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한국 환경운동의 역사와 쟁점

박한솔│ 청년위원장

 

 

기후변화가 위기로, 위기는 ‘재앙’이 되고 있다. 세계기상기구(WMO)가 지난해 5월 발간한 <2021년 전(全) 지구 기후현황 보고서>는 재앙을 수치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온실가스 농도는 산업화 이전 수준의 149%인 431.2 prm에 도달하여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전 세계 평균기온은 1850-1900년 산업화 이전보다 약 1.11℃ 상승했다. 또한 해수면은 2013년부터 2021년 사이에 연평균 4.5mm씩 상승했다. 이 또한 역대 최고치다. 해수 온도도 급상승했다. 바다 속 2,000m까지 온도가 높아졌고, 앞으로도 계속 높아질 예정이다. 바다는 연간 대기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의 약 23%를 흡수한다. 이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낮추지만, 한편으로 바다의 pH 농도를 감소시킨다. 2021년 해양 표면 pH 농도는 지난 2만6천년 가운데 가장 낮았으며, 이러한 변화 속도는 이후에도 전례가 없을 만큼 급속히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pH 농도가 감소하면 바다가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능력도 약화된다.

폭염, 산불, 눈, 가뭄, 한파, 폭풍 등 기상이변은 더욱 빈번해졌다. 북미 서부 지역에서는 올해 6-7월 중 이례적인 폭염을 기록했다. 미국 브리티시 컬럼비아 중남부에 위치한 리턴(Lytton)은 6월 29일 기온이 무려 49.6℃에 달했다. 해당 지역에서는 무려 569명이 열사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한파는 북미는 물론 동북아시아 일대를 습격했다. 러시아는 2009-2010년 이후 가장 추운 겨울을 보냈으며, 일본에서는 평균 이하의 기온이 관측됐다. 중국 대륙 또한 비정상적으로 추웠다. 기온에 비하여 강수량은 그 변동성이 더욱 컸다. 1951-2000년을 기준으로 총 강수량이 평년 이상인 지역은 동유럽, 동남아시아, 남미 북부 지역 및 북미 남동 일부 지역이었다. 반면 서남아시아와 중동, 남아프리카 일부, 남미 남부 일부 지역 및 북미 중부 지역은 강우량이 적었다. 세계기상기구는 이러한 기후변화가 “안보, 인간 이동성, 생계, 경제, 기반시설 및 생물 다양성뿐만 아니라 보건, 식량 및 물 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 사회에 인도주의적 위험을 제기한다.”고 분석했다.

위에 나열한 위기의 징후들, 아니 그 자체로 위기인 현상들은 더 이상 새로운 일이 아니다. 기후위기를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인류 문명이 파괴될 것이라는 절망적인 예측에 지배계급조차 고개를 끄덕인다.1) 그들이 (명백히 사기이지만) 이른바 ‘탄소중립’에 합의한 까닭이 그러하다. 그러나 기후위기는 모든 인류에게 평등한 위기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극심한 무더위 속에서도 에어컨을 펑펑 틀어댈 수 있는 자들은 좀 더 오래 살아남는다.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삶의 터전이 서서히 가라앉을 때도, 더 높은 곳을 차지한 이들은 아무래도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기후위기가 더 큰 규모의 경제공황을 야기할 때,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리겠지만, 누군가는 이 위기를 기회 삼아 더 큰 이익을 벌어들인다. 기후재앙의 가장 큰 피해자는 노동자와 빈민이 될 것이고, 자본가들은 인류 최후의 순간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약자에게 특히나 파멸적인 기후재앙 앞에서 ‘진보 좌파’를 자처하는 이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분명하다. 이 위기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강조하며,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자본주의의 수혜자들이자 이 체제를 지키기 위해 갖은 수를 동원하는 극소수 독점자본가와 그 주구들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다. ‘기후위기는 모두의 잘못’이라는 식의 연대책임론은 기후위기의 ‘주범’을 은폐한다는 점을 폭로해야 한다. 누가 더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며, 기후위기를 부추김으로써 이익을 얻는 자들이 누구인가를 지목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때 기후위기의 주범은 자본가계급이며, 원인은 자본주의 체제임이 드러난다. 자본주의적 생산에 기후위기의 1차적 책임이 있음을 부정한다면 어떠한 주장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안타깝게도 한국 주류 환경운동계에서는 기후위기의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는 주장들이 대안처럼 제시되는 듯하다. 심지어 몇몇 환경운동단체들은 ‘체제 내부 비판자’로서의 역할에 안주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이 글에서는 한국 환경운동(특히 환경운동단체를 중심으로)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 이 시기 환경운동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까닭은 눈앞의 재앙으로 닥친 기후위기 문제를 해소하기에 앞서, 한국 환경운동의 현재를 가늠하기 위함이다. 한국 환경운동의 역사와 관련된 내용은 주로 한국 환경사회학회가 펴낸 ≪환경운동과 생활세계≫(2013) 중 <한국 환경운동의 역사>(구도완·홍덕화)를 참고하였다.

 

 

1. 한국 환경운동의 역사와 쟁점

 

(1) 환경오염 문제의 발생 (60-70년대)

 

한국의 환경운동은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공업화가 차츰 진전됨에 따라 환경오염 문제가 실제적인 피해로 이어지기 시작하면서, 몇몇 피해자들의 자구적인 대응으로서 나타나기 시작했다.2) 이 시기는 한국 환경운동의 맹아기로 여겨진다. 60-70년대는 박정희 군사파쇼정권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밀어붙이던 시기였다. 정권은 파쇼통치에 대한 노동자 민중의 저항을 폭력적으로 억누르는 한편, 경제개발을 명목으로 한 국토 개발을 추진하였다. 자연히 환경오염 또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민주적 권리가 억압된 상황에서 사람들이 환경오염을 사회 문제로 거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일부 양심적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환경오염 실태 조사가 이뤄지기도 하였으나, 군사독재라는 엄중한 정세로 인해 조사 결과는 거의 공개되지 못했다. 더욱이 60-70년대의 공업화는 아직 진행 중에 있었던 관계로, 환경오염은 공업지대 인근 지역에서 국지적인 형태로 발생하였으며, 그 대응 또한 일부 공해 피해자들의 일회적이고 자생적인 피해보상운동 형태로 전개되었다.3) 즉 환경오염 문제가 아직까지 전국적인 문제로까지 확산되지 않았고, 이에 대한 대중적 인식 수준 또한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아직까지 ‘운동’이라고 할 만한 조직적 움직임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시기 환경오염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공해방지법>(1963), <환경보호법>(1977) 제정 및 <자연보호헌장>(1978) 선포 등이 있었으나 실질적인 대책이 되지 못했다. 여전히 정부는 국토 개발을 제1의 목표로 삼았고, 국민들은 이러한 정부의 개발 시책에 동원되는 대상에 불과했다. <공해방지법>은 한국 최초의 환경 관련 법령으로 제정되었는데, 정부의 의도적인 방치 속에서 사실상 유명무실화 되었다.4) <자연보호헌장>은 “자연을 사랑하고 환경을 보전하는 일은 국가나 공공 단체를 비롯한 모든 국민의 의무”라고 밝히면서, “국민 각자가 생활 주변부터 깨끗이 하고 전 국토를 푸르고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야 한다.”로 마무리된다. 정부의 환경오염 대응은 ‘조국 근대화’를 위시한 새마을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고, 국민의 국토청결운동의 의무를 강조하는 것에 머물렀던 셈이다. (앞의 글).

 

 

(2) 본격화된 환경오염과 환경운동의 등장 (80년대)

 

1980년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결과물로서 환경오염이 전국화된 시기였다. 급속한 경제개발은 급속한 환경파괴로 이어졌다. ‘공해’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점차 확산되었고 이는 80년대 민중운동과 결합하면서 ‘반공해 운동’으로 거듭났다. 자생적, 일시적이던 종래의 환경오염 대응과 달리 조직적인 형태의 환경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80년대 환경운동이 민중진영과 연계를 맺었던 까닭은 한국의 환경오염(경제개발)이 군부독재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한다. “정치적 억압에 바탕을 둔 산업자본주의 경제성장이 공해피해로 나타났기 때문에 초기 환경운동가들은 정치적 민주화 없이는 공해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5) 실제로 정부 수립 이후 한국의 경제개발은 독점자본 지배체제 공고화의 과정이었으며 이는 극심한 환경파괴로 이어졌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그 자리를 군사 쿠데타로 꿰찬 박정희정권은 군부를 중심으로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노동자 민중의 투쟁을 압살했다. 그러면서 “수출주도 공업화전략으로 경제개발계획의 방향을 설정한 이후에는 국제 경쟁력을 위해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며 정책적으로 독점자본을 육성했다.”6) 박정희 정권은 이 시기 삼성, 현대, 한진, 럭키(現 LG), 한국화약(現 한화) 등 현재까지 한국 자본주의의 중추인 대규모 기업집단을 성장시켰다. 이 과정이 노동자 민중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수탈과 더불어, 모든 잉여가치를 극소수 재벌에 집중토록 하는 폭력적인 과정으로 점철되었음은 물론이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급속한 경제성장은 노동자 민중의 저임금·장시간 노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처럼 세계 최저의 임금 수준과 세계 최장 노동시간, 노동자들의 전적인 무권리 상태라는 악조건 속에서 환경 ‘운동’이 발생했다. 이 시기 환경운동의 주체는 학생 운동권이었다. 당시 학생 운동권은 환경오염을 독점자본주의와 군사독재체제의 결과물로 인식한 가운데 민주화 투쟁의 일환으로서 ‘공해추방운동’을 벌였다.7) 한국 최초의 민간 환경운동단체인 한국공해문제연구소(공문연, 1982)에 이어 대학생과 청년이 주축이 된 반공해운동협의회(1984)8),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공해반대운동시민협의회(1986) 등 환경운동단체가 잇따라 창립되었다. 이 시기 환경운동은 민중운동의 기반 위에서 당대의 반제반독점 투쟁, 통일운동과 결합하여 변혁성을 띠는 경우가 있었다9). 변혁적 환경운동 진영은 환경오염이 계급(민족)모순과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와 공청협의 통합조직인 공해추방운동연합(공추련, 1988)은 창립선언문에 다음과 같이 밝힌다. “과연 누가 이 땅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가? … 우리는 감히 단언할 수 있다.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는 독점재벌들과 그 비호자 군사독재, 그리고 한반도를 식민지 쓰레기장으로 여기면서 군림하고 있는 미국이 그 주범이라는 것을!”10) 공추련은 그 강령에서도 다음과 같이 변혁적 성격을 분명히 한다. “우리는 이 땅의 민중에게 잠재되어 있는 거대한 변혁적 힘을 바탕으로 당면한 공해와 핵의 위협으로부터 민중의 노동과 생활을 수호하고 나아가 사회적 불평등과 자연으로부터 소외가 극복된 진정한 민주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 노력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공추련이 환경오염의 근본 원인이 ‘독점재벌’과 ‘사회 경제적 불평등’에 있다고 밝힌 점이다. 환경문제의 원인은 독점자본가 등 지배계급에 있으며 사회 경제적 불평등을 타파함으로써 노동자 민중에 가해지는 억압이 해소될 때 비로소 환경문제 또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환경오염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인정한 바람직한 견해였다. 이처럼 80년대 환경운동은 민중운동과의 결합 속에서 변혁적 성격을 띠었다.

