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특집: 쏘련 건국 100주년] 쏘련 붕괴의 원인―로저 키란ㆍ토마스 케니의 ≪배반당한 사회주의≫를 중심으로

 

신재길 | 교육위원장

 

* 이 글은, 지난 1월 19일에 열린, <가칭 ‘포럼’>의 2023년 1월 정례 토론회 ‘소련 붕괴 원인에 대한 다양한 견해’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이 글은, 로저 키란(Roger Keeran)과 토마스 케니(Thomas Kenny)가 저술한 ≪배반당한 사회주의: 쏘련 붕괴의 배후(Socialism Betrayed: Behind the Collapse of the Soviet Union)≫를 요약한 것이다.

쏘련 붕괴의 원인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정세와 노동≫ 제139호(2017년 12월/2018년 1월)-제165호(2020년 9월)에, 총 23회에 걸쳐 번역ㆍ연재되었다.

 

 

1. 쏘련 붕괴를 설명하는 잘못된 견해들

 

1) 사회주의 자체의 결점

첫 번째 이론의 지지자들은 어떤 사회주의든 자체의 “유전적 결함” 때문에 망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사회주의가 쏘비에트 연방으로 탄생한 것은 이치에 맞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사회주의는 인간의 본성과 자유 시장에 반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이론의 문제점은 쏘비에트의 역사가 종말을 향해 갈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인간의 본성과 사유 재산 및 자유 시장으로부터 멀어진 데서 찾는 점이다. 이 이론은, 쏘비에트 사회주의가 집단 농업화와 제2차 세계 대전 때 독일의 침입 속에서 생존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1980년대에 겉보기에 훨씬 더 작은 도전에 붕괴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2) 대중적 저항

두 번째 이론은 대중적 저항이 쏘비에트 사회주의를 붕괴시켰다는 것이다.

지식인들의 각성, 노동자들의 저항, 민족주의자들의 등장 그리고 선거에서 비공산주의자들의 승리와 같은 대중적 저항의 측면을 강조한다. 확실히 쏘비에트 체제에 대한 지식인들의 불만이 꽤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예를 들어, 1980년대에 많은 저명한 쏘비에트의 경제학자들은 시장을 선호했다. 학자들이 제안한 개혁안은 고르바쵸프의 정책에 영향을 미쳤고, 이런 식으로 지식인들은 붕괴에 기여했다. 대중적 불만의 다른 측면들도 역할을 했다. 바꾸에서의 폭동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사이의 갈등, 발트에서의 민족주의자들의 저항, 광부들의 파업, 인민 대표자회의에서 자유주의 반대파 블록의 형성은 쏘비에트 사회주의 해체의 중요한 순간으로 부각되었다. 하지만, 이 이론의 주요한 결점은 대중적 불만이 고르바쵸프 개혁의 시작이 아니라 마지막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대중적 불만은 고르바쵸프 정책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한 농담이 말하는 것처럼, 글라쓰노쓰찌는 쏘비에트 시민에게 비판할 권리를 주었고, 뻬레쓰뜨로이까는 비판할 거리를 주었다. 하지만, 1985년 개혁 과정의 시작 당시에 대중의 불만은 존재하지 않았다. 일부 쏘비에트 사람들은 재화의 품질과 양에 대해서, 공무원들의 특권과 부패에 대해서 불만을 표했지만, 대부분의 쏘비에트인들은 그들의 삶에 대해 만족하고 체제에 대해 만족을 표명했다. 여론 조사는 쏘비에트 시민들의 만족 수준이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체제에 대해 갖는 만족도와 비견될 만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1990-91년, 지도자들이 사적 소유와 시장주의, 그리고 민족적 분열을 지향할 때, 대다수의 쏘비에트 시민들은 공적 소유, 가격 통제, 그리고 쏘비에트의 유지를 선호했다. 결국 대중적 저항은 독립 변수라기보다는 종속 변수였고, 고르바쵸프 정책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산출물이었다.

 

3) 외적 요소들

세 번째 이론에 따르면, 외적 요소들은 냉전에 뿌리를 두고 있고, 세계 경제가 쏘비에트의 붕괴를 야기했다. 세계 경제, 기술 변화, 카터와 레이건 정책에 의해 발생한 외부 압력은 의심할 여지없이 쏘비에트에 어려움으로 나타났다.

 

쏘비에트 사회는 외부 침략의 위협이 없는 내적 발전의 사치를 누리지 못했다. 스스로를 방어하고 동맹을 원조하는 비용은 매년 증가했고, 자원이 사회적으로 유용한 국내 투자에 쓰이지 못하고 빠져나갔다. 1980년대에, 동맹에 대한 쏘비에트의 원조는 연간 440억 달러에 달했고, 군비 지출은 경제의 25-30%를 차지했다. 레이건은 제2차 냉전을 일으켜 쏘련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다각적인 전략을 시작했다. 그 전략은 군비를 두 배로 늘리는 것(“군비를 파산에 이르게 소비하는 것”), 전략 방어 계획(“스타워즈”), 아프가니스탄과 폴란드 그 밖의 지역의 반공주의자들을 원조하는 것, 세계 시장에서 석유와 가스(쏘비에트 경화의 원천)의 가격을 낮추는 것이었고, 다양한 형태의 경제전 및 심리전을 포함하였다.

