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계급운동과 부문운동 간의 통일에 대하여(2)

한동백 │ 회원

 

 

 

 

머리말 — (1)
I. 보편-특수-개별 — (1)
II. 인식의 상승 도정 — (1)
III. 상호외재성 — (1)
IV. 각 부문운동의 추이 — (2)
  IV-1. 여성
  IV-2. 장애인
  IV-3. 생태
  IV-4. 기타
V. 주관주의의 두 흐름 — (2)
  V-1. 직접성의 인식으로서 ‘개별’에 집착하는 우경적 편향
  V-2. 추상적 보편에 집착하는 좌경적 편향
결론 — (2)
 

IV. 각 부문운동의 추이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정 저항적 성격을 지니는 모든 사회운동이 특수한 실천을 반영한 일정한 이념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특히 부문운동은 보편적 모순의 개별화 작용, 즉 그것의 구체적 전개를 통해 자리 잡은 개별적 모순을 반영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모든 부문운동의 추이, 내용은 특정한 역사적-사회적 발전 국면과 표리관계를 이루고 있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제국주의 시대에서 부문운동 역시 제국주의 시대라는 특수한 규정 속에서 구체적으로 자기 존립 기반을 가진다.

물론 각 부문운동이 발생하게 되는 연유에는 우연적 계기도 그에 못지않게 혼재되어 있기는 하나, 이 부문운동이 진행되면서 점차 일정한 규모를 가지면 가질수록 확립되어있는 역사적 국면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만큼, 계급운동과의 관계에서 그것은 점차 단순한 무연고한 차이로서 계급운동과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연관을 이루는 대립물로서 대면하는 것으로 된다.

부문운동의 이러한 배경 속에서 계급운동이 긍정적인 통일을 이루려면 가장 처음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가장 먼저 파악해야 하는 것은 층차화되어 있는 부문운동의 내적 계기를 파악하는 것이다. 계급운동은 이러한 내적 계기를 파악함으로써 부문운동의 발전 경로에서 관철되는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으며, 이렇게 하여 부문운동의 추후 전개 양상 또한 미리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어떠한 사물 규정의 내적 계기를 본다는 것은, 그 사물 규정의 생성 계기부터 시작하여, 그것의 변화·발전의 실제적 현실, 즉 그것의 역사를 파악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부문운동과의 긍정적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부문운동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파악되는 역사란, 특정한 개인의 집합, 또는 분절된 개별의 집합에 관한 단순 시간적 발전 순서를 파악한다는 의미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역사를 본다는 것은 규정되어 있는 체계의 역사를 본다는 것이며, 규정되어 있는 체계, 즉 특수한 체계란 그것을 포섭하는, 즉 그것에 지대한 인과적 힘을 더하는 일반적인 체계와 그것을 함께 고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유물론적 의미에서 우리가 특정한 것의 역사를 파악한다는 것은 그 특정한 것의 분절된 사건―그 외부를 둘러싼 사회적 조건과 완전히 차폐된 것으로 고려된 ‘사건’으로서―의 궤적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회적 조건, 사회적 규정력과 엮인 사건을 고찰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부문운동의 역사를 파악한다는 것은, 그 부문운동을 둘러싼, 심지어 그 부문운동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는 사회형태의 내용과 그것을 밀접관 관계 하에서 역사적으로 파악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사회형태란 토대(생산양식)와 상부구조, 즉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 이른 사회체제를 의미한다. 모든 부문운동의 추이, 성격은 이 사회체제의 발전 양상 속에서 규정된다.

사실 사물의 본질을 파헤친다는 것은 그 사물의 역사적 전개 양상을 파헤치는 것과 분리될 수 없으며, 오히려 핵심적인 것으로 된다. 왜냐하면 사물의 외관, 인식된 직접적인 규정들은 모두 그러한 것을 형성하게 한 계기들의 통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계기란 항상 역사적으로 순차를 이루는 것으로 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지구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재 드러나 있는 지구의 환경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넘어―즉, 현재적 수준의 제 규정을 단순히 ‘많이’ 인식하는 것을 넘어―, 지구의 형성 과정을 파악해야 한다. 지구 자기장이든, 지구 내에서 특정하게 형성된 지리적 환경이든 그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지구의 형성 과정을 연구하는 것과 절대 분리될 수 없는 이유도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된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파악한 부문운동의 보편적 내용을 계급적 운동의 토대 위에 세우는 실천적 작업을 개시하는 것이다.

어느 운동 사회에서나 의식의 불균등성은 필연적이며, 자연발생적인 인식 수준은 혁명적 계급의 과학적 사상의 주입, 즉 의식성의 주입이 없이는 착취 계급의 이념에 직접 포섭된 것이거나, 무원칙하게 혼란된 내용을 지닐 수밖에 없다. 외부로부터 사회주의 의식의 주입 주체는 대자적인 노동자계급이다. 그런데 이 작업은 개인적 수준에서 집단적 수준에 이르기까지 매우 부단한, 그리고 치밀한 계산을 요구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각 부문운동은 상대적으로 독립성을 지닌 각각의 (이념적) 체계에 의해 추동되며, 이미 각각의 부문운동은 저마다 내적으로는 일자적 관계를 이루고 있고, 그럼으로써 외적으로는 그것과 이질적인 대자적 관계에 속하는 일자를 배제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각 부문운동은 자기 체계에 대한 고유의 보존력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고, 따라서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부문운동의 저항은 필연적이다.

오늘날 숱하게 많은 부문운동이 각자 20세기 사회주의의 ‘결함’을 지적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것을 넘어, 실제 운동에서 직접적으로 계급운동과 대립하는 일이 적지 않은 것 역시 이러한 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스로 지닌 과학적 세계관의 현실적 내용—노동운동이 이해하고 적용하는 정도— 대해 계급운동이, 그것이 부문운동의 이념 간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을 주체적·창조적으로 주조하지 못한다면, 계급운동과 부문운동 간의 관계는 적대적 모순이라는 늪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세계관과 부문운동의 이념 간의 연결 지점을 찾는 것은, 부문운동이 대상으로 하는 수많은 사회모순을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세계관이 (통일적으로) 포섭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연결 지점을 찾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실제로 그것을 어떻게 설득하고, 부문운동 내의 인식 변화를 실질적으로 추동할 수 있을지에 대한, 아주 미시적인 수준의 문제도 연구되고, 해명되어야 한다. 이러한 것에 대한 전술적 내용은 앞으로의 실천에서 지속적으로 탐구되고 찾아져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부문운동의 실제적·역사적 발전 추이를 파악하는 것, 그리고 부문운동의 현재적 내용을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세계관이 지양해내고 부문운동을 설득하는 것, 두 가지 요소가 계급운동과 부문운동의 통일을 위한 절대적인 조건이다. 그런데 두 번째 요소는 첫 번째 요소를 확립하는 데에 달려있다.

이 원칙에 따라 여성, 생태, 장애인 부문 운동의 역사적 추이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IV-1. 여성

 

여성운동은 전체 인구의 약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운동으로서, 부문운동에서도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계급운동과도 연관성이 매우 깊다. 여성운동은 크게 (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사이 초기 자본주의 형성기의 양태, (나) 19세기 초중반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간 약소한 긴장이 형성된 시기의 양태, (다) 19세기 말 독점자본주의 시기의 양태, (라) 20세기 초 이후 전반적 위기 하의 양태로 나누어진다. 오늘날의 여성운동은 20세기의 양태와 연속성을 지니는 것으로 된다.

여성운동의 초기 발전 추이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사이 잉글랜드와 프랑스 등지의 정치적 급변과 관련된다. 이 시기 낙후한 봉건제 생산양식은 질곡에 달해 있었으며, 이를 반영한 부르주아의 반봉건투쟁이 두드러졌다. 특히 잉글랜드에서 봉건제 생산양식의 해체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의 출현이 점차적으로 이루어졌다.

셰일라 로버덤(Sheila Rowbotham)은 ≪숨겨진 역사≫에서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수공업으로 인해 폐쇄적인 지방 공동체는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생산을 효율적으로 하게 하는 분업과 전문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이제는 본격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전에는 생산 조직에서나 분명하게 나타났었던 사회적 분화가 특징적으로 되고 있었다. 시골이나 도시 할 것 없이 부유하지도 않고 가난하지도 않은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이 점차 커지고 있었으며 그들 스스로도 자기들의 존재를 의식하기에 이르렀다. 분업이 조금 더 세분화되고 전문화됨에 따라 부유한 자작농의 부인들은 농업 노동에서 손을 떼어도 좋게 되었지만, 가축을 키운다든지, 함께 기거하는 농장 하인들에게 음식을 장만해 준다든지 하는 일들을 계속해야 했으므로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냈다. 도시에서는 생산의 단위가 커짐에 따라 영세상인이 사업을 시작하는 데 드는 자본 규모가 점차 커져갔고 결과적으로 자본 없는 전문 기술자들은 노동자들을 고용해서 사업을 해봐야겠다는 희망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길드 조직과 수공업의 규율에 영향을 끼쳤다. 장인(匠人)들을 보호하기 위한 독자적인 조직들이 발달되었고 가입 조건이 까다로운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 일반적으로 견습공직에는 남성들이 종사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남성들과 경쟁하지 않고 여성들만이 종사할 수 있는, 여성을 위한 특정한 직업들이 있었다. 이 직업들은 여성들의 가사 노동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는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이 단계에서는 아직도 가정 생활과 산업 활동이 분명하게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성들은 마실 것, 먹을 것, 입을 것을 생산하는 일을 하였다. 이 이후로 이러한 직업들을 가리키는 어휘들은 그 원래의 고유한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 채 여성들을 가리키는 진부한 표현으로 바뀌어 버렸다. 즉 예전에는 “brewster”는 여성 양조자를, “spinster”는 노처녀가 아니라 물레질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여자를 의미했다.”1)

 

수공업적 생산이 지배적인 초기 자본주의 발달기―아직은 봉건제 생산양식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는―에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은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그만큼 가사 활동과 생산 활동의 분리는 크게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고, 여성 일반 역시 이러한 경제사적 전개 속에서 남성이 종사하던 부문과 겹치지 않는, 그리하여 일자리 경쟁이 사실상 성립하지 않는 영역에서 소규모 노동력을 제공하는 형태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이 시기 가사 활동 외 전반적인 생산 활동에서 여성의 역할이 아직은 저평가된 연유로 인해, 그만큼 여성 일반의 정치적 요구의 질적 수준이나, 그 양적 발전 수준은 크게 제한되어 있었다.

17-18세기 여성운동은 위와 같은 경제적 상황을 반영하여, 주로 여성의 교육권 및 극히 일부의 기본권 보장이라는 부르주아적 요구의 달성을 위한 형태로 등장하였다. 이 시기 여성운동은 초기에 극소수의 부르주아 지식인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말기에 이르러서는 부르주아 여성 군중과 프롤레타리아 여성 군중 일부의 일정한 참여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후기의 경향은 특히 프랑스 혁명의 전야와 그 이후에 활발히 등장하였다.2) 1789년 1월 24일 국왕 루이 16세는 삼부회를 소집하여 당시 군중의 불만 사항을 조사하기 위한 진정서를 작성해 오도록 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계층의 목소리가 담긴 진정서가 등장하였는데, 여성 역시 그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계기로 하여 여성 군중은 정치적 참여의 권리까지 요구하기에 이른다.3)

 

이세희 교수는 이 시기 프랑스 여성운동에서 여성 군중의 참여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실제로 대혁명 초기를 특징짓는 시위운동에서 여성의 참여보다 더 명확한 것은 없었으니, 여성들은 그들 스스로의 실천을 통해 주권행사에 참여했던 것이다. 1789년 4월 생-탕투안 교외의 레베이용 공장주에 대한 폭도에 참가한 여성들은 폭력의 교사자 역할을 함으로써 남성들을 선동하였다. 사건 직후 한 생선장수 여인은 방화와 약탈 그리고 ‘제3신분 만세’를 외친 혐의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는 여성들이 이미 정치적 색체를 띠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사례가 된다. 보다 전통적인 경우는 1789년 봄 식량폭동 때의 여성 개입으로서, 여성이 다수를 차지하는 강력한 동원화가 확인되었다. 여성들은 원래 빈번히 소요를 일으키는 집합체였던 바, 일반적으로 주민들의 불안과 분노를 촉발시킨 것은 시장에서의 곡물 공급의 부족이나 곡물가의 급등 때문이었다. 가족을 부양할 수 없는 상태의 민중여성들은 그 자리에서 상황을 토론했으며 그녀들의 분노는 급속히 폭동에의 호소로 변화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남성들이 합세하고 사람들이 구제를 요구하면서 시청 앞에서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관계 당국이 만족할 만한 대안을 내놓지 못한다면 그들의 요구는 협박과 더불어 곡물 저장소에 대한 습격으로 변질되곤 했다.”4)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 보장, 여성의 기본권 보장 확대는 이 시기 발전한 부르주아 여성운동의 대표적인 요구였다. 그러나 당시 부르주아의 가장 급진적인 날개에서 요구하였던 바의 내용이 세계사적 의미에서 실제로 온전히 받아들여지게 된 시점은 19세기 말, 심지어 20세기에 다다르면서였다.

사실 여권신장의 제일 촉매제는 생산력의 증대이다. 생산력의 증대는, 부득이하게 기존 사회적 관계의 급변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생산력의 발전은 그에 걸맞는 형식으로서 새로운 생산관계와 이를 반영한 상부구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즉, 생산력은 사회형태에 내장된 각이한 형식적인 관계 변화를 주도한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규정된 생산양식의 내용이다. 그와 반대로 이에 수반하는 경제적인 관계 항, 즉 생산관계는 그것의 형식이다. 이 변화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비로소 여성의 집단적인 실천도 가능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그러한 실천이 주체적 역량을 확보하게 되는 계기도 나오는 것이다. 즉 17-18세기 부르주아 여성운동은 당대 사회의 근본변혁에서 진보적 역할을 담당하였지만, 그 규모는 매우 협소하였으며, 그 요구의 질적 수준도 이 시기 생산력에 대응되는 수준의 부르주아적 계급성·당파성에 의해 제한되어 있었기에 실질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실제로 프랑스 혁명을 통해 형성된 급진 부르주아 정파인 산악파의 정권하에서도, 그 이후의 기회주의적 테르미도르 정권하에서도 여성의 부르주아적 권리는 보장되지 않았다.

여성의 참정권 운동 및 기본권 보장 운동이 비로소 힘을 갖게 된 계기는 광범한 임금 노동자계급 여성의 등장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임금 노동자계급 여성의 폭발적 등장의 핵심 계기가 바로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의 확립이다.

