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23년 9월 22일 진행되었던 연구토론회를 전후하여, 여러 동지들로부터 비판받았고, 내용상 심각한 오류가 있음이 지적되었습니다. 이러한 비판의 내용을 담은 원고가 조만간 기관지를 통해 발표될 예정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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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자연과 사회의 합법칙성을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에 맞게 각각을 개변하고자 하는 의지를 합목적적 의지(zweckmäßiger Wille)라고 하며, 이러한 의지를 현실적으로 발현하는 것을 합목적적 활동(zweckmäßige Tätigkeit)이라고 한다.
합목적적 활동은 크게 외적 합목적성에 의해 추동되는 타성적 활동으로서의 합목적적 활동, 그리고 자기목적적 활동으로 나누어진다. 맑스는 여러 경제학 저술에서 자본의 목적성에 귀속된 것으로서의 소외된 노동에 대해서도 합목적적 활동이라고 하며, 그 반대의 경우, 즉 노동의 본래적 의미를 회복한 것으로서의 노동에 대해서도 합목적적 활동이라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합목적적 활동이란 바로 자기목적적 활동이다. 왜냐하면, 외적 합목적성에 의해 추동되는 목적 의지는 자기로부터 산출된 것이 아니라 외적 합목적성의 기체(基體)로서 산출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때의 생산자는 그저 외부에 선 주체의 피정립태에 불과하다. 자기목적(Selbstzweck) 대해 맑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자유의 왕국은 사실상 궁핍과 외적 합목적성에 의하여 지시되는 노동이 없어지는 곳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따라서 그것은 사물의 본성으로 보아 본래의 물질적 생산분야의 맞은편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사물의 본성으로 보아 본래의 물질적 생산분야의 맞은편에 있는 것이다. 미개인이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며 자기의 생활을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하여 자연과 투쟁하지 않을 수 없듯이, 문명인도 그러한 투쟁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어떠한 사회형태하에서도 또 있을 수 있는 어떠한 생산양식하에서도 그러한 투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발전함에 따라 이 자연적 필연의 왕국이 확대되는데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 확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욕망을 충족시키는 생산력도 확대된다. 이 왕국에서의 자유는 오직 사회화된 인간, 연합된 생산자들이 자연과의 자기들의 이 물질대사를 합리적으로 조절하고 이 물질대사가 맹목적인 힘으로서 그들을 지배하지 않도록 자기들의 공동통제 밑에 두며 가장 적게 힘을 들이고 그들의 인간성에 가장 알맞고 가장 적합한 조건에서 그 물질대사를 수행하는 데만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역시 필연의 왕국이다. 필연의 왕국의 맞은편에서, 자체 목적(Selbstzweck)으로서의 의의를 갖는 인간의 힘의 발전이 시작되고 자유의 진정한 왕국이 시작된다. 그러나 자유의 왕국은 이 필연의 왕국을 토대로 해서만 꽃피울 수 있다. 노동일을 줄이는 것이 기본조건이다.[1]K. 맑스 저ㆍF. 엥겔스 편, ≪자본론≫ 제III권(2), 백의, 1990, pp. 1003-1004. (강조는 인용자. 이하 동일.)
자기목적적 활동으로서 노동이란 외적 필연성에 의해 타성적이지 않은 노동 활동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그들의[자신의: 인용자] 인간성에 가장 알맞고 가장 적합한 조건에서 물질대사를 수행”하는 것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런데 외적 합목적성에 의해 대상화된 활동이 있다면, 즉 그러한 대상화된 활동이 실제적인 자기 규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필경 그것은 자신의 대립물과 관계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대상화된 활동의 맞은편에는 자기목적적인 규정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목적적 활동의 주체는 자본이다. 맑스는 ≪자본≫과 ≪요강≫ 등에서 여러 번 자본의 자기목적적 활동, 즉 자기운동에 대해 직접적으로 기술한다. 그런데 맑스의 이러한 표현은 언뜻 낯설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자본은 상식적으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라고 간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논의하고자 하는 주제와 맞게 더 구체적으로 말하여 보자. 우리는 흔히 목적 의지, 목적적 활동의 주체를 상정할 때, 그러한 주체에는 항상 인식주관이 들어설 수 있는 ‘영역’이 필시 존재해야 함을 자연스럽게 전제해 놓는다. 즉 합목적성에 대한 통속적인 사고는 칸트가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주관적 격률에 불과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만큼 객관적 실재가 목적 연관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거부한다. 예를 들어,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돌멩이가 바람에 의해 다른 구조물에 부딪히는 현상을 보았을 때, 그 현상에 대해 우리는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 부딪힌 현상이 발생하였다”라고 해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고는 먼저 (칸트가 언급한 바와 같은 식의) 주관적 격률 속에서나 있을 표상을 객관적 사물 대상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처럼 보이며, 동시에 현재의 과학적 발전 수준에 있어 너무나도 어긋나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이 자본주의 사회의 주체로서 자기목적적으로 활동한다는 표현은 위의 사고 예시와 다를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자연적 존재로서의 자연, 그리고 체계로서 사회적 존재가 자기목적적 운동을 이룰 수 있다는 사고는 유물론적 세계관에 있어서 매우 당연하다. 왜냐하면 유물론의 핵심은 물질의 영원성을 승인함에 있으며, 물질의 영원성은 오로지 물질의 절대적 자기운동성을 승인함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의 절대적 자기운동은 다른 말로, 물질의 절대적인 자기목적적 운동이다. 물질의 자기목적적 운동을 승인하지 않는다면, 물질의 내재적 속성이자, 근본적인 존재 양식인 운동을 물질과 무연고한, 물질에 절대적으로 외재하는 존재에서 끌어와야 한다. 실제로 과거 적지 않은 기계적 유물론자가 이러한 철학적 시도를 감행하였지만, 이러한 노력은 모두 관념에 대한 물질의 선차성을 옹호하는 데 실패하였다.
철학의 근본문제에서 물질의 선차성을 승인하고, 그것을 옹호하는 투쟁에서 합목적성이라는 주제는 매우 직접적인 형태로 제기된다. 아주 대표적인 예로, 그리스도교인들은 유물론자를 비난함에서 항상 ‘물질을 창조한 미지의 존재’를 들먹인다. 유물론에 대한 그리스도교인의 이러한 비난에서 전제되는 사고란, 물질에 대해서는 아무리 그 객관성을 승인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존재 이유는 자기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창조’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모든 주제는 철학사적으로는 철학의 근본문제에서 유물론과 관념론 간 투쟁이 그 본질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이 투쟁에서 기계론과 목적론 간 대립이라는 영역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헤겔은 기계론과 목적론의 대립이 지니는 의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합목적성(Zweckmäßigkeit)이 감지되는 곳에서 오성이 그 원천을 이루는 것으로 상정되며, 따라서 목적에 대해서는 개념의 독자적이며 자유로운 실존이 요구된다. 목적론은 주로 기계론에 대립되는데, 기계론에서는 객관에 정립된 규정성이 본질적으로 외면적인 규정성으로서, 그 어떤 자기규정도 명시될 수 없는 그런 규정성이다. 흔히 cause efficientes와 causa finales로 불리는 작용인과 목적인의 대립은 바로 이 기계론과 목적론의 구별과 관계되는 것이며,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세계의 절대적 본질을 이루는 맹목적인 자연의 기계성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어떤 목적에 따라서 스스로를 규정하는 오성으로 볼 것인가 하는 논구도 이와 같은 구별로 귀착된다. 이 밖에 결정론과 더불어 숙명론과 자유의 이율배반성도 역시 기계론과 목적론과의 대립에 관한 것인가, 왜냐하면 자유로운 것(das Freie)은 목적론에서 등장하는 바와 같은 자기 실존 속에 깃들어 있는 개념을 뜻하기 때문이다.[2]G. W. F. 헤겔, ≪대논리학≫ 제III권, 임석진 역, 자유아카데미, 2022, pp. 303-304.
제3장에서 다루겠지만, 헤겔은 기계성과 목적성의 통일을 추구한다. 그런데 이러한 통일은 헤겔 변증법에 대한 유물론적 지양에서 보존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 유물론자는 현대과학의 성과로서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기계성의 내용적 풍부성을 승인한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개별적 사물 규정이 자기운동하는 총체성의 본질적 규정으로부터 각자의 규정성을 부여받은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 즉 목적성을 승인한다. 사실 목적성 역시 자기 체계를 이루는 생물학적 메커니즘 속에서 입증되는 요소로서, 엄연히 생물학의 발전에서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기계성과 목적성의 변증법적 내용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목적론의 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부터 고찰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목적론의 중요한 두 양식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며, 오늘날 종교적 목적론의 낡아빠진 잠꼬대도 모두 그의 자연학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는 목적론의 뿌리가 되는 내용을 살펴보고, 그것을 지양ㆍ발전해 온 역사를 추적함을 통하여 합목적성이 어떻게 객관적 실재의 보편적 운동 양식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했는지도 알 수 있다.
