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마당] 생각하며 투쟁하는 노동자! 그것은 곧 계급투쟁 실천의 첫걸음!!

― ≪피억압의 정치학(상)―한국사회와 노동자 · 민중운동≫을 읽고(2)

 

 

김용화 | 편집위원

 

* 채만수, ≪피억압의 정치학(상)―한국사회와 노동자 · 민중운동≫, 노사과연, 2008.

(이 책은 현재 절판 중이며 곧 재발간할 예정이다.)

 

 

 

들어가며

 

≪피억악압의 정치학≫ 이 책의 두 번째 발췌 · 정리다. 이 역시나 한국사회의 지배계급과 부르주아지 그리고 그에 결탁, 동조 세력들의 몰계급적 담론들이 여실히 드러난다. 또한 그 담론들의 현실적 내용들이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전개되면서 그에 따른 우리 노동자계급의 임무가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고 있다. 모든 내용이 어느 한 문장도 뺄 수 없이 다 주요하지만, 본문에 앞서 몇 가지의 내용만 순서에 상관없이 대략적으로 알려보고자 한다.

 

첫째로, 노동자들에 대한 사상통제가 진보적 지식인들에 의해서 민주화된 형태로 교활하게 은폐되어 이루어지는 것.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에 의해서 노동자 · 민중에 대한 사상통제가 ‘민주화’된 형태로, 그리하여 교활하고 어쩌면 보다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 몰계급적 담론, 독점자본의 착취와 억압을 은폐하면서 그들의 지배의 영속화를 꾀하는 반동적 담론을, 기껏해야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관점의 정치공학일 뿐인 담론을 ‘진보적 담론’이라는 허울로 치장하여 강매함으로써 그렇게 노동자 · 민중에 대한 사상통제를 가하고 있는 것.

 

둘째로, 노동운동의 지도부가 해야 할 일은, 부정부패의 추악한 실상과 부르주아 정치에는 왜 부정부패가 수반할 수밖에 없는가를 폭로하는 일이다. 그리고 부르주아 이데올로그의 끈질긴 환상 조장에 대항하여 해결해야 할 문제의 본질은 잉여가치 착취의 폐절임을 상기시켜야 하는 것.

 

셋째로, 한국의 노사협의회가 얼마나 기만적이며 노동자들의 권익투쟁을 사전에 억제하려는 기구인가. 민주노총 지도부 일부의 인식은, 우리 사회에서 진보를 내세우면서도 사실은 가장 기만적이고 악질적인 일부 인텔리들의 터무니없는 사대주의적 책동을, 어떤 배경과 의도에서인지 모르지만, 그대로 답습한 것.

 

넷째로, 국가주의, ‘월드컵’을 계기로 국가주의가 얼마나 위력적으로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가는, ‘월드컵’에 즈음하여 거대 상업언론을 통해 축구를 찬미하는 것.

 

다섯째로, 환경 문제의 원인은 개별 기업이나 공공단체의 개별적 프로젝트나 행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대중의 행위와 의식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이윤 생산에 기초한 사회체제의 문제,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의 문제라는 점. 지금 환경운동 및 그 지도자들은 환경 문제를 그것이 마치 비계급적인 문제고, 개별 기업이나 공공단체의 개별적인, 따라서 우연적인 문제인 것처럼 대중에게 제시함으로써, 대중이 그 진정한 원인을 파악하고, 그리하여 적절한 대응과 투쟁을 마련하는 것을 방해하는 데에, 따라서 (독점)자본의 이익에 봉사하고 있다는 것.

 

여섯째로, 자본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는 ‘고용 없는 성장’, 과학기술혁명의 진전이, 자본주의적 생산 그 자체의 내적 필연성으로 인해서 갈수록 가속도적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다는 점. 지금의 ‘고용 없는 성장’, 과학기술혁명의 진전이 그랬던 것처럼. 갈수록 만연할 수밖에 없는 과잉생산, 그에 따라 갈수록 격렬해지는 경쟁이, 우리가 일상에서 절실히 경험하는 것처럼, 그것을 추진하고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이제는 거의 한계에 달하면서 오늘날의 사회문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격렬해지는 계급투쟁이 발생하고 발전해 가는 것. 등등등등….

 

다른 내용들도 만만치 않았지만, 특히 너무나 부끄럽고 후회스럽게 했었던 내용은 2002년 월드컵에 필자 또한 멋모르고 열광했었다는 것이다!

 

≪피억압의 정치학≫ 이 책은 상, 하 두 권으로 나누어 발간된 책이다. 발췌 · 정리를 딱 몇 번으로 나눠서 할지 아직도 정하지는 못했고, 앞으로 더 진행하면서 량과 횟수를 조절해 볼 예정이다. 그리고 모든 강조는 필자의 것이다.

 

 

제3부 지배 이데올로기

                    -부르주아 언론과 지식인들

 

1.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의 몰계급적 담론과 그 반동성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와 더불어 인류사회가 계급적으로 분열된 이래 인류의 역사는 착취하는 자 집단과 착취당하는 자 집단 간의 투쟁, 즉 계급투쟁으로 점철되어 왔다. 그리고 인류사가 이렇게 계급투쟁의 역사임이 19세기에 역사 · 사회과학적으로 입증된 이래 보수적 · 반동적 이데올로그들, 그러한 지식인들의 주요 임무의 하나는,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그러한 사실을 부정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역사와 사회 문제를 논하되, 마치 계급적 착취와 억압이란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듯이, 전혀 그에 관해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노동자들을 위시한 피착취 · 피억압자들의 관심과 정치 · 사회의식을 오도하는 것이야말로 그들 반동적 지식인들이 그것을 부정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역사 · 사회문제를 그렇게 몰계급적 언어로 논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반동적 지식인들의 특징이었다.

 

우리 사회의 경우 1980년대까지, 그러니까 이승만에서 박정희, 전두환 정권 등으로 이어지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임이 유난히 강조되던 시대는 바로 폭력적 사상통제가 노골적으로 난무하던 시대였고, 역사 · 사회과학의 필수도구인 특정 언어조차 상실된 시대였다. 계급적 담론을 금지함으로써 계급적 착취와 억압 자체를 은폐 · 부정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진보적이고자 하는 일부 지식인들 일부계층이라는 말을 빌어서라도 착취와 억압의 현실을 언어화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성격상 기회주의적일 수밖에 없고, 정명하지 않은 개념으로 그 착취와 억압을 정확하게 분석 · 표현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노동자 · 인민의 경우는 결코 그렇지 못하다.

그들 대부분에게는 과거 파쇼 지배 하에서의 그것에 못지않은 사상통제가 가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화’된 교활한 형태로, 그리고 어쩌면 보다 효과적인 형태로! 다름 아니라,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 ‘진보적 언론들의 몰계급적 담론, 몰계급적 비판을 통해서!

구태여 시간을 멀리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이, 최근 며칠 동안 ‘진보적 언론들’이 전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의 몇몇 발언을 보자.

