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비정규직 노동운동 어디로 가야 하나

 

조남수 │ 회원, 노동전선 정책국장

 

 

1. 들어가는 말

 

지금 이 땅의 노동운동에서 비정규직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지는 아주 오래된 것 같다. 그만큼 현재 비정규직 노동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반영한다. 동시에 최근에 고용이 전적으로 비정규직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고, 비정규직을 주위에서 발견하기가 다반사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비정규직 문제는 노동자가 존재하는 어느 곳이나 가장 열악한 임금 및 노동 조건을 대표하고 있다. 흔히 비정규직 노동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표현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 높은 노동강도 등이다. 주요하게도 이러한 비정규직 문제는 또한 대부분 여성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비정규직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여성 노동자이다. 페미니즘에서 전문적으로 여성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현실적인 삶에서 여성 문제의 본질적이고도 주요한 문제는 경제적인 문제, 그것도 구체적으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노인 빈곤 그리고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의 기회조차 박탈당한 생존의 벼랑 끝에 서 있는 모든 여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에서는 특히 비정규직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엇을 의미하고, 비정규직 문제를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총체적으로 바라보면서 향후 비정규직 운동이 어떠한 내용을 지향하고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즉 비정규직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현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갈등이 존재하는 바, 그들 사이의 임금 및 노동 조건의 차이는 무엇인가이다. 여기서 문제는 노동자들이 주어진 조그마한 파이를 둘러싸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혈투를 넘어서서, 자신들이 만든 파이 전체를 가져가는 생산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자랑하는 거대한 생산력은 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가지는데, 이것이 모든 인민들에게 의미하는 바를 해명할 것이다. 비정규직 운동이 정규직과 더불어 궁극적으로 실업을 매개로 비정규직을 생산하는 자본-임노동 관계를 지양하는 운동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살펴볼 것이다. 자본-임노동 관계의 철폐가 의미하는 바는, 비정규직 운동이 이제까지처럼 노동조건 개선과 정규직화에 목을 매지 말고,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계급 대립 자체를 철폐함으로써 비정규직도 철폐하는 변혁운동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해방된 사회에서는 지금의 사회구조처럼 생산물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의식적으로 계획적으로 이것들을 통제함으로써 노동이 해방이 되고, 여성이 해방되고, 인간이 해방되는 사회가 될 것이다.

 

 

2. 비정규직 노동자

 

1) 통계로 본 비정규직 노동자

 

통계청이 2021년 8월 실시한 ‘경제활동 인구조사 부가조사’에 의하면 비정규직은 904만 명으로 임금노동자의 43%를 차지하고, 정규직은 1,196만명으로 전체 노동자의 57%이다. 세부 고용형태별로 살펴보면 기간제가 21.6%로 가장 많고, 시간제(파트타임)도 16.7%에 달하고 있다. 비정규직의 94.3%(852만명/904만명)가 임시 근로자이거나 임시 근로를 겸하고 있어, 고용상의 불안정을 겪고 있다.

 

성별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포를 보면 남자는 정규직이 744만 명(64.6%), 비정규직이 408만 명(35.4%)으로 정규직이 많다. 여자는 정규직이 452만 명(47.7%), 비정규직이 496만 명(52.3%)으로 비정규직이 더 많다.

 

남성은 20대 초반 이하 청년층과 60대 이상 고령층에서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많다. 이에 반해 여성은 20대 초반 이하 청년층과 50대 후반 이상 중고령층만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많고, 그밖에 연령층에서는 정규직이 많다.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는, 자본과 국가가 규정하는 노동자 개념상에서 오는 실질적인 노동자, 예를 들면 특수고용 형태의 노동자 등의 누락으로 이 사회의 실질적인 임금노동자 수를 축소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가장 열악한 작업장에서 노동하는 비정규직에 대한 완전한 자료를 수집하는 데 기술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그러므로 공식적인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이 전체 노동자의 43%를 차지한다고 하면, 국가기관에서 사용하는 노동자 규정에서 누락된 특수고용 노동자 등 실질적 노동자와 통계에서 잡히지 않은 사각지대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감안하면 비정규직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50%를 상회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음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은 남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수가 50살부터 5년 단위로 41만명, 43만명, 48만명, 33만명, 37만명으로 일정한 수로 계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수 또한 50살부터 5년 단위로 통계치가 56만명, 50만명, 52만명, 34만명, 52만명으로 남성 비정규직 노동자와 같이 일정한 수로 계속적으로 이어지고 있고, 여성 비정규직이 수에서 남성 노동자보다는 조금 상회하고 있다. 또한 위의 통계치는, 노동자군의 일부는 노동자의 생계수단의 가치인 임금이 겨우 가계 생계를 영위할 정도로만 그쳐 노후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사회에서 늙어서도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있는 일군의 노동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별 고용형태별 임금격차를 살펴보면, 2021년 월 평균임금이 여성(209만원)은 남성(326만원)의 64.2%고, 비정규직(180만원)은 정규직(344만원)의 52.2%다. 남성 정규직 임금(383만원)을 100이라 할 때 남성 비정규직(222만원)은 57.8%, 여성 정규직(280만원)은 73.0%, 여성 비정규직은(145만원)은 37.9%다. 남녀 차별보다 고용형태에 따른 임금격차가 더 심하고, 남녀 고용형태에 따른 임금 차별이 비정규직 여성에게 심하게 적용됨을 알 수 있다

