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탈성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박한솔 | 회원, 민주노총 제주본부 선전홍보부장

 

* 이 글은 ‘평등교육실현을위한 학부모회’와 ‘현장과 광장’이 주최한 2022 기획 강좌 “기후 ‘위기’가 아니라 재앙이다”에서 발표한 글이다.

 

 

‘탈성장’은 무엇을 말하는가

 

지난 몇 년 사이 이른바 ‘탈성장’ 담론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탈성장이란 그 단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 ‘성장지상주의로부터 벗어나자’는 주장이다. 기후위기 문제가 전면화된 지금, 탈성장론은 꽤나 급진적인 이념으로 취급되곤 한다. 왜냐하면 이는 ‘성장 없는 자본주의’를 만들자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장’이란 국내총생산(GDP)의 성장을 말하는데, 이는 곧 자본주의적 성장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자본의 막대한 이익을 위해 상품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경제 구조의 ‘끊임없는’ 팽창을 말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성장을 목표로 하는 반면, 지구의 자연은 물리적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작금의 기후위기가 발생하였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성장을 억제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탈성장론이다.

 

그렇다면, 기후위기를 위해 탈성장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는가? 국내 탈성장 운동 단체 중 하나인 생태적지혜연구소의 장윤석 씨[1]장윤석, [기획강좌] 탈성장 “전환은 빠르게 삶은 느리게” 감속주의 편, 2020.12.7. https://youtu.be/t6-Sjh4ChdM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우선, 1) 성장의 한계를 인식해야한다. 이른바 ‘지속가능한 성장’은 결코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의 경제는 최소한 ‘현상유지’를 목표해야 하고, 나아가 지구에 악영향을 미치는 생산 부문은 과감히 정리해가면서 성장과 소비를 중심으로 꾸려진 경제 체제 너머를 전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2) ‘자율성문제다. 탈성장 측에서 말하는 자율성이란 인간이 ‘성장을 위한 성장’과 과시적인 소비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필요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자율성 문제와 관련하여 ‘코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라는 철학자의 말을 살펴보자. 카스토리아디스는 원래 트로츠키주의자였는데,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공산당의 노선과 현실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 점차 반맑스주의 기조로 선회한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를 극복한 사회, ‘탈자본주의’ 사회의 요체는 노동계급의 자율성에 있다고 한다. 생산현장에 있는 노동자들은 외부의 개입이 없다면 스스로 생산을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데, 이들이 사회를 주도한다면, 인간이 자연을 지배해서 무한히 진보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물론이고 현실사회주의마저, 이런 이데올로기를 노동자들에게 끊임없이 주입하면서 더 나은 사회(아마도 탈성장)를 향한 ‘상상력의 제약’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이라고 할 수 없는 셈이다.

 

