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마당] 진실은 강고한 계급 투쟁의 무기!(2)

― ≪진실이 밝혀지다―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을 읽고

 

김용화 | 편집위원

 

* 마리오 소사(Mário Sousa), ≪진실이 밝혀지다―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제3판), 채만수 역, 노사과연, 2013.

 

 

 

들어가며

 

여전히 언제나 대중 매체에서는 지배계급들의 ‘개굴개굴개굴’ 시끄러운 소리들을 경쟁하듯 대변하느라 분주하다. 코로나 방역 포기 선언! 그에 따른 지원 또한 중단! 청와대의 문 측과 윤 당선인 측의 힘겨루기의 지저분한 행태는 차치하더라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태를 연일 언론에 내보내면서 이에 따라 대한민국의 안보를 더욱더 강화해야 한다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설파에 바쁘다. 특히 늘 간간히 또는 자주 듣는 한미 연합훈련 실시 등등등.

 

국민의 안보가 그리도 걱정이 되면 각종 연합훈련 등과 싸드 설치 대신에 ‘국민’ 각자에게 아예 스스로 안전을 지킬 수 있는 최신 총 몇 자루와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다고 하는 무기들을 쥐여 줘야 ‘국민’들은 더 고맙게 여기지 않겠는가! 그러나 지배계급들은 자신들의 안보에는 몹시도 너무나 ‘현명’해서 스스로 무덤을 파지는 않을 것이고, 오히려 불안을 최대로 조성하여 안보라는 것을 이용해 민중들의 눈과 귀, 입을 막으면서, 앞으로는 더한 파씨즘으로 단도리할 것이다. 그럼 저들이 부르짖는 ‘안보’보다 더 무서운 원흉인 지배계급을 노동자계급이 먼저 무덤으로 모시는 수밖에 없겠지!

 

물론 당연히 어떠한 종류로든, 형태든 무고한 인민들을 헤치는 전쟁의 참혹함은 있어서도 안 되고 진행되지 않아야 하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도 곧바로 중단되어야 한다. 또한 전 지구상의 인민 대중들은 전쟁을 당장 멈출 수 있게 각국에서 전쟁 저지 투쟁 실천으로 반전 운동을 더욱더 펼쳐 나가야 하고, 특히 이는 분명 제국주의 국가들, 더 엄밀히 말해서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배계급들의 이해를 위한 그들의 대립의 전쟁이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이 앞장서서 인민들의 참혹한 희생은 막아야만 한다. 무엇보다 전쟁으로 인해 민중들의 죄 없는 소중한 생명이 부질없이 쓰러져 가고 있고, 물가 상승의 경제적 부담 또한 노동자계급에게 전가되고 있는 것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로 인해 발생한 전쟁임을 은폐한 채 어느 한쪽만의 편을 들면서 홍수처럼 쏟아내는 언론 보도를 보고, 수십 년 동안 쏘비에트 사회, 쏘련을 악마화하고 왜곡하며 파괴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망령이 현재에는 더욱더 살아나고 있는 듯한 오싹함을 느끼고 감지했다.

 

옛 쏘련 시절에는 소수 민족도 이웃 나라들도 사이좋게 잘 지냈다. 사회주의 사회가 붕괴되어 버린 후부터 사이좋던 민족들은 자본주의의 특성으로 인해 또다시 자결권을 잃고 제국주의 이권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사이좋게 지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은 지금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진실들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사회주의 사회인 쏘련이 민족 해방을 위해 어떤 개념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가를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알 수 있다.

 

민족 자결권을 위해 투쟁할 때, 사회민주주의의 목적은 민족적 억압 정책을 종식시키고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민족들 사이의 분쟁의 소지를 제거하고 그 분쟁의 기세를 무디게 하며 그것을 극소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계급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책을 부르주아지의 정책과 본질적으로 구별해 주는 점이다. 부르주아지의 정책은 민족적 투쟁을 악화시키고 부추기며 민족 운동을 장기화하고 첨예하게 하려고 시도한다. (레닌ㆍ쓰딸린, ≪맑스-레닌주의 민족운동론≫.)

 

그리고 아래 발췌문에서도 살펴볼 수 있겠지만, 민족 해방을 위해 아래와 같이 실천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1930년대에는 쏘련의 이념적 물질적 활력과, 모든 시민을 평등하게 대우하려는 의지를 입증해 주는 또 다른 조치도 실행되었다. 전반적이고 의무적인 초등교육이 전국의 모든 민족들에게 그들 고유의 언어로 시행되었던 것이다. 이전에는 기록된 형태로는 거의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언어들로 된 수많은 새 책과 교과서들, 기타 학습 자료들을 만드는 엄청난 문화적 작업을 의미했다.

 

위의 두 예는 쏘비에트 국가가 민족들의 자결권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에 비하면 빙산에 일각일 뿐이다.

 

≪진실이 밝혀지다―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 이 책은 제1편 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 제2편 1930년대 쏘련에서의 계급 투쟁―쏘련 공산당 내의 숙청과 정치재판, 제3편 안토니 비버의 ≪쓰딸린그라드≫ 비평―나치의 전쟁 흑색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성의 순서대로 발췌ㆍ정리하여 ≪정세와 노동≫에는 1편을 1부로, 2편을 2부로, 3편을 3부로 세 번의 나누어서 게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2편의 내용이 엄청나게 많음으로 2편을 2부와 3부로 나눠서 기관지에 실고, 제3편 안토니 비버의 ≪쓰딸린그라드≫ 비평은 생략할 것이다. 왜냐하면 제3편은 1편, 2편과 중복 부분이 있기도 해서이다. 발췌에 있어 미비한 점에 대해 많은 양해를 바라며, 이 책에 대해 더 세세한 점이 궁금하시다면 노동사회과학연구소로 문의바랍니다. 이 발췌의 내용 중 모든 강조는 필자의 것이다.

 

 

 

제2편: 1930년대 쏘련에서의 계급 투쟁

쏘련 공산당(CPSU) 내의 숙청과 정치재판

 

1930년대에 모쓰끄바에서 벌어진 쏘련 공산당의 숙청, 즉 제명과 정치재판은 부르주아 흑색선전자들이 좋아하는 두 가지 이야깃거리이다. 부르주아 대중 매체는 그 두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거론하면서 대중들에게 당시의 쏘련과 이 기간에 벌어진 숙청 및 정치재판에 대한 완전히 거짓되고 잘못된 인상을 각인시켜 왔다. 그들의 목적은 사회주의와 쏘련을 중상(中傷)함으로써 오늘날의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귀 기울이는 것을 막는 동시에 자본주의가 무언가 불가피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이 시기 쏘련의 역사를 명백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부르주아의 거짓말들과 싸우기 위한 것이고, 볼쉐비끼가 혁명적 이행 속에서 맞닥뜨렸던 곤경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1930년대에 관한 진실들

 

1930년대는 제1차 및 제2차 5개년 계획이 실행되고 농업 집산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1929년에 2천9백만 루블이었던 국민소득은 1938년에는 1억5백만 루블로 증가했고, 고용노동자 수는 1930년의 1천450만 명에서 1938년에는 2천8백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최대 7시간 노동일(광부 및 유사 직종의 노동시간은 더 짧았다)로 이행했는데, 이 개혁 조치는 1930년대 말엽에 나치 독일의 전쟁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폐기되었다. 1930년대에 쏘련의 생산은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속도로 증가했다. 1930년 초 쏘련의 산업생산 총액은 2천1백만 루블이었는데 8년 뒤 산업생산액은 1억 루블 이상이었다. 1930년 초 파종면적은 1억1천8백만 헥타르였는데, 1938년에는 1억3천6백9십만 헥타르에 달했다. 동시에 농업의 완전한 집단화를 달성했고, 농업의 집단화 및 현대화와 관련된 거대한 문제들을 경험하고 해결했다. 1930년 초에 쏘련에는 3만4천9백 대의 트랙터가, 1938년에는 48만3천5백 대로 14배나 증가했다!

 

1930년대에는 쏘련의 문화 역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1929년의 각급 학교의 학생 수는 약 1천4백만 명이었다. 1938년에는 그 수가 약 3천4백만 명으로 증가하였고, 동시에 시간제 강의만 듣는 학생들까지를 포함하면 4천7백만 명 이상에 달했다. 1938년에는 그 수년 전부터 문맹이 완전히 근절된 상태였다. 이 기간 동안 고등교육을 받는 학생 수는 20만7천 명에서 60만1천 명으로 거의 3배로 증가했다!