 

2) 비정규직 노동자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비정규직이 이 사회에서 지배적인 고용형태로 점차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것이 최종적으로 이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을 구성하는 새로운 계층으로 고착화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보편적인 고용형태인 비정규직은 무엇인가를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이다. 맑스는 이것에 대한 답변의 단초를 비정규직을 실업 형태의 하나로 규정하면서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상대적 과잉인구의 제3의 범주인 정체적 과잉인구는 현역 노동자군의 일부를 형성하지만, 그러나 아주 불규칙하게 고용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것은 자유롭게 처분할 .있는 노동력의 무진장한 저수지를 자본에게 제공한다. 그들의 생활 상태는 노동자계급의 평균적인 표준 수준 아래로 떨어지고, 바로 이것이 그들을 자본의 특유한 착취부문의 광범한 토대로 만든다. 최대한의 노동시간과 최소한의 임금이 그들을 특징짓고 있다. 우리는 이미 가내노동이라는 항목 하에서 이미 그 주요 모습을 알게 되었다. 이 과잉인구는 대공업과 대농업의 초과인원들로부터, 그리고 특히 수공업 경영이 메뉴팩춰 경영에, 메뉴팩춰 경영이 기계제 경영에 굴복하여 몰락하는 산업부문들로부터 끊임없이 보충된다. 그 규모는 축적의 규모 및 활력과 더불어 ‘과잉화’가 진척됨에 따라서 팽창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과잉인구는 노동자계급 중 자신을 재생산하고 영구화하는 한 요소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 요소는 노동자계급의 총 증대에서 나머지 요소들보다 비율적으로 보다 더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1) (강조는 인용자)

 

위에서 맑스는 오늘날 아주 불규칙하게 고용된 현역 노동자군의 일부인 비정규직을 정체적 과잉인구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오늘날 비정규직으로 표현되는 정체적 과잉인구가 불규칙하게 고용되어 ‘최대한의 노동시간’, ‘최소한의 임금’으로 특징지어지고, ‘노동력의 무진장한 저수지’를 자본에게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맑스가 위에서 지적하듯이 당시에 정체적 과잉인구가 기계제 경영에 의한 대공업과 대농업의 초과인원으로부터 끊임없이 보충된다고 지적한다. 일본에서는 80년 이후 종신고용제의 종말과 더불어 비정규직이 전면적으로 도입되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김영삼 정부 때 신자유주의 도입과 더불어 노동법 개악을 통한 정리해고제의 도입을 시작으로 비정규직이 단초가 마련되었다. 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IMF 경제 위기를 거치면서 김대중ㆍ노무현 정부가 노동진영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 도입을 위한 법적 제도적 체제를 구축한 이후 비정규직이 현장에 전면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맑스는 당시에 정체적 과잉인구가 자본주의 초기의 대공업과 대농업의 초과인원과 수공업 경영의 몰락으로부터 보충된다고 지적한다. 지금은 AI로 표현되는 고도의 과학기술문명이 적용되는 산업 부문에서 기존에 고용된 노동력의 방출이 눈에 띄게 보이고 있다. 심지어 주차장 및 편의점조차 무인 시스템이 점차적으로 도입되고 있다. 이상에서 보듯이 비정규직은 신자유주의가 도입되면서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초기에도 존재하였고, 신자유주의가 전면화되면서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고용형태가 되었다. 그렇다면 비정규직이 본질적으로 정체적 실업의 형태라면, 근원적으로 실업은 왜 발생하는가가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실업 발생의 원인을 설명하면 정체적 과잉인구인 비정규직 노동자가 왜 발생하는가 혹은 왜 존재하는가도 완전히 풀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비정규직과 실업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맑스는 그의 유명한 저서 ≪자본론≫에서 ‘왜 자본주의사회에서 실업문제가 항시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노동자 인구는 그 자신에 의해 생산되는 자본이 축적됨에 따라, 자기 자신을 상대적으로 불필요하게 하는 수단들을 생산한다.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특유한 인구법칙인 바, 실제로 특수한 역사적 생산양식은 어느 것이나 그것의 특수한, 역사적으로 타당한 인구법칙을 가지고 있다. 추상적인 인구법칙이란 단지 동물에게만, 그것도 인간이 역사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한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잉여노동자 인구가 축적의, 즉 자본주의적 토대 위에서의 부의 발전의 필연적 산물이라면, 이 과잉인구는 거꾸로 자본주의적 축적의 지렛대로, 아니 실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존재조건으로 된다. 그 과잉인구는 마치 그것이 자본 자체의 비용으로 육성된 것처럼 아주 절대적으로 자본에 속하는,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산업예비군을 형성한다. 그것은 자본의 변덕스러운 가치증식욕을 위해서 현실적인 인구증가의 제한으로부터 독립하여 언제나 준비되어 이용할 수 있는 인간재료를 창조한다.”2) (강조는 인용자)

