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번역] 경제학*의 대상에 대하여**

인떼르(Inter)***

번역 : 김의진 │ 회원

 

 

* [역자주] 여기서 경제학이라는 용어는 대부분 영어로는 political economy로 표현되는 것이다. 기존의 한국의 운동 진영에서는 political economy를 정치경제학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경제(經濟) 자체가 일정한 정치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고 political economy는 원래 근대적 의미의 경제학을 의미했던 것으로 판단되어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경제학이라고 번역했다.

** 출처: https://revolutionarydemocracy.org/rdv2n2/inter.htm

*** [역자주] 1990년대 로씨야에서 활동했던 맑스-레닌주의 단위로서 이 글은 이들의 집단 저작으로 보인다.

 

  

 

사회과학 전반을 통틀어, 사회주의 경제학의 대상과 그 위상의 확립은 쏘련 내외의 경제학자들과 맑스주의 이론가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논쟁의 화두였다. 사회주의 경제학과 연관된 제반 자료들은, 쏘련 경제와 그 국가의 전반적인 발전 단계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며, 그 자체로서 한편으로는 경제적 토대의 실질적인 진화 과정에 대해,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전자에 의해 촉진되는 계급들 간의 변동들에 대해 증거를 제공하고 그것들을 반영하는 광범위한 문헌적 자료들이다. 맑스주의 이론가들은 사회주의 경제학의 역사를 쏘련 사회 내부에서의 계급투쟁의 표현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는 우리의 분석이 다름 아닌 맑스주의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학에 대한 논의들은 사회주의적 변혁과 새로운 사회의 건설의 과정에 참여하는 서로 다른 사회적 집단과 계급들의 노력을 체현하는 서로 다른 관점들을 비교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제 현실과 유리된 경제학자들과 정치인들의 순수 이론적, 학구적 주장들과 같은, 이 논의들에 대한 피상적이고 저급한 인식을 다루게 될 것이다. 우리는 쏘비에트 국가의 첫 번째 발전 단계에서 나타난 사회주의 건설의 가장 사활적인 문제들을 다루며, 사회-경제적 상황의 모순을 분석하는 경제적 논의들을 다룬다. 우리가 어떤 정치적 인물을 사회-경제적 조건으로부터 고립시켜 바라보지 않고, 또 후자에 의해 결정되는 그들의 정치적 활동을 고려하는 한, 이러한 논의들에서 사상가들의 창조적 활동의 결과로서 특정한 이론적 모델과 인식에 대한 투쟁보다 더 근본적인 무언가에 대해 주의를 더욱 돌릴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관한 뜨로쯔키주의-부하린주의적 ‘좌익’ 반대파의 테제와  레닌주의적 개념들 사이에서의 이론적 차이의 성격은 당대에 명백히 드러났다. 전시 공산주의 경제의 주요 요소들의 도입을 옹호했던 뜨로쯔키주의적 개념들이 혁명 러시아의 역사적 순간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오류였는지 여부는, 그러한 개념들이 생겨난 조건들로부터의 추상을 통해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다.

우리가 뜨로쯔키의 의심스러운 도덕적 및 정치적 원칙보다도, 혁명과 새로운 사회의 건설, 그리고 계급 철폐에 대해, 뜨로쯔키 개인의 태도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의심의 여지없이 주관적 요인들의 총체가 뜨로쯔키에게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러한 요인들로 설명하는 것은, 한 정치적 활동가와 이론가로서 뜨로쯔키 개인을 그의 뒤에서 그를 지지했던 사회적 세력들로부터 고립시켜 설명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오류일 것이다.

뜨로쯔키의 정치적 경력의 전체에 걸친 동요는 매우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공산주의자들에게 관건이 되는 것은, 도시와 농촌 사이에서 상품 생산이 없는 관계로의 즉각적인 이행의 문제에 대한 뜨로쯔키의 ‘좌익주의’가 매우 일시적인 성격의 것이었으며, 그 시대의 요구들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거대한 격변과 전방위적인 집산화가 일어난 1920년대 말엽에 전면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부하린주의와 뜨로쯔키주의의 본질은 1930년대 융합되었다고 한다. 부하린과 뜨로쯔키는 모두 ‘행정적 방식’으로 개혁을 수행하는 것에 원칙적으로 반대했고, 시장이 도시와 농촌 사이의 관계를 규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계획은 상당한 정도로 시장을 통해 제어되고 실현된다.”1) 뜨로쯔키의 1930년대 저서들은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에 대한 부하린의 주장과 뜨로쯔키의 주장 사이의 유사성을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뜨로쯔키주의는 쏘련에서 반혁명의 이데올로기였다.

쏘련에서 뜨로쯔키의 기회주의와 부하린주의와의 유기적인 유사성을 성공적으로, 제때에 폭로했음에도 불구하고, 뜨로쯔키주의의 언어는 해외에서, 특히 쓰딸린 사후에 호응을 끌었다. 뜨로쯔키의 저술들에 대한 수많은 출판물들이 쏟아져 나온 것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상품-화폐 관계의 보전―보편적인 집산화라는 모험주의적 정책의 결과이며, 쓰딸린에 의해 영도되는 관료주의와 농민들 앞에서 노동자들의 후퇴였다고 암시되는―을 아마도 쓰딸린이 합법화했다는 기회주의적 테제들이 특히 광범하게 유포되었다. 뜨로쯔키는 교활하게도 이러한 현상을 역사적 발전의 보다 일반적인 법칙 탓으로 돌렸고 또 모든 혁명에는 반혁명이 뒤따른다는 탓으로 돌렸다. 뜨로쯔키의 이러한 논리대로라면, 쓰딸린의 입장은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에 의해 일어난 변화와 동일선상에 놓이게 되며, 후자가 전자의 산물로 된다. 흐루쇼프-브레즈네프주의 이데올로그들도 마찬가지로 쏘련과 인민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상품-화폐 관계의 범위를 제한하기 위한 모든 시도들을 ‘좌익적’ 열망으로 간주하며 뜨로쯔키주의와 결부지었다. 여기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것은,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동일한 수정의 두 가지 측면들ㅡ수정주의의 악순환ㅡ이다.

부하린주의는 전자와 비교할 때 보다 일관적이고, 솔직하며, 소양이 있기 때문에 더 단순하다. 부하린의 테제들은 과학적 원칙으로서 사회주의 경제학 수립의 역사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연구에 있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자료이다. 흐루쇼프-브레즈네프주의의 수정주의적 테제들의 뿌리와 발생적 기원은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과, 계급모순의 성격에 대한 해석, 그리고 양자를 다루는 방식과 관련하여 폭로되었으며, 이는 사회주의 경제학의 근본적 문제에 대한 인식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의 가치는, 오늘날 맑스주의 이론가들에게 있어 부하린의 관점이 본질적으로 쓰딸린 이후 시기 사회주의 경제학 전반을 망라(網羅)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 놀라운 사실이 쓰딸린의 저작인 <쏘련 사회주의 경제의 제 문제>에서 지적되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쓰딸린은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에 쏘련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보그다노프-부하린적 견해의 자연발생적인 부활에 대해 논했다. 1951년의 논쟁들은 흐루쇼프-브레즈네프주의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거의 두 세대가 넘는 동안 은폐되었으며, 오늘날에서야 세간에 공개되고 있다.

