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번역] 당 조직과 당 문학*

V. I. 레닌

번역&해제 : 제일호 │ 회원, 시인

 

* 이 논문은 레닌이 망명지에서 성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온 뒤 1905년 11월 13일자 볼쉐비끼 당의 합법적 신문 ≪노바야 지즌(Novaya Zhizn:새 생활)≫ 12호에 게재되었다. 출처: Lenin Collected Works, Progress Publishers, 1965, Moscow, Volume 10, pages 44-49. 영문출처: Marxists Internet Archive (2001)

 

 

10월 혁명1) 이래 발생해 온 러시아에서의 사회민주주의적 작업을 위한 새로운 조건은 당 문학의 문제를 전면에 제기했다. 러시아가 봉건적이고 전제주의적이었던 시절의 우울한 유산인 합법적 출판과 비합법적 출판 간의 구별은 사라지기 시작했으나,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우리 수상2)의 위선적인 정부는, ≪이즈베스쨔 소베따 라보치히 제쁘따또프(Izvestia Soveta Rabochikh Deputatov)≫3)가 “비합법적으로” 인쇄될 만큼 여전히 미친 듯이 날뛰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방해할 수 없는 것을 “금지”하려는 어리석은 시도에서는 정부에 불명예를 가져오고 정부에 더 심한 도덕적 타격을 가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합법적 출판과 비합법적 출판 사이의 구별이 존재하는 한, 당 출판(party press)과 비당 출판(non-party press)에 관한 문제는 극도로 단순하고 극도로 잘못된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결정되었다.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실천적인 당 활동가 그룹들과 연계된 그룹들에 의해 운영되고 출판되는 모든 비합법적 출판은 당 출판이었다. 당들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든 합법적 출판은 비당 출판이었지만, 합법적 출판은 이러저러한 당들에 “이끌리고 있었다.”(gravitated) 부자연스러운 동맹 관계, 생소한 “동거인들”, 가짜 표지 도안은 불가피했다. 당의 견해를 표현하기를  원했던 사람들에 대한 강요된 제한들이, 당의 견해에 도달하지 못했거나 사실상 비당원인 사람들의 미성숙한 사고나 정신적 비겁함과 뒤섞여 있었다.

우화적(Aesopian) 언어, 문학적 속박, 노예적 언어, 이데올로기적 농노제의 저주받은 시대여! 프롤레타리아트는 러시아의 모든 살아있고 신선한 것들을 질식시키던 이 불결한 분위기를 끝장냈다. 그러나 아직까지 프롤레타리아트는 러시아를 위한 단지 절반의 자유만을 쟁취했을 뿐이다.

혁명은 아직 완수되지 않았다. 짜르 전제는 더 이상 혁명을 패배시킬 만큼 강하지 못하지만, 반면에 혁명 역시 아직 짜리즘을 패배시킬 만큼 강하지 못하다. 그리고 우리는 공개적이고 솔직하고 직접적이고 일관된 당 정신(party spirit)과, 실험적인, 암암리의, “외교적인”, 다루기 힘든 “합법성”과의 부자연스런 결합이 도처에서, 모든 것에 작동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부자연스러운 결합은 심지어 우리 신문에서도 느껴진다. 온건한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신문들의 간행을 금지한다는 사회민주주의적인 폭정에 관한 구치꼬프(Guchkov)4)씨의 재담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 기관지 ≪쁘롤레따리(Proletary)≫5)가 전제적이고 경찰 탄압이 지배하는 러시아의 폐쇄된 문 밖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여전하다.

비록 그러할 지라도, 절반만 완수된(half-way) 혁명은 우리 모두를, 새로운 노선에 따라 모든 것을 조직하는 작업에 즉시 착수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심지어 “합법적으로” 출판되는 것일지라도 오늘날 출판되는 문학(문헌 literature)의 십중팔구는 당 문학이 될 수 있고, 당 문학이 되어야만 한다. 부르주아적 관습, 이윤 창출, 상업화된 부르주아 출판, 부르주아적 문학 출세주의 및 개인주의, “귀족적 무정부주의”, 이윤 추구 등과는 대조적으로 사회주의적 프롤레타리아트는 당 문학의 원칙을 제시하고 이 원칙을 발전시키며 이 원칙을 최대한 충실하고 완전하게 실천에 옮겨야 한다.

당 문학의 원칙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사회주의적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문학이 개인이나 집단을 풍요롭게 하는 수단일 수 없다는 것만은 아니다. 사실 문학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의 대의와 무관한 개인적 과업이 될 수는 없다. 비당파적인 작가들을 타도하라! 문학적 초인들(supermen)을 타도하라! 문학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대의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하며, 전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으로 의식화된 전위 전체에 의해 작동되는, 하나의 단일하고 거대한 사회민주주의적 기계장치(mechanism)의 “톱니바퀴와 나사(a cog and a screw)”가 되어야만 한다. 문학은 조직적이고 계획적이며 통일적인 사회민주당 활동의 구성요소가 되어야 한다.

