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준엽 | 회원
* 이 글은 지난 7월 17일에 있었던 청년위원회 제1회 토론회의 발제문이다.
Ⅰ. 청년(학생)운동의 정의에 관한 이론적 문제
정의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것의 정의는 연구의 시작에서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연구의 결과 수립된 것이다. 청년(학생)운동의 정의의 문제도 그렇다. 하지만 청년(학생)운동의 연구는 무에서 시작할 수는 없는 것이고, 청년(학생)운동에 대한 막연한, 추상적인 일반적 관념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그것에서 청년(학생)운동과 관련된 여러 규정들의 연관을 파악하면서, 청년운동의 참모습을 규명해나가는 것이 청년(학생)운동에 대한 정의를 수립하는 기본 연구 방향이라고 하겠다.
청년(학생)운동은 <청년들에게 특수하게 발생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청년들의 활동>이라는 불완전한 정의에서 연구를 시작해보자. 이때 제기되는 여러 문제가 있다. 먼저, “청년들에게 특수하게 발생하는 모순이란 무엇인가”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와 동시에 “청년들은 단일한 집단인가”하는 문제도 제기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청년들의 활동은 –지금의 현실에 기초해서-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가”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청년운동과 연관된 다양한 문제들을 상호연관성 속에서 파악해나가면서, 결론적으로 한국 사회구성체 발전과의 연관성 속에서 청년운동을 정립하면, 청년운동에 대한 정의가 수립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청년범주에 대한 추상적 보편을 통한 정의로부터 청년운동을 정의하려는 시도와 청년(학생)의 사회적 존재를 규명할 때 나타나는 몇 가지 편향들을 검토하면서 청년운동에 대한 정의를 수립해 나갈 것이다.
먼저 “청년운동이란 무엇인가”하는 문제는 청년이라는 세대적 범주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몇 가지 외면적 특징들, 예를 들면, 청년의 세대적 기질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되는, ‘학습에 관심이 많다’, ‘활기차다’, ‘급진적이다’, 등등으로부터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청년들은 그들의 세대적 기질에 의해, 운동에 포섭되기 쉽고, 주체성을 띠며, 따라서 혁명운동의 주요 구성부분이다.”라는 식의 말이 이러한 사고를 대표한다. 그렇게 추상적으로 설정된 청년범주를 통해서 청년운동을 정의하게 된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지 않아 보이는 현상이 발생했을 때, 그 문제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고, 같은 말이지만, 청년범주를 고정된 것으로 바라보게 됨으로써 다른 것들과 연관 속에서 변화하는 청년범주의 내용들을 전혀 포섭할 수 없다. 이러한 시도는 청년들로부터 보이는 몇 가지 외면적 특징들을 추상해서, 그것들로 청년 범주를 설정하고, 이렇게 고정된 청년범주를 통해서, 다시 청년운동을 설명하는 형이상학적 논의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실천과 이론의 불일치를 극단적으로 심화시킬 수밖에 없고, 운동 주체의 소멸로 나아가게 한다.
청년범주에는 그 내부에 “청년”이 아닌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서로 다른 이해와 특수한 경험을 가진 청년집단들, 개인들이 함께 있다. 그러면서도 청년범주가 성립될 수 있고, 따라서 청년이 갖는 고유한 모순의 해결로서 청년(학생)운동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규명하는 것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특수한 임무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적 청년 개개가 자신의 개별성을 가지면서도 청년 일반이 겪는 고유한 모순이 성립되고, 그에 기초해서 청년운동이 성립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오직 현 단계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서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 한국자본주의의 지금으로부터 규명될 수 있다. 청년이 갖는 세대적 특징은 일반적으로 노동력의 재생산과정, 자본주의적 생애주기에 의해 규정되며, 지금은 특히, 한국 자본주의의 고도화된 발전과 그 위기라는 규정이 청년이 갖는 고유한 모순의 내용이 된다. 이 고유한 구체적 내용이 청년(학생)운동의 강령이 되며, 청년(학생)운동의 전략전술적 목표를 규정하는 객관적 근거이다.
위의 내용이 청년(학생)운동의 본질을 밝혀줄 수 있는 이론적·방법론적 기초라고 하겠다.
Ⅱ. 현단계 청년(학생)운동의 문제
앞에서는 청년(학생)운동을 그 정의를 위한 이론적·방법론적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이제는 역사적인 과정과 함께, 현단계의 청년(학생)운동의 상을 규명해보도록 하자. 과거, 소위 “80년대 학생운동”과 지금의 “청년(학생)운동”은 서로 다른 경제적 규정성 속에 있다. 청년(학생)운동의 정치적 목표와 청년들을 설득하는 방식은 모두 그들이 살고 있는 구체적인 삶, 즉 한국자본주의의 현 발전 수준에 기초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과거와 오늘의 경제적 규정성은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앞에서 청년에 대한 추상적 인식에 기초한 청년(학생)운동을 성립시키려는 시도는 그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볼 때, 그 비(非)변증법적 접근방식에도 불구하고, 근거를 갖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한국자본주의의 상승발전시기,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지금과 같이 전면적인 자본주의의 위기로 표현되지 못하고, 자본축적이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순조롭게 진행되던 시기에 그 근거를 갖는다. 자본축적시기에는 전반적으로 새로운 노동력이 요구된다. 신세대의 노동력이 충분히 흡수되는 시기이며, 심지어 일시적으로 부족해지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시기, 20세기 중후반 한국의 청년(학생)운동이 성립되었다는 그 특수성이 그 시대의 청년(학생)운동의 본질에 반영되어있다.
