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마당] 진실은 강고한 계급 투쟁의 무기!(1)

― ≪진실이 밝혀지다―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을 읽고

 

김용화 | 편집위원

 

* 마리오 소사(Mário Sousa), ≪진실이 밝혀지다―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제3판), 채만수 역, 노사과연, 2013.

 

 

 

들어가며

 

지금 현재 21세기에 사회주의는, 다름 아닌 반쏘ㆍ반공주의로 횡행하고 있다!

이는 20세기 사회주의! 그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무지라고 일컬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제국주의에 의한 악의적인 반공 이데올로기와 의도된 물리적 압박 속에 갇혀서 20세기 사회주의 중심에 있던 쏘련 사회를 오류와 실패의 사회주의였다고만 역사적으로 규정지어 버리고, 청산하고, 내팽개치고 있기 때문인 것이 가장 큰 원인 중에 하나라고 여겨진다. 그 방증은 세계적으로 노동자계급은 여전히 착취와 억압 속에 패배 중이고, 한국 사회만 보더라도 진보라고 자처하는 곳곳은 부르주아 또는 소부르주아적인 것을 진보라 착각하며 무늬만 사회주의로 표방되어 있는 실천으로 가득 차 있는 현실이 말해 준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쏘련과 여타의 사회주의 사회들이 굳건하게 유지되고 발전해 왔다면 현재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같은 사태가 벌어졌을까 하는 것이고,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사태를 불러들인 미 제국주의와 EUㆍNATO 제국의 범죄는 은폐된 채, 서방과 한국 등의 언론에서 홍수처럼 연일 편파적으로 보도되고 있는 것들을 세계인들과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어느 분의 말씀을 인용해 본다.

 

이는 미제 및 EU와 러시아 간의 대립은 여러 이권을 둘러싼 제국주의 대 제국주의의 대립인데, 우크라이나는 자원, 통상로 등의 면에서 지리적으로 요충지이고, 따라서 미제 등이 나토로 끌어들이려는 것은 러시아 포위 전략의 일환인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우크라이나 사태는 명백히 국가주의(민족주의) 대 제국주의의 충돌이다. 그리고 가장 뼈아프게 직시해야 하는 것은 사회주의 쏘련의 해체에 그 근본적 원인이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필연적이라는 점에, 즉 본질적인 면에 전혀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식을 똑바로 가져 보기에는 ≪진실이 밝혀지다―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의 저자 마리오 소사의 서문이 적절할 듯하여 다음과 같이 그대로 옮기려 한다. 이보다 더 적절한 내용을 필자로서는 더 잘 구사할 수 있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여기 소개되고 있는 나의 글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역사적 발전에 관한 진실을 탐구한 결과물이다. 나는 역사적 발전을 인식한다는 것이 계급 투쟁과 인류의 미래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인민의 마음을 얻어, 그들이 새로운 사상, 즉 연대와 사회주의의 사상, 전 인류를 위한 새로운 미래의 사상의 편에 서게끔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역사를 안다는 것은 이러한 작업에서 하나의 기초이다.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 그리고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나라들의 역사를 알고 이해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특히 중요하다. 쏘련의 역사와 거기에서 쓰딸린 동지가 수행한 역할을 이해하는 것이 그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동시에 이는 제국주의 프로파간다에 맞서 싸우는 무기이며, 또한 자본주의에 맞선 일상의 투쟁에서 영감의 원천이다.

 

누구를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이 세상에 모든 도덕의 완결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라고들 한다. 그럼 이런 세상을 만드는 데 방해했었고 그 세상의 시작이 되는 사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상상조차 부족하리만큼 잔인했던 파괴와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던 반동들은 필시 용서받지 못할 범죄자요 살인자라 해도, 아무도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어야 한다. ≪진실이 밝혀지다―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 이 책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ㆍ사회, 즉 억압과 착취가 없는 사회를 망가뜨리려고 했던 가장 극악한 악마들의 실체가 밝혀진다. 그 대표 반동분자들을 먼저 언질하자면, 뜨로쯔끼와 그 일파, 히틀러 등등등과 제국주의 국가들이다. 이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인간의 삶을 가치 있게 살 수 있는 사회주의 사회를 지켜 내려고 부단히 애썼던 쏘련 사회와 그 지도자 쓰딸린을 악마화했던 왜곡된 역사 또한 낱낱이 그 진실을 자료와 증언을 통해 입증하고 밝혀 주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여전히 제국주의들의 공작에 의해 그 거짓말들의 신화는 깨어지지 않고, 21세기 반쏘ㆍ반공주의가 횡행하고 있음이 너무나 가슴 아프다! 이 책을 통해 한국 사회의 노동자계급이라도 진실을 인지하고 보다 더 강고한 계급 투쟁의 무기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고의 사회ㆍ세상이라 함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억압과 착취와 차별이 없는 무계급의 사회이지 않겠는가! 그 사회를 완성하기 위한 보다 더 든든한 시초가 될 수 있었던 러시아 혁명이 있었고, 혁명 이후 완전한 자유의 무계급 사회를 향해 악마보다 더한 적들과 맞서 싸우면서 험난함을 헤쳐 나갔던 영웅들과 자신들의 진정한 자유의 사회주의 사회를 지키고자 했던 인민들의 고단한 투쟁들이 있었기에 그 사회는 결코 쉽사리 무너지지는 않았었다.

 

≪진실이 밝혀지다―쏘련에 대한 거짓말≫은, 제1편: 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 제2편: 1930년대 쏘련에서의 계급 투쟁―쏘련 공산당 내의 숙청과 정치 재판, 제3편: 안토니 비버의 ≪쓰딸린그라드≫ 비평―나치의 전쟁 흑색선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성의 순서대로 발췌ㆍ정리를 했고, 총 3-4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본문 중의 모든 강조는 발췌ㆍ정리한 필자의 것이다.

 

 

 

제1편: 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

 

1. 쓰딸린 시대에 쏘련에서 수백만 명이 감금되고 죽었다는 조작된 역사

 

이 세상에서 쏘련의 노동 수용소(굴라크, gulag)에서 벌어졌던 살인과 의문의 죽음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못 들어 본 사람이 있을까? 쓰딸린 시대에 쏘련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굶어 죽었으며 수백만의 반대파가 사형에 처해졌다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이런 이야기들은 자본주의 세계의 서적,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그리고 영화에서 계속 반복되면서, 사회주의의 희생양이 된 수백만 명에 대한 신화는 지난 50년 동안 끝도 없이 자라났다.

 

그렇지만 도대체 이 숫자들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리고 예전에는 비밀이었지만, 1989년 고르바쵸프에 의해 연구 목적으로 개방된 쏘련의 국가 문서고에는 어떤 정보가 있을까? 부르주아 신화공들은, 쓰딸린 시대에 쏘련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었다는 자신들의 이야기가, 국가 문서고가 개방되는 그날에 사실임이 증명될 것이라고 한결같이 이야기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사실로 증명되었는가?

 

이 글은 쓰딸린이 쏘련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기아로, 그리고 노동 수용소에서 죽었다는 신화의 기원이 어디이며, 그 배후에는 누가 있는지를 보여 준다. 필자[1]필자 마리오 소사(Mário Sousa)는 스웨덴의 맑스-레닌주의 공산당( KPML(r) )의 당원이다. 이 글은 1998년 4월 공산당 신문 ≪프롤레타리아트(Proletären)≫에 … Continue reading는 쏘련의 문서 보관소에서 행해진 조사 보고서들을 연구한 후, 쓰딸린 시대에 쏘련에서 구금되었던 사람의 실제 숫자와 그들이 감옥에 구금되었던 기간, 사망자와 사형이 선고된 사람의 실제 숫자에 대해 구체적인 데이터로 기록된 정보들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진실은 큰 차이를 보인다.

 

히틀러에서 허스트, 콘퀘스트, 그리고 쏠줴니쯴까지

히틀러에서 허스트, 콘퀘스트, 그리고 쏠줴니쯴을 관통하는 역사적인 연결 고리가 있다.