80년대 환경운동은 ‘공해추방운동’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공장에서 발생한 매연, 오폐수 등으로 인한 공해 피해가 주된 관심사였다. 그 대표적인 활동이 대중들에게 공해병의 존재를 알린 ‘온산병’ 진상규명 운동이었다.

온산병은 울산시 울주군 온산면 일대에서 발생한 ‘공해병’이다. 1978년 온산면에 조성된 500만평 규모의 중화학공업단지(온산국가산업단지)는 구리, 아연, 알루미늄 등 비철금속을 주로 생산하다가 80년대 들어 화학, 제지, 자동차 부품 등 여러 상품을 생산하는 종합공업단지로 거듭났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무계획적으로 공업단지를 조성한 탓에 1만 2천명이 공단에 포위·고립된 상태로 살아가게 되었다. 공장 가동 5년이 지난 1983년부터 주민들 사이에서 이상증세가 나타났다. 남녀노소를 불문한 온산 주민들에게 전신 신경통 증세가 발현되고 심한 경우에는 수족마비, 반점이 생기기도 했다. 1985년에는 온산 주민 1,000명이 전신마비 증상을 보이는 등 공해피해가 확산하기 시작했다.

정부에 의해 은폐되었던 온산병의 존재는 1985년 한국공해문제연구소(공문연)의 조사 결과가 한국일보 보도를 타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온산공단 어민 500여명이 ‘이타이이타이 병’11) 초기 증세를 보였다는 소식이었다. 보도가 나가자 환경청은 온산 일대 환경은 양호하며, 주민들의 증상은 공해병이 아니라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의 발표를 믿는 사람은 없었고, 실존하는 피해 앞에서 오리발을 내미는 정부의 태도는 대중의 거센 비난을 샀다. 거듭된 온산병 공방 끝에 결국 정부는 공해 피해를 인정했다. 하지만 당시 전두환 정권은 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을 앞둔 상황에서 온산병 문제가 대두되는 것을 막기 위해 황급히 1만여 명의 주민들을 대거 이주시켰고,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었다. 이후 온산 주민들이 11개 공해배출 업체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 끝에,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법원에서 온산병이 공해피해로 인정되었다.

온산병 사태는 1991년 낙동강 페놀 유출 사고와 더불어 대중들에게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공문연을 비롯한 환경운동단체들은 온산병 주민 지원 사업에 적극 나섰고 공해 문제 해결을 위해 자본과 정부에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등 환경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만드는 데 집중했다. 그러던 1987년, 6월 항쟁의 결실로 파쇼통치체제가 막을 내리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쟁취하게 되자 환경운동은 새 국면을 맞이했다. 정치적 민주화와 더불어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해체로 정세가 급변했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던 반공해 활동가들이 주도한 변혁지향적 환경운동은 전망의 상실 속에서 침체된 가운데, ‘시민운동’의 영향을 받은 (소)부르주아 환경운동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3) (소)부르주아적 ‘시민환경운동’의 주류화 (90년대-00년대)

 

90년대 이후 환경운동이 갖는 특징은 냉전 종식과 더불어 확산된 ‘탈이념성’에 있다. 독점자본 해체, 군사독재 타도, 민족통일이라는 거시적 전망 속에서 전개된 80년대 환경운동과 달리, 90년대 환경운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확립과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붕괴라는 조건 속에서 정부 정책에 대한 참여, 제도 개선 등 협소한 목표를 중심으로 운신하게 된다. 거꾸로 말하자면 변혁운동의 세가 약화된 틈을 타, 환경 문제를 비정치적·탈계급적 운동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시도된 것이다.

더 이상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환경운동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목전의 환경파괴를 막기 위해 활동하고 이를 위해 정치권을 압박하여 제도 개선을 이뤄내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가 되었다. 환경운동의 (소)부르주아적 성격이 강화된 것이다. 특히 민중운동 진영이 방황하는 사이 자유주의적,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세를 불려나가던 ‘시민운동’의 등장은 이러한 경향을 가속화하였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산하 환경개발센터, 환경운동연합 등 소위 ‘환경 NGO’들은 기존의 변혁적 환경운동을 대체하는 ‘시민환경운동’으로 나아갔다. 이처럼 “시민환경운동은 온건하고 현실적인 환경운동을 했다는 점에서 반공해운동과 구분된다.”12)

 

시민환경운동는 주체 측면에서도 기존 반공해운동과 구별된다. 노동자, 대학생 등이 주축이었던 반공해운동과 달리 시민환경운동은 80년대 이후 경제성장으로 형성된 중산층을 중심으로 착실히 제도화(체제내화)의 길을 걸었다. 경실련과 환경운동연합의 창립선언문에서 80년대 반공해운동에서 볼 수 있었던 독점자본, 군사독재, 민족통일 등의 투쟁적 구호가 자취를 감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경실련은 취지선언문(1989)에서 그들의 계급성을 구태여 감추려 하지 않았다. 경실련 취지선언문을 살펴보자.

 

어떤 사람은 경제 정의를 위한 시민운동을 보고 “당장의 민주주의 실천과 노동자들의 권익옹호, 그리고 통일의 과제가 있는데, 당신들이 이를 희석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질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답변할 것입니다. “아니오, 우리는 바로 이 나라의 민주화와 통일 그리고 산업 평화를 위해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길이야말로 사실은 경제 성장과 복지, 민주주의와 통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면서 경실련은 더욱 구체적으로 시민운동의 주체와 그 목적에 대해 아래와 같이 밝힌다.

 

어떤 사람은 왜 민중이 아니고 시민이냐고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힘을 모으려는 세력은 소외되고 억눌린 민중만이 아닙니다. 선한 뜻을 지닌 가진 자도 운동의 중요한 주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가 이래서는 안 되고 기필코 민주복지사회로 가야겠다고 하는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면 그가 기업인이든 중산층이든 할 것 없이 이 운동의 중요한 구성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굵은 글씨는 인용자)

 

즉, ‘민중’만을 운동의 주체로 인정할 수 없으며, 시민운동은 “선한 의지를 가진” 자본가까지 포괄해야 하고, 그로써 ‘복지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이 경실련의 입장인 것이다. 이러한 경실련 산하에 설립된 ‘환경개발센터(現 환경정의)’가 경실련과 같이 ‘온건한’ 입장을 취하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환경개발센터는 설립취지문에서 ”현 단계에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일은 … 환경관리라는 개념에 입각한 정책대안을 제시하고”, “정부 및 기업과의 대화를 통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는 형태”라고 밝혔다.

이러한 환경(시민)운동의 ‘전략’은 환경운동 주체의 다각화를 낳았다. 민중뿐만 아니라 부자와 중소자본가, 소위 ‘사회 명망가’까지 두루 운동의 주체로 끌어들임으로써 환경운동 제도화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전략이었다. ‘노동자 민중’이 여러 주체들 가운데 하나의 지위로 격하됨에 따라 더 이상 환경운동은 ‘계급적 운동’이라고 말하기 어려워졌다.

 

 

“계급을 동일한 생산적 지위를 갖고 계급의식을 갖고 운동하는 집단으로 정의하는 한, 환경운동은 계급운동이 아니다. 환경운동의 주체는 계급의식과 관련 없이 자발적으로 집합행동에 참여하는 피해자, 시민 등이기 때문이다.”1)

 

그러한 한에서, 한국의 환경운동은 노동계급성을 부정(동시에 (소)부르주아 계급성을 확보)하였으므로 그 자체로서는 반자본주의 운동이 될 수도 없을 것이다.

 

“환경운동의 목표나 이념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명시적으로 제시한 담화는 1990년대에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환경운동은 반자본주의운동이 아니다.”2)

 

비교적 변혁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던 공해추방운동연합도 내외 정세의 변화와 소부르주아 사조의 침습 속에서 기존보다 후퇴한 강령을 가진 ‘환경운동연합’으로 재편된다. 이들은 “‘민중이 스스로 민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상황에서 민중운동은 성공할 수 없다’는 인식”3)을 공유한 가운데, 전국 8개 지역의 반공해운동조직을 통합하여 1993년 출범했다. ‘환경운동의 대중화’를 필두로 새로 태어난 환경운동연합의 창립선언문에는 더 이상 독점자본이나 경제적 불평등 문제가 언급되지 않는다. 또한 환경문제의 원인을 ‘자본주의’에서 찾지도 않게 되었다. 다만 “새로운 환경의식과 실천으로 스스로 자신의 삶터를 건강하게 가꾸어 나가는 시민운동을 펼쳐나가”고, “기업들이 환경을 지키는 데 앞장설 수 있도록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더욱 철저히 할 것”이며, “서구문명의 소산인 인간 이기주의의 틀을 깨고 … 자연과 더불어 모든 인류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선언한다.4)

정리하자면 현재까지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시민환경운동은 체제 변혁이라는 목표를 포기하고, 개량을 통한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시민환경운동 단체들의 주된 활동은 반(反)환경적 기업을 비판하고, 정부 정책에 대한 개입력을 높이는 데 집중되었다. 이들 환경운동단체는 제도권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함에 따라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제도적·정책적 틀을 마련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면서 수질오염, 대기오염 등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 생활오염 문제를 사회 문제로 대두시키는 한편, 쓰레기 줄이기와 재활용 등 대중들을 상대로 한 인식개선운동을 벌였다. 이 가운데 쓰레기 종량제, 재활용 등 일부 환경운동은 정부에 의해 정책화되기도 하였는데, 대체로 2000년대 초·중반까지의 일이다. 이후 환경운동단체의 정책 개입력은 도리어 약화되었는데, 이는 뒤에서 살펴볼 것이다.