 

‘한겨레’및‘진보적 지식인들’의‘상생’

우선, ≪한겨레≫(2006. 9. 30.)는,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이 9월 29일 “통일문화재단 10돌을 맞아 29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평화와 상생의 밤’ 기념식과 후원행사”를 가졌고 “이날 기념식엔 각계 인사들이 영상을 통해서 평화와 상생의 메시지를 보내왔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각계 인사들’이라는 사람들도, 모두 우리 사회에서 내로라하는 ‘진보적 단체’, ‘진보적 지식인들’, ‘진보적 인사들’이다. ‘학술회의’에는 극우적 인사들과 ‘진보적’ 인사들, ‘진보적’ 지식인들이 함께 발제하고 토론하였는데, 한겨레의 평가는 이렇다.

 

29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한반도 갈등, 어떻게 풀 것인가’를 주제로 열린 학술회의의 오후 주제는 ‘남남 갈등의 해결을 위한 상호이해와 협력 그리고 사회통합을 모색하자’는 것이었다. 남북 갈등을 주제로 한 오전 회의와 마찬가지로 주최 쪽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와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를 각각 진보와 보수를 대변하는 발제자로 정하고, 토론자들 역시 진보-보수로 양분했다. 그럼에도 첨예한 대립보다는 대안 모색의 관점에서 중도적 노선시민 참여라는 공통의 토대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한 것은 성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강조는 인용자}

 

그 명성도 드높은 내로라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이 토론자로 참가하여 발언하고 있지만, 실제로 어느 누구도 “남북 간의 갈등도, 소위 남남갈등도 그 본질은 착취와 억압의 문제를 둘러싼 계급적 대립이며, 따라서 착취와 억압 즉 계급관계의 지양 없이는 그 대립은 결코 극복될 수 없다는 뜻의 발언은 한 마디도 없었던 것 같다. 보도를 통해서 보는 한은 그렇다.

 

기묘하게도 이렇게 그 이마에 상생진보를 나란히 써 붙이고 행세하는 우리 사회 진보적 지식인들‘! 명색이 사회과학을 한다는 자들인데, 대립과 갈등의 원인과 본질을 사회과학적으로, 계급이라는 문제로 규명하는 대신에 “상호 이해와 협력 그리고 사회통합” 따위를 운운하면서 ‘상생이라는 어릿광대춤을 추고 있는 꼴이라니! 참으로 구역질 날만큼 고결한 인품과 심오한 사상의 소유자들이다!

 

공허하기 그지없는‘윤리’ㆍ‘민주주의’ㆍ‘전술’타령

‘진보적’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과 ≪오마이뉴스≫도 행여 뒤질세라 ‘진보적 지식인들’의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9월 29일의 프레시안 “한국 사회에 대한 깊은 절망감이 배어 있(는)”, 그러나 그러면서도 밥 먹여주는 민주주의를 위해 다시 싸우자며 전의를 다지고 있는 한 지식인의 얘기를 전하고 있다. 다소 길지만, 그대로 인용해보자.

 

김명인에게 ‘배반의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 ‘노무현’과 그 언저리에서 한 자리 차지하는 왕년의 ‘진보’ 인사들이라는 사실은 여러 모로 안타깝다. 그는 잘 알려진 대로 적어도 2003년까지는 대통령 노무현의 수많은 실망스러운 언행에도 그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노무현 지킴이’였다. 2004년부터 그 기대는 뿌리째 흔들렸다. 2004년 3월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는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본 김명인은 몇 가지 역사 속 장면을 떠올렸다. “1979년 12월 12일 밤 가로막힌 한강대교에서의 망연함, 1980년 5월 17일 오후 캠퍼스에서 ‘계엄군이 온다’는 비명소리의 기억, 며칠 뒤 광주학살 소식을 접하고 전율하던 기억….” 그 같은 기억 속에 대통령 탄핵을 ‘반란’으로 규정하며 “반란은 진압되고 반란자는 응징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김명인은 불과 두 달 뒤 정무에 복귀하자마자 파병 약속은 어떻게든 지키겠다고 미국의 대통령과 약속하는 대통령 노무현을 목격했다. “파병 약속 재확인이나 하라고 광화문 네거리에 나가 촛불 들고 탄핵 철회를 외친 것”이 아닌데 말이다. 그는 그렇게 애정을 접었다. “윤리적 기대의 힘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 강자의 논리에 밀려 그 윤리를 포기할 때, 그의 정치적 생명은 벌써 반 이상 소멸된 것이다. 그 다음에 남는 것은 윤리적 추진력을 상실한 이율배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정치논리이고 볼썽사나운 권력게임이며 이전투구일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정치력도 부족하고 연줄도 없고 구체적인 인적 토대도 없고 게다가 돈도 없는 대통령에게서 기대할 것은 강한 윤리의식과 비전과 불굴의 의지밖에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강대국 미국의 힘과 회유에 밀려 최초의 윤리의식을 내팽개쳤을 때, 이미 그는 리더십을 지탱할 토대의 대부분을 상실했다. 남은 것은 불행한 ‘노빠들’의 헛된 미망뿐. 가진 것이라고는 대통령 개인의 생존전략으로 전락한 맹목적 책략과 뚝심뿐. 그 상태에서 지금 그가 진보·수구 양 진영으로부터 맹공을 당하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예견된 결과이다.”

 

2004년의 이른바 ‘탄핵정국’에서 그토록 미친 듯이 ‘탄핵 반대’, 탄핵 무효를 외쳐댔던 수많은 진보적 지식인들, ‘진보적 인사들’, ‘맑스주의 정치학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좌파 활동가들’ 대부분이, 한 마디 자기비판은커녕, 자신들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오늘날 시치미를 떼며, 딴소리 · 딴짓을 하고 있다. 그들에 비하면, 비록 자기비판이나 반성이 아닌 푸념 혹은 회한의 토로일망정 김명인 교수는 훨씬 솔직하고 진지하며, 따라서 그만큼 건강하다. 그러나 그의 건강성은 대체로 거기까지이다. 왜냐하면, 그가 이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외쳐대는 목소리의 높이에 비하면, 문제 그것에 대한 그의 사회과학적 인식의 수준은 너무나도 낮고, 그만큼 노동자 · 민중에게 미치는 사상적 악영향, (어폐가 있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 사상통제는 심각하기 때문이다.

 

과거 파쇼 지배 하에서는 국가기관에 의해서 지식인들에 대한 사상통제가 폭력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요즘엔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에 의해서 노동자 · 민중에 대한 사상통제가 민주화된 형태로, 그리하여 교활하고 어쩌면 보다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몰계급적 담론, 독점자본의 착취와 억압을 은폐하면서 그들의 지배의 영속화를 꾀하는 반동적 담론을, 기껏해야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관점의 정치공학일 뿐인 담론을 ‘진보적 담론’이라는 허울로 치장하여 강매함으로써 그렇게 노동자 · 민중에 대한 사상통제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의 담론 속에 노동()’자본()’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적대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변혁을 통해서 그 역사적인 착취 · 대립 · 지배관계를 지양해야 할 존재로서가 아니라, 그 착취와 지배, 대립에 눈 감고, 혹은 그것을 약간은 완화시켜서 서로 상생해야 할 존재로 등장한다. 그렇게 철저히 반동적인 관점과 담론이 ‘진보’의 이름으로 선전되고, 노동자 · 민중은 바로 그들의 그러한 사상적 영향 · 통제 하에서 시달리고 있다. 따라서 기회 있을 때마다 저들의 그러한 반동성을 널리 폭로하는 것, 그리하여 노동자민중을 그들의 사상적 영향력 하에서 해방시키는 것, 이것은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주요 임무의 하나이다.

