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마당] 생각하며 투쟁하는 노동자! 그것은 곧 계급투쟁 실천의 첫걸음!!

― ≪피억압의 정치학(상)―한국사회와 노동자 · 민중운동≫을 읽고(1)

 

 

김용화 | 편집위원

 

* 채만수, ≪피억압의 정치학(상)―한국사회와 노동자 · 민중운동≫, 노사과연, 2008.

 

 

들어가며

 

≪피억압의 정치학≫ 이 책은 10여년도 훨씬 전에 발간된 책이다. 오래 전에 해체되었던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의 월간 기관지 『현장에서 미래를』에, 그리고 노동사회과학연구소의 월간 기관지 『정세와 노동』에 발표했었던 글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기타 이전에 발표한 글들이나 외부에 기고했던 글들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그 게재 지면과 시기를 밝혔으나, 게재된 신문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이 있어서 그 전체를 밝힐 수는 없었다.” 그리고 또 “우리 노동사회과학연구소의 모토이기도 한, 노동운동의 정치적 · 이념적 발전을 위해’ ‘생각하며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이 부족한 책을 바친다. 2008년 3월 14일 슬픈 날에… 이와 같이 저자는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

≪피억압의 정치학≫ 이 책에는 그 당시 노동, 정세사항들, 또는 우리 노동자들이 무심, 무지, 무기력함으로 미처 대응투쟁을 하지 못하고 지나쳤을 수도 있는, 아니, 오히려 목숨을 건 투쟁을 동반했었던 주요한 현황들을 적확한 계급적 관점, 즉 맑스 · 엥엘스 · 레닌 등의 사상을 전제로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며 부르주아지 지배계급과 그에 동조세력들의 추악함과 몰계급성을 폭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과 근로인민을 위해 이렇게까지 진심을 다하여 주옥같은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감탄이 절로 드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 진심은 글쓰기의 재주가 뛰어난 탓에 표현이 잘 되어진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저자의 올바른 노동자계급적 사상의 반영이라 본다. 하여 어느 누구한테서도, 어느 곳, 어디서도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현실에 바탕을 둔 지극히 계급적 이론과 실천방향의 중요한 내용들이 담겨있다 할 수 있다. 독자들은 이 책의 내용을 노동자계급적 관점으로 살펴보고, 계급투쟁에 실천의 밑거름이 반드시 되어야 함을 강조해본다.

 

앞으로는 현재보다 더 자본주의의 필연적 모순 때문에 부르주아지 지배계급으로 인한 피억압의 정치는 더욱 파시즘 적으로 강화될 것이기에, 노동자계급의 정치투쟁은 더 무기력해지고 혼란을 거듭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순으로 인해 계급투쟁은 더욱더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역사의 필연이 될 것이다. 그 모순이란 다름 아닌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성의 발전 자체에 있는 것이다.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발전 모순과 관련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변혁 가능성 및 필연성은 당연히 그 자본주의 혹은 생산력 발전의 낮은 정도나 왜곡 · 특수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고도화되고 성숙한 결과로서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비조응, 모순의 격화에 있는 것이며, 그 특수성은 구체적 전술 방침의 모색 · 수립과만 관계가 있다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과 그 모순의 격화에 그 변혁의 가능성과 필연성이 있다는 사실은 최근 수년 사이에 급속히 격화되고 있는 전반적인 경제위기, 고용 · 실업문제의 심각성 등에서도 경험적으로 증명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두 말하면 잔소리겠지만, 모든 주요생산시설 등이 대다수의 인민을 위한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성은 당연히 개인의 소외, 배제, 억압, 착취가 아닌 사회화로써 작용하기 때문에 만인에게 물질적 정신적 풍요를 필요에 따라 주어지게 한다. 그러나 지금의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모순으로 인해 노동자 개개인을 비롯한 노동자계급, 근로대중들의 처절한 생존권투쟁, 정리해고 등등의 사태의 심화가 깊어지고 있다. 그 심화 속에 우리 노동자계급은 더 이상 고통스럽게 허덕이지말고 적확한 계급적 사상을 견지하고 대중의 역동성을 합치하여 폭발로 나아가야 한다.

 

≪피억압의 정치학≫ 이 책에는 10년이 훨씬 넘은 내용들이 담겨 있지만, 생산력의 점차적 발전으로 인해 원시공동체 붕괴 이후에 계급사회가 발생하여 현재까지 대다수의 인민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그대로인 채이니 지금 현재의 피억압의 정치의 정세 또한 반영하는 그 본질에 있어서는 전혀 다를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의 그 추악함들을 지난 과거로만 치부 하지 말고 지금 세태와 비교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어야 한다고 다시한번 요구해본다.

 

또한 맑스 · 엥엘스 · 레닌의 사상을 구닥다리로 치부하는 이들이 더 많지만, 지금 현재도 여전히 노동자계급과 근로 대중의 억압하고 착취로 영속해오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역시 구닥다리가 아니라 인민에게 악으로 존재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아니, 보다 더 강고하게 우리는 맑스 · 엥엘스 · 레닌 사상을 전제로 끊임없는 사상학습을 대중의 역동성과 합치될 때까지 멈춰서는 안 될 최우선 중의 하나의 실천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노동자계급적 관점으로 실천투쟁이 진행될 수 있으며 이것이 곧 노동자계급 내의 정치노선의 혼란을 완화, 또는 사멸하게 하는 것이고 혁명을 앞당기는 길이다고 확신한다.

 

≪피억압의 정치학≫ 이 책은 상, 하 두 권으로 나누어 발간된 책이다. 발췌 · 정리를 딱 몇 번으로 나눠서 할지 정하지는 못할 것 같고 앞으로 진행하면서 량과 횟수를 조절할 예정이다. 그리고 모든 강조는 필자의 것이다.

 

 

제1부 부르주아 계급지배와 그 재생산

 

1. 추악함과 강고함, 그리고 환상의 변주곡

-부르주아 선거제도의 본질과 기능

 

■ ‘낙천 낙선의 시민운동’의 영광과 좌절

 

‘낙천 · 낙선운동’에 대한 ‘국민의 환호’ – 그것은 ‘부정부패’, ‘지역감정’, ‘정경유착’ 등의 전력과 혐의가 있는 정치인들을 총선에서 낙천 · 낙선시키면, 정치개혁이 이루어지고 진정으로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가 이루어지리라는 기대의 반영이다. 경실련이나 총선시민연대, 그리고 언론이 부추기는 것은 바로 그러한 기대이다 자신들의 ‘운동’이 일정한 정치적 위력을 발휘하여 자신들 시민운동의 정치적 사회적 위상이 비약적으로 높아지기를 바라는 내밀한 속마음은 화려한 구호 속에 감춘 채 말이다.

 

■ 부르주아 지배의 합리화를 위한, 대중에 대한 정신적 테러

 

시민운동 단체들과 진보적 언론’에게 있어서도 부르주아 지배와 합리화만이 문제인 것이다. 정치의 개개인의 풍성만이 문제이지, 그들 정치인이 속한 정당은, 민주당이든, 자민련이든, 한나라당이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안목으로 보자면, 오늘날 한국의 부르주아 정치 · 부르주아 지배가 대중의 경멸과 혐오를 받고 있는 이유는, 경제적인 영역에서의 재벌의 ‘천민성’과 더불어, 정치적인 영역에서는 오로지 부패 · 타락한 정치인의 진출을 저지하지 못한 때문만으로만 보일 터이다. 그러니 그들은 부패 · 타락한 정치인의 의회 진출을 저지하여 부르주아 지배를 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의 낙천 · 낙선운동, “그래! 그렇게 해서 고쳐 가면 되겠지” 하는, 근거 없는 환상을 대중에게 심어줌으로써 대중의 정치적 냉소주의로부터는 부르주아 정치를 일단은 상당 정도 건져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부르주아 지배를 연장하고 재생산하는 데에서의 시민운동 단체들의 그러한 역할은 사실은 대중에 대한 정신적 테러이다.

 

“역사가 보여주듯이, 어떤 계급착취도 경제법칙의 필연적인 작용과 피억압자에 대한 공공연한 테러만으로는 그 지배를 유지해갈 수 없다. 지배계급은 어떤 경우에나 자기의 사회적 상태나 가능성에 따라서, 인민 대중에 대한 이런 저런 이데올로기적 공작이라는 수단에 의존해 왔다.”[1]베 벳쏘노프, “資本主義と勞動者意識の操縱”, 쏘련과학아카데미 세계경제와 국제관계연구소 편, ≪世界經濟と國際關係≫(일본어 번역판) 제7집, … Continue reading 그리고 그 대표적이고 전형적인 이데올로기 공작 수법은, 지배계급 자신의 이익을 사회구성원 공통의 이익인 것처럼 포장하여 대중의 정서에 부단하게 호소하는 것이다.

