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노동자 교양 정치학 지상강좌(2)

<노동자 교양 정치학 지상강좌>

제1강 국가 (2)

 채만수|소장

 

3. 국가란 무엇인가

6) 피억압계급을 착취하는 도구

피억압계급을 착취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국가 그것, 즉 “사회 위에 서 있는 특수한 공적 폭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따라서 국가는 “조세와 국채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1) 이에 관해서 엥겔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러한 공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가시민(Staatbürger)의 부담이 필요하다. ― 즉, 조세가 필요하다. 이것은 씨족사회는 전혀 모르던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에 관한 얘깃거리를 충분히 알고 있다.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그 조세조차 더 이상 충분하지 않게 된다. 국가는 미래를 담보로 어음을 발행하여 돈을 빌린다. 즉 국채(國債)를 발행하는 것이다. …

이제 공적 폭력과 조세징수권을 쥐고 관리(官吏)는 사회의 기관으로서 사회의 위에 선다.2)

“미래를 담보로 한 어음(Wechsel auf die Zukunft)”으로서의 국채(Staatsschulden)가 결국 조세에 의해서 지불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국가는 이렇게 그 자체가 자신의 유지를 위하여 피억압계급을 착취하는 도구일 뿐 아니라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수단, 도구이기도 하다. 역시 엥겔스의 얘기를 들어보자.

국가는 계급대립을 억제해 둘 필요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이들 계급의 대립의 한복판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그것은 일반적으로3) 가장 힘이 센,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계급의 국가이며, 이 계급은 그 국가를 이용하여 정치적으로도 지배계급이 되고, 그리하여 피억압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할 새로운 수단을 획득한다. 그리하여 고대국가는 무엇보다도 우선 노예를 억압하기 위한 노예소유자들의 국가였으며, 봉건국가는 농노적·예속적 농민을 억압하기 위한 귀족의 기관이었고, 근대 대의제 국가는 자본에 의한 임금노동의 착취를 위한 도구이다.4)

이상의 엥겔스의 설명으로 국가란 그 자체 피억압계급을 착취하는 기구이자, 동시에 지배계급이 피억압계급을 억압·착취하기 위한 도구·수단이라는 것이 충분히 명백해졌을 것이다.

여기에서 조세와 관련하여 한 마디만 첨언하자면, 현대 부르주아 국가의 피지배·피착취계급으로서의 노동자계급은, 국가에 따라 소비세라고도 불리고 부가가치세라고도 불리는 간접세율을 최소화하고, 소위 법인(소득)세를 포함한 소득세율의 누진율을 최대한 높일 수 있어야 국가에 의한 착취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자본가들이 내는 소득세도 결국은 착취된 잉여가치의 일부여서 결국 모든 세금은 노동자들의 잉여가치이긴 하지만, 소득세와 간접세는 노동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가치생산물(부르주아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부가가치’라고 부르는, 노동자들에 의해서 새롭게 생산된 가치)이 잉여가치와 임금으로 분할 된 후에, 자본가들이 내는 소득세는 자본가들이 착취한 잉여가치에서 부담하는 부분이고, 상품가격에 붙는 간접세는 노동자들이 그 임금에서 부담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7) 민주공화제, 혹은 현대 대의제 국가의 경우

그런데, ‘국가는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기 위한 도구이다’라고 할 때, 재산의 크기나 유무에 상관없이 자본가건 노동자건 상관없이 일정 연령 이상의 성인이면 누구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는 현대 ‘민주공화제 국가’는 어떤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모르면 몰라도 아마 모든 나라에서 재산이나 성별, 종교의 차이를 불문한 보통선거권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러한 보통선거가 실시되는 국가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서유럽의 국가들에서조차 19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재산 상태에 따른 정치적 권리의 차별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엥겔스는 이렇게 얘기한다.

