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마당] 대중문화(혹은 상업문화) vs 노동자문화

 

박현욱 | 자료회원, 노동예술단선언

 

* 금속노조 문화국, ≪노동자문화 길찾기≫ 제3권, 2021에 수록된 글입니다.

 

 

 

우리도 집회 저렇게 재미있게 해요 vs 집회에 놀러 왔냐?

 

“우리도 집회 때 유명한 대중가수 불러서 대중가요도 부르고 하면 좋잖아요.” 노동조합 간부들에게 집회 시 조합원들의 참여도와 호응도를 높이는 문제는 늘 고민거리다. 재미없고(?) 지겨운 민중가요보다 사람들이 잘 아는 대중가요를 부르거나 유행하는 대중문화 컨텐츠(드라마, 예능 등)를 활용하면 더 재미있는 집회를 할 수 있고 반응도 좋을 텐데… 그러나 그러자니 뭔가 눈치가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가끔 조심스럽게 질문하는 이들이 있다. “근데 투쟁이나 집회할 때는 대중가요 같은 건 부르면 안 되나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안 될 거 없고 실제로 제법 활용되고 있다. 2021년 민주노총의 총파업 보급곡과 율동도 요즘 인기 있는 대중가요 트로트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였고 인기 있는 드라마 캐릭터 복장을 한 채 행진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다.

 

반면 그런 현상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냉소적인 시각도 있다. 최근 어느 복수 노조 사업장의 투쟁 현장에서 한 간부와 얘기를 나누다 “저쪽(어용 노조)에서는 집회하는데 트로트 가수 불러서 공연하고 아주 개판이더라고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 행위가 ‘노조답지 못한 행위’ 즉, 어용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의미가 깔린 말이다.

 

한쪽에서는 대중문화의 적극적인 활용이 집회의 혁신이고 나아갈 방향이라고 보는가 하면 또 다른 쪽에선 투쟁의 의미를 훼손하고 역행하는 것이라 비판하는 상황을 어떻게 볼 것인가? 더 나아가 노동자문화의 길을 찾고자 하는 노동자 혹은 노동조합 간부들에게 있어서 대중문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판단할 것인가? 이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노동자문화와 대중문화의 관계’를 생각해 보고 그를 통해 민주노조가 나아갈 방향을 찾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여기 국뽕 한 사발 추가요~!

 

한국 대중문화는 특히나 요즘에 심상치 않다. 한류, 세계를 휩쓸고 있는 문화 강국 코리아, BTS, ‘기생충’, ‘오징어 게임’에 각종 TV 예능까지… 심장이 뛰고 엔돌핀이 돈다. 어쨌든 기분 좋아지는 말들이다. 일명 ‘국뽕’.

 

합법적 마약이라고 불리는 이 ‘뽕’의 위력은 확실히 대단하다. 청년은 6포, 7포 세대로, 중장년은 38선, 56도로, 노년은 노인 빈곤율 1위로 내몰리며 ‘헬조선’이라고 스스로 이 사회를 칭하던 한국의 노동자 민중은 일약 전 세계인의 부러움과 동경을 한 몸에 받는 ‘BTS와 기생충 보유국’의 자랑스러운 국민이 되었다.

 

문화의 힘. 소프트 파워라 불리는 이 힘은 블랙홀급 위력으로 내 삶의 문제들을 빨아들이는데, 그 선두에는 단연 음악, 영화, 드라마 등 대중문화가 서 있다. ‘쥬라기 공원’이라는 헐리우드 영화 한 편으로 벌어들인 수입이 현대자동차에서 2년간 자동차 만들어서 번 수입보다 많다는 사실만 봐도 이 파워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다.

 

노동조합이 투쟁만 잘하면 되지 왜 문화까지 고민해야 하나? 혹은 문화는 그냥 재미있게 즐기면 되는 거 아냐?라고 생각하시는 동지들이 있다면 빨리 그 생각을 바꿔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투쟁이란 결국 싸움이고 싸움은 곧 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화가 가지는 그 강력한 힘.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는 노동과 자본의 싸움에서 관건이 된다.

 

이렇게 은혜로운 나라에 살면서 뭐가 불만이라고 데모질이야!

안타깝게도 지배계급으로서의 자본과 국가는 그 힘을 일찌감치 깨우쳤으며 그들답게 피지배계급으로서의 노동자 민중을 통제ㆍ억압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다.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가 있어 이렇게 우린 은혜로운 이 땅을 위해~ 아아 우리 대한민국’ 80년대를 산 동지들이라면 모르기 어려운 노래, 1983년에 발표되어 초유의 히트를 기록한 ‘아 대한민국’이라는 노래의 가사 일부이다. 국뽕을 갈아 넣은 것이 아니라 아예 제목 자체가 국뽕인 이 노래가 그만큼의 대중적 파급력을 행사한 데에는 당시 정권이었던 전두환 정권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쿠데타와 5ㆍ18 학살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은 민주주의를 향한 노동자 민중의 저항과 투쟁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대한 대응 중 하나로 문화의 힘(우민화 정책으로서의 3S 정책 등)을 활용했다.