 

1930년대에는 쏘련의 이념적 물질적 활력과, 모든 시민을 평등하게 대우하려는 의지를 입증해 주는 또 다른 조치도 실행되었다. 전반적이고 의무적인 초등교육이 전국의 모든 민족들에게 그들 고유의 언어로 시행되었던 것이다. 이전에는 기록된 형태로는 거의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언어들로 된 수많은 새 책과 교과서들, 기타 학습 자료들을 만드는 엄청난 문화적 작업을 의미했다. 처음으로 자신의 언어로 문헌이 출판된 민족도 여럿이었다. 이것이 앞으로 고찰할 1930년대 쏘련에서의 계급 투쟁의 배경이다. 이 글을 읽는 동안 이 사실을 상기하도록 하자.[1]J. V. Stalin, Works, Vol. 12, Moscow, 1955, p. 242.; J. V. Stalin, Works, Vol. 13, Moscow, 1955, p. 288.; J. V. Stalin, Problems of Leninism, Peking, 1976, p. 874.

 

 

공산당의 발전

 

1930년대에는 수백만 명의 새로운 당원들이 쏘련 공산당(볼)(CPSU(b))에 가입하여, 생산과 사회 발전을 위한 투쟁에 참여했다. 이러한 대거 입당과 엄청난 생산 증대가 반드시 유익한 것만은 아니었고, 공산주의자로서의 충분한 수준에 미치지 못한 사람들을 제명, 즉 숙청해야 했다. 사회주의는 실수를 교정하고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토론과 비판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숙청은 대외정책상의 이유로도 중요했다.

 

1930년대 내내 쏘련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외부 위협이 증대했다. 봉쇄와 파괴행위, 자본주의 국가들의 침략적 위협에 더하여 사회주의 쏘련을 분쇄하고 슬라브 인민을 절멸시키려는 새로운 적이 출현했다. 1930년대 쏘련의 중요한 성장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쏘련이 나치 독일에 승리하는 토대였던 것이다. 공산당 내부의 불합리한 것들과의 투쟁 및 숙청은 생산에서의 성공과 국가의 보안을 위한 조건들이었다. 부르주아 역사가들은 이것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부르주아의 미신에 따르면, 숙청은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한 피의 박해였으며, 권력에 굶주린 관료들이 광범한 행정적 폭력적 장치를 이용해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진보적인 반대파를, 실로 ―그들 역사가들에 따르면― ‘진정한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로 이루어진 반대파를, 문자 그대로 도륙을 낸 박해였다. 이들 박해의 뒤에는 물론 억지 의심과 병적인 행동의 쓰딸린이 있었다. 1930년대의 숙청과 정치재판에 관해 부르주아 역사가들과 문필가들은 수십 년 동안 그렇게 서술해 왔다. 그러나 정작 그들 자신의 나라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을 사찰하고, 박해하고, 투옥하고, 처형하고 있는 바로 그 부르주아지가 ‘진짜’ 공산주의자들을 박해한다고 쏘련을 비난한다는 이 단순한 사실은 겉으로 드러난 것이 전부가 아님을 보여 주고 있다. 부르주아 역사가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고, 우리는 바로 그것을 입증할 것이다.

 

 

쓰몰렌쓰크의 문서들

 

쓰몰렌쓰크 문서들은, 쏘비에트 사회가 어떻게 작동해 왔는가를 알고자 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금광일 것임이 틀림없다. 특히 쏘련과 사회주의에 적대적인 사람들조차 거기에서 자신들의 목적을 입증할 사실들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서 자료는 서방 대중 매체에서 단 한 번도 신문의 제1면에 보도된 적이 없다. 쓰몰렌쓰크 문서들에 기록된 쏘련 서부 지역의 정치적 생활은 서방의 대중 매체가 광고했던 (그리고 여전히 광고하고 있는) 터무니없는 거짓말과 신화 속의 날조된 내용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쓰몰렌쓰크 문서들은 생활의 모든 측면에 관한 광범위한 의견들을 담은 수십만 인민의 기록의 수집물로서, 반쏘 흑색선전전의 자료로는 이용될 수 없었던 것이다.

 

 

독자적인 결론을 위한 새로운 사실들

 

1985년이 되어서야 쓰몰렌쓰크 문서들에 대한 새로운 연구에 기초한 한 권의 책이 출판되었다. ≪대숙청의 기원들―쏘비에트 공산당에 대한 재고찰, 1933년부터 1938년까지(Origins of the Great PurgesThe Soviet Communist Party Reconsidered, 1933-1938 )≫라는 제목의, 미국의 역사 교수 존 아크 게티(J. Arch Getty)의 저서였다. 이 책은 쏘련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대단히 가치 있는 자료와 통계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게티는 (≪대숙청의 기원들≫ 이후 약 15년 뒤인) 1999년에 1930년대 쏘련에 관하여, ≪숙청으로의 길―쓰딸린과 볼쉐비끼의 자멸, 1932-1939(The Road to TerrorStalin and the Self-Destruction of the Bolcheviks, 1932-1939 )≫이라는 제목의 새로운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의 의의가 무엇인지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1930년대 쏘련의 발전과 관련된 사실들에 대해서는 거의 설명해 주지 않고 있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게티의 연구는 쏘련에 관한 일부 신화들과 거짓말들을 깨뜨렸지만, 게티 본인도 쏘련에서의 계급 투쟁의 조건들을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부르주아 저술가에 불과하다.

 

쏘련에서 1930년대의 대부분은 나치 독일의 침략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투쟁했던 시기임을 상기해야 한다. 만일 이러한 사실의 중요성을 간과한다면, 물론 불가피하게 잘못된 결론들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볼쉐비끼가, 쏘련을 최대한 발전시키고 방어력을 구축하는 대신에, 자멸했다면, 나치는 전쟁에 승리하여 쏘련과 슬라브 인민들을 절멸시켰을 것이다. 그러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고, 쏘련은 전쟁에 승리하여 나치즘을 절멸시켰다. 독자들은, 노점의 헌책방의 싸구려 탐정소설의 내용 수준의 결론들을 내리게 하는 온갖 종류의 음모와 어리석음 때문에, 강단의 연구는 이렇게 현실과는 동떨어진 근본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지난 50년 동안 대학 강단에 만연해 온 방대한 양의 거짓말과 반쪽짜리 진실들, 그것이 서방의 쏘련 연구 특징이다.

 

 

1920년대 숙청들의 역사에 대한 요약

 

혁명이 승리하고 공산당이 지배당이 되었을 때, 레닌과 당 지도부는 당과 국가기구에 일부 달갑지 않은 분자들이 스며들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출세를 위해 당원이 된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레닌에 의하면, “한편에서는, 집권당에는 집권당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모든 최악의 분자들이 달라붙는 것은 당연하다.”[2]Vladimir I. Lenin, “러시아 공산당(볼) 제8차 전국협의회 중앙위원회 정치보고”, Collected Works, Vol 30, Moscow, 1965, p. 186. 그렇기 때문에 당원들의 활동을 평가하는 것이 중요했다.

 

당원 숙청의 일반적 기준은 부패와 소극성, 당의 규율위반, 알코올중독, 범죄행위, 반유대주의였다. 자신들의 출신계급을 숨긴 부르주아 개인들이나 꿀라크들은 모두 추방되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계급적 출신 배경을 인정하고 당원이 된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들의 과거를 숨긴 과거의 짜르 관료들 역시 어쩔 수 없이 추방되었다. 추방된 사람들은 모두 중앙통제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고, 그 경우 보다 상급 기관에서 재검토되었다. 수백 명의 당원들이 참석하는 일반 집회에서의 결정은 일반적으로 당 중앙에서의 결정들보다 더 엄격했다. 당 중앙위원회는 우선 평당원들이 당당하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어 당의 타락한 관료들과 그들의 동조자들을 단속하도록 격려했다. 이것은 결국 힘든 작업이었다. 부패한 관료들은 비판과 곤경을 벗어나는 수천 가지의 책략을 알고 있었고, 그 대신에, 추방당한 사람의 대부분은, 소극적이거나 정치적으로 무지하다고, 혹은 술버릇이 나쁘다고 당 비서들로부터 고발당하고도 자신을 변론하지 못한 평당원들이었다.

