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특집: 우크라이나 전쟁] 우크라이나 대기근과 쏘련 농업 집산화는 러시아 도시 노동자가 얻을 이익을 위한 농민 착취였는가

― 쉴라 피츠패트릭의 ≪러시아혁명 1917-1938≫을 중심으로

 

전우재 | 회원

 

 

1. 들어가며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는 전쟁이 길어지고 있다. 전쟁이 지지부진한 사이, 전쟁을 분석하는 여러 기사가 게시되었다. 그 기사 중에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서 일어난 역사 사건을 분석하는 기사들이 많았다. 특히 대기근과 관련한 기사들이 많았다. 이들 기사들은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대기근이 인재라고 보았다.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던 재난인데, 그러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대기근이 인재라는 주장은 농업 집산화가 잘못되었다는 비판에 근거한다. 쏘련에서 발생한 농업 집산화를 묘사하는 방향은, 대개 착취받는 지배계급이 따로 존재한다는 식으로 묘사된다. 주로 당 관료들의 이익을 위해서 농민들이 착취를 당했다고 주장되나, 이는 근거가 매우 빈약한 비판으로, 쏘련의 당 관료들은 생산 수단을 처분하거나 매각하거나 상속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근래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또한 쏘련 관료들이 관료주의적 성격을 보인 건 쓰딸린 시대 이후라는 주장이 부르주아 학계에서도 많이 존재하는 까닭으로, 당 관료들을 위해 농민들이 학살당했다는 주장이 설득력과 근거를 갖춘 경우는 잘 찾아보기 어려웠다.

 

근래에 새로 등장한 주장은, 러시아 도시 노동자와 같은 쏘련의 일부 집단을 부양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와 쏘련 일대의 농민들이 착취당했고, 그 과정에서 인재인 대기근이 발생했다는 주장이다. 러시아 민족, 특히 러시아 도시 노동자를 위해 타 쏘비에트 공화국 농민을 착취했다는 주장은 쉬이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주장에 근거한다.

 

1. 쏘련의 농업 집산화는 러시아 도시 노동자를 부양하기 위함이었다. 농업 집산화로 인한 혜택은 노동자만이 누리고 농민은 누릴 수 없었다.

2. 쏘련의 농업 집산화는 폭력적인 과정을 통해 진행되었다. 소생산자의 자발성을 인정하지 않고 집산화가 진행되었다. 폭력적인 농업 집산화로 인해 농민들이 실망하자, 곡물을 불태우는 등 저항을 진행하였고, 그 까닭으로 대기근이 발생하였다.

3. 쏘련의 농업 집산화는 폭력적인 과정을 통해 진행되었다. 타 쏘비에트 구성국은 러시아 쏘비에트 공화국을 부양할 까닭으로, 식민지 속주와 같은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 증거로,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예시로 들 수 있다. 밀 생산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우크라이나가 집산화에 반발하자, 기근이 발생한 우크라이나에 구호 물품을 보내지 않은 것을 사례로 들 수 있다.

 

위 질문과 관련한 기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크라이나로선 러시아에 씻지 못할 원한을 품을 만한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90년 전 우크라이나인 수백만 명이 대기근 속에 죽어간 ‘홀로도모르’(Holodomor)가 바로 그것이다. … 통계가 부실했던 시절에 일어난 일인데다 이 사건을 ‘반공산주의 선동’이라면서 한사코 부인한 소련의 통치가 60년 가까이 계속되는 동안 많은 자료가 사라지거나 왜곡됐기 때문에 아마도 정확한 피해 규모는 영원히 밝혀지기 어려울 것이다. … 우크라이나 민족을 말살하려는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악마적 기획의 결과라는 인식 때문 … 항의하는 주민들에게는 악명 높은 소련 비밀경찰의 체포, 고문, 처형이 뒤따랐다. 홀로도모르를 연구하는 현대의 역사학자들 가운데 다수는 이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는 아닐지라도 상당 부분이 막 싹 트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억누르려는 스탈린의 의도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대체로 인정한다.[1]추왕훈, “[뉴스 뒤 역사] 우크라이나가 품은 원한의 뿌리 홀로도모르”, ≪연합뉴스≫, 2022. 2. 15. <https://www.yna.co.kr/view/AKR20220208157500081>

 