 

맑스는 위에서 자본축적이 진행됨에 따라서 불가피하게 산업예비군, 즉 실업이 수반된다고 주장한다. 즉 노동자 인구는 그 자신, 즉 가변자본과 생산수단, 즉 불변자본의 결합으로 상품을 생산한다. 자본은 무한한 이윤 추구 본성으로 인해, 고정된 양의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으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의 양을 더욱 더 늘려 더욱 더 큰 규모로 확대 재생산한다. 확대재생산, 즉 자본축적이 진행됨에 따라, 노동자 인구는 생산에서 생산수단에 비해서는 더욱 더 적은 규모로 자기 자신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만든다. 이러한 잉여인구는 자본의 요구에 언제든 부응할 수 있는 산업예비군으로 존재하고, 이제는 이것이 다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존재조건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표현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손으로 창조한 생산수단의 양적, 질적 발전이 상대적 과잉인구, 즉 산업예비군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이 산업 예비군의 하나의 형태가 정체적 실업이라는 것이고, 이것이 오늘날의 비정규직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비정규직 고용형태가 점차 광범위하게 모든 생산 현장과 산업 현장에 스며들고 있다. 물론 특수고용 노동자의 경우도 비정규직의 하나의 고용 형태로 보아야 한다. 실질적 자본가는 법적 형식의 문제로 그의 실질적인 책임은 피하면서도 더욱더 세련된 형태로 노동자를 통제한다.

 

 

3 비정규직 문제에서 제기되는 쟁점

 

1) 임금기금설

 

비정규직이 광범위하게 도입되면서 비정규직 투쟁이 전국 곳곳에서 계속 발생하고 있다. 이에 따라 노동운동 진영 내부에서 비정규직 운동의 중요성과 관심이 점차적으로 높아져왔다. 점차 비정규직 운동이 활기를 띠는 만큼 단위 사업장 내에 정규직과의 반목과 갈등이 고조되었다. 이것은 노동운동 내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즉 비정규직 운동이 추구하는 노동조건 및 처우개선과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투쟁에서 정규직 노조가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 적대적이기조차 하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 이유는 비정규직이 정규직화되면 기존 정규직의 임금과 노동조건의 혜택이 비정규직에게도 공유되면서 기존 정규직의 몫이 현저히 줄어든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적인 사고가 현장에 유포되고 지배하게 될 때, 단위 사업장에서 자본에 대한 전선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강고한 연대 투쟁이 방해받고 있는 실정이다. 정규직이 단순한 비정규직 연대 투쟁 차원을 넘어 소위 “을끼리의 전쟁”으로 적전 분열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즉 자본과 국가와의 대적 전선에 모든 노동자들이 일치단결하여 싸워도 쉽지 않은 상황인데, 단위 사업장 안에서 노동자들끼리 전투를 벌이는, 그야말로 안타까운 상황이 종종 연출되고 있다. 경제학설사에서는 이러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갈등의 기저에 놓인 사상을 ‘임금기금설’, 혹은 ‘노동기금설’ 이라고 일컫는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주어진 시점에서의 사회적 자본의 고정된 량이라는 독단은, 팽창과 수축의 운동과 같은, 생산의 가장 통상적인 현상들과 충돌할 뿐 아니라 축적 그 자체마저 거의 이해할 수 없게끔 한다. 따라서 벤담이나 그의 패거리인 맥컬록, 밀, 기타 등등에 의해서 그것이 주장된 것은 오직 “공리주의적” 저의가 있었기 때문일 뿐이었다. 그들은 특히 자본 중에서 노동력과 교환되고, 그들이 무차별적으로 “임금기금”, “노동기금”이라고 부르는 부분에 이 독단을 적용하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그것은 사회적 부의 한 특수한 부분, 즉 매순간마다 자연이 숙명적인 한계를 설정하고 있는 일정량의 생활수단의 가치이며, 이 한계는 노동자계급이 아무리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해도 허사다. 임금노동자들 사이에서 분배되는 총액이 이렇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그 결과, 만일 분배에 참여하는 사람들 각자에게 귀속될 몫이 너무나 작다면, 그것은 그들의 수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고, 결국 그들의 불행은, 사회적 질서 때문이 아니라, 자연적 질서 때문인 것이 된다.”3)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부르주아 계급의 임금기금설은 전체 노동자가 사회에서 자본가로부터 받는 임금의 전체 총액은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개별 노동자가 받는 임금의 크기는 노자 간의 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져 있는 자연적 질서라는 것이다. 각 개별 노동자가 받는 임금의 크기는 노동자의 수에 따라서 그 크기가 변하게 된다. 즉 노동자가 많으면 임금이 적고, 적으면 임금은 많다. 이러한 사고를 정규직과 비정규직에 적용하면, 비정규직이 많이 받으면, 정규직은 그만큼 적게 받게 된다.