19세기에 이르러 기계제 대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하자 기존의 가족제도 내에서 여성의 지위 및 이를 반영하게 될 다양한 여성운동의 성격이 급변하게 된다. 이 시기 소생산자 계급을 이루고 있던 중소농과 수공업자들은 자본과의 경쟁에서 몰락하였고, 그 결과 대규모 인구의 이촌향도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 인구는 이주하여 정착한 지역에서 임금 노동자화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강화하였으며, 이 과정은 농촌에서 발생한 거대한 프롤레타리아 계급 집단을 다시 도시에 공급하는 원인으로 되었다. 원인이 결과가 되고, 결과가 원인이 되는 이러한 과정에서 가사 활동과 생산 활동은 명백히 분리되기에 이르렀다. 즉 광범하게 남아 있던 인력인 여성은 생산수단에 결합할 수 있는 대규모 노동력으로 간주되기에 이른다:

 

“새로운 기계들은 노동자들의 조심스러운 취급을 요구했으며, 따라서 노동자들은 가내 공업의 장시간이긴 하나 불규칙적인 노동 시간과는 다른 노동의 리듬(주기적 리듬)을 감수하게 되었다. 공장 소유주들은 노동력을 기계에 대한 부속물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들은 노동자들이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를 바랐다. … 공장 내에서의 육체적 현금 거래가 빚어내는 폭력은 비인격적인 징벌로서 새로운 산업적 관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되었다. 공장 내에서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은 남편과 아버지들이 아니라, 감독자와 고용주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이것은 노동자계급 가족에 있어서는 남성의 사회적 지배가 위태롭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고용주들은 자기들의 직업과 전통에 대해서 자부심이 대단한 장인들보다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을 억누르기가 훨씬 쉽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공장 소유자들은 이러한 값싼 노동 예비군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자, 곧 이들을 고용했는데―때로는 남자보다 우선적으로―이때 그들은 여자들에게 남자들이 받는 임금보다 적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여성들을 그들의 전통적인 영역 밖으로 유혹해 낸 것은 아니라고 자축하기도 했다. 공장 노동의 조건은 달리 어쩔 도리가 없는 절망적인 사람들이나 혹할 수 있을 정도였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장 생산으로 인해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은 독립적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5)

이 시기 여성 임금 노동자는 노동운동을 통해 여권신장을 도모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성 노동자는 이를 통해 점차 부르주아 여성운동과 대립하는 (아직은 매우 약소한)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의 주체로 나아가기에 이른다.

본래 19세기에 이르러서도 한동안 개별 임금 노동자 여성은 여권신장에 있어서 부르주아 여성운동과 결합하는 형태로 존재하였다.6) 그러나 이와 동시에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수에 상응하는 만큼 자본주의에서 특수한 규정성을 띠는 계급적 적대, 즉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간의 적대가 굳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계급적 적대가 한 사회에서 갖는 인과적 힘은, 자본주의의 발전수준에 대응하였다.

주지하다시피, 19세기 자본주의의 발전 속도는 매우 빨랐으며, 따라서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 간 계급 적대가 지니는 인과적 힘도 그만큼 증가하였다. 한편으로, 영국에서는 1824년 노동조합 단결권이 인정―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이 제한된 형태로서―되었다.7) 노동조합 일부 활동의 법률적 보장은 임금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합법적 투쟁의 확산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계급 적대는 제도적 영역 속에서도 노골적인 것이 되었으며, 이 적대는 여성과 관련된 모든 운동에 일정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이 시기 제도권 개혁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부르주아 당파 역시 노동자계급의 압박 속에서, 노동자계급에 대한 회유책으로서 일시적인 타협을 강제 당하던 측면이 있었다.

물론 이 시기에도 프롤레타리아 계급 전반의 주체적 역량은 부르주아의 그것에 비해서 상대적으로는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에, 대부분의 여성운동은 부르주아 당파 또는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당파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일례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노동운동이 핵심 계기로 된 영국의 1830년대 차티스트 운동에서 참정권 보장의 범위는 남성 도시노동자로 한정되었다. 1866년, 여성 참정권 보장을 공식적으로 의회에 요구한 당시 자유당 소속 하원의원이었던 존 스튜어트 밀은 부르주아였다. 그는 1,499명의 서명을 받아서 의회에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는 청원을 제출하였다. 또한 각각 1869년에 설립되어 영국, 미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여성사회정치연맹(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과 전국여성참정권협회(National Woman’s Suffrage Association)의 결성을 주도한 계급이 부르주아였다는 것도 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앞서 언급한 프롤레타리아와의 일정한 긴장 속에서, 부르주아에게 강제된 측면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두 계급 간의 계급 적대는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19세기 부르주아에게 있어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로버덤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중산 계급은 조합을 공포의 눈으로 바라보았는데, 거기다 여자들까지 조직화되자 조합은 완전히 계급적 힘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사회가 지니는 권위의 기초; 인용자]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어 버렸다. 여성 노동자들의 잠정적으로 간헐적인 투쟁은 노동자에 대한 고용주의 지배는 물론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까지도 위협하였다. 예를 들어, 1832년 5월 리즈 지방의 머큐리는 1,500명의 여자 카드 식자공의 파업에 의해서 상당한 두려움을 느꼈다. … 지배계급은 여성들이 투쟁할 때 결과하는 사회-정치적인 의의를 대부분의 노동자들보다 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글래스고우 방적공 협회가 남녀 노동자들에게 동일 일금을 지급하기 위해서 협상을 벌인 것은 아주 보기 드문 일이었다. 즉, 자본으로 인해 일어난 가족과 노동, 가정과 공장, 남성과 여성 사이의 분열을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노동자계급의 일치단결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인식한 초기의 중요한 사례였다.”8)

19세기 말 독점자본주의에 이르게 되자 비로소 프롤레타리아 당파는 부르주아 당파에 체계적으로 대응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더 나아가, 여성 노동자의 수 역시 이전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여성 문제의 사회적 기초≫ 서문에 따르면, 19세기 말 당대 주요 서구사회에서 여성 노동자의 수는 다음과 같다:9)

 

 

나라

조사 연도

전체 인구 (백만)

산업 인구 (백만)

산업 노동자 (백만)

오스트리아

1890년

11.7

12.2

7.8

6.2

4.4

5.3

독일

1895년

25.4

26.4

15.5

6.6

9.3

5.3

프랑스

1891년

18.9

19.2

11.1

5.2

5.0

3.6

잉글랜드 & 웨일즈

1891년

14.1

14.9

8.9

4.0

5.4

3.1

미국

1890년

32.1

30.6

18.8

3.9

8.7

2.9

102.2

103.3

62.1

25.9

32.8

20.2

 

전체 노동자, 이와 더불어 여성 노동자의 양적 성장은, 자연스레 여성운동에서 여성 노동자의 비중을 상승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존에 관변적 성격을 지녔던 부르주아 여성운동 역시, 부르주아가 제도권 정치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경제적 토대가 존재하는 한에서 계속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운동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간 계급 적대를 반영하는 운동으로서 기능하게 될 수밖에 없다. 즉 19세기 말에 이르러 여성운동은 비로소 프롤레타리아, 소부르주아,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에 긴밀하게 얽혀져 있는 형태로 전개되었으며, 동시에 해당 계급이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지닐 수밖에 없었던 몇 가지 한계도 고스란히 물려받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이미 몰락해 버린 소부르주아의 지속적인 노동자계급으로의 인입은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이 소부르주아에서 막 노동자계급으로 된 운동원은 프롤레타리아 진영 내에서 ‘전(前)자본주의 시기 남성의 지위’를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사회적 생산에서의 여성노동을 ‘폐지’함으로써―을 내비치기도 하였다. 이는 19세기 여성운동을 평가하는, 적지 않은 여성사가들 사이에서 자주 지적되곤 한다.10)

19세기 말에 성장한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은 당대 여성임금 차등 지급, 여성 노동자의 생활수준 향상을 위한 정책 요구,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철폐 등을 내세웠다.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은 또한, 여성 노동자의 정치적 활동 반경을 넓히기 위해 부르주아 민주주의 개혁의 요구를 드높였다. 여성 노동자의 활동 반경이 넓으면 넓을수록, 전체 노동운동이 자본가와의 대립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기회도 넓어진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이 이러한 요구는 매우 정당한 것이다.

19세기 말 독점자본주의 시기의 양태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대표하던 한 인물인 아우구스트 베벨은 ≪여성과 사회주의≫(1879) 1910년 증보판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렇듯 법률상으로 명백한 남성에 대한 여성의 불평등한 지위를 입법에 의해 평등하게 실현시키기 위해, 참정권 요구운동이 진보적 여성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 흐름은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도록 고무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사상이다. 노동자계급에게 정당한 것이라면, 그것은 언제나 여성에게도 정당하다. 언제나 억압받고 권리를 박탈당하며 수없이 무시당하는 그들이 자신들의 종속적인 지위를 극복하기 위해 유리하게 보이는 모든 수단들을 동원하고 자신을 방어하는 것은 권리일 뿐 아니라 의무이기조차 하다.1)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대중을 공적 사무에서 격리시킨다면 정치교육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정치적 권리를 사용하도록 함으로써 기대할 수 있는 일이다. 연습 없이는 누구라도 대가가 될 수 없다, 지배계급은 언제나 민중을 정치적 미성숙상태에 묶어두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만인의 이익을 위해 열정을 갖고 싸우고 우매한 대중을 혼들어 깨워 분연히 일어서도록 하는 것은 계급의식과 목적의식에 투철한 소수의 과제로 계속 남는다. 지금까지 큰 운동은 모두 반드시 그러하였다. 따라서 여성운동에서도 똑같이 그렇다고 하여 놀랄 것도, 실망할 것도 없다. 과거 경험으로 보건대 수고와 회생은 보답을 받으며 미래의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 … 자신의 행복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된 사회 전반의 복지를 위해 함께 힘을 다해 뛰는 것은 무엇보다 당사자인 남녀 모두를 눈에 띄게 훌륭하게 만들 것이다. 근시안적 시각을 가진 자들이나 전체 구성원의 완전한 평등에 기초한 공동체에 적의를 가진 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현상이 발생할 것이다. 사회제도가 남녀를 물질상의 걱정과 과도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정도에 비례하여 남녀관계는 발전적인 방향으로 개선될 것이다.”2)

 

반면, 부르주아 당파에 속해 있던 부르주아 여성운동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의 개혁 요구를 완전히 막아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1874년 영국에서 등장한 부르주아 주도 노동조합인 여성보호공제동맹(Women’s Protective and Provident League, 이하 ‘공제동맹’)은 노동조합의 단체행동권을 부정하였으며, 이른바 자유주의의 ‘자조의 원리’에 입각하여 국가 주도의 개혁 정책에 공공연히 반대하였다.3) 공제동맹은 19세기 말에 들어서 프롤레타리아가 주도하는 여성노조에 대항하는 어용 여성노조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의 요구를 일부분만 반영하면서 그것을 자신 활동의 토대로 삼는 경우였다. 마지막으로는 개혁이 지니는 내용에 타협점을 가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19세기 말 이후, 여성의 임금 노동자화가 크게 진행된 상황에서 각 여성운동 조직의 입장은 특히, 1890년대 영국에서 벌어진 보호입법 논쟁4) 속에서 극명하게 나뉘었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적 원칙에 입각한 여성 조합운동의 경우 보호 규정의 확대 적용 및 강화를, 그리고 자유주의 어용 여성 조합운동의 경우 보호 규정의 폐지 또는 현존하는 보호 규정의 완화라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현재까지 서술한 여성운동의 세 단계는 한국에서도 같은 양상으로서 발현―약간 시기가 뒤처진 형태로―되었다.

한국의 부르주아적 여성운동의 이념적 맹아는 봉건조선 해체기인 18세기부터 서서히 형성되었으며, 19세기 말에 이르러 부르주아 여성운동의 형태로 본격 등장하게 되었다. 1898년 9월에 발표된 여권선언서인 ≪여권통문(女權通文)≫은 이미 여성의 사회진출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데, 이 시기 여권운동은 당대 봉건적 생산양식 속에서 개혁적 성격을 띠는 양반부인을 주도로 하여 일어났다. 1896년 4월에 창간된 ≪독립신문≫ 역시 여러 차례에 걸쳐 여성의 평등한 인간권리론을 주장하였다.5) 그런데 이 시기의 대한제국에서 전개된 여성운동은, 세계사적 차원에서 바라보자면, 이미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를 기점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초기 부르주아 여성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탈이라는 당대의 역사적 배경이 지니는 특수성과 긴밀한 연관을 지니고 있었다. 즉 한국의 초기 부르주아 여성운동은 당시 저항적 성격을 띤 민족자본 주도의 민족주의 운동과 표리 관계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예로, 1907년에 진행된 부르주아 민족운동인 국채보상운동에서 여성은 다양한 의연금 납부 조직을 결성하여 참여하였다.6)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과 여성운동과의 긴밀한 관계는 1919년 3·1 민중항쟁 때도 유지되었다. 이 시기 여성운동은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제작·반포하여 항일 정신을 고취하는 방식, 항일웅변 대회를 여는 방식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7)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조선 지역 내 공단의 증가,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동방에로의 확대, 쏘련의 탄생 등 다양한 객관적 조건의 형성으로 인해 여성 공제조합8), 여성동우회9)로 대표되는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이 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에 형성되어 있던 부르주아 여성운동의 여성 교육 및 여성의 독립적 생활에 대한 지원 운동이 전개되었다. 즉 이 시기 여성운동은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과 부르주아 여성운동 사이의 긴장된 관계 속에서 발전하였으며, 항일운동이라는 보편적 성격을 공유하고 있었다.

1920년부터 시작한 신여성운동 역시 1920년대의 여성운동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신여성운동은 크게 부르주아적 신여성운동과 프롤레타리아적 신여성운동으로 나뉘었는데, 먼저 등장한 신여성운동은 부르주아적 성격을 지녔었다. 두 신여성운동 모두 당대 식민지 조선에 잔존해 있던 봉건 구습을 비판하고, 근대화된 여성관을 사회에 확립하는 데에서 동일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신여성운동은 부르주아의 기본 이념인 자유주의, 평등주의에 입각한 부르주아적 여성관을 기초로 한 데 반대, 프롤레타리아 신여성운동 즉, 사회주의적 신여성운동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주도로 하여 제국주의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역사적 사명을 지닌 투쟁가로서의 여성관을 기초로 하였다. 당시에 활동하던 남성 여성운동가인 김기전(金起展)이 ≪신여성≫ 1924년 6월호에 게재한 글은 당대 부르주아 신여성운동과 프롤레타리아 신여성운동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는 부르주아 신여성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신여성들의 외형적 삶을 보면 종래 여자들의 그 더러운 생활 역사 속에서 근본적으로 뛰쳐나오려는 노력이나 기풍이 없이 그저 과도적인 부르주아식 분위기 속에서 더러운 향락만을 탐하려고 한다. 진정한 신여성은 자기 번뇌를 가지고 자신을 극복하는 싸움 속에서 새로운 사상을 가져야 한다.”10)

1920년대 여성운동의 최대 성과는 1927년 근우회(勤友會)의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근우회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여성운동과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 간의 대립을 극복하여, 여성의 권리 신장을 이루어내고, 항일 여성운동에서 통일된 전선을 확고히 하고자 성립되었다. 근우회는 당대 여성이 겪는 사회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이 전 인류를 위한 투쟁과 분리될 수 없음을 표명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근우회 선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에 있어서 여성의 지위가 일층 저열하다. 미처 청산되지 못한 구시대의 유물이 오히려 유력하게 남아 있는 그 위에 현대적 고통이 겹겹이 가하여졌다. 그런데 조선여성을 불리하게 하는 각종의 불합리는 그 본질에 있어 조선사회 전체를 괴롭게 하는 그것과 연결된 것이며 일보를 진하여는 전 세계의 불합리와 의존 합류된 것이니 문제의 해결은 이에 서로 관련되어 따로따로 성취될 수 없게 되었다. 억울한 인류가 다 한 가지 새 생활을 개척하기 위하여 분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으며 또 역사는 그 분투의 필연적 승리를 약속하여 주고 있다. 조선 여성운동의 진정한 의의는 오직 이와 같은 역사적 사회적 배경의 이해에 의하여서만 비로소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니 우리의 역할은 결코 편협하게 국한될 것이 아니다.11)

 

근우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1931년 소멸하였다.