 

 

2. ‘제3의 길’은 진보노선인가?

 

영국과 프랑스에 이어 독일에서 ‘보수 우파’ 정권에 반대하는 ‘좌파’가 집권하게 되면서 저들의 새로운 깃발, 곧 ‘새로운 노동당'(New Labor)을 자처하는 영국의 블레어 총리나 공개적으로 그의 정책노선을 모방하고 있는 독일의 새 총리 쉬뢰더(사회민주당)가 내건 이른바 ‘3의 길혹은 새로운 중도의 깃발이 새로운 진보노선으로 화려하게 각광받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제3의 길’ 혹은 ‘새로운 중도’는 정말 진보로서의 내용을 갖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한갓 요란한 가면무도회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광대극에서 우리는 현대 사회민주주의의 본질 및 기능역할 등을 읽어야 한다.

 

본래 사회과학상의 진실, 곧 진보의 근거는 우리가 지금 발 딛고 서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사회적 운동법칙 자체에 있는 것이지 그러한 과거 정책의 경험주의적 평균에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운동법칙을 밝히고 그에 입각해 대응을 모색하는 대신에 관념적 개념조작으로 과거 정책의 경험주의적 평균을 구하는 저들의 작업은 그 방법 자체에서 우선 몰이론적(沒理論的)이다. 저들이 아무리 수많은 암호와도 같은 단어와 개념들로 수만 쪽의 지면을 화려하게 채우더라도 이는 공허한 관념의 유희인 것이다.

 

더구나 저들이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 내세우는 ‘3의 길혹은 새로운 중도 사실은 진정한 ‘제3’ 혹은 ‘중도’도 아니고 극히 기만적인 것이다.

 

비버리지적 ‘좌파’가 얼마나 좌파적인가만을 간단히 보자.

비버리지는 케인즈의 이론적 직계로서 독점자본의 옹호자였고, 1941년에 처칠의 보수당과 애틀리의 노동당 간 연립정권 하에서 ‘비버리지위원회’가 구성되어 사회보장 문제를 논의되게 된 것도, 전시 국가독점자본주의가 급속도로 강화되면서 노동자 대중의 생존권이 심각하게 파괴되자, 불온해져 가는 노동자계급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서였다. 즉, ‘제3의 길’ 혹은 ‘새로운 중도’를 내세우는 자들이 편향된 ‘좌파’로 제시하는 비버리지적인 사회(민주)주의란, 현대 사민주의 일반이 꾸준히 그 성격을 강화시켜 온 바의,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한 경향이고 그것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ㆍ정책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제3의 길’ 혹은 ‘새로운 중도’가 과거 서유럽 사민주의 정권의 그것보다도 훨씬 더 우파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노선이자 독점자본의 새로운 가면임을 의미한다. 그만큼 그것은 진보적이 아니라 보수 · 반동적이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제3의 길’ 혹은 어떤 형태이든 ‘중도’이기 위해서는 그것은 ‘비사회주의적이고 비자본주의적인 그 무엇’, 즉 현실적 존재로서의 자본주의를 지양한, 그러나 비사회주의적인 그 무엇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그 무엇’은 현실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저들의 ‘제3의 길’ 혹은 ‘새로운 중도’란 자본주의를, 그것도 그 모순ㆍ위기가 극도로 격화되어 있는 현대 국가독점자본주의를 그 진면목을 은폐하여 구제하고자 하는 가면에 불과하다.

 

 

3. ‘사회개혁투쟁’과 노동자

 

그들의 깃발에 쓰여 있는 구호들

한보 그룹의 도산을 계기로 ‘대선자금’을 핵심으로 한 김영삼 정권의 부정부패가 장막을 사이에 두고 그 거대한 그림자를 드러내자 사람들은 한편에서는 분노하고 한편에서는 허탈해하고 있다. “‘문민’이니, ‘개혁’이니, ‘사정’이니 하는 포장과 말장난에 놀아나 내 저런 썩어빠진 정권을 열렬히 지지했다니!” 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부정부패와 그 ‘일소’, ‘개혁’이라는 구호가 어디 김영삼 정권만의 문제이며, 어제오늘의 문제인가? 초대 이승만 정권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예외 없이 높이 쳐들었던 깃발이고, 깊이 새겨진 낙인이다. 그리하여 사실 그 정도면 부패한 부르주아 정치에 신물을 내고 절망할 만도 할 것이다. 그리고 ‘전혀 다른 원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새로운 길은 없을까’ 모색해봄직도 하다.

 

그러나 현실의 큰 조류는 전혀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 노동조합운동의 최상층 핵심 지도부조차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대신에, 사실상 노동자계급의 이익과 대의를 버리고, 그러한 흐름을 선도하고 있다. 끈질기게도 부르주아 정치에서 한 줄기 희망을 찾으려 제도개혁’, ‘사회개혁투쟁이라는 명분 하에 그래도 이 길뿐이다!”라고 외쳐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깃발에 쓰여 있는 구호들을 보자.

제도개혁! 사회개혁! 정치자금법 개정! 선거법 개정! 돈세탁방지법 제정! 부패방지법 제정! … 개정! 제정! 개정! 제정! 개개정! 제제정! … 저들의 주장에 흐르는 기본 요지는 대략, “법제도를 정비하여 깨끗하고 돈 안 드는 정치를 실현하고 부정부패를 추방하자”는 것이다.

 

착각과 건망증

그러나 저들은 크게 착각하고 있다. ‘제도개혁’, ‘사회개혁’을 주장하면서 제반의 ‘개혁입법’을 주장할 때, 무엇보다도 그들은, 지금 대중이,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분노하며 규탄하고 있는 것은 김영삼 정권의 부도덕성만이 아니라 그 불법성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청와대를 정점으로 하는 크고 작은 권력관료, 정치인, 그들과 야합하여 이권을 누리는 자본―간단히 말해서 지배계급ㆍ지배집단이 그러한 법제도를 고의로 유린하는 데에, 그리고 그러한 법제도의 존재를 선언하여 그것을 관철해야 할 검찰이나 경찰 그리고 법원과 같은 이른바 ‘사법당국’이 그러한 불법을 앞질러 저지르고, 또 그것들을 방조은폐합리화하고 있는 데에 있는 것이다. 부정부패나 금권ㆍ타락선거가 문제될 때마다 법제도를 재정비해 왔지만, 그것이 결코 그러한 불법과 부정부패를 일소하지도 감소시키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저들은 망각하고 있다. 방향 잃은 계급투쟁이 격화될 때마다, 여ㆍ야 정치인들이나 대자본가들이 법제도를 재정비하면서 ‘깨끗하고 맑은’ 정치와 관행을 다짐하지만, 그때마다 동시에 그들은 ‘저것을 기필코 유린하여 당선되고 이권을 거머쥐어야지!’ 하고 굳게굳게 재다짐한다는 사실을 저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음모와 기만

매번 실천을 통해서 증명해 주는 것처럼, 여ㆍ야 정치인들이나 대자본가들은 ‘깨끗하고 맑은’ 정치와 관행을 다짐하면서 법제도를 정비할 때마다 동시에 그렇게 ‘저것을 기필코 유린하겠다’고 재다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제도개혁이나 제도개선을 주장할 때, 그것은 기만이요 음모이다.