 

그러나 일정한 시점에서 사회적 자본은 고정된 크기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이 당연히 침체, 중위의 호황, 번망기, 공황 등의 팽창과 수축같은 보편적인 운동을 동반한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은 무한한 이윤 추구 본성상 확대 재생산하는 경향을 필연적으로 지니게 된다. 이것은 자본이 더욱 많은 이윤 추구를 위하여 자본 자체를 키우려는 속성을 가지므로, 생산수단에 투여되는 불변 자본뿐만 아니라 노동력에 투여되는 가변 자본 자체도 더욱더 커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한 사회에서 특정한 시점에서 사회 전체에서 총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의 크기는 결코 고정된 양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적 자본은 사회적 부의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자본의 일부에 불과한 임금기금이 사회적 부의 고정적이고 또한 미리 정해진 부분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 임금기금의 상대적 크기는 사회적 자본이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으로 분할되는 비율에 의존하는데, 이 비율은, 이미 본 바와 같이, 그리고 뒷장들에서 다시 보다 더 상세히 설명하는 것처럼, 축적과정 내내 계속 동일한 채로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이다.”4)

 

먼저 지배계급들이 사회적 부의 막대한 부분을 낭비한다. 자본가(놀고먹는 화폐자본가, 즉 투기꾼들 포함)들, 지주(불로소득자)들의 사치와 향락, 정부기구의 비생산적 지출 등등. 따라서 사회적 자본은 사회적 부의 일부분일 뿐이다. 전체 사회적 자본은 사회 전체 부 중에서 어느 만큼이 생산에 투하되어지는 지에 따라서 변동하고 고정된 크기가 아니다. 따라서 임금기금도 변한다. 또한 자본이 확대재생산되는 과정에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투입 비율이 변동되어, 사회적 자본의 양이 같아도 임금기금의 크기는 변화한다. 자본이 축적되면서 가변자본은 불변자본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적은 비율로 증가한다.

 

“사회적 부 중에서 불변자본으로서, 즉 소재적으로 표현하면, 생산수단으로서 기능해야 할 부분을 가동하기 위해서는 일정량의 살아 있는 노동이 필요하다. 이 량은 기술적으로 주어져 있다. 그러나 이 노동량을 유동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노동자의 수는 주어져 있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것은 개개의 노동력의 착취도에 따라서 변동하기 때문이고, 또한 이 노동력의 가격이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가격의, 게다가 대단히 탄력적인 최저한도가 주어져 있을 뿐이다.”5)

 

위에서 지적하는 것은, 생산수단을 가동하기 위한 일정 양의 노동이 필요한데, 문제는 이 노동 양에 대응하는 노동자의 수는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위 현장의 노자 간의 힘 관계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즉 노동의 힘이 센 곳에서는 일정하게 필요한 양의 노동을 수행하기 위하여 고용된 노동자의 수가 많을 것이고, 노동의 힘이 약한 곳에서는 그것을 수행하기 위한 고용된 노동자의 수가 적을 것이다. 맑스는 덧붙여 노동자가 생존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동력의 가치, 임금의 최소한도는 주어져 있지만, 노자간의 힘의 관계에서 의해서 그것이 결정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결국 노동자계급의 과제는 “을끼리의 전쟁”이 아니라, 을끼리 단결하여 노동기금을 최대한으로 증가시키는 것, 즉 소위 “파이를 늘리는 것”이다.