이어서, 3) 재정치화로서의 탈성장이다. 재정치화란 말그대로 ‘탈정치화’된 사안을 다시 정치적인 사안으로 복귀시키자는 것이다. 요컨대 지금의 기후위기는 정치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인류 전체의 책임이자 사업인 것처럼 치부되는 상황이 그러하다. “인간이 지구를 망가뜨렸다”거나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 다같이 노력해야 한다” 등의 말을 우리가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유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기후위기를 야기한 자들이 책임을 회피하는 데 불과하다. 이는 타당한 관점이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 일회용품을 아무리 많이 소비한다고 한들, 결국 이 플라스틱들의 생산과 시중으로의 유통은 오롯이 자본에 의해 조정, 통제된다. 자본은 이윤이 될 것 같으면 생산을 멈추지 않는데, 개인적 차원에서 몇몇 상품의 소비를 줄여 수요를 감소시킴으로써 자본의 이윤 창출 욕구를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자본은 사회적 필요와 노동자들의 구매력을 초과할 만큼 과도하게 상품을 생산한다. 이 과정에서 자본이 환경을 생각하리라는 기대를 하기도 어렵다. 물론 과소비를 하는 사람들이 기후위기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작금의 기후위기에 자본과 동일한 수준의 ‘연대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 책임 소재를 추궁하는 과정은 당연히 정치적이다. 정리하자면, 탈성장론자들은 경제성장과 기후위기 극복이 함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지속가능한 성장’이 기후위기를 비정치적인 문제로 만들고 있다고 보고, ‘탈성장’이라는 구호를 바탕으로 작금의 기후위기를 정치화하려 시도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탈성장은 4) 기후위기의 원인이 자본주의에 있음을 인정한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유력한 대안이 탈성장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탈성장론은 자본주의가 야기한 각종의 환경 문제를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으로부터 파악하지 못한다는 결정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끝으로 나와있는 것들은, 5) 탈성장으로 이행하기 위한 여러 실천 방안들이다. 생태적지혜연구소는 ‘다시 땅으로’라는 운동을 탈성장 이행 과제로 설정한다. 이는 ‘소농 사회’로의 회귀 운동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건 환경을 오염시키는 데다, 극심한 피로사회로 사람들을 내몰고 있으니 다시 소규모 공동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생태적지혜연구소’는 이 사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탈성장의 행동주의 노선 중에서 ‘다시 땅으로’ 운동이 탈성장 행동의 핵심이다. 자급자족하는 삶, 임금으로부터 자유로운 삶, 생태적 삶, 지속가능한 삶. 탈성장의 이념에 철저하게 부합되는 삶의 모습이란 소농의 삶으로 검증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원, 농지를 가꾸는 개인의 주체야말로 성과주체를 극복하고 타자와 시간을 매 순간 느끼는 경험을 누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68혁명기 히피들의 탈주선으로 선택되기도 했던 ‘다시 땅으로’ 운동은 반소비주의, 반화폐주의, 공동체 건설 등 실천 가능한 모습으로 탈성장 사회의 조각을 지금-여기에 실현할 수 있듯,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 텃밭을 일구길 바란다. 텃밭에서 땀을 흘리며 피로한 주체를 단련하고 자연이 주는 성과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란다.”[2]두더지, “다시 땅으로” : 탈성장으로 가는 사회와 개인의 과제, 생태적지혜연구소, 2022.

보다시피 낭만주의적 경향이다. ‘문명과의 거리두기’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이런 관점이 갖는 문제점은, 기후위기의 원인이 기술의 자본주의적 활용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생산력의 발달과 그에 따른 기계문명의 발달 자체로부터 파악한다는 점이다.

 

 

탈성장 관점에서 본 기후위기의 원인

 

탈성장론은 기후위기의 원인이 자본주의에 있음을 인정한다. ‘탈성장’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프랑스의 정체생태학자 앙드레 고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구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물질 생산에 있어서 무성장, 나아가 탈성장이 필요조건이다. 그렇다면 지구의 균형은 자본주의 시스템과 양립할 수 있는가?”[3]권승문, 〈탈성장: 녹색성장과 그린뉴딜을 넘어〉, 《에너진포커스》 99호,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2020.6.30. 사실 “지구의 균형은 자본주의 시스템과 양립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의식은 꽤나 중요하다. 이는 ‘자본주의가 환경을 파괴하지 않고 무제한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견해보다 진일보한 것이기도 하다. 작금의 기후위기는 자본의 탐욕과 성장지상주의가 원인임을 인식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진영의 입장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탈성장론이 갖는 한계 또한 바로 여기서 나온다. 탈성장론은 자본주의로부터 ‘성장’이라는 목표를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성장이란 물론 이윤 중심의 생산을 멈추자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는 자본주의의 존재 근거를 침해한다. 자본주의가 성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육식동물이 다른 동물을 사냥하지 않는 상황과 유사하다. 사냥을 하지 않으면 육식동물은 굶어 죽어야 한다. 물론 인간이 육식동물에게 먹잇감을 제공한다면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이건 무의미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 육식동물은 다른 동물을 사냥해야 한다. 그것이 생존기계로서 육식동물의 본성이고, 생태계의 법칙이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 자본주의는 존재 근거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성립할 수 없다. 육식동물과 달리 자본은, 자신이 직접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는 한(즉, 상품을 필요를 넘어 과잉생산하지 않는 한) 이윤을 대신 물어다 줄 외부의 존재도 없다. 결국 자기 존재 근거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본주의에게 남는 선택지는 하나 뿐이다. 지금처럼 무제한적인 생산과 탐욕을 이어가면서 지구와 함께 종말을 맞이하는 것이다. 샤낭이 맹수의 본성이듯 ‘성장’은 자본주의의 본성이다.

