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주체와 자연사적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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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 않은 사람들은 흔히 자기의 활동이 순전히 환경을 초월한 자신 의지의 활동인 것처럼 생각하곤 한다. 따라서 인간 활동에 대한 통속적인 이해는 항상 타인의 불행, 또는 타인의 ‘성공’이 오로지 독립된 의지인 노력의 결과로서 좌우된다는 생각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내면화하는 원인이 된다. 인간의 활동과 사회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의 가장 비극적인 형태는 사회 모순에 대한 자각 없이 행해지는 자신에로의 몰개념적 비난이다.

 

맑스가 1846년 12월 P. W. 안넨코프에게 보낸,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을 비판한 서신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것의 형태가 어떠하든지 간에 도대체 사회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상호간의 행위의 산물입니다. 이러한 또는 저러한 사회형태를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인간은 자유롭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 사람들이 그들의 ― 인류 전체 역사의 토대인 ― 생산력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은 중언부언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1]K. 마르크스, 강민철·김진영 역 (1988), P. W. 안넨코프에게 보내는 편지: 《철학의 빈곤》, 아침, p. 179.

 

자연과학의 발전, 특히 그중에서 생명과학의 발전이 밝혀낸 바는, 인간의 활동이 순전히 자기 주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활동을 더욱 보편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 인간을 둘러싼 자연사물과 인간이라는 유기체 간의 물질적 상호작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필연성을 구성하는 자연적 사실은 인간이 자신의 자의를 통해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9세기 걸쳐 진행된 생명과학의 발전은 이러한 생각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결과로 J. 몰레스홋, C. C. 포크트와 같은 생리학적 결정론자가 19세기 말에 걸쳐 적지 않게 등장하였다.

 

그런데 인간이 한갓 자연사물에 의해 기계적으로, 타성적으로 움직이는 존재에 불과하다면, 사회의 근본적 변혁에서 인간의 역할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다. 즉 생리학적 결정론에서 인간은 자기목적적인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비판받은 M. 슈티르너와 K. 그륀과 같이, 사회 발전에서 인간의 주관을 무비판적인 방식으로 그 중심에 놓게 된다면, 역시 사회 발전의 합법칙성에서 관념에 대한 물질의 일차성과 그것이 표현하는 필연성의 지위는 끝없이 추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자연필연성과 인간의 주체적 활동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이미 《변증법적 유물론과 자유》에서 대략적으로 밝힌 바 있다.

 

문명사회에서 인간이 맞닥뜨리는 자신의 대립적 주체는 단순 자연사물이 아니라 ― 과거, 그리고 현재의 생리학적 결정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사회적 활동에 의해 창조되고 또 그 규정력을 크게 불린 또다른 사회적 존재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자본이다. 맑스는 이에 대해 《요강》에서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언급하였다:

 

자본은 적극적인 주체, 즉 과정의 주체로서의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면서 자신에 대하여 자기 증대되는 가치로서 관계한다. 즉 자본은 잉여가치에 대하여 자신에 의해서 정립되고 근거지워진 것으로서, 생산 원천으로서의 자본이 생산물로서의 자기 자신과, 생산하는 가치로서의 자본이 생산된 가치로서의 자기 자신과 관계한다. […] 자본이 새로 생산된 가치로서의 이윤을 전제된 것으로서 자기 증식되는 가치와 구별하고, 이윤을 증식의 척도로 정립한 다음에 자본은 이러한 분리를 다시 지양하고 이윤을 자본으로서의 자신과의 일체성 속에서 정립하는데, 이제 이 자본은 이윤만큼 증대되어 동일한 과정을 더 큰 규모로 새롭게 시작한다. 자신의 순환을 그림으로써 자본은 순환의 주체로 확대되고, 그리하여 확장되는 순환, 즉 나선을 그린다.[2]K. 마르크스, 김호균 역 (2000),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제3권, pp. 12-13. (강조는 인용자, 앞으로의 모든 강조는 인용자의 강조)

 

