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만수 | 소장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도 있고, ‘좌정관천(坐井觀天)’, 즉 ‘우물 속에 앉아 하늘을 본다’는 말도 있지만, 우물 안에서 바라보는 하늘 즉 세상과 그에 대한 심상(心想)도 다 같지는 않을 것이다. 우물 안에서 바라보는 하늘, 곧 세상의 크기도 그 우물의 깊이 나름일 것이며, 더구나 그렇게 보이는 하늘, 세상에 대한 해석은 바라보는 주체의 자질에 달려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여러 사회적ㆍ정치적ㆍ경제적 문제들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개혁’의 목소리들이 높다.
그중에서도 여기에서는 ‘국민연금 개혁’을 둘러싼 논란을 간단히 보기로 하자. 그들 논란이 과연 세상에 탁 트인 관점에서의 논란인지, 아니면 우물 안에서 세상을 보는 관점, 그것도 깊디깊은 우물 안에서 우물(愚物)들이 떠들어 대는 헛소리에 불과한지를.
I
‘국민연금 개혁’! ― 그동안에도 심심할 만하면 들리곤 하던 타령이 요즈음 유난히 시끄럽게 들린다. ‘국민연금’ 그것이 안고 있는 문제 자체에 기인하는 본래의 흥에다가, 대통령 윤석열이 당로하면서부터 그리고 올해에도 년초부터 기필코 ‘개혁’해 내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데에 힘입은 흥행일 것이다.
여러 계급ㆍ계층ㆍ집단 간의 대립적 이해관계를 반영하여, 여와 야가, 그리고 소위 ‘보수’와 ‘진보’가 사실상 매사에 치열하게, 때로는 적대적으로까지 대립ㆍ투쟁하는 것이 오늘날 이 사회의 모습이다. 그런데도 유독 이 ‘국민연금 개혁’ 문제만은 그들이, 비록 한 가락으로 제창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때로는 작은 불협화음도 없진 않지만, 입을 모아 합창하고 있다.
정부나 자본가 단체들과 그 대변자들, 보수적ㆍ극우적 대중 매체들이나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에 불과한 소위 진보적 매체들, 진보적 논객들이, 그리고, 지난 대선 과정에서 정의당 심상정 후보가 ‘진보의 금기’를 깨니 어떠니 하고 떠들어 댄 것처럼, 소위 진보 정당과 그 대표자 등이 함께 입을 맞추고 있는 것이야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이 소위 ‘연금 개혁’, 그중에서도 ‘국민연금 개혁’에 대해서는 심지어 양대 노총마저도[1]예컨대, 2023년 2월 9일의 한국노총 성명, “국회의 총체적 무능함과 비겁함이 연금개혁을 망친다―전문가 합의가 어렵다는 핑계로 연금개혁 무산 시도 … Continue reading 그것이 절박하고 절실하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외쳐 대고 있다. 더구나 노동자계급, 특히 투쟁하는 조직 노동자들에 대한 진하디진한 적의를 맘껏 드러내며 온갖 폭력적 압박을 가하고 있는 극우 윤석열 정권이, 그 적의를 실현하는 방안으로서의 소위 ‘노동 개혁’과 한 묶음으로, 기필코 해내겠다고 거듭 다짐하고 있는 사안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토록 이구동성으로 요란하게 ‘국민연금’을 ‘개혁’해야 한다고 떠들어 대는 데에는 분명 무언가 거부하기 어려운 필요와 이유, 동기가 있을 것이다.
저토록 시끄러운 판에 그걸 모를 사람이야 필시 없겠지만, 저들이 떠들어 대는 그 필요와 이유, 동기를 개괄해 보자면, 대략 이렇게 될 것이다.
1) 인민의 노후생활을, 혹은 그 노후의 일정한 소득을 보장해야 한다. ― 칭송받아 마땅한 대단히 숭고한 동기다!
2) 그런데 현재의 ‘국민연금’은, ‘적게 내고 많이 받도록’ 설계되어 있는[2]애초에 왜 그렇게 정신 나간 설계를 했는지를 묻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데에다가, ‘저출산ㆍ고령화’라는 추세까지 가세해서, ‘개혁’을 하지 않으면 머잖아, 비근하게는 최근 정부 측의 추계(推計)에 의하면, 2041년부터는 적자를 기록하기 시작하고, 2055년이 되면 그 기금이 완전히 소진된다.
3) 그렇게 되면, 1990년 이후 출생한 사람들은 연금 보험료를 부담만 하고 연금을 받지 못하게 되는 사태가 발생할 것이므로, 그러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떠들어 대는 대로 ‘국민연금’을 ‘개혁’하든지, 2055년부터는, 기존의 ‘적립식’, 즉 기금을 적립해 가면서 그 기금으로부터 연금을 지급하는 방식에서, ‘부과식’, 즉 연금 지급에 필요한 자금을 그해 그해 거두는 방식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다.
4) 그런데, 부과식으로 전환할 경우, 정부 측의 ‘제5차 국민연금 재정추계 시산 결과’에 의하면, 보험료율이, 현행 9%에 비해서, 전환 시점인 2055년에는 26.1%로, 그리고, 예컨대, 2060년에는 29.8%, 2070년에는 33.4%, 2080년에는 34.9%, 2088년에는 31.7%, 2093년에는 29.7% 식으로 급등한다.
5) 이는 ‘미래세대’에게 엄청난 부담을 전가하는 것이어서,[3]바로 위 숫자들은, 곽윤아 기자, “연금 소진땐 그해 거둬 그해 지급…월급의 35% 보험료로 내야할 판”, ≪서울경제≫(인터넷판), 2023. 1. … Continue reading ‘개혁’을 해야 하는바, 그것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2093년에 연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전제하에, 예컨대, 만일 2025년에 ‘개혁’하게 되면, 보험료율을 17.86%로, 2025년이 아니라 2035년에 ‘개혁’하게 되면, 보험료율을 20.73%로 올려야 하는 식으로, ‘개혁’이 늦으면 늦을수록 보험료율이 올라가게 되고, 그만큼 “시간이 지날수록 다음 세대가 져야 할 부담이 커지기 때문”[4]김상철 경제칼럼니스트, “지각 출발한 ‘연금개혁’ 서둘러야 하는 이유”, ≪주간조선≫(인터넷 판), 2022. 12. 29. … Continue reading이다.