“모든 비유는 불완전하다”라는 독일 속담이 있다. 문학을 톱니바퀴에 비유하고 살아 있는 운동을 기계장치에 비유한 나의 비유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내가 감히 말하건대, 나의 저런 비유가 자유로운 사상 투쟁, 비판의 자유, 문학 창작의 자유 등등을 저해하고 사멸시키며 “관료주의화 한다”라고 아우성치는 신경질적인 지식인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러한 아우성은 부르주아 지식인의 개인주의의 표현에 불과할 것이다. 문학이 기계적 조절이나 평준화에, 소수에 대한 다수의 지배에 조금도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또한 이 분야에서 개인의 독창성, 개인적 취향, 사고와 상상, 형식과 내용이 더 넓은 범위에서 의심 없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점에도 의문의 여지는 없다. 이 모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프롤레타리아 당의 대의의 문학적 측면이 그것의 다른 측면들과 기계적으로 동일시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르주아지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게는 생소하고 이상한 명제, 즉 문학은 사회민주당의 활동의 다른 요소들과 불가분하게 결합된 사회민주주의 당 활동의 한 요소로 전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조금도 반박하지 못한다. 신문은 다양한 당 조직들의 기관지가 되어야만 하며, 그 필자들은 반드시 이들 조직의 조직원이 되어야만 한다. 출판과 배포의 중심, 서점과 독서 공간, 도서관 및 그와 유사한 시설들은 모두 당의 통제 아래 두어져야만 한다. 조직된 사회주의적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모든 활동들을 주시하고 그것들을 전체적으로 감독해야만 하며, 시종일관 어떠한 예외도 없이 살아 있는 프롤레타리아 대의의 삶의 흐름(life-stream)을 그 활동들에 주입시켜야만 한다. 그것을 통해 낡고 반(半)오블로모프(semi-Oblomov)적6)이며 반(半)소상인적인(semi-shopkeeper) 러시아적 원칙, 즉 ‘작가는 쓰고 독자는 읽는다’라는 원칙의 토대를 무너뜨려야 한다.

물론 우리는 아시아적 검열과 유럽 부르주아지에 의해 더럽혀져 왔던 문학 활동의 변혁이 단번에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종류의 표준화된 제도나 몇 가지 법령을 통한 해결을 옹호하는 것은 우리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여기에는 틀에 박힌 도식이 전혀 적용될 수 없다. 우리 당 전체와 전 러시아의 정치적으로 의식화된 사회민주주의적 프롤레타리아트 모두가 이 새로운 문제를 인식하고 명확하게 구체화시켜 도처에서 그것을 해결하는 것에 착수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봉건적 검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나서는, 부르주아적 소상인적인 문학적 관계들의 포로가 되기를 원하지도 않으며, 또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경찰뿐만 아니라 자본과 출세주의로부터 자유로운, 그리고 나아가 부르주아적인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로부터도 자유로운 출판을 확립하기를 원하며, 그렇게 확립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말은 독자들에게 역설적이거나 모욕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뭐라고! 자유에 대한 열렬한 투사인 일부 지식인들은 외칠지 모른다. 뭐라고, 당신은 문학 활동과 같은 섬세하고 개인적인 문제에 집단적인 통제를 가하기를 원한다고! 당신은 노동자들이 과학, 철학 또는 미학의 문제들을 다수결로 결정하기를 원하는가! 당신은 절대적으로 개인적인 이데올로기 활동의 절대적인 자유를 부정하는가!

진정하시오, 신사양반들! 무엇보다도 우리는 당 문학과 그것의 당 통제에 대한 종속을 논의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나 어떠한 제한도 없이 자유롭게 쓰거나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당을 포함한) 모든 자발적인 결사체 역시 당의 이름을 사용하여 반(反)당적 견해를 옹호하는 당원들을 쫓아낼 자유가 있다. 언론과 출판의 자유는 완전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후에는 결사의 자유 역시 완전해야만 한다. 나는 당신들이 소리치고, 거짓말하고, 마음속에 담아둔 것들을 쓸 수 있는 완전한 권리를 당신들에게 언론의 자유의 이름으로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신들은 나에게 이러저러한 견해를 주장하는 결사체에 가입하거나 탈퇴할 수 있는 권리를 결사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줄 수밖에 없다. 당은 자발적 결사체이기 때문에, 반당적 견해를 옹호하는 자들을 자체적으로 숙청하지 않는다면, 처음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나중에는 물리적으로 해체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당적인 것과 반당적인 것 사이의 경계선을 규정하기 위해 당 강령, 전술에 대한 당의 결의 그리고 당의 규약이 존재하며, 마지막으로는 국제적인 사회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자발적인 국제적 결사체―여기서는 불철저하고, 완전히 맑스주의적이지 않으면서 전혀 올바르지도 않은 개인이나 경향들을 당에 지속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당내의 주기적인 “숙청”을 실시했다―가 존재한다. 그리하여 우리 당 내에도 부르주아적인 “비판의 자유”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역시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순식간에 대중 정당이 되고 있으며, 공개된 조직으로 급격하게 바뀌고 있어서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일관되지 못한 많은 이들이 들어오는 것을 피할 수 없는데, 아마도 약간의 기독교적인 요소나 심지어 신비주의자들도 들어올 수 있다. 우리는 튼튼한 위장을 가지고 있고 바위처럼 굳센 맑스주의자들이다. 우리는 그러한 일관되지 못한 요소들을 소화해야 할 것이다. 당 내의 사상의 자유와 비판의 자유로 인해 우리가 당이라 알려진 자발적 결사체로 사람들을 조직할 자유를 잊게 될 리는 결코 없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당신들 부르주아 개인주의자들에게 절대적 자유에 관한 당신들의 이야기는 완전히 위선에 불과하다는 말을 해야 하겠다. 돈의 힘에 기초해 있는 사회, 즉 노동 인민 대중이 가난하게 살고 한 줌의 부자들이 기생충처럼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실제적이고 유효한 “자유”란 결코 있을 수가 없다. 작가 양반들, 당신들의 부르주아 출판업자와의 관계에서 당신들은 자유로운가? 당신들은 당신들에게 소설7)과 그림으로 외설물의 제공을 요구하고, “신성한” 무대예술의 “보완물”로서 매춘의 제공을 요구하는 당신네 부르주아 대중과의 관계에서 자유로운가? 이러한 절대적인 자유라는 것은 부르주아적이거나 무정부적인 수사(修辭)이다. (왜냐하면, 세계관으로서의 무정부주의는 뒤집어 놓은 부르주아 철학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회 속에서 사는 이상, 사회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부르주아 작가, 예술가 또는 여배우의 자유란 돈 가방, 부패, 매춘에 대한, 단순히 가면을 쓴(혹은 위선적으로 가면을 쓴) 종속에 불과하다.