헤겔에 의해 관념론적 형태로 제출[3]헤겔 전(前) 근대철학에서 주체(Subjekt)는 단순히 인식주관을 의미하는 용어에 지나지 않았다. 헤겔은 주체에 대해, 객관의 단순한 대립물인 … Continue reading되고, 맑스에 의해 유물론적으로 그리고 혁명적으로 재정립된 변증법적 주체 개념은 자기관계하며 능동적으로 운동하는 현존을 의미한다. 자기관계한다는 것은, 그것의 정립 활동의 근원이 자기에게서 나온다는 것이며, 그것이 타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정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산 노동을 먹고 자란다. 그리고 그것은 생활적인 요인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임노동자의 존재를 전제한다. 그런데 임노동자는 다름 아닌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폭력적⋅강제적으로 생성된 현존이다. 즉 자본은 자신의 고유한 활동 속에서 임노동자를 정립하고, 그 임노동자의 노동을 통해 자기관계하는 주체적 규정성이다.[4]“노동 생산력의 증가는 보다 많은 생산물을 창출하기 위해서 보다 적은 직접적인 노동을 필요로 한다. 요컨대 사회적 부가 갈수록 노동 자체에 … Continue reading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산 노동을 먹고 자라면서 이 사회에서 지배적인 주체로 군림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체가 유기적 총체성을 스스로 구현해낼 수 없다면, 이내 그 지위를 자신의 대항자에 넘겨주어야 한다. 자본이라는 주체는, 자신을 주인된 지위로 만들었으며 또 그것을 유지하게 해 준 자신의 고유한 활동성에 의해 가상(假像)[5]가상(Schein) 또는 외양은 통속적으로 취급되는 것과 같은 단순 인식의 산물이 아니다. 흔히 우리는 가상을 ‘현실에 없는 것‘ 정도로 여기지만 … Continue reading적 지위를 가지는 자신의 대립자에게 주체의 지위를 내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과정은 1844년, 맑스의 경제학과 철학에 관한 수고에서 ‘자연사적 과정(naturgeschic htlichen Prozeß)’[6]MEW, Bd. 23. S. 16.의 일부로 간주된다. 흔히 우리는 자연사적 과정을 설명함에서 맑스가 《자본》 제1판 서문에서 매우 짤막하게 논한 부분만을 거론하는 데에 그치는가 하면, 자본주의 사회에 저항하는 실천 투쟁, 그 이후의 사회에서 인간의 주체적 활동 등을 자연사적 과정과 확연히 구분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한다.

 

자연사적 과정이라는 개념의 구체적 전모(全貌)는 이미 1844년 수고에서 매우 난해한 형태로 등장한다.[7]자연사(自然史)라는 개념은 1844년 전 문건인 《언론의 자유에 관한 논쟁(Debatte über Pressefreiheit)》, 《도벌법에 관한 논쟁(Debatte über das … Continue reading 먼저 자연사적 과정에 대한 개념 정립은 인류 역사를 물질적 존재의 역사가 아니라 사유의 역사로 간주하는 헤겔 철학을 비판하면서 전개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맑스는 수고 세 번째 노트의 『헤겔 변증법과 헤겔 철학 일반에 대한 비판』에서 헤겔의 그 관념론적 한계로 인해, 헤겔 철학과 그 학파는 인간의 몰주체성을 확정하는 철학과 학파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한다:

 

“헤겔은 부정의 부정을―그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긍정적 관계에 의해 진정으로 유일한 긍정적인 것으로, 또는 그 안에 존재하는 부정적인 관계에 따르는 모든 존재의 유일하게 참된 활동과 자신을 실현하는 행위(Akt und Selbstbethätigungsakt)로―간주함으로써, 역사의 운동에서 추상적이고 논리적이며 사변적인 표현만을 찾아내었다. 이렇게 간주된 역사는 그것의 전제된 주체로서 인간의 현실적인 역사가 아니라, 반대로 [이념의; 인용자] 인간 창조 활동, 인간의 발생사(Menschen als eines vorausgesetzten Subjekts, sondern erst Erzeugungsakt, Entstehungsgeschichte des Menschen ist.)일 뿐이다.”[8]MEGA, 1/Bd. 2, S. 401.

