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마당] 진실은 강고한 계급 투쟁의 무기!(3)

― ≪진실이 밝혀지다―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을 읽고

 

 

김용화 | 편집위원

 

* 마리오 소사(Mário Sousa), ≪진실이 밝혀지다―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제3판), 채만수 역, 노사과연, 2013.

 

 

 

     들어가며

 

≪진실이 밝혀지다─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의 마지막 발췌 · 정리이다. 이 책에는 인류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사회주의 사회의 역사적 진실들을 알 수 있는, 한 문구도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 무엇보다도 이번 글에서는 쓰딸린의 연설에 더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그동안 진보라고 자처하는 분들이나 조직과 단체들도, 쏘련 붕괴 이후에 의지할 곳을 잃은 자기 사상의 방어 때문인지, 쓰딸린에 대해 결코 해서는 안 될 오해를 하고 있는 듯하여서이다. 쓰딸린에 대한 오해는 곧 사회주의 사회를 부정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맑스 · 레닌사상을 부정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는 현재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사회의 전복을 지체시키는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실제로 주위에 열이면 열, 백이면 백이 하나같이 스탈린을 자본주의적인 독재자로까지는 아니겠지만, 노동자계급은 물론이고 인민들 전체를 괴롭혔던 독재자였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물론 사회주의를 빨갱이라고 세뇌당해 온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쓰딸린은 노동자계급과 근로대중을 위한 프롤레타리아계급독재 사회의 지도자였다. 생각해보라. 프롤레타리아계급독재란 무엇인가? 혁명 전에 노동자계급과 인민들을 착취하고 짓밟으며 호의호식했던 지배계급, 혁명 후에도 아직 적지 않게 남아있는 이 계급들을 전멸해가는 과정에 꼭 필요한 독재가 아닌가 말이다. 특히 쓰딸린은 전 세계 제국주의 국가들과 여타의 자본주의 사회들로 둘러싸였어도, 온갖 악랄한 경제적 공세, 쏘련 사회 내부의 교란 · 와해 공작, 인민살육의 전쟁 등의 압박과 고통 속에서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고 몇십년을 버티며 사회주의 사회를 지키고 발전시키려 노력했던 지도자였다.

 

그 진실은 ≪진실이 밝혀지다─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을 통해 어느 정도 알 수가 있다. 무엇보다 쓰딸린이 최고의 지도자로 있었던 시기의 중앙위원회의에서 사회주의 사회를 지키고 발전시켜 나아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부단히도 했었는지를 잘 살펴보았으면 한다. 이것이 우리 노동자계급이 또 다시 쟁취해야 할 프롤레타리아트독재의 크나큰 밑거름이기 때문이다. 발췌의 내용 중 모든 강조는 필자의 것이다.

 

제2편 1930년대 쏘련에서의 계급투쟁

쏘련공산당(CPSU)내의 숙청과 정치재판

 

뺘따꼬프-라제끄 재판에 관한 미국 대사 조셉 데이비스의 기록

모스끄바 주재 미국 대사로서 이 재판을 목격했던 조셉 데이비스는 1936년에서 1938년 당시 쏘련의 정세와 관련된 이런 저런 주제들에 대해서 대단히 광범한 자료를 남겼다. 데이비스는 한 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그 책은 1941년에 뉴욕에서 ≪모스끄바에서의 임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1941년 10월까지의 일지와 논평을 포함하여, 국무성에 보낸 비밀 전문(電文)들과, 공무상의 그리고 사적인 서신들, 일기, 업무일지 등의 기록”이며, 그가 루즈벨트 대통령과 국무성, 미국의 가족들에게 보낸 서신들이 포함되어 있다. 조셉 데이비스는 직업적인 외교관이 아니라 변호사이자 자본가였고,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과는 사적인 친구였으며, 미국 민주주의의 열렬한 찬양자였고, 철저한 반사회주의자였다.

 

 

미국의 국무장관에게 보낸 데이비스의 보고서

 

뺘따꼬프-라제끄 그룹에 대한 재판과 관련하여 1937년 2월 17일에 데이비스는 “극비(Strictly Confidential)” 보고서를 국무장관에게 보냈다.

 

통역의 도움을 받아 저는 주의 깊게 증언을 청취했습니다. 저는 제가 이 피고인들의 증언들을 믿지 않으려 했음을 당연히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피고인들의 자백이 모두 일치한다는 점, 그들이 장기간 (외부와 접촉이 끊긴 채 독방에) 감금되어 있었고, 그동안에 그들 자신과 그 가족들에게 협박과 강제가 가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등, 이 모든 것이 저로 하여금 피고인들의 진술의 신뢰성에 심각한 의문을 갖게끔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관찰했을 때, 그리고 그 사건의 재판에서의 경험과 과거 경험에서 터득한 신빙성 판단력에 입각해 보았을 때, 적어도 쏘련 정부에 적대적인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 음모와 모반이 광범하게 존재했으며, 이는 그들의 법률 하에서는 공소상의 범죄를 구성한다는 것을 증명할 만큼은 국가가 사건을 입증했다는 결론을 저는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1)

 

 

1937년의 윌렌스티에르나와 1999년의 아크 게티

윌렌스티에르나 대사에 의하면, 뺘따꼬프 재판의 피고인들은 심문을 받고 죄를 자백할 때에 “생기가 있고 정신이 또렷해 보였으며, 그들 중 한 두 명은 심지어 입가에 희미한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더욱이 피고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고 자백했으며, 이는 윌렌스티에르나 대사에게는 “해결할 수 없는 심리학적 난제”였다. 부르주아 계급과 그 문필가들 피고인들의 자백에 완전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 새로운 연구가 발표되거나 새로운 책이 발간될 때처럼 그동안 그 주제가 제기될 때에는 그 피고인들이 실제로 유죄였다는 것을 변명하기 위한 새로운 이론들이 창안되어 왔다.

 

저자의 상상력 이외에는 어떤 근거도 없으면서도 때로는 완전히 새로운 일련의 이론들 가운데 최근의 것은 아크 게티의 최근[1999년-역자]의 저서인 ≪숙청으로의 길―쓰딸린과 볼쉐비끼의 자멸≫에서 읽을 수 있다. 게티가 속한 학계에서는, 즉 쏘련에 대한 적대적이고 편견에 찬 태도가 그리고 뜨로츠끼에 대한 신성화가 완전히 지배적인 학계에서는 그러한 일들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게티가 볼 때 자백이란 단지 레닌 시대 이래 볼쉐비끼당에서 일어나던 모든 현상의 기초를 이루는 어떤 의식(儀式)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게티에 의하면, 이 무고(無辜)한 피고인들은, 오직 지배층에 존경을 표시하기 위해서, 그리고 오직 당의 단결을 위해서, 자신들에 대해서 거짓증언을 했고, 모든 동무들과 쏘련 및 전 세계 근로인민 앞에서, 그것도 영원히 치욕을 감수했으며, 사형 판결을 받아 총살당하는 것을 감수한 것이다!

 

그리고 게티가 말하는 자백 의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에 대해 유죄임을 인정하기를 거부한 사람들도 어찌 되었건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다! 이는 터무니없다고 말할 수 없을지는 모르나 무척 억지스럽다. 모든 피고인들이 자신들이 결백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유죄라고 선언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분별없는 연구자만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한 연구자는 진실을 탐구할 수 없고, 자신의 가설을 억지로 합리화하고 있을 뿐이다.

 

 

게티의 음모와 어리석음

 

모스끄바 재판의 피고인들 대부분이 공산당의 전직 고위 관료, 즉 이른바 당의 지배층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범죄도 없었고 아무도 유죄가 아니었다면, 왜 그 지배층의 일부가 다른 일부를 공격했겠는가? 수백 쪽에 달하는 지루한 문서자료들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역사를 갖은 음모와 어리석음의 속임수로 돌리는 난해한 이론들에도 불구하고, 게티는 자신의 저서 ≪숙청으로의 길≫에서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언제나 그렇듯이, 모든 것은 어쨌든 쓰딸린의 작품이라는 것, 즉 그가 권력을 갈망하여 그리고 정치적 지배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배후에서 이 모든 일을 꾸몄다는 것이다. 그리고 게티는 다음과 같이 극단적으로 말하면서 그의 저서를 끝맺고 있다. ― 쏘련에 “노동자의 혁명 따위는 없었”으며, “사회주의 시대의 특권지배층이 사실상 그 국가를 물려받아”, “1990년대의 ‘새로운’ 지배자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 자산의 법률적 소유자로 되었다.”2)

이것이 역사란 말인가? 모든 것이 그토록 단순해서 60년 전의 지배층이 1990년에 국가를 자본에 팔아먹은 자들과 동일한 지배층이라고 믿어야 한다고? 국가를 단지 어떤 이의 ‘이론’을 위해서, 60년이라는 긴 세월을 건너뛰고 그동안에 일어났던 모든 것들에 대해 눈을 감아야 한다고? 사회주의와 무계급 사회를 위한 싸움에서의 모든 계급투쟁에 눈을 감는 것. 그리고 특히 인류의 최대의 비극, 즉 나찌즘과 파시즘에 대항한 제2차 세계대전에 눈을 감는 것. 주로 쏘련이 싸워 승리했으며, 자신의 조국뿐 아니라 전 인류를 위해서, 자유를 위해서 수많은 최고의 공산주의자들과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쳤던 전쟁. 십년 동안이나 시간을 다투어 분투해야 했으며, 쏘련의 광대한 지역을 잿더미로 만들고 엄청난 사회적ㆍ경제적 문제들을 남겼던 전쟁. 이 모두를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인류 최대의 그 비극이, 그것이 일어났던 국가의 사회 발전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의 저서 ≪숙청으로의 길≫로서 게티는 지배 자본가계급에게 흡족한 성과를 만들어 냈다. 그는 문서고가 개방된 후 더 이상은 옹호할 수 없는 거짓말들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쏘련을 중상모략하고 그에 의혹을 던지는 새로운 부정직한 이론들을 꾸며 내고 있다.