역사상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 국가시민들에게 인정되는 권리는 재산에 따라 차등이 있으며, 그리하여 국가란 무산계급에 대한 방위를 위한 유산계급의 조직이라는 것이 단적으로 표명되어 있다. … 근대 대의제 국가들의 선거자격(Wahlzensus)에서도 그렇다.5)

여기에서 엥겔스가 “근대 대의제 국가들의 선거자격(Wahlzensus)에서도 그렇다”라고 언명할 때 그 “근대 대의제 국가들”이란 물론 선거제도가 도입되어 있긴 했지만 아직 재산 상태에 따라 선거권의 유무가 결정되었던 19세기 중엽 서유럽의 ‘대의제 국가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 점은 보통선거권이 일반화되어 있는 현대 대의제 국가들, 현대 민주공화제 국가들과 다른 점이다. 그 때문에 엥겔스가 “근대 대의제 국가들의 선거자격(Wahlzensus)에서도 그렇다”라고 언명할 때, 그것은 현대 민주공화제 국가에서의 사정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위 인용문에 문단도 바꾸지 않고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다음과 같은 언명이다.

그러나 이렇게 재산의 차이를 정치적으로 승인하는 것은 결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거꾸로, 그것은 국가의 발전의 낮은 단계를 가리키는 것이다.6)

재산의 유무에 따라 선거권을 부여하거나 부여하지 않는 것은 국가가 아직 낮은 발전단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뿐, 국가의 본질에 관한 문제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면 보통선거를 통해서 형식상 ‘인민에 의한 지배(democracy), 즉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대 민주공화제 국가 및 영국 등과 같은 현대 입헌민주제적 대의제 국가들에서 유산계급의 지배는 실질적으로 어떻게 관철되는가?

당시 아직 사실상 예외적으로만 존재하고 있던 그러한 국가에 대해서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우리 현대의 사회관계들 속에서는 갈수록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으로 되고 있는 최고의 국가형태인 민주공화제, 그리고 유일하게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간의 최후의 결전이 치러질 수 있는 국가형태 ― 이 민주공화제는 공식적으로는 더 이상 재산의 차이를 문제 삼지 않는다. 거기에서는 부(富)는 자신의 권력을 간접적으로, 그러나 그만큼 한층 더 확실히 행사한다. 한편에서는 관리들을 직접 매수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그 전형적인 표본이 미국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정부와 증권거래소의 동맹의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이 동맹은 국채가 증대하면 증대할수록, 그리고 주식회사들이 운송뿐 아니라 생산 자체까지도 자신들의 수중에 집중하고7) 또한 증권거래소를 자기들의 중심점으로 삼으면 삼을수록 그만큼 용이하게 실현된다.8)

엥겔스가 이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을 썼고 공표했던 것은 1884년, 그러니까 아직 현대 민주공화제 국가의 발생·유년기였다. 그런데도 그 국가형태 속에서 유한계급, 즉 부르주아지가 그 지배를 어떻게 간접적으로 관철하는가를, 아니, 그러나 어떻게 더 확실하게 관철하는가를 저토록 소름끼칠 정도로 정확하게 밝히고 있다. ― “한편에서는 관리들을 직접 매수하는 형태로”, “다른 한편에서는 정부와 증권거래소의 동맹의 형태로”! 그리고 부르주아 정부와 부르주아지의 활동의 중심점인 증권거래소의 “동맹은 국채가 증대하면 증대할수록, 그리고 주식회사들이 운송뿐 아니라 생산 자체까지도 자신들의 수중에 집중하고 또한 증권거래소를 자기들의 중심점으로 삼으면 삼을수록 그만큼 용이하게 실현된다”는 것을!

게다가, 현대 부르주아 민주공화제 국가에서의 선거는 철저하게 금권선거(金權選擧)이다. 거만(鉅萬)의 돈이 없으면 선거를 치를 수가 없고, 그 거만의 돈도 상대적으로 적으면, 당선되기가 쉽지 않다. 그 때문에 야심을 가진 개천의 용들은 자진해서 독점자본가계급에 매수되어 그들의 이익 대변자가 되고, 독점자본가계급은 자신들의 지배를 보다 더 공고히 하기 위해 즐겨 그들을 매수하여 부린다.