 

헤겔 역시 《정신현상학》에서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해 논하였으나, 맑스에게 그것 역시 절대이념의 자기 전개 활동에 불과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주체적 인간’은 절대이념에 의해 창조된, 다른 말로 “철학적 정신의 확장된 존재 양식, 그것의 자기 대상화(das ausg ebreitete Wesen des philosophischen Geiste, seine Selbstv ergegenständlichung)[9]위와 같은 출처.로 된 인간 활동에 불과하다는 것이 헤겔 철학에 대한 1844년 수고의 비판 요지였다. 맑스는 논리학에서 시작하여 정신철학에서 그 끝을 맺는 《엔치클로페디》의 체계는 추상적 정신이 어떻게 인간을 소외시키며 자신을 실현하는지에 대한 체계를 서술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맑스는 역사에 대한 헤겔 체계의 한계를 지양함으로써 역사는 자연사적 과정의 일부와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간주[10]“역사 자체는 자연사의 현실적 일부(ein wirklicher Theil der Naturgeschichte), 자연의 인간으로의 전개(des Werdens der Natur zum Menschen)의 현실적 일부이다.” (MEGA, … Continue reading한다.

 

그런데 이 자연사적 과정은 단순히 인간에 대한 자연의 규정 활동만 의미하는 게 아니다. 자연사적 과정은, 그 용어로 인해 마치 자연과 자연을 매개로 하는 사회의 수많은 규정력이 인간에게 가해지는 측면만을 의미하는 것처럼 여겨지고는 한다. 그러나 이는 반쪽짜리 진실에 불과하다. 자연사적 과정은 인간에 대한 자연의 규정 작용을 포함하는 동시에, 인간의 주체적 활동이 역으로 자연을 능동적으로 개조하는 규정 작용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수고에서 맑스의 설명을 더 음미해 보자:

 

“대지 위에 서서 모든 자연적 힘들을 내쉬는, 현실적인 신체를 지닌 인간이 자신의 외화를 통해서 자신의 현실적이고 대상적인 본질적 힘들을 낯선 대상들로 정립할 경우, 이러한 정립이 곧 주체인 것은 아니다; 정립은 대상적이고도 본질적 힘에 관한 주체성이다. 따라서 이 본질적 힘들의 활동은 대상적인 활동으로 될 수밖에 없다. 대상적인 존재는 대상적으로 작용한다. […] 대상적 존재가 대상을 만들어내고 정립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대상들에 의해 정립되기 때문이며, 그것이 본래 자연(es von Haus aus Natur ist)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정립 활동에서는 대상적인 존재가 그 자신의 “순수한 활동(reinen Thätigkeit)”을 통해 대상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대상적인 산물이 그의 대상적 활동을 확증하고 그의 활동을 대상적이고 자연적인 존재의 활동으로 확증한다.”[11]MEGA, 1/Bd. 2, SS. 407-408.

 

맑스의 설명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주체적 활동도 왜 자연사적 과정의 일부에 속할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다. 맑스의 해명에 따르면, 인간 그 자신의 “순수한 활동”이 대상에 덧씌워지는 것이 인간의 주체적 활동의 내용을 구성하지 않는다. 인간이 주체적 활동을 통해 자연을 개조한다는 것은, 그러한 인간에 의해 다루어지는 사물이 내재한 자연필연성의 힘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자연의 규정 작용이 그 어떠한 장황한 설명이 필요 없이 당연히 자연필연성―자연과학자들에 의해 숱하게 증명된 바 그대로―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듯이, 그리고 또한 그러한 과정 없이는 그것을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듯이, 인간의 주체적 활동에 의한 자연의 개조 역시 자연필연성을 거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생산 활동은 그것이 타성적―대상화나 소외로서―이든, 주체적이든 항상 자연사적 과정으로 되는 것이다. 인간의 주체적 활동 역시 대상적 활동이고 따라서 그것은 감각적인 성질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인간이 자연사물 및 생산물과 대립하는 과정 역시 자연필연성이 지니는 내용의 한계성이 그 조건으로 된다. 따라서, “짐승은 직접적인 육체적 욕구의 지배하에서만 생산하지만, 인간 그 자체는 육체적 욕구로부터 자유로이 생산하며, 그러한 욕구로부터의 자유 속에서만 비로소 진정으로 생산”[12]MEGA, Bd. 1/2, SS. 370-371. 과거에 내가 작성하였던 《변증법적 유물론과 자유》(《정세와 노동》 (2022년 7·8월호), 노동사회과학연구소 편, 63-106쪽.)의 여덞 … Continue reading한다고 할 때, 여기서 자유로운 생산 활동 역시 자연필연성의 한계성이 그것을 형성하는 조건으로 되는 것이다.

