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변증법적 유물론과 자유

 

한동백 | 회원

 

* 이 글은 현대사상연구소의 현대사상세미나 ‘자유’(2022. 6.)에서 발표한 글이다.

 

 

머리말

 

쏘련을 포함한 전 세계 사회주의 나라의 붕괴 이후, 독점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와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이데올로기 간의 역관계에서, 힘이 전자에게로 급격히 치우치게 되었다.

독점 부르주아지의 승리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이데올로기 간의 철학적 논쟁 영역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영향력을 크게 쇠퇴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그 대략적 양상은 다음과 같다:

 

(1) 제 규정 간 매개·연관·체계 대신 원자적 고립을 강조하는 학파의 영향력 증대

(2) 실재와 논리[1]논리학은 세계에 대한 인식의 역사의 총계, 총화, 결론인데, 여기서 인식은 그것의 형식으로서 개념·판단·추론을 포괄한다. (블라디미르 레닌, … Continue reading 간 연계 대신 실재와 논리 간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는 사조의 전반적 팽배

(3) 인식된 필연으로서의 자유 대신 ‘항구적 자유의지’[2]인간은 환경으로부터 그 어떠한 인과적 영향을 받지 않으며, 자연발생성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제한적으로만 존재한다는 자유론으로 … Continue reading 또는 ‘직관적 자유’[3]어떠한 특정한 계기에 의해 순간적인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상 조류로, 실존주의, 생철학과 해석학 등이 이러한 자유론을 갖는다.를 설파하는 사조가 인간 자유에 대한 논증에서 영향력 행사

(4) 인식에 관한 체계적 발전의 세계관 대신 선학(禪學)적 직관, 즉 ‘신비적 체험’을 강변하는 학파의 확장

(5) 존재-사유 일치성에 대한 부정적 견해의 증대

(6) 사건에 대한 체계적 설명, 세계관의 성립 등을 모두 부정하고 일상생활에 천착하는 통속적 교설의 모음집으로서 이른바, ‘생활철학’의 영향력 증대

(7) 과학과 철학에 대한 통일적 세계관에 대한 부정 팽배 (제 학문의 변증법적 연관성의 부정)

(8) 유물론을 자칭하며 객관적 실재에 관한 형이상학적 이해를 설파하는 사조의 영향력 확장[4]대표적으로, 물질과 그 인식에 대한 슬라보예 지젝의 이해는 이러한 편향에 속한다. 그 자세한 내용은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문영찬 저, … Continue reading

 

나열된 것 외 수많은 양상이 존재한다. 이 중 본고는 (3), 즉 인간 자유에 관한 논쟁 영역을 다루며, 그중에서도 변증법적 유물론이 어떠한 설명 방식을 취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을 다룬다. 본고는 이 과정에서, 과거 국내에 소개된 변증법적 유물론자들이 다룬 자유 개념에 대해 검증하고, 그것이 충분한 내용을 갖고 있는지, 즉 그 설명이 충분히 변증법적 설명인지 검토하고, 변증법에서 자유 개념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어떠한지 논증한 다음, 기존의 것을 뛰어넘는 설명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1. 자유 개념에 대한 기존의 설명 방식

 

자유 개념에 대한 유물 변증법적 이해는 여타 존재했던 관념론적 세계관에서의 그것보다 훨씬 더 정교한 설명을 요구한다. 관념론적 세계관에서 결정론은 언제든 버려질 수 있지만, 유물론적 세계관에서 결정론은 결코 버려질 수 없는 관점이기 때문이다. 즉, 결정론의 사수에서 자유는, 그것이 통속적으로 이해된 필연과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필연과 자유의 관계에 대한 해명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중핵적 내용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해명에서 선진 유물론 사상가들의 서술 방식은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에 대응할 수 있게 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역시 중요하다.

 

자유 개념에 대한 기존의 설명 방식을 참조함에서, 본고가 다룰 인물은 A. 코징, O. W. 쿠시넨, N. N. 트루브니코프이다.

 

먼저 A. 코징의 자유 개념에 대해 검증해보자. 코징이 자유에 대해 어떠한 관점을 갖고 있었는지는, 그가 기술한 ≪철학대사전≫의 <자유> 항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이 자연 및 사회의 객관적 법칙성(필연성)에 대해 갖는 관계, 특히 그것을 인식하고 실천적으로 지배하는 정도를 말한다. 자유는, 객관적 필연성을 통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얻어진 능력, 즉 자연과 사회의 합법칙성에 정통하여 이를 의식적으로 적용하고 활용하는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자연과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늘려나가는 데서 성립한다.“ (≪철학대사전≫, pp. 1116-1117.)

 

이는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이 제공할 수 있는 자유 개념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설명이다.

인간은 자연 및 사회의 객관적 법칙성, 즉 그것들의 운동에서 관철되는 필연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실천으로 검증하고, 이로써 자연과 사회를 지배할 수 있다. 이는 인식주체가 외적 대상에 의한 타성(惰性)으로부터 해방됨을 말하는데, 이것은 대상에 대한 인식에서 직접성을 완전히 극복한 후에라야, 즉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속에서 제 규정의 매개·연관을 파악한 후에라야 가능한 것이다. 이 과정은 단순 관조적 성찰(포이어바하가 그랬던 것처럼), 정적(精的) 인식, 이념적 추상(이론적 추상, 오성적 인식의 단계)과 다르며, 이론과 실천의 통일과 맞닿아 있는 과정이다. 즉, 자유의 실현은 인간의 대상적 활동과 별도로 이루어질 수 없다.

 

코징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이 필연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필연성은 인간에 대하여 맹목적으로 스스로를 관철한다. 우리가 필연성을 인식하고 합목적적으로 이를 이용할 때, 우리가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것을 욕구하고 그에 맞추어 행위할 때, 필연성은 맹목적으로 작용하기를 멈추고 자유 속에서 지양되어 보존된다.“ (≪철학대사전≫, p. 1118.)

 

≪철학대사전≫(이하 ‘사전’)의 <자유> 항목의 전체 내용에서 자유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범주에 속하는 필연성과 우연성, 현실성과 가능성과 밀접하게 설명되는 대신에, 전자의 내용이 부분적으로 첨가되어 있다. 이 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필연성은 ”인간이 필연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에서 인간에게 맹목적으로 작용하며, 인간에게 있어서 이는 대상에 대한 타성으로서 자연발생성의 발로로 나타날 것이다. 반대로, 인간이 제반 대상의 합법칙성(그것들의 운동에서 관철되는 필연성)을 인식하고, 목적의식적(합목적적)으로 그 대상을 다루면, 필연성은 인간에게 맹목적으로 작용하길 멈춘다.

이러한 설명이 갖는 문제점은, 그 설명이 인간 자유의 서술에 관해서 본질적이라 하더라도, 헤겔이 지적했던, “근거 관계로서의 본질을 서술함에서 형식규정적 성격을 완전히 사상할 수 없고, 그래서 본질에 대한 설명은 동어반복적 성격을 완전히 털어낼 수 없다”는 그 한계[5]헤겔은 ≪논리의 학≫ <본질론> 제3장에서 규정적 근거가 갖는 특성을 해명하였고, 그 한계를 밝혔다. 그는 “갖가지 규정적 근거에 관한 반성이 … Continue reading를 아주 명확히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근거 관계에서 하나의 사건(‘사건-1’)이 갖는 추상된 원인(실재적 근거)을 규명한다고 하더라도, 추상된 원인을 규정한 그것의 다양한 원인은 항상 남아 있게 되고, 따라서 ‘사건-1‘에 대한 종전의 근거 규정은 형식규정(동어반복적인)이라는 성격을 항상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 규정을 단 하나의 간단한 궁극적 본질(완전한 근거)로 환원할 경우 다시 형식적 근거 규정으로서 형식규정이 된다. 결국, 대상에 대한 본질(여기서는 자유에 대한 본질)규정은 근거 관계 간 총체적 운동에 관한 부단한 해명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사전’에서는 인식주체(주관)의 필연성(객관운동에서 관철되는 필연성) 인식 여하에 따라 필연성이 인식주체에게 맹목적으로 작용하길 멈추고, 자유 속에서 가상(假象)되어 존재하게 된다고 하는데, 그 법칙성에 대한 서술(객관-주관 또는 주관-객관 변증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주관은 객관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서 현실성을 얻게 되는 것으로, 주관은 객관의 외화로[6]주관이 객관에 선행한다는 식의 설명은 자연과학의 요구와 배치된다. 레닌은 따라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페촐트는 인과 법칙을 일의적 … Continue reading, 형식을 먼저 갖고, 그 형식의 관계가 의식적 내용을 구성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수많은 범주의 상호 연관 속에서 시종일관 관철되는 필연성-우연성, 현실성-가능성의 변증법, 즉 물질적 사물과 의식적 사물, 전자 간, 후자 간의 생동한 변증법은 사전에 서술되어 있지 않다.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적대적 계급 사회에서는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양이 그가 속한 계급에 따라 아주 달라진다. 왜냐하면, 그런 사회에서 자유는 계급적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시민적 자유란 무엇보다도 소유 계급이자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의 자유, 즉 부르주아가 노동자계급과 기타 근로 대중을 착취하고 지배하여, 자신들의 이익과 요구를 충족시키는 자유이다.“ (≪철학대사전≫, pp. 1118-1119.)

 

사전의 이러한 설명은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이 관철되는 사회에서 자본가계급이 마치 자유를 갖는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제국주의 단계로 이행한 자본주의에서 자본가계급 역시 자본의 자기 증식(자본의 자기 운동이라는 필연적 운동)에 가상된, 소외된 존재에 불과하다. 이들이 폐물이 된 생산관계를 수호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탄압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그것이 합목적적인 행위라는 점, 즉 어떠한 객관적 대상(코징에게 이것은 ’노동자계급‘으로 된다)을 지배한다는 의미에서의 자유와는 관계가 없다. 그것은 자본의 자기 증식 전반에서 소외된 자본가계급이 갖는, 자연발생성 발로의 가장 전형적인 예일 뿐이다. 사전의 서술이 타당하게 적용될 수 있는 지점은, 서술된 자유가 오로지 형식적 자유, 즉 부르주아가 봉건제 사회에서 주장했던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출판의 자유, 이동의 자유 등을 말할 때이다.[7]바로 이러한 점에서, 의회에 관해 다룬 볼테르의 서신에서 표현된 ‘자유의 확립’만큼 형식적인 자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형식적 자유 … Continue reading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본래적 자유는 아닌데, 그것은 자유의 역사적인 발전 경로에서 생성된 정형화된 형식으로서 형태 규정(어떠한 주어에 관한 술어라는 단칭적, 형식적인 것으로서 ’자유‘)이다. 이는 본래적 자유의 발전 도정에서 필연적으로 생성될 수밖에 없는 형식이며, 본래적인 자유와 연관성을 갖지만, 본래적인 의미에서 자유와는 상이한 질적 규정을 갖는다. 따라서 이 서술은 본래적 의미에서의 자유를 설명하기에는 부적합하다.

이어서 사전은 또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우리는 노동시간을 단축함으로써 자유 시간을 연장하고, ‘자기 목적’으로서의 인간의 활동을 뒷받침해 주는 수단을 늘려갈 수 있는 것이다. 전인적으로 발전된 개인이 행하는 생산 이외의 자유로운 활동, 즉 자기 목적으로서의 인간의 완성을 지향하는 자유로운 활동이 진정한 자유의 왕국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창조적 활동은 필연성에 종속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대사전≫, p. 1120.)