… 우크라이나는 소련 초창기에도 연방 전체를 먹여살리는 곡창지대였다. 1929년 스탈린은 그런 우크라이나에 농업집단화 명령을 내렸고, 우크라이나 농민들은 집단농장으로 이주하거나 땅과 생산물, 농기구 등을 내놔야 했다. 당연히 반발이 클 수밖에 없었고 곡물 생산도 급감했다. 스탈린은 본때를 보이겠다는 식으로 농업 수탈을 강화했고, 밭을 갈 소와 파종할 씨앗까지 압수했다. 반발하는 농장이나 마을은 통째로 블랙리스트에 올려 식량공급을 차단했고, 체포-투옥, 강제이주, 처형 등으로 탄압했다. 이로 인해 1932-33년 우크라이나에서 3백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2]이현식, “[뉴스쉽] 러시아는 왜 학살을 반복하는가…우크라이나 ‘절멸’로 돌아서는 푸틴”, SBS, 2022. 4. 9. … Continue reading

 

위 기사의 내용을 요약하면 앞서 번호로 정리한 내용과 같고, 이 두 기사가 말하는 바는 동일하다. 러시아는 예전부터 우크라이나를 착취하는 식민 통치와 같은 행동을 했는데, 그것이 현재까지 이어져와 결국 전쟁을 불러왔다는 맥락이다. 이 기사는 단순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서 발생한 역사 사건을 분석함에 지나지 않는다. 20세기 사회주의 진영을 비판하는 기사이기도 하다. 기사는 쏘련에서 발생한 농업 집산화는 식민 통치로 보고 있다. 기사가 주장하는 바를 따라가면 쏘련은 집산화를 수월하게 진행하기 위해 대기근을 조장하거나, 구호 물품을 보내지도 않는 비인간적인 정권이 된다.

 

농업 집산화는 도시 노동자 부양을 위해서인가?

 

사회주의는 무척 풍부한 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으나, 사적 자본, 계급 폐지를 통해 생산력 발전을 억제하는 유기구성 고도화로 인한 실업이나 무정부적 생산, 앞의 두 요소를 불러오는 부와 빈곤 재생산을 타파하는 사상이라고 정의할 때, 농업 집산화가 도시 노동자만을 부양하는 사상이 될 수 있으려면 농업 집산화와 사회주의 발전으로 인한 혜택이 오로지 도시 노동자에게만 주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계급 폐지와 생산력 발전으로 인한 생활 수준 향상이 농민에게는 주어지지 않고, 노동자에게만 주어진다면 농업 집산화는 농민을 착취한 몫으로 도시 노동자를 부양하는 정책이 된다.

 

농민에게 혜택이 주어지지 않는지 여부를 중점으로 농업 집산화 정책을 살펴보는데, 이를 위해 당시 농민 정책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던 레닌의 저서와, 실제 정책을 진행하여 생겨난 여러 문제들을 문건으로 언급한 쓰딸린을 살펴보고, 당시 당내에서 있었던 토론을 살펴보면 그 여부를 알 수 있겠다.

 

다시 말해, 농업 집산화가 농민을 착취하여 도시 노동자를 부양하기 위한 정책이라는 가설이 검증되기 위해서는 농업 집산화가 농민이나 여타 무산계급에게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지 않는 정책이라는 점이 입증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농업 집산화가 가진 여러 성격 중 하나인, 중빈농 연대를 통한 부농 포위가 당시 쏘련 대다수 농민에게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이 입증되어야 하는데, 부농들은 농촌에서 생산되는 곡물 유통 대부분을 담당하거나 도시에서 생산되는 공산품을 마음껏 구매하는 등 도농 생산력 발전 수혜를 오롯이 독점하고 있었으므로, 부농을 타격하지 않는 정책이 농민을 위하는 정책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농업 집산화가 농민을 착취하고 도시 노동자만을 부양하기 위한 정책이라는 점은 설득력이 약하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집산화가 폭력적으로 진행되는 등 소생산자를 설득하여 자발성을 이끌어내는 능동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한 잘못은 존재한다는 점이다.

 

 

2. 이론적 배경

 

농업 집산화는 도시 노동자를 부양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을 비판하기 위해서, 먼저 농업 집산화 정책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부분을 알아보아야 한다. 먼저, 농업 집산화는 부농을 배제하며 중농과 빈농 사이에 기반을 구축하며, 대규모 사회주의 농업 생산을 진행하기 위해 협동조합을 조직하는 등의 행위를 말한다. 농업 집산화 정책이 진행된 연유로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1. 생산력 향상

2. 부농 포위

3. 높은 단계 사회주의 진입

 

위 세 가지는 서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상황에 따라서는 한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생산력 향상이나 부농 포위 모두가 높은 단계 사회주의로 진입하는 과정이자 방법이기 때문이다. 농업 집산화가 시작된 1920-30년대 상황을 구체적으로 적용하여 각각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생산력 향상이다. 농업 집산화는 동일 생산 수단 내에서 협업을 가능하게 하여 생산력을 증대하게끔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소작 체제에서 나타나는 혼잡한 토지 구획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 동일 생산 수단 내에서 협업이 가능하다면, 더 많은 일을 더 빨리 할 수 있다. 연탄 나누기 행사를 생각해 보자. 똑같이 많은 사람들이 연탄을 돌리더라도, 한 명이 옮긴 연탄을 여러 명분으로 곱하는 것보다, 여러 명이 한꺼번에 일한 분이 더 많거나, 한정된 시간 안에 더 빨리 해낼 수 있다.