 

 

1937년 당 숙청과 반(反)관료주의 투쟁

 

1937년 중엽에는, 두 가지 중대한 문제들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며 쏘련에서 사회주의의 건설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반드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들 문제 중 하나는 지노비예프-까메네프 반역 재판과 뺘따꼬프-라제끄 반역 재판에 의해서 드러났다. 아직까지도 과거의 반대파들이 무기를 내려놓지 않았음이 입증된 것이다. 그들의 지하 활동은 1930년대 초 이래 끊임없이 계속되었지만, 가담자들이 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또 다른 문제는 당내의 관료주의, 부패, 그리고 기회주의에 맞선 투쟁이었다.

1937년 2월에 이 두 가지 중요 문제를 다루기 위해 중앙위원회가 소집되었다. 그 회의가 시작되었을 때에는 중앙위원회 위원인 부하린과 르이꼬프도 참석했다. 그들은 당의 적들과 협력했으며, 또한 뜨로츠끼와의 반혁명 동맹에 참여했고, 쏘련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부하린과 르이꼬프는 자신들을 변호하려고 했지만, 중앙위원회는 그들을 반역자로 평결했고, 당에서 축출했다.

 

 

쓰딸린의 연설

 

그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쓰딸린은 “당 사업에서의 결함과 뜨로츠끼파 및 기타 표리부동한 자들을 청산하기 위한 조치들”3)이라는 제목으로 매우 중요한 연설을 했다. 스딸린은 이 연설에서 중앙위원회의 다른 동지들에게, 어떻게 해서 외국의 앞잡이들이나 뜨로츠끼주의자들 및 그들의 정치적 동맹자들이 당 기구들뿐 아니라 쏘련 국가의 경제적ㆍ행정적 조직에 침투하여 파괴행위와 정탐, 해독행위를 벌일 수 있었는지를 물었다.

스딸린은 계속해서 이전 수년 동안의 파괴행위 및 정탐활동의 목록과 중앙위원회가 당 기구들에 보낸 경고서한을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 사실들은 우리 동지들이 이러한 신호들과 경고들에 매우 느리게 대처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 당의 동지들이 퇴화했고, 그 계급의식이 약화되었으며, 그 기강이 흐트러진 것인가? 아닙니다, 물론 아닙니다! 혹시 그들이 타락하기 시작했는가? 이 역시 물론 아닙니다! 그렇게 추정할 만한 어떤 근거도 결코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이러한 경솔함, 부주의, 자기만족, 무분별은 어디에서 왔는가? 문제는 단지, 경제 건설의 최전선에서 벌이는 경제 활성화 운동에 열중하고 그 거대한 성공에 흥분한 나머지 우리 동지들이 볼쉐비끼라면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사실들을 잊은 데에 있습니다. …

 

그들은 쏘비에뜨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을 둘러싼 국제정세상의 중요한 사실을 잊었습니다. … 그들은 쏘비에뜨 권력은 지구상의 단지 1/6에서만 승리하고 있고, … 그 외에 수많은 국가들, 계속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을 유지하면서 쏘련을 에워싸고, 쏘련을 공격하여 궤멸시킬 기회를 엿보고 있거나, 아무튼 쏘련의 힘을 잠식하여 약화시킬 기회를 엿보고 있는 부르주아 국가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4)

 

 

자본주의 국가의 스파이들

 

쓰딸린은 그 다음 계속해서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관계를 지적했다.

부르주아 국가들이 서로 다른 부르주아 국가에 간첩과 파괴자, 반정부 활동가, 그리고 때로는 또한 암살자들을 보내며, 그들에게 이들 국가의 기업과 공공기관에 침투하도록 지시하고, 앞잡이들을 포섭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그들 국가를 약화시키고 그 힘을 잠식하기 위해서 후방을 교란시키고 있다는 것은 2×2=4라는 것만큼이나 명백히 입증되어 왔습니다. … 오늘날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의 간첩과 반정부 활동가들로 들끓고 있고, 다른 한편에선 영국과 프랑스 간첩들이 독일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습니다. 미국에는 일본의 간첩과 반정부 활동가들이 득시글거리고, 일본에는 미국의 간첩과 반정부 활동가들이 득시글거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이 부르주아 국가들 간의 관계의 법칙입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됩니다.― 어찌 부르주아 국가들이 자신들과 동류인 부르주아 국가들을 대하는 것보다 더 친절하고 더 우호적으로 쏘비에뜨 사회주의 국가를 대하겠는가? 어찌 그들이 쏘련에는 친족인 부르주아 국가들에 보내는 것보다 더 적은 수의 간첩과 파괴자, 반정부 활동가들, 그리고 암살자를 보내겠는가? 어찌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겠는가? 부르주아 국가들은 어떤 부르주아 국가에 보내는 것보다도 쏘련에는 두 배 세 배나 많은 파괴자와 간첩, 반정부 활동가들, 그리고 암살자들을 보낼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보다 더 정확하지 않겠습니까? 자본주의가 쏘련을 포위하고 있는 한, 우리나라에는 외국의 정보기관들이 보내는 파괴자들과 간첩들, 반정부 활동가들이 있으리라는 것은 명백하지 않습니까? 5)

 

 

당 강좌와 레닌 강좌

 

쓰딸린은 다음에 당 사업에서의 수많은 오류들과 발생한 오류들을 수정하기 위해 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대책들에 관해 상세히 설명한다. 그는 세포 지도자들로부터 지구(地區) 및 쏘비에뜨 공화국들의 당 조직의 지도자들에 이르기까지 지도적인 당 간부들을 위한 체계적인 학습을 제안하면서 연설을 끝맺는다.

 

당 세포 서기들을 당적으로 교양하고 재교육하기 위해서는 각 지구의 중심에 4개월 과정의 ‘당 강좌’가 개설되어야 합니다. 지구 조직의 제1서기들을 정치적으로 재교양하기 위해서는 쏘련에, 말하자면, 10곳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들에 8개월 과정의 ‘레닌 강좌’가 개설되어야 합니다. 시당 서기들을 사상적으로 재교양하고 정치적으로 단련시키기 위해서는 쏘련공산당(볼) 중앙위원회 산하에 6개월 과정의 ‘당 역사 및 정책 학습 강좌’가 개설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6개월 과정의 ‘국내ㆍ국제 정책협의회’가 쏘련공산당(볼) 중앙위원회 산하에 조직되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각 지역과 변경의 당 조직들 및 각 민족 공산당의 중앙위원회의 제1서기들을 보내야 합니다.6)

 

학습은 당 내부의 제 모순과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올바른 방법이고, 1934년 1월부터 쓰딸린과 즈다노프, 끼로프가 결의한 노선이었다.“논쟁에 회답하는 연설”에서 쓰딸린은 논쟁 중에 제기되었던 몇 가지 중요한 쟁점들을 끄집어냈다. 무엇보다도 쓰딸린은, 한때 뜨로츠끼주의자였거나 뜨로츠끼 동조자들이었으나, 그 이후에 마음을 바꾸어 당에 충성하며 열심히 일한 사람들은 뜨로츠끼파 범죄자들이나 첩자들에 대한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했다.