“기업들이 환경을 지키는 데 앞장설 수 있도록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하겠다고 밝힌 환경운동연합은 현재까지도 그러한 강령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이를테면 환경운동연합은 지난 2021년 식품기업을 대상으로 ‘플라스틱 트레이 제거 캠페인’을 벌였다. 그 결과 농심, 동원 F&B, 오뚜기, 풀무원 등 7개 기업이 동참 의사를 밝혀 플라스틱 트레이 제거를 약속했다고 한다. 환경운동연합의 이러한 실천은 불필요한 플라스틱 쓰레기를 생산하는 일부 자본에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지만, 짓궂게 말해 ‘언 발에 오줌 누기’다. 환경오염을 야기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제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환경운동 단체의 이러한 ‘캠페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비판이 제기된다.

 

“오늘날 환경운동 단체들이 공식적·비공식적으로 전개하는 환경 문제에 관한 캠페인을 보자면, 환경 문제는 ‘경제 개발’이나 ‘공업화’에 수반하는 문제이고, 그것을 유발하는 개별기업의 개별적인 행위나 국가 및 기타 공공단체의 개별 프로젝트의 문제이며, 심지어 대중의 시민의식의 부족의 문제이다. 따라서 기업 및 공공단체 등의 개별적인 프로젝트에 구체적으로 대응하고, 대중이 그렇게 대응하도록, 그리고 또 대중 자신이 무분별한 소비나 쓰레기 배출·투척 등으로 공해를 유발하지 않도록 캠페인 하는 것이 환경 문제에 대한 적절한 대응, 적절한 운동으로 된다.

실제로 지금 환경운동은 그렇게 전개되고 있다. 그리하여 기업이 반환경적인 프로젝트를 세우지 않도록 사전에 효과적으로 계도하고, 그 기업의 정책 결정에 참여하기 위해서 환경운동의 최핵심 지도자가 재벌기업의 사외이사로 된다고 하는 일도, 그러한 타락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5)

 

한편 이 무렵 (소)부르주아 환경운동의 한 경향으로서 ‘생태주의운동’6)이 나타났다. 생태주의운동은 “환경 문제를 기술이나 제도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과 삶의 총체적 전환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새로운 형태의 운동”7)이다. 한국의 생태주의운동의 대표주자는 생활협동조합으로 유명한 ‘한살림’이다. 1986년 만들어진 한살림은 2019년 기준 약 70만 명의 조합원을 거느린 거대 생활협동조합으로 성장했다. 이들 생태주의운동의 견해는 ‘한살림 선언’(1989)8)에서 잘 드러난다. 한살림은 사회주의 체제가 “권력을 당과 국가의 관료에게 집중시킴으로써 관료의 무책임, 부패, 나태만을 조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 자연자원을 무분별하게 개발함으로써 자연을 황폐화하였다”(선언428)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사회주의 체제는 “기술적 산업주의”라는, 자본주의 체제와 동일한 문명적 기반 위에 서 있다고 규정하면서, “산업문명은 기술과 기계로써 인간과 자연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세계”라고 비판한다(선언428).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 환경을 개발의 대상으로 삼으며 파괴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또한 한살림은 “자본주의이건 사회주의이건 간에 오늘날의 경제이론은 직선적인 성장에 대한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며 “성장에 대한 강한 집념은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서로 유사하게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선언431). 생산을 어느 계급이 통제하는지, 그리고 생산이 계획적인지 여부를 떠나 ‘생산력 발달’ 자체가 환경오염(나아가 인간성의 파괴)을 불러왔다는 주장으로, 이는 근래에 대두된 탈성장론9)과도 접점이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 이른바 ‘생산력주의’의 입장에 섰으며, 자연에 대한 수탈과 인간에 대한 지배, 착취를 각자 다른 형태로 자행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한살림의 이러한 관점은 산업문명과 근대성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난다. 오죽하면 한살림은 “기계문명은 생명의 부정이며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며, 그것은 곧 전 인류의 죽임”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렇다면 생태주의운동이 제시한 대안적 세계관은 무엇인가? 생태주의운동은 근대 산업문명에 대한 성찰로부터 출발하여 서구의 생태주의철학, 동학사상, 노장철학, 불교사상 등을 그 주된 이념으로 한다. 한살림은 “생명은 단순히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남는 그 이상의 것으로 자기한계를 초극하여 진화함으로써 창조의 기쁨을 누리는 거룩함”이라며 “이 거룩한 생명이 바로 한울님”이라고 말한다. 이어 “한울님은 결코 초월자나 절대자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실현을 위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끊임없이 창조적으로 진화하는 생명 그 자체”라고 부연한다. 즉, 인간에 내재한 ‘한울님’을 만나기 위한 개인의 ‘각성’과 ‘수양’이 강조된다. 한살림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내부에 ‘우주생명’을 지니고 있지만 현대 기계문명에 의해 이러한 생명이 망각됨으로써 생명의 본성을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인간은 인류의 파멸과 생태계의 파괴라는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이에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소외된 본성을 회복하는 일”이며 이는 곧 “인간이 자신 안에서 우주생명과 합일됨을 깨닫는 일”이다. 이처럼 한살림의 생태주의운동은 영성주의적 세계관에 기초한다. 인간해방의 단초를 인간을 둘러싼 객관세계에 대한 의식적 변화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본유관념으로서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한울님’을 깨닫는 등 삶의 태도를 바꿀 것을 요구한다. 한살림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 이들의 운동은 새로운 인식, 가치, 양식을 지향하는 ‘생활문화 운동’이며 자아실현을 위한 ‘생활수양 운동’이다. 이러한 생태주의운동의 입장은 공동체 운동, 생활협동조합 운동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근대 산업사회의 이데올로기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개인이 각성하기 위해서는, 자아실현과 공동체의 복원을 준비할 수 있는 대안적 공간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소외된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자는 취지로 생태주의운동은 마을 공동체 만들기, 귀농, 생명문화 확산시키기 등 활동을 벌였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바로 ‘생활협동조합’이다. 한살림은 아이쿱과 함께 국내 협동조합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데, 한 살림은 중산층 고객을 대상으로 유기농 제품을 공급하는 사업에 치중한다는 비판을 듣고 있다.10) 이는 협동조합이 ‘대안 만들기’를 시도하면서도 자본주의 체제의 논리에 따라 운영될 수밖에 없는 모순으로부터 비롯되는 한계다. 즉, 공동체의 복원,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거창한 목표가, 협동조합이 ‘시장의 선택’을 받기 위해 이윤을 유일한 목표로 하는 다른 자본들과 경쟁함으로써 훼손된다는 것이다. 자본 간의 피 튀기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협동조합은 하나의 자본으로서 행위할 것을 강요받는다. 자본에 포위된 이상 시장경쟁력을 갖추고 이윤을 창출하는 것 외에 협동조합이 고를 수 있는 다른 선택지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협동조합 운동이 말하는 “공동체와 사회적인 유대는 자본주의적 이윤논리를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 채,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맷돌이 끊임없이 토해내는 잉여인간들과 패배자들이 겪게 되는 고통과 그로부터 생겨나는 불만과 저항이 자본의 순환을 방해하는 것을 방어할 완충지대를 만드는 것에 이용된다.”11) (이러한 비판은 비단 협동조합운동에 국한되지 않으며, 소위 ‘시민운동’ 전체에 적용될 수 있다.)

 

 

(4) 주류 환경운동의 위기 (00년대 중반-현재)

 

2000년대 이후에도 (소)부르주아 사조는 환경운동의 주류적 지위를 점하고 있다. (소)부르주아 환경운동은 제도화의 터를 닦는 시기인 90년대를 지나, 00년대에 들어 그 제도화가 한층 확고해졌으며 적지 않은 개량적 성과를 축적했다. 그러는 사이 “지금의 환경위기를 부른 한 원인이 정부와 너무 쉽게 협상하고 타협해 온 환경단체에도 있다는 자성”1)에서부터, 환경운동이 정부나 지자체와의 협상에 치중하면서 현장성과 대중성을 잃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체제내화의 과정에서 정부 및 자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환경운동의 독립성이 훼손됐다는 지적도 나온다.2) 여기엔 ‘환경운동단체는 대안 없는 반대만 한다’는 식의, 보수언론을 위시한 반환경적 보도 등 전반적인 언론지형이 환경운동에 불리하게 작용한 측면도 배제할 수 없다.

위와 같은 사정을 종합하면 00년대 이후 환경운동이 처한 위기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제도권 진출을 통한 환경문제 해결’이라는 환경운동의 전략이 실효성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 현재 환경운동의 주류는 90년대 시민운동의 영향을 받은 (소)부르주아적 시민환경운동이다. 6월 항쟁의 결실로서 쟁취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제도는 형식적으로나마 모든 대중들에게 개방적인 정치 환경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주류 환경운동 세력은 이러한 변화를 적극 활용하고자 하였다. 정부는 주류 환경운동의 ‘체제내화’ 신호를 긍정적으로 보았다. 노태우 정권을 시작으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기까지, 정부는 국가기구의 의사결정과정에 환경운동단체를 적극 참여시켰다.3) 이로써 정부는 사업 추진 과정에서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환경운동단체는 자신들의 목표 달성과 함께 제도권에서의 발언권 취득, 영향력 확대 등을 도모할 수 있었으므로 국가기구에 대한 참여를 마다하지 않았다.

문제는 주류 환경운동 진영의 이러한 제도권 진출 전략은 환경오염에 대한 대응으로서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부적절했다는 점이다. 환경파괴의 핵심 원인은 자본주의 체제, 다시 말해 이윤을 위해 한 사회에 필요한 양 이상으로 상품을 과도하게 생산하는 체제에 있다. 그러나 주류 환경운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마련된 제도를 잘 활용한다면 환경오염을 막을 수 있다고 오인하였다. 하지만 그 결과에서 보듯 개량의 성과에 비해 환경파괴는 더욱 급속히 이뤄졌다.

