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번역]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비나치화” 할 수 있는가

 

번역: 김병기(편집위원)

 

* 이 글은 “Is Russia capable of “Denazifying” Ukraine?”, Politsturm, 2022. 8. 5.(<https://us.politsturm.com/is-russia-capable-of-denazifying-ukraine/>)의 번역이다.

 

 

러시아 연방은 “특별군사작전”의 목표 중 하나로 우크라이나의 비나치화를 선언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사용되었던 이 소비에트 용어는 국가의 민주적 변혁을 수행하기 위해서, 파씨즘 정권 지배의 잔재인 독일의 국가, 사회-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생활을 정화하기 위한 조치들을 의미한다.

러시아 당국의 수많은 모순된 성명서들로 판단할 때, 우크라이나 사회와 국가 기관의 극우적이고 노골적인 파씨스트 요소들은 “정화(청소)”되어야만 한다. 그러한 기치를 내걸면서, 그들의 행동을 파씨즘에 대한 투쟁으로 제시한다. 선전물은 소비에트 인민의 위업과 러시아의 역사적 사명 -파씨즘과 나치즘에 대한 투쟁– 을되풀이해서 자랑스럽게 떠든다.

그러나, 러시아가 20년 이상 점차적으로 비 공산화 과정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소련과 달리, 현대 러시아가 하나의 자본주의 국가라는 것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비나치화를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I. 파씨즘과 나치즘의 뿌리

 

일단 우크라이나의 나치즘과 파씨즘을 정화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먼저 무엇이 파씨즘이고 나치즘인지를 밝혀내는 것이 필요하다.

나치즘은 파씨즘의 형태 중 하나다. 파씨즘은 자본주의 국가 조직의 특정 형태이다. 잘 알려진 불가리아 공산주의자 디미트로프(Dimitrov)의 정의에 의하면, 파씨즘은 금융자본의 공개적인 테러 독재이다. 또한, 파씨즘은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특징도 있다:

-노동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극단적인 형태의 폭력 사용;

-광신적인 애국주의와 인종차별주의;

-경제를 규제하는 국가-독점적인 방식의 광범위한 사용;

-“독재적인” 정부, 즉 어떤 식으로든 국민에 의해서 통제되지 않는 정부;

-시민의 공적 그리고 사적 생활의 표명에 대한 최대 한도의 통제;

-착취체제를 위해 민족주의와 사회적 선동으로 대중을 동원하고 정치적으로 활동하게 하는 능력.

 

지금까지 언급된 내용에 전투적인 반-공산주의도 추가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의 정치적 사상과 국가 체제인 파씨즘에서 가장 중요한 입장은, 목소리를 내는 특징 외에도, 공산주의에 대한 비타협적인 투쟁이다.

파씨즘 등장의 역사적 조건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기로,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결성,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혁명적인 운동의 성장과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파씨즘은 혁명적인 노동운동에 대한 대 자본의 대응이다.

파씨스트 정권 수립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분명히 우리는 한가지 공통점에 주목할 것이다. 그것은 대자본과 긴밀한 파씨스트가 권력을 잡기 바로 직전에, 국가적으로 심각한 정치적ㆍ경제적 위기 그리고 혁명적 정서의 상승이다.

 

1920년대 상반기 이탈리아의 상황 – 파씨즘이 하나의 정치사상으로 유래된 역사상 최초의 파씨스트 국가. 종전 후에, 그 나라는 어려운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었고, 모든 고난은 노동자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이탈리아의 실현되지 않은 영토 요구는 불평과 혁명적 정서의 성장에 기여했다: 협상 동맹국은 그들을 불만족스러운 상태로 내버려 두었다. 이탈리아 사회는 전쟁에서 막대한 인적 손실을 경험했고, 그 결과 상당한 빈곤을 겪었으며, 계급 모순으로 분열되었다. 특별히 10월 혁명의 승리와 소비에트 정부 활동의 영향으로, 노동자 운동은 빠르게 성장했고 정치화되었다.