 

부르주아 지배의 합리화를 통한 그것의 안정적 재상산은 분명지배계급으로서의 (독점)부르주아지의 이익이고, 따라서 (독점)부르주아 언론과 천둥벌거숭이 소부르주아 언론의 공통의 이해관계 사항이다. 그 때문에 독점 부르주아 언론과 시민운동은, 종파적 이해에 따른 극히 부차적인 마찰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는 언제나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를 사회의 공적인 이해로 포장해서 선전하는 데에 합작을 해왔다. 아직까지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른바 ‘시민운동’이 부르주아 언론의 대대적인 각광을 받으면서 성장하는 주요한 이유의 하나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지적[2]이재영 (민주노동당 창준위 정책국장), “한국 시민운동 성장을 바라보며”, 역사학연구소 편, 『함께 보는 우리역사』 제51호, 1999년 겨울, p.2.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상업주의 언론과의 합작, ‘지나친 언론 의존’이라는 비판은 식상할 정도로 들어왔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 시민운동에서 언론이 차지하는 역할의존이나 활용의 대상을 넘어 공동의 기획자임을 직시해야 한다. 보도의 필요가 생길 때 언론은 시민운동에 정보와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시민운동이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신문 사회 2면의 피케팅 사진은 하나 같이 사진기자들이 연출하는 것이다. 언론은 시민운동의 이름을 빌어 지신의 논조를 전파하거나 지면을 메우고, 시민운동은 취약한 활동력을 언론으로 보완하는 공생관계가 고착되어 가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합작하여 이데올로기적 공작을 행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중을 정치적으로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가하는 정신적 테러이다. 그리고 독점자본의 정당 이외에는 노동자계급의 정당도, 기타 소부르주아지의 정당도, 의미 있게 존재하지 못하는 것도, 그들이 그토록 지탄해 마지않는 타락 부패의 정치도, 개판인 선거판도, 나아가 ‘지역감정’에 대한 대중의 감응도 사실은, 군대 · 경찰 · 검찰 · 법원 · 감옥 등등에 의한 물리적 억압을 보완하면서 그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는 그러한 정신적인 정치적 억압과 무력화의 소산이 아니겠는가?[3]베 벳쏘노프, 같은 글, p. 150 참조. 그러한 정신적 테러를 일상적으로 체험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적인 사고력을 상실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더구나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자신의 정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그런 교묘한 경제적 강제의 체제인데 말이다. 다음과 같은 지적[4]베 벳쏘노프, 같은 글, p. 153.을 들어보자.

 

다른 어떤 사회에서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만큼 사회관계의 본질이 베일에 가려져 있는 사회는 없다. 국가독점자본주의 하에서의 생산의 사회화는, 소유와 직접적 생산관리의 ‘분리’, 자본의 비개성화, 자본의 외면적 탈인격화를 초래한다. 독점자본의 권력은 한층 은폐되고, 착취는 한층 가장된다. 그 결과, 이 현실적, 객관적인 과정은 주관적 환상의 원천으로 된다. 부르주아 사회의 진짜 주인으로서 비개성적이고 이름도 없는 사회층을 상정한다. 이러한 사정이, 흡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천명이고 숙명인 것 같은 외관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다시 한층 무력감을 낳아 조종되는 인간을 부각시킨다.

 

■ 지배의 재생산 장치

 

‘근본주의’는 후기 부르주아 윤리에서는 죄악으로 간주된다. 당연히, 적당히 눈을 감고 적당히 배를 맞추면서 사는 것이 현존의 사회질서를 위협하지 않는 것인데 근본주의는 이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지의 근본주의에 대한 증오는 단지 종교적 문제에 대해서만은 아니다. 그 본령은 오히려 정치적 문제에 있다. 그리하여 현대 부르주아 정치와 선거를 논하고 비판할 때, 그것들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기보다는 대개는 극히 지엽말단의 것들만을 문제 삼는다. 그리고 부르주아 정치와 선거제도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 문제의식을 오히려 은폐한다.

 

시민운동 단체들이 벌이고 있는 이른바 ‘낙천 · 낙선운동’이나 이른바 ‘정치개혁’ 운동, 그리고 부르주아 언론이 그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부르주아적 대의정치자체나, 그것을 재생산하는 부르주아적 선거제도의 본질적 기능과 그 한계를 문제 삼는 대신에 부정부패니,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이니, 지역감정이니, ‘정경유착이니 하는, 사실 문제의 본질에 비추어 보면 극히 부차적인 성격의 것들만을 문제 삼고, 마치 그러한 측면만을 교정할 수 있다면 만사오케이라는 식의 환상을 대중에게 심는다.

 

부르주아 대의정치나 선거제도의 본질은 결코 그렇게 그들이 믿고 선전하는 것처럼 단순하지도 몰계급적이지도 않다. 봉건적 귀족정치와 절대주의에 대항하여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일궈낼 때의 그것은 무엇보다도 진보적이었고, 보통선거권이 확립될 때까지의 과정도 역시 진보적이지만, 진보성은 언제나 절대적인 한계를 갖는 그것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 그것은 이미 철저히 독점부르주아지의 지배를 재생산하고 보장하는 장치로 전락해 있다.

 

바로 이 점에 대해서 오늘날 대부분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은 범죄적으로 침묵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은폐하려 하고 있다. 한국의 시민운동 단체들이나 자칭 자유주의자들, ‘진보적 언론’ 역시 마찬가지다. 독점부르주아 지배체제의 안정적 재생산이라는 현상유지’에서 본능적으로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2. 부르주아 정치와 ‘정치개혁’ 운동이라는 ‘조두증후군’

 

조두(새대가리)증후군’이라고나 해야 할 난치의 정치적 백치증이 창궐하고 있다. ‘정치개혁’ · ‘정치혁명’ · ‘낙천 · 낙선운동’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병증으로서 선거철에 이르면 주기적이고 집단적으로 발병하는 것이 그 특성의 하나다. 잠재했던 병증이 선거철을 맞아 발병하면, 남녀 가릴 것 없이 그러한 조직을 급조하기도 한다. 신문 · 라디오 · TV, 그리고 요즈음에는 인터넷 매체들도 주요한 환자들, 혹은 환자조직들이다. 그들 환자들은 정치적 ·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높지만, 그들의 정치의식, 사회의식은 극히 비과학적이고 실제로는 백치에 가까운 것 또한 주요한 특징의 하나다. 이는 이른바 ‘· · ’ 같은 극우적인 언론과, 예컨대 한겨례참여연대 등 자타가 ‘진보적’이라고 자부하고 평가하는 단체와 그 구성원들, 그리고 기라성 같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전적으로 동일한 병을 앓고 있는 데에서 증명된다. 이들 환자들은 자신들의 병증을 전혀 질병으로서 자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인들의 부정부패나 범죄라는 또 다른 사회적 정치적 병증과 싸우며 그것들을 치유 혹은 수술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이 병증은 사회적으로도 질병으로서 치부되는 대신에 진보적이고 건설적인정치운동 · 사회운동으로 치부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치인들의 부정부패나 무능이라는 부르주아 정치의 숙명적 불치병이 너무나 심각하기 때문이고, 사회의 여론을 조종하고 형성하는 언론과 지식인 집단들이 이 질병의 주요 환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 병은 더욱 난치병으로 되고 있고, 사회에 후술하는 것과 같은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내가 이러한 병증을 조두증후군, 즉 새대가리증후군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 환자들이 자신이 한 일의 결과를 전혀 사실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똑같은 부질없는 소동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개혁’, ‘혁명’, ‘운동’의 대상으로 삼는 부르주아 정치인들의 부정부패와 범죄는 아무리 물갈이’, ‘판갈이를 해보았자 보람 없이 재발하고 창궐하는 것임을, 그리하여 이내 다시 악취가 진동하는 것임을, 그들은 전혀 인정하려 들지 않으면서 매번 소동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컨대 지난 2000년 총선에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를 당시의 한 기록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즉, 월간 『말』 2000년 3월호는 “썩은 정치놀음은 이제 그만”이라는 제목의 화보와 함께 이렇게 쓰고 있다.

 

16대 총선을 두어 달 앞둔 지금 한국의 정치사는 새롭게 쓰여지고 있다. 그 주역은 대통령도 여야 정치인도 아닌 ‘이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선언한 시민들이다. 그리고 그 중심엔 지난 112일 낙천 · 낙선운동을 선언하고 출범한 26월 항쟁 사령부총선시민연대가 자리잡고 있다. 아무도 이토록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태풍’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부패 · 무능 · 반민주 · 반인권’ 인사 한 명 한 명이 거명될 때마다 오만하기만 했던 정치인들은 마치 살생부가 날아온 듯 벌벌 떨어야 했다.

 

선거 후 그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운동’의 성과에 대해서 만족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태풍을 일으키며 물갈이해서 만든 16대 국회나, ‘수구 · 보수에 대항하여 평화’ · 개혁세력이라고 뽑아 놓은 노무현 정권이 그 동안 어떤 짓을 해 왔고, 지금 어떤 몰골을 하고 있는가를 보면서도 저들은 오늘날 자신들이 다시 벌이고 있는 소동이 역시 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임을 알지 못하고 있다. “역시 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단정하는 데에 대해서, 그간의 절절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의를 제기하고 싶을 것이다. 어쩌면 저들의 두뇌가 정말 새대가리 마냥 너무나 작아서 부르주아정치란 그렇게 썩고 부정부패하고 무능할 수밖에 없도록 저주받은 것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저들 조두증후군 환자들은, 백치에 가까운 정치의식 및 사회의식의 표현이지만, 부르주아 정치의 부패와 범죄를 정치인들의 개인적인 도덕적 품성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오늘날 ‘고백’ · ‘참회’하고 있는(?) ‘양심적인’, 과거 민주투사들의 초상을 보라! 그 부패와 범죄는 결코 개인적 품성 탓이 아니고 사회적이며 계급적인 것이다. 그 부패와 범죄는 부르주아 정치, 이른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사적 · 계급적 이해 · 거래와 밀접히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고, 뿐만 아니라 가능한 모든 수단과 자원을 동원하여 계급적 분열과 대립을 은폐하면서 대중을 매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무릇 썩지 않는 부르주아 정치, 부패하지 않는 부르주아 정치인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보개혁을 자처하는 자들의 위선에 대해서 몇 가지 예를 들고 싶다. 오늘날 ‘진보적’ 조두증후군 환자들이 ‘정치개혁’의 희망을 찾고 있는 ‘열린우리당’의 의장을 비롯한 핵심인자들이 과거에 벌인, 예컨대 다음과 같은 정치적 언동들이다.