봉건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에 걸쳐 전개된 한국의 여성운동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그 어떤 운동도 당대의 생산양식과 분리되어 형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여성운동이 초기부터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녔던 것은, 당대 한반도를 둘러싼 일련의 정치적 사태와 연관된 것이었고, 이러한 정치적 사태는 모두 당시 세계사적인 차원에서의 생산양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즉 19세기 말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제국주의의 규정성이 지배적인 규정력으로 화하였던 시대였으며, 이 당시 한반도의 상황도 이러한 규정력에 의해 일차적으로 규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1945년 이후 해방 정국에서 전개된 여성운동은 계급적 대립의 성격을 훨씬 더 강렬하게 지니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여러 부문의 항일·노동운동 활동에 종사하였던 여성을 주축으로 조선부녀총동맹이 결성되었다. 조선부녀총동맹은 미군정의 탄압 속에서 1947년 남조선민주여성동맹으로 개편되었으며, 1951년 북조선민주여성동맹과 통합, 조선민주여성동맹으로 개편되어 사실상 이남에서 소멸 일로를 걸었다. 1945년 이후 성립된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 조직은 이남에서 갖가지 탄압 속에서 소멸하였는데, 이는 1945년부터 1950년대에 걸쳐 진행된 대규모 좌익 학살과 연속성을 지니는 것으로 된다. 이 시기 여성운동의 성과는 1948년 2월 공창제의 폐지이다.

이후 이남에서 여성운동은 어용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는 소규모 우익 여성단체가 주도하였다. 이 소규모 조직은 1959년에 통합되어 한국여성단체협의회를 구성하였는데, 이 조직의 활동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문맹퇴치나 ‘계몽교육’ 수준에 그쳤으며, 사실상 여성해방과 거리가 멀었다. 즉 1940-50년대 프롤레타리아 정치 세력을 대대적으로 학살한 후의 상황은 노동운동과 진보적 민주주의 운동의 부재였고, 두 운동의 부재는 여성운동의 소멸을 가져온 것이다.

여성운동은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오랜 황혼기를 겪어야 했다. 그러다가 1970년 전태일 열사 분신 의거를 계기로 하여 그간 묵살되어 왔던 여성 노동자의 목소리가 표출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여성 노동운동이 크게 성장하게 된다.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80%를 차지12)하였던 여성 노동자들은 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지부(이하, ‘청계피복노조’)를 결성하여 사측의 노동착취와 탄압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였다. 한일나일론 (1970), 한영섬유(1971), 크라운전자 (1972), 태광산업 (1972), 동일방직 (1976), YH 무역 (1979) 등에서도 여성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80년대에는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하여 노동운동은 변혁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변혁적 노동운동과 민주주의 운동의 대대적인 결합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성운동은 일반민주주의 운동의 한 부문으로 간주되어, 주로 여성 노동운동을 필두로 하여 성장하였다. 이를 반영하여 비단 노동운동의 영역만이 아니라 학계로 진출하여 여성 일반의 주제를 다루는 흐름도 크게 일어났다.

그러나 1991년 쏘련 붕괴 이후 변혁적 노동운동이 크게 쇠퇴하고, 변혁적 노동운동과 민주주의 운동 간의 연계성도 크게 파괴되었다. 1990년대 운동 전반에는 1980년 이후 변혁적 세계관을 담당하였던 맑스-레닌주의의 영향력이 사실상 소멸하고, 이 공백 속에 탈근대주의와 이른바, ‘탈민족주의’ 담론이 들어서게 되었다. 또한 1980년대 말부터 대대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제3의 길’·페미니즘·생태주의·소부르주아 시민사회론 등이 노동운동과 일반민주주의 운동에서 점차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반동기의 물결 속에서 과학적 세계관이 후퇴하는 틈을 타 수많은 소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가 들어서게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은 수많은 운동 영역에서 각각의 이데올로기적 체계를 고수하며 분절된 운동이 전개되는, 이른바 운동의 분열적 경향성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경향성은 계급운동에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는가? 이러한 경향성은 전체 운동에서 노동자계급 헤게모니의 지속적 약화를 가져오는 동시에, 이전 노동운동이 다루어본 경험이 없는, 여성 일반을 둘러싼 사회문제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을 계급운동 진영에 제공한다.

1990년대 이후 여성학계에 쌓인 수많은 연구는 여성이 겪는 범죄, 그리고 갖가지 차별 구조 등에 대한 다양한 접근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노동운동이 여성운동과 이전보다 더 강력한 통일을 구축하기 위해 포섭해야만 하는 몇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1990년대 이전 직장 내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벌어지던 성범죄, 그리고 여성이 일상에서 겪는 범죄 등은 사회의 근본변혁을 위한 투쟁에서 최주변부에 자리 잡은 주제였으며, 상대적으로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이 형식적으로는 확고하게 자리 잡은 현 상황에서도 성별 임금격차가 극심하게 나타나는 문제, 일터에서의 성별에 따른 차별적 대우에 관한 문제 등이 가시화되었는데, 이러한 문제는 1991년 이전 계급운동 진영에서 적어도 일반적으로는 주제화·범주화되지 않은 문제였다.

1990년대 이후 부르주아 민주주의 요소가 일정하게 강화되면서 동시적으로 발전한 여성의 인식의 발전은 계급운동으로서 노동운동에 새로운 과제를 계속 떠안기고 있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경향은 국내에서는 최근의 경향이지만, 세계사적으로는 이미 1960년대부터 두드러졌던 것이었다.

그런데 상기한 문제는 1922년 쏘련의 등장으로 시작된 전반적 위기하에서, 그리고 이후 이어진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 속에서 형성된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자본주의의 필연적 발전 국면 속에서 가시화되고 또 주제화될 수밖에 없던 문제였다. 주지하다시피 국가독점자본주의 하에서 위기는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확산되며, 이에 따라 모든 부문에서 계급투쟁이 첨예화될 수밖에 없다. 즉, 여성이 겪는 사회모순도 국가독점자본주의하에서는 단순히 경제적 위기의 한 표현태로만 될 뿐만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위기의 표현태로도 된다. 국가독점자본주의하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은 질곡에 다다라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을 억압하는 측면이 강화되고, 그만큼 이전보다 더 심각한 수준의 상대적·정체적 과잉인구화를 불러온다. 더 나아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동향에 대한 부르주아 국가의 예민성이 극도에 달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 여성이 겪을 수밖에 없는 대대적인 실업, 경력단절 문제는 계급 역관계상 총자본이 사회를 통제하려는 전술이 빚어내는 결과로 될 수 있다. 즉 과거에 여성은 자본의 상대적 잉여가치의 착취를 위해 집안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나와야 했지만, 오늘날의 자본주의 전개 양상 속에서 여성 노동자는 또한 언제든 계급 역관계상 부르주아가 이점을 얻기 위해 해고되거나, 사회적 생산의 일선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13)

왜냐하면, 첫 번째로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 중 일반적으로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계층은 남성 노동자에 해당하고, 따라서 여기서 해고가 되어도 상대적으로 불만을 표출하지 않을 계층은 여성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누군가가 (상대적으로 더) 빈털터리가 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상대적으로 가정 경제를 책임질 확률이 더 높은 남성보다는 그 반대인 여성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게 부르주아 질서의 ‘안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두 번째 이유로는, 현재까지도 여성은 사회적 생산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가정에서 무급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로 되어 있으며, 여성 역시 이러한 것의 ‘당위’를 설파하는 반동적 이데올로기에 일정 영향을 받고 있다는 데 있다.14) 세 번째로 여성의 주부화는 노동력 재생산비의 약간의 상대적 감소를 유발하는 요인으로 되기 때문이다. 물론 세 번째 요인은 단독으로서는 부르주아에게 여성 노동자 해고 및 배제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성을 사회적 생산의 영역에로 이동시키는 것을 통하여 주어지는 잉여가치가 존재(상대적 잉여가치 착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 맞벌이라고 하여도 가사노동과 육아는 주로 여성이 맡는 것이 아직까지 당연한 것으로 취급되고 있고 실제로 한국사회에서 여성 노동자가 상대적으로 가사노동과 육아를 더 많이 분담한다.15) 따라서, 여성 노동자는 노동력의 만성적인 불완전 회복을 겪을 수밖에 없고16), 자본은 이러한 노동력을 노동력의 폐기가 필요한 상황에서 일차적으로 폐기하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로, 앞선 모든 과정의 결과로서 여성 일반은 자신의 노동 능력을 복잡화·숙련화 할 기회를 잃게 되고, 종국에는 취업에 성공하더라도 저임금 단순노동, 고용 불안정 직종에 편입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모든 사회적·경제적 결과가 이념적 형태로 반영되어, 여성에 대한 일련의 차별적 인식을 재생산하고, 이러한 인식이 다시 원인의 원인으로 되어 사태를 악화하기 때문이다.17) 반동적 부르주아, 파시스트들의 여성관이 국가독점자본주의하 여성이 겪는 사회모순을 모두 정당화하는 것은 이와 관련된다.18)

오늘날 여성이 겪는, 그리고 새롭게 인식되고 있는 여성을 향한 사회모순은 그 본질상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특수한 모순이 산출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모순이며, 따라서 과거, 자유경쟁 자본주의와 독점자본주의 시기에 국한된 연구가 직접적으로 그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았던 현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모순을 정당화하는 독점부르주아의 공세는 이미 개시되었다. 이른바 첨단 심리학이라고 자칭하는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본성, 그리고 여성과 남성이 지니는 생물학적 본성을 절대화하여 그것을 절대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이를 군중에게 지속적으로 선동하고 있다. 즉 이 반동적 사상은 인간의 본성은 처음부터 이기적이고 악하며, 이는 전혀 바꿀 수 없고 따라서 자본주의는 영구 불멸이라는, 자본주의 옹호론을 구사하고 있으며,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서도 여성이 현재의 열악한 지위에 자족해야 함을 정당화하고 있다.

20세기 사회주의의 대규모 후퇴 이래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세계관은 부재해 왔다. 1990년대 이후 노동운동은 전반적으로 한국 자본주의의 전개 속에 나타나는 여러 사회모순을 하나의 과학적 체계로 설명해내기보다는, 몇 가지의 소부르주아적, 절충주의적 설명 방식에 만족해 왔다. 이 과정에서 여성운동은, 계급운동 내 개량적 방법론과는 다른,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같은 한계를 지닌 다른 소부르주아적 이론을 받아들여 여성을 둘러싼 사회현상을 ‘설명’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변혁적 노동운동이 여성운동과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현재 새롭게 현상하는, 여성을 둘러싼 사회모순의 현상 형태를 범주화하여 과학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더 많은 현상을 하나의 체계로, 일관되게 설명할수록 통일에 가까워지며, 그만큼 여성운동에서 소부르주아 사상의 영향력은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 여성이 겪는 사회모순을 연구하려면 먼저 여성을 둘러싼 사회모순의 객관성을 승인해야만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여전히 적대적 생산관계를 극복하지 못한 사회이며, 따라서 계급 적대에 기초한 사회이다. 자본주의의 적대적 생산관계는 모든 인간 간의 관계―본래 적대적이지 않았을 관계인―역시 점차적으로 적대화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생산양식 하에서 모든 인간관계는 적대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이는 여성과 남성 간의 관계도 예외가 아니다. 엥엘스가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에서 밝혔듯이, 계급 사회 형성과 함께 여성과 남성 간의 적대도 시작된 것이다.19) 여성에 대한 남성의 독재로 현상하는 성별 간 적대―여성과 남성 간의 불평등한 관계, 전근대적 남성 독재가 자행한 노골적 폭력의 자본주의적 현상태로서 남성에 의한 여성 대상 범죄 등―는 오랜 역사를 지녔으며, 이는 생산력이 과거 봉건제 사회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하에서도 역시 동일하게 (다소 약화되었지만)적용된다. 이러한 적대는 자본주의를 지양하고자 하는 계급운동 내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자본주의를 극복하지 않는 이상 누구든 주관적으로는 없앨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엥엘스가 언급하였던 바와 같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생활양식은 부르주아 계급과는 달리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가 항구적일 수 없는 조건에 있다. 즉 “이 계급에게서는 고전적 일부일처제의 기초도 역시 모두 제거”20)되어 있다. 왜냐하면, “남성의 지배와 일부일처제는 다름 아닌 재산의 보존과 그 상속을 위해 이룩된 것인데, 그들은 이러한 재산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그들에게는 남성 지배의 확립을 위한 아무런 동기도 없기”21) 때문이다. 물론 엥엘스는 이러한 관계가 딛고 선 토대가 자본주의 가족제도인 이상, 그 본원적 적대성이 완전히 극복될 수는 없음을 다시 말하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 내 여성과 남성 간의 관계가 다른 계급의 관계에 비해서 그 적대성이 매우 희석된 채로 있으나, 엄연히 적대의 가능성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조건이 부여하는 이러한 적대를 주관적으로 회피하거나 부정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그것의 원인이 사적 소유임을 설득하는 것이 여성운동과의 통일을 과제로 떠안고 있는 계급운동의 임무이다. 오직 이러한 토대 위에서만 여성 노동자계급과 남성 노동자계급 간 단결의 기초가 세워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변증법적 의미에서 통일은 양극의 대립·모순·적대를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연관 방식의 존재성을 승인하고, 더욱 높은 인식을 통해 그것을 능동적으로 지양해내는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형성되어 있는 대립·모순·적대를 증폭하는 방식으로서 여성과 남성 노동자계급 간 단결을 한사코 방해하고자 하는 자본의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공세의 대표적 구성 요소는 우생학과 생리학주의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공세는 여성과 남성 간의 적대를 영속화하는 온갖 수사들로 가득하다. 이러한 요소를 원용으로 하는 부르주아적 공세는 노동자계급의 통일된 전선의 형성을 방해하거나, 형성되어 있는 전선을 와해하려는 의도가 매우 다분하다. 노동자계급은 이러한 자본의 공세에도 철저히 대응해야 한다.

