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1990년대 대표 여성 작가 3인의 계급성과 여성성 ― 공선옥, 공지영, 신경숙의 작품을 중심으로

 

 

제일호 │ 회원

 

 

1. 서론

2. 세 작가의 대표 소설과 줄거리

3. 공선옥 소설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의 계급성과

   여성성(모성성)

4. 공지영 소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의 여성성(페미니즘)

5. 신경숙 소설 ≪외딴방≫의 사실을 빙자한 몰계급성 그리고 표절

6. 총평과 결론

 

 

1. 서론

 

범죄의 은폐, 조작과 금권으로 타락한 부르주아 선거의 난장판을 보여준 대통령 선거가 끝이 났다. 민주개혁 세력 대 수구보수 세력의 싸움이라는 말은 독점 자본의 좌, 우파 간 나눠먹기 경쟁일 뿐이라는 것을 까발려주면서 주권자인 인민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그들만의 리그가 끝이 났다. 역시 승리는 독점자본주의라는 산에서 독점자본 호랑이의 전폭적인 지원과 은혜를 받은 검사 출신의 멧돼지가 당선되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인민의 삶은 퍽퍽하겠지만 권력을 잡은 반동적 수구 기득권 집단의 발악이 극에 달할 듯하다. 앞으로 인민의 저항이 더 거세질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 부르주아의 잔치판에서 노동자 후보라는 사람도 등장하여 “분단 이후 처음으로 사회주의 운동세력이 ‘사회주의’를 공개적으로 내걸고 출마하는 대선”이라는 거짓말을 했다. 2002년 대선에서 사회당 후보가 이미 ‘반자본주의 반조선노동당 사회주의’라는 똑같은 내용으로 출마를 했다. 그때도 ‘반자본주의 반조선노동당’이었는데 2022년 대선에서도 ‘반자본주의 반조선노동당’이다. 그들의 사회주의는 부르주아들이 반쏘, 반북의 프레임으로 노동자 인민을 거짓으로 기만하듯이 20세기 사회주의의 구체적 역사와 성과를 왜곡하는 기만적인 사회주의이다. 좌익 공산주의와 뜨로츠끼주의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은 분명한 현실이다. 어쨌든 부르주아 선거는 끝이 났고 이제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갈기 위해 다시 들판으로 나가야 한다.

 

선거과정에서 계급을 지우기 위한 별의별 말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그 중 압권은 이대남과 급진적 페미니즘의 대결 그리고 분열과 통합의 문제였다. 20대 남녀 간의 갈등이 있는 것처럼 조장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분열이니 통합이니 하며 문제의 본질은 덮어버리고 그 문제를 확대재생산해나가는 꼴들이 더 가관이었다. 20대의 고용이나 주거 등의 불안정성과 암울한 미래는 막다른 골목에 선 자본주의가 보여주는 모순 덩어리의 슬픈 현실이다. 이것을 성대결의 문제로 덮어버리려는 지배 집단의 얄팍한 술수는 천박하기도 하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을 대중에게도 심어줄 수 있어 심각하다고 할 수 있겠다. 계급사회를 철폐하기 위한 사회혁명과 남녀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성의 혁명은 분리될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계급의 평등이 성의 평등을 담보하는 것이기에 성의 평등은 계급의 평등을 통해 구현해나갈 수 있다. 자본주의는 계급사회이자 노동력의 착취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가부장적 질서를 인정하는 남녀 차별의 사회이기에 자본주의에서 여성은 이중의 착취 구조에 빠져 있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계급차별과 남녀차별이 동시에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계급모순은 기본모순이자 적대적 모순이고 남녀간 갈등은 2차적 모순이다. 적대적 모순은 갈등과 투쟁을 통해서 모순이 해소되지만 남녀 간의 모순은 갈등과 투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해결될 수가 있다.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는 성별만 차이가 있을 뿐 자본주의 사회에서 똑같이 착취와 억압을 당하는 노동자이다. 그러므로 여성 특히 20대 여성 노동자들은 여성해방과 동시에 더 강하게 계급해방을 부르짖어야 하며 남성 노동자들은 적이 아니라 동지이며 성별을 떠나 자본가들이 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국의 노동자는 하나이며 모두가 연대하고 단결하여 이 체제를 끝장낼 때만이 노동해방과 여성해방이 이루어진다. 리버럴 페미니즘과 급진적 페미니즘이나 에코 페미니즘의 남녀 대결 구조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맑스주의적 여성해방론에 입각하여 계급해방을 위한 사회혁명을 주장하고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여성해방을 위한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연히 본 유튜브의 한 방송에서 꽤 진지하게 여성 운동에 종사하는 20대 여성이 콜론타이를 모르는 걸 보고 의아했던 적이 있다. 남녀차별의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은 계급이라는 것을 모르고 성별의 차이에서 오는 차별이라는 현상적 모습만을 바라보기에 나타나는 순진한 반응일 것이다. 여성 차별과 비하의 그 현상이라는 것은, 영화화되기도 했던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에서 나오는 대사,

“아, 됐어. 씹다 버린 껌을 누가 씹냐?”