심지어 오늘날,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쓰딸린 개인의 역할에 대해 새롭게 바라보는 관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자는 맑스-레닌주의의 이론가로서 쓰딸린에 대한 진지한 평가를 하는 데 있어서 주저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특히 우리는 그의 마지막 저작인 <경제적 제 문제>에 대해서는 지극히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다. 쓰딸린의 경제학에 대한 흐루쇼프-브레즈네프주의적 비판의 유산인 현대 러시아 공산주의 운동에서의 이러한 중대한 결점을 우리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전후 경제의 복구 직후, 쏘비에트 경제에서 질적으로 새로운 조건들이 창출된 결과, 근본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목표, 즉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이 정식화되었다. 이는 말렌꼬프의 쏘련 공산당(볼) 제19차 당 대회 연설에서 생생하게 제시되고 있다. 심지어 전쟁 시작 이전인 1941년에서조차,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위한 계획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서들이 있다. 이러한 계획들을 복구하기 위한 진지한 의지들은 전후 시기에 이르러서야 표현되었다.2)

그러나 학계에서의 상황은 개선의 여지가 많았으며, 견해들의 발전의 규모를 놓고 판단한다면, 쓰딸린은 이론가들의 부분적인 오류를 다루었던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일탈을 다루고 있었다고 우리는 올바르게 가정할 수 있다.

파시스트 독일의 참패와, 인류 역사에서 전례 없는 성장률을 통해 가속화된 국민경제의 복구는 쏘련이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최종적으로 확립했고, 이를 확증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것은 쏘련 과학원의 최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쏘비에트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쏘비에트 국가가 마치 객관적인 경제 법칙을 일체 고려하지 않고도 자신의 의지대로 경제적 토대를 재구축할 수 있을 정도로 전지전능하다는 믿음을 확산시켰다. 쏘련의 많은 경제학자들은 공산주의 사회로의 건설을 초래할 큰 길을 수립함에 의해, 독립적인 과학적 분야로서 경제학의 종말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간주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이것은 경제학에서의 주의주의와 주관주의를 의미했고 보그다노프-부하린주의 경제학의 복원을 의미했다.

쏘련의 주요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주의주의와 주관주의의 돌연한 발생을 촉진시킨 것이 무엇이었는지 찾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주의주의와 주관주의는, 당 내부의 우익적, 좌익적 일탈에 대한 투쟁 속에서 수십 년 동안 축적된 경험과 과학적 노력의 결과로 놓인 과학적 토대를 침식하는 특출난 힘으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자료들과 문헌들을 고찰할 때, 경제적 논쟁은, 즉, 쓰딸린 생전에 개시됐던 모든 이론적 전선에서의 공세는 1953년 말에 이미 전부 중지되었다.

 

 

II

 

쓰딸린 사후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공식적인 발표에 따르면 쏘비에트 체제가 거둔 성취 하에서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에 유효성이 다했다고 한다. 그것은 쏘비에트 국가의 역사에서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쏘비에트 국가의 기능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현대 수정주의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더 이상 구체적 역사적 조건에 조응하지 않았으며 특히 쏘비에트 사회의 새로운 사회적 구조에는 더더욱 조응하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이러한 것이 흐루쇼프-브레즈네프주의 이데올로그들의 목적이었다. 그들은, 공산주의 사회 건설의 문제에 대한 고전가들(맑스, 레닌 등을 일컬음-역자)의 개념들과 사회주의 사회 내부에서의 비적대적인 계급 모순들의 해결에 대한 접근과 완전히 모순되게도, 쏘비에트 국가의 질적으로 새로운 형태―‘전 인민’의 (국가-역자) 형태―로의 이행의 필연성을 위한 토대를 건설하기를 원했다.

쓰딸린 사후 경제개혁의 내용에 대한 연구로 들어가지 않으면서, 이 글은 보그다노프-부하린주의 경제학의 복원을 대표했던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 쏘비에트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나타난 반맑스주의적 견해들의 확산과,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수정주의의 ‘경제 과학’간의 유기적 연계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전자는 적어도 쏘비에트 국가에 의해 강력하게 저지당했다. 그러나 쓰딸린의 사망은 맑스-레닌주의로부터의 자생적이고 조용한 점진적인 일탈이 발생하는 것을 허용했다. 쓰딸린의 사망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유효성을 다했다는 주장을 위한 ‘적법한’ 토대의 확립과, 더 나아가 새로운 ‘사회과학’으로서 그것의 가일층의 발전을 허용했는데, 그것은 쏘련에서의 사회주의적 생산양식의 파괴와 자본주의의 복고를 초래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유효성이 다했다는 취지의 주장은 사회주의의 승리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며, 쏘련에서 자본주의가 복고될 모든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주관주의적 견해와 함께 제시됐다. 적대적 계급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철폐, 그리고 생산수단의 소유권에 있어서의 완전한 이행과 함께, 계급적 차이들, 즉, 계급 일반이 사라졌다고 가정되었고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더 이상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사회주의 사회에 고유한 사회적 차이들의 존재, 사회적 차이들의 소멸은 사회적 경제적 과정에 강한 영향을 끼치는 쏘비에트 국가(전 인민의)에 의한 의식적인 행위의 과정 속에서 수행된다. 사회주의 체제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의 결여로 특징지어지며, 착취로부터 해방된 인간들의 집단주의, 상호 유대와 동지적 협력 등에 기초한 사회적 연대의 체제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들의 틀 안에서 ‘사회적 차이들’의 존재와 그 해결책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사회주의 사회의 주요한 목표는 공산주의의 물질적-기술적 토대의 창출로 여겨졌다.)

도시와 농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차이들의, 노동자와 집단농장 농민 및 지식인들 간의 사회적 차이들의 소멸 과정은, 기술 발전 자체와 생산력의 성장으로 인해 초래되는 모순들을 제외하고는, 어떤 모순도 없는 계속적인 과정으로 보였다. 본질적으로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진화적인 과정으로 가정되었는데, 왜냐하면 사회주의 사회에서 계급 모순들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그리고 단지 존재하는 사회적 집단들 사이에서의 차이와 경계가 폐지되기 때문이었다.

현대 수정주의자들은 타인의 노동에 대한 착취를 가능케 하는 사적(私的) 자본주의 경제제도에 대한 청산의 결과로 인한 계급적대의 청산을 계급모순 자체의 소멸과 등치시킨다.3)

 

“적대와 모순은 하나가 아니며, 동일하지도 않다. 전자는 소멸할지라도, 후자는 사회주의 하에서도 여전히 존재한다.”(레닌)4)

 

물론 적대와 모순은 하나가 아니고, 동일하지도 않기 때문에, 전자를 극복하는 것은 후자를 극복하는 것을 초래하지 않는다. 이는 사회주의 경제학의 대상에 관한 맑스-레닌주의적 인식의 출발점이다. 아울러, 부하린의 저서인 ≪이행기의 경제≫에 대한 레닌의 논평이 1929년에 최초로 출판됐고, 1920년대 쏘련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퍼진 부하린주의에 대한 비판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도 강조되어야 한다.