 

1) 2001년 6월 16일자 『동아일보』는, “민주당 ‘정풍운동’을 주도했던” 당시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의 2001년 6월 15일 충남 당진 군민회관에서 열린 ‘자민련’ 당진지구당개편대회에서의 발언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국가 안보에 대한 굳건한 철학과 신념을 가진 김종필 명예총재님이 뒷받침해주신 덕으로 국가가 튼튼히 발전하고 있다. 민주당과 자민련은 공동운명체이다. 자민련은 근대화의 정신이며 민주당은 민주화의 선봉이다. DJP 공조가 흔들릴 때 정치와 경제가 흔들렸다.

 

2) 2000년 7월 25일자 『조선일보』는 “몸싸움 고함 욕설… ‘난장판 국회’”라는 제목 하에, 법안의 이른바 ‘날치기 통과’의 한복판에 자타공인의 ‘개혁적인’ 의원이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흥미진진하게 보도하고 있다.

 

민주당과 자민련이 7월 24일 국회법 개정안을 16대 들어 처음으로 ‘날치기’ 통과시킨 국회 운영위 회의장은 몸싸움과 고함, 욕설로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회의장은 거친 숨소리와 함께 땀 냄새로 가득 찼고, ‘길터!“, ”안비켜, 임마“, 이게 뭐하는 짓이냐” 등 욕설이 난무했다……

 

3) 무엇보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잡음들’!

 

이러한 언동들에 대해서 진보적’ ‘개혁적환자들은 어떤 변명을 할 수 있는지 자못 궁금하다. 그러면 저들 조두증후군 환자들이 벌이는 소동이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은 무엇일까? 참으로 무서운 현실이지만, 저들의 저 백치같은 ‘조두증후군’의 발작이 사실은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강화해 가는 유력한 수단의 하나가 되고 있다. 저들은 부르주아 정치의 불치의 부정부패 때문에 ‘정치혁명’이니, ‘정치개혁’이니, ‘시민혁명’이니 하며 그렇게 요란스럽게 소동을 벌이고 있는데, 바로 그러한 소동이 대중의 정치적 · 사회적 관심을 사로잡으면서 역설적이게도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유지 · 강화하는 것이다.

 

저들이 ‘정치혁명’ · ‘정치개혁’ · ‘시민혁명’을 요란스럽게 떠들 때, 빈곤과 실업의 절망으로 일가족 집단자살이 드문 사건이 아니게 된 상황인데도, 생존권이라는 노동자 · 민중적인 의제 · 담론은 설자리를 잃고, 대중의 삶은 그만큼 더욱 철저하게 파괴돼 가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 조작에 혼을 빼앗겨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 판에 끼어서 어릿광대 노릇을 하고 있는 일부 ‘노동운동단체들이나 ‘진보정당’도 있다. 하지만 그들을 제외하면, ‘정치개혁’을 떠들어대는 자들은 모두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생존권’이라는 노동자 · 민중적인 의제 · 담론과 부르주아적인 그것이 첨예하게 대립 · 경쟁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리하여 가능한 한 노동자 · 민중적인 의제 · 담론을 배제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수구 · 보수 이데올로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진보적’이라는 매체, ‘진보적’이라는 시민운동 단체들도 사실은 그러한 반노동자 · 반민중 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저들의 조두증후군 사실은 그렇게 정치적 · 사회적 의제를 선점하고 부르주아적 억압 · 착취 체제를 최대한 안정적으로 재생산하려는 계급적 본능에서 발작하곤 하는 것이며, 그러한 한에서 저들의 정치개혁소동정치적 음모이고 범죄행위이다. 모름지기 ‘조두증후군’을 경계하고 계급적 관점을 견지할 일이다.

 

 

제2부 전쟁과 평화

 

1. 반미 · 반전과 노동자 · 민중운동

 

■ 신자유주의와 빈곤 그리고 저항

 

신자유주의가 전세계적으로, 따라서 한국에서도, 노동자 · 민중의 생활과 생존권 자체를 피괴해오고 위협해온 지 이미 오래다. 무엇보다 ‘노동의 유연화’ 혹은 ‘노동시장의 유연화’라는 목표 하에 반노동자적인 정책으로 전개되어 왔고, 그들 정책은 노동 관련 법률의 개악을 통해서 제도화되어 왔다. 1997년의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따른 대량의 정리해고와 광범한 비정규직화, 그리고 독점자본 이익 위주의 여러 경제 · 사회정책은 노동자계급은 물론 농민이나 도시 자영업자 등, 여러 계급 · 계층의 생존권을 파괴하면서 사회 전반의 빈부격차와 빈곤화를 심히 확대 · 심화시켰다.

 

신자유주의의 전개에 따른 빈곤문제는, 세계적으로 보자면, 더욱 심각하다. 간단히 요약하면, 현재 약 60억의 세계 총인구가운데 약 30억은 도시에, 약 30억은 농촌 지역에 살고 있는데, “세계 인구의 약 반이 하루 2달러 이하로써 살면서, 그들 대부분이 만성적인 영양실조이거나, 다음 식사는 어떻게 때워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걱정하고 있다.” 약 10억은 깨끗한 물이 없는 곳에서, 약 20억은 전기가 없이, 약 25억은 위생적인 화장실이 없이 살고 있다. “약 30억 도시 거주자 가운데, 최근의 한 유엔 보고서[5]UN Human Settlements Peogram의 The Challenge of SlumsGlobal Report on Human Settlements 2003. ―(인용자) 에 의하면, 그의 10억이 슬럼에서 살고 있고, 그 숫자는 이른바 호경기였다는 1990년대에 엄청나게 증가했다. 다음 50년 동안에는 슬럼에서 사는 사람의 수가 대략 300% 증가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Fred Magdoff, “A Precarious Existence: The Fate of Billions?”, Monthly Review, Vol. 55, No. 9, Feb. 2004, p. 1.; 다만, 다음 50년 후에 그러한 사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자ㆍ민중의 저항이 결코 이러한 상황이 50년이나 지속되도록 허용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것은, 특히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득세하고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이후, 국가 간의, 그리고 계급 및 계층 간의 불평등과 빈부격차가 더욱 확대돼가고 있다는 점이다.[6]이에 대해서는 위에 소개한 Fred Magdoff와 Michael D. Yates의 글들을 참조. Michael D. Yates의 글은 이 책에 번역ㆍ게재한다. 게다가, 쏘련과 동유럽에서의 20세기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로 제국주의의 세계 재분할 전쟁, 식민지 침략 전쟁에 대한 억제장치가 사라지자, 1991년의 ‘걸프 전쟁’에서부터 발칸 전쟁, 최근의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침략에 이르기까지 제국주의, 특히 미국에 의한 침략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바로 “자유로운 시장을 전 세계에 수출하고, 지구화된 자본에게 새로운 활동의 장을 제공하기 위해서 부시가 선언한 ‘해방전쟁’”[7]안드레아 카토누, “미국: 고전적 제국주의―모든 세력이 결집하여 부시 도당을 고립시키자”, ≪社會評論≫ 제136호, 2004년 겨울, 도쿄: 小川町企劃, … Continue reading이다. 당연히 노동자 · 민중의 투쟁과 제3세계의 저항이 전개될 수밖에 없다.

 

서유럽과 미국 등에서는 노동자 · 민중의 투쟁이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 눈에 띄게 활성화되고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장기투쟁의 끈질김과 격렬한 전투성도 보여주고 있다. 지난해 {2003년} 10월 24일 이탈리아에서는 “정부 연금제도 개악에 반대하여 수백만 명이 총파업에 참가”하고 있고, “11월 1일 베를린에서는 약 10만 명이 게르하르트 슈뢰더 수상의 사회보장 공격에 항의하여 거리로 몰려 나갔다.” 또한 대처 정권 이후 신자유주의에 억눌려온 영국에서도 지난해에 전국적으로 2만 명이 넘는 우편노동자가 노동조건의 악화와 자본 측의 횡포에 항의하여 ‘비공식 파업’을 벌였다.[8]이상의 사례들은 위 ≪社會評論≫, pp. 81-86의 “정부와 자본의 횡포에 대항하는 유럽의 노동자”에 의거했다. 그리고 지금도 미 서부지역에서는 7만 명의 식품판매 노동자들이 3개월째 파업을 벌이고 있다. 1999년 말 씨애틀 투쟁 이후 지난해 칸쿤 투쟁까지 신자유주의와 그 세계화에 반대하는 노동자, 민중, 시민, 사회단체의 ‘국제적인 연대투쟁’[9]씨애틀 이후 칸쿤까지 이어져 왔고, 어떤 면에서는 ‘국제적 연대’ 혹은 그 투쟁의 ‘새로운 전형’으로까지 잡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최근의 … Continue reading도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고, 특히 최근에는 미국 등의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는 반전투쟁이 국제적인 연대 속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나아가 ‘세계사회포럼’과 같이 신자유주의를 돌파 ·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여러 갈래로 활달하게 벌어지고 있다.

 

■ 주체의 정치적 혼란과 투쟁의 ‘불임성’

 

그런데 이러한 투쟁의 전망은 어떤가?