 

사회 발전의 촉진 수준만큼 자유의 확대 발전이 규정되며, 동시에 인간의 합목적적인 활동이 사회 발전을 더욱 촉진한다는 것, 사용가치의 소비를 통한 인간의 욕구 충족 행위가 그 대립물을 형성하여 피규정을 이루고 복귀하는 그 과정에서 노동(자유로운 활동)이 생성될 수 있고, 그러한 의미에서 자유는 자연적 규정력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8]마르크스는 경제학과 철학에 관한 그의 수고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짐승은 직접적인 육체적 욕구의 지배하에서만 … Continue reading을 안다면, 우리는 노동이 인간의 삶의 영위와 분리되어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자유로운 노동은 자유 시간 연장의 조건이기도 한 동시에, 자유 시간 연장에 의한 결과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활동을 말할 때 유념해야 할 것은 ‘노동 시간의 단축’, 즉 ‘자유 시간’의 증대가 그것의 조건이면서도, 또한 동시에 그것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서로가 풍부한 순환을 이루는 속에서 자유로운 활동(자유)이 있을 수 있음을 아는 것이 곧 자유에 대한 본질규정의 확립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이해 없이 조건이라는 것에 천착할 경우 ’노동으로부터의 해방‘[9]실제로 자유를 단순히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기술하는 사례는 적지 않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외적 … Continue reading이 곧 자유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오해를 가질 수 있다.[10]노동시간의 단축에서 주어로 되는 것은 아직은 소외된 성격을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한 노동의 시간을 말한다. 노동시간의 단축은 자유로운 노동의 … Continue reading

코징은 ‘자기 목적으로서 인간의 완성’을 주장하는데, 이는 “필연의 왕국의 맞은편에서, 자체 목적으로서의 의의를 갖는 인간의 힘의 발전이 시작되고 자유의 진정한 왕국이 시작된다. 그러나 자유의 왕국은 이 필연의 왕국을 토대로 해서만 꽃피울 수 있다.”라는 ≪자본≫의 서술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자본론≫, 백의, p. 1004.) 그러나, 이는 자유의 본질을 해명하기에는 추상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서술이다. 물론, 그가 활용한 지면은 사전이라는 점에서, 애당초 설명의 추상적인 성격을 충분히 극복하기 어려운 조건이었음을 알 필요가 있다.

코징은 후반부에서 자유를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 즉 의지적 선택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을 부르주아적 자유론의 특징이라고 서술한다. 자유를 단순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러한 ‘자유로운 선택’이 어떠한 객관적 법칙에 의해 성립될 수 있었나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관념론적 편향이며, 심리철학에서 관념론적 편향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그 자체의 발로이거나, 영향이라는 점에서 코징의 서술은 옳다. 그러나 자유는 그러한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닌다. 인식된 필연은 인식 주체가 대상에 대해 개념적 판단을 한다는 것이며, 객관적 실재의 운동을 총체적으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연발생성의 발로인 욕구(계급사회에서는 조야한 실제적 욕구)에 타성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목적의식적인 활동을 가함으로써, 즉 생산력의 발전에 기여함으로써 나타난다. 여기서 외적 대상에 의한 작용으로부터 자유(자율성)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기 행동의 근원이 외적인 규정으로부터 자유라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선택’[11]자연 필연성에 의한 타성태로서 인식주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한편으로 대상에 관한 자율성의 발현이다. 그리하여 이 지점에서 자유로운 행위로서 … Continue reading이라는 문제는 항상 제기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12]A. 뮈슬리프첸코는 이 점에 대해서 옳게 파악하고 있다: “어떠한 사회적 활동도 모든 개인의 행위에서부터 성립되고 있지만, 경제적 토대는 이들의 … Continue reading

두 번째로 다룰 쿠시넨의 ≪맑스-레닌주의의 기초≫는, 사전의 설명보다 한층 짧게 서술되어 있다:

 

”인간의 진정한 자유는 자연과 사회법칙으로부터의 추상적인 독립(그런 독립은 사실 불가능하다)이 아니다. 자유는 이 법칙들을 아는 데 있으며, 그러한 인식을 기초로 한 행동에 있다. … 인간은 자연과 사회의 법칙을 인식할 수 있으며, 그 성격과 작용의 방향을 앎으로써 자신의 이해를 위해 이를 활용하고, 인간을 위해 봉사하게 할 수 있다.“[13]오토 쿠시넨, 서진영 역 (1990), ≪변증법적 유물론 입문≫, 동녘, p. 140.

 

사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설명이지만, 한 가지 차이점을 언급한다면, 쿠시넨은 자유를 대상에 대한, 인간 이해를 위한 활용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를 인간의 물질적 욕구 충족의 발전적 경향과 동일시하는 설명은 쿠시넨의 교재만이 아니라, 국내에서 출판된 변증법적 유물론에 관한 대다수의 교재에서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에는 몇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 만큼, 실제로 이러한 설명에 대한 비판 역시 정형화되어 존재한다. 즉, 욕구의 생성, 그것의 충족은 모두 자연의 필연성, 즉 자연의 규정력에 의한 것인데, 이것에 대한 발전적 추구, 더 높은 수준의 욕구 충족이 과연 필연성의 대립적 의미에서 그 상이한 규정을 갖는 ’자유‘일 수 있냐는 것이다.

가령, 가뭄으로 인해 충분한 농산물을 생산하지 못하였고, 그로 인해 굶주렸던 자가, 그로부터 1년 후에 가뭄철에도 농작물이 아무런 해가 없이 자랄 수 있게 하는 기계를 개발(그러한 기계를 발명할 수 있을 정도에 상응할 만큼 자연법칙의 필연성을 인식하여)하여 굶주림으로부터 피하고 충분한 음식을 소비(충분한 사용가치의 소비)하면 그것을 자유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러한 경우에도 인간이라면 무조건 충족해야만 할 수밖에 없는 식욕이라는 생리학적 규정성(자연적 규정력)은 항상 전제되며, 1년 전에 굶주렸던 자가 가뭄철에도 누릴 수 있는 바로 그 풍족함은 발명된 기계의 작동 및 그 작동에 필요한 제반 조건의 유(有)에 한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우, 결국 자유의 근거인 ’가뭄철임에도 불구하도 풍족함을 유지하는 것‘은 자연적 규정력에 완전히 종속되었다고 해석할 여지가 충분히 존재한다.

 

자연 필연성이라는 객관의 맹목적 작용으로부터의 해방으로서, 즉 운동하는 자연 필연성이라는 자연법칙을 인식하나 그것을 바꿀 수는 없으며, 동시에 그것에 규정을 가하는 주관으로서의 자유“라는 말에 관해 곱씹어 생각해본다면, 문제에 대한 기존의 형해화된 답변으로 일관하는 것은 스스로의 무지를 증명하는 셈이 된다는 것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 필연성과 자유에 관한 기존의 형해화된 설명은 가장 단순한 내용만을 지닌 해명 요구에 의해서도 언제든 다시 글을 쓰든, 아니면 입을 열든 해야 하는 운명에 놓일 것이다.

 

필연성과 자유에 관한 체계적인 해명의 열쇠는 필연성과 우연성, 현실성과 가능성이라는 변증법의 범주에서 찾을 수 있다. 이에 관한 것은 제2장에서 엥겔스 저작 ≪공상에서 과학으로≫를 다루며 진행하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다룰 트루브니코프의 견해는 ≪맑스주의 변증법의 역사≫에 담겨져 있다. 이 문헌은 1971년 쏘련과학아카데미의 연구자들에 의해 공동저술된 것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심도 있는 주제를 선정하여 다룬 문헌이다. 트루브니포크는 이 문헌의 제1권 제2장 <유물변증법의 형성에서의 사적 유물론의 역할>에서 필연성과 자유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자유와 필연의 이율배반은 어떤 숙명적인 것으로 이해된 생산력의 운동을 통해 이론적으로 해결될 수 없고, 오로지 사회의 발전법칙의 인식에 기반한 피억압자나 피착취자의 자신의 존재조건에 대항한 의식적인 혁명적 활동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다. … 경제적 조건 뒤에는 항상 인간과 인간의 활동·필요·욕구·목표·이상이 놓여 있다. 따라서 공산주의적 변혁이라는 필연성의 실현은 인간의 의지와 의식, 그리고 그의 의식적인 행위에 달려 있다. … 노동자계급이 현실의 혁명적 변혁으로 나아가는 이유는 단지 현존하는 생산력이 ’그 자체로서‘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객관적인 요구가 노동자계급의 존재조건 속에, 그 존재의 비인간성 속에 표현되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은 자기자신을 해방시키고 전체 사회의 존속과 발전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존재조건을 변화시키지 않을 수 없다.“[14]소련과학아카데미, 문성현 外 역 (1990), ≪맑스주의 변증법의 역사≫, 제1권, 한울림, pp. 93-94.

 

트루브니코프의 설명은 ’자유로운 행위의 결과로서의 사태’에 관한 설명이다. 그는 생산력의 해방을 위한 노동자계급의 자각적 실천(지배계급에 대항하는 목적의식적 실천)을 ‘생산력의 해방’이라는 추상적 동일성에 의한 단순 규정력의 결과에서 찾지 않으며, 인간의 존재양식(욕구, 이상, 기타 인간 속성들)이 생산력의 발전이 없이는 사회와 조화하여 그 규정을 온전히 확보할 수 없다는 것에서부터 그것을 찾는다. 그는 노동자계급은 인간의 본래적 존재양식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생산관계가 생산력에 비조응하여 생겨나는, 형식(생산관계)의 내용(생산력) 억압을 극복해야 하고, 그런 점에서 노동자계급의 변혁적 실천은 생산력의 해방과 필연적으로 연관될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자유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필연성과 자유의 통일이 갖는 내적 운동이 산출(생성)한 제 현상의 결과에 관해 서술한 것에 불과하다. 즉, 생산력의 발전 도정이 인간의 본래적인 존재양식과 구체적으로 어떠한 관계를 가지며, 여기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욕구와 노동의 변증법에 대해서, 그는 서술하지 않는다.

앞서 살펴본 문헌들을 통해 자유에 관한 생동적인 내용을 확인하기에는 무리가 뒤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과도한 추상적 설명으로 점철되어 있는가 하면, 자유를 다루는 데 있어 변증법적 방법론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해, 기존 서술이 갖는 내용은 자유에 관한 형식규정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15]하지만, 한편으로 모든 서술은 형식규정적 성격을 갖고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모든 서술은 상대적으로 동어반복적이다. 그것은 본고의 글이 … Continue reading

 

 

2. 생산력의 발전과 자유

 

자유는 자연적인 것의 발전 운동 끝에 생성된 사회적인 것의 범주이며, 인간 문제에 속하는 동시에 그것의 근거 관계는 자연적인 것의 범주를 고찰하지 않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있다. 다시 말해, 자유는 생산력의 발전 운동과 관련성을 지니며, 이와 분리될 수 없다.

생산제력의 발전과 자유가 상호 관련을 지닌다는 것은, 대상에 의한 인간의 자연발생성의 발로로서의 욕구와 그것의 대립물인 인간 노동(대상에 대한 인간의 합목적적 활동) 간의 변증법적 운동 양상 속에서 자유에 대한 정확한 규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술 역시 필연과 자유의 관계에 대한 실재적 근거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본질규정은 아니며, 결과적으로는 자유의 객관적 대응물로서 우연성과 가능성을 다루어야 함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2-1. 필연과 자유의 관계에 대한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서술

 

이 문제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시작 지점은 필연과 자유의 관계에 대한 엥겔스의 언급을 통해서만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엥겔스는 ≪공상에서 과학으로≫에서 필연과 자유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사회적으로 작용하는 힘들도 자연력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고 고려하지 못하는 한 맹목적으로, 폭력적으로,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고 그 작용, 방향, 영향을 파악한 이상, 그것을 더욱더 우리의 의사에 복종시키며, 그것을 이용하여 우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냐, 없냐는 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16]프리드리히 엥겔스, 나상민 역 (1990), ≪공상에서 과학으로≫, 새날, p. 68. … [공산제가 실현되면; 인용자] 인간을 둘러싸고 지금까지 그들을 지배하여 온 생활조건이 이제는 인간의 지배와 통제 밑에 들어오며 인간은 처음으로 자연에 대한 참다운 의식적인 지배자가 된다. 지금까지 인간을 지배하는 외적인 자연법칙으로서 인간과 대립해 온 인간 자신의 사회적 행위의 법칙이 이제는 인간에 의하여 능숙하게 이용될 것이며 그리하여 인간의 지배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17]위와 같은 문헌, pp. 75-76. (강조는 인용자)

 

엥겔스의 이 유명한 언급은 오늘날 변혁 운동에서 필연성과 자유의 공존을 해명할 때 항상 인용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 앞서 선제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해명은 필연성과 우연성, 현실성과 가능성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것이다. 위 설명은 필연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인식주체가 객관에 대해 갖는 자유로 이행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것은 이미 엥겔스도 인식했던 것인데, 그는 자신의 저술인 ≪자연변증법≫에서 제반 객관사물이 갖는 일반성으로서 필연과 우연의 통일을 규명해야 함을 언급하였고, 그 이론적 시원으로 헤겔의 ≪논리의 학≫을 제시하였다:

 

”헤겔은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명제들, 즉 우연적인 것은 그것이 우연적이기 때문에 하나의 근거를 갖고, 또한 바로 그것이 우연적이기 때문에 어떠한 근거도 갖지 않는다는 명제, 우연적인 것은 필연적이며, 필연성은 자기 자신을 우연성으로 규정하고, 그리고 다른 한편, 이 우연성은 오히려 절대적 필연성이라는 명제를 제시하면서 등장했다.(≪논리의 학≫, II, 제3편, 제2장 「현실성」)“[18]프리드리히 엥겔스, 윤형식·한승완·이재영 역 (1989), ≪자연변증법≫, 중원문화, p. 223.

