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마당] ≪노동자 교양경제학≫을 읽으며(2)

― 한국에서의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의 성립과 사회구성체 논쟁

 

예상호 | 회원

 

* 채만수, ≪노동자 교양경제학: 정치경제학 원론에서 신자유주의 비판까지≫(제6판), 노사과연, 2013.

 

 

Ⅰ. 한국에서의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의 성립에 관한 논쟁

 

1.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로의 이행

지난 시간에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가 무엇인지, 어떤 역사적 경로를 밟아 오며 형성되었는지를 탐구하였다. 그 과정에서 국가와 계급 등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언제부터 자본주의 체제가 성립되었는가? 다른 말로, 어떠한 역사적 단계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로 이행하였는가? 자본주의 체제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리고 앞으로도 살펴볼 것처럼 어떤 공통된 특징들과 작동 원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한국에서 나타나는 구체적인 현상들을 과학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한국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정확한 파악을 통해서만 현재 청년들이 겪고 있는 실업, 좌절, 무한 경쟁의 굴레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고, 그 과학적 분석을 기반으로 해야만 각각에 맞는 대안과 해결책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작점이 바로 한국의 자본주의 이행 시기에 관한 분석이다.

1980년대 일어난 사회구성체 논쟁 중 일부도 이와 관련하여 전개되었다. 먼저 한국이 자본주의 사회임은 부정할 수 없이 명백하다. 또한, 조선이라는 봉건 사회에서 현 자본주의 체제로 이행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크게 두 가지 논쟁거리가 남게 된다. 첫 번째는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 언제 등장했는가에 대한 논쟁이다. 즉 자본주의 이전의 생산 방식이었던 봉건제 사회(조선)에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가 언제였느냐 하는 논쟁이다. 두 번째는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 언제부터 지배적인 생산관계가 되어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했느냐 하는 논쟁이다. 그리고 두 번째 논쟁의 경우 다시 두 가지의 논쟁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말 그대로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이 언제 성립되었느냐 하는 논쟁이 존재한다. 다음으로는 1970-80년대 농업 생산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던 재생소작제의 성격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2.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 언제부터 등장했는가?

앞서 보았듯 이 논쟁은 한(조선)반도 내에서 자본주의적 성격을 띤 생산 방식이 언제 어떤 형태로 나타났는지를 다룬다. 저자가 말했듯이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은 18-19세기 중엽 사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책에는 이 범주와 관련된 서술이 각주로만 간략하게 다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책의 각주와 함께, 필자가 알고 있는 통론 수준의 지식을 첨부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농촌에서는 이앙법의 확산으로 이모작이 가능해져 농업 생산력이 꾸준히 발달하였다. 이에 고구마, 감자 등의 구황 작물과 연초, 채소, 약재 등의 상품 작물들이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이 중 상품 작물의 재배에는 소작농과 무전농 등이 임노동 형식으로 종사했다. 여기서 상품 작물을 판매하여 부를 축적한 일부 농민들과 소작농들은 지주화되었다. 이들은 경영형 부농 혹은 서민 지주로 분화했다. 이에 따라 지대 형태도 변화하였다. 기존에 지주와 농민이 2분의 1로 나누어 갖던 타조법에서 정액제인 도조법으로 전환되었고, 이때 일부에서는 금납제(조세를 현물이 아닌 화폐로 내는 방식)가 출현했다. 이처럼 농촌에서도 화폐의 유통이 활발해지고 시장의 역할이 확대되었으며 상업적 지주가 출현하는 등 자본주의적 경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지주들이나 각종 지방 토호, 수령들에 의해 땅을 잃게 된 농민들이 늘어났고, 이들이 도시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에 서울을 중심으로 사상의 활동이 증가했고, 이들이 도고 상인으로 성장했다. 도고 상인들은 전국적 유통망을 설립하고 상품을 독점하는 등 이익을 취했다. 이에 당연히 화폐 사용이 증가했고, 이들 중 일부는 화폐자본을 축적하면서 고리대 등을 통해 화폐를 증식했다. 또한, 이들이 성장하면서 기존의 관허 상인들인 시전들과의 갈등이 일어났는데, 시전들은 금난전권을 통하여 사상의 활동을 억압했다. 결국, 정조대에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이 모두 폐지되며 시장 경제의 비중도 확대되었다.

한편 수공업은 이전부터 민간 수공업의 비중이 점차 확대되었지만, 여전히 주문과 동시에 원료, 자금을 미리 받아 생산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는 아직 수공업자들이 상업자본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뜻했는데, 이 중 일부가 상품을 독자적으로 생산하고 판매하게 되면서 역시 시장 경제의 비중이 확대되었다. 광업도 기존에는 부역을 통해 운영하던 것이 1651년에 설점수세제를 시행하여 경영이 민간에게 이양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국가는 별장을 파견하여 광업을 관리 감독하였는데, 1775년 별장도 폐지되고 수령이 자체적으로 관리하게 된다. 이때 광산에서 상납하는 세금을 덕대가 맡아 운영했는데, 이는 광업에서도 민간자본의 비중이 확대되고 민간에 의해 운영되는 것을 방증한다.