그리고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위선을 폭로하고 가짜 상표를 찢어 버린다. 그것은 비계급적인 문학과 예술(이것은 오직 사회주의적인 초계급적 사회에서만 가능할 것이다)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는 부르주아지와 연계되어 있는, 이 위선적으로 자유로운 문학을, 공개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와 연계될 실제적으로 자유로운 문학과 대비시키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자유로운 문학일 것이다. 왜냐하면 탐욕이나 출세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 사상과 노동 인민에 대한 공감(sympathy)이 그 대열에 완전히 새로운 힘을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유로운 문학일 것이다. 왜냐하면 몇 명의 배부른 여주인공이나 비만으로 고통 받으며 권태로워하는 “만 명의 상류계층”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꽃이고 힘이며 미래인 수백, 수천만 노동 인민에게 봉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유로운 문학일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혁명적 사고의 최후의 단어(결론 the last word)를, 사회주의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경험과 살아 있는 활동으로 풍부하게 하고, 과거의 경험(과학적 사회주의, 그것의 원시적이고 유토피아적인 형태로부터 사회주의의 발전의 완성)과 현재의 경험(노동자 동지들의 현재의 투쟁) 사이의 영구적인 상호작용을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일하러 갑시다 동지들! 우리는 새롭고 힘겨운 과제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그 임무는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자계급 운동과 불가분하게 연계된 광범위하고 다채로우며 다양한 문학을 조직하는 숭고하고 감사한 임무이다. 모든 사회민주주의적 문학은 당 문학이 되어야만 한다. 모든 신문, 잡지, 출판사 등은 즉시 사업을 재조직하여 이런저런 형태로 이런저런 당 조직에 통합되는 상황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사회민주주의적” 문학은 실제적으로 이름값을 하게 될 것이고, 그때에야 비로소 “사회민주주의적” 문학은 자신의 의무를 충족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심지어 부르주아 사회의 틀 안에서조차 부르주아적 노예상태를 깨부수고 실제적으로 선진적이고 철저하게 혁명적인 계급의 운동과 융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번역 후기]

Marxists Internet Archive (https://www.marxists.org)에 실린 영역본을 번역했다. 번역의 정확성과 용어의 정확한 해석을 두고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하는 레닌의 글이라서 러시아어 원문을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러시아어 원문은 본인의 러시아어 수준이 까마귀라 참조하지 못하고 영역본만을 번역한 한계를 보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본인은 우선 러시아어 ‘литература’(literatura)에 대한 번역을 문학으로 하였지만 문헌으로 번역하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Партийная организация и партийная литература>(Partiynaya organizatsiya i partiynaya literatura, 당 조직과 당 문헌)는 흔히 <당 조직과 당 문학>으로도 많이 번역되는데, 러시아어 ‘литература’(literatura)는 문학예술뿐만 아니라 논설, 기사 등 비문학까지도 포괄하는 단어이다. 이 글에서 레닌은 당 기관지 등에 기고하는 당원들의 자세부터 문학예술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논하고 있기 때문에 ‘문헌’으로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맥락에 따라 ‘문학’, ‘문필’로도 혼용하였다.

 

(<당 조직과 당 문헌>, 권용석(야우리))

러시아어 ‘литература’(literatura)는 문학예술뿐만 아니라 논설, 기사 등 비문학까지도 포괄하는 단어이므로 광의의 의미를 지닌 문학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문헌(文獻)(1. 옛적의 제도나 문물을 아는 데 필요한 자료나 기록. 2 참고가 되는 서적이나 문서.)으로 번역하는 것 보다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V. I. 레닌, ≪레닌의 문학예술론≫, 이길주 옮김, pp. 50-56, 논장(1988). V. I. 레닌, ≪레닌저작집≫ Vol. 3-3, 김탁 옮김, pp. 310-315, 전진출판사(1990). V. I. 레닌, <당 조직과 당 문헌>, 권용석(야우리)를 참고로 번역을 했다. 1980년대 출판된 두 권의 책보다는 2019년에 지난 시절의 번역들에 문제를 제기한 권용석의 번역이 더 정확하고 매끄럽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번역을 하는 데 노사과연의 최상철 동지의 <맑스-레닌주의 문학예술론의 몇 가지 쟁점에 대한 고찰>, ≪노동사회과학≫ 제2호, (2009), pp. 289-324. 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해제]

<당 조직과 당 문학>에 대하여

 

1. <당 조직과 당 문학>이 나왔던 시대적 배경

 

(1) 1905년 10월 러시아 혁명

 

1) 피의 일요일과 쏘비에트의 창설

1905년  러시아 혁명의 배경은, 짜르의 러일 전쟁의 발발에 대한 러시아 민중의 불만과 전쟁 반대 운동 과정을 겪으면서, 고조된 민중의 짜르에 대한 불신과 힘든 삶을 영위하고 있던 노동자들의 파업이 확산된 것이었다. 사건의 발발은 1905년 1월 9일 가퐁 신부가 이끈 시위였다. 가퐁 신부는 자유주의나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지만 당시의 러시아 민중들의 삶을 아파했다. 그러나 그는 비밀경찰과 서로 연락하던 인물로서, 순진하게도 짜르 니꼴라이 2세에게 청원을 하기 위해 사전에 정부에 통보한 후 대중들을 이끌고 동궁으로 행진하고 있었다. 이 시위에서 민중은 비무장한 상태로 러일 전쟁의 중지, 대사면, 시민의 자유, 정당한 임금, 인민에 대한 토지의 점차적 양도, 보통 평등 선거권에 기초한 헌법제정회의 소집 등을 요구하였다. 착취, 빈곤, 전쟁에 허덕이던 민중의 소박한 요구였다. 그런데 이날 짜르는 비무장의 시위 대중에 발포를 했고, 이로 인해 동궁 앞 광장에서 1,000명 이상이 사망하고 2,0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짜르는 가퐁의 바람과는 달리 민중을 폭력으로 굴복시켜 저항의 싹을 잘라내어 짜르 체제의 안정을 위해 학살을 저질렀다. ‘피의 일요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짜르의 기대와는 달리 ‘피의 일요일’ 사건은 오히려 민중을 더욱 더 분노하게 만들었고 혁명의 불길로 타올랐다. 곳곳에서 대중파업이 일어났다. 1월 중에는 지난 10년간의 파업 노동자 수를 넘는 44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다. 파업은 모든 공업 중심지로 확산되었는데, 이때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수는 약 28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때 최초로 노동자 쏘비에트가 만들어졌다. 중요한 섬유공업 중심지인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서 노동자들은 장기간에 걸친 격렬한 파업투쟁 중에 전권대표자 쏘비에트를 창설했다. 1905년 10월 뻬쩨르부르그에서 노동자 대표 쏘비에트가 창설되었고 이후 러시아 각지에서 자주적인 쏘비에트가 설립되었다.