 

인간 주체의 자기관계적인 정립 활동과 자연사적 과정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더 정확히는 후자가 전자를 포괄하는, 외연적인 폭이 더 넓은 범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사를 자연사적 과정으로 간주하고, 이를 통해 인간사의 전개와 그 내용을 규명한다고 하여 그것이 곧 인간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주체성, 즉 인간의 주체적 활동은 오로지 자연필연성을 매개함으로써만 가능하며, 인간이 주체가 될 수 있는 이유도 오로지 그 필연성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즉 “자기 외부에 자신의 자연[인용자; 성질 또는 본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존재는 결코 자연적 존재라 할 수 없으며, 그런 존재는 자연의 존재에 관여할 수 없다.[13]MEGA, 1/Bd. 2, S. 408. 맑스의 1844년 수고에 따르면, ‘자연사적이지 않은 인간의 주체적 활동’이란 인간의 주관적 내용과 형식이 자연계에는 없는 필연성을 ‘창조’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부 동지들은 맑스주의의 주체 개념을 자연사적 과정과 무관한 것―즉 그것의 기반이 “자연계에는 없는 것“으로 취급되는 방식으로―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는 맑스주의를 관념론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자연사적 과정은 자연 발전의 합법칙성만이 아니라 사회 발전의 합법칙성까지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라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또한 바로 그렇기에 맑스와 엥엘스가 인간사를 자연사적 과정‘만’으로 해석하였다고 해서 맑스가 인간의 주체를 해명하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 반대로, 맑스와 엥엘스는 인간사가 자연사적 과정임을 확증함을 통해 인간이 외적 대상에 대한 주체적 지위를 얻을 수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맑스가 안넨코프에게 보낸 서신의 중요한 내용이 하나로 이어지는 자연사적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서신의 내용으로 다시 들어가 보자:

 

“모든 생산력은 하나의 획득한 힘, 과거 활동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산제력은 인간적 에너지가 적용된 결과물이지만, 이러한 에너지 자체는 인간들이 그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제반 관계(Verhältnisse) 통해서 이미 획득되어진 생산제력을 통해서, 그들보다 먼저 존재하고, 그들 자신이 창조하고 지나간 세대의 활동 결과물인 사회형태를 통해서 조건지어집니다. 모든 새로운 세대는 구세대에 의해 획득된 생산제력을 현존상태로 발견하며, 또 그것들은 그들에게 새로운 생산을 하기 위한 원료(Rohmate rial)로서 봉사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통해서 인간사에 있어 하나의 연관이 성립하며, 인간의 생산제력과 또 그에 따라 인간들간의 사회적 연관이 성장하면 할수록 그것이 더욱더 인류의 역사가 되는 그러한 인류사가 성립하게 됩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아래와 같은 결론이 도출됩니다; 비롯 개인들의 그것에 대해 의식하고 있건 의식하고 있지 못하건 간에 인간의 사회사는 항상 단지 그 사회를 이루는 개인들의 발전사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들 간의 물질적 관계가 그들 간의 모든 관계의 기초, 토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물질적 관계란 그 속에서 그들의 물질적이며 개인적인 활동이 실현되는 필연적 제 형태 이외의 아무것도 아닙니다.[14]P. W. 안넨코프에게 보내는 편지: ≪철학의 빈곤≫, p. 180.

 

그리고 한편으로 맑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새로운 생산제력의 획득과 더불어 인간은 그들의 생산양식(Produktionweise)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생산양식과 더불어 단지 이러한 특정한 생산양식의 필연적인 제 관계에 불과했던 모든 경제적 제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15]위와 같은 문헌, p. 181.

 

인간은 생산양식에 의해 조건지어지지만, 한편으로는 생산양식의 내적 모순에 의해 기존의 생산양식을 변화시키는 주체로도 된다. 두 과정은 1844년 수고에 따르면, 모두 생산양식이라는 물질적 관계, 과정의 총체가 인간의 자연적 조건을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즉 그것은 자연필연성을 관통하는, 그리고 동시에 경유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생산양식이 인간을 형성해내는 과정이든, 그리고 인간이 생산양식에 반란을 일으키는 과정이든 모두 자연사적 과정이 된다.