 

확실히, 쏘비에트 체제를 압박한 외부 요인들은 다양하고 강력한 방식으로 쏘비에트 체제에 장애를 초래했고, 쏘비에트 붕괴를 온전히 해명하기 위한 한 부분이다. 군비 경쟁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권위 있는 의견이 서로 다르다. 논쟁은 대부분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 미국의 압력은 그것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리고 어떠한 형태가 되더라도 이전의 경제 제재, 파괴 행위, 외세의 침략보다 대외적 위협의 정도가 약했다. 더구나 외압이 쏘비에트가 대응하는 특정 형태와 방향을 결정하지는 않았다. 결국 외압과 내부 문제에 대한 고르바쵸프의 특정한 대응이 붕괴에 대한 가장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4) 관료의 반혁명

네 번째 이론은 그 원인이 관료의 반혁명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왜 오늘날 러시아의 최고 경영자들과 자본가들이 이전의 쏘비에트 관리들이었고, 대개 쏘련 공산당원인지를 설명해 준다.

 

옐찐이 점차 자본주의의 길로 가려는 의도를 드러낼 때, 당-국가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힘과 특권이 자신들을 새로운 소유자로 하는 사유제로의 전환에 의해 유지되고 향상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렇게 하여, 1991년 8월의 이른바 “쿠데타”의 신속한 붕괴는 옐찐과 자본주의에 충성하는 엘리트들의 변절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고르바쵸프나 “쿠데타” 지도자들에 대한 엘리트(대중뿐 아니라)의 지지가 없었기 때문에, 1991년 8월과 12월 사이에 “음모”가 흐지부지되고 고르바쵸프의 운이 다했다. 이것은 자본주의 복원이 비교적 빠르고 평화롭게 이루어진 특징과 함께 새로운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데 커다란 어려움을 겪은 것을 동시에 해명해 준다.

 

그러나 “위로부터의 관료 혁명” 이론이 완전히 납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관료들은 체제를 방어하기 위한 집단행동을 할 능력이 없었고 의식적으로 스스로의 종말을 촉진할 능력도 없었다. “고위 관료”는 어쨌든 충분한 실체를 가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확실한 사회 그룹인데, 이들은 응집력 있는 정치 세력으로 행동하기에는 너무나도 이질적이었고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이러한 엘리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의식적으로 독립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다면, 무엇 때문에 1983년에는 안드로뽀프의 맑스-레닌주의를, 1987년에는 고르바쵸프의 수정주의를, 그리고 1993년에는 옐찐의 자유 시장 충격 요법을 지지했겠는가? 세 개의 매우 이질적인 이데올로기가 관료의 자기 이익 속에 있었던 것인가? 쏘련 공산당의 해체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인 1987년에 관료 엘리트의 국가 재산에 대한 절도는 배아 단계였다. 1990-1991년에는 절도가 만연했는데, 당-국가 엘리트가 아닌 다른 곳에서 절도가 만연했고, 이것이 붕괴를 초래했다는 견해가 신빙성이 있다. 국가 엘리트는 사건에 반응했지 선도하지 않았다. 일부 엘리트들은 권력과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 재산을 탈취했지만, 그 과정에서 기회주의적으로 반응했지 주인공은 아니었다.

 

진정한 문제는 흐루쇼프에서 시작되었다. 1956년 제20차 당 대회에서 채택된 “급진적 소비형 모델”과 임금 평준화는 동기를 약화시켰고, [물자] 부족을 낳고, 경제 성장을 늦췄고, 암시장과 부패를 조장했다. 1959년 제21차 당 대회에서 채택된 쏘비에트 연방이 “완전한 형태의 공산주의 사회”를 시작했다는 흐루쇼프의 생각은 지나치게 낙관적이었고, 환상을 심어 주었으며, 임금 평준화와 침체로 이어졌다. 1961년 제22차 당 대회에서 채택한 쏘비에트 국가가 전 인민의 국가가 되었고 쏘련 공산당은 전 인민의 당이 되었다는 생각은 국가에 대한 당의 약화와 지식인 및 관료들이 당에서 점점 더 우위를 차지한다는 신호였다. 요약하자면, 쏘비에트 연방의 문제점들과 고르바쵸프의 정책은 흐루쇼프의 잘못된 정책의 여진이다.

 

고르바쵸프 하의 국가 관료들은 안드로뽀프의 개혁 프로그램을 가로챘고, 고르바쵸프는 사회주의를 배신하고 자본주의를 복구했다. 진정한 문제는 관료제가 아니라 제2 경제이다. 제2 경제는 당과 국가를 부패시켰고, 쁘띠 부르주아 정신을 관료 안팎으로 키웠으며, 제2 경제 기업가들과 함께 일부 관료들을 고르바쵸프 기회주의의 기반으로 만들었다.

 

5) 민주적 요소의 결핍과 과도한 중앙 집권

다섯 번째 이론은 쏘련이 민주주의의 부족과 과도하게 중앙 집권화된 행정 체계 때문에 붕괴했다는 주장이다. 민주주의 부족 이론가들에 의하면 민주 제도의 부족과 경제의 과도한 집중화는 쓰딸린이나 쓰딸린 및 레닌에게서 유래한다. 이러한 견해는 사민주의 좌파와 유럽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널리 지지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얄팍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쏘비에트 사회주의에 대한 어떠한 방어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쏘비에트 붕괴를 민주주의의 부족이나 과도한 중앙 집권화 탓으로 돌리는 것은 심리적 또는 정치적 거리 두기 메커니즘으로 작용한다. 사회주의 이상은 쏘련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고 더럽혀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방식이다.