이처럼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 조선 후기부터 점차 등장하던 것 자체는 대체로 수용되고 있다. 다만 논쟁이 아예 종식된 것은 아니다. 예컨대 경영형 부농이 실질적으로 유의미한 비율로 존재했는지 등에 대한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특히 이 책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 곧 자본주의 사회로 전화할 토대가 될 정도로 확립되었다는 ‘자본주의 맹아론’은 학계에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3-1.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 언제부터 지배적 생산관계가 되었는가?

그렇다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지배적으로 된 시기는 언제인가? 이에 대한 주장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이 중 앞선 두 가지는 다수설이다. 이 책의 저자는 세 번째와 같이 주장하고 있다.

 

1) 1910년대 이행설

이 주장은 1910-18년까지 진행된 토지 조사 사업이 자본주의로 이행하게 된 계기라고 본다. 즉,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해 근대법적인 사적 토지 소유가 확립되었고, 이것이 곧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지배적 생산관계로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토지 조사 사업은 ○토지에 대한 경작 농민의 소유권 부정 ○경작 농민의 무산자화 ○지주의 배타적이고 독점적 소유권 확립이라는 성격을 보이며, 이는 곧 이전 연재에서 보았던 자본의 본원적 축적(시초 축적)이다. 이 설의 지지자인 박현채 교수는 일제의 생산관계는 의심 없이 자본주의였고, 이것이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해 식민지 조선에 반영된 것이므로 조선도 자본주의 사회가 되었다고 보충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먼저 맑스가 인도 벵골에서 ‘토지 개혁’으로 확립된 토지 소유 제도들을 ‘영국의 지주 제도의 희화’, ‘프랑스의 농민적 토지 소유의 희화’로 보는 것을 근거로 든다. 이는 곧 형식적으로는 근대법적 토지 소유를 나타내더라도, 실질적으로 거기에는 영국적인 자본가적 차지농 경영이나 프랑스적인 독립 자영농 등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본질적으로는 봉건적 소유라는 뜻이다. 즉 조선에서 토지 조사 사업이 일어나 법적으로는 지주의 근대법적 소유가 나타났지만, 그 내용, 즉 생산관계 면에서는 여전히 지주-소작 관계가 중심이었다는 점에서 봉건제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일제의 생산 양식이 자본주의일지라도 그것이 곧 식민지가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으로 연결될 수는 없다. 영국의 총독부ㆍ동인도회사가 자본주의적 상부 구조였다고 인도가 자본주의 사회일 수는 없는 것이다.

 

2) 1930년대 이행설

이 주장에서는 앞서 본 1910년대 이행설의 토지 조사 사업과 20년대의 임야 조사 사업을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기라고 파악한다. 또한, 1938년부터 공산액이 농산액을 능가하기 시작했으므로, 이러한 추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1930년대부터 조선이 자본주의 사회였다고 분석한다.

이 주장은 먼저 공업에서도 가내 수공업, 소생산적 경영 등이 있다는 점과 농업에서도 자본주의적 경영이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하지만 당시 농업은 봉건제가 지배적이었고 공업에서 비자본주의적 경영의 비율을 파악할 수 있는 통계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러한 지적은 방법론에 대한 비판으로 국한되는 셈이다.

더욱 결정적인 비판은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통계가 가격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차후 살펴볼 테지만, 가격은 가치의 화폐적 현상 형태이고 이 관계 자체에서 가격이 가치와 괴리될 수 있는 여러 요인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이 수요와 공급에 따른 변동이다. 이외에도 독점 가격, 인플레이션, 시장 가격-생산 가격의 괴리 등이 있다. 이들에 의해 가격은 가치를 기준으로 일정 범위를 따라 진동한다. 따라서 가격으로 파악된 통계는 근본적으로 정확할 수 없다. 이는 현재 모든 분야에서 인용되는 GDP, GNI 등의 통계도 모두 포함한다. 이렇듯 ‘상식을 벗어난’ 주장에 사뭇 놀랄 수도 있지만, 그 과학적인 근거는 앞으로의 연재에서 드러날 것이다.