 

… 예컨대, 벽돌공들이 열을 지어 벽돌을 비계 아래에서 그 꼭대기까지 운반한다면, 그들 각자는 동일한 일을 하지만, 개개의 작업들은, 하나의 총작업의 연속적인 부분들, 즉 노동과정에서 어느 벽돌이고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특수한 국면들을 형성하고, 그럼으로써 총노동자들의 가령 24개의 손은, 비계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각 개별 노동자의 2개 손보다 벽돌을 빠르게 운반한다. 노동대상이 동일한 공간을 보다 짧은 시간에 통과하는 것이다.[3]칼 맑스, ≪자본론≫ 제1권 제3분책, 채만수 역, 노사과연, 2019, pp. 542-543.

 

협업을 통해서도 생산력이 증대되지만, 경지 정리를 통해서도 생산력이 증대된다.[4]리오 휴버먼,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장상환 역, 책벌레, 2000, p. 17. 과거 봉건 시대에는 경작지가 중구난방이었다. 동네 어귀에 흐트러져 있었고, 다른 사람의 경작지와 내 경작지가 붙어 있는 경우는 많았지만 내 경작지와 내 경작지가 붙어있는 경우는 적었다. 경작지가 적으니 트랙터와 같은 장비를 쓸 수 없고, 고장이 나기 쉽다. 최신 농업 장비를 사용하기 좋게 농지를 새로이 구획한다면 좋겠지만, 소생산자들이 각각의 땅에서 경작을 진행하고 있거나 지주가 알박기를 하듯 경작지를 소유하고 있다면 새로이 구획하기 어렵다. 농업 집산화를 통해 경지 정리가 가능해진다면, 트랙터를 포함한 여러 농업 장비를 수월히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생산력이 증대된다.

 

둘째로 부농 포위이다. 농업 집산화는 단순히 협동농장을 만드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중농과 빈농을 연대시켜 부농을 포위해, 농촌에서 계급을 완전히 타파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농촌 현장에서 집산화를 진행하기 위해서 부농을 공격해야 했고, 농촌 현장을 떠나 높은 단계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부농을 타격해야 했다. 먼저 부농 포위와 관련한 이론적 근거를 다음 인용문을 통해 살펴보자.

 

그러나 실제로 볼셰비키는 이웃보다 더 부유해진 농민들을 극단적으로 의심했다. 볼셰비키는 종종 그런 농민들을 ‘쿨라크’로 분류하면서 잠재적 착취자나 농촌 자본가로 여겼으며 … 농민 계급 내부의 계급 분화 징후를 지켜봤다. 그것은 중농을 계급투쟁으로 뛰어들게 해서 부농에 맞서는 빈농을 지지할 기회를 잡기 위해서였다.[5]쉴라 피츠패트릭, ≪러시아혁명 1917-1938≫, 고광열 역, 사계절, 2017, p. 208.

 

대농이란 농업에서 통례로 수 명의 임금노동자를 사용하면서 다만 문화 정도가 높지 못하다는 점과 생활관습 면과 자기의 농사에서 자신의 육체적 노동을 한다는 점에 있어서만 ‘농민’이라고 말할 수 있는 농업에서의 자본주의적 기업가이다. … 농촌에서의 공산당의 모든 사업에서 주되는 주의는 반드시 이 층과의 투쟁과 이 착취자들의 사상적 및 정치적 영향 등등으로부터 농촌 주민의 다수인 피착취자와 근로자들을 해방하는 데 집중되어야 할 것이다.[6]레닌, “농업문제에 관한 테제 초안”, ≪노농동맹과 농민문제≫, 학민사, 1989, p. 157.

 

쉴라 피츠패트릭은 쏘련 공산당이 농촌에서 발생하는 계급 분화를 유심히 살펴보고, 중농을 계급 투쟁으로 뛰어들게끔 유도할 기회를 엿보았다고 분석한다. 그 근거는 레닌에 있다. 레닌은 대농(부농)을 노동 계급과 적대하는 자본가계급이라고 분석한다. 레닌은 사회주의를 계급의 폐절이라고 규정하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제시한다.