 

쏘비에트 연방이 민주주의의 부족과 과도한 중앙 집권화 때문에 붕괴했다고 말하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의미한다. 쏘련의 붕괴가 스웨덴 같은 서구 사회민주주의의 정치적 경제적 형태와 실천(즉, 자유민주주의와 혼합 경제)이 부족했기 때문이거나, 또는 지금까지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종류의 사회민주주의와 혼합 경제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생각 모두 역사적 설명으로서는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는 어떤 이상향에 부합하는가 아니면 부합하지 않는가 하는 정도에 따라 역사를 설명하려고 하는 이상주의적 사고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겔이라면 이러한 생각을 마음에 들어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맑스주의자이건 아니건 간에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역사적 설명이 사실의 구체적 내용과 역사적 모순, 사건의 내적 논리에 충실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역사 외적 기준으로 역사를 재단하여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이론의 현실적 문제는 고르바쵸프가 사민주의 이상을 가지고, 쏘련을 혼합 경제의 자유민주주의로 전환시키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정치적 경제적 붕괴로 이어졌다. 사민주의적 이상의 결핍이 쏘련 붕괴의 원인이 아니라 반대로 사민주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고르바쵸프의 정책이 쏘련 붕괴의 원인이었다.

 

보다 중요한 점은 쏘련이 민주주의가 부족했는가 하는 역사적 실제문제이다. 민주주의 부족 이론가들은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실제 역사를 무시한다. 역사적으로 사회주의는 자유주의보다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더 강했다. 자유주의는 점진적으로 단지 하나의 가치로서만 민주주의를 주장한 반면, 사회주의는 처음부터 하층계급에 의한 지배로서의 그 전통적 의미를 받아들였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우월성의] 선택을 숭배했지만,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평등에 가치를 두었다. 평등은 자본가계급의 우월성, 지배, 착취를 폐지한다는 의미이다. 자유주의가 민주적 형식을 흡수한 반면, 사회주의는 민주적 메커니즘을 발전시켰다.

 

쏘련은 대중이 참여하도록 설계된 다양한 정치 제도와 수단들을 발전시켜 왔다. 쏘비에트가 실천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신문을 새로운 소식뿐 아니라 고충 처리(ombudsmen) 용도로 사용하는 것, 노동조합에 노동자의 권리와 생산 규범에 대한 권한 및 사회 기금의 처분권을 부여하는 것, 그리고 쏘비에트, 생산 위원회, 지역 위원회, 생활단지 관리 위원회와 기타 당 및 정부 기관들을 창설하는 것 등이다.

 

하지만 쏘비에트 민주주의는 일부 영역에서 발전하고 있었던 반면 다른 곳에서는 문제가 발생했다. 제2 경제의 몇몇 부유한 수혜자들의 성장뿐 아니라,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특히 당 상점과 특권은 사회주의 평등을 헛되게 만들었다. 당의 주된 권한은 잘해 봐야 쏘비에트 자문 기구를 만드는 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었고, 최악의 경우 고무도장[무조건적으로 인가하는 사람]에 불과했다. 제2 경제로 인해 당과 정부의 일부는 부패했다. 요점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강점과 약점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중앙 집권화가 붕괴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는 발상은 민주주의 부족 이론만큼이나 문제가 많다. 쏘련은 (비국유 기업의 몇몇 요소를 가진) 국유 기업들과 (제한된 시장을 가진) 중앙 집권화된 국가 계획을 중심으로 경제를 조직하려고 시도한 역사상 첫 번째 나라였다. 계획 경제의 강력한 중앙 정부만이 사회주의 목표들을 이룰 수 있었다. 그것은 재산을 사회화하고, 내부와 외부의 적으로부터 혁명을 보호하고, 신속한 전기화와 산업화를 달성하고, 모두를 위한 교육, 의료 및 주택을 향상시키고, 국가에서 가장 낙후되고 억압받은 지역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 일에 대한 청사진도 없었고, 이것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쏘련의 전체 역사는 국유 재산과 중앙 계획의 맥락하에서 다양한 종류의 계획 메커니즘, 가격 차이, 임금, 투자 정책 그리고 중앙 집권화와 분권화에 대한 지속적인 실험과 관계가 있었다. 쏘비에트가 중앙 계획과 관련된 문제들에 지속적으로 직면했다는 말은 분명 사실이다. 그들은 중앙 집권적인 계획 경제의 맥락 안에서 분권화된 의사 결정을 위한 적절한 역할을 찾기 위해 거듭 노력했다. 그러나 문제가 단순히 중앙 집권화 그 자체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문제가 사회주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덧붙이자면 이는 고르바쵸프가 계획 경제를 허물고 사기업에 문호를 개방했을 때 도달한 지점이다. 다시 말해, 중앙 집중화에 여러 문제가 있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중앙 집중화 자체가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주의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민주주의 부족 이론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비장의 카드 하나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쏘련이 노동자계급의 의지와 이익을 진정으로 나타낼 중요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가졌었더라면, 그리고 공산당이 진정으로 노동자계급의 선봉에 섰었더라면, 공산당을 포함한 노동자들은 공산당의 전복, 사회주의의 폐지, 그리고 자본주의로의 회귀에 저항했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노동자계급뿐 아니라, 공산당원들도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쏘비에트 민주주의에는 어떤 점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쏘비에트 붕괴의 실제 역사는 이러한 논리의 망을 벗어나 있다. 노동자계급의 저항은 있었다. 이 저항이 사회주의의 해체를 막을 만큼 크지 않은 이유는 물론 큰 수수께끼이다. 명백히 자기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정책에 대해 사람들이 묵인하는 것은 매우 골치 아픈 현상이다. 이런 현상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잘 알려져 있으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일반적이다. 쏘비에트 사회주의도 관성을 초월할 수 있는 시민을 창조하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도적 무지와 사무적 태도로 대개는 움직이지 않았다. 실망스럽지만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이는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만큼이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폐단이기도 하다.