맑스는 자본주의 체제의 철폐와 사회주의 체제로의 대체, 그리고 새로운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수립의 불가피성을 예측했다. 자본주의적 생산 형태의 기본적인 모순은, 자본주의 생산 내부에서 떠오르는 생산력의 사회적 성격과 모순되는,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의 사적 성격에 기초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철폐는 낡은 생산관계의 붕괴와, 그것이 새롭고 질적으로 상이한 종류의 (생산-역자) 관계에 의한 대체를 경과한다.

사회주의 생산관계에 의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대체는 혁명이라는 수단을 통해, 사회적 격변 등을 통해 발생한다. 즉, 그것은 비약의 형태로 일어난다. 낡은 생산관계는 생산력 발전의 형태로부터 (생산력 발전을-역자) 제약하는 요소로 전화되며, 그 결과 사회혁명이 객관적으로 불가피해지게 된다.

새로운 사회주의적 (생산-역자) 관계에 의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교체는 혁명의 과정 속에서 일어난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파괴의 전제 조건은, 폭력적 대변동의 형태 속에서 달성되는, 노동자계급에 의한 국가권력의 장악이다. 더 나아가, 꿀락(부농-역자)을 포함하는 착취계급에 대한 수탈은, 부하린의 언어로 말하자면, 폭력적 수단과 강제를 통해, 그리고 쏘비에트 국가에 의해 대표되는 노동자계급에 의한 경제외적 압력에 의해 수행된다.

그러나 이는 모든 혁명적 변혁이 일반적으로 폭력적인 사회적 대격변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약과 같은 질적인 이행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대격변을 통해 달성되는 것은 아니다. 혁명적 변혁을 폭력적 대격변과 등치시키는 것은, 비적대적 과정에 대한 변증법의 가장 근본적인 것, 즉,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발전하는 것과 사멸하는 것 사이의 모순들의 존재,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의 발전의 원천으로서 대립물의 투쟁에 대한 부정을 초래한다. 현대 수정주의자들과 부하린은 핵심적인 지점―무계급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과 공산주의로의 이행이 진화적 과정을 통해 일어나야 한다―에서 서로 일치한다. 계급들의 통일의 계기를 절대적인 위치로 상승시킴으로써, 이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모순들의 계기를 무시한다.

쏘비에트 사회주의 사회 내부에서 대립물의 투쟁은 자본주의 하에서와는 상이한 내용을 지닌다. 자본주의 하에서 자신들의 수명 이상으로 사는 계급들은 존재하며, 그들은 저항을 조직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생산력의 가일층의 발전은, 낡은 생산관계가 그들의 성장을 불가능하게 함에 따라, 이 계급들을 파괴하는 전제조건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자본주의 하에서 생산관계와 생산력 간의 모순은 계급적 적대의 힘에 의해 강화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적대(antagonism)와 모순(contradiciton)은 하나가 아니며, 같지도 않다.

 

“사회주의 생산관계,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사회 발전을 위한 무한한 가능성을 위한 조건을 열어놓았다. 사회주의 사회의 발전의 길에 놓인 장애물들은 자본주의 하에서와는 전혀 다른 종류이다: 이것들은 인민의 의식 속에 남아있는 자본주의의 잔재들과, 저발전의 상이한 표현들, 그리고 사회주의와 이질적인 가치들 등이다. 그리고 이러한 장애물들에 대해 투쟁하지 않는다면, 발전의 속도는 느려질 것이다.”5)

 

대립물의 투쟁은, 갈등으로 악화시키는 상황을 허용함이 없이, 생산력의 본질적 성격에 낙후된 생산관계를 제때에 조응시키기 위한 조건들이 존재할수록, 저항을 조직할 역량이 되는 반동적 계급들이 존재하지 않을수록, 사회주의 하에서 상이하다. 사회주의 하에서 생산력의 가일층적 발전은, 모순들이 성질에 있어서 적대적이지 않을지라도, 그러한 모순들을 해결할 때만이 가능하다.

현대 수정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종국적인 승리가 경제에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파괴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는 입장을 옹호하며, 계급적 적대의 폐지를 모든 계급적 모순의 소멸과 같은 것으로 본다. 생산력 발달을 지연시킬 수 있는 모순들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소멸과 함께 소멸되는가? 경제에서 자본주의적 요소가 폐지될 때, 사회주의의 건설은 자신의 목표를 충족시킬 수 있는가?

 

“ … 생산력에 대한 국가 소유는 갈등의 해결책이 아니며, 국가 소유의 이면에 그러한 해결책의 요소들을 구성하는 기술적인 조건들이 감추어져 있다.”

“그 해결책은 현대적 생산력의 사회적 본성에 대한 실천적인 승인에만, 그리고 따라서 생산, 전유 및 교환 양식이 생산수단의 사회주의화된 성격과 조화를 이루는 것에만 놓여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사회가 공개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생산력―전체로서 사회의 통제를 제외한 모든 통제를 넘어서서 성장한―을 소유함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6)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목표는 생산, 전유, 교환의 양식을 ‘생산수단의 사회적 성격과 조응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 및 사회적 부문의 존재와 더불어, 우리는 집단농장 부문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 … 물론, 우리의 현재의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성장과 완전히 조응하며, 7리그의 걸음으로(매우 빠른 속도로-역자) 그 발전을 촉진하고 있는 시기에 있다. 그러나 그것을 쉽게 생각하고 우리의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에 어떠한 모순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생산관계의 발전이 생산력의 발전보다 뒤처져 있고 뒤처질 것이라는 점을 볼 때, 확실히 모순은 존재하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7)

 

쓰딸린 이후 시기 쏘련의 경제적 실천이 보여주듯이(경제성장률의 지속적인 하락), 집단적 소유와 상품유통의 존재가 생산력 발달을 지연시키는 요소들이라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생산력의 발전은 오직 집단적 소유를 전 인민적 소유의 단계로 끌어올리고, 상품유통을 생산물 간의 교환으로 점진적으로 대체할 때만 이루어질 수 있다. 바로 경제적 연계의 하나의 형태로서 상품-화폐 관계의 사멸에서, 우리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계급적 차이들의 제거를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전제조건들 중 하나의 창출을 보게 된다. 쓰딸린 이후 시기의 쏘비에트 이데올로그들은 쏘련에서의 노동을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노동으로 간주했는데, 쏘련에서 생산된 모든 생산물들이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상품의 형태를 취했다는 것과도 명백하게 모순된다. 그들은 상품-화폐 관계의 기능에서, 사회주의와는 이질적인 가치의 강화를 위한 어떤 기반도 보지 못했다.