 

민주노총의 한 문건(1997. 4. 17.)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패를 추방하기 위해서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부패와의 전쟁을 벌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정기관의 독립성을 확고히 함과 동시에 돈세탁 방지제도 신설, 공익정보(내부비리) 제보자 보호제도 신설, 공직자 윤리규정 강화, 부패행위 처벌 강화, 부패방지 특별수사부 신설 등을 주된 내용으로 종합적인 부패방지법을 제정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정보공개법, 프라이버시법, 정부윤리법 중 특별검사규정, 공직개혁법 중 내부고발자 보호조항, 세금개혁법 중 정보공개조항, 상원윤리법, 하원윤리법 등에 의하여 부정부패를 빈틈없이 규율하고 있다. 특히 정부윤리법은 공직자의 청렴성과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거미줄 같은 공직자의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대부분의 나라가 미국과 비슷한 부패방지법제를 가지고 있다. 동남아에서도 단일한 부패방지법이 일반화되어 있다. 인도의 부패방지법(1947년)을 시작으로 필리핀의 독직 및 부패방지법(1961년), 대만의 부정공직자처벌법(1963년), 싱가포르의 부패방지법(1969년) 등이 그 대표적 예이다. 특히 싱가포르는 검찰과는 별도로 부패행위 조사국이라는 대통령 직속 사정기관을 두어 강력한 부패척결 의지를 실현하고 있다.

 

민주노총 지도부 일부의 이러한 놀랍고 기막힌 인식은, 우리 사회에서 진보를 내세우면서도 사실은 가장 기만적이고 악질적인 일부 인텔리들의 터무니없는 사대주의적 책동을, 어떤 배경과 의도에서인지 모르지만,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민주노총의 일부 지도부가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 그리고 기타의 국가들이 ‘거미줄 같은 공직자의 규범을 제시’하여 “부정부패를 빈틈없이 규율하고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먼저 그들의 부패한 체제, 부패할 수밖에 없는 체제와 싸우고 있는 그들 나라의 노동자계급을 모욕하거나 안중에 두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마치 그들 나라에서는 정말 부정부패가 규율되고 있는 것과 같은 허위의식을 전파하는 것이며, 법제도를 정비하면 그런 것들이 정말 규율될 것 같은 환상을 대중 속에 심는 것이다. 그들이 왜 무슨 의도와 무슨 목적으로 그러한 환상을 조장하려는 것인지 물어야 하고, 대중을 오도하려는 그러한 기만적 책동은 단호히 멈춰져야 한다.

 

본질은, 잉여가치의 분배가 아니라, 그 착취

제도개혁이나 제도개선’을 주장할 때, 우리는 그 주장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다름 아니라, 그것은 기본적으로 지배계급 내부의 합리화의 문제인 것이다.

 

민주노총이나 기타의 노동자 단체가 그것을 주장할 때, 그것은, 환상적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 대중으로 하여금 계급적 이해와 관련된 측면을 보지 못하게 하면서, 문제의 본질이 마치 정치자금의 정화(淨化)나 부정부패의 일소에 있는 것과 같은 허위의식을 심는 몰주체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서 문제의 본질은, 정치자금의 정화(淨化)나 부정부패의 일소와 같은 착취된 잉여가치의 자본가계급 분파 간의 재분배가 아니라, 잉여가치의 착취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잉여가치의 착취 문제를 옆으로 밀쳐 둔 채, 잉여가치 착취의 근절문제를 제쳐 둔 채, 문제의 본질이나 핵심이 마치 부정부패 등의 일소에 있는 듯한 주장들. 그것들은 결국 착취기구를 합리화하자는 주장에 불과하다.

 

노동운동의 지도부가 해야 할 일은, 부정부패의 추악한 실상과 부르주아 정치에는 왜 부정부패가 수반할 수밖에 없는가를 폭로하는 일이다. 그리고 부르주아 이데올로그의 끈질긴 환상 조장에 대항하여 해결해야 할 문제의 본질은 잉여가치 착취의 폐절임을 상기시켜야 하는 것이다.

 

 

4. 색깔 드러낸 위선의 ‘사회원로들’

―144명 ‘사회원로들’의 정규직 임금 동결 · 삭감 요구에 대해서

 

144명의 사회원로! 이 사회의 양심과 도덕, 그리고 권위의 상징이다. 바로 그런 분들께서 지난 {2004년} 6월 10일에 이 사회의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 중의 하나인 ‘비정규직’ 문제에 팔을 걷고 나섰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를 줄여야한다”며 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저임금 문제를 해결할 “근본적 대안”이란 게, 다름 아니라,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의 동결 · 삭감이라니 말이다. “기업의 국제경쟁력이 크게 약화된 상황에서 정규직화만을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기업의 해외이전만 가속화시킨다”며, 그들은 아예 드러내놓고 비정규직의 철폐를 반대하고 있다. 아니, 이들의 주장은 사실상,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위해서 비정규직을 확대해야 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기업의 국제경쟁력이 크게 약화된 상황”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수출 실적, 엄청난 순이익을 낼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논평은 단지 악선동을 위한 저들의 파렴치한 거짓을 드러내기 위해서일 뿐이기 때문에, 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거나 이른바 ‘지불능력’이 약화되면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자제해야 한다는, 즉 저임금을 감수해야 한다는, 이른바 ‘임금지불능력론’을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절대 안 된다.)[1]이른바 ‘임금지불능력론’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채만수, ≪노동자 교양경제학≫(전면개정판), 노사과연, 2006, pp. 302-10 참조.

 

이들의 주장은 물론 조선일보등 자본의 언론, {파쇼언론}에 의해서 크게 환영받고, “사설로까지 다뤄졌다. 도대체 이들 144명의 ‘사회원로’들이, 그리고 자본과 그 언론노리는 게 무엇일까?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임금 삭감, 비정규직 확대 등 노동조건의 더 한층의 가혹화, 자본의 이윤 증대이고, 그를 위해 한 몫을 하고 싶은 것이다.

뒤돌아보면, 작년에 이미 언론은,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 노동자들의 연간 임금 총액이 6,000만 원이나” 되느니 어쩌니 하면서, 조직 노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친 바 있고, 조흥은행과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에 격앙되어 노무현 대통령 역시, “노동운동은 도덕성을 잃었다”며, 노동자들에 대한 여론의 공격을 선도한 적이 있다. 144명 ‘사회원로들’의 성명 역시 그러한 움직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인데, 양심과 도덕, 그리고 권위를 대표하는 ‘원로들’답게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임금격차의 축소”를 들고 나옴으로써 이들의 공격은 한층 더 위선적이고 악질적이다. 악의적으로 과장되긴 했지만, 그 어름의 ‘고임금’(?)을 받는 극소수의 노동자들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뿐만 아니라 대기업 조직 노동자들 중에는 연간 4,000만 원이 넘는 ‘고임금’(?)을 받는 사람들이 상당수에 이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의 임금은 정말 고임금인가?