2. 아리스토텔레스
고대 형이상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늘날까지도 변증법에서 유효하게 쓰이는 여러 논리적 범주를 정식화하였는데, 그중 목적론과 관련되는 것은 능동과 수동 범주이다. 그는 능동과 수동 범주를 자신의 질료형상설과 연계하여 목적인과 작용인이라는 두 범주를 창안해 내었다.
이 두 범주는 ≪형이상학≫에서 그의 철학의 기본 개념으로서 등장하지만, 이러한 개념이 자연세계에 대한 더욱 세밀한 적용 속에서 서술되는 곳은 ≪자연학≫이다.
≪자연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관념론 노선을 따랐던 파르메니데스와 유물론 노선을 따랐던 자연철학자의 견해가 지니는 한계를 모두 비판한다. 그는 그 결과로 모든 사물 규정, 즉 개별 실체가 형상(eidos)과 질료(hyle)로 이루어져 있다는 질료형상설을 전개한다. 여기서 형상 또는 형식은 질료의 근저에서 질료의 목적으로서 기능한다. 예를 들어, “동상은 청동으로부터 만들어진다”고 할 때, 청동은 동상을 그 형상으로서 지니고 있으며, 이 형상은 청동이 동상으로 변화하는 운동을 유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생성의 의미에서 본성은 본성을 향해 나아간다. 예를 들어 그것은, 의술과는 성격이 다른데, 의술 행위는 건강으로 이어질 뿐 의술로 이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의술은 기술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술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본성이 본성과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성장하는 것은 무언가에서 무언가로 성장한다. 그러면 그것은 어떠한 것으로 성장하는가? 그것은 그것이 생겨난 것으로 성장하는 게 아니라 그것의 경향성으로 성장한다. 그 경향성이 향하는 양태가 본성이다.[3]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Physics)≫, 193b13-193b18. (The Complete Works of Aristotle (The Revised Oxford Translation, edited by Jonathan Barnes), Vol. 1,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 Continue reading
이 본성은 정확히 무엇인가? 그는 그것을 목적이라고 간주한다:
본성 또는 본성 그 자체는 목적이다. 어떤 것이 어떠한 끝을 향하여 지속적인 변화를 겪는다면, 그것 자체가 바로 목적이다. … 모든 마지막 단계가 목적인 것은 아니며, 오로지 최선의 마지막 단계만이 목적으로 된다.[4]같은 책, 194a28-194a33. (Ibid., p. 22.)
목적을 담지하는 것은 형상이며, 최상의 목적이 곧 최상의 형상이다. 반대로 질료는, 목적의 대립물로서 필연(또는 기계성)을 담지한다. 즉 “필연적인 것은 질료와 그것의 변화”[5]같은 책, 200a31-201b10. (Ibid., p. 34.) 이다. 질료는 목적인에 의하여 그 끝, 즉 목적으로 나아간다. “목적을 위한 변화는 자연적으로 생성되어지는 모든 것의 내부에 존재”[6]같은 책, 198b34-199a8. (Ibid., p. 31.) 하며, “끝이 있다면, 그 이전의 모든 단계는 그 목적을 위한 것”[7]같은 책, 199a9-199a19. (Ibid., pp. 31-32.) 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형상은 질료의 원인이지, 질료가 형상의 원인은 아니다. 그는 질료와 형상 사이의 관계에서 형상에 선차성을 부여함으로써 관념론적 노선에 치우친다. 그런데, 형상과 질료, 목적과 필연 간의 관계에는 상호 규정성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정돈되지 않은 나무토막을 목재로 가공하기 위해 톱질을 해야 하는데, 톱질이 생겨나는 즉시 나무토막이 목재로 되는 것은 아니다. 목재를 형성하기 위한 생산자의 톱질 역시 그에 맞는 형상이 있는 것이며, 톱질 후 마감처리에 관한 모든 사항도 그만한 형상이 있다. 또한 그러한 형상으로 나아가는 가능태로서의 질료도 항시 존재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과정을 최소한도로 좁히면 무엇이 질료이고 무엇이 형상인지 도저히 구분하기 어렵다는 난점이 제기된다는 것이다. 즉 나무토막을 잘라내는 작업에서 원시적인 톱질에 의존하느냐, 또는 기계에 의존하느냐는, 나무토막이 목재로 나아가는 도정상에서 각기 다른 형상인을 불러온다. 그런데 이러한 ‘다른 형상인’을 불러오는 것의 근거는 바로 가능태로서 질료, 또는 질료의 구성 요인들―나무토막, 기계, 기계 작동, 톱, 톱질 등―에 의해 규정되는 측면이 있다. 이렇게 형상과 질료는 서로가 서로를 규정짓는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질료가 형상으로 나아가는 것 이상으로, 형상이 질료로 나아가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질료 간 관계 기술에서 이러한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이에 관한 서술은 ≪자연학≫만이 아니라 ≪형이상학≫에서도 매우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이 지점에 관한 ≪자연학≫의 서술을 먼저 다루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형상: 인용자]이 작용할 수 있는 대상은 ‘움직이는[움직여지는: 인용자] 것’[질료: 인용자]뿐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의 경우에서 두 번째, 두 번째의 경우에서 첫 번째는 같은 간격에 있다. 가파른 오르막길과 가파른 내리막길이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로, 두 경우 모두 오직 하나의 현실태가 존재하며, 서로 정의가 같지는 않지만 두 경우에는 하나이고 동일하다. 따라서 이것[현실태: 인용자]은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과 ‘움직여지는 것’ 모두에게 존재한다.[8]같은 책, 202a12-202a20. (Ibid., p. 38.) 여기에는 변증법적 난점이 존재한다. 아마도 행위자와 피행위자의 현실태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각각은 행위, 피행위이다. 행위의 결과 혹은 목적은 능동, 피행위의 결과는 수동이다. 그런데 둘 다 움직임이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그것들이 서로 다르다면 무엇의 내부에 있는가? 둘 다 움직여지는 것에 있든지, 아니면 행위가 행위자 안에, 피행위가 피행위자 안에 있을 것이다.[9]같은 책, 202a21-202a28. (Loc. cit.)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위와 피행위가 단순히 ‘움직임’이라는 추상적 동일성에 의거하여, 두 경우가 서로에 대해 동일하다고 주장하고, 이것이 “변증법적 난점”임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가 언급한 것이 전제하는 더욱 본질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굳이 더 언급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본질적인 내용이란, 바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과 ‘움직여지는 것’이 각자에 대해 “같은 간격”에 있다는 언급에 있다. “같은 간격”이 전제하는 바는, 목적인과 작용인이 서로에 대해 동일적인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형상에 수동적으로 이끌리는 질료가 존재하는 것만큼 형상은 능동적인 것이다. 그런데 능동적인 것은 수동적인 것을 진정 수동적인 것으로서의 움직임으로 규정하는 것만큼, ‘수동적인 것에 대한 수동적인 것’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왜냐하면 수동적인 것이 없이는 능동적인 것은 진정 능동적인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서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위는 행위자 안에, 피행위는 피행위자 안에 각각 존재하고 있으면 제기된 난점이 해결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능동이 지니는 수동적인 성격, 수동이 지니는 능동적인 성격을 더는 논하지 않는다. 그는 기계성과 목적성에 관한 변증법적 이해의 문턱에 접근하였지만, 그 내부로 진입하지는 못한 채 필연에 대한 목적의 절대적 우선성을 취하였다.