 

인간의 대상적 활동―소외되어 있든, 주체적이든―이 자연필연성의 표현이며, 둘은 한날한시라도 분리될 수 없음에 대해 논한 맑스의 과학적 분석은 그로부터 약 백년 후에 작성된 쓰딸린의 《소련 사회주의의 경제 문제들》(1951)에서 매우 직접적인 방식으로, 고스란히 계승되어 나타난다. 쓰딸린은 1940-50년대 쏘련 경제학계 내 일부 관념론적 편향이 “소비에트 국가와 그 지도자들은 경제학의 현존 법칙을 폐지하고 새로운 법칙을 ‘구성’하며 새로운 법칙을 ‘창조’할 수 있다”고 한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이 동무들은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다. 짐작하건대, 그들은 사람들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진행되는 자연 또는 사회의 객관적 과정을 반영하는 과학의 법칙을, 정부가 발표하며 사람들의 의지에 의하여 창조되며 오직 법률적 효력만을 가지고 있는 법령과 혼동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맑스주의는 과학의 법칙을 ― 자연과학의 법칙이거나 경제학의 법칙이거나를 막론하고 ― 사람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진행되는 객관적 과정의 반영이라고 이해한다. 사람들은 그 법칙을 발견하며 인식하며 연구하며 자기들의 활동에서 고려하며 사회를 위하여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것을 변경하거나 폐기할 수는 없다. 더 나아가, 과학의 새로운 법칙을 구성하거나 창조할 수는 없는 것이다.”[16]J. V. 스탈린, 《스딸린 선집》, 제3권, 학우서방, p. 450.

 

이러한 쓰딸린 견해는 인간의 주체적 활동 역시 대상적 활동이며, 바로 그래서 인간이 생산력을 증대시키며 자신들의 역사를 창조하는 과정이 자연사적 과정으로 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 맑스의 견해와 합치한다. 바로 다음 구절에서 쓰딸린은 위와 같은 사실이 인간에 대한 자연의 지배를 영속화하는 것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였으며, 자연에 대한 인간의 능동적 개변의 실재적 가능성도 오로지 위의 유물론적 입장을 승인할 때 비로소 논리적으로 가능한 것이 되며, 합당한 견해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17]위와 같은 문헌, pp. 451-452.

인간사가 자연사적 과정이라는 사실은 형상 또는 형식에 대한 질료의 우선성[18]헤겔은 《엔치클로페디》의 자연철학 서문에서 정반대의 인식을 보여준다: “정신적 발현은 모두 제 자신과의 자유로운 보편적 관계라는 계기를 … Continue reading을, 그리하여 논리적인 것과 이론적인 것에 대한 역사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의 우선성을 승인하는 유물론적 세계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내용이다. 인간사가 자연사적 과정이라는 것은 곧 인간 활동이 항상 물질적 관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심지어 인간의 심상(心像) 간의 관계마저 오로지 외부의 물질적인 존재와 매개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물질적 관계, 물질적인 것의 운동이 지니는 표현 형태인 자연필연성을 경유하지 않는 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다만 이것의 매개 형태에 따라 그것이 자연법칙이 되는가 하면, 또한 사회법칙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쏘련 붕괴 후 세계 각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은 자연사적 과정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는 주체 개념을 비난하고, 관념 속에서 그들만의 왕국을 세우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주체를 주관적 관념의 단순한 즉자적인 것, 직관성 정도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S. 키르게고르, K. 야스퍼스, J. -P. 사르트르, M. 하이데거와 같은 실존주의자들에 의해 시도된 바 있으며, 오늘날까지 가지각색의 부르주아 잡사상이 그들만의 ‘주체’를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이 유파는 인간의 주체성이 자연필연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부정하며, 인간 역사가 자연사적인 과정이면, 필시 그것은 인간의 부자유를 설파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고 간주한다. 두 번째는 주체의 성립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유파이다. 이러한 류의 경향은 다시 두 가지 경향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불리는 일군에 속하는 학자들인데, 이 노선은 물리학에서 관념론적 노선이 자본주의 세계의 지배적인 것이 된 후, 이 ‘성과’를 프랑스의 철학자 G. 바슐라르가 철학적으로 가공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슐라르는 《불의 정신분석》에서 체계의 안정성이란 있을 수 없음을 주장하였고, 그 ‘대안’으로 상상력을 통해 무한히 흩어지며[19]바슐라르는 불의 체계적 안정성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자신의 주장을 전개한다: “불은 전기와는 달리 자신의 과학을 찾아내지 못했다. 전 과학적인 … Continue reading, 동시에 이를 통해 창조되는 ‘상상력이 만들어낸 체계’만이 있을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를 M. 푸코, J. 데리다, G. 들뢰즈, J. -F. 리오타르 등이 활용하여 최종적으로 주체 해체의 철학을 전개[20]왜냐하면 체계의 안정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곧 주체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주체란 개별적 사실의 근저에서 자신을 전개하는 … Continue reading하였다. 두 번째 경향은 분석철학의 감각 소여 대응설이다. 분석철학자들은 자연에 의해 움직여지고, 또 자연을 지배하는 주체는 그 존재성이 증명될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근대철학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이들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을 의식 표상인 감각 소여에 한정하고 있으며, 주체라는 것도 이러한 감각 소여의 우연한 결합에 따른 복잡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21]최근에 들어서는 분석철학 내 유파인 피츠버그 학파에 의해 감각 소여 대응설과 그에 기반한 기존 분석철학의 틀이 비판받는 추세이지만, 피츠버그 … Continue reading는 주관적 관념론을 전개한다.