그렇다. 그러나 다만 노동자들의 평균임금에 비해서 그럴 뿐이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우리 사회의 저임금이 얼마나 심각하고 광범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노동자 가계의 생계비, 노동력의 재생산비에 비해서는 어떤가?

노동력의 재생산비 자체가 상당히 탄력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임금이 그들 노동력의 재생산비에 비해서 고임금이라고 할 아무런 증거도 없다. 오히려 그에 비하면 여전히 ‘저임금’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더 합리적인 대답일 것이다.

 

고임금 노동자들이 그 고임금을 어떻게 해서 받고 있는가 하는 것에 의해서 증명되고 있다. 저들은, 주당(週當) 법정노동시간은 물론이고, 법이 허용하는 최장노동시간을 훨씬 넘어서 잔업ㆍ특근ㆍ야근을 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1년 365일 중에 360일을 노동하는 사람조차 있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그러한 ‘고임금’을 받고 있는 것이다. 보다 짧은 노동시간에 대한 저들의 임금이 자신들의 재생산비에, 즉 그 가족의 생활비에 충분해도 저들이 그토록 장시간 노동을 하겠는가? 바로 저들 고매한 사회원로들께서 비열하게도 애써 외면하면서 결코 말하지 않고 있는, 바로 그 현실이다.

 

나 역시 이미 1년 반(半) 전에 저들 대기업 노동자들을 비판한 적이 있다.[2]“노동시간, 임금, 이윤, 그리고 초과노동 할증률”, ≪현장에서 미래를≫, 2003년 1월호. 이 글은 수정ㆍ보강되어 ≪노동자 교양경제학≫(전면개정판, … Continue reading 그들은 당연히 비판받아야 한다. 그들은, 법정노동시간에 정당한임금을 자본에 강요할 막강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혹은 그러한 힘을 현재화시키기를 거부 혹은 주저하면서, 그렇게 장시간 노동을 감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감수하는 그러한 장시간 노동과, 그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는 그들의 저임금은, 단지 그들의 문제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사실상 사회 전반의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을 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조그마한 양심이라도 있었다면, 도덕관념이 조금이라도 살아 있었다면, 저들 ‘사회원로들’은, 전반적인 저임금과 기아임금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의 이른바 ‘노동의 유연화’와 그에 따른 비정규직의 광범한 확산을 문제 삼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꾸로 “대기업 노조가 임금을 동결하고 비정규직 임금을 올려 임금격차를 줄이는 것이 근본적 대안”이라고 주장하고 나서고 있다. 바로 저들은 명백히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이간질시켜서 서로 반목하게 하고자 하는 목적을 감추고 있지 않다.

 

 

5. 이른바 ‘경영참가’, 취할 만한 길인가?

 

한국의 노사협의회가 얼마나 기만적이며 노동자들의 권익투쟁을 사전에 억제하려는 기구인가는 새삼 부연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은 독일식의 이른바 ‘공동결정제도’에 대해서도 그 동안 그 허구성이 많이 폭로되어 왔기 때문에 그 형태 자체에 대해 새롭게 언급할 내용은 별로 없다. 그래서 보다 본질적인 측면을 얘기하자.

 

노동자 경영참가제도란,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제도라기보다, 본질적으로는 노동자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기업 번영’이라는 목표에 종속시킴으로써 노동운동을 약화시키고, 따라서 착취를 강화안정화시키기 위한 제도인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경영’의 역할과 기능이란 다름 아니라 이윤의 극대화, 즉 착취의 극대화를 꾀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오늘날 노동운동이 무력화되어 있고 체제내화되어 있다는 사실도 ‘노동자 경영참가’의 발전ㆍ강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노동자 경영참가’ㆍ‘종업원 지주제’(이 역시, 이윤분배제도 즉 성과급 제도와 더불어, 광의의 ‘노동자 경영참가’ 제도의 한 형태이다) 등등 노동운동 내부의 사민주의적 선전ㆍ선동과 강력히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사민주의란, 노동자계급을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으로 그 포로로 하는 독점자본의 강령이기 때문이다.

 

 

6. 가히, 국가주의와 전쟁 선동의 극성시대

 

월드컵을 계기로 국가주의가 얼마나 위력적으로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가는, ‘월드컵’에 즈음하여 거대 상업언론을 통해 축구를 찬미하고, ‘월드컵’을 더욱 성대하게 장식할 ‘꺼리’를 찾아 눈이 벌건 수십 명 기자들의 환시리에 인천공항까지 히딩크를 환송하는 백기완 선생의 동정에서 상징적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선생께서는 필시 ‘월드컵’을 계기로 국가와 독점자본이 무엇을 위해서 어떤 정세 ·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전력투구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이 결코 필부의 그것으로 무심히 보아 넘겨지지는 않을 것임을 모를 리 없을 터인데도 그렇게 움직였으니 말이다.

 

붉은 악마현상이 얼마나 심각하고 맹목적적인 국가주의, 전체주의를 조장하고 있는가를 알고 싶다면, “‘붉은 악마’를 부추기지 말라”는 논평을 낸 인권운동사랑방의 홈페이지 게시판이 얼마나 입에 담기도 거북한 욕설과 악담, 증오로 도배질되었는가를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붉은 악마’는 말한다. 자신들은 결코 누구에 의해서 조종된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라고. 자발적으로!? 자신들은 결코 정치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고 순수하다고.

그들이 “비정치적”이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필시 자신들은 결코 부정부패로 궁지에 몰린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등 민주당의 이해관계와는, 따라서 또 그 반대편에서 차기 집권을 노리는 이회창 씨나 한나라당의 이해관계와는 전적으로 아무런 상관도 없고, 그런 편들기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그 ‘정치성’을 거론한 일부의 ‘비판’이 그러한 차원의 것이었고, 그에 대한 응수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차원의 ‘비판’과 응수야말로 ‘정치’의 의미를 참으로 왜소화시키는 것 아닌가? 계급적 이해의 대립이라는 정치의 본령을 은폐 · 사상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자신들의 열광적인 국가주의 · 애국주의가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그 문제와 대항하여 그리고 생존권을 위해서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그리고 (예컨대, 보건의료산업노조의 파업ㆍ농성투쟁에 대한 공격처럼) 그들에 대한 국가권력과 자본의 잔혹한 탄압ㆍ공격을 얼마나 가렸는가, 그들은 겸허히 돌아봐야 할 것이다.

 

월드컵국면에서 가장 해악스러운 역할을 한 것은 누구니 누구니 해도 ≪한겨레≫나 ≪한겨레21≫을 비롯한 이른바 ‘진보언론들’이고, 그 중에서도 ≪한겨레≫의 이른바 “월드컵 기획자문위원단”으로 참여, “월드컵 포럼”을 통해 문재(文才)를 맘껏 발휘한 언필칭 ‘진보적 지식인들’일 것이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하고 무슨 글을 썼는지, “기획자문단 활동”이라는 제목이 붙은, 6월 27일자 ≪한겨레≫ 보도를 통해 살짝 엿보자.

