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특집: 쏘련 건국 100주년] 쏘련 건국 100주년 기념 유럽 공산주의 구상의 화상 회의에서 그리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디미뜨리스 꾸춤바스가 한 연설

 

디미뜨리스 꾸춤바스(Δημήτρης Κουτσούμπας)

번역: 고리버들(회원)

 

* Dimitris Koutsoumbas, “Teleconference of the European Communist Initiative on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Founding of the USSR Speech Delivered by Dimitris Koutsoumbas, GS of the CC of the KKE”. <https://inter.kke.gr/en/articles/Teleconference-of-the-European-Communist-Initiative-on-the-100th-anniversary-of-the-founding-of-the-USSR-Speech-delivered-by-Dimitris-Koutsoumbas-GS-of-the-CC-of-the-KKE/>

 

 

동지들, 쏘련 건국 이후 100년간 이루어진 국제적, 국내적 발전은, 20세기 사회주의 건설 과정 자체에서 얻은 모든 긍정적이고 동시에 부정적인 경험을 아우르고, 반혁명의 승리―무엇보다 쏘련에서의―로부터 유용한 결론을 끌어내, 사회주의에 관한 우리의 계획적 구상을 풍부하게 할 필요성을 확인해 줍니다.

 

우리는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이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혁명적 전략의 체계화, 사회주의 건설 과정 전체에 관한 객관적 평가, 반혁명 및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복원이 확산되는 원인의 해석과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책임이 모든 공산당에 그러하듯 우리 당에도 시급하고도 무르익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 운동에 맞선 부르주아 논객들은 한 세기가 넘도록, 으레 지적 엘리트주의의 형태를 상정하며 노동자 운동의 중핵에 포화를 집중하였습니다. 이들은 보통 혁명의 필연성과 그 정치적 소산인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혁명적 노동자들의 권력에 맞서 투쟁합니다. 특히, 이들은 처음으로 성공한 혁명, 그러니까 러시아 10월 혁명의 결과에 맞서 싸우며, 혁명 스스로 반혁명적 행위와 기회주의적 장애물을 폭로하고 격퇴한 모든 시기에 맹렬한 반대를 표했습니다. 이러한 반혁명 행위들과 기회주의적 장애물들은 최종적인 분석에서 볼 때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10월 혁명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층위에서 약화시켰습니다.

 

한 세기가 넘도록, 혁명적 투쟁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포기하거나, 이로부터 후퇴한 모든 조류는 소위 “전체주의적”이고 “독재적”이며 “폭동주의적(putshist)”인 공산주의에 맞선 “민주적 사회주의”라고 홍보되었습니다. 우리는 과학적 공산주의와 계급 투쟁에 대항하는 이런 류의 비판과 중상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판과 중상은 자본주의 아래의 조건에만 존재하지 않고, 다른 형태와 조건 아래에서는 새로운 사회적 관계들의 형성 과정, 그리고 그러한 관계들이 공산주의적 관계들로 확장되고 성숙하는 과정에도 존재합니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에 관한 논의에서 어떤 시기에 벌어진 사건들을 평가할 때 다른 잣대가 사용되고, 사회주의 건설에 기여한 바를 지우려는 노골적인 목표가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이들은 어떤 경우에는 70년 쏘련 역사를 전부 부정하고, 다른 경우에는 70년 역사에서 사회주의적 기초가 놓인 시기만을 노립니다. 어떤 경우든, 이들은 언제나 사회주의적 도정(道程)으로부터의 일탈들을 이루는 정치적 실천들을 지지합니다.

 

그리스 공산당은 20세기 사회주의 건설 일반, 사회 진보를 위한 투쟁,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의 종식을 위해 쏘련이 사회주의 도정에 기여한 바를 변함없이 옹호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당은 부르주아 중추들의 이데올로기적 개입을 논박하는 데 있어 이념적으로는 강철같이 더욱 단단해졌고, 경험적으로는 더욱 능숙해졌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ㆍ확립ㆍ발전을 추구하고, 생산ㆍ분배의 새로운 관계를 비롯한 모든 사회적 관계들의 확장과 심화를 추구하며, 새로운 인간을 빚어내는 것을 추구하는 계급 투쟁의 가차 없는 도정을 연구하였고, 계속해서 성찰하며 가일층 연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쏘련의 기여와 사회주의에 대한 전적인 허무주의로 빠지지 않으면서, 국제적 역관계의 압력 속에서 발생하는 모순ㆍ과오ㆍ일탈에 질문을 제기합니다. 우리는 그리스 공산당이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일부로서, 자본주의 전복을 위한 투쟁과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투쟁에서 더욱 강해지도록, 비판적이고 자기비판적인 태도로 연구에 임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스스로의 약점, 이론적 한계와 잘못된 평가 역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문제점 일부를 이루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 당과 공산주의 운동이 국제적으로 수행할 향후의 역사적 연구들이, 쏘련과 여타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험과 관련된 쟁점들을 의심할 여지 없이 더욱 분명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주의-공산주의에 관한 이론의 발전은, 우리 당에 그리고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현재도 그리고 미래에도, 필수적인 것이고, 살아 있는 과정이며, 도전인 것입니다.

