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맑스의 ≪자본론≫에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3)*

 

일렌코프(Evald Ilyenkov)** 

번역 : 노준엽 │ 회원

 

* 출처: https://www.marxists.org/archive/ilyenkov/works/abstract/index.htm/ 이 번역물은 일렌코프의 저서인 ≪맑스의 ‘자본론’에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을 분량을 나누어 연재하는 것이다.

 

** 역주: 쏘련의 철학자로 ≪변증법적 논리학의 역사와 이론≫(연구사, 1990) 등의 저서가 있으며, 변증법적 논리학의 문제를 깊이 있게 접근하고 있는 철학자이다.

 

 

1장 구체에 대한 변증법적 개념과 형이상학적 개념

 

  1. 변증법적 논리학과 형식논리학에서 추상과 구체의 개념

  2. 추상과 구체의 개념들의 역사로부터

  3. 맑스에게 있어서 구체의 정의

  4. 개념에 대한 관념의 관계에 대하여

  5. 인간의 개념과 그것의 분석으로부터의 약간의 결론들

 

 

개념에 대한 관념의 관계에 대하여(계속)

 

*  *  *

 

관념에 대한 개념의 관계 문제를 접근할 때, 인간의 정신 속에서 객관적 실재를 반영하는 데 있어서의 형식과 단계로서의 관념은 또한 하나의 추상이며, 그러한 관념의 형성은 수많은 요인들에 의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직접적인 실천적 이해에 의해, 인간의 필요와 그러한 필요를 관념적으로 반영하는 목적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명백히, 충분히 고려해야만 한다.

 

개념―객관적인 사물의 본질을 표현하는 하나의 이론적 추상―과 실천 간의 연계는 더욱 광범위하고, 깊고, 그리고 더 복잡하다. 개념에 있어서, 대상은, 특수하고 협소한 실용적인 목적과 필요의 관점에서라기보다는, 세계사적 발전을 관통하는 인류의 실천 전반의 관점에서 이해된다. 오직 그러한 관점만이 결국 대상 자체의 관점으로부터 대상을 고려하는 것과 부합한다. 오직 이러한 관점으로부터만, 사물에 대한 객관적으로 본질적인 정의들―있는 그대로의 것으로서 대상, 다른 말로 하면 하나의 개념에 대한 추상이 형성되는 것―을 구분할 수 있다.

 

하나의 개념을 정의한다는 것은, 상응하는 용어에 대한, 인간에 의해 주어지는 감각을 찾아야 한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개념을 정의한다는 것은 대상을 정의하는 것이다. 유물론의 관점에서, 그것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유일하게 올바른 정의란 대상의 본질에 도달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의 용어의 의미 혹은 느낌에 대한 습관이나 합의를 수립할 수 있다. 개념의 내용은 (그것과-역자) 전혀 다른 것이다. 비록 하나의 개념의 내용이 항상 직접적으로 ‘용어의 의미’로서 나타나지만, 그것은 동일한 의미가 전혀 아니다.

 

그것은, 유물론적 변증법(변증법적 논리학)에서 해석되는 것처럼, 개념의 구체성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극히 중요한 지점이다.

 

신실증주의자들은 개념을 정의하는 문제를, 형식적 규칙에 따라 만들어진 용어들의 체계 안에서 용어의 의미를 수립하는 문제로 축소한다. 그리고 개념에 대한 정의들과, 의식의 밖에서 독립적으로, 즉 정의 밖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 간의 일치의 문제는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제거된다. 결국, 그들은 절대적으로 풀 수 없는 소위 추상적 대상의 문제에 도달한다. 이러한 명칭(추상적 대상-역자)은, 개별자의 직접적인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주어지는 개별적 사물에 대한 이름으로 적합하지 않은 그러한 용어를 의미하는 것으로 언급된다. 개인의 의식 속에서 하나의 대상에 대한 감각적 이미지가, 여기서 다시 구체적인 대상으로 불린다는 것―이 점은 극단적인 경험주의의 오랜 전통에서 완전한 동의를 받는다―에 주목하자.

 

실제 과학의 전체가, 개인의 감각적 경험(즉 그 의미에 대하여 어떤 ‘추상적 대상’을 갖고 있는)에 직접적으로 상응하지 않는 정의들로 이루어져 있는 한, 구체에 대한 추상의 관계의 문제는 의식 속의 개별적 이미지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의 관계의 문제로 변형된다. 논리학의 문제로서, 그것은 또한 무시되고 있고, 부분적으로는 심리학적인, 부분적으로는 형식적인 언어학적 문제에 의해 교체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수준에서는, 그 문제의 정식화 자체가 그것에 답변할 어떤 가능성도 배제하기 때문에, 어떤 일반적 개념이 객관적 진리인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실증주의자들의 ‘논리학’은 하나의 개념과 다른 개념 간의 (실제로는 하나의 용어와 다른 용어 간의) 연계들과 이행에 대한 연구에 집중을 한다. 개념으로부터 의식 외부 (즉 정의와 감각적 경험의 외부의) 대상으로의 이행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사전에 가정하고 있다. 용어에서 용어로 나아가면서, 이 논리학은 하나의 용어로부터―또 다른 용어가 아닌―하나의 대상으로 연결되는 다리―개인에게 직접적인 경험으로서 주어지는 사물이 아니라 그 진정한 의미에서 ‘구체성’으로 연결되는 다리―를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용어에서 대상으로, 추상에서 구체로 그리고 그 역으로 이끄는 유일한 다리―둘 간의 확고한, 모호하지 않은 연관을 수립하는 것을 허용하는 다리―는, 맑스와 엥겔스가 이미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보여주었듯이, 대상, 즉 사물과 인간의 객관적 존재를 포함하는, 실천적 활동이다. 순수한 이론적 활동은 여기서 충분하지 않다.