 

이 문제에서는, 다른 모든 문제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개별적이고 차별적인 접근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모든 이들에게 똑같은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습니다.7)

 

 

당 관료 통제

 

맺음말의 기타 문제들은 모두 당 관료들과 평당원 간의 관계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쓰딸린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는 당 관료의 선발을 비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극히 자주 당의 일꾼들이, 객관적인 이유가 아니라, 즉흥적이고 주관적이며 속물적이고 소부르주아적인 이유로 선출되고 있습니다. 극히 자주 소위 친지들, 친구들, 동향 사람들, 개인적으로 헌신적이었던 사람들, 상관에게 아부하는 데 능숙한 사람들이, 그들이 정치적ㆍ업무적으로 적합한지 여부를 고려함이 없이 선출되고 있습니다. 자연히, 책임감 있는 일꾼들로 구성된 지도 집단 대신에 우리는 친밀한 사람들로 구성된 소규모의 가족을, 즉 노동자협동조합을 갖게 되는데, 그 구성원들은 무사안일하게 살려고 하고, 서로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하며, 내부의 수치를 드러내지 않고, 서로를 칭찬하며, 때때로 무기력하고 메스꺼운 성과 보고서들을 본부로 보냅니다. 그러한 가족적 분위기에서는 업무상 결함을 비판하거나 지도자들이 그 업무를 자아비판할 어떤 여지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물론 그러한 가족적 분위기는 아첨꾼들을, 즉 자존심이 없는 사람들을 양성하기에 좋은 여건을 조성하고, 그 때문에 그것은 볼쉐비즘과는 어떤 공통점도 없습니다.8)

 

더 나아가 쓰딸린은 당 관료들을, 단지 그들의 상관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훨씬 더 중요하게는 평당원들에 의해서 통제할 필요성에 대해서 언급했다.

 

어떤 동지들은 오로지 지도자들이 작업 결과에 따라 사람들을 평가하는 하향식 평가로만 사람들을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물론 하향식 평가는 사람들을 평가하고 작업을 완료하였는지 검증하는 데 필요한 효과적인 수단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향식 평가로서 평가 업무 전체가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또 다른 종류의 평가로 상향식 평가가 있는데, 이것은 지도자들이 인도하는 대중들이 지도자들을 평가하고, 지도자들의 실수에 관심을 갖고, 그리고 이러한 실수들을 교정할 수 있는 방법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평가는 사람들을 평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입니다.9)

 

 

레닌주의의 적용

 

쓰딸린은 또한, 자아비판은 적이 그것을 약점으로 간주하고 악용할 것이며 또한 조직의 해체와 약화로도 귀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아비판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동지들, 그것은 어리석은 소리, 완전히 어리석은 소리입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우리의 실수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그것들을 정직하게 교정함으로써만 우리는 우리 당을 강화하고, 우리 당의 신망을 높일 수 있습니다. … 간부들의 실수를 얼버무려 봐주고 감싸는 것은 분명히 바로 이들 간부를 죽이는 것을 의미합니다.10)

 

마지막에 쓰딸린은 당 조직의 지도자들에게 대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을, 즉 올바른 지도력을 발휘하는 확실한 길을 역설했다. 그는 “개별 당원들의 운명에 대한, 당에서 당원들을 추방하는 문제에 대한, 혹은 당에서 추방된 당원들을 복권시키는 문제에 대한, 우리 당 일부 동지들의 형식적이고 무정한 관료주의적 태도”11)를 단호하게 비판했다.

 

쓰딸린은 당원자격에 대하여는 레닌주의적 원칙을 적용할 것을 당 지도자들에게 요청했는데, 그 원칙에 따르면 “당원이란 당의 강령을 받아들이고, 당비를 납부하며, 당 조직 중 한 곳에서 일하는 사람이다.”12) 어떤 당원도 당의 강령이나 당 정책을 깊이 알고 있지 못하다는 이유로 추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쓰딸린은, 당 회의에 지각하거나 당비를 지불하지 못한 것과 같은 사소한 잘못을 이유로 노동자들을 추방하는 것을 냉혹한 정책이자 엄청난 관료주의라고 불렀다. 당원들을 추방해 버리기 전에, 문제의 인물이 스스로 개선할 수 있도록 어떤 비판이나 경고, 혹은 일정한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당 지도자들은 당원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바로 우리 동지들 중 일부에게 부족한 점입니다”13)라고 쓰딸린은 결론지었다.

 

 

당원들이 비판을 시작하다

 

스딸린의 연설들이 출판되자, 사회적 논쟁을 촉발했다. 주된 쟁점은 여전히 지역 당 지도자들의 무소불위의 권력과 부패였다. 1930년대 내내 중앙위원회는 당원들에게 지도부에 대한 비판을 개시하고, 부패하고 열의가 없는 당 서기들을 규탄하도록 촉구하였다. 지구(地區) 위원회들의 많은 회의들이나 작업장 및 주거 세포의 많은 회의들에서는 당 지도자들의 정체가 남김없이 탄로되어 즉석에서 그 지위들을 잃었고, 당원들의 신뢰를 받는 새로운 지도자들이 곧바로 선출되었다. 그 무엇도 당원들이 타락한 당 관료들로부터 권력을 빼앗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벨르이 지구의 사례

 

이제 1937년 2월 중앙위원회 회의 후 노동자 계급 속의 그러한 분위기를 보여 주는 전형적인 한 예를 보자. 벨르이 지구(Belyi Raion, [쏘련의 행정단위-역자])에서 당의 활동을 분석하기 위한 회의가 나흘간 진행되었다. 회의록이 스몰렌스끄 문서들14) 속에 포함되어 있다. 예전에는 회의에서 거의 발언을 하지 않거나 소극적이었던 평당원들이 이번엔 연이어 발언에 나섰고, “직위에 상관없이”15) 거리낌 없이 발언했고 지구 서기인 꼬발레프(Kovalev)를 준엄하게 비판했다. 그는 당원들을 배려하지 않는 관료주의자가 되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정치교육에 관한 거짓 보고서를 작성했고, 교육회관은 불필요하다면서 그것들을 폐쇄하였다. 그는 독재적이었고, 불공평했으며, 잔인했다. 무언가 때문에 지구 사무실로 불려 온 당원들은 으레 장시간을 기다려야 했거나, 곧바로 업무를 마치지 못한 채 돌아가야 하는 불편을 겪었다. 벨르이 내무인민위원회의 위원장인 비노그라도프(Vinograd-ov)가 꼬발레프를 돕고 나섰다. 그는 당원들에게 당의 업무에 대하여 논의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에 의하면, 중앙위원회의 2월 회의에서 하달된 지시는 당원들이 봄철 파종에 대하여 논의하라 것이었다는 것이다. 회의는 당원들이 즉시 꼬발레프를 걷어차고 까르뽀프스끼(Karpovsskij)를 당 지구의 서기로 선출하는 것으로 끝났다.

 

 

스딸린의 “논쟁에 회답하는 연설”, 투쟁의 도구

 

역사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쓰딸린의 “논쟁에 회답하는 연설”이 알려지자 평당원들이 즉시, 상부의 권고를 개의치 않고, 출세주의자들과 부패한 관료들을 내치면서 자기들 자신의 지도자들을 선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스몰렌스끄 문서고의 보고서들이 명백히 보여 주는 것처럼, 자발적인 투쟁이었고 가까운 장래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동시에 권력을 지닌 부패한 관료들은 계속해서 서로를 보호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투쟁은 이제 막 시작된 것에 불과했다.

 

 

1937년의 당 선거

 

중앙위원회 회의 2주 후인 1937년 3월 20일에 “당 조직 선거”에 관한 중앙위원회의 포고가 발표되었고, 언론에서는 자아비판과 당 내부 민주주의, 지도적인 당 관료들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중앙의 지도부는 부패한 당 지도자들이 선거 집회들을 교묘하게 조종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토론과 비판을 위한 당 회의들은, 예전에는, 당 규율이 부족하거나 비행을 저질렀다며 평당원들을 비판하던 공개 토론의 장이었다. 상황이 반전되어 이제는, 지방 당 지도자들이 비판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들 회의에서는 대체로 많은 당원들이 당위원회들에 임명되었다. 회의록은 세세하게 작성되었다. 마지막에 비밀선거들이 실시되었다.

 

 

이전 지도자들이 교체되다

 

1937년 5월에 알려진 선거 결과에 의하면, 5만4천 개의 당 조직 가운데 55퍼센트에서 이전 지도자들이 교체되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이전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이 엄청나게 컸다는 것을 보여 주었고, 두 번째로는 부적격하거나 권력을 남용하는 정치인들을 내쫓기 위해 필요한 집단적인 힘을 평당원들이 실제로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미 존재하고 있던 불만을 중앙위원회 회의가 공식화시켰음이 명백해졌다.

 

하지만, 당 선거는 다른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

광역 수준의 당 지도자들은 비판에서 살아남는 대단한 능력을 보여 주었다. 부패한 정치인들이 광역 수준에서 소군주(小君主)처럼 행동하면서 어떻게든 투표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든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 알려졌다. 평당원들에겐 이런 광역 수준의 지도자들을 소지역 지도자들처럼 평가할 능력이 없었다. 평당원들이 곤란을 겪는 데는 또 다른 요인도 있었다. 부패하고 부적격한 광역 및 도시의 서기들은 언제나 어떤 조건에서도 자신들을 지원하는 무리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이다. 평당원들이 진실을 좇아 이 모든 것을 헤쳐 나가기란 쉽지 않았다.