한편, 현대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독점)자본에 의한 이데올로기 지배, 대중조작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이 글 모두(冒頭)의 각주 2)에서 이미 인용했지만, 다시 인용하자면,

지배 계급의 사상이 어느 시대에나 지배적인 사상이다. 즉, 사회의 지배적인 물질적 권력인 바의 계급이 그 사회의 지배적인 정신적 권력이다. 물질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계급은 그와 동시에 정신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그 때문에 또한 정신적 생산을 위한 수단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에 종속되어 있다. 지배적 사상이란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의 관념적 표현, 사상의 형태로 표현된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며, 따라서 그것은 실로 하나의 계급을 지배계급이게 하는 관계의 관념적 표현, 따라서 이 계급의 지배의 사상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다.9)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현대 민주공화제 사회에서 “물질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도 “정신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도, 그것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하고 있는 계급은 독점자본가계급이다. 그 때문에 정치제도로서 보통선거제가 실시되지만, “아직 자기를 해방할 만큼 성숙해 있지 못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저들 독점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의 지배 때문에 그들의 권력을 재생산하도록 그 선거권을 행사한다. 보통선거권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는 현대 민주공화제에서도 그렇게 하여 국가는 여전히 유산계급의 국가, 부르주아지의 국가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역사는 발전하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성숙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역시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유산계급은 보통선거권을 수단으로 삼아 직접적으로 지배한다. 피억압계급이, 따라서 우리의 경우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직 자기를 해방할 만큼 성숙해 있지 못한 동안에는, 그러한 한 그들 대다수는 기존 사회질서를 유일하게 가능한 사회질서로 인정할 것이고, 정치적으로는 자본가계급의 후미(後尾), 그 최좌익(最左翼)을 형성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해방을 향하여 성숙함에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를 독자적인 당으로 조직하고, 자본가들의 대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대표자들을 선출하게 된다. 보통선거권은 그러므로 노동자계급의 성숙도의 계측기이다. 오늘날의 국가에서는 그 이상의 것으로는 될 수 없고 결코 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역시 충분하다. 보통선거권이라는 온도계가 노동자들 사이에서 비등점(沸騰點)을 가리키는 그날에는, 노동자들도 자본가들도,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알 것이다.10)

여기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보통선거권은 그러므로 노동자계급의 성숙도의 계측기이다” 이하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마지막 문장, 즉 “보통선거권이라는 온도계가 노동자들 사이에서 비등점(沸騰點)을 가리키는 그날에는, 노동자들도 자본가들도,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알 것이다”이다!

보통선거권은 “오늘날의 국가에서는” “노동자계급의 성숙도의 계측기” “그 이상의 것으로는 될 수 없고 결코 되지도 않을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도 역시 충분하다”?! 그리고, “보통선거권이라는 온도계가 노동자들 사이에서 비등점(沸騰點)을 가리키는 그날에는, 노동자들도 자본가들도,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알 것이다”! “비등점”?!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알 것이다”?! ― 도대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오늘날 이 나라에 국가보안법이 있듯이, 1884년 당시 비스마르크 치하의 독일에는 ‘사회주의자 단속법’(1878-1890)이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그 의미를 새겨야 할 것이다.

 

4. 국가의 사멸

이상에서 우리는 편의상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1884) 및 레닌의 ≪국가와 혁명≫(1918), “국가에 관하여. ― 스베르들로프 대학에서의 강의”(1919) 등을 중심으로 ‘국가란 무엇인가’를 고찰해왔다. 하지만, 이들 저작 속에 표명된 맑스주의의 국가관, 즉 국가는 계급대립의 비화해성의 산물이며 지배계급의 피지배계급에 대한 억압과 착취의 도구라는 국가관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형성되고 공표되었다. 예를 들면, ≪공산당 선언≫(1848)이나 ≪1848년에서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1850),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1852) 등등에서 명확히 하고 있는 국가론이 그것이다.