 

히틀러

1933년 독일에서는, 1월 30일 히틀러가 수상이 되었고, 폭력적이며 법을 무시하는 새 정부 형태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나치는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새로운 선거를 할 것을 공포했고, 확실하게 승리하기 위해 의사당에 불을 지르고 공산주의자들에게 그 죄를 뒤집어씌웠다. 공산당과 그 당원들은 구속되었고, 나치는 의회 선거에서 유권자의 48%의 표를 획득했고, 공산당을 금지한 후 사회민주주의당과 노동조합 운동을 짓밟기 시작했으며, 최초의 강제 수용소[2]강제 수용소(Konzentrationslager). 1933년 2월 제정된 ‘국민과 국가의 방위령’에 의하여 나치가 국내외에 설치한 감옥이다. … Continue reading는 성별의 구분 없이 좌익 인사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 사이 의회에서 히틀러의 권력은 우익의 협조로 계속 증대했다. 향후 4년간 의회와 협의 없이도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절대 권력을 부여하는 법을 의회에서 통과시킨다. 그때부터 공개적인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며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독일의 무장과 군사화를 제한하고 있던 1918년의 국제 협약[3]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항복하고 휴전 조약을 맺은 것은 1918년(11월 11일)이지만, 독일의 무장을 강력하게 제한했던 ‘베르사유 강화 … Continue reading을 깨뜨리면서 절대 권력을 강화해 갔고, 나치 독일은 무서운 속도로 재무장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쏘련에서 수백만 명이 죽었다는 신화들이 틀을 갖추기 시작할 때의 국제 정세였다.

 

독일 지도부에서 히틀러의 측근에 있었던 선전장관 괴벨스는 독일 인민에게 나치의 환상을 심어 주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것은 광대한 국민 생활권[4]나치 독일이 영토 확장의 주요 동기로 삼았던 소위 ‘(국민) 생활권’을 말한다. 영어로는 habitat, living space 등으로 번역한다.을 가진 대독일[5]독일어로 Großdeutschland. 19세기까지 대독일(주의)은 독일 통일에 있어 오스트리아를 배제하는 프로이센의 소독일(주의)에 대립되는, 오스트리아의 … Continue reading에 사는 인종적으로 순수한 독일 인민이라는 몽상이었다.

 

이 국민 생활권의 일부는, 조만간 독일이 점령하여 병합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는, 본래 독일보다 훨씬 넓은 동유럽이었다. 1925년에 이미 히틀러는 그의 ≪나의 투쟁≫에서 우크라이나를 이 독일 생활권의 필수 불가결한 부분으로 지목했다.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동유럽의 다른 광활한 지방들을 ‘적절한’ 방식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들이 독일에 속해 있어야 했다. 나치의 무력이 이 지역을 해방시키고 독일의 기술력과 계획으로 우크라이나를 독일의 곡물 생산 지역으로 변모시키겠다고 말이다!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쏘련의 다른 지역을 점령한다는 것은 곧 쏘련과 전쟁을 벌인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이는 미리 준비를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괴벨스를 수반으로 하는 나치의 선전성은 우크라이나에서 볼쉐비끼가 저지른 대량 학살에 대한 선전, 즉 농민들로 하여금 사회주의 정책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하기 위해 쓰딸린이 고의로 파국적인 기근을 촉발하여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는 흑색선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캠페인의 목적은 독일 군대에 의한 우크라이나 ‘해방’을 위한 세계적 여론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노력과 나치의 흑색선전문의 일부가 영국 신문들에 보도되었음에도 우크라이나에서의 ‘대량 학살’에 관한 나치의 선전은 세계적으로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히틀러와 괴벨스가 쏘련에 대한 그들의 중상모략적 유언비어를 퍼뜨리기 위해서는 분명히 도움이 필요했다. 그 도움을 서방의 대국, 미국에서 찾아냈다.

 

윌리엄 허스트―히틀러의 좋은 친구

허스트는 나치가 쏘련에 대해 펼친 심리전을 지원한 억만장자이다. 허스트는 소위 ‘황색 언론’, 즉 선정적 언론의 ‘아버지’로 알려진 미국의 유명한 신문 소유주이다.

 

허스트는 선정적인 기사를 사기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지 않았다. 보도할 만한 잔혹한 사건이나 범죄가 없을 때에는 으레 그의 기자들과 사진사들이 사건을 “날조”했다. 진실인 것처럼 제시되는 숱한 날조된 잔혹한 사건들과 거짓말들, 바로 이것이 황색 언론의 특징이다. 허스트는 이러한 거짓말들 덕택에 백만장자, 그리고 신문업계의 저명인사가 되었다. 그는 계속해 미 전역에서 일간 및 주간 신문들을 사들이거나 설립했다. 1940년대에 25개의 일간 신문, 24개의 주간 신문, 12개의 라디오 방송국, 2개의 세계적인 뉴스 통신사, 영화용 뉴스를 공급하는 사업체인 코스모폴리탄 영화사,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사업체를 소유하고 있었다. 1948년 그는 미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 중 하나인 볼티모어의 bwal-tv를 인수했다. 허스트의 신문들은 미국 전역에서 매일 1천3백만 부가 팔렸고, 독자는 거의 4천만에 육박했다. 미국 성인 인구의 거의 3분의 1이 매일같이 허스트의 신문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세계 도처의 수백만의 사람들은 그의 뉴스 통신사와 영화, 일련의 신문들을 통해 허스트의 언론으로부터 정보를 얻었는데, 그것들은 세계에 걸쳐서 거대한 양으로 번역되고, 출판되었다.

 

실로 허스트의 제국이 수십 년에 걸쳐 미국 정치와 세계 정치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허스트는 극렬한 보수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였고 반공주의자였으며, 그 정견은 극우파였다. 1934년에 허스트는 나치 독일로 여행을 떠나는데, 히틀러는 친구로 예우하며 맞는다. 이 여행 이후 허스트의 신문들은 한층 더 반동적 성향을 띠게 되고, 사회주의와 쏘련, 특히 그 지도자인 쓰딸린에 반대하는 기사들을 끊임없이 실어 댔다. 하지만 수많은 독자들이 허스트의 이 도를 넘은 행위에 항의했고, 그는 결국 기사를 중단하고, 신문들을 회수해야 했다. 허스트의 선정적인 신문의 1면에는 쏘련에 관한 만평과 조작된 사진들이 빈번하게 실리곤 했으며, 쓰딸린은 손에 대검을 든 살인자의 모습으로 그려지곤 했다. 미국의 4천만 독자들과 세계 곳곳의 다른 수백만의 독자들이 매일 이런 기사들을 읽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우크라이나 기근에 관한 신화

허스트의 언론이 초기에 벌인 반쏘 캠페인들 중 하나는 우크라이나에서 수백만 명이 기근으로 죽었다는 주장을 내세운 것이었다. 이 캠페인은 1938년 2월 8일 Chicago American지의 제1면 머리에 “쏘련에서 6백만 명이 굶어 죽다”라는 기사를 실으면서 시작되었다. 나치 지지자인 허스트가 나치 독일이 제공한 자료를 사용, 볼쉐비끼가 고의로 우크라이나에서 수백만 명을 아사하게 했다는 대량 학살에 관한 날조된 기사들을 내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 문제의 진실은 전혀 달랐다.

 

1930년대 초에 쏘련에서 일어났던 것은 주요한 계급 투쟁이었다. 땅 없는 빈농들이 부유한 토지 소유자인 꿀라크에 대항해 일어났고, 농업의 집산화를 위한 투쟁, 즉 꼴호쓰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던 것이다. 직간접적으로 12천만 명의 농민들이 연관된 이 거대한 계급 투쟁은 분명히 농업 생산에 불안정을 야기했고, 몇몇 지역에서는 식량 부족을 초래했다. 식량 부족으로 인해 사람들은 약해졌고, 전염병의 희생자 수가 늘어났다. 이러한 전염병들은 당시 유감스럽지만 쏘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1918-20년 사이에 유행했던 스페인 독감으로 미국과 유럽에서 2천만 명이 죽었지만, 누구도 이들 국가의 정부가 자기 국민들을 죽였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전염병들에 직면해서 이들 정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겨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페니실린이 개발되면서부터 전염병들은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 있게 되었고, 전반적으로는 1940년대 말엽에 이르러서야 전염병들을 억제할 수 있었다.