 

더욱이 쏘련의 소극성에 대한 책임을 사회주의 정치 제도에서만 찾는 것은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전통적인 쏘비에트 정치 형태들(신문, 쏘비에트, 공산당 그 자체)의 상당수가 1985년 이후 고르바쵸프에 의해 손상되었다. 그래서 대다수의 쏘비에트 인민들은 재산의 사유화, 가격 통제의 제거, 쏘련의 해체, 정치적 견해를 표현하는 전통적 방식이 사라지고 있는 것에 반대했지만, 인민 대표자회의와 같은 새로운 기관은 이러한 대중 정서를 집행하는 데 전혀 효과가 없었다. 게다가 고르바쵸프와 다른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레닌으로 돌아가 더 좋은 사회주의를 발전시킨다는 허황된 확신을 가지고 전통적 제도의 약화와 자본주의의 복구를 진두지휘했다. 다시 말해서, 고르바쵸프와 다른 공산주의자 리더들이 인민의 생활 수준, 경제 안정, 사회주의 자체를 침식하고 있던 바로 그때, 이들은 노동자에게 더 좋은 사회주의를 약속하고는 노동자에게서 이전에 노동자의 관점을 대변하던 제도를 박탈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수동성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6) 고르바쵸프 개인적 요인

마지막 이론은 쏘비에트 붕괴가 주로 고르바쵸프 개인 때문이었다는 것, 즉 고르바쵸프의 이념적 일탈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관점이다.

 

고르바쵸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설명은 그가 혼자 움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맥락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모호하게 한다. 고르바쵸프가 안드로뽀프에서 일단 멀어졌을 때, 공산주의 운동에서 선례가 있었던 사상, 즉 부하린과 흐루쇼프의 사상과 쏘련 사회의 일부 사람들에게 호소력 있는 사상을 대표했다. 당과 정부의 중앙 권력 약화, 사유 재산의 합법화, 시장에 대한 더 많은 자유의 허용과 같은 사상은 1980년대에 세력을 형성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법적인 사기업과 유착된 역동적인 (기생적인 경우) 부문의 이익을 뚜렷하게 반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르바쵸프는 역사를 만드는 단독의 “요인”이 아니라 특정 전통의 유산이자 시대의 산물이었다.

 

결국 쏘비에트 붕괴 이야기는 사회주의의 불가능성에 뿌리를 둔 비극의 불가피한 전개 과정은 아니었다. 대중적 저항이나 외국의 적에 대한 패배도 아니었다. 자유민주주의와 혼합 경제를 실현하는 사회주의의 이상과 합치되지 못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한 남자의 의식적인 배신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혁명 그 자체 내의 특정한 경향이 승리한 이야기였다. 이 경향은 초기엔 시골의 소농적 특성에, 나중에는 제2 경제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제2 경제는 한편으로 소비자들의 요구를 제1 경제가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 정부 당국이 제2 경제의 위험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법적으로 막지 않았기 때문에 번창했다. 이러한 경향은 고르바쵸프 이전에 부하린과 흐루쇼프에서부터 나타났었다. 이 경향은 번영,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비전이 희생 없이도, 투쟁 없이도, 강한 중앙 권력 없이도 빠르고 쉽게 올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경향은 제국주의와 자유주의, 사유 재산과 시장을 허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이 경향의 지지자들 중 일부는 이들이 진정한 사회주의자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들은 돈벌이와 사유 재산을 충실하게 지지하는 이들과 동맹을 맺었다. 고르바쵸프 이후에야 혁명의 이러한 경향이 비로소 지배적이 되었고, 그 논리적 결말에 이르게 되었다. 고르바쵸프에 이르러서야 겨우 이 경향의 어리석은 방향이 완전히 드러난 것이다. 그 방향은 새로운 사회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야만주의였다.

 

 

2. 쏘련 붕괴의 원인

 

결론부터 말한다면 쏘련은 1986년 이후 미하일 고르바쵸프가 추구했던 정책 때문에 붕괴했다.

 

1) 쏘련 공산당 내의 두 가지 경향

고르바쵸프의 정책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니고, 현존하는 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대안도 아니었다. 고르바쵸프의 정책은 어떻게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것인지에 대한 맑스주의 자체만큼 오래된 공산주의 운동 내부의 논쟁에 근원을 두고 있다.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쏘련의 논쟁에서 두 개의 주요한 경향이나 추세가 있었다. 좌파는 계급 투쟁, 노동계급과 공산당 권력의 지배를 촉진시키는 것을 선호했지만, 우파는 후퇴나 타협 그리고 다양한 자본주의적인 사상을 사회주의에 혼합시키는 것을 선호했다. “좌파”와 “우파”는 선과 악에 대한 동의어는 아니었다. 오히려 정책의 정확성과 적절성은 그 정책이 주어진 상황하에서 사회주의의 단기간이나 장기간의 이익을 가장 잘 나타내느냐 아니냐와 관계가 있었다. 그러므로 쏘련 정치사는 복잡한 문제이다. 한편으로, 사회주의를 위한 계급 투쟁을 두려움 없이 추구했던 블라지미르 레닌도 브레쓰트-리또프쓰크 조약(the Treaty of Brest-Litovsk)과 신경제 정책(NEP)에서 그랬던 것처럼 타협에 대해 때때로 찬성했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서구의 사상을 혼합하는 데 종종 찬성했던 니끼따 흐루쇼프는 동시에 더 큰 임금의 균등화라는 좌파의 정책에 찬성했다.

 

고르바쵸프의 초기 정책은 블라지미르 레닌, 이오씨프 쓰딸린과 유리 안드로뽀프에 의해 주로 대표되었던 좌파 공산주의의 전통과 닮았던 반면에 그의 후기 정책은 니꼴라이 부하린과 니끼따 흐루쇼프에 의해 주로 대표되었던 우파 공산주의의 전통과 닮았다. 1985년 이후, 공산당을 약화시키고, 자본주의와 타협하고, 쏘련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의 사적 재산, 시장과 정치적 형태들의 어떤 점들과 혼합하는 소위 사회주의의 사회민주주의적인 해석을 그 정책들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르바쵸프의 정책은 우파로 이동했다.