한국 자본주의가 청년 세대의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으로부터 청년들의 진취성, 활동성과 같은 성격들이 강조될 수 있었다. 지금과 같이 청년의 노동력이 불필요한 것으로 취급되는 시기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다. 바로 여기에, 당시의 청년(학생)운동에 대한 접근 방식의 형이상학적 오류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이론이 먹히는 역사적 조건이 있는 것이다.
ⅰ. 한국자본주의 팽창기 청년(학생)운동
가. 당시 대학생 운동의 조건
과거 청년(학생)운동이 대학생들을 소위 ‘이데올로기적 존재’로 보고, ‘존재 이전’의 문제를 주요하게 제기하고, 노동자·인민과 계급적 이해를 같이 할 것을 요구했던 것은, 바로 한국 자본주의 팽창기에 육체노동자들과 그들을 관리할 정신노동자들이 대거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생산력 수준의 한계로 지금과 같이 대학이 전면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대학을 나오기만 하면, 대기업 사무직(정신노동자)으로 취직은 보장되어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컴퓨터나 인공지능이 아직 발전하지 않았던 시기, 이들 지식인은 자본에게 매우 귀한 존재였다. 따라서 지식분자로서, 노동계급의 과학적 세계관에 비교적 접근이 용이했던 대학생들이 부르주아적 삶을 살 수 있는 유력한 가능성을 포기하고, 노동자계급의 일원으로서 운동에 복무할 것을 제기했던 것은, 당시의 객관적 조건에 비추어봤을 때, 청년(학생)운동의 과제 중 하나였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객관적 조건이 당시 청년(학생)운동의 ‘존재 이전’을 중심 문제로 제기하게 했다.
이러한 경제적 규정성 속에서 대학생들은 1980년 5월의 광주와 대면하고, 이를 기점으로 운동의 정치적·사상적 발전을 가져왔다. 이는 먼저 막연하게 설정되었던 반외세운동을 반미반제 운동으로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바로 분단의 원흉이 미제와 그에 기생하는 지주·자본가라는 점이 당시 학생운동가들에게 인식되었다. 또한 광주는, 계급성이 다소 막연했던 당시의 민주화운동이 인민대중의 물리력에 기초한 운동으로 변모해야 한다는 점을 제기하였고, 이는 우리 운동에서 노동계급의 과학적 세계관이 어느 정도 일반화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 폭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동구권 등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좌절은 우리 운동의 발전 수준에 비해 너무나도 막대한 위기였고, 결국 1980년대의 과학적(혹은 그렇게 발전하는) 운동은 199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그 과학성을 상실하고,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그 자리를 물려주고 만다.
나. 당시 대학생 운동의 계급성 확립 실패의 문제
당시 대학에 진입하지 못한 청년들은 육체노동을 했는데, 이들은 여러 조건들에 의해 과학적 지식에 접근하기 매우 힘들었다. 한국자본주의 팽창시기(1950년대 한국자본주의의 성립 이후 1989년 하반기 혹은 1997년까지)의 전반기, 즉 대략 1970년대 초까지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국가가 주도적으로 농민층을 분해시키고 공업 노동자로 만드는 과정이 당시 내내 있어왔다. 그 후반기에도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완만하게 높아졌지만, 자본의 양적 성장은 폭발적이었기 때문에, 자본은 계속해서 더 많은 노동력을 요구했다. 당시 자본은 국가의 파쇼적 폭압을 통하여 노동자들의 저항을 분쇄하고 절대적 잉여가치 창출의 길을 달려왔다. 노동법에 적힌 8시간 노동제는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이는 생산설비의 발전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노동력을 양적으로 더 많이 투하하고, 노동력 재생산비용 상승(임금)을 최대한 억제해야 시장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는 사정에서 비롯된다. 바로 이러한 조건 하에서 한국자본주의 팽창기의 청년 노동자들은 살아왔다.
한국자본주의의 근본적으로 낮은 생산력 수준 때문에, 노동자들은 공부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당시 청년들 대다수는 도시의 공장 노동자거나, 농촌의 농민이었다. 한국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후자에서 전자로의 이행이 가속화되었다. 당시의 한국자본주의의 생산력은 지금의 경우와 다르게, 그 일부를 대학교육에까지 나눠줄 형편이 되지 못하였는데, 이는 청년 노동자들의 정치적 발전에 있어서 제약조건이다. 청년 노동자들이 경공업 산업에서 장시간 단순 노동을 할 수 있는 지식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자연과 사회의 합법칙적 발전의 내용을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조건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과는 다른 조건인데, 지금과 같이 대학교육을 받는 사람의 비율이 73.7%(2021년 기준)라는 보편성을 가지게 되는 가장 큰 근거는 바로 사회적 생산력의 증대 때문이다. 생산력의 발전으로 청년 노동력의 대부분이 대학교육에 돌려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현재 청년의 정치적 발전 가능성의 객관적 근거가 된다.