 

‘철학자들이 직면하는 가장 어려운 임무 중 하나는 사고의 세계로부터 실제적인 세계로 내려가는 것이다. 언어는 사고의 직접적 현실성이다. 철학자들이 사고에 독립적인 존재를 부여했듯이, 그들은 언어를 독립적인 영역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것이 철학적 언어―그리고 이 속에서 단어의 형태로서 사고는 그 자신의 내용을 가진다―의 비밀이다.’1)라고 맑스는 1845년에 일찍이 썼다. 그때는 논리학의 영역에서의 실증주자들의 발견들이 이루어지기 거의 백 년 전이었다. 이 작업의 결과, ‘사고의 세계로부터 실제의 세계로 내려가는 문제는 언어로부터 생활로 내려가는 문제로 전환되었다.’2) 그리고 그것은, 그러한 경향의 철학자들에 의해 말로 해결할 수 있는 과제로, 또한 단어로 남아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단어 이상의 어떤 것으로 될 특수한 마술적 단어를 창조하는 과제로 인식되었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그러한 과제가, 언어와 사고가 실제 생활의, 인간과 사물의 객관적 존재를 표현하는 형식이라기보다는 그것들 자신의 내재적 규칙과 법칙들에 따라 조직되는, 분리된 영역이라는 관점에서만 발생하는 상상적인 것임을 훌륭하게 보여주었다.

 

“우리는 사고에서 현실로의 이행, 따라서 언어에서 생활로의 이행의 문제 전체가 단지 철학적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임을 보았다. … 이 커다란 문제는 … 물론 이 돈키호테 같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하나의 단어―하나의 단어로서, 문제에서 이행을 형성하는, 또한 하나의 단어로서 단순한 단어이기를 멈추는, 그리고 또한 하나의 단어로서 신비한 초언어적 방식으로 언어 내적인 것으로부터 그것이 가리키는 실제적 대상을 지시하는―를 찾아서 만들어 내는 것을 마침내 결과할 수밖에 없었다.”3)

 

최근에는, 또한 많은 부르주아 철학자들은, ‘추상적 개념’의 거대한 전체 체계가, 한 개인의 인식에서의 개별적 이미지로서, 무엇보다도 ‘구체적’ 대상이라고 불리는 ‘유일한 개별’로서, 이러한 불안정하고 알기 어려운 토대에 기초한다는 관념에 뿌리는 두는 이 사이비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절대적인 것을 찾는 낡은 방식에 불과하다. 헤겔이 절대적인 것을 개념 속에서 찾는 반면에, 신실증주의자들은 그것을 절대적인 규칙과 결합된 단어들과 신호의 영역에서 찾고 있다.

 

철학에서 관념론을 완전히 버린, 맑스와 엥겔스는 사고와 언어를 ‘단지 현실 생활의 표현’4)으로서 보았고 그리고 개념들의 정의를 언어적으로 기록된, 실재에 대한 정의로서 보았다. 하지만 실재는 단순히 분리된 개별자들이 추상의 망 속에서 추상적인 일반적 정의들을 잡아내는, 개별적 사물들의 단순한 바다로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조직된 구체성, 즉 인간의 자연에 대한 관계들의 명료한 체계이다. 언어와 사고는 정확히 인간과 사물들의 이런 체계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표현의 형식)이다.

 

이런 기초 위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오늘날까지도 관념론 철학(신실증주의 철학을 포함하여)의 언어 속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특수한 ‘추상적 대상들’로서 나타나는, 그러한 ‘추상들’의 객관적 의미의 문제를 해결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이 모든 신비한 추상―관념론 철학에 따르면, 의식 속에서만, 사고와 언어 속에서만 존재하며, 구체적 현실 속에서 자신들의 객관적인 사실적인 대응물을 발견하는―에 대해 유물론적인 해석을 하였다. 그리하여 구체에 대한 추상의 관계 문제는 언어적으로 표현된 추상의 개별적, 감각적으로 주어진 사물에 대한 관계의 하나이기를 멈추었다. 그것은 그 자신 내부에서 구체적 현실의 내적 구분의 문제로서, 이 현실의 구별된 요소들 사이의 관계의 문제로서 나타났다.

 

맑스와 엥겔스의 의해 밝혀진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분명히 매우 단순하다. 개념들의 정의는, 실제적 구체성의 상이한 요소들 간의 문제, 즉 인간에 대한 인간의 그리고 사물에 대한 인간의 관계 체계에 대한 법칙 지배적인 조직화의 문제일 뿐이다. 이러한 구체적 현실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그것의 구조와 조직화를 표현하는 개념들의 ‘추상적’ 정의를 산출해야 한다. 그 개념에 대한 각각의 추상적 정의는, 구체적 현실에서 실제적(객관적)으로 추출된 분리된 요소를 표현해야 한다. 그 해결책은 처음에는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관념론 철학이 지금까지 해명할 수 없었던 문제의 고르디아스 매듭을 단번에 자른다.

 

이 관점에서, 추상은 감각이나 낱말 기호의 의미나 감각의 형태로 오직 인간 뇌 속의, 의식 속의, 순수한 관념과 동의어가 아니다. 이 용어는 또한, 충분히 타당한 이유로, 맑스에 의해 의식 밖의 현실에 적용되었다. 예를 들면, ‘추상적 인간 노동’, 추상적인―분리된―개별적 인간, 혹은 ‘추상적 부의 물질적 측면으로서 금’, 등등.

 

이 모든 표현들은, 추상을 순수한 관념, 정신, 지식의 동의어라고 보고, 동시에 구체를 개별, 감각적 인식의 동의어라고 보는 논리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는 엉터리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일 수 있다. 그것은, 오로지 그들 논리학이 자본주의적 관계라는 구체적 현실이 사고 앞에 제기하는 변증법적 과제를 절대 풀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강단 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현실은 전적으로 신비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예를 들어, 여기에서, ‘구체’의 한 측면 혹은 속성의 의미를 가지는 것은 ‘추상’이 아니며, 오히려, 감각적 구체가 추상적 보편의 단순한 표현 형식의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전도―이것의 본질은 맑스 이전에 드러나지 않았다―속에, 가치 형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의 완전한 어려움이 놓여 있다.