 

 

2) 전함 포템킨 호의 반란과 민족의식의 고양

저항과 투쟁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병사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6월에는 흑해 함대에 속해 있던 전함 ‘포템킨 호’에서 수병들이 불합리한 처우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심적으로 포템킨 호에 동조하던 다른 전함들은 포템킨 호에 포격을 가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배의 자침과 병사들의 소환으로 승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포템킨 호’의 반란은 우발적인 사건이며 용두사미로 끝난 감은 있지만, 국가의 전략 무기인 전함에서 일어난 반란이 체제를 위협했다는 점에서 세계에 매우 큰 충격을 주었다. 이는 러시아 제국 붕괴의 서막을 알린 사건이었으며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지는 주요한 사건이었다.

아울러 1905년 혁명은 러시아에 의해 억압받던 민족들의 저항의식도 고취시켰다. 피억압 소수민족 학생들은 짜르의 초상과 러시아어 교과서를 찢어 버리고, 러시아 관리들에게 “러시아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이렇게 혁명이 점점 더 발전해나가자 겁을 먹은 짜르 니꼴라이 2세는 8월 19일 비록 자문의회에 불과하지만, ‘제국의회’를 인정하는 양보 조치를 취했다.

 

 

3) 볼쉐비키와 멘쉐비키의 대립, 농촌의 소요, 혁명의 진행과 결과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내 두 분파인 볼쉐비키와 멘쉐비키는 1905년 혁명에 대해 서로 다른 태도를 취했다. 둘 다 당시 혁명의 성격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보았지만, 멘쉐비키는 혁명의 주관적 요소인 주체적 역량을 무시한 채 기계론적인 객관적 법칙에 매달려 1905년 러시아 혁명 시기에 부르주아계급의 헤게모니를 인정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그에 협력할 것을 주장했다. 멘쉐비키는 부르주아지가 혁명의 대열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우려했고 부르주아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모순을 희석시키려고 했다. 그 결과 멘쉐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보다는 부르주아계급의 편에 서게 된다. 러시아혁명 운동에서 다른 집단과 달리 멘쉐비키는 맑스주의를 받아들인다. (러시아의 수정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적 요소는 사라졌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는 공개적으로 거부된다. 1905년 4월 (제네바) 당 협의회에서 멘쉐비키는 정치적 강령과 전술을 채택하고 1905-190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에서 이를 적용하려고 시도한다. 그들은 노동자계급을 향하여 농민이 아니라 자유주의적인 부르주아계급과 연합할 것을 호소했다. 그들은 러시아의 농업문제가 지닌 혁명적 핵심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노·농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를 거부했다. 당의 역할을 혁명과정에서 단지 이론적인 ‘극단적 반대’에 한정시켰다. 멘쉐비키는 봉기를 반대하면서, 혁명은 자연발생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5년 12월 쏘비에트의 등장에 대해 혁명적인 지휘부로서가 아니라 지역적인 자치기관으로 이해했던 멘쉐비키는 성 뻬쩨르부르크 쏘비에트에서 노동자들이 무장을 해제할 것을 호소했다. 혁명 직후에 플레하노프는 “무기를 든 것은 잘못이다.” 라고 회고했다. 짜르의 두마(Duma)에서 멘쉐비키가 카데트와 연합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권력의 핵심인 짜르 전제정치의 타도 없이도 정치적 지위가 얻어질 수 있다는 헌법적 환상을 카데트와 공유했다. 레닌이 회고했던 것처럼 “정치사상과 정당의 한 조류로서 볼쉐비키는 1903년 이래 존재해왔다.” 볼쉐비키는 맑스주의의 혁명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그리고 뒤에는 카우츠키의 중앙파에 반대하는 ‘이론의 순수성’을 고집해 왔다. 동시에 그들은 맑스주의는 도그마로 고정된 것이 아니며 사회적 삶의 전개에 따른 계속적인 발전만이 맑스주의를 살아있는 지도원칙으로 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볼쉐비키는 노동운동의 토대 위에서 존재하고 성장해왔다. 그들은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충실했다. 그들은 노동자의 의식이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자본과 노동의 투쟁 외부로부터 from without) 사회주의 사상이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노동자계급의 운동은 프롤레타리아 전위당의 지도 없이는 경제투쟁 의식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으며, 자연발생적인 운동은 그 성장이 결코 승리를 가져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볼쉐비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일반의 연합에 의한 독재를 구성해야 하며, 사회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는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농업노동자의 독재로 성장·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농민은 이행기의 필수적인 연합세력이며, 프롤레타리아트는 민주주의 혁명에서도 헤게모니를 결코 부르주아지에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1905년 가을이 되자 투쟁은 격렬해져 갔다. 농민들은 약 2,000여 채의 지주 가옥을 불태우고 귀족들이 인민들로부터 약탈한 식량을 다시 빼앗아 와서 자신들 사이에서 분배했다. 10월에는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8시간 노동제를 중심적인 요구로 하는 파업이 전국을 뒤흔들었다. 농민도 함께 참여하는 노동자 쏘비에트는 모스크바, 뻬쩨르부르그를 포함한 많은 도시와 마을에서 출현했다. 이에 10월 17일 짜르는 입법권이 있는 의회를 약속했다. 하지만 볼쉐비키는 이러한 입법의회 역시 거부했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짜르는 혁명을 진압하고자 하는 대응들을 빠르게 내놓았다.  짜르는 큰 변혁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1월 18일 스비아토폴크 미르스키를 해임하고 후임에 알렉산드르 불리긴을 임명해서 2월 18일(음력) 황제는 〈불리긴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황제를 보필하는’ 의회 창설,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다. 위의 양보로도 질서를 회복하지 못하자, 짜르의 자문에 응할 두마(Duma)의 창설에 찬성했다. 두마의 권한이 너무 작아서 선거권에 제한이 가해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자 소요는 더욱 격화되었고 10월에는 총파업으로까지 발전했다.