한국자본주의 팽창기 청년들의 이러한 조건에는 1980년대 운동의 거대한 한계[1]물론 그 한계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고, 운동의 발전 속에서 소멸할 수 있는 한계였다. 하지만 쏘련 붕괴로 1980년대 운동 붕괴의 큰 요인이 되었다.가 내포되어 있다. 당시 가장 주요한 문제는 “존재 이전”을 통해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에서 먼저 (불완전한) 계급성을 획득한 대학생들이 공장과 농촌에 들어가서 노동자·인민을 교양하고, 그들이 스스로 자기의 존재성‧계급성을 깨우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과학적 사회주의에 기초한 노동계급운동이 실질화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물론 선진분자의 도움을 배제하지 않는다!- 스스로 깨우쳐야 하며, 노동자 지식인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그들이 사회발전의 필연성을 노동과정 속에서, 투쟁 속에서 스스로 깨우치고, 많은 노동자들이 이를 시작으로 사회발전의 합법칙성을 더욱 전면적으로 인식해나갈 때만이 비로소 우리 운동이 사회주의 혁명을 실질적으로 담보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합이 1980년대 대학생들이 중심이 된 몇몇 정치조직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형성되가고 있던 시점인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 동구권의 붕괴를 기점으로 과학적 사고 자체가 붕괴되고 만다. 이와 함께 근로인민대중이 “존재 이전”을 한 대학생들과의 결합을 통해서, 자신의 역사적 임무를 깨닫고 앞으로 전진했던 시대는 막을 내리고 만다.
우리가 과거 한국자본주의 팽창기에 선배 운동가들로부터 계승해야 할 것은 바로 이 과학성, 맑스-레닌주의이다. ’80년대 운동‘은 60년대, 70년대 반독재운동의 정치적 한계를 비판하고, 운동을 과학적 기초(맑스-레닌주의) 위에 올려놓으려 했다. 세계의 제현상을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초해서 보고, 한국 사회의 변혁을 실질적으로 준비해나가는 것, 이것이 그들의 정신이었다. 우리는 바로 이 점을 계승하고, 변화된 지금의 현실에 맞게, 새로운 운동을 준비하면 된다.
ⅱ. 한국자본주의의 성숙기, 위기 국면의 청년(학생)운동
가. 변화된 경제적 조건에서 청년들의 전반적 상황
그렇다면 지금 변화된 경제적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한국자본주의의 성숙도이다. 한국자본주의의 성숙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모순이 파생되고, 자본주의 자체를 근본적인 위기에 빠뜨리는 과잉생산공황이 만성화되어 있다.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력의 발전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극심한 비조응의 표현이며, 다음 단계의 사회구성체인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의 필연성을 보여주는 가장 본질적인 징표이다.
이는 청년들의 구체적인 삶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로 표현된다. 한국자본주의의 팽창기와 다르게 지금의 청년들의 노동력은 과거에 비해 덜 필요하다. 아니, 교육 받고 시장에 나오자마자 폐기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보는 것이 맞겠다. 청년 예비노동자가 사용가치를 생산할 능력이 충분히 있음에도, 자본의 입장에서 그들을 고용하는 것이 이윤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청년들의 노동력이 용도 폐기되고, 비정규직 고용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산업의 전 영역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청년들에게는 극심한 고통이다. 지금 대학생들에게는 대기업 사무직, 공무원, 공기업 취직과 같은 소수 상층 노동자의 길과 대다수 비정규직 노동자의 길이 있다. 문제는 대기업, 공기업, 공무원 등의 소수의 안정적인 일자리들도 계속 그 수가 줄어들고 있고, 그 노동조건이 더 열악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자본주의 생산력과 생산관계 비조응의 명확한 표현이다.
한 예로 사범대 졸업자 및 교직 이수자는 임용고시를 칠 자격이 주어지는데, 학생 수 감소(이 또한 자본주의 위기의 산물이다)와 교육 관련 기술의 발전(예를 들면, 쏘프트웨어를 통한 교육)으로 정교사 취업 시장이 과잉상태이기 때문에, 자격이 주어지더라도 정교사가 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이 과잉 상태는 교직 이수 제도 폐지방침에서 아주 극명하게 드러난다.
작금의 한국 대학생들은 위와 같은 경제적 규정성들에 의해, 자신의 노동력을 고평가 받아 비싸게 팔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정체성은 청년들의 삶 일반을 규정한다. 근로대중의 청년들은 쌓아놓은 재산이 전혀 없으며, 자기 노동력 가치 이하로 팔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 그 부모세대도 언제까지나 자식을 부양할 수 없고, 자신의 노후생활도 불안정해지고 있는 형국이다. 고학력, 고능력임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는 이 자본주의 모순의 강력한 표현! 우리 시대의 청년들은 한국자본주의 모순의 약한 고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지금 청년들을 강타하는 한국자본주의 모순의 한 발현 모습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거와 같이 대학생의 낭만성, 지성을 강조하면서, 대학생 운동을 꾸리려 하는 시도는 학생들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경향은 강화되어 왔고, 앞으로도 더 강화될 것이다.
이러한 청년들의 삶은 과거의 조건과는 상당히 다르다. 과거와 다르게 지금의 청년들은 거의 대다수가 대졸(재학)자이다. 과거에 계급의식의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이 부르주아 계급의 반동적 이데올로기 주입과 함께 문맹이나, 지식의 절대적 부족 모두에 있었다면, 지금은 후자의 요인이 과거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대학은 취업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생산력의 발전으로, 대학 이외에서도 대학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충분히 많고, 공부할 수 있는 일정한 여유가 생겼다. 대다수 청년들이 대학생이거나 대졸자이며 대학생이 아니더라도,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과 온라인 수업들로 대학지식들을 비교적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대학생과 비대학생의 지식적 차이를 줄게 하는 요인이며, 인텔리적 성격을 대학생만(적어도 대학생을 거쳐야) 가질 수 있었던 옛 조건에서 벗어나게 되는 계기이다. 이는 청년 노동자가 스스로 과학적 사회주의를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이 과거에 비해 증대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청년(학생)운동에 있어서 매우 유리한 객관적 조건이다.