개개의 투쟁에서의 경제적 승리는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어디에서도 해방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평론가적이고, 전혀 구체성이 없는, 공허하기 그지없는 구호만 난무할 뿐, 노동자계급의 해방에 대한 구체적인 전망이 부재한 것이 지금 노동자 · 민중의 세계적 상황이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여, 독점자본에 의한 착취와 억압의 강화, 그리고 그에 따른 노동자 · 민중의 생존권 파괴에 반대하여, 그리고 제국주의가 벌이는 침략전쟁에 반대하여 세계 도처에서 노동자 · 민중이 투쟁을 벌이고 있지만, 이들 투쟁이 사실은 어떤 혁명과 해방도 잉태하지 못하는 불임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그 불임의 원인을 찾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원인은 기본적으로 주체에 있고, 따라서 그 정치적 혼란과 무능에 있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부르주아 지배 이데올로기와 그에 따른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혼란은 1960년대 이후 특히 강화되었다. 첫째로는, TV, 라디오, 상업신문 등 부르주아 대중매체가 사회 전반의 정서와 이데올로기 형성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거대 산업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이미 1960년대부터, 섹스 · 스크린 · 스피드 등 소위 ‘3S 산업의 대중적 악영향이 여러 사람들의 우려하는 바로 될 만큼, 이들 상업적 대중매체가 대중의 비판적 사고력을 마비시키고 파괴하면서 그 정서와 이데올로기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해 오고 있다.

 

둘째로는, 부르주아 국가와 독점자본이 목적의식적으로 대중조작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성립으로 사회주의의 정치적 · 이데올로기적 위협이 강화되자 부르주아 국가와 독점자본은 한편에서는 CIA 등 각종 국가 정보기관이나 이른바 ‘씽크탱크들’을 통해 온갖 정보를 왜곡 · 날조 조작하여 유포해 왔을 뿐만 아니라, 그들 왜곡 · 날조 · 조작된 정보에 대중적 설득력을 불어넣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온갖 정치공작을 해 왔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주의와 독점자본에 비판적인 지식인이나 기타 인사들에 대해서암살, 합법적인 투옥 · 사형 등에서부터 모함, 함정, 회유 및 매수까지 온갖 탄압과 공작을 다 벌여 왔다. 경찰이나 검찰 · 법원 등 국가 사법기구는 차치하더라도, 거대화한 상업적 대중매체가 그러한 공작의 수행자 혹은 전달벨트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국가와 자본의 수중에 있는 온갖 것들, 예컨대 각종의 이권이나 대학의 교수직 등까지 그러한 공작의 도구로, 대중의 이데올로기를 조작하는 도구로 이용되어 왔다.

 

셋째로는, 독점자본이 자신들의 수중에 집중된 거대한 부를 이용하여 노동운동과 노동자계급의 상층부를 매수하고, 그들이 노동자 대중의 정치적 역동성을 거세 · 오도하는 데에 성공해 왔기 때문이다.

 

1970년대가 되면,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반적 위기가 재격화되고 있다는 것이 사실상 누구에게나 명확해졌지만, 자본주의 선진국의 관료화한 노동조합 간부들은 물론이고 전통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정당으로 자처해 온 사민주의적 정당들독점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치부대로서의 역할을 강화해 갔다. 그리고 ‘유로 코무니즘’의 서유럽 공산당들변혁성을 상실하고 무기력 · 무능력해져 갔다. 모든 이데올로기 조작은 마침내 대중뿐만 아니라 비판적 · 진보적 지식인들도 지배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지배는 그들로 하여금, 예컨대, 쏘련의 여러 내부 사정이나 정치 관행, 외교 · 군사 전략 등에 관해서 미 CIA와 헐리우드가 합작해서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현실로 믿게끔 하는 상황을 조성하는 데에까지 이르러 완성되었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이러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혼란은 동유럽과 쏘련에서의 20세기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로 오늘날 정점에 달하고 있다.

 

■ 시급한 과제로서의 정치적 전위 형성

 

현재의 상황은 이렇게 한편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위기가 전반적으로 격화되어 가고, 그에 따라 노동자 · 민중의 생존권 파괴 또한 확대 · 심화되고 있다. 객관적 위기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그에 의해서 촉발 · 활성화되고 있는 노동자 · 민중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혼란 및 무능 때문에 그러한 투쟁이 불임성의 투쟁으로 머물고 있다. 불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동자계급이 해결해야 할 가장 당면한 전략적 과제는 그 정치적 전위를 형성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노동자계급을 지배하고 있는 오늘날의 정치적 혼란은, ‘당 일괴암주의에 대한 비판’이니, ‘자율주의’니, ‘평의회 운동’이니, 하는, 소부르주아 급진주의적인,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관념적이고 반동주의적인 사상 · 이론 · 담론이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노동운동 활동가들 사이에서까지 상당히 널리 회자되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이러한 것들은 외견상 모두 쏘련에서의 사정이나 그 상황 전개를 비판하는 형식으로, 혹은 그에 대한 비판을 전제로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바의 것들은,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 조작과 그들 자신이 소부르주아적 근성이 결합하여,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거기에 다시 진한 종파주의가 결합하여 만들어낸 자신들의 주관, 즉 풍차일 뿐 실제의 쏘련에서의 사정이나 그 상황 전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예컨대, 쏘련을 가르켜서 국가사회주의국가자본주의니 하고 비판하는 주장들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그들은, 쏘련에서 국가가 사회생활의 사실상 전체 영역에서 규정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에서 그 ‘사회주의’로서의 한계를 발견하고 비판하면서, 이른바 ‘비국가 사회주의로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라고 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계급적 지배와 억압의 도구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이러한 주장은 매우 매력적으로 들리고,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오늘날 ‘비국가사회주의’ 혹은 ‘자율주의’ 등의 이름으로 상당한 청중 · 독자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국가의 문제를 아주 관념적으로 이해하는 것으로서, 사실상 국가를, 따라서 이미 19세기 중엽에 이루어졌던, 비과학적인 소부르주아 급진주의자들인 아나키스트들과 맑스 사이의 논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맑스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역사을 만들어가지만 그것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그 역사를, 역사적으로 형성된 제 조건에 의해 규정되면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따라서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가 국가라고 하는 틀 속에서 그것을 주요한 지렛대로 하여 발전했다면, 그것은 그 길만이 유일한 현실적인 길이었고, 국가가 소멸될 수 있는 조건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지, 국가사회주의를 사회주의의 본래의 모습으로 지향했기 때문이 아니다.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소멸되는 것이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율주의자들’ 혹은 비국가 사회주의자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아주 부정직하다. ‘국가’사회주의를 비판하려면, 사회주의초기의 계급투쟁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고, 그러한 계급투쟁에도 불구하고 어떤 ‘비국가적’인 발전의 길이 가능하다는 자신들의 해법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는 대신에 마치 몰이꾼들의 추격에 쫓긴 겨울 꿩이 눈 속에 머리를 처박음으로써 자신에게 닥친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듯이, 그러한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전위로서의 혁명적 정당.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새로운 역사, 새로운 세상의 주체로 나서기 위한 필수적인 전략적 전제조건이다. 이것이 없이는 노동자계급은 결코 전진할 수 없고, 실제로 한국의 노동운동이 오늘날 전진하지 못하고 답보하고 있는 이유도 사실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이후 파쇼적 탄압의 기가 꺽이고 ‘민주화’되면서 노동자계급에게도 차츰 정치적 공간이 확대되었지만, 아직도 전위 형성의 전망은 잘 보이지 않는다. 노동운동 내부에 존재하는 분열과 과학적 세계관 및 정세 분석의 부재가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쏘련 및 동유럽에서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된 이후 확대 · 심화돼 가고 있는 이론적 · 사상적 혼란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고, 그 때문에 이들 20세기 사회주의, 특히 쏘련의 전개와 그 붕괴 원인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 · 분석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 그 외에 지금 한국의 노동운동을 이른바 ‘NL’과 ‘PD’로 크게 분열시키고 있는 ‘민족문제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시각에서의 이해도 시급히 요구도고 있다.

 

■ 반미 · 반전 문제의 한국의 노동자 · 민중운동

 

“혁명적 이론 없이는 혁명적 운동도 있을 수 없다”[10]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レ-ニン全集≫ 제5권), p. 389.는, 것은 당연하다. 혁명적 이론이 없이는, 역사와 정세에 대한 올바른 분석이 없이는, 광범한 대중의 동의도 신뢰도 획득할 수 없고, 따라서 전위당 자체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반미 · 반전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접근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한국의 노동운동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이론과 역사인식, 정세인식을 획득하는 데에 있어서, 따라서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그 정치적 전위조직을 획득하는 데에 있어서 주요한 이론적 · 실천적 문제의 하나로 되어 있다.

 

한국의 노동자 · 민중운동은 1980년대 중반, 대략 1986년 이후부터 이른바 ‘NL’과 ‘PD’로 분열되어 있다. 민족문제, 즉 ‘반미, 반제, 자주, 통일의 문제를 운동의 중심적 과제로 삼고 있는 ‘NL’, 즉 ‘민족해방파’와 계급문제, 즉 계급적 착취와 억압의 폐지를 운동의 중심적 과제로 삼고 있는 ‘PD’, 즉 ‘민중민주주의파’로의 분열이다. 애초에 1980년대에 노동자 · 민중운동이, 그리고 그와 더불어 자본주의적 생산과 한국 사회의 구성과 운동에 관한 과학적 이해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이전에는 미분화 상태에 있던 ‘NL’‘PD’적 사고가 발전했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의 분화 · 발전이 노동자 · 민중운동의 정치적 분열과 대립으로 발전하면서 한국의 노동자 · 민중운동은 서로 상대를 좌파우파로 규정하게 되었고, 그럴수록 운동은 한국 사회와 그 모순에 대한 총체적 이해로부터 멀어져 가게 되었다.