 

 

쏘련이 존재했던 두 30년의 시기들(1922-1956년, 1956-1991년)과 쏘련이 해체된 이후의 현대 자본주의적 야만의 30여 년(1991-2022년)

 

동지들, 올해 12월 30일은 1922년 12월 30일에 이루어진 쏘련 건국의 100주년을 맞습니다. 우리는 구체적이고 핵심적인 질문들에 답함으로써, 이 역사적 순간으로부터 지나간 100년에 다가가야 합니다.

 

첫째로, 10월 사회주의 대혁명에 뒤따른 쏘련 건국은 쏘비에트 연방의 인민과 민족, 전 세계 인민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까?

 

둘째로, 쏘련은 모든 모습에서 과오ㆍ약점ㆍ실패ㆍ차질로부터 자유로운, 상향적이고 효과적인 도정이었습니까? 아니라면 이 부정적인 요소들의 원인은 무엇이고, 어디서 찾을 수 있으며, 왜 자라난 것입니까? 이러한 요소들이 영향을 미치고, 궁극적으로는 쏘련 해체와 사회주의 체제 전복을 초래한 것입니까?

 

셋째로, 쏘련 해체 이후 세상은 개선되었습니까, 악화되었습니까? 세계의 인민들은, “하늘나라에 대한 폭행”[1][역자 주]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마태오 복음, … Continue reading을 “명계(冥界) 어둠”으로의 비극적 추락으로 바꾸어 놓은 인류 최초의 거대한 역사적 퇴보로 인해 이득을 보았습니까, 손해를 보았습니까?

 

우리는 대개 역사를 시기별로 구분하려 하지 않습니다만, 건국 이후 100년(1922-2022년)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며 짧게 언급하는 것을 양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 100년이 있기 전, 자본주의 발전과 계급 투쟁이 공산주의를 필연적으로 역사의 중심부로 불러낸 전체 시기가 앞서 있었습니다. 1848년에 맑스와 엥엘스가 쓴 ≪공산당 선언≫과 1871년 빠리 꼬뮌이라는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부터 1917년 러시아의 성공적인 10월 사회주의 혁명에 이르는 시기입니다.

 

1917년 혁명은 인류 역사상 문명 최고의 성취 가운데 하나, 즉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 철폐의 시작을 알립니다. 혁명은 레닌의 당이 영도한 덕에,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들이 삼국 협상 동맹으로 떠받치고 있었음에도 러시아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혁명은 부의 소유자들이라는 구세력이 맹렬한 내전을 일으켜 혁명을 억누르려 개입한 속에서 수행되었습니다. 혁명은 승리하였고, 그 결과 1922년 말 쏘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건국되었습니다.

 

이로써 1922년 12월 30일부터 쏘련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도정이 시작되었고, 1991년 12월 26일에 망치와 낫을 새긴 적기가 끄레믈(크렘린)에서 내려갈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해체와 함께 희망은 수십 년간 인민을 위한 길을 비추던 쏘련이라는 등댓불을 떠났고, 다시금 인민들의 투쟁에만 달린 것으로 되었습니다!

 

 

쏘련이 존재하는 동안 사회주의에 기여한 바

쏘련이 존재했던 69년간 어떤 문제들이 있었더라도, 사회주의 체제는 대체로 자본주의에 비해 사회주의가 갖는 우월성과 사회주의가 근로 인민의 삶과 노동 조건에 제공하는 방대한 이점을 입증하였습니다.