나. 철지난 학생운동론 비판
지금 현존하는 청년(학생)운동에 있어서 철저한 과학적 인식의 고수는 사라진 지 오래이다. 사실 우리 모두가 문제의식은 있다. 어떤 방식의 운동이 맞을까? 조금 더 분단모순, 계급모순에 대한 문제를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 등등. 하지만 그 문제의식을 구체화할 과학적 인식의 도구들이 우리들에게 충분히 보급되지 않은 탓에 단지 추상적으로, 따라서 실천에 있어서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문제의식은 있지만 문제를 타개할 역량은 없는 것이 현 시점 우리들의 주소이다.
사실 많은 청년 운동가들이 은연중에 전제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80년대식 학생운동론이다. 캠퍼스 중심으로 학생회장을 당선시켜 학생 사회를 민족적·민중적으로 개편하는 것! 이런 학생회장들을 토대로 전국적 학생운동조직을 만들어 내는 것! 바로 80년대에 정립된 학생운동론이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진 만큼 그런 식으로 운동이 전개되는 것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1980년대 대학진학률이 전반적으로 40%[2]고등학교 상급학교진학률, e-나라지표 <https://www.index.go.kr/potal/stts/idxMain/selectPoSttsIdxSearch.do?idx_cd=1520>대를 넘기지 못하는 것과 달리 2021년 대학진학률이 73.7%[3]같은 곳이다. 이 지표는 1980년대와 달리 지금은 청년층 대다수에게 대학교육을 시행할 수 있을 만큼 자본주의의 생산력이 발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분명히 우리 운동에 긍정적인 조건을 형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생들을 ‘이데올로기적 존재’로만 규정하고, 청년(학생)운동에서 대학생만을 강조면서, 대학 학생회 중심의 운동방식을 밀고 나가려고 하는 것은, 그 건강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운동의 소멸을 예비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조건들에 대해서 좀 더 세밀하게 알아보자.
첫째, 대학기관 자체의 성격이 변모하였다. 지금의 대학구조는 서열화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 부르주아 및 상층 (소)부르주아 계급의 자식들이 상위권 대학에 진학[4]“지난해 상반기 서울대 ‘9∼10분위 추정 학생 비율’은 73.6%였다. 9분위 이상은 가구의 월 소득이 893만 원을 넘어 장학금 혜택에서도 제외된다. 즉 … Continue reading한다. 이러한 서열화는 1997년 대공황 이후 한국자본주의 빈부격차의 극심화를 반영함과 동시에, 청년들을 서로 분열시켜 노동계급 의식을 마비시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있다. 또한 지금의 대학은 완전히 전문취업학원으로 변모하였으며, 대학 자체가 어떤 학문적 탐구의 기관이라는 성격을 잃었다.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력을 그것의 생산관계가 파괴해나가고 있는 과정, 혹은 자본주의의 반동화 현상으로 해석된다. 그런 점에서 대학생만의 특유의 학문적 탐구의식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둘째, 지금의 일반적인 대학생들은 취업준비생, 즉 예비노동자로서 자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다. 대학생이 청년층 전체로 일반화되고, 대졸 실업자가 크게 증가했다. 이는 한국자본주의 위기 국면이라는 경제적 규정성에 따른 것이다. 상위권 대학으로 갈수록 이러한 경향이 상대적으로 강화될 수는 있겠지만, 그러한 것이 전체 청년(학생)운동의 본질을 이룰 수 없다. 대학 과정 전체가 취업 준비 과정이 되는 현실에서, 취업과 동떨어진 정치적 내용을 매개없이 전달할 때, 학내 민주화 운동을 고립시키고 쇠퇴시킬 위험도 있다.
셋째, 대학생은 과거의 독점적 사회적 지위–지식인–를 잃어버렸다. 과거에는 대학이 한국자본주의 팽창기에 지식인의 수가 적었으므로, 그들을 양성하는 대학공간은 매우 중요했고, 따라서 그 구성원인 학생의 사회적 지위가 대단히 높았다. 그래서 당시 대학생들의 목소리는 사회적 파급력이 매우 컸다. 이것이 대학생(성)을 중심으로 운동이 성립될 수 있었던 이유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자본주의 생산력의 고도의 발달로, 지식인이 일반화되고, 낡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이들을 흡수할 수 없게 되었다. 더 이상 지식 일반을 대학생이 독점적으로 얻을 수 있었던 시기가 지났다. 따라서 과거에 청년 중 대학생이 가지고 있었던 최대 이점 –지식을 독점적으로 소유-가 사라졌기 때문에, 청년(학생)운동에서 대학생을 강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생이 청년층에서 양적으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 대학생이 임노동 관계에 포섭된 노동자보다 상대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점 등을 말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생 운동이 중요하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물론 동의한다. 위에서 말한 측면들은 대학생들이 전체 청년(학생)운동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되는 이유이다. 위의 이점들은 지금 소규모로 존재하는 청년(학생)운동의 구성원들의 대다수가 대학생인 현실적 근거이기도 하다. 또한 운동의 초기에는 과거의 운동노선에 따른 운동이 새로운 청년 운동가들을 발굴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미약하나마 과거의 운동노선에 기초해서 아직까지도 인적 재생산이 성립하는 공간, 조직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념할 것은 우리 운동이 대중운동으로서 발전하기 위해서는 청년이 대학생으로서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예비노동자로서 운동하는 것이 청년의 변화된 존재 조건에 합치하며, 따라서 이것이 운동 확장·발전의 길이라는 것이다.