 

<한겨레> 월드컵 기회자문위원들에게는 월드컵이 ‘축제의 장’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독특한 시각과 생동하는 문체로 눈길을 끌었던 관전기들은 이들 기획위원이 숨 막히는 격전의 현장을 직접 누비며 써낸 것이다. ……. 8강행을 확정한 이탈리아전 관전기에서 유홍준 위원은 “아놀드 하우저가 말한 축구의 변증법은 맞았다. 우리는 강팀을 만날수록 더욱 강해지고 멋진 경기를 펼쳤다”고 말했다.

이들 기획위원은 월드컵 시작 전부터 릴레이 기고를 통해 한-일 관계와 노동, 여성, 문화, 환경 등 다양한 관점에서 월드컵을 분석하고 재해석했다. 때로는 기획위원들이 집단으로 서울 시청 앞 광장에 나가 붉은 악마들과 함께 외치고 노래하고 춤추며 들끓어 오르는 새로운 문화를 직접 몸으로 체험하기도 했다. 이들에게 6월 한 달은 너무 짧았다.

 

짧게 인용한 대목들만 보더라도 얼마나 “독특한 시각과 생동하는 문체”의 명문들인가!!!

 

우연인지, 아니면 어느 쪽의 누군가에 의해서 기획된 것인지, ‘월드컵의 폐막을 즈음한 시기부터 상황은 새롭게, 묘하게, 더욱 고약하게 전개되고 있다. 바로 황해 연평도 인근 해역에서의 남북 충돌을 계기로 기승을 부리고 있는,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ㆍ파쇼 언론과 이회창, 김용갑, 강창희 등등을 필두로 한, 김민웅 목사의 표현(≪한겨레≫ 2002. 7. 10.)을 인용하자면 식민주의 파시스트 세력의 광적인 전쟁 선동이 그것이다.

 

이들의 관심이란 오로지 대북 적대정책과 전쟁론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전쟁국가를 향해 치닫고 있는 미국의 독점 대자본과 군사주의 정권의 하수세력으로서 자신의 기득권적 지위를 확보하려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과 더불어, 그리고 미국을 등에 업고 “서해교전을 북한의 의도적 도발이라고 일방적으로 규정하고 그 증거가 있다며 전쟁의 예비 단계적 환경을 만들어 가고 있다.” 진상과 배경, 원인을 밝히고 갈등의 평화적 해결을, 그리고 남 · 북간의 평화구도를 모색하려는그들은 사건의 일부의 노력을 “반민족적 행위”로 매도하지만, 사실 그들이야말로 친일 부역 세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민족주의적 입장에서는 이들의 전쟁 선동을 ‘무책임하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은 현실적이기보다는 어딘가 도덕적인 냄새가 난다. 저들은 냉정하게 계산하고 있는데 말이다. 권력과 군수 보급의 이권을 쥐고 있는 저들에게는 이런 저런 떼돈이 들어 올 것이다. 여차여차 상황이 불리하면, 돈 싸들고 미국이나 기타 어딘가로 도망치면 그만이다. 비자ㆍ영주권은 물론, 집 사두고 ‘원정출산’까지 해두지 않던가? 이것이 저들이 그리는 전쟁이다. 그러니 전쟁을 마다하겠는가?

 

문제는 노동자 · 민중의 태도이다.

계급적 관점에 충실하다는, 노동자 · 민중운동 내부의 상당수 활동가 · 이론가들도 문제가 없는 게 아니다. 이른바 ‘주사파’의 소부르주아적 민족주의를 비판하면서 그들은 주관적으로는 계급적 관점에 충실하다고 자부하지만, · 북의 분단을 보는 그들의 관점은 영락없는 국가주의 그것이다. 남 · 북의 분단을 역사적 맥락에서도, ‘계급적 분단의 지리적 외화형태’로도 보지 못하는 그들의 관점이 어찌 국가주의가 아니며, 어찌 계급적 관점에 충실한 것이겠는가? 재승(才勝)한 사이버 논객, 진중권 류의 객관주의도 그 대표적 예의 하나일 것이다.

 

평화의 길은 하나다. 저들 전쟁 선동자들로 하여금 전쟁이 자신들의 기회가 아니라 무덤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또 만일 저들이 전쟁을 일으키면 그것이 실제로 저들의 도망칠 수 없는 무덤이 되도록 노동자 · 민중이 미리부터 조직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그 작업 · 방법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최근의 국제적, 그리고 국내의 정치 · 경제 상황은 그것을 찾고 실천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상당히 절박한 과제임을 말해주고 있다.

노동자 · 민중운동의 정치적 무능력의 또 다른 상당 부분은 실용주의 · 편의주의 · 경험주의에 안주하면서, 이념과 이론은 관념적 혹은 소부르주아 급진주의의 ‘진보적 지식인들’에 의존하는 데에서 연유한다. 그들 ‘진보적 지식인들’의 대부분은 참으로 이상야릇한 청산주의적 맑스주의를 표방하고 있는데, 그들의 그러한 이념 ·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이론적 불철저성 탓인 것이다. 이리하여 노동자 · 민중운동의 사상적, 이념적, 그리고 조직적 정체(停滯)가 너무나 오래 지속되면서 부르주아지의 일방통행이 새롭게 구조화돼 가고 있다. 부르주아적 의제의 일방적 지배를 극복하고 노동자 · 민중이 생존 · 생활의 의제, 해방의 의제를 사회적 · 정치적으로 세워가기 위해서는 노동자 · 민중운동의 진지한 자기 점검과 재정비가 필요하다.

 

 

7. 근본 원인을 외면한 환경운동의 타락

 

내가 아는 한 사람은, 누구 못지않게 환경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또 실제로도 몇 년 전까지는 환경운동의 참가자였고, 또 적극적인 후원자였다. 그러한 그가 환경운동하면 그토록 냉소적인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까? 다름 아니라, 그가 한국 환경운동의 일반적 경향과 그 내막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고, 그의 결벽한 성격이 그 경향과 내막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털어 놓은 바에 의하면, 두산 그룹의 낙동강 페놀 대량 방출 사건으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히고, 분노하고, 그리하여 환경운동 단체들뿐 아니라 환경 문제에 조그만 관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면, 두산 그룹의 그러한 살인적 행위를 규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런데 다른 때도 아닌 바로 그때에 환경운동의 리더라는 사람들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로의 국제환경회의에 가는데, 다름 아닌 바로 그 두산 그룹의 재정 후원을 받아서 가더라는 것이다.