 

이 노래가 사람들의 의식을 장악하면 투쟁이니 저항이니 떠들어 대는 소리는 말 그대로 헛소리가 된다. 노랫말대로 누구나 행복하고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데다 뜻하는 건 다 될 수 있는 안드로메다급 은혜로 충만한 땅에 살고 있는데도 불만을 가지고 데모질을 일삼는다? 누가 봐도 설득력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데모질하는 놈들이야말로 미친놈 혹은 ‘사회적 악’이 되어 버린다. 지탄받아 마땅한 대상이 정권이 아니라 그에 저항하는 자들로 뒤집히게 되고 따라서 소위 사회적 악을 일소하겠다는 공권력의 무자비한 탄압에 충분한 명분을 제공하여 대중의 응원과 지지까지 이끌게 된다. 당시 어른들이 소위 ‘데모질’하는 이들을 욕하며 한결같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저것들 다 사우디 같은 데 보내서 고생 좀 시켜 봐야 해. 대한민국에 사는 게 얼마나 행복한 건데 데모질이나 하고 말야… XXX들…’

 

1980년대 전두환의 3S 정책

 

전두환 정권은 노동자 민중의 분노를 통제하기 위해 우민화 정책이라고 불리는 문화 정책, 일명 3S 정책을 활용했다.

 

스포츠(Sports)

○ 1981년 88올림픽ㆍ86아시안게임 유치

○ 1982년 프로야구 출범

○ 1983년 프로축구ㆍ프로씨름ㆍ노동대잔치 출범

 

섹스(Sex)

○ 1982년 야간 통행금지 37년 만에 해제

○ 성매매 업소 급증

○ VTR 보급

○ 포르노 테이프 유통

 

스크린(Screen)

○ 1980년 12월 1일 컬러 TV 방송 시작

○ 에로 영화 급증

○ 드라마 ‘달동네’ 히트, 드라마 ‘전원일기’ 시작

 

집단적 가스라이팅

물론 ‘아 대한민국’이야 당시가 군사 독재 정권인 데다가 대놓고 SF 공상 과학 노래이니 그것과 현재 ‘위대한 대한민국 문화의 힘’에 바탕한 진성 ‘국뽕’과 비교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생각하실 분도 있을 테다. 혹은 지금 정권이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런 이데올로기를 활용하겠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테다. 과연 그럴까? 다르나?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은 지금은 실제로 한국 대중문화가 세계에 꽤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이고 다르지 않은 점은 여전히 그것이 노동자 민중에 대한 이데올로기 통제 수단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전자의 이유로 이전보다 더 실효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재가 당시보다 절차적 민주주의에 있어 훨씬 나아진 정권이라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국가 권력을 유지하는 관리자인 정권의 역할이란 자본주의 체제 유지와 자본가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이 그 본질이라는 면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사실 당시(적어도 7-80년대 한국)보다 훨씬 자본주의 체제가 위기를 맞고 있는 현 상황이 어떤 면에선 더욱 강력한 이데올로기 통제 수단을 필요로 한다.

 

앞서 말한 6포, 7포 세대, 헬조선 등 한국 민중을 스스로 규정짓던 이런 표현들이 괜히 나온 말이겠는가? 자본주의 체제가 전반적인 위기를 향해 가는 상황이기에 노동자 민중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실업과 불안정 노동, 상시적인 대량 구조 조정과 끝없는 생존 경쟁에 내몰릴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노동자 민중의 고된 현실이 의식 속에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다.

 

고통스러운 현실은 분노가 되고 분노가 조직되면 저항과 투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해야 하는 국가 권력의 입장에서는 그 분노가 체제를 향한 저항 의식으로 성장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며, 따라서 의식을 통제하기 위한 강력한 이데올로기 통제 수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소위 ‘땡전 뉴스’식의 미디어를 통한 정권 홍보라든가 ‘북풍, 간첩 사건, 지역감정’ 등의 낡은 방식은 투쟁을 통해 성장한 노동자 민중에게 더 이상 효과적으로 먹혀들지 않는다. 더 고도화한 이데올로기 통제 수단. 바로 (대중)문화를 통한 국뽕 이데올로기는 상당히 고도화한 수단이면서도 예나 지금이나 (지금은 더더욱)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오늘도 국뽕에 한껏 취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술처럼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하고 진통제처럼 내일의 고단함을 버티게 하며 더 나아가서는 정말로 전 세계인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대단한 나라의 행복한 국민이 된 듯 환각 작용을 일으키는, 말 그대로 ‘뽕(마약)’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그것이 반복되면 한순간의 환각 작용이 아니라 ‘정말 내가 행복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굳어지게 되고 그럼에도 내가 불행하다고 여긴다면 그건 이 사회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라 여기게 된다.

 

이른바 노동자 민중에 대한 집단적 가스라이팅. 가스라이팅을 행하는 자들이 노리는 것은 그 대상의 무력화이다. 바로 노동자계급의 무력화!

 

노동자에겐 국경이 없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극단적 고통을 겪고 있는 이에게 마약 성분이 포함된 진통제를 한시적으로 쓰듯이, 그런 것들이 어느 정도의 긍정적인 면도 있다. 대중예술인들과 수많은 대중문화 관련 노동자들이 만들어 내는 멋진 예술 작품을 즐기며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고 스트레스를 푸는 것 역시 긍정적인측면이 꽤 있다. 그러나 인간의 감각에 통점이 있어서 고통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으니까 신경 써서 고치라는, 말하자면 더 큰 고통이나 죽음을 면하기 위해 몸이 나에게 보내는 신호이다. 살이 썩어 들어가 고통스러운데 그 고통을 잊고 싶어서 마약이나 진통제에만 의존한다면 결국 죽는다.

 

문화라는 무기로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마약을 제조해 노동자 민중으로 하여금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하거나 똑바로 못 보게 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의도와 맞아떨어진다. 당연하게도 노동자 민중은 그에 저항하는 노동자 민중의 문화, 저항의 문화라는 무기로 그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수십 년을 일해도 한순간 일터에서 쫓겨나 비정규직으로 다시 최저 임금으로 내몰린다. 노년 취업률 1위가 말해 주듯이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하는, 실제 1년에 2천 명이 넘는 수가 일하다 죽는 지옥 같은 대한민국의 노동자로 살면서도 여전히 현실을 바꾸고자 투쟁하려는 의지는 점점 힘을 잃게 된다.