 

 

 

쏘비에트 국가는 그 본성상 생산력을 조직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고 가정되었다. 고전가들(맑스와 레닌 등을 가리킨다-역자)이 강조했었던 생산력의 체계에 대한 연구는 전체적으로 경제학에서 더 이상 역할을 하지 못했다. 쓰딸린 이후 시기 쏘비에트 경제학자들은 생산관계를 사회주의 경제학의 대상으로 더 이상 간주하지 않거나, 잘해야 경제학의 대상에 관한 맑스-레닌주의적 정식을 부분적으로 고수하는 데에 그쳤으며, 생산력의 조직화에 관한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뻬레쓰뜨로이까 직전까지 지속됐던 이론적 논의들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쏘비에트 경제학자들은 사회주의 경제학의 대상이라는 쟁점을 종결된 것으로서 결코 간주하지 않았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문제의 형식적 측면일 뿐이었다. 우리의 견해로는 쏘비에트 이데올로그들은 전 인민의 국가로의 이행의 필연성으로부터, 그 결과로 인한 계급 모순의 결여로부터, 특히 사회주의 경제학의 대상에 관한 반맑스주의적 해석으로부터 자체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쓰딸린 이후 시기 쏘비에트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진 테제는, 고전가들이 사회주의 경제학의 대상에 관한 문제를 미해결 상태로 남겨 놓았다는 것이며, 맑스-레닌주의의 ‘창조적 발전’만이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변혁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론적 정식화를 완성시켜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1950년대와 그 이후의 이론적 정식화―전 인민국가라는 개념을 수용한―를 가장 위대한 이론적 성취로서 간주한 방식은 그와 같았다.

사회주의 경제학의 대상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이라는 개념의 이론적 개진을 위한 커다란 중요성이 있으며, 사회주의 경제학의 범주를 발전시키기 위한 큰 길을 개괄한다. 상품-화폐 관계를 도입하려는 경향은 경제학자들의 측에서, 인민들 간의 관계들의 체계에 대한 검토에 대한 경멸적인 태도를 수반하였다.

생산관계에 관한 연구는 뒷전으로 밀려났고, 그 동안에 대다수의 이론가들은 사회주의 경제학의 대상에 대한 정의의 수정과 확장에 관하여 합의에 이르렀다.

쓰딸린은 야로쏀꼬에 대한 논평에서 경제학의 대상에 관한 고전적 정의를 제기했다:

 

“경제학의 영역은 생산, 사람들의 경제적 관계이다. 이것은 다음을 포함한다: a) 생산수단의 소유 형태, b) 이로부터 나오는, 생산에서의 다양한 사회적 집단의 지위와, 또는 맑스가 말한 “그들의 활동의 상호교환”, 그리고 c) 전적으로 이에 종속되는 생산물의 분배 형태이다. 이 모든 요소들이 합쳐져서, 경제학의 영역을 구성한다.”8)

 

본래 맑스주의의 고전적 사상가들에 의해 제시됐고, 1950년대 초반 경제학 논쟁에서 쓰딸린이 제기한 정의로는, 전인민국가 개념의 이데올로그들과 창시자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규정은 1950년대 후반의 이론가들에 의해 일면적인 것으로, 다르게 말하자면 원시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오직 이 영역에서만 이들은 고전가들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쓰딸린의 원시성과 교조주의를 볼 수 있었다. 오쓰뜨로비쨔노프(Ostrovityanov)에게 쓰딸린은 투박하고 우둔한 것처럼 보였다. 쓰딸린은 경제학의 범주들, 특히 상품-화폐 관계의 역할과 위치에 대한 재검토를 초래한, 새로운 발전 단계에서 경제적 토대에서의 중대한 변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노동에 대한 사적인 자본주의적 전유의 결여가 모순 일반의 근본적인 소멸을 초래할 것―사회주의 경제학의 대상에 관한 문제에 강한 충격을 준―이라고 계속하여 완강하게 주장했다.

쓰딸린이 자신의 정의를 제기했을 때, 쓰딸린은 맑스주의 고전에 대한 해석에서 매우 피상적이고 교조적이었다고, 그리고 새로운 발전 단계에 있는 사회의 역사적 발전의 기본적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보여주었다고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말한다). 이러한 견해의 옹호자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정당화함으로써, 두 개의 서로 배타적인 사고 체계 간의, 그리고 레닌의 일관적인 노선과, 맑스주의의 정신에 이질적이며 맑스주의를 단순히 비속화하고 부정했던 보그다노프와 부하린의 수정주의적 노선 간의, 비타협적인 투쟁을 넘어서는 지점에 스스로를 위치지우기를 원했다.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기의 기회주의적 이데올로그들은, 말로는 우익을 비판하고 쓰딸린과 조금은 형식적으로만 일치한다고 하면서, 쓰딸린의 견해를 매우 제한되어 있고 흠결로 가득 차 있다고 간주했다. 그들이 주장하기를, 새로운 기제가 작동하기 시작한 전후(戰後) 단계의 새로운 조건에 쓰딸린의 개념은 적합하지 않다고 했는데, 이는 쓰딸린 사후에야 이루어질 수 있었던 분석이었다.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기의 이데올로그들은, 물론 쓰딸린을 부정하면서 레닌도 부정했다. 그들이 맑스주의의 발전이라고 불렀던 것은, 보그다노프-부하린주의 정치경제학의 유감스러운 재생(再生)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계급적 성격 자체로 인해, ‘맑스주의를 기술적 문제의 수렁에 빠트리고’ 중심적 문제―생산과정 속에서 인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검토―를 회피함으로써, 맑스주의를 파괴한다는 목적을 갖추고 있었다.

맑스주의의 고전적 사상가들과 쓰딸린은 소유관계의 체계를 생산관계의 일부로 보았으며, 생산관계가 전체 사회-경제적 관계들의 총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많은 이론가들은, 국가 소유와 집단적 소유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없으며 양자가 모두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사회주의적 소유의 구조에 관한 비과학적 명제를 받아들임으로써, 생산관계의 구조가 변화했다는 결론―쏘비에트의 학문 및 연구가 반드시 따라야 할 방향성을 결정지은―으로 나아갔다.

흐루쇼프주의자들은 야로쏀꼬에 대한 비판에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브레즈네프주의자들은 야로쏀꼬에 대한 모든 비판을 단순히 잊어버렸다.

 

“야로쏀꼬 동지의 주요한 오류는, 사회 발전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역할에 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입장을 버렸다는 것, 그가 생산력의 역할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생산관계의 역할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그리고 결국 사회주의 하에서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구성 부분이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끝났다는 점에 있다.”9)

 

쓰딸린은 야로쏀꼬를 인용한다:

 

“ … 사람들의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조직화의 한 수단, 한 요소로서, 생산력의 조직화의 부분이 된다.”10)

 

야로쏀꼬주의는 사회주의 경제에서 자본주의적 범주들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경향을 쏘비에트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확산시키며, 사회주의 하에서의 노동을 상품으로 취급하자는 지경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을 직접적으로 결과하는 상황이 되었다.