기존의 청년(학생)운동의 내용이 크게 달라져야 한다. 대학생이 일반화되어 ‘특권층’으로서 대학생이라는 정체성이 소멸된 현실에서 청년(학생)운동은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청년(학생)운동은 자신의 객관적 존재성에 기초해서 운동하면 된다는 말이다. 바로 인텔리적 특성을 가진 예비노동자! 바로 여기서부터 청년들에 대한 설득이 시도되어야 한다. 공기업, 대기업, 공무원, 전문직 등 갈수록 그 수가 줄 수 밖에 없는 소위 ‘안정적인 일자리’에 대한 환상을 직시하는 것. 그것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확대되는 것은 자본주의의 필연이라는 것. 따라서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그러한 현실이 변혁된다는 것. 그것에 대한 앎에서 우리 운동이 출발해야한다.
Ⅲ. 청년의 정치적 발전의 필연성
앞에서는, 한국자본주의의 팽창기라는 규정이 소멸한 지금, 청년들이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지 살펴보았다. 또 청년운동의 전망을 과거와 같은 경제적 조건에 근거해서 찾으려고 하는 편향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지금부터는 다음과 같은 전개로 청년(학생)운동의 여러 문제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현재 청년들 삶의 객관적 조건이 과거보다 그 지적 수준의 발전으로 사회주의 건설에 유리하게 변화했다는 점을 중심으로 위의 서술을 총화해보자.
둘째, 그 객관적 조건에서부터 나오는 가능성들이 필연성으로 전화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지 철학적 측면에서 살펴보자.
셋째, 우리 주체 역량의 여러 문제들을 살펴보자.
넷째, 현 운동 상황과 관련하여 그 문제점들을 짚고, 대략적이나마 우리의 운동 방향에 대해서 고찰해보자.
ⅰ. 자본주의가 산출한 사회주의의 객관적 조건으로서 청년들의 지적 능력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1970~80년대의 청년(학생)운동과 2000년대 이후의 청년(학생)운동은 질을 달리한다. 그 근거는 대학생들의 사회적 지위, 성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한국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고, 세계분업이 더욱 다층화되었으며, 국가 간의 이동도 매우 활발해진 사실 등 자본이 필요한 노동력의 질이 상승했다. 이러한 과정은 자본주의적 생산력의 발전과 함께 진행되는 것이며, 고등교육 또한 그에 발맞추어 보편화되었다. 자본주의적 생산력 발전의 이러한 측면은 사실 사회주의의 객관적 조건의 하나를 창출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발전의 요구에 맞게 피억압 청년대중을 교육함으로써, 피억압 청년대중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필연성을 이해하고, 능동적일 수밖에 없는 사회주의 건설의 추동자가 될 수 있다는 실재적 가능성을 배태하는 것이다. 즉 순전히 자본주의의 요구 때문에 진행된 교육이 사회주의의 조건이 되는 모순이 청년들의 삶 속에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건설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분리된 채 전자가 후자를 외적으로 강제한다고 해서 진행될 수 없다. 사회주의 건설은 노동자 자신이 새로운 사회 건설 과정의 합법칙성을 스스로 인식하고, 스스로 이해한 바대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노동자의 지적 능력은 아주 중요한데, 자본주의 태내에서 이것이 배태된다는 모순은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필연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이다. 청년 노동자의 지적 능력 발전, 그런데도 그들을 사회적 생산력 내로 포섭하지 못하는 낡은 생산 관계의 반동성, 이것이야말로 청년들의 정치적 발전의 가장 중요한 근거이다.
바로 청년 노동자의 이 측면, 즉 지식인이자 예비노동자의 성격을 강하게 가진다는 것은 과거 운동이 걸어야 했던 길과 비교해볼 때,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는 훨씬 더 곧은 길이 된 측면이다. 과거의 운동에서 청년 노동자는 이론가이면서 동시에 실천가이기 어려웠다. 대학생이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를 교육하는 것으로서는 물론, 당시 조건에 의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해야 했지만, 운동에 있어서 필요한 대자적 노동자가 충분히 확보될 수 없었다. 주체의 힘은 결국 필연성을 더 많이 아는 데에서 나온다. 외적 필연성을 더 많이 더 구체적으로 인식해서, 자신과 그 필연성의 연관까지 파악해내는 것. 바로 이것에서 주체의 힘이 나오고, 능동성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조건에서는 먼저 의식화된 대학생은 그 존재에 있어서, 얼마든지 출세의 길을 갈 수 있었다는 측면에서 불완전했고, 노동자는 스스로 학습할 여유와 그럴 수 있는 기반(지금의 온라인 강의, 출판물, 등등)이 별로 없었다는 점에서 계급의식 발전이 쉽지 않았다. 이는 그만큼의 운동의 한계를 부여한다. 이는 물론 운동의 발전을 통해 극복될 수 있었지만, 쏘련 붕괴라는 거대한 파고를 맞고, 극복에 실패한다.
하지만 지금은? 대학생이 공장에 가서 노동자들을 교육하는 방식의 유효성은 소멸하였다. 이제는 대학생과 청년 노동자가 크게 다르지 않다. 대학생은 예비노동자로서 청년 노동자의 존재성과 다르지 않다. 지금의 일반화된 대학생이 예비노동자라는 규정을 가지면서, 과거 청년 노동자에게 부재했던 인텔리성이 생긴 것이다. 바로 여기에 노동자가 <자본론>을 읽고, 현대자본주의를 분석하고, 그에 따른 정치적 전망을 제시한다는 노동계급의 전형이 발견될 실재적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지금의 청년 노동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해야만 하는 일이다.