 

국뽕 이데올로기의 심각성은 그뿐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지배계급이 체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쓰는 수단이 극단적 애국 이데올로기다(대공황 극복을 위한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즘이나 현재 일본의 우경화 등).

 

실제로 현재 대중문화 관련 국뽕을 다루는 수많은 인터넷 매체들은 특히나 일본(k-pop과 j-pop 원조 논란 등), 중국(대중문화 표절, 한복 공정, 김치 공정 등) 등 주변국에 대한 문화적 우월성을 경쟁하듯 다루며 국가적 대결 구도에 바탕을 둔 배외적 애국주의를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그 나라들의 지배계급이 의도한 바인 애국주의적 우경화 역시 마찬가지 경향성을 가진다.)

 

공황 같은 자본주의의 위기마다 자본가계급은 예전에도 그랬듯 할 수만 있다면 전쟁을 통해 그 위기를 극복하려 한다. 그게 가능하려면 당연하게도 자국의 노동자 민중이 타국에 대해선 적개심을, 자국에 대해서는 애국심을 가슴에 품어야 한다. 자국에 대한 우월성과 자부심은 그 바탕이 되기 때문에 국뽕 이데올로기의 강화, 조장은 필수적이다. 물론 노동자 민중은 그럴수록 더욱더 국경을 넘어 전 세계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자본가계급의 전쟁 책동이나 그를 위한 애국주의적 우경화에 맞서야 한다. 그러나 대중문화를 통한 국뽕에 한껏 취해 있는 노동자 민중에게 과연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 수많은 국뽕 관련 컨텐츠들은 국가 간 대결 구도를 바탕에 깔고 있다.

 

 

강남 스타일 vs 노동자 스타일

 

다시 집회나 투쟁에서의 대중가요 문제 얘기로 넘어가자. 국뽕으로 시작한 얘기이니 그 이야기로 이어 가 보자면, 일명 ‘한류’를 세계적으로 끌어올린 시작으로 ‘강남 스타일’의 세계적 흥행을 꼽는다. 한국에서도 이 노래와 춤은 상당한 인기를 끌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 했는데 노동자 역시 그러했다. 실제로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서 강남 스타일의 ‘노가바’나 ‘커버 댄스’ 공연을 개인적으로도 참 많이 봤는데 힘든 투쟁과 지루한 집회에 지쳐 있던 노동자들은 대체로 같이 웃고 환호하며 즐겼다.

 

▲ 대중성이라는 이름 아래 인기 있는 대중문화 컨텐츠를 활용하는 노동조합의 집회들

 

오빠도 강남 스타일?

그런데 그냥 웃고 즐겼으면 된 일일까? 집회를 진행하는 이들이 흔히 말하듯 ‘반응 난리, 호응 폭발’이면 잘된 것일까? 특히나 ‘노가바’도 아닌 그냥 원곡에 댄스 커버를 하는 경우라면 더구나 생각해 볼 일이다. 거의 아시겠지만 이 노래는 ‘오빤 강남 스타일~~’이라는 말로 시작해서 끝난다. 사실 그게 다다. 시종 ‘오빤(나는) 강남 스타일’이라고 외쳐 대는데 이는 강남 스타일이 소위 쿨하고 핫한, 말하자면 매력 있고 누구나 선망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일 테다. 당연하게도 비강남 스타일은 그에 반대되는 뭔가 찌질하고 매력 없는 스타일이 될 수밖에 없다. 뭐 그게 확대 해석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강남 스타일만큼 ‘쿨’하고 ‘핫’하지 않은 스타일이라는 정도까지 해 두자.

 

그래서 강남 스타일이 뭔데? 가사의 내용을 따지지 않더라도 ‘강남’이 가지는 의미가 ‘부유함’의 상징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한국인은 흔치 않을 거다. 말하자면 가진 자들의 스타일이라는 의미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진 자란 곧 자본가 혹은 그에 준하는 (적어도 ‘노동자’와는 대척점에 있는) 자들의 스타일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투쟁 현장에서 강남 스타일을 부르고 춤을 추며 환호한다? 노동자들의 투쟁이란 당연하게도 자본가와의 싸움일 텐데? 비강남 스타일들이 강남 스타일과 싸우면서 오빤 강남 스타일이라고 외치며 환호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져도 호응만 좋으면 되지 뭘 심각하게 따지냐며 넘어갈 일일까?

 

오마주 혹은 동경? 패러디 혹은 풍자?

‘그게 문제라면 가사를 바꿔 부르면 괜찮지 않은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조직되는 과정에서 혹은 노동 운동의 역사 속에서 원래 있던 노래(대체로 대중가요)의 가사를 노동자의 현실에 맞게 바꿔서 부르는 소위 ‘노가바’는 많은 역할을 해 왔다. 우리의 처지를 담은 절절한 가사를 익숙한 멜로디에 붙여서 부르며 내적으로는 의식의 성장과 동질감을 형성하고 외적으로는 우리의 현실과 요구를 알릴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이며 그 긍정성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런 행위의 이유와 동기, 그리고 역사성에 대해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실제 역사 속에서 있었던 노가바를 예로 들어 보자. ‘물가는 하늘 위로 치솟고 임금은 바다에서 빌빌빌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우리완 거리가 먼 곳… 원하는 것은 돈이 없어 살 수가 없고 뜻하는 것은 시간 없어 할 수가 없네… 아아 임금 인상하라!(85년 대우자동차 파업 당시 노동자들이 부르던 ‘아 대한민국’ 노가바)’ 이 노가바는 ‘아 대한민국’이라는 노래 가사를 정면으로 받아치며 비꼬고 있다. 노래를 통해 전달하려는 의도를 정면으로 뒤집어 놓음으로써 현실뿐 아니라 노래 자체에 대해서도 통렬하게 비판하며 풍자하고 있다.