 

 

성장지상주의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때문에 성장지상주의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자본주의 자체를 폐지하는 일과 분리될 수 없다. 하지만 탈성장론은 이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가능한가? 이들은 자본주의가 성장지상주의에 ‘의해’ 지탱된다고 간주한다. 즉, 자본주의는 성장에 대한 무한한 욕망으로인해 파국으로 치닫고 있으므로, 이러한 관념을 지양한다면 성장 일변도의 경제 체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사회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이 아니다. 사회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은 인간의 의식에 앞서 ‘물질’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데서 출발한다. 인간의 의식, 사상, 사고방식은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타날 만한 물질적 기초 위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탈성장론에 의하면, 우리는 대상(자본주의)에 대한 관점(성장지상주의로부터 벗어나기)을 달리하면 대상의 성격(기후위기를 야기하는 무제한적 생산)마저 바꾸어낼 수 있다. 이는 당연히 불가능한 발상이고, 몽상이다. 이처럼 탈유물론에 기초한 탈성장 논의는 성장주의의 물질적 토대라는 문제를 간과하여 성장주의의 원인을 찾는 정치경제학적 분석을 부차적인 요인으로 보는데, “그 결과 탈성장 논의는 경제 중심주의, 성장 중독주의의 증상을 여러 측면에서 폭로를 하지만 그 이상의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4]김민정, 〈탈(脫)성장 논의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진보평론》 80호, 진보평론, 2021.

 

그렇다면 ‘성장지상주의’는 어떤가? 역사상 자본주의의 탄생 이전에도 지금과 같은 ‘성장지상주의’는 존재했을까? 성장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는 자본주의 이후에나 나타난 현상이다. ‘성장’에 대한 욕구도 결국 한 사회의 생산력 수준에 근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막대한 이윤을 가져다줄 수 있는 기계제 대공업이나 첨단기술이 존재하지 않던 사회에서 성장에 대한 욕구는 지금에 비하면 훨씬 낮았다. 이는 인간이 자연을 인식하고 활용하는 능력이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유를 하자면, 시험에서 백점을 맞았을 때 우리는 ‘만점’이라고 하고, 주차장에 자리가 다 찼을 때 ‘만차’라고 하는데, 이건 옛날 사람들이 ‘1만’ 이상의 수를 상상하기 어려웠던 사정과 관련되는 관용구이다. 물론 과거에도 1만 이상의 단위는 당연히 존재했지만,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웠을테니 막연히 ‘1만’이 가장 큰 단위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가장 큰 수로 1만을 연상하는 조선시대 사람들과, 만원으로는 밥 한 끼 사먹기도 어려운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욕구 수준은 천양지차다.

 

지금과 같은 ‘무한한 성장’에 대한 신뢰는 산업혁명 시기를 거치면서 비로소 나타났다. 기계제 대공업의 발달과 과학기술혁명의 결과, 이전 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단시간 내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신’이 주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자연(세계)은 인간에 의해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대상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이전 시대에 상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성과들이 터져나오면서 ‘무한한 성장’이라는 신화가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본주의에서 ‘성장지상주의’만 제거하겠다는 주장은 공상적으로 들린다. 초기의 ‘성장 신화’는 자본주의적 토대 위에서 나타났고, 현재는 자본주의를 유지존속시키는 데 기여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자본주의는 이윤의 무제한적 축적, 즉 끊임없는 ‘확대재생산’을 통해 유지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상품이 단순히 돌고 도는 구조가 아니다. 상품을 판매하여 이윤을 얻으면, 자본가들은 더 큰 이윤을 얻기 위해 생산수단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려 한다. 여기에 마찬가지로 이윤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다른 자본과의 경쟁도 동반된다. 이처럼 이윤에 대한 무한한 추구와 극심한 경쟁이라는 조건은 성장지상주의를 만들어내는 토대이고, 이것이 자본주의의 핵심 동력이다.