마침내, 소위 “붉은 2년”이 도래했다: 노동자들이 대중 파업을 조직하고, 공장과 공장을 점유하고, 노동자 평의회를 만들었던 노동운동의 상승기. 사실상, 혁명적 상황이 이탈리아에서 발전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유명한 “로마 행진”이 일어난다 – 무솔리니의 파씨스트 당원과 그 당의 준 군사 조직(“블랙 셔츠”의 파견대)이 이탈리아 수도로 이동. 그것의 결과로 파씨스트는 권력을 잡았다.

 

1930년대 독일의 상황: 전쟁으로 매우 황폐해진 나라, 초인플레이션 공포(1921-23년), 심각한 정치적 위기, 독일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엄청난 성장과 독일 공산당의 영향. 독일과 서구 자본의 공개적인 지원으로, 히틀러 나치는 정확히 공산주의와의 격렬한 투쟁 중에 권력을 잡았다. 이 투쟁은 20세기의 20년 내내 가라앉지 않았다.

알다시피, 1919년에, 독일 부르주아는 프라이코프(Freikorps)[1]자유 연대 (Free Regiment)라는 의미. 주로 지원병, 탈영병, 변절자 등으로 구성되었다.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에, 특별히 독일 혁명 (1928-19) 기간에 … Continue reading 준 군사 조직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유혈 진압했다. 그 이후에, 확립된 민주 체제를 보존하기 위해서, 독일 부르주아는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Bavarian Soviet Republic)을 무너뜨리고, 독일 공산주의자 지도자였던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를 살해하는 것으로 “자신의 활동을 제한했다”. 30년대 초까지, 공산주의자와 우익 사이에는 주기적인 충돌이 있었다.

그러나 10년이 조금 지난 후, 독일 자본의 상황이 다시 악화되자, 매우 공격적인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이 권력을 잡는다. 1933년 1월, 히틀러는 독일 제국 수상으로 임명되었다. 2월에는, 극단적인 정치적 규제가 도입되었고 (독일 공산당의 활동 금지를 포함해서), 라이히스타그 의회 방화 사건으로 (The arson of the Reichstag)[2]1933년 2월 27일에 일어난 의회 화재사건. 나치와 민족주의자 동맹은 그 화재를 공산주의자가 국가를 타도하기 위한 준비된 폭동이라고 비난하고 … Continue reading 공산주의자들은 기소되었다. 나치는 빠르게 권력을 장악했고, 라이프치히 과정 동안 공산주의자들을 공공연하게 비난했고, 혁명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스페인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파씨스트 프랑코 정권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자, 좌익 정당과 공산주의자 연합이었던 인민전선(Popu lar Front) 정부와의 공개적인 무장 충돌, 즉 1936-39년의 스페인 내전 시기에 수립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씨스트 정권뿐만 아니라 스페인 자본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프랑코 파씨스트는 치열한 전투 중에 연합 정부를 무너뜨리고, 반대자들에게 가장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또 하나의 파씨스트 정권이 스페인에 수립되는데, 이는 이탈리아와 독일 정권들보다 더 오래 지속된다.

 

다른 많은 파씨스트 정권이 세워졌던 역사적 조건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파씨스트 쿠데타에는 언제나 혁명적인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맹렬한 증오 그리고 대자본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이 수반된다.

유사하게, 현대 파씨스트도 공산주의자를 “문명사회에 대한 주요 위협”이라고 부른다. 모든 나라의 극우 정당, 운동 그리고 단체는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열렬한 반 공산주의에 근거해서 그들의 이념을 세우고, 대자본의 대표들과 유대를 맺으면서 재정 지원을 받고, 이런저런 형태로 지배계급의 이해를 보호하는 데에 이용된다. 이로부터 파씨즘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1. 파씨즘은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2. 공산주의자의 지도와 인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으면서, 자본주의 타도와 소비에트 권력의 확립을 위해 혁명적으로 싸우는 노동자 운동에 의해서 그들의 지배력이 위협을 받는 시기에, 자본가는 마지막 수단으로 파씨스트 정권의 수립에 의지한다.