“ … 골키퍼가 있어야 골 넣는 맛이 난다는 둥, 한 번도 안 해 본 여자는 있어도 한 번만 해 본 여자는 없다는 둥 우습지도 않는 19금 유머까지 남발하며 자꾸 술을 권해 … ”

“‘김치녀’, ‘된장녀’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며 돌아다니는 ‘맘충’ 팔자가 상팔자야!”에서 여성차별의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성차별과 여성비하는 사회의 곳곳에 자리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영역에까지 침투하여 여성들을 분노하게 하고 있다. 물론 문학의 영역에서도 이 차별을 넘어서고자 하는 움직임은 있었다. 1990년대 초 이미 강한 여성성을 바탕으로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여성 작가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그 시절을 대표했던 3인의 여성작가(공선옥, 공지영, 신경숙)는 문학계에 미친 영향이 컸고 지금까지도 그들의 작품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들은 각자 고유의 출신과 삶의 여정 그리고 문학적 표현으로 자본주의 성장기에 나타난 여성차별을 고발하면서 각자 나름대로 가부장적 질서를 고발하며 여성성을 전하려고 노력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에서는 시대의 아픔과 함께 드러나야 하는 계급성은 자연발생적이고 희박하거나 보이지 않는 한계도 있었다. 그래서 3인의 대표작 (공선옥의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신경숙의 ≪외딴방≫)을 바탕으로 작품에서 드러나는 계급성과 여성성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세 작가의 대표 소설과 줄거리

 

1) 공선옥의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

 

이 소설은 오지리라는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라며 한 남자를 사랑했던 두 여자의 운명을 그린 이야기이다. 상훈과 연인이었던 채옥은 땅 문제로 원수가 되어버린 두 집안의 반대로 맺어지지 못하고 방황하다 우연히 만난 건달과 결혼해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고향 오지리로 돌아온다. 동네 유지였던 상훈의 집안 종이나 다름없었던 은이네. 고향을 떠나 공장에 다니던 은이는 위장취업한 운동권 학생 상훈과 만난다. 부유했던 자신의 집안이 착취한 은이네 가족에 대한 도덕적 부채감으로 상훈은 은이와 결혼을 하지만, 둘 사이는 평탄하지 못했고 임신한 은이는 고향이자 시댁인 오지리로 혼자 돌아온다. 채옥은 남편에게서 도망쳐 왔지만 병든 아버지를 돌보며 여전히 힘겹게 살고 은이는 시부모에게 홀대당하고 아이까지 유산한다. 두 여인 모두 비참한 삶 속에 있다. 채옥은 폐병 걸린 아버지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남편에게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과 격이 맞지 않는다’는 상훈의 오래된 외도를 알게 된 은이도 오지리를 떠난다. 그들은 이제 막 서른이었다. (이상숙 문학평론가의 요약 중에서)

 

2)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 소설은 여성에 대한 가정폭력과 페미니즘에 관한 내용을 적고 있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살펴보면 세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혜완, 경혜, 그리고 영선이라는 세 여자는 대학 때부터 친구였으며 서로 연락은 하지 않더라도 친구 사이를 유지하며 살아오고 있었다. 이 세 여자는 세월이 흘러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고 결혼을 했으며 가정폭력도 당하며 각자 다른 방식으로 대처를 해나간다. 혜완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이혼을 하고 경혜는 끝까지 참고 살며 영선은 결국 자살을 하고 만다. 어느날 혜완에게 걸려온 경혜의 전화 목소리에서 영선의 자살시도 얘기가 흘러나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그 사건을 시작으로 과거의 기억들이 뛰쳐나오게 된다.

 

혜완은 병원으로 달려가 영선을 만나고 영선의 남편은 박 감독과 얘기를 나눈다. 혜완은 영선이 자살시도 같은 걸 하지 않을 친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박 감독이 안일한 태도로 영선이 우울증을 앓고 있으면서 알콜 중독이었다는 얘기를 하는 걸 보면서 그리고 경혜를 만나면서 자신의 끔찍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경혜가 남편이 바람을 피는 걸 알면서도 참고 있다는 것과 영선이 왜 자살시도를 했는지를 듣게 되면서 혜완은 자신과 두 여자 친구를 조금씩 이해해갔다. 혜완은 아이를 잃고 남편에게 가정폭력을 당하다 이혼을 했다. 이 모든 상황은 혜완의 시점에서 판단되고 있으며 혜완의 시점에서 피드백이 되어 친구의 상황이 판단된다. 그리고 자기의 상황에서 판단하며 자신의 인생을 살아간다. 그런데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만들어감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의 탓을 하고 미워하고 증오한다. 어느 누구 하나 자신에게서 상처를 찾지 않고 상대방에게서 상처를 찾아내고 다시 상처를 입힌다.