흐루쇼프주의자들은 형식적으로 야로쏀꼬주의와 무관한 것처럼 행동했다. 기회주의자들은 이후 무엇을 했는가? 흐루쇼프주의 이데올로그들은 맑스를 인용하며, 생산관계가 생산력으로부터 고립되어서 고찰될 수 없으며, 생산관계와 생산력의 통일의 계기에 대한 특별한 강조와 함께, 생산관계가 오직 생산력과의 상호관계 속에서만 고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더군다나, 과학적 규범으로서 경제학은 생산관계에 대한 검토에만 스스로를 국한시킬 수 없다는 논변도 공공연하게 나왔다. 흐루쇼프주의자들은 (정치) 경제학(political economy)의 대상을 확장시키는 것이, 그것을 경제학 일반의 과학(the science of economics in general)과 등치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는 경제학의 대상에 관한 특정 경제학자들의 ‘비과학적’인 해석을 피해가기 위한 것이었다. 오쓰뜨로비쨘꼬프와 그 동료들은 ‘맑스-레닌주의’라는 가면 하에서 보그다노프-부하린주의 학설의 부활을 은폐하는 것을 완벽하게 수행했고, 그 결과 우리는 수정주의에 대한 수정주의의 투쟁을 보고 있다. 그리고 당과 인민들은 이제 이들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쓰딸린 당시에 활동했던 경제학자들 중 상당수는 일반적으로는 경제학의 대상의 영역을 확장할 필요에, 특수하게는 사회주의 경제학의 대상의 영역을 확장할 필요에 대해 동의했다고 충분한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고전적 정의가 부적합하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그러한 한계들을 쓰딸린(레닌도, 맑스 혹은 엥겔스도 아니라)의 탓으로 돌렸다. 이것은 경제과학이 생산관계와 생산력을 그 상호 의존 속에서 검토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형식적으로는, 비록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정식은 물질적 생산의 발전의 형식―그것의 수동적 형식으로서―을 그 내용으로부터 기계적으로 고립시켜서 검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현대 수정주의자들은 생산관계가 생산력과의 유기적 관계와 상호 작용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생산관계와 생산력 양자의 통일의 계기를 특별히 강조했다. 이러한 정식은 그 자체로는 불필요한 요구이다. 맑스는 생산관계를 사회적 생산 발전의 한 ‘형태’11)로서 간주했으며, 그리하여 그것들을 내용과 형식 간의 상호작용이라는 변증법적 방법에 입각하여 검토할 것을 제기했다. (흐루쇼프주의-역자) 이데올로그들은 개혁의 명령에 따라 그들의 테제를 정식화했는데, 이 정식화는 생산관계의 수동적 성격과 생산력에 의해 생산관계가 흡수된다는 주장을 초래했다. 쓰딸린은 쏘련의 경제학자들 사이의 이러한 경향을 인지했으며,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이것들(생산관계와 생산력-영문판 편집자)은 서로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사회적 생산의 두 개의 상이한 측면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사회적 생산의 상이한 측면들을 구성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된다. 이들 측면들의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해 흡수될 수 있고, 그것의 구성 부분으로 변환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맑스주의에 대하여 매우 엄중한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12)

생산력이 사회적 발전에서 가장 능동적인 구성 요소이며, 현존하는 ‘새로운’ 사회-경제적 체제(계급 모순의 결여 등)가 생산력의 역할보다 2차적인 역할을 (생산관계에-역자) 부여하고 있다고 하는, 고전적인 테제에 대한 기계적 해석이 이루어졌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경제학은, 생산력과의 통일과 상호 작용 속에서 경제적 관계들의 체계로서 존재하는 생산의 사회적 측면을 고찰한다. 이러한 분석에서, 생산관계들은 물질적 생산의 기능과 발전의 사회적 형태로서 표현된다.”13)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새로운 개념의 틀 속에서 주어진 정의는 야로쏀꼬의 정의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맑스주의 경제학을 대신하여, “우리는 보그다노프의 “보편적 조직 과학”의 성질을 갖는 어떤 것을 얻는다.”14)

 

생산의 과정에서 사람들 간의 관계가 단지 생산력의 한 형태일 뿐이고 생산력에 대한 어떤 역의 영향을 줄 가능성이 없다면, 그러면 그러한 관계에 대한 맑스주의적 탐구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생산관계는 그것의 내용인 생산력의 수동적인 형식이 되었다. 그렇다면, 내용과 형식 간의 상호 관계에 관한 이러한 기계적인 해석으로 인한 결과, 생산관계와 생산력 간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생산의 사회적 과정의 형식’이라는 말은 ‘생산의 기능과 발전의 사회적 형식’이라는 말과 동일하다는 것이 입증된다. 그것은 모두 동일한 것이 된다: 조응(conformity)한다는 것은 종속(subordination)한다는 것과 동일하다. 맑스에 따르면,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성격에 조응한다. 오늘날의 수정주의자들은 생산관계와의 통일을, 생산력과의 과장된 방식의 통일 속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전자(생산관계-역자)는 물질적 생산의 기능의 사회적 형식이며 결과적으로 후자(생산력-역자)에 종속된다고 결론짓는다. 우리가 얻는 것은 생산관계와 생산력의 관계가 조응(照應)의 관계에서 종속(從屬)의 관계로 변형된다는 것이다.

 

“생산력은 생산관계와 융합된다.”15)

 

부하린의 ‘융합’과 ‘통일’에 관한 이론과, 흐루쇼프-브레즈네프 개혁의 현자(賢者)들이 제시한 개념들을 비교해보자.

생산관계에 대한 검토는, 생산관계가 발달하게 된 전제조건과 분리시키거나 특정 사회-경제적 체제와 조응하는 생산양식 등과 분리시켜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는 후자(생산양식-역자)를 맑스주의적 방법론에 고유한 것으로서, 그 자체로 명백한 것으로 간주한다. 우리가 생산관계와 생산력의 ‘통일’을 절대화하는 것 속에서, 단지 생산관계에 대한 탐구를 뒷전으로 옮겨놓기 위한 시도를, 그리고 단지 그것(생산관계-역자)을 생산력의 합리화에 종속시키는 시도를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것은 달리 설명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길을 따라 맑스주의를 ‘창조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일반적으로, 쓰딸린 이후 시기의 경제학자들이 경제학의 대상, 사람들 간의 생산관계를 사회적 생산의 수동적 형식으로 간주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적절하다. 이것은 생산관계에 대한 검토를 생산력의 합리적 조직화의 문제, 과학 및 기술적 진보의 문제, 그리고 계획 수립 등의 문제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독립적인 연구의 대상으로서 생산관계에 대한 부정으로 귀결됐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야로쏀꼬의 목적이었다.