언급한 주제와 맞닿아 있는 것이 바로 부르주아, 소부르주아 진영으로서 페미니스트 진영과 프롤레타리아 운동 진영 사이의 관계 문제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에서 유의해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페미니즘은 기나긴 여성운동의 역사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이념적 체계이다. 이러한 이념의 형성에는 여성 억압의 객관적 계기들이 존재하는데, 이 사상이 여성운동 내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기에,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에서 이러한 계기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것은 매우 위험하며, 그것은 계급운동과 여성운동 간의 모순을 격화하는 데로 나아가는 데 일조할 뿐이다. 따라서 비판의 원칙은, 페미니즘이 지니는 이론적 한계를 드러내되, 동시에 그러한 이론이 형성된 객관적 계기들, 배경, 그리고 대상으로 하는 사회현상을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세계관의 일관된 체계로 포섭해내는 것으로 되어야 한다. 만약에 특정한 페미니스트가 여성 대상 범죄와 성별 임금격차, 고용에서 취약성 그리고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 멸시의 원인을 연구함에서 그릇된 사상을 지니고 있다면, 따라서 그리하여 사적 유물론적 비판이 제기되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그 이론의 한계를 비판하되 동시에 그 이론이 연구하고자 하였던 대상과 그 이론을 생성한 조건들, 즉 그것의 사회적 계기들 역시 동시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1990년대 이후에도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여성운동, 즉 노동운동의 여성 부문으로서의 여성운동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외 노동자계급과 연계가 없거나 적지만, 여성을 둘러싼 사회모순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여성운동이 전개된 바 있다. 1990년, 일본군 ‘위안부’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제국주의 전쟁범죄를 다루는 여성운동 단체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창립되었다. 그 외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평화를만드는여성회,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미군에 의한 여성 대상 범죄에 적극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운동 조직도 매우 많다. 이러한 조직들은 계급운동과 연계되어 있지 않거나, 연계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지만, 직접적 생산과정의 바깥에서 벌어지는 여성 의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유의할 수 있다. 국내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여성에 대한 차별, 멸시가 본질적으로는 자본주의·제국주의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계급운동에서 적극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IV-2. 생태

 

자본주의의 과잉생산은 그간 인류가 경험하지 못하였던 극단적인 수준의 환경오염을 만들어냈다. 자본주의의 생태 파괴는 이미 부르주아 학계 내에서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자본주의의 확대 재생산이 진행되면 될수록 생산에서 생산수단 투입계수가 상대적으로 증가하는데, 왜냐하면, 개별 기업은 생산된 가치의 전화 형태로서의 (개별적) 총가격을 낮춰야 시장에서 초과이윤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쟁이 거듭될수록 가치 총량에서 가변자본(노동력) 가치의 비중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게 되고, 그만큼 노동생산성과 상품의 재고량도 증가한다. 자본은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해당 부문에서 과잉생산을 전제하고 생산을 전개한다. 이윤을 확보하기 위한 자본의 경쟁으로 인해 과잉 생산된 상품은 자본주의 사회의 고유한 생산관계로 인하여, 개개의 효용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되지 못하며, 종국에는 폐기처분 된다. 이렇게 하여 자본은 낭비를 가속화한다. 그 결과 토지의 황폐화, 수질 오염(바다 및 지하수 오염 등), 자원낭비, 온실 기체의 과도한 유출 등의 심각한 환경오염을 유발한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사문·분석을 유의할 수 있다:

 

“급변하는 유행에 맞춰 저가의 의류를 빠르게 생산·유통하고 소비하는 소위 ‘패스트 패션’(fast fashion)을 추구하는 패션업계가 과잉생산에 따른 재고 줄이기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패스트 패션이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과잉생산에 따른 재고들이 쌓이면서 환경오염에 미치는 영향이 더 커지면서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업체의 경영적 생존은 물론 인류의 생존을 위해 패션업계의 재고 줄이기가 화두로 제기되고 있다고 LA 타임스가 3일 보도했다. LA 타임스는 패스트 패션업계의 환경 문제는 제작과정과 과잉생산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버려지는 패스트 패션 옷들로 인한 환경오염 문제도 심각하다. 패스트 패션 의류는 가격이 저렴한 대신 품질이 낮아 오랜 기간 입을 수 없을뿐더러 유행이 지나면 몇 번 입지 않았더라도 버려지기 일쑤이다. 이 때문에 자원낭비, 쓰레기 문제와 더불어 폐기된 의류의 소각 처리시 이산화탄소와 다이옥신 등 각종 유해물질을 발생시켜 지구온난화를 유발한다는 비판을 받고있는 것도 사실이다. 유엔에 따르면 패션업계는 지구 온실효과를 가속화하는 데 10%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이는 항공 및 선박업계를 합친 것보다 더 큰 수치다. 하지만 문제는 과잉생산 관행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는 데 있다. 패스트 패션 대표 주자격인 ‘H&M’의 경우 지난해 재고 규모가 무려 43억 달러에 이른다. 할인시장으로 재고 소진을 해 보지만 또 다른 유행을 지향하는 제품의 과잉생산이 이어지면서 재고의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22)

 

이름마저 ‘친환경적’인 ‘에코백’조차 자본주의적 생산에 들어서는 순간 다음과 같은 문제를 야기한다:

 

“최근 일회용 비닐봉지로 인한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한 솔루션으로 손꼽히던 면 토트백, 에코백이 과잉생산으로 인해 생각만큼 환경 친화적이지 않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미국과 영국, 덴마크에서 발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면 소재의 에코백은 131회, 텀블러는 재질에 따라 최소 15회에서 39회 이상 재사용해야만 환경 보호 효과가 발생한다. 한 사람이 여러 종류의 에코백을 가지고 있다거나, 구입 후 사용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오히려 비닐봉지보다도 더 해롭다는 것이다. 실제 섬유 재활용 및 지속가능성 전문가들은 에코백을 재활용하더라도, 가방에 인쇄된 로고와 메시지 등으로 인해 재활용 면적이 줄어든다고 강조한다. 이런 부분은 천에서 잘라내야 하고, 결국 재활용을 위해서는 10-15%의 낭비 부분이 생기게 된다.”23)

 

축산업은 지하수 오염원에서는 원자력 발전소보다 훨씬 높으며, 90%에 달하고 있는데, 이는 세계 수질 오염에서 축산업이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축산업의 과잉생산은 단순히 수질 오염만이 아니라 지구온난화에도 영향을 준다. FAO에 따르면, 2019년 기준으로 지구온난화에서 축산업의 비중은 약 18%에 하는데, R. Goodland, J. Anhang (2009)는 이보다 훨씬 높은 51%를 차지한다고 분석하고 있다.24)

바다 오염도 세계 플라스틱 산업에서의 과잉생산이 그 주된 원인으로 된다. 생산되는 플라스틱의 91%는 그대로 버려지며(오로지 생산된 것의 9%만 재활용된다, 2017년 기준), 버려진 플라스틱의 최종 정착지는 바다이다.25)

이외 수많은 환경오염에서 과잉생산이 그 근원으로 되고 있다는 보도와 분석은 차고 넘치며, 이를 모두 인용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이다.

자본주의는 그 사멸에 가까워질수록 인간과 자연 간의 모순을 더욱 더 격화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발전이란 자본의 자기 정립 활동이 확립하는 모든 생산적 요인이 가져오는 환경적 요인의 부단한 축적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축적을 구성하는 속성 중 하나가 생태 파괴, 오염의 축적이기 때문이다. 생태 파괴가 축적된다는 것은, 파괴된 생태, 환경의 오염이 사회적 수준에서 제어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음을, 즉 ‘사회적 자정 가능 수준’을 넘어섰음을 의미한다.

인간과 자연 간의 모순이 격화한다는 것은, 둘의 관계가 대립·비적대적 모순을 넘어서 적대로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적대란 인간의 고유한 활동이 더 이상 자연과 조화될 수 없다는 것, 또는 그러한 상태로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간은 항상 외적 자연의 토대 위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 따라서, 실은 인간과 자연의 적대로 나아가고 있음은 곧 인간종의 멸종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맑스가 언급한 ‘인간과 자연 간 물질대사의 균열(Riss im Stoffwechsel zwischen Mensch und Natur)’이 뜻하는 바이다.

생태운동의 기원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생태 오염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시기에 대한 인식이 먼저 필요하다. 왜냐하면, 특정한 사회모순이 없으면, 특정한 사회운동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19세기 초중반부터 본격적으로 기계제 대공업이 발달하면서 인류는 대기권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기체 이상의 물질을 방출하였다. 이 시기 인간의 생산 활동은 화석연료 연소, 금속 제련, 폐기물 소각 등 다양한 독성물질을 방출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인간의 건강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쳤다.26)

아래의 표는 전 세계적인 대기권 금속류 방출량을 보여준다:27)

 

연평균 방출량 (톤)

기간

카드뮴

구리

니켈

아연

1850-

1900

380

1,800

22,000

240

17,000

1901-

1910

900

5,300

47,000

800

39,000

1911-

1920

1,100

8,000

49,000

2,100

49,000

1921-

1930

1,400

9,600

110,000

2,100

62,000

1931-

1940

1,700

12,000

170,000

4,900

75,000

1941-

1950

2,200

17,000

170,000

8,000

96,000

1951-

1960

3,400

23,000

270,000

14,000

150,000

1961-

1970

5,400

44,000

370,000

26,000

240,000

1971-

1980

7,400

59,000

430,000

42,000

330,000

1981-

1990

5,900

47,000

340,000

33,000

260,000

 

 

삼림 파괴 역시 기계제 대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19세기 무렵에 이르러서 극심해졌다. 삼림 파괴의 주요 원인은 광산 채굴, 대규모 목장 건설, 땔감 채취, 철도 건설이었다. 일례로 1860년 이전 북아메리카에서는 농지와 목장을 조성하기 위해 약 90%의 삼림이 파괴되었다.28)

생태운동은 이와 같은, 환경오염의 발전 속에서 타당한 당위를 지니고 성장한 측면이 있다.

생태운동의 본격적인 생성 시기에 관해서는 그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산업혁명 후 생태 파괴, 특히 대기 오염과 삼림 파괴가 두드러짐에 따라 그에 조응하는 만큼 생태운동이 성장하였다는 것은, 생태운동의 역사를 되짚을 때 발견되는 보편적 사실이다. 일례로, 산업혁명 시기에 활동하였던 낭만주의 시인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는 윈더미어(Windermere) 해안 보니스(Bowness)의 1마일 떨어진 호수 지역(Lake District)의 내부로 철도가 건설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실상 단독으로 공개 반대 운동을 전개한 적도 있다.29) 이 때문에 그를 생태운동의 기반이 되는 행동양식을 남겼다고 평가하는 견해 또한 존재한다.30) 이후 환경오염이 지속적으로 증대하면서 수많은 생태운동 조직이 설립되었다. 1889년 영국에는 대대적인 모피 산업과 삼림 파괴에 의한 생물종의 다양성 감소를 막기 위한 일환으로서 깃털 연맹(The Plumage League)31)이 설립되었다.32) 또한 1898년, 대기 오염 방지를 위한 환경 조직인 석탄연기저감협회(Coal Smoke Abatement Society)33)가 설립되었다. 이 단체는 1926년 연기감소법과 1956년 청정대기법 제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34) 일국적 차원에서 자연환경 일반 보존 운동으로서의 생태운동은 1895년, 내셔널 트러스트(National Trust)를 통해서 확산되었다.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 한국지부의 소개문에 따르면,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은 “당시 영국은 무분별한 개발과 자연환경 파괴 그리고 자연·문화유산의 독점적 소유에 의한 각종 사회문제가 발생”함에 따라 탄생하였다.

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생태운동은 자본주의의 전개가 몰고 온 생태 파괴의 발전과 함께 성장하였다. 특히 그중에서도 생태운동 조직의 성립이 가장 잦았던 나라는 당시 자본주의의 발전 정도가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던 영국에 집중되어 있다.

제국주의 시대에 들어서는 자국의 생태 모순을 식민지에 전가하는 경우가 허다했으며, 제국주의 침략 행위를 통해 그 지역의 생태를 재생 불가능 수준으로 파괴한 역사 또한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로, 한국과 오키나와 등에 존재하는 미군 기지가 방출하는 오염원―불법적 독극물 처리, 무단 석유 방류 등―이 대기·토양·지하수·하천을 오염시킨 사례가 숱하게 존재한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은 베트남 전역에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 에이전트 화이트(Agent White), 에이전트 블루(Agent Blue)와 같은 독성이 매우 강한 제초제를 살포했는데, 이 때문에 생겨난 삼림 파괴는 오늘날까지 베트남 생태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제국주의 전개 양상에 따라 인간과 자연 간의 모순이 격화하면서, 20세기에 들어서 생태운동은 더욱 성장·확산하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생태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국제회의인 ‘로마클럽(Club di Roma)’이 있다. 로마클럽은 1968년, 이탈리아 자본가인 아우렐리오 페체이(Aurelio Peccei) 주도로 열린 회의로, 생태운동에 신맬서스주의를 확산시킨 일대 계기였다. 이 회의는 1972년 ≪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라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는데, 이 보고서는 인간의 누릴 수 있는 경제적 성장에는 한계가 있으며, 이것은 지구상의 유한한 자원이 절대적으로 규정짓는 필연임을 강변하고 있다. 또한 생태 파괴의 원인을 인구의 증가에 놓는다.

이 보고서는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 보고서에서 전개된 내용의 핵심은 맬서스의 ‘인구법칙’과 다를 바 없었다. 또한 이 보고서의 내용은, 이미 보고서가 나오기 전인 1968년, 폴 랄프 애얼릭(Paul Ralph Ehrlich)이 저술한 ≪인구폭탄≫이 함축한 내용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이 보고서는 생태운동이 신맬서스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이른바 ‘성장 없는 사회’, ‘제로 성장 사회’를 주장하는 데에 힘을 보탠 것으로 되었다. 놀랍게도 오늘날까지 국제적 규모의 다양한 생태운동 조류―생태 파괴의 본질을 사회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자체의 문제라고 간주하는―는 대부분 본질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공존에 관한 이러한 입장을 승인하는 데서 절대적인 동일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아니라면, 자연을 의인화하여 인류를 지배하는 절대적 주체로 상정하는 식의 신비주의·영성주의를 따르는 경우이다. 종국에는 이러한 주장 역시 신맬서스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신맬서스주의의 제국주의적 반동성은 빈곤국·개발도상국에 대한 관점에서 극렬히 드러난다. 일례로, L. 마주르, I. 앵거스 사이에서 벌어진 이른바 빈곤 인구의 ‘인구감축 논쟁’은 이 반동성을 단적으로 드러낸다.35) 신맬서스주의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이른바, ‘맬서스 트랩(Malthusian Trap)’, ‘(사회체제와 무관하게 규정된) 성장의 한계’ 등―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생태운동의 이념적 경향36)은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세계관인 맑스주의로 무장한 여러 계급운동을 이른바 ‘인간중심주의’, ‘기술지상주의’, ‘성장에 대한 무근거한 낙관주의’로 비난하는 근원으로도 된다.