 

영선은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처음엔 나아지는가 싶었지만 나아지지 못했다. 영선은 ‘누구 하나 자신을 믿어주고 이해해주는 친구 하나 있었다면 자신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고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말하고 치료를 받지만 오히려 의사에 대한 경멸감만 느낀다. 결국 영선은 자살을 하게 되고 경혜는 울부짖으며 자신의 딸은 이렇게 살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혜완은 법당에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구절을 읽고 자신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고 노력해야한다는 것을 깨닫고 눈물을 닦아내며 걸어갔다.

 

3) 신경숙의 ≪외딴방≫

 

이 소설은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이며 10대 후반의 과정을 겪으며 지나온 성장 소설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1인칭 시점이므로 나)은 농촌에서 음식이 넉넉하고 상대적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오빠의 교육 부담으로 인해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1978년에 외사촌 언니와 함께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온다. 서울에서 이 둘은 취업을 위해 직업훈련원에 다닌다. 대학에 다니는 주인공의 큰 오빠와 함께 이들은 가리봉동의 ‘외딴 방’을 얻어 함께 기거하며 구로공단에 자리 잡은 동남전기 주식회사에 다닌다. 그 시절 가난한 농촌 출신의 여성노동자들이 대개 그랬듯이, 한편으로는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저임금과 함께 고된 노동에 시달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과 고독과 절망에 시달린다. 그래서 주인공의 일상은 피로와 짜증으로 덮여 있었으며 주인공에게는 절망만이 나타나던 시기였다. 그러나 주인공은 이러한 일상 속에서도 자신이 서울로 올라온 목적인 진학을 위한 꿈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 1979년 그녀는 산업체 특별학교인 영등포 여고로 진학을 했고 공장에서의 힘든 작업을 마친 뒤에도 향학열을 불태우며 자신의 꿈을 키워 간다. 그 과정 속에서 많은 힘든 일들이 벌어진다. 주인공의 노조의 탈퇴, 평소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노조 지부장이나 주변 인물들과의 불편한 관계 등이 벌어지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이기에 묵묵히 걸어간다. 그녀가 소중하게 품고 있었던 문학적 열망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배움을 포기할 수 없었다. 79년 봄에 그녀는 희재 언니를 처음 본다. 희재 언니는 가난한 고독과 절망 속에서 살다 죽은, 혹은 그렇게 인생을 마감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와 다를 바 없는 고난의 일상을 보내야 했던 모든 불우한 젊은이들을 상징하고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믿고 따랐던 희재 언니는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드는 거니?”라는 말을 남기고 결국 자살하게 되고 자신이 잠근 방안에서 일어난 희재 언니의 죽음으로 인해 죄책감과 복합적인 심리상태 속에서 외딴방을 탈출하듯 도망치게 된다.

 

 

3. 공선옥 소설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의 계급성과

여성성(모성성)

 

공선옥 소설의 인물들은 주로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이나 집안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노동자 민중들이다. 그 중에서도 자신의 성과 동일한 여성들을 주로 주인공으로 한다. 그들은 가부장적 폐해 이상의 핍박과 자본주의와 독재라는 시대의 아픔을 견뎌내며 사회와의 불화에 뒤틀어진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여성들이다. 그들은 처절한 여성성과 민중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쉽게 절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혹한 절망의 벽 앞에서도 포기하거나 그 늪에서 허우적대지 않고 그 절망을 희망의 예감으로 만들어 당당하게 맞서며 자신의 미래를 바라본다. 사상과 철학, 논리로 절망을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묵묵히 앞으로 나아간다. 이는 노동자 민중이 자신의 피억압자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억압을 무너뜨리는 해방의 주체라는 운명을 동시에 가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과학적 사상으로 무장된 노동자 민중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자연스레 계급성을 지녀가는 노동자 민중의 단초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세계관을 처음으로 알리고 시작된 작품이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이며 그 세계관은 계속 이어지는 작품에서도 관철되고 있다.

 

모든 계절이 그러하듯 겨울 또한 영영 잊어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설사 아버지의 죽음 같은 이 지겨운 생이 그리 쉽게 마감되지 않는다 한들 이제 얼마간의 시간이 물처럼 흐른 뒤에는 겨울을 이겨낸 나무가 튼튼한 수액을 뿜어내듯 자신은 이제 절망의 나날을 사는 아버지 옆에서 완전하게 절망하는 법을 배울 것이고, 그런 뒤에는 절망을 빠져나가는 출구를 향하여 첫 발을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1)

 

