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특집: 쏘련 건국 100주년] 쏘련의 농업 정책과 집산화

 

김선재 | 자료회원

 

 

1. 서론

 

쓰딸린 시기에 이루어진 쏘련의 농업 집산화에 대한 인식은 지금까지 그 실질보다는 제1 세계의 적성국인 쏘련 및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악선전과 정치적 공세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러나 농업 집산화라는 사건의 역사적 맥락과 이유, 그리고 결과물에 대한 진지한 고찰 없이 추진 과정에서의 ‘잔악성’과 ‘비인간성’만을 조명하는 것은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반공 이데올로기의 틀 안에 가둬 버리는 우행에 불과하다. 만일 쓰딸린의 농업 집산화에 오류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집산화가 수행된 역사적, 경제적, 시대적 맥락을 오롯이 조명할 때 우리는 그러한 오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글에서는 쏘련에서의 농업 집산화가 어째서 수행되었는지, 집산화 실행 당시 농촌과 농업의 상황은 어떠했고 실행 이전의 농업 정책은 어땠는지, 집산화 이후 농업에 끼쳐진 영향은 어떠했는지를 기존과는 다른 시각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볼쉐비끼 정권 수립 직후 이루어진 전시 공산주의 농업 정책에 관하여, 그 다음으로 적백 내전 종전 이후 NEP(New Economic Policy, 신경제 정책) 시기의 농업 정책에 관하여 살펴볼 것이고, 쏘련 농업이 전시 공산주의 시기와 NEP 시기 동안 겪은 변화와 그 변화를 통해 창출된 새로운 경제적 국면을 살펴볼 것이다. 상술한 과정을 통해 집산화 이전의 농업 현황에 대한 검토를 마친 후에는 쓰딸린 정권이 농업 집산화와 이에 병행되었던 기계화를 수행한 방식과 그 여파를 최종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2. 전시 공산주의 체제의 농업 정책

 

10월 혁명을 통해 뻬뜨로그라드에서 정권을 잡은 볼쉐비끼의 경제 정책은 즉각적인 사회주의 경제 건설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았다. 피폐화된 러시아 경제의 현실에 조응하여, 볼쉐비끼는 일차적으로 곡물 조달, 운송, 철강 등의 주요 산업 부문들만을 국유화한 채, 혼합 경제하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을 꾀하였다. 하지만 전국에서 반대 세력의 봉기가 일어나고 영국을 비롯한 선진 열강들이 내전에 간섭해 오기 시작하자, 볼쉐비끼는 새로운 국면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정책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구 러시아 제국의 곡창이었던 우크라이나는 직간접적으로 독일의 지배하에 속하게 되었고, 백군은 우랄 산맥과 씨비르(시베리아), 중앙아시아의 경제 중심지들을 점유했다. 뻬뜨로그라드의 볼쉐비끼 정권은 전국 석탄 생산량의 10%, 철강 생산량의 25%, 사탕무 생산의 10% 이하, 곡물 생산의 절반 이하만을 통제하는 상황에 이르렀다.[1]Maurice Dobb, Soviet Economic Development Since 1917,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66, pp. 103-104.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볼쉐비끼는 신생 혁명 국가를 생존시키고 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적은 양의 자원을 최대한 총동원해야만 했다. 결국 초기의 혼합 경제 방침은 폐기되었고, 소위 ‘전시 공산주의’ 모델이 도입되었다. 전시 공산주의 모델의 핵심은 국내의 모든 산업적, 인적 자원을 정부가 통제하고, 시장 기구를 행정 기구로 대체한다는 원칙에 있었다. 1918년 6월부터 모든 대규모 산업과 광업이 주요 운송 시설 및 창고와 함께 국유 재산이 되었다. 국내 생산량의 해외 유출을 통제하기 위해 모든 해외 무역은 국가에 의해 독점적으로 수행되었다.

전시 공산주의 농업 정책의 핵심은 곡물의 사적 운송 및 거래를 금지하고, 국가 경찰을 농촌에 파견하여 부농과 중농이 소유한 잉여생산물을 강제 징발하는 것에 있었다. 곡물의 생산과 농토의 경작은 여전히 집단화되지 않은 채 지역 농민들에 의해 자율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생산된 곡물을 수취하고 타 지역으로 운송 및 판매하는 일은 정부에 의해 독점되었다. 이 지점에서, 전시 공산주의 기조하의 농업은 생산과 유통이 모두 민간에서 이루어졌던 NEP(신경제 정책) 시기의 농업과 둘 모두가 사회화되어 집단적으로 수행되었던 농업 집산화 이후의 농업과는 본질적 차이를 지녔다.