 

허스트 언론의 기사들은 수백만 명이 굶어 죽은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고의로 기근을 조장한 때문이었다며, 그림까지 동원하여 이를 생생하고 섬뜩하며 세세하게 묘사했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들의 거짓말을 진실로 보이게 했고, 자본주의 국가들의 여론을 극렬히 반쏘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서방 언론들이 조장한, 공산주의자들이 일으켰다는 기근에 대한 항의의 물결 속에서, 이를 바로잡으려는 쏘련에 그 누구도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그것이 1934년부터 1987년까지의 상황이었다. 50년 이상 전 세계에 걸쳐 수 세대의 사람들이 쏘련의 사회주의에 대하여 부정적 관점을 심어 주는 이러한 중상모략을 주식(主食) 삼아 자라 왔다. 허스트는 1951년 숨을 거뒀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매스 미디어 제국은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반동적 선전을 전 세계에 퍼뜨리고 있다.

 

52년이 지나서야 거짓말이 밝혀지다!

나치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이후에도 우크라이나에 관한 나치의 정보 공작은 사라지지 않았고, 나치의 거짓말들은 CIAMI5[6]CIA(Central Intelligence Agency)는 미국의 중앙정보국, MI5(The Security Service)는 영국의 국가정보부.가 이어받았으며, 반쏘 선전전에서 언제나 맨 윗자리를 보장받았다. 반쏘 선전에서 제2차 세계 대전 후 매카시 일당의 반공 마녀사냥 역시 우크라이나에서 수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거짓말을 자양분 삼아 창궐했다. 1953년 이를 주제로 한 책 ≪끄레믈의 사악한 행위들(Black Deeds of the Kremlin)≫이 미국에서 출판되었다는데, 출판 자금을 댄 것은 미국에 있는 우크라이나 망명자들이었다. 그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때에 나치에 부역했던 자들로서, 미국은 그들을 세계의 민주주의자들이라고 소개하면서 정치적 피난처를 제공했다.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80년대에 반공 성전(anti-communist crusade)을 개시하자, 흑색선전이 다시 활개를 쳤다. 1984년에 하버드 대학교의 한 교수가 ≪러시아에서의 인간의 삶(Human Life in Russia)≫이라는 책을 출판하여, 허스트 언론이 1934년에 날조한 모든 거짓 정보들을 그대로 복창했다. 이번엔 미국 대학교라는 존경스러운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고 1986년 또 이 주제와 관련된 책이 출간된다. ≪비탄의 추수(Harvest of Sorrow )≫라는 이 책은 전 영국 정보부 출신이자 현 캘리포니아의 스탠포드 대학교의 교수인 로버트 콘퀘스트(Robert Conquest)가 썼다. 이 책을 쓴 공로로 콘퀘스트는 극우파인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단체(Ukraine National Organisation)로부터 8만 달러를 받았다. 이 단체는 1986년에 콘퀘스트의 이 책으로부터 소재를 따온 ≪절망의 추수(Harvest of Despair)≫라는 영화 제작에도 자금을 지원했다. 이때에는 우크라이나에서 기아로 죽었다고 미국에서 주장되는 사람의 숫자가 1천5백만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이 이야기는 완전 거짓 정보였다.

 

캐나다의 저널리스트 더글러스 토틀(Douglas Tottle)[7]더글러스 토틀(Douglas Tottle, 1944- ). 캐나다의 사진사이자 저술가이며, 노동조합 활동가. 탄광 광부와 철광 노동자로 일했다. 1970년대에는 … Continue reading1987년에 토론토에서 발간된 그의 저서 ≪사기, 기근 그리고 파씨즘―히틀러에서 하버드에 이르는 우크라이나 대학살의 신화(Fraud, famine and fascismthe Ukrainian genocide myth from Hitler to Harvard )≫에서 그 날조들을 꼼꼼히 폭로했다. 허스트의 언론이나 콘퀘스트 등의 책이나 영화에 이용된 사진 자료들, 즉 굶어 죽어 가는 아이들이 담긴 끔찍한 사진들이 1922년에 간행된 출판물들로부터 가져온 것임을 입증했는데, 1918-21년의 내전 기간 중에 여덟 개의 외국 군대가 쏘련을 침공했기 때문에 그때에는 실제로 수백만의 사람들이 기아와 전쟁 상태에서 죽어 갔다. 더글라스 토틀은 1934년 기근에 관한 보도들을 둘러싼 진상을 밝히고, 허스트 언론이 공표한 잡다한 거짓말들을 폭로하고 있다.

 

기근이 발생했다는 지역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기사와 사진들을 보낸 기자는 토마스 워커(Thomas Walker)라는 인물인데, 우크라이나에는 단 한 번도 가 본 적 없고, 모쓰끄바에서도 겨우 5일간 체류했을 뿐이고, 진짜 이름은 로버트 그린(Robert Green)이란 사람으로서 콜로라도 주 교도소를 탈옥한 죄수였다. 그는 미국에서 체포되었고, 법정에서 자신이 우크라이나에는 가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쓰딸린이 조장했다는 기근으로 1930년대에 우크라이나에서 수백만이 아사했다는 거짓말들은 1987년이 되어서야 그 진상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거짓말과 날조된 보도로 수백ㆍ수천ㆍ수억의 사람들을 속여 온 허상들은 우익의 지원을 받은 작가들이 쓰는 , 영화, 언론 속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게쉬타포의 거대한 확성기였던 허스트의 언론은 독점자본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거짓말들을 ‘진실’로 둔갑시킬 수 있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게쉬타포는 사라졌지만, 쏘련의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비열한 흑색선전은 CIA를 새로운 후원자로 삼아 계속 수행되었다. 미국 언론의 반공주의 캠페인은 한 치도 줄어들지 않았다.

 

로버트 콘퀘스트―신화의 창시자

부르주아 언론이 그토록 자주 인용하는 이 사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쏘련에서 죽었다는 수백만에 관해 가장 많은 글을 쓴 두 명의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쏘련에 관한 모든 신화와 거짓말의 창조자인 그는 무엇보다 먼저 ≪대숙청(he Great Terror)≫(1969)과 ≪비탄의 추수(Harvest of Sorrow )≫(1986)라는 책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나치에 부역했다가 미국에 망명하여 극우 정당들에 속해 있는 우크라이나인들을 정보의 원천으로 삼아, 기아로, 그리고 혹은 1936-38년의 재판들 중에 수백만이 죽었다고 쓰고 있다. 콘퀘스트가 저술한 책들의 스타일은 일종의 격렬하고 광신적인 반공주의다. 레이건이 히스테리적으로 반공 성전을 벌이던 1983년에는, 기근을 1937년까지 연장하고, 희생자 수를 5-6백만 명에서 거짓 숫자를 더해 1천 4백만 명으로 증대시켰다. 이 같은 거짓 주장들은 충분한 보상을 받아 1986년에 그는 레이건과 계약을 맺고 쏘련의 침공에 미국 국민들을 대비시키기 위한 대통령 선전 자료를 집필하였다.