 

플레하노프 또한 그의 저서 ≪맑스주의의 근본문제≫(1908)에서 ≪공상에서 과학으로≫를 검토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러한 엥겔스의 말은 일반적으로 ‘비약’의 개념을 좋아하지 않고 따라서 필연의 세계에서 자유의 세계로의 ‘비약’을 이해할 수 없고 또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반박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 이 엥겔스의 말은 헤겔의 학설을 이해한 자에게는 극히 명료한 것이다. … [엥겔스가 말하는; 인용자] 자유와 필연의 관계에 대한 문제에서는 결코 헤겔의 학설과 대치되는 것이 아니다.[19]게오르기 플레하노프, 민해철 역 (1987), ≪맑스주의의 근본문제≫, 거름, pp. 130-131. (강조는 인용자)

 

플레하노프는 이 대목에서 맑스와 엥겔스에 대한 당대 신칸트주의자들의 비판 양상을 소개하고, 그에 대한 반비판[20]그러나, 수행된 반비판은 현재까지 소개되었던, 필연과 자유에 대한 형식적 언급과 별다른 차이를 갖지 않는다.을 수행한 후, 필연과 자유의 변증법적 관계 문제에서 헤겔이 갖는 지위를 재차 확인한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는 드디어 헤겔이 ≪논리의 학≫에서 필연과 우연의 변증법적 관계 문제를 어떻게 해명했는지에 대해 명확히 규명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2-2. 필연성과 우연성 및 현실성과 가능성

 

자유는 오로지 필연성과 우연성이라는 통일체와 현실성과 가능성이라는 통일체의 입체적 접점을 면밀하게 따져봐야지만 비로소 규명된다.

기나긴 역사에서 필연과 우연, 현실성과 가능성의 문제는 철학 논쟁의 주요 주제로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기원전 2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 활동했던 철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필연과 우연에 관한 문제의식은 고대 그리스의 원소론자인 엠페도클레스, 원자론자인 데모크리토스의 단편에서 이미 다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 또한 ≪티마이오스≫[21]≪티마이오스≫에 따르면, 지성과 필연은 동일한 것으로 취급되지 않으며, 지성은 필연의 외부에서 필연을 설득하는(69a-c), 초월적 존재로 … Continue reading와 ≪국가≫ 등에서 필연과 우연 문제를 전적으로 다루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메가라의 에우클레이데스에 의해 창시되었다는 메가라학파에 속해있던 디오도로스는 과거의 참은 미래의 참을 필연적으로 불러온다는 논증을 수반하여 항상 참인 원리는 항상 필연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현실성과 가능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자연학에 관한 소론≫ 등에서 심도 있게 다루어지는데, 그는 현실성과 가능성을 필연과 우연이라는 문제와 연관하여 다룬다.[22]자연학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소론집에 따르면,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보다 선대의 철학자들이 갖는 몇 가지 모순적 설명 방식에 대해 … Continue reading

데모크리토스의 교의를 따르던 유물론 학파의 일원이었던 에피쿠로스는 원자 이탈(clinamen)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연의 객관성을 인정하였다.

필연성의 문제는 존재론을 철학의 화두로 놓았던 로마 철학에서 역시 주요한 연구 대상으로 자리 잡았는데, 스토아학파에 속했던 제반 학자는 우연을 배제하였고, 세계는 오로지 로고스에 의한 필연의 원리만이 관철된다는 기계적 결정론을 승인하였다.

당대 철학에서 필연성과 우연성의 문제는 형이상학적으로만 다루어졌을 뿐이었다. 앞서 논한 것처럼, 데모크리토스 학설을 이은 에피쿠로스는 원자 이탈을 통해 우연성을 설명하려고 하였지만, 그것은 기본 규정의 매개 범주를 고려하여 얻어낸 결론이 아니었으며, 단순 다원론적 이론 전개로부터 성립된 개념에 불과하였다. 현존하는 규정과 기본 규정(그들이 말하는 운동의 근본적인 원인)을 연관하지 않는 식의 설명 방식을 통해 우연의 객관성을 말하려고 하였던, 이와 같은 시도는 로마의 스토아학파 철학자 키케로의 선과 악에 관한 강의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기원전 2세기 로마에서도 매우 조잡한 것으로 평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23]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김창성 역 (1989), ≪키케로의 최고 선악론≫, 서광사, p. 22.

중세기에 들어서면서 보에티우스, 히포의 어거스틴에 의해 발전한 교부철학은 필연과 우연, 그리고 자유의 문제를 내재적인 원인으로서 신, 즉 자연필연성으로서 신이 아니라, 초월적 원인으로서 신의 목적성에 귀속하여 다루는 길을 택하였다. 보에티우스는 ≪철학의 위안≫ 제5장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적 행위는 필연의 연쇄가 아니라고 하였다.[24]≪철학의 위안≫, 제5장, 산문6. 그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적 순차가 신에게는 신에게 있어서의 ’현재‘ 하나로 통일되기에 자유의지적 행위를 신이 예견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였다.[25]위와 같은 출처. 어거스틴 역시 보에티우스와 같은 길을 걸었다. 에보디우스가 “어떻게 하여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기 의지가 공존할 수 있으며, 신의 예지적 강제성(사실상 필연성인)에 의한 것이 어떻게 자기 의지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였을 때, 어거스틴은 신이 악인의 악행을 알 수는 있어도 그것을 막느냐 마느냐와는 또 다른 문제이며, 악인은 신이 그것을 아는 것과는 무관하게 자기 의지대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고 한다.[26]Augustine of Hippo, Peter King (2010), On the Free Choice of the Will, On Grace and Free Choice, and Other Writings, Cambridge University Press, III:10.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도처에서 신에 의한 필연적 작용을 끊임없이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두 입장의 공존은 오로지 신을 내재적 원인이 아니라 초월적 원인으로 설정할 때만 ’정당화‘될 것이다. 인간이 행한다는 ‘의지하는 것‘ 역시 자연필연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어거스틴의 주장에는 허점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에 어떠한 작용은 그가 말하는 신이 행하는 것이고, 어떠한 작용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편취에 불과하다. 오랜 시간 후 스피노자에 의해 철저히 반박되는 이러한 관점은 중세신학에서 필연과 자유의 양립 문제를 설명하는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서구에서 봉건제 사멸기, 초월적 원인으로서 신에 기초한 그리스도교 신학은 자연과학의 발달에 의해 큰 후퇴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필연과 자유에 관해 가장 두드러진, 그리고 가장 진보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던 유물론 철학자로 바뤼흐 스피노자가 있었다. 그는 자유가 오로지 필연에 대한 인식에서만 성립될 수 있으며, 필연으로부터 독립된 자유(자유의지)란 있을 수 없다는, 자유에 관한 과학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필연이 우연과의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 관철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였으며, 우연의 객관성을 부정하였다. 그는 사유 운동을 물질 운동에 대한 반영으로 파악하지 않고, 두 실재적 양상을 실체의 무한한 속성의 종(種)이며, 둘을 단순 수평으로 나열되는 요소로 설정하여 필연에 의해 부단히 이행하는 물질의 현존적인 규정이 사유 규정으로서 필연을 인식한 사유와 어떻게 연관을 이루는지 올바르게 밝혀내지 못하였다.[27]스피노자의 맥락에서 ‘필연을 인식하는 것‘은 사유 규정으로 취급될 뿐, 엄연히 관조적인 사유를 벗어난 실천은 고려되지 않는다. G. W. F. 헤겔에 따르면, 스피노자에게서 전일적 실체는 ”자기 생동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추상적인 관념으로 서술”[28]G. W. F. Hegel, Werke, Vollständige Ausgabe durch einen Verein von Freunden des Verewigten, Bd. 15, S. 368.될 뿐이다. 그 귀결로 사유와 연장 사이의 연관은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매우 모호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하여 스피노자의 철학은 인간의 능동적 실천, 총체적인 필연 속에서 외적 필연성에 대한 주도성을 지니는 인간을 정확히 규명해낼 수 없었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숙명론으로 퇴행할 위험성을 항상 내포하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 자유 문제가 철학사적으로 필연성이라는 문제와 항상 엮여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인간 자유를 다루기 위해서는 필연성이 무엇인지 선차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철학사적으로 자연필연성에 관하여 가장 집요하게 강조하였던 스피노자는 필연성을 자주 말하였을 뿐, 그것이 어떠한 성질을 지니고 있는지까지는 구체적으로 밝혀내지 못하였다. 그가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던 규정과 규정 간의 연관 및 상호작용(동일 속성 내에서, 그리고 신에서 통일되는 상이한 속성 간의 그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객관적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 그는 추상적으로만 언급하였다.

필연과 우연의 문제는 규정과 규정 간의 매개범주가 변증법적으로 연관을 이루고 있으며, 둘이 서로 형이상학적으로 분리된 영역이 아님을 인식해야 비로소 옳게 파악할 수 있다. 둘을 분리하는 순간 프랑스 유물론이 그러했던 것과 같은 숙명론, 또는 모든 사건을 우연 일반으로 해소하는 극단적인 결론만을 가져올 뿐이다.

엥겔스가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필연성과 우연성의 변증법, 현실성과 가능성의 변증법에 대한 과학적 이론을 정초한 철학자는 헤겔이다. 그는 ≪논리의 학≫ 본질론의 현상 편의 제3장에서 내면적인 것[29]헤겔은 이를 “형태도 없이 도처에 스며들어 있는 본질“(G. W. F. 헤겔, 임석진 역 (1983), ≪대논리학≫, 제2권, 지학사, p. 255.)이라고 표현하였다. … Continue reading과 외면적인 것[30]외적인 것은 실존을 의미한다. 실존은 본질의 정립작용 상의 제 양상이 모든 직접태를 아우른다. 이 실존이 각자의 직접태를 정립작용을 통해 … Continue reading의 통일인 현실성[31]내면적인 것과 외면적인 것은 서로 즉자대자적으로는 동일한데 왜냐하면 두 규정은 각자 자기지양을 통하여 대립항으로 부단히 이행하고, 그 역순을 … Continue reading을 시작으로 하여 가능성을, 그리고 이 범주와 연관된 다른 하나의 범주, 즉 필연성과 우연성을 교차하여 논하면서 필연성과 자유의 문제를 다룬다.

 

헤겔에 따르면, 내면적인 것과 외면적인 것의 통일이라는 점에서 현실을 말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절대적 현실성이 된다.[32]≪대논리학≫, 제2권, p. 255. 그러나 그것은 정립되지 않은 현실성, 즉 즉자적 존재로서 현실성이기에 형식적 현실성이다.[33]위와 같은 문헌, p. 274. 따라서, 이러한 통일은 이제 막 직접적인 형식통일에 들어선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34]위와 같은 문헌, p. 276. 형식적 현실성은 “그 스스로의 외면성으로 인해서 변화의 테두리 속으로 말려드는 일도 없으며, 어떤 타자 속에서 스스로가 가현(假現)일 수도 없는, 오로지 자기현현일 뿐”[35]위와 같은 출처.이다. 그리하여 형식적 현실성은 참된 의미에서 실재화된 것이라 할 수 없다.