≪자연학≫과 달리, ≪형이상학≫에서는 능동과 수동 간의 상호 규정적 관계가 더욱 직접적인 방식으로 언급된다:
‘힘’[가능적인 것: 인용자]과 ‘발휘 상태’[현실적인 것]는 오직 움직임[운동]에만 관계하는 경우들보다 더 많은 경우에 적용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종류의 “디나미스”[dynamis, 힘] 개념에 대해 말한 다음에, 발휘 상태에 대해 논의하는 가운데 아울러 다른 종류의 “디나미스”[dynamis, 가능태]들에 대해서도 [그 뜻을] 밝혀 볼 것이다. 우리가 다른 곳에서 설명했듯이 “힘”[능력]과 “~[할] 수 있다”는 여러 가지 뜻을 갖는다. 이런 뜻들 가운데 ‘한 이름 다른 뜻으로’ “힘”이라고 말해지는 것들은 모두 제쳐 두자. … 같은 종류에 관계된 힘들은 모두 일종의 [변화의] 근원들이며, 으뜸가는 힘에 관계 맺어 “힘”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리고 이 으뜸가는 힘은 다른 것에서 [일어나는], 또는 자신을 다른 것으로 보는 관점에서 [자신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근원이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그것은 겪음의 힘, 즉 ‘겪는 것 자신 안에 든 변화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 변화가 다른 것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자신을 다른 것으로 보는 관점에서 [자신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든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다른 것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자신을 다른 것으로 보는 관점에서 [자신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든, ‘[어떤 것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근원’[변화의 근원]에 의해 더 못한 것[으로의 변화]이나 소멸을 안 겪[을 수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힘에 대한] 이런 모든 정의 속에 으뜸가는 힘에 대한 규정이 [들어] 있다. 그리고 또, 그 힘들은 [어떤 것을] 그저 입히거나 [그저] 겪는 힘이거나, 아니면 잘 입히거나 [잘] 겪는 힘이다. 그래서 그 힘들에 대한 규정 속에 또한 ‘[그것들보다] 앞선[우위인] 힘들’에 대한 규정이 어떤 점에서 들어 있다. 그러므로, 분명히 입힘[능동]의 힘[능력]과 겪음[수동]의 힘은 어떤 점에서 하나다.[10]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metaphysics)≫, 1046a1-1046a20.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김진성 역주, 이제이북스, 2007, pp. 375-377.)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이어서, 위의 언급된 ‘난점’을 다시 소생시키는 다른 진부한 예―‘집을 짓는 기술’과 ‘집을 지을 수 있는 것’, ‘뜨거움’과 ‘뜨겁게 할 수 있는 것’ 등―를 나열하면서 위의 ‘난점’에 대해 더 거론하지 않는다. 이 ‘난점’이야말로 기계성과 목적성의 통일에 도달하기 위한 열쇠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난점’을 몇 가지 진부한 예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간주하였다. 다시 말해, 그는 능동과 수동, 형상과 질료, 목적과 기계성이 대립물의 통일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중세기 그리스도교 세계관의 목적론적 변론―맹아적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여, ‘최고의 형태’로서는 아퀴나스에 의하여 정립된―이 지니는 허무맹랑함은 바로 목적 개념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서 변증법적 난점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사상한 것에서 나왔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목적 개념에 관한 형이상학적 관점을 뛰어넘지 못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한계는 그가 ≪자연학≫에서 내내 내재적 합목적성을 추구하였던 것과는 무색하게, 그의 목적론이 후대의 목적론, 즉 외재적 합목적성―신의 변덕으로 대표되는―에 기반한 목적론을 정당화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16세기 이후 가속화한 과학의 발전은 목적인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완전히 무력화하였다. 18세기 말에 이르게 되면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인 개념은 여러 과학자에 의해 웃음거리로 되어 있음이 포착된다. 바로 이러한 기류 속에서 이른바, ‘도덕적 실천철학’의 당위로서, 객관적 합법칙성과 유리된 목적성을 탐닉하였던 인물이 칸트였다. 한편 19세기에는 생물학이 폭발적으로 발달하면서 목적론의 쇠퇴는 가일층 심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목적성이 존재하지 않는 기계성의 내재적 한계를 사변철학으로써 논증한 인물이 헤겔이다.
3. 헤겔
헤겔은 내재적 합목적성 개념을 구체화하고, 그것을 자신의 철학 체계에서 유효한 장치로 형성해 내었다. 그는 이를 위해 목적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주목한다. 그는 여러 저술, 특히 ≪엔치클로페디≫와 ≪철학사 강의≫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 개념이 객관적 영역에서의 목적 연관, 내재적 합목적성을 정초하는 데 매우 뛰어난 논리를 제공한다고 평가한다. 물론 그는 ≪논리의 학≫에서 기계성과 목적성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한계를 본질적으로 뛰어넘었다. <최종적인 끝으로서의 목적>을 상정한 목적론적 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원리에 기초하여 목적론을 확립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종국에 “탈(脫)세계적인 오성의 개념”[11]G. W. F. 헤겔, 앞의 책, p. 305.으로서 목적론적 원리를 반복하는 것으로 전락할 뿐이다. 오히려 그는 ‘끝’이 아니라, ‘시초이자 끝’인 것이며, ‘끝’은 다시 ‘시초’로 된다는 의미로서의 변증법적 목적 개념을 정립한다. 더 나아가 그는 기계성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사실상 부재하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 개념을 넘어, 기계성을 자기 활동의 필연적 요인으로서 구성한 목적성에 관해 말한다. 그의 철학 체계에서 고전적인 의미로서의 목적론은 철저히 지양된다. 헤겔 철학 체계에서 목적인은 작용인을 통해서만 설 수 있으며, 작용인은 목적인을 통해서만 설 수 있다. 자기목적적 운동은 이러한 상호 의존 관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헤겔의 목적 개념을 살펴보기에 앞서, 그가 어떻게 하여 기계론의 한계를 드러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기계적 과정, 연관이 어떻게 하여 목적적 과정, 연관을 자신의 필연적 짝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지도 파악해야 한다. 이는 기계론적 사유의 한계를 지적함으로써 합목적성의 토대를 세우는 작업에서 가장 먼저 거론되어야 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기계론적 사유는 자연세계에서 그 어떠한 목적을 상정하지 않고도 자연의 맹목성을 기초로 하는 내적 총체성이 확립될 수 있다고 간주한다. 따라서 기계론자들은 목적 개념을 두는 것은 자연을 고찰함에서 불필요한 개념을 거론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라고 한다. 합목적성이라는 것이 단지 주관 속에서나 있을 사념이나 표상이 아니라, 그것이 객관적인 활동성임을 보이기 위해서는 먼저 기계성만을 거론하는 것이 자연의 내적 총체성을 보증할 수 없음이 해명되어야 한다.
헤겔의 철학 체계에서 기계성이란 무엇인가? 기계성은 개별적 현존재로서의 수다적 객체가 서로 외면적으로 연관하는 양식이다. 즉 그것은 객관성이 “그의 전체 계기를 통하여 이룩된 총체성으로 인하여 그 각 계기가 자립적인 무관심성 속에서 외적으로 병립한 객관으로서 존립하고 있으며, 그들 각 계기는 이러한 그들의 상관관계 속에서 개념의 주관적 통일[12]관념론자 헤겔에 따르면 개념이란 “스스로를 실재적이며 존재하는 것으로 정립하는 것”(같은 책, p. 253.)이다. 더 나아가 헤겔은 객관 그 자신을 … Continue reading을 다만 내적이거나 아니면 외적인 통일”[13]같은 책, p. 260.로서 지니는 것이다. 즉 객관은 그 자체에 있어서 다수성(Mehrheit)을 뜻하기에, 그것은 복합적인 것(Zusammengesetztes) 또는 집합체(Aggregat)로 간주되어야 한다.[14]같은 책, p. 265. 그런데 이렇게 이해된 수다적인 현존재의 총체로서 (기계적) 객관은 내적으로 곧 서로에 대해 전달(Mittheilung), 저항(Widerstand)과 같은 규정 작용을 가하며, 작용자 역시 피규정 작용을 가하는 것의 총체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원인과 결과라는 것도 바로 이러한 기계적 총체성의 내적 규정 작용을 이루는 구성물이다. 기계성으로 대표되는 총체성은 “피규정적 존재의 총체성(Totalität des Bestimmtseins)”[15]같은 곳.이다. 그런데 이러한 총체성은 실은 각자의 현존재가 각자의 <자립적인 현존재>임을 전제한 속에서의 ‘총체성’이다. 즉 기계적 객관에서 실재의 연관 방식은 각자가 자립적이고 서로에 대해 외면적인 현존재임을 전제한다. 그런데 이는 관계로 이루어진 총체에서 하나의 측면을 부여받았다는 의미에서의 특정한 실재라는 사실을 사상한 ‘총체성’이다.
현대과학의 성과로써 계속해서 밝혀지고 있는 내용은, 각자 사물이 ‘각자의 실재, 존재’라는 사실만을 내포하는 게 아니라 내밀한 연관으로서의 관계의 한 측면이라는 사실까지 내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계적 객관에서 취급되는 각자의 현존재는, 서로에 대해 외면적임을 전제한 채 각자의 자립성을 자기 내적으로만 보증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관계 양상에 기초한 사고는, 전체로서의 단일한 관계의 외부에 자리 잡은 또 다른 외면적인 규정성을 그 전체로서의 단일한 관계의 어딘가에 접합하는 사고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러한 역학적 사고, 즉 기계론만으로는 총체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보증할 수 없다.