1918년부터 모든 부문의 사적 거래가 원천 금지되고 정부가 소비 물자의 유일한 배급자가 되었을 정도로 전시 공산주의는 철저한 통제 경제 체제의 구축을 수반했으나, 전시 공산주의 정책은 볼쉐비끼의 사회주의 이념에 의한 이데올로기적 정책이라고 볼 수 없었다. 레닌은 전시 공산주의하의 몰수 정책과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사회화가 본질적으로 다른 성격을 지닌다고 지적했으며, 당대의 전시 공산주의 정책이 이념적 이유가 아닌, 당면한 적을 타격해야만 하는 현실적 이유에서 수행되었음을 역설했다.

1918년 5월,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어제의 주요 과제는 가능한 한 단호하게 국유화와 몰수를 수행하며, 부르주아 계급을 타격하고 분쇄하며, 사보타주를 진압하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가 계산할 수 있는 시간을 지닌 것보다 더 많이 국유화하고 몰수하고, 타격하고 깔아뭉갰다는 것을 보지 못할 이는 장님밖에 없을 것이다. 사회화와 단순한 몰수의 차이점은 올바르게 계산하고 분배할 능력 없이 ‘결정’만으로 행해질 수 있는 것이 몰수라면, 사회화는 그러한 능력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2]≪레닌 전집≫ 제27권, p. 333.

결과적으로 전시 공산주의 정책은 신생 국가를 방어하고 내전에서 승리한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1920년에 백군이 붕괴된 후로 대다수의 지역적 봉기 세력들은 진압이 완료되었고, 영국과 일본 등에서 파견된 간섭군 또한 순차적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전시 공산주의 정책은 러시아 경제에, 그중에서도 특히 농업 부문에 파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씨비르(시베리아)의 밀 생산은 절반으로 하락했고, 까프까쓰(코카서스) 지방과 볼가 지방의 밀 생산은 3할 이하로 하락했다.[3]Dobb, op. cit., p. 111.

농업 생산량의 저하는 곧 농민의 빈궁화로 인한 구매력 저하로 직결되었고, 농민들이 공산품을 구매할 수 없게 되자 공업 또한 불황에 접어들었다. 농민의 소비 수준 저하는 매우 심각했는데, 당시 농민들은 내전 이전의 12-15% 수준의 소비밖에는 할 수 없었다. 이러한 경제적 현실은, 볼쉐비끼로 하여금 새로운 정책을 택할 것을 강제하고 있었다.

 

 

3. NEP 시기의 농업 정책

 

적백 내전을 거치며 러시아의 경제 상황은 상술했듯이 극도로 피폐화되었고, 경제의 회복이 사회주의 건설 이전의 우선적 과제로 제기되었다. 결국 1921년 초, 볼쉐비끼 정권은 전시 공산주의 정책을 폐기하고, NEP(신경제 정책)를 발표했다. NEP하에서 도시와 농촌 간의 상거래는 재개되었고, 국가 경찰에 의한 잉여곡물의 징발이 중단되었다. 레닌의 주도하에, 곡물 징발은 농민들에게서 일정한 비율의 곡물을 정기적으로 수취하는 ‘현물세’로 대체되었다. 더 이상 농민들은 곡물 잉여분의 전체를 국가에 내어 주지 않아도 되었고, 미리 알려진, 고정된 비율만을 내어 주면 되었다. 따라서 이는 식량을 증산하는 물질적 유인이 되었다. 농민들은 정기적으로 열리는 시장에서 공업 생산품과 교환할 수 있는 곡물의 잉여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쏘련 정부는 농민이 자신의 토지를 타인에게 임대해 주거나 농지를 경작할 노동자들을 사적으로 고용하는 것까지 허가했다.

