬 목적 자동적 프로그램의 전개” 운운하는데, 여기서 한동백이 말하는 “보존력”이 마이어가 언급한 “물질의 고유한 속성”을 의미하든, (절대로 아니겠지만 혹시라도 “엄격하게 자연 법칙을 따르는” “상태 변화를 겪을 수 있는 수용력”을[88]같은 책, p. 79. 의미하든,) 뭐든 간에, 방사성 붕괴 현상, 냉각 현상 등은 그러한 “목적 자동적 프로그램[!]의 전개”로 절대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이어서,
여기서 목적 자동적 과정이란, “종국 점을 갖고 있는 비유기적 자연에 있는 모든 과정들을 포함”하는 프로그램의 전개 양상을 의미한다. 여기서 종국 점이란, 개별적 현상 체계 내부에 설정되어 있는 목적이다.[89]한동백, 앞의 글, pp. 93-94.
라고 하고 있는데, 목적 자동적 과정은 그 어떤 프로그램의 전개 양상도 아닐뿐더러(아, 마이어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한동백의 프로그램일 수는 있겠네요. 그러면 모든 것이 들어맞지요. 그렇다면, 마이어를 인용하지 말았어야죠! 이것은 끝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종국 점을 가질 수는 있어도 결코 목적을 갖지는 못”합니다.[90]에른스트 마이어, ≪생물학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 p. 80. 이렇게 한동백은, 목적 자동적 과정에 대해, 그리고 그것과 목적 법칙적 과정의 차이에 대해, 한번이라도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지껄이지 못할 소리를 태연하게 술술 읊고 있습니다. 이 문장 바로 앞에서도 “목적 자동적 과정은 … 비유기적 자연 …” 운운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비유기적 자연의 과정과 생물계의 과정의 차이를 안다면 절대로 하지 못할 말을, 바로 다음 문장에서 하고 있지요. 그래서 이것은, 몰이해 아니면 사기!
여기에서 ‘헤겔식 헛소리 ②’를 호명해야겠습니다. 살펴본 대로, 한동백은 “목적 자동적 프로그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렇게 프로그램으로 목적 자동적 과정과 목적 법칙적 과정을 통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형적인 헤겔식(?) 방법! 이 두 과정이 프로그램으로 통일되어 있어야, 헤겔식으로, 그 다음의 논리 전개가 가능하지요. 물론 해답은 정해져 있고요. 이 프로그램이 바로 내재된 목적(목적 방향을 유도하는 것)이고, 이것은 유기적 자연을 넘어, 무기적 자연에까지, 즉 총체적 자연, 물질 일반에 내재되어 있다는 전개… 하지만, 이것의 명칭을 한동백 프로그램으로 부르든 뭐라 부르든 간에, 마이어의 주장이 아님은 분명하지요! (아무튼, 헤겔과 관련된 내용은 다음 호에서 더 자세하게 살펴봅시다.)
그의 몰이해 혹은 사기는, 이어지는 목적 법칙적 과정에서도 한 문장 한 문장 계속됩니다.
그는 이어서 목적 법칙적(teleonomic) 과정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그것은 “목적 법칙적 과정이나 행동은 그것의 목적 방향성이 진화된 프로그램의 영향 때문인 그러한 것”으로 되며, “한 과정이나 활동의 목적 방향을 포함”하고 “엄격하게 궁극적 인과 작용들과 관계”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 유전 프로그램과 신체 프로그램 간의 대립 운동을 통해 해명한다.[91]한동백, 앞의 글, p. 94. (강조는 인용자.)
목적 자동적 과정과 목적 법칙적 과정의 차이를 전혀 모르는 한동백은, 목적 법칙적 과정에 대해 그냥 책에 있는 대로 우선 쓰고 봅니다. 그러고 나서, 앞서 헥켈이 헤겔에게서 작용인과 목적인의 대립을 발견했듯, 유전 프로그램과 신체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것을 즉시 대립적 관계로 파악하고, 마이어가 목적 법칙적 과정을 이것의 “대립 운동을 통해 해명”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헤겔식(?) 헛소리 ③’을 호명합니다!
이것이 대립 운동을 하든, 아니든 간에(물론, 헤겔식으로는 대립적 운동으로 파악할 수도 있겠지요. 또 유전 프로그램과 신체 프로그램은 생명체 내 두 가지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당연히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앞서, “목적 법칙적 과정” 중 “프로그램의 종류”를 설명한 부분에서, 또 “적응 형질”에 대해 설명하면서도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그 부분들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마이어는 이미 목적 법칙적 과정에 대해, 충분히 해명했습니다. 특히, 그것이 목적 자동적 과정과 어떻게 다른지를 이야기하면서요. 그리고 생물학적 과정의 이중 인과에 대해 설명하면서요. 그것의 핵심이, 유전 프로그램이든, 신체 프로그램이든,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설명하면서요!!
그리고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목적 법칙적 활동들을 통제하는 프로그램들은 오로지 게놈의 DNA에 의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유전 프로그램들 이 외에 신체 프로그램을 인식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92]에른스트 마이어, ≪생물학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 pp. 85-86.라는 마이어의 언급처럼, 비유기적 자연에서의 목적 자동적 과정과는 다른, 생명계의 목적 법칙적 과정에 대해 처음 이야기될 때, 그때의 프로그램은 아직 유전 프로그램으로만 보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후 연구를 통해, 유전 프로그램에도 열린 것과 닫힌 것이 있으며, 유전 프로그램 외에도 신체 프로그램 등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고, 이 신체 프로그램은 적응 형질 등 다른 개념과도 연결이 됩니다. 즉, 프로그램의 내용을, 또 목적 법칙적 과정의 내용을 풍부화해 준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한동백의 ‘목적 법칙적 과정을 그것의 대립 운동을 통해 해명’했다는 헤겔식 헛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한동백이 “목적 법칙적 과정이나 행동은 … 목적 방향성이 진화된 프로그램의 영향 … 목적 방향을 포함 … 엄격하게 궁극적 인과 작용들과 관계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 유전 프로그램과 신체 프로그램 간의 대립 운동을 통해 해명한다” 운운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 ‘프로그램’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거나 사기를 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드러낼 뿐만 아니라(앞서 다 드러났지요!), 그 문장의 내용이 직ㆍ간접적으로 우리가 앞서 ‘적응 형질들’에서 보고 기억해 두었던, 그것과 신체 프로그램의 관계, 그리고 ‘기능’, 마이어가 말하고 있는 ‘(생물학에서의) 근접 원인과 궁극 원인’의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기에, 한동백이 그것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거나, 전부 사기를 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유전 프로그램과 신체 프로그램의 대립 운동을 통해 해명”된다고 했으니까요.[93]물론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 둘은 생명체 내의 두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상호 관계 속에서 작동하고 있고, 그러한 관계 속에 그렇게 운동(대립 … Continue reading 결국, 전부를, 즉 아무것도 이해하고 있지 못하거나, 아니면 대~단한 사기를 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우선 여기에서 “엄격하게 궁극적 인과 작용들과 관계”하는 것이라고 할 때, “궁극적”이라는 것은, 목적 법칙적 과정이 (유전) 프로그램의 존재[94]유전 프로그램과 신체 프로그램과의 관계는 앞서 “목적 법칙적 과정” 중 “프로그램의 종류”를 설명한 부분에서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또 “적응 … Continue reading와 관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한동백이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그 ‘프로그램’ 말입니다! (아래에서 모아서 살펴보겠습니다.)
또 여기서 “인과”란, 아래의 인용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목적 법칙적 과정의 이중 인과가 둘 다 그렇고, 우주적 목적론을 제외한 또 다른 외관상 목적론적 현상ㆍ과정들도 다 마찬가지이지만, 그것들이 인과적 설명에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과율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지요(보다 자세한 내용은, 앞서 본문의 “생물학의 상대적 특수성”과 “생물학의 두 분야”를 참조하세요).
목적 법칙에 대한 정의에서 핵심 단어는 유전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의 존재를 인식하는 데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이 (A) 물질적인 어떤 것이며 (B) 목적 법칙적 과정이 시작하기 전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목적 법칙과 인과성 간에 어떠한 충돌도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진화된 프로그램들에 의해 통제되는 목적 법칙적 과정들의 존재는 생물학의 이중 인과 작용들에 대한 근거다.[95]에른스트 마이어, ≪생물학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 p. 83.
네 개의 인정된 목적론적 과정 중 어느 것도 미래의 알려지지 않은 목적으로부터 거꾸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인과적 설명과 목적론적 설명 간의 충돌이라는 이전에 자주 제기되어 온 주장을 반박한다. 우주적 목적론이 존재한다면 그러한 주장은 참일 수 있지만, 이제 과학에서 인정된 네 가지 종류의 목적론[teleology]에는 타당하지 않다.[96]같은 책, p. 94. (강조는 인용자.)