채옥의 독백 속에서 ‘아버지의 절망이 나의 절망임을 깨닫는다’는 것은 전근대적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계급의 대물림이 이어진다는 것을 인식했다는 것을 말하며 ‘절망하는 법을 배워야 절망을 빠져나가는 출구를 향해 첫발을 내디딜 수 있다’는 것은 계급의식에 있어 엥겔스의 ‘허위의식’과 ‘진실의식’의 일치를 보여주며 ‘주체와 객체의 일체’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작가가 의식했든지 간에 작가의 머리 속에는 ‘의식은 존재의 반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위장 취업한 운동권 학생 상훈(은이의 남편)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의 외부 주입론에 대해서도 언급하고자 한다. 그러나 상훈이라는 지식인 인물은 도덕적 부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랜 외도를 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어 피해자(여성)에게 상처를 입힌 가해자(남성)로 전락한다. 이것은 작가가 은이의 여성성을 부각시키고자 한 모티프라고 할 수 있겠다. 공선옥이 등단하고 작품 활동을 시작한 1990년대는 1980년대를 휩쓸었던 민족, 통일, 노동, 계급 등의 거대담론이 물러나고 개인의 정서와 일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말하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개인의 정서와 일상적인 이야기와 함께 여성, 생태, 환경 등의 주제가 부상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공선옥의 소설에서 보이는 계급성은 여성성과 공유를 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노동해방문학, 민중문학, 통일문학 등의 문학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쟁취, 노동해방, 민족통일이라는 정치, 사회적 과제가 공동으로 맞물려 요동쳤던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1990년대 초반에 발표한 소설이다. 공선옥의 이 소설에는 1990년대 초 쏘비에뜨와 동구의 몰락 속에서 맑스-레닌주의와 사회주의의 몰락을 빌미로 논리적 사변이나 거대담론에 대한 반발을 빌어 도망치는 비겁함이 없다. 자신의 계급적 운명을 깨닫고 묵묵히 그 운명을 딛고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그 운명은 시대와 가정을 떠나 피지배계급이 안고 있는 숙명이기에 절망하면서도 희망으로 나아가는 의식의 변증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가부장적 집안에서의 핍박과 사랑하는 한 남자로 인한 애증의 교차 속에서 두 여인은 힘들고 고달픈 상황에 놓여있다. 하지만 그녀들의 고통은 아버지, 남편, 시댁에 복종해야하는 운명의 틀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전근대적인 여인들의 삶과는 결이 다른 시대적 불화를 가지고 있다. 지주와 소작인, 농지개혁과 일제의 적산토지를 둘러싼 분쟁, 축첩과 폭력이 난무하는 봉건적 가정, 노동현장의 부조리와 노동자의 의식, 노동현실의 문제와 노동운동가의 허위적 모습, 자본의 추악함, 계급의 문제 등이 이전 여성들의 문제와는 다르게 두 여인의 삶을 교차하며 돌아간다. 한 개인인 여성의 삶이 역사와 시대의 톱니바퀴에 맞물려 돌아가며 자본주의 성장기의 처절한 여인들의 삶이 그려진다. 시대의 아픔 속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는 가장 비참한 순간에도 그녀들은 희망을 내려놓지 않는다. 이 순간이 완벽한 절망의 순간이라는 것과 가장 어두운 순간이 곧 여명의 순간이란 것을, 그것을 깨닫는 것이 곧 그 어둠과 절망을 깨고 나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악연은 이제 끝이다. 가자. 내 새끼야. 악령의 손에 붙잡히기 전에, 붙잡혀서 우리들 고운 인생이 속절없이 무너지기 전에 어서 이곳을 빠져 나가자꾸나. 달빛도 곱구나, 눈빛도 환하구나. 아가야, 겁내지 마라. 아비는 악령이란다.2)

 

채옥은 아가에게 폭력적인 남편을 ‘아비는 악령이란다’라고 말하며 악연을 끊고 오지리를 떠나자고 말한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폭력을 당하며 살아가는 여성들의 자포자기의 순종적인 모습을 뛰어넘는 강한 모성성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물론 악령은 계급사회, 가부장제의 가족제도 등의 억압과 악습이기도 하며 병든 아버지와 신분차이를 핑계로 며느리를 인정하지 않는 시부모(은이에게)와 폭력적인 남편(채옥에게)이나 노동현장에서 만나 도덕적 부채감으로 결혼한 후 격이 맞지 않는다며 아내를 방치하고 외도까지 한 남편(은이에게)에 대한 비유이다. 두 여인은 악령에 무너지지 않는다. 그녀들은 이 가혹한 운명의 눈길을 거침없이 걸어가며 희망을 가진다. 그녀들을 옭아매고 있는 사슬은 계급과 함께 전근대적인 순종적이며 여린 여성성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 끝을 마무리하고 인생이 무너지기 전에 오지리를 떠나고자 하는 것이다. 처절하고도 눈물겨운 모성성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극한의 고통 속으로 인물을 몰아놓고서 강한 생의 의지를 가진 강한 모성성이 바로 곧 희망임을 보여준다