물론 생태주의에 근거한 생태운동 역시 일반적으로 생태 파괴의 원인에 자본주의가 있음을 일정 인식하고 있다. 이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작년에 열린 9·24 기후정의행진의 구호, 그리고 최근 4·14 기후정의파업에서 표출된 구호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선언적으로는 거론하되, 생태 파괴라는 결과를 자본주의 경제의 일반 법칙이 어떠한 매개 범주를 거쳐서 불러오는지, 그리고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는 어떠한 사회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일절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즉 우리가 자본주의를 생태 파괴의 근본으로 놓는다면, 우리는 그 전개 양상에 대한 구체적 해명과 자본주의를 지양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청사진을 대중에게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국내 생태운동은 이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 하였다.

자본주의 발전법칙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경제적 발전법칙이 전개되는 사회를 구상하지 않고 행해지는 ‘자본주의 비판’은 엄밀히 따진다면 자본주의 비판이라고 할 수 없다. 막연한 인식은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반하는 요구를 하게 만드는 원인으로도 된다. 일례로, 생태주의에 근거한 생태운동에서 일반적으로 요구하는 ‘정의로운 전환’이 노동자계급의 이해와 전면적으로 배치된다는 것은 새삼 다룰 필요가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생태주의에 근거한 생태운동은 일반적으로 ‘생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체제의 전면적 변혁이 아니라, 체제 내에서 이른바, 소비자 ‘네트워크’ 방식으로 행해지는 ‘자율적 공동체’를 구상한다. 그러나 수많은 부르주아 전문가가 이제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생태 파괴의 근원은 과잉생산에 있다. 과잉생산이란 계획적으로 조절되지 않는 생산, 즉 무정부적 생산의 필연적 결과이다. 생산과 소비가 전일적으로 계획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또한 환경오염을 막을 수 있는 첨단 기술의 전면적이고 신속한, 체계적인 적용이 불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인류가 생태 난제를 해결하는 것은, 인간과 자연 간의 관계에서 인간이 자연을 얼마나 인간의 이해에 맞게 개변할 수 있는가의 싸움이다. 사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자연에 대한 인간의 투쟁”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 고유한 생산관계로 인해 이러한 싸움에서 ‘대자연의 복수’를 그대로 허용하고 있다.

생태운동과 사회체제의 근본변혁을 목적하는 변혁적 계급운동 사이의 대립은 매우 자주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표출되며 그것도 아주 적대적인 방식으로 발현된다. 특히 생태운동은 일반적으로 20세기 사회주의권에서 벌어졌던 생태 파괴의 몇 가지 사례에 대해 일정 학습된 경우가 많으며,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전통적인 의미의 사회주의’는 ‘대안 사회’로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사회주의의 성과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세계관의 기본 전제를 공격하는 것에서 극렬히 드러난다. 노동자계급 역시 이에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일환으로서 대응한다. 문제점은, 일차적인 운동 동기가 인간과 자연 간의 모순, 즉 생태 모순인 경우에 속하는 활동가가 (계급운동에 대립되는) 생태운동에 지속적으로 인입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는 역시 계급운동에 인입된다. 이러한 전개 양상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계급운동과 생태운동 사이에 모순을 격화하는 요인으로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변혁적 계급운동은 생태운동이 다루는 대부분의 의제를 공개적·구체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구체적인 질문에는 구체적인 해명이 필요한 법이다. 다양한 환경오염의 사례를 추출하여 이것이 어떻게 자본주의·제국주의의 내적 모순의 개별적 전개 양상으로 될 수 있는가를 과학적으로 설명해야 하며, 또한 자본주의에서는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과잉생산으로 인해 생태 파괴가 필연임을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 그리고 20세기 사회주의에서 환경오염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였으며, 실제로 20세기 사회주의에서 생태 파괴가 심각한 수준이었는지 역사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실천 외에도, 거리에 나와 생태운동과 적극적으로 접촉하면서, 어떻게 하여 생태주의자들이 맑스주의적 해법에 대해 회의하며, 맑스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지, 그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야 한다. 생태 의제에 대한 생태주의적 접근 방식과 맑스주의적 접근 방식은 그 심원에서부터 서로 근본적 대립을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대립은 표층적으로 드러난 몇 가지 문제를 다루는 것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

물질대사의 균열 정도가 날이 갈수록 심화함에 따라 적지 않은 지역에서 인간과 자연 간의 모순이 주요모순으로 현상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자본주의가 지양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인간과 자연 간 모순은 격화할 것이며, 그만큼 생태 문제가 지니는 위상은 날로 커질 것이다. 인간과 자연 간의 모순은 노동자계급의 주체적 역량에 따라 노자 대립으로 전화할 수 있다. 생태 문제에 있어 노동자계급의 일반적 과제란, 인간과 자연 간의 대립·모순을 지양하여 그것을 자체 내에 보존한 대립·모순으로서 더욱 구체적 의미를 지니는 노자 대립·모순으로 전화시키는 것에 있다.

 

 

IV-3. 장애인

 

장애인은 근대기 도래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 존재 자체가 터부시되는 방식으로, 사회의 저변을 형성해 왔다. 오늘날 장애인은 제도화된 저임금, 공공연한 차별 속에서 갖가지 사회모순이 집중적으로 노출되는, 가장 취약한 계층이다.

장애인이 겪는 특수한 사회모순은 생산력 운동에 규정된 한계성을 지우는 생산관계의 성격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생산력이란 인류가 자연과 관계함에서 그 스스로의 욕구를 얼마나 충족할 수 있냐와 관련된다. 인류는 자연을 개조하는 노동 행위를 통해 목적된 욕구를 충족하고, 이러한 충족 행위는 질적으로 더욱 높은 수준의 노동 행위를 창출해 간다. 이 과정을 통해 욕구는 부단히 상승 작용을 해 나간다. 이때 욕구의 증대는 노동 행위를 통해 형성된 개조된 자연력에 의해 추동된다. 여기서 개조된 자연력이란 노동 행위자의 이해에 맞게 변형된 자연의 특수한 규정력을 총괄한다. 특정한 욕구라는 목적성을 함유·반영한 새로운 형태의 자연물, 즉 생산물, 그리고 발달된 도구가 그것이다. 이것들은 생산력의 질료적 요인이다. 생산력의 질료적 요인은 다시 욕구, 즉 생산의 동기로서 목적성에 결합되어 특정한 욕구의 형상을 반영해 나간다. 이를 반영한 질료적 요인―원료, 노동수단, 인간 노동력 등―의 총합인 생산력은 이전의 생산력보다 더 높은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생산력 증대의 전개 과정이다.

따라서 생산력의 증대는 사용가치의 증대이다. 사용가치란, 형성되어 있는 욕구가 목적하는 바의 효용을 그 소비로서 충족하게 하는 주·객관적 규정성, 성질을 의미한다. 질적으로 새로운 사용가치의 형성은 노동 과정에 전제된 욕구를 형상인으로 하여 반영한 질료적 요인의 통일 결과이며, 효용은 이러한 사용가치 소비의 결과로서 충족된다.

그런데 이 생산력 전개 운동은 그것을 일체성의 규정으로 아우르는 형식화 작용에 의해서만 추동될 수 있다. 즉 우리가 어떠한 자연물을 다룬다는 것은 필시 어떠한 규정되어 있는 관계 내에서 그것을 수행함이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관계, 교류형태가 바로 생산관계이다. 만약에 이러한 관계가 없다면 생산력 전개 운동은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관계 형식의 고유한 규정력이 생산력 전개 운동에 반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생산력의 증대란 인간이 유효하게 활용할 수 있는 개조된 자연력의 질적 다양화, 양적 증대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활용될 수 있는 자연력>의 다양화는 곧 인간이 활용하거나 향유 가능한 자연적 요소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것이 이어서 함의하는 바는, 그러한 변형된 자연력에 결합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인간 대응 방식도 존재해야 비로소 생산력의 증대가 온전히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집터를 세울 때 나무와 돌을 활용한다는 것, 그리고 갖가지 가공된 화합물을 사용한다는 것 사이의 차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그 집터의 질료적 구성물이 바뀌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러한 갖가지 구성 요소를 생산하는 데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인간관계의 내용도 변화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생산력의 구성 요인이 발전한다는 것은 생산관계 발전의 예비이다.

그러나 생산관계는 이미 인간적 관계로 끈끈하게 형성되어 있는, 특수한 보존력을 지닌 것이므로 생산력의 내용적 발전에 항상 뒤떨어진다. 이 과정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격화되는 것이다. 생산력은 자신의 고유한 운동을 전개하면서 생산관계를 자극하고 생산관계는 그에 반작용한다. 반작용은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을 억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억압의 가장 두드러진 표현태를 말한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자본의 대대적인 가치 파괴를 동반하는 공황이라고 할 수 있다.

생산력 발전의 억압은 인간이 자신의 이해에 따라 활용할 수 있는 자연력의 발전적 전개가 억압됨을 의미한다. 자연은 인간 신체의 연장이며, 활용될 수 있는 발전된 자연력 역시 인간 자신의 발전된 신체의 연장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생산관계에 의한 생산력 발전의 억압은, 인간이 자연을 자신의 이해―개인적·고립된 차원이 아니라 전 사회적인 차원에서의―에 맞게 활용하는 것에 대한 억압이다. 이것은 앞서 다룬, 생산자를 배반하는 자연의 작용력으로서 생태 파괴, 환경오염 등으로 나타난다. 또한 생산력의 발전이 억압당한다는 것은 생산력의 변화 속에서 인간이 자연의 고유한 활동에 대해 더욱 획기적인 대응 능력을 발전시킬 기회도 억압당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애인의 권리가 제한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드러나게 된다.

인간이 자연을 자신의 이해에 맞게 개조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연과의 투쟁에서 자신의 자연적인 조건을 상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회적 조건을 창출해냄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근력이 약한 사람에게 있어 기계의 발명이란, 기계가 없었을 때 도저히 수행해낼 수 없었던 노동 활동을 영위할 수 있는 실재적 가능성이 창출되었음을 의미한다. 기계를 발명하고 그것을 상용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특수한 목적을 띠는 기계가 나타났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기 위해 형성되는 수많은 사회적 관계가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 항이 인간의 생활양식과 조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생산력의 발전을 보증하는 것으로 되나, 비조응하면 갖가지 사회모순이 격화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계화·자동화의 확장은, 그 사회체제가 당분간은 유지된다는 전제에서는 인간에게 축복이 아니라 비극이다.

자연과의 투쟁에서 신체적 조건에 커다란 제약을 받게 된 개별자는 생산력의 증대를 통해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확장하며 노동 활동을 영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활동은 어디까지나 그러한 활동을 보장할 수 있는 사회체제 속에서만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내재적 운동 양식은 필연적으로 사회 생산력의 구성 요소인 기술 발달을 장애인이 자연과의 투쟁에서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것―현재의 수준을 뛰어넘는 것으로서―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고유한 생산관계에 의해 억압되는 생산력의 내용은 곧 장애인 일반에게 〈활용될 수 있는 자연력〉으로서의 여러 가지 생산적 요인이 결합할 수 없음을 전제하고 있다. 역사적 사례로 따진다면, 봉건제 사회에서 자본제 사회로 이행하였을 때, 그것에 전제되는 생산력의 폭발적 증대는 장애인이 그간 누릴 수 없었던 일부 노동 활동을 창출하게 해 준 조건으로 되었다. 그러나 장애인이 누릴 수 있는 자본주의 생산력의 수준은 바로 이 정도의 수준에서 멈춰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G. 슈틸러는 죽어가는 사회에서의 사회발전 억압 양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총괄한다:

 

“고도로 발달한 생산의 사회화는 자본의 투하 및 운용에 있어서 생산의 전 사회적 연관을 고려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능한 한 짧은 시간에 최대로 높은 이윤을 얻으려 하는 자본가적 목표와 대립하게 된다. 교통·정보 부문, 교육, 도시와 토지이용 계획 등의 영역에서 여러 과제가 다루어져야 하는데, 이것들은 직접적 이윤획득이라는 자본가적 관심에 방해요인으로 된다. 교육 및 직업교육, 직장 및 직업의 전망, 휴양 및 건강 유지, 환경보전, 노동자계급의 소비구조 등이 문제로 대두한다. 이것은 노동자계급의 상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오직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에 의해서만 합리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생산제력은 자본주의에서도 그 같은 해결을 추구하도록 촉구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부분적으로만 또는 여러 가지 사회적 동요 및 충돌이 있을 때 도래가 가능한 것이다.”37)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사회의 총체적인 생산적 요소를 인간의 이해에 맞게, 총체적으로 운용할 수 없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적 장애38)라는 문제를 사회의 총 생산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문제는 그대로 방치되거나, 그러한 방치가 정당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상황은 장애인에게 이내 사회모순으로 작용하게 되었으며, 자본 이데올로기는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갖가지 장애인 차별적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기에 이르렀다. 예를 들어, 현재까지도 전개되고 있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장애인 지하철 이용 권리 투쟁은 바로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생산력 발전 억압과 관련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적대적 분배 관계 속에서 구성되어 있는 생산력의 일 측면인 교통수단의 활용은 비장애인의 편의에 한정되어 있다. 이것의 활용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교통수단이 장애인의 활용에 적합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되기 위한 여러 필수적 구성 요건이 자본주의 사회와 불가분을 이루는 고유한 사회적 관계에 따라 형성될 수 없음을, 또는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인간이 활용할 수 있는 자연력이 제한되어 있다. 교통수단 활용 형태의 변혁, 즉 그것을 장애인이 활용할 수 있는 일반적 형태로 변혁하는 일은 곧 생산력의 해방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력의 해방이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백한 한계가 생산양식의 고유한 전개 운동과 필연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하여 체제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장애인 운동이 장애인 권리의 증진에 있어서 전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주 그릇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간 자본주의의 발전 국면 속에서 차츰 보장되기 시작한 장애인 권리 형성의 이면에는 장애인이 주도하는 고유한 사회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장애인이 접근할 수 있는 민주적인, 그리고 초보적인 권리는 본래 자본주의가 형성한 생산력 발전과 조응될 수 있던 것―다른 부문에 대응하자면, 여성 참정권의 보장과 같이―들이었는데, 지배계급인 자본가계급은 오로지 자신들의 이윤을 증대할 수 있는 한에서만 취급될 수 있는 ‘장애인의 권리 향상’에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이 이상의 권리는 오로지 장애인의 주체적 투쟁을 통해서만 비로소 확보될 수 있었다.

장애인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 그리고 정책적 논의의 역사는 고대 노예제 시기로까지 소급되나, 근대적 의미에서 장애인에 대한 취급은 19세기 초중반에 걸쳐 전개되었다. 미국의 경우 1830년 연방 인구조사에서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언어장애인의 수를 집계하였다. 1840년에는 정신질환자와 지적장애인의 수를 집계하였다.39) 이후 서구사회 전역에서 장애인 수용 시설이 생겨났으며, 장애인 운동 단체도 1860년대에 걸쳐 등장한다.