 

“이러한 전도―이것을 통하여 감각적 구체가 단지 추상적 일반의 하나의 형태로서만 나타나고 그리고 역으로 추상적 일반이 구체의 하나의 속성으로 나타나지 않는―가 가치의 표현을 특징짓는다. 그 점이 가치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로마 법과 게르만 법은 모두 법이라고 하면, 그것은 자명한 것이다. 만약 내가 반대로, 법은, 이러한 추상은, 자기 자신을 로마 법과 게르만 법 속에서, 이러한 구체적 법 속에서 실현한다고 하면, 그러면 그 관계는 신비한 것이 된다.”[≪자본론≫]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말과 언어로 사실들을 표현하는 신비로운 형식이 아니고, 사변적인 헤겔식 말의 전환도 아니며, 오히려 서로 연결된 현실 요소들을 실제적으로 ‘전도’한 완전히 정확한 언어적 표현이다. 그것은 사회적 생산의 분리된 고립된 연계들의 각자에 대한 보편적인 의존성이라는 실제적 사실에 대한, 인간의 의식이나 그들의 의지에 대해 완전히 독립적인 사실에 대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 사실은, ‘구체’에 대한 ‘추상’의 신비로운 힘으로, 즉 분리된(개별적) 사물들과 개인들의 운동을 인도하는 보편적 법칙이 각각의 개별적 개인과 개별적 사물에 대하여 가지는 힘으로 불가피하게 나타난다.

 

헤겔식 표현 방식을 떠올리게 하는, 이 ‘신비로운’ 말의 전환은, 사물이 그 속에서 존재하는 ‘사물들’과 ‘관계들’의 실제적인 변증법을 반영한다. 그런데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이 표현의 신비로운 본성이, 정확히 ‘추상’과 ‘구체’가 강단 논리학에 의해 적용되는 의미로 사용된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는 점이다.

 

참으로, 만약 ‘구체’가 어떤 사물에 대한 정의에 적용되고, ‘추상’이, 사고와 정의의 특수하고 독립적인 대상으로 간주되어 사물들 간의 관계에 대한 정의로 적용된다면, 화폐와 같은 사실은 즉시 매우 신비적인 것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객관적으로, 이 점에 대해 가질 수 있는 환상과는 별도로, ‘화폐는, 뚜렷한 속성들을 가진 물질적 대상이지만, 생산의 사회적 관계를 대표’5)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맑스가 지적했듯이, ‘그들이 대단히 신중하게 하나의 사물이라고 묘사했던 현상이 하나의 사회적 관계로 다시 나타나고, 잠시 후, 그들이 하나의 사회적 관계로 묘사했던 것이 한 번 더 하나의 사물로 나타나 그들을 괴롭힌다.’6)

 

이 ‘신비’는 자본주의적 생산에만 특수한 특징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자. 개별적 ‘사물’(즉 ‘구체적 개념’의 대상)과, 그 속에서 그러한 사물이 이러한 특별한 사물로 존재하는 ‘관계’(‘추상적 개념’의 대상) 사이의 관계의 변증법은 보편적 관계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보편적 연계로부터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없다는 객관적으로 보편적인 사실―사물들은 언제나 다른 것과의 관계의 체계 속에서 존재한다―의 표현이다. 상호작용하는 사물들의 이 체계(맑스가 구체성이라고 부른 것)는 언제나, 각각의 분리된 감각적으로 인식되는 사물과 관련하여, 결정적이고 따라서 논리적으로 우선적인 어떤 것이다. ‘관계’가 어떤 ‘사물’로 생각되고, 그리고 어떤 ‘사물’이 ‘관계’라고 생각되는 이 놀라운 상황은, 정확히 이러한 변증법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다.

 

사물들의 상호관계의 체계는, 그들 관계들(즉 ‘구체’)의 어떤 법칙 지배적 체계는, 사고 속에서 항상 분리된 감각적으로 인식되는 사물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다소간 파편적이고, 특수한 표현으로, 즉 추상적으로 나타난다. 이론적 분석의 모든 어려움은, 사물들 간의 관계가 특수한 독립적 대상으로서 추상적으로 간주된다는 점이 아니며, 또한 역으로 그 ‘사물’이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의 체계 밖에 존재하는 고립된 대상으로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각각의 사물은 상호작용하는 사물들의 어떤 구체적인 체계의 요소 혹은 계기로서, ‘관계들’의 어떤 체계의 구체적인 개별적 표현으로서 해석되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구체’를 ‘추상’에 종속된 어떤 것으로서, 그리고 심지어는 그것(추상-역자)의 생산물(그리고 이 점은 보편, 특수, 개별의 문제에 대한 헤겔식 신비화 전체의 뿌리이다)로서 제시하는 말의 전환은 사실상, 각각의 개별적 현상(사물, 사건 등)이 항상 그것의 제한성 속에서 생겨나고 존재하며, 나중에는 어떤 구체적인 전체 속에서, 법칙 지배적 방식으로 발전하는 개별적 사물들의 체계 속에서 죽어가는 절대적으로 실제적인 환경을 표현한다. 각각의 개별적 사물에 대한 법칙(그리고 법칙은 자연과 사회에서 보편의 현실이다)의 ‘힘’ 혹은 결정적인 활동, 부분들과의 관계에서 전체의 결정적 중요성은 정확히 ‘구체’에 대한 ‘추상’의 힘으로서 인식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신비화된 표현이다.

 

맑스는, ‘구체’의 현실을, 개별적인 고립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발전하고 있고 발전으로부터 발생하는, 상호작용하는 사물들의 전체 체계로서, 어떤 법칙에 따라서 나누어지는 전체로서 보여줌으로써, 이러한 신비화를 벗겨냈다. 이러한 해석을 수용하면, 어떤 신비화의 그림자도 사라지게 된다.