 

국내적으로, 파씨즘의 목표는 노동자와 공산주의자 운동을, 그리고 외교 정책에 있어서는 사회주의 국가, 다른 제국주의자 세력과 종속국을 겨냥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파씨즘은 독점 단계에 있는 자본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 한 마디로, 파씨즘은 자본주의의 자연적인, 그리고 역사적으로 제약을 받는 산물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폐지하지 않고,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파씨즘을 물리치는 비나치화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민을 불평등한 적대 계급으로 분열시키고, 계급 투쟁을 불러일으키는 착취와 약탈 체계의 근원을 보존한다는 것은 파씨즘의 근원을 보존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더 깊어질수록, 즉 자본주의의 모순과 노동 해방을 위한 노동 인민의 계급 투쟁이 더 격렬해질수록, 파씨즘화의 과정은 더욱 강하게 진행될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점점 더 파씨스트 독재로 퇴보한다. 대자본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연막을 포기하고, 테러리스트 방식의 독재로 이행하는 시기가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코민테른 제 7차 총회 보고서에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Georgy Dimitrov) 자신의 발언을 상기하는 것은 적절하다: “파씨즘 승리의 특징은 바로 이 승리는… 노동계급의 단결 투쟁의 실현을 무서워하고, 혁명을 우려하고, 그리고 더 이상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의회주의라는 낡은 방식으로 대중에 대한 그들의 독재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부르주아 자신의 나약함을 나타내고 있다”

파씨즘과 나치즘을 완전히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런 심오한 변혁이 없다면, 비나치화에 대한 어떤 말도 그냥 말로만 남아있을 것이다.

 

 

II. 러시아는 예외인가?

 

현대 러시아는 예외인가? 위대한 애국 전쟁, 소비에트 교육 그리고 러시아 문화는 파씨즘에 대한 보호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따라서, 러시아는 비나치화를 수행할 수 있을까?

현대 러시아 연방은 일반적인 자본주의 국가이고,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챌 수 있는 징표들이 있다. 독점 자본 권력이 지배하는 그 국가에는 사유재산과 함께 직ㆍ간접적인 방법으로 가장 가혹하게 착취당하는 임금 노동이 존재한다.

러시아는 소련의 업적과 상징 그리고 “승리한 인민”의 이미지 등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있지만, 1991년 이래로 지배계급은 점차적으로 비 공산화를 진행시키면서, 이데올로기, 철학, 교육, 문화 영역에서 공산주의 유산들과 싸우고 있다.

소비에트 권력의 적들, 즉 솔제니친(Solzhenitsyn)[3]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nitsyn, 1918-2008) 공산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과 소련의 정치적 탄압에 대한 비난으로 유명한 소련 소설가. 붉은 … Continue reading, 일리인(Ilyin)[4]세르게이 도블라토프 (Sergei Dovlatov, 1941-1990) 러시아 변호사, 종교ㆍ정치 철학자, 군주제주의자. 카데트 당 (Kadet Party) 우파를 지지. 10월 혁명을 … Continue reading, 도블라토프(Dovlatov)[5]도블라토프 (Sergei Dovlatov, 1941-1990) 20세기 후반에 서방 세계에 널리 알려진 러시아의 언론인이자 작가. 1976년에 반 정부적인 작품 활동으로 소비에트 … Continue reading, 브로드스키(Brodsky)[6]조셉 브로드스키 (Joseph Brodsky, 1940-96). 러시아 시인이자 수필가. 1972년에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1987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등의 대중화에 의한 반공산주의 확산; 영화와 문학에서의 반 소비에트적인 이야기의 확산; 혁명과 소련의 역사를 헐뜯고, 실제 역사를 음모론으로 바꿔버리는 다큐멘터리 제작; 공산주의 상징들에 대한 투쟁: 거리 이름 바꾸기, 기념비 철거, 소비에트 상징물 부수기, 5월 9일에 레닌의 능묘를 판지로 덮기. 마지막으로, 정치인과 언론인 뿐만 아니라 대통령 자신의 열렬한 반 공산주의 성명. 이렇게 충분한 사실들이 있다.