물론 기계성은 엄연히 객관의 내부에 존재하는 객관적 연관 방식이며, 오로지 사물, 또는 사물의 연관 방식의 외재적 구별을 통하여서만 확립될 수 있는 합법칙성(Gesetzmäßigkeit)을 근거하는 연관 방식이다. 우리는 어떠한 법칙에 관하여 말할 때 항상 서로에 대해 외재하는 사물 규정을 전제한다. 실은, 과학적 실천에서 합법칙성에 대한 인식은 (상대적으로 자립하는) 외재하는 것 사이의 정형화된 규정 작용의 내용, 형태를 드러내는 것으로 된다. 기계성을 향한 사유는 과학적 실천의 세포이기에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 헤겔은 이러한 기계성에 대한 사유, 즉 기계론이 “피규정성의 적극적 자기반성으로서의 바로 그 피규정성의 지양이며, 자체 내로 돌아가 참잠한 규정성인가 하면, 개념[16]앞서 언급하였듯이 헤겔은 관념론자로서, 실재성(객관)의 주체적 실현자를 개념이라고 간주한다.의 정립된 총체성이니, 이는 곧 객관의 참다운 개별성”[17]G. W. F. 헤겔, 앞의 책, p. 281.을 드러내는 과정이라고 간주한다. 과학은 결국 이러한 수다성(Vielheit)으로서의 개별자에 대한 인식, 전제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의 기초란 사물의 운동 방식에 대한 법칙을 파악ㆍ기술하는 것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기계성은 “객관의 비자립적인 특수성과 또한 그 객관들의 과정 내부에서 움직임 없이 고정되어 있는 구별, 즉 법칙(das Gesetz)”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이러한 법칙은 이미 사물의 운동 양상에 관한 구체적 보편을 함유하고 있다. 그리하여 법칙에 대한 이해, 법칙적 이해는 그보다 더욱 높은 차원의 이해에 도달하기 위한 밑거름으로 된다. 즉 기계적 개체성은 “즉자대자적으로 부정적인 통일의 구체적 원리이며, 또한 그 자체의 총체성”[18]같은 책, p. 287.이고, 동시에 “스스로를 규정적인 개념 구별들로 분할시키면서도 오직 자기 자신과 동등한 보편성 속에 머물러 있는 하나의 통일”[19]같은 곳.이다.
그런데 이러한 법칙 연관은 서로에 대해 무차별적이며, 법칙 자체도 서로의 법칙 간 연결을 전제하고 있다. 실제로 역학, 물리학, 화학 등 자연과학의 대상에 관한 여러 법칙, 더 나아가 사회과학의 대상에 관한 여러 법칙이 기술되는 방식을 보자면, 그 법칙이 더욱 ‘풍부한’ 내용을 함유하면 할수록 다른 법칙과 접합을 이룸으로써 저마다의 외재적인 측면이 희석되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객관적 실재의 내적 법칙을 형성된 학(學)의 체계로써 반영해 나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기계성은 “객관의 관계가 아직도 어떤 지향성인 까닭에 객관이 중심에 대하여 여전히 자립적이고 외면적인 객관의 모습을 지니는 그런 중심점을 향한 지향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 대하여 확고히 대립해 있는 객관으로의 지향적 노력(ein Streben nach dem bestimmt ihm entgegengesetzten Objekt)”[20]같은 책, pp. 289-290.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로써 객관은 이제 낱개의 외재하는 것―외재하는 현존재들―으로 이루어진 기계적 총체성으로서가 아니라, 그 대립물로서 희석작용을 이루는 관계로서의 총체성으로 화한다. 헤겔은 이를 기계성의 진전한 형태로서의 화학성, 즉 화학적 연관의 총체로 간주한다. 화학성은 “일차적인 부정, 즉 무관심적인 객관성과, 규정성의 외면성의 일차적인 부정”[21]같은 책, p. 299.이다.
화학성이라는 희석 과정은 무차별적인 관계항의 확립이고, 이 관계항의 규정성을 헤겔은 중화적인 것(ein neutrales) 또는 중립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중화적인 것을 통한 통일은 내부의 긴장을 그대로 온존한 선에서의 (내적으로) 부정적인 통일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이는 이내 “화학론의 시초가 되었던 긴장 상태에 있는 두 객관 사이 대립의 회복”[22]같은 책, p. 297.을 추동한다.
실제로 우리는 다양한 연구 방법론, 특히 양적 연구 방법론에서 너무나도 많은 법칙을 모조리 변수로 잡고자 하는 트리 분석법이 과대적합을 유발함을 알 수 있다. 외재적인 것 사이의 고정적인 규정 작용으로서의 법칙은, 그것이 총체성을 드러내 주는 데 있어 제한적인 내용을 함축하는 현존재의 연관 방식을 전제한 선에서의 규정성을 연결하는 법칙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이것이 기계론적 사유의 한계이자, 기계성이 화학성으로 이행하는 계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를 상쇄하기 위해 언급된 법칙 외 상이한 법칙을 과도하게 고려하였을 경우에도 역시 또 다른 한계, 즉 과적합이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데 이러한 화학론적 사유상에서의 문제보다 더욱 근본적인 것은, 화학적 연관 방식의 ‘무한한 전개’가 최종적으로 형성하는 (객관의) 총체성이란 결국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먼저 화학성의 진리는 상이한, 서로에 대해 외재적인 법칙을 그 법칙에 대해 외재적인 새로운 하나의 규정성을 통하여 ‘통일’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진정한 통일을 가져올 수 없다. 즉 “긴장 상태에 있는 두 객관의 중화성을 그 성과로 하는 첫 번째 과정은 그의 성과물 속에서 소멸됨으로써 이제 이 과정을 다시금 활성화시키는 것은 다만 외면으로부터 부가되는 차별, 분화작용(Differenzierung)일 뿐이며, 이렇듯 직접적인 전제에 의하여 제약되는 가운데 이 과정은 모름지기 그 전제 속에서 소진”[23]같은 책, p. 300.되고 만다. 결과적으로 화학성의 고수는 기계성의 한계를 반복하는 것을 뛰어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 우리는 변혁적 실천을 통해 각자의 이해를 지닌 수많은 활동가 집단을 맞닥뜨린다. 이러한 정파의 난립은 곧 정파가 서로에게 규정 작용함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러한 정파가 각자 자립적인 현존재로서 서 있음을 의미한다. 누군가는 이러한 정파의 대립을 ‘연합’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파에 관한 화학적 연관, 즉 ‘연합’은, 그저 정파 간 차이를 정초하는 외재적 규정성의 외면에 선 다른 현존재로서의 규정을 접합함을 통해 정파 간 ‘통일’을 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중화적인 것에 기초한 ‘통일’은 정파 간 대립을 극복할 수 없다. 결국 그러한 화학성의 체계로서 ‘연합’은 다시 기계성의 체계―화학적 연관을 통해 묶여 있던 것의 분화작용으로서―로 복귀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화학적 ‘통일’의 그 극한으로의 전개가 가져올 한계는, 생생한 차이를 사상한 속에서 희석된 관계만을 그 진리로 삼는 내용만을 산출할 뿐이라는 것에 있다. 따라서 화학론을 극한으로 밀고 갈 경우, 모든 것을 우연적인 관계로 환원해 버리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이러한 화학적 연관의 총체를 지양한 것이 바로 목적(der Zweck)이다.[24]같은 책, p. 302.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에는 외면성을 지양해 나가는 일정한 방향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목적이라는 것은 그러한 지양의 성과물이다. 그리고 그만큼 목적성은 기계성과 화학성을 그 자체적인 계기로 지니고 있다. 즉 목적은 “그 자체 내에 특수성과 외면성의 계기를 지니며, 따라서 활동적이고 더 나아가서는 스스로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밀쳐내려는 충동”[25]같은 책, p. 313.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외면성의 관계를 거치지 않은 목적성이란 존재할 수 없다. 목적은 “외면성 그 자체에 의해서 촉발되며, 자기가 관계하는 객관적 세계에 맞부딪혀 있다.”[26]같은 책, p. 314. 다시 말해, 목적이란 외면적 규정성으로 이루어진 총체성에 대한 부정 운동, 지양 운동의 결과물로서 그 스스로가 기계적인 “객관적 세계에 맞부딪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헤겔은 이렇게 형성된 단초적인 목적은 주관적 목적, 즉 객관적인 것에 대해 외재적으로 존재하는 합목적성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렇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 헤겔은 다음과 같이 적는다:
목적은 자기 동등적인 보편이고, 자기를 자기로부터 밀쳐내는 부정성을 내포하는 것으로서, 그런 한에서 여전히 무규정적이면서도 우선을 보편적인 활동성인 것이다. 그러나 다시 이 활동성은 자기 자신에의 부정적인 관계인 까닭에, 어느덧 자기를 규정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에게 특수성의 계기를 부여하는바, 이 특수성은 자체 내로 반성한 형식의 총체성이라는 점에서의, 그리고 형식의 정립된 구별과 반대된다는 뜻에서의 내용이다. … 이제 이 자립성[목적을 받는 주어와 목적으로서의 술어: 인용자]이 객관성의 규정을 획득하기에 이르렀지만, 각기 자립적인 이 완전한 상이성은 개념의 계기라는 점에서 다만 개념의 단순한 통일 속에 유폐되어 있다. 이렇듯 목적이 이와 같은 객관성의 총체적인 자기내적 반성이면서 더욱이 직접적인 것인 한, 첫 번째로 이 단순한 자기반성으로서의 자기 규정이나 혹은 특수성은 구체적인 형식과 구별되며, 이는 하나의 특정한 규정적 내용일 뿐이다. 이로써 목적은 비록 그것이 형식면에서는 무한한 주관성이라 하더라도, 유한적이다. 두 번째로는 목적의 규정성이 객관적인 무관심성의 형식을 지니는 까닭에, 이 규정성은 그 어떤 정립작용보다도 앞서는 전제의 형태를 띤다. … 그리하여 목적의 자기 규정적인 활동은 바로 그 스스로의 동일성 속에서 곧바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외면적이며, 바로 자기내적 반성이면서 동시에 외적인 반성이기도 하다.[27]같은 책, pp. 316-317.