 

앞서 언급된 모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이다. 두 경향은 모두 강단과 여러 학술 매체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인간이 자연과 상호작용한다는 것, 인간사가 자연사적 과정이라는 것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노동계급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계급투쟁 일환이다. 왜냐하면 체계의 안정성을 부정하면 주체가 부정되고, 주체가 부정되면 형태 변환하며 자신을 불리는 자본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맑스가 구사한 《자본》의 체계와 그 변증법적 방법론은 있을 수 없는 게 된다. 또한 노동계급이라는 동일성,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이 지닐 수 있는 주체성이 모조리 부정된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대항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는 계급적 주체가 노동계급이라는 진리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 어떠한 현존재는 흩어지고 분열하여 그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혼란한 것이기에, 안정된 체계(또는 규정성)로서의 계급 또는 계급성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인간사가 자연사적 과정이라는 것을 부정한다면, 인간사는 객관적인 과정, 그리고 그 합법칙성을 알아낼 수 있는 과정으로서의 체계가 아니라, 한갓 각 개체의 주관성에 의해 이렇게도 해석될 수 있고 또한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해 버린다. 이는 노동계급이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 하에서 인류해방을 담지하고 있는 계급이라는 것이 객관적 진리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관주의에는 객관적 진리가 존재할 수 없고, 바로 그렇기에 주관주의적인 역사학에는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대한 객관적 진리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자본주의를 영속화하는 주된 정신적 수단이다.

 