따라서, 러시아 부르주아는 체계적으로 공산주의와 싸우고, 그것을 왜곡하고 불신한다. 자본주의 러시아에서, 공산주의는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적대적인 사상이다. 공산주의는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곤경과 억압된 상황에 대한 이유를 설명한다. 착취의 실체를 밝히고, 사회생활의 사실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발전 법칙을 알려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계급 투쟁을 통한 노동 해방과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에 관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 세계의 자본가들과 그들의 대리인들은 공산주의를 증오한다. 이러한 이유로, 러시아 연방의 부르주아는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말로만 파씨즘을 반대하고, 비나치화를 선언한다.

사실, 노동자와 공산주의 운동과 싸우는 하나의 방법으로써, 러시아 부르주아는 언제나 자신의 위치를 보존하기 위한 하나의 유망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써, 파씨스트와 극우파를 이용하거나, 심지어는 파씨스트 정권을 직접 수립하는 것 조차도 염두에 둘 것이다. 이 경우, 현대 러시아 국가에서 소비에트 과거는 절대적으로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다.

소련의 이념적 유산과 위대한 애국 전쟁에 대한 기억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왜곡되고 경멸당한다) 어떤 식으로든 극우파의 이용과 파씨즘 정권으로의 퇴보를 막을 수 없다. 이것은 이념적인 태도가 아니라, 객관적인 사회-경제적 과정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현대 러시아에서 이것을 관찰할 수 있다.

러시아는 공산주의 이념을 보수주의, 민족주의, 종교 그리고 부르주아 애국주의로 대체한다. 공산주의 상징과 의미를 혁명 이전의 상징과 의미로 대체하고, 혁명적인 소비에트 인물을 폄하한다. 반대로, 짜르 시대의 인물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높이고 이상화 한다.

 

자본은 끊임없이 우익과 극우 인사들을 먹여 살린다. 누구나 “정통 과두정치” 콘스탄틴 말로페예프 (Konstantin Malofeev)와 그의 집단인 “양두 독수리(Double-headed eagel)[7]제국과 (Empire) 관련된 문장 및 도형. 신성 로마와 러시아 제국에서 사용되었다.”의 대중 활동을 알고 있다. 당국은 공개적인 그들의 백위대 선전 활동을 막지 않았고, 심지어 유튜브가 그 과두 정치인이 소유하고 있는 언론매체인 차르그라드 채널(Tsargrad channel)을 차단했을 때조차도 그들을 옹호한다. 당국은 출판물 “블랙 헌드레드”(Black Hundred)[8]20세기 초 러시아의 반동적인 군주제 주의자와 극우 민족주의자 운동. 전제 군주국을 절대적으로 지지., 민족주의 언론매체인 “스푸트니크와 포그롬”(Spunik and Po grom), “유라시안니즘”(Eurasianism) 변론가인 뒤긴(Dugin)[9]알렉산드르 뒤긴 (Aleksandr Dugin, 1962~). 정치 분석가, 철학자. 1980년대부터 반 공산주의 활동을 시작. 소련 해체 이후에 민족적 볼셰비즘을 옹호하는 민족 … Continue reading 등과 같은 노골적인 파씨스트들의 활동을 정지시키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정부는, 간부 직원을 통해, 국내외 정책에서 그들의 아이디어를 홍보하고 실행한다.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 (Vladislav Surkov) 전 러시아 연방 대통령 보좌관이자 “궁정” 신봉자는 사실상 러시아 연방의 비공식적인 협동조합주의(Corpora tism) 전령이었고, 게다가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 연방의 정책을 이끌었다. 러시아 국가는 미래에 반동적인 극우 성향에 의지해야 할 경우를 대비해서 모든 방법으로 그들을 보호하고 소중히 여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현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비나치화 할 수 없다. 전투적인 반 공산주의가 이끄는 자본주의 국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파씨즘과 그것의 표명을 물리칠 수 없다. 파씨즘은 심각한 위기 상태에 처한 자본주의의 직접적인 산물이다. 해결될 수 없는 자본주의 모순으로 러시아는 그런 위기를 피할 수 없다.