 

사회주의란 계급의 폐절이다. 계급을 폐절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지주와 자본가를 타도해야 한다. 우리는 이 부분의 과업을 수행하였다. … 계급을 폐절하기 위해서는 둘째로, 노동자와 농민 간의 차이를 없애버리며 모든 사람을 노력자로 만들어야 한다. … 이 과업은 오직 전체 사회경제의 조직적인 재건에 의해서만, 개별적, 고립적 소상품 경영으로부터 사회적 대규모 경영에로의 이행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 가장 어려운 부분의 과업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 근로자인 농민과 소유자인 농민을, 일꾼인 농민과 장사꾼인 농민을, 노력자인 농민과 투기업자인 농민을 분간하며 구별해야 한다.[7]같은 글, 같은 책, pp. 158-159.

 

지주와 자본가 또한 타도해야 하지만, 자본가적 농업을 하는 농민 또한 타도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궁극적으로는 노동자와 농민, 즉 소생산자의 경계가 사라져야 하는데, 이는 대규모 경영을 통해서 가능하다. 농민이 각각 경지에서 소규모로 경작해서는 계급이 사라지거나 다음 단계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높은 단계 사회주의 진입이다. 높은 단계 사회주의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생산력도 증대되어야 하고, 계급이 철폐되어 부농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네프 기간 내내 국가의 자본축적을 확대하기 위해 농민들의 농업 생산물을 상대적으로 싸게 사들이고 국유화 산업의 공산품에는 높은 가격을 매긴 것은 체제의 경제 철학의 일부였다. 그러나 곡물 자유시장의 존재는 국가가 정한 가격을 시장 수준에 근접하게 했다. … 그러나 1927년에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기존의 방정식은 수많은 방식으로 바뀌었다. … 게다가 시장에 나온 곡물 대부분이 러시아 농민 중 극소수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추측됐기에, 그 이익을 농민계급 전체가 아니라 체제의 적인 ‘쿨라크’가 가져갈 가능성이 높았다.[8]쉴라 피츠패트릭, 앞의 책, p. 228.

 

스탈린이 보기에 문제는 쿨라크가 곡물을 비축해놓고 소비에트 국가에 몸값처럼 배상금을 요구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곡물 가격을 올리거나 농촌에 공산품을 더 많이 공급하는 회유책은 무의미했다. 쿨라크의 요구만 급증할 것이기 때문이다. … 국가는 농민 ‘비축자’를 원래 도시의 투기꾼에게 적용하던 형법 제107조로 기소했다.[9]같은 책, p. 229.

 

토지와 같은 중요 생산 수단을 부농이 쥐고 흔든다면 높은 단계 사회주의 진입은 요원한 일이 된다. 지주들이 ‘알박기’를 한다면, 토지를 생산성 있게 구획하거나 정리할 수 없으며, 설사 생산력이 증대되어 많은 양의 농작물이 생산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 수혜는 곡물 대다수를 유통하는 부농이 차지하게 된다. 도시 노동자들이 모두를 위해 생산한 공산품도, 곡물 유통을 통해 많은 이익을 얻은 부농들이 죄다 차지하여 사용하게 된다.

 

높은 단계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생산력도 증대되어야 하고, 계급도 사라져야 한다. 특정 집단이 생산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독점한다면 높은 단계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가 없다. 임노동에서 발생하는 잉여가치가 자본가에게 전유되는 게 아니라, 사회 모두를 위해 사용되어야 필요에 따른 분배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조합적 노동수익이란 사회적 총생산물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다음의 것들이 공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 첫째로 : 소모된 생산수단을 대체하기 위한 부분. 둘째로 : 생산을 확대하기 위한 추가분. 셋째로 : 재해, 자연현상에 의한 교란 등에 대비한 예비기금 혹은 보험기금. … 총생산물의 다른 부분은 소비수단으로 이용되도록 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분배되기 전에, 이것에서 다시 다음의 것들이 제외된다 : … 첫째로 : 직접적으로 생산에 속하지 않는 일반적인 관리비용. … 둘째로 : 학교, 보건시설과 같이, 필요를 공동으로 충족시키도록 되어 있는 것. … 셋째로 : 노동 불능자들 등을 위한 기금, 요컨대, 오늘날 소위 공적 빈민구제에 속하는 것.[10]칼 맑스, “고타강령 비판”, ≪칼 맑스ㆍ프리드리히 엥엘스 공산당 선언≫, 채만수 역, 노사과연, 2022, pp. 143-144.

 

맑스는 “고타강령 비판”에서, 필요에 따른 분배를 위 인용문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사회화된 생산 시설에서 생산되는 부는 더욱 많은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 투자되어야 하고, 또한 학교, 의료와 같이 모두에게 필요한 부분을 제공하기 위해 투자되어야 한다. 부농이 존재하는 한, 이는 불가능하다. 첫째로 자본가적 농업을 통해 얻은 잉여가치를 자신들이 전유하고, 둘째로 도시 노동자들이 쏘련 인민 전반을 위해 생산한 공산품들을, 농촌 한정으로, 자신들이 전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을 만들기 때문이다.