‘국민연금 개혁’ 타령에는 이렇게, ‘노후 보장’이라는 숭고한 동기에, ‘다음 세대’ 혹은 ‘미래세대’의 부담 경감이라는 또 하나의 숭고한 동기와 필요, 이유가 덧붙여져 있다. 거기에서, 소위 ‘소득대체율’, 즉 얼마를 받을 것인가를 둘러싸고는, 그리고 보험료율을 과연 얼마만큼이나 올릴 것인가를 둘러싸고는, 이견이 분분하면서도, 아무튼 서둘러 보험료율을 올려야 한다는 데에는 사실상 하나로 입을 맞추고 있다.[5]여기에서 “사실상 하나로 …”라고 쓰는 이유는, 예컨대, “철저하게 가입자와 비가입자를 구분”하여 “국민연금 보험료에는 ‘꼬리표’를 … Continue reading
동기도, 이유와 필요도 고상해서 아주 그럴싸하게 들릴 것이다.
그런데, ‘국민연금’을 ‘개혁’하지 않으면, 그것도 시급히 ‘개혁’하지 않으면, 엄청난 부담이든, 청엄난 부담이든, 정말로 ‘미래세대’에 부담을 안기는 것일까?
저들, 즉 ‘개혁’해야 한다고 떠드는 자들, 특히 자본 측의 대답은 당연히 “그렇다!”일 것이다. 그리하여, ‘국민연금’과 관련해서도, 이른바 ‘적자 재정’과 관련해서도, ‘미래세대에 부담을 안겨서는 안 된다’는 깃발을 선도적으로 흔들어 오다시피 한 극우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이렇게까지 왜장치고 있다.
이미 연금 기금이 바닥난 프랑스에선 연금 지급을 위해 현 세대가 소득의 28%를 보험료로 내고 있는데, 연금 수령 연한을 2년 늦추자고 하자 온 국민이 들고일어나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 우리는 바로 지금 연금 개혁을 하지 않으면 프랑스보다 훨씬 심각하게 될 게 분명하다.
저출산ㆍ고령화는 경제ㆍ사회적 역동성과 국가 재정 역량을 쪼그라트려 나라 전체를 ‘수축 사회’로 만든다. 생산 인구 감소로 세입은 줄고 노인 복지, 의료비 등 정부 지출은 급격히 늘어나기 때문이다. 65세 이상에게 월 30만원씩 주는 기초연금에 소요되는 재원이 올해는 22조원이지만, 2045년엔 100조원을 넘게 된다. 문재인 정부 5년간 나랏빚을 400조원 이상 늘리는 바람에 국가부채 1000조원 시대가 이미 열렸다. 저출산ㆍ고령화에 대응할 재정 여력은 더 빈약해진 상태다.[6]“기초연금에 소요되는 재원”이 어떻니, “재정 여력”이 어떻니 운운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뒤에서 논의하자.
우리가 지금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이 재앙은 필연적으로 닥쳐온다. 각 분야의 구조 개혁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규제 개혁으로 경제를 활성화하고,[7]물론, “규제 개혁으로 경제를 활성화하고”는 “규제 개혁으로 자본을 활성화하고”로, 아니, “규제 개혁으로 자본의 잉여노동 착취를 … Continue reading 노동 개혁으로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평생 벌어도 내 집 마련이 힘들고, 자녀 사교육비에 허리가 휘는 상황이 이어지면 저출산 문제의 해결은 요원하다. 집 문제, 일자리 문제, 교육 문제 해결 없이 저출산 극복은 불가능하다. 노인 연령 상한 조정, 정년 연장 등으로 사회 보장 비용을 줄이고, 여성ㆍ노인층의 사회 활동 참여율도 높여야 한다.
바로 지금 개혁을 시작해야 한다. 개혁엔 저항과 고통이 따르지만 다른 길이 없다. 개혁만이 미래세대에게 더 나은 세상이 오리라는 희망을 줄 수 있다. 희망이 없는 곳에 재앙은 더 빨리, 더 무섭게 닥쳐온다.[8]“[사설] 우리 아이들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암울한 대한민국”, ≪조선일보≫(인터넷 판), 2023. 1. 28. … Continue reading (강조는 인용자.)
무척 절박하다. 자신들이 예상하는 ‘사태’를 “재앙”으로까지, 그것도 “지금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 필연적으로 닥쳐”올 “재앙”으로까지 규정할 만큼!
하지만,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면 놓치지 않을 것이다. ― “각 분야의 구조 개혁을” 하면, “평생 벌어도 내 집 마련이 힘들고, 자녀 사교육비에 허리가 휘는 상황”도, “집 문제, 일자리 문제, 교육 문제”도, “저출산 문제”도 극복될 듯이 떠들면서, “지금 개혁을 시작해야” 한다고, “개혁엔 저항과 고통이 따르지만 다른 길이 없다”고, “지금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이 재앙은 필연적으로 닥쳐온다”고 떠들어 대고 있지만, 사실은 모두 기만이며 협박일 뿐이라는 것을!
노동자ㆍ인민에게 “평생 벌어도 내 집 마련이 힘들고, 자녀 사교육비에 허리가 휘는 상황”을, 즉 “집 문제, 일자리 문제, 교육 문제”를 강요하며 “저출산 문제”를 유발하고 있는, 그리하여 저 “사설”이 ‘개혁’해야 할 대상으로 삼고 있는 “각 분야의 구조”라는 것은 사실은 모두 자본이, 즉 자신들이 주도하여 형성해 온 것이고, ‘개혁’해 온 것이다. 그런데도 저 “사설”은 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지 않은가? 노동자ㆍ인민이 어떤 ‘개혁’에 저항한다면, 그것은 그 ‘개혁’이란 것이 그들에게 더 큰 고통을 강요할 뿐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개혁엔 저항과 고통이 따르지만 다른 길이 없다” 운운하는 말로 구렁이 담 넘듯이 눙치면서, 자신들의 탐욕을, 노동자ㆍ인민 착취 강화를 관철하려 들고 있지 않은가? ― “규제 개혁으로 경제를”, 즉 자본의 착취를 “활성화하고, 노동 개혁으로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고! 그리고, “노인 연령 상한 조정, 정년 연장 등으로 사회 보장 비용을 줄이고, 여성ㆍ노인층의 사회 활동 참여율도 높여야 한다”고!
II
사실, 이 문제, 즉 ‘연금 개혁’을 하지 않으면 ‘미래세대’에 엄청난 부담을 안겨 준다는 주장에 대해서, 그리고 ‘재정 적자’가 증대하면 역시 ‘미래세대’에 부담을 안겨 준다는 주장에 대해서 나는 1년 전에 비판을 가한 적이 있다.