장애인 관련 시설, 기타 법률적 제도의 정비, 장애인 운동 단체의 난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기계제 대공업의 확장에서 장애인 역시 점차 자본의 전개 운동의 질료적 요인, 즉 생산수단에 결합하는 노동력으로 전화해 가는 과정의 반영이다. 자본은 상대적 잉여가치의 착출을 위하여 여성만이 아니라 장애인을 사회 밖으로 불러낸 것이다. 당대의 장애인 교육 시설 및 수용소, 사회제도는 장애인 노동력을 관리하고 그것의 재생산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였다. 구빈원(救貧院) 역시 부랑자와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폭력적인 노동 규율 훈련소였다.40)

그러나 이내 장애인의 여러 신체적·정신적 특성은 자본의 특수한 요구, 즉 ‘경쟁에서의 승리’를 충족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사회적 판정’을 받게 되었다. 이후 장애인은 대부분 직접적인 생산과정에서 배제되어 ‘유폐된 존재’로 변화해 갔다.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장애인에 대한 제한적인 노동권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부르주아 정권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애인의 증가란,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구성인으로 편입시키지 못하는 요소의 증대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다. 사회에서 방치된 장애인의 증가는 곧 장애인 운동의 양적 팽창과 ‘급진화’를 불러올 것이다. 즉 총자본의 의도를 반영하는 정권의 안정성을 기하는 데 있어 이제 장애인은 걸림돌이 된다. 따라서 1907년, 미국 인디애나주는 세계 최초로 장애인 단종법(斷種法)을 시행한다. 1938년에는 33개 주가 단종법을 시행하였고, 1921년에서 1964년 사이에 약 63,000명 이상의 장애인들이 강제 불임 수술을 당하였다.41) 북유럽에서는 1929년 덴마크를 시작으로 하여, 1934년 스웨덴과 노르웨이, 1935년에는 핀란드, 1938년에는 아일랜드가 단종법을 시행하였다. 1933년, 독일에서는 집권한 나치가 단종법을 시행하였으며, 일본의 경우 이를 모태로 하여 1940년에 단종법을 시행하였다.42) 한국의 경우는 1973년 박정희 군사파쇼 정권 시기에 제정된 모자보건법이 실질적인 단종법의 역할을 하였다. 각 부르주아 정권은 이러한 행위를 ‘사회적 비용 절감’ 및 우생학적 논리로 정당화하였다.

장애인 단종 정책은 나라마다 그 폐지 시기, 또는 강제 불임 시술 조건의 ‘대폭적’ 완화 시기가 약간씩 다르다. 미국의 경우 1970년대까지 일부 주가 끝까지 단종법을 유지한 바 있다. 한국의 경우 1999년 2월, 모자보건법에서 정부가 강제 불임 조치를 명령할 수 있다는 9조 조문이 법률 개정으로 소멸하였다.

인간의 가장 초보적인 권리인 재생산권마저 박탈당한 만큼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의 수준도 극심하였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에 대응하는 장애인 운동은 노동권·재생산권·이동권 쟁취 운동, 탈시설 운동 등 다양한 분야로 나뉘며, 내부에서도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 이러한 장애인 권리 운동의 발전은 현재 부르주아 민주주의 제도의 틀에서 몇 가지 장애인 권리를 보장하는 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배계급의 반동적 분파가 장애인 권리의 축소를 부르짖는 것의 본질은, 이른바 과거부터 자본가계급이 장애인 차별의 근거로서 들이대었던 ‘사회적 비용의 절감’에 있다. 오늘날 다양한 장애인 운동 분야에서 부르주아가 대응하는 고질적인 방식 역시 ‘사회적 비용의 절감’에 그 본질이 있는 것이다. 착취분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애착’은 실은 그들의 자유로운 의지가 아니라 자본의 강제 명령의 결과이다.

변혁적 계급운동은 지배계급이 장애인 권리 운동에 흑색선전을 가하는 것에 대해 수동적으로 대응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응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장애인 권리 운동에 대한 부르주아의 대응에는, 체제 내에서 사회복지의 확충 및 확대를 위한 사회적 요구에 대한 부르주아의 대응과 동일한 보편성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착취분을 피지배계급에게 ‘제도적’으로 내어주고 싶지 않고자 하는 그들의 발악은 장애인 권리 운동에 대한 대응 방식에서도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더 나아가, 장애인은 그 생활의 일반적 조건으로 인해 프롤레타리아 계급 내 최하위 계층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운동의 혁명화의 근원으로 된다. 이 역시 변혁적 계급운동이 유의해야 할 사항이다. 마지막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장애인 차별의 근원이 자본주의임을 더욱 구체적으로 연구하여 대대적으로 선전하여야 할 것이다.

 

 

IV-4. 기타

 

앞서 다룬 부문운동 외에 수많은 의제를 중심으로 하는 운동이 존재한다.

다양한 부문운동은 자본주의 사회의 내적 모순의 다종다양한 외화 형태를 대상으로 하면서, 그 독자성을 견지하고 있다. 계급운동은 이러한 운동이 대상으로 하는 사회현상의 본질에 접근하여 그것이 자본주의의 생래적 법칙과 어떠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일례로 각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청소년운동은 교내 인권 운동과 강한 밀접성을 지니고 있는데, 교내 청소년의 인권 처우 역시 자본의 자기 증식 운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이 증식하기 위해서는 노동력이 꾸준히 재생산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노동력을 형성하는 과정이 자본주의 교육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자기 증식을 전개함에서 모든 인적 관계, 사회적 관계를 스스로의 대자적 관계에 포섭해 나간다. 이 과정은 동시에 생산의 사회적 성격이 부단히 증가하는 과정으로도 되는데, 이것은 또한 그만큼 인간관계가 자본의 자기 운동이 지속되기 위한 조건, 또는 그것이 산출하는 조건에 재구성되는 규모가 날로 커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렇듯, 자본이 사회 전반의 양상을 지배적으로 규정짓고 있는 상황에서 부문운동을 가능할 수 있게 해 주는 개별적 현상태는 자본주의의 기본 모순이라는 동일성을 공유하고 있다.

부문운동의 대상으로서 사회모순은 각자의 외재성을 지닌 채, 각자 인격체마다 상이한 규정력을 지니면서 항존한다. 예를 들어 여성이면서 동시에 장애인이고, 노동자계급일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노동자계급보다 더 많은 사회모순의 규정력을 받는다. 각각의 인격체는, 그 인격체에 있어 (인격체 외부에 존재하는) 사회모순 규정성이 어느 정도로 결합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상이한 활동 반경을 지닐 수 있다. 그것은 개별자마다 존재하는 불균등한 의식의 근거가 될 수 있으며, 각각의 개별자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설득 방향이 차별화될 수 있는 것의 근거로 된다. 결과적으로 계급운동의 내부적 단결은 이러한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달려있다.

 

 

 

V. 주관주의의 두 흐름

 

계급운동과 부문운동 간의 연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류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직접적인 인식을 절대시하는 오류이다. 직접적 인식을 절대화한다는 것은 제한적인 경험에서 얻은 일면적 인식을 절대화한다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적대계급과의 투쟁에서 우경적·기회주의적 태도를 불러온다. 또 다른 하나는 계급운동의 특수한 활동을 반영한 사유 규정을 추상적 보편화하여 그것을 절대화하는 태도이다. 추상적 보편은, 보편의 개별화 작용을 사상한 것으로서 ‘보편’, 즉 ‘정지해 있는 보편’을 의미한다. 즉, 운동에서 보편적 지위를 갖는 계급운동의 우위성을 말하지만, 계급운동이 다른 운동을 포섭할 수 있는 매개지점을 찾는 데 소홀히 하거나, 애당초 이것이 불가능함을 못 박으려는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두 가지 오류 모두 ‘주관주의적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주관주의란 사태를 변증법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생긴다.

앞서 살펴본 대로, 부문운동은 그것이 활동하는 토대, 즉 생산양식과 무관할 수 없다. 부문운동이 대상으로 하는 사회집단·계층이 겪는 사회모순은 특정한 역사적-사회적 발전 국면의 규정을 선차적으로 받는 위치에 있다. 부문운동 대상의 이러한 성격은, 이 대상을 근거로 하는 (부문)운동이 계급운동과 통일될 수 있는 근거로 되는데, 왜냐하면 본래 부문운동의 토대는 계급운동의 토대와 무연고한 것이 아님을 이 사실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 부문운동은 계급운동에 대해 단순 무연고한 차이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 차이는 각자의 부정 운동을 거쳐서 이내 서로 연관을 맺는 대립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이내 부문운동의 일부 내용이 계급운동의 일부 내용과 모순되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는 통일의 계기이다. 왜냐하면 대립과 모순은 연관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관이 존재한다는 것과 두 사회운동 범주의 활동 계기가 동일한 보편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식의 상승을 통해서 두 사회운동 범주가 통일, 즉 지양·발전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발전이 모순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순의 극복과 모순의 ‘종국적인 소멸’은 다르다. 전자는 살아있는 것이고, 후자는 사념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러한 지양은 구체적 투쟁 속에서 계속 새로운 모순 항을 산생한다. “모든 구체적인 사물, 모든 구체적인 어떤 것은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종류의 또 종종 모순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1)

여기서 ‘인식의 상승’은 중요하다. 상이한 사회운동 구성원이 서로 동일한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승인하여, 대자존재로서 노동자계급으로 전화해 가는 것은 개별에 관한 매개되지 않은 직접적인 인식으로부터 매개된 개념적 인식인 보편적 인식으로 상승하는 과정, 즉 인식의 상승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통일의 인식론적 조건에 관한 이러한 (과정이라는) 진리는 역설적으로 실천에서 경험론적 편향과 교조주의적 편향을 가져오게 하는 밑거름이 된다. 사실 구체적 보편을 인식하는 과정이라는 것은, 무지(無知)에서 지(知)로 향하는 방향성을 지니고 있기에, 두 가지 주관주의로 발현하는 단편적 이해는 실천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V-1. 직접성의 인식으로서 ‘개별’에 집착하는 우경적 편향

 

모든 인식의 단초점은 경험이다. 즉 구체적인 것에서 생동하는 직관으로 나아감으로써 가장 초보적인 인식의 축이 형성되는 지점이 바로 경험이다. 그런데 경험적 인식, 즉 감각(감성)적 인식은 지각과 그 사유 규정으로서 표상 간의 혼란으로 가득하다. 감각적 인식은 정리되지 않은 인식이다.

감각적 인식 하에서 개별적인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감각적 인식 하에서 개별자는, 보편의 실현 과정을 계기로 지닌 개별자로 인식된다기보다는, 갖가지 현존 규정의 잡다로 인식된다. 이때 반영되는 것은 엄연히 사회화된 존재, 즉 사회적 존재이므로 경험적 인식은 이 사회적 존재가 지시하는 바에 따라 추후의 인식을 형성해 나갈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것은 바로 자본에 의한 인간의 대상화로 나타난다. 이러한 대상화가 비로소 인간에게 낯선 규정력으로 발현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일컬어 소외라고 한다.

경험적 제한성을 극복하는 일에는 인식의 상승이 전제된다. 그러나 인식의 상승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인식의 상승이 추동되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 사회주의 의식의 주입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경험론적 주관주의는 이러한 의식 주입의 측면을 너무나도 간과한 나머지 각종 부르주아 사상의 침투를 ‘다양한 견해’라는 빈약한 ‘명분’하에 그대로 방치한다. 오늘날 우경적 편향은 운동 전반에 만연해 있다. 갖가지 소부르주아 사상에 대한 일말의 경계심도 없는 와중에, 심지어 독점자본의 반동적 이데올로기까지 노동운동에 공공연히 침투되는 사례도 빈번하다.

변혁적 계급의식의 형성에서 외부로부터 사회주의 의식 주입의 필연성은 어떻게 보증되는가? 그리고 사회주의 의식의 주입이 부재한 상황 속에서 자연발생성은 왜 항상 부르주아에 복무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이에 대해 레닌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자생적 운동, 즉 최소 저항 노선을 따르는 운동이 도대체 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로 이어진단 말인가? 간단한 이유에서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있어 온 것이며, 더 포괄적으로 발전해 왔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유포 수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노동계급은 자생적으로 사회주의에 이끌린다고 말한다. 사회주의 이론이 노동계급의 불행의 원인을 다른 어떤 이론보다 깊이 있고 올바르게 정의한다는 의미에서 이는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까닭에, 이 이론 자신이 자생성에 굴복하지만 않는다면, 그것이 자생성을 정복하기만 한다면,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이론을 그렇게 쉽게 체화하는 것이다. … 노동계급은 자연적으로 사회주의에 이끌려간다. 그러나 너무나 폭넓게 유포된(그리고 항상 다종다양한 형태로 부활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더욱 더 자연적으로 노동자들을 옭아매고 있다.”2)

 

본래 노동자계급은 체질적으로, 의식적으로 사회주의 이론에 이끌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딛고 서 있는 곳은 자본주의 사회이다. 각종 사회적 매체들을 동원하여 선전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공식적인 교육의 장에서나, 또는 휴식의 장에서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노동자에게 끝없이 주입되고 있다. 자본은 자신의 이해에 복무하는 이데올로기에 막대한 금전을 투입한다.

이러한 역관계 속에서 자생성에 근거한 부문운동 이데올로기는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세계관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경우가 잦다. 문제는 앞서 언급한 그대로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진지한 비판, 구체적인 취급이 없이 단순히 과학적 사회주의와 그것을 동렬에 놓는 경우가 노동운동 내에서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사회주의’라는 딱지를 붙인 반(反)사회주의 이데올로기도 존재한다.

부문운동 이데올로기의 구성 요소에는 물론 계급운동이 합리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자료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각 부문운동의 대상이 되는 계층, 사회집단이 겪는 사회적 작용에 관한 수많은 통계적 추이, 그리고 그들 운동의 역사적 발전 추이 등은 우리가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는, 또한 그래야만 하는 자료이다. 그러나, 부문운동 이데올로기가 스스로의 이념적 체계를 전제하는 선에서 활용하는 고유한 범주가 존재한다. 여기서 범주란 부문운동 이데올로기에서 고유하게 사용하는 ‘개념’들도 있지만, 이것보다 더욱 중요한 요소는, 그들이 바라보는 사회상태의 ‘내적 구조’에 관한 서술로서의 범주이다. 경험론적 주관주의는 이러한 범주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사회주의 이론에 그것을 절충한다.