ⅱ. 청년들의 정치적 발전의 가능성이 필연성으로 전화하는 문제
앞에서는 청년들이 충분히 정치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객관적인 요인들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정치적 발전이 현실화하여, 지금의 가능성이 필연성으로 전화되기 위해서는 사실 더 많은 근거가 필요하다. 아직 우리에게 그러한 운동이 영향력 있게 존재하지 못한 상황에서, 지금의 가능성이 필연성으로 어떻게 전화될 수 있는지 그 철학적 근거를 따져보아 우리 운동의 가능 근거를 알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체 개입이 무엇이고,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가장 보편적인 차원에서 미리 살펴볼 수 있다. 이 철학적 근거의 문제를 먼저 밝히고, 그다음에 우리 주체 역량을 되돌아보면서, 지금 당면한 과제들을 몇 가지 선정해보려고 한다.
가. 우리의 운동의 철학적 근거로서 가능성과 필연성의 문제
사태가 서로 연관하지 않고 일단은 즉자적으로 존재한다고 본다면, 여러 사태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로만 일어날 수 있는 후속 사태들이 거의 무한에 가깝다. 예를 들어 지금 강의실에 에어컨이 고장나 10분 안에 매우 더워질 수도 있다. 갑자기 어떤 동지가 나가야 할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혹은 윤석열 정부가 청와대로 다시 주거지를 이전할 수도 있다. 이것들은 그 매개 연관이 없이 고찰된 사태들이다. 즉 근거가 없다. 이를 형식적 가능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즉자적인 사태가 다른 것과 서로 연관을 이루면 곧바로 개개 사태는 실재적 현실성이 된다. 그리고 서로 다른 실재적 현실성 간의 연관으로 수많은 또 다른 실재적 현실성이 생성되는 것이 가능한데, 실재적 현실성이 다른 실재적 현실성을 가져오는 것을 실재적 가능성이라 한다. 예를 들어 외적 합목적성에 지배되고 있는 청년 대중과 외적 합목적성을 지배하는 능동적인 청년운동가들이 있다고 하자. 양자는 서로 다른 실재적 현실성을 가지는 것이다. 이때 양자가 결합하는 것을 통해 청년 대중운동이 성립할 실재적 가능성이 있다. 이때 후자의 노력으로 양자가 서로 실질적으로 결합하여 청년 대중운동이 성립되면, 이 실재적 가능성이 실재적 현실성으로 전화된 것이고, 이 이행 자체를 필연성이라고 한다.
이때 청년운동가들은 청년운동 발전을 위해 여러 객관적 조건들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객관적 조건들의 연관을 충분히 파악함으로써 실재적 가능성을 파악할 수 있다. 즉 이 객관적 조건들은 실재적 현실성인데. 실재적 현실성들의 연관이 앞으로 일어날 실재적인 것으로서 실재적 가능성을 산출한다. 이는 이때 이 객관적 조건들, 즉 실재적 현실성을 다른 것과의 충분한 연관 속에서 보지 않으면, 실재적 가능성을 볼 수 없다. 즉 그것은 죽은 지식이 된다. 예를 들어 외적 합목적성에 지배되는 청년들의 상태를 그 자체로서만 고찰한다면, 그것이 다른 것으로, 즉 능동적인 청년으로 전화될 실재적 가능성에 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런 지식은 단지 허무주의를 만들 뿐이다.
“설령 한 사회가 그 운동의 자연법칙을 찾아냈다 하더라도 –그리고 근대 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밝히는 것이 이 저작의 궁극적 목적이다- 그 사회는 자연적인 발전단계들을 뛰어넘을 수도, 법령에 의해 그것을 제거할 수도 없다. 그러나 산고(産苦)를 단축하고 완화할 수는 있다.”[5]칼 맑스, ≪자본론≫, 제1권, 제1분책, 채만수 역, 노사과연, p. 17
법칙은 “뛰어넘을 수도, 법령에 의해… 제거할 수도 없다.” 즉 모든 것은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그 “산고(産苦)를 단축하고 완화할 수는 있”는데, 법칙이 실행되는 여러 가지 경로들은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존재하며, 이 중 우리(운동 주체)는 실제적 가능성을 더 많이 알고, 그것들 중 “산고(産苦)를 단축하고 완화”하는 경로를 현실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파악한 당면과제, 즉 현실화해야 할 가능성을 단계적으로 해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조직이 확보하는 영향력을 더 키운다. 우리 자신은 또한 하나의 객관으로서 다른 객관적 요소들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우리의 주체적 역량이 커질수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더 많아진다.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청년(학생) 대중운동 건설에 성큼성큼 다가가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청년들의 변화된 조건이 정치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과거보다 더 유리한 실재적 가능성을 형성할 때, 우리 운동 주체의 개입이 청년들의 정치적 발전을 현실화할 수 있는 철학적 근거가 있다.