주류 환경운동은 군사파쇼 체제의 종식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정착이라는 정치적 조건의 변화 속에서 ‘투쟁’이 아닌 ‘협상’을 택했다. 협상 전략은 지배계급 가운데 ‘온건한’ 정치세력이 정권을 잡았을 때는 비교적 유익하고 간편한 수단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위기가 가중되면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보장한 권리들이 독점자본의 이윤 창출에 방해 요인이 되고, 독점자본은 협상과 대화보다 폭력과 배제의 정치를 선호하게 된다. 그 결과 탄생한 정권들이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 정권이다. 이처럼 정부(자본)가 자신들의 위기를 돌파하고자 한층 반동적인 정치를 자행하는 정세는 ‘양보’를 얻어낼 수 있는 영역을 협소화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류 환경운동은 여전히 제도권에 머무르고 있다. 만에 하나 문재인 정권과 같은, 어디까지나 ‘국민의힘에 비하여’ 절차적 정당성과 협상을 중시하는 정권이 나타난다고 하면 상황은 달라질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가 만성화된 상황에서 지배계급 정치는 주류 환경운동에게 여지를 줄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노무현 정권은 이른바 ‘참여민주주의’라고 하여 정책결정과정에서 시민참여를 강조한 정부였지만 자본을 위한 개발 사업을 계속 추진했다. 지난 2004년에는 수도권 규제 완화, 새만금 간척사업, 천성산 터널 건설 등 개발정책을 추진하다 환경시민사회단체와 큰 마찰을 빚었다. 특히 새만금 사업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새만금 문제는 친환경 조건을 충족시키면서 경제적 효과도 달성하는 방향으로 추진할 것”이라며 환경운동계의 사업 중단 요구를 거부했다.4) 이에 110개 시민단체는 노무현 정부의 반환경정책을 규탄하는 ‘환경 비상시국 선언’을 발표하고 민간환경단체정책협의회에서 탈퇴하는 등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으나 끝내 사업 철회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자본가 정치세력 중에서도 반공적·반노동적 성향이 짙은 이명박·박근혜·윤석열 정권을 상대로 한 환경운동단체의 대응은 더욱 힘겨웠다. 이들 정권은 경기활성화를 명목으로 기업 규제 완화, 그린벨트 해제, 대규모 국책개발사업 등을 추진하는 한편, 정부 정책에 걸림돌이 되는 환경운동단체를 의사결정과정에서 배제시키는 것은 물론 폭력적으로 탄압했다. 새만금 사업, 4대강 사업(초기엔 한반도 대운하 사업), 제주해군기지 사업, 현재 추진 중인 제주 제2공항 사업 등에서 이러한 흐름이 꾸준히 관측되고 있다. 특히 4대강 사업은 주류 환경운동단체가 총력을 기울여 저지하고자 했지만 사업 철회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제주해군기지 저지 투쟁 또한 구럼비 바위 발파 등 자연환경 훼손 등을 중심으로 사업의 문제점을 공론화하는 데 주력했음에도 결국 막지 못했으며, 투쟁 과정에서 많은 활동가들이 국가권력의 희생자가 되었다. 현재진행형인 제주 제2공항 반대운동의 경우 정부의 일방적 사업 강행을 저지하고자 나섰으나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들 사업은 하나같이 자본의 이익과 연결되어 있다. 경기침체가 일상화된 자본주의 체제에서 정부는, 경기 회복을 위해 유효수요를 창출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때 추진되는 것이 사회간접자본 확충 등 대규모 토건사업이다. 환경운동의 전성기인 90년대에는 정부의 정책 전환을 견인(이를테면 동감댐 건설 백지화 등)하던 성과를 거둔 것을 떠올리면, 자본의 달라진 전략 앞에서 주류 환경운동은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둘째, 체제내화된 환경운동은 당면한 기후위기를 해소할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서두에서 살핀 바와 같이 기후위기는 이미 인류에게 가시적인 피해를 주고 있다.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촌각을 다투는 문제다. 그런데 주류 환경운동의 기후위기 대응은 사안의 심각성에 비해 다소 맥빠지게 대응할 뿐만 아니라, 기후위기의 핵심 원인인 자본주의를 제대로 지적하지 못하고 있다. 그 대응이라는 것들은 워낙 다종다양하고 생겨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탓에, 지면의 한계 상 전부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 중 몇 가지를 꼽자면 다음과 같다. ‘기후위기의 원인은 탄소배출에 있으므로, 탄소배출의 주범인 화석연료를 추방하고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이룩한다면 기후위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자본주의의 유지와 ‘지속가능한 발전’이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경우가 있고, 조금 더 급진적(?)으로는 ‘탈성장’을 통해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들이다. 아래에서 이들 주장을 자세히 살펴보자.

 

 

가) 에너지 전환론

 

태양열, 풍력, 수력, 지열, 바이오 등 재생에너지는 기후위기론이 대두하기 전부터 화석연료 중심의 생산체제를 변화시킬 수 있는 대안으로 소개되어 왔다. 화석연료의 과도한 사용이 대기오염과 지구온난화를 야기하였으므로 이를 대신하여 재생에너지로 에너지 전환을 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왜 하필 화석연료가 자본주의적 생산의 필수요소가 되었는지’를 해명해주지 못한다. 자본주의와 화석연료는 역사를 같이하며, 자본주의를 폐지하지 않고서는 (화석연료가 고갈되기 전까지) 멈출 수 없는 흐름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을 바탕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산업혁명은 특히 석탄을 연료로 삼는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상징된다. 그러나 증기기관이 곧바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핵심요소가 된 것은 아니었다. 1784년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한 이후에도 꽤 오랜 시간 동안 공장의 주된 동력은 수력이었다. 그러나 수력은 점차 자본주의적 생산의 걸림돌이 되기 시작했다. 영국의 사례를 들면, 수력은 수자원이 있는 곳에서나 이용할 수 있었다. 수자원은 대체로 도시와 멀리 떨어진 농촌에 위치했다. 이를 개발하는 데 비용이 들었음은 물론이겠거니와, 노동자들을 수력발전이 가능한 곳으로 이주시켜야 했으므로 정착촌 건설에 따른 추가적인 비용이 발생했다. 더욱이 수력은 물이 부족해지면 생산 속도가 떨어진다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이를 만회하고자 했지만, 1800년대 초반 ‘공장법’ 제정으로 노동시간의 상한선이 규정되면서 이러한 방법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다.

이때 자본가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 증기기관이었다. 증기기관은 증기열을 발생시킬 석탄만 있다면 어디에서든 운용할 수 있었고, 생산 속도도 수력보다 빨랐으므로 이점이 분명했다. 자본주의적 경쟁은 증기기관의 확산을 더욱 부추겼다. 어느 자본이 증기기관을 도입하여 시간당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게 되자, 다른 자본들도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경쟁적으로 증기기관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증기기관은 영국을 시작으로 많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생산의 필수적 요소가 되었다. 그러던 중 벌어진 양차 세계대전은 석탄과 더불어 석유를 원료로 한 생산 방식을 도입하게 하였다. 1900년대 이전까지 석유는 주로 조명용 등유나 윤활유로 쓰였는데, 1880년 내연기관의 발명과 1903년 비행기의 발명은 자본을 위한 새로운 시장을 창출했다. 더구나 석유의 도입은 다분히 계급적 의도에서 이뤄진 전환이었다. 다음의 인용을 보자.

 

1912년 영국이 군함에 석탄이 아니라 석유를 사용하기로 결정하면서 사태는 전환을 맞았다. 이 결정에는 계급적 이해관계가 주된 구실을 했다. 군함 연료로 사용되던 고품질 무연탄은 웨일스 지역 탄광에서만 생산됐다. 1910년에 윈스턴 처칠은 이 지역 광원 파업을 진압하는 데 군대를 동원했다. 처칠은 1911년에 군 통수권을 장악하자마자 군함 연료를 석유로 대체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처칠은 이로써 “광원들의 정치적 요구에서 정부를 해방시켰다”고 했다.5)

“20세기 초 제국주의 군대는 휘발유를 소비하는 주된 집단이었다.”(앞의 글). 그러던 휘발유가 대중화된 것은, 전쟁 중 급속히 확충된 정유시설과 과잉생산된 석유를 소비하기 위해 석유 자본과 자동차 자본 등이 공모한 결과였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자동차 대량 생산이 시작됐다. 1929년이 되자 자동차 제조업은 미국 최대 산업이 됐다. 더불어 화학 부문에서는 석유 정제 과정의 부산물을 이용해, 혹은 석유에서만 얻을 수 있는 고급 에너지 수요에 맞춰 새로운 제품을 개발했다. 1930년대에는 나일론 같은 합성 섬유가 발명됐고 플라스틱과 산업용 화학물질이 최초로 대량 생산됐다.”(앞의 글).

 

여러 신재생에너지가 개발된 현재까지도 화석연료는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그 핵심적인 지위를 넘겨준 적이 없다. ‘에너지 전환’을 위해서는 화석연료를 동력원으로 삼는 공장과 운송수단 등을 모두 바꿔야 하는데 이러한 대전환은 사상 유례가 없다. 수십 년간 축적한 불변자본을 일순간에 다른 형태로 청산하는 일은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 것으로 예상되는 까닭에 어떤 자본도 섣불리 이를 실행하려 하지 않고 있다.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한 체제에서 안정적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자본들이 굳이 그러한 모험을 감행할 동인이 없다. “전 지구적 관점에서 보면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이 합리적일지라도, 개별 자본가들의 관점에서는 완전히 비합리적인 일이다.”(앞의 글).

만에 하나 자본주의를 유지한 채로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이 성공적으로 이뤄졌다고 가정해도 기후위기는 여전히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것이다. 왜냐하면, 재생에너지를 바탕으로 한 생산이 제아무리 친환경적이라고 해도, 자본은 이 ‘친환경 에너지원’을 바탕으로 또다시 모든 인류가 다 사용하지도 못할 상품을 마구 찍어내며 낭비적 소비를 부추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을 ‘제본스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영국의 신고전파 경제학자 윌리엄 스탠리 제본스(1835-1882)는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한다고 해서 그 자원의 수요가 감소하지 않으며, 오히려 증가한다고 주장했다. 실례(實例)를 들자면 미국에서는 생산력 발달에 따라 에너지 효율이 증가한 자동차가 1970년대부터 판매되기 시작했지만 연료 수요는 줄어들지 않았고 자동차의 수는 두 배로 늘었다. 다만 제본스의 이러한 연구는 그 자체만으로 생태주의적으로 해석되지는 않는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영국 산업의 발전에 치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제본스는 환경파괴가 경제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보았으며, 그에게 있어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인간이 일방적으로 자연을 소비하는 데 있을 뿐이다. 비록 제본스에게 환경파괴 문제는 관심 밖의 일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주장은 자본주의적 생산은 필연적으로 환경파괴로 이어진다는 통찰을 제공했다.