≪조선일보≫의 저 “사설”도 “문재인 정부 5년간 나랏빚을 400조원 이상 늘리는 바람에 국가부채 1000조원 시대가 이미 열렸다” 운운하고 있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정부가 어쩔 수 없이 소위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면서 ‘재정 적자’가 증대하자 특히 극우 언론들이 예의 “미래세대 부담” 어쩌구 하면서 시끄럽게 떠들던 때였기 때문이고, 정의당의 심상정 대통령 후보께서 “진보의 금기”를 깬다며 ‘국민연금 개혁’ 문제를 제기하여 설왕설래할 때였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꽤나 모자란 비판이요 논의였지만, 여기에 1년 전의 그 비판의 후반 부분[9]채만수, “진실을 밝혀 알리지 않고, 과학에 의거하지 않고는 미래가 없다―최근 정세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정세와 노동≫ … Continue reading을 그대로 옮겨 보자.
* * *
심상정ㆍ정의당의 ‘연금 개혁’ 구상이 아무리 엉뚱한 소리, 아무리 “보수 정당에서 주장하는 ‘연금재정 안정화론’과 한 치의 다름도 없는 주장”이라고 할지라도, 그 엉뚱한 소리, 그 주장은 결코 저 ‘연금공대위’가 ‘비판’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과연 진보 정당으로서 얼마나 정의로운지 그들 스스로 성찰해야 하는 상황이 개탄스러울 뿐”인 게 아니다. 즉, 그것이, “보수 정당에서 주장하는 ‘연금재정 안정화론’과 한 치의 다름도 없는 주장”인, “상향식”이 아니라, “하향식”의 ‘연금재정 안정화론’이라서 개탄스러운 게 아니다.
심상정ㆍ정의당의 ‘연금 개혁’ 구상이 개탄스러운 것은, 그것이, 상향식이든 하향식이든, 철저히 자본주의 체제 내적인 구상으로서 현대 사민주의 정당의 반동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진한 노동자ㆍ인민의 시야ㆍ사고ㆍ상상력을 자본주의라는 체제 내에 가두어, 이미 웃살아도 한참을 웃산, 착취와 억압의 자본주의 체제를 연명하는 데에 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것이 재정 지출 확대, 즉 적자 재정의 문제이든, ‘연금재정 안정화’의 문제이든, 저토록 ‘미래세대의 부담’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면, 어떨까?
―― “가령 노동자ㆍ인민의 생활 안정을 위하여 재정 지출ㆍ적자 재정을 대폭 확대하고, 그리하여 노동자ㆍ인민이 그 소비를 증대할 수 있어 생활 상태가 다소라도 개선된다면, 그 노동자ㆍ인민은 과연 미래세대가 생산할 재화를 미리 소비하는 것인가? 그리하여 미래세대는, 선대가 ‘앞당겨 소비한’(!) 것들을 벌충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만큼 더 많은 부담을 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그만큼 더 많이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광인 그것도 정말 요~상한 광인이 아닌 한, 누구도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재정 지출ㆍ적자 재정을 확대하더라도, 그리하여 아무리 노동자ㆍ인민의 소비가 증대하고 그 생활 상태가 나아지더라도, 생활 상태의 개선을 위하여 그들 노동자ㆍ인민이 소비하는 것은 당대의 노동자ㆍ인민 자신들이 생산하는 것들이지, 아직 생산되지도 않은 미래세대의 생산물들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방금 질문은 재정 지출의 확대, 따라서 적자 재정의 문제였지만, 이른바 ‘연금기금’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연금 지급액의 인상 등으로 ‘연금기금’이 ‘고갈’되면, 국가 재정에서 보충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10]이백윤 ‘사회주의’ 후보도 민주노총 주최의 ‘진보정당 대선후보 정책토론회’(2월 10일)에서 특수직 연금과 관련, 그것이 “부족하다면 국가 … Continue reading 그리고 또 실제로도 그렇게 보충할 수밖에 없고, 보충하고 있다. 연금기금의 문제는, 본질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재정의 문제와 같은 것이어서, 재정으로 통합해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아무튼 그런데도 재정 지출의 확대, 적자 재정의 문제만 나오면, ‘미래세대의 과도한 부담’ 운운하는 광인적 담론이 활개를 친다. 아니, 사실은, 대자본의 공황 구제를 위한 재정 지출의 확대, 적자 재정에 대해서는 “시급한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 운운하며 아우성치는 언론과 정부 등이, 노동자ㆍ인민 구제를 위한 재정 지출의 확대, 적자 재정의 문제만 나오면, “미래세대에 과도한 빚”이니, “미래세대에 과도한 부담”이니 하면서, 가히 광인적 헛소리, 그것도 요~상한 광인적 고결한 헛소리들을 해 댄다. 그리고 앞에서 본 것처럼, 소위 ‘진보적인’ 논객들조차 그러한 광인적 헛소리에 대한 반론이랍시고, “다른 선진국들의 재정 적자 비율, 규모에 비추어볼 때” 운운하시며 본질적으로 동일한 헛소리를 해 대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 문제를 위의 질문처럼 제기하면 그토록 명확히 답이 보이는데, 도대체 왜 현실의 언론ㆍ담론에서는 그토록 요~상한 광인적 헛소리로 둔갑하는 것일까?