 

지금 노동자 · 민중운동 속의 이른바 ‘NL’과 관련한 문제는, 그들이 민족문제, 즉 ‘반미 · 반제 · 자주 · 통일’ 문제를 중시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투쟁을 계급문제와의 관련 속에서가 아니라민족주의적으로’, ‘국가주의적으로’, 그리하여 몰계급적으로 벌이는 데에 있다. 따라서 과제는, 그들의 인식과 실천을 계급문제에 대한 보다 철저한 인식 위에서 재확립하는 것이다.

 

한편, 계급사회로서의 한국사회의 기본모순은 당연히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간의 모순이다. 계급적 착취와 억압의 폐지를 중심적 과제로 삼고 있는 ‘PD’, 즉 ‘민중민주의의파’의 문제의식은 일단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PD’ 민족문제 반미, 반제, 자주, 통일의 문제들 상대적으로 경시하고 있는 점이야말로, 혹은 ‘NL’을 견인하고 포용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계급적 대의에 설 수 있도록 유도하는 대신에, 그들을 외면하고 경원하는 것이야말로, 한국의 노동운동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해결되어야 할 문제일 것이다. 한국 사회에 있어서 민족문제, 즉 ‘반미, 반제, 자주, 통일’의 문제는, 결코 환상에 근거한 문제가 아니라, 계급문제와 더불어 한국 사회의 근본적 모순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반미 · 반제 없이 한국 사회의 계급적 모순을 극복 · 지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극히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이다. 왜냐하면 이는, 다름 아니라, 현실적이고 규정적인 힘으로 존재하는 민족모순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940년대 후반 이후의 역사가 증명하는 것처럼, 제국주의로서의 미국은 한국에서 자본가계급에 의한 노동자계급의 착취와 지배라는 계급관계를 강제하고 보장하는 궁극적인 힘인데도, 이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미 · 반제 없는 계급투쟁은, 그 계급관계를 강제하는 궁극적인 힘을 무시한 것으로서, 성공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바로 동일한 이유 때문에 노동자 · 민중의 단결과 통일을 이끌어낼 수도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반미 · 반제 없는 노동운동은, 그 정치적 편협성 때문에 노동자 · 민중의 한 분파의 생존권 투쟁, 경제주의적 투쟁으로 협소화될 수밖에 없고, 정치투쟁의 발전 전망이 없다. 계급모순과 더불어 우리 사회의 현실적인 근본모순인 민족모순을, 반미 · 반제 · 자주 · 통일의 문제를 노동자 · 민중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그러한 인식의 기초 위에서 이론과 실천이 전개되지 않으면, 노동자 · 민중운동의 통일 · 단결도, 따라서 그 정치적 발전도 불가능한 것이다.

 

■ 신식민지적 지배와 계급 및 민족 문제, 그리고 전쟁

 

오늘날 계급문제가 민족문제와의 결합 속에서 제기되어야 하고, 민족문제가 특히 반미 · 반전의 문제로 전개되어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제국주의란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전함에 따라 격화되는 과잉축적과 과잉생산에 따른 시장의 부족, 그리고 원료의 부족을 정복과 지배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고, 따라서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라는 계급적 모순의 국제적 확장이다. 제국주의적 지배와 착취는 그 성질상 당연히 그 종주국보다는 그 종속국 혹은 종속민족에서 보다 가혹하고 근본적인 모순으로서 기능한다.

 

신식민지적 지배는 당연히 제국주의 종주국의 독점자본과 그 현지 대리인으로서의 신식민지의 지배계급의 강한 유착, 신식민지 지배계급의 제국주의 종주국에 대한 강한 종속적 동맹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지배는, 어떤 형태의 제국주의적 지배에도 저항하는 노동자 · 민중에 대한 억압 위에서만이 가능하다. 당연히 식민지 종주국의 지시와 정치적 · 경제적 · 군사적 지원에 의한 것으로서, 상황에 따라서는 내전이나 수만에서 수십만 · 수백만의 참혹한 대량 학살로 발전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지 지배계급이 노동자 · 민중의 저항과 반란을 제압하지 못할 경우에는 물론 제국주의 종주국의 군대가 직접 나서고, 그 현지 주둔이 그 지배를 보증하는 장치가 된다. 신식민지 지배는 이렇게 제국주의의 현지 대리인으로서의 그 지배계급의 제국주의와의 유착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신식민지 지배는, 현지의 지배계급에 의한 대리통치이다. 그런데 민족문제 혹은 자주의 문제를 민족주의적 혹은 국가주의적으로 바라보게 되면, 그 지배와 대립을 ‘민족’에 대해서는 외재적인 것으로 보게 되기 때문에, 민족 내부의 제국주의 동맹자를 보지 못하거나 간과하고, 투쟁의 대상을, 즉 그 현지 지배계급과 지배도구를, ‘자유롭게 세워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계급 대립을 단지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라는 앙상한 추상 속에서만 바라보게 되면, 그 계급관계를 강제하고, 그 지배 · 착취를 가혹하게 만들고 있는 제국주의, 민족문제를 간과하게 된다.

 

오늘날 미국이 갖은 모략과 함께 ‘불량국가’, ‘깡패국가’, ‘테러지원국가’, ‘악의 축’ 등으로 규정하면서 적대하고 침략하고, 침략과 전쟁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국가들이란, 미국의 그러한 신식민지 지배를 거부하고, 그에 저항하고 있는 국가들이다. 제국주의가, 특히 미국이 여러 이유를 날조하면서 그들 국가를 봉쇄하고, 공격 · 침략하는 것은 그들 국가를 자신의 ()식민지로 삼아서 그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서일 뿐이라는 것은 최근의 이라크 침략에서 드러난 대로이다. 자신은 세계 전체를 다 합한 것보다도 더 많은 핵무기와 생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WMD(대량살상무기)가 어떻고 하면서 침략의 구실을 찾는 것도 언어도단이려니와, 이라크에 어떠한 WMD도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여실히 입증하고 있다.

 

2. 분단, 전쟁 그리고 ‘6 · 15 공동선언’

 

6·25 전쟁과 관련, 주지하는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는 1950년 6월 25일 미명에 ‘북의 남침’에 의해서 전쟁이 터졌다는 ‘6·25 사변이라는 것이 교과서적 정설이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알고 그 전후 맥락을 깊이 생각한다면, 그 정설은 금방 설득력을 잃게 될 것이다.

 

1950년 625일보다 훨씬 전부터 3·8선을 연해서, 그리고 남쪽의 여러 산악 속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었고, 따라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625일을 기한 확전이 아니라 6월 25일 훨씬 이전부터 계속되어 왔던 전쟁 그 자체이다. 확전이 주로 전술적 고려의 결과였다면, 전쟁 자체의 발발과 지금까지도 사실상 지속되고 있는 남과 북 간의 적대 그 자체는 전적으로 전략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 그 전쟁은 무엇이였으며, 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이 문제는 당연히 남북의 분단은 무엇이며, 그 원인은 무엇인가의 문제로 직통한다. 분단은 그 전쟁이 있게 된 구조적 원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단과 전쟁의 정체와 성격, 그 원인을 밝히는 것은, 오늘날 한국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양분하고 있는 이른바 ‘NL’(민족해방파)‘PD’(민중민주주의파)의 각각이 그 이론과 논리, 실천에서 기본적으로 어떠한 부족 혹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가를 밝힐 수 있게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NL’과 ‘PD’라는 이 분열은, 이른바 민족문제 혹은 민족모순과 계급문제 혹은 계급모순을 사실상 형이상학적으로 파악하면서, 이 양대 모순이 어떤 관계 속에 있는가 하는 것을 일원론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데에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단과 전쟁은 분명 계급모순, 혹은 계급 간 적대의 외화형태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즉, 민족문제, 민족모순은 계급모순이 외화된 하나의, 주요한 형태인 것이다. 그런데, 분단과 전쟁을 이렇게 계급모순, 혹은 계급 간 적대의 외화형태로 파악하는 데에 대해서는 맑스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여러 인텔리들로부터도 ‘계급 환원론’이라는 강한 ‘비판’이 쏟아진다.[11]‘계급 환원론’이란 용어는, 사실은 사회적 제사상(諸事象)의 상호연관과 역사 발전에서의 계급 혹은 경제의 중심성을 부인하고 사적유물론에 … Continue reading 그러한 비판이 최소한의 설득력이라도 가지려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절대적으로 부인할 수 있어야 한다. 과연 가능할까?

 

우선, 일제로부터 해방된 정치 공간에서는 좌 · 우의 정치세력, 그러니까 만주 등지를 배경으로 항일 빨치산 투쟁을 벌였던 무장세력, 중국공산당 등과 협력하며 항일투쟁을 벌였던 세력, ‘조선공산당’ · ‘신민당’ ·‘인민당’(후에 ‘조선노동당’) 등등 노동자 · 농민을 위시한 인민의 국가를 지향하는 좌익 정치세력과, 한민당 등 지주 · 자본가와 친일관료 중심의 우익정치세력이 치열하게 각축했고, 결국 그들이 각각 북과 남의 지배적 정치세력을 형성했으며, 그 대립이 결국 분단과 전쟁, 그리고 분단의 고착화로 이어지지 않았는가?

 

둘째로, 많은 경우 미국과 쏘련에 의한 38선 이남과 이북의 분할 점령을 분단의 주요한 ‘원인’으로 들지만, 이 또한 쏘련은 국제적인 노동자 전선의 이익을, 그리고 미국은 독점자본의 전선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이었지 않은가? 즉, 미 · 쏘의 분할 점령이란, 비록 두 국가가 제2차 대전 기간 동안 반파시즘 투쟁에서 협조했지만, 결국 (독점)자본과 노동이라는 계급 대립의 국제적 형태를 표현 · 의미했던 게 아닌가?