 

2) 쏘련 붕괴의 직접적 원인―고르바쵸프의 정책

쏘련 붕괴는 국가의 부실한 경제 성과, 연방 공화국으로부터의 민족주의적 압력, 자유나 소비재의 부족에 대한 대중의 불만, 또는 독재 정권을 자유화하려는 노력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결과의 핵심은 정치 체제 또는 국가의 상층부에서 발견된다. 문제는 엄밀히 말해서 국가의 취약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정신 상태의 취약함이었다.

 

고르바쵸프의 정책은 불가피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우연한 것도 아니었다. 강력한 내외부의 힘이 수정주의를 지탱했고 고르바쵸프에게 권력을 주었다. 이러한 힘은 내부적으로는 합법적, 불법적 사기업과 이와 연관된 부패, 외부적으로는 미국의 침략과 군사주의, 그리고 부활하는 자유 시장 이념이었다. 이는 수십 년 동안 점점 더 강해졌다. 1985년에 고르바쵸프는 내부 세력을 부추기고 외부 세력을 수용했다. 1986년 이후 고르바쵸프의 계획은 그 핵심적 과제를 잃고 쏘련 공산당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나아갔다. 당에서 자신의 적들을 과감하게 처리하지 못한 흐루쇼프의 실패에서 배우고자 했던 고르바쵸프의 결단을 반영한 것이었다(당이 가장 필요할 때 당을 약화시킴).

 

쏘비에트 연방에 대한 배신은 사회주의의 전복과 연방 국가의 분열로 인한 것이다. 이것은 다섯 가지의 구체적인 과정으로부터 직접 비롯된 것이다. 당의 청산, 반사회주의 세력에게의 언론의 이양, 계획적인 공공 소유 경제의 사유화와 시장화, 분리주의 촉발, 미 제국주의에의 굴복 등이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부정확하고 추상적인 단점들이 이러한 정책들의 “원인”일 수는 없다. 쏘련 공산당의 고르바쵸프 지도부는 이 모든 정책들을 의식적인 정치적 선택으로 시작했다.

 

고르바쵸프의 수정주의가 쏘련 공산당의 정치와 쏘비에트 사회에서 오랫동안 잉태되어 왔지만, 쏘비에트의 붕괴가 예정된 것은 아니었다. 지난 35년 동안, 발전이 다른 방향으로 향할 수 있었던 사건들은 많았다. 이러한 생각에 대한 가장 강력한 논거는 쏘련 공산당이 1920년대 후반에 니꼴라이 부하린의 기회주의를 물리친 사건이다. 그때는 계급적 뿌리가 강한 거대한 농민이 노동자계급 국가를 포위하고 있던 때였다. 1950년대에 더 이상 포위되어 침략당할 위험이 사라지자, 쏘련은 억압적이지 않은 쓰딸린 이후 시대로 진입할 수 있었고, 흐루쇼프의 사상과 정책의 많은 잘못을 제거할 수도 있었다. 정치적으로 침체된 브레쥐네프 시대의 후반부에, 지도자들은 증가하는 부정적 경향, 특히 제2 경제 및 부패와의 전쟁을 더 잘 수행할 수도 있었다. 유리 안드로뽀프가 살아 있었다면, 자신의 첫 번째 개혁 성과를 날카롭게 분석하고 평가하여 개혁 과정을 더 깊고 광범위하게 가져갔을 것이다. 뻬레쓰뜨로이까 시대에는 1986년 이후에 취한 문제적 정책 방향이 지도부 전체나 고르바쵸프의 마음속에서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부하린, 흐루쇼프와 고르바쵸프가 보였던 경향성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마침내 승리하였다는 것은 그것에 끈질기고 실질적인 뿌리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 뿌리는 더 이상 혁명 초기의 집요했던 농민들이 아니라, 상업주의 및 제2 경제의 범죄 행위가 퍼진 데 있었다.

 

3) 고르바쵸프 정책의 물질적 기초―제2 경제(시장 경제)

고르바쵸프의 정책 변화의 근본적인 원인과 그 물질적 기초는 개인적 기업이라는 2차 경제가 사회주의 안에서 발전한 것과 이와 함께 새로운 쁘띠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 새로운 수준에 달한 당의 부패이다. 제2 경제의 성장은 인민들의 상승하는 기대를 충족시키는 데 있어 사회화된 부분인 “제1 경제”가 지닌 문제점의 반영이다. 또한 불법 경제 활동에 대한 법을 집행하는 당국의 모호함과 사적 경제 활동의 부식 효과를 인식하는 데 있어 당의 실패를 반영했다.

 

쏘비에트 붕괴의 원인은 무엇인가? 1980년대 초반에 쏘비에트 연방을 힘들게 했던 경제 문제, 외부 압력 그리고 정치적 및 이데올로기적 침체들이 개별적 혹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쏘련이 붕괴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르바쵸프와 그의 동맹 세력들이 추진한 특정한 개혁 정책에 의해 촉발되었다. 1987년 고르바쵸프는 유리 안드로뽀프가 시작하고, 고르바쵸프 자신이 2년 동안 따라왔던 개혁 과정에 등을 돌렸다. 1953-64년 흐루쇼프의 정책, 더 거슬러 올라가 1920년대에 부하린이 신봉한 사상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재현한 새로운 정책을 채택했다. 고르바쵸프가 180도 전환한 것은 반사회주의적 의식에 대한 사회적 기반을 제공한 제2의 경제가 성장한 때문에 가능했다. 고르바쵸프의 수정주의는 반대자들에 결정적으로 승리하고는 맑스-레닌주의의 필수적인 원리를 버렸다. 계급 투쟁, 당의 주도적 역할, 국제 연대, 집단 소유와 계획의 우선을 폐기했다. 쏘비에트 외교 정책의 후퇴와 쏘련 공산당의 핵심이 제거되는 결과를 낳았다. 당의 핵심이 제거되는 과정은 대중 매체에 대한 당의 굴복, 중앙 계획 체제의 해체와 그 결과로서 경제 침체, 그리고 쏘련 구성 국가를 조화시키는 당 역할의 종식 과정이었다. 대중의 불만이 커지자 옐찐의 반공산주의적인 “민주주의자들”이 거대한 러시아 공화국을 장악하였고, 그 자리에 자본주의가 들어앉았다. 민족 분리주의자들은 비러시아 공화국에서 승리했다. 쏘련은 산산조각 났다.