궁극적 원인과 근접 원인(궁극적 인과 작용과 근접 인과 작용) 및 유전 프로그램과 신체 프로그램의 관계, 그리고 ‘기능’ 등등은 서로 연결되어 설명될 수 있기 때문에, 한꺼번에 인용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읽으시면서 이해하실 수 있도록, [ ] 안에 약간의 설명을 병기해 두었습니다.
유기체들에 있는 이러한 유전 프로그램들의 존재(=궁극 원인들[ultimate causes])는 과거 유기체들의 진화 역사 동안에 작용한 근접 원인들의 결과다.[97]같은 책, p. 84.
다양한 종류의 프로그램들[유전 프로그램과 신체 프로그램 등]은 뚜렷하게 분리되지는 않는다. 모든 것들이 유기체가 진화하는 과거 역사 동안 작용한 근접 원인들의 결과다. 그리고 모두가 [또한, 목적 법칙적 과정으로서] 궁극 원인들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98]같은 책, p. 86.
살아 있는 각 객체들의 유전형으로 구성되는 이러한 프로그램은 매 세대마다 일어나는 수십억 년간의 자연 선택의 산물이다. … 유전 프로그램들은 단지 살아 있는 유기체들에서만 발생한다. 그것들은 무기적 세계와 생명계의 절대적인 경계선을 제공한다.[99]같은 책, p. 130.
근접 인과 작용과 궁극(진화) 인과 작용들은 기능주의자들의 논의에서 자주 혼동되었다.[100]같은 책, p. 90.
한 기관이나 다른 생물학적인 형질의 생리적 기능을 묘사하는 것들은 목적론적인[teleological] 것이 아니다. 게다가 더 좋은 경우에는 그것들이 대체로 물리화학적 설명들로 번역될 수도 있다. 그것들은 근접 인과 작용들 때문이다.
목적론적인 측면들에 대한 분석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구조나 활동의 생물학적 역할이다. 그러한 역할들은 진화적 인과 작용들 때문이다.[101]같은 책, pp. 76-77.
적응 형질들의 특성 중 하나는, [즉, 후자는] 그것들이 목적 법칙적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목적 법칙적 프로그램들을 위한 집행 기관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아마도 신체 프로그램들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 제안했다.[102]같은 책, p. 90-91. (강조는 인용자.)
여기까지 한동백의 왜곡을 정리해 봅시다. 마이어가 “그들은 기능이라는 단어가 두 가지 아주 다른 현상들을 가리킨다는 것 그리고 프로그램이라는 개념이 목적–방향성(goal-directedness)의 문제에 새로운 국면을 부여한다는 것을 무시했다. 그들은 근접 원인과 진화적 원인들 간 구별과, 정적인 (적응된) 체계들과 목적–방향적인 활동들 간 차이점을 혼동했다”고 비판했던 철학자들과 한동백이 무엇이 다릅니까?
한동백 역시 최소한의 기본 개념부터 대부분의 내용을 다~,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앞서 한동백의 인용에 대해, “마이어는 한동백에게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라고 했던 저의 상상에 동의하실 거라 믿습니다.
그런데, 한동백은 끝까지 헛소리입니다.
일부 관념론자, 즉 초월적 목적론자, 외재적 목적론자들은 마이어의 연구 성과를 악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이어는 그러한 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못 박았다:
비록 분명하게 목적 방향적인 유기적 과정들과 활동들이 많이 있지만, 그 목적은 이러한 활동들을 지시해 주는 프로그램이 이미 암호화되어 있기에, 초자연적 힘들을 포함시킬 필요는 없다. 그러한 목적 법칙적 과정[초자연적 목적성이라 오인되는 것: 한동백]들은 원리상 물리화학적 원인들로 환원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비유기적 자연에는 중력과 열역학 법칙들 같은 단지 자연법칙들의 작용에 기인하는 종국을 완수하는 과정들이 있다.[103]한동백, 앞의 글, pp. 94-95. (강조는 인용자.)
누가 마이어의 연구 성과를 악용합니까? 마이어가 말하는 생물학의 상대적 특수성을 이해하면, 다섯 가지 목적론이 뭔지를 이해하면, 목적 자동적 과정, 목적 법칙적 과정의 차이를 이해하면, 전혀 악용할 소지가 없지 않습니까? “외재적 목적론자들”이 악용을 한다구요? 도둑이 제 발 저리는지요. 마이어를 악용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유물론자’라고 사기 치는, ‘내재적 목적론자’ 한동백, 당신 아닙니까!
위에서 한동백이 인용한 것은, 마이어의 이 책에서, “목적론” 부분 중 거의 마무리에 해당하는 “목적론의 현재 위치”라는 부분입니다. 전통적 목적론에 대한 자신의 고찰을 마무리하는 부분입니다.
이전에는 아주 이질적인 “목적론적”이라는 범주에서 위에 언급한 네 가지 물질적 과정들을 제거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이것은 우주적 목적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네 가지 외관상 목적론적인 과정들―즉, 목적 법칙적 과정들, 목적 자동적 과정들, 자연 선택에 의한 적응성 획득 그리고 합목적적 행동―은 정확히 물질적 현상들이라는 인식은 목적론에서 이전의 신비감과 초자연적인 함축들을 박탈했다.
살아 있는 자연에는 적응성(칸트의 합목적성)이 있지만, 다윈은 그것의 기원이 물질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비록 분명하게 목적 방향적인 유기적 과정들과 활동들이 많이 있지만, 그 목적[goal]은 이러한 활동들을 지시해 주는 프로그램에 이미 암호화되어 있기 때문에, 초자연적 힘들을 포함시킬 필요는 없다. 그러한 목적 법칙적 과정들은 원리상[in principle] 물리화학적 원인들로 환원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비유기적 자연에는 중력과 열역학 법칙들 같은 단지 자연 법칙들의 작용에 기인하는 종국을 완수하는 과정들이 있다.
네 개의 인정된 목적론적 과정 중 어느 것도 미래의 알려지지 않은 목적으로부터 거꾸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인과적 설명과 목적론적 설명 간의 충돌이라는 이전에 자주 제기되어 온 주장을 반박한다. 우주적 목적론이 존재한다면 그러한 주장은 참일 수 있지만, 이제 과학에서 인정된 네 가지 종류의 목적론[teleology]에는 타당하지 않다.[104]에른스트 마이어, ≪생물학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 p. 94.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도, 인용문의 순서로 보면, 적응, 합목적성, 목적 법칙적 과정, 목적 자동적 과정의 차이가 총괄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 목적[goal]이 이러한 활동들을 지시해 주는 프로그램에 이미 암호화”되어 있는 생물계의 목적 법칙적 과정과 비교해, “마지막으로 비유기적 자연에는 중력과 열역학 법칙들 같은 단지 자연 법칙들의 작용에 기인하는 종국을 완수하는 과정들이 있다”라고 또 다시 인용하고 있으면서, 그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끝까지 알지 못하는, 즉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정말 대단한 ‘철학자’이십니다!
마이어의 책 어디에서, 한동백의 주장처럼, 비유기적 자연과 생물계의 과정에 모두 적용될 수 있는 목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비유기적 자연의 자연 법칙적 과정과 생물계의 이중 인과(자연 법칙, 프로그램)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비유기적 자연에서의 목적을 오히려 비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과정들을 유기체에서 진행되는 참된 목적 방향적인 과정들과 같은 범주에 놓는 것은 가장 잘못된 것”이라고[105]같은 책, p. 79.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참으로 목적 방향적(goal directed)이고 외관상 목적적인[purposive] 과정들”은 “살아 있는 자연에서만 발생한다”[106]같은 책, pp. 70-71.고 귀가 닳도록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동백이 하고 있는 가상(?)의 우려가 아니라, 그와 정반대로 마이어는, 아마도 혹시나 하는 마음도 조금은 작용해, “목적론”의 마지막 부분을 “목적론과 진화”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앞서 적응 부분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긴 했지만, 그 내용의 핵심은 진화론은 목적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때때로 다윈의 친구들과 적들 모두 그를 목적론자로 분류했다. 그가 초기에 그러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자연 선택을 진화적 변화의 메커니즘으로 채택한 후에는 목적론을 포기했다.[107]같은 책, p. 69. )
다윈이 자연 선택 원리를 확립시킨 후, 이러한 과정은 지지자나 반대자들 모두에게 널리 목적론적[teleological]인 것으로 해석되었다. …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ultimate goal]을 갖고 있지 않은, 말하자면 매 세대에서 다시 시작하는, 다윈주의 진화의 변이적 본성을 충분히 인정할 때 그러한 해석은 더 이상 합리적인 견해가 아니다. 기껏해야 자연 선택 과정은 퍼어스의 “종국적(finious)” 과정들에 대한 정의에 적합할 것이다. … 분명 자연 선택은 최적화 과정이지만, 명확한 목적을 갖고 있지는 않으며, 우연한 사건들을 일으키는 것들이 얼마나 많으며 또한 우연한 사건들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것을 목적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장 그릇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적응에서의 어떠한 개선 또한 목적론적 과정이 아닌데, 그 이유는 주어진 진화적 변화가 적응에 공헌하는 것으로서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 없는지는 엄격히 진화가 일어난 다음에 결정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108]같은 책, p. 95. (강조는 인용자.)