 

형식적 현실성 역시 자기부정을 내포한 규정에 불과한 것이기에, 자기부정을 통해 정립에 들어서게 된다. 형식적 현실성의 대립물은 형식적 가능성[36]형식적 가능성은 “단적으로 타자에게로 이행하는 범위 내에서의 동일성”을 가리키기도 한다. (위와 같은 문헌, p. 289.) 여기서 단적으로 타자에게 … Continue reading이다. 이 대립적 운동에서 각자의 대립항에 상관하는 제 규정, 즉 제3자가 필연성[37]위와 같은 출처.이며, 두 항(형식적 현실성과 형식적 가능성)의 통일이 우연성[38]위와 같은 문헌, p. 281.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이 갑자기 불어오는 풍랑에 의해 모두 찢길 수 있다는 상상을 할 수 있다. 비록 그러한 생각을 한 때가 아주 화창한 날씨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나타난 사태들은 모두 현실적이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 책장의 존재, 화창한 날씨, 풍랑이 불어오는 것 및 풍랑에 의한 책의 훼손 등은 모두 현실적 사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적 가능성 속에서 파악된 형식적 현실성으로서 사태일 뿐이다. 외적인 것과 연관된 것이 아닌, 이러한 무반성적인 현실성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것은 엄연히 조건이 충족되었을 경우 절대적으로도 가능한 것이다. 특정한 조건에 의해 특정한 사태가 생성되었을 때, 조건은 그것이 외적인 규정을 받기 전에는 무수히 많은 필연적 결과를 내포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이 상대적 우연성이다. 이러한 형식적인 가능성을 우리가 인식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필연을 인식했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모두 실재화되지 않은, 형식적 사태일 뿐이기 때문이다.

실재적 현실성과 가능성이란, 형식적 현실성과 가능성이 각자의 반성규정을 이루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형식적 현실성은 피정립적 존재로 이행하여 외적인 규정과 상관을 이룬다. 상관을 이룬 실재적 현실성은 실재적 가능성을 대립물로 지닌다. 실재적 현실성과 실재적 가능성의 통일은 상대적 필연성[39]위와 같은 문헌, p. 277.이다. 그런데 가능성은 현실성의 반성된 자기반성태[40]위와 같은 문헌, p. 279.로, 본질규정에서 보면 현실성과 가능성은 형식적 동일률 하에서만 구분될 뿐이다. 예를 들어, 특정한 조건에 의해 특정한 사태가 생성됨이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면, 조건과 사태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가능성은 현실성의 자기반성태로, 본질적으로 보면 현실성과 상이한 것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가능성은 현실성의 내용으로서 제 양상을 형식적으로 규정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재적 현실성을 그 자체로서만 보면 무엇보다도 여러 가지 특성을 지닌 사물, 즉 실존하는 세계[41]위와 같은 문헌, p. 284.가 된다. 그런데 어떠한 사태를 이미 실재적 현실성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실재적 현실성 역시 즉자태로서의 규정(형식규정)을 어느덧 내포하는 것이 된다.[42]위와 같은 문헌, p. 285. 이것은 실재적 현실성의 대립물인 실재적 가능성과 연관을 이루면 더욱 명확해진다.

예를 들어,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사물의 생동성을 감각 능력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러한 직접적인 구분의 근거 역시 직접적으로 구분된다. 어떠한 푸른 사과에 대해서, 그것을 ”아직 충분히 익지 않아서 붉은빛이 선명하게 돌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그 사태의 근거에 대한 직접태(”충분히 익지 않았다”)를 전제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전제하기도 전에 이미 객관적으로 관철된 것이다. 실재적 현실성과 가능성 역시 이러한 직접태를 지양하지 않은 근거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바로 상대적 필연성인 것이다. 사물에 대한 고찰을 직접태에 대한 ’고찰‘에서 만족하는 순간, 수많은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직접태는 객관에서 먼저 관철된 것이다. 다시 말해, 실재적 현실성과 가능성은 내적 모순을 지니고 있으며, 이 모순을 통해 언급된 규정들은 절대적 현실성과 가능성으로, 그리고 그것의 통일로서 절대적 필연성으로 이행[43]위와 같은 문헌, p. 291.하게 된다.

절대적 현실성에 이르러서는 모든 사태가 본질규정으로 파악되기에, 현실성은 가능성과 완전한 동일성을 이루는 것으로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사태는 매개되어 있다. 사태가 매개되어 있다는 것은, 특정한 사태라는 특정한 현존재 규정이 그것과는 다른 현존재 규정을 거치며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질규정은 다시 형식규정을 내포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규정과 규정 간의 구분으로서 파악되는, 또한 객관적으로 관철되는 필연성을 실재적 필연성이라고 한다.

 

현실성과 가능성, 필연성과 우연성에 대한 헤겔의 견해를 이해함을 통해 우리는 객관에서 관철되는 우연을 명료하게 다룰 수 있다. 양자물리학에서 불확정성 원리는 전자 위치의 불확정성과 전자의 운동량의 불확정성이 반비례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정식화한 것으로, 이는 실험적 방법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전자의 특정한 운동량이 위치의 불확정성을 항상 가지고 오며, 그 역도 성립한다면 전자의 운동은 항상 우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자는 다른 원자와 상관을 이루며(형식적 현실성의 정립작용 조건이자 그 자체인 외적 규정과의 상관) 절대적 필연을 관철하게 된다. 이는 아원자 입자의 운동―이 과정은 아원자 입자만이 아니라, 보스 입자인 광자에도 적용되며, 심지어 분자에도 적용된다―이 그 필연을 관철함에서 우연을 경유한다는 것을 객관의 영역에서 증명한 것이다. 즉 아원자 입자는 무반성적인 규정으로서는 우연적인 것이나, 그것이 반성규정에 들어서는 순간 필연을 관철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 무반성적인 규정(정립적 규정)의 반성적인 규정(피정립적 규정)으로의 이행은 필연적인 것으로, 필연은 우연을 항상 지나가고, 우연은 필연으로 항상 이해할 수밖에 없다. 현대물리학의 발전은 인류가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상승할수록 고려해야 할 내적 연관이 적어지기는커녕 훨씬 많아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 숱하게 많은 변증법적 유물론 교재는 필연과 우연에 관해 일정 형해화된 설명을 제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교재들은 대개 우연에 관해 “필연을 인식하지 못하였을 때 그것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인식하게 되면 그것이 필연임을 확인할 수 있다”[44]국내에서 널리 읽힌 녹두출판의 ≪세계철학사≫(전3권), F. V. 콘스탄티노프가 감수한 변증법적 유물론 교재, 그리고 원서를 알 수 없는 번역 교재 등이 … Continue reading는 수순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마치 우연이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필연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기계적 유물론을 연상케 한다. 맑스와 엥겔스는 우연의 객관성을 분명히 인정하였으며, 심지어 우연이 필연의 자기동일성 확보에서 지대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자유는 인간에게 가해지는 외적인 규정의 시점, 즉 외부로서 객관의 시점에서는, 정립적 존재로서 필연성이 피정립적 존재로서 필연성으로 화하기 위한 경로에서 생성되는 우연성이다. 이를 통해 필연은 비로소 자기동일성을 확보한다. 인식주관으로서 인간에게서 그것은 사태(실재적 현실성)에 대한 실재적 가능성을 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필연에 대한 인식은 곧 실재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 또는 그러한 과정“을 단절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실재적 가능성을 파악한다는 것은 실재적 현실성이라는 생동하는 규정과 다른 규정 간을 연관을 정확히 규명해내는 것이다. 실재적 가능성을 발견한다는 것이 오로지 이러한 내용을 갖출 경우에만, 그것을 필연에 대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필연을 인식한다는 것은 사태에 객관적 연관 작용을 규명하는 것이고, 이것을 규명한 후에라야 비로소 실재적 가능성은 필연적으로 실재성을 이룰 수 있는 모든 사태라는 점에서 곧 실재적 현실성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인간에 의해 파악된 연관하는 실재적 가능성(필연에 대한 인식)은 곧 절대적 필연성인데, 외적 합목적성의 시점에서 보면 이것은 그것이 경유하는 우연성이 된다.

 

2-3. 상대적 자기 운동, 욕구와 노동의 변증법

 

우리는 변증법적 결정론에서 말하는 필연과 우연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필연과 우연의 변증법적 상관이 곧 ”인간이 진정 능동적일 수 있는 존재냐”에 대한 답이 되지는 못한다. 인간의 능동적 실천 행위에 대해 규명하기 위해서는 외적 합목적성이 처음에는 맹목적으로 작용하여 어떻게 인간이 그것의 맹목성을 지양하는지, 그 구체적인 과정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능동적인 실천 행위는 외적 합목적성과 단절되지 않는다. 인간의 능동적 실천이라 할 수 있는 합목적적인 노동은 외적 합목적성의 관철로서 발현되는 인간 욕구로부터 시작한다. 인간은 무엇을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며, 자기가 지니는 특별한 개별적 존재양식이 보장되는 안전한 환경에서 살아나가기를 희구한다. 이러한 욕구는 자연적인 것, 즉 생물학적인 것과 분리될 수 없지만, 동시에 사회적인 것도 침투되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양한 식재료를 통해 더 높은 수준의 풍미를 즐기는 것, 그리고 더운 날에는 시원한 곳, 추운 날에는 따뜻한 곳에서 지내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이 강한 작용력을 발휘하여 형성되는 것이다. 동시에 사회로부터 존중을 받고 싶어하는 것, 인간관계에서의 원만함 등은 사회적인 것이라는 범주에서 작동되는 제 양상의 침투를 통해서 형성된다. 심지어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은 서로 범주들이 매개된 형식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서로는 분리될 수 없다. 인간이 지니는 대부분의 욕구는 매우 직접적인 방식을 통해, 외적 합목적성이 맹목적으로 작용하여 형성된 것이다. 인간은 아무런 생산적 기반 없이 욕구를 억제할 수 없다.

 

인간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노동한다. 본래적인 의미에서 노동은 합목적적이며, 그것은 자연발생적인 욕구의 대립물로서 형성되는 것이다. 자연발생적인 욕구는 합목적적인 노동을 통해 풍부한 복귀를 이루는데, 그것은 노동이 지니는 작용에 의해서 성립된다. 그 첫 번째 근거는, 합목적적인 노동은 자연필연성을 인식하여 자연을 인간의 욕구에 맞게 개변한다는 것이다. 이 개변은 자연필연성을 그대로 보존하며, 단, 그 필연성을 욕구에 알맞게 배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근거는 첫 번째 근거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으로, 생산제력의 발달, 즉 사용가치의 양적, 질적 발전이 그것이다. 생산력의 발전을 통해 형성된 피정립적인 인간 욕구는, 정립되기 전의 인간 욕구보다 발전된 양상을 보인다. 그리고 이 풍부화된 욕구는 다시 합목적적인 노동을 통해 풍부화를 거듭하며, 그 풍부화된 욕구를 반영한 노동은 자연필연성에 대한 더욱 높은 인식을 보장한다.

자연발생적 욕구과 합목적적 노동의 변증법은 곧 인간 자유의 증대 도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합목적적인 노동의 질적 발전은 곧 필연성에 대한 인식의 확대·발전을 의미한다.

변증법적 결정론에서 말하는 ‘외적 필연성, 즉 외적 합목적성에 의해 종속되지 않는, 휘둘리지 않는 인간 활동’은, 필연적 법칙성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활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필연적 법칙성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것으로 취급한다면, 그것은 결정론이 아니라 비결정론의 견해에 불과하다. ’외적 합목적성에 지배되지 않는 인간’이라는 것은, 되려 인간이 필연적 법칙성의 운동을 스스로 구현하며, 필연성의 구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필연성의 구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현실성에 대한 내적 연관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여 실재적 가능성을 인식하고, 실재적 가능성을 실재적 현실성으로 화하는, 즉 실재적 필연성을 이루는 활동이다. 인식주관이 실재화한 현실에 관한 실재적 가능성을 외적 합목적성의 객관적 작용으로서의 실재적 가능성에 합치한 대로 판단하지 못했을 때, 실재적 가능성에서 실재적 필연성으로의 전화는 인간의 욕구와 무관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반대일 경우에는 인식주관은 외적 합목적성을 통하여 생성된 스스로의 욕구에 합치하는 실재적 필연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사태 속에서 외적 합목적성은 인간에게 맹목적으로 작용하기를 멈춘다.