 

위 주장을 종합한다면, 농업 집산화가 단순히 도시 노동자를 부양하기 위해 진행된 정책이라는 가설은 설득력이 약해 보인다. 농업 집산화가 진행되지 않았다면 부농은 농촌에서 강고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테고, 농업 생산력을 폭발시키거나, 공업 생산력 증대의 수혜를 농민 모두가 볼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부농을 타도하지 않았을 때, 농촌에 어떤 상황이 발생하는지 ≪인민일보≫의 일부를 살펴보자.

 

티토 일당은 집단화가 유고슬라비아에서 가치 있는 것으로 입증되지 못했다고 단언한다. 그들은 “집단화는 몰수와 동일”하며 “가능한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시골 지역에서 농노제와 빈곤을 보존하는” 길이라는 악의적인 모략을 해댄다. 그들은 농업의 발전이 “경제적 세력들의 자유경쟁에 기초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견해를 지지한다. … 시골 지역에서의 양극화는 토지 소유에 생겨난 변화에서 가장 먼저 드러났다. 전(前) 유고슬라비아 농림비서 슬라브코 코마르(Slavko Komar)는 … 전체 소농가구의 13퍼센트만을 차지하는 8헥타르 이상의 땅을 소유한 부농가구가 전체 개인소유 토지의 33퍼센트를 갖고 있었음을 인정했다. 코마르는 또한 대략 10퍼센트의 소농가구가 매년 토지를 사고판다는 점도 인정했다. … 시골 지역에서의 양극화는 또한 역축(役畜)과 농기구 소유의 커다란 불평등으로 나타난다. … 부농들은 많은 수의 쟁기와 짐수레뿐 아니라 1,300대가 넘는 트랙터와 기타 많은 농기계들을 소유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양극화는 노동자의 고용과 같은 자본주의적 착취 형태의 성장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 고리대금업자 또한 유고슬라비아 시골 지역에서 매우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이자율은 종종 연간 100퍼센트를 상회한다. 게다가 실업자들의 곤경을 이용하여 노동시장을 독점하고 그 과정에서 착취를 일삼는 자들도 있다. … 위 사실들이 보여 주듯 유고슬라비아의 시골은 착취계급의 지배를 받고 있다.[11]≪인민일보(人民日報)≫와 ≪홍기(紅旗)≫ 편집국, “유고슬라비아는 사회주의 나라인가? —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공개서한에 대한 논평(Ⅲ)”, … Continue reading

 

위 인용문은 ≪인민일보≫에서 유고슬라비아를 분석한 기사이다. 내용이 방대해 구체적인 수치와 상황을 미처 인용하지 못했으나,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쏘련과 달리 사회주의적 농업, 즉 농업 집산화를 통해 부농과 벌이는 농촌 계급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생산력 증대도 일어날 수 없었고, 임노동도 사라지지 않았고, 다음 단계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도 없었다. 이는 단순히 도시 노동자가 혜택을 받거나 받지 못하는 문제가 아니다.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농업 집산화가 진행되지 않는다면 농촌에서 극심한 양극화가 발생하게 된다.

 

이윤만을 위한 생산이 진행되는 까닭으로 억제되었던 생산력 발전과 증대의 수혜를 대중 모두가 누리는 사회주의 건설이 진행될 수 없었다. 사회 모두를 위해 쓰여야 할 잉여가치가 자본가, 지주, 자본가적 농민이 독점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연장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잉여가치를 자본가계급이 차지하고, 이윤을 위한 생산이 진행되니 응당 부와 빈곤이 확대 재생산된다.

 

 

3. 농업 집산화 이론과 그 적용

 

농업 집산화의 이론적 배경을 살펴보았다. 농업 집산화는 다음 단계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 당시 쏘련에 꼭 필요했으며, 이는 구체적으로 생산력 발전, 부농 포위와 같은 과제로 나타났다. 저 과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필요에 따른 분배가 가능한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어려웠다. 농업 집산화 자체는 농민에게 충분히 이익이 되는데, 농업 집산화가 진행된 쏘련과 농업 집산화가 진행되지 않은 유고슬라비아 사례를 비교 분석하며, 농민에게도 충분히 이익이 됨을 알 수 있었다.