 

셋째로, 그 동안 한국 사회를 짓눌러온 파시즘, 군사독재, 국가보안법 등은 노동자 계급과 농민 등이 자주적이고 변혁적인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을 저지하는 데에 그 본질적 존재이유 · 목적이 있지 않은가?

 

넷째로, 남과 북이라는 분단의 당사자인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그 계급적 기초 · 성격 · 지향을 전적으로 달리하고 있지 않은가?

 

이상과 같은 사실들은 분단과 전쟁이 사실은 적대적 계급 분열로 말미암은 것이며, 그 때문에 그 분단이 그토록 강고하고, 그 전쟁이나 이후의 정치 상황이 그토록 처절 · 잔인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하여, 이른바 ‘계급 환원론’ 운운하는 자들이 만일 위의 사실들을 부인하는 정당한 사실과 논리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들에게는 어떤 발언권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계급 환원론’을 공박하려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주요 목적의 하나는, 민족모순은 사실은 계급모순의 외화형태라는 시실을 확인하는 것 자체에 있다. 그것의 해결 없이는, 혹은 그것과의 대결 없이는 계급모순의 직접적 형태인 노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 노동자 · 민중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의 통일적 관계를 파악하지 못한 나머지, ‘PD’ 은, 일반적으로 민족모순 및 그와 대결해야 하는 실천적 요구의 의의를 경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 북을 포함한 20세기 사회주의 체제의 역사적 · 정치적 의의를 오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NL’ 은 민족문제, 민족모순의 기초에 계급모순이 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기본적으로 그 민족모순이 계급모순, 즉 계급적 적대에 의해서 규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많은 경우 민족주의적 태도로 일관하는 편향 · 오류를 범해오고 있다. 그리고 ‘6·15 선언’ 이후 그러한 편향과 오류가 더욱 심화돼가고 있다. 특히 민족 대단결의 원칙이다.

 

민족 대단결! -일견 거부하기 어려운 명제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와 역사는 무엇에 의해서 추동 되는가”, 혹은, “지금 ‘민족 대단결’ 그것을 말하게 하는 분단과 적대는 무엇에 의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면, 그 명제가 전혀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이며, 자칫 함정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함정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6·15 선언’(‘7·4 공동선언’도 물론)과 “민족 대단결”의 원칙은 분단과 적대를 절대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계급’, ‘계급적 분열’, ‘계급적 적대’에 대해서 일언반구 언급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은, 물론 바로 그 ‘침묵’이라는 소극적인 방법을 통해서이지만, 분단과 적대의 기초에 있는 계급적 분열과 적대를 은폐하고, 그 문제의식조차 기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선언 속에 담긴 남북 합의로서의 “민족 대단결”의 원칙 등을 무시하거나 폄하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남 · 북 간의 긴장과 적대를 완화시키고, 외부로부터의 과도한 압력으로부터 다소라도 자유로워져서 각자의 사회운동 법칙에 따라서 발전해 갈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선언의 한계를 보지 못한다면, 심각한 정치적,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 계급적 성격과 지향을 달리하는 두 정치집단의 ‘공동의’ 선언이기 때문이고, 독점자본가계급의 정치적 요구도 담을 수 없다면, 노동자 · 민중계급의 정치적 요구도 담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한국 노동자 · 민중은 계급적 관점을 견지한 주체적인 태도와 설천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3. 평양 측의 핵실험

 

■ 독점자본의 기만적 반응

 

{2006년} 10월 9일 “핵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평양 측의 발표가 있자, 국내적으로도 국제적으로도, 오늘날의 세계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반응이 잇따르고 있다. 이들 반응은 당연히 그 각각이 사회 각 세력의 정치적 · 계급적 성격과 목적을 반영하고 있다.

 

가장 요란하게 들리는 것은 물론 독점자본, 따라서 제국주의의 이해를 반영한 목소리이다. 평양 측의 핵무기 개발과 보유, 그리고 핵실험은 모두 국제평화, 특히 동북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평양 측의 도전 · 도발이며, 따라서 그에 대한 강력한 응징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핵무기에 관한 한, 미국이야말로 가장 비난받아야 마땅한 나라이며, 나아가 실제로도 국제평화와 인류의 안전에 가장 위험한 존재가 아닌가? 미국의 한 노동자 정치신문을 인용해보자.

 

미국이야말로 맨 처음 원자폭탄을 개발했다. 미국이야말로 인구밀집 지역들-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한 유일한 국가이며,[12]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미국의 핵무기 투하는 결코 제2차 대전을 끝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군국주의 … Continue reading 남태평양에서의 미국의 원폭실험에 수천 명이 노출되어 방사능 중독으로 앓고 있다. 실제로 그 해악이 너무나도 거대한 나머지 2001년에 핵배상심판위원회는 비키니 섬의 주민들에게 5억 달러 이상을 배상하도록 미국정부에 명령했다. 미국은 지금까지 7만 개의 핵폭탄을 제조했고, 지금도 1만 개 이상의 핵폭탄을 비축하고 있다. 수소폭탄을 맨 먼저 개발한 것도 미국이다. 수천 마일 떨어진 국가들을 겨냥하여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맨 먼저 개발한 것도 미국이었다. 핵무기로 무장한 잠수함을 맨 먼저 개발한 것도 미국이었다. 중성자탄을 맨 먼저 개발한 것도 미국이었다. 다탄두각개목표재돌입미사일을 맨 먼저 개발한 것도 미국이었다. 1945년 이후 미국은 핵무기 프로그램에 55천억 달러를 써왔다.[13]“The first WMD deception―Nukes and the Cold War”, Workers World, May 6, 2004. 이 신문에 의하면, 미국은 지금도 핵무기의 개발ㆍ생산에 매년 350억 달러 이상을 쓰고 … Continue reading

 

이 신문은, “미국정부는 북이나 이란, 이라크 같은 나라들이 핵무기를 확보하려고 함으로써 세계평화를 위협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세계평화가 없는 것은 무엇보다도” “미국의 점령군이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라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미국의 초국적기업과 은행이 계속 세계를 지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펜타곤[미 국방부]이 휘두르고 있는 거대한 양의 핵무기에 의해서 세계가 매일 협박을 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무시무시한 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한 나라들은 어느 나라나 만일 워싱턴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경우 폭격으로 그 존재 자체를 없애버리겠다는 협박을 받고 있다. 베트남의 경우 헨리 키신저와 빠리 평화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핵무기로 말살시켜버리겠다는 협박을 거듭거듭 받아왔다.[14]같은 글.

 

실제로 지난 9월 21일 미국을 방문했던 파키스탄의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은, 당시 미 국무차관보의 협박 때문에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략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미국의 CBS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폭로한 바 있다.[15]예컨대, 주성하 기자, “’미국에 협조하라, 아니면 석기시대로 되돌려놓겠다’” <www.donga.com/fbin/output?n=200609230023> 참조. 리차드 … Continue reading 이러한 사실들에 침묵한 북의 핵실험 비난, 그것은 기만이자 반북 · 반공책동이며, 기껏해야 위선에 불과하다. 더구나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주요 핵 보유 국가들의 그것은, 기만일 뿐 아니라, 자신들만이 핵을 보유하고 그를 통해서 세계에 대한 협박과 지배를 계속하겠다는 제국주의의 깡패논리일 뿐이다.

 

■ 평양 측의 핵무기 개발 · 보유 · 실험은 미국의 “대북 정책이 낳은 ‘쓴 열매’”

 

평양 측에 의한 핵무기의 개발, 보유 그리고 그 실험을 미국에 의해서 강요된 것이다. 이는 세계의 진보적 인사나 단체들은 물론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언론조차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실제로 이번의 핵실험은 미국, 특히 부시 정부의 대북 위협 · 압살정책의 결과이다. 이에 대해 미국의 노동자 신문 『워커스 월드』는 정당하게도 이렇게 쓰고 있다.

 

2002년 1월의 연두교서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및 이란과 더불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날조된 ‘악의 축’에 포함시켰다. 1년 후에 미국은 이라크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을 개시하여 그 정부를 전복시키고 괴뢰정권을 세웠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 모두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우리는 부시의 연두교서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사실상의 선전포고로 생각하고 있다”고,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유엔 주재 대사 박길연은 『워커스 월드』(2002년 3월 28일)에 말했다. 그 대사는 또한 펜타곤[미 국방부]의 2002년 1월 『핵정책 개관』에 주목했는데, 그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포함하여 7개 국가에 대하여 핵무기를 사용하는 계획을 담고 있었다. 대사는, 그것은 이전의 합의[16]1994년 10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국 사이에 제네바에서 맺은 비공식 합의로서 이른바 ‘제네바 합의’로 불리는 것. 쏘련 붕괴 후 … Continue reading를 무효로 만든 것이라며, “이는 대단히 심각한 상황전개다”라고 말했다.[17]Deidre Griswold, “Behind the nuclear issue in Korea―The real reasons for Washington’s hostility”, Workers World, May 24, 2005. 2002년 9월 국립안보전략은 ‘선제전쟁’ 및 ‘체제 교체’라는 독트린을 제시하고, 그것을 부시의 ‘악의 축’이라는 주장과 연결시켰다. 6개월 후 워성턴은 아무런 도발을 받지 않았지만 이라크의 체제를 교체하기 위한 선제전쟁을 개시해 사담 후쎄인 정부를 전복시켰다. …나아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미국의 핵 폭격기들과 핵무장 잠수함들, 크루즈 미사일들, 항공모함들, 그리고 구축함들로 둘러싸여 있다.[18]Fred Goldstein, “Nuclear crisis made in USA―Bush threats forced North Korea to arm in self-defense”, Workers World, Oct. 12, 2006.