 

소리는 작고 가늘게 그러나 가늘지만 힘 있게 자꾸만 은이 뒤를 따라오는 것이었다. 그래, 이제 혼자서 가는 거야. 서른 살의 절망은 또 다른 희망이 아니겠니. 너는 이제 이곳 오지리에 너의 절망을 두고 떠나는 거야. 이제 너는 너의 온전한 희망을 향해 앞만 보고 달려가라구, 달려가라구.3)

 

은이는 ‘오지리에 절망을 두고 ~ 너의 온전한 희망을 향해 앞만 보고 달려가라구’ 말하고 있다. 그녀를 소작인의 자식으로 태어나게 했던 공간이며 부유한 시댁의 핍박이 서럽게 내리꽂히던 그 공간 오지리를 탈출하고자 한다. ‘서른 살의 절망은 또 다른 희망’이라면서. 그녀는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것은 소작농의 딸로 태어난 노동자라는 계급과 시댁의 횡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자연발생적인 계급의식의 형성은 은이가 노동자로 살았기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채옥과 은이는 자신들이 처한 고통과 절망에 대해 알고 있다. 그 절망을 아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려 한다. 고통과 절망의 끝에서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 끝의 순간 삶을 이어가고 미래를 바라보고자 한다면 남은 것은 희망뿐이다. 서른 살의 그녀들은 살고자 했고 그것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작품의 배경 내내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지만, 인물들은 두려움 없이 험한 길을 떠난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1980년대라는 사회적 상황과 가난한 여성으로 사는 삶에 대해 분노하기도 한다. 동시에 흔들리고 체화되지 못한 가치관으로 비틀거리다 허위에 빠지기도 하고 어설픈 도피도 한다. 그러나 그럴 때도 채옥과 은이는 완전한 절망은 희망에 대한 예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들은 오지리라는 고통의 공간에서 삶을 묵묵히 이어갔고 희망의 예지로 오지리를 떠나게 되는 것이다. 혁명적 낭만이라고 할 정도로 절망을 이겨내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가지는 당당함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은 계급성과 여성성 그리고 시대상이 묘하게 교차하는 소설이다.

 

 

4. 공지영 소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의 여성성

(페미니즘)

 

공지영의 대표 소설인 이 소설의 제목은 불경 ≪숫타니파타≫ ‘외뿔경’의 37구절에서 가져온 것으로 이 책의 표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 구절은 무소유를 말씀하신 법정 스님이 자신의 오두막 한 켠에 붙여 두었다고 전해져 유명하다. 굳이 해석을 하자면 수행을 하는 도반의 모습은 마치 거침없는 무소의 전진처럼 흔들림 없이 달려가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당시(1980~90년대 독점자본의 성장기이자 가부장적 사회의 모습이 잔존하던 시기)를 살아가던 여성들의 모습 역시 어떠한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무소처럼 전진해야함을 강조하고자 이러한 제목을 붙였을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작가의 작품 설명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누군가와 함께 행복하려면 내가 먼저 행복해야 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행복의 주체는

반드시 ‘내’가 돼야 한다는 동시대 여성들을 향한 응원과 격려였습니다.

 

행복의 주체는 반드시 ‘내’가 돼야 한다는 이 말은 삼종지도나 칠거지악 등 봉건적 유교 이념과 가부장적 질서에서 여성의 삶은 나의 것이 아니라 지아비와 자식을 위한 수동적이고 비주체적인 삶이었다는 것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이다. 이것은 성차별적인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이 억압받는 현실에 저항하여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페미니즘의 목소리이다. 여러 가지 페미니즘 중에서도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넘어 급진적 페미니즘으로 가는 단계이다. 급진적 페미니즘은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가 더 근원적인 억압형태로서 계급관계보다 더 근원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보며 여성을 억압하는, 성별에 기반한 권력체계인 가부장제의 철폐를 주장하는 사상이다. 하지만 여성의 불평등을 포함한 모든 사회적 불평등은 사유재산제의 발생에서 기인한 것이기에 모든 억압의 근원은 계급관계에 더 근원적인 의미가 있다. 계급사회에서 지배계급의 원활한 지배를 위해 가부장제가 탄생한 것이므로 계급관계의 해소는 곧 가부장제의 철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계급해방이 여성해방을 담보하는 것이지 여성해방이 계급해방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계급해방을 위해서는 계급사회인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사회혁명이 필요하다.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고 연대해야 하기 때문에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관계없이 모든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여성이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에 의해 동시에 억압을 받고 있다 하여 맑스주의 여성해방론과 급진적 페미니즘을 혼합하는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이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은 노동자계급의 분열을 획책하고 남성노동자들을 여성해방의 이슈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들 뿐이다.