총파업의 진행 속에 당황한 짜르는 9월 젬스트보 의회(러시아의 지방 의회)가 요구한 기본적인 민권 승인, 정당 결성의 허가, 보통선거를 지향하는 선거권 확대를 다룬 내용의 〈10월 선언〉에 서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선언이 발표되자 모든 주요 도시에서 선언을 지지하는 자발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성 뻬쩨르부르크 등의 파업은 공식적으로 종료하거나 빠르게 소멸했고 사면도 이루어졌다. 짜르의 이러한 양보는 소요에 대한 새로운 잔인한 반동을 내포하고 있었다. 공공연히 반유대주의 공격을 행하는 보수층의 역습도 있었고, 오데사에서는 하루에 약 500명이 피살되었다.

혁명의 정점은 12월 20일 발발한 모스크바 봉기였지만, 모스크바 봉기는 9일 만에 패배로 끝났다. 12월 5일부터 7일까지 볼쉐비키와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강행했다. 모스크바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고 정부는 7일에 병력을 보내 시가전이 시작되었다. 1주일 후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대포를 사용하여 노동자들이 점거하는 지역에 포격을 했다. 12월 18일 약 1,000명이 사망하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볼쉐비키는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구타를 당하고 살해되었다. 그러나 파업은 1906년, 1907년에도 계속되었고 그 규모는 점차 작아졌다. 1907년 6월 3일 짜르는 의회를 해산하고 수상 스톨리핀을 내세워 공공연한 반동을 시작하였다.

1905년 혁명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러시아 노동자들이 세계사의 중심에 선 사건이었으며, 이는 1917년 러시아의 10월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노동자 쏘비에트가 처음으로 만들어져서 1917년 혁명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 역시 1905년 혁명의 중요한 의의다. 그래서 레닌은 1905년 혁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05년의 “총연습”이 없었더라면 1917년 10월 혁명의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2. 레닌의 당 조직론과 문학의 당파성

 

레닌은 당 조직이 무엇이기에 모든 사회민주주의적인 문학은 당 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을까? 그래서 우선 레닌의 당 조직론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문학의 당파성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맑스와 레닌의 당 조직론

 당 조직론이란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 사회의 타파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무기로서 갖추어야 하는 조직에 관한 이론을 말한다. 이것은 크게 당 조직에 관한 이론과 그 하부조직(대중 조직)에 관한 이론으로 나누어지고 그 내용은 조직 원칙, 조직의 형식과 내용, 조직의 역할과 임무를 포괄하고 있다. 맑스와 엥겔스는 과학적 사회주의를 확립하여 자본주의의 역사적 성격과 운동법칙, 자본주의의 몰락을 과학적으로 규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사적 유물론의 ‘토대’ 개념인 바, 그것은 물질적 생산 및 생산관계가 사회의 근본적 토대로 작용한다는 것이었다. 맑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으로 인해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의 자기 운동의 결과 붕괴될 운명일 수밖에 없다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떠한 사회구성체의 몰락과 변화도 자동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한 변혁은 상부구조의 변화, 곧 국가권력의 파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의 주된 임무는 자본주의 국가권력의 탈취와 새로운 권력을 수립하는 것임을 맑스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엥겔스 역시 과학적 사회주의의 내용은 이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철폐라는 실천적 관점에서만 올바르게 해석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과학적 사회주의의 내용은 첫째로는, 극복대상인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기 위해 자본주의의 내적 운동법칙을 규명하고, 둘째로, 그것에 근거한 변혁이론으로서 전략과 전술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나아가 자본주의의 변혁에서 전략과 전술의 문제는 주체로서 노동자계급의 전략과 전술의 문제로서 제기되며, 따라서 혁명의 무기로서의 조직의 문제, 즉, 조직의 위상과 임무 역시 제기된다.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양대 계급으로 나누어진다. 자본이 무한한 자기 증식을 위하여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자본의 증가는 동시에 노동력의 고용의 증가를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는 발전의 결과 소수의 부르주아지와 다수의 프롤레타리아트로의 계급 분열이 불가피하고, 그에 따른 계급투쟁은 심화되고 자본주의 사회의 주요 계급이면서 노예의 위치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혁명이 자본주의적 모순을 철폐할 것이라고 맑스는 생각했다. 그래서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트 자체를 변혁 동인으로 파악했고, 노동자계급의 조직은 자본주의 사회가 창출하고 확대시키는 노동자계급의 현실에 따라 광범하고 굳건하게 결합되어야 하며 과학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의 정당이며 전위부대라고 말한다. 당을 만들어내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해방투쟁이고, 당의 임무와 목적은 노동자계급과 그 동맹자인 무산자의 이익과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에서 국적에 상관없이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공통된 이해관계를 고수하며 운동 전체의 이익을 대변한다. 따라서 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의 가장 선진적인 부분이며 투쟁의 과학성을 보장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조직이 바로 공산당인 것이다. 하지만 맑스의 혁명적 정당 개념은, 19세기 중반 현대적 의미의 정당이 확고히 자리 잡고 있지 못하고 부르주아적인 의회에서조차 참정권의 제한이 일반적이었을 때 나왔기 때문에, 이후의 발전된 정당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맑스의 당 조직 혹은 혁명적 정당의 개념은 광의로는 노동자계급의 조직화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협의로는 가장 선진적 노동자계급의 부위 또는 그러한 역할을 스스로 담당하는 인텔리들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맑스의 당 이론이 자본주의 사회 변혁의 추동력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를 하나의 조직으로 정립할 것을 요구했다면, 레닌은 그의 조직론에서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반영할 혁명적 전위조직으로서의 당과 노동자계급 자체를 엄밀하게 구분했다는 데 그 역사적 중요성 있다.