 

한편 경제가 성장하지 않는다는 말은 곧 자본증식을 할 수 없다는 것, 즉 자본이 자본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전제조건을 없애는 것이고, 이는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에 커다란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한번 상상해보자. ‘모든’ 자본이 ‘남기기 위한’ 생산을 중단하고 ‘필요’에 따른 생산을 하는 자본주의를 말이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필요한다. 즉 자본가는, 노동자가 제공한 노동력으로부터 창출된 이윤을 모조리 노동자에게 돌려주거나, 자본가 스스로의 생활을 위해 전부 소진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야만 자본주의에서 ‘성장’이 사라질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가정은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자본가가 이윤을 포기하고, 성장을 하지 않는데도 유지되는 ‘자본주의’ 말이다. 이런 가정은 무의미하다. 어떠한 가능성도 현실성도 없는 공상에 불과한 것이다.

 

 

국가권력에 맞서지 않고 탈성장이 가능한가?

 

한편으로 탈성장론은 자본주의 체제를 바꾸려는 제법 급진적인 시도로 보이지만, 그 수단으로서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뚜렷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탈성장을 위한 실천 과제로 내놓은 것들(생산의 축소/복지제도 확대/화폐와 신용제도의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시키는 ‘물질적 힘’, 즉 국가권력과의 투쟁이 반드시 필요하다. ‘복지제도의 확대’와 같이 자본주의 존립 근거를 훼손하지 않는 몇몇 개량적 요구의 경우, 강력하고 조직된 노동계급이 존재한다면 국가를 상대로 쟁취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탈성장’은 복지 확대 요구와는 결이 다른 문제이다. 자본가들에게 이윤에 대한 탐욕, ‘축적을 위한 축적’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윤에 혈안이 된 자본가들로서는 ‘절대로’ 수용할 수 없는 요구이다. 그럼에도 탈성장론자들에 따르면 탈성장 사회로 가기 위한 정치는 국가 전복이나 자본의 파괴를 요구하지 않는, 왜냐하면 성장 물신주의에 따라 유지되는 이데올로기와 사회구조를 근저에서부터 거부[5]김민정, 위의 논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실현 불가능한 발상이다. 탈성장이 기후위기 문제를 ‘정치화’하는 시도의 일환이라면, 마땅히 정치권력의 획득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하지만 탈성장론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 제대로 된 해명을 내놓지 못했다.

 