숨겨진 동기는, 두말할 나위 없이, 자본주의 사회라는 착취ㆍ지배 체제를 유지ㆍ관리하는 데에 드는 비용을 최대한 절약하려는 자본가계급의 열망, 즉 더 많은, 최대한의 잉여노동을 축적하려는 자본의 탐욕이다. 자본과 그들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대표자들은, ‘미래세대에 부담’ 운운하고, ‘국민의 세금 부담 증대’ 운운하지만, 재정 지출의 확대, 적자 재정의 증대로 세금을 더 걷어야 하게 되면, 자신들이 착취ㆍ취득한 잉여가치의 더 많은 부분이 세금으로 징수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즉, 직접적이든 노동자들을 경유해서든, 자신들이 취득한 잉여가치의 더 많은 부분이 당장 세금으로 징수되어야 하고, 증대된 재정 지출로 조금이라도 나아진 노동자ㆍ인민의 생활 상태가 새로운 ‘정상적인 것’으로 되면, 그렇게 증대된 세금 역시 ‘정상적인 것’으로 된다는 것을, 그리고 자칫 그러한 상승 과정이 일종의 관례로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주지하는 것처럼, 노동자들의 생산물과 그 가치는 자본가에 의해서 전유(專有)되고, 거기에서 임금이 지불된다. 그런데 세금이 오르면, 그리하여 노동자들이 내야 할 세금이 오르면, 임금 또한 여하튼 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 임금이란 노동력의 재생산비여서, 그 크기에 탄력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일정 수준 이하로 그것을 내려 누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가치생산물(=부가가치) 중에서 최대한의 부분을 잉여가치=이윤으로서 착취하려는 자본가계급, 그리고 그들과 잉여가치의 일부를 공유하는 지주계급 등이 그토록 증오하는 ‘임금 인상’, 게다가 전반적인 ‘임금 인상’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빈곤의 구렁텅이에서 허덕이는 노동자ㆍ빈민을 구제ㆍ지원하기 위한 재정 지출의 확대가 제기될 때마다 ‘미래세대에 과도한 빚을 넘겨준다’느니, ‘국민의 부담 증대’니 운운하며 아우성치고 나서지만, 그때 그 ‘국민’이란 바로 잉여가치의 착취자들 자신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즉, 직접적으로 재정의 형태를 취하든, 연금기금이라는 간접적인 형태를 취하든, 모두 노동자ㆍ인민에게 견디기 어려운 빈곤을 강요하면서 착취자들 자신의 체제 관리ㆍ유지 비용을 절약하려는 탐욕의 위장된 표현이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노동의 희망” 따위의 깃발을 내걸고 이 시대, 이 사회에서 진보적이기로 호가 난 저 정당, 저 당의 대통령 후보께서는 “연금 개혁” 운운하면서 그 음흉한 위장에 더욱 부정직한 형태로, 따라서 그 의미하는 바를 알고 보면 가증스러운 형태로 가담하고 있다.
다름 아니라, 그러한 위장, 가능한 한 화려한 위장을 통해서 노동자ㆍ인민대중을 기만하고, 그리하여 그들의 계급 투쟁을 무기력화ㆍ해체하는 역할을 노는 것이 바로 현대 사회민주주의 정당,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떠맡은 사회적 임무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이 재정 적자든, 고갈된다는 연금기금이든, 그 적자ㆍ고갈을 통해서 ‘미래세대’에게 전가하는 부담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미래세대가 생산해야 하는 것을 앞세대가 먹어 치우는 게 결코 아니며, 그렇게 먹어 치울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재정 적자 등이 후세대에게 무언가를 전가한다는 환상이 생기는 것은 전적으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와 그에 따른 부기 방식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가 폐지되면,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부기 방식이 사라지면, 그러한 환상도 사라진다.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가 폐지된 사회라면, 그해 그해의 사회적 총생산물은 다음과 같이 처리ㆍ소비된다.
[우선: 인용자] 거기에서 다음의 것들이 공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첫째로: 소모된 생산수단들을 대체하기 위한 부분.
둘째로: 생산을 확대하기 위한 추가분.
셋째로: 재해, 자연현상에 의한 교란 등에 대비한 예비기금 혹은 보험기금.
…
총생산물의 다른 부분은 소비수단으로 이용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인용자] 개인적으로 분배되기 전에, 이것에서 다시 다음의 것들이 제외된다:첫째로: 직접적으로 생산에 속하지 않는 일반적인 관리비용.
이 부분은, 오늘날의 사회에 비하면, [사회주의ㆍ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인용자] 처음부터 극히 현저하게 제한될 것이며, 새로운 사회가 발전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줄어들 것이다.
둘째로: 학교, 보건시설 등과 같이, 필요를 공동으로 충족시키도록 되어 있는 것.
이 부분은, 현재의 사회에 비하면, [사회주의ㆍ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인용자] 처음부터 현저하게 증대하며, 새로운 사회가 발전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증대한다.
셋째로: 노동 불능자들 등을 위한 기금, 요컨대, 오늘날 소위 공적 빈민구제에 속하는 것.[11]칼 맑스, “[부록2] 고타 강령 비판”, ≪공산당 선언≫, 채만수 역, 노사과연, 2022, pp. 143-144.
그러고서 이후에 남는 것들이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 아직 구사회의 모반(母斑)이 남아 있고 생산력이 비교적 낮은 단계에서는 각자의 노동에 따라서, 생산력이 고도로 발달한 높은 단계에서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서 ‘분배’된다.[12]같은 글, 같은 책, pp. 144-148 참조.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ㆍ생산 양식만 폐지되면, 그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류가 획득한 고도의 생산력에 힘입어 누구나 안락하고 풍족한 생활을 즐길 수 있다. 오늘날 같으면, 고도의 생산력 덕분에 아주 짧은 시간만 노동하고도, 아니, 이제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위에서는 노동자ㆍ인민의 대량의 해고ㆍ빈곤의 원인인 소위 AI, 인공 지능으로 대표되는 고도의 자동화ㆍ무인 생산 기술 덕분에 일하기 싫은 사람은 일하지 않아도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노동만으로도 누구나 그렇게 안락하고 풍족한 생활을 즐길 수 있다. 문제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ㆍ생산 양식의 폐지, 새로운 사회의 건설, 그것뿐이다.