 

하지만 강남 스타일뿐만 아니라 민주노총이 2021년 총파업을 선동하기 위한 보급곡으로 만들었다는 ‘한잔해’라는 노래의 노가바만 봐도 그런 의도는 찾을 수가 없다. 또한 아무리 강남 스타일을 노동자 스타일로 바꿔서 부른다 한들 일종의 원형 상징처럼, 부르면 부를수록 노동자들에겐 노동자 스타일이 아닌 원곡 강남 스타일이 더 인식, 전파되는 결과를 낳는다.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한잔해’를 비롯해 몇몇 대중가요를 노동조합을 통해 알게 되었으며 무의식중에 원곡을 흥얼거리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춤 역시 원곡 춤을 그대로 추는(일명 커버 댄스)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실제로 2021년 한 산별노조는 대규모 집회에서 요즘 인기 있는 아이돌 댄스 그룹의 춤을 몸짓패에게 연습해서 하도록 요구하기도 했었다.

 

노래는 노래일 뿐. ‘의미충’이세요?

굳이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에까지 이런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가? 변화한 대중의 정서를 따라가지 못하는 구닥다리 운동권 정서에다 진지충, 의미충이냐며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나 역시 ‘가뜩이나 투쟁하고 농성하느라 스트레스받고 힘든데 문화 프로그램이나마 좀 아무 생각 없이 즐길 수 있어야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당연히 그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기 자랑 등 조합원의 참여를 높이는 프로그램의 활용으로 권장할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활용하는 것과 무비판적으로 수용, 혹은 동경하여 지향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앞서 말했듯이 대중가요를 활용한 민주노조의 문화 활동은 첫째 노동조합이 익숙하지 않은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으로의 접근성을 낮춘다는 점에서, 둘째 노동자계급의 계급성을 담은 노래가 존재하기 어려웠던 역사적 제약 속에서, 셋째 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한다는 측면에서 이유와 의미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노동조합이라면 그 정도의 활용을 넘어서는 대중가요에 대한 적극적 수용과 활용에 대해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노동자계급의 문화를 대중문화의 하위문화로 종속시키고 노동자 스스로에게 계급적 문화는 저급한 반면, 대중문화는 ‘쿨’하고 ‘핫’한 문화로서 동경의 대상이 되게 해, 스스로 독자적인 노동자문화를 폐기하도록 유도해 가는 역할을 하게 된다.

 

신선해서가 아니라 익숙해서다

그러함에도 ‘집회에서 지겨운 민중가요 말고 대중가요나 k-pop 댄스 같은 거 하니까 신선하고 좋다’는 반응을 무시할 수는 없다. 물론 동의되는 부분도 있다. (나 역시 숱한 집회에 변화 없는 민중가요와 문화 프로그램에 질려 버릴 때도 있으니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뭔가 앞뒤가 안 맞는다. 정말 지겨운? 민중가요가 아닌 대중가요가 나오니 신선해서 좋다고? 좋을 수는 있겠으나 그 이유가 ‘신선해서’라니?

 

간부들까지는 그럴 수 있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집회에 참석하고 그때마다 지겹게 민중가요를 들을 테니까. 그런데 정말 조합원들도 그럴까? 지겹다는 것은 너무 많이 접한다는 것이고 신선하다는 것은 반대로 자주 접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민주노총의 조합원들이 살면서 민중가요를 듣고 접할 기회가 얼마나 될까? 간부 혹은 활동가들 혹은 민중가요를 아주 좋아하는 조합원들을 빼고 일반적인 조합원들은 집회에나 나와야 겨우 접하는 것이 민중가요이다. 따라서 보통의 조합원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몇 번이나 집회에 참여하는 경험을 하는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반면 그들이 대중가요를 접하는 횟수는 어떤가? 일상 속에서 미디어를 통해 말 그대로 ‘지겹도록’ 대중가요를 접하게 된다. 당연히 지겨우려면 늘 듣는 대중가요가 지겨워야지 들을 기회가 흔치 않은 민중가요가 지겹겠는가?

 

아마도 반대의 이유일 것이다. 민중가요가 지겨워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생소해서라는 이유가 더 맞을 것이고 대중가요가 신선해서라기보다는 익숙해서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문화란 오랜 세월 자신의 삶과 함께하며 자연스럽게 익숙해지고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노동조합에 소속된 노동자일지라도 대개는 그들의 삶에서 노동자 혹은 민주노조의 조합원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생활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성인이 되어 취업하기 전까지는 그저 이 사회 대중의 일원으로 대중문화를 자신의 문화로 삼으며 살아온 이들이다. 노동자가 된 후에도 여전히 이 사회 대중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은 강한 규정력을 가진다.