 

이 소설은 남성에 대한 혐오가 생길 정도로 남성들을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이며 이기적으로 묘사한다. 소설에서 보이는 혜완 전남편의 폭력, 단골 카페 여사장에 대한 여사장 애인의 구타, 카페에 함께 온 여자 손님을 홀로 두고 떠나는 냉정한 남학생, 신혼 초부터 불륜을 저지른 경혜의 남편, 소설가 장의 불륜 등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의 한 단편들이다. 당시만 그러했을까? 지금은 어떠한가? 이러한 질문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 유효한 질문이다. 그래서 근래에 급진적 페미니즘이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었고 미투 운동 등의 전개와 함께 남성을 적으로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여성의 지위는 나름 많은 신장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지만 계급사회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폭력은 여전히 남아있고 그 대상은 피지배계급 전체이지 여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밥 먹듯 해대는 쉬운 해고, 수시로 저질러지는 노조에 대한 압력 등의 폭력은 성별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 구조적인 폭력에는 무관심하면서 가부장적 질서에서 이루어지는 여성의 폭력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폭력을 허용하는 사회의 기본에는 계급관계가 그 근저에 있는 것이지 성별관계가 그 근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80년대 대학을 나온 지식인 여성들이다. 그녀들은 상대적으로 덜 모멸을 당했을 것 같지만 그녀들 역시 커다란 벽 앞에서 울어야만 했다. 그 커다란 운명의 벽 앞에서 어떻게 대처해나가는지 각자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살펴보도록 하자.

 

“똑똑하다 해도, 아무리 공부를 잘했다 해도, 세상의 온갖 지혜를 다 가졌다 해도 운명이 더 강해! 운명만큼 강한 것은 없어!”

 

자살을 선택한 영선의 말이다. ‘운명만큼 강한 것은 없어’라는 말은 운명을 받아들이는 자세이다. 운명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체념을 하는 수동적인 자세와 운명을 헤쳐 나가려는 의지를 보이는 능동적 자세로 나누어지는데, 자살을 선택한 영선은 전자의 자세였다. 어쩌면 이것은 그녀가 보였던 최대한의 저항이었을는지 모르지만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

 

“어차피 의사가 아니었다면 난 결코 그 사람과 결혼 따윈 안했을 거였어. 넌 연애해라. 난 니가 벌어다 주는 돈이나 쓰면서 살지 … ”

 

불륜을 알면서도 그냥 살아가기로 한 경혜의 말이다. 결혼에 대한 속물적 근성을 드러내면서 비주체적인 전근대적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를 보여주고 있다. 현실에서 자주 보이는 슬픈 단상이며 여성들이 가장 경계해야하는 단상이다. 비주체적이면서 잘못된 결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이겨내지 못하면서 여성해방을 주장한다면 아이러니가 아닐까?

 

“이 말 참 좋지? 들어봐 …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

 

영선의 죽음 앞에서 혜완이 눈물을 흘리며 불경을 읽다가 영선이 한 말을 떠올린 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중 가장 현실적이며 객관적 사고를 하는 혜완은 작가 모습의 분신 일지도 모른다. 혜완은 독립된 개체로서 여성의 삶을 누리고자 이혼했지만 남편이 아닌 다른 남성 선우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작가의 시각으로는 혜완 역시 여성해방을 주체적 모습으로 이루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여성해방의 깃발을 들어주는 남자를 기다리는 신데렐라였다. 그래서 혜완은 그것을 자각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떠올린 것이었다. 그러나 착각하고 있는 것은 여성운동을 펼치고 있는 여성운동가들이 남성들에 기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여성연대’나 ‘여성해방운동 단체’ 등의 직함을 들고 여성들의 지위를 ‘특권화’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러한 명함을 들고 기성의 정치권이나 기득권층으로 유입되어 들어간 인물들이 한 둘이 아니며 이들이 하고 있는 역할은 얼굴 마담 이상이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격화되고 있는 계급모순을 감추고 희석화하고자 여성, 환경, 반핵, 지역운동 등의 부문 운동을 부각시키는 독점자본의 술수에 놀아나고 있을 뿐이다. 사회구조적 모순의 해결 없는 부문으로의 해소는 나름 유의미 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정한 변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래서 지금 시급한 것은 계급운동의 강화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지혜롭다 해도 운명이 더 강하다’는 영선의 말은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의 주인공 잔의 하녀인 로잘리가 한 말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군요”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좋고 나쁨으로 나누어진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주체의 의지와 객관적 상황이다. 객관적 상황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극에 달한 자본주의에서, 노동자의 운명 역시 자본주의의 피억압자, 피착취자로서 자본주의를 건설하는 것과 동시에 자본주의를 타도해야 하는 운명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건설자임과 동시에 파괴자로서의 운명. 계급의 발생과 계급의 해소.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노동자 스스로의 의지에 달려있다. 결정론이 아닌 계급투쟁의 운명, 그것이 바로 역사이다.