또한 현물세를 내고 남은 곡물의 도매와 유통이 민영화되었다. 이로 인해 민간 유통업자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곡물의 민간 판매를 통해 자산을 축적한 부농들이 대폭 성장했다. 반면 중공업을 비롯한 대규모 공업은 부분적으로 국가 통제가 유지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NEP 시기의 쏘련 경제에는 민간 주도의 중소 규모 공업 및 농업과 국유하의 대규모 공업이 공존하고 서로 관계 맺는 이원적 경제 체제가 자리 잡았다. 이러한 이원적 경제 체제하에서, 볼쉐비끼는 농민들의 생산 동기와 구매력을 강화하기 위해 공업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곡물가를 인상하였고, 공개적으로 부농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당 지도부는 이러한 상황을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자본주의가 복구되고 있다는 사실을 매우 공개적으로 인정했는데, 일례로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환의 자유는 자본주의의 자유를 의미한다. 우리는 공공연하게 말하고 강조한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숨기고자 한다면 모든 것은 매우 어려워질 것이다.”[4]≪레닌 전집≫ 제32권, p. 490.

볼쉐비끼에게 있어 NEP하의 경제 동향이 자본주의적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은 곧, NEP가 언젠가는 폐기되고 사회주의 경제 정책으로 대체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NEP는 시작 시점에서부터 경제 회복 및 사회주의 건설 기반 확보를 위한 일시적 정책으로 출범했고, 그 어떤 볼쉐비끼 지도자도 NEP가 영속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전시 공산주의가 내전 승리와 외세 격퇴를 위한 일시적 해법이었듯이, NEP 또한 경제 재건을 위해 강제된 일시적 해법이었다.

NEP는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농업 생산의 폭발적 증가가 이루어졌다. 내전 이후로 만성적인 곡물 부족을 겪던 쏘련 경제는 다시 곡물을 해외에 수출할 정도로 잉여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1928년에 들어서는 농업 생산이 1920년 대비 118%나 증가해 있었다.[5]G. W. Nutter, “The Soviet economy: Retrospect and Prospect”, David M. AbshireㆍRichard V. Allen, National Security: Political, Military and Economic Strategies in the Decades Ahead, New York: … Continue reading 하지만 레닌의 예상대로, NEP 시기 동안 농촌에서는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완전히 복원되었다. 토지와 잉여곡물, 농촌자본은 소수 부농들의 손에 집중되었고, 가난한 농민과 땅을 갖지 못한 농촌 노동자들의 삶은 기존보다 더 빈곤해졌다. 이러한 빈농들은 도시로 이주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빈농들의 도시 이주는 도시의 실업 문제를 심화시키는 연쇄적 악영향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민간 곡물 유통하에서 농산물의 가격이 인상되자 공업화에는 차질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데, 일례로 1924년 당시 중공업에 투입된 자본량은 1917년보다 23%나 적었다. 또한 1912년에 중공업 생산량은 전체 제조업 생산의 28%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1926년 시점에서는 29%였다. 단 1%밖에 성장하지 않은 것이다.[6]Paul Gregory, Socialist and Nonsocialist Industrialization Patterns, New York: Praeger, 1970, p. 28. 여기에 더하여 1926년 이후로는 중공업 생산이 오히려 감소하기 시작했다.

NEP 체제는 공업 발전에 적합하지 않았고, 공업 부문에 대한 국가의 집약적 투자 필요성은 점차 대두되었다. 집약적 투자를 위해서는 집약적 자본이 필요했고, 집약적 자본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잉여생산물을 국가의 관리하에 동원해야만 했다. 그러나 1928-1929년간의 대 풍작 사이에 막대한 힘을 축적한 부농과 지주들은 현물세 납부를 거부하고 인위적으로 시장에 풀리는 곡물량을 조절하여 곡물의 시세를 급상승시키는 등 국가의 잉여생산물 동원을 방해하고 있었다. 소위 네쁘맨이라 불리던 유통업 기반의 신흥 자본가들은 곡물 유통 과정에서 막대한 이윤을 수취했으며, 농업 생산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곡가는 나날이 오르기만을 반복했다. 곡가의 상승은 곧 도시의 노동자 부양력 하락으로 이어졌고, 이는 공업화를 가로막고 있었다.

NEP 모델의 고곡가 정책과 농업 지원 정책하에서 성장한 부농들은 역설적으로 국가의 시책에 조금도 협조하지 않고 있었는데, 당시 부농들의 비협조성은 쓰딸린이 1929년 4월 당 중앙위원회에 보고한 다음의 일화로 가늠해 볼 수 있다. “곡물이 풍부한 카자흐스탄에서 우리의 선전원 중 한 사람이 두 시간 동안 곡물 보유자들을 설득하여 도시에 공급하기 위한 곡물을 수매해 보려 하니, 꿀라크[부농을 의미함] 하나가 파이프를 물고 한 발짝 앞으로 나오며 말하기를, “젊은 친구, 춤을 좀 춰 보게. 그럼 내가 몇 뿌드[뿌드는 러시아의 무게 단위로, 16.38kg을 말함]의 곡물을 팔아 주겠네”라고 답했다.”[7]≪쓰딸린 전집≫ 제12권, p. 95.