이와 같이, 외적 합목적성에 합치하면서도, 그것의 작용에 맹목적으로 되지 않고 주도적으로 인식한 실재적 필연성을 실재화한 현실로 구현하는 것이야말로 인간(또는 인간 인식주관)이 자기 활동의 근거를 자기에게 가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인간 활동의 상대적인 자기 운동이다. 이것이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등이 언급한 합목적적인 노동이다.

 

인간의 합목적적인 활동은 상대적 자기 운동이라는 성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관념의 상대적 자기 운동은 객관적 실재의 자기원인으로서 자기 운동, 즉 절대적 자기 운동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즉, 상대적 자기 운동이라는 도정은 절대적 자기 운동에 근거하고 있고 있다. 인간은 자연과의 물질대사 없이 근거를 자기 위에 두는 활동을 할 수 없다. 인간의 능동적인 활동이 지니는 내용은 물질의 자기 운동으로부터 독립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식주체로서 인간의 상대적 자기 운동은 총체적으로 볼 때는 물질의 자기 운동의 일면에 불과한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태들의 실재적 필연성을 인식함은, 사태의 실재적 필연성이 선재한 다음에라야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식주체로서 인간의 사유와 실천 활동은 물질의 운동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R. 데카르트나 I. 칸트가 전개하였던 것과 같은 선험주의를 비과학으로 간주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인간 자유의 근거, 다시 말하여 인식주체로서 인간 활동의 상대적인 자기 운동의 근거를 인간의 생성과 소멸과 무관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자기 운동, 즉 물질에서 찾는다.[45]이와 반대로 헤겔은 ≪논리의 학≫ 본질론의 현실성 편 마지막 장에서 형이상학적 인과론으로는 운동성을 확립할 수 없다는 점을 옳게 지적한 다음, … Continue reading

이에 관하여 동부 민주독일의 철학자인 G. 슈틸러는 ≪변증법과 실천≫(1968)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18세기 유물론은 인간을 자연에 의해 결정되고 의존하는, 여러 면에서 자연에 종속된 존재로 보았다. 그들에게 자연은 모든 존재의 생산적 기초를 형성했다. 의식, 도덕, 정치 등은 그것의 속성이자 산물로만 간주되었다. … 이 사상은 인간의 행동에서 자의적인 것을 배제하고, 그것을 객관적인 근거로부터 설명하고자 노력한다. … 그러나 인간 존재양식은 객관적 결정 작용으로 끝맺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모순적 매개로부터 추동력을 얻는 변증법적 자기 운동(dialektischen Selbstbewegung)의 전개이다. 기계적 유물론은 객관성에 의한 물신화의 주문을 깨뜨릴 수 없었다.“[46]Gottfried Stiehler (1968), Dialektik und Praxis, Akademie-Verlag, Berlin, S. 61. (약칭, DuP) (강조는 인용자)

 

객관적인 것은 일정 단계에서 주관적인 것을 실재적[47]주관적인 것은 객관적 실재는 아니지만, 실재적인 것이다. 대립물로 이행시킨다. 이 관계는 서로 변증법적 연관을 이루며 각자에 관해서 더더욱 풍부화하는 규정을 이룬다. 여기서 객관적인 것의 본질적 범주로서 필연적 법칙성은 그대로 지양·보존되며, 그것은 절대적인 체계를 이룬다. 주관적인 것(인간의 활동)은 객관의 존재 방식 중 일부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가령, 거대한 자동화 채굴 기계를 통해 지상에서 몇 마일 아래에 있는 광물을 인간은 노동을 통해 끌어올릴 수 있다. 인간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분별하고 무정부적인 생산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급격히 배출시킬 수 있고, 이산화탄소가 일정량이 되면 지구의 기상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은 서로 연관을 이루며, 전자가 후자가 지니는 특정한 규정의 계기로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주관적인 것에 의해 객관의 자기 운동이 제약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객관의 절대적인 자기 운동의 일면이며, 자기 운동의 전개 양상이 된다. 이산화탄소가 급격히 증가하고 기상 운동의 객관적 연관이 지는 체계가 급격히 변화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객관적인 운동일 뿐이다. 그저 그러한 속에서 인식주체로서 인간만이 소멸의 일로로 나아갈 뿐이다.

 

슈틸러는 객관의 산물이자 그것의 대립물인 주관에 관해, 그저 객관에서 멀리 떨어져 객관과 전혀 상관하지 않는 부유물이 된다고 보는 C. A. 엘베시우스의 기계론을 비판한다.(DuP, S. 66.) 엘베시우스와 J. 톨런드의 철학적 견해의 전개가 필연적으로 인간의 능동적 실천을 부정하는 숙명론으로 귀착하게 될 것을, 그는 지적한다.(DuP, S. 67.) 슈틸러는 인간 활동에 관한 기계론적 견해만을 지적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그가 그와는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키는 편향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다.[48]“부르주아 철학자들에게 자기 운동은 본질적으로 개념에 의해 결정되는 과정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은 사회발전에서 이데올로기적 활동을 … Continue reading 그는 객관적 실재의 절대적 자기 운동이 내적 부정성에 기반하여 내적 모순을 심화·발전하여, 그것의 해소점을 상대적으로 독립된 외부로부터 구하고, 모순이 해소된 규정은 같은 방식으로 자기부정을 기반으로 재차 자기 운동을 전개한다고 말한다.(DuP, SS. 117-118.) 이 지점에서 슈틸러는 자기부정과 해소점으로서 외적인 규정은 절대적 자기 운동의 주체에 의해 분화되어 나온 규정들이면서도, 이 주체가 지니는 자기 운동의 내적 추동력이 될 수 있는, 자기 운동의 내적 모순을 규명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내적 모순의 자기-능동적 전개는 사회주의 혁명을 추동한다.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형성된 사회주의 사회구성체는 잔존하는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의 내적 모순을 추동하는 외적 요인이 된다. 여기서 사회주의 사회구성체는 자본주의의 체계와는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세계에서 사회주의는 상대적으로 외적인 규정이다. 동시에 사회주의 세계라는 규정은 앞서 언급한 대로 자본주의 내적 모순의 추동력이 된다.

 

이렇게 주체는 그 주체의 체계와는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있는 다른 규정을 산출하고, 그러한 규정은 그 주체의 체계 내 모순을 가일층 심화·발전하는 추동력이 된다. 객관에 대한 주관의 역할도 이와 다르지 않다. 객관적인 것은 그와는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있는 주관적인 것을 산출한다.[49]이것은 필연적인데, 주관의 영역 속에 영원히 잠식되어 객관화로부터 자유로운 주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정한 심리적 및 실천적 작용을 … Continue reading 그러나 주관적인 것은 객관적인 것의 내적 모순을 심화·발전하는 규정자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합목적적 활동은 특정한 원소의 내적 모순을 심화하여 그 이행을 에너지로 삼는, 원자력 발전이라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였다. 심지어 원자력의 이용은 지구 전 영역의 물질적 흐름을 급격하게 바꿀 수 있는, 추가적인 인간 행위를 산출할 수도 있다. 이렇듯, 필연성을 인식한 인간의 활동은 객관적인 것의 발전에서 지대한 변수가 된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의 합목적적인 활동은 상대적으로 자기-목적적이다.

인간의 합목적적인 활동은 객관과 주관을 넘나드는,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전제로 하는데, 이는 의식의 변증법, 즉 주관적 변증법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인간의 의식은 내적 모순과 상대적인 외적 모순의 연관체인 물질 운동을 반영하는데, 이렇게 반영되어 형성된 관념은 객관적 형식이 아니라 주관적 형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주관적 형식은 개념, 판단, 추론, 법칙[50]≪철학노트≫, 논장, pp. 133-134., 표상, 주관적 범주 등이 있는데, 각자의 형식은 그것이 반영한 물질 운동 과정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 형식들은 연관을 이루어 의식적인 내용을 이룬다. 그리고 연관을 이루는 내용은 다시 하나의 형식으로 이행하고, 이행되어 생성된 형식은 다시 이를 반영한 내용을 구성한다.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문제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주관적 형식이 사념에 불과한 표상에서 추상적인 개념[51]헤겔과 S. 홀게이트는 이를 형식적 개념이라 하고, L. 비고츠키는 이를 전개념(Pre-concept)이라 한다. M. 토이니센은 표상마다 외면적인 형식(주관적 … Continue reading으로, 그리고 추상적인 개념에서 구체적인 개념으로 상승[52]이 상승 과정에 대해 필자는 이미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고등 의식으로의 발전과 실천에 대하여≫(노동사회과학연구소, 2021년 9월 호 및 10월호 … Continue reading을 중시한다.[53]슈틸러는 이를 변증법적 사고(Dialektisches Denken)라고 한다. 이에 관해 슈틸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변증법적 사고는 본질적인 맥락에서 사고는 … Continue reading 이 상승은 주관 상에서의 내용과 형식이 내재한 모순을 인식했을 때 추동되는데, 이 추동은 기존의 주관적 내용과 형식을 검증하기 위한 상대적으로 능동적인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54]뮈슬리프첸코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개인은 자기의 자유를 우선 그 자신의 감정으로서, 또한 선택의 자유 가운데 있는 주관적 … Continue reading 부단히 운동하는 객관적인 현존재 규정의 생성·소멸 및 변화·발전과의 근사적 일치를 주관적 형식으로 구현한 의식의 제 내용를 갖춤으로써, 비로소 객관 사물에 관한 상대적 진리를 획득하게 된다. 상대적 진리란 반영의 근거인 객관적 운동 연관과 발전 연관을 파악한 것으로, 인식주체는 대상 사물의 내적 연관을 올바로 이해하고 사물의 필연적 법칙성을 상승하는 욕구에 조응시켜 능동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이때 외적 합목적성은 인식주체에게 맹목적으로 작용하길 중단하고, 인식주체가 필연적 법칙성을 통해 사물을 능동적으로 개변한다. 주관적 형식이 그것이 지니는 내용의 발전을 추동하고, 그 내용이 객관적 실재의 운동과의 일치로 나아갈 때 상대적으로는 불철저한 능동성이 성립한다. 인간은 이러한 낮은 단계의 능동성을 획득하여 올바른 실천으로 나아가 인식주관이 지닌 모순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그 모순을 극복할지[55]이렇게 하여 인식주체는 과거보다 한 단계 발전한 인식 지평을 얻을 수 있다., 아니면 올바르지 못한 실천, 즉 맹동하여 인식주관이 지닌 모순을 계속 간직하고 추상적인 사고 단계에 머무를지, 그 향방에 대해 주체적으로 개척할 수 있다.