 

쏘비에트 연방과 세계 사회주의 체제는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항하는 유일하고 실질적인 견제 세력을 구성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쏘비에트 연방이 반파쑈 인민의 승리에서 수행한 역할은 결정적이었습니다. 붉은 군대의 승리는 공산당이 영도하는 민족 해방 및 반파쑈 운동의 발전을 추동하였습니다. 유럽의 중부와 동부의 많은 국가에서 반파쑈 투쟁은 부르주아 권력의 전복과 연결되었고, 쏘련은 이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들은 착취, 외세의 점령, 제국주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인민들의 국제주의적 연대를 예증하는 역사적 사례들을 남겼습니다. 이들은 식민 체제의 해체와 군사적 대립 및 갈등의 규제에 결정적으로 공헌하였습니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노동자들이 이룬 성취는 수십 년간 참조점이 되었고,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및 대중 운동에서 이룬 성취에도 이바지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형성된 국제적 역관계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혁명적 투쟁 노선을 저지하고 노동 운동을 흡수할 조건을 만들어 내기 위해, 어느 정도 양보하며 신중하고 교묘하게 움직이도록 강제하였습니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철폐는 인류를 임금 노예제로부터 해방하였고, 생산과 과학의 발전이 인민의 필요를 충족시킨다는 목적으로 나아갈 길을 닦았습니다. 이로써 일자리 보장, 공공 무상 의료 및 교육, 국가가 염가에 제공하는 써비스, 주택, 지적ㆍ문화적 창의력에 대한 접근권 등을 만민이 누렸습니다. 문맹이라는 끔찍한 유산의 절멸은 일반 교육 수준의 증진, 실업의 철폐와 함께 사회주의 고유의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쏘련의 노동 시간은 세계 최저였습니다. 모든 노동자는 주휴와 유급 연휴를 보장받았습니다. 노동하지 않는 시간은 늘어났고, 그 내용도 변모하였습니다. 노동하지 않는 시간은 노동자들의 문화ㆍ교육 수준의 발전을 위한 시간으로 변화하였고, 이는 노동자들의 권력과 생산 단위의 경영 통제에 노동자들이 더욱 참여하게끔 하는 데 복무하였습니다.

 

근로 인민의 사회 보장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포괄적 퇴직 수당 제도가 만들어졌고, 낮은 퇴직 연령(여성 55세, 남성 60세)이라는 중요한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사회주의 권력은 여성 불평등의 철폐를 위한 기초를 놓았고, 객관적으로 존재한 심대한 문제들이 극복되었습니다. 이 기초에서 모성의 사회적 성격과 사회화된 아동 양육이 보장되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혁명적 노동자들의 권력은, 소수 착취자가 아니라 피착취 인민이라는 사회적 다수의 이해관계를 표현하는 국가로서, 스스로가 민주주의의 더욱 우월한 형태라는 것을 입증하였습니다. 권력과 행정에서 근로 인민의 대리적인 참여, 상위 권력 기관에서 자신을 대표하는 이들을 노동자들이 선출하고 소환할 가능성을 통해, 사상 최초로 생산 단위는 민주주의의 중핵이 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의 권력은 주변부로부터 대중을 끌어들였고, 노동조합, 문화ㆍ교육ㆍ여성ㆍ청년 조직 등의 수많은 대중 조직이 발전하여 인구 대다수가 조직되었습니다.

 

자유의 부재와 반민주적 정권을 운운하는 부르주아 및 기회주의 선전은 “민주주의”와 “자유”에 관한 부르주아적 관념을 퍼뜨리며, 민주주의를 부르주아 의회주의와 동일시하고, 자유를 부르주아 개인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와 동일시합니다. 자본주의 아래 자유와 민주주의의 진정한 본질은 사회 일반, 특히 자본주의적 기업체 내부의 임금 노예제의 경제적 강제와 자본 독재입니다.

 

10월 혁명은 광대한 다민족 국가의 틀 내에서 다양한 민족과 민족체들 사이의 평등을 구축하는 과정에 착수하였고, 모든 형태와 현상의 민족 억압을 철폐함으로써 민족 문제에 관한 해결의 방향성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사회주의적 관계의 침식 과정에 의해 저해되었고, 1980년대에 반혁명이 발전하면서 끝내 멈추어 버렸습니다.