경제의 재건이 어느 정도 완료된 1928년의 시점에서, 볼쉐비끼는 공업화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새로운 정책을 도입할 필요성을 느꼈다.

 

 

4. 농업 집산화와 기계화

 

쓰딸린이 집권한 이후, 1928년부터 NEP는 점진적으로 폐기되어 갔고, 기존 NEP 모델은 급속한 공업화 모델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급속한 공업화 모델은 내부의 경제적 요인에 의한 측면도 존재했지만, 그와 동시에 서유럽 선진국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실패와 쏘련에 대한 선진 열강들의 적대 정책, 파씨즘의 유행 등으로 인한 국외 위협 증가에 의해 일정 부분 강제된 측면 또한 존재했다.

쏘련 지도부는 국가계획위원회를 설립하여 기존의 혼합 경제가 아닌 계획 경제 제도를 도입했고, 1928년 10월에는 중공업 고정 자본량을 5년간 2배 성장시킨다는 내용의 제1차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5개년 계획의 실행을 위해 쏘련 지도부는 공업에 필요한 숙련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교육 과정에 무상 교육을 도입했고, 노동력이 공장으로 유입되도록 유도하기 위해 농업 및 써비스 부문의 임금을 의도적으로 삭감했다. 반면, 중공업 부문 노동자들의 임금은 매우 급속도로 인상되었다.

상술한 정책을 통해 대규모의 노동력이 도시로 다시 인입되었으나, 쏘련 지도부에게는 인입된 노동자들에게 곡물을 공급하는 과제가 남아 있었다. 도시의 식량 사정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1929년에는 빵의 공급 방식을 배급제로 변경해야 했고, 이후에는 고기, 찻잎, 우유 등의 상품의 배급이 시작되었다. 1929년의 농업 생산물 단가는 1927년 10월 1일에 비해 25.9%나 올라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밀의 시장가는 289%나 상승했다.[8]R. W. Davies, The Industrialisation of Soviet Russia I: The Socialist Offensive; The Collectivisation of Soviet Agriculture, 1929-1930,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80, p. 47.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곡물 판매량의 56%가량을 독점하고서 도시로의 곡물 공급 여부와 그 양을 좌지우지하고 있던 꿀라크[9]Ibid., p. 27.의 영향력을 농촌에서 분쇄해야만 했다. 꿀라크 분쇄를 위한 볼쉐비끼의 해답은 농업의 집산화였다.

전 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29년 4월에 1932년까지 10%의 농지를 집단 농장과 국영 농장의 형태로 집산화할 것을 결의했고 이러한 수준의 집산화가 곡물에 대한 꿀라크의 영향력을 추방하는 데 충분할 것이라고 첨언했으나, 이는 곧 지방위원회의 정정에 의해 더욱 높은 수준의 목표로 수정되었다. 1930년 1월에 이미 우랄 산맥과 볼가 지역 농지의 집산화 비율은 최소 39%에서 최대 56%에 달했고, 일부 지역들은 그로부터 1년 내로 모든 토지를 집산화할 것이라는 지방 계획을 발표했다.[10]Lynne Viola, The Best Sons of the Fatherland: Workers in the Vanguard of Soviet Collectivisa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pp. 93-94.

집산화가 지도부의 초기 예상을 벗어난 속도로 급속히 추진된 것은, 집산화가 단순히 상부의 지령에 의해서뿐만이 아니라 빈농을 중심으로 한 아래로부터의 대중 운동에 기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토론토 대학 교수로 재임하고 있는 쏘련사 연구자인 린 비올라(Lynne Viola)에 따르면, “비록 중앙에서 시작하고 승인되었지만, 집산화는 상당할 정도로, 농촌의 지역과 지구에 있는 지방 당과 정부 기관의 자유롭고 진취적 기획에 의하여 특별한 정책이 되었다. 집산화와 집단 농장은 쓰딸린과 중앙 당국에 의해서라기보다 훈련되지도 않았고 권한도 없는 농촌의 관리들과, 자활에 맡겨진 집단 농장의 지도자들의 실험에 의해서, 후진적인 농촌의 현실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또한 “국가는 집단에 의해, 그리고 법령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러나 농촌의 행정에서, 정부의 발언권을 강화시켜 주거나, 정부 정책의 정확한 수행을 보장하는 하부 조직이나 인적 자원이 없었다. 농촌에서 쓰딸린 체제의 기반은 국가 통제의 확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통제와 정비된 행정 계통의 완전한 부재에 있었다. 그 결과 그것은 농촌에서 기본적인 통치 도구가 되었다.”[11]Ibid., pp. 215-216.