그래도 굳이 가격 총액 통계를 참고한다면, 1930-40년 조선인 산업별 인구 추이 및 비율[1]조선 총독부, ≪국세 조사 보고≫.을 통해서 비판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1930년 농업에 종사하는 비율은 80.6%이고, 광업과 공업에 종사하는 비율은 합산하면 5.9%이다. 1940년에도 전자는 74.8%로 여전히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광업과 공업은 6.7%로 소폭 상승했다. 후자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아무리 혹사당하더라도 인구의 7-80%를 차지하는 농민보다 투하한 노동량이 많을 수는 없다. 그리고 맑스주의 경제학에서는 가치는 사회적 노동 시간에 의해 측정된다. 그런데 이 이행설이 인용한 통계에 따르면 1938년부터 공산액이 농산액을 능가한다. 이것은, 농민이 생산한 생산물의 가치가 노동자의 그것에 비해 매우 큰 평가 절하를 겪었다는 것, 즉 식민지 조선에서 농업 생산물과 공업 생산물 간에 극심한 식민지적 부등가 교환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설은 ○가격 통계를 무분별하게 인용하고 있다는 점 ○그것을 수용하더라도 이는 조선 사회가 자본주의화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조선 농민들이 식민지 정책에 의해 엄청난 수탈을 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비판받아야 한다.

 

3) 1940년대 농지 개혁

이처럼 위 주장들은 그 근거들에서 보이듯이 조선 사회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 분명 이행하고 있다는 점을 나타내 주지만, 여전히 지배적 생산관계가 봉건적 생산관계라는 점을 논파하지는 못했다. 이에 저자는 광복 이후 나타난 농지 개혁을 통해서야 비로소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가 되었다는 주장을 피력한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농지 개혁이 직접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창출한 것은 아니다. 토지를 분할받은 농민들은 분명 자영농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자영농은 이전 연재에서 보았듯이 소생산적 생산 방식이며 이는 계급 관계를 전제하지 않기 때문에 계급 사회의 성격을 논할 때는 논외로 간주된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가 고대 노예제 사회로 취급되지만, 사실 몰락 전후 시기를 제외한다면 소생산자가 분명 다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따라서 농지 개혁은 직접적으로는 소생산으로서의 자영농을 창출했지만, 그것은 동시에 당시까지 지배적이었던 반봉건적인 지주-소작 관계를 사실상 일소했고, 이를 통해서, 이미 18세기부터 등장하여 서서히 성장해 왔고, 특히 일제하에서 상당히 급속히 발전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 하여금 ‘지배적 생산관계’가 되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종래의 봉건적 지주들로 하여금 자본가적 길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했다. 이렇게 한국에서의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은 농지 개혁을 통해 성립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소생산이 생산 수단과 생산 과정의 분산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따라서 소생산으로서의 자영농은, 농업 생산력이 발달함에 따라, 다수가 잉여노동력으로 전락하게 되며, 몰락할 수밖에 없다. 즉, 농지 개혁을 통한 농민의 분할지 소유 그 자체가 농민층의 분해, 즉 농민의 토지 상실을 필연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필연적 법칙 위에, 한국에서의 농민층의 분해는 ○유상분배로 농민들을 빚쟁이로 내몬 기만적인 농지 개혁 ○미국의 원조로 유입된 대규모 잉여농산물로 인한 농산물의 저가격 ○인플레이션과 그에 따른 농산물-공산품 간의 가격 격차 확대 ○전쟁 비용 충당을 위한 현물세로서의 토지수득세 등에 의해 가속화되며, 이런 요인들이 누적적으로 작용한 결과,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에 걸친 대대적인 이ㆍ탈농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바로 한국에서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 대규모로 일어난 형태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저임금의 노동력을 대량으로 공급받으며 한국 자본주의는 더욱 급속하게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한국에서의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은 농지 개혁을 통해 성립되었으며, 이후 농지 개혁을 통해 창출된 분할지 소유의 소생산적 자영농층의 분해를 통해, 대규모의 본원적 축적을 이루고, 저임금의 노동력을 공급받으며, 한국 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ㆍ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던 것이다.

 

3-2. ‘재생소작제’의 성격에 관한 논쟁

그런데 지주-소작제는 ‘재생소작제’라는 형태로 다시 등장했고, 1970-80년대 농업 생산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소작농이 직접 생산자의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던 식민지 조선에서는, 지주-소작 관계의 성격 자체가 그 사회의 성격을 규정함과 동시에, 당면 혁명의 성격 및 그 과정에서의 소작농의 위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였다.

1980년대 재생소작제의 성격에 관한 논쟁에서도, 그것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비록 농업 종사자의 비중 자체가 이전에 비해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변혁 세력이 이들과 어떻게 협조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전략, 즉 혁명 과정에서 소작농을 어떻게 배치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의식을 안고 있었기에, 그 중요성은 여전히 컸다.

지주-소작 관계의 성격 자체에 대해서 말하자면, 논쟁은 그것을 자본제적 생산관계로 보는 견해와 봉건제적 생산관계로 보는 견해가 대립해 왔다. 일본에서는 전자의 견해를 ‘노농파’, 후자의 견해를 ‘강좌파’라고 부르고, 한국에서는 각각 ‘자본파’와 ‘봉건파’라고 부른다.