 

2) 공정담론과 비정규직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제기된 것은 문재인 정부 초기의 인천국제 공항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둘러싸고 인천국제공항 정규직과 취업 준비생들의 격렬한 반발 때문이었다. 이후 조국 사태를 계기로 은수저 흙수저라는 신조어가 생겨났고, 공정이라는 담론이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정규직은 많은 소위 스펙을 쌓고 시험을 치루고 입사하였는데,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는 것이 과연 공정한가라는 질문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공정이란 무엇인가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험이라는 객관적 기준으로만 공정이 담보되는 것인가라는 문제, 즉 스펙을 쌓고 시험을 치르기 위하여 엄청난 비용이 드는 데 이 비용을 모든 취업 준비생이 감당할 수 있는가도 문제이기도 하다. 경쟁은 자본주의의 질서를 전제로 하는데, 자본주의 질서 자체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맑스는 아래와 같이 설파한다.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가 그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유통, 즉 상품교환이라는 영역은 실은 천부인권의 진정한 낙원이었다. 여기에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유ㆍ평등ㆍ소유 그리고 벤담뿐이다. 자유! 왜냐하면, 어떤 상품, 예컨대 노동력의 구매자와 판매자는 오로지 그들의 자유의지에 의해서만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유롭고 법률적으로 같은 신분의 인격으로서 계약을 체결한다. 그 계약은 거기에 그들의 의지의 공통의 법률적 표현이 주어진 최종결과이다. 평등! 왜냐하면, 그들은 상품소유자로서만 서로 관련을 맺고, 등가물과 등가물을 교환하기 때문이다. 소유! 왜냐하면, 각자는 오직 자기의 것만을 자유롭게 처분하기 때문이다. 벤담! 왜냐하면 쌍방의 누구에게나 중요한 것은 그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결합시켜 하나의 관계를 맺게끔 하는 유일한 힘은, 그들의 이기주의, 그들의 특별이득, 그들의 사적 이익이라는 힘뿐이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각자가 자신에게만 관심을 갖고 다른 사람은 결코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사물의 예정조화에 따라서, 혹은 전혀 빈틈이 없는 섭리의 비호 하에서 그들 상호의 이익, 공동의 이익, 전체의 이익이 되는 일만을 수행하는 것이다.

 

속류 자유무역론자가 이곳에서 자본과 임금노동의 사회에 대한 직관들, 개념들 및 자신의 판단기준을 차용하고 있는 이 단순유통, 즉 상품교환의 영역을 떠날 때, 우리 등장인물들의 면모는 이미 얼마간 바뀌어 나타난다. 이전의 화폐소유자는 자본가로서 앞장서 걸어가고, 노동력의 소유자는 그의 노동자로서 그의 뒤를 따라간다. 한 사람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으며 사업의 일념으로, 다른 사람은 자기 자신의 가죽을 시장에 팔아버렸기 때문에 이제 무두질 당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는 사람처럼 겁에 질려 마지못해서.” 6)

 

노동력의 구매자와 판매자는 그들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자유롭고 법률적으로 같은 신분의 인격으로서 계약을 체결한다. 또한 그들은 상품소유자로서 평등한 관계에 있다. 각자 자기들이 자유롭게 처분할 것을 소유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력의 구매자와 판매자는 서로의 이익이 되는 행위만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 이외에는 소유한 것이 없는 노동자는 노동력을 판매하기 위하여 자본가와 자유로운 계약을 한다. 이에 노동자는 그 대가로 삶을 영위한다. 노동력의 판매자는 법 앞의 평등이라는 형식으로 자본가와 자유로운 계약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생산수단이 없는 노동자가 고용되어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실업 상황은 이 사회에서 굶어 죽는 것을 의미한다. 맑스는 이러한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의 외양과는 다르게, 자본가는 앞장서서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으며” 가고 그의 노동자는, “겁에 질려 마지못해서” 그의 뒤를 따라간다고 묘사한다. 즉 노동자는 자본과의 관계 속에서 외형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결코 자유롭고 평등하지 않다. 이것은 결코 자유주의자가 그토록 강조하는 능력주의도 기회의 균등도, 가진 것이 없는 자에게는 결코 이 아수라 세상에서 구원의 빛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정담론은 자본과 임노동관계가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결코 성립할 수 없다. 즉 노동자가 자본가로부터 노동력의 가치인 임금을 받고 실업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자본-임노동 관계 자체가 불평등하므로 결코 공정이라는 단어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공정이라는 단어가 횡행하는 것은 이 사회가 결코 그것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한다. 맑스는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평등하지 않은 처지를 아래와 같이 정확하게 묘사한다.