검증되지 않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런 식의 절충은 노동자계급운동의 통일 단결에 심각한 혼선을 주며, 심지어 (불필요한) 내부 이론적 대립도 심화한다. 이러한 상황은 노동계급 의식 전반의 쇠퇴를 불러오며, 결과적으로는 노동운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오늘날 그 해악성의 실례(實例)를 굳이 새삼스럽게 논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V-2. 추상적 보편에 집착하는 좌경적 편향

 

계급모순은 개별화 작용하면서 다양한 파생모순으로 외화하는데, 이는 계급모순(보편)의 필연적인 존재 양식이다.1)

우리가 구체적인 것에 대한 추상적 표현, 즉 구체적인 사실에 대한 형식으로서 ‘계급모순’을 이야기할 때 쉽게 젖어 들기 쉬운 오해는 무엇인가? 바로 이러한 보편으로서 ‘계급모순’이 개별화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추상’2)하는 것이다. 즉 보편적인 모순을 이해함에서 그것을, (파생적) 대립자를 통해 자신의 동일성을 확립하는 활동적 규정성이 아니라, 정적인 방식으로, 잡다한 규정성―개별적이고 현상적인 것들―의 근저에 머물러 있는 것3)이라고 오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편자는 활동적이기 때문에 보편적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보편자와 개별자 간의 관계를 논함에서 변증법적 원칙을 견지하지 않으면 ‘보편적인 것’은 어떠한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는가? 결국 ‘보편적인 것’은 개별적인 것에 대해 보편적인 것의 지위를 확립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해에서 개별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의 고유한, 그리고 필연적인 활동의 결과가 아니라, ‘보편적인 것’과 완전히 독립된, 즉 서로 간 무한한 틈의 건너에서 무근거하게 ‘발생’한 것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사실 이 관계에서 어떠한 것이 보편자인지, 개별자인지 따질 수조차 없을 것이다. 개별적인 것의 두 계기가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이기에 비로소 개별에 대한 보편의 지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에 기초해서 이제 보편으로의 상승에 대해 언급해보도록 하자. 우리가 개별 사태로부터 보편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의 표상 속에서 전제되어 있는 ‘보편’, 즉 추상적 보편을 ‘재생’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보편으로 접근한다는 것이란 그것이 아니라, 주어진 개별적 사태의 내적 계기와 그것들의 연관을 파악하여, 그 개별적 사태에 대한 인식의 제 계기를 지양하여 보편적 인식으로 이르는 것이다. 여기서 얻어낸 보편적 인식, 즉 개념적 인식으로서 보편적 내용이란, (과정으로 파악된) 즉자적인 보편에서 개별적 사태―즉자적인 보편의 외화로서, 인식주관에게 드러나고 표현된 그 ‘개별적인 것’으로서―로의 전개 운동이 밟아나간 계기에 내재하는 모든 또는 거의 모든 매개된 범주를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생태 파괴의 현장에서 오랫동안 삶을 영위하여 그것의 심각성을 경험으로써 깨닫고, 그리하여 이것을 완전히 극복하기 위해 체제 내의 범위에서 여러 제도적 개선에 뛰어든다고 하는 것만으로는 나 스스로가 자본주의 기본모순에 대한 구체적 인식에 도달하였다고 할 수 있는가? 당연히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더욱 본질적인 문제를 체제 내 제도적 개선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태 파괴의 근원에는 자본의 자기 운동이 있다. 여기서 내가 사회모순의 보편적인 내용에 접근한다는 것은 바로 자본의 자기 운동이 생태를 파괴하는 총체적 과정에 대한 체계적 인식이다.

이제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보자. 누군가에게 위와 같은 체계적 인식이 부재한다면 그 누군가는 그것의 필연적 귀결로서 소부르주아적 동요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계급운동이 외부로부터 사회주의 의식을 이 ‘누군가’에게 주입한다면, 이때 고려해야 할 중요한 내용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사회주의 의식의 주입 대상이 지닌 인식 수준의 내적 계기와 그것의 연관 방식에 관한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은 특정 주입 내용이 구성하는 범주가 주입 대상의 인식 범주와 결합할 수 있는지에 관해 판별할 때 필수적으로 검토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상들의 세계도 즉자적 세계도 인간에 의한 자연인식의 계기, (인식의) 단계, 변화 또는 심화의 계기라는 것”4)을 상기해 본다면, 이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의 의식을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게다가 우리는 심리학자가 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특정한 권역 내에서 부문운동 조직의 고유한 활동에서 드러나는 활동상을 연구함으로써 (실천과 조응할 수 있는 측면에서는) 대략적으로, 그러나 동시에 (얻어낸 자료의 수준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부문운동의 인식 수준을 판단해야 한다. 부문운동이 계급의식을 통해 보편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이 부문의 활동가들이 여러 부문운동의 계기로서 계층적 대립, 사회집단 간의 대립의 내적 계기와 그것들의 연관 방식을 규명하고, 이를 통해 그 계기에 대한 이해를 보존한 채 그것에 녹아 있는 지(知)로 상승하는 것인데, 이 지점에서 변혁적 계급운동이 능동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다른 방향에서 총괄하자면, 이는 계급운동 진영이 부문운동의 운동적 계기를 파악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개별화 작용하는 기본모순(보편적 모순)을 더욱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과정은 부문운동이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을 이해하는 것으로 상승하는 것에 못지않게, 계급운동이 개별화 작용하는 보편적 모순의 구체적 양상을 더욱 폭넓게 이해하는 것으로서 더욱 구체적인 보편으로 접근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자면, 운동 전반이 상승·발전한다는 전제 속에서 계급운동과 부문운동 간 관계는 단순한 연대의 차원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서로 동일한 대자적 관계에 포섭되어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급운동과 부문운동 간의 관계에서 인식의 상승이 지니는 역할은, 현재 부문운동이든, 또는 (변혁적이지 않은) 노동운동이든, 관여하는 대다수 노동대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으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침식되어 있다는 상황 속에서 중요한 위상을 지닌다.

마오쩌둥이 ≪모순에 대하여≫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즉자적인 보편으로서 모순의 보편성에서, 그것의 규정된 보편으로서 모순의 특수성으로, 그리고 다시 이 특수성으로부터 즉자대자적인 보편자, 즉 회귀한 모순의 보편성으로 도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로 된다. 이 원칙은 인식 상에서도 동일하게 강조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 마오쩌둥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인류의 인식 운동의 순서로 본다면 그것은 항상 개별적인, 특수한 사물의 인식으로부터 점차 일반적인 사물의 인식에로 확대된다. 사람들은 언제나 먼저 허다한 상이한 사물의 특수한 본질을 인식한 뒤에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들을 개괄하여 제 사물의 공통한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러한 공통한 본질을 인식한 뒤에 이런 공통한 본질에 대한 인식을 지침으로 하여 아직 연구되지 않았거나 아직 깊이 연구되지 않은 각종 구체적 사물을 계속 연구하여 그 특수한 본질을 발견한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이런 공통한 본질에 대한 인식을 보충하고 풍부히 하고 발전시킬 수 있으며 또 그것을 생기가 없는, 죽은 것으로 되지 않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인식의 두 과정이다. 즉 하나는 특수로부터 일반에 이르는 과정이며 하나는 일반으로부터 특수에 이르는 과정이다.”5)

어떻게 하여 특정한 시기의 특정한 조건에서 구체적 보편에 진입한 인식은, 다른 시기와 조건에는 추상적 보편으로 전화하는가? 이러한 대립물로의 전화는 어떻게 하여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왜 인식주관에게 있어서 특정한 조건 속에서 고찰된 보편적 내용은 ‘보편에 대한 항구적인 인식’으로 될 수 없는가? 이것은 앞서 언급할 것처럼, 객관적인 보편이 부단히 자기 전개하면서 개별화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물론 이러한 개별화 작용 속에서 갱신되는 보편은 이전의 계기를 지양·보존한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과학기술을 변화한, 그리고 특정한 조건에서 역시 동일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이 갱신 속에서 총체적 구체성은 이전의 그것과는 다른 내용을 지닌다.

이는 구체적인 전술적 내용이 없이, 이미 내적으로 정식화해놓은 ‘보편’이라는 표상으로는 군중을 설득할 수 없고, 더 나아가 변혁운동에 새로운 운동인자를 인입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죽어있는 보편 표상에 근거한, 과격하기만 하고, 군중의 일반적 인식과 매개점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좌경적 공문(空文)은 사실상 아주 단적으로 표현되는 표어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실천에서 이러한 화법으로 일관하는 것은 군중에게 그 어떠한 긍정적인 효과―사회 근본변혁에 동의하거나, 직접 실천에 가담하는 것으로서―를 줄 수 있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추상적 보편에 집착하는 주관주의는 운동 확장에 크나큰 걸림돌이 된다.

 

 

 

결론

 

계급운동과 부문운동 간의 통일은 양 운동의 근거가 지니는 동일성(보편성)을 간취한 속에서, 서로의 외재적 내용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여 통일된 대오로서 계급운동의 모습은 어떠할 것인가?

통일된 대오로서 계급운동은 먼저 각종 개별적 의제를 통일된 세계관으로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을 각자의 불균등한 의식 수준과 조응할 수 있는 형태로 주조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발전한 계급운동이란, 여러 모순 항의 극복 방안을 과학적으로 해명하고 이를 군중에게 능동적·효율적·입체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계급운동이다. 이때의 계급운동은 거의 모든 개별적 사회모순에 대응되는 의제에 관해서 올바른 실천을 전개할 토대가 확립되어 있다. 발전한 계급운동의 활동 양태는 소부르주아 사상을 무원칙하게 절충하는 방식이나, 추상적으로 획득된 ‘보편’을 공염불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양태일 것이다.

그런데 계급운동은 단순히 사변 속에서 존재하는 운동이 아니다. 어느 사회운동이든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살아있는’ 조직과 활동가, 그리고 실제적인 규율, 행동강령 등의 요소가 존재한다. 그런데 이러한 구성 요소는 그것의 결합체로서 사회운동의 구체적 활동 방향과 통일을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추상적인 수준의 ‘담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군중을 전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군중과 접촉할, 그 어떠한 계획조차 없는 조직은, 그에 걸맞는 구성 요소, 즉 매우 협소한 요소를 통해서도 목표한 대로의 활동을 전개할 수 있다. 제한된 인원으로 구성된 소규모 정치조직, 서클은 그것의 전형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러한 사회운동을 구성하는 요소도 그것에 조응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가 되어야 한다.

문제는 20세기 사회주의의 대대적인 쇠퇴 후 국내에서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세계관을 선언적으로나마 표방하는 건실한 조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대부분 군중에게 일말의 영향력조차 없는 소규모 조직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선에 있다. 이러한 조직은, 물질·기술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발전한 계급운동의 내용을 온전히 실현하는 데에 커다란 제약 조건이 따른다. 즉 오늘날 수많은 ‘좌익’ 조직이 저마다 구체적이지 않은, 어떠한 면에서는 절충적인 견해를 내면화해 가며 장기적으로 소멸로 나아가는 것에는 빈약한 내적 토대의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측면이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빈약한 물질적 토대의 운동이 ‘숙명’적으로 사멸할 수밖에 없었다면,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는 존재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소규모 서클의 수준에서 전위당의 수준에 이르기까지의 도정에서 변혁운동이, 조성되는 정세마다 취해야 할 구체적인 전술이 무엇인가는 매우 중요하다. 구상된 전술이 실천에서 그 유효성이 입증됨과 동시에, 이것이 하나의 활동의 원칙으로 되어 내적인 토대를 강화하는 것으로 작용하고, 이를 통해 조직의 질적, 양적 발전이 이루어진다. 이것에 기반하여 비로소 부문운동과의 긍정적 통일을 해낼 조건이 내적으로 확립되는 것이다.

결국에는 형성되어 있는 조직적 토대를 전제한 속에서, 각 정세 구도에서 공세와 후퇴, 군중의 전취와 관련된 전략과 이를 반영한 구체적 전술이 어떠한 내용을 갖춰야 하는지가 오늘날에 해명되어야 할 문제로 된다. 계급운동과 부문운동의 통일 정도와 그것의 실현 규모, 대응 방식의 질적·양적 수준이라는 것도 바로 형성되어 있는 조직적 토대의 내용을 반영하는 선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사과연


1) 실라 로우버덤, 이효재 역 (1982), ≪영국 여성운동사≫, 종로서적, pp. 7-8.

 

2) 이에 대해서 아우구스트 베벨은 다음과 같이 적는다: “상당수의 여성들이 시대사조에 동참하기 위해서 아니면 명예욕만은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사소한 동기에서 국가 및 봉건사회의 모든 기초적 원리들을 의심하고 전복시켰던 이 대내적 운동에 뛰어들었다. … 대혁명, 마치 대기를 맑게 하는 소나기와 같이 낡은 모든 것들을 뿌리 뽑으면서 프랑스 전역을 휩쓸어 문화세계의 진보적 정신들을 열광시켰던 이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기 수십 년 전부터 이미 여성들은 학문 및 정치적 클럽에 다수 참여하면서 철학, 자연과학, 종교, 사회, 정치 문제에 대해 놀라울 정도의 대담함으로 논구하고 토론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1789년 7월 바스티유 감옥에서의 대혁명의 서곡이 시작되었을 때, 상층계급의 여성들뿐만이 아니라 평민여성들도 모두 함께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반대 혹은 찬성하면서 놀랄 만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좋은 일, 궂은 일 가리지 않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했다.” (아우구스트 베벨, 이순예 역 (1989), ≪여성론≫, 까치, p. 304.)

 

3) 이세희 (2012), ≪프랑스대혁명과 여성·여성운동≫, 탑북스, pp. 273-274.

 

4) 이세희 (2012), ≪프랑스대혁명과 여성·여성운동≫, 탑북스, pp. 274-275.

 

5) 실라 로우버덤, 이효재 역 (1982), ≪영국 여성운동사≫, 종로서적, pp. 40-41.

 

6) 예를 들어, 1857년에 조직된 여성고용촉진협회(Society for the Promotion of the Employment of Women, 이하 ‘촉진협회’)는 영국 내 여성 노동자 문제에 관여하였는데, 이 조직은 부르주아 주도로 포섭된 여성 노동자 대중 조직이었다. (강남식, 19세기 말 20세기 초 영국 페미니즘과 여성노동운동 ― 여성노동보호법을 중심으로 ― , 영국사학회, 영국연구, 2002, vol. 8, p. 73.) 촉진협회는 당시 빈곤한 노동자계급 여성에게 “자조·자립의 기회”를 부여한다는 명목으로 여성노동보호법을 폐지시켜 여성 노동시장을 개방함으로써 여성 노동권을 보장하려고 하였다. (강남식 (2002), p. 75.) 당대 영국에는 부르주아 계급에게 포섭된 이와 같은 여성 노동자 조직이 산재해 있었다. 이러한 조직들은 당대 제도권에 여권신장과 관련된 개혁안이 통과되어야 하는 당위를 설파하기도 하였다.

 

7) 실라 로우버덤, 이효재 역 (1982), ≪영국 여성운동사≫, 종로서적, p. 44.

 

8) 실라 로우버덤, 이효재 역 (1982), ≪영국 여성운동사≫, 종로서적, p. 45.

 

9) Alexandra Kollontai: Selected Articles and Speeches, Progress Publishers, 1984, p. 22.