 

사회주의 국가들은 자신의 출발점과 비교하든, 아니면 자본주의 세계에 살고 있는 근로 인민의 생활 수준과 비교하든, 의심할 수 없는 성취를 이루었고, 이는 사회주의가 사회의 번영을 빠르고 지속적으로 증진하고 인민을 위한 전반적인 발전을 촉진하는 고유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쏘련 사회주의 건설의 공헌과 우월성은 그 거대한 파괴를 초래하고 지속적인 방해물과 위협을 던진 제국주의의 포위 전략과의 상호 연관 속에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쏘련의 건국(1922년)부터 그것의 해체(1991년)로 귀결된 반혁명 세력의 최후의 공격을 야기하게 만든 기회주의적 변형과 과오까지, 쏘련에서의 사회주의 건설 도정에 대한 평가

제2차 세계 대전까지의 사회주의 건설 제1기는 자본주의적 소유를 철폐하고, 자본주의로부터 물려받았으며 제국주의적 포위와 개입으로 인해 가중된 사회 및 경제적 문제들을 계획적으로 다루는, 기초적이고 일차적인 목표를 마주하였습니다. 혁명이 제정으로부터 물려받은 극심한 불균등을 쏘비에트 권력이 줄인 것은 바로 이 시기의 일이었습니다.

 

1917년부터 1940년까지의 시기에 쏘비에트 권력은 대부분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쏘비에트 권력은 전기의 보급과 생산의 산업화, 교통 기반 시설의 확장, 농업 생산 상당부의 기계화를 일구어 냈습니다. 쏘비에트 권력은 계획 생산을 개시하였고, 사회주의 산업 생산에서 획기적인 발전 비율을 달성하였습니다. 쏘비에트 권력은 국내 생산력을 모든 산업 부문에서 발전시켰습니다. 생산 협동조합(꼴호쓰)과 국영 농장(쏘프호쓰)이 탄생하여, 농업 생산에서 사회주의적 관계를 확대하고 보급하는 기초가 마련되었습니다. “문화 혁명”이 실현되었습니다. 새 세대의 공산주의적 전문가ㆍ과학자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임금 노동력의 철폐와 함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완전히 철폐되어, 새로운 사회-경제적 형태의 기초를 놓았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성취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까지는 새로운 사회가 발전할 기초가 마련되었습니다. 계급 투쟁은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있었고, 자본주의적 관계의 철폐와 중앙 계획에 기초하여 사회화된 생산 부문의 확산으로 이어졌습니다. 사회적 풍요라는 번영과 관련하여 상당한 결과를 거두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전후 복구를 뒤따라, 사회주의 건설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당은 새로운 요구와 도전을 마주하였습니다. 쏘련 공산당 제20차 대회(1956년)에서는 경제, 그리고 공산주의 운동과 국제관계의 전략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일련의 기회주의적인 입장이 채택되었기에, 이 대회는 눈에 띄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전 시기 전체에 걸쳐 자리 잡은 대립의 상호 역관계는 수정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입장에 유리하게 변화하였습니다. 그 결과, 당은 그 혁명적 특색을 잃기 시작하였습니다.

 

꼴호쓰 농부들, 농업 생산 및 공업 경영자들이 제기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확장과 심화를 향한 필요에 맞선 사회적 저항은 1950년대 초 당내 대립을 통해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층위로 표출되었습니다. 이 극심한 대립은 이론적으로 가치 법칙을 사회주의 법칙으로 수용하면서 종료되었고, 사회주의 발전 과정에 더욱 직접적이고 강력한 결과를 지니는 정치적 선택들을 의미하였습니다. 이는 물질적 낙후성이 그러한 이론적 입장의 영향을 덜 고통스럽게 하였던 전쟁 이전 시기와 비교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력은 우익 기회주의적 일탈의 팽배로 특징이 지어지는 쏘련 공산당 제20차 당 대회의 결의들에서 채택된 입장들을 통해 정치적으로 표출되었습니다. 중앙 계획과 사회주의적 생산 단위의 관리상 나타나는 약점을 교정한다는 미명하에 (자본주의적인 잠재성을 지니는) 상품-화폐 관계들을 확장한 정치적 선택들이 점차 채택되었습니다.

 

과거의 것이었던 방식과 수단이 경제상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시장” 정책의 고취 탓에, 사회적 소유와 중앙 계획, (기술적 노동 분업과의 병행 및 다중 전문화를 목표로 하는 능력과 역량의 확대를 통한) 노동계급의 균질화, 노동 조직에 관한 노동자들의 참여, 노동자들의 상향적 통제는 강화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정반대의 경향이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배경으로 하여, 사회적 의식 수준은 점차 저하하였습니다. 품질 관리, 더욱 효과적인 조직과 경영, 원료와 노동 시간의 보존을 위한 발명 등의 영역에서 쓰따하노프 운동과 공장 쏘비에트가 지닌 이전의 경험과 효율성은 상실되었습니다.