그 징표는 확실히 변하겠지만,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민족주의자와 정부 내의 “급진파”에서, 파씨스트 성향의 인물과 단체에서 선언된 그 나라의 정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 부르주아지의 진정한 계획은 우크라이나의 사회-경제 체제를 퇴보에서 진보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지배적인 자본을 친 서방 자본으로부터 친 러시아 자본으로 바꾸는 것이다.

 

 

III. 비나치화는 어떻게 수행되는가?

 

우리는 이미 서론에서 비나치화가 소비에트 용어임을 지적했다. 그것은 독일의 점령 지역과 관련된 소련의 전후 정책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졌다. 나치즘의 재발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서, 전후 독일 사회는 이 나라에 10년동안 존재했던 파씨즘 정권의 영향과 결과로부터 정화되어야만 했다.

비나치화에 대한 소련의 경험은 하나의 본보기이고, 어떻게 파씨스트 이념과 주요 인물들의 영향으로부터 사회를 정화시킬 수 있는가에 관한 “안내서”이다.

그것은 소련이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과 달리) 나치 범죄자들을 지속적으로 기소하고, 제3 제국의 옛 관리들의 국가 기구를 청산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추구했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소련은 어떻게 전 나치가 박해받고 처벌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연합국에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비나치화라는 용어에 대한 소비에트 정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경우다: “그 나라의 민주적 변혁을 실행하기 위한” 정화. 모든 나치의 체포와 처벌뿐만 아니라, 파씨즘의 물질적 토양을 박탈하기 위해서 민주주의 정신으로 그 나라를 깊이 변혁하는 것이다.

소비에트 의미에서, 민주화는 의심할 여지 없이 사회주의 변혁을 의미했다. 이것이 소련이 한 것이다. 소련은 노동자와 공산주의자가 동독에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도왔고, 소련의 지원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급진적인 사회 개혁으로 파씨스트 이념의 담지자들을 제거하고, 공산주의 이상에 대한 노동자 교육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회를 만들었다.

동독인은 나치 지배하에서 살았던 사람뿐만 아니라 서구 형제와도 달랐다. 그들의 정신과 공공 생활에서, 그들은 그러한 변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전후 서독의 모순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서독은 도처에 많은 나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나치 정권에 충실했던 자본 역시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따라서, 소련은 바로 파씨즘의 물질적 근거인 자본주의의 사회-경제적 관계를 파괴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소비에트 방식이 아니고는 수행될 수 없는 비나치화에 대한 요구가 있다: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체하는 비나치화만이 그러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파씨즘의 특정 지지자, 파씨스트 지도자, 그리고 신 나치 무장 세력에 대한 박해와 처벌이 파씨즘과의 싸움에서 중요하다 할지라도, 파씨즘과 파씨스트와의 진정한 투쟁은 이것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파씨즘을 낳게 하는 요소들, 즉 자본주의 사회의 조직체에 대한 투쟁이 우선이다.

 

착취자와 피착취자라는 적대적인 계급들로 나누어진 사회가 유지되는 한 파씨즘이나 나치즘은 패배당하지 않는다. 이 두 계급의 적대적인 경제적 이해관계로 인해 그들의 해방을 위한 피착취자 대중 투쟁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결국 계급 투쟁은 조만간 자본가 착취자를 파씨스트의 서비스에 의지하도록 강요할 것이다.