 

 

5. 신경숙 소설 ≪외딴방≫의 사실을 빙자한 몰계급성 그리고

표절

 

신경숙의 ≪외딴방≫은 소멸해가는 존재들에 대한 슬픔을 그려내고 있다. 추상적 감상을 바탕으로 한 서정시와 같은 성장소설이지만, 노동자로서의 삶이 묻어난 노동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 소설이다. 어린 시절 독점자본의 값싼 노동력 조달의 창구로 이용된 산업체 부설 학교를 다니며 노동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작가는 작가 특유의 내면적 고뇌와 섬세한 필치로 소설을 적고 있다. 다만 그 어디에서도 계급적 분노를 찾아볼 수가 없다. 특히 희재 언니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은 분노보다는 연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작가가 계급의식이 부재하거나 혹은 ‘허위의식’을 가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신경숙은 글을 쓰는 작가가 되어 지위를 상승코자하는 계급상승의 ‘허위의식’만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계급이 단순한 사회적 불평등이 아닌 사회적 관계들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내 지위의 상승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사장에 대한 분노와 투쟁, 그리고 그 관계의 해소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신경숙의 ≪외딴방≫은 암울하지만 저항의 분위기가 넘쳐나던 이전의 노동소설과는 다르게, 노동소설이 한편의 일체의 흥분과 분노도 없이 서정시마냥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의 무대가 되는 1980년대는 산업화, 이촌향도, 노사갈등과 노동자 투쟁, 통일운동, 군사정권의 폭력과 인권탄압 등의 무거운 주제가 넘쳐나던 시기이기에 노동자의 삶은 더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노동자 출신인 작가는 더 분노해야하지 않겠는가? 자신의 출신과 계급을 망각하여 계급성도 가지지 못하고, 나아가 자연발생적인 계급의식도 가지지 못한 작가를 노동 작가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물론 출신 집안이 시골에서 부자였다고는 한다. 다만 형식적으로 사실적인 노동현장 묘사와 그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꿈을 꾸는 어린 여성노동자들의 모습, 자본의 착취 구조에 대한 언급은 긍정적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이 작가의 섬세함은 곳곳에서 묻어 나온다. 산업체 특별학교를 다니기 위해 잔업거부에 참여하지 못하고 결국 노조 탈퇴서를 써야 했던 것과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준 노조 지부장 및 미쓰 리 언니와 행동을 함께 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수치심과 양심의 가책, 좁은 방에서 두 오빠 및 외사촌 언니와의 괴로운 생활, 두 오빠의 힘든 고학 그리고 오빠들의 좌절과 고통, 생산계장의 성희롱과 폭행 등등. 섬세한 묘사는 탁월하다. 그러나 이 아픔에 대한 현상적 고민이 있을 뿐 내가 노동자로 이 자리에 서 있게 한 근본원인이 무엇인지, 체제는 무엇인지, 체제의 본질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치밀한 고민이 없다. 이것은 대체적으로 문예작품을 개인적 창작활동의 소산으로 생각하는 순수문학을 지향한다는 관념에 빠진 작가들이 보이는 한계이다. 이들은, 예술작품이, 창작하는 개인의 세계감각이나 영감의 표현이기에 이 개인의 내적 생활 외에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사회적 요인으로부터 관념적으로 초월하려는 부르주아와 인텔리겐챠의 요구에 부응하는 이 문학관은 문학의 범위를 철저히 체제내로 제한해버리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당연히 신경숙의 ≪외딴방≫은 노동자의 치열할 삶을 겪으면서도 사회적, 정치적 투쟁의 문제에 대해서는 제시하지 못하고 개인주의나 비밀주의의 심연으로 빠져든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가정이 시골에서는 동네에서 가장 마당이 넓은 집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지만 오빠와 동생의 진학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서울로 오게 된 사연을 이야기 하면서 1960-70년대 경제개발 과정에서 급속도로 진행된 이촌향도의 원인이 저곡가 정책 등에 따른 가난에 있다고 이야기 한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인간의 소중한 그 무엇을 빼앗아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서울 길은 향학열로 불타 있었다고 말한다. 작가의 개인적인 삶의 추동력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지만 작가 특유의 섬세한 감성으로 내가 아닌 타인의 모습과 공통의 집단적 성격을 깊이 바라보지 못했음은 안타깝다. 노동자 출신이 쓴 소설이 이토록 창조적 개성의 개인적 실체와 성질만을 강조하는 부르주아의 문학에 부합하고 있다는 것은 작가가 노동자 출신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작가의 철학, 세계관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창작은 작가의 계급적 존재의 소산이다. 작가의 창작은 그것을 창작한 사회적 존재와 마찬가지로 합법칙적인 것이며 또한 모든 사회적 과정과 그것의 인식을 위하여 일정한 객관적인 의의를 갖는 것이기에, 신경숙의 ≪외딴방≫은 성장소설이지 노동소설이 아니다.