 

1) 자본파

한국에서는 김준보 교수로 대표되는 이 주장은 소작농이 사실상 임금 노동자와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사실상의 임금노동자’이고, 따라서 지주-소작 관계는 자본제적 관계라는 것이다. 이 주장에서는, 소작농은 본질적으로 자본가적 기업농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고, 봉건적 예농(신분적 예속 등을 포함한)이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들은 필연적으로 농업 노동자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으므로, ‘사실상’ 노동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주장에서 보이듯이 이들이 차후 노동자의 길을 따라가더라도, 이는 아직 ‘가능성’일 뿐이다. 즉, 자본파에서는 소작농을 ‘사실상’ 노동자라고 하지만 ‘사실상’이 가진 엄밀한 의미를 따져 보면 아직 노동자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2) 이른바 ‘반자본제’

자본파 일부인 이진경 등에서 나온 주장으로, 이들은 맑스와 레닌의 저서에서 반(半)프롤레타리아트의 개념이 등장하는 것에 착안하여 ‘소작인은 반프롤레타리아트이고 따라서 지주-소작 관계 또한 반자본제’라는 주장을 펼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반프롤레타리아트란, 자기 땅에서 자작을 하든, 토지가 없거나 부족해 소작을 하든, 자기가 경작하는 땅이 너무 좁아 거기서의 노동만으로는 생계를 충당할 수 없기 때문에, 일주일에 며칠은 공장이나 가까운 대농장에서 품팔이를 하는 사람들, 혹은 1년 중 농번기에는 자신이 경작하는 땅에서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는 대도시의 공장으로 가 임노동을 하는 계절노동자들을 가리키는 용어이기 때문에, 이러한 반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이 경작하는 땅과 관련해서는 소작농이나 소생산으로서의 자작농이고, 공장이나 대농장에 나갈 때는 노동자가 된다. 따라서 그 생산관계는, 한편에서는 소생산이나 지주-소작 관계,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임노동 관계라는 양자로 분열되는 것이지, 결코 반자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자신의 주장, 즉 지주-소작제는 ‘반자본제’이며 ‘본질적으로는 자본제’라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본론≫ 제3권 제37장의 아일랜드 소작농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면서, 맑스가 당시의 지주-소작제를 자본제적 관계로 규정했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런가? 해당 부분을 온전히 인용해 보자.

 

우리는 여기에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데 차지인 자신이 산업자본가이거나, 그 경영 방식이 자본주의적 양식이 아닌데 지대 즉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 대응하는 토지 소유 양식이 형식적으로 존재하는 관계들에 대해서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것은 예컨대 아일랜드에서의 경우이다. 여기에서는 차지인은 대개 소농민이다. 그가 토지 소유자에게 차지료로 지불하는 것은 자주 그의 이윤의 일부분, 즉 그가 그 자신의 노동 도구의 소유자로서 취득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그 자신의 잉여노동의 일부분을 흡수할 뿐만 아니라 다른 관계들 아래에서는 그가 똑같은 노동량에 대해서 수취할 정상적인 노임의 일부분도 흡수한다.[2]≪자본론≫ 제3권, MEW, Bd. 25, SS. 638-639.

 

이진경은 이 중 ‘이윤’, ‘노임’ 등의 단어를 토대로, 아일랜드의 차지인으로서의 소농민을 (반)자본제적 존재로, 지주-소작 관계를 (반)자본제적 관계로 주장하고 있다. 반면 위 인용문에서 명확히 볼 수 있듯이 맑스는 정반대로 당시 아일랜드의 농업에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 대응하는 토지 소유 양식이 형식적으로만 존재한다고 말했으며, 소작농(차지인)을 자본가나 노동자가 아닌, 스스로 노동 도구를 가지는 ‘소농민’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이윤’과 ‘노임’은 소작농에 대한 착취를 말하기 위해 자본제적 관계에서 빌려 온 단어일 뿐이고, 이는 맑스가 각 단어 뒤에 실제 의미를 덧붙인 것에서 또다시 드러나고 있다.

 

한편 이진경은, 뒤에서 살펴볼 봉건파가 ‘지대율’의 차이에서 봉건제적-자본제적 지대의 차이를 찾으려 한다고 자의적으로 규정하며, 이들을 보고 지대 형태에서 봉건제와 자본제의 차이를 찾는다면, 그것은 ‘지대가 생산관계의 본질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1986년 서울의 건물주들도 명백히 봉건 지주다!’[3]이진경,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아침, 1987, p. 209.라는 반어로, 그것이 오류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이 조소를 위한 엄격하지 않은 비유라고 할지라도, 그는 건물주가 받는 건물 임대료가 지대와 엄연히 구별되는 규정을 갖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건물은 언제나 땅 위에 지어지므로 그 임대료에도 역시 지대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건물’의 임대료라는 것은 개념적으로 건물 자체의 임대료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순수한 의미의 그것은 지대가 아니라 건물에 투자된 고정자본[4]생산 과정에서 자신의 가치를 여러 생산물에 순차적으로 나누어 이전하는 생산 수단, 예컨대 기계, 공장 건물과 같은 생산 설비나 공구 등이 있다.에 대한 이자와 그 건물의 감가상각비이다.