ⅲ. 현재 청년(학생)운동의 역량과 방향
가. 주체 역량의 객관적 측면
청년들이 극우화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보면, 우리의 주체 역량이 얼마나 미약한지 알 수 있다. 청년들의 현 상태는 우리 역량의 표현이기도 하다. 청년들의 극우화는 청년들의 경제적 조건이 너무나도 악화된 상황에서, 청년들을 지배하는 인식되지 못한 필연이 그들에게 파괴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때 청년운동이 영향을 주어 그들이 극우적으로 전화되는 것을 막고, 청년들의 정치적 발전을 추동해나가는 역할을 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다. 이전 세대 운동에서 발생한 사건인 쏘련 붕괴가 가장 큰 요인이다. ’80년대에는 맑스-레닌주의가 다수 운동가에게 명확하게 인식되지는 않았더라도, 그 지향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공유하고 있었던 하나의 상식이었다. 이는 운동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그러했는데, 노동운동은 물론, 학생운동, 여성운동까지 맑스-레닌주의적 철학 체계, 경제학이 불완전하게나마 파급되어 유의미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발전 수준의 한계로 인해, 그들에게 사회주의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이 없었던 탓에, 사회주의 세계의 붕괴는 맑스-레닌주의 이론 자체의 붕괴로 느껴졌을 테고, 이는 맑스-레닌주의 전체를 의식적으로 버리게 된 원인이 된다.[6]이는 분명 철저하게 분석되어 나온 과학적 결론이 아니라 운동에 대한 감성적 태도로 비롯된 결론에 불과하다. 그 누구도 맑스-레닌주의의 철학, … Continue reading 그 결과 변절해서 반동의 길을 걷거나, 서구의 새로운 이론[7]들뢰즈, 라깡, 알튀세르 등의 포스트모던, 신좌파 담론들을 의미한다. 이들 철학적 노선은 변증법에 반대하는 것이 공통점이다.을 수입해서 맑스-레닌주의의 빈자리를 메꾸려고 했다. 또 어떤 이들은 맑스-레닌주의가 아닌 ‘맑스주의’를 찾아 3만리 여행을 떠나거나 소위 ‘진보적 민족주의’를 자신의 사상적 근거로 삼기도 했다. 변절을 제외한 두 경향의 운동들이 그나마 남아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제 경향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의도적 기각 혹은 무지로 일관하는데, 이는 사물 현상의 제 연관을 과학적으로 파악하는 세계관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그들에게 사물 현상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불가능한 것으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새롭게 산출되는 실재적 현실성을 자신의 인식체계 속에 근거 있게 포섭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고, 따라서 운동의 발전은 거기서 딱 멈춘 것이다. ’80년대, ’90년대 초 운동이 맑스-레닌주의를 버린 순간 그들 운동의 소멸은 이미 예비되어 있었다.
현 시점 청년(학생)운동의 상황은 위의 전개에 완전히 포섭되어 있다. 남아있는 극소수 청년(학생)운동이 이상의 수준을 유지한다면 똑같이 그 소멸이 예정되어 있다.
지금 청년(학생)운동의 한계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론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우리 운동은 감성적인 것을 중요시하며, 감성적 연계가 지니는 중요성을 과대평가하거나 운동의 본질로까지 여기고 있다. 물론 감성적 연계는 대중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감성적 연계에서 시작하여,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통일적 인식을 수립하는 게 필수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통일적 인식은 이성적 인식이다. 좋은 친구로 지내는 것을 넘어서 세계를 변혁할, 함께 바꿀 동지가 되어야 한다.
둘째, 공통된 과학적 사고의 기반이 없어 서로 다른 정파 간의 토론을 통한 상승발전이 불가능해졌다. 개별적 조직들이 서로 다른 내용을 이야기하지만 공유되는 이론적 인식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가 서로 다른 인식체계에 기초해서 만든 경험을 공유하고 토론할 공통적 기반이 전혀 없다.
셋째, 청년(학생)운동가들의 자주성이 너무나 미약하다. 지금 선배 세대의 정치적·사상적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운동을 만들어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 자주성이 너무나 미약하다. 지금의 운동은 맑스-레닌주의를 상실함으로서 비과학적인 것으로 되고, 따라서 역사발전에 걸림돌이 되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그 운동을 선배 세대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면, 이들을 비판하고 넘어서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된다. 청년들은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하고 행동해야한다.
위의 내용은 모든 청년(학생)운동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이다.
결국 잔존하는 청년(학생)운동도 이런 경향성 속에서 완전히 변화하지 않는다면, 결국 운동 전체의 소멸로 나아가게 된다. 새로운 청년 운동가들이 조금씩 발굴되고 있지만, 이미 그들을 훈련시킬 기존의 역량은 상실되었다. 이렇게 되면 많이 낙후된 지금의 정치적·조직적 수준에서 더 낙후되어, 인민대중의 자주적 운동은 완전히 상실될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바로 우리 운동의 이러한 현 상태도 청년들의 정치적 발전을 요청하고 있다. 이는 우리 주체 역량 내부의 일이고, 청년들이 정치적으로 발전하는 경로밖에 답이 없다.
나. 주체 역량의 주관적 측면
청년(학생)운동의 과제는 지금 운동의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과학적 세계관에 기초한 운동을 다시 조직하는 것이다. 다시 맑스-레닌주의의 깃발을 들고, 전체 운동을 대체해 나가는 것, 변화된 현실에 맞게 맑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는 것, 그렇게 발전된 이론체계에 근거해서 대중을 더 많이 설득해내는 것 등의 과제들을 새세대 청년(학생)운동만이 떠맡을 수 있다. 청년(학생)운동의 부흥은 우리 운동 전체를 살리는 단계적 목표이다. 청년(대중)운동을 부흥시켜 전체 인민대중운동의 동력을 만드는 것, 실로 이것 밖에 한국 사회 변혁 운동의 전망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주체의 힘과 상관없이 제기되는 과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위해 부단히 우리의 힘을 키우고 큰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금 수행할 수 있는 작은 과제들을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활동방향은 학습(연구)·조직·선전이다. 이 세 영역은 항상 가지고 가야하는 활동 내용이다.