 

 

1920년대의 숙청들

 

1919년의 당원 재등록 이후에도 레닌과 당 지도부는 당에는 여전히 상당한 결점이 있음을 알았다. 오직 노동자들과 다른 계급 출신의 신뢰할 만한 분자들만 선발한다는 지령이 무시된 채 엄청나게 많은 새로운 당원들이 계속 유입되었다. 1929년에는 1백53만 명의 당원들이 심사를 받았고, 이들 가운데 약 17만 명, 즉 11%가 제명되었다. 중앙통제위원회에 재심을 요청하여 3만7천 명(제명당한 사람들의 22%)이 당원자격을 회복했다. 그 절대다수는 노동자계급 출신의 평당원으로서,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지방의 당 관료들에 의해서 추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당원들이 당 활동에 참가하는 것을 보다 어렵게 만든 생활여건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정치적 이유로 인한 제명은 1929년의 숙청에서 발생한 총 제명의 1%를 넘지 않는다.[3]J. Arch Getty, Origins of the Great PurgesThe Soviet Communist Party Reconsidered, 1933-1938, New York, 1985, p. 46. 이를 쓰딸린주의자들의 모든 반대세력 제거라는 만연한 신화와 비교해 보라. 게다가, 제명된 사람들은 굴라크 노동수용소에서 죽거나 실종되었다고 부르주아들은 항상 주장하고 있다. 사실은 그와 다르다. 숙청된 사람들 가운데 오직 절도, 횡령, 공갈협박, 파괴행위 등의 범죄를 저지른 자들만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 외의 숙청된 이들은 계속 평범한 삶, 다만 당원으로서의 의무 및 당원으로서 누리던 지원이 없는 삶을 살았다.

 

 

1930년대 쏘련 공산당에서의 숙청

 

1930년대의 숙청이야말로 바로, 사회주의를 비방하고 억압적 국가로서의 쏘련이라는 신화를 강화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들고 나오는 단골 소재이다.

 

장 유명한 역사 위조자들로는 영국 비밀정보부의 요원이었던 로버트 콘퀘스트와 파씨스트 알렉싼드르 쏠줴니쯴(Alexander Solsjenitsyn),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 로이 메드베제프가 있다. 스웨덴에서 그들에 부화뇌동하는 자들로는 실패한 시인 페르 알마르크, 무뢰한 슈타판 스코테, ‘역사가’이자 뜨로쯔끼주의자 페테르 엥글룬드(그는 최근에 왕립군사과학원(Royal Academy of Military Science)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및 몇몇 수상한 인물들(옐네르(Gerner) 교수, 살로몬(Salomon), 칼손(Karlsson) 등등)이 있다. 그러나 자본가들과 정치경찰인 CIA 및 MI5는, 미국과 영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서도 학자들을 매수하고 있다. 스웨덴에도 역시 자본과 정치경찰 세포(Säpo)에서부터, 예컨대, 스톡홀름(Stockholm), 웁살라(Uppsala), 룬드(Lund) 대학교의 학과들에까지 이런 [매수의: 역자] 흔적들이 있다. 역사의 위조자들을 폭로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들은 사람들의 무지를 악용해 사회주의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수세적으로 만들고, 공산주의자들을 그들의 역사로부터 격리시키고 있다.

 

콘퀘스트가 꾸며낸 얘기들은 CIA에 의해 수십 년 동안 자본주의 대중 매체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유포되어 왔으며, 불행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진실이라고 믿고 있다. 저서인 ≪대숙청―30년대 스딸린의 숙청(The Great TerrorStalins Purges of the Thirties)≫은 1968년에 출판되어, 부르주아 계급의 주요한 반()사회주의 투쟁 무기의 하나로 이용되고 있다. 그 정보의 출처는 매우 미심쩍은 무리들로서, 나치 협력자들과 변절자들, 테러리스트들이 그 출처다. 부르주아 역사가들은 콘퀘스트의 거대한 날조들을 역사적 사실들로 격상시켜 왔고, 그의 거짓말들을 기꺼이 정기간행물과 책들 속에 반복 인용해 왔다.

 

 

1933년의 숙청들

 

1933년에 일어난 첫 번째 숙청은 농업 협동조합이 거대한 진전과 함께 쏘련 전역에 확산되고, 산업생산도 전례 없는 결과를 산출해 내던 열광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일어났다.

 

당은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문호를 개방했고, 1930년대 첫 3년간 수십만의 새로운 당원들이 선발되었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급증했기 때문에 당 지도부는 새 당원들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당 지도부는 기회주의자들이나 부패한 관료들, 범죄자, 반유대주의자, 알코올중독자, 당 규율을 위반하는 당원들을 색출하고 있었다. 당의 지령들은, 숙청은 동지적인 분위기에서 수행되어야 하고, 사람들의 사생활을 깊이 파헤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당 지도부는 지방 관료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도록 평당원들을 격려했으며, 지방 당 지도부가 소극성이나 정치적 무지를 이유로 평당원들을 추방하지 않도록 경고했다. 1929년의 실수들이 반복되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당의 그러한 지령에도 불구하고 1933년 숙청은 중앙위원회의 의도와 다르게 흘러갔다. 쏘련처럼 광대한 나라에서는 지방의 당 비서들이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때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성공적인 숙청에 대한 자신들의 관심을 과시하기 위해서 일부 지방 당 비서들은 많은 평당원들과 노동자, 농민들을, 즉 추방되어서는 안 되는 충실한 당원들을 내쫓았다. 추방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1930년에서 1933년 사이에 입당한 사람들로서, 당의 모든 논의 사항들을 숙지할 시간이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당 강령과 맑스레닌주의를 깊이 학습할 수 없었음에도, 당 비서들은 이들이 너무 무지하다고 여겼다. 중앙위원회는 지방 당 지도자들의 당 지령 위반에 대해서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했으나, 그 이후의 상황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주 공교롭게도 이후 수년 동안 쏘련은 살아남기 위해 발전의 속도를 높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제명된 사람들의 단연 절대다수, 사실상 3분의 2는 1928년 이후에 입당한 사람들이었으며, 그 때문에 비교적 새로운 당원들로 간주되어야 했다. 23%는 농업노동자나 농부, 14.6%는 공무원, 약 62%는 노동자라는, 추방된 사람들의 분포는 압도적 다수인 85%가, 레닌 시대부터의 당 간부가 아닌, 평범한 노동자들이었음을 보여준다. ≪대숙청≫에서 로버트 콘퀘스트는 1933년의 숙청을 다루면서, 백만 명 이상의 당원이 정치적 이유로 추방되었다고 암시한다. 숙청의 역사를 알고 있다면, 콘퀘스트의 주장이 거짓말임은 명백해진다.

 

 

“검증(Proverka, Проверка)” ― 1935년의 당원증 통제

 

1933년의 숙청은 전국에 걸쳐 당 조직 내부의 대단히 심각한 난맥을 드러냈다. 당원 명부는 현실에 부합하지 않았다. 많은 당원들이 이사하고, 탈당하고, 제명당하거나 죽었으나, 이것이 당원 명부에 반영되지 않았던 것이다. 지방 당 비서들은 5개년 계획과 집산화에 따른 재정업무를 처리하는 데 여념이 없었고, 혹은 순전한 게으름이나 관심의 부족으로, 당원 명부가 제대로 갱신되지 못했다. 그 결과 당의 재정 회계에 커다란 난맥상이 존재했다. 1934년 10월, 중앙위원회는 모든 당원들을 새롭게 등록시키기로 결정했다. 중앙위원회는 지방 곳곳에 대표자들을 보내, 등록 작업을 돕는 한편, 당 서류들의 실제 상태를 점검하여, 가능하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였다. 1935년 4월 말이 다가오는데도 새로운 등록은 거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1930년대 초기의 공산당

 

부르주아 언론은 서방세계의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완전히 맹목적인 규율이 쏘련 공산당을 지배하였으며, 그리하여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들이 기다란 명부에 필시 여러 차례 등록되어 주도면밀하게 통제되고 있었다고 믿도록 가르쳐 왔다.

 

이러한 이미지는 완전히 거짓된 것이다. 실제로는, 생산을 위한 투쟁에 몰두하고, 세계적인 기록을 거듭한 믿기 어려운 생산의 성과에 도취되어, 많은 지방 당 비서들이 당의 다른 문제들은 돌보지 않았다. 당원증은 으레 당 시설 내에서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일반 책상서랍 속이나 찬장 속에 보관되었고, 전국적으로 수천 장이나 사라지기도 했던 것이다. 출당된 사람들조차 계속 당원증을 가지고 있었고, 아무도 그것을 반환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사망자의 당원증이 자주 오용되거나 부정부패에 이용되기도 했다. 생산의 성과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지방 당의 지도자들은 증대하는 생산의 잉여가 이윽고 다른 모든 어려움들을 일거에 해결해 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20만 개의 당원증 남발

 

당원증을 가진 사람은, 중요한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고 중요한 회의가 열리는, 전국의 모든 당 시설들에 수시로 출입할 수 있었다. 바로 그 때문에 당원증은 적들과 간첩, 적대분자들, 외국 공작원들에게 매력적인 물건이었다. 그들은 전복 행위를 하는 데에 그 당원증을 방패막이로 이용할 수 있었다.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을 경우 그 사람에 대한 보다 자세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동안 그의 당원증의 효력은 중지되었다. 당원임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들은 제명되었고, 그들의 당원증은 회수되었다. 제명된 모든 사람들은, 당규에 따라, 상급 기관에 재심을 요청할 수 있었으며, 이 상급심은 새로운 조사를 벌여 2주일 내에 새로운 결정을 내리도록 되어 있었다.