 

 

광역 지도자들이 교체되다

 

공산당 내부의 관료주의와 부패에 대한 투쟁은 보다 높은 수준에서도 계속되었다. 평당원들이 광역 수준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당 중앙은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중앙위원회에서 광역 협의회에 대표자들을 파견하기로 당 중앙이 결정했다. 언론에 보도된 25군데의 광역 협의회 중 4군데의 협의회가 당 지도자들이 물러나는 것으로 끝났다. 문제가 개선되긴 했지만, 많은 곳에서는 여전히 그곳의 소군주들이 당의 지시에 개의치 않고 계속 제멋대로 지배하고 처신했다.

 

 

장군들에 대한 군사재판

 

광역 당 협의회들이 개최되고 있던 바로 그때에 국가의 장래에 결정적인 무언가가 쏘련의 정치에 발생했다. 아이데만(Eideman)을 비롯한 몇몇 장군들이 체포되어 반역죄로 기소되었다. 이들 장군은 1937년 5월 26일에 체포되어, 오랫동안 “어떤 적대적인 파시스트 권력에 상습적이고 비열하게 군 기밀들을 누설했으며, 쏘비에뜨 국가를 전복시키고 자본주의를 부활시키기 위해 간첩으로 활동한”16) 혐의를 받고 있었다. 장군들의 이 음모는 반대파 군부가 쏘련 정부에 대항하여 벌인 투쟁이었다. 뺘따꼬프-라제끄 반역 재판은 반대파에게 심각한 타격을 가했으나, 장군들은 그들의 쿠데타 계획을 취소하지 않았다. 1937년 3월 말이 되면서 그들은 쿠데타 시점을 결정했다.

 

 

사회주의 사회가 스스로를 방어하다

 

쏘비에뜨 정부의 신속한 개입으로 이번에 쏘련에 대한 쿠데타 시도를 막았지만, 민간 사회에서 그리고 군 내부에서 어떤 규모의 음모가 있었는지 그 모두가 알려지진 않았다. 그 장군들은 많은 거물급 당 관료들 및 간부들과의 접속 망을 가지고 있었다. 1938년 부하린의 재판 때에야 비로소 음모의 전모가 알려지게 되었다. 공모자들은 이미 체포하여 제거할 수천 명의 당 관료들의 명단들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사회는 그 장군들과 뺘따꼬프 무리가 남겨 놓은 흔적들을 추적함으로써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었다. 재판 중에 언급되는 군사기밀들 때문에 재판 과정은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재판부는 모든 피고인들을 유죄로 평결하고,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938년 5월 12일에 ≪쁘라브다≫는 8명 사형수들의 총살형이 집행되었음을 공표했다.

 

 

공모자들, 그리고 그들의 국외 연줄

 

1937년에 쏘련에서 있었던 쿠데타 시도가 만일 성공했더라면, 그 전모를 평가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한편에서는 쏘비에뜨 정부가 인민과 쏘련 군 병사들의 매우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음모자들이 동원 가능 병력을 준비하면서 다년간 은밀하게 작업해 오고 있었다. 군대 내에서 정부에 충성하는 부대들과 음모자들에게 충성하는 부대들 사이에 대결이 벌어졌다면, 비록 음모자들 측의 군사의 수가 훨씬 적기는 했지만, 광범한 영향을 야기했을 것이고, 엄청난 손실을 초래했을 것이다. 이 또한 그들 음모자들이 바라는 바였다. 그들이 최종적으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지원이 불가결했다. 그러한 지원을 할 수 있는 곳은, 장기간 쏘련을 위협해 오던 군사 강국들, 즉 나찌 독일이나 일본, 이딸리아였다. 그 계획은 바로 그렇게 구상되어 있었다.

 

 

광역 당 회의와 반혁명에 대한 투쟁

 

1937년 6월, 쏘련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맴돌았다. 아무도 군사적 음모의 정확한 규모를 몰랐지만, 그 규모가 드러난 것보다 훨씬 크다는 징후는 많았다. 중앙위원회는 대대적인 조사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군사적 음모는 상부에서 나왔고, 민간 사회에서의 그 뿌리는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밝혀져야 했다. 광역 당 지도자들의 사업을 평가하고 음모의 규모를 알아내기 위해서 수많은 임시 당원회의들이 개최되었다. 1937년 6월 19-21일의 회의를 앞두고 상황이 급변했다. 당원들이 그토록 거침없이 발언하게 된 데에는 훨씬 더 중요한 또 다른 일이 있었다. 음모를 꾸며 사형 판결을 받은 장군들 중 한 명인 우보레비치가 루?체프와 최상의 협력관계에 있는 광역위원회 위원임이 밝혀졌던 것이다. 루?체프와 그의 무리가 당원들에게 저지른 오랜 비행들이 가차 없이 폭로되었다. 서부 지역 지도부의 부패와 전횡에 대한 고발 목록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그 결과, 지도부 전체가 그 회의에서 해임되었다. 그 이후 계속된 조사로 루?체프와 그의 일당은 체포되었고, 부패 및 권력 남용죄로 기소되었다.

 

 

중앙위원회 광범한 반격을 시작하다

 

1917년 혁명기에는 막연하고 다소 낭만적이었던 노동자 권력의 상(像)이 노동자들이 지배하는 쏘련에서는 이제 현실이 되었다. 일부 유복하게 살고 특권을 가졌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새로운 사태가 두려웠다. 그들은 반혁명의 길을 택하였다. 그들은 사회주의적 발전을 저지하기 위해 불가피한 동맹자들을 쏘련의 외부에서 찾았다. 중앙위원회는 백색테러 및 반역에 맞서 단호히 싸우기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정치적 상황은 불안정했고, 음모자들의 국외 연결고리는 여전히 그 실체가 불분명했다. 그 장군들이 쏘련의 국방에 관한 기밀들을 누설했는데, 이것이 국가를 얼마나 약화시켰는지는 불분명했다.

 

 

나찌즘이 유럽을 재패하다

 

유럽에서는 파시스트 군대들이 거침없이 행동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내전은, 프랑꼬를 돕기 위해 5만 명을 파병한 이딸리아의 지원을 받아 절정에 달해 있었다. 나찌 독일은 경제적으로 지원했고, 또 전투기와 폭격기, 소총, 탱크, 기타 군사 장비들로 이딸리아와 프랑꼬의 파시스트들을 무장시켰다. 아프리카에서는 이딸리아가 최신 병기에 대한 방어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무자비한 전쟁을 벌인 후 에티오피아-아베씨니아(Ethiopia-Abessinia) 왕국을 점령했다. 나찌는 1938년 3월에는 오스트리아를, 1939년 3월에는 체코를 점령했다. 같은 달에 마드리드가 파쇼의 수중에 떨어졌고, 1939년 9월에는 나찌 독일이 폴란드를 정복ㆍ점령했다. 1940년 4월에는 덴마크가 나찌의 침략에 굴복했고, 1940년 6월에는 노르웨이가 용감한 저항 끝에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달에 네덜란드와 벨기에, 룩셈부르크, 그리고 군사 강국 프랑스가 독일의 공격 5주 만에 무너졌다. 영국군이 프랑스를 지원했지만, 역시 대패한 후 심각한 피해를 입고 퇴각해야 했다.

 

쏘련은 위험에 처해 있었다. 파시즘의 공격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장군들의 반역이 가한 타격은, 그 피해를 회복하는 데 장기간이 걸릴 것이었고, 나라를 위태롭게 했다. 정부는, 세계 최대ㆍ최강의 군대인 나찌 독일의 군을 격퇴하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았다. 1941년 6월 침략 당시 나찌 독일은 8백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인류 역사상 그렇게 거대한 군대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다. 쏘련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전속력을 다해 현대 산업을 건설했고 군대를 5백만으로 증강했다.

 

 

숙청이 최고위층을 가격하다

 

중앙위원회 광역 당 지도자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충성심에 의문을 제기한 후, 당내의 숙청에 탄력이 붙었다. 평당원들은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당 관리들에 맞서 더욱더 목소리를 높여 갔다. 자신들이 전적으로 안정적인 자리에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불시에 간부의 자리에서 평당원으로 내던져졌고, 일부는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로 인해 곧바로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쏘련에서는, 서방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들과는 대조적으로, 모두가 법 앞에 평등했다. 나아가, 사회의 고위직은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하며 아주 신중하게 법을 준수해야 함을 의미하는 명예로운 임무였다. 이는 오직 자본주의의 부르주아지에게만, 즉 언제나 범죄와 부정거래와 투기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놀랄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숙청과 ‘고참 볼쉐비끼들’

 

부르주아 역사가들은 ‘고참 볼쉐비끼들’에 대한 박해에 대해서, 즉 숙청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사람들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 왔다. 만일 ‘고참 볼쉐비끼들’이 숙청되거나 체포되었다면, 그것은 단지 그들이 주요 간부로서 평당원들에 의해 부패하고, 거만하거나 자신의 임무에 무관심하다는 지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917년에 모스끄바에서 10월 혁명에 참여했던, 쓰딸린 세대의 127명의 주요 ‘고참 볼쉐비끼들’에 대한 연구는 그들이 특별한 숙청 대상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127명의 ‘고참 볼쉐비끼들’ 가운데 109명에 대해서는 그들의 평생의 행적을 추적할 수 있었다. 이들 가운데 38명은 1937년에 추방되거나 재판에 회부되었다.17) “쓰딸린이 ‘고참 볼쉐비끼들’을 몰살시켰다”는 신화는 단지 신화에 불과한데, 콘퀘스트와 CIA에 의한 또 다른 이 거짓말은 당시 뜨로츠끼가 꾸며낸 것이었다.