이 국가관은 그 과학성 때문에 일찍부터 범(凡)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적어도 그 대강은, 즉, 국가 그것이 지배계급의 피지배계급에 대한 억압과 착취의 도구라는 사실은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국가가 없는 사회’ 그것은 당연히 무릇 사회주의자들의 이상(理想)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엥겔스도, 예컨대, 예의 저작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국가는 그리하여 영원한 옛날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 없이 지내던 사회들, 국가나 국가권력은 전혀 몰랐던 사회들이 있었다. 계급들로의 사회의 분열과 필연적으로 연결된 일정한 경제적 발전 단계에서 이 분열에 의해서 국가가 하나의 필연적인 것이 되었다. 우리는 지금, 이들 계급의 존재가, 더 이상 필연적인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생산의 적극적인 방해물로 되고 있는, 그러한 생산의 발전단계에 급속한 보조(步調)로 접근해가고 있다. 이들 계급은, 이전에 그것들이 불가피하게 발생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불가피하게 사멸할(fallen) 것이다. 계급이 소멸하는 것과 함께 국가도 불가피하게 사멸한다(fallen). 생산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연합에 기초하여 생산을 새로이 조직하는 사회는 모든 국가기구를 그것이 그때에 속해야 할 곳으로 옮길 것이다. 물레 및 청동 도끼와 나란히 골동품들의 박물관으로.11)

엥겔스가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는 바는, “계급이 사멸하는 것과 함께 국가도 불가피하게 사멸한다(fallen)”는 것이다.

 

1) 계급의 폐지

여기에서 “계급이 사멸한다”고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노동자계급이 혁명적 조치에 의해서 계급을 폐지함을 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혁명적 조치는, “다른 모든 사회적 진보와 마찬가지로, 계급의 존재가 정의, 평등 등에 모순된다는 통찰이 얻어졌다고 해서, 이들 계급을 폐지하겠다는 단순한 의지에 의해서 실행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일정한 새로운 경제적 조건들에 의해서 실행될 수 있는 것”이고, “그 실행을 위한 물질적 조건이 존재할 때에 비로소 가능해지고, 비로소 역사적 필연성으로 되는 것”인데,12) 엥겔스에 의하면, “이러한 지점에 지금 도달해 있다.”13)

아무튼 계급의 사멸이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조치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맑스와 엥겔스가, 예컨대, 일찍이 ≪공산당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언명하고 있는 데에서 명백하다.

공산주의자들의 당면 목적은 다른 모든 프롤레타리아 정당들의 그것과 동일하다.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으로의 형성, 부르주아지 지배의 전복,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

공산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소유 일반의 폐지(Abschaffung)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의 폐지이다.

그러나 현대의 부르주아적 사적소유는 계급대립에, 그리고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착취에 입각한 생산물의 생산 및 전유(專有)의 최후의 그리고 가장 완성된 표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단 하나의 표현, 즉 사적소유의 폐지(Aufhebung)로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14)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 권력을 장악하면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그럼으로써 계급을 폐지한다는 데에서는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에서 수많은 전거를 찾아낼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지면상 하나의 예만 더 인용하기로 하자. 엥겔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생산수단을 우선 국유재산으로 전화(轉化)시킨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는 프롤레타리아트로서의 자기 자신을 지양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계급차이와 계급대립을 지양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로서의 국가 또한 지양한다.15) (강조는, 엥겔스)