* * *
III
이른바 ‘국민연금’에 대해서, 그리고 ‘적자 재정’ 혹은 ‘재정 적자’에 대해서, “미래세대의 부담” 운운하면서 그 ‘개혁’ 운운하는 것은 철저히 자본주의 체제 내적인 구상이다.[13]참고로, “미래세대 부담” 운운하는 유행에 편승하여, ‘국민의힘’ 소속의 오세훈 서울시장도, 지하철 요금 인상 및 노인 무료승차 문제와 … Continue reading
하지만, 예컨대, 옛 봉건 지배층들이, “하늘의 뜻”을 들먹이면서, 영원할 것처럼 떠들던 봉건 사회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 자본주의 체제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질 과도적인 사회에 불과하며, 사실은 그 극도로 격화된 모순과 그로 인한 파국적 위기 때문에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어야 할 체제이다. 심지어 ≪조선일보≫ 같은 극우 매체조차 사실상 거듭거듭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14]“뉴딜정책의 진실은 많은 사람들의 인식과는 다르다. … 뉴딜정책은 프랭클린 루스벨트(Roosevelt)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1933년부터 제2차 … Continue reading 자본주의 그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이나 특히 제2차 세계 대전과 같은 엄청난 파괴와 인간 살육을 통해서만 연명해 왔고, 다시 또 그러한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미래세대의 부담” 운운하면서 ‘국민연금 개혁’ 운운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자본의 이데올로그들이 조장하는 ‘자본주의의 항구성’ 혹은 그 ‘불멸’이라는 사고에 갇혀서, 즉 그렇게 깊디깊은 우물에 갇혀서 읊어 대는 우물(愚物)들의 타령일 뿐이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영원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개혁’ 운운하는 저 우물들의 타령은, 순진한 노동자ㆍ인민대중의 시야ㆍ사고ㆍ상상력을 자본주의라는 체제 내에 가두면서, 앞서 말한 것처럼, 이미 웃살아도 한참을 웃산, 착취와 억압의 자본주의 체제를 연명하는 데에 봉사한다. 물론 당분간일 뿐이지만, 아무튼, 착취와 억압의 자본주의 체제를 연명하는 데에 봉사하는 것이다. 노동자ㆍ인민의 이름을 참칭하며 그러한 반동적인 역할을 하는 대표적인 집단은 사민주의자들과 그 정당들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저런 ‘개혁’을 주장하면서 그에 매달리는 언필칭 진보 정당이나 진보적 지식인들, 진보적 시민 단체들이 바로 그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재정이 적자 나거나 연금기금이 고갈된다고 해서 그 자체 때문에 미래세대가 어떤 부담을 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어느 시대나 미래세대가 생산하게 될 것들을 당겨먹거나 당겨 소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재정 적자나 연금기금의 고갈이 ‘미래세대’의 부담 가중으로 된다면, 그것은 순전히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와 그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부기 방식 때문일 뿐이다.
지금 ‘국민연금’이 ‘기금’으로 적립하고 있는 것은 미래의 노인들이 소비하며 살아가는 식량 등등의 생활 수단들이 아니다. 그저 ‘화폐’를 적립할 뿐이며, 그것마저도 사실은, 실제의 화폐인 금이나 은, 혹은 그것들을 대리하는 가치표장, 즉 국가지폐로서의 한국은행권을 적립하는 것이 아니라, 화폐 명의(名義), 다른 말로 가공(架空)의 화폐만을 적립할 뿐이다. 그리고 그에 의해서 ‘미래세대’가 생산할 생활 수단들에 대한 일종의 청구권만이 적립될 뿐이다. ‘국민연금’을 ‘개혁’하지 않을 경우 2041년부터는 적자로 되어 2055년에는 고갈, 소진된다고 지금 저들이 야단법석을 떠는 ‘기금’, 그것은 바로 그러한 가공의 화폐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에 기초한 그러한 청구권일 뿐이다.
그런데 그러한 가공의 화폐나 청구권이 적립되느냐 안 되느냐, 혹은 얼마만큼 적립되느냐에 따라서 ‘미래세대’가 생산할 생활 수단들의 량이 좌우되는가? 적립을 많이 하면, ‘미래세대’가 생산할 생활 수단들의 량이 감소해서 그들의 ‘부담’이 적어지고, 적립된 가공화폐, 적립된 청구권이 없으면, ‘미래세대’가 생산할 생활 수단들의 량이 엄청나게 많아져서 그들의 부담이 엄청나게 증대하는 것인가? 그리하여 ‘미래세대’에게 엄청난 부담을 전가하는 것인가?
저 우물 속의 우물들도, 제정신을 가지고는, 차마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저들 우물들이 주장하듯이 ‘기금’이 소진되는 경우 ‘미래세대’의 부담이 증대한다면, 그것은, 거듭 말하는 것이지만,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와 그에 기반한 부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 체제 때문일 뿐인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 그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생산 수단을 공유하는 보다 고도의 사회로 이행하면, ‘미래세대의 부담 증대’ 따위의 헛소리, 망상은 사라진다. 뿐만 아니라, 저 앞에서 ≪조선일보≫의 “사설”이 “각 분야의 구조 개혁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듯이 사기 치고 있는,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집 문제, 일자리 문제, 교육 문제[15]혹시, 예컨대, 독일에서는 초등교육뿐 아니라 고등교육까지도 무료로 실시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봐라,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도 교육 … Continue reading”나 ‘저출산’도 비로소 해결되게 된다.
IV
“근본주의다! 근본주의다!” 하고, 필봉을 휘두르며 비난ㆍ비판하고 나설 위인이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답할 것이다. ― “과분한 영광입니다”라고.
“비판의 무기는 물론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고,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에 의해서 전복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하지만 이론 또한 그것이 대중을 사로잡자마자 물질적 힘으로 된다. 이론은 그것이 사람들에게(ad hominem) 입증되자마자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으며, 이론은 그것이 근본적(radikal)으로 되자마자 사람들에게(ad hominem) 입증된다. 근본적이란 사물을 뿌리에서 파악하는 것이다”[16]맑스,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서설”, MEW, Bd. 1, S. 385.(최인호 역, 김세균 감수,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1권, 박종철출판사, … Continue reading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접근하면서, 당장의 개별적인 해결책에 나 몰라라고만 하고 있을 수는 물론 없다. 그 때문에, 나는 작년에, 연금 지급액의 인상 등으로 ‘연금기금’이 ‘고갈’되면, 국가 재정에서 보충하면 그만이며,[17]저 앞에서 본 것처럼, 전용복 교수도, “철저하게 가입자와 비가입자를 구분”하여 “국민연금 보험료에는 ‘꼬리표’를 달아놓고, 걷은 돈 내에서 … Continue reading 또 실제로도 그렇게 보충할 수밖에 없고, 보충하고 있다고 수줍게 얘기했다. 이 얘기가 수줍은 이유는 굳이 연금 제도와 그 기금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금기금은 그저 재정으로 통합해 버리면 그만인데도 말이다.
실제로, 자본주의 체제를 전제한 위에서의 노후 보장 문제, 혹은 ‘연금’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저 우물들에게는 어이없게 들릴지 모르지만, 각종 ‘연금’, 연금 제도들을 해체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가 그 재정(財政)에서 보장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재의 소위 ‘기초연금’을 두 측면에서 확대, 일반화하는 것이다.
하나는, 소위 ‘자격’ 혹은 대상인데, 예컨대, 60살이든, 아니면 65살이든, 일정한 년령에 달한 모든 사람으로 확대, 일반화하고,
다른 하나는, 급여액인데, 현재처럼 ‘연금을 줍네’ 하고 사실상 생색을 낼 뿐인 금액, 최저 생활을 유지하기에도 부족한 금액이 아니라, 평균적인 생활 수준을 보장할 수 있는 금액을 지급하는 것으로 확대, 일반화하면 된다.
국가는 그 돈이 어디 있어서?