단적으로 말해 재생에너지로의 전환, 즉 ‘화석연료의 철폐’는 자본주의 자체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자본가계급은 자의든 타의든 막대한 비용을 들이면서까지 화석연료를 포기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화석연료의 포기는 자본가계급에게 손해를 안기기 때문이다. 설령 기적적으로 에너지 전환이 이뤄진다고 해도 자본주의적 생산은 재생에너지마저 환경에 파괴적인 형태로 사용할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본성이 ‘무정부적 과잉생산’과 ‘자본 증식(잉여가치 착취)’에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국가들이 1992년 리우에서 결의한 바를 불과 10여년 만에 파기한 행위도 그러한 본질로부터 비롯된다. 자본주의 체제가 마련한 기후위기에 대한 앞선 모든 대응들은, 생태 문제를 ‘시장경제’ 아래에 종속시켰다. “어젠다21(지속가능한 개발을 실현하기 위한 국제적 지침. 1992년 리우회의에서 채택되었다─인용자)에서 기업에 대한 언급은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해 기업의 역할을 증대시켜야 한다는 한마디뿐이다. 지구를 오염시키는 데 기업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6)

 

 

나) 지속가능한 발전론

 

이어서 살펴볼 것은 ‘지속가능한 발전’이다. 지속가능한 발전론은 1992년 리우 회의를 통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은 1987년 세계환경개발위원회(WCED) 보고서를 통해 제시되었는데, “미래 세대가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능력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발전”으로 정의되었다. 전 세계는 물론 한국의 주류 환경운동 진영은 이러한 자본가 국가를 향해 ‘지속가능한 발전을 실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속가능한 발전의 실상은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와 안정을 위해 개별 자본이 취해야 할 태도를 언급한 데 불과하며, 인류는 자본이 그린 원대한 이상(?)인 리우 선언 발표 30주년을 넘긴 현재, 전 지구적 기후위기·기후재앙에 직면한 상황이다.

“미래 세대가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능력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발전”이 자본주의에서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이 가능하다면 오직 자연에 ‘투자’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다시 말해 부의 원천인 자연을 마구잡이식으로 파괴할 게 아니라, ‘황금알을 낳는 오리’로 소중히 대하자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개념이 ‘자연 자본(Natural Capital)’이다. 자연 자본은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자원과 생태계로부터 얻는 경제적, 환경적, 사회적 이익을 모두 뜻한다.”7) 즉, 자연에 가격표를 붙이자는 것인데, 이는 심지어 “완고한 환경보호활동가들과 실리를 추구하는 사업자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한다.(앞의 글). 만일 자본가들이 환경을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면, 그들이 이윤을 위해 자연을 보호하려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자본주의적 환경보호론’인 셈이다. 이러한 자본의 자연관은 미국에서 ‘총량거래제’로 구현되었다. 총량거래제는 온실가스 배출의 총량을 정하고, 정부가 온실가스 배출 허가증(탄소배출권)을 기업에 판매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는 환경오염을 막는 데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많은 허가증을 가진 기업들”이 “허가장이 더 필요한 다른 회사들에게 그것을 팔 수 있”었기 때문이다.8) 다시 말해 총량거래제는 탄소 배출을 줄이는 데 기여한 것이 아니라, “기업이 다른 곳(대개 제3세계)에서의 오염을 줄이는 데 도움을 주고 은총을 살 수만 있다면, 그 기업이 계속 오염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앞의 책). 일종의 ‘면죄부’ 제도인 총량거래제는 한국에서도 ‘배출권거래제’라는 이름으로 지난 2015년부터 시행되고 있지만,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조차 “2015년 배출권거래제가 도입된 이후 제조업의 비용 부담은 줄어든 반면 온실가스 감축 성과는 제한적이었다고 분석”9)할 만큼 실효성이 없는 제도로 여겨지고 있다.

 

주류 환경운동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환경운동연합은 지난 2006년 노무현 정권이 발표한 ‘국가 지속가능발전 전략 및 이행계획’을 두고 “중요한 것은 계획이나 구호가 아니라 실행”이라며 “그럴싸한 종합대책이 수립되지만 사실 정책의지가 없기 때문에 이행과정을 관리, 평가, 촉진할 조직과 예산, 법제 등 제도적 기반이 뒷받침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미흡하지만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 수준을 반영한 지속가능발전 이행계획이 ‘보고서 작업’을 뛰어 넘어 정책과 사회를 지속가능하게 변화시키는 실질적인 출발점이 되길 기대한다”며 “환경운동연합은 국가 지속가능발전 전략이 제대로 이행되고 발전적으로 진화하도록 감시하고 참여하는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10) 다시 말해 정부가 지속가능한 발전 계획을 수립한 것 자체는 긍정적이나 이를 실행할 의지가 없는 것이 문제이며, 이러한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환경운동연합은 “국가 지속가능발전 전략”이 제대로 이행되는지 여부를 감시하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것이다. 환경운동연합의 이러한 입장은 근래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015년 논평을 보자(강조는 인용자).

 

환경운동연합도 제46회 세계 환경의 날을 맞아, 지구 차원의 주제를 공감하고 해결을 위해 노력에 함께 할 것을 다짐한다. 세계적인 경제 침체와 극단주의의 발호 속에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정부와 기업들을 이해하고, 합리적인 문제제기와 대안적인 협력을 하고자 한다. 지구의 수용력과 자원의 효율적 이용, 시민의 건강한 소비 등의 주제에 더 연구하고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들이 국제사회가 논의 중인 포스트-2015 발전 계획(9월)과 신기후체제 출범(12월) 등에 연결되도록 하는 것이 지금 NGO의 역할임을 인식한다. … 11)

 

나아가 환경운동연합은 기업이 “사회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인정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음으로 한국 기업들의 사회적 책임과 환경인식의 개선을 촉구한다. 최근 기업들은 ‘온실가스배출권거래제’, ‘저탄소차협력금제도’를 무력화 시켰고,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률과 유해화학물질관리법’, ‘화학물질관리법’ 등의 시행을 어렵게 하고 있다. 가정용에 비해 턱없이 낮은 산업용 전기요금을 당연시 하고, 수도권 과밀화에 따른 혼란과 비효율이 걱정되는 중에도 개발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입지 규제 완화를 주장하고 있다. 사회의 중요한 부분인 기업들이 사회의 존중을 받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희망을 주는 것은 사회적 기업, 공유 경제 등에 대한 실험들이 확산되고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들을 주의 깊게 보고 응원하고자 한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정부와 자본에 ‘협력’하겠다는 환경운동연합의 방침은,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면 그가 기업인이든 중산층이든 할 것 없이 이 운동의 중요한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경실련과 같은 (소)부르주아 시민운동의 관점에 입각해 있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스스로를 ‘NGO’, 즉 비정부기구로 정체화하면서, 소위 ‘사회적 기업’12), ‘공유경제’ 실험이 널리 확산되며 성공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물론 사회적 기업이니 공유경제니 하는 ‘대안’들은 풍전등화의 자본주의가 그 생명을 연장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절대다수 인류의 생존, ‘지속가능한 삶’과는 관련이 없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다름 아닌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와 존속을 위한 이데올로기이다. 정부가 지난 2016년 발표한 ‘제3차 지속가능발전 기본계획(2016-2035)’은 “환경·사회·경제의 조화로운 발전”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바탕으로 다양한 이행과제들을 제시하는데, 그 내용은 몇몇 복지정책과 일자리 창출, 재활용 활성화, 미래산업 육성기반 조성, 환경경영 확산 등의 내용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정부의 지속가능발전 계획은 소위 ‘신성장 동력’ 발굴을 통해 자본주의가 야기한 기후위기를 극복해보겠다는 터무니없는 발버둥이다. 그럼에도 주류 환경운동 진영이 지속가능한 발전과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긍정하는 것은, 스스로 자본을 감시·비판하는 역할에 안주하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며, 또한 이들 주류 환경운동의 (소)부르주아적 성격이, 자본주의 체제와 지구 환경의 위기가 심화된 현재에도 거의 달라지지 않았음을 실증해주는 것이다.

 

 

다) 탈성장론

 

근래에는, 걷잡을 수 없는 재앙으로 다가오고 있는 기후위기의 책임을 자본주의에 묻지 않을 수 없게 된 정세를 반영하듯,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환경이론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일부 환경운동 진영에서 각광받는 ‘탈성장론’이다. 탈성장론이 기존 (소)부르주아적 환경 이데올로기와 차별화되는 부분은 기후위기의 원인이 자본주의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탈성장이라는 개념은 프랑스의 정치생태학자 앙드레 고르가 창안하였다. 그는 “지구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물질 생산에 있어서 무성장, 나아가 탈성장이 필요조건”13)이라고 주장한다. 탈성장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에 대해 탈성장론자들은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성장 이데올로기’에서 탈피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경제성장에 대한 우리의 집착, 중독 증세로 인해 자본주의가 성장을 멈추지 못하고 환경오염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탈성장론자들은 자본주의에서 성장이라는 목표를 제거한 뒤에는 사회를 커먼즈(commons)라는 소규모 협동조합 중심으로 재편하고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산업들을 대거 축소, 폐지할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탈성장의 요지는 ‘경제성장 없는 자본주의’라고 요약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해 탈성장론의 주장은 실현될 수 없다. 가장 큰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성장이라는 목표를 제거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존립 근거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성장이란 ‘자본의 증식’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사회적 생산은 동시에 재생산의 과정인데, 자본주의 사회의 재생산은 다른 사회구성체와 달리 ‘확대재생산’이라는 특성이 있다. 확대재생산은 생산과정에서 소비되는 생활수단과 생활자료를 보충하는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되고, 더 많은 생산수단과 생활자료를 생산함으로써 이후 생산에 투입해야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의 이러한 확대재생산은, 자본가가 잉여가치 일부를 자기 생활을 위해 개인적으로 소비하고, 나머지 잉여가치를 모두 불변자본에 투하하여 자본의 규모를 확대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즉, 잉여가치를 자본으로 전화시키는 절차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 내내 반복되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 하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생산은 ‘상품생산’이다. 상품생산의 특성은 그것이 이윤을 목적으로 행해진다는 점이다. 자본가에게 막대한 이윤을 불러오는 상품은, 설령 그것이 사회의 절박한 필요와 무관하다 할지라도 과잉 생산된다.14) 반대로 이윤이 적거나 심지어 팔면 팔수록 손해인 상품은 사회적으로 필요하다고 해도 거의 생산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야기한 기후위기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상품의 (상대적) 과잉생산이라는 필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나아가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전유의 자본주의적 형태라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본모순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극복 불가능한 것이다.