 

쏘련에서의 이론적 쇠퇴와 이에 상응하는 정치적 후퇴는 새로운 시기, 생산력이 더 높은 수준에서 발전되고 상응하는 중앙 계획의 발전을 요청하던 시기에 이루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적 관계가 심화할 필요가 성숙하였던 것입니다.

 

1980년대에는 뻬레쓰뜨로이까와 함께 기회주의가 배신적인 반혁명 세력으로 완전히 발전하였습니다.

 

제27차 대회(1986년)의 결의는 더욱 기회주의적인 선택을 확립하였습니다. 뒤이어, 소유 형태의 다중성에 대한 인정이라는 외피를 쓰고 자본주의적 경제관계를 제도적으로 정당화한 법이 통과되어(1987년), 반혁명이 조장되었습니다. 제28차 쏘련 공산당 대회라는 배반의 마지막 단계에 반응한 확고한 공산주의 세력들은 때맞춰 이를 폭로하고 노동계급의 혁명적 대응을 조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전후 시기에, 제19차 대회(1952년 10월)에서는 어느 정도, 그리고 제20차 대회(1956년)에서는 주요하게 전개된 것과 같은 “평화 공존” 노선이, 미국과 영국의, 그리고 서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의 부르주아지와 그것의 개별 정치 세력들의 특정 분파의, 자본주의적 야만성과 공격성은 인지하였으나, 그것을 독점자본주의, 즉 제국주의의 필수적인 요소로 인지하지는 못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로써 “평화 공존” 노선은, 제국주의가 자신의 세계적 지배를 파괴해 온 세력과의 공존을, 장기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다는 식의 공상적인 인식이 조장되는 것을 허용하였습니다.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노동 운동 및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항하는 자본주의의 일관된 전략은 과소평가되었습니다.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모순―당연히 제국주의적 피라미드 내에서 불가피한 것으로서 의존의 요소를 포함한―은, 올바르게 분석되지 않았습니다.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많은 공산당의 입장은 이러한 전략의 일부입니다. 사회민주주의를 “좌익”과 “우익”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관점이 여러 공산당에서 지배적인 것으로 되어, 이에 대항하는 이데올로기 투쟁을 크게 약화하였습니다. 노동계급의 단결이라는 미명하에, 공산당은 일련의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 양보를 하였는데, 사회민주주의 측과의 단결 선언은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을 목표로 하지 않고 노동계급을 공산주의적 견해의 영향력으로부터 거두어 계급적 본성으로부터 소외되게끔 하였습니다.

 

서유럽에서는 각국의 국가적 특수성을 구실로 하여, “유러코뮤니즘”이라고 하는 기회주의적 조류가 수많은 공산당 간부를 지배하였습니다. 이 조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과학적 법칙인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혁명 투쟁 일반을 부정하였습니다.

 

자본주의 국가들의 공산당과 집권 공산당 사이의 기회주의적 상호 작용은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핵 공격의 위협, (유럽 중부 및 동부) 사회주의 국가들 내 계급 투쟁의 첨예화, (예컨대 베트남, 조선에 맞선)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 아래 강화되었습니다. 제국주의의 유연한 전술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공산당 내 기회주의의 발전, 사회주의 건설의 약화, 자본주의 유럽 및 전 세계 혁명 투쟁의 약화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고로,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제국주의의 압력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격화되었습니다.

 

동지들, 승리를 거둔 이 추세는 오늘날 이론적 관점에서만 평가되어서는 안 되며, 현실적인 결과들에 의해서도 평가되어야 합니다. 쏘련에서 그러한 개혁들이 적용된 이후, 문제는 명확해졌습니다. 사회주의 건설 사상 최초로 침체가 머리를 내밀었습니다. 기술적 낙후가 대다수의 사업체에서 나타났습니다. 기업들이 상품을 창고에 사 모으거나 제한된 수량을 공급하여 가격의 인위적인 상승을 유도하였기에, 많은 소비재가 부족했고 “시장”에는 여러 문제가 자라났습니다.

 

세계적인 공업 원자재의 생산과 제조업에서 쏘련의 몫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1970년대에 벌어진 쏘련 경제의 이러한 후퇴를 보여 주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사회주의 생산에서 시장적 요소들의 점증하는 관여는 사회주의 생산 자체를 약화시켰습니다. 이는 사회주의 발전 동력의 감소로 이어졌습니다. 개인과 집단의 단기적 이익은 (각 기업 노동자들 사이의, 노동자와 경영 기관 사이의, 각 기업 사이의 소득 격차의 증가와 함께) 사회의 일반 이익을 해치는 방식으로 촉진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반혁명이 번성하고 마침내 뻬레쓰뜨로이까를 그 수단으로 삼아 승리할 사회적 조건이 갖춰졌습니다.