 

 

계급 문제에 답이 있다

 

1937년에는 서방(西方)과 부르주아적 사고에 경도된 당 관료와 간부들이 추방되었다. 그들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길을 걷고 있는 쏘련을 다시 자본주의 사회로 되돌리고자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또한 쏘련을 약화시킨 사람들이었으며, 서방에 동조하고 협력하며 사라진 자본주의를 재도입하고자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권력을 잃고, 당에서 축출되었으며, 재판에 회부되었다. 1937년의 쏘련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증오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당의 정책과 대중 투쟁의 어려움

 

숙청의 목표는 당과 군대 내의 부패한 관료들과 반역자들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수백만의 당원들이 참여한 그러한 광범위한 투쟁이 실수 없이 수행될 수는 없었다. 투쟁은 관료주의와 반역을 겨냥한 것이었지, 고위직 당 간부들 일반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일부 방면에서는 이러한 원칙을 적용하기가 어려웠다. 사무직에 종사하면서 당의 활동에 대하여 딱히 관심을 보여 주지 않은 당원들은 그들이 직무를 수행하면서 입증한 사회주의에 대한 충성심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추방되곤 했다. 중앙위원회는 이에 반대했고, 그렇게 추방된 이들로부터 탄원이 접수되면 그러한 부당한 조치들을 시정했다. 1937년 10월 돈바스(Donbas)에서 온 기술 간부들을 위한 환영식에서 쓰딸린은 모든 간부들을 문제 삼는 사람들에 반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진술했다. 쓰딸린에 따르면, 쏘련의 새로운 기술자들과 경제전문가들은 노동자계급 출신이며, 인민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내무인민위원회와 권력 투쟁

 

경찰은 사회주의 사회의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되고, 사회주의의 법규를 준수해야만 했다. 보안경찰의 활동은 중요해서 내전에서 국가를 구했지만, 그 권력은 노동자와 농민의 당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앙위원회 위원 예죠프를 정점으로 한, 내무인민위원회 내의 일부 세력은 누가 반혁명분자이며 적의 특징은 무엇인지를 그들 스스로 결정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이웃이나 직장에서 부패한 관료 또는 배신자들과 교제했던 사람들까지 모두 추방할 기세였다. 명백히 이는 보안경찰이 아니라 중앙위원회가 결정해야 할 정치적인 문제였다. 예죠프가 강하게 비판을 받은 것은, 그가 때때로 과도하게 반역자들을 추적하도록, 즉 무고한 사람들까지 투옥하여 심한 고통을 당하도록 내무인민위원회를 이끌었기 때문이었다.

 

중앙위원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사회와 언론에는 내무인민위원회와 예죠프의 행동들을 찬양하는 경향이 있었다. 쓰딸린 자신은 이러한 찬양에 반대했다. 1937년 12월 내무인민위원회의 창립 20주년을 맞아 보안경찰을 위한 공개행사가 볼쇼이 극장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는데, 쓰딸린은 불참했다. 내무인민위원회의 행사는 거부했지만, 마치 시위라도 하듯이 그날 저녁 볼쇼이 극장에서 열린 음악회에 참석했다. 쓰딸린의 불참은 그것을, 그가 영웅 조종사들이나 극지(極地) 연구원들, 꼴호즈 여성들과의 모임에서부터 공장 지도자들이나 자신의 선거구 유권자들과의 모임에 이르기까지 모든 모임에 자주 나타났다는 사실과 관련지어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부하린-르이꼬프의 반역 재판, 1938년 3월 2일-13일

 

21명의 거물급 인물들이 대역죄로 재판에 회부된다는 사실이 1938년 2월 27일에 언론에 공식 발표되었다. 그들은 쏘련 정부를 무너뜨리고 국가를 자본주의 사회로 되돌리기 위해 “우익과 뜨로츠끼파 블록(Bloc of the Rights and Troskyites)”을 구성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파괴행위, 테러, 나찌 독일이나 일본ㆍ영국과의 협력,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정부의 주요 위원들의 암살 기도, 끼로프 암살 연루, 작가 막심 고리끼(Maxim Gorky)와 그의 아들 막심 뻬쉬꼬프(Maxim Peshkov), 보안경찰 의장 멘쥔스끼(Menzhin-sky)와 정치국원 꾸이브이쉐프(Kuibyshev) 암살 등도 이 조직의 활동 중 일부였다.

 

 

유죄를 시인하다

 

피고인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중앙위원회 전 위원 부하린과 르이꼬프, 그리고 전 보안경찰 총수 야고다로서, 그들은 사회에서 정치적 영향력과 권력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다른 피고인들 중 다수도 쏘련의 사회주의 건설에 지배력을 가진 관리들이었다. 이 재판에 관해서 수많은 저서와 기사들이 나왔는데, 그 거의 모두가 부하린과 그의 동료들이 유죄임을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피고인들이 기소된 사실에 대하여 유죄임을 인정했다. 재판의 신뢰성과 공정성에 대한 증언은, 다른 누구보다도 우선, 재판이 있을 때마다 매일 참관했던 당시 모스끄바 주재 미국 대사 조셉 데이비스가 제공하고 있다.

 

 

파시즘에 대한 경계

 

부하린과 르이꼬프 재판은 공개적으로 진행되었고, 쏘련 주재 외교관들과 전 세계 언론이 열심히 지켜보았다. 검사의 기소 내용과 그에 대한 피고인들의 답변 및 방어권과 자유발언권에 대하여 아는 것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중요하다.

 

계속해서 우리는 1938년 쏘련에서 프랑스어와 영어, 독일어로 출판되었고, 스웨덴의 노동자문화출판사(Arbetarkulturs För-lag)가 ≪파시즘의 영향(På vakt mot fascismen)≫이라는 제목으로 스웨덴어로 출판한, 그 공개재판의 속기록을 고찰할 것이다. 그 공식적인 속기록을 입수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꼭 읽어볼 것을 우리는 강력히 권장한다. 우리는 우선 세 명의 피고인, 체르노프, 젤렌스끼, 이바노프 심문 내용의 일부를 다루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것인데, 이는 이를 통해 이 우익 집단의 전반적인 활동들을 보여 주고, 그러고 나서 차후에 이 우익 단체의 지도자인 부하린, 르이꼬프, 야고다에 대해서 고찰하기 위해서이다.

 

 

연구의 부재

 

이들 재판에 대한 견해들은 자본주의 대중매체에서 새로운 책들과 논문들로 몇 번이고 반복해서 공표되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단지 (콘퀘스트와 같은) 비밀경찰의 앞잡이들이나 파시스트들, 혹은 뜨로츠끼주의자들의 책과 논문들을 복제한 것들에 불과했다. 이들 재판에 대한 연구는 사실상 전무(全無)하다.

나는 웁살라 대학의 도서관에는 그 재판 속기록들의 영어판이나 프랑스어판, 독일어판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그 도시의 신문을 통해 의문을 제기했고, 그 속기록들이 소각처분되었다는 답변을 받았다. 대학 도서관 측의 얘기로는, 자료보관소의 임대료를 지불할 돈이 부족했고, 그리하여 많은 고서와 학술지들을 소각처분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역사에 관한 거의 모든 책들이 소각처분되었다. 이야말로 부르주아들이 문화를 어떻게 존중하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농업 담당 인민위원 체르노프에 대한 심문

 

재판 중에 피고인들은 일상적으로 그리고 광범하게 생산설비들을 파괴해 왔다는 끔찍한 범죄를 인정했다. 우파의 전술은 파괴행위를 자행하여 집단농장을 위한 투쟁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르이꼬프가 체르노프에게 내린 지시들 중에는 “정책의 과도함을 역설할 것, 우끄라이나 인민들의 민족감정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것, 그리고 어디에서나 이 과도함은 모스끄바 당국의 정책의 결과라고 설명할 것18) 등이 있었다! 나아가, 체르노프는 베를린의 “무역 대표부나 대사관의 요원 중에 혹시 아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규합하여 우익 조직을 만들 것”19)도 지시받았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르이꼬프는 체르노프에게, “우리가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쏘련이 패배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패배를 촉진해야 하고, 또한 마찬가지로 쏘련의 경제력과 국방력을 훼손시킴으로써 전쟁의 발발 그 자체를 촉진해야 한다”20)고 얘기했다.