 

하기에 오히려 노동자에게 대중가요는 오히려 익숙한 ‘자신의 문화’라는 인식이 강한 반면, 민중가요는 여전히 익숙지 않은, 가끔 집회에서나 들어 봄 직한 낯선 것들이다. 따라서 노동조합의 투쟁이나 집회에서 대중가요가 ‘반응’이 좋고 신난다면 그것은 민중가요 혹은 노동자의 문화가 여전히 자신의 것으로 느끼기엔 낯선 반면 익숙한 대중가요를 진짜 ‘자신의 것’으로 느끼는 데에 따른 반응이라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 집회에 이제 나오기 시작한 젊은 조합원들에게서 민중가요 혹은 투쟁가요를 매우 신선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성을 자주 접한 경험이 있다. 오히려 노동조합이 조합원 혹은 대중에게 ‘이게 우리의 문화야. 어때 뭔가 다르지?’라는 태도로 자신 있게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아무도 우리 얘기를 노래로 불러 주지 않아요

몇 년 전 어느 집회 현장에서 ‘진짜 사장이 나와라’라는 노래와 몸짓을 한 적이 있다. 집회가 끝나고 노동자 한 분이 내게 와서는 주머니에서 다 해지고 낡은 종이 조각 하나를 꺼내서 보여 줬는데 거기엔 손으로 직접 써 놓은 이 노래의 가사가 적혀 있었다. 노동조합 만든 지 얼마 안 됐을 때 우연히 이 노래를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면서 그 노래를 만들고 부른 사람을 오늘 보게 되니 꼭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 안주머니에서 꺼내 필자에게 보여 준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간 노래 가사

 

“세상에 내 얘기를 해 주는 노래가 있다니 깜짝 놀랐어요. 듣자마자 우리 조합원들에게 이 노래를 꼭 알려 주고 싶어서… 일하는 곳의 현장 소음 때문에 제 귀가 별로 좋지 않은데도 100번 넘게 반복해서 들으면서 가사를 모두 손으로 직접 써서 외웠어요. 티비나 라디오에서 수많은 노래가 나오지만 아무도 우리 얘기를 노래해 주진 않잖아요.” 속으로 ‘아이고 민주노총에 전화 한 통 하시거나 홈페이지만 들어가도 바로 가사를 다운받을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을 했으나 말하진 않았다. 가사를 반복해 들으며 한 자 한 자 가사를 썼을 그 마음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았기에.

 

문화란 삶의 반영이다. 노동자 삶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먹고사는 문제일 것이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도 일터이고, 생활비, 양육비, 교육비, 대출금, 노후자금 등 고민의 중심에도 돈, 즉 임금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미디어를 통해 듣는 대중가요들에선 그런 얘기를 거의 들을 수가 없다. 일이 너무 힘들어서 아프다거나 임금이 작아서 슬프다거나 비정규직이라서 서럽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대중가요에서 들어 본 일은 거의 없을 거다. 대중의 대다수가 노동자이며 대중가요란 그런 대중의 삶을 노래하는 것일 텐데도 어찌 된 영문인지 대중가요엔 진짜 대중의 삶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얘기는 빠져 있다는 것이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삶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는 대중가요가 있긴 하지만 극소수이고 그마저 노동자의 구체적인 삶이나 해결의 의지를 다루기보다는 관념적인 위로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대중가요의 최신 인기 차트. 그 속에 우리의 이야기는?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70년대 초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로 시작하는 히트곡 ‘님과 함께’라는 노래부터 2021년 민주노총 총파업 투쟁 노가바 보급곡 ‘한잔해’라는 노래(‘한잔해 한잔해 한잔해 갈 때까지 가 보자 한잔해’)까지… 예나 지금이나 대중가요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는’ 미래에 대한 불가능한 환상으로 잊게 하거나 술이나 먹으면서 털어 버리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노동조합으로 조직되고 투쟁에 나서는 것은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고 그러한 의지는 당연하게도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현실을 직시하는 일은 꽤 고통스러운 일이니, 대중적 인기에 바탕해 돈을 벌어야 하는 상업(대중)가요가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거대한 노동자의 일상, 한정된 노동조합 활동 시간이라도

집회나 투쟁 현장에서 ‘꼭 민중가요만 고집해야 하는가?’라는 애초의 질문에 대해 ‘굳이 투쟁 현장이나 집회에서마저 대중가요를 불러야 하는가’라고 반문해 보자. 노동자들의 거대한 일상 속에서 노동조합 활동, 혹은 투쟁이나 집회에 참여하는 그 짧고 한정된 시간에, 노동자 스스로의 얘기를 담아내기에도 턱없이 모자란 그 시간에까지 일상 속에서 늘 지겹도록 접하고 부르는 대중가요를 부르거나 대중가수의 공연을 배치해야 하겠는가 말이다. 어차피 한두 시간 남짓 집회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휴대폰으로 혹은 각종 미디어를 통해 숱하게 들을 그 대중가요를 말이다. 어떤 대중가수도 불러 주지 않는 노동자의 삶과 투쟁을 담은 노래를, 그 짧은 민주노조 조합원으로서의 활동 시간만이라도 부르고 또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새삼 다시 말하지만, 문화의 힘은 강하다. 출근길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 한 구절을 하루 종일 흥얼거린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반복적으로 되뇌다 보면 알게 모르게 나의 일부분이 되고 자연스레 그 문화에 젖게 된다.

 

노동자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세상을 바꾸고자 목적의식적으로 활동하는 조직이 노동조합이다. 따라서 할 수 있는 한 조합원들이 자꾸 노동자 스스로의 삶을 담은 노래를 접하도록 목적의식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접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점점 대중가요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삶을 담은 민중가요도 ‘자신의 것’으로 되어 갈 것이고 그렇게 문화가 바뀌어 갈 때 진정으로 노동자의 삶도 바꾸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대중가요는 굳이 노동조합에서까지 들려주지 않아도 조합원들이 알아서들 취향에 맞게 듣고 즐기니까.

 

 

대중성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지는 대참변

 

애초에 대중문화 전반을 다루고자 했으나 노래만으로도 너무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그 외 대중문화에 대해 깊이 있는 내용으로 다루기에는 지면상 한계가 있지만 짧게라도 몇 가지를 다뤄 보겠다.