또한, 공산주의를 – 파씨즘의 공공연한 적이자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파씨즘을 파멸시킬 수 있는 유일한 세력 – 부정하면서 파씨즘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공산주의의 구호와 강령을 통해서만, 즉 파씨즘의 주요 근원인 자본주의에 대한 계급 투쟁을 통해서만 비나치화는 수행될 수 있다. 이러한 강령을 부정하면서, 진정한 비나치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이다. 비나치화를 할 수 있기도 하고, 할 수 없기도 한 그런 자본주의 국가는 없다.

전 세계에 사회주의 체제의 확립만이 세계가 파씨즘과 나치즘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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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References
1 자유 연대 (Free Regiment)라는 의미. 주로 지원병, 탈영병, 변절자 등으로 구성되었다.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에, 특별히 독일 혁명 (1928-19) 기간에 바이마르 공화국을 (Weimar Republic) 타도하려는 독일 공산주의자와 그들을 지원했던 소련에 맞서 싸웠다.
2 1933년 2월 27일에 일어난 의회 화재사건. 나치와 민족주의자 동맹은 그 화재를 공산주의자가 국가를 타도하기 위한 준비된 폭동이라고 비난하고 날조했다. 다음날 (28일) 여러 민주적 권리들을 제한하고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nitsyn, 1918-2008) 공산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과 소련의 정치적 탄압에 대한 비난으로 유명한 소련 소설가. 붉은 군대 (Red Army) 복무 중인 1945년에 스탈린에 대한 비판으로 8년 징역과 국내 유배에 처해졌지만, 몇 편의 작품을 썼다. 후르시초프 시기에 무죄로 석방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소련의 정치적 억압에 관한 여러 편의 소설을 썼다. 1969년에 작가 동맹으로부터 제명되었고, 1970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74년에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서독으로 추방되었으나, 1976년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1990년 소련 해체 직전에 국적이 회복되자, 1994년에 러시아로 돌아와서 2008년에 사망했다.
4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Sergei Dovlatov, 1941-1990) 러시아 변호사, 종교ㆍ정치 철학자, 군주제주의자. 카데트 당 (Kadet Party) 우파를 지지. 10월 혁명을 재앙으로 간주하고, 반 볼세비키 정권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5 도블라토프 (Sergei Dovlatov, 1941-1990) 20세기 후반에 서방 세계에 널리 알려진 러시아의 언론인이자 작가. 1976년에 반 정부적인 작품 활동으로 소비에트 언론인 조합으로부터 제명당했다. 1979년에 뉴욕으로 이주해서 살다가, 거기서 사망했다.
6 조셉 브로드스키 (Joseph Brodsky, 1940-96). 러시아 시인이자 수필가. 1972년에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1987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7 제국과 (Empire) 관련된 문장 및 도형. 신성 로마와 러시아 제국에서 사용되었다.
8 20세기 초 러시아의 반동적인 군주제 주의자와 극우 민족주의자 운동. 전제 군주국을 절대적으로 지지.
9 알렉산드르 뒤긴 (Aleksandr Dugin, 1962~). 정치 분석가, 철학자. 1980년대부터 반 공산주의 활동을 시작. 소련 해체 이후에 민족적 볼셰비즘을 옹호하는 민족 볼셰비키 당의 (National Bolshevik Party) 공동 창립자. 그 당을 떠난 후, 2002년에 유라시아 당을 (Eurasia Party) 창당하고 미국 패권에 도전하는 신 유라시아니즘 (Neo-Eurasianism) 이념을 주창. 그의 견해는 파씨스트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고, 푸틴 정부에서 공식적인 직함은 없지만, 언론 매체는 그를 ‘푸틴의 브레인’으로 보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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