 

로버트 콘퀘스트는 영국 비밀정보부(British Secret Service)의 정보 공작 부서인 정보연구부(IRD, Information Research Department)가 창설되었을 때부터 1956년까지 요원으로 일했다. 거기에서의 그의 ‘작업’은 쏘련의 이른바 ‘사악한 역사(black history)’, 즉 기자들이나 기타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 사실처럼 제시되고 배포되는 조작된 이야기들을 지어내는 것이었다. IRD를 떠난 후에도 정보부의 제안을 받으며 IRD가 제안하는 책들을 집필했다. 1937년에 쏘련에서 벌어진 권력 투쟁이라는 주제에 관한 우익의 기본 교과서인 그의 저작 ≪대숙청≫[8]스웨덴어판에는 “1937년 쏘련의 숙청 기간 동안의 ‘수백만의 사망자’에 관한 그의 책 ≪대숙청≫”이라고 되어 있다.은 IRD의 협조로 마무리되어 출판되었다. 발간 부수의 1/3을 프래저 출판사(Praeger press)가 구입했는데, 이 회사는 대개 CIA와 연계하여 책들을 출판하는 곳이다. 콘퀘스트의 책은, 콘퀘스트와 극우의 거짓말을 널리 대중들에게 계속 퍼뜨리기 위해서, 대학교수들이나 출판ㆍ라디오ㆍTV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같은 쓸모 있는 바보들에게 증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콘퀘스트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우익 역사가들에게 있어 쏘련에 관한 자료의 가장 중요한 출처 가운데 하나이다.

 

알레산드르 쏠줴니쯴―반동분자, 파씨스트

수백만 명이 쏘련에서 생명과 자유를 잃었다고 주장하는 책들이나 기사들에 항상 연관되는 또 다른 사람은 러시아 작가 알렉싼드르 쏠줴니쯴이다. 그는 반쏘 선전물을 배포한 반혁명 활동의 혐의로 1946년에 8년간의 노동 수용소 형을 선고받았다. 쏠줴니쯴은 니끼따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의 승인과 도움을 받아 1962년에 책을 내기 시작했다. 그의 글들을 흐루쇼프는 쓰딸린의 사회주의적 유산과 싸우기 위해 이용했다. 쏠줴니쯴은, ≪수용소 군도≫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 후 그의 책들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대량으로 출판되기 시작했고, 그 저자 쏠줴니은 제국주의가 쏘련의 사회주의와 싸우는 데 있어 가장 귀중한 도구의 하나가 되었다. 그의 글들은, 쏘련에서 수백만 명이 죽었다는 흑색선전물들에 추가되었고, 자본주의 매체들은 마치 그것들이 진실인 양 발표했으며, 그를 가장 위대한 자유 및 민주주의의 투사로 간주했다. 그가 나치에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회주의 사회에 대항하는 흑색선전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은폐되었다. 쏠줴니쯴은 1974년에 쏘련 시민권을 포기하고, 미국에 정착했다.

 

미국에서 쏠줴니쯴은 중요한 모임의 연사로 빈번하게 초대되었다. 미국의 노총격인 노동총동맹산업별회의(AFL-CIO) 총회의 주 연설자였고, 세계정세에 관해 강연하도록 미연방 상원에 초청되었다! 그의 강연들은 격렬하고 도발적인 선동으로서, 가장 반동적인 견해들을 주장하고 선전했다. 특히 베트남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인데도 미국이 다시 베트남을 공격해야 한다고 선동했다. 그리고 40년에 걸친 파쑈 통치 끝에 1974년 인민 혁명으로 좌익 장교들이 포르투갈의 권력을 잡자, 미군의 포르투갈 개입을 옹호하는 선전을 시작했다. 또한 북베트남에서 미국인들이 노예 노동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쏠줴니의 공상이 베트남 전쟁을 다룬 람보(Rambo) 영화들을 만들어 냈으며, 평화를 위해 집필 활동을 하는 미국인 저널리스트들을 잠재적 반역자로 비난했다. 또한 쏘련에 대항한 미국의 군사력 중강을 옹호하는 선전 활동도 전개했으며, 파씨즘에 대한 공공연한 지지에서는 훨씬 더 오른쪽으로 나아갔다.

 

프랑꼬의 파씨즘에 대한 지지

1975년 프랑꼬(Francisco Franco, 1892-1975)가 죽은 후 스페인의 파쑈 정권은 정국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고, 1976년 초에 스페인에서 발생한 사건들은 전 세계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요구하는 파업과 시위가 벌어졌고, 국왕은 사회적 동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매우 신중하게 다소간의 자유화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 정치사의 이 가장 중요한 순간에 쏠줴니쯴이 황금 시간대에 방송되는 스페인 TV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온갖 종류의 반동적 주장을 펼쳤다. 그는 인터뷰에서 1억 1천만 명의 러시아인이 사회주의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단언하면서, “진보주의 단체들”을 스페인을 독재라고 간주하는 “이상주의자들”이라고 비난했다. 텔레비전에서 쏠줴니쯴의 이러한 발언들은 스페인의 파씨즘을 노골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미국에서의 망명 생활 18년[9]쏠줴니쯴은 1974년 미국 버몬트에 정착하여, 쏘련이 붕괴된 후 1994년 러시아로 돌아가 2008년에 죽었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미국에서의 망명 생활 … Continue reading 동안 공적인 자리에서 차츰 사라지기 시작한 이유의 하나이고, 자본가 정부들이 보내던 전면적인 지지를 점차 잃기 시작한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새로운 자본주의 러시아에서 서방이 어떤 정치 집단들을 지원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기준은 순전히 그들 집단의 엄호하에 높은 이윤을 내며 돈벌이를 잘할 수 있는지 여부이다. 러시아의 대안적 정치 체제로서 파씨즘은 그들의 돈벌이에 유리할 것으로 생각되지 않고 있다. 쏠줴니쯴이 원하는 러시아의 정치적 미래는, 전통적인 러시아 정교회의 복귀를 동반한, 권위주의적인 짜르 체제로의 복귀이다. 아무리 교만한 제국주의자들이라도 이 정도의 정치적 백치를 지원할 생각은 안 들 것이다.

 

나치스트 윌리엄 허스트, 비밀 정보원 로버트 콘퀘스트, 그리고 파씨스트 알렉싼드르 쏠줴니쯴. 이렇게 이들이 바로 쏘련에서 수백만 명이 죽거나 구속당했다는 부르주아 신화들을 퍼뜨린 대표적인 장본인들이다. 게다가 세계 도처에서 쏘련에서 죽거나 투옥된 사람들의 수를 공론하는 데에 전념하는 많은 사람들이 나타났고, 부르주아 언론은 언제나 그들에게 최상의 보수를 주었다. 그러나 마침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 이들 역사의 날조자들의 진면목이 폭로되었다. 1989, 역사 연구에 당의 기밀 문서고를 개방하라는 고르바쵸프의 명령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2. 국가 문서고가 거짓 선전을 입증하다

 

고르바쵸프의 새로운 자유 언론들은 콘퀘스트와 쏠줴니쯴의 거짓말들을 미친 듯이 떠들어 댔다. 동시에 고르바쵸프는 자유 언론의 요구에 따라 중앙위원회의 문서고를 역사 연구에 개방했다.

 

공산당 중앙위원회 문서고의 개방은 이 혼란스러운 추측들의 핵심적인 쟁점인데,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부분적으로는 진실을 밝혀 줄 사실들이 그 문서고에서 발견될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쏘련에서 살해당하거나 감금되었던 인민들의 숫자를 제멋대로 떠들어 댔던 사람들 모두가 문서고가 개방되는 날 그들이 언급했던 숫자들이 사실로 증명될 것이라고 오랫동안 주장해 왔다는 점이다! 그러나 문서고가 열리고, 실제 문서에 기초한 연구 보고서들이 출판되기 시작하자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고르바쵸프의 자유 언론도 죽거나 감금된 사람들에 대해서 떠들어 대던 자들이나 모두가 갑작스럽게 국가 문서고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연구 보고서들에 담긴 죽거나 감금당한 사람들의 숫자는 자유 언론이 증폭시켜 온 숫자들과는 정반대였다. 그 때문에 그 내용들은 대중적으로 공표되지 않은 채 있다. 그 보고서들은 발행 부수가 적고 대중 일반에게는 사실상 알려져 있지 않은 과학 잡지들에 실렸을 뿐이다. 과학적 연구 결과를 담고 있는 보고서들은 거의 자유 언론의 광란에 대적할 수 없었고, 따라서 콘퀘스트와 쏠줴니쯴의 거짓말들은 계속 옛 쏘련 인민들 중 다수 부분의 지지를 받았다. 서방에서도 역시 쓰딸린 시대 쏘련의 형벌 제도에 관한 러시아 연구자들의 보고서는 신문의 1면이나 텔레비전 방송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어째서일까?