 

구체는(그리고 추상이 아니라)―그것의 발전, 그것의 법칙 지배적인 구분 속에서 하나의 전체로서 취해지는 현실로서―추상과 관련하여 언제나 우선적인 어떤 것이다(이 추상이 현실의 분리된 상대적으로 고립된 계기든지 혹은 그것의 정신적인 언어적으로 기록된 반영으로서 해석되든지 간에). 동시에 어떤 구체성도 그것 자신의 분리된 요소들(사물들, 관계들)의 특수한 결합, 종합, 통일로서 존재하며, 그 요소들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그것이 정확히 왜 구체가 사고 속에서 오직 다양한 정의들―그 정의들의 각각은 바로 그 구조 속에서 실제적으로 구별되는 계기들의 하나를 기록하고 있다―의 통일로서 반영되는 지의 이유이다. 구체의 지속적인 정신적 재생산은 그러므로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으로서, 즉 특수한 정의들의 현실에 대한 집합적이고 전면적인 이론적 상으로의 논리적 결합(종합)으로서, 특수에서 보편으로의 사고의 운동으로서 실현된다.

 

분리된(특수한) 정의를 뽑아내고 그것들을 연결하는 순서는 결코 자의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의 연쇄는, 맑스-레닌주의의 고전가들이 보여주듯이, 이 주어진 경우에서 사고에서 재생되는 현실의 구체적 영역의 발생, 형성, 그리고 성장하는 복잡성의 역사적 과정에 의해 일반적으로 결정된다. 하나의 이론적 구성이 언제나 시작되어야 하는, 전체에 대한 근본적, 일차적, 보편적 추상적 정의들은, 전체의 부분을 형성하는 모든 ‘특수자들’로부터, 예외 없는, 단순한 형식적 추상을 통해서는 여기에서 전혀 형성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본론≫의 일차적인 보편적 범주인 가치는, 상품, 화폐, 자본, 이윤, 그리고 지대에 똑같이 고유한 일반적 특징들을 보유하는 추상들을 통해 정의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특수자’, 즉 상품에 대한 가장 뛰어난 이론적 정의들―다른 특수자들은 그러나 엄격하게 고려에서 배제된다―을 통해 정의된다.

 

이러한 초보적인 경제적 구체성으로서의 상품에 대한 분석은, 경제적 관계들의 또 다른 ‘특수한’ 형태에 속하는 보편적인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추상적인) 정의들을 산출한다. 그런데 전체적 요점은, 상품은 동시적으로 다른 범주들에서 기록되는 다른 특수자들의 존재의 하나의 보편적 조건이 되는 그런 종류의 특수자라는 점이다. 그것(상품-역자)은 그 전체적인 특수성이,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구성, 즉 미발전되고, 초보적이고, “세포로서” 구성이 되는 것―그것에 내재적으로 고유한 모순들을 통하여 발전해가는―에 놓여 있는 특수한 전체이다.

 

개념에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은, 한 종류의 실제적인(역사적으로 정의되는) 인간 간의 관계가, 마찬가지로 실제적인, 사물들에 의해 매개되는 다른 종류의 관계들로 발전해 가는 객관적인 변증법을 매우 정확히 반영한다. 추상에서 구체로 가는 사고의 전체 운동은 그러므로 동시에 ‘개념에서 개념으로’의 운동이 아니라, 사실에서 사실로 가는 사고의, 하나의 사실을 고려하는 것에서 또 다른 사실을 고려하는 것으로의 이행의 절대적으로 엄격한 운동이다.

 

맑스의 방법론의 이 특수한 특징은 ≪자본론≫의 논리에 대한 칸트주의적 해석에 반대하는, 맑스주의 고전가들의 주장들에서 끊임없이 강조되어야만 했다. 이 특수한 특징은, 이 방법론을 적용함에 있어서, ‘우리가 순수한 논리적 과정을 취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 과정과 그것의 사고에서의 해석적 반영, 그것의 내적 연관에 대한 논리적 추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 있다.[≪자본론≫ 3권의 보충, 가치법칙에 대하여]

 

개념에서 구체에 대한 추상의 관계의 문제는 이런 접근에 기초해서만 정확하게 풀 수 있다. 모든 개념은, 그것의 전체로서 구체적 실재의 특수한 부분의 계기들의 하나만을 기록한다는 의미에서 추상적이다. 각각의 개념은 또한 구체적이다. 왜냐하면 개념은 잡다한 사실들의 형식적인 일반적 ‘특징들’을 기록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정확한 방식으로 그것이 속하는 사실에 대한 구체적 한정성을, 그것의 특수한 특징―이 특징 덕분으로 개념은, 현실적인 총체성 속에서 다른 어떤 역할이 아니라 바로 이 역할을 하게 되며,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이 특수한 기능과 ‘의미’를 갖게 된다―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모든 개념은 (만약 그것이 단지 언어적으로만 고정된 일반적 관념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잘 발전된 개념이라면) 그러므로 구체적 추상이다―이것이 낡은 논리학의 관점에서 얼마나 모순적으로 들릴 지라도. 그것(개념-역자)은 항상 그 속에서 표현되는 하나의 사물(즉 감각적으로, 경험적으로 진술되는 사실)이지만, 단순히 현실의 불명확한 영역에 속하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어진 상호작용하는 사물들(사실들)의 구체적 체계의 한 요소로서 그것(개념-역자)이 특수하게 갖고 있는 속성과 관련하여 고려되는 사물이다. 다른 사물과의 관계들의 어떤 구체적 체계 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하나의 사물은 또한 하나의 추상―관계들과 속성들의 매개인 사물들과 연계되지 않은 특수한 대상으로 간주되는 관계 혹은 속성에 지나지 않는다―이다.

 

논리적 (보편적) 범주들로서 추상과 구체의 범주에 대한 맑스주의적 개념은, 레닌의 수많은 철학적 저작들과 단편들에서, 또한 그가 사회적, 정치경제학적, 그리고 정치적 문제들을 고려하면서 수행한 그의 논리학으로의 여행에서 더욱 정교화 되었다. 그가 이 문제들을 다룰 때마다, 레닌은 확고하게 맑스와 엥겔스가 발전시킨 관점을 방어했고, 자의적으로 선택된 형식적 유사성들을, 그리고 잡다하면서도 실제로는 연관되지 않는 현상의 ‘유사한 특징들’을 언어적 형식 속에서 기록하는 공허한 형식적 추상들을 날카롭게 반대하고 이론적 추상들의 객관적 중요성을 강조했다.