 

우파는 전쟁의 패배를 위해 일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쏘련 정부를 전복하고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지원하는 대가로 우끄라이나와 벨라루씨 일부를 독일에, 그리고 태평양 연안을 일본에 할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찌 독일의 첩자

 

체르노프는 독일을 위해 일하기로 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그는 농업 및 공업의 성과에 관한 비밀정보를 정기적으로 독일 경찰에 제공했을 뿐 아니라 독일 경찰이 요구하는 파괴행위를 수행했다. 체르노프는 법정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당시 독일 정보부가 제게 내린 주요 임무는 국내 곡물을 상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증대하는 곡물 수확량과 이를 보관할 공간 사이의 불일치를 야기하기 위해서 곡물 창고의 건설을 지체시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두 가지가 달성될 수 있을 터였습니다. 첫째로는, 곡물 그 자체가 상했을 것이고, 둘째로는, 농부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곡물이 썩어가는 것을 볼 때 그들이 분노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저는 또한 곡물 창고들에 해충, 특히 옥수수 벌레를 대규모로 퍼뜨리라는 지시도 받았습니다.21)

 

체르노프는 독일을 위해 이 모든 끔찍한 파괴행위를 저질러 쏘련에 엄청난 손실을 초래했다.

 

 

농업 파괴행위

 

체르노프는 법정에서 자신의 반(反)혁명 활동의 다른 부분들에 대해서도 진술했다. “선별해 놓은 종자들을 마구 뒤섞어 곡물 수확량을 감소시키는 종자 뒤섞기”도 있었고, 경작과 관련해서는 “작물별 경작 면적을 부적절하게 계획하여, 사실상 적절한 윤작을 할 수 없도록 집단농장의 농민들을 배치할 작정”도 있었다. 농기계트랙터센터와 관련해서는, “목표는 트랙터와 콤바인, 기타 농기계들을 고장냄으로써 농기계트랙터센터의 재무(財務)를 혼란시키는 것이었다.”22)

축산과 관련해서는 “종자용 가축들을 죽여 버리고, 가축의 사망률을 높이도록 힘쓰며, 사료 자원의 개발을 저지하고, 특히 가축의 사망률을 높이기 위해서 고의로 여러 종류의 박테리아를 감염시키는 것23)이었다.

 

전국에 산재한 우익 조직원들이 체르노프의 이런 파괴행위 활동을 도왔다. 특히 그들은 동부 시베리아에 가축 전염병 치료약을 보내지 않음으로써 1936년 봄에 2만5천 마리의 말이 역병으로 죽게 했다. 인민을 위한 쏘련의 농업기구를 책임지고 있던 체르노프가 수많은 협력자들과 함께 시간을 바쳐 몰두한 것은 바로 이런 식의 활동이었다.

 

 

모스끄바 당위원회 서기, 쎈뜨로소유즈 의장 젤렌스끼24)

 

반역자의 활동에 대한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젤렌스끼는 법정에서 자신이 어떻게 짜르 시대에 돈에 매수되어 그의 공산당 동지들을 밀고하면서 비밀경찰을 위해 일했었는지를 말했다. 그는 용케 과거를 숨기고 공산당에서 계속 활동하면서 출세를 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의 첫 임무는 중앙아시아의 협동농장화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는 스미르노프로부터 “대농들, 즉 꿀락들을 보존하고,” “협동농장의 조직을 견제하고 저지하라”25)는 지시를 받았다. 목표는, “공급 업무와 관련하여 인민 내부에 불만을 야기하기 위해”, “주택 건설, 협동조합, 무역, 상품 유통 등 주민에게 가장 즉시 영향을 끼치는 경제 부문들을 와해시키는 것26)이었다. 1936년에 그들이 어떻게 “꾸르스끄 지역(Kursk Region)에서 설탕 공급을 교묘히 방해하여” “많은 상점에 2-3주 동안이나 설탕이 바닥나게”27) 했고, 젤렌스끼는 비슷한 방법으로 레닌그라드에서는 담배를, 벨라루씨에서는 빵을, 그리고 소금은 전국적으로 파괴했다고 진술했다.

 

 

인민의 목구멍과 위장을 난도질한 버터

 

우익과 뜨로츠끼파 블록이 조직한 버터 파괴행위-우익 조직은 오직 고품질의 버터만이 매우 높은 가격에 정기적으로 생산되도록 조치했다. 이는 인민 사이에서 거대한 불만을 유발했다. 인민의 불만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서, 우익 조직 요원들이 버터에 못과 유리를 섞어서 “우리 인민의 목구멍과 위장을 난도질했던” 것이다. 젤렌스끼에 의하면, “1936년에는 자동차 50대 분량의 달걀을 썩도록 방치해” 모스끄바에서 달걀이 동나게 했다. “가능한 곳은 어디든 파괴한다”28)는 것이 신조였다.

 

 

쿠데타에 호의적인 영국 노동당

 

젤렌스끼는 또한 법정에서 “물품들을 잘못된 지역으로 혹은 잘못된 시기에 발송함으로써 그 보급을 동결시키는 것”도 조직했다고도 진술했다. 이외에도 젤렌스끼의 반(反)혁명 활동은 거대 조직 쎈뜨로소유즈의 자금을 횡령하고, 또 전국의 쎈뜨로소유즈 지부들을 비밀리에 반혁명분자들을 조직하는 본부로 이용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젤렌스끼는 또한 쎈뜨로소유즈의 의장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영국 노동당과 접촉해, 쏘련에서 우익 쿠데타가 일어날 경우 지원을 요청했다. 노동당은 반혁명 쿠데타를 환영했고, 그 실현을 위한 지지를 보냈다.

 

 

북 까프까즈 당의 제2서기, 이바노프29)

 

체르노프와 젤렌스끼의 법정 진술들은 쏘련의 근로인민에 대한 끔찍한 범죄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부하린과 르이꼬프가 이끄는 조직이 저지른 온갖 범죄의 단지 일부에 불과하다. 이바노프에 따르면 부하린은 “제재소들은 이권으로서 영국에 넘겨져야 하고, 쏘련 정권이 지은 새로운 제재소들도 짜르[제정 러시아-역자]의 채무에 대한 변제로서 양도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부하린은 1934년 이후 줄곧,

 

우리는 이미 실질적으로 변제하기 시작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한편에서는 지지를 잃지 않도록,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신뢰를 잃지 않도록 영국의 부르주아지에게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부하린의 이런 지시들에 따라서, “가장 값비싼 목재를 싼 가격에 팔아넘겼”다. “이는 외화로 수백만 루블의 손실을 쏘련에 끼친 것을 의미했”다.30)

 

 

북 까프까즈에서의 테러

 

이바노프는 또한 부하린으로부터 북 까프까즈에 테러집단을 양성하라는 임무를 받았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끼로프 암살 후, 부하린은 이바노프에게, “단발적인 테러 활동은 어떠한 성과도 낳지 못하므로 대규모 테러 활동을 조직해야 하고, 그때에야 우리는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말했다. 이바노프에 의하면, “그의 노선은 당 지도부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바노프의 테러 집단은, “무력간섭 때에 아르한겔스끄(Arkhangelsk)와 국가 주요 지점의 간선 통신망을 절단하고, 그리하여 영국이 이 목재 생산지와 가장 중요한 항구를 장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31) 아르한겔스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바노프의 테러 집단은 또한 목재 부족을 가중시키기 위해서 북 까프까즈에서 “불량 장비를 공급하고, 기계센터를 망가뜨리며, 수로를 통한 목재수송을 방해하면서 목재 산업의 기술적 재정비를 막는” 임업 파괴행위도 조직했고, “제재업의 기술적 재정비를 방해하고, 특히 셀룰로즈 및 제지 산업의 자본설비 확충을 저지하여 전국적인 종이 배급 부족 사태를 유발했는데, 공책의 공급을 가로막고, 그리하여 대중의 불만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문화혁명에 타격을 가하려는 것이 그 목표였다.”32)

 

 

쿠데타 계획

 

뜨로츠끼가 강화조약의 서명을 거부한 결과 독일은 거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계속 러시아로 진격해 들어왔다. 레닌은 중앙위원회에서의 논쟁 끝에 가까스로 뜨로츠끼와 부하린을 고립시키고, 강화조약에 동의하도록 중앙위원회를 설득했다. 그러나 반대파는 이 결정, 즉 레닌의 정책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대신에 쿠데타를 준비하였다. 모든 증인들이 법정에서, 부하린파와 뜨로츠끼파 집단 및 좌익사회혁명당의 음모는 레닌과 쓰딸린, 스베르들로프의 체포뿐만 아니라 정부의 전복도 준비했다고 진술했다. 게다가 이들 집단은, 증인 야꼬블레바가 명확히 진술한 것처럼, “그리고 만약 투쟁이 더욱 격렬해진다면, 우리는 그들을 죽여 없애는 것도 망설여서는 안 된다”33)는 데에 동의했다.