 

 

당원증 검증 결과는 어땠는가?

 

서부 지역의 문제는 현저했다. 중앙위원회는 당원증 검증을 잘못한 사례로 그 광역당 제2비서인 쉴만(A. L. Shil’man)과 통제위원회 지방 대표인 끼쎌료프(Kiselev)를 공개적으로 엄중하게 비판했다. 서부 지역 한 지구의 지도자인 당 비서 스쩨빠노프(Stepanov)는 당에서 추방되었다. 중앙위원회는 이 중요한 업무에 헌신적으로 임할 것을 요구했지만, 그는 단지 얼마나 많은 당원들을 검증했으며, 얼마나 많은 거짓 당원들을 적발했는지 실적을 보여 주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중앙위원회는 이러한 관료주의적인 일 처리 방식에 반대했다. 중앙위원회는 철저한 조사를 통해 당원명부에 올라 있는 당원들이 실제 당원임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새로운 당원증 검증

 

중앙위원회는 당원증 검사가 실패할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원대회에서 당원증을 검증하도록 했고, 모든 당원들에게는 당원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공표할 기회가 주어졌다. 당원들에게 당원대회에서 비판과 자아비판을 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었고, 이로써 당원대회는 거대한 논쟁의 장이 되었다. 무언가를 숨길거리가 있었던 당 비서들은 지방 당 지도부의 과실들을 폭로할 수 있는 당원증 검증이 지속되는 것을 무서워했다.

 

1935년 7월의 당 대회들은 오만한 당 관료들과 기타 억압자들에 맞선 토론장이 되었다. 비판과 자아비판이 당의 정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실제로 밑바탕 수준에서 언제나 적용되고 있는지는 불확실했다. 이제, 적어도 이 기간 동안에는, 이러한 상황들이 평당원들에게 유리하게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쓰딸린 자신이 비판과 자아비판의 필요성을 공언했고, 과오를 토론에 부치지 않음으로써 간부들을 타락시킨 치명적 오류로서 비판의 부재를 지목했다. 1935년의 당원증 검증은 또한 당의 또 다른 아주 심각한 결점도 보여 주었는데, 당원증이 위조하기 쉬워 신뢰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새 당원증 제작은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부르주아 계급의 거짓 선전과 현실

 

이제 잠시 1935년의 당원증 검증에 관해 부르주아 대중 매체가 퍼뜨려 온 거짓말들에 관해서 살펴보자.

 

공개적인 논쟁은 당에 숨어들어와 경제적ㆍ사회적 이해를 좇던 부르주아 분자들에게 강한 타격을 가했다. 꿀라크와 상인에서부터 도둑, 과거의 백군 장교, 짜르의 경찰들이 타격을 받았다. 당원증을 검증하는 동안 일어난 일은 무엇보다도 당에 잠입한 부르주아 분자들을 노동자들이 당으로부터 추방한 것이었다. 역사의 위조자들을 광분하게 한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부르주아들은 사회에서 특권을 가지는 데에 그리고 노동자들, 즉 “폭도들”을 엄하게 속박하는 데에 익숙해 있었는데, 노동자들이 노동자의 당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적대적이고 부르주아적인 가치기준이 폭로되면 추방된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완전히 이성을 잃었던 것이다. 수년간에 걸친 은밀한 와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 계급이 권력을 잡을 기회는 완전히 사라졌다.

 

당원증 검증이 수많은 사람을 처형한 공포스럽고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이었다는 주장은 비밀경찰 요원인 로버트 콘퀘스트에게서 비롯했다. 이러한 역사적 문제들에 대한 지식이 없이 그의 책 대숙청(The Great Terror )을 읽는다면, 누구나 그의 거짓말들을 알아채기 어려울 것이다. 1935년의 당원증 검증은 단지 당원의 재등록에 관한 1934년 10월 중앙위원회의 결정의 결과였을 뿐이다.

 

 

1936년 당원증 교체

 

1935년의 당원증 검증 후에, 그리고 결과로, 중앙위원회는 모든 당원들의 당원증을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가능한 한 진정으로 명예로운 당원으로서 헌신적인 공산주의자들에게만 당원증을 배포하기 위한 노력들을 기울였다.

 

중앙위원회의 지령은 대단히 명확하고 세밀해서 아무도 우회할 수 없었다. 첫째, 1935년의 당원증 검증이 끝나기 전에는 어떤 당원증도 교체될 수 없었다. 둘째, 당 비서들 외에는 누구도 새 당원증을 발급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당원증의 교체는 오직 당 비서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 내에서만, 그리고 그 당원이 속한 세포의 당 비서와 관련 당원이 배석한 가운데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 다음, 당원은 자신의 신상 정보를 제공하는 서식을 2부 작성해야 했다. 당원은 당 비서 입회하에 새로운 당원증과 그 서식에 서명해야 했다. 이러한 과정을 마친 후에 당 비서는 새 당원증에 도장을 찍었다. 모든 당원증에는 당원의 사진이 첨부되어야 했고, 사진이 없는 당원증은 무효였다.

 

새로운 당원증들은 내무인민위원회(NKVD) 우편으로 지역 당 비서들에게만 보내졌고, 그것들은 중앙위원회가 보낸 특수 잉크만을 사용해서 기록되어야 했다. (당원증을 발급할 권한이 있는) 모든 당 비서들의 서명은 당 중앙의 특수 문서국에 보관되었다. 수백만 당원의 당원증 교체작업은, 당원의 진정한 증명서, 극히 위조하기 어려운 증명서를 도입하기 위한 당 중앙의 진지한 노력이었다. 당의 당원증 교체사업은 당의 적들을 추가적으로 적발하고 추방하려는 새로운 숙청작업의 일환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었다.

 

 

단지 2%만이 추방되다

 

당원증 교체 기간 중에 대량의 숙청이 단행되었고, 그 숙청은 당에서 벌어진 이전의 어떤 숙청에서보다도 수적으로 대량이었다고 콘퀘스트는 주장한다. 이 모든 것은, 콘퀘스트에 의하면, 1936년 8월 19-24일의 재판을 기다리고 있던 반대파에 대한, 지노비예프와 까메네프, 쓰미르노프가 주역이었던 뜨로쯔끼-지노비예프 본부에 대한 적대 분위기를 촉발하기 위해 쓰딸린이 조장한 것이었다. 당시 그들은 외국에서 뜨로쯔끼가 주도한, 쏘련 정부의 지도자들을 암살하고 권력을 찬탈하려는 음모에 연루된 혐의로 고발되어 있었다. 쓰몰렌쓰크 문서들에 대한 게티의 연구가 밝히고 있는 수치들은 콘퀘스트의 주장들이 새빨간 거짓말임을 입증하고 있다. 실제로 1936년의 숙청에서는 당 역사상 가장 적은 수, 당원의 2-3%만이 제명되었다.

 

 

1936-1938년의 정치재판들

 

정치재판과 공산당 내의 숙청은 직접적으로는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두 개의 별개의 일이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30년대에 벌어진 정치재판의 역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부르주아 역사서들은 1930년대의 사건들을 완전히 혼란스러운 이야기, 실제 사건들과, 신화와 거짓말, 반쪽짜리 진실들의 난잡하게 날조된 뒤범벅으로 만들어 왔고, 숙청과 반역 재판을 동일한 사건으로 여기게 하는 날조를 저질러왔다.

 

정치재판은 1936년 8월에 뜨로쯔끼-지노비예프 본부에 대한 재판으로 시작되었고, 부르주아 대중 매체들에서는 그 재판들은 보통 모쓰끄바 재판이라고 불리고 있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한밤중에 자기 집에서 끌려 나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상황에서 살해당한, 모골이 송연한 ‘쓰딸린의 복수’의 역사로 언제나 기술되고 있다. 페테르 엥글룬드의 책 ≪영점에서의 편지≫에 의하면, 그들은 바닥에는 “방수포(防水布)”가 깔려 있거나 “도살장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고랑들이 바닥에 파여 있는” “방음”된 방들 속에서 목에 총을 맞고 살해되었다. 그에 의하면, “시체들은 검은 방수복과 앞치마를 입고 고무장갑에 고기를 거는 갈고리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운반”되었는데, “벌거벗은 다른 시체들이 너부러져 있던 트럭에” 내던져졌다. 엥글룬드의 이야기들은 콘퀘스트와 CIA의 돈을 받은 작가들로부터 취해 온 것이다. 엥글룬드 자신이, 1930년대 쏘련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를 스웨덴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생각이 전혀 없는 무지하고 비열한 인간이다. 보수만 좋다면, 그는 기꺼이 사회주의와 쏘련에 대한 어떠한 공격에도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고 있다.

