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을 넘어 생각한다≫를 읽고
박한솔 | 회원, 민주노총 제주본부 선전홍보부장
* 박한식ㆍ강국진, ≪선을 넘어 생각한다―남과 북을 갈라놓는 12가지 편견에 관하여≫, 부키, 2018.
우리의 소원은 통일…정말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 왔고 입이 닳도록 흥얼거린 노랫말이다. 초등학교 음악 시간에 이 노래를 합창할 때면, 이북에서 우리와 같은 역사, 같은 언어를 공유하며 같은 옷을 입는 이들을 적대하지 말자고 다짐하곤 했다. 더욱이 내가 어릴 땐 남북 관계가 상당히 진전되었던지라 금방이라도 통일이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 시절에 학교에서 ‘통일 백일장’ 따위가 열리면, 반만년을 함께 동고동락한 우리 민족이 외세와 이념의 틈바구니에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눌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인 현실을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어 내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수험생이 된 필자는 대학의 법학 전공에 원서를 넣었다. 법학 개론을 떼면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헌법이다.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오가는 현실에서 빛바랜 감이 있지만, 어쨌거나 대한민국은 안팎으로 ‘평화 통일’의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으로 시작하는 헌법 전문을 읽어 내려가면 이내 “평화적 통일의 사명”이라는 문구가 나오고, 헌법 제4조에서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밝히고 있다. 의무 교육 과정에서 우리가 (지배계급 관점에 입각한) ‘북한’ 사회를 겉핥기식으로나마 배우고, 통일 문제를 전담하는 행정 부처가 존재하며, 부침이 있을지언정 남북 대화를 이어 가는 까닭이다. 노랫말에서부터 국가 정책에 이르기까지 ‘통일’이라는 단어는 분명 한국 사회에 있어 보편적 공리(公理)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우리’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북쪽에 사는 ‘광신도’들과는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며 그냥 ‘우리끼리’ 살자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막대한 통일 비용을 언급하며 통일을 반대한다. ‘우리끼리’ 먹고살기도 힘든데 낙후된 ‘북한’ 경제와 부채를 떠안는 게 도대체 무슨 이익이 되냐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반도 이남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국민’임은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다. 사실 주변으로 눈을 돌려도 통일에 찬성하는 이들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차피 갈라진 거 서로 신경 끄고 살아가자는 입장과, 통일이 그렇게 시급한 일이냐고 되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걸핏하면 미사일을 쏘아 대고 자기네 지도자를 신으로 떠받드는 광신자들과 무슨 놈의 통일을 하느냐”고 격앙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기나긴 분단과 대결의 역사 속에서 민족적 동질성이 약화되고 ‘대한민국’ 정체성이 강해진 탓인지 몰라도, 어쨌거나 반만년을 함께한 민족이 고작 반세기의 분단 끝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는 징후로 여겨진다. 군사 분계선과 더불어 정서적인 영역에까지 그어진 ‘선’을 말이다.
우리는 ‘북한’, 공식 명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대다수는 ‘독재 국가’, ‘후진국’, ‘고난의 행군’, ‘아오지’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북을 연상할 것이다. 그러나 북에 관한 정보가 충분치 않은 데다가, 그나마도 반공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악의적으로 편집, 왜곡된 정보를 바탕으로 북을 투사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으니 별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북을 정말 단 하나도 모른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던가? 그런데 북에 있어서는 100가지 정보 중 하나조차 쉽게 믿기 어렵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김일성은 1986년에 총에 피격당해 숨졌지만,[1]1986년 11월 17일 자 ≪조선일보≫는 “金日成 銃 맞아 被殺”이라는 호외를 발행했으나 오보로 밝혀졌으며, 김일성은 7년 뒤인 1994년 사망한다. 실제로는 1994년까지 생존해 있었으며, 모란봉 악단 현송월 단장은 음란물을 제작, 판매한 혐의로 공개 총살되었지만,[2]“김정은 옛 애인 등 10여명, 음란물 찍어 총살돼”, ≪조선일보≫, 2013. 8. 29. 2018년 평창 올림픽에 참석했다.[3]“‘현송월 숙청’도 오보 판명…‘북한 소식통’ 정보의 왜곡ㆍ과장”, JTBC, 2019. 6. 3. 이처럼 ‘카더라’가 범람하는 조건이건만 ‘일견(一見)’을 위해 무턱대고 월북을 할 수도 없는(사실 ‘완전 불가능’까지는 아니지만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잡혀갈 수도 있으니 없는 셈 치자) 노릇이니 답답함은 배가된다. 더욱이 국가보안법과 남북교류협력법은 남쪽 인민들이 당국의 허가 없이 직접 북녘 인민과 접촉할 수 없도록 제한하고 있다. 무심결에 북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거나, 북에서 생산한 문헌을 소장하고 있다간 ‘이적 행위’가 될 수도 있다.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나라가 북녘에 대한 무지를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선을 넘어 생각한다≫(2018)는 북에 대한 우리의 무지와 맹목적 반감에 파열구를 낸다. 책의 저자 박한식은 남북 관계 개선,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통일을 위한 첫걸음으로 ‘대화’를 권유한다. “‘신뢰’가 있어야만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세상에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입니다. 신뢰라는 것은 대화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 대화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p. 10.) 신뢰가 있어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획득하기 위해 대화에 나서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대북 문제에 있어 신뢰보다 적대를, 대화보다 압박을 선호하는 현실 속에서 저자의 말은 실현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저자가 끊임없이 대화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 이외에 한반도 평화 체제를 구축할 방법이 사실상 전무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출처가 불분명한 정보와 확증 편향 속에서 “북한 붕괴는 시간문제”라고 여긴다. 그러니 대북 정책의 초점은 자연히 최대한의 압박, 고립, 봉쇄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 이쯤에서 가능한 질문은 하나다. ‘북한은 정말 붕괴할까?’