 

 

 

IV

 

새로운 경제학을 확립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발걸음은, 쏘비에트 국가의 역할, 경제적 과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그것의 역량에 대한 견해의 진화였다. 자신의 경제적 정책에 체현되어 있는, 경제적 조직화에 있어 쏘비에트 국가의 활동은, 사회주의 하에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국가의 경제정책은 나라의 경제적 생활의 모든 영역을 포괄했다.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경험은 이 점을 생생하게 증명했다. 쏘비에트 국가의 경제적 정책의 위상, 상부구조와 경제적 토대 간의 상호 관계는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문제이다.

파씨즘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는, 유럽의 거의 모든 인적, 경제적 자원들을 보유했던 독일에 대한 쏘비에트 군수 공업의 우위를 확보하는 데에 커다란 이점을 주었던 견고한 경제 체제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나찌즘에 대한 완전한 승리 그리고 계속하여 인민경제의 복구를 위한 계획의 초과 달성은 사회주의적 생산양식의 자본주의에 대한 우월성의 생생한 증거였다. 이것은, 사회적 생활, 특히 경제적 생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국가의 역할과 능력에 관한 견해들의 진화에 대해 탐구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가질 수밖에 없는 틀 내에 있는 구체적인 역사적 자료이다. 물론 이러한 쟁점에 대한 해석의 전제조건들은 수없이 많고 자명했으며, (쏘비에트-역자) 국가가 전지전능하다는 의견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예상되지 못했던 것은, 쏘련 학계의 역사에서 전적으로 새로웠던 것은, 사회과학 전반을 포괄했던 경제학에서 나타났던, 이러한 주관주의적이고 주의주의적인 견해들의 규모였다.

 

경제학에서 니꼴라이 보즈네쏀쓰끼(N. Voznesensky)의 저작들은 커다란 중요성을 지닌다.

N. 보즈네쏀쓰끼는 누구였는가?

보즈네쏀쓰끼는 경제학자이자 당원이며, 1940년 이래로 쏘련 과학원의 일원으로서 레닌 훈장을 2회 수여받았고, 1938년부터 1949년까지 고쓰플란(국가계획위원회)의 의장이었으며, 1949년 이래로 전 연방 공산당(볼) 중앙위원회 정치국 성원이었다. 보즈네쏀쓰끼는 세간에 잘 알려진 명저인 ≪대조국전쟁 시기 쏘련의 전시경제≫(1947)를 비롯하여 다양한 경제적 저술들을 집필한 저자였다. 그는 1930년대에 사회주의 경제학을 창출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경제 이론의 영역에서 부하린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 있어서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보즈네쏀쓰끼가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에서 축출된 이유는 1949년 1월에 실시된 도매가격 개혁에 있었다. 공산품과 운수 부문 그리고 서비스 부문에 대한 도매가격은 1949년 고스플란 문서고의 문헌들에서 확인되듯이, 기존보다 평균 2배 이상 인상됐다. 개혁은 본질적으로 중공업에 대한 보조금의 지급 중단과, 국민경제의 부문과 분야 간에서 가치법칙에 따라서 노동에 따른 분배 체계로의 이행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국유 기업의 운영에서 이윤 원칙이, 생산의 중심적 지렛대로서 그리고 노동생산성을 늘리기 위해 광범위하게 도입됐다.

이런 것이 가격의 전반적인 변화와 그것(가격-역자)을 가치, 생산가격(생산 비용 + 평균이윤)과 조응하도록 하는 것의 의미였다. 보즈네쏀쓰끼 사건은 몇 가지 매우 불명확한 문제들을 조명하는데, 적어도 쓰딸린이 그에 대해 ‘질투심’―여러 직책에서 그가 제거된 원인이라고 세간에서 말해지는―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해진다. 여기에 더해서, 고쓰플란의 기능에 대한 중요한 자료들이 보즈네쏀쓰끼에 의해 은폐되었다는 사실도 강조되어야 한다. 더군다나 문서적 증거에 따르면, 쓰딸린은 1949년에 최초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데, 이는 <경제적 제 문제>를 집필하는 길과, 경제학에서 공산주의 건설의 문제에 대해 보다 성숙된 해석의 길을 열었다.16)

고쓰플란의 그 이상의 모든 기능은 1949년 1월 1일에 도입된 가격의 점차적인 인하―쓰딸린의 사망 이전까지 지속됐던 과정―를 위한 계획을 입안하는 것에 국한되었다. 가격을 즉각적으로 1948년 수준으로 인하하는 것은 실행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과정은 여러 해에 걸쳐 이루어질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이미 1949년 3월 13일에 보즈네쏀쓰끼를 고쓰플란 의장과 정치국 성원에서 축출하는 포고가 내려졌다. (쓰딸린과 각료회의가 사실상 알지 못한 채 계획되었던 개혁이 시작된 지 몇 주가 지난 후에.) 1949년 11월과 12월이 되어서야, 보즈네쏀쓰끼는 자신의 형제 그리고 꾸즈네쵸프(Kuznetsov), 포치꼬프(Pochkov), 포포프(Popov), 라디꼬프(Radikov) 일당과 함께 체포되었다. 고쓰플란의 기밀 문서를 외국에 넘겼다는 혐의도 또한 제기되었다. 보즈네쏀쓰끼는 1950년에 조국에 대한 배반을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1950년 9월 30일에 총살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은 다른 사건과 혼동되었는데, 보즈네쏀쓰끼가 고쓰플란 의장직에서 축출된 이유에 대한 혼란이 이었다. ‘레닌그라드 그룹’의 여타 구성원들은 쓰딸린 사후 복권되었다. 포포프는 1953년에 뽈쓰까(폴란드) 대사로 임명되었으며, 쉬낀(Shikin)은 1954년에 훈장을 수여받았다. 후에 니꼴라이 보즈네쏀쓰끼는 불법적으로 탄압받았다고 선언되었다.17)

≪대조국전쟁 시기 쏘련의 전시경제≫에서 보즈네쏀쓰끼는 경제에서 국가의 역할에 대한 해석에서 반(反)맑스주의적 접근을 재생산했고, 경제학에서 주관주의와 주의주의를 확산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고, 새로운 이론적 사고를 정당화했다. 니꼴라이 보즈네쏀쓰끼는 전후 시기 반맑스주의적 사고의 예언자였다. 그는 사회주의 경제에서 국가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문제를 포함하여, 경제학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건드렸다.

 

“쏘비에트 경제에서 국민경제의 운동과 발전의 원천은 계획을 수행하는 쏘비에트 국가이다.”18)

 

니꼴라이 보즈네쏀쓰끼는 더 나아가 경제학에 대한 자기 자신의 정의를 제기했다:

 

“사회주의적 계획은 생산과 분배에 대한 경제법칙의 합리적 활용과 적용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서 사회적 발전 법칙이며, 이러한 능력으로 인해 경제학의 대상으로 된다.”19)

 

앞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작업의 목적은 경제학에서 새로운 공식적인 견해들의 체계의 수립과, 전자(새로운 공식적인 견해들의 체계-역자)에 선행했고 그리고 당대의 문헌들에 포함되어 있었던 근본적 문제들에 관한 반(反)맑스주의적 정식들의 복원 사이에 유기적 연관성을 추적하는 데에 있다. 쓰딸린 사후에 많은 경제학자들은 보즈네쏀쓰끼가 보유하고 있었던 모든 직책에서 축출된 것의 불법성을 공공연하게 선언하며, ‘창조적 개념’의 승리의 대의를 위한 십자군으로 그를 보았는데, 그것(창조적 개념-역자)은 경제학의 문제들에 대한 공식적 견해의 이전의 모든 발전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보즈네쏀쓰끼가 쓰딸린의 사망 직후에(쏘련 공산당 20차 당 대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복권되었고, 그와 함께 경제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그것의 대상―에 대한 재고를 초래한, 국가계획의 역할에 대한 그의 개념 또한 복권되었다.