 

“노동자는 그가 원하는 즉시 그가 자기 자신을 빌려 주었던 그 자본가를 떠난다. 그리고 자본가는 자신이 노동자로부터 어떠한 이득도 보지 못하거나 의도했던 만큼의 이득을 보지 못하게 되는 즉시, 자기가 좋다고 생각할 때면 언제나 노동자를 해고한다. 그러나 노동력의 판매가 유일한 수입원인 노동자는 자신의 생존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구매자 계급 전체, 즉 자본가 계급을 떠날 수 없다. 그는 이 자본가 혹은 저 자본가에게 속하지는 않지만 자본가계급에게 속한다. 더구나 자신을 주인에게 데려가는 것, 즉 이 자본가계급 속에서 구매자를 찾는 것이 그의 책무이다.”7) (강조는 인용자)

 

노동자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본가에게 유일하게 소유한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는 처지여서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예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형식적으로 이 자본가 저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팔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자본가계급에게 그것을 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자본가에게 종신으로 고용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노동자계급 전체는 비정규직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필연적인 산물인 동시에 자본주의 축적의 지렛대인 실업이 노동자들에게 필사적인 생존경쟁을 부채질한다. 그리하여 청년 실업이 계속적으로 사회적 문제가 되고, 노년에 들어서도 노인들이 거리에서 폐지를 줍고,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의 근원적 해결 없이 실업이나 비정규직 문제들에 대해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의 부족을 이유로 사회적 패배자로 낙인찍는 것은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노동자들이 생산한 생산수단이 소수의 사적 소유로 되어있기 때문에, 다수의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을 가진 자들에게 노동력을 파는 것 자체, 자본과 임노동 관계 자체가 불평등하고 불공정하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간의 임금과 노동조건의 공정성을 논하기 전에, 시야를 확장하면 노동과 자본 간의 관계 자체가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문제 삼아야 할 것이다.

 

자본은 이윤과 이자를 얻고, 지주는 지대를 얻는다. 비정규직을 포함한 노동자는 이 모든 것을 생산하지만, 임금과 실업과 빈곤과 고통을 얻는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전제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사회 양극화의 주범이다.

 

3) 생산의 사회화와 개인

 

다른 한편으로 공정이라는 잣대는 부르주아적 언어로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에 맞게 대우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노동의 결과에 따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과 노동조건의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이야기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정규직은 노동의 결과가, 즉 노동생산성이 좋다는 것이고, 비정규직은 노동의 결과가 상대적으로 비정규직에 비해서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엥겔스가 아래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생산수단 자체의 성격 전화와 더불어 생산 자체도 사회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과연 개인의 노동의 결과, 더 나아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노동의 결과를 전체의 생산과정과 별개로 측정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그곳(맑스의 ≪자본론≫-인용자)에서도 논증되었다시피 부르주아지는 생산 수단을 개인의 생산 수단에서 사회적 생산 수단으로, 요컨대 오로지 인간들의 총체에 의해서만 사용될 수 있는 생산 수단으로 전화하지 않고서는 저 제한된 생산 수단을 강력한 생산력들로 전화할 수 없었다. 물레, 베틀, 대장간의 해머를 대신하여 방적기, 역직기, 증기 해머가 등장하였다; 개별 작업장을 대신하여 수백 수천 명의 공동 작업을 요구하는 공장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생산 수단과 마찬가지로 생산 자체도 일련의 개인적 행동에서 일련의 사회적 행위로 전환하였고, 생산물도 개인들의 생산물에서 사회적 생산물로 전환하였다. 이제는 공장에서 나오게 된 방사, 직물, 금속 제품 등은 많은 노동자들의 공동 생산물이 되었으며, 요컨대 완성되기 전에 많은 노동자들의 손을 차례차례 거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이렇게 말할 수 없다: 그것을 내가 만들었고, 그것은 나의 생산물이다.”8)

 