 

▲▲ 드라마 속 그들은 무장을 한 채 생존의 벼랑에 내몰린 게임 참가자들을 무참히 학살한다.
▲ 2021 민주노총 총파업대회에 나타난 그들

 

노동자대회의 선두에 선 학살자들의 행진

얼마 전 민주노총이 진행한 총파업대회에서 많은 이들을 깜짝 놀라게 한 장면이 연출됐다. 앞서 말한 최근 국뽕의 정점을 찍으며 전 세계에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 속 캐릭터 복장을 한 사람들이 북을 치며 대오를 이끄는 장면이었다.

 

집회란 더 많은 대중에게 우리의 요구와 주장을 알리기 위한 행위이기에 대중의 최대 관심사를 적극 활용하려는 노력은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인기 있는 대중문화 컨텐츠라 해서 무턱대고 갖다 쓰다가는 이와 같은 참변을 일으키기도 한다. 바로 그 캐릭터가 극 중 학살자 무리들의 복장이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여러 이유로 빚을 진 사람들을 모아서 큰 상금을 걸고 죽음의 게임을 벌이는 내용이다. 수백여 명의 참가자들은 대개 심각한 생활고를 겪는(주인공은 정리 해고당한 노동자로 그려진다) 사람들이고 게임을 주관하는 이들은 전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부를 가진(당연하게도 자본가) 자들이다.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게임(생존 경쟁)은 이어지고 탈락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한다. 무장을 한 채 그 죽음을 집행하는 자들, 게임 주관자들(자본가)의 하수인으로 게임을 관리하는 관리자 집단(국가)이 등장하는데 바로 그들의 복장을 한 채 노동자대회의 행진 퍼포먼스를 한 것이다. 드라마의 내용을 아는 이들이 그 모습을 본다면 노동자대회 행진의 의미를 어떻게 느끼겠는가? 노동조합이 노동자 민중을 통제 억압하고 학살하는 자들의 역할을 하겠다는 의미로 느끼거나 아니면 스스로 학살하는 자들을 앞세워 퍼포먼스를 벌이는 ‘아무 생각 없는 사람들’로 비웃음을 사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죽음의 게임을 박살 내자가 아니라 죽음의 게임에 참여해 이기자?

더 심각한 것은 총파업 조직을 위한 민주노총의 홍보 영상이다. ‘오징어 게임’을 패러디한 이른바 ‘총파업 게임’ 영상. 삶이 벼랑으로 내몰리는 노동자들이 ‘오징어 게임’처럼 ‘총파업 게임’에 뛰어든다는 내용이 영상의 골자인데… 만듦새에 대해서는 차치하고서라도 그 영상을 본 이들이 경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오징어 게임’이라는 것 자체가 자본가들이 주관하는 게임인 데다가 그 게임 내용이 최후까지 생존해 일확천금을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죽이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총파업이란 그렇게 생존 경쟁에 내몰리며 죽어 나가는 현실을 바꾸자고, 말하자면 게임판 자체를 거부하고 박살 내 버리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총파업 참여를 선동하고 홍보하는 영상이 오히려 그 게임판에 뛰어들자는 내용이라니? 그저 드라마의 흥행세만 이용하려 했을 뿐이라고 항변할 수 있겠으나, 그렇다면 더더욱 그 고민의 얄팍함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 총파업을 선동하기 위한 민주노총의 홍보 영상.
이 영상을 본 조합원 중에는 “총파업이 게임이라니?”라며 탄식하는 이들도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뿐만이 아니다. 최근 큰 화제가 된 전문 댄서들의 경쟁을 다룬 TV쇼를 비롯 예능 프로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것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치열한 경쟁, 경쟁에서 진 사람들은 탈락하고 승자만이 남아서 최종 우승을 거머쥐는 이른바 ‘승자 독식’이 이 프로그램들의 기본 포맷이다. 그것을 접하는 대중은 능력에 따라 승리를 거머쥐기도 하고 탈락하기도 하는 씨스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특히나 다음 세대를 이어 갈 청소년기의 아이들은 경쟁에서 이기지 못해 도태되고 불이익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체화하게 된다. 그렇게 체화된 이들에게 있어서 보편적 평등이란 오히려 공정하지 않은, 매우 부당한 것이 된다. 소위 ‘능력도 안 되면서 같은 대접을 받으려 하는 도둑놈 심보’로밖에 여겨지지 않을 터.

 

◀ 약자 지목 배틀.
나보다 능력이 안 되어 보이는 이를 꺾어 승자가 되는 컨셉.
예능이니 이렇게 웃으면서 보기만 하면 되는 일일까?

 

◀ 능력주의에 따라 경쟁에 지면 탈락하는 것이 공정한 것.
저성과자는 해고되는 것도 능력주의 따라 공정한 것?

 

◀ 서바이벌 예능의 컨셉.
노동자로서 생존하고 싶으면 노동자끼리 싸워서 이겨라?

 

◀ 서바이벌 예능의 구도.
노골적인 피라미드형 계급 구조가 드러난다.