즉 쏘련의 농업 집산화는 국가와 관료 집단의 강압적인 통제나 관료주의적 지령에 의해 수행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행정 계통이 부재한 상황에서 농촌 지도자와 지방 당원들의 아래로부터의 집산화 운동에 의해 수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농업 집산화는 두 가지 유형을 통해 이루어졌다. 첫 번째 유형은 집단 농장으로, 집단 농장에서 가내 소비를 위한 소토지를 제외한 개별 토지는 농부들이 집단적으로 경작하는 큰 구역에 병합되었다. 수확물의 일부는 세금으로 공제되었고, 나머지는 집단 농장에 속한 농민들의 재산이 되었다. 수확물들은 이윤을 위해 집단적으로 판매되었으며, 그 수익금은 작업량에 비례하여 농부들에게 분배되었다. 두 번째 유형은 국영 농장으로, 국영 농장에서는 전체 작물이 국가로 귀속되며, 농부들은 현대의 기업 농장처럼 공장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미리 정해진 임금을 받았다. 당시 쏘련에는 몰수된 대지주의 토지에 기반한 국영 농장이 이미 존재했었지만, 임금 노동에 익숙하지 않았던 대다수의 농민들은 국영 농장 형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대체로 자영농이나 소농, 중농이 경작하던 토지는 집단 농장 유형으로 집산화되었고, 이미 대규모 경작이 이뤄지고 있던 대장원이나 새로 개척한 황무지의 경우에는 국영 농장 유형으로 집산화되었다.

1928년에 시작된 농업 집산화는 193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료되었다. 1933년의 시점에서 농민 중 3분의 2가 집단 농장에 속해 있었다. 집산화는 일시적 기근 현상과 다소의 혼란을 빚었으나, 급속한 공업화를 바탕으로 대량 생산된 트랙터가 농촌에 보급됨에 따라 농업 생산량은 오히려 증가했다. 당 지도부는 농민들이 개인적으로 트랙터를 비롯한 농기계를 장만할 구매력을 지니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각 집단 농장마다 MTS(Machine Tractor Station, 기계 트랙터 지역본부)를 설치했다. MTS는 집단 농장에서 공동으로 사용하기 위한 트랙터들을 배치해 놓는 공간으로, 도시에서 생산된 트랙터들은 무상으로 각 집단 농장의 MTS에 인계되었다.

1930년을 기준으로, 곡물 생산량은 8,350만 톤에 이르렀으며, 이는 1929년의 7,170만 톤과 대비된다. 사탕무와 목화의 생산량은 20%가량 증가했다.[12]Davies, op. cit., pp. 337-339, 419. 또한 집산화와 국가 통제로 인해 기존에 문제가 되던 도시로의 곡물 유통 및 도시에서의 곡물 단가 사안 또한 개선되었는데, 농촌에서 도시로의 곡물 유통은 1931년을 기준으로 1929년 대비 21.7% 증가했다.[13]Ibid., pp. 360-361. 국가는 시장 평균가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도시 노동자들에게 곡물을 공급했고, 결국 도시 노동자를 부양하여 공업화의 기반을 다진다는 일차적 목표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성공을 대내외적으로 홍보하고 집산화 사업의 완수를 선전하기 위해 쓰딸린은 1934년 1월, 제17차 당 대회에서 중앙위원회를 대표하여, 사회주의 경제 제도가 “이제 누구에게도 도전받지 않을 수준의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오직 사회주의 우끌라드만이 국가 경제 전체에 유일한 지도력을 행사”한다고 선언했다.[14]≪쓰딸린 전집≫ 제13권, p. 316.

 

 

5. 결론

 

전시 공산주의가 내전과 외침이라는 현실적 상황에 대응하여 국가 자원을 총동원하기 위한 정책이었고, NEP(신경제 정책)가 내전으로 피폐화된 경제를 재건하고 추후 사회주의 건설의 기반을 닦기 위한 방책이었듯이, 쓰딸린의 농업 집산화 또한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이념적 독선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공업화를 위한 곡물 수급, 곡가의 안정, 국가 시책에 비협조적인 부농의 농촌 영향력 제거 등의 시급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이었다.

