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발트 일리옌꼬프(Э́вальд Илье́нков)
번역: 김민규(자료회원)
* E. V. Ilyenkov, “Knowledge and Thinking”[1979], Journal of Russian and East European Psychology, vol. 45, no. 4, July–August 2007, pp. 75–80. <https://www.marxists.org/archive/ilyenkov/works/articles/knowledge-thinking.pdf>
우리의 학교가 단순히 학생의 머리에 학습 자료를 이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라는 슬로건은 우리의 교육학 문헌에서 얼마간 상당히 널리 쓰여 왔다. 이것은 합리적인 표어이다. 하지만 그것은 교육학계가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문제에 즉각적으로 직면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사고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사고”란 무엇인가?
이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과연 모든 교육학자들이 그 스스로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그 단어의 의미를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정규 교과를 이수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의 발전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단순히 사고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인데, 왜냐하면 사고는 단지 “독립적일”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차이를 인지하는 것은 단지 바른 길로 가는 첫 번째 걸음일 뿐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어려운 일인 두 번째 걸음은 이 차이를 극복하는 것에 있다. 즉, 이것은 “지식의 완전한 숙달”과 “사고하는 훈련”을 두 개의 상이한 과제로 간주하는 것을 그만두는 일이다. “상이하다”는 것은 각각의 과제가 다른 과제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수행되고 그리고 “상이한” 방법과 수단으로 수행될 수 있고 수행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물의 본성에 의해, 지식과 사고의 본성에 의해 불가능한 일이며, 전체적인 문제는 완전한 지식 습득의 과정이 동시에 사고를 훈련하고 사고하는 능력을 훈련하는 과정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매 걸음마다 반대되는 상황―“알고는” 있으나 창조적으로(독립적으로) 사고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과 실제로 마주치지는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만나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자주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는 진정한 의미의 지식은 없으며 소위 “지식”으로 오해되는 무언가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어떤 것을: 역자] 일반적으로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직 어떤 것을 특수하게만 아는 것, 이것 혹은 저것을 아는 것만이 가능하며, 어떤 대상을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그것을 조정할 수 있고 독립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고”는 각각의 “대상”을 지적으로 다룬다는 것―즉, 그것의 본성에 부합하면서, 그것에 대한 환상에 따라서가 아니라―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이다. “사고”란 실제적으로 작동하는 지식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나 이 지식을 현실에 적용할 수 없다고 말할 때(그리고 매우 자주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매우 어리석은 말을 하는 것이며, 그것의 절반이 나머지 절반을 완전히 무효로 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 지식(대상에 대한 지식!)을 대상에 연관시키지 못하면서 어떤 대상을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사실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은 어떤 사람이 실제로 어떤 대상을 알지 못하고 다른 어떤 것을 알고 있을 때 발생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대상에 대한 문구들이 그러하다. 과학에 퇴적되어 있고 대상에 대한 지식 대신에 숙달된(기억된) 단어, 용어, 공식, 부호, 상징, 그리고 그것들의 결합물들 ― 현실 위에 그리고 현실 밖에 존재하는 특수한 대상으로서,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며 환영(幻影)적인 “대상”의 특수한 세계로서.
바로 여기서 지식의 환상이 발생하며, 이 환상적인 지식을 현실에, 삶에 ―이 현실, 삶에 대해 그 사람은 의미 없게 기억된 단어들, 공식들, 그리고 “규칙들”에서, “기호로 된 구성물들” 속에서 이미 표현된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만을 알고 있다― 연관시킨다는 해결할 수 없는 과제가 이어진다. 그리고 그가 이러한 환상적이고 순수하게 형식적으로 숙달된 “지식”을 삶과, 현실과 연관시키려고 할 때, 그는 지식과 삶 어느 것에 대해서도 가치 있는 것을 창출할 수 없다.
위에서 스케치된 지식의 개념에 대해, 매우 널리 퍼진 그리고 철학적으로 그릇된, 사고에 대한 개념이 대응한다.
이러한 개념은 첫눈에 보기에 상당히 명백하고 심리학적으로 허용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간단히 속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천년의 전통의 힘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사고”는 “내적인” ―말이 없는― 언어와 같은 어떤 것으로서, 스스로에게 속삭이는 소리 없는 침묵의 독백 같은 어떤 것―필요하다면 다른 사람에게 말이나 문자의 형태로 “외적으로” 전환되는 것으로―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견해의 옹호자들은 그러므로 “사고”를 무엇보다도 그것의 어구적 표현에서, “언어적 사고”로서 이해하고 탐구한다. 사고하는 능력 자체는 자연스럽게 여러 종류의 단어, 부호, 상징을 조작하는 능력이나 이러한 부호를 알려진 “규칙”에 맞춰 결합하고 분해할 수 있거나 “발언의 연산”의 수행을 할 수 있는 능력, 즉 어떠한 부호의 결합의 순서를 다른 순서로 변환할 수 있는 능력과 다소 일관되게 동일시된다. 이러한 행동을 지배하는 “규칙”에 대해, “사고의 법칙”이라는 지위와 이름이 할당된다 ― 그럴 자격이 없는 지위와 이름.