그렇다면 먼저 묻건대, 국가는 왜 저 소위 ‘기초연금’을 지급하는 것일까? 혹은, 국가는 왜 이런저런 이른바 사회 보장 제도를 실시하는 것일까?
그것이 국가의 역할이니까?
‘진보적’인 논객들은 필시, “그렇다, 그것이 국가가 응당 담당해야 할 역할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건대, 그러면 왜 반동적인 국가(정권)도 그러한 것들을 시행하는 것일까?
대답은 역시: “그것이 바로 국가의 역할이라니까!”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답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답은, 왜 국가마다, 그리고 왜 같은 국가라도 시기와 사회적ㆍ정치적 조건에 따라서 수행하는 그 ‘역할’의 정도가 다른가, 왜 국가는 기회만 있으면 그 ‘역할’을 약화ㆍ해체하려고 하는가, 그리고 왜 당신들 ‘진보적’ 논객들은 그것이 ‘국가의 역할’임을 수시로 역설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입으로 두말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맞다. 노후 보장을 포함한 ‘사회 보장’은 국가의 역할이며, 심지어 봉건 사회에서조차 ‘구휼’이라는 이름으로 그러한 역할을 하곤 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국가의 본래의 역할, 혹은 자발적ㆍ적극적 역할일까?
아니다. 강요된 역할, 소극적 역할일 뿐이다. 즉, 일정 정도 그 역할을 하지 않으면, 말하자면, 민심으로 이반으로, 즉 민중 봉기로 국가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마지못해 수행하는 역할일 뿐이다. 같은 국가라도 시기와 사회적ㆍ정치적 조건에 따라서 수행하는 그 ‘역할’의 정도가 다른 것도, 기회만 있으면 그 ‘역할’을 약화ㆍ해체하려고 드는 것도, 그리고 이른바 ‘진보적’ 논객들이 그것이 ‘국가의 역할’임을 수시로 역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그 ‘역할’이란 것의 그러한 성격 때문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가 그 ‘역할’을 어느 범위까지 수행하고, 어느 정도까지 수행하는가 역시 전적으로 국가에 대한 노동자ㆍ인민대중의 요구, 압력, 위협의 정도에 달려 있다. 1930년대 대공황과 제2차 대전을 거치면서 서유럽ㆍ북유럽 국가들에 그나마 괜찮은 ‘사회 보장 제도’가 확립되었던 것도 바로 노동자ㆍ인민대중의, 특히 노동자계급의 그러한 요구, 압력, 위협이 강했기 때문이었고, 20세기 사회주의 세계 체제가 해체ㆍ붕괴된 이후 그 ‘사회 보장 제도’가 약화ㆍ해체되고 있는 것도 바로 노동자ㆍ인민대중의, 특히 노동자계급의 그러한 요구, 압력, 위협이 심히 약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국가에 대한 노동자ㆍ인민대중의 요구, 압력, 위협과 그 강도(强度)가 그 ‘국가의 역할’ 자체도, 그 범위나 정도도 결정하는 것이다! 국가에 대한 노동자ㆍ인민대중의 요구, 압력, 위협이 강하면 강할수록, 국가는 노후 보장을 포함한 소위 사회 보장을 튼실히 하는 것이고, ‘연금 제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세금으로 그것을 해내라는 요구, 압력, 위협이 강하면 강할수록, 세금으로 해내는 것이다.
이만하면, “국가는 그 돈이 어디 있어서?”란 도발적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계속 같은 질문을 해 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답이라고 우기는 건 답이 아니다! 지금도 적자 재정인데, 국가는 도대체 어디서 세금을 거두란 얘기냐?”라면서.
이는 분명 ‘내 코가 석 자인데 남의 걱정하는’ 격이지만, 몇 가지 언급해 둬야 할 것은 있다.
V
우선,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국가 재정이 적자인 것은, 세원(稅源)이 없어서가 아니다. 세금을 거두어야 할 자들에게서 거둬야 할 만큼의 세금을 거두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들은 세금, 즉 국가 재정의 엄청나게 많은 부분을 노동자들을 위시한 빈곤한 인민대중에게 전가하고 있다.
세금의 징수와 관련해서 노동자들은 주요하게 다음 두 가지를 주장하고, 강요해야 한다.
첫째로, 철저한, 고율의 누진소득세. ― 예컨대, 월소득이 300만 원인 사람과 1,000만 원인 사람이 있다고 하자. 소득이 300만 원인 사람이 10%의 소득세를 내고 나면, 그의 수중에 270만 원이 남는 반면에, 소득이 1,000만원인 사람이 10%의 소득세를 내고 나면, 그의 수중에 900만 원이 남는다. 후자가 20%의 소득세를 내더라도 그의 수중에는 800만 원이 남아, 전자와 후자의 소득 차이는 530만 원으로 전자의 소득의 사실상 2배이며, 후자의 소득은 전자의 그것의 사실상 3배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월소득이 수천만 원, 수억 원인 사람들이 사실상 득실득실하고, 그들의 대부분은 노동하지 않는 착취자들이다! 그들이 착취자들이든 아니든, 그 고액의 소득에 합당한 고율의 누진세를 징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국가에 강요해서!
그렇게 될 경우, 세원은? 재원은? 돈이 어디에 있어서? 등등의 질문도 필요 없을 것이며, 재정 적자 따위도 사라질 것이다.
사실 연금 보험료가 9%든, 15%나 30%든, 이 연금 제도는 고소득 자본가들이 문제의 누진소득세를 피하는 방법의 하나다. 문제의 ‘국민연금’의 경우, 2022년 7월 1일 이후 현재, 연금 보험료를 부과하는 ‘기준소득월액’의 상한액이 553만 원이다! 그리하여, 월소득이 553만 원 이상인 자는 월소득이 얼마든, 즉, 1천만 원이든, 5천만 원이든, 혹은 1억 원이나 그 이상이든, 매월 ‘5,530,000원 × 9% = 497,700원’만 내면, 시쳇말로 땡이다! 이 얼마나 공정! 공정! 공정한가!
둘째로, 일체의 간접세의 폐지. ― 이른바 부가가치세와 관세가 대표적인 간접세인데, 이들 간접세는 소득이 얼마든, 그리고 과세 대상의 가격이 얼마든, 구매자는 동등한 세율로 세금을 낸다. 부가가치세의 경우 일률적으로 10%의 세율로, 그리고 관세의 경우 품목에 따라 규정된 세율로.