북한 붕괴라는 ‘희망 사항’
박한식은 일각에서 유포하는 ‘북한 붕괴론’이 “거의 종교적 도그마 수준”(p. 19.)이라고 지적한다. 오히려 그는 ‘북한’이 ‘절대로’ 붕괴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에 따르면 ‘북한’ 체제는 상당한 역사적 정통성과 지지 기반을 갖추고 있다. 실제로 동구권 붕괴와 쏘련의 해체, 이어진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도 북은 붕괴하지 않았다. “체제가 붕괴하는 것은 그 체제를 유지하는 정통성이 무너졌을 때”(p. 21.)인데, 그간 무수한 경제적 타격을 입었을지언정 북의 정통성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북한의 정통성은 항일무장투쟁을 지도한 김일성 주석과 조선노동당 그리고 미국 등 외세에 맞서 자주성을 지키는 것에 그 뿌리를 두고 있”(같은 곳.)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북한이 저절로 붕괴하지는 않더라도 국제적인 압박을 통해 어느 정도 굴복시킬 수 있지 않겠느냐’는 주장도 착각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실제로 수년째 지속되고 있는 갖가지 제재에도 불구하고 북은 끄떡없이 버티고 있다. “제재가 효과가 없다는 것은 북한 경제가 제재로 인해 받는 타격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 보고서에 따르면 2013년 북한에서는 식량 문제가 없었고 오히려 식량 생산이 늘었다고 합니다. … 한국개발연구원(KDI) 보고서를 보더라도 2016년 초반 제4차 핵실험으로 인한 대북 제재에도 불구하고 2016년도 북한 경제는 … 모두 전반적으로 활기를 띠는 등 꾸준한 성장세를 기록했다고 합니다.”(p. 30.)
‘수령님’께서 가라사대
우리가 생각하는 ‘북한’은 비단 ‘후진국’이라는 인식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로 수식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폭정을 휘두르며 ‘북한’ 인민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있다는 것이 대중적인 견해다. 특히 김정은 시대에 들어 자신의 고모부(장성택)를 처형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러한 관점은 더욱 보편적인 것이 됐다. 김정은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고모부를 살해한 ‘패륜아’이자 최악의 독재자가 된다. 장성택 처형은 ‘수령님’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간 제아무리 고위층이라도 언제든 목이 달아날 수도 있다는 심증을 확신으로 굳힌 사건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저자는 ‘북한’이 ‘1인 독재’라는 통념과 달리 ‘집단 지도 체제’에 의해 운영되는 국가라고 설명한다. “북한을 지배하는 것은 조선노동당입니다. 북한 조선노동당이 지배하는 일당 독재국가로, 조선노동당을 움직이는 것은 특정한 개인이 아닙니다.”(p. 45.) 장성택의 처형 또한 김정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한다. “제가 평양에서 들은 바를 종합해보면 조선노동당의 여러 최고위급 간부들이 협의한 끝에 장성택을 처형하기로 결정했”(p. 50.)다는 것이다. 이에 개인적으로 장성택과 친분이 있던 당 간부들은 장성택 처형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는 것이 저자의 증언이다. “그럼에도 ‘당과 국가를 위해 살려둘 수 없다’고 결정”(같은 곳.)한 것이다. 저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역시 당에서 결정한 사안을 거부할 수 없었으리라고 추측한다.