 

레닌에게 있어서, ‘추상’은 항상 생활과 유리된 용어의 동의어, 형식적인 단어-창조의 동의어, 현실에 부합하는 명백한 사실이 없는 공허하고 비진리적인 정의의 동의어였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레닌은 항상 진리의 구체적 성격과 현실을 표현하는 개념들의 구체적 성격을 주장했고 그리고 말과 행동 사이의 분리할 수 없는 연계를 주장했다. 왜냐하면 추상과 구체의, 보편과 특수 및 개별과의 실제적인 합리적 종합을 보장하는 것은 오직 이러한 연계들뿐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한 레닌의 견해는 논리학에 대하여 거대한 중요성이 있는데, 더 주의 깊은 연구, 일반화, 그리고 체계화를 요구한다. 이 견해들이, 개념을 단호하게 ‘추상’(개별적 사물들 혹은 사실들의 개념)과 ‘구체’(‘사물들로부터 고립되어’, ‘특수한 대상으로서’ 고려되는 관계들과 속성들을 언급하는)로 형이상학적으로 분할하는 것과는 전혀 공통점이 없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레닌은 두 유형의 개념들을 똑같이 추상적인 것으로서 평가했다. 그는 전혀 그것들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사실들과 대상들이 그것들의 전체적인 결합 속에서 그리고 구체적인 상호작용(즉 그것들의 ‘관계들’ 속에서)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사회적 관계들에 대한 어떤 고려도 항상 ‘사물들’에 대한, 엄격하게 검증된 사실들에 대한 가장 주의 깊고 사려 깊은 취급에 기초해야 하며, 그 사회적 관계들은 절대로 사물들과 사실들로부터 분리되어 고려되는 ‘하나의 특수한 대상’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레닌은 모든 경우에 있어서 구체적 사고를 주장했는데, 왜냐하면 구체성은 레닌에게―맑스에게도 마찬가지로―개념들의 객관적 의미와 진리성의 동의어였고, 반면에 추상성은 그것들의 공허함의 동의어였다.

 

우리가 여기서 말한 것은 다음의 결론들을 보장한다. 변증법과 형식논리학 모두에서, 개념들을 일률적으로 추상과 구체의 두 부류로 나누는 것을 허용될 수 없다. 이러한 구분은 철학에서 최고와는 거리가 먼 전통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들 전통에 맞서서 맑스와 레닌만이 투쟁했던 것이 아니라 헤겔, 스피노자, 그리고 개념(사고의 형식으로서)과 용어(하나의 언어적 상징)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알았던 일반적인 모든 사상가들이 투쟁했다. 용어들을, 개인에 의해 감각적으로 인식된 분리된 사물들의 이름과, 그것들의 ‘일반적’ 속성들과 관계들의 이름으로 나누기 위한 어떤 근거가 있지만, 개념과 관련하여 이러한 구분은 전혀 의미가 없다. 그것은 논리적 구분이 아니다. 논리학에서 그것을 위한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개념과 그것의 분석으로부터의 약간의 결론들

이제 위의 내용을 고려하여 인간의 개념을 고찰해 보자. 인간이란 무엇인가? 처음으로 보면, 그 문제는 말도 안 되게 단순해 보인다. 우리들 각각은 어떤 특정한 관념을 이 단어와 연계시키고, 이 관념에 기초해서 어떤 다른 존재 혹은 대상으로부터 인간을 쉽게 구별한다. 맑스 이전의 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공통 감각을 지닌 모든 개별이 인간 개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마도 어떤 다른 개념도 이 개념보다 더 철학자들 사이에서 더 신랄한 논쟁을 야기하지는 않은 것 같다.

 

형이상학적(반변증법적) 견해에 따르면, 이 개념을 정의하는 것은, 다른 어떤 개념보다 전혀 어렵지 않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다른 어떤 존재들이 아니라 인류의 모든 개별적 대표자들에서 공통적으로 고유한 일반적 요소를 추상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권고를 수행하려는 시도는 근본적인 철학적 의미가 있는 수많은 어려움에 즉각적으로 부딪히게 된다. 이러한 추상을 하기 전에, 어떤 살아있는 존재들이 인류에 포함될 수 있고 어떤 존재들이 그럴 수 없는지 결정해야만 하는 문제에 부딪힌다. 형식적 성질이 전혀 아닌 고찰은 즉시 험악한 활동으로 들어간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적 존재’로서 인간이라는 그의 유명한 정의를 내오는 데서 노예를 고려하지 않았다. 노예는 하나의 다른 ‘종’, 즉 ‘도구’에 포함되었다. 비록 ‘말’을 하는 종이었지만. 그 자신의 계급(노예소유주 계급-역자)의 이데올로그로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오직 자유로운 시민의 활동만이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이었다.

 

인간 개념에 대한 초보적인 분석은, 그것이 계급들의 존재와 투쟁 그리고 그들의 세계관과, 무당파적 혹은 순수하게 아카데믹한 적이 결코 없었던 인간주의에 대한 특정한 해석과, 천 개의 끈에 의해 얽혀 있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드러낸다.

 

부르주아 체제는, 봉건적 질서에 맞서는 투쟁 속에서 스스로를 주장하면서, 봉건제가 인간 본성에 대한 왜곡되고 거짓된 편견에 기초하는 반면에, 자신이 인간의 진정한 본성에 부합하는 유일한 구조라고 주장함에 의해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했다. 현대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그들은, 사회주의가, 오로지 ‘자유 기업’ 체제 하에서만 만족되는 ‘인간 본성의 요구들’과 양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 애쓴다.