위에서 엥겔스가 언급하다시피 주류경제학에서 ‘규모의 경제’라고 일컬어지는 거대한 생산 규모는 개인의 생산수단을 사회적 생산수단으로, 생산 자체도 개인적 행동에서 사회적 행위로, 생산물도 개인의 생산물에서 사회적 생산물로, 공동의 생산물로 전화시킨다. 최고도의 생산력을 자랑하는 현대의 생산과정 자체가 수많은 공정에 수많은 노동자가 참여하는 협업과 분업의 과정이기 때문에 어느 개별 노동자가 특정한 생산물에 어느 정도 기여하였는가를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맑스는 아래와 같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고도의 협업과 분업으로 이루어지는 생산과정의 이점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개 기병소대의 공격력이나 1개 보병연대의 방어력이 각 기병들과 각 보병들에 의해 개별적으로 전개되는 공격력의 합계 및 방어력의 합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처럼, 개별 노동자들의 힘의 기계적 합계는,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분할되지 않은 작업을 동시에 함께 할 때에, 예컨대 무거운 짐을 들어 올린다든가, 크랭크를 돌린다든가, 길에서 장애물을 치운다든가 할 필요가 있을 때에 발휘되는 사회적 역능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러한 경우, 결합된 노동의 성과는 개별화된 노동에 의해서는 전혀 산출될 수 없거나, 휠씬 장기간에 걸쳐서만, 혹은 왜소한 규모로만 산출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협업에 의한 개별적 생산력의 제고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집단력일 수밖에 없는 생산력의 창조다.

 

많은 힘들이 하나의 총력으로 융합됨으로써 생기는 새로운 역능을 도외시하더라도 대부분의 생산적 노동의 경우, 단순한 사회적 접촉이 경쟁심을 유발하고 활기를 특수하게 자극하여, 그것이 개개인의 개인적 작업능률을 고양하고, 그리하여 144시간이라는 하나의 동시적 노동일 속에서 함께 일하는 12명은, 각자가 12시간 일하는 12명의 개별적인 노동자들보다, 혹은 12일 동안 계속해서 일하는 1명의 노동자보다 휠씬 더 많은 총생산물을 제공한다. 이는, 인간은 천성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것처럼, 정치적 동물은 아니지만, 어쨌든 사회적 동물이라는 데에서 기인한다.”9)

 

맑스는 거대한 규모로 결합된 자본주의의 노동과정은 단순한 개별적 생산력 제고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로 집단적 생산력이라는 새로운 생산력을 만들어 낸다고 강조한다. 그는 또한 거대한 자본주의 생산과정은 이러한 새로운 생산력 이외에도 집단적인 노동과정을 통하여 개인들에게 경쟁과 특수한 활력을 불어넣어 개개인의 작업능률의 고양을 가져온다고 지적하고 있다. 현대사회의 고도로 발전한 과학기술 문명 은 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강화시킨다. 그러므로 어느 특정의 산업부문 뿐만 아니라 개별 기업에서 일련의 생산 공정에서 개인뿐만 아니라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이 각 생산 단계에서 얼마만큼 생산에 기여하였는가를 측정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4 비정규직 운동 어디로

 

자본주의 발전이 고도화되면서, 산업예비군이 대량으로 창출되고 있다. 정규직과 실업자의 중간지대인 비정규직이 만연하고 있다. 만성적인 실업을 이용한 자본과 국가의 노동 분할ㆍ통제가 진행되고 있고, 자본과 국가는 자본주의 발전의 필연적인 결과인 자본축적의 위기를 노동자에게 전가하고 있다. 향후 비정규직 고용이 일상화, 상시화되며, 비정규직 고용형태가 지배적으로 자리를 잡을 것으로 보인다.

 

저임금, 고강도, 장시간 노동을 하는 비정규직을 누가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이는 바로 이 사회에서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노동자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겠는가? 특히 나이 많은 사람들이 생존의 길목에서 어쩔 수 없이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있고, 그것도 결코 쉽게 얻어질 수 있는 일자리가 아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규직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생존 몸부림이 청년층에서 일어나고, 비정규직과의 경쟁에서도 생존투쟁이 발생한다.

 

비정규직을 철폐하는 운동은, 자본주의 생산관계 자체를 지양하는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산업예비군, 즉 상대적 과잉인구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것은 자본주의 자체이다. 특히 현 시기 극단적인 사회적 양극화를 초래하는 것은, 만성적 과잉생산으로 신음하고 있는 자본주의 자체이다. 이 사회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정규직 노동자 모두가, 생산수단 자체를 생산하고, 또 그 생산수단을 소유한 이의 몫(잉여가치)까지 생산한다. 이러한 사회구조를 어떻게 변혁할 것인가에 대하여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전체 생산 수단의 주인이 되어, 그 생산 수단을 사회적으로 계획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사회는 자기 자신의 생산 수단에 대한 인간의 이제까지의 예속을 절멸시킨다. 각자가 해방되지 않고 사회가 해방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낡은 생산 방식은 근본에서부터 변혁되어야 하며, 특히 낡은 분업은 소멸되어야 한다. 그 대신에 다음과 같은 생산조직이 나타나야 한다. 한편으로는 아무도 인간 생존의 자연적 조건인 생산적 노동에서 자신의 몫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할 수 없는 생산조직;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적 노동이 각자에게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능력을 모든 방면에서 도야하고 발휘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인간을 예속하는 수단이 되는 대신에 인간을 해방하는 수단으로 되는, 그리하여 생산적 노동이 하나의 부담에서 즐거움이 되는 그러한 생산 조직.