 

이러한 개혁들로, (불법) “암”시장에 투자할 금액이 (밀수 등) 주로 불법적인 수단을 통해 축적될 가능성이 형성되었습니다. 이 기회들은 기업 및 부문의 관리층에 있는 공직자들, 꼴호쓰 및 외국 무역을 맡는 간부들과 주로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아울러, 쏘련 검찰총장(Procurator General)은 소위 말하는 지하 경제에 관한 정보를 제시하였습니다. 이 수치에 따르면, 협동조합과 국영 농업 생산의 상당한 부분이 소비자들에게 불법적 경로로 흘러갔습니다.

 

개별 농업 생산자인 꼴호즈니끼 사이의 소득 격차는 증가하였고, 농업 생산의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성격을 증진하려는 경향에 대한 이들의 반대도 증가하였습니다. 돈을 벌고 있던 일부 농부 및 꼴호쓰 관리 간부들은 사회주의 건설을 해하는 사회 계층으로서 강화되고 있었습니다. 산업 내 사회적 격차는 “기업 소득”의 집중을 통해 더욱 극명하게 표명되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그림자 자본”은 기업 소득을 통한 축재(蓄財)의 결실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생산물의 전유라는 불법적 행위 및 암시장의 결실이기도 했으며, 예컨대 생산 수단의 사유화나 자본주의의 복원과 같은, 형성 중에 있는 자본으로서의 합법적 기능을 추구하였습니다. 그 소유자들은 반혁명이라는 사회적 동력을 구성하였습니다. 이들은 국가 및 당 기구에서 자신이 쥔 지위를 이용하였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지위로 인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동요의 영향력에 객관적으로 더욱 취약한 인구의 여러 부분으로부터 지지를 얻었습니다. 이 세력들은 당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고, “뻬레쓰뜨로이까” 정책을 통해 표출된 당의 기회주의적 침식과 반혁명적 타락을 강화하였으며, 자본주의적 관계의 제도적 확립을 추구하였습니다. 이는 뻬레쓰뜨로이까 이후, 사회주의 전복으로 달성되었습니다.

 

동지들, 사회주의 건설은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으로부터 시작하는 연속적인 과정입니다. 그 시작으로부터 새로운 생산 양식이 형성되고, 이는 자본주의적 관계, 자본과 임금 노동 사이의 관계의 완전한 철폐 이후 승리를 거머쥡니다. 자본주의적 관계가 세계적으로, 아니면 최소한 제국주의 체제의 발전되었고 영향력 있는 국가들에서 철폐된다면, 그 뒤에는 새로운 관계가 확대ㆍ심화되고, 공산주의적 관계와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그 돌이킬 수 없는 확산을 보장하는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갑니다.

 

사회주의적 도정은 자본주의로의 역전과 후퇴의 가능성을 포함합니다. 그러한 후퇴는 사회적 발전에서 새로운 현상이 아니고, 어떤 경우에든 사회 발전의 역사에서 일시적 현상을 구성할 뿐입니다. 인류 역사상 어떤 사회-경제 체제도 즉시 확립되지 않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발전의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의 이행은 직선적이고 상향적인 과정이 아닙니다. 이는 자본주의 확산의 역사 자체에서 알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 생산 양식의 형성은 집중된 생산 양식의 사회화, 중앙 계획, 서로 다른 경제 부문으로의 노동력 할당, 사회적 생산물의 계획적 분배, 노동자들의 통제 제도 형성으로 시작합니다. 이 새로운 경제관계들에 기초하여, 생산력, 인간, 생산 수단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생산과 전체 사회는 조직됩니다. 사회주의적 축적, 사회적 풍요의 새로운 단계가 달성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 아래의 사회화는 경제와 사회의 전체적 조직과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의 국가를 통해, 공산당의 영도 아래에서 영향을 미칠 것이며, 이는 근로 대중의 동원에, 노동자들의 통제에 의존할 것입니다.