이렇게 구매자가 누구나 동등한 세율로 세금을 낸다는 것은, 바로 간접세가 소득역진세(所得逆進稅)임을, 즉 극히 극히 공평한 세금임을 의미한다! 예컨대, 돈을 주체하지 못해서 몇백만 원, 아니 몇천만 원짜리 ‘명품 빽’ㆍ‘명품 시계’ 등을 사는 사람이나, 몇만 원짜리 혹은 몇천 원짜리 가방 혹은 시계를 사는 사람이나 같은 률의 세금을 내는 것이고, 그것들이 수입품일 경우, 같은 률의 관세를 부담하는 것이다. 이 역시 얼마나 공정! 공정! 공정한 세금인가!
간접세를 폐지할 경우, 이러한 공정은 없어진다. 따라서 노동자ㆍ인민대중은 그러한 공정을 없애도록 국가에 강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되는 경우, ‘국민연금’ 대신에 국가가 모든 인민의 노후를 보장할 돈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걱정할 필요도 물론 없어진다.
추기: 노동자들, 특히 조직 노동자들을 사실상 적으로 단정하며 전쟁을 벌이고 있는 윤석열 정부의 고용노동부 장관도 역시 “미래세대” 타령이다. 요렇게 ―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 개혁 방향에 대해 무조건적 반대나 당장의 유불리에 집착하지 말고 전체 노동자와 미래세대, 국가 미래를 생각하며 책임 있는 경제ㆍ사회 주체로서의 모습을 보여 달라”[18]전종휘 기자, “노동계 원로들 “윤 정부 균형 잃었다” 장관에 쓴소리”, ≪한겨레≫, 2023. 2. 23. <https://www.hani.co.kr/arti/society/labor/1080771.html?_fr=mt0>! (강조는 인용자.)
노사과연
References
↑1 | 예컨대, 2023년 2월 9일의 한국노총 성명, “국회의 총체적 무능함과 비겁함이 연금개혁을 망친다―전문가 합의가 어렵다는 핑계로 연금개혁 무산 시도 규탄한다”(<http://inochong.org/report/369915>) 및 같은 날의 민주노총 성명, “국회가 연금개혁을 구조개혁 논의부터 다시 하겠다는 말은 시급한 연금개혁을 하지 않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http://nodong.org/index.php?mid=statement&page=2&document_srl=7812648>)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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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애초에 왜 그렇게 정신 나간 설계를 했는지를 묻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
↑3 | 바로 위 숫자들은, 곽윤아 기자, “연금 소진땐 그해 거둬 그해 지급…월급의 35% 보험료로 내야할 판”, ≪서울경제≫(인터넷판), 2023. 1. 27.(<https://www.sedaily.com/NewsView/29KMZK0VPU>)에서 인용했는데, 이 기사는 자본의 이해(利害)를,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관례에 따라서, ‘국민’ 혹은 ‘국가 경제 (전체)’의 이해로 포장하는 기만적 어법에 기대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부과 방식으로의 전환은 국가 경제 전체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한다. 이번 추계에 따르면 연금 급여 지출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현재 1.7%에서 기금 소진 후(부과 방식 전환 후)인 2060년 7.7%, 2080년 9.4%까지 늘어난다. GDP의 10% 가까이가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생산ㆍ투자 부문이 아닌 고령자의 지갑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다.”
‘적립식’으로부터 ‘부과식’으로의 전환이 어떻게 그리고 왜 “연금 급여 지출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바꾼다는 것인지, 그 신묘한 계산방식이 무엇이든, 저들이 얘기하는 것은 결국, 부과식으로 바꿀 경우 “국가 경제 전체에”, 즉 자본 전체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
↑4 | 김상철 경제칼럼니스트, “지각 출발한 ‘연금개혁’ 서둘러야 하는 이유”, ≪주간조선≫(인터넷 판), 2022. 12. 29. <http://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23661> 예컨대, ≪경향신문≫(인터넷 판)도 “[사설] 2년 빨라진 국민연금 소진, 생애ㆍ노동 주기 다시 짜야”, 2023. 1. 27.(<https://m.khan.co.kr/opinion/editorial/article/202301272018015#c2b>)에서 이렇게 말한다. ― “국민연금 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개혁을 늦출수록 미래세대 부담이 커진다. 기금 고갈을 막기 위해 보험료율(현재 9%)을 높이고, 소득대체율(2028년 40%)과 수급연령(올해 만 63세, 2023년엔 65세) 등을 조정하는 논의가 필요하다.” |
↑5 | 여기에서 “사실상 하나로 …”라고 쓰는 이유는, 예컨대, “철저하게 가입자와 비가입자를 구분”하여 “국민연금 보험료에는 ‘꼬리표’를 달아놓고, 걷은 돈 내에서 연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못 박아” 둔 “프레임”을 벗어나 국민연금 기금이 부족하고 고갈되면, 세금을 투입하면 된다는 반론(전용복 경성대 국제무역통상학과 교수, “2055년 30대는 국민연금에 등골 휜다? 중요한 게 빠졌다―[전용복의 경제시론] 개혁론 핵심 주장이 놓친 질문… 부족한 재원, 어디에서 충당할 것인가”, ≪오마이뉴스≫, 2023. 1. 31. <https://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898506&CMPT_CD=MTO99>)이나, “얼마를 더 내고 얼마만큼 받을지 논의하는 현 정부의 논의는 사실 근본적인 연금개혁이 아니다”며, “개혁의 실마리는 저출산에서 찾아야 한다”고 “진짜 해법”(황춘화 사회정책팀장, “연금개혁 위한 ‘진짜 해법’”, ≪한겨레≫(인터넷 판), 2023. 2. 07.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78715.html>)을 제시하는 논객 등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이참에 허실삼아 묻자면, ≪한겨레≫는, 진짜 해법이 아닌 걸 진짜 해법이라고 내세우는 게 약간은 꺼림칙해서였는지, 아니면 정말 진짜 해법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는지 “‘진짜 해법’”이라고 작은따옴표로 묶고 있는데, 같은 글에서 “저출생ㆍ고령화 문제” 운운하면서도, 왜 “개혁의 실마리는 고령화에서도 찾아야 한다”는 ‘진짜 해법’은 제시하지 않으셨는지?! |
↑6 | “기초연금에 소요되는 재원”이 어떻니, “재정 여력”이 어떻니 운운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뒤에서 논의하자. |
↑7 | 물론, “규제 개혁으로 경제를 활성화하고”는 “규제 개혁으로 자본을 활성화하고”로, 아니, “규제 개혁으로 자본의 잉여노동 착취를 활성화하고”로 읽어야 한다. 저들이 말하는 ‘경제’란 으레 자본이니까! |