목적이란 외면적 객관의 총체성의 지양으로서 성립하지만, 처음에는 직접적인 형태로서의 목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즉자적 목적, (단초적) 보편으로서의 목적은 자기규정을 이룰 수 있게 하기 위한 대타존재로서의 특수자를 자신의 반성 규정으로서 놓게 된다. 그런데 이 반성 규정은 앞선 목적에 대해 자립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따라서 “이 주관[주관적 목적: 인용자]은 무관심적이며 외면적인 객관성에 관계하게 되고, 이러한 객관성은 주관에 의해서 내면적인 규정성과 동등한 것”[28]같은 책, p. 319.이 된다. 결국 “목적 안에서의 최초의 정립”[29]같은 곳.이란, “정립된 것으로서의 규정된 것의 정립이면서 동시에 이러한 목적규정과는 무관한 위치에 있는 객관적인 세계를 전제하는 것”[30]같은 곳.이다. 헤겔은 이를 전제(voraussetzen) 또는 전제작용이라고 한다. 이러한 전제작용이 “스스로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밀쳐내려는 충동”을 표현하는 가장 구체적인 작용이다. 전제작용은 기계성에서의 전달작용과 대비된다. 그러나 전제작용 역시 다시 지양되기에 이르는데, 이러한 지양의 결과가 수단(Mittel)이다. 그리고 이 수단이야말로, 우리가 제2장에서 다루었던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에서의 ‘변증법적 난점’을 구성하는 것이다.
헤겔은 수단이 목적의 건너편에 선 외적 객관성(질료)을 목적(형상)과 이어주는 매개, 매사라고 간주한다. 실제로 돌이 조각상이 된다고 하였을 때, 그리고 조각상은 목적으로 설정하였을 때, 주어로서 돌이라는 외적 객관성과 조각상 사이에는 항상 수단이 놓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러한 수단은 주어와 술어가 외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이상 항상 외적 객관성과 목적 사이의 매개로서 등장한다. 그러나 외재적 합목적성은 이러한 수단까지 단초적으로 설정되었던 특정한 목적만의 수단으로 간주해 버린다. 헤겔은 이러한 것이 지니는 한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사람들은 포도나무가 인간에게 주는 잘 알려진 유용성을 고려할 때뿐만이 아니라, 코르크나무의 유용성까지도 포도주병을 막기 위해 그 외적 구조물로 만들어지는 마개와의 관계에서 본다. 과거에는 거의 모든 저서가 이러한 정신으로 쓰였는데, 이러한 방법으로는 종교에 대한 그 어떠한 진정한 관심도 진전시킬 수 없었거니와, 학문적 관심조차 진전시킬 수 없었을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31]Hegel Sämtliche Werke, Bd. 8, Stuttgart: Frommann-Holzboog Verlag, 1964, S. 205.
결과적으로 여기서 수단은 다시 특정한 목적만의 외적 객관성으로 전화한다. 그러나 우리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동원하는 수단이라는 것은 필시 다른 목적으로도 쓰일 수 있다. 이러한 사유의 결과로부터 나오는 결론이란, 이제는 수단이 단순히 특정한 목적‘만’의 외적 객관성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매개중항으로서 수단은 외적 객관성과의 외면적 관계를 이루는 목적이 떨쳐낼 수 없는 외면적 객관성으로서 전화된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돌과 조각상 사이의 수단을 악(惡)무한적으로 나열할 수 있다. 조각상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각종 도구가 구비되면, 이 사태는 다시 외적 객관성으로 전화된다. 그리고 당초 목적이었던 조각상은 그 도구를 외적 객관성으로 (외면적으로) 지님으로써 재차 그 사이를 매개하는 것으로서의 도구, 즉 하나하나 돌을 가는 작업으로서의 각종 수단―조각가의 개별적 움직임들―을 매개중항으로서 불러온다. 즉 “수단의 객관성과 목적론적 규정 사이에는 바로 이들의 중재를 위한 또 하나의 새로운 수단이 투입되며, 이것이 곧 무한으로 이어지면서 마침내 매개의 무한누진이라는 상태가 정립”[32]G. W. F. 헤겔, 앞의 책, p. 331.된다. 헤겔은 목적과 수단 사이의 이러한 관계를 총괄하며, 외면적(주관적) 목적보다 오히려 객관적인 것으로서 수단을 “더욱 고귀한 것”[33]같은 책, p. 326.이라고 간주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수단이야말로 목적의 수행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수단을 통한 목적의 외면적인 활동은 이제 자기를 매개로 규정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지양”[34]같은 책, p. 324.한다. 헤겔은 그 지양의 과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제 목적론의 성과를 조금 더 자세히 고찰하면, 이 성과가 주관적 목적에 대한 절대적 전제인 한,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합목적적 활동이 그의 수단을 통하여 다만 기계적으로 객관에 관계하면서 바로 이 객관의 무관심적인 규정성을 대신하여 객관에게는 마찬가지로 외면적인 또 다른 규정성을 정립하는 데 머무는 한, 모름지기 성과는 목적을 한낱 외면상으로만 자체 내에 간직할 뿐이다. 이렇듯 객관이 목적을 통하여 지니게 되는 규정성은 일반적으로 이와 다른 한낱 기계적인 규정성과는 구별되는바, 왜냐하면 그러한 규정성은 통일의 계기이며, 따라서 비록 그 규정성이 객관에 대하여 외면적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그 자체에 있어 단지 외면적인 것일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통일을 나타내는 객관은 하나의 전체로서, 이에 대하여 그의 부분들에 해당하는 객관의 고유한 외면성은 무관심할 뿐이다. 이것은 갖가지 관계나 규정성을 자체 내에 통합하고 있는 하나의 규정된 구체적 통일이다. 객관마다 지니는 어떤 특수한 성질로부터는 파악될 수 없을뿐더러, 또한 규정적인 특정한 내용에 비추어 볼 때, 객관의 특유한 내용과는 또 다른 내용임이 틀림없는 이러한 통일은, 비록 그 자체로서는 기계적 규정성이 아니라 하더라도, 객관 내에서는 여전히 기계적이라고 해야만 하겠다.[35]같은 책, pp. 329-330.
외면적인 합목적성은 그것의 성립 자체로 이미 그 자신의 활동성으로서 매개중항인 수단을 형성한 것이다. 수단의 무한누진은 이러한 외면적인 합목적성의 생성을 통해서 실현된 것이다. 그런데 외면적인 합목적성의 생성계기는 기계성과 그 진전된 내용으로서의 화학성이다. 역설적으로, 기계성은 그 자신의 내적 모순으로 인해 외면적인 합목적성의 근원으로 되지만, 이 외면적인 합목적성에 의해 수단이라는 규정을 그 자신이 받는다. 즉 목적성에 의해 기계적 객관성이 회복된 것이다. “부정성은 이제 이러한 방식으로 자기 자체 내로 복귀하는바, 이 부정성은 마찬가지로 객관성의 회복이면서도 어디까지나 부정성과 동일한 것으로서의 객관성의 회복이며, 여기에서 동시에 이 부정성은 목적에 규정된 데 지나지 않는 외면적인 객관성으로서의 객관성의 정립”[36]같은 책, p. 334.이다. 이것이 바로 실현된 목적(Der ausgeführte Zweck)이며, 이 목적 속에서의 “수단이라고 하는 측면이 바로 목적 그 자체의 실재성을 의미”[37]같은 책, p. 335.한다. “실현된 목적은 수단이기도 하고, 반대로 수단의 진리는 실재적인 목적 그 자체”[38]같은 곳.이다.