 

이와 관련하여, 진보적인 프랑스 작가인 베르코르스의 한 소설에서 묘사된 상황을 분석해 보자. 그 소설은, 일반화되고, 날카롭고, 그리고 재치 있는 형태로, 현대 세계에서 충돌하는 인간에 대한 전형적인 견해들을 그려낸다. 이상한 생물체들의 한 공동체가 열대 숲의 외딴 지역에서 발견된다. 현대 과학에서 유행하는 어떤 기준에 따르면 이들은 유인원이지만, 다른 기준에 따르면 그들은 인간이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동물적, 생물학적 세계와 인간의, 사회적 세계 사이에서 하나의 특별한,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은 이행하는 형태이다. 전체 문제는 그들이 인간을 동물로부터 분리하는, 거의 인식되지 않는 경계를 건넜는지, 그렇지 않은 지이다.

 

그것은 오직 생물학 혹은 인류학 전문가들이 고려할 순수한 아카데믹한 문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순수한 아카데믹한 문제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그 트로피(작가에 의해 창조된 생물체가 불리는 방식)는 곧 다양한 이해관계에 따른 분쟁의 중심이 되고 그리하여 상이한 견해들 간의 분쟁의 중심이 된다. 하나의 추상적인 이론적 문제, ‘이것들이 동물인가 혹은 인간인가?’는 명확하고 아주 구체적인 답을 요구한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의식적으로 이 존재들 중 하나를 죽인다. 만약 트로피가 사람이라면, 그러면 그는 사형되어야 할 살인자이다. 만약 그들이 동물이라면, 범죄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문제가 늙은 성직자를 고문한다. 만약 트로피가 사람이라면, 그는 그들의 영혼을 구제할 의무와 세례의식을 행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만약 이것들이 단지 동물에 불과하다면? 그 경우 그는, 눈이 멀어 팽귄들에게 세례한 성 마엘이 범한 신성모독을 재현하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또 다른 강력한 이해관계는 트로피를 이상적인 노동력으로 보는 산업의 회사이다. 노동조합도 계급투쟁도 모르고, 생물학적인 것 이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훈련된 동물들―무엇이 자본가들의 관점에서 더 나을까?

 

트로피가 발견된 소유지의 회사는 이것들이 그 회사의 사적 재산을 이루는 동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할 것이다. 트로피의 성질에 관한 논쟁은 수백 명의 사람들과, 수십 개의 이론과 학설들이 관련되고, 그것들의 범위는 더 넓어지고 그 문제 자체는 더욱 더 뒤얽히게 된다. 그 모든 것은 아주 다른 대상들과 가치들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한다.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엄밀하고 모호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기준을 깊이 숙고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처음에 보일 수 있는 것보다 더 어려운 문제라는 것을 증명한다.

 

만약 어떤 ‘인간의 속성’이 선호된다면, 그 트로피는 인간의 범주에 안에 들 것이고, 만약 다른 속성이 선호된다면,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러한 특징들의 계열을 생각하는 것은 또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경우 문제는 이러한 특징들의 수와 관련하여 떠오르고, 어려움은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인간 속성들의 수를 늘리고, 트로피가 가지고 있지 않은 속성을 이에 포함시켜서, 트로피를 자동적으로 인간 종족 밖에 남겨둔다. 특징들의 수를 줄이고 인간과 트로피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이미 알려진 것만 남겨서, 트로피를 인간 종족에 포함시키는 정의를 얻을 수도 있다. 사고는 악순환으로 빠져 들게 된다. 트로피의 성질을 정의하기 위해서 이미 인간에 대한 정의가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전에 트로피를 호모사피엔스의 한 종으로 포함할 것인지 아닌지를 사전에 결정하지 않는 한 인간을 정의할 수 없다.

 

게다가, 각각의 특징들에 대한 해석은 즉각적으로 폭발적인 논쟁을 초래한다. 사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언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노동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그리고 등등. 이 개념들의 어떤 의미에서 트로피는 사고와 언어 모두 가지고 있는 반면에, 다른 의미에서는 가지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인간 각각의 속성에 대한 같은 종류의 논쟁이 인간 개념 자체에 관해 타오른다. 논쟁에 대한 가시적인 결말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가장 일반적인 철학적 개념의 영역에 도달하지만 더 큰 힘과 격정으로 불타오를 뿐이다.

 

그 논쟁은 ‘어떤 생활의 활동 양식이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어떤 생활의 조직이 ‘인간의 본성에 합치’하고, 이 ‘본성’은 어디에 놓여 있는가’라는 주제를 다룰 때 특히 첨예해진다.

 

인간과 비-인간 사이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을 허용하는 ‘일반적이고 본질적인 특징’을 수립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다시 또 다시 아주 오래된 하나의 어려움에 부딪힌다. 그러한 특징은 오직 인간과 인간에 가장 가까운 동물의 조상 사이의 경계가 이미 그어져 있을 때만 정의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의 머리 안에, 결정되어야 할 바로 그 ‘일반적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이 경계선을 그릴 수 있을 것인가? 매우 차가운 물과 매우 뜨거운 물을 구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미지근한 물은? 돌 하나는 무더기를 만들지 않고, 돌 두 개도 무더기를 만들지 않는다. 무더기를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돌이 필요할까?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하는 사람이 대머리가 되는 지점은 어디인가? 이러한 명확한 경계가 존재하기는 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오직 분류의 편의를 위해서 임의로 상상의 선을 그린 것은 아닌가? 그 경우 선은 어디에 놓여야 하는가? 그것은 존재하는 힘들이 그리기 원하는 곳에 그려질 것이다―즉 소설의 영웅이 도달하는 확신. 정말로, 주관적 관념론자의 교의들(실용주의, 도구주의 등)은 이 문제의 해결을 존재하는 힘들에게 넘긴다. 그들의 목소리는 진리의 기준이 된다. 모든 것은 그들의 의지와 변덕에 의존하여 만들어진다. 이 세계의 모든 불행은, 사람들이 아직, 인간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리고 인간이 무엇이었으면 하는가에 대해 동의하지 못한다는 사실로부터 뻗어 나온다―이것이 소설의 주인공이 철학하는 방식이다.