 

 

1936-1938년의 당내 숙청작업과 반역자 재판의 배경

 

자유시대 1920년대

‘사회주의자’ 혹은 ‘좌파’ 출신의 부르주아 역사가들과 소부르주아 정치 활동가들은 1920년대는 자유가 지배하던 시대였고, 사회 전반에서 토론이 왕성했으며, 예술과 문화가 번성하여, 전반적으로 개인이 자신을 표현하고 사회의 발전 경로에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 발전에 대한 빗나간 해석이다. 이는 1920년대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사회가 발전하고 사회주의가 건설됨에 따라 1930년대에는 훨씬 더 많은 쏘련 인민들이 전례 없이 광범하게 정치 토론과 풍부한 문화생활에 참여할 수 있었다. 1930년대에 새로운 현대 사회에서 문화와 논쟁, 지식에 접근할 수 있게 된 수천만, 수억의 인민들이 이에 해당된다.

 

사회주의 도입을 방해하다

부르주아지가 1920년대의 쏘련에서 찬양하고 있는 것은 정치 토론과 문화 발전이 아니라, 정치적 반대파들이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좌절시킬 가능성이었다. 1920년대에 여러 반대파 단체들이 논쟁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몰두했던 끊임없는 분파활동들을 부르주아지는 특히 찬양하고 있다. 이들 단체들은 대체로 뜨로쯔끼나 지노비예프, 까메네프, 부하린, 쓰미르노프, 릐꼬프(Rykov), 뺘따꼬프, 라데크, 쏘꼴니꼬프(Sokolnikov) 등과 같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사회주의의 도입을 좌절시키려는 강령을 내걸고 있었다. 중앙원회 내의 소수파에게는 후진적인 러시아에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던 것이 바로 뜨로쯔끼의 입장이었다.[4][역주] 기본적으로 이른바 ‘일국 사회주의론’을 반대하는 뜨로쯔끼는,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후진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 건설 가능성을 … Continue reading 대신에 그들은, 먼 장래에 사회주의 사회에 도달할 수 있도록, 국제정세가 호전되기를 기다리면서 시장관계를 이용하고자 했다.

 

자본주의인가, 사회주의인가

반대파와 중앙위원회 다수파 사이의 대립은 국가의 미래에 관한 것, 즉 자본주의인가, 아니면 사회주의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은 1925년 12월 제14차 당 대회의 주요 의제였다. 당 대회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인 쏘련은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하며, 나아가 당의 주요 임무는 쏘련의 사회주의 건설의 승리를 위한 투쟁이라고 선언했다. 채택된 이 결의문은 당의 입장으로서 규정되었고, 모든 당원들을 기속(羈束)하고 있었다.

 

결의문은 쏘련과 공산당의 지속적인 정치적 발전을 결정적으로 확립했다. 그러나 당 대회 직후부터 반대파는 사회주의를 위한 중앙위원회의 업무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여러 해가 지나면서, 제1차 5개년 계획 기간 중의 엄청난 생산 결과들과 같이, 중앙위원회의 정책이 올바르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더욱더 명백해짐에 따라 반대파는 갈수록 고립되었고 당과 국가기관 내부에서 영향력 있는 지위들을 상실했다. 그 때문에, 반대파의 조직적이고 비밀스런 활동은, 살인과 파괴활동에서부터 간첩행위와 적(敵) 나치 독일과의 협력까지를 허용하는 반정부 음모로 바뀌었다.

 

교육의 부족

1930년대에는 공산당 내부에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대립이 또한 발생했다.

당은 누구든 글을 읽을 수 있으면 그에게 당직을 맡기는 것에 관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들 중 일부는 유감스럽게도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서 당에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들 당 관료들은 더욱더 많은 권력을 갖게 되었고, 당 관료주의가 당의 노동자 권력을 위협하는 경우들도 있었다. 노동자들 사이에 교육이 부족했기 때문에 때로는 이들 노동자들이, 말은 청산유수 같지만 권력을 남용하거나 부패한 관리들을 공격할 용기를 갖지 못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제15차 당 대회 이후, 당 기구 내의 노동자 권력과 관료주의 사이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쓰딸린에 의하면, 투쟁은 인민의 사고(思考)에 관한 것이었다. 끼로프 및 쥐다노프와 함께 쓰딸린은, 당 내부 문제들의 가장 커다란 부분은, 향후 몇 년이고 계속될 당원들의 정치교육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당 기구 내부의 관료주의와의 투쟁

1934년 1월의 제17차 당 대회에서는 관료주의와의 투쟁의 문제가 주요 의제 중 하나였다. 당 지도부는 당내의 모든 수준에서의 학습과 자아비판, 재조직화, 관료주의에 대한 공격을 요구함으로써 공산주의적인 이념들을 부흥시키려고 분투하고 있었다. 그 당 대회는 산업 생산과 집단 농장에서 엄청난 성과를 낸 시기에 개최되었고, 역사에는 “승리의 대회”로 기록되었다. 쓰딸린은 대회 연설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요약했다.

 

이 기간에, 쏘련은 근본적으로 변모되었고, 그 후진성과 중세주의라는 특성을 벗어 버렸습니다. 쏘련은 농업 국가에서 산업 국가로 되었습니다. 쏘련은 소농적 개별경제의 국가에서 집단적이고 기계화된 대규모 농업의 국가로 되었습니다. 쏘련은 무지하고 글을 모르는 미개한 나라에서, 쏘련을 구성하고 있는 민족어들로 기능하는 대학들과 중등학교들, 초등학교들의 광대한 망으로 뒤덮인, 교양 있고 문화적으로 높은 수준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 아니 오히려,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5]J. V. Stalin, “Report to the Seventeenth Party Congress on the Work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P.S.U.(B.)”, Problems of Leninism, Peking, 1976, p. 694.; [J. V. Stalin, … Continue reading

 

평당원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투쟁이 당 관료제 내부의 부패한 관료들에 맞서 활기차게 벌어졌다. 당내 민주주의를 보장하고 권력의 남용을 저지할 수 있도록 당규를 올바로 적용하기 위한 조건들을 정비했다. 그러나 부패했거나 불성실한 당 지도자들을 숙청하라는 당원들을 향한 호소는 단지 부분적으로만 성공했고, 때로는 전혀 성공하지 못했다.

 

쏘련이 성공과 나치 독일의 위협

이것이 바로 1930년대 중반 쏘련 공산당 내부의 정치적 상황이었다. 효과적인 협동조합 운동을 수반한 당의 지도를 통해서 쏘련은 도시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농촌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생산과 사회 건설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쏘련은 세계적인 강국이 되었고,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 일반 노동자들의 삶은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다양한 멋진 측면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930대 중반에는 파씨즘 역시 유럽에서 그 세(勢)를 강화하면서 쏘련의 존립 그 자체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말 이후 독일의 거대 금융자본의 재정지원과 지지를 받아 히틀러는 나치당을 건설하고, 1천만 명에 이르는 실업자를 안고 있는 국가의 선거에서 대승을 거뒀다. 1933년 1월에는 히틀러가 독일제국의 총리로 지명되어, 나치는 이내 독일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었다.

 

나치는, 무엇보다도, 공산당과 쏘련을 절멸시키겠다는 공약을 내걸었고 권력을 잡았던 것이다. 1930년대 중반에 히틀러는 독일의 군비를 제한하는 일체의 국제조약을 파기하고, 나치 독일을 유럽 최대의 군사강국으로 만들어 갔다. 쏘련은 나치 독일에 대한 방위 태세의 일환으로 군의 거대한 재무장에 착수했다. 1937년 쏘련의 군비예산은 영국과 프랑스의 그것들을 합친 것의 두 배에 달했다. 전쟁이 곧 닥쳐오리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었는데, 이 방어전쟁 속에서 사회를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활기찬 공산당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필요했다. 바로 그 때문에, 쏘련 공산당 내에서 관료주의와 부패에 대한 투쟁과, 진정으로 평당원들에 의해 지배되는 당을 만들기 위한 투쟁이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가 되었다.