이러한 개념의 기초 위에서, 사고하는 것, 즉, 사물의 본질, 실제적 삶의, 객관적인 현실의 상황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성취하는 것의 실제적인 능력을 훈련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유물론적인 반영 이론에 의해 사고라는 용어에 주어진 의미로서의 사고하는 능력 대신에, 여기서 적극적으로 훈련된 능력은, 객관적 상황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진정한 ―유물론적인― 의미에서 객관적인 진리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적 구성물의 “단순성과 우아함”의 성공, 효용성, 합의, 고려 등등을 향하는 것으로서, 기껏해야 세련된 언어적 기민함에 불과하다. 드물지 않게 이러한 개념은 직관, 비합리적이고 잠재의식적인 동기, 도덕적 및 미적인 “가치들”이 하는 역할에 대한 이야기들과 결합되어 있고, 그리고 언어 속에서의 활동 및 언어를 수반하는 활동, “기호적 사고”를 내밀하게 안내하는 다른 순수하게 주관적 요인들이 하는 역할에 대한 이야기들과 결합되어 있다.
위에서 스케치된 사고에 대한 이해는 현재 서양 철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조류인 신실증주의와 실존주의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과학과 교육 분야 모두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영향은 우리나라에도 침투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은 고려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현대 과학 철학”이라는 유행하는 복장을 한 이질적인 철학적 영향에 대해, 지식과 사고에 대한 그리고 이 양자의 언어와의 관계에 대한 명확하고 원칙적인 변증법적 유물론적 이해를 대치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실제적이고 객관적인 현실은, 자신의 발전 과정에서 삶은, 그 결정적인 측면들에서 언어에, 혹은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에, 혹은 “기호적 구성물들”을 만드는 능력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들이 사고라고 잘못 불리고 있다. 혹은 실제적인 사고, 즉, 우리를 둘러싼 세계 속에서 진정한 상황들에 대한 인식을 획득하는 능력에 대해서조차,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에 의존한다고 잘못 알려져 있다.: 역자] 비록 삶에서 약간의 매우 중요한 것들이 이 능력에 의존하지만.
물론 가장 높은 형태의 사고―그 토대에 대해 우리의 학교가 가르칠 의무가 있는 과학적-이론적 사고를 포함해서―는 언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내가 말하는 것이 이 연결의 문제를 무시하는 것에 찬성하는 주장으로 읽혀서는 확실히 안 된다. 소위 과학 언어를 포함해서, 언어의 유창한 숙달은 사고의 주요한 조건이지만, 반대로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진정한 사고는 유창한 언어 숙달에 불가결한 조건이다. 독립적으로 사고할 수 없는 사람은 언어를 숙달할 수 없다; 오히려, 언어가 그를, 그의 의식을 지배할 것이다. 그의 사고(“그의 내적인 언어”)는 언어적 고정 관념이나, 무의미하게 암기된 기호적 구성물이나 “규칙”, 규정, 지시, 조언 및 기타 등등에 대한 영구적인 노예적 의존 관계의 상태로 남아 있다. 그리고 정확히 바로 여기에 교조적인 생각, 교조적인 사고―매우 나쁜 종류의 사고―가 형성되는 비밀이 놓여 있다. 교조주의는 반드시 같은 구절의 공허한 반복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교조주의는 때때로 매우 세련된 언어적 기민함에 의해, 삶을 죽어 있는 공식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밀어 넣는 능력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일에는 실제적인 재주꾼이 있다. 하지만 교조주의는 본질에 있어서 교조주의로 남아 있다; 교조주의는, 발전 과정에 있는, 긴장된 변증법적 관계에 있는 살아 있는 현실을 고정된 공식이 모호하게 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번성한다.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은 무엇보다도 변증법, 즉, 이 단어의 가장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시대의 최고의 맑스주의자인 레닌이 부여한 의미로서의 변증법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변증법은 무엇보다도 “대립물들이 어떻게 동일할 수 있고 동일한지(그것들이 어떻게 동일하게 되는지), 어떠한 조건하에서 동일하고 스스로를 다른 대립물로 전화시키는지, 왜 인간의 사고가 이러한 대립물들을 죽어 있고 얼어 버린 것으로서가 아니라 살아 있고, 조건적이며 역동적인 것으로 이해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교의”[출처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레닌의 글로 추정됨]*이다.
(*원문대로.)