 

오늘날 환경운동 단체들이 공식적 · 비공식적으로 전개하는 환경 문제에 관한 캠페인을 보자면, 환경 문제는 ‘경제 개발’이나 ‘공업화’에 수반하는 문제이고, 그것을 유발하는 개별기업의 개별적인 행위나 국가 및 기타 공공단체의 개별 프로젝트의 문제이며, 심지어 대중의 시민의식의 부족의 문제이다. 따라서 기업 및 공공단체 등의 개별적인 프로젝트에 구체적으로 대응하고, 대중이 그렇게 대응하도록, 그리고 또 대중 자신이 무분별한 소비나 쓰레기 배출 · 투척 등으로 공해를 유발하지 않도록 캠페인하는 것이 환경 문제에 대한 적절한 대응, 적절한 운동으로 된다. 그리하여 기업이 반환경적인 프로젝트를 세우지 않도록 사전에 효과적으로 계도하고, 그 기업의 정책 결정에 참여하기 위해서 환경운동의 최핵심 지도자가 재벌기업의 사외이사로 된다고 하는 일도, 그러한 타락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환경 문제의 원인은 개별 기업이나 공공단체의 개별적 프로젝트나 행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대중의 행위와 의식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이윤 생산에 기초한 사회체제의 문제,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의 문제라는 점은 그들의 운동과 대중 캠페인에서는 철저히 외면되고 있다. 아니, 보다 절실하게 말하면, 철저히 은폐되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 환경운동 및 그 지도자들은 환경 문제를 그것이 마치 비계급적인 문제고, 개별 기업이나 공공단체의 개별적인, 따라서 우연적인 문제인 것처럼 대중에게 제시함으로써, 대중이 그 진정한 원인을 파악하고, 그리하여 적절한 대응과 투쟁을 마련하는 것을 방해하는 데에, 따라서 (독점)자본의 이익에 봉사하고 있다.

 

재벌 등 독점자본이 ‘환경운동에 동참한다’는 위선적 미명 하에 환경운동 단체와 일부 지도자를 때로는 공공연하게, 그리고 때로는 은밀하게 지원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다름 아니라, 한편에서는 개별적인 자본 · 기업으로서의 자신들의 반환경적 행위와 프로젝트에 대한 환경운동의 예상되는 투쟁을 사전에 봉쇄 · 무력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어서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현재의 환경운동의 그러한 친자본적 성격에 대한 보상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운동에서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우선, 그러한 탐욕과 결탁이 단지 우연적이고 자의적인 듯이, 그리하여 그 개별적 행위 하나하나를 규탄하고, 그 행위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지불하게 하면, 그러한 운동과 투쟁을 확대해가다 보면, 환경 문제는 해결될 것처럼 기존의 운동이 사고하고, 행동하고, 선전하는 점이다. 그러한 탐욕과 결탁은 사실은 자본주의적 이윤 생산과 경쟁에 의해서 강제되고 있어서, 자본주의적 생산이 지속되는 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필연적이라는 점을 그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거나,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생산이 환경 파괴적인 것은, 환경 파괴적인 것으로 돌출되고 그리하여 이른바 환경운동의 규탄 대상이 되고 있는 사건들만이 아니다. 사실은 자본주의적 생산 그 자체가 환경 파괴적으로 진행되고 있고, 그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점 역시 지금의 환경운동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거나 은폐하고 있다.

 

기업에서는 엄청난 양의 생산시설과 기자재가 단지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즉 자본주의적 시장 경쟁에 불리하다는 이유만으로 계속적으로 폐기돼가고 있고, 그럴 수밖에 없다. 대중은 멀쩡한 의복이나 주택 등등, 사실상 거의 모든 종류의 생활수단을 끊임없이 폐기하고 교체하도록 독점자본이 대중매체를 동원하여 조성하는 대중문화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다. 대부분 대중의 스포츠, 취미생활조차 자본의 이윤과 축적에 봉사하도록 개발, 붐이 조성되고, 그것들 역시 거의 예외 없이 환경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속성상 도시로의 인구 집중이 강화되고 있고, 그 자체 또한 환경 파괴적이다. 언뜻 몰계급적인 것처럼 보이는, 예컨대 교통량의 증대와 그에 따른 자연 파괴적 교통 기반시설의 폭발적 증설도 사실은 자본주의적 생산에 의해서 유발되고 있는 것이다. 등등.

 

한편, 환경 파괴나 공해의 영향은 보편적인 것처럼, 즉 몰계급적인 것처럼,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고, 대개의 경우 그렇게 선전된다. 그러나 그것도 명백히 사실이 아니다. 대자본가를 포함한 자본가계급 역시 그 악영향을 면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노동자 · 민중에게 훨씬 더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노동자ㆍ민중에게는 그 악영향을 차단하고 경감시킬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언뜻 그 영향이 가장 보편적일 것 같은 대기 오염을 예로 들어 보자. 노동자 민중에게는 그렇게 오염된 공기를 항상 들이마시지 않을 방법이 없지만, 부유한 자본가들은, 공기 청정기가 설치된 집안, 공기 청정기가 설치된 사무실, 그리고 공기 청정기가 설치된 고급 승용차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 그만이다.

 

환경 문제가 이렇게 계급적인데도, 많은 경우 그것은, 그리고 환경운동은 마치 몰계급적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것은 마치 ()시민의 운동영역이라는 듯, 노동자계급 운동은 그것을 방치하고 있다. 당연히 잘못이다. 노동운동은 마땅히 자신의 운동을 환경운동에까지 확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그 환경운동은 기존의 소부르주아적 환경운동과 그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주도되고 그에 봉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노동자 계급 자신의 세계관이 반영되고 해방을 향한 자신의 본래적 운동과 결합한, 그러한 운동이 되어야 할 것이다.

 

 

8.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에 대해서

 

1월 10일자 ≪동아일보≫는, 김순덕 논설위원의 “‘앙꼬’ 없는 찐빵 먹는 법”이라는 논설을 싣고 있다. 바로 “‘고용 없는 성장’의 잔인함”에 관한 얘기이다. 이런 저런 너스레를 늘어놓으면서, “고용 없는 성장이라니, … 마치 앙꼬 없는 찐빵처럼 앙꼬만 빼먹은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가뜩이나 고픈 배가 아파지기까지 하는 고약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며, 억지 비유를 들어 그 ‘잔인함’을 얘기하고 있지만, 정작 정말 잔인한 것은 그 자신의 논법과 주장이다. 여러 구역질나는 너스레 중에는, 예컨대, 다음과 같은, 고용 없는 성장을 더욱 조장하고자 하는 주장들을 갈겨 놓고 있기 때문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아무리 내 나라지만 과연 이 땅에 투자할 가치가 있느냐다. 내가 제조업체 사장이래도 중국보다 임금은 열 배, 공장 지을 땅값은 40배가 넘는 우리나라에 투자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국가경쟁력은 날로 떨어지는 마당에 서비스업이라도 살리려면 개방을 해야 하는데도 의료는 의사가, 교육은 교육자가 완강히 막는 형편이다. (운운.)

 

결국, ‘국가경쟁력을 위해서 임금을 삭감하고 신자유주의적 개혁 · 개방 정책을 강화하라는, 고용 없는 성장을 촉진하라는 주문이다. 그의 글 어디에도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이 초래되는 근본적인 원인,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순, 자본주의적 과잉생산과 경쟁 격화의 역사적 의미 등에 관한 비판적인 언급은 한 마디도 없다. 비판적인 언급은커녕, 들은 풍월은 있어서, “세계화와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생산성이 높아지고 근로자 쥐어짜기가 경영합리화로 인정되면서, 고용감소 특히 제조업부문의 고용감소는 구조적 산업변화에 따른 영구적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면서도, 그리하여 “고용 없는 성장이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 “그나마 위안을 주는 것”이라는, 철저히 전도된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 경쟁력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 “중요한 건 줄어든 만큼 새로운 분야에서 일자리가 나오느냐인데 이는 어떤 능력을 지닌 정부를 만나는가에 달린 운수문제가 됐다”고 말하는 것도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발언은 사실은 자신들이 조장한 ‘박정희 신드롬’을, 그리하여 수구ㆍ보수 지향을 대중에게 은근히 선동하고 있는 발언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그가 정말 대중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숙명론과 그에의 굴종이기 때문이다. 즉,

 

개인이 선택할 길은 둘 중의 하나다. 내 한 몸이라도 스스로 앙꼬가 되어 나라의 입 하나를 덜어주는 동시에 앙꼬 없는 찐빵이라도 나눠먹을 것인지, 아니면 지난해처럼 남들 발목잡기로 앙꼬 없는 찐빵조차 아무도 못 먹게 만들 것인지.