 

 

1936년 8월 19-24일

뜨로쯔끼-지노비예프주의자 합동본부에 대한 재판

(지노비예프-까메네프 재판)

 

끼로프의 암살자인 니꼴라예프나 테러 조직인 레닌그라드 그룹 및 지노비예프, 까메네프 등등에 대한 1935년 1월의 재판 이후, 쏘련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음모의 일환으로 테러와 공격을 계획하고 있는 반대 조직들이 더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대두되었다. 1935년 중반에 지노비예프-까메네프 그룹의 전직 고위 정치인들 및 관료들과 수년간의 그들의 활동에 대한 또 다른 조사가 시작되었다. 대부분 공산당과 국가의 고위직 관료였던 16명의 고참 뜨로쯔끼주의자들과 지노비예프 추종자들이 나치 독일의 뜨로쯔끼 조직과 공모하여 파괴행위와 스파이 활동, 테러, 그리고 쏘련 정부와 공산당의 주요 인사들에 대한 공격을 조직해 온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전의 정치적 반대파가 폭력조직으로 변한 것이다. 당의 정치 노선에 관한 1927년의 당원 총투표에서 반대파가 1%도 얻지 못하고 패한 후, 피고인들은 폭력과 쿠데타만이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제1차 5개년 계획과 집단 농장들이 일구어 낸 생산에서의 놀라운 성과는 이들을 한층 더 압박했다. 그러한 생산의 성과 때문에 정부에 반대하는 정치 강령이 설 자리가 더 이상 없었던 것이다.

 

 

계획된 테러

 

피고인들의 공통점은 쓰딸린 정부와 싸우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불사한다는 점이었다. 무엇보다도, 피고인들은 끼로프의 살인을 준비하고 실행했던 것이 바로 뜨로쯔끼지노비예프주의자 합동본부였음을 털어놨다. 미수에 그친 쓰딸린과 보로쉴로프(Voroshilov)의 암살에 관한 상세한 내용들 또한 밝혀졌다. 동시에 쓰딸린과 보로쉴로프에 대한, 그리고 쥐다노프, 까가노비치(Kaganovich) 및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암살 준비들도 드러났다. 쿠데타 계획 역시 법정에서 밝혀졌다.

 

 

반대파 본부의 뜨로쯔끼

 

재판은 공개적으로, 국제 기자단뿐만이 아니라 모쓰끄바 주재 외교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피고인들은 언제나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었는데, 그 재판 과정 속에서 예기치 않았던 많은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예를 들면, 음모를 주도했던 인물은 뜨로쯔끼였으며, 그가 국외에서 지령을 보내어 쏘련 정부 요인들을 암살하고 파괴행위와 테러를 하도록 요구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피고인들이 법정에서 진술한 바에 따르면, 뜨로쯔끼는 수차례나 망명지에서 베를린이나 코펜하겐으로 건너와 일부 조직원과 직접 접촉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음모의 핵심을 조직했던 그의 아들 레오 쉐도프(Leo Sedov)가 쏘련 정부에 대한 뜨로쯔끼의 테러를 이끌었다.

 

법정에서 그들은, 1933년에 뜨로쯔끼의 동의하에 독일의 뜨로쯔끼주의자들과 게쉬타포 사이에 연락망을 조직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쏘련에 도착했을 때 그들 중 몇 명은 게쉬타포가 쏘련 내에 심어 둔 나치 요원들의 도움을 받았다. 뜨로쯔끼-지노비예프 합동본부의 피고인들에 대한 재판은 유죄판결로 끝났다.

 

 

공산당 내부의 공모

 

테러본부의 주동자인 지노비예프와 까메네프, 레인골드가 모반을 목적으로 정치적으로 협력하기 위해 쏘련 공산당의 고위 당원들과 접선해 왔다는 사실이 재판 과정에서 밝혀졌다. 고참 뜨로쯔끼파인 뿌뜨나(Putna) 장군 역시 뜨로쯔끼 일당의 테러활동에 적극적이었음이 재판 과정에서 지적되었다. 재판에 참석한 외교관들, 즉 진성 부르주아와 반사회주의자들의 집합체는 재판의 진실성을, 즉 그 공평성과 공정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당시 국제적으로 저명한 법률가이자 영국 의회의 의원이었던 재판관(Domaren; judge) 데니스 노웰 프리트(Denis Nowell Pritt)는 재판의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후에 런던의 신문 ≪뉴스 크로니클(News Chronicle)≫에 그 재판에 관한 글을 기고하였다.

 

재판관 프리트는 윈체스터(Winchester) 대학과 런던(London) 대학에서 법학에 관한 교육을 받았으며, 독일과 스위스, 스페인, 쏘련의 소송절차를 연구했다. 그는 쏘련 법정 상황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재판관 프리트는 ≪뉴스 크로니클≫에 이 재판의 공평성과 공정성을 증언하였다. 프리트에 의하면, 피고인들의 범죄는 법정에서 입증되었다. 나중에 ≪모쓰끄바 재판은 공정했다≫라는 제목의 소책자에서 프리트는 재판의 순수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오늘날 재판관 프리트의 의견을 소개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특히 중요하다. 쏘련에 적대적인 거짓 선전들이 여느 때보다 대규모로 이루어지고 있다. 실례를 무릅쓰고 우리는 재판관 프리트의 글에서 장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그 재판에 대한 그의 분석은 잇달아 벌어진 1937년과 1938년의 정치재판에도 적용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은 쏘련의 규정에 따라 재판과정이 언제나 동일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쏘련의 재판 절차에 관해서 영국의 법률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지 읽어 보자.

 

 

D. N. 프리트의 ≪모스끄바 재판은 공정했다≫[6]D. N. Pritt, The Moscow Trial was Fair, London 1936. <http://www.geocities.com/redcomrades/mo-trial.html>   [역주] 스웨덴어판에는 “D. N. 프리트의 ≪인민법정 앞의 … Continue reading*

 

혐의는 심각한 것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채 20년이 못 된 쏘비에트 러시아의 불안정하고 파란만장했던 역사의 여러 단계에서 우대를 받아 왔고, 반혁명 행위나 일탈행위를 저질렀다는 상당한 혐의를 받았으나 장래에는 충성을 다하겠다는 다짐하에 그러한 행위를 용서받았던 사람들인데, 그러한 사람의 한 무리가 이제는 끼로프(그는 실제로 1934년 12월에 암살되었다)와 쓰딸린, 보로쉴로프를 비롯하여 기타 저명한 지도자들을 암살하려는 냉혹하고 계획적인 음모를 장기간 꾸며 왔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국내에서 상당한 추종자들을 끌어모을 어떤 구실도 없이, 그리고 현존하는 쏘비에트 사회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어떤 현실적인 정책이나 철학도 없이, 단지 자신들이 권력을 잡으려는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갖은 어려움과 결점에도 불구하고, 외부 세계의 군사적ㆍ교역상의 적대에도 불구하고 쏘련 사회주의는 엄청나게 후진적이었던 한 아시아적 국가(Asiatic State), 약 19년 만에 세계적으로 중요한 국가로, 산업이 크게 발전한 국가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략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의 그것과 비슷했던 생활수준을 이미 동유럽의 여러 민족의 그것을 뛰어넘어 곧 산업이 발전한 서유럽 상류층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국가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혐의는 전혀 조작된 것이 아니었다. 피고인들 스스로 그 혐의를 인정했는데, 그들의 대다수는, 기록이 보여 주듯이, 강압적인 자백 요구에 맞서 자신을 방어할 만한 충분한 육체적ㆍ정신적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피고인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들이 자백하지 않을 수 없도록 무언가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는 낌새를 내비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그들이 원할 때마다 언제든 일어나 발언했으며, 심지어 장황하게 발언했다(얘기가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그들은 그들이 원하면, 간수를 대동하여 산책을 했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최후 진술들이었다. 쏘련의 법률에 따라서 피고인들이 마지막 발언을 했다. 검사 쉰쓰끼가 먼저 4-5시간 동안 정력적이고 명료하게 발언했다. 그는 대단히 지적이고, 온화한 성품의 영국 사업가처럼 보였다. 그는 한 번도 호통을 치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주먹으로 테이블을 치지 않았고, 좀처럼 방청객을 쳐다보거나 효과를 노린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거침없이 말했다. 그는 피고인들을 악당, 살인자들이라고 불렀고, 처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비록 이처럼 중대한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영국의 검찰청장들은 이렇게 강경하게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쏘련 정부를 통째로 전복하려고 했던 15명의 범인들에게 이제 발언할 권리가 주어졌다. 사람들마다 매우 장황하게, 짧게, 논쟁적으로, 약간의 탄원조로, 대부분이 유창하게, 격정적으로 발언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만장(滿場)한 방청객들을 향해서, 재판부를 향해서 말했다. 그들은 어떤 장애나 방해도 받지 않고 발언했던 것이다. 쏘련의 행정 당국은, 이 사건을 성공적으로 소추함으로써, 반혁명 행위를 근절하는 데 있어 대단히 커다란 걸음을 내디뎠을 것이다.