 

인간의 일반적이고 본질적인 특징은, 첫눈에 보이는 것처럼 발견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실천적 경험으로부터 깨닫고서, 그 소설의 영웅들은 철학적이고 사회학적인 개념들에서 해결책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후자의 진리의 기준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여기에서 그것은 모두 시작에서부터 출발한다. 베르코르스와 그의 주인공들은 이 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답변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편향’적인 것으로 보인다. 베르코르스는 ‘물질적 생산에서 인간의 실제적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개념은 ‘인간적 유대의 다른 형태들’, 무엇보다도 ‘관습적인 철학’을 무시한다고 믿는다. ‘물질적 생산보다는 사냥, 전쟁, 혹은 물신 숭배적인 관습에 기초하여 인간적 유대가 건설되는 세계의 수많은 부족들이 있다’, ‘현재 3억 힌두교인들을 묶고 있는 가장 강력한 끈은 저발전된 농업이 아니라 그들의 관습적인 철학이다.’ 그 소설의 주인공들은, 저자의 의도에 따라서, 인간 존재의 일반적이고 본질적인 기준에 대한 맑스주의적 정의와 관념론적인 기독교적 정의 사이에서, 어느 쪽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면서 동요한다. 그들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기독교를 화해시킬 제3의 것을 찾고 있다.

 

‘각각의 사람은 무엇보다도 우선 한 인간이고 그리고 그때서야 플라톤, 그리스도, 혹은 맑스의 추종자가 된다’고 베르코르스는 그 책의 러시아 판 후기에 썼다. ‘내 견해에서는, 맑스주의와 기독교 사이 차이와 관련된 것들을 강조하기보다 이러한 기준에서 나오는 그들 사이의 연결의 지점이 발견될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인간의 본질, 이데올로기적 차이들은 이러저러한 교의를 고수하는 것에 놓여 있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에 놓여 있는가? 그것은 ‘인간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 인간이다’라는 사실에 놓여 있다. 이것은 베르코르스가 변증법적 유물론의 ‘편향된’ 견해에 반대하여 제기할 수 있었던 유일한 대답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대답’은 우리를 다시 출발점―어떤 명확한 내용도 부여되지 않은 하나의 단순한 이름으로―으로 되돌려 놓는다. 동어반복에서 벗어나기 위해, 맨 처음에서부터 추론의 노정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베르코르스가 매우 분명하고 재치 있게 보여준 그 입장은, 우리 시대의 시급한 문제들과 괴롭게 싸우고 있는 서구 지식인 집단들의 태도는 잘 드러내지만, 그들 스스로 아직까지 그 문제―휴머니즘의 고귀한 이상을 회복할 방법은 어디에 있는가?―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본성적으로 이 이상들에 적대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감히 공산주의를 취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 속에서 ‘사고의 독립성’, 허위적인 ‘인류의 사고하는 부분의 특권들’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이 부분은 현대 세계의 이들 두 개의 실제적인 극 사이에서 선택을 두고 고뇌하지만, 어떤 복잡하지 않은 이론적 문제가 균형을 잡지 못하면서 뒤얽히고 완전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변화해 간다. 반면에 형식논리학의 가장 복잡한 도구들의 도움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들은 동어반복을 초래한다. A=A, 인간은 인간이다. 현대 인류의 각각의 개별적 대표자들이 지니는 추상적인 동일한 속성을 확립하는 것을 통해 인간에 대한 정의를 찾는 것으로부터는 어떤 것도 나올 수 없다. 이러한 종류의 공리에 기초한 논리학은 여기에서 무언가를 하기에 절대적으로 무력하다. 보편적 정의로 표현되는 인간의 본질은 각각의 개별자에 내재한 추상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독립되어 취급되는 인류의 각각의 개별적 대표자들이 지니는 동일한 특징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보편적 정의는 이러한 방식으로 획득될 수 없다. 여기서 다른 종류의 논리학, 보편과 개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변증법적 유물론적 개념에 기초한 논리학이 필요하다.

 

이러한 본질을 모든 개별자 속에 내재하는 일련의 추상적 특징들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편은, 누군가가 열심히 찾을 지라도, 여기에서 발견될 수 없다. 이러한 길을 따르는 연구는, 가장 정교한 논리학의 도움을 받는 경우에도 또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이 점에 대한 하나의 훌륭한 설명은 미국인 철학자, 구스타프 E. 뮐러의 ≪변증법≫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책을 보고 판단했을 때, 저자는 헤겔로부터 무언가를 배웠다. 그는 심지어 대립물의 상호 침투, 과학적 테제의 발전에서 모순의 역할, 의식의 자기의식에 대한 관계,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한 헤겔주의적 명제들을 흡수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형식적인 변증법적 박식함은 헛돌고 있고 공허함으로 귀결된다.

 

‘인간은 인간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인간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할 수 없다. 똑같이 만약 그가 스스로를 스스로에 대해 경험하는 것으로부터 구분할 수 없다면, 인간은 인간에 대한 경험을 전혀 가질 수 없을 것이다.’7) 뮐러 식의 인간이 형식적인 변증법적 도식의 규칙에 따라 자신 내부에서 수행하는 일련의 ‘동일시’와 ‘구분’은, 매우 난해하고 복잡하여 그것들의 창조자 자신도 풀 수 없는 구성으로 그를 데려간다. 사이비 변증법적 논리학의 최종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인간은 너무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여서, 당신이 인간을 연구하면 할수록, 인간을 이해할 것이라는 희망을 더 적게 가지게 된다. 뮐러가 상호작용하는 개인들의 뒤얽힌 복잡성 속에서 가까스로 고립시켜 내는 유일한 ‘일반적 특징’은 궁극적으로 ‘반영의 힘’ 그리고 ‘반영에 대한 사랑’으로 판명된다. ‘그의 진정한 인간성은 이 반영의 힘에 놓여 있다. … 그리고 자아가 스스로를 더 잘 알수록, 자아는 더욱 의심스럽고 불확실해 보인다. 문제가 되는 개별 속에서 절대를 포괄하는 것은, 플라톤이 에로스라고 부른 것, 사랑이다. 인간의 진정한 자아는 사랑이다.’8)