 

 

야고다와 막심 고리끼 암살

 

보안경찰인 연방국가정치보안부(OGPU)의 전임 의장 야고다에 대한 심문에서는 끔찍한 범죄가 드러났다. 야고다는 보안경찰 OGPU(내무인민위원회의 전신)의 부의장이었고, 그런 연유로 그는 특히 우익 조직이 발각되거나 체포되지 않도록 보호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우익 조직의 인물들을 지도적인 지위에 임명할 수도 있었다. 야고다는 자신은 거액의 돈을 훔쳐 그것을 뜨로츠끼로 하여금 임의로 사용하게 했고, 끼로프 암살을 모의했던 공범이었다고도 자백했다. 또한 막심 고리끼와 그의 아들 막심 뻬쉬꼬프, 정치국원 꾸이브이쉐프, 그리고 자신의 직속상관인 OGPU 의장 멘쥔스끼를 살해하도록 강요했다.

 

 

뜨로츠끼 대 고리끼

 

고리끼는 뜨로츠끼를 정치적인 모험가로 분류하고 그와의 관계를 강하게 끊었다. 고리끼는 사회주의 건설을 강하게 지지하였고, 쓰딸린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여러 반역자들이 고리끼를 만나서 그의 동의를 구하고자 했지만, 어느 누구도 이러한 상황을 바꿀 수가 없었다. 고리끼는 반혁명에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는 유럽의 많은 국가들의 지식인들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쿠데타가 일어나면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반혁명분자들을 비난할 터였다. 우익과 뜨로츠끼파 본부는 고리끼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뜨로츠끼의 요구였다.

 

법정에서 고리끼의 비서 끄류치꼬프는, 자신은 야고다로부터 고리끼의 아들 막심 뻬쉬꼬프를 죽여 고리끼를 절망에 빠진 무해한 노인으로 만들라는 임무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끄류치꼬프는 뻬쉬꼬프를 부추겨 야고다에게 받은 와인을 밤낮으로 마시게 했다. 점차 몸이 허약해져 병에 걸리게 되었다. 의사인 레빈과 비노그라도프가 뻬쉬꼬프를 진찰하고 약을 처방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약들이 그의 병세를 악화시켜 마침내 1934년 5월에 그를 죽게 했다. 고리끼는 비탄에 잠겼지만, 계속 적극적으로 혁명과 사회주의를 옹호했다. 끄류치꼬프의 다음 임무는 의사들이 고리끼에게 약을 처방할 이유가 생기도록 지켜보며 고리끼의 건강을 잠식하는 것이었다. 고리끼가 감기에 걸리도록 하는 것이었다. 여러 번의 실패 끝에 고리끼가 병에 걸리게 만들 기회가 찾아왔다. 손자는 독감을 앓고 있었고, 그를 무척 사랑하던 고리끼도 곧 전염되게 상황을 만들었다. 고리끼는 1936년 5월 31일에 앓아누웠다. 엉뚱한 치료로 고리끼의 병은 폐렴으로 전이되었다. 의사들은 법정에서 자신들이 고리끼에게 가한 치료에 대해서 회한에 찬 진술을 했다. 고리끼는 1936년 6월 18일에 숨졌다.

 

 

더 많은 암살

 

정치국원 꾸이브이쉐프와 OGPU 의장 멘쥔스끼도 이 음모의 희생자들이었다. 혼란과 간부 부족을 야기하기 위해서 우익 본부는 야고다가 중앙위원회의 지도적 인물들을 가능한 한 많이 죽이길 원했다. 심장이 약했던 멘쥔스끼는 심장운동에 해를 끼치는 약을 복용하고 숨졌다. 그리고 정치국원 꾸이브이쉐프에게도 심장병은 고의적으로 무시되었다. 의사들은 그에게 엉뚱한 약을 투여했다. 정치국원인 꾸이브이쉐프는 제1차 및 제2차 5개년 계획의 배후에서 활약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몰로또프와 더불어 그는 제1차 5개년 계획을 총괄하고 제2차 계획을 제안한 1932년 쏘련공산당(CPSU)의 제17차 대회의 연사 중의 한 사람이었다.

 

 

부하린-르이꼬프 반역 재판, 요약

 

부하린-르이꼬프 반역 재판의 모든 피고인들은 재판부 앞에서 자신들의 범죄 행위들을 자백했고, 모든 것이 어떻게 합의되었고 실행되었는지 말했다. 21명의 피고인들이 전적으로 자유롭게 자신들의 사건을 인정하고 심지어 자신들의 유죄를 부인하기도 했던 그 재판에서는 수천 가지의 사실이 밝혀졌다. 사건들의 전말에 대한 새로운 자료들이 제시되기도 했고, 어떤 피고들은 자신이 음모를 꾸민 주요 인물들에 의해 오도되었음을 느끼고 일어나 이를 명확히 밝히기도 했다.

 

 

모범적인 검사

 

쏘련의 최고위 연방 검사 브이쉰스끼는 허위 주장을 그칠 줄 모르는 부르주아 언론의 중상모략에 시달려 왔다. 경찰의 앞잡이 콘퀘스트에서부터 스웨덴의 그 비슷한 자들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모든 위조자들은 그 재판에서의 브이쉰스끼의 역할과 행동에 관하여 수많은 공상소설을 써 댔다. 그러나 진실은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법정의 속기록을 읽어 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브이쉰스끼 검사는 강력한 증거를 제시했고, 그 때문에 피고인들은 진실을 얘기하는 수밖에는 다른 어떤 여지도 거의 없었다. 바로 이것이 역사의 위조자들을 완전히 미치게 만들고 있다. 브이쉰스끼는 사건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고 어떤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는 피고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연루된 것들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고, 세세한 내용을 전부 드러내게 하였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브이쉰스끼 검사는 피고인들에게 정중한 태도를 취했다. 브이쉰스끼는 검사로서의 자신의 직무를 모범적으로 수행했고, 피고인들의 설명으로부터 정확한 결론을 이끌어 냈다.

 

 

러시아의 매국노들은 자본주의의 영웅들이다

 

그 재판의 속기록을 읽어보면, 이것이야말로 반역자들과 간첩들, 살인자들에 대한 아주 정당한 판결이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부 저술가들은 사형을, 즉 18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을 비난한다. 60년보다도 더 전에는 사형은 전 세계적으로 대역죄에 적용되는 통상적인 형벌이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사형은, 역사의 위조자들이 제기하는 진정한 문제가 아니라, 단지 오늘날 사람들로 하여금 1930년대의 그 재판들을 비난하게 하려는 구실일 뿐이다. 쏘련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제기하는 문제는, 그 재판은 광대극이었으며, 정부 반대파를, 즉 그 비판가들에 따르면 일단의 사상가들, 철학가들, 시인들, 세계 개혁가들 등이었던 반대파를 제거하는 것이 그 재판의 목표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 위조자들의 영웅은, 쏘련의 국가 권력을 잡기 위해 나찌 독일이나 파쇼 일본과 동맹했던 최악의 범죄자들 집단이다. 그들은 막심 고리끼와 끼로프를 죽인 살인자들이며, 문화혁명을 저지하기 위하여 종이 공급을 방해하여 쏘련의 학생들에게 공책을 공급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 인물들이고, 공장과 광산, 기차들을 파괴한 자들이고, 또한 버터에 못과 유리를 넣어 인민의 목구멍과 위장을 갈기갈기 찢어지게 만든다든지, 가축 역병을 퍼뜨려 수만 마리의 말과 가축을 죽이는 등 수천 명의 노동자들을 주저 없이 살해한 자들이다. 러시아의 매국노들이자 나찌의 협력자들인 그들이 바로 자본주의 대중 매체의 우상이자 스웨덴 우익의 영웅들이다.

 

 

부하린-르이꼬프 재판과 조셉 데이비스 대사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매일 온종일 법정을 지켜본 한 사람은 당시 미국 대사 조셉 데이비스였다. 그는 미국 정부를 위하여 전체 재판과정을 면밀하게 파악하고, 피고인들을 둘러싼 상황들과 그 재판의 신뢰성에 관해 보고해야 했던 것이다. 나는 조셉 데이비스의 저서 ≪모스끄바에서의 임무≫로부터 인용한다. 첫 번째 인용문은 데이비스가 1938년 3월 8일에 그의 딸 엠렌(Emlen)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그의 딸은 당시에는 미국에 있었지만, 그전에는 가족들과 함께 모스끄바에서 살았었다.