레닌은 맑스가 파악한 자본주의 본질을 통해 당시의 자본주의의 단계가 제국주의 단계에 도달했음을 밝히고 이것이 러시아에서 어떻게 발현되는가를 해명함과 동시에 혁명의 현실성을 제시하였다. 레닌은 맑스의 조직론을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켰는데 중요한 내용은 전위정당,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조직화의 문제, 과학적 사상에 기초한 제분파의 분리와 통합 그리고 조직의 원리에 관한 것들이다.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발달을 둘러싸고 전개된 혁명노선의 문제는 혁명 주체 형성의 문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레닌은 인민주의자들과 합법적 맑스주의자들을 비판했다. 레닌은, 러시아의 상황이 상당한 정도로 자본주의가 발전했고,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다가올 혁명의 주체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래서 레닌의 일차적 관심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화였다. 공업지대의 선진노동자계급과 지식인 대중 사이에 써클적 형태로 존재하고 있던 맑스주의 활동가 조직들을 당이라는 전국적이고도 유기적인 차원의 조직으로 재편하는 것이 현실적 과제였기에, 레닌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임무는 노동자를 조직하고 그들을 선전·선동함으로써 노동자의 억압에 대한 자발적인 투쟁을 전 계급에 대한 투쟁으로, 분명한 정치적 사회주의적 이념을 가진 정당 결성을 위한 투쟁으로 전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직의 임무와 더불어 조직의 실천력을 중대하게 평가한 레닌은 이와 같은 조직을 만들기 위해 정치신문 ≪이스크라≫를 제작하고 배포망을 전국적으로 건설하려 했다. 주어진 상황 하에서 혁명을 수행한다는 것은, 혁명적 상황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하고 변혁의 방향을 정확히 제시하며 그것을 수행할 동력을 만들고 이를 통해 실천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조직을 건설할 것인가의 문제는 주어진 상황이 이떠한가에 의해 객관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며 건설된 조직은 주어진 상황을 실천적으로 규정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혁명의 과정을 밝히는 혁명론에서는 조직론이 전략·전술론과 더불어 주요한 부분을 구성하게 된다. 어떠한 조직을 건설할 것인가는 어떠한 상황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와 밀접하게 연관된 중요한 문제이다. 레닌의 조직이론은 혁명적 전위정당론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독점적 자본 운동을 수호하는 정치적 탄압기구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혁명이 단지 객관적 조건의 성숙만으로 실현될 수 없기에 정치적 계급의식을 고양시킬 주체적인 노력을 해야 하며 국가를 타도해야 할 임무가 있다. 둘째, 짜르 전제라는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은 서구와 같은 대중적 사회주의 정당을 불가능하게 하기에 적의 적극적이고 폭력적인 탄압에 대처하기 위해 조직의 규모를 축소시키고 경험과 훈련으로 단련된 직업혁명가를 요구하게 된다. 셋째, 역사적 경험을 통해 확인하듯이 노동자계급의 운동은 대개 노동조합 운동으로 그치고 마는 경제주의로 귀결되기에 혁명적 이론은 노동자계급의 외부(전위 정당, 공산당 등 과학적 사회주의를 생성시키고 정립하는 영역)에서 도입하여 노동자계급을 통해 발현시켜야 하며 이를 전위정당의 과업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결성된 당 조직은 전위조직과 대중의 관계, 당과 노동조합의 관계, 당 운영원칙으로서의 민주집중제라는 원칙 하에서 활동해야 한다.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노동자계급의 변혁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조직의 견고함과 대중과의 관계 설정이 중요하다. 1898년 레닌과 러시아 맑스주의자들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창설했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에서 제기된 당원의 자격 문제는 당, 전위조직의 성격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멘쉐비키를 대표하는 마르토프는 당에 동조하는 사람은 누구나 당원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그와는 달리 레닌은 당을 ‘계급의 당’으로 전제한 후 계급 전체가 당의 지도하에 행동하게 될 수 있으려면, 지도자들의 안정된 조직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임무 수행이 가능해야 하며 대중의 범위가 확대될수록 당 조직은 더욱 엄격한 기준에 입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당은 직업혁명가에 의해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도와 대중의 결합 문제를 보면, 혁명 과정에서 대중은 사회변혁의 주체이며 변혁의 기본 동력이면서 동시에 당의 지도를 받아들여야 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조직 활동의 성공 여부는 대중성을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레닌은 대중추수적으로 당이 대중의 의식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정치투쟁이 고양되는 때와 장소에서 대중을 당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전위당의 임무라고 말한다. 지도와 대중은 변혁과정의 동일한 주체이면서도 동시에 구별되어야 함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 레닌의 조직이론이다.