 

의식의 변증법에서 의식은 내적인 성찰과 낮은 단계에 머문 능동적인 실천을 통해 그것의 발전에 관한 내적 추동력을 얻는다. 내적 추동력을 통해 형성된 발전한 의식의 제 형식과 내용은 그에 대응되는 내적인 성찰과 실천을 산출한다. 이러한 의식의 변증법은 객관과 분리된 과정이 전혀 아니며, 객관적 변증법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의식의 변증법은 그것의 가장 초보적인 추동이나 과정에서 객관적 실재의 과정, 운동을 반영한 것이다. 동시에 의식의 변증법은, 상대적이지만 그것의 발전 추동력을 그것이 초보적인 단계에 형성한 주관적 내용과 형식에서 얻는다. 사유가 지니는 모순의 심원은 객관적 변증법의 산물이고, 사유의 발전을 구성하는 주관적 모순은 객관만이 아니라 주관적인 형식과 내용으로부터 그 추동력을 얻는다. 내적 추동력을 통해 상승한 구체적인 사유는 존재와의 일치성, 즉 상대적 진리를 획득하게 되고 자연을 개변한다. 인식의 시작 단계에서 인식의 변증법은 객관에서 (낮은 단계의 인식·사유로서)주관으로 옮겨가는, 구체에서 추상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인식의 발전과 확대는 추상에서 구체라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이론적 성찰과 실천의 부단한 통일을 통해 형성된 구체적인 사유는 자연을 개조하는 주관에서 객관이라는 변증법을 성립한다.이 과정은 인식의 가장 저급한, 그러나 시초적인 단계인 감응의 단계에서 추상적인 사유의 단계인 감각적 확신-지각-오성, 그리고 구체적인 사유의 단계인 이성적 인식으로의 발전이라는 수순을 밟으며 진행된다. 전 과정은 낮은 수준의 실천에서 높은 수준의 실천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며, 종국에는 객관과 일치성을 이루는 구체적인 개념을 형성하여 사물의 필연적 법칙성을 파악하고, 외적 합목적성의 맹목적인 작용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의식의 변증법이 지니는 상대적 자기 운동은 사회주의 및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경제 계획의 실재적 가능성이자 실재적 필연성이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라는 과도기에서 추동되는 의식의 능동성과 경제 계획의 조화에 관해 슈틸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주관적 요인이 지니는 창조력(die Schöpferkraft des subjektiven Faktors)과 의식의 능동적 역할(die aktive Rolle des Bewußtseins)은 사회주의 건설의 과학적 계획의 발전과 완성에서 표현된다. … 계획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의식적인 창조 과정이 전개되는 필수적인 형태이다. 계획 기구는 사회적 의식이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집단적 주체의 도구이다. … 의식의 변증법(Die Dialektik der Bewußtheit)은 새로운 경제 체제에 의해, 경제 계획 분야에서 새롭고 더욱 높은 방식으로 실현된다. 기본적인 경제 과업들에 관한 중앙계획은 개별 경제 단위에서 주요 생산업과 생산 부문의 독립성을 고려한 계획을 포함하하여, 그것들을 유의미한 단위로 병합한다. 의식은 자기 조직화된 변증법적 체계로 생성되는데, 이것은 심급에 의해 미리 질서지어진 조절 메커니즘의 경직된 선형성이 아니라 체계의 변증법적 구조에서 비롯되는 상대적인 변증법적 자기 운동을 수행하게 된다. … 객관적인 경제 법칙의 완전한 활용은 경제 계획의 살아있는 내용이 된다.“[56]DuP, SS. 165-166. (강조는 인용자)

 

사회주의 사회에서 생산·유통·분배 전반에 관한 중앙집중적인 계획의 확대는 곧 상승하는 인식과 실천의 표현 형태이다. 이는 자유의 확대를 의미한다.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간다면 자유는, 생산력의 항구적 발전을 억압하는, 즉 과잉생산과 자본가치의 파괴를 동반하여 생산양식의 내용과 형식의 비조응을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는 조건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소외된 노동으로, 자본의 자기 증식에 가현되어 있는, 〈외적 합목적성의 맹목적 작용으로서의 노동〉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자유의 확대를 위한 합목적적인, 자연 개변의 실천이 아니라 동물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는 타성적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적대적 분업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 이는 전인적 인간을 형성하지 못하게 하여 사물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을 가로막는다. 전 사회적인 생산은 무정부적·무계획적·무의식적으로 추동되는 타성적 운동 과정에 불과하다. 이러한 조건에서 자유를 희구하는 노동대중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적인 규정력을 확보하는 한, 노예적 삶은 필연이라는 것을 인식함이 전제될 것이며, 자연스럽게 자본주의 사회에 대항할 것이다.[57]DuP, S. 181.

 

 

결론

 

자유란 객관적 범주인 현실성과 가능성, 필연성과 우연성을 경유하여 부단히 운동하는 과정으로서 객관적 실재와의 주관-객관적 일치를 획득하는 과정이며, 또는 그것의 결과이기도 하다. 현실적으로 그것은 생산력의 항구적인 발전이다. 우리가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자유의 왕국은 필연의 왕국과 나란히 하여 존재하는 규정이지, 필연의 왕국을 완전히 소멸하고 그 위에 선 규정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유의 왕국은 외적 합목적성의 세계인 필연의 왕국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며, 서로 변증법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다.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에서 자유의 왕국은 높은 단계의 그것보다 훨씬 낮은 수준에서 현실화된다. 생산력이 끊임없이 발전하는 속에서 계급이 소멸하면 일반적으로 가능성의 영역에서만 존재했던 자유의 왕국이 그 전 단계의 사회에서의 그것보다 전면화된다.

 

오늘날 자유에 관한 지배적인 담론은 자유의지론이다. 자유의지론은 필연과 무관한, 이와는 독립된 선택의지만을 자유의 유일한 내용으로 삼고 있다. 이들은 필연에 대한 인식과 무관하게, 모든 사람은 환경적 작용을 초월하여 선택의지를 지닐 수 있다고 한다. 이들에게 선택의지는 항구적인 것인데, 자유의지론자들은 개인에게 닥치는 불행, 부조리 등의 근거를 오로지 개인에서만 찾는다. 즉 개인이 겪는 불행은 개인이 스스로의 선택의지를 통하여 언제나 피할 수 있으며, 그것은 환경적 작용과는 완전히 무관하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 개인이 자신에게 온 불행을 피하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 개인의 탓이다. 자유의지론은 빈곤 문제마저도 사회적인 문제, 외적인 합목적성의 관철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환경을 초월한 노력의 부재 여부에서 찾는다. 자유의지론은 생물학, 심리학, 뇌과학 등의 발달로 부르주아 학계 내에서조차 그 이론적 파산을 면치 못하였으나, 대중적으로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암암리에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자유의지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계급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반영된 담론이라는 점에서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의지론에 대응하는 전반적인 흐름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초해 있다기보다는, 기계적 결정론에 기초해 있다. 이들은 18세기 프랑스 유물론이 범했던 오류를 재차 범하며, 자유의지론에게 정치적으로 유리한 지형을 내주고 있다.

자유의지론자들은 ”마르크스주의는 ‘강한 결정론’(hard deter- minism)[58]부르주아 강단학계에서 기계적 결정론을 이르는 말이다.에 근거하기에, 그것은 숙명론과 다를 것이 없다“고 악선동한다. 그러나 맑스주의는 ‘강한 결정론’을 극복한 세계관이다. 일부 학자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양립가능론(compatibilism)으로 묶으려고 하는데, 변증법적 유물론은 기계론과 자유의지론을 절충한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양립가능론으로 묶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자유에 관한 부르주아적 관점 중 또 하나의 대표적 경향은, 생산력의 일정 발전 국면에서 생성된 형식적 자유를 본래적인 자유와 동일시한다는 것에 있다. 양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이동의 자유, 종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을 자유 그 자체로 여기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적 자유는 부르주아적 재산권의 확립 과정에서 생성된 부산물이며, 더욱 본질적으로는 생산력 발전의 일정 단계에서 형성된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적·법률적 형태로서의 ‘자유’이다.[59]“지배하는 개인의 권력이 국가로 구성된다는 사실과 무관하게 지배하는 개인조차 이런 실제 관계[소유관계; 인용자]아래 지배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 Continue reading 이는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없다. 되려 부르주아적 형식적 자유는 생산력의 항구적 발전에 따른 자유의 확대 과정에서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며, 종국적으로는 소멸할 것이다. 예를 들어, 종교의 자유를 보자면, 부르주아는 누구든 자의적으로 종교를 믿을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생산력이 발전한 미래공산제에서는 객관 사물의 필연적 법칙성에 대한 인식 수준이 매우 높을 것이기에 종교를 믿을 필요도 없어진다. 미래 사회에서 종교를 믿을 ‘자유’는 명시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동의 자유, 표현의 자유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유의지론의 악선동과 달리, 변증법적 유물론은 변증법적 결정론에 기초해 있다. 변증법적 결정론에서 자유는 필연과 독립하여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객관적인 필연을 주관이 구체적으로 재현한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재현도 객관적으로는 필연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필연을 이루는 것이 된다. 이러한 점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결정론적 세계관에 기반한 것이다. 필연과 우연, 원인과 결과가 변증법적 상관을 이룬다는 것을 승인한다는 점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기계적 유물론과 대척점에 서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자유에 관한 문제를 다룰 때, 가장 큰 난점은 인식주체가 주체적으로 어떻게 상(象)을 형성하며, 상이 인식주체의 능동적인 활동에 의해 어떠한 경로를 거쳐서 개념으로 이행하는지에 대해서 통일적이고 구체적인 해명을 내리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심지어 상에서 개념으로의 발전과 실천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유기적으로 결합을 이루는지에 대하여도, 현재까지는 개론적인 수준에서 추상적인 서술에 머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상에서 개념으로의 이행, 구체적 개념의 형성을 다루는 것은, 인간 자유의 근거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그러나 맑스, 엥겔스와 레닌, 마오쩌둥까지 이 문제에 관해서 명확하고 간단한 해답을 내놓지는 못했다는 점[60]뒤에서 언급하겠지만, 맑스와 엥겔스가 공동으로 저술한 ≪독일 이데올로기≫는 이 문제에 관해 다루지만, 매우 난해하게 서술되어 있으므로, … Continue reading에서, 이 과제는 후대 유물론 철학가의 과제가 되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 변증법적 유물론이 일정한 공백을 지녔음으로 인해 쏘련과 동부 민주독일의 수정주의자들은, 그것을 칸트적 절충주의로 해소(H. 자이델, H. T. 프롤로프 등이 대표적)하고자 했다. 민주 폴란드에서 맑스주의의 탈을 쓴 주관주의 이론가인 A. 샤프는 근대기의 휴머니즘과 키에르케고르적 실천관을 절충하여 자유에 관한 직관주의적 체계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수정주의적 시도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이론적 기반을 부정함을 기초로 하여 자유와 실천 문제를 논한 것이기에 적절한 연구라고 할 수 없다.

사회주의 조선의 주체철학자들은 철학의 근본물음에 관한 새로운 견해를 추가하고, 인간의 이른바, 3대 본질적 속성으로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강조하여 인간의 능동적 의식 활동 및 실천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한국의 국가보안법은 주체철학의 연구를 적극적으로 차단하고 있기에 더 이상의 깊은 내용으로 접근하는 것이 어려운 상태이다.

 