국가는 지배계급의 지배를 실현하는 폭력기구이다. ‘주권재민’의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인가? 재벌 총수에게는 가벼운 처벌을 내리는 반면, 파업 노동자에게는 수백억 규모의 손배가압류를 명령한다. 노동자들의 요구에 비해 대폭 후퇴된 채로 제정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그마저도 정부의 시행령 개악 시도로 무력화할 위기에 처했다. 얼마 전 많은 희생자를 낸 이태원 참사에서도, 정부는 ‘공공부문 민영화 반대’를 외치는 노동자들의 시위를 막기 위해 엄청난 양의 경찰력을 투입한 반면, 참사 몇 시간 전부터 도움을 요청하던 이태원의 시민들을 위해서는 노동자 집회에 훨씬 못 미치는 극소수의 인원만 보냈다. 이러한 모습에서 국가는 본질적으로 극소수 자본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탈성장 측에서 국가권력을 쟁취하는 문제는 회피하면서도, 국가의 공적 기능을 확대하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국가와 자본은 ‘구조적 상호의존 관계’”이며 “(…)국가의 자율성은 국내의 자본축적 요구를 어떻게 수행할지에 관한 제한적 자유‘만’을 허용”할 뿐이다.[6]김민정, 위의 논문. 자본주의적 생산을 폭력으로써 유지하고, 극심한 환경파괴를 부추기는 구조가 ‘자본가들의 국가’에 의해 지탱되는 이상, 국가권력 문제를 부차화하는 탈성장 담론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자본주의는 자연에 대한 파괴,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없다면 유지될 수 없는 사회이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 자체를 지양하지 않는 ‘탈성장’이라는 개념은 국가권력의 문제를 회피하는 것과 다름없다. 탈성장론자이자 맑스엥겔스전집(MEGA) 편집위원인 사이토 고헤이의 주장은 이러한 비판을 뒷받침한다. “사이토 고헤이나 요르고스 칼리스는 지역 협동조합을 통한 ‘커먼(common, 공공재)’의 공동체적 소유를 주장”하는데, 이들은 “‘커먼’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을,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우회한 채, 시민들의 자발적인 상호부조와 협력을 통해 충분히 달성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7]김요한, 〈탈성장, 사회주의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담론일까?〉, 《가자! 노동해방》, 노동해방투쟁연대, 2022.6.30., … Continue reading한다. 나아가 고헤이는 “‘커먼’을 관리할 때 반드시 국가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8]김요한, 위의 글.고까지 주장한다. 이처럼 탈성장론은, 노동자와 자연에 대한 착취적·약탈적 경제구조를 지탱하는 자본가계급의 국가권력을 어떻게 타도할 것인지, 노동자계급이 국가권력을 어떻게 장악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회피 내지는 등한시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기후위기 문제를 풀어내려면 결국 이 사회의 물질적 생산을 책임지고, 거듭되는 환경파괴 속에서 불안정한 삶을 이어가는 계급, 즉 사회를 변혁할 강력한 유인을 가지고 있는 노동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하여야 한다. 다만 여기서 노동계급의 국가권력 장악이란, 기존 지배계급의 국가를 그대로 인수하여 자기 목적에 따라 사용한다고 이해하여서는 곤란하다. 레닌에 따르면, “우리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피억압계급의 잠정적인 독재가 계급을 폐지하는 데 필수적이듯이, 착취자에 대항하여 국가권력의 도구와 원천들과 수단들을 잠정적으로 사용해야”[9]레닌, 《국가와 혁명》, 김요한, 위의 글에서 재인용. 할 뿐이다.

 

 

결론

 

이렇게 탈성장론의 관점을 간략하게나마 알아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탈성장론은 자본가계급의 이데올로그들이 주장하는 ‘녹색 자본주의’, 즉 ‘그린뉴딜’[10]그린뉴딜은 ‘그린(green)’과 ‘뉴딜(New Deal,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1930년대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추진한 일련의 경제정책)’의 … Continue reading이나 ‘저탄소 녹색성장’[11]화석연료 사용 비중을 낮추고, 친환경에너지 사용 비중을 높이면서 경제 개발을 도모하는 일. 여기서 ‘녹색성장’이라는 개념은 2000년 1월 … Continue reading과는 얼마나 다른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는가? 사실 양자의 유사성에 관한 문제는 예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몇몇 탈성장론자는 양자의 유사성을 인정하기도 한다(그림1 참고).

 

<그림 1> 탈성장과 그린뉴딜의 차이는 수출과 소비의 감소,
부유세 신설 등 미미한 차이에 불과하다. (출처-각주1과 동일)

 

이를테면 ‘그린뉴딜’ 등 자본주의의 보다 신실한 지지자들은, “전 세계 GDP의 1.5~2%를 에너지효율 향상과 재생에너지 확대에 투자하면 기후위기를 막을 수 있고, 전 세계 대중의 생활수준을 높일 뿐 아니라 일자리도 창출하는 효과적인 프로그램”인 반면, “탈성장론자들은 기후변화 이슈에 관해서는 실행 가능한 안정적인 정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12]권승문, 위의 글. 그런데 사실, 이들은 탈성장론자와 거의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칼리스는 지난 2019년 미국 의회에 제출된 ‘그린뉴딜 결의안’에 대해 “재생에너지뿐만 아니라 건강, 주택 및 환경 인프라에도 자금을 투입하고, 여기에는 경제 보장, 직업 보장 및 기본소득 계획과 유사한 조항이 있으며, 이는 성장 없이 복지를 보장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항”이라며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13]상동. 해당 결의안에는 이른바 ‘정의로운 전환’을 통한 온실가스 감축 제로 달성, 수백만 개의 일자리 창출, ‘지속가능한’ 환경 보장 등의 내용이 담겨 있는데, 이는 자본주의가 야기한 기후재앙을 극복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낮은 수준의 대응이다.