프롤레타리아트는 장악한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를 폐지, 그것들을 국유화함으로써 계급을 폐지하고, ‘국가로서의 국가’ 또한 지양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역사적으로 두 가지의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하나는, ‘국가의 사멸’, 혹은 ‘국가로서의 국가의 지양’에 관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계급의 폐지’에 관해서였다. ‘국가의 사멸’과 관련한 논쟁과 그 의의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보기로 하면, ‘계급의 폐지’의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사실은 혁명적 맑스주의와 기회주의·개량주의 간의 논쟁이었다. 즉, 맑스와 엥겔스의, 위에서 인용한 것과 같은 언명에도 불구하고, 제2 인터내셔날의 수많은 ‘맑스주의자들’, 기회주의자들이 계급의 폐지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조치임을 부정하거나 은폐하고 나섬으로써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논쟁이었다. 국가에 관한 우리의 입장·논의를 “왼쪽의 교조주의”니, “고색창연한 테제들”이니, “고색창연”하고 “시대착오적”인 “테제들”이니 하고 초들고 나서는 자들이 바로 그러한 기회주의자·개량주의자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2) 국가의 사멸

   ― 그리고 기회주의

앞에서 확인했던 국가의 문제를 그 ‘존재’라는 측면을 중심으로 가장 간단히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렇게 된다.

(1) 국가는 사회가 경제적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불가피하게 착취자와 피착취자라는 계급들로 분열되고 그 계급적 대립이 화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했다.

(2) 이들 계급은, 이전에 그것들이 불가피하게 발생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불가피하게 사멸할(fallen) 것이다. 혹은, 어떤 ‘비등점’에 이르면, 노동자계급은 계급을 폐지한다.

(3) 그리고 계급이 사멸하는 것과 함께 국가도 불가피하게 사멸한다. 혹은 노동자계급은 ‘국가로서의 국가’ 또한 지양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즉 맑스주의 국가학설에서 ‘국가의 사멸’ 혹은 ‘국가로서의 국가의 지양’은 결코 국가의 금명간(今明間)의 폐지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계급이 폐지됨에 따라, 즉 국가에 의한 억압을 필연적이게 했던 사회의 계급적 분열과 대립이 사라짐에 따라 국가가 불필요하게 되고, 그에 따라 국가가 “저절로 잠들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맑스주의 국가학설은 이렇게 말한다. ―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멸한다”고!

좀 더 자세하게 엥겔스의 말을 들어보자.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생산수단을 우선 국유재산으로 전화(轉化)시킨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는 프롤레타리아트로서의 자기 자신을 지양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계급차이와 계급대립을 지양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로서의 국가 또한 지양한다. 계급대립 속에서 운동하고 있는 지금까지의 사회는 국가를, 즉 그때그때의 착취계급의 자신의 외적인 생산조건들을 유지하기 위한, 따라서 특히 피착취계급을 현존 생산양식에 의해서 주어진 억압 조건들(노예제, 농노제 혹은 예농제, 임금노동) 속에 폭력적으로 억눌러두기 위한 조직을 필요로 했다. 국가는 전체 사회의 공식적 대표자, 즉 하나의 가시적인 단체로 그 사회를 통합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국가가 그러한 것이었던 것은 단지 그 자신이 그 시대에 전체 사회를 대표했던 그 계급의 국가였던 한에서였다. 즉, 고대에는 노예를 소유한 국가시민의 국가, 중세에는 봉건귀족의 국가, 우리 시대에는 부르주아지의 국가. 국가는 마침내 실제로 전체 사회의 대표자가 됨으로써 자기 자신을 불필요하게 만든다. 억압해두어야 할 사회계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자마자, 계급지배 및 지금까지의 생산의 무정부성에 기초한 개체생존을 위한 투쟁이 제거되자마자, 억압할 아무것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며, 특수한 억압력, 즉 국가를 필요하게 했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국가가 실제로 전체 사회의 대표자로서 취하는 최초의 행동 ― 사회의 이름으로 생산수단을 장악하는 것 ― 은 동시에 국가로서의 최후의 자립적 행동이다. 사회관계에 대한 국가권력의 간섭은 한 분야 한 분야에서 차례로 불필요하게 되고, 그러고 나서는 저절로 잠들게 된다. 인간들에 대한 지배 대신에 물건들에 대한 관리와 생산과정의 지휘가 나타난다.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멸(死滅)한다. … 국가는 오늘 내일에라도 폐지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무정부주의자들의 요구는 … 이 점에 비추어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16)