‘북한 인권’은 돈이 된다
‘북한’에 대한 부정적 시각으로는 단연 인권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세간에 의하면) 권력이 김정은 1인에게 독점되어 있는 이상 ‘북한’이라는 나라는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라 ‘수령의 나라’이고, 그에 따라 인민들은 수령에게 기쁨을 드리기 위해 살아가는 것 이외에 삶의 목적이 있을 수 없으므로 개개인에게 있어서 그곳은 ‘지옥’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 인권’ 문제는 선악의 이분법으로 단순화하여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권력 세습’과 ‘1인 독재’라는 사실만을 근거로 ‘북한 인권’이 심각하다고 논증할 수 없는 탓이다. 특히 북에 관한 정보가 부족한 가운데 일부 탈북자의 증언을 절대화하는 경향은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을 방해하기도 한다. “제가 보기에 ‘탈북자’들에게 듣는 정보는 많은 경우 편향되어 있는 데다가 정보 자체가 정확하지 않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p. 85.) 이는 한국인이라고 해서 한국의 모든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저자는 탈북자 증언의 신빙성보다도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훨씬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황장엽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자신이 북한 주민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겠다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탈북했다는 듯이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그가 북한을 떠난 것은 그저 자기 살 길을 도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 일단 한국으로 들어오면 자신의 몸값도 높여야 하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해야 하므로 북한을 비판하고 한국을 칭찬합니다만,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p. 86.)
“일부 탈북자들의 왜곡된 증언이 미치는 영향은 꽤 심각합니다. 비슷한 증언과 비슷한 소동이 계속되고 그것이 북한 인권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강화시킵니다. … 자신을 북한 정무원 총리 강성산의 사위라고 주장한 강명도라는 탈북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1994년 7월 27일 기자회견을 자청해서 “북한이 현재 핵탄두 5개를 보유하고 있으며, 핵탄두 5개를 추가로 개발할 계획”이라고 주장했습니다. … 그런데 강명도가 제시한 근거가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국가안전보위부 간부에게 들었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근거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드러난 사실은 이 기자회견 자체가 청와대 지시로 급조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신동아가 2003년 이 사안에 대해 질문서를 보냈을 때 김영삼 대통령 측은 “기자회견을 하라고 지시했고, 그 이유는 북핵 협상이 한국을 배제한 채 진행되는 데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고 답했습니다.”(pp. 86-87.)
‘북한 인권’ 문제의 화두는 이른바 ‘완전 통제 구역’으로 알려진 각종 수용소들(강제 수용소, 장애인 수용소, 정치범 수용소 등)의 실존 여부다. 미국을 위시한 국제 사회는 이러한 수용소의 존재를 기정사실화하여 ‘북한 인권’ 문제를 거론하고 있고, 그 근거로써 탈북자들의 증언을 내세운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들의 증언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는 일이다. “2000년대 초반 탈북자 김운철의 증언은 북한 내 강제수용소와 고문, 처형 등 북한의 인권 문제를 국제적으로 공론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그러나 자신이 김운철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사실 박충일이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습니다. … 그는 1999년 11월 러시아 국경수비대에 체포되어 북한으로 송환된 일곱 명 중 한 명인 김운철과 닮았다는 소리를 듣고 김운철로 행세하다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그가 늘어놓은 강제수용소 관련 거짓 증언은 그가 한국으로 들어오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2001년 7월 17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당시 신건 국가정보원장이 탈북자 박충일과 김운철은 다른 사람이라고 밝힘으로써 그의 거짓 행각은 공개적으로 탄로가 났습니다.”(p. 87.)