20세기 사회주의권에서 맑스-레닌주의 철학가로 활동한 뮈슬리프첸코, 슈틸러, M. 부어, R. O. 그로프, K. S. 바크라제 등은 이 문제를 다루었는데, 나는 이들의 성과가 더욱더 발굴되고, 그것이 번역되고 소개된다면 이 문제를 다루는 데서 큰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이와 더불어, 나는 전통적으로 〈사적 유물론의 시초〉라 평가받고 현재까지도 그러한, 맑스와 엥겔스의 난해한 저서인 ≪독일 이데올로기≫가 이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저서는 확실히 현재 다루는 문제에 관한 간단한 형식의 해명을 주지는 않지만, 서술된 비판적 내용을 교차·분석하고 종합할 경우 위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충분히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80년대 말 ≪독일 이데올로기≫는 발췌 번역만 이루어졌으며, 현재까지 대중적으로도 이 저서는 몇 개념어로 정형화된 사적 유물론만을 철저히 교육한다는 의미에서만 읽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사적 유물론은 물질의 자기 운동에서 객관과 주관의 상관이라는 요소를 빼놓고는 깊게 이해할 수 없다. 최근(2019년),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가 ≪독일 이데올로기≫를 완역하였다. ≪독일 이데올로기≫의 난해한 문장을 번역한,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의 고생 덕분에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막스 슈티르너에 관하여 어떠한 인식론적 비전을 가지고 비판을 가했는지 비교적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본 문서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중점으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앞으로의 객관-주관 변증법 연구 방향은 ≪독일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사과연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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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논리학은 세계에 대한 인식의 역사의 총계, 총화, 결론인데, 여기서 인식은 그것의 형식으로서 개념·판단·추론을 포괄한다. (블라디미르 레닌, 홍영두 역 (1989), ≪철학노트≫, 논장, p. 37.)
2 인간은 환경으로부터 그 어떠한 인과적 영향을 받지 않으며, 자연발생성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제한적으로만 존재한다는 자유론으로 과거 중세 스콜라 학파 주류, 근세 라이프니츠, 칸트 등에 의해 주장되었다. 오늘날에는 자유의지론으로 불린다.
3 어떠한 특정한 계기에 의해 순간적인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상 조류로, 실존주의, 생철학과 해석학 등이 이러한 자유론을 갖는다.
4 대표적으로, 물질과 그 인식에 대한 슬라보예 지젝의 이해는 이러한 편향에 속한다. 그 자세한 내용은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문영찬 저, 노사과연)을 참조하길 바란다.
5 헤겔은 ≪논리의 학≫ <본질론> 제3장에서 규정적 근거가 갖는 특성을 해명하였고, 그 한계를 밝혔다. 그는 “갖가지 규정적 근거에 관한 반성이 만약 지금까지 밝혀진 바와 같은 근거의 형식에 의지할 경우에는 필경 여기서 어떤 근거를 제기한다는 것이 한낱 형식주의적인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하였다. (게오르크 헤겔, 임석진 역 (1983), ≪대논리학≫, 제2권, 지학사, p. 134.)
6 주관이 객관에 선행한다는 식의 설명은 자연과학의 요구와 배치된다. 레닌은 따라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페촐트는 인과 법칙을 일의적 규정성의 법칙(das Gesetz der eindeutigen Bestimmtheit)으로 개종시켜 아래에서 보게 되다시피 이 법칙의 선험성을 자기 이론에다 도입했다. 이것은 페촐트가 칸트주의적 관념을 빌어 아베나리우스의 주관적 관념론 및 유아론으로부터 자기를 구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 학설을 지구(객체)가 생물(주체)이 출현하기 훨씬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언명하는 자연과학의 요구와 조정할 수 없다는 것, 이러한 것들이 페촐트로 하여금 인과성(일의적 규정성)에 달라붙게 했다.” (블라디미르 레닌, 박정호 역 (1992),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상권, 돌베개, p. 114.)
7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의회에 관해 다룬 볼테르의 서신에서 표현된 ‘자유의 확립’만큼 형식적인 자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형식적 자유 역시 당대 봉건 통치배들과의 투쟁이라는 근거 관계를 갖는 것으로서의 형식이다.
8 마르크스는 경제학과 철학에 관한 그의 수고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짐승은 직접적인 육체적 욕구의 지배하에서만 생산하지만, 인간 그 자체는 육체적 욕구로부터 자유로이 생산하며, 그러한 욕구로부터의 자유 속에서만 비로소 진정으로 생산한다; 짐승은 그 스스로만을 생산할 뿐이지만, 인간은 자연 전체를 재생산한다; 짐승의 생산물은 직접적으로 그 동물의 육체에 속하게 되지만, 인간은 자신의 생산물과 자유롭게 대립한다.” (MEW, Bd. 1, SS. 370-371.)
9 실제로 자유를 단순히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기술하는 사례는 적지 않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외적 합목적성[객관적 실재의 유기적 매개·연관]에 의하여 지시[지배]되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자본론≫, III-2, 백의, pp. 1003-1004.)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노동은 자연과 인간이라는 양 규정자가 있는 한 사라질 수 없으며, 당연히 인간적 생활양식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자연 속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노동함은 그것 자체로 자연 필연성을 이룬다. 자유의 왕국에서 노동은 사라지지 않는다. 자유의 왕국에서 노동은 비로소 가상의 지위라는 성격에서 벗어난, 인간 유적 본질을 실현하기 위한 활동으로서 노동이 되는 것이다.
10 노동시간의 단축에서 주어로 되는 것은 아직은 소외된 성격을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한 노동의 시간을 말한다. 노동시간의 단축은 자유로운 노동의 조건이면서, 동시에 자유로운 노동의 결과이기도 하다. 즉, 노동시간의 단축은 미래공산제에서 계속될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동시에 그 단축 자체가 유적 본질의 실현으로서 노동의 근거가 된다. 노동에 관한 이러한 변증법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채,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노동시간의 단축을 말하게 되면, 되려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에 얽혀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칭하는 이성백 교수의 노동 개념에 대한 낭설은 그것의 대표적 예이다.(최원형,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진짜 노동해방이다」, 한겨레, 2010-12-23, 기사 인용문: “이 교수는 “21세기 코뮌주의의 이상적 목표는 사적 소유가 철폐된 가운데 적은 시간 일하고 남는 시간은 생명향유 활동에 쓰는 것이라며 노동시간 단축이 노동운동의 핵심 과제라고 주장한다. 곧 노동해방의 이념이 자본으로부터의 해방뿐 아니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소득을 노동으로부터 분리해 모두에게 보장하자는 기본소득론과도 연결된다.“)
11 자연 필연성에 의한 타성태로서 인식주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한편으로 대상에 관한 자율성의 발현이다. 그리하여 이 지점에서 자유로운 행위로서 ‘자유로운 선택‘이 거론되지 않는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2 A. 뮈슬리프첸코는 이 점에 대해서 옳게 파악하고 있다: “어떠한 사회적 활동도 모든 개인의 행위에서부터 성립되고 있지만, 경제적 토대는 이들의 행위를 보통 ‘궁극적’으로 제약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 결의를 위한 일정한 여지가 늘 존재한다는 것,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창조하지만 제멋대로 만드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 그때 사람들은 이 외적 필연성에 반드시 자연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 외적 필연성을 지지하거나 거기에 반항하거나 하면서, 바로 그것으로써 자신의 의지의 자유와 자각을 표출한다.”(A. 뮈슬레프첸코, 진영민 역 (1989), ≪철학적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인간≫, 논장, p. 150.)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내적 자유에 대한 과학적 이해는 다음과 같은 것에서 출발한다. 즉 내적 자유는 상대적인 자립성을 지니지만, 고립적인 것이 아니고, 밖으로부터 즉 일정한 사회환경과 자연적 제 조건에 의해 부과되어지는 양자택일[선택; 인용자]의 연관으로서 고찰되어야 한다.”(앞의 문헌, p. 164.)
13 오토 쿠시넨, 서진영 역 (1990), ≪변증법적 유물론 입문≫, 동녘, p. 140.
14 소련과학아카데미, 문성현 外 역 (1990), ≪맑스주의 변증법의 역사≫, 제1권, 한울림, pp. 93-94.
15 하지만, 한편으로 모든 서술은 형식규정적 성격을 갖고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모든 서술은 상대적으로 동어반복적이다. 그것은 본고의 글이 지니는 한계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본고는 또한 기존의 자유에 관한 실재적 근거에서 만족하지 않고, 실재적 근거의 근거를 거듭하며 자유의 본질에 상대적으로(기존의 서술 방식과 비교하여) 근접해 가려고 한다.
16 프리드리히 엥겔스, 나상민 역 (1990), ≪공상에서 과학으로≫, 새날, p. 68.
17 위와 같은 문헌, pp. 75-76.
18 프리드리히 엥겔스, 윤형식·한승완·이재영 역 (1989), ≪자연변증법≫, 중원문화, p. 223.
19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민해철 역 (1987), ≪맑스주의의 근본문제≫, 거름, pp. 130-131.
20 그러나, 수행된 반비판은 현재까지 소개되었던, 필연과 자유에 대한 형식적 언급과 별다른 차이를 갖지 않는다.
21 ≪티마이오스≫에 따르면, 지성과 필연은 동일한 것으로 취급되지 않으며, 지성은 필연의 외부에서 필연을 설득하는(69a-c), 초월적 존재로 간주(68e)되고 있다. 이러한 지성의 설득이 없다면, 필연은 맹목적인 작용으로서 방황하는 원인에 불과하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22 자연학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소론집에 따르면,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보다 선대의 철학자들이 갖는 몇 가지 모순적 설명 방식에 대해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즉, 엠페도클레스를 포함한 과거의 자연철학자들은 “모든 결과는 항상 원인을 갖는다.”는 인과론을 인정하면서도, 어떠한 자연 현상에 대해선 우연을 비판적 태도 없이 운운하였다는 것이다. (김영균 (1989),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우연(tyche)의 문제>, 한국서양고전학회, ≪서양고전학연구≫, 제3권, pp. 54-55.) ≪자연학≫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군가는 어떠한 것도 운으로부터 나올 수는 없다고 말한다”라고 하면서 “[그런데 그들은 또한; 인용자] 마찬가지로 그것들이 운으로부터 나왔다고 말하면서도, [재차; 인용자] 그것들의 원인으로 간주되는 어떠한 것이 항상 있다고 한다”고 하며, 필연과 우연에 대한 자연철학자들의 모호한 태도를 문제시한다. (≪자연학≫, 196a1-7.) 공교롭게도, 오늘날 적지 않은 변증법적 유물론 교과서에서 보여주는 필연과 우연에 대한 설명 역시 고대 자연철학자들의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데, 이는 뒤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23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김창성 역 (1989), ≪키케로의 최고 선악론≫, 서광사, p. 22.
24 ≪철학의 위안≫, 제5장, 산문6.
25, 35, 37 위와 같은 출처.
26 Augustine of Hippo, Peter King (2010), On the Free Choice of the Will, On Grace and Free Choice, and Other Writings, Cambridge University Press, III:10.
27 스피노자의 맥락에서 ‘필연을 인식하는 것‘은 사유 규정으로 취급될 뿐, 엄연히 관조적인 사유를 벗어난 실천은 고려되지 않는다.
28 G. W. F. Hegel, Werke, Vollständige Ausgabe durch einen Verein von Freunden des Verewigten, Bd. 15, S. 368.
29 헤겔은 이를 “형태도 없이 도처에 스며들어 있는 본질“(G. W. F. 헤겔, 임석진 역 (1983), ≪대논리학≫, 제2권, 지학사, p. 255.)이라고 표현하였다. 헤겔은 본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유(有), 곧 자기 자신의 부정에 의하여 제(諸) 자신을 매개하고, 또한 제 자신과 관계하는 직접성, 따라서 동시에 제 자신과의 관계로, 곧 역시 직접태로 자기를 지양하는 매개이기도 한 직접성이 바로 본질이다.” (G. W. F. 헤겔, ≪철학 강요≫, 제111절.) 본질은 반성적 정립작용 그 자체인데, 본질은 정립작용의 제 양상이 각자의 직접태를 자기지양을 하는 모든 전개를 내포한다. 예를 들어, 녹는 얼음은 수많은 조건에 의해 녹고 있는 중인 얼음, 즉 액체로서 물로 변화하는 도정 속의 ‘녹는 얼음’이다. 본질은 이 도정 전반과, 그 도정 속에서 직접태를 갖는 모든 것의 자기반성, 즉 자기지양태 전체를 의미한다.
30 외적인 것은 실존을 의미한다. 실존은 본질의 정립작용 상의 제 양상이 모든 직접태를 아우른다. 이 실존이 각자의 직접태를 정립작용을 통해 스스로를 규정하고 형식을 부여하면 그것이 현상으로 된다. (≪대논리학≫, 제2권, p. 255.)
31 내면적인 것과 외면적인 것은 서로 즉자대자적으로는 동일한데 왜냐하면 두 규정은 각자 자기지양을 통하여 대립항으로 부단히 이행하고, 그 역순을 반복하며 서로를 규정해주기 때문이다. (≪철학 강요≫, 제141절.)
32 ≪대논리학≫, 제2권, p. 255.
33 위와 같은 문헌, p. 274.
34 위와 같은 문헌, p. 276.
36 형식적 가능성은 “단적으로 타자에게로 이행하는 범위 내에서의 동일성”을 가리키기도 한다. (위와 같은 문헌, p. 289.) 여기서 단적으로 타자에게 이행한다는 것은 외적인 것과의 상관이라는 규정이 생성되기 전의 모든 ‘잠재적인’ 현실성(형식적 현실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형식적 가능성이란 이러한 막연한 현실성으로서의 막연한 가능성에 불과한 것이다.
38 위와 같은 문헌, p. 281.
39 위와 같은 문헌, p. 277.
40 위와 같은 문헌, p. 279.
41 위와 같은 문헌, p. 284.
42 위와 같은 문헌, p. 285.
43 위와 같은 문헌, p. 291.
44 국내에서 널리 읽힌 녹두출판의 ≪세계철학사≫(전3권), F. V. 콘스탄티노프가 감수한 변증법적 유물론 교재, 그리고 원서를 알 수 없는 번역 교재 등이 모두 이러한 수준에서 필연과 우연의 관계를 서술하고 있다. 해당 교재에서 필연과 우연의 변증법적 상관은 선언적이고, 매우 추상적인 수준에서만 언급된다. 필연과 우연은 객관에서도 작용하는 것이고, 그것은 인식주관의 파악 여부와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규정이다. 만약에 우연을 “파악되지 못한 필연‘으로 간주한다면, 이는 18세기 프랑스 유물론이 우연에 대해 다루었던 그것과 하등 차이가 없는 방식이 될 것이며, 그것을 애초에 우연이라고 명명하는 것부터 무의미한 것이 된다. 우연을 지성의 무지로부터 설명하였던 방식은 고대에 이미 존재했으며, 이는 앞서 언급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학≫에서 지적한 것이다. 그는 자연철학자들이 필연과 우연이 모두 존재한다는 것(심지어 데모크리토스조차 이를 모호하게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을 형식적으로는 인정하면서도, 두 규정을 본격적으로 다룰 때에는, 우연 일반을 모조리 필연으로 해소해버렸다는 것을 지적하였는데, 필연과 우연에 관한 불철저한 서술 또한 이 맥락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45 이와 반대로 헤겔은 ≪논리의 학≫ 본질론의 현실성 편 마지막 장에서 형이상학적 인과론으로는 운동성을 확립할 수 없다는 점을 옳게 지적한 다음, 현실성과 가능성, 필연성과 우연성의 변증법을 보편자·특수자·개별자의 매개연관을 통해 구현할 수 있는 주체는 개념뿐이며, 개념만이 절대적으로 자기 운동한다는 객관적 관념론을 전개한다. 그는 개념이 구현하는 세계(왕국)를 자유의 왕국(Reich der Freiheit)이라고 한다. (위와 같은 문헌, pp. 330-331.) 헤겔의 견해는 추상적인 비물질적 존재의 절대적 자기 운동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유물론과 대립된다.