우리가 중점적으로 고찰했던 것은, 전통적으로 목적론으로 불렸던 것 혹은 외견상 목적론적 과정으로 보이는 것들, 다섯 가지이고, 그중 하나는 비유기적 자연에 관계되는 것, 세 가지는 생물계에 관계되는 것, 나머지 하나는 비과학적으로 폐기되었습니다. 그런데, 생물계에 관계되는 것 중, 목적 법칙적 과정은 개체 내의 유전 프로그램 등에 의해 특정한 목적(목표)로, 그것의 표현형이 유도되는 과정이라는 것인데, 전체적 자연에서의 자연 선택 과정은, 오히려 목적 자동적 과정에 가깝다는 것입니다(이것은 사실 목적 자동적 과정과 목적 법칙적 과정의 차이를 이해한다면, 당연한 것이긴 합니다). 위의 적응에 관한 내용은, 앞서 적응에 대한 설명에서 여러 번 등장했던 것이라 생략하고, 합목적적 행위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따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모든 세대들에서 풍부한 변이를 낳고 항상 열등한 개체는 제거하고 가장 적응한 것들에 호의를 베푸는 자연 선택의 순전히 자동적인(automatic) 과정은, 1859년 전에는 목적론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었던 모든 과정들과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다. 현재 우리는 여전히 자연에서 네 가지 목적론적 현상들이나 과정들을 인지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화학과 물리학의 법칙들로 설명될 수 있으며, 반면에 칸트가 채택한 것과 같은 우주적 목적론은 존재하지 않는다.[109]같은 책, p. 132.
이렇게, 마이어의 주장은 끝까지, 한동백의 ‘자연적 존재와 사회적 존재 모두가 자기목적적 운동을 한다’는 그것과 정반대이지 않습니까? 그나마 조금은 한동백의 ‘물질 자체에 내재된 목적’과 유사하기라도 한,[110]하지만 사실, 이 또한 다른 것인데,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생물계의 목적 법칙적 과정도, 다윈의 자연 선택 앞에서 이렇게 무력해집니다. 한동백의 주장은 다른 말로 하면, “자연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목적성”이지요, 그런데 이것은, 이 책에서 마이어의 주장이 아니라, 그가 반박하고 있는 내용으로 등장합니다.
자연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목적성을 설명해줄 메커니즘에 대한 증거를 발견하려는 모든 노력들은 성공적이지 못했거나, 아니면 자연에서는 그것이 유기체들에서 발생하며, 그것은 엄격하게 인과적으로 설명되었다.[111]에른스트 마이어, ≪생물학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 p. 69.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도 엥엘스를 왜곡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문장을 숨기고 사기를 쳤던 것일까요? 아니면, 이 문장을 보고도 정말 몰랐을까요?
끝으로, 한동백이, 자연과학의 성과, 생물학의 성과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해 주고 있다면서 인용하고 있는 이 책에서, 한동백의 주장과 동일한 주장은 딱 하나 있습니다.
세계는 최근에 발생되지도 않았고, 항상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외관상 목적론적인 변화들에 대한 세 가지 설명이 진척되었다.
… 이러한 변화들은 내장된 프로그램에 지배되며, 개체의 유전자형에 있는 목적 법칙적 프로그램과 유사하다. [그런데] 많은 후기–다윈주의 연구는 그러한 우주적 프로그램이 존재하지 않으며 우주적 진화의 불규칙성이 너무나 커서 프로그램의 존재와 조화될 수 없다는 증거를 제공하는 결과를 가져왔다.[112]같은 책, p. 92.
한번 작명해 보자면, ‘우주적 목적 법칙적 프로그램’! 하지만 최신 자연과학의 성과는 이것을 존재를 입증하기는커녕, 그것의 부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 * *
이번 호에서는, 한동백이 주장하는 바의 근거가 오류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다음 호에는, “3. 내용상의 오류 (2) ― 한동백은 왜 이렇게 주장하는가 혹은 주장할 수밖에 없는가?”, “4. 태도(?)의 문제 및 약간의(?) 조직적 문제”, “5. 나가며”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모두 언급했던 모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한동백은, 맑스-레닌주의 이론, 헤겔 철학, 현대 철학, 맑스주의 경제학, 과학, 수학 등에서 대단한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품성까지 훌륭하다고 추앙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 글을 쓰면서, 한동백과 제가 같은 글을 본 것이 맞느냐고 할 정도, 그가 정말 이해를 못하는 것, 정확히는 이해력이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알고도 사기를 치는 것인지, 내내 생각했습니다. 그런 그가, 그 커뮤니티에서 독서법을 조언하고 있더군요. “속독하지 말고, 천천히 이해하면서 몇 번씩 읽으라고!” 저는 한동백이 이번 호에 비판된 엥엘스와 마이어의 책들을 그렇게 읽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맑스가 루게에게 했던 말을 인용하며, 정리하겠습니다.
신문의 한 난에 숨겨져 있는 오류들의 그물을 찢어발기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상세한 이야기들이 필요했다. 모든 독자들이 그러한 문필적 협잡 행위를 요해할 만한 교양과 시간을 가질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익명의 그 ‘프로이센 인’[루게: 인용자]은 우선 당장은 정치적ㆍ사회적 관점의 집필 행위를 중단할 의무, 독일의 상태들에 대한 장광설을 그만둘 의무, 오히려 자기 자신의 상태에 관한 양심적인 자기 변명에서 시작할 의무를 독자 대중에게 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113]칼 맑스, “기사 「프로이센 왕과 사회 개혁. 한 프로이센 인이」(『전진!』 제60호)에 대한 비판적 평주들”,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 Continue reading (강조는 인용자.)