 

연구 보고서가 보여 주는 것

쏘련의 형벌 제도에 관한 연구는 거의 9천 쪽에 달하는 긴 보고서 속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 보고서의 저자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람들은 러시아 역사학자인 V. N. 젬쓰꼬프, A. N. 더긴, 그리고 O. V. 흘레브뉴크이다. 그들의 작업은 1990년에 발표되기 시작했고, 1993년이 되면 대략 마무리되어 거의 모두가 간행되었다. 서방 여러 국가의 연구자들과의 공동 연구의 결과로서 이 연구 보고서는 서방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오해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 여기서 분명하게 말해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이 연구에 참여하고 있는 어떤 연구자도 사회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그것이다. 오히려 그들의 세계관은 부르주아적이고, 반사회주의적다. 실제로 그들 중 다수는 극히 반동적이다. 여기에서 이를 밝혀 두는 것은, 독자들이 이후 서술될 내용들을 어떤 공산주의적 음모의 소산으로 상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연구자들은 콘퀘스트, 쏠줴니쯴, 메드베제프 등등의 거짓말들을 완전히 폭로했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순전히 그들이 자신의 학자적 양심을 앞세우면서 선전적 목적에 자신들을 팔아넘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연구의 결과들은 쏘련의 형벌 제도에 관한 수많은 물음에 답하고 있다. 우리의 최대의 관심사는 쓰딸린 시대이며, 논란 또한 그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쏘련의 수감자 및 사망자와 관련해 가장 자주 언급되는 두 집단, 즉 1930년에 처벌된 꿀라크들과 1936-38년에 처벌된 반혁명분자들에 가해진 형벌에 대해서 검토할 것이다.

 

형벌 제도의 하나로서 노동 수용소

1930년 이후 쏘련의 형벌 제도는, 구치소, 굴라크 노동 수용소 및 노동 이주지, 개방 특구(öppna specialområden, special open zones) 그리고 벌금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구치소: 체포된 사람은 보통 그 사람을 기소할 것인지 석방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예비 심문 기간 동안 구치소에 수감된다.

벌금형: 벌금형에 처해지는 사람들은 그들이 저지른 위법의 성격을 볼 때 벌금형을 받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개 예비 심문 기간에 구치되지 않았으며, 벌금은 보통 그 사람이 일정 기간 동안 받는 임금[10]이 ‘임금’은 물론 자본주의 사회의 임금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의 비율로 결정된다.

굴라크 노동 수용소: 반혁명 활동의 판결을 받은 이들의 대다수와 심각한 범죄 행위(살인, 강도, 강간, 경제 범죄 등)를 저지른 자들이 보내졌다. 이곳에서 일정 기간 보낸 후에 노동 이주지나 개방 특구로 이동할 수 있었다. 수용소는 그 면적이 매우 넓었고, 수형자들은 엄중한 감시 속에 생활하며 노동했다. 그들에게는 분명 노동을 하면서, 사회의 짐이 되지 않을 필요가 있었다. 건강한 사람 누구라도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지낼 수는 없었다. 오늘날의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그러한 것이다. 1940년 3월에 쏘련에는 53곳의 노동 수용소가 있었다.

굴라크 노동 이주지: 약 425곳이 있었는데, 노동 수용소보다 작은 단위였고, 더 자유롭고, 덜 엄격하게 운영되었다. 여기는 덜 심각한 형사적, 정치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보내졌다. 그들은 공장이나 농장에서 자유롭게 일했고, 시민 사회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노동으로 받는 임금은 전부 그 자신에게 귀속되었다.

개방 특구: 대개 농업 집단화 과정에서 토지를 몰수당하고 추방된 꿀라크들이 보내진 농업 지역이었다. 사소한 형사 범죄나 정치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도 이곳에서 노동하곤 했다.

 

9백만 명이 아니라 45만 4천 명이다

형벌 제도가 중앙 행정으로 단일화되었던 1934년부터 쓰딸린이 사망한 1953년까지 20년 동안의 통계표를 보자. 이 자료는 ≪미국 역사평론≫에 제시되어 있다.

 

1934-53년 쏘련의 수형자 통계

(표 출처: ≪미국 역사평론≫)

(단위: 명, %. 수형자 수는 매년 1월 1일 기준임.)

 

 

굴락

노동

수용소

그중

혁명

분자

혁명

분자

(%)

(%)

굴락

노동

이주지

합계

’34

510,307

135,190

26.5

26,295

5.2

147,272

83,490

510,307

’35

725,438

118,256

16.3

28,328

3.9

211,035

67,493

240,259

965,697

’36

839,406

105,849

12.6

20,595

2.5

369,544

58,313

457,088

1,296,494

’37

820,881

104,826

12.8

25,376

3.1

364,437

58,264

375,488

1,196,369

’38

996,367

185,324

18.6

90,546

9.1

279,966

32,033

885,203

1,881,570

’39

1,317,195

454,432

34.5

50,502

3.8

223,622

12,333

355,243

350,538

2,022,976

’40

1,344,408

444,999

33.1

46,665

3.5

316,825

11,813

315,584

190,266

1,850,258

’41

1,500,524

420,293

28.7

100,997

6.7

624,276

10,592

429,205

487,739

2,417,468

’42

1,415,596

407,988

29.6

248,877

18

509,538

11,822

360,447

277,992

2,054,035

’43

983,974

345,397

35.6

166,967

17

336,135

6,242

500,208

235,313

1,719,495

’44

663,594

268,861

40.7

60,948

9.2

152,113

3,586

516,225

155,213

1,335,032

’45

715,506

283,351

41.2

43,848

6.1

336,750

2,196

745,171

279,969

1,740,646

’46

600,897

333,833

59.2

18,154

3

115,700

2,642

956,224

261,500

1,818,621

’47

808,839

427,653

54.3

35,668

4.4

194,886

3,779

912,794

306,163

2,027,796

’48

1,108,057

416,156

38

27,605

2.5

261,148

4,261

1,091,478

275,850

2,475,385

’49

1,216,361

420,696

34.9

15,739

1.3

178,449

2,583

1,140,324

2,356,685

’50

1,416,300

578,912

22.7

14,703

1

216,210

2,577

1,145,051

2,561,351

’51

1,533,767

475,976

31

15,587

1

254,269

2,318

994,379

2,528,146

’52

1,711,202

480,766

28.1

10,604

0.6

329,446

1,253

793,312

2,504,514

’53

1,727,970

465,256

26.9

5,825

0.3

937,352

785

740,554

2,468,524

 

위 표가 보여 주는 사실을 통해서 콘퀘스트가 얼마나 사기꾼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수치 중 어느 것 하나 사실에 근접조차 하지 않는다. 1939년 노동 수용소와 노동 이주지, 구치소 전체에는 약 2백만 명의 수형자가 있었다. 이 중 정치적 범죄로 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9백만 명이 아니라, 454천 명이었다. 그리고 1937-39년 사이에 노동 수용소에서 죽은 사람은, 3백만이 아니라, 16만 명이었다. 1950년에는, 1천 2백만이 아니라, 57만 8천 명의 정치범이 노동 수용소에 있었다. 6천만 명이 노동 수용소에서 죽었다는 쏠줴니쯴의 주장은 논할 가치조차도 없으며, 누가 보아도 명백히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그럼 냉정하게 굴라크 노동 수용소에 관련된 통계들을 분석해 보자. 형벌 제도에 잡혀 있는 사람들의 절대적 수치를 우리는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가? 2백 50만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무엇인가? 옥에 갇혀 있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든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들의 완전한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기에는 사회가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는 살아 있는 증거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2백 5십만은 실로 그 사회에 대한 비판을 대표한다.