 

계급 투쟁은 쏘비에트 국가가 집단화와 산업화를 빠르게 착수했던 1928-1929년 때처럼 종종 격화된다. 심지어 농촌 지역에서의 계급 관계가 이러한 사건들에 의해 엄청난 인적 희생을 치르며 달라졌을 때조차도, 낡은 계급적 잔재는 완강히 생존했고, 2 경제의 새로운 성장과 함께 1950년대 초반에 부활했다. 고르바쵸프와 그의 그룹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노선을 지지할 특정한 사회 집단을 목표로 삼았다. 도시와 시골의 기업가 대부분, 수완 좋은 노동자, 소농, 관리자, 과학자, 기술자, 교사, 예술가, 이상주의적인 하급 관리, 민주주의적 생각을 가진 일반 당원 등이다. 이 범주의 사람들은 물질적 생산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다.

 

고르바쵸프 시대의 수백만 쏘비에트 인민들의 경제적 불만은 중앙 계획 체제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의 해체로 인한 것이었다. 1985년 경제는 여전히 중앙에서 계획되었고, 쏘비에트 역사상 가장 높은 생활 수준을 가져다주었다. 수십 년 동안, 쏘비에트 경제는 미국보다 더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1980년대에 전처럼 빠르게 격차를 좁히지는 못했고 경쟁의 성질이 바뀌었다. 선두 주자로서 미국은 새로운 산업으로의 중요한 질적 전환을 이뤄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초에 쏘비에트 경제는 연 3.2%의 놀랄 만한 속도로 성장하면서, 여러 면에서 미국 경제를 천천히 따라잡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1985년에서 1991년까지 시장의 마법은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이다. 상품화폐 관계가 확대될수록 뻬레쓰뜨로이까는 점점 더 실패했다. 1992년 옐찐이 충격 요법을 전면적으로 도입하자, 쏘비에트 경제는 재앙적인 침체에 빠졌다.

 

4) 고르바쵸프 정책의 사상적 기초―계급 투쟁의 포기(수정주의)

쏘비에트 사회주의의 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계급 철폐를 위한 투쟁은 국가 권력의 장악으로 끝나지 않으며, 사회주의를 건설한 지 70년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전히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세계에서 사회주의 국가 내부의 계급 투쟁이 끝났다는 생각은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계급 투쟁의 표현이다. 이러한 생각에 대한 굴복이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 중 하나였다.

 

쏘비에트 붕괴의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고르바쵸프의 기회주의가 쏘비에트 공산당 내에서 발생했다는 점이 아니다. 이전에 기회주의를 저지했던 것처럼 고르바쵸프의 기회주의를 공산당이 저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왜 쏘련 공산당은 1964년의 흐루쇼프나 1929년의 부하린에 대처한 것처럼 1987년과 1988년의 고르바쵸프에 대처할 수 없었을까? 그것은 어느 정도 당이 방심했고, 2 경제와 이로부터 불거져 나온 당과 정부의 부패를 일소할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은 당원 자격에 있어 너무 방만해졌다. 당의 문호가 너무 넓어진 것이다. 특히 노동자가 아닌 당원이 증가했다. 민주 집중제는 변질되었다. 당과 노동계급을 연결하는 노동조합, 쏘비에트 그리고 여러 기제들은 경직되어 갔고, 비판과 자기비판은 사라져 갔다. 집단 지도도 쇠퇴했다. 당의 화합과 지도부의 노선을 따르는 것이 맹목적인 최고 덕목이 되었다. 이념적 고양은 시들해졌다. 흐루쇼프는 이념적으로 잘못을 범했고, 여러 분야에서 이념은 현실과 멀어져 갔다. 많은 면에서 이념은 현실에 안주하고 형식화되고 의례적으로 된 것이다. 그 결과 매우 훌륭하고 뛰어난 많은 사람들이 이념에 혐오감을 느꼈다. 최고 지도자들 대부분은 기회주의의 의미와 위험에 충분히 주의를 돌리지 못했다. 간단히 말해서, 당 스스로가 개혁이 필요했다.

 

무익한 후퇴를 정당화하는 이론을 수정주의라 부른다.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우익 기회주의는 대개 국내외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투항(투쟁보다는)의 형태를 취한다. 수정주의는 때때로 현실을 바꾸기 위한 투쟁보다는 “현실 존중”에 대한 옹호로,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 점진적 접근만을 고집하는 일방주의로, 그리고 객관적인 정세에 대한 굴복으로 나타난다. 또한 항쟁을 회피하는 길을 통해, 빠르고 쉽게 사회주의로 가려고 한다. 이런 사고의 습성은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과정의 자동적이고 자생적인 성질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으며, 사회주의 발전의 열쇠로서의 생산력 발전을 강조하고, 생산관계를 완전하게 하는 계급 철폐 투쟁을 경시한다. 흐루쇼프 하에서,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기회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론이 분명히 시작되었다. 두 전임자와는 다르게, 흐루쇼프는 사회주의의 발전 도상에서 기회주의가 존재할 어떤 사회적 토대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부정은 노동자계급 국가가 전 인민의 국가가 되었고 공산당이 전 인민의 당이 되었다는 흐루쇼프의 표현에서 발견된다. 흐루쇼프의 낙관론이 어리석었다는 것은 고르바쵸프의 배신으로 드러났다.