탈성장론자들은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가운데, 오직 ‘성장지상주의’로부터 벗어나면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 자본주의가 환경을 파괴하는 이유는 ‘성장지상주의’에 있다. 이는 존재와 의식의 관계에서 의식이 1차적이라고 보는 관념론적 견해다. “인간은 그들 생활의 사회적 생산에서 그들의 물적 생산제력의 일정한 발전수준에 조응하는 일정한, 필연적인, 그들의 의사와는 무관한 제관계, 생산관계를 맺는다. 이 생산 제관계 전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현실적 토대를 이루며, 이 위에 법적이고 정치적인 상부구조가 세워지고 일정한 사회적 의식형태들이 그 토대에 조응한다.”(강조는 인용자)15). 이것이 바로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명제다. ‘성장지상주의’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이다. ‘가치’ 중심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사용가치’ 중심의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로 바꿀 때, 자본 증식을 목적하는 성장지상주의 또한 (서서히, 혹은 급격히) 사라지며 기후위기의 근본적 원인 또한 제거된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유지한 채로 성장지상주의만을 제거하겠다는 탈성장론의 입장은, 기후위기의 원인을 자본주의라고 지목하였음에도 공상적일 수밖에 없다. (이밖에 탈성장론과 관련해서는 졸고(拙稿) <탈성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http://lodong.org/wp/archives/18045)를 참고하라)

 

 

(5) 급진적 환경운동의 등장 (10년대 후반~현재)

 

(소)부르주아 환경운동이 제도권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진보적 성격을 급격히 상실함에 따라 당면한 기후위기 앞에 더욱 급진적인 대안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한 흐름을 반영하며 지난 2010년대부터 등장한 것이 흔히 ‘기후정의운동’으로 표현되는 ‘급진적 환경운동’16)이다. ‘기후위기 비상행동’(2019), ‘체제전환을 위한 기후정의동맹’(2022) 등이 대표적이다.

기후위기 비상행동이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이들은 2019년 9월 21일 전국에서 진행된 대규모 기후대중행동에서 시작하여 지속적인 기후운동을 위해 청소년, 환경, 인권, 노동, 농민, 종교, 여성, 동물권 등 각계각층으로 구성된 연대기구로 결성됐다. 이들은 921 기후위기 비상행동 선언문에서 “정부와 기업, 국회와 언론은 이미 알고 있는 해답을 외면한다. 경제성장률이 조금만 내려가도 호들갑스럽던 그들은, 한 번도 꺾인 적 없는 이산화탄소에는 너무나 태연하다”고 비판하며 “끊임없는 경제성장, 욕망의 무한 충족은 불가능하다”고 못 박는다. 이어 그들은 “지금 필요한 것은 기후정의”라며 “온실가스를 뿜어대는 기업, 이를 방관하고 편드는 정부, 눈앞의 이익에 매몰된 정치권, 진실에 무관심한 언론”이 마땅한 책임을 져야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선언을 바탕으로 기후위기 비상행동은 ▶정부의 기후위기 비상선언 발표 ▶온실가스 배출제로 계획 수립 등 기후정의에 입각한 대응책 마련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독립기구 구성 등 요구안을 지난 2019년 발표했다. 기후위기 비상행동은 “기후위기 자체가 현대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이윤동기가 더욱 많은 화석연료 소비를 유도하여 초래된 대표적 결과”라며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위기의 심화를 가져온 국가와 산업이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17)

한편 체제전환을 위한 기후정의동맹(이하 기후정의동맹)은 지난 2021년 문재인 정권의 대통령직속 2050 탄소중립위원회 해체를 요구하는 공동대책위원회를 해체한 뒤 새로 탄생한 연대체이다. 공대위는 탄소중립위원회가 ‘자본의 이윤축적을 위한 성장 전략을 만드는 조직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가하며 기후위기에 역행하는 탄소중립위원회 해체운동을 벌였다. 3개월간의 활동 끝에 공대위는 “자본주의 성장체제에 맞서는 거대한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며, “이를 위한 강력한 사회적 연대와 권력을 조직하자”고 밝히며 기후정의동맹으로의 재출범을 선언했다. 기후정의동맹은 제안 배경을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기후위기는 생태위기, 불평등 위기, 사회 재생산의 위기, 민주주의 위기와 같은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위기의 한 측면입니다. 기후정의동맹은 기후위기를 환경의제가 아닌 자본주의 성장체제의 문제로 보고, 이에 맞선 광범위한 사회운동의 연대를 건설하고자 합니다.”18)

 

기후정의동맹은 또한 “자본과 권력이 유포하는 ‘기후위기론’과 그 해결책으로서 ‘녹색성장/시장’에 맞서는 구체적인 싸움의 현장을 열어내고 조직해나가고자 한다.”며 “자본주의 성장체제에 맞선 긴 싸움의 과정에서 ‘기후정의’를 우리의 무기로 함께 만들어갈 세력화를 시작”한다고 말한다. 이어 기후정의동맹은 자본과 정권이 유포하는 ‘기후위기론’이 자본주의를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함을 분명히 한다. 그러면서 예시로 든 것이 ‘녹색 소비자 되기’, 기후위기의 ‘탈정치화’인데, 이는 자본과 권력에 의해 기후위기의 본질을 은폐하는 수사라는 것이다.

기후정의동맹이 제안하는 대안은 ‘공공적·민주적·생태적 에너지 체제 전환’이다. 이른바 ‘정의로운 에너지 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기후정의 투쟁을 벌이자는 것이다. 기후정의동맹이 에너지 전환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한 까닭은, 그간의 에너지 전환 운동이 “시장과 기술을 활용해서 어떻게든 화석연료를 줄이고 재생에너지를 줄이자는 주장(탄소환원주의)”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난 수십 년간의 에너지 전환은 “에너지를 상품으로 보고, 에너지를 통해 기업이 이윤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윤 체제’만 강화”시켰다는 비판이다.19) 그에 따라 기후정의동맹은 ‘이윤을 위한 에너지 체제’와 대결할 것을 선언하며 ‘정의로운 에너지 체제’를 수립하자고 제안한다. 정의로운 에너지 체제는 공공·민주·생태라는 세 가지 원칙을 근거로 한다. 에너지 전환은 자본이 아닌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하고, 그 과정은 민주적이어야 하며, 에너지 수요 감축 등 지구의 생태적 한계를 감안한 조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 급진적 환경운동의 의의

 

급진적 환경운동의 의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기후위기의 책임이 ‘모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정부 등 지배계급에게 있다고 규정한다. 90년대부터 주류 환경운동이 (소)부르주아 운동으로 후퇴함에 따라 이들의 운동은 기업·정부에 대한 비판과 견제와 아울러 과소비 자제, 재활용운동 등 대중의 인식개선운동이 되었다. 이는 환경문제가 ‘모두의 노력’을 통해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인식을 널리 퍼뜨렸고, 환경파괴의 계급성을 지우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다. 심지어 주류 환경운동에서 ‘자본주의’라는 단어는 일종의 금기처럼 취급되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반면 급진적 환경운동은 기후위기에 대한 기업과 정부의 책임을 추궁하면서 그것이 1차적이라고 주장한다. 자본의 욕망에 의한 환경오염, 이를 지지·조장해 온 정부, 성장 이데올로기를 퍼뜨린 언론에게까지 책임의 범위를 확장한다. 이처럼 급진적 환경운동은 “기후위기는 체제의 문제라는 인식”(비상행동)을 함께 하면서 “자본이 독점한 생산에 대한 권리와 통제를 노동자가 손에 쥐어야 한다.”(기후정의동맹)는 등 맹아적 형태의 변혁성을 담지하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둘째, 자본 및 정권과의 ‘협력’ 관계를 거부하고, 기후운동의 주체를 피억압민중으로 설정한다. 90년대부터 주류화된 환경운동이 제도권에서의 협상(의회주의), 자본·정권과의 비판적 협력관계 설정 등 이른바 ‘환경실용주의적’ 입장에 섰던 것과 달리, 급진적 환경운동은 자본과 정권을 기후위기의 책임자로 간주하는 만큼 이들과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급진적 환경운동의 두 단체는 정부 주도의 탄소중립위원회에 반대하고,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의 폐기를 촉구하는 등 정부의 기후위기 대응을 강력히 비판한다.

또한 급진적 환경운동은 ‘기후 불평등’ 문제에도 주의를 기울이는데, 여기에 자본과 정부의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기후위기 비상행동은 지난해 여름 중부지방 폭우와 관련하여 성명을 내고 “기후정의 진영은 줄곧 기후위기가 우리 사회의 가난하고 약한 이들의 존립부터 위협할 것이라고 경고해왔다”며 정치인, 관료, 자본가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방치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기후위기에 대응하겠다는 위선, 친환경 경영을 하겠다는 기만”들이 “녹색분칠”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20) 자본주의가 불러온 경제적 불평등이, 마찬가지로 자본주의가 불러온 기후위기로 인해 기후불평등으로까지 확장됐다는 지적이다.

자본과 정부가 기후위기를 야기하는 한편, 그로 인한 피해에 손을 놓고 있다는 사실은 이들 지배계급을 더 이상 환경운동의 주체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이어진다. 급진적 환경운동에 따르면 기후위기의 주체는 “노동자와 기후위기 최일선 당사자들”21)이고, 또한 그 주체는 “기업이 아니라 동지”22)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급진적 환경운동은 90년대 시민환경운동과 같이 탈계급적 연대연합이 아닌, 기후위기의 가장 큰 피해를 입는 피억압민중을 중심으로 한 운동이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주류 환경운동이 민중주체성을 버리고 제도권 진입, 자본 및 정부와의 협력으로 대표되는 ‘주류화’ 전략을 취하면서 끝내 체제내화로 귀결된 역사를 감안하면 이들 급진적 환경운동의 주체 설정은 주목할 만하다.