노사과연
References
↑1 | 한동백, “합목적성 개념의 논리적 내용에 대하여”, ≪정세와 노동≫ 제192호(2023년 6월), p. 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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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같은 글, p. 88. |
↑3, ↑9 | 프리드리히 엥겔스, ≪자연의 변증법≫, 황태호 역, 전진, 1989, p. 243. |
↑4, ↑8 | MEW, Bd. 20, S. 519. |
↑5 | MEW, Bd. 20, S. 478. |
↑6 | 프리드리히 엥겔스, ≪자연변증법≫, 윤형식ㆍ한승완ㆍ이재영 역, 중원문화, 1989, p. 261. |
↑7, ↑11 | MEW, Bd. 20, S. 509. |
↑10 | MEW, Bd. 20, S. 480. |
↑12 | 프리드리히 엥겔스, ≪자연변증법≫, 윤형식ㆍ한승완ㆍ이재영 역, 중원문화, p. 211. |
↑13 | 한동백, 앞의 글, p. 79. |
↑14 | 같은 글, p. 92. |
↑15 | 프리드리히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반-뒤링)≫(≪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5권), 박종철 출판사, 1994, p. 79. |
↑16, ↑17, ↑18, ↑25, ↑26, ↑27, ↑28, ↑29 | 같은 곳. |
↑19 | 같은 책, pp. 74-75. |
↑20, ↑22, ↑79, ↑88, ↑105 | 같은 책, p. 79. |
↑21 | 같은 책, p. 75. |
↑23 | 같은 책, pp. 79-80. |
↑24 | 같은 책, p. 80. |
↑30 | 한동백, 앞의 글, pp. 91-92. |
↑31 | 같은 글, p. 91. |
↑32, ↑35 | 프리드리히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반-뒤링)≫(≪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5권), 박종철 출판사, 1994, p. 74. |
↑33 | “[뒤링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용자] … “열병적 환상들”이 나타났는바, “헤겔이라는 자”가 이것들을 정점에 끌어올렸다. 이 자는 “헤겔-은어”를 사용했으며, 자신의 “형식상으로도 비과학적인 수법”과 “조잡함”을 수단으로 하여 “헤겔-전염병”을 퍼뜨렸다.” (같은 책, p. 33.) (강조는 인용자.) |
↑34 | G. W. F. 헤겔, ≪헤겔 논리학≫(개정판), 김계숙 역, 서문문화사, 1997, p. 329. |
↑36 | 한동백, 앞의 글, p. 88. |
↑37, ↑81 | 같은 글, pp. 92-93. |
↑38 | 같은 글, pp. 93-94. |
↑39 | 에른스트 마이어, ≪생물학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 박정희 역, 철학과 현실사, 2005, pp. 52-54. |
↑40 | 같은 책, pp. 46-47. |
↑41 | 같은 책, p. 54. |
↑42 | 같은 책, p. 61. |
↑43 | 같은 책, p. 104. |
↑44 | 같은 책, p. 42. |
↑45 | 같은 책, p. 43. |
↑46 | 같은 책, p. 45. |
↑47 | “살아 있는 유기체에서 보이는 외관상[seemingly] 목적론적인[teleological] 과정들이 엄밀하게 물질적으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책, p. 74.) |
↑48 | 같은 책, p. 25. |
↑49 | 같은 책, p. 77. |
↑50 | 같은 책, p. 75-76. |
↑51, ↑59 | 같은 책, p. 70. |
↑52 | 물론 이것은 마이어의 구분입니다. 마이어도 자신의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베크너와 우저 외에도 여러 학자들이 목적론을 구분하는 시도를 했습니다. 이러한 시도들을 고찰한 오창희는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목적론은 적어도 다음의 네 가지 종류에 적용될 수 있다. (1) 인격적 행위자의 의도적인 행위, (2) 항상성을 포함한 유기체의 기능적 활동, (3) 미리 프로그램된 것의 전개, (4) 자연선택이나 적응을 통한 생물의 진화.” (오창희, “과학에서의 목적론”, ≪철학≫ 제54집(1998년 봄), 한국철학회, p. 164.) |
↑53 | 에른스트 마이어, 앞의 책, pp. 77-78. |
↑54 | 같은 책, pp. 79-81. |
↑55, ↑63 | 한동백, 앞의 글, p. 95. |
↑56 | 과거에 목적론으로 불리던 혹은 외견상 목적론적으로 보이는 과정 중 하나라는 의미에서 ‘목적 자동적’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의미는 있겠으나, 그것의 정확한 의미로만 따져 본다면, 여기에 무슨 ‘목적(goal)’이라는 것은 없고, 따라서 “종국 자동적” 정도로 번역해도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
↑57 | 에른스트 마이어, 앞의 책, p. 298. |
↑58 | 같은 책, pp. 81-82. |
↑60 | 같은 책, p. 298. |
↑61 | 앞서와 마찬가지로, 잠시만 번역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앞서 잠깐 언급한 마이어의 또 다른 저작 ≪이것이 생물학이다≫의 역자들은 이 ‘텔레오노미’를 “목적론”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에른스트 마이어, ≪이것이 생물학이다≫, 최재천 외 역, 몸과 마음, 2002, p. 51.; … 최재천 외 역, 바다출판사, 2016, p. 46.). ‘텔레오노미’를 “목적론”으로 번역한 것은, 저자의 주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명백한 오류입니다 ― 그래서 저는 진화생물학의 국내 최고 권위자로 손꼽히는 최재천 교수가 이 부분을 번역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공역자들의 잘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에 비해, 이 책의 역자는 그것을 “목적 법칙”으로 신경 써서 번역한 것 같습니다. 다만, 아쉬움에서 약간의 지적을 하고 싶습니다. (물론 다른 나라 말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은 늘 어려운 작업임을 잘 알고 있기에, 순전한 아쉬움의 차원입니다.) 역자는, goal directed 또는 goal directedness를 ‘목적 방향적’, ‘목적 방향성’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먼저 goal을 ‘목적’으로 번역하면, 바로 뒤에 나올 purpose, purposive의 ‘목적’과 차이가 없게 되는데(물론 이 중 하나는 ‘합목적적’으로 번역하고는 있지만), 의식적ㆍ의도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purpose의 ‘목적’과 ‘목표’로서의 goal은 뉘앙스의 차이가 있긴 한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의 번역이 오역은 아닙니다. 다음으로, direct(ed)(ness)를 ‘방향’의 의미로만 번역하고 있는데, 이 또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 글의 취지를 적극적으로 살린다면, directed의 뜻에서 “유도된, 지시받은, 규제된, 지도된, 관리된, 통제된, 지휘(지시)에 따른” 등의 의미를, 또 directedness의 뜻에서 “유도됨, 지휘(지시)에 따름” 등의 의미를 살려서, 그것이 프로그램에 의해 유도되고 지시ㆍ지휘되고 통제된다는 의미를 더 부각했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
↑62 | 에른스트 마이어, ≪생물학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 p. 82. |
↑64 | 에른스트 마이어, ≪생물학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 pp. 82-83. |
↑65 | 같은 책, pp. 85-86. |
↑66 | 같은 책, pp. 87-88. |
↑67 | 같은 책, p. 88. |
↑68 | 같은 책, pp. 88-89. |
↑69 | 같은 책, p. 89. |
↑70 | 같은 책, pp. 89-90. |
↑71, ↑101 | 같은 책, pp. 76-77. |
↑72, ↑100 | 같은 책, p. 90. |
↑73 | 같은 책, pp. 77-78. |
↑74, ↑102 | 같은 책, p. 90-91. |
↑75, ↑112 | 같은 책, p. 92. |
↑76 | 한동백, 앞의 글, p. 64. |
↑77 | 같은 글, p. 95. |
↑78, ↑87, ↑90 | 에른스트 마이어, ≪생물학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 p. 80. |
↑80 | 한동백, 앞의 글, p. 92. |
↑82, ↑86 | 같은 글, p. 93. |
↑83 | 인용문 그대로는 네 가지. 여기서 마이어가 ‘생각하는 유기체들의 합목적적 행동’을 빼고 있는 이유는, 앞서 언급한 관련 부분을 참조하면 되실 듯합니다. |
↑84 | 에른스트 마이어, ≪생물학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 p. 71. |
↑85 | 한동백, 앞의 글, p. 93. |
↑89 | 한동백, 앞의 글, pp. 93-94. |
↑91 | 한동백, 앞의 글, p. 94. |
↑92 | 에른스트 마이어, ≪생물학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 pp. 85-86. |
↑93 | 물론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 둘은 생명체 내의 두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상호 관계 속에서 작동하고 있고, 그러한 관계 속에 그렇게 운동(대립 운동)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 작용은 마이어의 설명 속에서도 풍부하게 등장합니다. “프로그램의 종류”, “적응 형질” 등에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이어가 그것을 통해, 목적 법칙적 운동을 해명했다는 것은 전형적인 헤겔식의 헛소리이죠. 정확하게는, 그것을 풍부화할 수 있었겠지요! |
↑94 | 유전 프로그램과 신체 프로그램과의 관계는 앞서 “목적 법칙적 과정” 중 “프로그램의 종류”를 설명한 부분에서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또 “적응 형질”에 대해 설명하면서도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그 부분들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다만, 아래에서도 그 일부를 다시 인용하겠습니다. |
↑95 | 에른스트 마이어, ≪생물학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 p. 83. |
↑96 | 같은 책, p. 94. |
↑97 | 같은 책, p. 84. |
↑98 | 같은 책, p. 86. |
↑99 | 같은 책, p. 130. |
↑103 | 한동백, 앞의 글, pp. 94-95. |
↑104 | 에른스트 마이어, ≪생물학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 p. 94. |
↑106 | 같은 책, pp. 70-71. |
↑107 | 같은 책, p. 69. |
↑108 | 같은 책, p. 95. |
↑109 | 같은 책, p. 132. |
↑110 | 하지만 사실, 이 또한 다른 것인데,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111 | 에른스트 마이어, ≪생물학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 p. 69. |
↑113 | 칼 맑스, “기사 「프로이센 왕과 사회 개혁. 한 프로이센 인이」(『전진!』 제60호)에 대한 비판적 평주들”,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1권, 박종철 출판사, 1992, pp. 22-23. |
선생님 저는 비판의 대상이 된 글 작성자입니다.
글을 모두 읽어봤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Endursache는 원래 causa finalis(목적인)의 번역어입니다. 따라서 제 글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causa finalis의 직역투로서 이것이 ‘최종 원인’이기에 ‘목적’과 관련이 없다고 해석하신 듯한데, 이는 철학에 대한 심대한 무지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부터 우리가 흔히 철학에서 다루는 모든 목적인, 목적 개념은 바로 causa finalis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말 이 글이 믿기지 않는군요.
제 말이 의심가시면 독일 철학자들이 causa finalis를 독어로 어떻게 부르는지 간단히 검색만 해도 나옵니다.
첫 부분부터 이렇게 틀리셨습니다.
두 번째 비판입니다.
선생님은 엥겔스가 자신의 저술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다루었던 목적 개념과 헤겔의 목적 개념은 어떻게 비교하고, 전자에 대해서 다룰 때 ‘목적’ 개념에 어떻게 적대적이었으며, 헤겔을 다룰 때 목적 개념에 어떻게 친화적이었는지 구분하지 않고 쓰시고 있습니다.