 

10) 1889년 7월 19일 국제노동자대회에서 클라라 체트킨의 연설을 기록한 문헌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그녀[클라라 체트킨; 인용자]는 반동적 분자들이 여성노동(집 바깥에서의 노동)에 대해 반동적 관점을 지니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사회주의자의 진영에서도 역시 여성노동이 철폐되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결국에는 여성노동의 문제가 되는, 여성해방의 문제는 하나의 경제적 문제이며 위에 언급한 관점들이 지니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정도의 경제적 이해를 사회주의자들에게서 기대하게 된다. 사회주의자들은 기존의 경제발달 하에서 여성노동은 하나의 필연성이며, 여성노동의 자연스러운 경향은 각 개인이 사회에 부여하는 노동시간을 줄이거나 사회의 부를 증대시킨다는 것 그리고 남성노동과 경쟁함으로써 임금을 떨어뜨리는 것은 여성노동 그 자체가 아니라 노동을 전유하는 자본가들에 의한 여성노동의 착취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필립 S. 포너, 조금안 역 (1986), ≪클라라 체트킨 선집≫, 동녘, pp. 51-52.)

 

1) 아우구스트 베벨, 이순예 역 (1989), ≪여성론≫, 까치, p. 303.

 

2) 아우구스트 베벨, 이순예 역 (1989), ≪여성론≫, 까치, pp. 311-312.

 

3) 강남식 (2002), pp. 75-76.

 

4) 당시 영국 노동계에서 활발히 일어났던 논쟁으로, 여성이 몰리는 직종에 대한 노동시간규제, 고용금지, 모성보호조항과 관련된 논쟁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1891년 공장법 제정에서 여성세탁부 노동시간규제, 위험·유해직종에서의 여성고용금지와 모성보호조항 등에 대해 일어난 일련의 분쟁이 있다. (강남식 (2002), p. 80.)

 

5) 박용옥 (2009), ≪여성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경인문화사, pp. 4-5.

 

6) 같은 책, pp. 51-52.

7) 같은 책, pp. 119-121.

 

8) 인천선미여공조합, 평양처녀양말직공조합, 안주염직소공녀조합, 부산여공조합, 연호부인노동회 등 다양한 여성 노동조합이 생겨났다. 당시 여성 노동조합은 식민지 사회라는 특수성 하에서 사회주의적 이념에 영향을 받았다. (박용옥 (2009), ≪여성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경인문화사, p. 200.)

 

9) 1924년 5월에 창립된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운동 조직이다. (박용옥 (2009), ≪여성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경인문화사, p. 194.)

 

10) 박용옥 (2009), ≪여성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경인문화사, p. 194.

 

11) 근우회, ≪근우≫ 창간호, pp. 3-4; ≪여성운동≫, pp. 223-224.

 

12) 이옥지 (2001), ≪한국여성노동자운동사≫, 제1권, 한울, p. 143.

 

13) 이러한 문제는 세계노동조합연맹(WFTU)과 국제민주여성연맹(WIDF) 등에서 오래전부터 다루어왔다.

 

14) 안리라·김수한, 성별분업과 맞벌이 여성의 차별 인식: 가사노동, 유급노동, 성역할 인식의 효과를 중심으로, 한국산업노동학회, 산업노동연구, 2021, vol. 27, no. 3, pp. 243-244.

 

15)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맞벌이 가정에서 남성 노동자가 하루 평균 가사노동·가정관리·가족보살피기에 쏟는 시간은 108분, 여성 노동자는 374분으로 집계되었다. (혼인상태별 및 맞벌이상태별 가사노동시간 (2019), e-나라지표.)

 

16) “한편, 기혼여성들이 노동시장에 진출하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이자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일과 가정을 양립하면서 겪는 이중역할 부담으로 인한 갈등이다. 기혼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활동 외에도 가정에서 자녀 양육과 가사 등의 역할요구로 이중부담에 직면하고 있어 그들의 삶은 갈등과 긴장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이재경 외, 2006). 일과 가정에 대한 갈등은 노동생산성을 저하시키고, 직무만족을 낮추며 이직률을 높이는 부정적 결과를 양산할 뿐 아니라, 개인 차원에서도 삶의 만족도를 낮추고 정신적 또는 신체적 건강을 해치는 문제로 확인되고 있다(가영희, 2006; 박기남, 2009; 권순원 외, 2013; 이지선⋅최영훈, 2013; 김경륜 외, 2014; 유성경⋅김은석, 2015; Konrad and Mangel, 2000; 허수연, 2017 재인용).” (김희주·김지혜·장연진, 근로환경과 일⋅가정 양립 갈등이 기혼 여성 노동자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 한국가족사회복지학회, 한국가족복지학, 2020, vol. 67, no. 1, pp. 7-8.)

 

17) 안리라·김수한 (2021), p. 265.

 

18) 전반적 위기 하 파시스트의 공세에 대응하는 차원에서의 여성운동은 특히 193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 이어진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파시스트 정권 내부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쏘련 여성반파씨즘위원회은 1941년 9월 7일 최초의 집회에서 세계 여성이 파시즘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해야 함을 전 세계 여성에게 호소한 바 있다. (A. 미셸, 이혜숙 역 (1994), ≪여성해방의 역사≫, 백의, p. 119.)

 

19) “[여성에게만 적용된다는 의미에서의; 인용자] 일부일처제는 자연적 조건이 아니라 경제적 조건에 기초한, 즉 원시적·자연발생적 공동소유에 대한 사적 소유의 승리를 기초로 한 최초의 가족형태였다. 가족 내에서의 남편의 지배와 자기의 재산을 상속해야 할 확실한 자기의 자식을 보자는 것―이것이 그리스인이 공공연히 선포한 단혼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 단혼은 결코 남녀 간의 합의에 의한 결합으로서 역사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더구나 합의의 최고 형태로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이다. 그것은 한 성(性)에 의한 다른 성의 압제로서, 과거 어느 시대에서도 알지 못했던 양성 간의 모순의 선언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인쇄는 되지 않았으나 1846년 맑스와 필자가 쓴 오래된 한 원고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즉 “최초의 분업은 자식을 생산하기 위한 남녀 간의 분업이었다.” 이제 나는 여기에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자 한다. 즉 역사에 나타난 최초의 계급적 대립은 단혼 하에서 보게 되는 남녀 간 적대의 발전과 일치하며, 따라서 최초의 계급적 압박은 남성에 의한 여성의 압제와 일치한다.“ (F. 엥겔스, 김대웅 역 (1991),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아침, pp. 88-89.)

 

20) F. 엥겔스, 김대웅 역 (1991),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아침, p. 96.

 

21) 같은 책, pp. 96-97.

 

22) 남상욱, “옷 재고 줄여야 기업도 살고 환경도 산다”, ≪한국일보≫, 2019-11-05.

 

23) 김민정, “과잉 생산되는 에코백, 환경에 오히려 독… 유기농 면가방 7천번 사용해야”, ESG경제, 2021-08-31.

 

24) Keren Dopelt, Pnina Radon, Nadav Davidovitch, Environmental Effects of the Livestock Industry: The Relationship between Knowledge, Attitudes, and Behavior among Students in Israel. Int J Environ Res Public Health, p. 2.

 

25) Daniele Selby, Plastic Production Will Increase by 40% Over the Next Decade, GLOBAL CITIZEN, 2017-12-27.

 

26) J. R. 맥닐, 홍욱회 역 (2008), ≪20세기 환경의 역사≫, 에코, p. 123.

 

27) Nriagu 1994; 앞의 문헌, p. 124.

 

28) 앞의 문헌, p. 368.

 

29) Scott Hess, “Wordsworth’s Environmental Protest: The Kendal and Windermere Railroad and the Cultural Politics of Nature.” William Wordsworth and the Ecology of Authorship: The Roots of Environmentalism in Nineteenth-Century Culture, University of Virginia Press, 2012, pp. 116–117.

 

30) 주혁규, 워즈워스의 탈체화된 시각 주체와 미학적 자연, 한국영어영문학회, 2019, vol. 65, no. 4, 통권 248호, p. 643.

 

31) 현 왕립조류보호협회(Royal Society for the Protection of Birds).

 

32) Anthony N. Penna (1999), Nature’s Bounty: Historical and Modern Environmental Perspectives, Armonk, N.Y. U.S.A.: M. E. Sharpe, p. 99.

 

33) 현 환경보호 영국(Environmental Protection UK).

 

34) M. L. Bell; D. L. Davis; T. Fletcher (2004), A retrospective assessment of mortality from the London smog episode of 1952: the role of influenza and pollution, Environ Health Perspect, 2004 Jan; 112(1): 6–8.

 

35) 여성의 권리, 인구 그리고 기후변화 논쟁 3, 2010-04-16,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36) 이 점에 있어서 상당히 복잡한 문제가 파생된다. 대부분의 생태주의자는 스스로 “신맬서스주의를 지향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들 주장의 종국적 귀결은 신맬서스주의의 ‘처방’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경제적 사회구성체, 사회체제와 무관한 ‘생산력의 한계’에 얽매여 있는 이상, 생태 문제를 ‘해결’하는 ‘고리’는 필연적으로 신맬서스주의로 수렴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해의 기초 위에서 바라보는 ‘생태 문제’란, (사회체제와 무관하게) ‘자연에 필연적으로 내재한 생산력의 한계’로부터 산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영속화’된 존재 양식은 지구의 생산력과 공존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이 ‘변화할 수 없는 존재 양식’을 지닌 인간이 생태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인간의 일정량 ‘소멸’로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아니라면 더 이상의 ‘욕심’을 추동하지 않는, 이른바 ‘제로성장’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어느 쪽이든 맬서스가 ≪인구론≫에서 최종적으로 제시한 ‘해결법’과 같다.

 

37) G. 슈틸러, 홍윤기 역 (1986), ≪사회발전의 변증법≫, 미래사, pp. 113-114.

 

38) 신체적 영역 또는 정신적 영역에서의 장애와 무관하게, 사회적 장애란 본질적으로 인간과 자연 간의 상관 작용의 일부이다. 선천적인 장애와 후천적인 장애 모두 인간과 자연 간의 관계의 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인간 재생산의 장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유전학적 법칙(또는 그러한 법칙의 근거가 되는 외적 사회환경의 작용력)의 결과이며, 후자 역시 자연의 토대 위에서 행해지는 사회적 실천의 결과로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 요소 모두 자연력에 의해서만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자연력의 작용 결과까지 전체 인류의 이해에 맞게 재개조―신체적·정신적 장애를 겪는 각 개별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확실히 자연과의 투쟁에서 불리한 요소라는 점을 감안할 때―하는 것이 바로 노동 활동이다. 여기서 언급하는 ‘재개조’란, 장애를 지니고 있는 신체에 대한 의료적 개조, 또는 전 사회적으로 동원되는 (장애인)보조 체계 등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 하에서 이러한 체계는 전 사회적으로 확립될 수 없다.

 

39) K. E. 닐슨, 김승섭 역 (2020), ≪장애의 역사≫, 동아시아, p. 137.

 

40) 김도현 (2007),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메이데이, pp. 70-70.

 

41) 같은 책, p. 82.

42) 같은 책, p. 83.

 

1) V. I. 레닌, 홍영두 역 (1989), ≪철학노트≫, 논장, p. 84.

 

2) V. I. 레닌, 최호정 역 (1999), ≪무엇을 할 것인가?≫, 박종철출판사, pp. 53-54.

 

1) “보편은 오직 스스로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절대적 부정성으로서의 창조적 위력(schoepferische Macht, als die absolute Negativitaet)이다. 그 자체로서 보편은 자기 내에서의 구별작용이라고도 하겠는데, 더욱이 이 구별작용은 보편성과 일체를 이룬다는 점에서 모름지기 규정하는 작용이다. 이런 점에서 보편은, 그 자신이 곧 보편적이며 스스로 자기와 관계하는 구별을 뜻하는 제구별의 정립(das Setzen der Unterschiede)이기도 한 바, 이로써 어느덧 이 구별은 각기 고정되고 유리된 구별이 된다. 그리하여 앞에서만 해도 유한자의 대자존재로서, 또한 물성이나 실체로서 규정되었던 바로 이 유한자의 고립적인 존립이 실제로는 다름 아닌 보편성이다.” (G. W. F. 헤겔, 임석진 역 (2022), ≪대논리학≫ 제3권, 자유아카데미, pp. 74-75.) 보편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특수하게 규정되어 있는 특정 양상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 어떠한 것을 ‘보편’이라고 간주하는 것에는 이미 그것이 근저에 요지부동하게 자리 잡고 있을 ‘순수하지 않은 규정성’이 전제되어 있다.

 

2) “사람들은 개념에 관해 언급할 때 흔히 오직 추상적 보편성만을 염두에 둔다. 고로 사람들은 개념이라는 것을 보편적인 표상이라고 정의하기를 선호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것에 관련하여 색·식물·동물 등을 언급할 때, 여러 색, 여러 식물, 여러 동물 등이 서로 구별되는 그 특수한 점만 제거하고, 공통적인 점만을 보유함으로써 개념이 성립한다고 말한다. … 그러나 개념의 보편성은 특수와 대립하여 성립하는, 단순 공통적인 것이 아니라, 되려 자기 자신을 특수화(구체화)하는 것(das sich selbst Besondernde (Spezifizierende)), 그리고 타자에게서도 문제없이, 분명하게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존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 공통적인 것을 참다운 보편 즉 일반과 혼동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인식과 실천적 행동에서 지극히 중요한 것이다.” (Saemtliche Werke, Bd. 8: Frommann Verlag, Stuttgart, 1964, § 163.) 관념론자 헤겔이 개념의 절대적 자기 운동을 염두에 두었다는 점을 감안하고 이 글을 이해할 때 변증법과 유물론을 지향하는 우리는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가? 우리는 이러한 개별화 작용, 즉 구체화 작용이 보편적인 객관 현존의 본원적인 존재 양식임을 승인해야 한다.

 

3) 여기서 잡다한 규정성, 잡다한 현존재는 당연히 구체적 의미에서의 개별자의 모든 면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본래 개별자는 저마다의 구별이 서로에 관해 총체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의 표현이다. 헤겔은 관념론자로서 개별을 인식주관과 통일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헤겔의 개별자 이해에 있어 개별은 가장 구체적인 것이면서, 전체성을 드러내는 것인 동시에, 인식주관과의 관계 하에서는 “바로 그 존재의 관념적인 계기에 의하며 [개념을; 인용자] 직접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추상”(≪대논리학≫ 제3권, p. 104.)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헤겔의 관점에서 개별자는 가장 구체적인 존재인 동시에 존재하는 것들을 다양한 ‘직접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사유 과정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나는 개별에 대한 헤겔의 두 번째 규정을 굳이 사유 규정과 연동하지 않더라도 성립할 수 있는, (개별이라는 규정성을 지닌) 객관적 실재의 특정한 발현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4) V. I. 레닌, 홍영두 역 (1989), ≪철학노트≫, 논장, p. 102.

 

5) 마오쩌둥, <모순론>, ≪모택동선집≫, 제1권, 인민출판사, 북경: 1967, p. 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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