보즈네쏀쓰끼가 축출된 진정한 이유는 1949년에도, 1950년에도, 1951년에도 공개되지 않았다. 보즈네쏀쓰끼의 이름은 학계의 출판물들에서 공식적으로 지워졌지만, 실제로는 그의 반맑스주의적 관점은 당대의 지도적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이에 관해서는, 공산주의자들이 1951년부터 쓰딸린의 사망 시기까지의 논쟁들에 대한 자료를 연구할 것을 권장한다.), 쓰딸린의 저술이 출판되기 전까지 별다른 비판을 받지 않았다. 물론 학계 내부에서의 상황도 1950년대 초반 무렵에는 통제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에 그 증거가 있다:

 

“≪보프로씨 에꼬노미끼(경제학의 제문제, Voprosy Ekonomiki)≫지는 경제학 영역에서 주관주의적이고 관념론적인 개념들을 폭로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잘못된 견해들의 선전을 위한 공간도 제공했다. ≪보프로씨 에꼬노미끼≫지의 편집자들은 심각한 오류를 범했다. 그것은, 쏘비에트 사회에서 국가와 계획의 역할에 관한 주의주의적인 견해의 잡탕일 뿐이었고 또 국민경제의 분야들 사이에서 노동의 분배의 조절자라도 되는 것처럼 가치법칙에 대해 물신숭배를 하는 니꼴라이 보즈네쏀쓰끼의 반맑스주의적 저술들을 과도하게 극찬하는 논설을 간행한 것이었다. ≪보프로씨 에꼬노미끼≫지의 편집진들 중 일부는, 보즈네쏀쓰끼의 반맑스주의적 저술들의 ‘맑스주의’적 요소를 신봉하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그 잡지에 보즈네쏀쓰끼의 책에서 수없는 인용을 하기 시작했다.”20)

 

주지하듯, 경제적 과정들에서 국가의 역할에 대한 흐루쇼프-브레즈네프주의적 개념은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의 비과학적이고 반맑스주의적 정식―1952년 말에서 1953년 3월까지 엄격한 비판의 대상으로 되었던―에 직접적으로 뿌리를 두고 있다.

계획에서의 국가의 활동은 쓰딸린 이후 시기 경제학자들에 의해 ‘국민경제의 운동과 발전의 원천’으로 인식되었으며, 이는 쏘비에트 국가에 대한 절대화로 귀결되었다. 생산력의 발달을 현저하게 지연시킬 수 있는 요소가 간과되었다. 쏘비에트 국가는 객관적 발전 법칙에 대해 어떠한 고려를 하지 않고도, 혹은 사회주의 하에서 상품경제와 집단적 소유―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이후의 가일층적 발전에 대해 장애물으로 작용했던―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생산력의 합리적 조직화와 활용 가능한 자원들의 이용을 계획함에 의해, 자신의 의지대로, 공산주의 경제로의 이행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여겨졌다.

계급모순의 결여와, 생산관계와 생산력 간의 실질적인 모순의 결여를 선언함으로써, 사회주의 경제를 상품경제로 간주하는 정도로까지 상품-화폐 관계(뻬레쓰뜨로이까 시기까지 노동력은 형식적으로는 상품으로서 간주되지 않았다.)의 작용 범위를 확장하고 넓히는 데에 있어 장애물은 제거되었다. 쏘비에트 경제에서 상품 경제의 범주의 작동의 범위를 넓히는 데 있어 중심적인 것은, 국가의 역할과 국민경제에 영향을 끼치는 국가의 능력―경제적 토대에 대한 상부구조의 반작용이라는 맑스-레닌주의적 개념에 대한 왜곡일 뿐인―을 과장하는 개념이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한 가장 뛰어난 비판은 1952년 말에서 1953년 3월까지 짧은 기간 동안에 제시되었다.

 

“이들 고용인들(employees)은, 발전법칙으로서 생산과 경쟁의 무정부성이 사라졌기 때문에, 사회적 생활의 자연발생적 성격이 경제의 계획적 발전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당과 국가의 기관들이 사회를 지도하면서 매우 괄목할만한 수준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국가의 형태를 띤 사회가 경제 발전의 객관적 법칙에 매이지 않고도 경제생활을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서 조직할 수 있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하에서 토대에 대한 상부구조의 반작용이 증대함에 따라, 많은 고용인들이 쏘비에트 국가의 조직화된 경제적 활동을 경제 발전의 원천으로서 인식하게 되었으며, 그들은 사회의 존립에 있어 우선적인 기초가 되는 사회의 경제적 발전을 2차적이고 국가의 의지에 완전히 의존하는 어떤 것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21)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기능을 이미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던, 전지전능한 국가의 기능은 두 개의 그룹으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특수하게 정치적인 것과 특수하게 경제적인 것으로 나누어졌고 후자는 자신의 경제 정책을 구성했다. 형식적으로 생산력은 생산관계를 통해, 쏘비에트 국가의 영향력에 종속되는 상부구조와 상호작용을 했다.

그와 같은 정식은, 비록 이 문제에 관한 고전가들(맑스, 레닌 등을 의미-역자)의 모호함과 심지어 모순성에 대한 모든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는 국가기구와, 특수하게는 이행기에 관한 맑스-레닌주의적 인식과 부합하지 않았다. 뚜렷하게 정의된 2개의 그룹으로 국가의 기능의 분할이라는 이러한 개념은, 쏘비에트 국가의 정치적, 계급적 내용으로부터 경제의 과정을 분리시켜 고찰할 가능성을 열었다. 경제적 토대는 계획을 통해 통제되고 전지전능한 무계급적인 국가에 의해 설계되는 통합된 전체로 여겨졌다. 그 결과, 국가의 계획과 조직적 활동은 자신의 정치적 활동으로부터 괴리되었다. 국가의 분할은 이렇게 도입되었다. 더 나아가, 국가의 정책도 사실상 경제학의 주요한 대상이 되었다.