 

내적 그리고 외적 위협

형벌 제도에 잡혀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보다 더 정확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쏘련은 극히 최근에야 봉건제와 농노제를 타도한 국가였고, 인권과 관련한 그 사회적 유산은 자주 사회가 감내해야 할 부담이었다. 짜르 지배와 같은 낡은 체제 속에서 근로인민들은 극도로 비참하게 살아가야 했었고, 인간의 삶은 거의 가치가 없었다. 강도와 폭력 범죄는 무제한한 폭력으로 처벌되었다. 군주제에 대한 반란은 보통 대량 학살이나 사형, 극도의 장기 징역형으로 끝을 맺었다. 이러한 사회관계들, 그리고 그와 맞물려 있는 사고방식들이 변하는 데에는 장기간이 필요하며, 이러한 사실이 범죄자들에 대한 태도뿐 아니라 쏘련의 사회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1930년대엔 유럽에서 거대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난 결과, 슬라브 인민의 생존을 위협하는 나치 독일로부터의 거대한 전쟁 위협이 있었고, 서방 블록 역시 간섭주의적 앙심들을 품고 있었다. 쓰딸린은 이러한 정세를 1931년에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우리는 선진국들보다 50년 내지 100년 정도 뒤쳐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 차이를 10년 이내에 따라잡아야 합니다. 만일 이를 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11]J. V. Stalin, “The Tasks of Business Executives(Speech Delivered at the First All-Union Conference of Leading Personnel of Socialist Industry, February 4, 1931)”, Stalin Works, Vol. 13, Foreign … Continue reading

 

그로부터 10년 후인 1941년 6월 22일 쏘련은 나치 독일과 그 동맹국들의 침략을 받았다. 1930년부터 1940년까지 10여 년 동안 엄청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 자원의 주요 부분은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는 데에 쓰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개인적 편익을 위한 것들은 거의 생산하지 못하면서도 열심히 일했다. 1937년에는 7시간 노동일제의 도입이 철회되었고, 1939년에는 사실상 모든 일요일에도 노동했다. 25백만 명의 쏘련 인민의 목숨을 앗아가고 국토의 절반을 잿더미로 만든 거대한 전쟁이 20년 동안(1930년대와 1940년대)이나 사회의 발전을 괴롭히고 있던,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범죄가 증대하는 경향을 보였던 것인데, 이는 사람들이 생활하면서 다른 방식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훔치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극히 어려웠던 시기에 쏘련은 최대 2백 5십만 명, 즉 성인 인구의 2.4%를 형벌 제도 속에 붙잡아 두고 있었다. 우리는 이 수치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그것은 많은 것인가? 적은 것인가? 비교해 보자.

 

미국에는 더 많은 수감자가 있다

(1996년 현재) 2억 5천 2백만 명의 인구를 가진 나라, 세계 자원 전체의 60% 이상을 소비하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인 미국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옥 속에 있을까? 전쟁의 위협도 없고, 경제적 안정을 해치는 어떤 중대한 사회적 변화들도 없는 미국에서의 상황은 어떨까?

 

1997년 8월 16일 자 FLT-AP 통신의 단신 기사는 550만 명이 감옥에 갇혀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 자료는 미연방 법무부의 통계에 따른 것이다. 오늘날 미국 수형자의 수는 이전 쏘련에서의 최대 숫자보다도 3백만 명이 더 많다! 쏘련의 노동 수용소와 관련하여, 그곳이 수형자들에게 가혹하고 힘겨운 곳이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 감옥의 상황은 어떤가? 그곳은 폭력과 마약, 매음, 성노예(미국 감옥에서는 한 해 29만 건의 강간이 발생한다)로 가득 차 있다. 미국의 감옥에서는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부유한 사회에서의 일이다!

 

중요한 요인―의약품의 부족

수용소에서의 죽음은 사회의 전반적인 자원 부족, 특히 전염병과 싸우기 위해 필요한 의약품의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는 노동 수용소에서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였으며,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항생제가 발견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반적으로 사용되게 되자 상황은 급격히 변화되었다. 사실 최악의 시기는 야만적인 나치가 쏘련 인민 전체에게 극히 가혹한 생활 조건을 강요했던 전쟁 기간이었다. 그 4년 동안에 50만 명 이상이 노동 수용소에서 죽었는데 ― 이는 문제의 20년 동안에 노동 수용소에서 죽은 총수의 절반이다. 이 동일한 기간에, 즉 전쟁 기간에 자유로웠던 사람들 가운데 2천 5백만 명이 죽었다는 사실도 잊지 말자. 쏘련의 상황이 개선되고 항생제가 도입되었던 1950년에 감옥에서 죽는 사람의 수는, 1934년에 5.2%에서 0.3%로 떨어졌다.

 

형벌의 기간은 얼마나 되었을까?

유죄 선고를 받은 이들의 형량은 서방의 흑색선전이 퍼뜨린 가장 악질적인 유언비어의 소재였다. 쏘련에서 죄수가 된다는 것은 끝없이 감옥에 갇혀 있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고 ― 한번 들어간 자는 누구도 나온 적이 없다는 사고를 은근히 주입시켜 왔다. 이것은 완전한 거짓이다. 쓰딸린 시대에 감옥에 간 사람의 압도적 다수는 실제로는 최고 5년 형에 처해졌다.

 

 

3. 쏘련에 대한 터무니없는 거짓말들

 

러시아 조사 보고서 검토

러시아의 역사가들에 의해 수행된 연구는, 지난 50년 동안 자본주의 세계의 학교들과 대학에서 가르쳐 온 것과는 전혀 다른 현실을 보여 주고 있다. 이 50년에 걸친 냉전 동안 여러 세대는 쏘련에 대해서 오직 거짓만을 배워 왔으며, 이 거짓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흔적을 남겨 왔다. 이러한 사실은 프랑스와 미국의 연구 보고서들에도 구체화되어 있다. 자본주의의 정치적 흑색선전은 쏘련의 죄수들을 항상 무고한 희생자로 내세워 왔고, 연구자들도 아무런 의문도 없이 이 억측을 받아들여 왔다.

 

통계 수치들을 가지고 관련 사건들을 해설할 때면, 연구자들의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가 ―때로는 모골이 송연한 결론들을 수반하면서― 전면에 등장한다. 쏘련의 형벌 제도하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은 그 대부분이 도둑이나 살인범, 강간범 등등인데도, 연구자들은 그들은 무고한 희생자들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범죄가 유럽이나 미국에서 저질러졌다면, 언론은 결코 이러한 유형의 범죄자들을 무고한 희생자로는 간주하지 않을 것이다. 쏘련에서 저질러졌기 때문에 언론의 태도가 달랐다. 살인이나 강간을 수차례나 저질러 온 사람을 무고한 희생자라고 부르는 것은 아주 더러운 책략이다.

 

꿀라크와 반혁명

반혁명분자들의 경우, 역시 그들이 고발된 범죄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의 부농인 꿀라크는 수백 년 동안 무한한 억압과 거리낌 없는 착취로 가난한 농민들을 지배해 왔다. 1927년 현재 1억 2천만 명의 농민 가운데 1천만 명의 꿀라크가 호사 속에서 산 반면에, 나머지 1억 1천만 명은 가난 속에서 살고 있었다. 혁명 전에는 그들은 가장 비참한 가난 속에서 살아왔다. 꿀라크의 부는 빈농들의 형편없이 지불받는 노동에 기초한 것이었다. 빈농들이 집단 농장으로 결합하기 시작하자 꿀라크들의 부의 주요 원천이 사라졌다. 그러나 꿀라크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근을 이용하여 착취를 회복하려고 했다. 무장한 꿀라크들이 집단 농장들을 습격했고, 빈농과 당 관리들을 살해했으며, 들판에 불을 지르고, 역축들을 도살했다. 빈농들 사이에 기아를 조장함으로써 꿀라크들은 빈곤과 그들 자신의 지배적 지위를 영속시키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태는 이들 살인자들이 기대했던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번에 빈농들은 혁명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꿀라크들보다 훨씬 강력해서, 꿀라크들은 격파되었고, 투옥되고 추방되거나 노동 수용소 형에 처해졌다. 1천만 명의 꿀락 가운데 1백 80만 명이 추방되거나 유죄 판결을 받았다.