물론 집산화의 과정 속에서는 적지 않은 부농들에게 국가 폭력이 행사되었고,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에서는 산발적인 기근이 일어났다. 쓰딸린 또한 “성공에 현혹되어”라는 글에서 농촌 지도자들의 과도하게 급진적인 집산화 촉구 및 집산화 과정에서의 극좌적 오류를 비판하고 인정했을 정도로 집산화 과정에서의 실책과 오류는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나, 쏘련 지도부가 집산화를 결단한 당대의 상황은 도시에서 만성적 곡물 부족 현상이 벌어지고 농촌에서는 부농에게 밀린 빈농들이 대거 고향을 버리고 이주하는 등 매우 시급한 대책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농업 집산화라는, 당대 쏘련 지도부의 급진적 결단은 결과적으로 도시 노동자들의 곡물 부족 현상을 해결해 냈으며, 집단화에 기반한 기계 농업 도입은 곡물의 총생산량을 증가시켰다. 이는 동시기에 수행된 급속 공업화 정책을 뒷받침했고, 후진적 농업 국가에 불과했던 쏘련은 농업 집산화의 토대 위에서 수행된 제1차, 2차 5개년 계획하에 대규모 공업 국가로 탈바꿈되었다.

쏘련 지도부는 집산화를 수행해야만 하는 외적 조건에 직면해 있었고, 집산화를 통해 그 외적 조건을 돌파해 냈다. 그렇기에 쓰딸린 시기의 농업 집산화 정책은 단순히 이념적 독선으로 인해 벌어진 재앙이나 전체주의 폭력 정도로만 치부할 수 없으며, 비상한 상황이 요구한 비상한 대책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노사과연

 

 

[참고 문헌]

– 바만 아자드,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사회주의국가 쏘련을 해체시킨 요인들≫, 채만수 역, 노사과연, 2005.

– 쉴라 피츠패트릭, ≪러시아혁명 1917-1938≫, 고광열 역, 사계절, 2017.

– Martin Nicolaus, RESTORATION of CAPITALISM in the USSR, Liberator Press, 1975.

– Ludo Martens, Another View of Stalin, 1994.

 

* 각주에서 인용한 문헌 중 상당수는 위 참고 문헌에서 2차 인용한 것입니다.

 

 

▲ “우리 집단 농장에 성직자와 꿀라크의 자리는 없다.”
(N. 미하일로프, 1932.)

 

References

References
1 Maurice Dobb, Soviet Economic Development Since 1917,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66, pp. 103-104.
2 ≪레닌 전집≫ 제27권, p. 333.
3 Dobb, op. cit., p. 111.
4 ≪레닌 전집≫ 제32권, p. 490.
5 G. W. Nutter, “The Soviet economy: Retrospect and Prospect”, David M. AbshireㆍRichard V. Allen, National Security: Political, Military and Economic Strategies in the Decades Ahead, New York: Praeger, 1963, p. 165.
6 Paul Gregory, Socialist and Nonsocialist Industrialization Patterns, New York: Praeger, 1970, p. 28.
7 ≪쓰딸린 전집≫ 제12권, p. 95.
8 R. W. Davies, The Industrialisation of Soviet Russia I: The Socialist Offensive; The Collectivisation of Soviet Agriculture, 1929-1930,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80, p. 47.
9 Ibid., p. 27.
10 Lynne Viola, The Best Sons of the Fatherland: Workers in the Vanguard of Soviet Collectivisa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pp. 93-94.
11 Ibid., pp. 215-216.
12 Davies, op. cit., pp. 337-339, 419.
13 Ibid., pp. 360-361.
14 ≪쓰딸린 전집≫ 제13권, p. 316.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0개의 댓글

연구소 일정

3월

4월 2024

5월
31
1
2
3
4
5
6
4월 일정

1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3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4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5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6

일정이 없습니다
7
8
9
10
11
12
13
4월 일정

7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8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9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0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1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2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3

일정이 없습니다
14
15
16
17
18
19
20
4월 일정

14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5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6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7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8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9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0

일정이 없습니다
21
22
23
24
25
26
27
4월 일정

21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2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3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4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5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6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7

일정이 없습니다
28
29
30
1
2
3
4
4월 일정

28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9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30

일정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