↑8 | “[사설] 우리 아이들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암울한 대한민국”, ≪조선일보≫(인터넷 판), 2023. 1. 28. <https://www.chosun.com/opinion/editorial/2023/01/28/FKCS7ORZUZAGHHVKPEAMYXSUEM/> |
↑9 | 채만수, “진실을 밝혀 알리지 않고, 과학에 의거하지 않고는 미래가 없다―최근 정세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정세와 노동≫ 제178호(2022년 2월), pp. 27-32. |
↑10 | 이백윤 ‘사회주의’ 후보도 민주노총 주최의 ‘진보정당 대선후보 정책토론회’(2월 10일)에서 특수직 연금과 관련, 그것이 “부족하다면 국가 재정으로 충당해야 한다. …”고 말하고 있다(최지현 기자, “진보정당 대선후보 김재연ㆍ이백윤, ‘체제전환’ 한목소리―민주노총 주최 진보정당 대선후보 첫 토론회”, ≪민중의 소리≫, 2022. 2. 10. <https://vop.co.kr/A00001608716.html>). 다만, 그렇게 국가 재정에서 충당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발언에서의 ‘국가’의 본질ㆍ기능에 대한 그의 인식과 신앙은 바로 부르주아지의 그것이어서 심히 비과학적이고 반노동자계급적인 것이지만, 그에 대한 논급은 생략하자. |
↑11 | 칼 맑스, “[부록2] 고타 강령 비판”, ≪공산당 선언≫, 채만수 역, 노사과연, 2022, pp. 143-144. |
↑12 | 같은 글, 같은 책, pp. 144-148 참조. |
↑13 | 참고로, “미래세대 부담” 운운하는 유행에 편승하여, ‘국민의힘’ 소속의 오세훈 서울시장도, 지하철 요금 인상 및 노인 무료승차 문제와 관련하여, “지금 세대가 책임을 미루면 미래세대에게 견딜 수 없는 부담이 가중될 것”(김하나, “오세훈 “무임승차, 미래세대 부담”…대한노인회 “서울 지하철, 국가철도 기능 보조””, ≪데일리안≫, 2023. 2. 17. <https://v.daum.net/v/URWHYN0gT0>) 운운하며 나서는데, 이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
↑14 | “뉴딜정책의 진실은 많은 사람들의 인식과는 다르다. … 뉴딜정책은 프랭클린 루스벨트(Roosevelt)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1933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시점까지 실시된 일련의 정책을 지칭한다. 1937년에 2차 경제위기가 다시 찾아왔다는 점에서 대공황의 궁극적 극복은 뉴딜정책이 아니라 2차 대전 발발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장용성 연세대 언더우드 특훈 교수(美 로체스터대 교수), “뉴딜정책, 절반은 실패였다”, ≪조선일보≫(인터넷 판), 2009. 4. 4. <http://busines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4/04/2009040400146.html>); “우리는 뉴딜에서 환상을 버려야 한다. … 결국 10년이 넘는 경기침체에서 미국을 살려낸 1등 공신은 뉴딜보다는 전쟁(2차 대전)이었다는 게 다수 경제학자들의 평가다. 전쟁 덕에 제조업이 대호황을 누리는 계기를 잡았었다.”(송희영 조선일보 논설실장, “[송희영 칼럼] 루스벨트의 뉴딜, 이명박의 뉴딜”, ≪조선일보≫ 2009. 1. 17.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1/16/2009011601438.html>) |
↑15 | 혹시, 예컨대, 독일에서는 초등교육뿐 아니라 고등교육까지도 무료로 실시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봐라,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도 교육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학비가 무료라고 해서 그것만으로 교육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독일에서는, (대학의 경우 ‘학생자치회비’를 제외하면,) 학비가 완전히 무료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히 호흐슐레(Hochschule)나 우니베지테트(Universität)로 불리는 고등교육의 경우 사회 각 계급(의 자녀들)이 균등하게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노동자계급 특히 그 하층 출신의 학생은 예외적이라고 할 만큼 소수이다. 학생자치회비는 아주 소액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회비를 내고 대학에 등록하면, 예컨대, 대중교통을 무료로 이용하는 등등, 그만큼 혹은 그 이상의 보상이 따르기 때문에, 그 회비 때문에 그들이 소수인 것은 아니다. 노동자계급의 생활상의 처지, 그리고 그에 따른 그들의 문화와 교육에 대한 관념이 그들을 고등교육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
↑16 | 맑스,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서설”, MEW, Bd. 1, S. 385.(최인호 역, 김세균 감수,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1권, 박종철출판사, 1990, p. 9.) |
↑17 | 저 앞에서 본 것처럼, 전용복 교수도, “철저하게 가입자와 비가입자를 구분”하여 “국민연금 보험료에는 ‘꼬리표’를 달아놓고, 걷은 돈 내에서 연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못 박아” 둔 “프레임”을 벗어나 국민연금 기금이 부족하고 고갈되면, 세금을 투입하면 된다고 얘기하고 있고(전용복 교수, 앞의 글), 이백윤 ‘사회주의’ 후보도 민주노총 주최의 ‘진보정당 대선후보 정책토론회’(2022년 2월 10일)에서 특수직 연금과 관련, 그것이 “부족하다면 국가 재정으로 충당해야 한다. …”고 말하고 있다(최지현 기자, 앞의 기사).
그런데 이 후보는, “사회주의를 전면에 내세”우고, “‘청년ㆍ여성ㆍ노인 빈곤과 임금ㆍ자산 불평등의 원인은 자본주의 체제에 있다’며 ‘소수 재벌과 불로소득자를 위한 경제를 모든 사회 구성원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경제로 바꾸지 않는 한 불평등한 현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역설”하면서도, “공무원연금을 둘러싸고 잘못된 논란이 일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특수직역연금의 정신을 보자면 국가와 국민, 노동자 민중에 봉사했기 때문에 연금이란 방식으로 일정 정도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강조는 인용자)고 한다. ‘국가’의 본질ㆍ기능에 대한 그의 인식은, 유감스럽게도, 부르주아지의 선전을 극복하지 못하고, 심히 비과학적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18 | 전종휘 기자, “노동계 원로들 “윤 정부 균형 잃었다” 장관에 쓴소리”, ≪한겨레≫, 2023. 2. 23. <https://www.hani.co.kr/arti/society/labor/1080771.html?_fr=mt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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