셋째, ‘이윤 중심 생산체제’의 극복을 주장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자본가계급의 이윤을 위해 이루어지며 이는 극심한 환경파괴로 이어져왔다. 급진적 환경운동은 자본주의가 “이윤을 위해 신공항과 석탄발전소 건설을 비롯해 세상을 망치는 사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23), “기후·생태위기는 바로 ‘이윤을 위한 에너지 체제’가 만들어낸 파괴적 결과”24)라고 말하는 등 기후위기의 원인을 자본주의 자체에서 찾고 있다. 주류 환경운동은 환경 문제의 원인을 무정부적인 개발, ‘과학기술 지상주의’25) 등에서 찾으며 “환경문제는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에서도 똑같이 발생한다.”26)는 식의 양비론을 취했다. 자본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문제제기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이와 비교하면 급진적 환경운동이 제기하는 ‘이윤 중심 생산체제의 극복’은 ‘산업화가 원인’이라는 식의 두루뭉술한 규정보다 구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윤 중심의 생산은 명백히 자본주의를 겨냥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 급진적 환경운동의 한계

 

이처럼 급진적 환경운동은 주류 환경운동보다 반(反)자본주의적 지향을 강화하면서 이윤을 위한 생산이 기후위기의 원인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광범위한 대중운동으로의 확장을 도모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운동이 갖는 한계 또한 분명하다. 우선, 주류 환경운동에 비하면 제법 급진적인 형태로 변화하였지만 그러한 인식이 자본주의에 대한 과학적 인식에 닿지 못하고 있으며, 특히 자본과 국가권력의 관계에 관한 문제를 예리하게 세우지 못하고 있다. 가령, 이들은 자본의 욕망으로 인해 기후위기가 초래되었음을 인정하지만, 정부에 대해서는 마치 그들이 자본과 기후위기 당사자 사이의 ‘중재자’ 내지는 ‘중립적인 존재’라는 인식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기후위기 비상행동은 윤석열 정권의 에너지 정책이 기후위기에 역행한다고 비판하며, “기후위기는 … 모두의 안위를 위협하는 일로 정부가 주도적으로 적극적 대응 계획을 세워야 함에도 산업과 기술 육성에만 치중하고 있”다고 부연한다.27) 즉, 정부는 기후위기와 같은 “모두의 안위를 위협하는 일”에 대해서 적극적인 대응을 할 책임이 있는데도 산업과 기술육성에 매몰되었다는 것이다.

 

맑스주의 국가론에 따르면, 국가란 지배계급의 지배를 유지하고 실현시키기 위한, 지배계급의 폭력기구이다. 국가권력은 한 사회의 생산수단을 장악한 계급의 수중에 있다. 왜냐하면 국가란 다른 모든 상부구조와 마찬가지로 그 경제적 토대로부터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위에 성립된 국가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자본주의를 온존시키고자 하는데, 이를 훼방하는 계급에 대해서는 공권력을 동원해 그들의 저항을 분쇄한다.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국가는 중립적이지 않다. 그렇기에 자본주의 국가는 “모두의 안위”에 관심이 없으며 “(자본주의적) 산업과 기술육성에만 치중”한다. 자본이 지구의 환경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노동자의 목숨까지 희생시켜가며 이윤을 획득할 수 있는 까닭은 국가가 이들의 든든한 뒷배인 덕분이다. 국가권력은 노동조합을 파괴하고 기후활동가들에게 불법행위의 책임을 묻지만, 자본을 비롯한 ‘기후악당’들에게는 한없이 온화하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중립적인 국가’를 기대할 수 없다. 단지 ‘국가권력을 어떻게 노동자계급의 수중으로 옮길 것인가’하는 고민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고서는 기후위기의 궁극적인 해결도 난망할 뿐이다.

또 다른 문제점은 급진적 환경운동이 내세우는 ‘기후정의’의 개념이 추상적인 수준에 머문다는 점이다. 우선 기후정의는 “기후변화의 원인과 영향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이러한 부정의를 줄이려는 관점을 말한다.”28) 위에서 살펴보았듯 급진적 환경운동은 기후정의의 실천 방법으로 ▶온실가스 배출제로 계획 수립 등 기후정의에 입각한 대응책 마련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독립기구 구성 ▶공공적·민주적·생태적 에너지 전환 등을 제기하였는데, 이러한 개량적 요구 이외에 기후위기를 야기하는 ‘이윤 중심의 생산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과제는 제시된 바 없는 것으로 보인다. 기후정의동맹 집행위원 한재각 씨는 기후정의를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기후활동가들의 격렬한 반대 시위에도 불구하고, 결국 탄중위는 회의를 열어 부정의한 탄소중립 시나리오와 NDC(감축목표─인용자)를 확정했다. 현재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성장체제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업과 관료들의 권력 독점에 (대해-편집자) 기후위기 최일선 당사자들의 사회운동을 일구고 그에 기반한 사회권력으로 맞서야 한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한 경험이었다. 기후정의동맹이라는 새로운 연대체를 결성하고, 대안적 헤게모니 블록(의 일부)를 만들어 내려는 이유다. 기후정의 정책과 제도의 구체적 모습은 사회적 투쟁의 결과이니까.29)

 

즉, 기후정의는 기후위기 최일선 당사자들을 주체로 자본과 정부를 위시한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는 것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후위기 최일선 당사자들을 하나의 공통된 목표 아래 결집시켜야 한다. 하지만 ‘기후정의’라는 표현과 목표의 추상성으로 말미암아 이는 아직까지 대중성을 확보하지는 못한 실정이다. 또 다른 기후정의활동가 김선철 씨도 기후정의운동의 대중화를 위한 과제로 기후정의운동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을 대중들에게 와 닿는 직관적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30) 이처럼 기후활동가들조차 기후정의의 추상성을 인정하고 있는데, 문제는 운동의 언어를 대중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만으로 기후정의운동이 갖는 추상성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기후위기를 야기하였다면, 이는 분명히 계급문제이며, 따라서 기후정의운동은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계급적 운동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기후정의운동(급진적 환경운동)의 추상성을 해소하는 문제는 그 몰계급성을 극복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급진적 환경운동은 운동의 주체를 ‘기후위기 최일선 당사자’로 규정한다. 기후위기의 최일선 당사자란 물론 자본과 정부에 의해 야기된 기후위기의 실질적인 피해자인 ‘노동자와 민중’일 것이며 이는 급진적 환경운동 내부의 여러 발언들에서 유추할 수 있다. 그럼에도 급진적 환경운동의 주체 규정에서 ‘계급성’은 불분명하다. 급진적 환경운동의 주체 범주에는 프롤레타리아뿐만 아니라 여성, 장애인, 청소년, 성소수자 등 여러 계층들이 나열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급진적 환경운동에서 노동자계급은 ‘지도계급’이 아니며 단지 여러 계층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러한 흐릿한 계급성은 ‘정체성 정치’로 대표되는 당사자성 논리로 운동을 협소화할 위험이 있다. 자본주의로부터 야기된 기후위기는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운동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폐지하는 데 그 어느 계급·계층보다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유일하게 혁명적인 계급, 노동자계급이 기후운동의 핵심세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결론

 

이상과 같이 한국 환경운동의 역사와 쟁점을 개괄적으로 알아보았다. 살펴본 바에 따르면 환경운동은 변곡점에 다다른 것으로 판단된다. 노동자·민중운동의 영향을 받아 변혁성을 띠었던 80년대의 반공해운동이, 90년대-00년대 내외 정세의 변화로 (소)부르주아 환경운동으로 후퇴하다가, 다시금 반자본주의 흐름을 타고 급진화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급진화된 환경운동은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극복해야 할 과제가 많다. 주류 (소)부르주아 환경운동의 자장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무엇보다 급진적 환경운동이 지닌 불분명한 계급성과 전망의 추상성은 기후위기라는 객관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운동 확장의 방해요인이 되고 있어서다.

이미 기후위기는 전 지구적 문제로 부상하였다. 녹색연합이 진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10명 가운데 9명은 기후위기가 심각하다는 데 동의했고, 10명 중 8명은 기후위기가 ‘이미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라고 응답했다.31) 기록적인 한파와 폭염, 잇따르는 재난, 불규칙적인 기후 속에서 대중들 또한 위기를 느끼고 있다. 그러나 돈이 많든 적든 막론하고 평등하게 찾아올 것만 같았던 재앙은 철저히 불평등한 형태로 노동자와 민중을 일방적으로 희생시키고 있다.

자본주의는 멸망 직전까지 이윤을 위한 자연환경 파괴와 노동력 착취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자본주의와 직접 맞서지 않고서는,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없으며 인류의 미래와 자본의 이윤을 건 사생결단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기후위기를 대하는 태도 또한 계급적 이해관계가 반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관계는 생산관계 속에서 각 계급이 차지하는 지위에 따라 객관적으로 결정된다. 환경문제를 둘러싼 대책의 온도차는 본질적으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구분, 불화, 적대의 표현인 셈이다. 그에 따라 자본과 국가가 내세우는 기후위기 대응들(탄소중립, 지속가능한 성장 등)은 자본가계급의 이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고 이는 노동자계급의 이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지만 지배계급은 그들이 소유한 대중매체를 총동원하여 노동자들의 이익과 전적으로 무관한 대응을 기후위기의 유일한 대안인 양 선전하고 있다. 자본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맞서 현시대에 ‘노동자계급적인 환경이론’을 수립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한편으로, 자본주의에 맞선 기후운동은 ‘노동자계급 중심성’이 필수적이다. 이는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에 대하여 수행하는 계급투쟁이,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폐지와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하필 노동자계급이 이러한 투쟁을 주도하는 까닭은, “모든 억압 받고, 착취 받는 근로인민들의 집단 중에서 그들만이 새롭고 더욱 고도한 생산양식의 담지자이기 때문이다.”32) 또한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에서 가장 잘 조직화되어 있는 집단이다(민주노총은 110만 명의 조합원을 거느린 거대한 노동조합인데, 한국에 이만한 규모를 가진 세력은 존재하지 않음을 상기해보라). 자본주의 체제를 혁명으로 뒤엎을 유일한 이해관계가 있는 계급이자 그럴만한 힘과 조직을 갖춘 계급이 노동자계급이기 때문에, 기후위기의 원인이 자본주의 체제에 있는 이상, 노동자계급이 기후운동에 있어서도 중심적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만 우려스러운 것은, 노동 중심성을 다른 피억압계층에 대한 배제 내지는 종속으로 오해하는 견해이다. 하지만 노동 중심성은 다른 계층을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자계급은, 그들에게 맡겨진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모든 근로인민과 함께 자본가계급과 투쟁할 것이다. 이처럼 과학적 이론과 노동자계급성으로 무장한 환경운동이야말로 마침내 자본주의 체제를 끝장내고,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참된 변혁운동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노사과연


1) 물론 개중에는 목전의 위기를 한사코 부정하는 ‘기후위기 허구설’의 지지자들이 존재하나, 아직까지 수적으로 우세하지는 않다.

 

2) ≪환경운동과 생활세계≫, 한국환경사회학회, 2013, p. 18.

 

3) <한국사회의 환경운동 역사와 쟁점 – 첫번째 이야기>, 녹색연합, 2000. https://www.greenkorea.org/미분류/17941/

 

4) “그러나 공해방지법은 전문이 21개조에 불과해 규율 내용이 크게 미흡했을 뿐 아니라 동법 시행규칙이 1969년 7월에야 제정되는 등 후속 입법이 미비했고, 경제개발을 최우선으로 추진하던 당시의 사회분위기 등으로 실효성을 거두기가 어려웠다.”, 워터저널, (http://www.waterjournal.co.kr/news/articleView.html?idxno=953)

 

5) ≪환경운동과 생활세계≫, 한국환경사회학회, 2013, p. 18.