이렇듯 이진경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반자본제’의 주장은 자의적인 인용과 해석, 불충분한 주장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필자가 계속해서 “이른바 반자본제”라고 부르는 이유 또한, 다른 두 주장과 달리 최소한의 과학적 분석마저 포기해 독자적인 주장으로도 전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3) 봉건파

봉건파의 가장 근본적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지대는 토지 소유에서 비롯되는 일종의 사용료인데, 이것이 지주-소작 관계에서는 소작료로서 나타난다. 그런데 이 지대는 봉건제와 자본제에서 나타나는 양상이 다르다. 봉건제에서는 지주가 소작농으로부터 잉여노동을 지대의 형태로 착취한다. 여기서는 지대가 일차적 형태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봉건 사회에 존재하는 나머지 것들, 예컨대 상업 이윤과 고리대 이자 등은 모두 지대로부터 비롯된 이차적인 것이다. 즉 봉건제에서는 잉여노동의 착취가 가장 먼저 지대의 형태로 나타난다.

반면 자본제에서는 잉여노동의 일차적 형태가 이윤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지대는 이윤에서 파생되는 이차적 형태의 성격을 띤다. 농업이 자본제적 경영으로 운영된다면, 가장 먼저 자본가가 잉여노동을 이윤으로 착취한다. 이 중 평균 이윤율을 넘는 부분이 지주에게 지대의 형식으로 지불된다.

이처럼 봉건제적 지대와 자본제적 지대는, 그것이 잉여노동 착취의 일차적 형태인가, 혹은 이차적 형태인가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지주-소작 관계에서 소작료는 자본가의 매개 없이 지주에 의해서 소작농으로부터 직접적, 무매개적으로 착출되므로, 잉여노동의 일차적 형태이다. 따라서 지주-소작 관계의 성격은 봉건제인 것이다.

 

(1) 봉건제적 지대에 대한 오해와 반봉건제

봉건파 중 일부는, 봉건제적 지대는 고율이고, 자본제적 지대는 저율이라면서, 지주-소작 관계의 봉건제적 성격의 근거를 ‘고율의 소작료’에서 찾는데, 이는 오류이다. 농민에게 소작지로 임대되던 토지가 농업 자본가에게 임대되는 그 시점으로 돌아가 보자. 분명 자본제에서 노동 생산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이는 농업에서도 동일하지만, 이것은 자본제적 생산 양식이 확립된 이후의 일이다. 즉 토지가 농업 자본가에게 임대되는 시점에서는 소작농의 노동 생산력과 동일하다고 전제할 수 있다. 이때 지주는 농민이 아니라 지대를 보다 많이 지불하겠다는 자본가에게 땅을 빌려 줄 것이다. 따라서 애초에 봉건제에서의 소작료는 자본가가 이윤 중 일부를 지대로 지급하는 것에 비해 낮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봉건제의 근거를 소작료의 고율로 분석하는 것은 오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제 식민지하에서도, 70-80년대의 재생소작제에서도, 소작료가 매우 고율이었음은 사실이다. 이는 재생소작제라는 봉건제적 생산관계가 주변 자본제적 생산관계에 포위된 ‘반봉건적’ 생산관계였기 때문이다. 시장 경제가 발달하면 잉여노동의 착취는 일정 규모에 국한되지 않는다. 시장에서는 오직 화폐에서 비롯되는 양적 차이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욕망의 크기는 무한해진다. 반면 본래의 봉건제에서는 이러한 시장 경제가 발달하지 않았기에 착취 또한 지주나 영주가 직접 소비할 수 있는 사용 가치의 일정한 범위 내로 제한된다. 예를 들어 영주가 극한의 착취로 쌀을 수만 가마니를 얻었더라도, 이를 팔 시장이 없다면 쌀은 곧 창고에서 썩을 것이다. 이러한 생산 양식에서는 욕망의 범위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고율의 소작료는 자본제적 생산관계에 포위되어, 지주들의 욕망도 무한해졌고, 이에 의해 그 착취 강도를 매우 강화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봉건제에서는 ‘경제외적 강제’가 있어야 하는데, 최소한 70-80년대에는 그런 게 없지 않느냐라는 반박도 존재한다. 봉건제에서는 생산 과정에 착취자가 관여하지 않는다. 농노와 농민들은 생산 과정과 경영에서 자율성을 가진다. 따라서 그 생산물도 가장 일차적으로는 그들 자신의 창고로 들어가게 된다. 이를 착취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경제외적 강제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은, 봉건파의 주장대로 재생소작제가 봉건제라면 경제외적 강제가 보여야 하는데, 이것이 보이지 않으므로, 봉건파의 주장은 오류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경제외적 강제를 신분적 예속ㆍ강제 같은 것으로 매우 좁게 해석하여 본 것이다.