 

사회주의적 관계의 발전에서 나타나는 어떠한 지연, 아니면 이보다 중요한 어떠한 후퇴도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 모순의 심화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기초에서, 사회적 모순과 격차는 사회적 적대로 발전할 수도, 계급 투쟁의 격화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쏘련에서 살펴볼 수 있다시피, 사회주의에는 사회적 세력들이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 착취적 관계의 잠재적 담지자로 행동할 가능성을 포함한 객관적 기초가 존재합니다.

 

특정한 시기를 거쳐, 당은 혁명적 영도의 성격을 점차 잃었고, 그 결과 반혁명 세력이 당과 권력을 거머쥘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1989년부터 1991년에 벌어진 이러한 상황을 반혁명의 승리로 규정합니다. 이들은 사회 불평등과 격차의 강화, 각각의 반혁명 및 사회 역행 세력들의 강화로 이어지는 과정의 최종장을 이룹니다. 이러한 상황들이 국제적 반동의 지지를 받은 것도, 사회주의 건설, 특히 자본주의적 관계가 철폐되고 사회주의를 세웠던 제2차 세계 대전까지의 사회주의 건설이, 국제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포화에 시달렸던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반혁명이 거둔 승리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물질적 전제 조건들의 기본적 발전 수준의 부족을 입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건설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과 비교할 때 생산력의 발전 수준이 낮고(V. I. 레닌은 중-약으로 특징지었다), 발전의 불균등 정도가 큰, 하나의 나라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특히 짜르 제국의 아시아 식민지였던 곳에는 전(前) 자본주의적 관계가 광범하게 살아남았기에, 사회주의는 추가적인 난점을 마주하였습니다. 당시 사회주의는 미국 같은 자본주의 열강이 저들의 국경 내에서 전쟁을 겪지 않은 정세에서,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참상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반대로, 자본주의 열강은 1930년대의 극심한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자 전쟁을 이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조건 아래 이룩한 놀라운 수준의 경제적ㆍ사회적 발전은 공산주의적 생산관계가 그 초기적 발전 단계에서조차 우월함을 입증합니다.

 

쏘련에서의 반혁명은 제국주의적 군사 개입으로 초래된 것이 아니라 내부와 상부로부터 초래된 것이며, 공산당의 기회주의적 변질과 그에 상응하는 쏘비에트 권력의 정치적 방향성의 결과로 초래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주의 건설의 기반에서부터 기회주의를 재생산하는 내부적 요인과 사회-경제적 요인에 중요성을 둡니다. 물론 이는 기회주의의 발전과 그것의 반혁명 세력으로의 진화라는 과정에서 제국주의가 투사하는 장기적 효과와 다면적 개입을 과소평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공산당 정책의 과학적이고 계급적인 성격은 사회주의 건설의 중요한 전제 조건입니다. 이러한 특징이 상실되는 만큼, 기회주의는 처리되지 않는 한 성장하며, 이는 반혁명 세력으로 점차 발전합니다.

 

우리 당은 깊이 있고 시의적절한 방식으로, 이러한 전체 상황 전개를 이해하지 못했던 오판과 이론적 무능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을 통감해 왔습니다.

 

사회주의 건설에 관한 그리스 공산당의 입장에 대해 이렇듯 비판적으로 논한다고 해서, 우리 당이 국제주의적 성격에 충실하였으며, 수천 명의 당원과 간부의 목숨을 걸고 20세기 사회주의-공산주의 건설 과정을 옹호하였다는 사실이 폄하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주의가 20세기에 한 기여를 전투적으로 수호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당의 의식적인 선택입니다.

 

그리스 공산당은, 공산주의 운동으로부터 발원하되, 쏘련 및 여타 국가들에 대한 비판이라는 명분으로, 완전한 거부를 내세우고, 해당 국가들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부정하며, 제국주의 선전을 차용하는 세력들과는 편을 같이하지 않았습니다. 쏘련의 약점이 존재함에도, 그리스 공산당은 사회주의에 대한 옹호를 번복하지도 않았습니다.

 

구 쏘련 땅과 전 세계의 인민은 쏘련 해체와 사회주의 체제의 전복 이후 전례 없는 참극을 경험하고 있다(1991-2022년)

1. 인간에 의한 인간의 극심한 착취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노동계급과 인민이 힘겹게 쟁취한 바는 쓰레기통으로 내던져졌습니다. 암흑시대에나 어울리는 노동 조건, 사회 보장의 분해, 노동조합의 자유와 권리의 제한, 실업률 증가, 경제 위기와 일련의 반노동ㆍ반노조 법률들, 극심한 주택 문제, 주요 거주지의 압류 경매, 인민의 소득을 좀먹는 에너지 빈곤, 가격 인상, 인플레이션이라는 위험, 무거운 세금이 자라났습니다.