총괄하자면, 기계성이 지니는 무관심성은 필연적으로 외면적 목적성을 정립해 내고, 외면적 목적성은 전제작용을 통하여 기계적 객관성을 지양한 것으로서의 기계적 객관성을 회복하는바, 이러한 객관성의 회복을 자체적인 부정 운동을 통해 실현하는 것이 곧 내재적 목적성이다. 즉, “개념[39]이로써 관념론자 헤겔은 관념인 개념의 자기규정적 운동을 완성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전도하여 그것을 물질의 자기규정적 운동이라고 … Continue reading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로부터 반발하는, 자기 반발적 통일이라고 할 목적과 이 목적의 객관화를 행한 초탈적 노력이 되도록 하는 바로 그 개념의 근원적이며 내적인 외면성은, 모름지기 외면적인 객관의 직접적인 정립이거나 혹은 그것의 전제”[40]G. W. F. 헤겔, 앞의 책, pp. 336-337.이다. “이를 또 달리 보면 자기규정(Selbstbestimmung)이란 개념에 의하여 규정되지 않은, 외면적인 객관의 규정이며, 반대로 이 외면적인 객관의 규정은 곧 자기규정, 즉 내면적인 것으로 정립된, 지양된 외면성”[41]같은 책, p. 337.이다. 이러한 자기목적적 운동은 기계적 객관을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되레 그것을 풍부하게 재생산한다. 그것은 “객관을 통하여 객관을 지양하는 것으로서, 한편으로 이 기계론은 수단의 지양, 다시 말하면 이미 지양된 것으로 정립된 객관의 지양”[42]같은 곳.의 결과이다. 결국 총체성은 “외면성 일반의 자기 자신에 의한 지양이고, 이로써 외면성의 피정립성 속에 깃들인 총체성”[43]같은 책, p. 338.이다.
사변철학에 의존한 것만큼 목적론에 관한 헤겔의 서술은 온갖 신비주의적 외피로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목적적 정립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사변철학의 방법론으로써 훌륭하게 제시하였다. 외면적(외재적) 수다성으로부터 목적성을, 목적성으로부터 다시 외면적 수다성을 넘나들면서 자기운동하는 개념은 헤겔의 철학 체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중세 그리스도교적 전통은 목적을 오로지 외재적 목적성, 그것도 기계성과 완전히 무연고한 초월적 목적성이라고 간주하였다. 현대의 그리스도교인들 역시 이러한 전통적인 목적성 개념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거의 모든 그리스도교인, 심지어 종교와 무관한 사람까지 치료하기 어려운 중병이 낫게 된 데에 대하여 ‘신의 기적’이라고들 한다. 이러한 언술에는 완쾌라는 현실성을 그것의 외부에 자리 잡은 초월적인 목적 의지가 ‘의도’하였으며, 따라서 그 완쾌에는 그러한 기적적인 의지가 ‘내포’하고 있다는 믿음이 침식되어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앓고 있던 병이 낫게 된 원인을 따짐에서, 발병과 완쾌가 내적으로 함유하는 필연적인 규정성의 완전히 외부에 자리 잡은 것을 거론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여 객관적인 목적을 거론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즉 (이러한 사고가 지시하는) ‘함유’ 또는 ‘내포’한 ‘목적’은 참된 목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현실적인 것은, 그것의 근저를 이루었던 어떠한 가능적인 것과 분리될 수 없으며, 가능적인 것은 항상 현실적인 것과 끈끈한 연결 고리를 형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언급한 맥락에서의 연결 고리가 존재하지 않는 ‘목적’을 상정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겪는 모든 사태를 해명함에서 그 사태의 토대를 완전히 뛰어넘은, 완전히 임의적인 ‘의지’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즉 누군가가 질병을 겪을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그러한 질병이 특정한 사람에게 걸려야 함을 의도한 초월적 목적 의지를, 누군가가 겪었던 질병이 완쾌된 이유에 대해서는 그러한 완쾌를 의도한 초월적 목적 의지를 통하여서만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루터교 신자이자 관념론자인 헤겔마저 중세 신학의 목적 개념에 근거한 통속적인 언술을 “어리석은 일”[44]G. W. F. 헤겔, ≪헤겔 자연철학≫ 제1권, 박병기 역, 나남, 2008, p. 28.이라고 한 것이다. 헤겔은 외재적 목적성 개념의 전제, 즉 “존재자(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가 [그 스스로의 제 규정을: 인용자] 단절적으로 내포한 고유의 목적”[45]한동백,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고등 의식으로의 발전과 실천에 대하여(하)”, ≪정세와 노동≫ 제175호(2021년 10월), 노동사회과학연구소.이라는 개념을 참된 목적 개념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목적은 보편적인 존재자가 그 자신으로 복귀함에서 그 스스로의 제 규정을 내재적이고 연관적으로 내포한 고유의 규정성이다.
물론 헤겔의 목적 개념은 어디까지나 이념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과정을 정당화하는 규정성으로서의 그 의도를 지닌다고 해야 할 것이다. 헤겔에게 있어 목적의 주체는 결국 절대이념이기 때문에, 그것은 “개념을 현실에 적용하려는 인간의 현실적인 행동 및 수행과는 무관한 것”[46]같은 글.이며, 헤겔의 내재적 목적성 개념은 절대정신이 “그 외화의 역으로서 자기 복귀를 하는 과정에서, 존재론적 차원에서 등장하는 것”[47]같은 글.이다. 따라서 합목적적 활동 또는 목적론적 관계에 관한 헤겔의 관념론적 서술은, 그가 그중에서도 올바르게 해명한 부분―그 자체의 자기 동일성과 이 목적 중에서 드러나는 부정성을 통해 그 자체가 지양 작용, 즉 대립을 부정하여 이것을 목적인 그 스스로와 일치시키는 활동이라는 서술―이 인간의 현실적인 활동에 침투하여 들어갈 수 있는 여지를 박탈한다. 인간 활동에서 인간 주체를 확립할 수 있는 목적 개념의 형성은, 그의 기계성-화학성-목적성 범주 또는 개념을 유물론적으로 개작할 때만 가능하다.
4. 엥엘스
적지 않은 ‘맑스주의자’가 엥엘스의 자연변증법을 공격한다. 그들은 엥엘스가 사유 주관이 존재하지 않음이 전제된 자연계 영역의 독자적 변증법을 가능한 것으로 ‘날조’하였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나는 유물론을 지향하는 사람으로서, 엥엘스의 기획에 도대체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전혀 파악할 수 없다.
오히려 변증법이 진정한 과학으로 될 수 있으려면, 그것이 제반 자연 영역에서도 유효한 원리임이 입증되어야 한다. 우리가 대상 사물을 고찰함에서, 특정한 자연 고찰 방식이 과학적일 수 있다고 자부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대상 사물의 객관적 원리를 드러내는 데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구상된 방법론이 그러한 방향성에 조금이라도 기여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방법론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를 지녔다는 의미에서 과학적으로 타당한 방법론의 기초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대상 사물의 운동 법칙을 파악하는 데서 그 대상 사물의 운동 법칙의 보편적인 원리를 담아내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서의 기초이다. 만약에 변증법의 기본 법칙들이 이러한 대상 사물의 운동 양상과 모순된다면 변증법은 폐기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엥엘스의 자연변증법은 탁월한 혜안을 제공한다.
현재 우리가 다루는 주제인 합목적성에 관하여서도 엥엘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지양하여 그것을 물질의 자기운동이 표현하는 한 방식이라고 간주하였다:
[E. 헥켈은: 인용자] 한 동물이나 식물에게서 자연도태를 통해 일정한 변화가 초래된 것이면, 그것은 작용인에 의해서, 그리고 이 변화가 인위적 도태(사육과 재배)를 통해서 초래된 것이면, 그것은 목적인에 의해서 야기된 것이라는 그럴듯한 결론에 도달한다! 사육자나 재배자가 목적인이라고! 물론 헤겔과 같은 정도의 변증법의 대가가 작용인과 목적인의 협소한 대립 속에서 빙빙 맴돌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경험과 이론으로부터, 물질과 그것의 존재양식인 운동은 창조될 수 없으며 그래서 그것이 그 자신의 목적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이 대립에 관한, 빠져나갈 길 없는 실없는 소리에 끝장을 내게 되었다.[48]F. 엥겔스, ≪자연변증법≫, 윤형식ㆍ한승완ㆍ이재영 역, 중원문화, 1989, pp. 261-262.
인간의 합목적적 활동에 관하여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인간과 함께 우리는 역사에 들어선다. 동물들도 그 발생으로부터 점차적 진화를 거쳐 오늘날의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지니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역사는 동물들에게 있어서 [외부세계에 의해: 역자] 만들어지는 것이며, 비록 그들이 그 역사에 참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 자신의 지식이나 의지가 없이 일어날 뿐이다. 이에 반해 인간은 스스로 좁은 의미에서의 동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자신의 역사를 의식을 갖고 스스로 만들며, 예견되지 않은 작용이나 조절되지 않은 힘들이 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이 줄어들게 되며, 역사상의 결과들은 이전에 설정된 목적과 더욱더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척도를 인류사에, 심지어 현재 가장 발전한 민족에 적용시킬 경우에도 여전히 예정된 목표와 달성된 성과 간에는 엄청난 불일치가 존재하며, 예견되지 않은 결과들이 우세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통제되지 않은 힘들이 계획적으로 작동된 힘들보다 훨씬 더 강력함을 알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역사적 활동, 인간을 동물상태로부터 인간으로 상승시켰고 인간의 모든 다른 활동들에 물질적 기초를 제공하여 주는 활동, 인간의 삶의 욕구들의 생산, 즉 오늘날 사회적 생산을 이루는 활동이 여전히 통제되지 않은 힘들의 의도되지 않은 작용 아래 종속되어 있고 의도했던 목적은 단지 예외적으로만 달성되며 훨씬 더 많은 경우에서는 의도한 목적과는 반대되는 결과를 낳는 한 어쩔 수 없는 것이다.[49]같은 책, p. 29.