70-80년대의 재생소작제에서도 생산물은 당연히 농민들 자신의 창고로 먼저 들어간다. 따라서 이를 수탈하기 위한 경제외적 강제가 존재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근대적 법률에 의한 소작 계약이고, 그 이행을 강제하는 국가의 법원, 검찰과 경찰 등의 집행 기구도 경제외적 강제이다. 이처럼 경제외적 강제의 형태는 채찍에서부터 계약까지 다양할 수 있다. 따라서 재생소작제에는 경제외적 강제가 수반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이다.

 

4. 소결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로의 이행 시기와 재생소작제의 성격 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이 책의 저자는 한(조선)반도에서의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발생 시기를 18-19세기 중엽으로 보고 있으며, 한국에서의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의 성립 시기는 1940년대 농지 개혁 이후로 보고 있다. 농지 개혁은 당시까지 지배적이었던 지주-소작 관계를 사실상 일소하고, 수많은 소생산적 자영농을 창출했다. 이후 한국 자본주의는 이들을 수탈하며, 대규모의 본원적 축적을 이루었고, 분해된 농민층으로부터 대량의 저임금 노동력을 공급받으며, 급속한 성장ㆍ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마지막으로 1970-80년대 농업 생산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던 재생소작제의 성격은 반봉건적 생산관계이며, 이는 봉건제적 생산관계가 자본제적 생산관계에 포위된 것을 뜻한다.

 

 

II. 한국 사회구성체 논쟁에 대한 개론

 

1. 사회구성체 논쟁

한국의 사회구성체에 대한 논쟁(이하 사구체 논쟁으로도 병기)을 살펴보는 것은 현재 우리 사회의 구조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 갈 수 있다는 점, 이를 통해 변혁적 운동의 구체적 경로를 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따라서 필자는 ≪노동자 교양경제학≫의 저자가 사구체 논쟁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피억압의 정치학≫*을 참고하며, 이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 채만수, ≪피억압의 정치학(상)≫, 노사과연, 2008.)

먼저 저자가 분석한 사구체 논쟁의 흐름은 시대에 따라 극적으로 달라진다. 일단 1970년대까지는 극악한 파쑈 체제에 의해 민중 운동과 사회 과학의 학술적 발전 모두 이루어지지 못했다. 50년대의 전쟁과 학살이 자유민주주의라는 구호와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일체의 의문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점, 그리고 사실상 유일하게 명확하고 과학적인 분석이 이루어지던 시점은 1980년대였다. 예를 들어, 노해동A그룹에 의하면, 한국 사회는 제국주의와 전반적 위기하 독점자본이 지배하는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이며, 대다수 농민과 심지어 중소자본가 계층조차도 독점자본에 의해 강한 압력을 받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그 해결책을, 파씨즘 권력과 제국주의 축출, 독점자본 몰수 및 국유화, 이를 통한 전 사회적 개조의 물적 토대 확보로 명시하였다.[5]노해동A그룹, “새로운 전략ㆍ전술 방침 확립을 위한 시론―기존 견해에 대한 비판적 고찰”(1988년 5월), 박현채ㆍ조희연 편, … Continue reading

반면 1990년대 현실 사회주의권 국가 대다수가 몰락하게 되면서 그 내용은 크게 바뀌게 된다. ‘진보 정치’의 발전이라고 평가받는 민주노동당의 강령을 살펴보면, 제국주의는 한국을 지배하는 현실이 아니라 외세의 ‘시도’로 국한되고 있으며 그 범위도 불평등 조약과 협정으로 국한되고 있다. 경제적 생산관계에서는, 독점자본주의이라는 정확한 진단에서 주로 소유 부문에 국한되는 재벌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후퇴했다. 그 해결책도 마찬가지로 일부 부문의 공영화와 중소자본의 사적 소유 보장 등으로 퇴보했다. 사회구성체 논쟁은 완전히 사라졌으며 그 자리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여러 개량적 대안들이 대신했다. 진보적 지식인들 대부분은 노골적으로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봉사하거나, 또는 경실련과 참여연대 등 소부르주아 계급의 혼란을 그대로 대변하는 시민 단체로 옮겨 갔다. 이러한 행보를 거부한 지식인들도 적지 않은 수가 80년대 자신들이 주창한 이론들을 스스로 수정했다. 대표적으로 ‘자율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은 국가 문제, 사회 문제를 규정하고 해결안을 모색하는 대신 ‘자율’과 ‘공동체’라는 자의적이고 형이상학적 명제를 앞세움으로써 자기 자신의 과학적 분석을 청산했다. 한편 80년대 사구체 논쟁이 객관적 분석과 근거를 세우기보다는 ‘당위’에 매몰되어 역시 자의적으로 주장을 전개하는 측면도 적지 않았는데, 이 역시 사구체 논쟁의 열기가 식어 버린 요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80년대 사구체 논쟁의 대략적인 과정은 어떠하였는가? 80년대는 무엇보다 미국은 절대적 우방이며 성역이라는 이전까지의 인식에 큰 균열이 일던 시기, 즉 민족 문제에 대한 자각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미국이 신군부의 진압을 용인한 것이 그 결정적 계기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제국주의와 종속 문제가 대중적으로 제기되고 극복 과제로서 설정된 것은 굉장히 큰 역사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사구체 논쟁은 크게 두 가지 문제로 나누어지게 된다. 첫째는 앞서 말한 제국주의 및 종속 문제였고, 둘째가 한국 사회의 경제적 구성 문제였다.