 

결국 도발자는, 평양 측이 아니라 미국이며, “그리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미국의 공격에 대한 억지력으로서 자신의 핵무기를 개발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선 것은”, 그리고 실제로 핵실험을 하고 나선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언필칭 ‘진보’를 자임하는 ‘환경운동연합의 어릿광대짓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0월 11일자로 ‘환경운동연합’의 홈페이지의 맨 윗머리에는 “핵 개발, 평화 위협하는 최악의 선택-북한 핵실험. 동북아 핵확산 위기 우려돼”라는 제목 하에 ‘환경운동연합’(공동대표: 신인령 · 윤준하, 사무총장: 김혜정) 명의의 ‘성명서’와, “11일 환경운동연합은 위와 같은 성명을 내고,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북한 핵실험 규탄 및 평화기원 퍼포먼스’를 진행했다”며, 어릿광대 ‘놀음을 찍은 사진 3컷을 자랑스럽게 내걸고 있다. 물론 자본의 선전기관들도어릿광대짓을 그냥 흘려보낼 리 없고, 사진과 함께 보도하고 있다.

 

앞에서 『프레시안』도 언급하고 있지만, 북이 핵무기로 동북아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난 50여 년 동안 북이야말로 미국의 핵무기의 위협을 받아온 것이다. 따라서 환경운동연합이 “‘한반도 비핵화’라는 민족적 합의와 국제사회의 기대를 저버리고” 운운할 양이면, 핵을 보유하고 핵실험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당하고 있는 북을 비난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기 전에 그렇게 강요하는 미국을 규탄하는 퍼포먼스를 벌여야 할 것이며, 미국을 향해서 핵무기를 철수시켰음을 객관적으로 검증하자고 요구하고 나섰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환경운동연합은 그렇게 하는 대신에 엉뚱한 어릿광대짓을 벌임으로써 결과적으로 독점자본의 반북 · 반공 소동에 일익을 담당하고 나섰다. 하기야 재벌들의 재정 지원을 받으며 ‘환경운동’임네 하고 있는 ‘시민운동단체’이니 무슨 말을 하랴만, 아무튼 이번의 어릿광대짓으로 또 한번 재벌들의 눈에 들었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 미국의 대북 적대 이유

 

미국은 제2차 대전 종전 이후 내내 북을 압살할 목적으로 압박 · 적대해왔다. 사실 한국전쟁1953년에 끝났지만, 동시에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평양 측이 거듭거듭 평화조약과 불가침조약을 요구하고 있지만, 미국 측완강하게 이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미국은 왜 그토록 완강하게 평화조약을 거부하며, 북에 대해서 위협을 가하면서 압박 · 적대하는가? 왜 그토록 집요하게 북을 압살하려 하는가?

 

다름 아니라, 북이 자본가와 지주의 재산을 몰수한 사회주의 국가, 노동자 · 인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저들 제국주의, 곧 독점자본의 입장에서는 사회주의 국가, 노동자 · 인민의 국가의 존재는 그 자체가 지신들의 체제에 대한 도전 · 위협으로서 절대로 그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며, 그리하여 저들은 과거 쏘련을 상대로 벌였던 냉전과 똑같은 이유와 목적에서 북을 압박하고 적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저들은 충분히 영특해서, 그러한 냉전과 위협 · 압박 · 적대가 현 조건 하의 사회주의 국가와 인민에게는 커다란 장애 · 손실 · 고통이며, 자신들에게는 치부의 수단일 뿐 아니라 과잉생산의 압박을 다소라도 완화하는 수단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 종파주의자들의 태도

 

물론 자본주의 혹은 제국주의 국가 내부의 노동자계급이 활발한 반전 · 계급투쟁을 벌임으로써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제국주의의 압력을 완화시킬 수 있었다면, 사회주의 국가는 훨씬 그 압력을 덜 받으면서 훨씬 굴절 없이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며, 20세기의 역사, 나아가 21세기의 역사는 지금과는 크게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인류의 역사적 도약은 훨씬 앞당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자칭 ‘맑스-레닌주의’의 계승자임을 자칭하는 뜨로츠끼주의자들은종파주의적 전통에 따라 제국주의의 선전기관을 능가하는 반쏘 · 반공선전을 일삼았다. 물론, 낙후됐던 구체제가 남긴 열악한 경제 · 사회적 조건 및 제국주의의 압박 · 적대 · 봉쇄에 의한 사회주의 발전의 어쩔 수 없는 지체와 굴절이 종파주의자들에 좋은 공격 대상이었다. 그리고 종파주의자들의 공격과 모략은 마침내 1960년대가 되면서 쏘련, 즉 20세기 사회주의는 사회주의가 아니고, 국가자본주의일 뿐이다고 하는 주장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이러한 극악한 반쏘 · 반공주의는, 쏘련과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붕괴를 계기로 오늘날에는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자들’ 혹은 ‘스피노자 맑스주의자들’임을 자칭하는 소부르주아 신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서도 널리 선전되고 있다.

 

쏘련 등 20세기 사회주의에서 생산수단에 대한 주요 소유형태가 국유였고, 그 경제가 계획경제체제였다는 것을 비난하면서 ‘국가자본주의’니 ‘국가사회주의’니 하며 운운하는 자칭 맑스주의자들, 자칭 맑스레닌주의의 계승자들은, 무엇보다도, 공산당 선언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노동자혁명의 제1보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으로 높이는 것,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여 부르주아지로부터 차례로 모든 자본을 탈취하고, 모든 생산용구를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하고, 생산력의 양을 최대한 급속히 증대시킬 것이다. 이는 당연히 처음엔 단지 소유권과 부르주아적 생산관계에 대한 전제적인 침해를 통해서만, 따라서 경제적으로 불충분하고 영속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방책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는데, 그러나 이들 방책은 운동이 진행됨에 따라서 그 자체를 내몰고, 생산양식 전체를 변혁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불가피하다.[19]MEW, Bd. 4, S. 481.

 

4. 군수산업과 전쟁을 위한 전쟁

 

군수산업은 전쟁을 위한 전쟁산업으로서 오늘날 독점자본의 주요한 존재형태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히 발전하였고, 특히 대공황과 제2차 대전 이후에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주요한 구성부분으로 되었다. 무엇보다도 과잉생산이라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순이 극도로 심화되어 대공황으로서 폭발하고, 그에 따라 독점자본 간, 그리고 제국주의 열강 간의 경쟁 · 대립 · 항쟁이 극도로 격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시아 10월 사회주의 혁명 이후 노동과 자본 간의 계급투쟁이 세계적으로 격화되고, 제2차 대전 이후 그것이 이른바 ‘냉전’의 형태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냉전은 미국이 종래의 제국주의 열강을 자신의 헤게모니 하에 재편성하면서 동시에, 이미 격화되어 있고 갈수록 격화되어 가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순, 즉 과잉생산을 완화 · 경감시켜가고자 하는 주요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국가가 전쟁을 위한 산업으로서의 군수산업을 비대화시키는 훌륭한 명분이었다. 이 군수산업은, 독점자본에게는 거대하게 자본을 축적해 가는 산업이면서도,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것도 아닌, 순전히 소모적인 산업으로서, 격화된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순, 즉 과잉생산을 완화 · 경감시키는 훌륭한 통로였던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1930년대의 대공황, 즉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면적 위기를 계기로 돌이킬 수 없는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시대로 진입하였다. 과잉생산에 대한 이른바 ‘유효수요’를 창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순전히 소모적인 산업으로서의 군수산업을 부르주아 국가에게 있어서 더 없이 좋은 과잉생산의 배출구였던 것이다.

 

군수산업은, 자본주의의 이러한 전면적 위기와 그에 따라 불가피해진 국가 기능의 변화 혹은 확대에 기초하여, 급속히 거대 독점자본으로 성장해 갔다. 국가가 안정적인 시장 · 판로를 보장해줬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제품의 구매는 ‘보안상의 이유’를 들어 경쟁 입찰보다는 주로 수의계약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리하여 사실상 터무니없는 독점이윤을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국방상의 필요’라는 이유로 국가는 군수산업체에 막대한 금액의 연구개발비를 제공했고, 그 결과 얻어지는 새로운 기술 또한 다시 그 기업의 독점적 권리로서 보장함으로써 소수 군수독점자본의 거대화를 조장하였다. 기생적, 파괴적 군수산업의 팽창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순, 과잉생산이 극에 달해서 이미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기에 이른 지 오래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지구상의 여기저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과 전쟁은, 물론 상품 및 자본 시장이나 석유 등 원료 자원의 확보라는 전통적인 이해관계가 기본적인 원인으로 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들 군수산업의 직접적인 이해와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벌어지고 있다. 각종의 병기가 누적적으로 비축될 수만은 없고, 또 군사예산 증액의 구실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져야 하고, 어느 나라, 어느 정권인가가 미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무언가의 존재로 선언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과거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확립되어 있던 동안에는 주로 “공산주의의 위협”이 좋은 구실이었고, 그리하여 ‘냉전’을 격화시켜 가면서 군사수요를 확대해 갔다. 그리고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붕괴된 지금은 세계화라고 하는,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제국주의에 걸림돌이 되는 민족주의적 국가 · 정권들이 미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악의 축”, “무법 정권으로 선언되면서 공격의 목표로 되고 있다. 사실, 석유 · 군수 자본을 비롯한 제국주의의 전쟁 책동에 비타협적으로 맞설 핵심세력은 노동자 · 민중밖에 없다. 특히, 노동자계급의 이익과 자본의 이익은 정면에서 충돌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이야말로 반제국주의, 반전 투쟁의 핵심적 주도적 세력이 될 객관적 조건을 지니고 있다.