인간은 짐승과 달리 자기목적적인 생명체, 즉 주체로 될 실재적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당대 엥엘스가 살았던 시기, 그리고 현재까지도 대부분 생산물을 자신의 힘으로 통제할 조건을 스스로 마련하지는 못한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의 목적은 자신을 둘러싼 생산물의 운동,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에 의해 정립된 피정립태라는 성격을 지니며, 따라서 인간이 진정 “의도한 목적과는 반대되는 결과”를 낳는다. 인간이 진정으로 의도, 목적하는 바는 아주 제한적으로만 달성될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인간을 자기운동의 수단으로 정립한다는 것이다. 이때 수단, 즉 인간은 자본의 외적 객관성으로서 대립하는데, 당초 자본이 설정한 외적 객관성인 자연 대상 역시 자본에 의해 대상화된 인간에 있어서는 수단 또는 외적 객관성이며, 그러한 한에서 인간의 의도와 활동 역시 합목적적 의지이며 합목적적 활동이다. 그러나 이 합목적성은 어디까지나 자본의 합목적성 아래에 귀속되어 있는 것으로서의 목적이다. 인간해방이란 인간의 목적이 진정 그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자기목적이라는 의미에서의 목적으로 됨을 의미한다.
인간은 그가 일으키는 변화를 통해 자연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변형시키며, 자연을 지배한다. 이것이 인간과 다른 동물 간 최후의 본질적 차이이며, 이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은 다시 노동이다.[50]같은 책, p. 116.
즉 짐승은 노동하지 않는다. 짐승의 행위는 그저 자연의 자기목적적 활동에 의해 대상화된 것으로서 기계성의 한 개별적인 발현태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은 노동을 통해 그 자신이 자연의 형상, 즉 목적으로 된다. 다시 말해, 노동이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전제 작용, 형상적 작용이다.
엥엘스가 구사한 목적 개념은 현재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헤겔의 변증법적 목적 개념을 염두에 둔 것임이 명명백백하다. 그런데 일부 전통적 형이상학자들은 헤겔의 내적 목적성을 오로지 자신들의 전통적인 목적론적 세계관을 옹호하는 데에만 활용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물론 헤겔의 ‘실현된 목적’에는 그러한 성격이 일정 존재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헤겔이 이 지점에서 ‘이성의 꾀(List der Vernunft)’를 거론하는 부분은 초월자를 상정하는 전통적 형이상학자들, 종교인들에게 있어서 적지 않은 ‘영감’을 주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목적론에서 합리적 핵심만 거두어들인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자연의 자기목적적 운동에 관한 변증법적 해명으로 될 수 있다. 그래서 엥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헤겔의 내적 목적―즉,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제3자, 예컨대 섭리의 지혜 같은 것에 의하여 자연에 도입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 자체의 필연성에 내포되어 있는 그러한 목적―을 적용하는 것조차 철저한 철학적 훈련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엉뚱하게도 자연에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행위를 강요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심령론적 경향이 조금이라도 보이기만 하면 극도의 도덕적 분격을 금치 못하는 바로 그 뒤링씨가 “본능은 주로 그 작용과 관련된 만족감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라고 아주 명확하게 단언한다.[51]F. 엥겔스, ≪반뒤링론≫, 한철 역, 이성과현실, 1989, p. 103.
과학으로서 변증법적 목적 개념이 실제로 유효한 원리로서 작동하기 위해서는 목적의 전제 작용이 여러 사물의 개별적 양태에 있어 어떠한 경계점을 지니고 있는가가 설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개별과학에서 과학적 실천을 통해 정초 중에 있으며, 이미 부분적으로는 커다란 성과를 내었다. 오히려 과학 발달과 함께 변증법적 목적 개념의 타당성은 입증되어 온 것이다. 엥엘스 역시 뒤링을 비판하면서 생물학의 성과를 통해 합목적성이 단순히 의식, 주관적 의도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자연 자체에서 발양되는 것임을 지적하였다.[52]“청개구리나 잎을 먹는 곤충이 푸른색이고 사막의 동물이 사황색(沙黃色)이고 극지의 동물이 주로 백설같이 흰색이기는 하여도 그것들이 일부러 또 … Continue reading
변증법적 목적 개념의 타당성은 특히 자연과학 분야에서 입증되었는데, 특히 생물학의 분야에서는 그것이 독보적이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생물학자 E. W. 마이어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철학 문헌에서 목적론적 분석이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에 있는 이유는 이제 명백하다. 참으로 우리는 이러한 문헌에서 목적론의 문제들을 취급하는 것은 어떻게 과학철학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최소 50년 동안 상당히 많은 과학철학자들이 목적론에 관한 논문을 썼는데, 그들의 분석은 논리와 물리주의 방법들에 근거한 것으로, “가장 훌륭한 방법으로” 또는 최소한 그러한 분석들을 위해서는 유일하게 믿을 만한 방법들인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러한 철학자들은 비록 목적론이 대부분 또는 전적으로 생명의 세계와 관계한다고 할지라도 생물학자들의 발견을 무시해버렸다. 그들은 기능이라는 단어가 두 가지 아주 다른 현상들을 가리킨다는 것 그리고 프로그램이라는 개념이 목적-방향성(goal-directedness)의 문제에 새로운 국면을 부여한다는 것을 무시했다. 그들은 근접 원인과 진화적 원인들 간 구별과, 정적인 (적응된) 체계들과 목적-방향적인 활동들 간 차이점을 혼동했다. 목적론의 문제에 관한 엄청난 철학적 문헌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목적론을 일원적인 현상으로 취급[53]여기서 언급되는 “목적론을 일원적인 현상으로 취급”하는 것이란, 당대 목적론에 비판적인 기계론자들이나 주관 관념론자들이 목적론을 … Continue reading하는 최근의 책과 논문들은 정말로 쓸모가 없다. 우주적 목적론의 의미, 적응성, 프로그램된 목적-방향성 그리고 결정론적 자연법칙들 간의 차이들을 인식하지 못했던 어떠한 저자들도 목적론의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다.[54]같은 책, pp. 72-73.
마이어는 전통적인 목적론자들이 과학적 현상을 이해하는 데도, 그리고 목적론을 옹호하는 데도 실패했다고 분석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생물학적 프로그램에서 목적-방향성의 내용을 무시해버리는 물리주의자들, 즉 반(反)목적론자들의 한계도 동시에 인식한다.
마이어는 방사성 붕괴 현상, 냉각 현상 등의 다양한 과학적 프로그램이 그것을 둘러싼 유기적 구성 요소들과의 결합에 의해 형성되며, 이러한 현상은 각자 보존력을 갖춘 체계를 이룬 목적 자동적(teleomatic) 프로그램의 전개라고 간주한다. 여기서 목적 자동적 과정이란, “종국 점을 갖고 있는 비유기적 자연에 있는 모든 과정들을 포함”[55]같은 책, p. 79.하는 프로그램의 전개 양상을 의미한다. 여기서 종국 점이란, 개별적 현상 체계 내부에 설정되어 있는 목적이다. 그는 이어서 목적 법칙적(teleonomic) 과정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그것은 “목적 법칙적 과정이나 행동은 그것의 목적 방향성이 진화된 프로그램의 영향 때문인 그러한 것”[56]같은 책, p. 81.으로 되며, “한 과정이나 활동의 목적 방향을 포함”[57]같은 곳.하고 “엄격하게 궁극적 인과 작용들과 관계”[58]같은 곳.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 유전 프로그램과 신체 프로그램 간의 대립 운동을 통해 해명한다. 마이어의 예에 따르자면, 칠면조 수컷이 암컷에게 과시할 때, 그의 과시 행동은 그의 세포핵에 있는 DNA의 직접 통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중앙 신경계에 있는 신체 프로그램의 통제를 받는다. 이러한 뉴런 프로그램은 “유전 프로그램으로부터 나온 지령들의 부분적 통제 아래에서 발달하는 동안 심어진 것”[59]같은 책, p. 86.인데, 그것이 형성된 이후에는 유전 프로그램에 대해서 일정 주도적 성격을 지닌다. 즉 신체 프로그램은 이후 유전적 형성으로 이어질 사태를 세우면서, 유전 프로그램의 목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유전 프로그램의 총체는 신체 프로그램이 지시한 대로 진화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목적 법칙적 의미에서 신체 프로그램이 (유전 프로그램에) 지시하는 규정성은 유전 프로그램의 내적 전개 없이는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부 관념론자, 즉 초월적 목적론자, 외재적 목적론자들은 마이어의 연구 성과를 악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이어는 그러한 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못 박았다:
비록 분명하게 목적 방향적인 유기적 과정들과 활동들이 많이 있지만, 그 목적은 이러한 활동들을 지시해 주는 프로그램이 이미 암호화되어 있기에, 초자연적 힘들을 포함시킬 필요는 없다. 그러한 목적 법칙적 과정[초자연적 목적성이라 오인되는 것: 인용자]들은 원리상 물리화학적 원인들로 환원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비유기적 자연에는 중력과 열역학 법칙들 같은 단지 자연법칙들의 작용에 기인하는 종국을 완수하는 과정들이 있다.[60]같은 책, p. 94.