슈틸러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종합한다: “[헤겔의; 인용자] 전체성(totalitat)은 외부로부터 규정될 뿐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부터 스스로를 형성하고 주관적인 단위로서, 그리고 그 자체의 목적으로서 자신과 관계한다. … 변증법적 전체성만이 스스로를 형성하고 그 자체에 근거하는 목적을 실현할 수 있기에, 주관성(subjektivitat)이라는 과정(prozeß)은 필연적으로 전체성의 전개로 규정된다. 따라서 전체성은 본질적으로 자기 운동으로 나타나며, 이는 자기 운동의 또 다른 필연적인 계기이다. … 그 운동 과정은 그 체계의 내적 모순에서 비롯되는 변증법적 자기 운동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Gottfried Stiehler (1970), Der Idealismus von Kant bis Hegel (약칭, IKbH), Akademie-Verlag, Berlin, S. 20.)

46 Gottfried Stiehler (1968), Dialektik und Praxis, Akademie-Verlag, Berlin, S. 61. (약칭, DuP)
47 주관적인 것은 객관적 실재는 아니지만, 실재적인 것이다.
48 “부르주아 철학자들에게 자기 운동은 본질적으로 개념에 의해 결정되는 과정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은 사회발전에서 이데올로기적 활동을 절대화하였기에, 자연스럽게 인간의 자기생산을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적 과정이라고 해석하였다.” (DuP, S. 80.)
49 이것은 필연적인데, 주관의 영역 속에 영원히 잠식되어 객관화로부터 자유로운 주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정한 심리적 및 실천적 작용을 거쳐 객관화된다. 즉 주관적 형식과 무한히 관계하며 무한한 자기의식으로 되는, 그러한 의식은 존재할 수 없으며, 그것은 일정 단계에서 객관화되어야 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신성가족≫에서 B. 바우어의 비판적 비판주의 일파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실체로부터 또다른 형이상학적 괴물주체‘, ‘과정으로서 실체‘, ‘무한한 자기의식에 다다랐으며, ‘완전하고 순수한 비판주의의 최종 결과는 사변적헤겔 학파형식에서의 기독교 창조론의 복구라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K. 마르크스·F. 엥겔스 (1844), ≪신성가족≫, 이웃 (1990), p. 219.) … 바우어의 ‘자기의식’도 자기의식으로 ‘고양되어진 실체’ 혹은 ‘실체로서의 자기의식’이다. 즉, 자기의식은 ‘하나의 인간 속성’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주체’로 변형되었다. 이는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신학적’ 풍자이다.(p. 221.)”
50 ≪철학노트≫, 논장, pp. 133-134.
51 헤겔과 S. 홀게이트는 이를 형식적 개념이라 하고, L. 비고츠키는 이를 전개념(Pre-concept)이라 한다. M. 토이니센은 표상마다 외면적인 형식(주관적 내용과 형식 간 내적 연관을 파악한 것이 아니라, 저마다 서로에 대해 무관심한 자립성, 즉 추상적 자립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 것)을 부과한 후 그것을 연언하여 판단과 추론의 근거로 사용하는 모든 주관적 과정을 오성에 의한 활동이라고 본다. (M. 토이니센, 나종석 역, ≪존재와 가상≫, 용의 숲 (2008), pp. 32-33.)
52 이 상승 과정에 대해 필자는 이미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고등 의식으로의 발전과 실천에 대하여≫(노동사회과학연구소, 2021년 9월 호 및 10월호 ≪정세와 노동≫)에서 밝힌 바 있다. 비록 뼈대만 있는 글에 불과하며, 지속적인 교정을 통해 내용의 수준을 끌어올려야 하겠지만, 주관적 변증법, 즉 의식의 변증법에서 표상과 개념의 능동적인 가공이 물질 과정의 모순을 반영한 의식의 제 형식과 내용이 지니는 모순 및 실천을 그 추동력으로 삼는다는 것은 충분히 다루었다고 생각한다.
53 슈틸러는 이를 변증법적 사고(Dialektisches Denken)라고 한다. 이에 관해 슈틸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변증법적 사고는 본질적인 맥락에서 사고는 구체적인 사고(konkretes Denken)이다. 현실 그 자체의 관계가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옳은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하는 것은 내적 추동력(innerer Bewegkräfte)에 기초한, 체계의 변증법적 자기 운동(der dialektischen Selbstbewegung des Systems)을 이해하는 것을 포함한다. 규정의 고립(isolierten Bestimmungen)을 고집하는 것은 결코 자기 운동에 대한 지식으로 이어질 수 없는데, 그것은 오히려 운동을 외적인 결합(äußere Verknüpfung)으로만 이해할 뿐, 체계 자체를 매개하는 것(Vermittlung eines Systems)으로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DuP, S. 144.)
54 뮈슬리프첸코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개인은 자기의 자유를 우선 그 자신의 감정으로서, 또한 선택의 자유 가운데 있는 주관적 현상으로서 감지한다. 이것은 자유에 대한 제 국면의 하나이다. 그러나 자유의 본성은 이러한 주관적 측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사회적·활동적인 한, 선택의 자유는 계속해서 보다 높은 제 단계에서 결의의 자유로 옮겨지고, 이어서 행위의 자유, 즉 객관적 자유로 옮겨간다.” (≪철학적 인식의 대상으로서 인간≫, p. 165.)
55 이렇게 하여 인식주체는 과거보다 한 단계 발전한 인식 지평을 얻을 수 있다.
56 DuP, SS. 165-166.
57 DuP, S. 181.
58 부르주아 강단학계에서 기계적 결정론을 이르는 말이다.
59 “지배하는 개인의 권력이 국가로 구성된다는 사실과 무관하게 지배하는 개인조차 이런 실제 관계[소유관계; 인용자]아래 지배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실제 관계 아래 지배하는 개인은 특정한 물질적 관계를 통해 제약되는 의지에 대해, 국가 의지라는 또는 법률이라는 일반적 표현을 부여해야 한다.” (MEW, Bd. 3, S. 331; K. 마르크스·F 엥겔스, 이병창 역 (2019), ≪독일 이데올로기≫, 먼빛으로, p. 653.)
60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맑스와 엥겔스가 공동으로 저술한 ≪독일 이데올로기≫는 이 문제에 관해 다루지만, 매우 난해하게 서술되어 있으므로, 명료하고 간단하게 추려진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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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10개의 댓글

  • 사소한 오류 수정 제안을 드립니다.

    “이 과정은 단순 관조적 성찰(포이어바하가 그랬던 것처럼), 정적(精的) 인식, 이념적 추상(이론적 추상, 오성적 인식의 단계)과 다르며, 이론과 실천의 통일과 맞닿아 있는 과정이다.”

    라고 쓰셨는데, 静的、静観的 으로 수정하는 편이 독자들에게 글쓴이의 의도를 더 잘 전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지적 감사합니다. 원래 의도 자체가 静的이 맞습니다. 빨리 쓰다 보니 한자 표기가 잘못된 줄 모르고 그냥 지나갔네요. 감사합니다.

  • 지젝은 라캉의 실재 개념, 상징적 빈틈 개념을 통해 자유의 가능성을 찾죠. 여기서 지젝의 자유는 자연과 고립된 “과도한 우연적 제스쳐”로서의 자유 개념으로 개악됩니다. 또다른 주관주의자는 루카치가 있습니다. 루카치는 자유를 말하면서 자연변증법을 부정하고 오로지 사회의 변증법만을 제시했죠. 사회적 범주로서 물상화에만 천착했죠.

    앞선 견해와는 달리 이 글은 자연 필연성과 인간존재의 자유가 분리된 것이 아님을 잘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루주아들은 퇴폐쓰레기문화를 향유하는 것도 자유라고 하는데 이것도 다루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 현재도 시중에 나와있는 수많은 교재는 자유는 인식된 필연성이라는 설명 이상의 지식을 주지 못했고… 현재도 그런데 앞으로 많은 글을 써주시길 바랍니다.

    • 글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 글의 저자는 엥겔스까지 마르크스의 연속성 하에서 보면서 전형적인 스탈린주의의 ‘자유’ 노선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스탈린주의가 자유를 억압했다는 건 제대로된 사회주의자라면 누구나 압니다. 이 글 처럼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을 떠받든다면 자유는 무(無)가 된다는 것을 스탈린주의자들과 그들 중 하나인 이 글 쓴 저자는 모르나 봅니다. 자유는 사회 속 인간만의 고유성에서나 찾을 수 있는 것인데 계속 자연변증법과 사회를 엮습니다. 스탈린주의자들의 특징입니다. 자유는 인간의 자연으로부터 단절을 통한 무관계적 탈자만으로 이뤄질 수 있습니다. 계속 자연을 들먹이며 ‘자유는 자연과의 투쟁 성과물’ 같은 말이나 하는 게 스탈린주의자들 특징입니다.

    • 글쓴이의 ‘자유’는 전형적인 전체주의자들의 ‘자유’입니다. 북한, 구소련의 스탈린적 관료, 관변학자들이 말한/말하고 있는 그 ‘자유’를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글쓴이가 서두부터 비난하고 나오는 지젝은 과거 전체주의 국가의 그 ‘자유’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철학자에요. 글쓴이가 인용한 슈틸러도 검색해보니 동독 스탈린주의 정권 관변학자로 독일 통일 후에도 스탈린주의를 고수한 사람이네요. 저자는 코제브를 공부하도록 하세요.

      • 그러한 형이상학적이고 비과학적인 궤변은 어느 사고회로에서 책동되는 것입니까? 실제 문서에 근거한 내재적 관점으로 주창을 하셔야지, 자신의 자가당착과 주관적 관념론에 의한 현실부정을 나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단순히 반공주의자들 처럼 과장, 왜곡날조, 의도적으로 왜곡된 정치적인 선전선동에만 의거 하는 것은 자신의 맹동주의성과 망동성, 책동성과 단편성, 무지에 의한 모순과 그릇된 권위에 호소하는 모순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 교과서적인 자유 개념이 아니라 변증법과 관련해서 설명한 것을 보니 흥미롭습니다.

    자본주의 철폐 투쟁은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 오랜만에 80년대 소련철학책 역서보는 느낌을받았습니다.

    결정론과 자유의지론 대립이 학계의 관심사인데 운동이 자유를 말하면서 이걸 다루질 않았었죠.

    자유는 외적인 필연을 사유주체가 받아안고 인식된 실재적 가능성을 현실성으로 실현하는 것…

    오묘하고 재밌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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