 

쏘련 농촌에서 벌어진 이 거대한 계급 투쟁, 1억 2천만 명이 연루된 투쟁의 과정 속에서 불의가 저질러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답게 살기 위해, 자기 자식들을 더 이상 굶주린 무지렁이로 살게 하지 않기 위해 싸웠던 가난하고 억압받던 사람들을 우리는, 그들이 그 싸움을 충분히 ‘문화적으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혹은 그들의 법정이 충분히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수백 년 동안 문명이 이룩한 진보에 접근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문화적이지 못하다고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그리고 수백 년 동안의 끝없는 착취 속에서 꿀라크 착취자가 언제 빈농들에게 문화적이었거나 자비로웠던가를.

 

1937년의 숙청

당과 군대 그리고 국가 기구의 숙청에 따른 1936-38년의 재판에서 유죄가 선고된 반혁명분자들의 문제는 러시아 혁명 운동의 역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수백만 명이 짜르와 러시아 부르주아지에 대항한 투쟁에 참가하여 승리했으며, 이들 가운데 다수가 공산당에 가입했다. 이 사람들 가운데는, 불행스럽게도,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한 그리고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보다는 다른 이유로 입당한 자들도 일부 있었다. 그러나 계급 투쟁은 흔히 당의 새로운 투사들을 심사할 시간도 기회도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는 자칭 사회주의자라면서 볼쉐비끼 당과 싸웠던 다른 당들 출신의 투사들까지 공산당에 받아들여졌다. 당시는 신생 쏘비에트 국가에 매우 힘든 시기였고, 기간요원이 ―심지어는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조차― 크게 부족했기 때문에 당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활동가들과 기간요원들의 자질에 대해서는 거의 요구를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이윽고 당을 두 진영으로 ―한편에는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으로 밀어붙이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다른 한편에는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조건들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사회민주주의를 추진한 사람들로― 갈라놓은 대립이 발생했다. 대립의 발단은 19177월에 당에 가입한 뜨로쯔끼에 있었다. 뜨로쯔끼는 몇몇 지도적 볼쉐비끼의 지지를 얻게 된다. 볼쉐비끼의 원래 계획에 맞서 연합한 이 반대파는 1927년 12월 27일의 당 투표에 부쳐진 정책안들 중의 하나를 제안했다. 이 투표가 이루어지기 전 수년에 걸쳐 당내에서는 거대한 논쟁이 벌어졌고, 총 725,000표 가운데 반대파는 6,000표를 얻었다. 당 활동가의 1% 미만만이 연합 반대파를 지지했던 것이다.

 

투표 결과에 따라, 그리고 반대파가 당의 정책과는 반대의 정책을 집행하기 시작하자,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연합 반대파의 주요 지도자들을 당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반대파의 중심적 인물인 뜨로쯔끼는 쏘련에서 추방되었다. 뺘따꼬프나 라테크, 쁘레오브라줸쓰끼, 쓰미르노프 같은 여러 지도적 뜨로쯔끼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노비예프와 까메네프, 쯔브도끼네는 나중에 자아비판을 했다. 그들 모두는 다시 당의 활동가로 받아들여졌지만, 조만간 진정한 자아비판이 아니었음이 명백해졌다. 이는 쏘련에서 계급 투쟁이 격심해질 때마다 매번 반대파 지도자들이 반혁명의 편에 단결했기 때문이다. 1937-38년에 상황이 완전히 명백해질 때까지 반대파의 대다수는 추방되었다가 다시 받아들여지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산업 파괴 행위

1934년 12월 끼로프가 암살되었는데, 그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폭력 수단을 통해 당의 지도력과 국가의 통치권을 탈취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던 비밀 조직이 밝혀졌다. 1927년에 패배한 정치 투쟁을 이제 그들은 국가에 맞서 조직된 폭력이라는 수단으로 승리하려 했던 것이다. 그들의 주요 무기는 산업 파괴 행위와 테러, 부정부패였다. 반대파를 주로 고무해 온 뜨로쯔끼는 해외에서 그들의 활동을 지휘했다.

 

산업 파괴 행위는 쏘비에트 국가에 가공할 손실을 끼쳤고, 쏘련은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중요한 기계들이 수리 불가능하도록 훼손되었고, 광산과 공장의 생산이 엄청나게 감소되었다. 쏘련과 노동 계약을 맺은 외국인 전문가들 중 한 사람인 미국인 엔지니어 존 리틀페이지(John Littlepage)는 1934년에 이 문제를 기술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1927년부터 37년까지 쏘비에트의 공업 부문, 금광에서 일했는데, 저서 ≪쏘비에트의 금을 찾아서(In Search of Soviet Gold )≫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피할 수 없는 한 나는 러시아의 미묘한 정치적 책략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나는 쏘련의 산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나는 쓰딸린과 그의 협력자들이 불만에 찬 혁명적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최악의 적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을 확신했다.

 

또한 리틀페이지의 책은, 뜨로쯔끼 일당 등 반대파가 반혁명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어디에서 챙겼는가도 말해 주고 있다. 비밀 반대파의 다수는 외국의 공장들로부터 기계들을 구입하는 데에서의 자신들의 직책상의 승인권을 악용했다. 그들이 구입을 승인한 제품들은 쏘련 정부가 실제로 대금을 지불한 제품들보다 훨씬 질이 낮은 것들이었다. 외국 공장주들은 그러한 거래 차액을 뜨로쯔끼 조직에 건넸으며, 그 결과 뜨로쯔끼와 쏘련 내 공모자들은 계속해서 이들 공장에 발주했다.

 

절도와 부정부패

1931년 봄, 광산에서 사용할 산업용 승강기의 구매를 위해 베를린에 쏘련의 구매 사절단이 파견되었다. 구매 사절단은 뺘따꼬프가 이끌고 있었으며, 리틀페이지는 승강기들의 품질을 점검하고, 승인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는 이 승강기들이 쏘련의 광산에서는 쓸 수 없는 조악한 품질의 불량품들임을 알아챘다. 그가 뺘따꼬프와 다른 쏘련 사절단원들에게 사실을 보고하자, 그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묵인하고 싶다는 듯이 그 승강기들을 승인할 것을 요구했다. 리틀페이지는 요구를 거부했다. 당시에 그는 이것이 개인적인 부정부패이며, 구매 사절단원들이 승강기 제조업자에 의해 매수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37년 재판에서 뺘따꼬프가 뜨로쯔끼 일당 등 반대파와 연루된 사실을 자백한 후, 자신이 베를린에서 목격했던 것이 개인적 차원의 부정부패 이상의 것이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돈은 쏘련 내 비밀 반대파의 활동들을 위해서, 즉 파괴 행위와 테러, 뇌물, 흑색선전을 포함한 활동들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쿠데타 계획

절도나 파괴 행위, 부정부패는 그 자체가 심각한 범죄이다. 그러나 반대파의 활동은 그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주요 위원들을 암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쏘련의 지도부 전체를 제거하는 쿠데타에 의해서 국가 권력을 탈취하는 것을 목표로 한 반혁명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 자신이 뜨로쯔끼주의자이고, 쓰딸린과 쏘련에 적대적인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한 아이작 도이처에 따르면, 쿠데타는 끄레믈에 대한, 그리고 모쓰끄바나 레닌그라드 같은 대도시들에 주둔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부대들에 대한, 군사 작전으로 시작할 예정이었다. 이 음모의 우두머리는, 도이처에 의하면, 뚜하체프쓰끼였다. 그는 옛 짜르 군대의 장교였다가, 혁명 후에 붉은 군대로 넘어온 인물이었다. 1930년 현재 군 장교의 거의 10%가 옛 짜르 군대의 장교 출신들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가 부르주아적 세계관을 버리지 않았고, 그것을 위해 투쟁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반대파들이 쿠데타를 준비하자 기회가 찾아왔다.