앙꼬가 되는 방법으로는 누구도 못 따라 올 경쟁력을 갖추는 것과 입맛을 낮추는 두 가지가 있다. 잔인한 말이지만 [―잔인한 줄은 아는군: 인용자―] (취업)될 사람은 되고, 할 사람은 벌써 하고 있다. 무능한 정부는 아직 안 되고 안 하는 사람의 고마운 핑계가 돼 줄 뿐이다.

 

그러니, ‘이 무능하고 게으른 자들아, 너 자신을 원망하라!?’

그의 얘기를 더 들어 보자.

 

정부가 만들겠다는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란 사실 근로자하기 불편한 환경임을 인정해야 할 때다. 비정규직은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고, [부르주아지의 능력 있는 개라는 증표로서의: 인용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게리 베커 말마따나 임금 양극화 역시 경제성장을 촉진한다는 점에서 감수할 수밖에 없다.

…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 다 같이 못사는 사회를 만들 심사가 아니라면 밀가루 반죽에 재를 뿌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니, ‘구구로 숙명으로 알고, 죽은 듯이 참고 살아라!?’

그러나 이 부르주아 지식인이 모르고 있는 것은, 노동자 · 민중이 싸움을 하는 것은, 비록 착취한 잉여가치를 나눠먹으며 호의호식하는 자신들에게는 그렇게 보이고, 그리하여 심히 심사가 뒤틀릴지 모르지만, 결코 “남의 발목잡기”도, “다 같이 못사는 사회를 만들 심사”도, “밀가루 반죽에 재를 뿌리는 일”도, 하물며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려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노동자 · 민중이 싸움을 하는 것은 바로 역사의 시곗바늘을 제대로 돌려서 착취와 억압이 없는 사회를 만들려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고용 없는 성장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지속 가능한 것인가?

김 논설위원이 “세계화와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생산성이 높아지고” 운운하고, 임 교수 역시 “새로운 생산방식” 운운하고 있지만, 실제로 ‘고용 없는 성장’, 혹은 ‘고용을 수반하지 않는 성장’이란 최근 수십 년 간의 과학기술혁명의 성과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혁명의 성과로 노동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졌고, 그리하여 과거와 같은 숫자의 노동력으로, 혹은 그보다 훨씬 적은 노동력으로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사용가치를 생산할 수 있고, 유통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고용 없는 성장’이, 임 교수의 주장과는 반대로, 결코 “더 이상 더 많은 노동력의 동원이 곧 더 큰 가치생산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도 아니며, 지속 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사실 상당히 어려운 경제학적인 분석과 설명이 필요한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그럴 여유가 없기 때문에 결론만을 말하자면, 가치는 인간노동만이 그것을 만드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가치란 사회 속에서의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생산수단을 포함한) 생활수단을 생산하는 그 인간노동의 교환관계 · 비율을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기술혁명의 성과로 ‘고용 없는 성장’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한편에서는, 생산물이 갈수록 무가치하게 생산된다는 것을, 그리하여 무상으로 분배되도록 생산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는 사유재산제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는 명백히 모순되는 것이다.

그리고 고용 없는 성장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다른 한편에서는, 생산수단이 소수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고, 사회구성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자본주의 사회, 그리하여 그들은 자본에 ‘고용되어야만’ 노동할 수 있고 생활수단을 획득할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갈수록 많은 다수가 ‘고용되지 못하게 된다’는 것, 즉 실업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우리 사회를 포함, 세계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고용 없는 성장’이란 바로 그러한 상황을 의미하는데, 그것이 과연 지속될 수 있으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양립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근로자하기 불편한 환경”이 아니라, ‘근로자들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 대대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한 환경이 지속될 수 있을까?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런데 더욱 의미심장한 문제는, 그렇게 자본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는 ‘고용 없는 성장’, 즉 과학기술혁명의 진전이, 다름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 그 자체의 내적 필연성으로 인해서 갈수록 가속도적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지금의 ‘고용 없는 성장’, 과학기술혁명의 진전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다름 아니라, 갈수록 만연할 수밖에 없는 과잉생산, 그에 따라 갈수록 격렬해지는 경쟁이, 우리가 일상에서 절실히 경험하는 것처럼, 그것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는 거의 한계에 달하면서 오늘날의 사회문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격렬해지는 계급투쟁이 발생하고 발전해 가는 것이다.

 

내가 오늘 이 글을 쓰도록 자극을 준 김순덕 논설위원 같은 분들이야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자본주의 자체가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는 것이고, 그것도 이제 매장할 시간이 임박한 것이다.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나가며

 

이번에도 다음과 같은 본문의 내용을 인용하며 ≪피억압의 정치학 –한국사회와 노동자 · 민중운동≫ 이 책의 두 번째 서평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다음호에 계속될 예정이다.

  

노동자 · 민중운동의 정치적 무능력의 또 다른 상당 부분은 실용주의 · 편의주의 · 경험주의에 안주하면서, 이념과 이론은 관념적 혹은 소부르주아 급진주의의 ‘진보적 지식인들’에 의존하는 데에서 연유한다. 그들 ‘진보적 지식인들’의 대부분은 참으로 이상야릇한 청산주의적 ‘맑스주의’를 표방하고 있는데, 그들의 그러한 이념 ·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이론적 불철저성 탓인 것이다. 이리하여 노동자 · 민중운동의 사상적, 이념적, 그리고 조직적 정체(停滯)가 너무나 오래 지속되면서 부르주아지의 일방통행이 새롭게 구조화돼 가고 있다. 부르주아적 의제의 일방적 지배를 극복하고 노동자 · 민중이 생존 · 생활의 의제, 해방의 의제를 사회적 · 정치적으로 세워가기 위해서는 노동자 · 민중운동의 진지한 자기 점검과 재정비가 필요하다.”

 

“‘노동운동의 정치적 · 이념적 발전을 위해’ ‘생각하며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이 부족한 책을 바친다. 2008314일 슬픈날에…”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이른바 ‘임금지불능력론’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채만수, ≪노동자 교양경제학≫(전면개정판), 노사과연, 2006, pp. 302-10 참조.
2 “노동시간, 임금, 이윤, 그리고 초과노동 할증률”, ≪현장에서 미래를≫, 2003년 1월호. 이 글은 수정ㆍ보강되어 ≪노동자 교양경제학≫(전면개정판, 노사과연, 2006)에도 “제6강에 대한 보론 2”로서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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