엥겔스가 볼프 류의 목적 개념을 비판하죠? 그 볼프 류의 목적 개념이 바로 제가 제 글에서 비판하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 또는 목적인 개념입니다. 그러나 제 글은 그러한 목적 개념을이 이미 헤겔적 단계 지양되었다고 쓰고 있으며, 심지어 헤겔 부분의 결론부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 개념에 대한 비판까지 추가적으로 써 놓았습니다.
선생님은 헤겔의 목적 또는 합목적성 개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 개념과 혼동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둘은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기왕에 목적인(causa finalis) 개념에 대해 더 얘기해보겠습니다.
선생님은 이 개념이 ‘최종 원인’이기에 목적과 무관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련과 동독의 수많은 철학자들 역시 causa finalis 원어 그대로 쓰면서 이것을 합목적성과 직접 연계해서 다룹니다. 그리고 독일 철학자는 위에 제가 언급하였던 그대로 causa finalis를 내내 Endursache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채 소장님에게서 보았던 모습을 선생님에게서도 보게 되는군요. 개념의 내용을 보지 않고 용어의 형식에 지나치게 집착합니다. 그래서 Endursache나 causa finalis가 목적인이라는 것도 모르고 글을 쓰신 겁니다.
세 번째 비판입니다.
선생님은 “이것으로부터 모든 내적 목적 그 자체가 얼마나 이데올로기적인 규정인지 분명한 결론이 나온다”를 인용하여 제 글을 비판하셨습니다.
여기서 엥겔스가 헤겔의 내적 목적 개념을 비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내적 목적 개념에 스며들어가 있는 관념론적 전제를 비판하는 것이지, 헤겔이 전개한, 수단과 목적의 통일, 합법칙성과 합목적성까지 공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분명히 제 글에서 헤겔의 내적 목적 개념이 관념론적으로 호도되어 있다고 써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토론회에서 제 발언을 쓰셨는데 정확하진 않습니다. 제 기억상 대략 “엥겔스가 충동을 그다지 그럴듯한 개념으로 생각지는 않은 것 같다. 아마도 당대로선 전제작용(헤겔이 말한 그 ‘충동’)이 사변적으로만 개진되어서 그런 듯하다”라고 하였습니다.
네 번째 비판
반뒤링론 한철 역 p. 108를 인용한 제 인용부가 몰이해고 사기라고 하셨습니다.
선생님, 유감이지만 그것은 제가 토론회에서 직접 설명하려고 미리 작성까지 한 내용이나, 토론회 시간이 없어서 말을 하지 못했을 뿐인 내용입니다. 저는 이 부분은 제 글을 비판하는 사람이 꼭 잡을 거라 생각했고 따라서 이에 대한 반론도 미리 준비해뒀었습니다.
먼저 선생님이 그 문장을 그렇게 해석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엥겔스 의도의 완전히 정반대로 해석한 것입니다.
“최근에는 특히 헥켈에 의해 자연 육종이라는 표상이 확대되어 종의 변이가 적응과 유전의 상호 작용의 결과로 파악되고 있는데, 이 경우에 적응은 이 과정에 변화를 일으키는 측면으로, 유전은 이 과정을 보존하는 측면으로 서술되고 있다. 그러나 뒤링 씨가 보기에는 이것도 역시 옳지 않다.”
자 이 부분에서 뒤링이 불만을 품은 것은, 그것이 “표상을 통해 규정된 충동과 활동을 전게로 한다”고 해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 여기서 문제로 되는 것은 ‘표상을 통해 규정된’입니다. 즉 생물학적 진화 과정이 관념적인 것에 의해 진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엥겔스가 보기에 뒤링은 헤겔의 관념론적 측면까지 다 답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엥겔스가 보기에 헤겔의 목적이라는 것은 그저 무의지적인 자연의 자기 운동에 의해 생겨나는 양태의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제 글 보시면 알겠지만, (지금 바로 기억해 내는 것이기에 100% 정확하진 않지만) 엥겔스가 헤겔 목적 개념에 대한 오해를 비판하면서 “철학에 숙달되지 않은 사람은 헤겔의 목적 [개념]을 필연적인 것을 초월해 있는 의식적 의도를 전제하는 것”이라고 본다고 말하죠? 바로 이 부분이 제가 인용한 부분과 연동되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엥겔스가 뒤링에게 말하고자 하였던 것은 “뒤링아 너가 인용한 헤겔의 목적 개념은 의식적 의도를 전제하지 않고도 성립하는 규정이다. 즉 헤겔의 목적 개념은, 개별 물질의 필연적 작용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다”입니다.
뒤링은 그런데 자신의 글에서, 자기 주장을 뒤바꾸어 “수단과 목적의 관계는 결코 의식적인 의도를 전제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그와 반대로 적응은 그와 반대로 ‘의식적인 의도’를 전제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엥겔스가 보기엔, 전자를 주장하려면 후자도 의식적인 의도가 없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로 엥겔스가 반박으로써 제시한 내용이 제가 인용한 동식물 합목적성 관련 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다시 봐봅시다.
“청개구리나 잎을 먹는 곤충이 푸른색이고 사막의 동물이 사황색(沙黃色)이고 극지의 동물이 주로 백설같이 흰색이기는 하여도 그것들이 일부러 또 어떤 관념에 따라 그러한 빛깔을 가지게 된 것은 물론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이러한 빛깔은 다만 물리적 힘과 화학적 인소의 작용에 의하여서만 설명되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동물들이 그러한 빛깔에 의하여 자기들이 생활하는 환경에 합목적적으로 적응되어 있다는 것과 그 결과 적들의 눈에 훨씬 덜 띄게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부 식물들이 그것에 내려앉는 곤충을 잡아먹는 데 사용하는 기관도 그러한 활동에 적응되어 있으며 심지어 합목적적으로 적응되어 있기까지 하다. 그리하여 뒤링씨가 적응은 오직 관념의 작용에 의하여서만 야기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합목적적인 활동도 역시 관념을 매개로 하여 진행되어야 하며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른 말로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이리하여 우리는 현실철학에서 늘 그러하지만 다시금 자기의 목적을 실현하는 조물주, 즉 신에 도달하게 된다.”
자 여기서 “그리하여 뒤링씨가 적응은 오직 관념의 작용에 의하여서만 야기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합목적적인 활동도 역시 관념을 매개로 하여 진행되어야 하며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른 말로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라는 내용이 나오죠? 자, 적응은 분명히 합목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뒤링은 합목적적인 것에 의식적 의도를 전제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적응 역시 무의지적입니다. 왜 무의지적인가? 선생님, 엥겔스는 여기서 식물에게까지 합목적적 활동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식물에게 뇌세포가 있나요? 식물에게 의식이 있나요? 식물에게는 의지가 없습니다.
정리하자면, 엥겔스가 말하고자 하였던 것은, ‘목적 개념에 의식적 의도를 전제하지 않은’ 뒤링을 비판했다기보단, 그렇게 말해놓고(이것도 말을 바꾼 것이지만) 적응은 의식적 의도를 전제한다는 듯이 써 내려간 것이 “논리적 혼란”이라는 겁니다.
네 번째 비판에서 선생님에게 정말 실망인 부분이 이것입니다.
엥겔스가 “목적 개념이 자연에서도 통용된다고 전력을 다해 주장했던 것은 뒤링이다”라고 했다 해서 자연에 합목적성이 있다는 것 자체를 엥겔스가 곧바로 부정하였다고 할 수 없고, 이것은 낱낱의 문장을 검토하면 더욱 명확해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목적 개념이 자연에서도 통용된다고 전력을 다해 주장했던 것”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말해놓고 ‘적응’에는 의식적 의도가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적응’ 역시 목적적 연관(합목적적 활동)이고, 따라서 ‘적응’과 자연의 합목적성을 분리해 놓는 것은 논리적 오류라는 것이죠. 그리고 엥겔스는 인용문 그대로 식물에게까지 목적적 연관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식물에는 그 어떤 의지도, 의식도 없습니다. 즉 이 부분에서 엥겔스가 비판 대상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 “자연에 목적성이 있다”는 주장 일반에 있지 않다는 게 명확해집니다.
다음 비판입니다.