지금 한국 노동자계급은, 신자유주의의 구조조정 공세와 힘겹게 싸우고 있지만, 역시 반전 · 반제국주의의 투쟁에 시급히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조건에 처해 있다. 그리고 정세가 요구하고 있는 이 투쟁에 적극적 · 주도적으로 나섬으로써만 한국의 노동자들은 명실상부하게 새 역사를 창도하는 계급으로서 성장 · 발전해 갈 수 있을 것이다. 미 제국주의에 의한 전쟁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반전 · 반미 · 반제국주의 투쟁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이다.

 

 

나가며

 

“자본주의사회(계급사회)에서는 노동자계급의 이익과 자본의 이익은 정면에서 충돌하고 있기 때문에, 억압과 착취, 제국주의 전쟁에 맞설 핵심세력은 노동자 · 민중밖에 없다.”는 본문의 내용 중 이 문장을 끝으로 ≪피억압의 정치학 –한국사회와 노동자 · 민중운동≫ 이 책의 첫 번째 서평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다음호에 계속될 예정이다.

 

“‘노동운동의 정치적 · 이념적 발전을 위해’ ‘생각하며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이 부족한 책을 바친다. 2008314일 슬픈날에…”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베 벳쏘노프, “資本主義と勞動者意識の操縱”, 쏘련과학아카데미 세계경제와 국제관계연구소 편, ≪世界經濟と國際關係≫(일본어 번역판) 제7집, 도쿄, 1969, pp. 150-151.
2 이재영 (민주노동당 창준위 정책국장), “한국 시민운동 성장을 바라보며”, 역사학연구소 편, 『함께 보는 우리역사』 제51호, 1999년 겨울, p.2.
3 베 벳쏘노프, 같은 글, p. 150 참조.
4 베 벳쏘노프, 같은 글, p. 153.
5 UN Human Settlements Peogram의 The Challenge of SlumsGlobal Report on Human Settlements 2003. ―(인용자)
6 이에 대해서는 위에 소개한 Fred Magdoff와 Michael D. Yates의 글들을 참조. Michael D. Yates의 글은 이 책에 번역ㆍ게재한다.
7 안드레아 카토누, “미국: 고전적 제국주의―모든 세력이 결집하여 부시 도당을 고립시키자”, ≪社會評論≫ 제136호, 2004년 겨울, 도쿄: 小川町企劃, p. 68.
8 이상의 사례들은 위 ≪社會評論≫, pp. 81-86의 “정부와 자본의 횡포에 대항하는 유럽의 노동자”에 의거했다.
9 씨애틀 이후 칸쿤까지 이어져 왔고, 어떤 면에서는 ‘국제적 연대’ 혹은 그 투쟁의 ‘새로운 전형’으로까지 잡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최근의 연대ㆍ투쟁 방식이나 그 형태ㆍ경향에 대해서는, 그러나 그것이 과연 ‘마땅한 길’인지, 보다 신중하고 진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10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レ-ニン全集≫ 제5권), p. 389.
11 ‘계급 환원론’이란 용어는, 사실은 사회적 제사상(諸事象)의 상호연관과 역사 발전에서의 계급 혹은 경제의 중심성을 부인하고 사적유물론에 적대하는 (소)부르주아 정치ㆍ사회학자들이 자신들의 형이상학적 다원론을 합리화하는 한 수단이다.
12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미국의 핵무기 투하는 결코 제2차 대전을 끝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군국주의 일본이 조만간 항복할 것이라는 사실은 당시 이미 기지의 사실로 되어 있었다. 미국이,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그 대통령 트루먼이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두 도시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수십만 명을 죽이고, 수많은 사람을 아직까지도 대대손손 죽음보다도 더 끔찍한 피폭의 고통에 살아가게 한 것은 단지 일제의 관동군을 깨뜨리며 한반도로 내려오고 있던 쏘련군의 진군을 저지하기 위해 종전을 불과 며칠 앞당기기 위한 것이었다. ― 인용자.
13 “The first WMD deception―Nukes and the Cold War”, Workers World, May 6, 2004. 이 신문에 의하면, 미국은 지금도 핵무기의 개발ㆍ생산에 매년 350억 달러 이상을 쓰고 있다.
14 같은 글.
15 예컨대, 주성하 기자, “’미국에 협조하라, 아니면 석기시대로 되돌려놓겠다’” <www.donga.com/fbin/output?n=200609230023> 참조. 리차드 아미티지(Richard Armitage)는 미 국방부의 동아시아 당당 부차관보, 국방부 차관보, 국무부 차관보 등 미 국방부와 국무부의 고위직을 두루 거치면서 지난 1980년대 이래 한국, 따라서 청와대 등에도 자주 드나드는 인물로서, 무샤리프 대통령이 그의 협박을 폭로할 당시에도 한국을 방문 중이었다.
16 1994년 10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국 사이에 제네바에서 맺은 비공식 합의로서 이른바 ‘제네바 합의’로 불리는 것. 쏘련 붕괴 후 심각한 식량ㆍ에너지난에 시달려온 평양 측은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흑연원자로(이른바 ‘중수형 원자로’) 발전소의 건설에 나섰는데, 이 흑연원자로에서는 핵무기 제조에 쓰이는 플루토늄의 추출이 가능하기 때문에 ‘핵폭탄 개발’이라는 의혹이 발생, 북에 대한 압력이 강화되자 북은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고 미국은 북의 핵시설 폭격 일보직전까지 가는 심각한 ‘핵위기’로 발전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북은 핵 활동을 동결하는 대신 미국 측은 ‘경수형 원자로’ 발전소 2기를 제공하고, 그것이 완공될 때까지 매년 50만 톤의 중유를 공급하며, 정치적ㆍ경제적 관계를 정상화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이 합의에 따라 1995년 3월에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가 설립되고, 2000년에는 경수로의 건설에 착수하기도 했으나, 2002년 1월 미국이 평양 측을 3대 ‘악의 축’으로 선언함으로써, 그리고 이후의 여러 의도적인 도발로 합의는 파기되었다. ― 인용자.
17 Deidre Griswold, “Behind the nuclear issue in Korea―The real reasons for Washington’s hostility”, Workers World, May 24, 2005.
18 Fred Goldstein, “Nuclear crisis made in USA―Bush threats forced North Korea to arm in self-defense”, Workers World, Oct. 12, 2006.
19 MEW, Bd. 4, S. 481.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6개의 댓글

스탈린의 궤변에 답글 남기기 답글 취소

  • ‘민족모순’이니 ‘주요모순’이니 하는 것들은 모조리 스탈린, 모택동 같은 마르크스의 탈을 쓴 전체주의자의 산물.

    • 1. 마르크스는 계급모순만 말했다. 2. 마르크스는 국가독점자본주의 같은 것을 말한 적이 없다. 3. 마르크스는 ‘신식민지’ 같은 것을 말한 적이 없다. 4. 마르크스는 농민과의 협력을 소부르주아적인 것이라 하였다.

      • 맑스 때의 정세와 20세기의 정세, 21세기의 정세가 같습니까? 그리고 각각의 국가에서의 실정이 같습니까? 첫 번째로 “‘민족모순’이니 ‘주요모순’이니 하는 것들은 모조리 스탈린, 모택동 같은 마르크스의 탈을 쓴 전체주의자의 산물.”이라는 궤변을 늘여 놓으셨습니다만, 일반적으로 맑스주의는 이론에 끼워맞추는 교조주의이고 경직적인 일원론이 아니라, 객관적 분석과 과학적 방법, 내재적 관점을 통하여 현실의 모순관계와 문제들을 분석을 통해 그리고 맹목적으로 원칙에만 매달리는 것과는 달리 확장적 사고를 통해서 새로운 이론들을 창발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 무지에 의해 논증하는 사람들이 가장 크게 범하는 오류중에 하나가 기계적으로 단어 고지 곧대로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문맥과 맥락을 무시하고 단지 몇몇 단서만을 습득하여 표면적인 지식에만 매몰되에 전체적인 흐름을 몰이해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맑스의 이론을 체계화한 사람이 엥겔스이고, 20세기 소련 실정에 맞게 맑스주의를 계승발전 시켜서 확장적 사고를 한것이 레닌주의이며, 이를 ‘구체적으로 체계화’하여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속에서 혁명의 방법론과 전술의 상정, 즉 일종의 현실화 과정이라면 과정으로 레닌주의를 발전 계승하여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경제 발전 법칙 등을 세세하게 상정한 것이 맑스-레닌주의입니다.

      • 노동자계급 혁명만을 해야하고, 보조역량과의 긴밀한 연계는 고려하지 않는 사고는 좌익 편향적 사고에 입각한 교조주의의 전형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레닌은 반대로 유연하게 접근했습니다. 원칙은 지키면서, 원칙만을 말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형식주의적인 구호를 무분별하게 남발하지 않으면서도, 본질은 살리면서 대중이 호응을 일으킬 수 있는 역량의 확보가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서 마오쩌둥의 중국 혁명시기에 반제반봉건을 외친 것과 우리나라에서 학생운동의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NLPDR]이나 반제반독점민중민주주의혁명[제독PD]로 창조적 이론을 확장적 사고를 통해 기존 맑스-레닌주의를 계승하면서도 그 나라 실정에 맞게 발전시켜 혁명에서의 전략과 전술, 역량확보와 대중화를 통해 사회주의 국가 단계와 공산주의 국가 단계로의 이행을 하기위한 기초적인 이론의 형성인 셈입니다. 그리고 결과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어쨌든 성공했던 것은 교조적 또는 맹동적 혁명이론이 아니라, 현실을 고찰하여 현실에서의 모순관계를 상정하여 현실에 맞게 이론을 창조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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