첫째, 청년운동가들은 맑스–레닌주의 철학, 경제학 학설을 부단히 공부하여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첫째는 객관 정세를 과학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원칙을 세우기 위함이며, 둘째는 부르주아 반동 학설에 맞서 노동자계급의 과학을 옹호고수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노력은 청년운동가들이 객관세계를 스스로 파악하고, 그 개입방향을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고양하기 위함이다.
둘째, 회원이 많아질수록 부단히 규율을 강화하고, 회원들의 역량을 높여야 한다. 규율을 강화하는 것과 회원 역량을 높이는 것은 동시 진행되는 것이다. 외적 강제로서 규율이 작동하면 그렇게 작동하는 만큼 조직의 힘이 약해진다.
셋째, 선전대상의 수준에 맞게 정치·사상적 내용을 공급하여야 한다. 청년운동가들은 정치·경제 정세를 잘 파악하고,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으로부터 파생된 수많은 모순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대중들에게 잘 설명해주어야 한다. 이때 해당 대중의 인식발전단계와 조응하게 선전내용을 공급하는 것이 중요하다.
Ⅳ. 청년(학생)운동의 전략에 대한 메모
지금의 미약한 조직적·사상적 수준에서 청년(학생)운동의 전략·전술을 고민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이 메모는 단지 지극히 추상적인 수준에서 대중운동으로서 청년(학생)운동의 성립에 있어 필수적인 단계들로 생각되는 것들을 적은 것이다.
현 단계 청년(학생)운동의 전략 목표는 노동하는 청년대중을 획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청년(학생)운동의 주체의 역할은 막대하다. 청년(학생)운동의 전략 목표는 이렇고, 전술적 목표는 모두 이 과제 해결에 종속된다. 청년들은 지금 지식인적 측면과 예비노동자로서의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으며, 양자는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향후 계급의식 발전에 지렛대가 될 수 있는 요인이다. 그런 점에서 청년들에게 노동계급의 당파성을 설파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가능해진다.
전략목표로 가기 위해서 설정되어야 할 중기 목표는 청년 (예비)노동자 대중 속에서 우리 운동이 뿌리내리게 할 수 있을 만큼의 양적 규정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 목표를 확보하고 난 뒤에는 전략목표가 실재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과정으로서 볼 수 있고, 그것이 실재적 가능성이 실재적 현실성으로 전화하는 필연성을 띠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당장 요구되는 단기 목표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맑스–레닌주의에 관심 있는 우리 주위의 청년들을 확고한 맑스–레닌주의 운동가로 자리잡게 해야 한다. 지금까지 미약하게나마 유지되고 있는 학생운동 재생산 틀 덕분에, 초기 운동의 중심은 수도권 지역의 대학생들이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맑스-레닌주의적 경향을 가진 활동가들의 집단적 실천이 우리 운동 내부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쳐야 한다. 지금 우리 운동의 비과학성, 소극성 등을 비판하고, 이들이 하나의 대안정파로서 우뚝서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단단한 조직이 요구된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지금 운동권 내부에 맑스-레닌주의 운동의 지지자들을 최대한 많이 만들고, 이렇게 확보된 힘을 통해서 운동 외부에까지 우리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과정은 노동하는 청년대중과 실질적으로 결합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다. 물론 평소에도 청년 노동자들과의 결합 시도는 있어와야 한다. 어느 정도 활동가들의 양이 확보되면, 더욱 전면적으로 청년 노동자들과 결합할 수 있다. 이들과 실질적으로 결합함으로서 노동계급운동을 중심으로 전체 운동을 변혁할 수 있다.
노사과연
References
↑1 | 물론 그 한계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고, 운동의 발전 속에서 소멸할 수 있는 한계였다. 하지만 쏘련 붕괴로 1980년대 운동 붕괴의 큰 요인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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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고등학교 상급학교진학률, e-나라지표 <https://www.index.go.kr/potal/stts/idxMain/selectPoSttsIdxSearch.do?idx_cd=1520> |
↑3 | 같은 곳 |
↑4 | “지난해 상반기 서울대 ‘9∼10분위 추정 학생 비율’은 73.6%였다. 9분위 이상은 가구의 월 소득이 893만 원을 넘어 장학금 혜택에서도 제외된다. 즉 서울대생 4명 중 3명은 유복한 환경에서 나고 자란 셈” 김동혁 기자, “서울대 학생 70% 고소득층 자녀” ≪동아일보≫, 2017. 7. 13. <http://news.donga.com/3/all/20170713/85330068/1> |
↑5 | 칼 맑스, ≪자본론≫, 제1권, 제1분책, 채만수 역, 노사과연, p. 17 |
↑6 | 이는 분명 철저하게 분석되어 나온 과학적 결론이 아니라 운동에 대한 감성적 태도로 비롯된 결론에 불과하다. 그 누구도 맑스-레닌주의의 철학, 경제학 학설을 합리적으로 비판하지 못했다. |
↑7 | 들뢰즈, 라깡, 알튀세르 등의 포스트모던, 신좌파 담론들을 의미한다. 이들 철학적 노선은 변증법에 반대하는 것이 공통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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