“유기계에 적용하는 것이 어느 정도로 정당하며 합당한가를 여기에서 연구하는 것…
왜 그 다음 내용은 추가 안 하시는지요? 그 다음 이어지는 글에서 변증법적 목적 개념을 아예 자연에 적용하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엥겔스가 말합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그것을 연구하는 것은 당대로선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 선생님의 의도라면 ‘상호 작용이 참된 목적인'(선생님이 잘못 이해하셨던 그 부분)이라는 엥겔스의 말은 공염불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말하는데 causa finalis는 목적인으로 번역됩니다. 이 개념의 기원 자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형이상학’인데, 질료와 형상, 수단과 목적의 관계를 설명함에서 목적을 설명하는 데 활용되는 개념입니다. 선생님은 finalis니까 최종이지 목적이 아니라고 하실 것 같으신데, 애당초 당대 (형이상학적)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목적이란 것이 완전 현실태(entelecheia)가 형성되는 ‘운동의 끝인 최종 지점’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설을 선생님께서 혼동하셨거나, 몰랐던 게 아닌 이상에야 이런 글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자연, 물질 일반의 “자기목적적 운동에 관한 변증법적 해명”이 될 수 있다, 엥엘스도 그렇다 말했다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까? 엥엘스는 명확하게, 목적 개념을 “유기계에 적용하는 것이 어느 정도로 정당하며 합당한가를 여기에서 연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백 보 천 보 물리고, 백번 양보해 보아도, 한동백이 주장하고 있는 문헌적 근거라는 것은 순전히 엉터리이고, 결국은 막다른 길이지 않습니까!” (김해인 선생님의 글)
만약 엥겔스가 의식적 의도가 없는 대상에도 목적적 연관이 있다고 하였다면, 자기 재생산 체계를 가진 대상 역시 합목적성 규정을 지닌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다시 말하지만, 엥겔스는 “상호 작용이 참된 목적인(다시 말하지만 Endursache는 우리가 생각하는 목적인 개념이 맞습니다, causa finalis를 독어로 번역한 것일 뿐입니다)”이라고 말한 바 있고요.) 이것은 제가 헤겔 부분서 수단과 목적, 법칙성과 목적성이 어떻게 상관하는지 찬찬히 읽어보시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목적 규정(다시 말하지만, 의인적 목적, 초월적 목적이 아니라 자연 자체 운동에 의해 산출되는 목적)이 유기계가 등장하기 전에 없었다면, 무기적 자연에서의 차이 자체가 설명 안 됩니다.
그래서 엥겔스가 “상호 작용이 곧 참된 목적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개별 물질이 자기 구별을 통해 운동한다면, 그것은 어떤 초월적 존재, 신 따위가 의도한 게 아니라, 개별 물질 스스로가 자기 구별한 다른 개별 물질(차이, 여기서는 이것이 목적 규정으로 될 것)과 상호 작용하여 물질 스스로 모순을 통해 다른 차이를 산출해낸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차이의 산출이 없다면 발전이 없을 거고 발전이 없다면 풍부한 차이조차 재생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이어는, 기존에 철학에서 사용된 ‘목적(텔로스)’의 의미에서, 종국 방향적인(end directed) 과정들과 목적 방향적인(goal directed) 과정들을 구분해 냅니다. 그리고 여기서 특히, 그리고 뒤에서도 누차 살펴보겠지만, 비유기적 자연(무기계)의 과정에 ‘목적(goal)’을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종국 점(endpoint)을 가질 수는 있지만, 목적(goal)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미, 마이어가 한동백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없음이 드러나고 있지 않나요? 그의 몰이해 혹은 사기의 단면들이 말입니다.”
선생님은 또다시 여기서 목적 방향성과 종국 방향성의 개념 차이를, ‘목적’과 ‘종국’의 사전적 정의에 집착하면서 정의하려고 들고 있습니다. 마이어가 ‘종국 점’과 ‘목적’을 구분하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제 글에서 말하는 ‘목적’이 마이어의 목적에만 해당하는 개념으로 착각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제가 누누히 말하는 것이지만, 용어의 형식이 아니라 개념적 내용을 봐야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마이어 저서 75페이지의 인용물을 소개하면서 저를 사기꾼이라고 하셨지만, 마이어가 말하는 종국점이란 건 제가 말하는 목적 개념이 모두 포괄하는 내용(마이어의 ‘목적’ 개념 역시 제가 쓴 논문이 말하고자 하는 목적 개념이 포괄하고 있습니다)입니다. 즉, 종국 방향성(마이어가 의도하지 않았든, 의도하였든) 역시 헤겔 논리학에서 말한 변증법적 목적 개념과 상동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국 점이란, 운동 과정이 상대적인 ‘끝’으로서 수렴점인데, 이러한 수렴점에 대해선 헤겔 역시 ‘전제’ 또는 ‘전제작용’이라는 용어로써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이어는 “텔로스(Telos)는 종국 점이나 목적을 의미한다. 그것들은 같은 것들이다. 반대로 진화생물학자에게는 목적으로서의 텔로스의 종국 점으로서의 텔로스 간 큰 차이점이 있다.”(75)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님 글에 따르면, telos는 말 그대로 ‘끝’, ‘목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마이어조차 종국 점 역시 텔로스 개념에 넣고 있으며, ‘목적 방향성’을 생물학적 과정에서 발생하는 텔로스 개념으로서 상정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마이어는 목적론자들이 종국 점까지 그 자신들이 말하는 목적, 즉 아리스토텔레스식 목적 개념에 부합한다고 말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하면서, 종국 점을 ‘비목적론적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목적론이란 아리스토텔레스식 목적 개념에 기반한 목적론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이어가 비판하는 우주적 목적론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 목적론에 기반한 목적론임에도 선생님은 계속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의 목적 개념을 무차별적으로 혼동한 채 비판 글을 적고 있습니다. 참고로 제 글 어디에도 이런 식(아리스토텔레스식)의 목적론을 따라야 한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목적 개념은 이전 철학의 기계론과 목적론의 통일 속에서 벼려진 것이지, 목적론이나 기계론 둘 중 하나에만 포함되는 게 아닙니다.
마이어는 “그러나 텔로스는 또한 단순히 끝을 향한 과정의 종국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고 하였는데, 이게 종국 점의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즉, 종국 점이란 어떤 사물의 발전 경향의 ‘끝'(그러나 이는 최종적인 끝이 아님, 이러한 끝이 성취되면 다른 목표가 끝으로 설정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종국 점은 사물의 발전 과정을 규정하기 때문에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적 목적 규정에 포함되는 내용입니다. (엥겔스가 뒤링을 비판하면서 헤겔의 목적 개념을, 선생님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 개념과 동일시하는 ‘사상가’들을 얼마나 무시했는지를 계속 이해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이는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 “피어스는 “목적론적”이라는 용어가 무기적 세계에 있는 자연 과정들에 적용시키기에는 너무나 강한 단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최종의 상태를 향한 그것들의 경향을 표현하기 위해 종국적(finious)이라는 용어를 발명할 수도 있겠다”고 제안했다.”(76)
이건 무엇을 뜻합니까? 엄연히 종국 점도 텔로스 개념에 속하지만, 그것을 ‘목적론적’이라는 말로 설명하기에는, ‘목적론적’이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 ‘강한 단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는, 마이어가 지적한 그대로 사실상 합목적성 개념이 포괄하는 내용에 불과합니다. 즉, 그것은 “최종 상태를 향한 그것들의 경향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입니다. 그런데 ‘최종 상태를 향한 그것’이라고 하였을 때 이 ‘최종 상태’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목적이 아닌지요? 마이어는 ‘종국 점’과 ‘목적’을 구분하지만, 그 구분을 책임지는 내용은 ‘종국 점’이 (제 글에서 말하고자 한 ‘목적’으로서) 목적에 포괄되지 않는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종국 점’과 마이어의 ‘목적’ 개념의 차이는 선생님이 마이어 저서에서 찾아 나열한 바로 그 항목의 설명에 나와 있습니다.
님께서 어떤 의미로,
또 의도로 목적 개념을 쓰고 있는지,
님 주변의 동지들과도 이야기하면서
말씀드렸던바,
모르지 않습니다.
댓글에 대한 내용까지 포함해서,
다음 호를 통해 뵙도록 하겠습니다.
건강 잘 챙기시구요~~
위 댓글에서 더 이어서 선생님 글을 조금더 다루어보겠습니다. 저는 앞선 댓글에서 분명히 종국 점 역시 텔로스에 속하고, 마이어 역시 그것을 텔로스 개념 안에 놓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이어는 분명히 그것을 자신의 ‘목적’ 개념과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그대로, 제가 볼 때 마이어의 ‘목적’ 개념과 종국 점은 헤겔이 목적론에서 다룬 내용이 모두 포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제가 앞서 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제가 이렇게 해석한 이유는 그가 분명히 ‘목적 법칙적 과정들’만이 아니라, ‘목적 자동적 과정들’, ‘자연 선택에 의한 적응성 획득’, ‘합목적적 행동’, 네 가지 모두를 “목적론적 과정” 안에 포괄하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마이어가 분명히 자신의 ‘목적’ 개념과 ‘종국 점’을 구분하고는 있지만 “네 개의 인정된 목적론적 과정들 중 어느 것도 미래의 알려지지 않은 목적으로부터 거꾸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미래에 알려지지 않은 목적’이 뭘 의미하겠습니까? 바로 신비적, 초월적 목적 규정 아닌가요? 글에서 제가 이러한 목적 규정을 내내 반박해 오지 않았나요?