 

뻬레쓰뜨로이까 기간 동안, 시장 사회주의는 가교 역할을 했다. 간단히 말해, 사회주의를 개혁하고 완성한다는 목적을 쏘비에트 인민에게 정당화하는 데 유용했다. 구호로서 그것은 효과적이었다. 재임 기간 말미에, 경제 “개혁”이 자본주의의 부활과 거의 구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만들어 냈을 때, 고르바쵸프는 “사회주의”라는 가식을 던져 버렸다. 서유럽이나 스칸디나비아를 닮은 “규제된 시장 경제”를 확립한다는 목표로 발전했다.[1]중국 공산당은 시장 사회주의 때문에 살아남아 발전한 것이 아니라 당을 강화하고 후계 체계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3. 결론

 

1) 사회주의에서 주체의 의식적 실천의 중요성

왜 쏘비에트 사회주의 체제는 그렇게 나약했는가? 내부로부터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체제는 실제보다 더 강하게 보인다. 따라서 예측치 못한 몰락은 더욱 충격적이었고 혼란스러웠다. 비슷한 질문을 다른 각도에서 해 보자. 미국 자본주의가 1929년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시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왜 쏘비에트 사회주의는 고르바쵸프 시기에 살아남을 수 없었는가? 당시 미국 자본주의는 40%의 대량 실직, 10년간의 침체를 야기한 경제 붕괴 기간이었고, 장기간의 공화당 지배가 끝난 때였다. 미 자본주의는 이를 극복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성장하고 번성할 수 있었다.

 

답은 다음과 같다. 주관적인 요소가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에서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강점인 동시에 약점이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질적인 차이는 자본주의는 자생적으로 성장하고, 사회주의는 의식적으로 건설한다라는 말 속에서 포착할 수 있다. 진부한 비유의 위험을 감수하고 말하자면, 두 체제는 뗏목과 비행기에 비교된다. 자본주의라는 뗏목에서 배를 조종하는 뱃사공은 단지 여울, 급류, 폭포만 피하면 된다. 대체로, 강의 흐름이 뗏목의 방향과 속도를 조절한다. 그것은 간단하고 자동적인 체제이다. 단지 느슨한 감독만이 요구된다. 커다란 실수들은 보통 위험하지 않다.

 

사회주의라는 비행기는 훨씬 더 우월한 교통수단이다. 범위, 방향과 조작의 자유도, 속도는 뗏목을 훨씬 능가한다. 그러나 비행기는 물리학과 공기 역학, 예측, 계획, 과학, 훈련, 지상 근무원, 레이더 등의 원리를 의식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거대한 사회적 분업을 필요로 하는 복잡한 씨스템이다. 이 씨스템은 조종이라는 주관적 측면이 뗏목의 경우보다 교통수단의 안전에 훨씬 더 중요하다. 비행기를 조종하는 데 있어 큰 실수는 드물기는 하지만 종종 치명적이다. 잘못을 용인할 여지는 훨씬 적다. 그러나 비행기가 때때로 추락한다는 사실이 뗏목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어느 비행기가 더 잘 설계되었는지, 어느 비행사가 더 잘 운행했는지 등의 비행기 안전에 관한 문제일 뿐이다.

 

사회주의 건설 법칙과 자본주의 발전 법칙은 전혀 다르다. 자본주의 법칙은 맹목적이다. 목적의식적이지 않고 중력의 법칙처럼 움직인다. 강의 흐름에 따라 뗏목을 떠내려 보내면 그만이다. 사공이 무엇을 하든 흘러가게 마련이다. 반면 사회주의 법칙은 객관적이지만, 중력과 추진력, 양력, 항력과 같은 힘들을 지배하는 법칙을 숙달하고 이용하는 설계자와 그러한 기초 과학에 근거한 기술에 능숙한 조종사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고르바쵸프의 지도력은 실수투성이인 후버가 미국 자본주의에 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큰 피해를 사회주의에 줄 수 있었다. 쏘비에트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회주의 경제 법칙은 자생적이고, 무정부적으로 작동하는 힘을 중단시키고, 사회가 사회의 이익에 따라 목적의식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경제 법칙을 무시하게 되면 “경제에 있어 어려움과 불균등, 불균형을 야기하고, 행동의 조화 및 사회단체와 노동단체의 동지적 협력을 약화시킨다.”

 

제국주의는 쏘비에트 연방 내에서 기회주의가 성장함에 따라 자국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한 공식을 발견했다. 멀리서 쏘련 공산당 지도부에 있는 기회주의 경향을 추동하는 것이다. 그들은 내전에의 개입, 나치 침략, 군비 경쟁, 파괴 활동, 경제 전쟁으로는 쏘비에트 사회주의를 이길 수 없었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지도부에 침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외부에서 기회주의적 정책을 고취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이윽고, 몇몇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스스로 수정주의라는 독배를 마셨다.

 

고르바쵸프는 자신의 프로그램이 흐루쇼프의 제거로 중단되었던 “반쓰딸린주의” 의제를 완성하는 것이라는 프레임을 일정하게 만들어 냈다. 집권 말기 고르바쵸프는 “쓰딸린주의”, “전체주의”, “명령 경제”와 같은 반공주의자들의 악의적인 인습적 말들을 노골적으로 사용했다. 이런 차용한 욕설로 과거를 낙인찍은 것은 쏘비에트 연방의 현재 및 과거 실상에 대한 합리적이고, 정직한 논쟁을 마비시켰다. 앞으로 사회주의의 지지자들은 쓰딸린 시대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역사적인 진리에 충실하기 위해, 우리는 쓰딸린의 두 가지 측면을 다 보아야 한다. 그것은 쓰딸린의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 및 사회주의 성과를 방어한 데 대한 이론의 여지가 없는 공헌과 우리가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고, 우리 사회의 삶에 중대한 결과를 가져온 그와 그의 주변인들에 의해 행해진 중대한 정치적 실수와 폐해이다.