 

6) ≪한국 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 박승호, 전국금속노동조합, 2020, p. 134.

 

7) ≪환경운동과 생활세계≫, 한국환경사회학회, 2013, p. 18.

 

8) 공해추방운동청년협의회(공청협)의 전신

 

9) 변혁지향적 환경운동이 양적으로 우세하지는 않았으나, ‘민주주의 쟁취’가 환경문제 해결의 선결과제라는 점에 대해서는 환경운동 진영 가운데 이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0) 공해추방운동연합 창립선언문(1988).

 

11) ‘이타이이타이 병’에서 ‘이타이’는 ‘아프다’를 의미하는 일본어 이타이(痛い)인데, 카드뮴 중독으로 인해 골격이 약해진 환자들이 ‘아프다 아프다’를 연발한 데서 유래했다. 일본 4대 공해병 가운데 하나이다.

 

12) ≪환경운동과 생활세계≫, 한국환경사회학회, 2013, p. 21.

 

1) <1990년대 한국의 환경운동: 전문 환경운동조직을 중심으로>, ≪한국사회학회 사회학대회 논문집≫, 구도완, 한국사회학회, 2000.

 

2) 구도완, 위의 논문.

 

3) ≪환경운동과 생활세계≫, 한국환경사회학회, 2013, p. 23.

 

4) 환경운동연합 창립선언문(1993), http://kfem.or.kr/?page_id=217

 

5) 채만수, <근본 원인을 외면한 환경운동의 타락>, ≪피억압의 정치학(상)≫, 노사과연, 2008, p. 263.

 

6) 생명운동이라고도 하는데, 현재엔 생태주의운동이라는 표현이 더 많이 쓰인다.

 

7) ≪환경운동과 생활세계≫, 27쪽.

 

8) <한살림선언>, ≪한살림 20년│햇살과 바람, 정직한 땀의 기록≫, 2006, http://edu.hansalim.or.kr/?p=1661, 이하 인용은 ‘(선언+쪽수)’식으로 표기.

 

9) 탈성장론은 기후위기의 원인이 자본주의 체제가 유포하는 ‘성장지상주의 이데올로기’에 있다고 보고, 이러한 성장지상주의로부터 벗어나 ‘성장 없는 자본주의’를 만들자고 주장한다. 탈성장론자들은 탈성장을 위해 필요한 과제로 화석연료 산업 등 공해를 유발하는 산업의 축소, 공공부문의 탈상품화(무상화), 노동시간 단축, 상업광고 규제, 커먼즈(commons, 협동조합) 확장 등을 제시한다. (아래 ‘(3) 탈성장론’ 단락 참조.)

 

 

10) 위의 책, 30쪽.

 

11) 서영표, <인식되지 않은 조건, 의도하지 않은 결과: 노골적인 계급사회의 탈계급 정치>, ≪진보평론 2013년 겨울≫ 제58호, 뉴래디컬리뷰, 2013.

 

1) 조홍섭, <환경의 위기, 환경운동의 위기>, ≪한겨레≫,  한겨레신문사, 2004.

 

2) 에너지전환포럼 사무처장을 역임하며 탈핵운동을 이끈 양이원영(現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지난 2011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캠페인만 하거나 아니면 정책 만들어서 정부랑 테이블 갖추어가지고 그것만 하거나, … 어쨌든 에너지위원회를 만들어서 정부랑 같이 뭔가 테이블을 만들고 작업은 많이 했는데, 그건 우리끼리만 한 거라는 거죠. 활동가들하고 정부 관계자들만 한 거지, 그거에 대해서 회원들이랑 시민들에게 제대로 알릴, … 소통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닌 거 같아요.” <한국 환경운동의 성장과 분화―제도화 논의를 중심으로>, ≪ECO 2013년 제17권 1호≫, 한국환경사회학회, 2013.

 

3) 대표적으로 1994년부터 운영된 민간환경단체정책협의회, 민관환경정책협의회 등이 있지만 현재로서는 두 조직 모두 이렇다 할 활동을 보이지 않고 있다. 전자의 경우 환경운동단체와 노무현정권의 관계 악화 이후 사실상 폐지되었고, 후자는 현재까지 운영 중이나 정부 환경정책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보기 어렵다.

 

4) <盧대통령 원로인사 간담>, ≪전북일보≫, 김준호 기자, 2003.11.6. https://www.jjan.kr/article/20031105105264

 

5) <화석연료에 대한 절망적 집착>, ≪마르크스21 34호≫, 에이미 레더, 장호종 역, 2020. https://marx21.or.kr/article/357

 

6) ≪생태혁명/지구와 평화롭게 지내기≫, 존 밸라미 포스터, 박종일 역, 인간사랑, 2010, p. 181.

 

7) <자연자본의 가치>, ≪지속가능저널≫, 문주은, 2017. http://m.sjournal.kr/news/articleView.html?idxno=172

 

8) ≪환경주의자가 알아야 할 자본주의의 모든 것≫, 존 밸라미 포스터, 황정규 역, 도서출판 삼화, 2016, p. 166.

 

9)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 효과에 잇따라 제기되는 의문들>, ≪환경경제신문 그린포스트코리아≫, 권승문, 2022. http://www.greenpost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2640

 

10) <환경운동연합 논평-지속가능발전, 이젠 구호를 넘어 실천으로〉, 환경운동연합, 2006. https://www.newswire.co.kr/newsRead.php?no=200606

 

11) 〈[논평] 환경운동연합 세계환경의날 ‘지속가능한 생산과 소비를 생각한다’>, 환경운동연합, 2015. http://kfem.or.kr/?p=151068

 

12) ‘사회적 기업’에 대한 비판은 다음의 인용구로 갈음한다. “기업이란, 그것이 자본주의적인 것이든, 사회주의적인 것이든, 다수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따라서 어느 기업이든 기업은 모두, 구태여 말하자면, 사회적 기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기업’이라는 호칭으로 대중에게 ‘사회적 이익을 위한 기업’이라는 거짓 심상, 거짓 사고를 심으려는 수작은, 그 주관적 의도가 무엇이든, 잉여노동・잉여가치의 착취, 그 착취를 통한 이윤의 획득, 자본의 축적이라는 자본주의적 기업의 동기・목적・기능을 은폐하고 그것들을 미화할 뿐이다.”(채만수, <바야흐로 혁명의 시대, 굴절된 위기·시대 의식>, ≪노동사회과학 제15호≫, 노사과연, 2021. 각주 31번, http://lodong.org/wp/archives/15352)

 

13) 권승문, <탈성장: 녹색성장과 그린뉴딜을 넘어>, ≪에너지포커스 99호≫,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2020.6.30.

 

14) 여기서 과잉생산은 물질적으로 너무 많은 양이 생산되었다는 의미의 절대적 과잉이 아니라, 상품이 대중의 구매력에 비해 지나치게 많이 생산된 ‘상대적 과잉’을 의미한다.

 

15) 맑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서문>,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김호균 옮김, 중원문화, 2017, p. 9.

 

16) 필자는 이들 운동을 ‘변혁적’ 혹은 ‘반자본주의적’이 아니라 급진적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들이 주류 환경운동의 체제순응적 행태에 비하여 비교적 반자본주의 성향을 강화하였다는 점에서 급진적이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과학적 인식에 기초한 변혁운동으로까지는 발전하지 않았으며, 또한 주류 환경운동의 (소)부르주아적 성격을 완전히 탈피하지도 못했다는 사정을 고려하였다.

 

17) <2019 핵심요구/배경과 취지>, 기후위기비상행동, 2019. http://climate-strike.kr/4958/

 

18) <체제전환을 위한 기후정의동맹 제안 배경 및 목표>, 기후정의동맹, 2022. https://www.climatejusticealliance.kr/d983f93b-20ab-4789-b2e5-febc7ca89f65

 

19) ≪이윤을 넘어 공공·민주·생태로≫, 기후정의동맹, 2022, p. 10.  https://www.climatejusticealliance.kr/ff20db01-67c4-4558-a3f2-dfa446962f4a

 

20) <[성명] 기후 불평등이 초래한 죽음 앞에서>, 기후위기 비상행동, 2022. http://climate-strike.kr/4753/

 

21) <[기자회견문]기후파국 초래하는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 당장 폐기하고 재수립하라!>, 기후위기 비상행동, 2023. http://climate-strike.kr/5070/

 

22) 위의 글, 34쪽, 기후정의동맹,

 

23) <우리는 결코 복종하지 않는다─기후활동가 이상현의 기후재판 벌금 불복종 지지 성명>, 기후위기 비상행동, 2023. http://climate-strike.kr/5098/

 

24) 위의 글, p. 7. 기후정의동맹,

 

25) <환경문제의 원인과 해결책>, 환경운동연합, 2007. http://kfem.or.kr/?p=39061

 

26) “산업혁명 이후 비약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산업은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이윤 추구의 극대화를 향해, 구동구사회주의권에서는 일국사회주의를 유지시키기 위한 생산력의 발전 형태로 발전을 거듭해 왔다. 20세기를 풍미했던 양 이념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난( … 것이다.)”, 환경운동연합, 위의 글.

 

27) <[기자회견문] 첫 단추부터 잘못 꿴 윤석열 정부 에너지 정책, 안전하고 정의로운 에너지전환 원칙 수립하라!>, 기후위기비상행동, 2022. http://climate-strike.kr/4660/

 

28) 권승문·김세영, ≪오늘부터 시작하는 탄소중립≫, 휴머니스트, 2022, p. 45.

 

29) <기후정의에서의 제도와 정책대안>, 한재각, 생태적지혜연구소, 2022. https://ecosophialab.com/기후정의에서의-제도와-정책대안/

 

30) 김선철, <기후정의운동과 사회 세력화의 과제>, ≪참세상≫, 민중언론 참세상, 2023.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7050

 

31) <[보도자료] 대다수 국민 “기후위기로 인한 심각한 영향 이미 나타나고 있어.. 대선 과정에서 강력한 기후위기 대응 공약 촉구”>, 녹색연합, 2021. https://www.greenkorea.org/activity/weather-change/climatechangeacction-climate-change/89368/

 

32) F. V. 콘스탄티노프, 김창선 역, ≪사적유물론≫, 도서출판 새길, 1988, p.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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