 

 

1937년 1월 23-30일

반(反)쏘련 뜨로쯔끼파 본부에 대한 재판

(뺘따꼬프-라데크 재판)

 

일부 지역에서는 평당원들에 의한 활기찬 당의 모습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진정한 노동자들의 당은, 국외의 뜨로쯔끼 조직과 동맹을 맺고 있던, 당 내부의 정치적 반대파에게는 위협이었던 것이다. 당 지도부에 대한 음모는, 1927년의 당원 총투표에서의 정치적 패배 이후에도 줄곧 비밀리에 계속되었다. 그러나 1934년 12월에 끼로프가 암살된 후 사회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고, 음모자들은 그들의 의도를 실현하기가 갈수록 더 어려워졌다. 이와 동시에 15개년 경제계획과 집단 농장의 성과를 비롯한 국가의 경제적인 성공은 음모 집단의 단결을 산산이 부수어 버렸다. 쏘련 정부 및 사회주의적 사회 발전을 좌절시키기 위해 수년 동안 은밀히 노력해 왔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의 마음이 중앙위원회가 취한 정책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생산성과에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음모 집단 내부의 분열로 정치경찰은 그 집단의 활동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입수할 수 있게 되었다. 공모자들 중 회개한 자들은 뜻밖의 결과를 보여 주는 정보를 제공했다.

 

 

자신들의 범죄를 자백하다

 

1937년 1월, 17명의 고위 관리들이 반역죄로 기소되어 최고법원의 군사위원회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자 모쓰끄바에는 커다란 사회적 동요가 일었다. 조직의 핵심을 이루는 주요 인물들은 뺘따꼬프, 쏘꼴니꼬프, 라데크 및 쎄레브랴꼬프였다. 모쓰끄바에서 열린 공개재판에서 피고인들은 자신들이 기소된 범죄들을 자백했고, 그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활동에 대해서도 진술했다. 기소된 17명의 관리들은, 독일에 있는 뜨로쯔끼파 조직과 접촉하며 이들의 지령을 받고 있던 비밀조직의 일원이었다. 그 비밀조직의 목적은 쏘련 정부의 폭력적 전복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 조직의 활동에는 공금횡령, 첩보활동, 파괴행위 및 테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직의 중심적 지도자인 뺘따꼬프의 공개재판에서 있었던 심문은 특히 중요했다. 뺘따꼬프는 후회하고 있었고, 뜨로쯔끼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자신이 저지른 범죄로 인해 사형선고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뺘따꼬프는 법정에서 라데크, 쓰미르노프, 쎄레브랴꼬프와 함께 이끌었던 테러 음모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했다. 뺘따꼬프는 제1차 5개년 경제계획 기간과 제2차 5개년 계획의 일부 기간 동안 수많은 대규모의 산업계획을 결정하는 지위에 있었다. 그가 사회주의 건설을 방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엄청나게 컸으며, 그 가능성을 이용했다. 아래의 모든 인용문들은 그 재판의 공개 기록에서 발췌한 것이다.

 

 

뺘따꼬프, 뜨로쯔끼파로 돌아가다

 

1920년대 말에 있었던 반대파들과의 격렬한 투쟁 후에,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 반대하던 모든 이들에게 새로이 기회를 부여했던 쏘련 정부의 정책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뜨로쯔끼파든, 정치적 우파나 당내의 소위 좌파에 속했던 다른 사람들이든, 쏘비에트 정부에 맞서 싸웠던 이들 모두가 고위직에 계속 머무르거나 복귀하도록 허용되었는데, 이로 인해 1930년대에 쏘련은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당시 뺘따꼬프의 임무는 쏘련의 석탄 광업 분야에서 사용할 중장비와 승강기를 구매하는 것이었다. 뺘따꼬프는, 쓰미르노프가 쏘비에트 정권과 당 지도력에 대항하는 투쟁을 심기일전하여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뜨로쯔끼의 지령을 설명하면서, 그러나 이는 정치투쟁 외곽에서 수행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자신에게 설명했다고 진술했다. 쉐도프는, 테러와 파괴행위, 암살 및 쏘련 내에서 진행 중인 전복공작(顚覆工作)을 통해 정권을 탈취한다는 뜨로쯔끼의 새로운 노선을 뺘따꼬프에게 확인해 주었다.

 

 

뺘따고프가 뜨로쯔끼파 본부와 파괴행위를 조직하다

 

뺘따꼬프는 쏘련 내에서 지노비예프-까메네프 조직이 경찰의 수중에 넘어갈 경우에 대비하여 새로운 반(反)혁명 본부를 구성하는 일을 맡았다. 이후에 뺘따꼬프의 조직은 뜨로쯔끼의 승인을 얻어 순수한 뜨로쯔끼파 본부(Troskyist centre), 소위 대체본부(parallel centre), 즉 지노비예프와 고참 좌파 당원들이 벌이던 활동의 대안이 되었다. 대체본부의 활동은 모쓰끄바로부터 우랄과 서부 시베리아, 우크라이나로, 그리고 차르꼬프(Charkov), 드네쁘로뻬드로프쓰끄(Djnepropetrovsk), 오데사, 끼예프 등의 도시들로 확산되었다. 뺘따꼬프는 자신의 고위직 권력을 이용해서 쏘련 전역으로 파괴공작원들과 암살자들을 파견했다.

 

뺘따꼬프는 법정에서 뜨로쯔끼파 조직의 활동을 자세히 설명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우크라이나, 서부 시베리아 및 우랄 지역에서의 파괴행위에 대한 뺘따꼬프의 증언

 

뺘따꼬프: 우크라이나에서, 주로 코크스 산업 및 화학 공업과 관련하여 파괴 활동들이 벌어지고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신축공장을 가동하는 것이었는데, 공장들은 급속히 후락(朽落)했고, 공장의 화학 부문들의 완공이 지연되거나 아예 거의 무산되었으며, 코크스 산업과 화학 공업에 투자된 자산이 절반까지나 그 가치를 잃었고, 새로운 코크스화 장치들이 손상되었습니다.

 

서부 시베리아의 뜨로쯔끼파 조직은 석탄 산업에서 가장 왕성한 파괴 활동을 벌였습니다. 이 파괴 작업은 쉐쓰또프와 그의 조직에 의해서 저질러졌습니다. 주로 점결탄(粘結炭, coking coal) 광산들에 불을 질렀습니다. 께메로보의 화학 꼼비나트에서도 새로 만든 설비의 가동을 지연시키고, 중요하지 않은 설비에 자금을 분산하는 것이었는데, 막대한 설비들이 항상 건설 중인 상태였고, 조업할 수 있도록 건설이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발전소와 관련한 파괴 활동은, 꾸즈네츠크 지역 전체의 효율적인 전력 자원을 감소시킬 것을 목표로 수행되었습니다.

 

우랄지역에서는 구리 산업에서는 가동 중인 구리공장들이 전면 가동되는 것을 방해하는 데에 주력했습니다. 공장에 인도된 구리가 엄청나게 낭비되었고, 손실되었습니다. 깔라찐쓰끄 공장(Kalatinsk Works)에서는 농축 설비가 항상 불량하게 가동되었고, 파괴 활동은 주로 중앙 우랄 구리 꼼비나트(Central Urals Copper Trust)의 관리자인 꼴레가예프가 이끌었습니다.[7]Report of Court Proceedings (재판 보고서), 1937, pp. 46-47.

 

그리고 뺘따꼬프는 이렇게 계속한다.

 

1934년 중반이었는데, 뜨로쯔끼는 그 동일한 지령 속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잡음으로써 일국(一國)에서만의 사회주의의 건설은 불가능하다는 그의 노선의 정당성이 완전히 입증되었음이 명백하고, 전쟁은 불가피하다며, 이제 우리 뜨로쯔끼파가 무언가 정치세력으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는 단지 피동적으로 관망하고 지켜만 보아서는 안 되고,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미리 이 패배에 능동적으로 대비(對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해서는 기간요원들을 조직해야 하고, 이 기간요원들은 말만으로는 조직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필요한 파괴 활동이 수행되어야 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이 지령 속에서 뜨로쯔끼는, 외국으로부터 필요한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블록[bloc, 여기서 ‘블록’은 뜨로쯔끼파가 이끄는 반대파를 의미한다. ― M. 소사]은 권력을 잡을 수도, 그것을 유지할 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문에 어떻게 하면 독일이나 일본과 같은 가장 침략적인 외국들과 임시협약을 맺을 수 있는가가 문제였고, 그, 즉 뜨로쯔끼는 스스로 이미 일본 및 독일 정부와 접촉을 하는 데 필요한 조치들을 취해 왔습니다.[8]ibid., pp. 52-53.