언급된 모든 정치적 효과는 실제로 대중 사이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노동계급 내부에서까지 발현되고 있다. 그만큼 현재의 반동기는 노동계급에게 매우 엄중한 것임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노동계급이 대중 사이에서 물적, 정신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이데올로기인 맑스-레닌주의로 무장하여 인간의 주체성과 자연사적 과정으로서 인간사라는 두 과학적 정립을 굳게 사수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대한 적극적이고 치밀한 투쟁을 감행하여야 한다.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K. 마르크스, 강민철·김진영 역 (1988), P. W. 안넨코프에게 보내는 편지: 《철학의 빈곤》, 아침, p. 179.
2 K. 마르크스, 김호균 역 (2000),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제3권, pp. 12-13.
3 헤겔 전(前) 근대철학에서 주체(Subjekt)는 단순히 인식주관을 의미하는 용어에 지나지 않았다. 헤겔은 주체에 대해, 객관의 단순한 대립물인 인식주관(subjekt)을 넘어서, ‘자기 활동성을 지니는 규정성‘으로 고찰하였다. 물론 헤겔이 이러한 주체 개념을 정립하기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준 철학자들 ― J. G. 피히테, F. 횔덜린, J. W. V. 괴테 ― 역시 헤겔 주체 개념의 맹아를 지니고 있었다.
4 “노동 생산력의 증가는 보다 많은 생산물을 창출하기 위해서 보다 적은 직접적인 노동을 필요로 한다. 요컨대 사회적 부가 갈수록 노동 자체에 의해 창출된 노동 조건을로 표현된다는 것, 자본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적 활동의 한 계기―대상화된 노동―가 다른 계기인 주체적 노동, 즉 살아 있는 노동의 거대한 신체가 되는 방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노동에 대하여 노동의 객체적 조건들이 그것들의 범위 자체에 의해서 표현된다는 것, 그것이 갈수록 거대한 자립성을 띠게 되고 사회적 부가 거대한 분량의 낯설고 지배적인 노동 권력으로 마주 서는 것으로 표현된다는 것 이외에 다른 뜻이 있을 수 없다. 여기서 강조점은 대상화됨(Vergegenstandlichtsein)이 아니라 소외됨, 외화됨, 양도됨 ― 노동자가 아니라 인격화된 생산 조건, 즉 자본에 속하는 것, 사회적 노동 자체를 자체의 계기들 중 하나로 마주 서게 한 거대한 대상화된 권력에 속하는 것이라는 데에 있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제3권, p. 124.)
5 가상(Schein) 또는 외양은 통속적으로 취급되는 것과 같은 단순 인식의 산물이 아니다. 흔히 우리는 가상을 ‘현실에 없는 것‘ 정도로 여기지만 변증법에서 가상은 그 존재론적 기반이 존재한다. 헤겔과 맑스는 가상을 객관적인 현존재로 간주하였다. 가상은 헤겔의 《논리의 학》에서 본질과 대립을 이루며, 본질을 본질일 수 있게끔 하는 규정으로 간주된다. 《요강》에서 맑스는 생산 과정의 대립물인 유통 과정을 생산 과정에 대한 가상 범주로 간주한다.
6 MEW, Bd. 23. S. 16.
7 자연사(自然史)라는 개념은 1844년 전 문건인 《언론의 자유에 관한 논쟁(Debatte über Pressefreiheit)》, 《도벌법에 관한 논쟁(Debatte über das Holzdiebstahlsgesetz)》에도 등장하지만(MEW, Bd. 1. SS. 72, 115.), 중심 개념으로 다루는 문헌은 1844년 수고가 최초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인간의 생활양식, 인류사를 자연사적 과정으로 고찰한 것은 맑스가 등장하기 훨씬 전의 일이었는데, 18-19세기 독일 스피노자주의 학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8 MEGA, 1/Bd. 2, S. 401.
9 위와 같은 출처.
10 “역사 자체는 자연사의 현실적 일부(ein wirklicher Theil der Naturgeschichte), 자연의 인간으로의 전개(des Werdens der Natur zum Menschen)의 현실적 일부이다.” (MEGA, 1/Bd. 2, S. 396.)
11 MEGA, 1/Bd. 2, SS. 407-408.
12 MEGA, Bd. 1/2, SS. 370-371. 과거에 내가 작성하였던 《변증법적 유물론과 자유》(《정세와 노동》 (2022년 7·8월호), 노동사회과학연구소 편, 63-106쪽.)의 여덞 번째 각주에는 나의 실수로 인해 이 부분의 출처가 MEW 제1권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13 MEGA, 1/Bd. 2, S. 408.
14 P. W. 안넨코프에게 보내는 편지: ≪철학의 빈곤≫, p. 180.
15 위와 같은 문헌, p. 181.
16 J. V. 스탈린, 《스딸린 선집》, 제3권, 학우서방, p. 450.
17 위와 같은 문헌, pp. 451-452.
18 헤겔은 《엔치클로페디》의 자연철학 서문에서 정반대의 인식을 보여준다: “정신적 발현은 모두 제 자신과의 자유로운 보편적 관계라는 계기를 포함하고 있다. 정신적인 것 일반을 자연물보다 더 사소하게 여기고 인간의 예술품이 재료를 밖에서 가져와야 하고 살아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자연물보다 더 뒤에 놓는다면, 이는 마찬가지의 오해이다. 사람들은 마치 정신적 형식이 정신에 걸맞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고, 형식 일반이 질료보다 더 높은 게 아니라는 듯이 생각하며, 모든 인륜적인 것에서 우리가 질료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역시 전적으로 오직 정신에만 속해 있지 않는 듯이 생각한다. 사람들은 또한 자연에서 더 높은 것, 살아있는 것은 제 질료마저도 밖에서 가져오지 않는 듯이 생각한다.” (G. W. F. 헤겔, 박병기 역 (2008), 《헤겔 자연철학》, 제1권, 나남, p. 58.)
19 바슐라르는 불의 체계적 안정성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자신의 주장을 전개한다: “불은 전기와는 달리 자신의 과학을 찾아내지 못했다. 전 과학적인 정신의 소유자에게 불은, 화학은 물론 생물학과도 관계된 하나의 복합적인 현상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이라는 개념에서 그 전체화의 측면을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 측면은 불의 현상들을 이해하기 위해 생명에서 실체로 갔다가는 다시 실체에서 생명으로 되돌가는 식으로 끝없이 그렇게 오락가락하는 설명들의 모호성에 상응한다.”(G. 바슐라르, 《불의 정신분석》, 이학사, p. 119.) 그는 이러한 모호성, 그리고 온갖 망설임을 통합시킬 방법으로서, “은유의 은유들에 이를 것”(p. 199.)을 주장한다. 그리고 은유의 은유에 이르는 방법은 “심리학의 결정 작용들에서 벗어나며 토착적이고 자기 발생적인 세계를 구축”(p. 199.)하는 것이다. 그것은 상상력을 구축하는 것인데 그에 의하면 상상력은 “의지보다 더한, 생의 충동보다 더한 심적 생산력”(위와 같은 출처)이고, 이것은 “몽상에 의해 창조되고 한정된 존재”(p. 199.)이다. 이것은 “구성의 단일성에 대한 천진한 이상, 이기적인 이상과 단절하여, 힘의 해체(decomposition)”(p. 200.)를 불러일으키는 힘으로 된다. 이렇게 하여 바슐라르는 과학을 한갓 주관적 상상력이 정초하는 체계로 전락시켰다.
20 왜냐하면 체계의 안정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곧 주체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주체란 개별적 사실의 근저에서 자신을 전개하는 보편이기도 하며, 또한 현상과 가상의 대립자로서 본질이기도 한데, 바슐라르에 따르면, 그 어떤 것도 모두 그가 언급한 불과 같이 흩어지는 규정성에 불과하기 때문에, 더욱 보편적인 것, 더욱 본질적인 것이란 있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대상에게 지배적인 규정력을 행사하는 주체 개념은 필연적으로 부정된다. 앞서 언급한 네 명의 철학자가 바슐라르의 사상에 영향받았음은 저들 저서와 논문에서 바슐라르가 공공연하게 인용된 것만으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본문에서는 따로 다루지 않도록 하겠다.
21 최근에 들어서는 분석철학 내 유파인 피츠버그 학파에 의해 감각 소여 대응설과 그에 기반한 기존 분석철학의 틀이 비판받는 추세이지만, 피츠버그 학파 역시 헤겔의 성과를 사변적이고 지엽적인 형태로만 재가공할 뿐이다. 따라서 이들 역시 관념론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3개의 댓글