 

1937년 공개 재판에서 부하린이 자백한 바에 의하면, 뜨로쯔끼 일당 등 반대파는 나치 독일과 협정을 맺었는데, 그 협정에 의하면 쏘련에서의 반혁명 쿠데타 후에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광대한 영토가 나치 독일에 양도될 참이었다. 이는 나치 독일이 반혁명을 지원하는 대가로 요구한 것이었다. 이 음모자들 모두는 사회주의 사회를 이끌고, 관리하고, 지키라고 고위직에 선출된 자들이었지만, 실제로는 사회주의를 파괴하기 위해서 일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이 1930년대에, 즉 나치의 위협이 끊임없이 증대하고 있었고, 나치의 군대가 유럽을 전쟁의 포화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 쏘련 침략을 준비하고 있던 바로 그때에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음모를 꾸민 자들에게는 공개 재판에서 반역자로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파괴 행위, 테러, 부정부패, 살인 모의의 죄를 범하고, 나치에게 영토의 일부를 넘겨주려고 했던 자들로서는, 그 외의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들을 무고한 희생자라고 부르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역사로부터 배우자!

우익들은 러시아 조사 보고서들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서도, 지난 50년 내내 가르쳐 온 새빨간 거짓말들을 계속해서 퍼뜨리고 있다. 그것들이 거짓임이 이제는 완전히 폭로되었는데도 말이다! 거짓말이라도 몇 번이고 되풀이되고 되풀이되면 마침내는 진실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러시아 조사 보고서들이 서방에서 출간된 이후, 여러 나라에서 이에 관한 수많은 저서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들 저서의 유일한 목적은 러시아 보고서들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해묵은 거짓말들이 대중에게 마치 새로운 진실인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시종일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거짓말들을 늘어놓는 책들 천지이다.

 

우익이 거짓말들을 반복하는 것은 오늘날의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해서이다. 그 거짓말들이 되풀이되는 것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어떤 대안도 찾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 거짓말들은, 유일하게 미래의 대안을, 즉 사회주의 사회를 제시하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더러운 전쟁의 일부이다. 해묵은 거짓말들을 담고 있는 이들 새로운 출판물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이 모두는 사회주의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한 사명을 부여하고 있다. 우리는 공산주의 신문을 부르주아의 거짓말들과 싸우는 진정한 노동자계급의 신문으로 만드는 책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것은 의문의 여지없이 오늘날의 계급 투쟁에서 중요한 사명이며, 이 계급 투쟁은 머지않아 새로운 힘으로 다시 일어날 것이다.

 

 

 

나가며

 

요즘 서평들을 작성하면 할수록 더욱더 머릿속에 맴도는 것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요상하면서도 무서운 한국 사회의 국가보안법이다. 노동자계급의 단결의 기초는 사상의 무장인데,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고 그에 따른 활동을 철저히 가로막는 국가보안법의 존재는 계급적 단결을 가로막는 첫 번째 장애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악법이 철폐되지 않는 이상 혁명의 길은 더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고,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를 바로 알고, 바로잡고, 계급적 단결을 갈망하며 실천해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기초를 다지려는 그 부르짖음은 허공에 흩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한국 사회 노동자계급은 그 이상을 뛰어넘는 힘을 가져야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계급적 힘을 더 갖추기 위해서는, 악법의 중심, 국가보안법의 존재를 더욱더 알리고, 그것을 함께 철폐하려는 단결의 힘이 요구된다.

이러한 실천에서부터 시작하자! 자본주의를 폐지하고, 억압받는 인민들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 사회주의 세상의 건설로 나아가자!

(다음 호에 계속)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필자 마리오 소사(Mário Sousa)는 스웨덴의 맑스-레닌주의 공산당( KPML(r) )의 당원이다. 이 글은 1998년 4월 공산당 신문 ≪프롤레타리아트(Proletären)≫에 게재되었다. KPML(r)은 Kommunistiska Partiet Marxist-Leninisterna(revolutionärerna)의 약어이며, 영어로는 Communist Party Marxist-Leninists(the revolutionaries)이다. 이 당은 1970년 10월에 창당되었으며, 2005년 14차 당 대회에서 지금의 Kommunistiska Partiet(영어로 Communist Party)로 이름을 바꾸었다. 스웨덴 전역에 40개의 지부를 두고 있으며, 원외 정당으로는 이 나라에서 가장 큰 당으로서, 이 당은 개량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단호히 배격하며, 맑스-레닌주의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2,600명의 사람들이 당 기관지 Proletären을 구독하고 있으며, 총 3,200부를 발행하고 있다. 이 글의 저자 마리오 소사는 24명으로 구성된 당 중앙위원회의 위원이며, 웁살라(Uppsala) 지역의 위원장이다.

≪프롤레타리아트(Proletären)≫의 정식 명칭은 Marxist-Leninist Proletären으로 Kommunistiska Partiet에서 발행하는 맑스-레닌주의 주간 신문이다.

참고로, 저자가 소속되어 있는 당은, 스웨덴 공산당(Sveriges Kommunistiska Parti, Communist Party of Sweden)과 다른 당이다.

2 강제 수용소(Konzentrationslager). 1933년 2월 제정된 ‘국민과 국가의 방위령’에 의하여 나치가 국내외에 설치한 감옥이다. 공산당원ㆍ사회주의자ㆍ민주주의자 등 모든 반파쑈주의자와 나치 체제에 순응하지 않은 자들을 일반 국민으로부터 고립시켜 말살하고, 나아가서는 전 국민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이 수용소로 끌려가 기한도 없이 구금되었다.
3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항복하고 휴전 조약을 맺은 것은 1918년(11월 11일)이지만, 독일의 무장을 강력하게 제한했던 ‘베르사유 강화 조약’은 1919년 6월에 서명되었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 1918년은 1919년으로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부분은 스웨덴어 원문에서 그냥 국제 조약(internationella överenskommelser)으로 되어 있고, 영어ㆍ불어ㆍ그리스어 등의 번역본에서만 보인다. 번역 과정에서 번역자들의 오류가 있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4 나치 독일이 영토 확장의 주요 동기로 삼았던 소위 ‘(국민) 생활권’을 말한다. 영어로는 habitat, living space 등으로 번역한다.
5 독일어로 Großdeutschland. 19세기까지 대독일(주의)은 독일 통일에 있어 오스트리아를 배제하는 프로이센의 소독일(주의)에 대립되는, 오스트리아의 사상이었다. 나치에 의해 이 사상은 유럽의 모든 독일 민족(게르만)을 통합한다는 사상으로 정립된다. 1943년 공식적으로 나치는 자신들의 국호를 대독일 제국(Großdeutsches Reich)으로 부른다.
6 CIA(Central Intelligence Agency)는 미국의 중앙정보국, MI5(The Security Service)는 영국의 국가정보부.
7 더글러스 토틀(Douglas Tottle, 1944- ). 캐나다의 사진사이자 저술가이며, 노동조합 활동가. 탄광 광부와 철광 노동자로 일했다. 1970년대에는 캘리포니아에서 멕시코계 농업 노동자 운동에 참여했으며, 캐나다 매니토바주에서 인디언 원주민 농업 노동자들과도 함께 일했다. 1975년부터 85년까지 캐나다 철광노동조합(United Steelworkers)의 기관지 The Challenger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8 스웨덴어판에는 “1937년 쏘련의 숙청 기간 동안의 ‘수백만의 사망자’에 관한 그의 책 ≪대숙청≫”이라고 되어 있다.
9 쏠줴니쯴은 1974년 미국 버몬트에 정착하여, 쏘련이 붕괴된 후 1994년 러시아로 돌아가 2008년에 죽었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미국에서의 망명 생활 18년(18-åriga exil i USA)”은 1976년에 그가 노골적으로 파씨즘을 지지한 이후부터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10 이 ‘임금’은 물론 자본주의 사회의 임금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11 J. V. Stalin, “The Tasks of Business Executives(Speech Delivered at the First All-Union Conference of Leading Personnel of Socialist Industry, February 4, 1931)”, Stalin Works, Vol. 13, Foreign Languages Publishing House, Moscow, 1954, p.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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