그에 더하여, 경제학의 대상에 국가 정책을 포함시킬지를 둘러싸고 논쟁이 집중되었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국가의 정책이 상부구조의 부분으로서 경제학의 대상에 포함되어서는 안 되며, 다른 사회과학에 의해 연구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형식적으로는 여전히 주장했다. 그러나 경제 정책을 사회주의 경제학의 요소 중 하나로 간주했던 다른 학자들도 존재했다. 후자는 보즈네쏀쓰끼에 의해 제공된 사회주의 경제학의 대상에 관한 보그다노프-부하린주의의 개념을 공공연하게 수용했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국가의 경제 정책이 경제학의 대상의 가장 중요한 구성 부분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이론은 상당수 학자들에게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22)

 

여기에서 우리는 국가의 역할에 관한 보즈네쏀쓰끼의 개념을 자신들의 기초로 하는 다양한 경향들 간의 투쟁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다. ‘현대적’ 경제학의 총체적인 상은, 과학적 규범으로서 경제학의 종언을 위한 적절한 전제조건을 제공해준 반맑스주의적 견해들로 가득 차 있다.

쓰딸린 이후 공식 이데올로그들은 부하린을 단지 형식적으로만 거부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부하린의 추종자들이 되었다. 맑스주의 경제학의 근본에 대한 쓰딸린의 해석에 대한 비판은 생산력 발달에 대한 장애물이 된다는 것이었다. 공식 이데올로그들은, 일반적로는 쏘비에트 사회과학의 체계 속에, 특수하게는 경제학의 체계 속에,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 이론가들의 근본적인 명제들―쓰딸린에 의해 당대에 엄정한 과학적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을 복원시켰다. 이들 개념들의 확산은, 성장 과정에서 실질적인 모순들을 부정하고 쏘련에 고유한 비적대적 모순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길을 닦았으며, 이것은 자본주의 질서의 복고를 초래했다.

현대 공산주의자들은 쓰딸린 이후 경제학이 생산관계의 생산력으로의 사실상의 종속을 자신의 토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매우 분명히 인식해야만 한다. 흐루쇼프주의 이데올로그들의 목적은 생산관계를 생산력의 구성 요소로 만드는 것이었으며, 후자(생산력-역자)의 성장을 위한 조직화와 계획을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주요한 문제로 만드는 것이었다. 1950년대 후반의 이론적 ‘성취들’은 브레즈네프의 경제학을 만들어낸 핵심이 되었으며, 현대 공산주의 운동에서 다양한 형태로 여전히 계속하여 존재하고 있다.

우리 맑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적 사회-경제 체제를, 수정주의자들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분리된(separate) 사회-경제적 구성체로 간주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주의의 주요한 목적이, 생산력의 합리적 조직화라기보다는 현존하는 계급 모순의 철폐에 있다고 간주한다. 경제학의 언어로 말하자면, 공산주의 건설의 목표는, 낙후된 생산관계를 성장하는 생산력과 조응시키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생산관계에 대한 포괄적인 검토를 요구한다. 노사과연

 

 

 

 

 

 


1) <위험에 처한 쏘비에트 경제>(‘The Soviet Economy in Danger’), in ‘Writings of Leon Trotsky’, [1932], New York, 1973, p. 274.

 

2) Vijay Singh, <쓰딸린과 2차 대전 후 쏘련에서 ‘시장 사회주의’의 문제>(‘Stalin and the Question of ‘Market Socialism’ in the Soviet Union after the Second World War’), Paper submitted to the Seminar ‘Stalin Today’, Moscow. 1994, Revolutionary Democracy, Vol. I, No. 1, April, 1995, pp. 4-5.

 

3)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적대(antagonism)는 여전히 존재한다. 레닌은 신경제정책 당시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그 자신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일이 없이, 일정한 한도 내에서, 국가가 사적 무역과 사적 자본주의를 통제한다는 조건 하에서 무역의 자유와 자본주의의 발달을 허용할 수 있다. (…)  그러나 이러한 통제가 완전히 성공한다고 해도, 노동과 자본 간의 계급적 적대는 명실공히 잔존할 것이다.”고 말했다. (Lenin Collected Works, Vol. 42, p. 375.) 사회주의적 부문 이외에도 소생산과 소농 경제와 같은 자본주의적 부문들이 비록 부차적이지만, 광범하게 잔존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 경제에 잔재하여 있는 이러한 부르주아적 요소들은 자본주의의 복원을 위한 토양을 끊임없이 배양한다. 비적대적 모순이 적대적 모순으로 전화할 가능성은, 물질적 자극과 사상적 자극을 적절하게 결합시키지 않는 한 농후하며, 계급 간의 적대(antagonism) 자체도 여실하게 존재한다. 사회주의 단계에서 착취계급의 소멸은 계급과 계급 간의 적대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노동자계급과 농민을 한 축으로, 착취계급의 잔재들과 외부의 이질적 요소들을 다른 축으로 하여 계급투쟁이 지속적으로 수행된다. [역자 주]

 

4) V.I. Lenin, ‘Leninskii sbornik’, Vol. XL, p. 391.

 

5) M.M. Rozental, ‘Marksistskii dialekticheskii method’, Moscow, 1952, p. 300.

 

6) F. Engels, ‘Anti-Duhring’, Moscow, 1975, p. 335.

 

7) J. Stalin, <쏘련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제 문제>(Economic Problems of Socialism in the USSR), Moscow, 1952, p. 75.

 

8) 같은 책, p. 81.

9) 같은 책, p. 66.

 

10) Loc. cit.

 

11) Marx and Engels, ‘Complete Works’, (in Russian), Vol. 13, p. 7.

 

12) J. Stalin, op. cit., p. 71.

 

13) Politicheskaya ekonomiya, Vol. 3. Moscow, 1979, p. 317.

 

14) J. Stalin, op. cit., p. 71.

 

15) V.I. Lenin, op. cit., Vol. XL, Zamechaniya k knige N.I. Bukharina Ekonomika perekhodogo perioda, p. 392.

 

16) Vijay Singh, op. cit., p. 15.

 

17) W.B. Bland, ≪쏘련에서 자본주의의 복고≫(The Restoration of Capitalism in the Soviet Union), Wembley, 1980. See Appendix 3, pp. 332-356. 우리는 매우 복잡한 보즈네쏀쓰끼 사건에 대해 일정한 조명을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귀중한 자료를 이용할 수 있게 해 준 빌 블랜드(Bill Bland)에게 감사를 표한다.

 

18) N. Voznesensky, ‘Voennaya ekonomika SSSR v period otechestvennoi voiny’, Moscow, 1948, p. 150.

 

19) 같은 책, p. 151.

 

20) ≪Voprosi ekonomiki≫, ‘오류를 바로잡고 쏘비에트 경제학자들의 저술을 개선하는 것’(‘Eliminating the Mistakes and Improving the Work of Soviet Economists’), No. 1, 1953, p. 4.

 

21) P. Yudin, ‘쓰딸린의 저작 <쏘련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제문제>―사회과학의 가일층적 발전의 기초’(‘The Work of Stalin Economic Problems of Socialism in the USSR – Basis of Further Development of the Social Sciences’),≪ Kommunist≫ No. 3, 1953, p. 45.

 

22) ‘Istoriya politicheskoi ekonomiki sotsializma’, Leningrad, 1983, p.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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