 

2. 제국주의와 종속 문제

제국주의와 종속 문제에서는 대부분 논쟁자들의 의견이 수렴하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한국은 미 제국주의라는 제국주의에 종속된 사회’라는 점이다. 이렇게 수렴된 의견은 경제적 구성에 대한 논쟁과 융합되면서 ‘식민지 반봉건 사회론’ 내지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론’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론’이라는 양 축으로 다시금 분화되는데, 사실 그 규정을 자세히 파고들면 추상 수준에서의 인식의 혼란을 반영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위 이론들 모두 한국이 미국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했고, ‘식민지론’자들도 제2차 대전 이전의 직접적 지배로써 식민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신식민지론’과 같이 현지인 특정 집단 및 계급을 국가로 조직하고 이를 통해 지배하면서도 그 관계를 은폐하는 제2차 대전 후의 식민지를 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이 ‘반제’, ‘반파씨즘’, ‘반독점’ 등 전술 방침에 있어서 치열하게 벌인 논쟁도 추상에서의 혼란에 의해 일어난 것이었다.

다만 그 논쟁에서 일정한 차이를 보이던 점은 결국 현지인들로 이루어진 국가 권력의 ‘자주성’ 여부였다. 문제 설정이 이러한 만큼, 국가 자체에 대한 논쟁 또는 계급성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국민 국가의 계급적 기반에 대한 ‘국민적 성격’에 대한 논쟁으로 기울어졌다. 그만큼 국민주의와 민족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던 논쟁이었으며 계급적 착취의 측면보다는 ‘종속된 체제에서 한국 자본주의가 어떤 특수성, 즉 비정상적 발전을 하는지’ 여부로 초점이 모아졌다.

이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현지인, 즉 피식민지인으로 이루어진 계급적 기반 여부는 당연히 그 지역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 계급적 기반은 종주국의 무력에 의해 보장됨과 동시에, 종주국의 권력에 종속되어 있다. 더 쉬운 말로, 애초에 식민지를 점령하고 지배하는 것은 피점령지의 일부 지배계급과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또한, 앞서 밝혔듯이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국민 국가의 자주성 따위가 아니라 피지배 인민들이 받는 착취와 억압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3. 당시 한국 사회의 경제적 생산관계

사실상 의미 있는 문제를 다루게 된 것은 결국 한국의 경제적 생산관계에 대한 의견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당시 농가의 약 3분의 2, 경작 농지 면적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던 재생소작제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 결론은 앞서 제1장에서 밝혔듯이 당시 지대가 잉여가치의 제1형태였다는 점에서 봉건제였고, 동시에 이러한 생산관계가 한국 사회 전체에서 지배적 관계가 아니었기에 자본-임노동 관계에 둘러싸인 반봉건제였다. 그런데 이때 앞서 본 종속 문제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논의에 공통적인 오류가 존재했다. 그것은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은 외국 독점자본의 지배하에 기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농촌의 봉건적 소작제가 온존했고, 자본주의도 전근대성을 띤 ‘반자본’적 성격이라는 것이다. 즉 이러한 의견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생산관계는 제3의 발전 법칙에 의해 이루어졌고, 따라서 혁명의 근거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이 아니라 그 왜곡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 즉 자본주의의 성숙이 아닌 왜곡과 지체가 혁명의 근거라는 주장은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서는 모든 주장에 적용되었다. 이들은 모두 낮은 생산력을 강조했고, 내용적으로 공백이 생긴 혁명의 근거에는 제국주의 지배에 의해 규정되는 발전의 특수성을 삽입했다. 결국, 당시 지식인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해 버린 이 오류는 87-88년의 대호황과 90년대 사회주의권의 몰락에 의해 폭발하며, 변혁이 개량으로 급격히 퇴보하는 데 일조했다.