자연현상에서 관찰되는 합목적적 활동에는 그 어떠한 신비적 개념 따위를 둘 공간이 없다. 그것은 순전히 물질의 물질적인 운동이다. 자연의 총체성은 스스로 목적의 조건을 형성하고, 그것을 통해 목적 정립적 활동을 하며, 동시에 이 과정에서 인과성을 그대로 보존한다. 과학의 발달은 “인과적 설명과 목적론적 설명 간의 충돌이라는 이전에 자주 제기되어온 주장을 반박한다.”[61]같은 곳. 기계성과 목적성이 서로 양립 가능하다는 견해는 마이어와 더불어, R. C. 르원틴, M. 루스, R. 먼슨 등 여러 생물학자에 의해 널리 인정되고 있다. 반대로 생물학적 메커니즘에 대한 해명에서 기계성 또는 목적성 각각이 그 대립항에 대해서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식의 설명은 생물학자 사이에서도 이미 회의의 대상으로 되어 있다.
생물학의 발전은 고도로 발전한 자연산물로서 인간의 존재양식에 대한 구체적 이해의 지평을 크게 넓혔다. 기계성과 목적성의 변증법에 관하여서도 그렇지만, 주제와 어긋나서 내가 굳이 거론하지 않은 후성유전학의 발달 역시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변증법에 관한 훌륭한 해명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는 노동대중에게 아직 폭넓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따라서 진정 유물론을 지향한다면 자연과학의 최신 성과를 흡수하여 그것이 변증법적 유물론 체계의 내적 당위를 강화함을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노사과연
References
↑1 | K. 맑스 저ㆍF. 엥겔스 편, ≪자본론≫ 제III권(2), 백의, 1990, pp. 1003-1004. |
---|---|
↑2 | G. W. F. 헤겔, ≪대논리학≫ 제III권, 임석진 역, 자유아카데미, 2022, pp. 303-304. |
↑3 |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Physics)≫, 193b13-193b18. (The Complete Works of Aristotle (The Revised Oxford Translation, edited by Jonathan Barnes), Vol. 1,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1, p. 21.) |
↑4 | 같은 책, 194a28-194a33. (Ibid., p. 22.) |
↑5 | 같은 책, 200a31-201b10. (Ibid., p. 34.) |
↑6 | 같은 책, 198b34-199a8. (Ibid., p. 31.) |
↑7 | 같은 책, 199a9-199a19. (Ibid., pp. 31-32.) |
↑8 | 같은 책, 202a12-202a20. (Ibid., p. 38.) |
↑9 | 같은 책, 202a21-202a28. (Loc. cit.) |
↑10 |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metaphysics)≫, 1046a1-1046a20.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김진성 역주, 이제이북스, 2007, pp. 375-377.) |
↑11 | G. W. F. 헤겔, 앞의 책, p. 305. |
↑12 | 관념론자 헤겔에 따르면 개념이란 “스스로를 실재적이며 존재하는 것으로 정립하는 것”(같은 책, p. 253.)이다. 더 나아가 헤겔은 객관 그 자신을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객관의 내적 연관의 필연적 구성 요소로서의 주관성>을 끝없이 거론한다. 이러한 맥락하에서는 주관성이 곧 개념이다. 그에게 있어 객관이란 개념이 자기 분립과 통일을 실재성―즉, 우리가 우리의 의식 외부에 독립적으로 실재한다고 할 때의 그것으로서―의 단계로까지 실현하는 방식의 총체이다. 여기서 ‘실재성으로의 발현’은 매개 관념성이 그 짝을 이루는 것으로 묘사된다. 헤겔에 따르면, 객관은 항시 주관성을 부착하고 나오는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그는 인식주관 외부의 실재적인 것으로서 객관적 실재에 관하여서도 언급한다. 사유 주관이 스스로의 관계에서 객관성을 정립한다는 헤겔의 기획은 다분히 신비주의적이며, 현대과학의 성과에 반한다. |
↑13 | 같은 책, p. 260. |
↑14 | 같은 책, p. 265. |
↑15, ↑19, ↑29, ↑30, ↑38, ↑42, ↑57, ↑58, ↑61 | 같은 곳. |
↑16 | 앞서 언급하였듯이 헤겔은 관념론자로서, 실재성(객관)의 주체적 실현자를 개념이라고 간주한다. |
↑17 | G. W. F. 헤겔, 앞의 책, p. 281. |
↑18 | 같은 책, p. 287. |
↑20 | 같은 책, pp. 289-290. |
↑21 | 같은 책, p. 299. |
↑22 | 같은 책, p. 297. |
↑23 | 같은 책, p. 300. |
↑24 | 같은 책, p. 302. |
↑25 | 같은 책, p. 313. |
↑26 | 같은 책, p. 314. |
↑27 | 같은 책, pp. 316-317. |
↑28 | 같은 책, p. 319. |
↑31 | Hegel Sämtliche Werke, Bd. 8, Stuttgart: Frommann-Holzboog Verlag, 1964, S. 205. |
↑32 | G. W. F. 헤겔, 앞의 책, p. 331. |
↑33 | 같은 책, p. 326. |
↑34 | 같은 책, p. 324. |
↑35 | 같은 책, pp. 329-330. |
↑36 | 같은 책, p. 334. |
↑37 | 같은 책, p. 335. |
↑39 | 이로써 관념론자 헤겔은 관념인 개념의 자기규정적 운동을 완성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전도하여 그것을 물질의 자기규정적 운동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
↑40 | G. W. F. 헤겔, 앞의 책, pp. 336-337. |
↑41 | 같은 책, p. 337. |
↑43 | 같은 책, p. 338. |
↑44 | G. W. F. 헤겔, ≪헤겔 자연철학≫ 제1권, 박병기 역, 나남, 2008, p. 28. |
↑45 | 한동백,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고등 의식으로의 발전과 실천에 대하여(하)”, ≪정세와 노동≫ 제175호(2021년 10월), 노동사회과학연구소. |
↑46, ↑47 | 같은 글. |
↑48 | F. 엥겔스, ≪자연변증법≫, 윤형식ㆍ한승완ㆍ이재영 역, 중원문화, 1989, pp. 261-262. |
↑49 | 같은 책, p. 29. |
↑50 | 같은 책, p. 116. |
↑51 | F. 엥겔스, ≪반뒤링론≫, 한철 역, 이성과현실, 1989, p. 103. |
↑52 | “청개구리나 잎을 먹는 곤충이 푸른색이고 사막의 동물이 사황색(沙黃色)이고 극지의 동물이 주로 백설같이 흰색이기는 하여도 그것들이 일부러 또 어떤 관념에 따라 그러한 빛깔을 가지게 된 것은 물론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이러한 빛깔은 다만 물리적 힘과 화학적 인소의 작용에 의하여서만 설명되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동물들이 그러한 빛깔에 의하여 자기들이 생활하는 환경에 합목적적으로 적응되어 있다는 것과 그 결과 적들의 눈에 훨씬 덜 띄게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부 식물들이 그것에 내려앉는 곤충을 잡아먹는 데 사용하는 기관도 그러한 활동에 적응되어 있으며 심지어 합목적적으로 적응되어 있기까지 하다. 그리하여 뒤링씨가 적응은 오직 관념의 작용에 의하여서만 야기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합목적적인 활동도 역시 관념을 매개로 하여 진행되어야 하며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른 말로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이리하여 우리는 현실철학에서 늘 그러하지만 다시금 자기의 목적을 실현하는 조물주, 즉 신에 도달하게 된다.” (같은 책, p. 108.) |
↑53 | 여기서 언급되는 “목적론을 일원적인 현상으로 취급”하는 것이란, 당대 목적론에 비판적인 기계론자들이나 주관 관념론자들이 목적론을 취급하였던 방식을 의미한다. 마이어에 따르면 그들은 목적론을 해석함에서, 단지 중세 그리스도교 형이상학에서 차용된 초월적 목적론만이 존재한다거나, 또 모든 목적론은 종국적으로 이 형이상학의 구성 요인으로서 목적론으로 수렴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만 반복하였다. (E. W. 마이어, ≪생물학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 박정희 역, 철학과현실사, 2005, pp. 77-78.) |
↑54 | 같은 책, pp. 72-73. |
↑55 | 같은 책, p. 79. |
↑56 | 같은 책, p. 81. |
↑59 | 같은 책, p. 86. |
↑60 | 같은 책, p. 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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