 

이론적으로, 농업 집산화는 농민에게, 특히 중농과 빈농에게 이익이 된다. 농업 집산화는 분명 이익이 되지만 이는 설득 과정을 필요로 한다. 자발성, 능동성을 설득을 통해 이끌어내고 참여를 유도해야 정상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과제이다. 농업 집산화 과정을 향해 반대자들은 줬다 뺏는 못된 정책이라고 야유한다. 실제로 부농들은 가축을 죽이거나 곡물을 불태우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저항했다. 농업 집산화는 부농을 타격하기 위해 실행되었으나, 많은 농민들은 농민을 타격하기 위해 실행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농촌에서는 즉각 분노와 혼란이 일어났다. 많은 농민들은 가축을 자기 손으로 넘겨주느니 그 자리에서 도살하거나 가까운 도시로 달려가 팔았다. … 정권은 이 명백한 재앙에 두 가지 방식으로 반응했다. 첫째로 오게페우[연방국가정치보안부: 인용자 주]는 재산을 몰수당한 쿨라크나 다른 말썽쟁이들을 체포해 시베리아나 우랄, 북부 지방으로 이송시켰다. 둘째로 … 집단화된 가축 대부분(쿨라크의 가축은 제외)을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했다.[12]쉴라 피츠패트릭, 앞의 책, pp. 248-249.

 

쉴라 피츠패트릭은 1930년을 전후해 농업 집산화가 진행되었으며, 강압적인 정책이 혼란을 불러왔다고 분석한다.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두 가지 정책이 실행되었다. 혼돈을 야기하는 부농을 직접적으로 타격하고, 강압적으로 집행된 정책을 수정하여, 소생산자를 설득한다는 원칙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꼬뮨 형태에서 아르쩰 형태로 집산화를 진행했다. 아르쩰 형태는 기본적인 생산 수단인 토지는 사회화되지만 가축과 주거는 집산화되지 않는 형태를 말한다. 쓰딸린은 1930년 문건을 발표해 농업 집산화는 설득을 통해 진행되어야 하는 자발성 원칙을 강조한다.[13]J. V. Stalin, “Dizzy with Success―Concerning Questions of the Collective-Farm Movement”, Pravda, No. 60, March 2, 1930. … Continue reading 이 결과, 이듬해는 집산화율 62%, 1937년에는 93%를 달성한다.[14]쉴라 피츠패트릭, 앞의 책, p. 250.

 

… 레닌은 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올바른 당 노선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레닌은 혁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상황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즉 노동자의 광범위한 대중이 자기 자신의 경험을 통해 당의 노선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결국 시간이 필요하고, 인민대중 속에서 당의 지칠 줄 모르는 사업, 당 노선이 옳다는 것을 인민대중에게 확신시키는 지칠 줄 모르는 사업이 필요합니다. … 우리가 10월 혁명에서 승리한 것은 당 노선이 올바르다는 것과 대중이 이 노선의 올바름을 인식하는 것을 구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초인적으로” 도약하려는 반대파 영웅들은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려고도 않습니다.[15]이오씨프 쓰딸린, “[번역] 우리 당의 사회민주주의 경향에 대하여(3)”, 신재길 역, ≪정세와 노동≫ 제179호(2022년 3월), 노사과연. … Continue reading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대중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쓰딸린은 1930년 자발성 원칙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문건을 발표하지만, 1927년에도 비슷한 내용을 언급했다. 아래 인용문은 농업 정책과 관련해 쓰딸린이 좌파와 대립하며 발표한 일종의 보고서이다. 좌파들이 주장한 내용은 현실성이 없었는데, 타격해야 할 대상은 부농이지, 농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구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하는 당시 상황에서 농민을 타격한다는 정책도 현실적이지 못하고, 타인 노동을 통한 이윤 추구, 즉 임노동을 타도하는 게 최우선 과제이지, 자기 노동을 통해 상품을 생산하는 소생산자는 타도가 아니라 설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보듯, 부농을 향한 타격이 농민 일반을 위한 타격처럼 여겨지는 문제가 있었다. 이로 인해 집산화율이 도로 후퇴하기도 하였으나, 단계적인 과정을 거치는 결정이 내려지며 오류가 다소 수정되었고, 집산화율은 다시 상승하였다. 중농과 빈농을 결합시켜 부농을 고립시키는 방향이 왕도이지, 농민 일반을 타격하는 게 목적이거나 쉽게 가는 길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설득을 통해 농업 집산화에 참여하게 되었으나, 부농들은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이 저항은 노동자계급을 향하는 저항으로, 부농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이 벌이는 계급 전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서방 주류학계에서는, 이 시기 일어난 사망자를 죄다 쓰딸린이 학살을 저질러 목숨을 잃었다고 평가하지만, 실제 쏘련은 과거부터 기근이 자주 발생하는 장소였고, 부농들이 사보타주를 저질러 먹을 음식이 없어졌을지언정 서두에 언급했던 기사처럼 일부러 사람을 굶겨 죽이는 정책을 진행한 경우는 없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오랜 가뭄과 기근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앤 애플바움, 역사가: 인용자 주]는 그것을 인정한다(p. 283.); 그녀는 아무도, 심지어 농부들도 가뭄을 부족의 원인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그러나 그녀의 자료에는 1932년 2월 16일 우크라이나와 몇몇 동부 지방에 87만 톤의 씨앗과 식량을 할당한 포고령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녀는 이 포고령을 언급하지 않았다.[16]Ruslan Pyrih, ed., Holodomor 1932-1933 rokiv v Ukraini: dokumenty I materialy, Kyiv, 2007, pp. 63-64. 이 포고령이 공표되었다는 사실은 지도자들이 그것을 실패의 인정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애플바움은 4월에 정치국이 우크라이나에 약간의 원조를 할당했음을 인정하지만, 스탈린은 갑자기 그가 우크라이나에 보낸 식량 원조를 철회했다고 주장한다(p. 174.). 그녀의 각주에는 이 행동에 대한 증거가 없으며 다른 출처에는 단 하나의 전보나 편지조차도 없습니다. 이 주장은 거짓인 것처럼 보인다. 애플바움은 1932년 5월 15일 우크라이나가 식량 구호를 위해 650만 푸즈(10만6000t)의 곡물을 할당했다는 정치국 법령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17]Holodomor, 2007, p. 156.; Holod na Ukraine, Ochyma istorikov, movoiu dokumentiv, Kyiv, 1990, p. 162.[18]Mark Tauger, “Review of Anne Applebaum’s “Red Famine: Stalin’s War on Ukraine””, History News Network, july 1, 2018. <https://historynewsnetwork.org/article/169438>