사람들은 아마도 우리가 학교 학생에게 세계의 모든 교수들과는 거리가 먼 것을 이해하고 숙달할 수 있는 것으로서 가르치는 꿈을 꿀 때 우리가 유토피아적 과제를 설정하고 있지는 않은지 물어볼 것이다. 이건 너무 터무니없는 계획이 아닌가? 아이들에게는 초보적인 진리만 가르치고 후에 대학과 대학원 공부를 위해 변증법의 미묘함은 남겨 두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미성숙한”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사물에 들어 있고 언어적으로 표현되는(과학의 언어로써) “모순”을 보여 주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 이것은 회의주의나 과학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지는 않을까? 예전의 방식대로 행동하는 것, 즉 학생에게 단지 확고하게 정립된 진리들, 검증되고 실험된 지식의 공식들만을 가르치는 것이 더 안전하고 더 타당하지 않을까?
더 안전하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는 우리는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에 대해 전혀 목표를 세울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학생의 머리에 학습 자료를, 마치 그것이 컨테이너인 양 이식시키기만 하면 되며 더 이상 귀찮게 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대안적인 문제이다; 여기에는 제3의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것은 정확히 현대 교육의 변증법적 문제이다. 즉,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현대 과학의 굳어 있는 토대를 숙달하는 과정을, 생각, 사고하는 능력을 훈련하는 과정과 결합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즉 독립적으로 이 토대를 발전시키고, 그것들을 교정하며, 그것들을 새로운 데이터와 실제적 삶의 변화하는 조건들에, 우리를 둘러싼 세계(죽어 있는 그리고 얼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증법적 변화를 겪고 있는)와 일치하도록 하는 능력과 결합하는 문제이다.
그렇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 이들 대립물들을 결합시키는 것, 즉, 이미 수립된 지식을 숙달시키는 과정과, 고정된 형식으로 그것을 숙달하기보다는 스스로 지식을 찾아내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과정을 결합시키는 것. 하지만 이러한 어려운 일은 달성될 수 있다. 하나의 조건 속에서 이 일은 달성될 수 있는데, 즉, 나중으로 미루지 않고 처음부터 학생들에게, “고정된” 것으로 지금 보이는 어떤 진리가 사람들에게 삶의 한가운데서, 그 모순들 속에서 떠오른 어려운 문제에 대한 답으로 탄생했다는 것을 각각의 모든 경우에 보여 준다면, [이러한 일은 달성될 수 있다.: 역자] 어떤 사람이 지금은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지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각각의 모든 “고정된” 진리는 과거 어느 시점에서 극복되고 해결된 모순이다. 사람들의 사고의 협동의 고정된 결과를 그것이 획득된 과정과 함께 숙달함으로써, 학생은 동시에, 그 결과가 획득되고, 만약 그 결과를 잊었을 경우 다시 획득할 수 있는 수단인 사고의 양식을 또한 숙달할 수 있을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초 위에서 가르침을 구축하기를 진지하게 원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나는 직접적으로 교육학에 관련되는, 가르침과 지식 숙달 과정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맑스의 심오한 약간의 관찰을 사고를 위한 양식으로 제공하고자 한다.
로셔[Wilhelm Georg Friedrich Roscher]는 의심할 여지없이 문학에 대한 상당한 ―그러나 종종 매우 쓸모없는―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나는 이 괴팅엔 학생이 문학적 보물을 어렵사리 뒤적이며 공식적이고 존경할 만한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만 익숙하다는 것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수학 문헌 전체를 알고 있으면서도 수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그런 교수 같은 남학생이 천성적으로 수업에서 배우고 그것을 가르치는 것 이상의 일을 할 수 없다면, 스스로를 가르치는 단계에 도달할 수 없다면, 그러한 바그너 같은 사람이 적어도 정직하고 양심적이라면 그는 그의 학생들에게는 조금 쓸모가 있을 것입니다. 그가 거짓 핑계를 대지 않고 솔직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면: “여기에 모순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고, 누군가는 저렇게 말합니다. 사물의 성질이 내가 가진 의견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제 자기 스스로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지 확인하십시오!”
이런 식으로 그의 학생들은 한편으로는 연구를 할 수 있는 것이 주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일을 하도록 유도될 것입니다.
하지만 틀림없이, 여기에서 내가 던진 도전은 그 교수 같은 남학생의 천성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문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 자신의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절충주의로 인해, 고정된 답의 풍부함을 단지 냄새 맡으며 킁킁댈 뿐입니다. (“페르디난트 라살에게 보낸 편지”, 1862년 6월 16일.)
물론 변증법적 논리학에 기초한 가르침의 재구성은 단순한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철학자, 심리학자, 교육학자, 즉 학생의 사고력 훈련에 직접 관여하는 구체적인 과학적 훈련의 교사들의 우호적인 협력적 노력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우리는 일반적인 철학적(논리적) 사고만을 오롯이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철학에 대한 가장 진지한 능력 없이는 어떤 것도 성취할 수 없다. 나는 이것을 교육학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싶다.
노사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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