 

2. 여성 학대와 남녀 불평등이 확대되었습니다. 아동 보호는 없다시피 하고, 약물 문제는 급증하였습니다. 그리스 NGO “방주”의 사례[2][역자 주] 2007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창립된 NGO “세상의 방주(Κιβωτός του Κόσμου)”를 가리킨다. “방주”는 그리스 전역에 아동 보호소 네 … Continue reading와 같은 아동 학대 사례는 늘어만 갑니다. 인종 차별주의, 민족주의, 파씨즘-나치즘도, 국가의 탄압과 폭력, 국내외 정보기관의 도감청, 부패, 추문도 악화일로입니다.

 

3. 제국주의 경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우크라이나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모순, 대립, 제국주의 전쟁은 치열해졌습니다. 피난민, 이민, 핵 위협도 떠오르는 문제입니다.

 

4. 환경 파괴가 심각한 문제로 나타났습니다. 자연재해(홍수, 지진, 화재 등)는 심화되어 일반적인 가족들을 위험 속에 내놓고 있으며, 에너지 빈곤과 전기 부족, 식량 위기라는 위험은 가중되고, 물을 위한 전쟁은 점차 현실적인 이야기로 되어만 갑니다.

 

문제가 산적해 있기에 훨씬 더 나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 인민과 청년들에 대한 야만과 잔혹함이 자본주의입니다.

 

국제 정세의 발전, 세계 인민이 번영을 누릴 새로운 시대를 예측하거나 기대한 이들은 틀렸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자본가들에게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부르주아의 하수인들은 사회주의의 전복과 쏘련의 해체를 통해 야만을 체계적으로 복원하려 힘썼습니다. 이들의 선전기구는 더욱 아름다운 어떤 것을 믿은 순진한 이들을 오도하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길을 잃었습니다. 이제는 누가, 어떻게, 힘들게 일하는 인민, 진보적 인민, 공산주의자들의 노력을 해쳐, 인류를 선사 시대로 되돌리려고 하는지를, 이들이 깨달을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올해 기념하는 쏘련 건국 100주년을 맞아, 이들 모두가 충실한 결론을 끌어내, 가슴에 손을 얹고, 더욱 냉철한 정신으로, 세계 혁명을 위한 위대한 군대에 동참할 때가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동지들, 우리는 반혁명적 전복이 이 시기의 성격을 바꾸지는 않는다는 데 확신을 가집니다. 21세기는 세계 혁명 운동이 새로이 불어나고 일련의 사회 혁명이 이루어지는 세기가 될 것입니다. 일부 성취를 방어하는 데 그치는 투쟁은 필요한 것이기는 하나, 견실하고 영원한 해법을 내주지 못합니다. 20세기 말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만이 유일한 탈출구이자 필연적인 전망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회주의의 필연성은 현대 자본주의 세계, 즉 제국주의 체제의 모순이 극심해지면서 자라납니다. 사회주의의 필연성은 독점의 지배로 특징지어지는 자본주의의 제국주의 단계에서, 더욱 우월한 사회-경제적 체제로의 이행을 요청하는 물적 전제 조건이 충분히 성숙하게 된다는 사실로부터 도출됩니다.

 

우리는 당으로서, 우리가 아직 종합적으로 다루지 않은 사안들까지 포함하여 우리의 결론을 더욱 알맞게 성문화할 수 있도록 연구와 조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당과 그리스 공산청년회 전원, 특히 젊은 세대가 이러한 결론과 우리의 평가를 흡수할 수 있도록 철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위와 같은 임무는 전략과 일상적 투쟁을 종합적으로 연결하고, 혁명적 노동자들의 권력과 사회주의 건설을 쟁취할 전략과의 연관 속에서 근로 인민의 즉각적인 문제들을 위한 목표를 설계할 당의 능력을 측정할 것입니다. (2022년 12월 5일)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역자 주]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마태오 복음, 11장 12절.)
2 [역자 주] 2007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창립된 NGO “세상의 방주(Κιβωτός του Κόσμου)”를 가리킨다. “방주”는 그리스 전역에 아동 보호소 네 곳을 운영하고 있다. 2022년 11월, 설립자인 안또니오스 빠빠니꼴라우(Αντώνιος Παπανικολάου) 신부에게 아동 대상 성범죄 혐의와 금융 범죄 혐의가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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