  • 잘 읽었습니다.

    자연필연성에 의해 주관독립적 객관성을 지닌 물질적 과정뿐만 아니라, 인간의 집단적 주체성 또한 근거지어지고, 조건지어진다. 자유로운 주체적 활동성은 객관적 필연성과 모순배리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에 의해 가능해진다.

    그리고 대상적 실천은 사회적 총체성 속에서뿐만 아니라, 자연사적 과정의 일부로서 자연 속에서도 이루어진다. 인간은 사회와 자연 각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도 존재하고, 사회 속에도 존재한다.

    생각건대, 인간의 대상적 실천이 전체 자연사적 과정과 일체화되어 있다는 결론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할 것 같네요..

    즉, 자연은 인간을 자신 속에 내함함으로써, 산출성과 피산출성, 정립과 피정립 사이의 모순적인 통일이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지평이라고.

    따라서, 물질적으로 통일된 자연은 다른 것에서 파생될 수 없는 불멸의 자기원인이라고.

    왜냐하면, 자연은 자신 속에서 인간을 통해 자신을 정립함과 동시에 그러한 정립행위에 의해 정립되니까.

    • 자기로부터 자기를 산출하지만, 그 산출물이 자기자신과 다르지 않고 동일하니까.

      원인과 결과가 자신 속에서 일치하니까.

      자연은 스스로 있는 궁극적인 존재론적 지평이며, 결코 소진되지 않는 영원한 절대적 총체성이다.

  • 그리고 문장이 점점 쉬워지고 읽기 편해지는 듯하여, 매우 좋습니다.

    글쓴이 님의 이전 논문들을 보면, 문장이 많이 어려운데, 점점 독자 입장에서 읽기 편해지는 듯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