 

오늘날 이것은 더 이상 환상도, 헛된 소망도 아니다. 현재의 생산력 발전에서는 생산력의 사회화(생산수단의 국유화-인용자)는 그 사실 자체에 의해 주어지는 생산의 증대만으로도, 요컨대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에 연원을 두는 제동과 파괴를 제거하고 생산물과 생산 수단의 허비를 제거하는 것만으로도, 모두가 노동에 참가하여 노동 시간을 오늘날의 표상에 비추어 보면 극히 작은 길이로 단축하기에 충분하다.”10)

 

위에서 엥겔스는 사회가 생산수단을 소유하여 그것을 사회적으로 계획적으로 이용한다면,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소멸될 것이며, 아무도 타인의 노동에 의지하여 생활하는 사람이 없는 생산조직이 가능하며, 생산적 노동이 그 자체가 즐거움이 되는 노동으로 전환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무정부적 생산에 따른 공황 등에 의한 생산력의 축소ㆍ파괴, 그리고 이윤을 위한 생산, 생산을 위한 생산이 초래하는 생산물과 생산수단의 낭비를 제거한다면, 현재의 생산력 수준에서도 사회구성원 모두가 노동에 참여함으로써 노동시간의 대폭적인 단축이 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노동운동, 그리고 비정규직 운동은 이러한 노동해방, 인간해방의 세상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할 때만이 계급 자체의 소멸, 이에 따른 비정규직 자체의 소멸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사회에 의한 생산 수단의 점유 획득과 함께 상품 생산은 제거되며, 그럼으로써 생산자에 대한 생산물의 지배도 제거된다.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 상태는 계획적이고 의식적인 조직화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개체의 생존을 위한 투쟁은 중지된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결정적으로 동물계를 벗어나고, 동물적 생존 조건으로부터 참으로 인간적인 생존 조건의 길로 들어선다. 인간을 에워싸고 지금까지 그들을 지배해 온 생활 조건의 전역이 이제는 자기 자신의 사회화의 주인이 되기 때문에 또 사회화의 주인이 되면서 처음으로 자연에 대한 참다운 의식적인 주인이 된 인간의 지배와 통제 아래로 들어온다.”11) (강조는 인용자)

노사과연

 

 

<참고문헌>

김유선, “[이슈페이퍼 2021-18] 비정규직 규모와 실태 –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2021.8) 결과”,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장귀연, “능력에 따른 차별은 공정한가 : 불평등과 민주주의”, ≪현장과 광장≫ 5호

채만수, “독점자본의 비정규직 확대 정책 : 그 배경과 의의”, ≪정세와 노동≫ 13호, 노사과연

칼 맑스, ≪자본론≫ 1권 제2분책, 채만수, 노사과연

칼 맑스, ≪자본론≫ 1권 제3분책, 채만수, 노사과연

칼 맑스, ≪자본론≫ 1권 제4분책, 채만수, 노사과연

칼 맑스, “노동과 자본”, ≪칼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5권, 박종철 출판사

프리드리히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반-뒤링)”, ≪칼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5권, 박종철 출판사

 


1) 칼 맑스, ≪자본론≫ 1권 제4분책, 노사과연, pp. 1066-1067.

 

2) 같은 책, pp. 1041-1047

 

3) 같은 책, p. 1005.

 

4) 같은 책, p. 1007.

 

5) 같은 책, p. 1001.

 

6) 칼 맑스, ≪자본론≫ 1권 제2분책, 노사과연, pp. 294-296.

 

7) 칼 맑스, “임노동과 자본”,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권, 박종철 출판사, pp. 549-550.

 

8) 프리드리히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반-뒤링)”,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5권, 박종철 출판사, p. 297.

 

9) 칼 맑스, ≪자본론≫ 1권 제3분책, pp. 540-542.

 

10) 프리드리히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반-뒤링)”,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5권, 박종철 출판사, pp. 322-323.

 

11) 같은 책, p.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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