 

혹자는 여기서 ‘반영의 힘’을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무력함은 훨씬 더 분명해 보인다. 인간의 본질은 확실히 이것과 아무 관련이 없다. 여기에서 표명된 것은 단지 한 철학자의 본질, 그리고 그가 관조하는 방식을 관조하는 것에 대한 그의 사랑뿐이다. 이것 모두에 대해 뭘러 자신을 힐난하는 것은 매정하고 쓸모없다. 그의 사고의 무력함은 무엇보다 그러한 편향되고 추상적인 심리학―현실의 삶과 대중들의 투쟁으로부터 완전히 괴리된 지식인의 심리학, 오직 그가 관조하는 방식만을 관조하는 사람의 심리학―을 창조하는 상황에 대해서만 비난되어야 한다. 만약 뮐러가 이 관조에 대한 관조를 ‘진정한 인간성’으로 본다면, 그의 입장을 평가하기는 쉽다. 어쨌든 누군가는 조금의 위로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의 인간성, 노동하고 투쟁하는 인간성은, 외로움 속에서 무력한 관조에 대한 그의 사랑과 이 무력한 사랑에 대한 관조를 키우고 있는, 한 인격주의 철학자의 개별성과 동일시되는 그것의 본질에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대 인간성의 본질은, 그리고 그것에 의한 인간에 대한 보편적 정의는, 물론 한 철학자가 가장 관심을 가질 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이다. 명확한 세계관은 이 문제에 올바르게 접근하기 위한 첫째의 그리고 필수적인 전제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결책이, 고립되어 취해진 현대 인류의 모든 개별적 대표자들 속에 고유한 ‘일반적이고 본질적인 속성’을 찾는 것에 있다고, 또한 보편을 단순한 동일성으로 축소하는 것에 있다고 제안하는 논리학보다는 더 발전된 논리학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논리학(전자의 논리학-역자)은 공허한 동어반복 이외에는 아무것도 산출할 수 없다. 게다가, ‘일반적인 것을 찾아라, 그러면 당신은 본질에 대한 지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라는 추상적인 모토는, 일반이 추상되는 사실들의 범위를 정하는 데에 자의성과 주관주의가 자유롭게 작용하도록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논리학과 세계관 사이에 연계들이 통일된 것이며, 그것은 일반화의 작용과 생활 및 철학에서의 명확한 당파적 입장 간의 관계들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의 증거이다. 일반을 위한 형식적 규칙들의 가장 복잡한 체계는, 명확하고 진보적인 세계관적 원칙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일반화를 보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것도 그에 못지않게 진실이다. 진보적인 세계관은, 어떤 세계관과 관련하여 중립성을 미덕으로 삼고,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사용되는 그런 추상적 규칙들을 산출하는 것에 스스로를 한정하고, 이러저러한 세계관을 위해 비이성적인 감정적 편견에 의존하는 논리학과 기계적으로 결합될 수 없다.

 

맑스-레닌주의 세계관은 윤리적 공준보다는 사실들에 대한 과학적으로 산출된 개념에 기초한다. 그것은 철두철미하게 논리적이다. 그런데 어떤 세계관이 산출될 때, 그 도움을 얻는 논리학은, 어딘가 밖에서가 아니라, 자체 내에서, 자기 자신의 명제들 속에서, 어떤 세계관적 원리를 포함한다. 노동자계급과 공산주의적 이상에 대한 가장 따뜻한 감정적 애착은, 어떤 이론가가 ‘비당파성’을 주장하면서, 고대의 순수 형식논리학을 채용한다면, 그 이론가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자신의 테제에서, 맑스는 ‘인간의 본질은 각각의 개인에 내재된 추상이 아니다. 현실에서 그것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다.’9)라고 하면서, 많이 언급된 이 본질을 정의하려는 이전의 모든 시도에 반대하여, 인간의 본질에 대한 자신의 변증법적 유물론적 개념을 대치시켰다. 이것은 세계관적, 사회학적 진리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심오한 논리학적 원리와 원칙, 변증법적 논리학의 가장 중요한 명제들 중 하나를 표현한다. 이 명제가 추상, 구체, 보편, 그리고 개별의 범주들에 대해, 낡은 비변증법적 논리학이 기초하고 있던 것과는 다른 개념을 취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논리학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 명제는 다음을 의미한다. 어떤 종의 본질에 대한 보편적 정의를, 이 종의 각각의 개별적 대표자가 지니는 동일한 속성에 대한 추상을 통하여 찾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다.

 

어떤 종의 본질에 대한 표현은, 아무리 노력해도, 일련의 ‘추상들’ 속에서 발견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일련의 것들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성질의 본질은, 따라서 각 인간의 진정으로 인간적 성질은, 오직 ‘사회적 관계의 총체’에 대한 구체적 연구를 통해서만, 전체로서의 인간 사회와 각각의 인간 개별의 탄생과 발전을 지배하는 법칙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

 

인간 사회는 구체적 공동체의 가장 전형적인 경우이며, 그리고 한 인간 개별의 사회에 대한 관계는 개별의 보편에 대한 관계의 특징적인 사례이다. 이 관계의 변증법적 성격은 여기에서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반면에 구체에 대한 추상의 관계의 문제는 보편의 특수 및 개별에 대한 관계의 문제와 밀접하게 얽혀 있다.

 

<다음 호에 계속>  노사과연


1) K. Marx and F. Engels, The German Ideology, Collected works, Vol. 5, Progress Publishers, Moscow, 1976, p. 446.

 

2) Ibid. p. 446,

 

3) Ibid. p. 449,

 

4) Ibid. p. 447,

 

5) Karl Marx,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p. 35.

 

6) Ibid.

 

7) 구스타프, E, 뮐러, 변증법, bookman, 뉴욕, 1953.

 

8) 같은 책, p. 214.

 

9) 칼 맑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권, 박종철 출판사, p.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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