 

2) 계급 의식과 정체성 의식

사회주의 다민족 연방이었던 쏘련의 붕괴는 민족 문제의 중요성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맑스 자신이 한 가지 이상의 측면에서 민족 문제를 과소평가했다. 더욱이, 과거의 국제주의자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그리고 오늘날의 세계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민족주의자들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자유 무역과 세계화 이데올로기를 가진 초국적 기업이 국가 주권과 발전을 공격하면, 노동자 당파들은 민족 자결권에 대한 민주적 권리의 최고 대변자가 되어야 한다. 유일한 세계 군사 강국 미국에 의한 세계 지배는 다른 모든 국가의 민족 문제를 부각시키고 있다.

 

새로운 사회주의의 부활은 민족 문제와 계급 문제가 중첩되고 (주변에 새로운 사회주의 권력을 도와줄 국가가) 있는 나라에서 나타날 것이다.

 

*       *       *

 

키란(Keeran)과 케니(Kenny)는 수정주의 극복을 위해서 레닌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한다. 그러나 수정주의는 새로운 상황과 조건에서 새로운 사고로 나타난다. 쏘련 붕괴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맑스-레닌주의 그리고 쓰딸린주의가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그 한계를 노정하면서 수정주의 발흥을 제압하지 못한 것이다. 그 한계는 단순히 정책의 문제만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사상 문제이다. 사회주의 사회는 키란(Keeran)과 케니(Kenny)가 주장한 바와 같이 의식적 건설 과정이다. 인간의 의식적 실천 문제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이는 1950-60년대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제기되었다. 쏘련과 동구에서는 ‘실천 논쟁’으로 중국에서는 ‘주관능동성 논쟁’, 그리고 북에서는 ‘주체’ 문제로 나타났다. 그러나 인간의 실천을 강조하는 견해는 관념론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논쟁이 중단되었다. 이것이 사회주의 국가에서 인간의 의식적 실천의 중요성을 사상적 경지까지 발전시키지 못한 결과를 낳았고, 그로 인해 맑스-레닌주의 사상은 형식화되었다. 맑스-레닌주의가 형식화되자 인간의 의식과 감정, 행동을 지배하는 사상으로서의 역할은 쇠퇴하였고 그 자리에 수정주의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여기서는 철학 사상 문제를 다루는 자리가 아니니 간단히 문제 제기를 하는 것으로 끝내고자 한다.[2][편집자 주] 이하의 내용은, 과거 ≪정세와 노동≫ 지면을 통해 논쟁이 진행된 바 있습니다. 관련된 필자의 주장과 이에 대한 비판(반론) 및 … Continue reading

 

첫째, 철학의 근본 문제를 재검토해야 한다. 물질-의식의 틀로는 의식적 실천 개념을 맑스-레닌주의 내에서 사상적으로 정립하기 힘들다. 철학의 근본 문제는 물질-의식, 인간-세계, 유(有)와 무(無)라는 세 가지로 재정립해야 한다.

 

둘째, 철학의 근본 문제의 연장으로 토대-상부구조론의 재검토가 필요하다. 기존의 토대-상부구조론으로는 상부구조(특히 국가와 당, 인간의 감정, 사상)의 능동적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기 힘들다. 사회 역사적 분석은 경제-정치-사상 틀로 재정립해야 한다.

 

셋째, 계급 의식에서 ‘의식’이 아니라 ‘감정’이 인간 행동의 가장 근본적인 기반이지만 의식성으로 보강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립해야 한다. 인간의 주관은 감각(경험)-이성의 틀에서 감각-감정-이성의 틀로 재정립해야 한다.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중국 공산당은 시장 사회주의 때문에 살아남아 발전한 것이 아니라 당을 강화하고 후계 체계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2 [편집자 주] 이하의 내용은, 과거 ≪정세와 노동≫ 지면을 통해 논쟁이 진행된 바 있습니다. 관련된 필자의 주장과 이에 대한 비판(반론) 및 재비판(재반론)은 다음의 글들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신재길, “물질과 철학의 근본문제”, ≪정세와 노동≫ 제119호(2016년 1월); “헤게모니 이행기에 전쟁은 필연적인가―전쟁의 원인, 경제와 전쟁의 순환구조 그리고 미중대결”, ≪정세와 노동≫ 제145호(2018년 8/9월호); “문영찬 연구위원장의 ‘비판’에 대한 반론”, ≪정세와 노동≫ 제147호(2018년 12월/2019년 1월); “헤겔과 맑스주의 국가론의 철학적 방법론적 기초에 대하여”, ≪정세와 노동≫ 제148호(2019년 2월); “맑스주의는 어떻게 실증주의로 타락하는가?―문영찬 연구위원장의 비판에 대한 재비판”, ≪정세와 노동≫ 제153호(2019년 7/8월).

문영찬, “신재길 동지의 사적 유물론 ‘수정’에 대한 비판”, ≪정세와 노동≫ 제146호(2018년 10/11월); “맑스주의 철학의 ‘수정’과 부르주아적 속류화―신재길 동지의 반론에 대한 비판”, ≪정세와 노동≫ 제149호(2019년 3월); “맑스주의 세계관에 대한 공격과 과학의 속류화―신재길 동지에 대한 세 번째 비판”, ≪정세와 노동≫ 제158호(2020년 1월).

신재길 교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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