다시 정리하자면, 제가 마이어의 용어적 사용을 모두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논변에서도 종국 점은 변증법에서 말하는 목적 개념이 이미 다 포괄하는 내용입니다. 비록 마이어는 자기 저서에서 그것이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완전한 인식까진 보여주진 못 합니다.(다만 변증법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진 않지만, 부분적으로는 승인하는데 바로 그것이 “이것은 인과적 설명과 목적론적 설명 간의 충돌이라는 이전에 자주 제기되어 온 주장을 반박한다”로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까?) 제가 마이어를 인용한 이유는, 마이어가 목적 자동적 과정을 분명 자기 개념에 따라 ‘목적’이라고 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것이 ‘목적’이라는 점에 있어선 부정하였으면서도, 그것이 분명히 텔로스의 한 종류로서, 또 ‘인정된 목적론적 과정들’로서 그것, 즉 종국 점임을 그가 설명했으며, 종국 점은 그가 인용하여 설명한 그대로 ‘최종의 상태를 향한 그것들의 경향’(또는 “단지 자연 법칙들의 작용에 기인하는 종국을 완수하는 과정들이 있다”)을 의미하는 것이 그의 저서에서도 드러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제 논문에서 변증법의 목적 개념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전제작용으로 야기되는 수렴점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 개념임 길게 설명했다는 점을 계속 망각하고 계십니다.
단 제가 이 부분을 인용하면서 마이어가 쓴 프로그램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소개하지 않고 너무 제 식대로 쓴 건 사실입니다. 위에 댓글로 쓴 제 생각이 보여주는 경로를 충분히 작성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두 번째 댓글을 더 달아보겠습니다.
먼저 저는 목적 법칙적 과정을 제 글에서 제가 인과 작용과 무관하다고 한 적도 없고, 그것과 절대적으로 모순적이라고 쓴 적도 없습니다. 그런 구절을 제시해 주시길 바랍니다. (‘목적 법칙적 과정’을 그 다음 장에 제시하기 전에) 저는 오히려 그 정반대로, 저는 제가 헤겔을 다루는 부분에서 목적 연관이 분명히 법칙적 연관과 연계를 이룬다는 것을 이미 다루었습니다. 헤겔의 ‘수행’ 개념을 설명하면서 이를 제시했으며, 이를 통해 헤겔 부분에서 목적 연관이 어떻게 법칙적 연관과 통일을 이루는 속에서 또 법칙적 연관과 구분되는지를 서술해 놓았습니다. 따라서 목적 자동적 과정이든, 목적 법칙적 과정이든 그것은 당연히 자연법칙에 의해 규정되는 것인 동시에 목적적 연관일 수 있다는 게 제 글의 요지입니다. 애당초 목적적 연관은 자연법칙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연관 방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탈퇴한 사람을 이렇게 확인사살하고.. 비판마저 글쓴이의 글을 제대로 이해한 것도 아니고..
정말 실망이네요. 저 글쓴이는 청년이라 들었는데 청년활동가 한명한데 이런 식의 비난을 가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나요? 정말 실망
글 쓴 이의 글을,
제가 이해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다음 호의 남은 부분까지 읽고
판단하시지요~~
이 글을 쓰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 적은 없었던 듯합니다
제가 느꼈던 피곤함과 카타르시스는 다르지 않을까 합니다.
이렇게 댓글로 직접 말씀하실 수 있는 거면 반비판에서 오히려 역으로 추궁하시는 지점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보시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Endursache는 causa finalis를 독어로 말한거예요. 목적인으로 번역하든 종국인으로 번역하든 목적과 관련된 개념이 맞습니다.
엥겔스가 뒤링 비판할 때 쓴 동식물 적응 예 관련 글 인용하신 부분은 뒤링만의 견해를 엥겔스가 다시 쓴게 아니라 적어도 식물의 적응도 합목적적이라는걸 자기도 승인한다는걸 엥겔스가 전제한고 쓴거기 때문에 인용 오류는 아닌 것 같은데요..
글 전체가 목적론적 철학에 대한 무지로 범벅되어 있네요.
연구소에 실망이 너무 큽니다.
대학원에서 독관 공부하고 있습니다. endursache는 목적인[목적원인] 또는 최종 원인으로 번역되고 둘은 같은 뜻입니다. 아마 편집위원장은 목적을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목적(의식적 목적)을 생각하고 쓰신 것 같습니다. 철학에서 목적 개념은 그 이상의 개념이고요. 라이프니츠, 칸트, 볼프, 셸링, 헤겔 다 이런 의미에서 endursache를 썼어요.
엥겔스의 그 부분은 목적에 관해 논한 게 맞습니다. 헥켈이나 뒤링이 헤겔의 목적 개념을 인용하는 듯 했지만 실상은 중세 목적론에서 말했던 목적 개념을 반복하는 것이니 엥겔스가 이를 비판하고 물질의 목적인=최종 원인=자기목적은 물질이고 그 비밀이 상호작용에 있다는 겁니다. 헤겔의 목적 개념의 실상은 너네들이 말하는 목적론과 다르다는 걸 말하고자 한 것도 있구요.(그래서 철학 잘 모르는 사람이 헤겔의 목적론을 어떻게 오해할 수 있는지 엥겔스가 비판하지 않던가요?)
마이어는 제가 잘 모르지만 목적론의 종류가 여럿이고. 이런 구도 속에서 자기만의 분자생물학적 목적 개념을 제출한 걸로 보이고요. 마이어가 종국 점과 [분자생물학적]목적을 구분했지만(그래서 한동백 씨가 글에서 마이어의 목적 개념을 생물학에만 적용하지 않나요??) 위에 댓글에서 한동백 씨가 말한 대로 종국 점도 <> 객관 목적론에서 다뤄지는 것과 흡사하거나 같아보입니다. 그치만 한동백 씨는 글에서 마이어의 종국 점까지 다루진 않았습니다. 아마 마이어가 자기 영역 밖이라서 최소한만 다뤘으니 넣진 않은 것으로 보이고요.
혹시나 오해될 소지가 있었다면,
다음 호에서 잘 해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이러니까 천씨 여성해방론 글 같은 거나 올려놓지..
연구소의 수준 잘 보고 갑니다.
비판할거면 비판대상 글이나 좀 이해하시고.. 문영찬 연구위원장은 왜 건드나?
당신들 어디가서 운동 주류될 생각 마세요.
연구소는 비판을 당하면 비판당한 사람을 공개적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조리돌리고 조롱하는 곳인가요? 들리는 소문이 참 대단하던데, 연구소에 여러모로 실망이 크네요.
사상논쟁보다는 졸렬한 비난으로 보이는군요. 앞의 신재길 교육위원장님처럼 견해가 달라도 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분에 대해 서로 논쟁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활동하던 동지를 쓰레기 취급하는군요. 이런 글이 공식적으로 연구소 기관지에 올라왔다는 사실이 연구소가 어떤 사람들로 주로 이루어져있는곳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듯 합니다.
맑스가 루게에게 했던 말을 인용하며, 정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판 대상의 개인적 활동까지 들춰서 얻자는 게 뭔지요? 그게 뭐 범죄거나 진보에 위배되면 문제지만 그것도 아니고.. 도대체 왜 이런 글을 올려서 연구소의 이미지에 먹칠하는지
사람들은 채소장이 논쟁 상대를 조롱하는 걸 싫어합니다. 그래도 정견이 있으니 공감해주는 것뿐이지요. 그런데 편집위원장님은 그런 조롱을 빈약한 명분으로 일삼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미 탈퇴한 사람한테요. 이게 운동하는 사람이 할 짓입니까?
진짜 커뮤니티 활동내역까지 들춰서 사람 망신주는거 엄청 음침하고 치졸해보입니다. 한국에 맑스주의 얘기하는 인터넷 커뮤티니가 한 수십개 되는 것도 아니고 딱 보면 누구인지 아는 수준인데 실명비판글에서 이렇게 얘가 걔다는 식으로 조롱하는건 무슨 경우인지?
채만수 선생님이 뭔가를, 누군가를 “조롱” 하신다면, 그게 무엇인지? 누구인지? 누군가의 어떤 논지를 “조롱”하시는지를 부디 다시 정확하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피지배계급의 해방의 길을, 철저하게,즉 과학적으로 밝히고 옹호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예전부터 당신이 글쓴 거 보면 어설프게 채만수를 따라하는 것 같더군? 그 특유 논리의 빈약성까지도. 이번에는 철학 개념에 대한 무지도 곁들인 채 썼네? 난 당신이 쓴 편집자 글을 볼 때마다 역겨움을 금치 못했어. 예나 지금이나 누구 시다바리 노릇만 줄창하다가 이젠 영혼까지 주군의 그것과 맞추려는 거야? 쯧..