 

 

전쟁의 패배를 위한 뜨로쯔끼의 지령

 

뜨로쯔끼의 지령으로 뜨로쯔끼파 조직이 정권을 획득할 새로운 가능성이 대안으로 등장했다. 그것은 더 이상 단지 중앙위원회와 정부의 주요 인사들을 살해하거나 파괴 활동을 저지름으로써 쏘련에 정치적인 불안정을 야기하려는 방식이 아니었다. 바야흐로, 다가올 전쟁에서 뜨로쯔끼파 조직은 쏘련의 패배를 위해 일하려는 것이었고, 나치 독일과 파쑈 일본의 도움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뜨로쯔끼에 따르면, “자본주의로 후퇴할” 필요가 있었고, “이는 미리 합의된 조건대로 이들 국가에 수많은 이권을 넘김으로서 우리가 권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지원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했다.”[9]ibid., p. 55.

 

븨쉰쓰끼 검사의 질문을 받고, 뺘따꼬프의 가장 신뢰하는 벗인 라데크는 이렇게 대답했다. 장차 다가올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쏘련이 패배할 때 뜨로쯔끼파 블록이 권력을 인수하는 것과 관련한 뜨로쯔끼의 지령은,

 

자본주의로의 복귀, 자본주의의 회복이었고, 이것은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첫 번째 변화는 자본주의적 요소들을 강화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허가의 형태로 독일인들과 일본인들에게 많은 경제적 이권을 넘겨주는 것, 그리고 독일에 국제가격 이하로 원료와 식품, 유지(油脂)를 공급할 의무를 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10]bid., p. 56.

 

더 나아가서, 뜨로쯔끼는 편지에서 이렇게 설명했다고 라데크는 말했다.

 

아마 영토의 양도도 필요할 것이며 … 그것은 우크라이나로 영토를 확장하려는 독일을 만족시키는 문제였습니다. 일본과 관련해서는 뜨로쯔끼는 아무르(Amur) 지역과 연해주를 양여하는 것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11]ibid., p. 58.

 

 

뜨로쯔끼, 나치와의 협력을 승인하다

 

뺘따꼬프와 라데크는 뜨로쯔끼의 지령들에 경악하여 그를 직접 만나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2시간에 걸쳐 회동을 가졌고, 뜨로쯔끼는 그 편지의 내용이 사실임을 확인해 주었다. 나아가, 뜨로쯔끼는 뜨로쯔끼파 대체본부의 활동들에 대해 불만스러워했는데, 그는 그 활동이 아주 저조하다고 생각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뜨로쯔끼는 시설과 공장들에 대한 훨씬 더 광범한 파괴를 요구했고, 쓰딸린필두로 쏘련의 지도자들에 대한 일련의 암살을 실행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뜨로쯔끼는 뺘따꼬프에게 대체본부가 “전쟁에 대비해서 기간요원들을 훈련시켜야 한다고, 다시 말해서, 쏘련을 침략하는 파씨스트를 도와파괴활동과 양동작전을 펼칠 요원들을 훈련시켜야 한다고 요구했다.[12]ibid., p. 62. 뜨로쯔끼와의 이 대화로 하나의 새로운 요소가 발생했다고 뺘따꼬프는 법정에서 진술했다.

 

뺘따꼬프: 말하자면, 새로운 무언가가 아주 명확하게 체계적으로 형성되었습니다. 본질적으로, 뜨로쯔끼파 조직은 파씨즘의 부속기관으로 변질되고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그때서야 그것이 명백해졌습니다.[13]ibid., p. 66.

 

뜨로쯔끼파 대체본부는 계속 뜨로쯔끼의 요구를 수행했고, 이제 그들은 중앙위원회의 지도자들, 즉 쓰딸린과 몰로또프(Molotov), 까가노비치(Kaganovitj), 보로쉴로프(Vorosjilov), 오르죠니끼제(Ordzjonikidze) 등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뺘따꼬프는 이 모든 것을 공개 재판에서, 국제 취재단과 외교사절단의 면전에서 진술했다. 대체본부의 활동은 그것이 발각되어 조직원들이 검거된 1936년 초까지 계속되었다.

 

 

나치 독일과 미국에서의 뜨로쯔끼파의 활동

 

오늘날 뜨로쯔끼주의자들이나 그들에 대한 자유주의적ㆍ반공주의적 찬양자들은 뜨로쯔끼가 나치당 및 게쉬타포와 협력했다는 보고서들을 매우 회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뜨로쯔끼와 게쉬타포가 협력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재판에서의 공개적인 진술들에만 매달릴 필요는 없다.

 

1934년 이후 나치 독일은, 나치가 국가를 장악한 지 겨우 1년 만에 이미 수천 명의 독일 공산주의자들이 살해되고, 또 다른 수만 명의 공산주의자들이 강제수용소들에 갇혀 있는 완전한 경찰국가가 되어 있었다. 게쉬타포의 허락이 없이는 어떤 정치적 활동도 절대적으로 불가능했고, 러시아 혁명가들이 관련된 그 어떤 정치적 활동도 불가능했다.

 

미국에서는 쏘련 정부에 대한 뜨로쯔끼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서 한 뜨로쯔끼파 조직이 결성되었다. 이 조직의 주요 목적흑색선전을 통하여 쏘련에 적대적인 대중들에게서 광범위한 지원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이 그룹은 일련의 저명한 지식인들을 조직하여 언론에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할 가능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뜨로쯔끼는 자신의 글들을 직접 친()나치 허스트 신문사(pro-Nazi Hearst-press)에 보냈다. 허스트가 히틀러를 만났던 1934년 이후 허스트 언론은 미국에서 나치즘을 대변하는 거대한 선전 매체가 되었다. 바로 그곳에 뜨로쯔끼는 자신의 글들을 출판하도록 보냈던 것이다. 허스트 신문에는 뜨로쯔끼의 글들이, 무쏠리니(Mussolini)―그는 거기에 그의 고정 기고란을 가지고 있었다―의 연대기 및 괴링(Göring)의 공공연한 나치 선전물들과 나란히 실려 있었다. 뜨로쯔끼의 글들은 나치의 반쏘 선전 속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가며

 

어찌 뜨로쯔끼를 혁명가라 부를 수 있는가?! 아직도 그를 추종하는 뜨로쯔끼주의자들이 있다는 것에 참으로 노동자계급적ㆍ사회주의적으로 애석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을 통해 역사의 진실을 알아 갈수록, 더 정확히 말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반동들,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배계급들의 악행을 접할수록, 가슴이 답답하고 분노에 머리가 어질어질할 뿐이다.

(다음 호에 계속)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J. V. Stalin, Works, Vol. 12, Moscow, 1955, p. 242.; J. V. Stalin, Works, Vol. 13, Moscow, 1955, p. 288.; J. V. Stalin, Problems of Leninism, Peking, 1976, p. 874.
2 Vladimir I. Lenin, “러시아 공산당(볼) 제8차 전국협의회 중앙위원회 정치보고”, Collected Works, Vol 30, Moscow, 1965, p. 186.
3 J. Arch Getty, Origins of the Great PurgesThe Soviet Communist Party Reconsidered, 1933-1938, New York, 1985, p. 46.
4 [역주] 기본적으로 이른바 ‘일국 사회주의론’을 반대하는 뜨로쯔끼는,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후진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 건설 가능성을 부정하는 우 편향을 범하고 있지만, 동시에 1920년대 중반에 NEP의 조기 종결과 이른바 ‘사회주의적 본원적 축적’을 주장하던 뜨로쯔끼는 극좌 편향을 대표했다.
5 J. V. Stalin, “Report to the Seventeenth Party Congress on the Work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P.S.U.(B.)”, Problems of Leninism, Peking, 1976, p. 694.; [J. V. Stalin, “Rechenschaftsbericht an den XVII. Parteitag über die Arbeit des ZK der KPdSU(B), 16. Januar 1934”, Stalin Werke, Bd. 13, Berlin, 1955, S. 273. ― 역자]
6 D. N. Pritt, The Moscow Trial was Fair, London 1936. <http://www.geocities.com/redcomrades/mo-trial.html>

 

[역주] 스웨덴어판에는 “D. N. 프리트의 ≪인민법정 앞의 지노비예프와 까메네프≫”라고 되어 있다.

* 이 책의 영역본에는 D. N. Pritt로부터의 아래의 긴 인용이 단 두 개의 문단으로만 나뉘어 있으나, 여기에서는 <www.marxists.org/history/international/comintern/sections/britain/pamphlets/1936/moscow-trial-fair.htm>에 따라 여러 문단으로 나누었다.

7 Report of Court Proceedings (재판 보고서), 1937, pp. 46-47.
8 ibid., pp. 52-53.
9 ibid., p. 55.
10 bid., p. 56.
11 ibid., p. 58.
12 ibid., p. 62.
13 ibid., p.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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