 

위 기사는 앤 애플바움이 쓴 ≪붉은 기근≫이라는 책을 읽고 쓴 마크 타우거라는 학자의 서평이다. 앤 애플바움은 러시아 제국과 쏘련이 우크라이나를 착취했다는 주장을 이어가며, 구체적으로는 쏘련이 우크라이나를 굶겨 죽였다는 주장을 이어가는데, 정작 기근 대책으로 구호 물품이 할당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왜 그것을 언급하지 않느냐는 지적이다. 심지어, 구호 물품이 할당되긴 했지만 그것이 번복되었다고 주장하는데, 번복되었다는 증거는 앤 애플바움이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기근을 다룬 또 다른 기사를 살펴보면, 러시아에 주기적으로 기근이 발생했으며, 1930년대에 인위적으로 쏘련이 저지른 게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대기근은 인위적으로 발생된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발생한 기근과, 부농과 벌이는 계급 전쟁이 겹친 결과였다. 또한 본때를 보이기 위해 우크라이나 인민을 일부러 굶겨 죽였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닌데, 위 기사와 마찬가지로 많은 양의 구호 물품이 우크라이나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터거 교수는 기후 조건이 1932년과 1933년 기근에 주된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홀로도모르” 신화를 지지하는 자들은 1917년 볼셰비키가 집권하기 한참 전인 19세기 말까지 러시아가 주기적으로 기근에 고통받았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또한 그들은 1920년과 1921년, 1924년, 1927년과 1928년에 심각한 기근들이 있었던 사실은 외면한다. 아주 흥미롭게도, 공식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1차 자료는 1928년에서 1929년까지 아주 심각했던 기근이 주로 가뭄 같은 자연재해로 발생했으며, 우크라이나는 쏘련의 다른 지역들보다 더 많은 원조를 쏘련 정부로부터 받았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명백하게도 소련에서 우크라이나 농민들에 대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악의적인” 음모가 조작된 이론임을 명백히 입증한다”고 그로버 퍼는 저서 『거짓 유혈: 티모시 스나이더의 유혈의 땅[역자: 2021년 3월에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피에 젖은 땅: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고, 현재 3쇄나 찍힐 정도로 사회과학 서적 베스트셀러다.]에서 스탈린과 소련에 대한 모든 비난이 조작이라는 증거(Blood Lies: The Evidence that Every Accusation Against Joseph Stalin and the Soviet Union in Timothy Snyders Bloodlands Is False)』에서 언급했다.[19]예카테리나 블라노바, “홀로도모르 사기: 일어나지도 않았던 이오시프 스탈린의 범죄(번역)”, 김남기 역, 노정협, 2021. 7. 14. … Continue reading

 

 

4. 결론

 