거짓과 왜곡이 포함된 이러한 증언들이 여전히 ‘북한 인권’ 문제의 유일하고도 확정적인 근거로 취급되는 경우는 익히 들어 온 바다. 그럼에도 정보의 신뢰도가 결코 높다고 할 수 없는 시점에서마저 탈북자들의 증언은 고스란히 대북 제재의 구실로 삼아졌다. “이런 과장과 위증은 미국에서 북한인권법을 제정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 이순옥이라는 탈북자는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한 생체 실험, 쇳물 주입 살해 등을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2004년 11월호 정세와 정책에서 이순옥의 증언에 대해 “이는 탈북자들조차 의구심을 가질 정도로 비현실적”이라며 “과장된 증언에 충격을 받은 미국 의회가 만장일치로 북한인권법을 통과시킨 셈”이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이순옥은 자신이 정치범 수용소 출신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경제범이었습니다.”(p. 88.) 이 밖에도 자신이 ‘완전 통제 구역’으로부터 도망쳐 탈북했다고 주장하는 신동혁이나, 2014년 영국 BBC가 ‘올해의 여성 100인’으로 선정한 ‘탈북 여대생’ 박연미의 증언들도 거짓이라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들의 증언이 비일관적인 데다가, 그 내용을 신뢰하기 어려울 만큼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결국 ‘돈’이다. 일부 탈북자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북에 관한 정보를 상품화하여 수요자(선교 단체, 미국 등)의 입맛에 맞게 자극적인 조미료를 더해 판매한다. 그리고 수요가 있는 곳에는 유사한 상품을 내놓는 ‘경쟁자’들이 출현하기 마련이다. ‘북한 인권’ 문제 연구자인 송지연 싱가포르 경영대학교 교수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탈북자들은 인터뷰를 하는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나 미국 의회, 서구 언론을 불문하고 질문은 한결같다. ‘왜 북한을 떠났나? 그곳에서의 삶은 얼마나 끔찍했나?’ 그들의 이야기가 끔찍하면 끔찍할수록 더 많은 관심을 받는다. 국제적인 행사에 초청받는 일이 늘어날수록 수입이 늘어난다.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이야기들의 경쟁, 이것이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는 한국에서 폐지를 줍거나 화장실을 청소하며 돈을 버는 일보다 나은 삶이다.”(pp. 91-92.) 무한 경쟁과 승자 독식이라는 자본주의의 규칙 속에서 주변부로 밀려나기 십상인 탈북민들에게는 그런 ‘과장된 증언’의 유혹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사회주의=통일?
이 밖에도 이 책은 “북한은 외국인 억류로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대북 지원이 핵개발을 도왔나”, “북한 비핵화는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등의 화두를 던지며 독자들에게 스스로가 알고 있는 ‘북한’이라는 나라가 정말 실존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오염된 정보를 근거로 ‘북한’에 대한 선입견을 강화하고, 그들을 함부로 재단하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과연 젊었을 때부터 ‘검은 머리 외국인’으로 살아온 저자(그는 미국에서 대학교수를 하다가 현재 은퇴했다)는 ‘북한’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우리’보다 훨씬 객관적이었고, 그랬었기에 ‘북한’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선’을 비교적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었다.
물론 이 책은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쓰인 게 아님은 분명하다. 특히 통일 문제를 대하는 필자의 시각은 문제의 소지가 있어 보인다. 그는 남북 간의 대결 국면을 추상적인 평화론으로 풀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그 나름대로 DMZ를 중심으로 한 ‘작은 통일 정부’를 세우자는 등의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필자의 입장에서는 모두 부족해 보인다. 저자는 자신의 표현대로 ‘변증법적 통일론’을 제안하고 있음에도 그 내용은 변증법이 아니라 북의 체제(사회주의)와 남의 체제(자본주의)가 기계적으로 결합된 형태라 아쉬움을 느낀다. 다음 대목을 살펴보자. “사람살이에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있고, 인간이 욕망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생존에 필요한 깨끗한 공기, 음식, 건강, 평화, 안전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권리’로 접근해야 하고, 국가에 ‘요구’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또한 사회주의 원칙에 입각해서 풀어야 합니다. 반대로 더 좋은 것을 갖고 싶고, 더 좋은 것을 먹고 싶은 것은 ‘욕구’로 나타나며 경쟁을 해야 합니다.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풀어야 합니다.”(p. 293.)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사회주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유산 중 발전적으로 계승할 부분(고도화된 생산력, 독점자본의 형성에 따라 수월해진 국유화, 조직된 노동력)을 취하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야기한 착취적인 성격을 해소해 나가는 체제이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높은 단계에 있는데 생존에 필수적인 영역은 사회주의로, 경쟁해야 할 부분은 자본주의로 운영해야 한다는 주장은 사회주의는 물론이고 자본주의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명백히 소수로 집중된 부와 다수에 대한 착취를 낳는다. 따라서 남과 북이 하나의 국가 내지는 연합체로 재편된다면, 그 체제는 당연히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주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더욱이 남과 북의 대결은 계급적 차원에서 ‘노동자 국가’와 ‘자본가 국가’의 대치이기도 하다. 자본가계급(착취계급)을 타도하지 않은 채로 통일이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그것은 아마 남쪽 주도의 흡수 통일이거나 반세기 전과 같이 계급 전쟁으로 귀결될 것이다. 결국 한반도 남반부에서의 사회주의적 변혁이 통일의 선결 과제이며 절대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선을 넘어 생각한다≫는 우리가 북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오해를 불식시키는 데 초보적인 도움을 주리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이 책을 주의 깊게 읽고, 사회주의자가 넘어야 할 ‘선’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노사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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