 

최근에 한 여성의 논문표절 문제가 대두되었지만 대학도 언론들도 조용하다. 논문표절이든 예술작품 표절이든 표절은 항상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주제가 되고 있다.

 

표절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신도리코인데 소설가 신경숙이 표절문제에 휩쓸리게 되었을 때 그녀를 비꼬는 언어였다. 신도리코니 뭐니 하며 표절 문제가 떠올랐을 때 신경숙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지난 기억을 뒤져봐도 ≪우국≫을 읽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제는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4)

 

사고를 치고 변명할 때 읊조리는 전가의 보도인 ‘기억이 나지 않는다’를 그녀 역시 사용하고 있다. 표절과 모방의 구분을 떠나 작가의 대응 태도는 권력자들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작가의 심성으로 보아 이미 자신도 문화 권력자가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발언이지는 않을 텐데 … 표절문제는 일본작가 마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신경숙의 ≪전설≫이 표절을 했다는 것인데, 표절과 모방의 경계는 어떻게 선을 그을까? 두 작품을 읽지를 않았기 때문에 그에 관한 글을 쓰지는 않겠지만, 신경숙을 위한 변명(?)을 하자면 그녀의 문학학습 습관이 문장연습을 하면서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으면 메모를 해두는 습관이 있어 그 메모 글을 자기도 모르게 자기의 작품 속에 넣지는 않았을까? 주제가 다르고 내용이 다르다면 비슷하거나 같은 문장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표절을 주장하는 쪽의 생각은 많이 다른 것 같다. 타인의 작품을 모방해서 자기만의 문학세계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복사기처럼 베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는 표현은 김후란의 번역본에만 나오는데, 그걸 그대로 베꼈다는 것이다. 이 문구는 다른 번역본 두 종에서는 “레이코는 사랑의 기쁨을 알았으며”(≪죽음의 미학(이문열 세계명작산책2≫, 이문열 ?음)와 “기쁨을 알고”(≪한창 꽃 핀 숲≫, 신우문화사)로 각각 옮겨져 있다고 한다. 즉 ≪우국≫을 읽은 신경숙이 의도하지 않게 그와 같은 표현을 쓴 게 아니라 김후란 번역본을 표절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에도 모방과는 분명 다른 것 같아 이 주장에 더 공감이 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6. 총평과 결론

 

여성 작가 3인의 작품은 그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몸소 겪으며 쓴 자기고백의 소설들로서 나름의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아픔을 개인의 고통으로 감수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반체제적인 지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차이는 있더라도 여성성의 부각 속에서 계급성은 약하거나 보이지를 않고 있다. 시절의 한계라기보다는 작가들의 한계라고 여겨진다. 다만 공선옥의 소설에서는 계급성과 여성성이 교차하고 민중의 일상 언어로 민중의 아픔을 그려내고 있어 다른 두 사람의 작품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는 것 같다.

 

예술작품은 작가 및 그의 창작을 결정한 사회적 집단을 의식하고자 하는 객관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부르주아를 의식한 작품은 부르주아를 만족시킨다. 프롤레타리아를 의식한 작품은 프롤레타리아를 만족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학의 언어를 맑스주의적으로 학습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술작품의 계급관념을 해명하고 이 작품을 통하여 주어진 작품의 기저에 놓여있는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현실을 바라보기 위해 작품에 주어진 묘사 또는 역사적 과거의 묘사가 계급투쟁에서 발휘한 역할을 철저히 규정해야 한다.

 

문학과 상부구조와의 상호영향의 문제에 있어 특히 철학, 정치와 문학의 상호영향의 문제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생성과정에, 그리고 문학이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 효과적으로 참가한다는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커다란 실천적 의의가 있다. 철학이 문학에 주는 영향을 부정하고 순수문학을 강조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건설될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방법론적 기초를 부정하는 것이다. 문학에 끼치는 정치적 영향을 부정하는 순수문학은 문학의 당파성을 부정하는 것이며 결정적으로 문학에 대한 계급의식의 결정과정을 힘들게 하는 것이다. 문학은 프롤레타리아의 일반적 과제들을 해결해나가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맑스-레닌주의적인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의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철학과 정치를 반영한 문학만이 참다운 노동문학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의 혁명 정당이 생겨 그 당의 혁명적 지도를 받는 프롤레타리아 문학만이 사회주의혁명을 쟁취하는 데 힘이 될 수가 있다고 하겠다. 문학은 이렇게 전진해 나가야 한다.  노사과연


1) 공선옥, ≪오지리에 두고온 서른살≫, 삼신각, p. 35.

 

2) 같은 책, p. 203.

 

3) 같은 책, p. 210.

 

4) 한윤정, “문학이란 땅에서 넘어졌으니까 그 땅을 짚고 일어나겠다”, ≪경향신문≫, 2015.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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