형법 제311조 공연히 사람을 모욕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당신이야 말로, 시다바리니 주군이니 구역질이니 하는 모욕적 발언이나 삼가하시기 바랍니다. 처벌법규에 따라 처벌될 수 있고, 최소한의 예의가 아닙니다.
저 청년에게 가한 당신네들의 폭력은 거기에 해당 안되고요?
그건, 정당한 의견에 대한 비판이며, 모욕적 언사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설령 일부 무례한 표현이 있어도 모욕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설령 모욕적 표현이 있다고 해도 정당한 의견 개진을 위해 타당성이 있으면 대법원 판례 상 위법성이 조각될 수 있습니다(2005도1453 판결)
오히려, 구역질난다님의 경우 형법 제311조를 위반하여 김해인 편집장님에 대한 모욕적 언사를 했으므로, 그에 대해 사과해야 합니다.
모욕적 언사와 무례한 표현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니…아무 토론장, 아니 일상생활에서 본문처럼 한 번 말해보세요 어떻게 되나. 그렇게 비꼬듯이 말해놓고 정작 그에 대해 윗 분이 몇 마디 하니 모욕죄니 형법이니 뭐니.. 참 잘 돌아갑니다.
자신들이 그 청년활동가에게 한 비난과 모욕은 정당한 비판이고, 자신들이 들은 비난과 모욕은 범죄라는 멋진 논리! 대단하십니다! 역시 변증법의 대가답습니다!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 연구소의 끝없는 발전을 바랍니다! 지금처럼 쭈욱 발전하여 끝없이 대중으로부터 고립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비판글 쓰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한동백씨의 다른 글들도 대충 읽어보게 되엇는데, 다른 글들도 문제가 많은거 같습니다. “몰이해인가, 사기인가?”하는 문제제기가 다른 글들에도 해당되는거 아닌가 우려가 됩니다. 그리고 저도 맑스레닌주의 저작- 경제학, 철학 등을 어느 정도는 읽어봤다고 할 수 있는데요. 조금만 공부하면서 일상 경험, 실천과 연결하면 쉽게 이해되는 중요한 개념들을 한동백씨는 괜히 어렵게 설명하다가 틀리게 설명하면서 망치는거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많이 아는것처럼 과시하려는 것 같기도 하고, 노동자계급이 아닌 지배계급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쉬움과 빈곤함을 구별합시다.
위 댓글의 “구역질 난다”님과 그의 의견에 공감하시는 님들은 본인들이 지배계급의 “시다바리 노릇”을 하며 지배계급에 “영혼”을 “맞추”고 있는건 아닌지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돌아봐도 알아차리긴 힘드실 것 같지만, 혹시나 부탁드립니다.
이렇게까지 비방으로 가득찬 글을…
한가지 확실한건 한국자본주의가 지양돼야 하는건 맞지만 그 주역이 당신들이 되어선 아니될 것 같습니다…
비판과 “비방”의 의미부터 구별해서 인식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누가 “주역”이 되어야할 것인가에 관심이 많으신가요? 이 논쟁이 “주역”을 뽑는 과정인가요?! 정말 “실망”입니다. 안타깝습니다.
엄밀하게 과학적인 이론과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주역”이라고 맑스레닌주의는 이미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들이 주역이 되어야 한다, 안 되어야 한다는 헛된 고민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저도 이런저런 헛된 고민을 많이 하는 사람이긴 합니다만)
그리고, 만약에, 내가 “주역”이 되지 않아도 된다면, 너무나 좋은 일 아닌가요?!
다음 글에서 해명하시겠다고 하니 지켜보려고 합니다만 이 글만 놓고 보면 한동백씨가 마르크스레닌주의자를 자처하면서 엥겔스를 왜곡하고 관념론으로 기울었다는 비판이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습니다.
한동백씨가 쓴 글에서 큰 줄기는 목적론을 유물론적으로 전유하는 것으로 읽힙니다. 그 글이 맞서려는 대상은 의식적인 목적을 일차적으로 내세우는 갖은 관념론이라고 보입니다.
그런데 김해인씨가 이 글에서 겨누고자 하고 또 지키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목적이란 유물론적으로 개작될 수 없는 개념이니 공연히 떠들지 말고 폐기하는 게 옳다는 주장이라면, 그래서 목적론 운운은 결국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수정 또는 왜곡으로 이어질 뿐이라는 생각이라면, 이는 어떤 의미에서 투쟁을 포기하는 노선 아닙니까? 저쪽 한편에 팽배한 관념론이 있고 이쪽 한편에 유물론이 있으니, 그것으로 됐다는 것 아니냐는 말입니다.
투쟁을 위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인지,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 남기 위한 타협인지 이 글만 봐서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글에서 이 대목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이념 투쟁”이라는 연구소의 목표가 어느 사이 “인정 투쟁”으로 바뀌었다고 판단하겠습니다.
국내 마르크스주의 글들이 관념론과의 적극적인 투쟁에 나서지 않고 단순히 유물론을 공리로 설정하는 것에서 머무르는 것이 유감스럽습니다. 철학의 빈곤이란 바로 이것이죠. 관념론은 논박의 대상이지 결단주의적으로 유물론이냐 관념론이냐 무작정 택일하라고 들이밀 대상이 아닙니다.
이 정도 수준의 비난은 지목 대상이 명확하고 공연성까지 있어서 상대쪽에서 신고시 사이버 모욕죄가 성립될 수 있습니다. 편집위원장은 자중하시길
특정 사안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는 인터넷 게시판 등의 공간에서 작성된 단문의 글에 모욕적 표현이 포함되어 있더라도, 그 글이 동조하는 다른 의견들과 연속적ㆍ전체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 내용이 객관적으로 타당성이 있는 사정에 기초하여 관련 사안에 대한 자신의 판단 내지 피해자의 태도 등이 합당한가 하는 데 대한 자신의 의견을 강조하거나 압축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고, 그 표현도 주로 피해자의 행위에 대한 것으로서 지나치게 악의적이지 않다면, 다른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글을 작성한 행위는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행위로서 위법성이 조각된다고 보아야 한다(대법원 2017도17643판결)
즉, 김해인 편집위원장님의 글은 지나치게 악의적이지 않고 피해자의 행위를 묘사한 것이므로 사회상규 상 타당합니다. 애초에 모욕죄가 조각되거나 성립될 지 여부는 법원 판단이고, 이 글은 편집위원장님의 정당한 의견 개진인데, 당신이 뭔데 편집위원장님에게 자중하라고 합니까?
연구소 몇몇 분들이나 그렇게 생각하는 거고요. 모욕죄에 해당할 여지가 없다고 잘라 말하는 근거가 뭡니까. 똑같이 말하자면, 당신은 뭔데 이 글에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겁니까?
제가 대법원 판례를 인용하면서, 저 편집위원장님의 글은 노사과연 전직 회원의 잘못된 이론에 대해 시정하는 과정으로서 사회적으로 타당하다고, 노사과연 전직 회원의 행동을 묘사한 것에 불과한 점, 지나치게 악의적이지 않아서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한 겁니다.
오히려, 편집위원장님에게 정당한 의견도 없이 위 댓글이 주군이니 시다바리니 모욕한 것이라든지, 사회상규도 모르면서 모욕죄 운운하는게 문제라는 겁니다. 또, 토론 중에는 일부 지나치게 악의적이지 않은 모욕이 나와도 대법원 판례 법리 상 사회상규에 반하지 않아 위법성이 조각되는데, 그러면 편집위원장님의 글에 정당하게 반박해야지 무조건 과도하게 악의적으로 모욕하는건 사회상규에 반하여 위법하다는 겁니다.
두 분 모두 법 운운하는 건 의미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투가 법적으로는 문제 없더라도 동지의 이론을 지적해주는 식의 건전한 비판은 아니라고 봅니다. 베베 비꼬는 문장만 삭제해도 분량이 절반은 줄겠네요. 사회상규 좋습니다. 그런데 그 상규가 동지를 비판할 때는 적용되지 않나 보네요. 대화를 이런 식으로 하면 안된다는 건 굳이 거창한 이론 없이도 사람 사는 데 당연한 거 아닐까요??
철학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미 글의 1/3을 차지하는 독일어 번역 문제가 명백히 목적이라는 의미로 밝혀진 상황에, 다음 글에서는 어떤 참신한 내용이 나올자 기대되기도 합니다. 그 글에서도 설마 운동을 교정하니 뭐니라는 이유로 이런 조롱성 어구로 점철되어 있지는 않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