이때까지 쏘련 농업 문제를 살펴보았다. 먼저, 쏘련에서 진행된 농업 집산화가 도시 노동자를 부양하기 위해 농민을 착취하는 정책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농업 집산화로 얻은 이익이 도시 노동자에게만 오롯이 주어진다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도시 노동자에게만 혜택이 주어지기 때문에, 농민을 착취하는 과정은 폭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위 주장이 타당성을 가지려면 농업 집산화로 인해 농민이 얻을 이익이 없거나 적어야 한다. 그러나, 농업 집산화가 가지는 두 가지 성격, 생산력 증대와 부농 포위는 빈농과 중농에게 손해를 끼치기보다는 이익을 가져다주었다고 볼 여지가 존재했다. 농업 집산화와 부농과 벌일 계급 전쟁이 발생하지 않은 유고슬라비아의 농촌에서 양극화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집산화가 폭력적인 과정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부농을 상대로 노동자계급이 전쟁을 벌이는 상황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쏘련이 농민을 다소 탄압하기는 하였으나, 그 농민은 자본가적 농민인 부농이었기 때문에, 높은 단계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 과정이 꼭 필요했다. 물론 집산화 과정에서 다소 오류가 있었다. 정책을 기계적으로 해석하여 무작정 집산화가 진행되었다. 쓰딸린은 반복해서 중농과 빈농을 집산화하는 데에는 자발성을 이끌어내는 방향이 중요하다고 하였고, 정책은 수정된다. 바로 집단농장을 조직하는 게 아니라, 아르쩰 형태를 거쳐 가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후퇴가 있었으나, 곧 높은 수준으로 조직화를 달성한다.

 

우크라이나에서도 위 과정이 진행되었다. 부농과 계급 전쟁이 일어났고, 격렬한 저항이 동반되었으며, 여러 해 겹친 재난으로 기근이 발생하였다. 러시아 제국과 쏘련이 우크라이나를 일부러 굶겨 죽이기 위해서 기근을 조장했다거나, 집산화에 반대하는 농민을 반동으로 몰아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주장은, 쏘련이 막대한 구호 물품을 우크라이나로 이송했다는 사실과 상충됨을 알 수 있었다.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추왕훈, “[뉴스 뒤 역사] 우크라이나가 품은 원한의 뿌리 홀로도모르”, ≪연합뉴스≫, 2022. 2. 15. <https://www.yna.co.kr/view/AKR20220208157500081>
2 이현식, “[뉴스쉽] 러시아는 왜 학살을 반복하는가…우크라이나 ‘절멸’로 돌아서는 푸틴”, SBS, 2022. 4. 9.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6706668&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3 칼 맑스, ≪자본론≫ 제1권 제3분책, 채만수 역, 노사과연, 2019, pp. 542-543.
4 리오 휴버먼,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장상환 역, 책벌레, 2000, p. 17.
5 쉴라 피츠패트릭, ≪러시아혁명 1917-1938≫, 고광열 역, 사계절, 2017, p. 208.
6 레닌, “농업문제에 관한 테제 초안”, ≪노농동맹과 농민문제≫, 학민사, 1989, p. 157.
7 같은 글, 같은 책, pp. 158-159.
8 쉴라 피츠패트릭, 앞의 책, p. 228.
9 같은 책, p. 229.
10 칼 맑스, “고타강령 비판”, ≪칼 맑스ㆍ프리드리히 엥엘스 공산당 선언≫, 채만수 역, 노사과연, 2022, pp. 143-144.
11 ≪인민일보(人民日報)≫와 ≪홍기(紅旗)≫ 편집국, “유고슬라비아는 사회주의 나라인가? —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공개서한에 대한 논평(Ⅲ)”, 장진엽 역, ≪노동사회과학 제7호: 과학적 사회주의의 어제와 오늘≫(2014년 11월), 노사과연. <http://lodong.org/wp/archives/12727>
12 쉴라 피츠패트릭, 앞의 책, pp. 248-249.
13 J. V. Stalin, “Dizzy with Success―Concerning Questions of the Collective-Farm Movement”, Pravda, No. 60, March 2, 1930. <https://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stalin/works/1930/03/02.htm>
14 쉴라 피츠패트릭, 앞의 책, p. 250.
15 이오씨프 쓰딸린, “[번역] 우리 당의 사회민주주의 경향에 대하여(3)”, 신재길 역, ≪정세와 노동≫ 제179호(2022년 3월), 노사과연. <http://lodong.org/wp/archives/16806>
16 Ruslan Pyrih, ed., Holodomor 1932-1933 rokiv v Ukraini: dokumenty I materialy, Kyiv, 2007, pp. 63-64.
17 Holodomor, 2007, p. 156.; Holod na Ukraine, Ochyma istorikov, movoiu dokumentiv, Kyiv, 1990, p. 162.
18 Mark Tauger, “Review of Anne Applebaum’s “Red Famine: Stalin’s War on Ukraine””, History News Network, july 1, 2018. <https://historynewsnetwork.org/article/169438>
19 예카테리나 블라노바, “홀로도모르 사기: 일어나지도 않았던 이오시프 스탈린의 범죄(번역)”, 김남기 역, 노정협, 2021. 7. 14. <http://mlkorea.org/v3/?p=10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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