당과 노동조합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문제는 러시아 혁명 기간의 주된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제2 인터내셔널은 노동조합에 대한 당의 우위를 인정했지만, 내용적으로는 충실하지 못했다. 레닌은 노동조합 운동이 정치투쟁으로 상승하기 위해서는 당의 지도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레닌의 조직이론은 노동운동의 개량화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레닌은 조직의 자연발생적 요소에 대한 의식적 요소의 상대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대중의 자연발생적 의식은 운동의 맹아적 형태일 뿐이기에, 대중의 의식은 자연발생적 의식보다 더욱 높은 수준으로 고양되어야 한다. 노동자의 계급운동이 자연발생적 현상으로 방치된다면, 그들의 의식과 조직 수준은 노동조합주의, 즉 자신들의 생활환경 개선과 경제적 여건의 상승에 만족하고 보수화될 것이기에, 당에 의한 지도, 즉 외부로부터 도입된 정치의식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레닌이 추구한 노동조합의 위상은 당의 사상적 선전에 녹아들고 그에 따라 당에 의해 통제되고 당에 의해 활용되는 대중조직이었다. 비합법적 당 조직은 조직적 측면에서는 합법적 대중조직에 순응하지만, 활동내용, 즉, 사상적, 정치적 측면에서는 관계가 거꾸로 되어 합법적 대중조직이 비합법적 당 조직에 순응해야 한다. 당과 노동조합의 이러한 상관성은 노동조합이 일정하게 조직적인 독립성과 대중성을 유지하면서도 당 이념의 지도를 받는 관계로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직원과 일의 처리 문제를 다루는 조직의 운영원리는 중요한 문제이다. 레닌의 조직 운영원리의 핵심은 민주집중제이다. 모순된 듯 보이는 민주와 집중은 관념적 형식논리가 아니라 혁명과정 속에서 획득된 것이라고 레닌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중앙집중을 가능한 한 크게 하려면 프롤레타리아 혁명투쟁에서 이념적이고 실천적인 지도를 할 수 있어야 하며, 중앙집중을 가능한 한 분산시키려면 당에 대한 책임감을 각 구성 부분에 부여해야 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당내 운영의 모든 의사록과 회의록을 공개하고 토론할 자유, 즉 민주주의가 주어져야 한다. 이것은 다양한 개인과 그룹에 대해 의사 표명의 기회를 주고, 모든 당원이 면밀하고 자주적인 연구를 통해 전체적인 안목을 배양하고 지도부를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이다. 또한 당의 통일을 유지하고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당 기관지인 ≪이스크라≫를 통한 자유로운 의견표시가 보장되었다. 그러나 다양한 토론과 의견교환은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형태로 집중화되어야 한다고 레닌은 지적한다. 즉, 자유에 따른 책임이 분명히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토론은 규율과 행동의 통일과 결합되어야 하며 각 구성단위는 상호비판과 자기비판을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 다수자에 대한 소수자의, 전체에 대한 부분의, 상급기관에 대한 하급기관의, 중앙에 대한 지부의 복종은 민주주의와 함께 집중의 원칙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레닌은 생각했다. 즉 자유롭게 토론하되 결의된 것은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은 민주주의와 집중의 원칙은 상호 유기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민주주의 없이 참다운 대중의 힘이 결집될 수 없으며 결집된 힘을 관철시킬 집중이 없으면 민주주의는 실현될 수 없다. 이처럼 ‘비판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로 요약될 수 있는 민주집중제는 레닌에 의해 확인된 중요한 원리이다.

 

2) 문학에 있어 당파성의 문제가 왜 중요한가?

 모든 이론은 계급적 이해의 반영임에도 불구하고 지배계급은 공평무사하고 불편부당한 비당파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계급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지배 계급의 당파성을 은폐하려는 술책에 불과할 뿐이다. 맑스주의는 이것을 폭로해야 하고 프롤레타리아적 당파성, 즉 현존하는 사회 모순을 가장 대담하고 철저하게 비판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사명으로부터 나오는 당파성을 선전해야 한다. 맑스-레닌주의 정당이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맑스-레닌주의 이론의 당파성은 당의 이론이 되어야 한다. 단, 당파성과 객관성의 일치 가능성은 끊임없는 비판과 자기비판 없이는 현실화 될 수 없다. 그래서 레닌은 비판과 자기비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당파성은 동시에 정치적 발전의 조건이기도 하며 지표이기도 하다. 어떤 주민 혹은 어떤 계급이 정치적으로 발전하고 계몽되어 자각이 높으면 높을수록, 통례적으로 그 당파성은 보다 높다. 이 통례는 모든 문명 제국의 경험에 의하여 확증되고 있다. 계급투쟁의 견지에서 본다면, 다음과 같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 즉, 무당파성 혹은 당파적 명확성의 부족, 당파적 조직성의 부족은 계급적 부동성을 뜻한다. (이것은 가장 좋은 경우이다. 최악의 경우, 이 부족은 대중이 정치적 사기꾼에게 속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이것은 의회제도의 제 국가에서는 너무나 잘 알려지고 있는 현상이다). (레닌, <페트로그라드 구(區)의회선거에서의 제 정당>, 1917, ≪레닌전집≫ 제24권, p. 533.)

혁명 계급의 당파성은 ‘당파성 일반’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편에 선 당파성이 되어야 한다. 당의 편에 선 당파성이 되어야 한다. 이 당파성을 전제로 작가는 현실의 올바른 변증법적 모사와 문학적 형상화에 임해야 한다. 아울러 국가 간의 전쟁에서도 민족주의에 빠져서는 안 되고 노동자계급의 공동이해를 강조하는 노동자 국제주의를 주장해야 한다.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투쟁, 즉 계급투쟁이 격화될수록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은 더욱 강화되어야 하며 ‘경향성’이니 ‘초당파성’이니 하는 관념적 숭배에 빠져서는 안 된다. 당파성은 주체적 요소의 객관적 발전에 대한 올바른 관계 규정, 즉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통일에 근거한 것이기에 문학이나 예술에서 당파성을 지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며 노동자의 문학이나 예술은 당파성을 지녀야 한다.