 

최근 극우 반동 보수 정당인 국민의힘 당 대표가 정계에 파란을 일으키며 급부상한 것도 바로 이러한 능력주의에 바탕을 둔, 공정성 담론을 내세우며 MZ세대라 불리는 젊은 층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포섭한 결과이다. 희망이 없는 젊은 세대의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에 기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를 ‘능력도 없으면서 노조만 믿고 철밥통에 고임금까지 꿰차고 있는’ 나이 든 노동자들에게로 전가해 소위 세대 간 갈등으로 문제의 본질을 틀어 버리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이른바 ‘인국공 사태’(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둘러싼 논란)에서부터 2021년 국민건강보험공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너무나 적대적이었던 같은 민주노총 소속 정규직 노동자들의 거침없는 모습에서만 보더라도 이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우리에게 얼마나 심각한 현실이 되어 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뿐만이 아니라 정권과 자본이 호시탐탐 노리는 노동법 개악의 골자들을 보면 그런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포맷을 그대로 가져다 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직무급제나 성과 연봉제 등 노동자들을 더욱 갈라놓고 저임금화하는 정책의 바탕에도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고 있고 저성과자 해고 등 해고를 일상화하는 것 역시 경쟁과 탈락이 일상적인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에게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하기에 노동조합의 간부라면 투쟁이나 집회 프로그램에서 이러한 대중문화의 서바이벌 예능 포맷을 무비판적으로 따와서 진행한다거나 참여자들 간 경쟁과 순위를 매기는 경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에 대해 좀 더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문화에 자부심을 가질 때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다시 ‘당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다’

이 글은 대중문화를 절대 악으로 규정하거나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는 의미로 쓴 것이 결코 아니다. 앞서 말했듯 노동자는 대중의 일원이고 대중문화 역시 그들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요소이기에 부정할 수도, 분리할 수도 없다. 다만 세상을 바꾸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조합이라면 문화에 대해서도 목적의식적으로 바라보고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지난 소책자에 실었던 내용(“노동자문화의 이해”, ≪노동자문화 길찾기≫ 제1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 시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다.’ 칼 맑스의 이 말은 문화적 실천을 함에 있어 우리가 반드시 새겨야 할 말이다. 대중문화란 대중의 의식과 삶의 반영일 텐데 그러한 대중의 지배적 의식이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자본주의 체제에선 자본가계급의 이데올로기)일 수밖에 없다. 당대의 지배계급이란 그 시대의 물질적 생산 수단을 소유한 자들이고 물질적 생산 수단을 소유한 자들이 이데올로기적 생산 수단도 소유하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로 삼성 이재용의 가석방 및 사면 논란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독점자본가인 재벌 총수가 아무리 중죄를 지어도 그들을 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돈으로 빵빵한 변호인단 꾸리고 법조인들을 매수해서만이 아니다. 여론, 즉 대중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바탕이 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데 바로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생각이 대중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생산 수단을 소유했다는 것은 대중의 목줄을 쥐고 있다는 것인데 그 목줄을 쥐고 있는 재벌 총수가 구속되어 있으면 삼성이 위태로워지고 삼성이 위태로워지면 대중에겐 자신들의 목줄이 위태로워진다는 공포가 여론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백혈병으로 수십 명의 반도체 노동자가 죽어 나가고 아무리 불법 파견과 노동 탄압, 착취를 자행해도 그들 재벌 총수들이 대중을 먹여 살리는 영웅인 한 그 영웅들을 감옥에 가둬 둘 수 없는 것이다.

 

대중문화는 당연하게도 이러한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고 반영하는 데 주요하게 역할한다. 노동자를 죽이고 노동 탄압을 일삼는 삼성이나 현대 자본일지라도 방탄소년단(BTS)이 삼성 휴대폰과 현대 자동차 광고를 하는 한 그 자본의 이미지는 동경해 마지않는 방탄소년단의 이미지로 형성 전파된다. 당연하게도 그러한 자본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은 그러한 이미지 세탁으로 친자본화한 대중의 눈총과도 맞서야 하는 더욱 힘든 싸움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산업 자체가 거대자본에 의해 움직이며 그 자체로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전파 강화하는 기구가 된다. 이미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장악하고 있는 한 그들 문화자본의 자신감은 대단하다. 과거 스스로 노동자계급 해방의 전사라 자임하던 ‘첨바왐바’라는 유명한 영국의 록밴드가 대형 음반자본인 EMI와 계약한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본은 설령 그들을 비판하더라도 자본의 이윤에만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흡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인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도 돈이 된다면 문화 상품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래 봤자 대세에 지장이 없다는 독점자본의 무서운 자신감인 데다가 심지어 체제에 대한 비판마저 체제 내로 흡수해 버리는 훌륭한 효과까지 거둘 수 있으니까.

 

축구가 인기 없으니 공을 손으로 던지자고?

글을 정리해야 하는 단계이지만 여전히 개운치 않은 것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 조합원들의 눈높이는 대형자본에 의해 오랜 기간 훈련된 대중스타들과 화려한 문화 컨텐츠에 맞춰져 있는데 어떻게 노동자문화로 그런 조합원들의 호응을 끌어낼 것인가? 혹은 노동자들이 대중적 문화 감성과 맞지 않게 자신들만의 문화를 고집해 대중들로부터 고립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이다.

 

최근에 나도 어느 노동조합의 문화 컨텐츠를 제작한 적이 있는데 편당 수십억씩 들여서 제작하는 자본의 문화에 비하면 고작 1-2백만 원의 예산만으로 제작해야 하는 조건은 결과물의 질적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처음 언급한 국뽕 한류 속에서 어느 정도의 답을 찾을 수 있다. 헐리우드의 막대한 예산 투입에 비하면 상대가 안 되던 한국 영화가 지금은 역으로 세계에서 손꼽히게 된 데에는 과거 스크린 쿼터제를 지키기 위한 영화인들의 투쟁도 큰 역할을 했었다. ‘어차피 안 되니 포기하자’가 아니라 그러니 더더욱 지켜 내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

 

이런 상황을 가정해 보자. 야구는 인기가 많아 관객이 가득한데 축구는 인기가 없어서 객석이 텅텅 빈 상황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누군가 “사람들이 야구를 좋아하니까 우리 축구도 공을 손으로 던지고 받는 것으로 룰을 바꿔야 합니다”라고 주장한다면? 필시 그 사람을 제정신이라고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노동자문화도 그렇다. 대중문화에 비해 인기도 없고 투박하다 해서 폐기하고 그 자리에 대중문화를 갖다 놓는다면 축구의 흥행을 위해 공을 손으로 던지는 꼴이 되어 버린다. 당연하게도 축구가 사람들로부터 다시 호응을 얻으려면 축구의 정체성을 더 잘 살리기 위한 노력, 다시 말해 공을 발로 더 잘 차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이 답이 될 것이다. 노동자문화는 호응이 별로 없으니 대중문화로 대체하자가 아니라 더더욱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더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답이 될 것이다.