 

4. 계급 모순과 민족 모순 문제

위의 논쟁들은 그 유명한 NL과 PD의 분열을 남기게 되었다. 물론 이 분열은 마냥 부정적인 것만이 아니라, 민중 운동의 발전과 구체적 경로 설정에 있어 꼭 필요했다. 대개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바에 따르면, 민족 모순을 근본적 모순으로 보고 중시하는 경향을 우파 내지 NL이라 하고, 계급 모순을 근본적 모순으로 보는 경향을 좌파 내지 PD라고 한다. 이때 NL의 경우 계급 모순이 한국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모순임을 경시하고, 민족 모순 관련 투쟁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여 주기도 했으며, 간혹 민족에 대한 우선도를 과장하여 김대중ㆍ노무현 정권 등에 무비판적으로 참여하는 등 계급 의식의 부재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한편 PD의 경우 계급 모순을 한국 사회의 기본 모순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타당하나, 민족 문제와 같이 현실적이고 구체적 조건을 도외시한 채 계급 투쟁을 외치는 경향이 강했다. 또한 매우 주관적인 잣대로 20세기 사회주의를 청산하는 일도 적지 않게 일어났다.

현재 한국의 민족 모순은 계급 모순의 현상 형태, 외화 형태이다. 한국과 미국, 한국과 일본 간의 민족 모순은, 결국 한ㆍ미ㆍ일 민중 대 한ㆍ미ㆍ일 독점자본의 모순ㆍ대립의 표현이고, 민족 분단 역시도 계급적 분열과 대립이 지리적인 형태로 외화된 것이다.

이러한 계급적 관점은 ‘제국주의’라는 용어에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미 제국주의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국가가 전 인민을 위한 국가라는 허구적 개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국가의 인민을 억압하는 독점자본의 도구라는 의미로 사용해야 한다. 이러한 계급적 의식이 부재하면, 민족주의와 애국주의, 국가주의의 포로가 되게 된다. 그것이 바로 NL의 문제점 중 하나이다. 반대로 보아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민족 모순은 계급 모순의 한 형태이고, 그것이 분단과 미국에 의한 종속으로 연결되어 자본의 착취 체제가 확립ㆍ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민족 모순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노동자계급의 해방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부재가 바로 PD의 문제점 중 하나이다.

 

5. 현 한국 사회의 단편적 현상들

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제기된 문제들은 더욱 발전한 형태로 오늘날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첫 번째로, 자본주의적 생산은 더욱 발전하고 고도화되어 그 모순 역시 격렬해졌다. 비정규직 확대, 실업 문제, 부익부 빈익빈의 심화 등은 여전히 악화하고, 과잉 생산에 의한 공황은 더욱 전면화되고 있다. 두 번째로, 1965년에는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던 농가 인구가 2021년에는 4.4%대로 폭락했다. 이 책에는 약 7%대로 서술되어 있는데, 대략 15년의 기간 동안 다시 그 절반 가까이 폭락한 것이다. 잔존한 농민들 역시 소농적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국제 농업자본의 공세에 고통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노동자와 민중 운동은 전략적 지도부가 없이 민주노총의 주도로 진행되고 있다. 합법 진보 정당은 이를 다시 체제 내적인 개량, 즉 사민주의적 발전으로 유도하고 있다. 이러한 사민주의적, 경제주의적, 조합주의적 경향의 극복이 노동자ㆍ민중 운동의 당면의 주요한 정치적ㆍ조직적 과제로 되어 있다.

 

 

III. 나가며

 

지금까지 한국 자본주의의 맹아와 그 이행에 대한 논의, 재생소작제의 성격, 그리고 사구체 논쟁에 대한 짤막한 개론까지 모두 살펴보았다. 위의 모든 논쟁은 한국 자본주의와 그 현상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과정으로써 전개된 것이다. 어떤 본질을 파악할 때 가장 기초적인 시작점은 언제나 분석이다. 분석 과정에서 부차적인 계기를 주요한 것으로 착각하거나 자신의 자의적 이론에다가 그것을 끼워 맞추거나 하는 것은 본질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 우리가 앞으로도 올바른 전망을 만들어 내려면 ‘분석’과 같은 과학적 방법을 숙련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따라서 ≪노동자 교양경제학≫에서 과학적으로 살펴본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로의 이행 및 반봉건제의 규정뿐만 아니라, 사구체 논쟁의 전개와 여러 오류까지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 글을 기고하게 된 목적 중 하나 또한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다.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조선 총독부, ≪국세 조사 보고≫.
2 ≪자본론≫ 제3권, MEW, Bd. 25, SS. 638-639.
3 이진경,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아침, 1987, p. 209.
4 생산 과정에서 자신의 가치를 여러 생산물에 순차적으로 나누어 이전하는 생산 수단, 예컨대 기계, 공장 건물과 같은 생산 설비나 공구 등이 있다.
5 노해동A그룹, “새로운 전략ㆍ전술 방침 확립을 위한 시론―기존 견해에 대한 비판적 고찰”(1988년 5월), 박현채ㆍ조희연 편, ≪한국사회구성체논쟁(I)≫, 죽산, 1989, p. 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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