레닌은 부르주아 지식인의 개인주의적 표현과 부르주아 개인주의의 절대적 자유는 위선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문학에서의 초당파성의 위험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다. 아울러 레닌은 ‘비당적인 작가를 타도하라’, ‘문학적 초인을 타도하라’고 말하면서 당 문학과 그것에 대한 당의 통제와 노동운동과 결합된 다양한 문학에 대해 말한다. 문학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도 당의 통제 역시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모든 사회민주주의적인 문학은 당 문학이 되어야만 한다’

문학은 그것이 생산된 사회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현실에 개입해야 하고, 현실에 개입하는 즉시 보다 나은 현실을 만드는 데 다양한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혁명을 요구하는 사회민주주의적인 문학은 당 문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노사과연


1) 1905년에 발생한 피의 일요일 사건을 발단으로 하는 러시아 제국의 혁명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1905년 10월 투쟁을 의미한다. (1917년 10월 혁명과 구분된다.) 1905년 혁명(Revolution of 1905) 또는 제1차 혁명이라고도 불리며, 제2차 혁명은 1917년 2월 혁명을 가리킨다. 특정 지도자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원인과 목적은 단순한 것은 아니었지만, 반정부 운동과 폭동이 러시아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전국 총파업, 전함 포템킨 호의 반란 등으로 최고조에 이르렀지만, 헌법 제정과 무력 진압으로 점차 진정되었고 스톨리핀 총리의 1907년 6월 19일의 쿠데타로 종식되었다. 노동자 쏘비에트가 처음 만들어졌고, 레닌은 1917년 10월 혁명을 가능하게 만든 총연습이었다고 말했다. 1905년 10월의 정치적 총파업은 짜르가 1905년 10월 17일의 선언에서 인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도록 짜르를 강제했다. 볼쉐비끼는 자신의 신문을 합법적으로 발행하기 위해 이 새로운 출판의 자유를 이용했다. 1905년 12월 무장봉기가 진압된 이후, 전제는 노동자 조직과 노동자 출판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2) 러시아 제국의 초대 총리인 세르게이 율리예비치 비테(Sergei Yulyevich Witte)를 가리킨다. 짜르를 대신하여 정부 수반이 되었다. 기본적인 시민권을 보장한 1905년 10월 선언을 기초하였으나 러시아는 여전히 전제정치 하에 있었다.

 

3) ≪이즈베스쨔 소베따 라보치히 쩨뿌따또프≫(Lzvestia Soveta Rabochikh Depucatoy 노동자대표 쏘비에트 회보)는 1905년 10월부터 12월까지 발행된 성 뻬쩨르부르그 노동자 대표 쏘비에트의 기관지였다. 통산 10호가 발행되었다. 11호는 인쇄 도중에 경찰에 압수되었다.

 

4) 알렉산드로 구치꼬프(Alexander Guchkov). 러시아 귀족 출신이 아닌 상업과 산업 부르주아 출신으로 보수적 자유주의 정치인을 대표한다. 러시아 의회 3대 두마 의장을 지냈고 임시 정부에서 전쟁 장관을 역임했다. 1905년 당시 두마 의원이었다.

 

5) ≪쁘롤레따리(Proletary)≫. 볼쉐비끼의 비합법적 주간 신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3차 당 대회의 결정으로 창간된 당의 중앙 기관지. 레닌의 편집 지도 아래 1905년 5월부터 11월까지 제네바에서 간행되었다. 통산 26호가 나왔다(레닌이 러시아로 떠난 이후에는 보로프스끼의 편집 지도 아래 25호와 26호가 발행되었다). 상임 편집국원에는 루나차르스끼와 올민스끼가 포함되었다. 레닌은 ≪쁘롤레따리≫에 약 90개의 기사와 짧은 글을 기고했다. 그의 기사는 이 주간지의 정치 노선, 이데올로기적 내용과 볼쉐비키의 행로를 결정했다. 레닌은 이 주간지의 편집자와 지도자로서 엄청난 양의 일을 했다. 레닌은 출판 자료를 편집했고 원칙과 당 정신에 대해 최고의 충실성과 혁명운동의 문제들을 명료하게 밝히고 중요한 이론적 문제들을 토론하는 데 있어 정확성과 명료함을 제공했다. 이 주간지는 러시아의 모든 주요 사건과 국제 노동계급 운동에 신속하게 반응했다. 아울러 멘쉐비끼와 다른 기회주의적, 수정주의적 요소들과 끊임없이 싸웠다. ≪쁘롤레따리≫는 제3차 당 대회의 결정을 전파하는 데 많은 일을 했고 볼쉐비키의 조직적, 이데올로기적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쁘롤레따리≫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신문 중 유일하게 혁명적 맑스주의를 일관되게 지지했고 러시아의 발전하고 있는 혁명에 대한 모든 주요 문제를 다루었다. 1905년 사건들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쁘롤레따리≫는 혁명의 승리를 위해 싸우기 위해 노동인민의 광범위한 대중을 선동했다. ≪쁘롤레따리≫는 러시아의 사회민주주의 조직들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레닌의 기사 중 일부가 러시아에서 볼쉐비키에 의해 재인쇄 되어 전단지 형태로 배포되었다. ≪쁘롤레따리≫는 레닌이 1905년 11월 초 러시아로 떠난 직후 출판을 멈추었다. 마지막 25호와 26호는 보로프스끼의 편집 하에 출판되었다. 레닌이 제네바를 떠난 후 그가 이 신문을 위해 썼던 몇 개의 기사가 마지막 두 호에 등장했다.

 

6) 오블로모프(Oblomov). 러시아 작가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곤차로프(I. A. Goncharov)의 동명 소설에 등장하는 지주이자 주인공. 어떤 욕망도, 의욕도 없이 누워서 살아가는 정적인 지주계급의 인물이지만, 그 나태 아래에는 인간적 고통, 열정을 숨기고 있다.

 

7) 원문(러시아어)에는 ramkakh(영어로 번역하면 frames(틀))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잘못 인쇄된 것임에 틀림없다. 내용상 그것은 romanakh(영어로 번역하면 novels(소설))을 의미하고 있다.―전집 편집자.

 

노사과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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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연히 예전 번역해두었던 것을 참고할 일이 있어 검색하다가 이 글을 보았습니다. 자세한 해제와 제 번역에 대한 언급 감사드리며, 언젠가 뵙고 교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동지께 연대의 인사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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