 

 

부하린 반역 재판에 대하여
1938년 3월 8일

 

지난주에 나는 매일 부하린 반역 재판을 방청해 왔다. 재판 과정에서 인간 본성의 모든 근본적인 약점들과 결점들이 ―최악으로는 개인적인 야망들이― 드러났다. 쏘련 정부를 전복시키려던, 거의 성공할 뻔했던 음모의 윤곽이 밝혀지고 있다. 그들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건대, 1936년 11월 초에는 이미 그 다음해 5월 중에 뚜하체프스끼를 수괴로 하여 쿠데타를 감행하려는 음모가 있었던 것 같구나. 분명히 그 당시는 쿠데타가 실제로 실행되느냐 마느냐 하는 아슬아슬한 상태였구나. 하지만 쏘련 정부는 아주 강력하고 신속하게 움직였다. 붉은 군대의 장군들이 총살당했고, 당의 모든 조직은 숙청되어 완전히 정화되었다. 그러고 나서 아주 소수의 최고위 인사들이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의 바이러스에 심각하게 감염되었으며, 실제로 독일 및 일본의 첩보부에 부역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쏘련 정부가 현재 외국인들에게 공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도, 즉 여러 외국 영사관을 폐쇄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정말 솔직히 말해서, 지금 법정에서 폭로되고 있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쏘련 정부가 과잉 반응한다고 비난할 수만은 없구나.

 

 

반역 재판이
러시아 내부의 히틀러의 제5열을 제거했다.
 

조셉 데이비스는 그의 저서 <모스끄바에서의 임무>에서 쏘련 내부의 제5열의 활동을 다루고 있다. 제5열은 외부의 적을 위해 활동하는 반역자들에게 주어진 이름이다.

 

조셉 데이비스 대사:

러시아 내부의 제5열

― 사후(事後) 1941년에야 깨달은 연구

 

(주: 이것은 1941년 여름에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한 이후에 집필되었지만, 여기에 삽입한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이곳이야말로 그 반역 재판이 러시아 내부의 히틀러의 제5열을 어떻게 격파했는지를 보여 주는 곳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 J. E. 데이비스.)

 

쏘련 정부는 당시 이미 독일의 고위 군부 및 정치 지휘부의 계획과, 러시아에 대한 독일의 공격을 예비하여 러시아에서 수행 중이던 ‘내부 공작’을 예리하게 꿰뚫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이들 활동이 존재한다는 것을 쏘련 정부가 믿었으며, 매우 놀라서 그들을 강력하게 분쇄해 나갔음이 명백했다. 독일의 침략이 시작된 1941년에는 이미 그동안 조직된 모든 제5열을 일소했다…

 

당시에는 그토록 폭력적으로 보였고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던 이들 모든 재판과 숙청, 청산 행위들은 지금 보면 내부로부터의 혁명뿐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공격으로부터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스딸린 정부의 강력하고 단호한 노력의 일환이었음이 명백하다. 그들은 국내의 모든 반역적인 요소들을 철저하게 일소해 갔다. 모든 의혹은 정부에 유리하게 해결되었다.

 

데이비스 대사의 평가는 여느 때보다 오늘날에 더 중요하다. 그것은 숙청에 관한 문제를 올바른 관점에서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부르주아 역사가들이 전혀 다루지 않았던 다른 문제들도 또한 제기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나찌가, 영국군의 도움까지 받았던 군사 강국 프랑스를 쳐부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두 번의 세계대전 사이에 있었던 프랑스 상층 계급의 자국 및 기타 문제들에 대한 반역행위들은 설명이 필요한 문제들이다.

 

 

몇 가지 결론들

 

이 글의 앞부분에서 언급한, 1958년에 출간된 멀 페인쏘드의 ≪쏘련 통치 하의 스몰렌스끄≫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로써 우리는, 페인쏘드의 이 책은 독자들을 심각하게 오도하고 있으며, 실은 역사적 사건들을 위조하고 있음을 입증할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이 책은 수세대에 걸쳐 쏘련 문제에 관한 지식인들의 사고를 지배해 왔으며, 로버트 콘퀘스트와 같은 비열한 경찰 앞잡이를 쏘련 문제에 관한 권위자인 것처럼 돋보이도록 했다. 페인쏘드가 주장하는 대로라면 갈수록 더 그 규모가 커지도록 계획되었다는 연이은 숙청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크 게티의 ≪대숙청의 기원들≫은 명확히 보여 주고 있다. 1936년에 당원증을 교체하면서 중앙위원회가 연이은 숙청을 시작했다는 페인쏘드의 주장 역시 전혀 사실무근이다. 페인쏘드에 따르면 모든 쓰딸린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한 광대극이었다는 그 재판들은 결국 나찌 독일과 협력하던 반역자들에 대한 사법 절차였던 것으로 판명난다.

사실 1930년대에 쏘련에서 벌어진 정치적 운동은 당과 사회 내 관료들의 권력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였다. 모든 것들이 훌륭하거나 완벽하지는 못했지만, 그 투쟁은 쏘련이 사회주의적 생산을 발전시키고, 나찌의 침략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었다. 아크 게티 교수의 ≪대숙청의 기원들≫의 결론부를 인용해 보자.

 

그 증언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숙청기’라고 여기는― 예죠프시치나(Ezhovshcina)*34)가 재정의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그것은 경직된 관료주의가 반대파들을 짓밟고 급진적인 고참 혁명가들을 몰살시킨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실은 그 정반대였을 수도 있다. 예죠프시치나는 오히려 관료주의에 대한 급진적이고 심지어는 병적인 반발이었다고 주장해도 결코 증거와 상반되지 않는다. 특권적 관료들은 의지주의(Voluntarism)와 혁명적인 엄격주의라는 혼돈의 물결에 쓸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퇴출되었다.35)

 

 

맺음말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조셉 데이비스 대사와 같은 인물을 찾기 어렵다. 오늘날 양심적인 부르주아 지식인을 찾기 위해서는 망원경과 같은 커다란 돋보기가 필요하다. 부르주아 대중매체는 콘퀘스트나 스코테, 알마르크, 엥글룬드, 그리고 대학 교수직이나 신문의 정치면 편집자직, 그리고 특히 소위 공산주의의 범죄를 조사한다는 직을 채우고 있는, 탐욕스럽고 파렴치한 ‘저술가들’ 같은 어릿광대들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 오늘날의 부르주아 지식인들은 특히 신용카드를 높이 휘두르며 자신들의 주인의 목소리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는 지적 난쟁이들을 연상시킨다. 정직한 지식인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들은 거의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고, 거의 언제나 수세에 몰려 있으며, 협잡꾼들을 지목하여 그들을 사실 그대로 역사 위조자들이라고 부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부 보다 대담하고 시민적 용기를 가진 사람들은 대중에게 그 논쟁에 대한 다른 해석을 제공할 수 있었고, 그 논쟁을 적절한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게다가, ‘시장 권력’에 대한 지식인들의 순종은 노동자들의 또 다른 멍에가 되어 있다. 착취와 지적 둔화로부터 노동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계급의 우쭐대는 어릿광대들과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를 아는 것은 우리의 현재를 이해하고 부르주아 계급의 거짓들을 깨부수는 데에 중요하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근로인민에게 역사를 알려 주고자 하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오직 우리 공산주의자들뿐이다. 우리는 이 임무를 저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나가며

 

진실은 강고한 계급투쟁의 무기~!!!!

 노사과연

 


1) Report of Court Proceedings (재판 보고서), 1937, p. 43.

 

2) J. Arch Getty & Oleg V. Naumov, The Road to Terror―Stalin and the Self-Destruction of the Bolsheviks, 1932-1939, New Haven, 1999, p. 586.

 

3) J. V. Stalin, Selected Works, Tirana, 1979, pp. 421-455.

 

4) ibid., pp. 423-424.

5) ibid., p. 424.

6) ibid., p. 440.

7) ibid., p. 443.

8) ibid., p. 444.

9) ibid., p. 446.

10) ibid., p. 448.

11) ibid., p. 452.

12) ibid., p. 454.

13) ibid., p. 455.

14) Getty, 1985, p. 151.

15) ibid.

16) Davies, 1941, p. 152.

17)  Getty, 1985, p. 176.

 

18) Report of Court Proceedings in the Case of the Anti-Soviet “Bloc of Rights and Trotskyites”, Moscow, 1938, p. 91.

 

19) ibid., p. 98.

20) ibid., p. 106.

21) ibid., p. 102.

22) ibid.

23) ibid.

24) ibid., p. 322.

25) ibid., p. 326.

26)26) ibid., pp. 327-328.

27) ibid., p. 328.

28) ibid., pp. 331-332.

29) ibid., p. 118.

30) ibid., pp. 122-123.

31) ibid., p. 123.

32) ibid., p. 124.

33) ibid., p. 440.

 

34)* [역주] 예죠프시치나(Ezhovshcina). 부르주아 역사가나 언론들은, 1936–38년에 내무인민위원 예죠프에 의해 대숙청이 자행되었다고 주장하며, 이 시기를 예죠프의 시대, 즉 ‘예죠프시치나’라고 부른다. 주로 ‘공포의 시기’를 일컫는 대명사처럼 쓰인다.

 

35) Getty, 1985, p.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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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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