 

무엇보다도 ‘탄소배출 제로’를 달성하는 동시에 ‘수백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주장은 현실성이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자리는 그냥 만들고자 하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당연히 자본의 이윤과 연관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가 체제 모순으로 인한 만성적인 경제 위기 속에서, 떨어지는 이윤율로 고심하는 이 시기에, 자본이 아무런 이유 없이 일자리를 수백만 개씩이나 만들 이유가 없다. 더군다나 AI의 발달과 자동화의 진척으로 그나마 고용 중이었던 노동자들도 거리로 쫓아내고 있다. 이윤이 되지 않는 고용을 하고, 심지어 재생에너지처럼 ‘돈이 안되는 사업’을 위해 수백만 개의 일자리를 제공할 자본은 세상에 없다. 그간 자본가계급이 반복해왔던 뻔하고 허황된 주장을, 자본주의에 비판적이라고 알려진 탈성장론자 칼리스가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결국 탈성장론이 그 의도야 어찌되었든지 간에, 객관적으로 자본주의의 유지·존속에 기여하는 이론임을 증명하는 셈이다.

 

자본주의가 기후위기를 만들어 낸 주범임을, 자본주의와 환경은 서로 보폭을 맞출 수 없다는 점을 인식했다고 한들, 이러한 탈성장론의 관점은 좋게 말해서 선의이지만, 당면한 기후위기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하는 공리공담에 그칠 가능성이 농후하다. 기후위기는 자본주의 하에서 필연이며,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가계급의 국가권력에 의해 폭력적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장윤석, [기획강좌] 탈성장 “전환은 빠르게 삶은 느리게” 감속주의 편, 2020.12.7. https://youtu.be/t6-Sjh4ChdM
2 두더지, “다시 땅으로” : 탈성장으로 가는 사회와 개인의 과제, 생태적지혜연구소, 2022.
3 권승문, 〈탈성장: 녹색성장과 그린뉴딜을 넘어〉, 《에너진포커스》 99호,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2020.6.30.
4 김민정, 〈탈(脫)성장 논의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진보평론》 80호, 진보평론, 2021.
5 김민정, 위의 논문.
6 김민정, 위의 논문.
7 김요한, 〈탈성장, 사회주의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담론일까?〉, 《가자! 노동해방》, 노동해방투쟁연대, 2022.6.30., http://nht.jinbo.net/bbs/board.php?bo_table=online1&wr_id=1171
8 김요한, 위의 글.
9 레닌, 《국가와 혁명》, 김요한, 위의 글에서 재인용.
10 그린뉴딜은 ‘그린(green)’과 ‘뉴딜(New Deal,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1930년대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추진한 일련의 경제정책)’의 합성어로, 환경과 사람이 중심이 되는 지속 가능한 발전 정책을 뜻하는 말이다. 즉, 기후변화 대응·에너지 전환 등 환경에 대한 투자를 통해 경기부양과 고용 촉진을 끌어내는 정책을 말한다. 이는 기존 경제·산업 시스템에 대한 대변혁으로, 저탄소 경제구조로 전환하면서 기후위기와 환경문제에 대응하는 것이다(네이버 지식백과).
11 화석연료 사용 비중을 낮추고, 친환경에너지 사용 비중을 높이면서 경제 개발을 도모하는 일. 여기서 ‘녹색성장’이라는 개념은 2000년 1월 <이코노미스트>지가 최초로 언급하였고, 스위스에서 열리는 다보스포럼(Davos Forum, 세계경제포럼)을 통하여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2005년 아·태 환경과 개발에 관한 장관회의(MECD)에서 ‘녹색성장을 위한 서울 이니셔티브(SI)’가 채택되어 UN 아·태 경제사회위원회(UNESCAP) 등에서 논의가 본격화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12 권승문, 위의 글.
13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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