 

▲ 춤이 어설퍼서 더 감동적이었다며 많은 이들의 호응을 이끌어 냈던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동지들의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플래시 몹.

 

▲ 노동자의 이야기를 문화 컨텐츠로 만들어 내려는 노력은, 있는 대중문화를 가져다 쓰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고를 요한다. 그러한 수고를 두려워하지 않으려는 실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서 와! 노동자문화는 처음이지?

노동자문화만을 고집하다간 대중으로부터 고립된다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노동자다움으로서의 변별성을 지켜 내고 더 강화하려 할 때 대중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더욱 인식하고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대중문화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노동자 민중의 문화가 있다는 것을 더욱 차별성 있게 강화하고 어필할 때 오히려 대중으로부터의 설득력도 회복할 수 있을뿐더러 대중을 장악하고 있는 지배계급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파열구를 내고 대중을 노동자 민중의 편으로 끌어올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언젠가 노동 운동과 관련 없는 한 지인이 내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지나가다가 노동조합이 집회를 하길래 관심이 생겨서 어떤가 지켜봤는데… 이건 뭐… 무슨 붉은 악마들이 응원하는 건지 길거리 콘서트를 하는 건지… 뭐 하는 건지 모르겠던데요. 아니 뭐 지나가는 사람들 불편하게 길 막아 놓고서는 무슨 야유회 하는 것도 아니고…” 대중에게 친근히 다가간다고 심지어 대중가수를 집회에 세운다면 물론 그 순간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올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대중을 모은들 그들에게 그날 노동자들이 모인 진짜 이유는 남지 않는다. 광고 음악은 유명한데 정작 광고하고자 한 제품은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현재를 지양하기 위한 실천만이 새 세상을 연다

물론 그렇다고 죽으나 사나 변함없이 하던 대로 하자는 식의 고집을 부리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이 지금껏 얘기한 대중문화에 대한 문제의식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 아무리 노동조합이 노동자계급의 문화로써 활동해야 한다고 한들 그러한 계급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발전시키고 설득력 있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없다면 그저 당위에 불과한 억지스러운 강요밖에 안 될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문화담당자나 문화활동가들(나를 포함)의 적극적인 고민과 반성적 평가에 바탕한, 안주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레슬링 선수가 복싱 선수를 상대로 주먹질로 싸우려 한다면 어리석은 짓이다. 어떻게 해서든 거리를 좁혀 복싱 선수를 잡아야 하고 자신이 가장 잘하는 그라운드 기술로 바닥에 눕혀야 승산이 있다. 자본과 싸우는 노동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가장 노동자가 잘할 수 있는 방식. 가장 노동자다운 무언가를 더욱 강화하고 그것을 앞세워 싸울 때 승산이 있다. 바로 그 바탕에 노동자계급의 문화가 있다. 노동자다움이 무엇인지 노동자계급만이 가질 수 있는 문화의 힘이 무엇인지(“노동자문화의 이해”, ≪노동자문화 길찾기≫ 제1권 참조)를 잘 찾아내고 그것을 열심히 갈고닦아 발전시킬 때 자본과의 싸움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하고 진짜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 열릴 것이다. 삶과 추억이 담긴 유행가 한 소절, 인생 영화 한 편, 퇴근 후 피로를 풀며 즐기는 드라마 한 편. 사람들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을 그러한 의미를 부정하는 것으로서의 노동자문화가 아니라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도구로서의 대중문화가 가지는 성격을 지양해 나가는 것.

 

운동이란 지금 세상을 바꾸어 조금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가기 위한 움직임이다. 자본가들이 권력을 가진 지금 세상을 노동하는 이들이 주인 되는 다음 세상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 즉 현재를 지양하려는 노력이 바로 운동이다. 노동 운동이 현재의 지배적(대중적) 문화에 종속되어 있어서는 결코 그것을 지양해 나갈 수 없을 것이며 다음 세상에 대한 문화적 전망 또한 제시할 수 없다. 다음 세상의 주인이 될 노동자로서 노동자 스스로의 문화가 진정한 대중문화로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실천하는 것이 노동자문화의 길을 찾고자 하는 이들이 함께해야 할 일이다.

노사과연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1개의 댓글

  • 개사투쟁/노가바는 그 간 금지곡 시절 동안의 투쟁 수단이었습니다. 다만 이것이 상업적인 것 등의 이유로 인해서 정신적인 차원에서의 문제를 지니고 있던 것이었는데 다만 이를 통해서도 일부의 간극을 확보한 탓으로 민중가요도 가창할 수 있는 상황으로 도달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고전 음악 등 비중을 지닌 측면에서 여전히 민중 성향의 곡을 조우하기는 쉽지 않지요… 이미 쇼스타코비치와 한스 아이슬러를 보았지만 전자는 그래도 음반사/자본 차원에서 전집을 기획하는 점도 존재하지만 후자는 이런 류를 찾아 볼 수 없지요…
    무엇보다 민중문화 특히 노동문화를 부흥해야 하는 사명은 존재하는 상황이지만 이를 실행할 주역을 강화하는 급선무를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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