이렇게 국가는, 오늘 내일 사이에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필요 없어짐에 따라 잠들어간다, 혹은 사멸한다는 것이 맑스주의 국가론의 ‘국가 사멸론’으로서, “국가를 오늘 내일에라도 당장 폐지하자”는 무정부주의자들의 비과학적인 소부르주아 급진주의적 주장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런데 이 ‘국가 사멸론’은 ‘국가’ 그 자체가 무엇인가를 대중적·기회주의적으로 왜곡하면, 맑스주의를 기회주의적으로 끌어내릴 염려가 있고, 또 제1차 대전 후 많은 사회주의 정당들이 실제로 그렇게 끌어내렸다고 레닌은 비판하고 있다. 레닌의 비판을 들어보자.

놀랄 만큼 사상이 풍부한, 엥겔스의 이 고찰 가운데에서 오직 하나의 요점만이, 즉 맑스에 의하면 ― 국가의 ‘폐지’라고 하는 무정부주의 학설과는 달리 ― 국가는 ‘사멸한다’는 점만이 현대 사회주의 정당들의 사회주의 사상의 불가분의 부분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맑스주의를 그러한 범위로 가지치기하는 것은 맑스주의를 기회주의로 격하시키는 것을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해석’은 비약과 격동이 없는, 즉 혁명이 없는, 단지 완만하고 단조로우며 점진적인 변화라는 애매한 개념만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 현재의, 널리 퍼져 있는, 대중적인, 국가 ‘사멸’ 개념은 의문의 여지없이 혁명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애매모호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해석’은, 하지만, 맑스주의의 가장 조악(粗惡)한 왜곡이며, 오직 부르주아지에게만 유리하다. 이론적으로는, 그러한 ‘해석’은, 말하자면, 우리가 방금 전문(全文)을 인용한, 엥겔스의 ‘개괄적’ 고찰 속에 지적된 가장 중요한 사정들과 이유들을 경시한 데에 기초하고 있다.

첫째로, 이 고찰의 머리에서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로서의 국가를 폐지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깊이 생각하고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아예 무시되든가, 그렇지 않으면 본질적으로 엥겔스의 ‘헤겔주의적 약점’과 같은 무엇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엥겔스의: 인용자] 이 말들은 최대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하나, 즉 1871년의 빠리 꼬뮌의 경험을 간략히 표현하고 있다. … 실제로는, 엥겔스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부르주아 국가를 ‘폐지하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며, 반면에 국가 사멸에 관한 말들은 사회주의 혁명 후의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잔존물들을 언급하고 있다. 엥겔스에 의하면, 부르주아 국가는 ‘사멸하지’ 않고, 혁명 과정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서 ‘폐지되는’ 것이다. 이 혁명 이후에 사멸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가 혹은 준국가(準國家, semi-state)이다.17)

여기까지 인용하는 것만으로도 명백하다. 사멸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후의 ‘프롤레타리아 국가’ 혹은 ‘준국가’이며, 부르주아 국가는 ‘사멸하는’ 게 아니라, 혁명 과정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서 ‘폐지된다’는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골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부르주아 국가가 사멸한다는 듯이 ‘해석’하는 것은 바로 맑스주의를 기회주의로 격하시키는 것이라는 것이!

 

3) 무정부주의자들과 국가의 ‘폐지’

앞에서 우리는, 맑스주의가 ‘국가 사멸론’을 주장함에 반하여 무정부주의자들은 ‘국가 폐지론’을 주장한다고 말했고, 이때 사멸하는 국가는, ‘부르주아 국가’ 혹은 ‘국가로서의 국가’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국가’ 혹은 ‘준국가’임을 확인했다. 그에 비해서 무정부주의자들이 오늘 내일에라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국가’는 ‘국가 일반’이며, 따라서 그들의 사상 속에 ‘프롤레타리아 국가’ 혹은 ‘준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의 사상 속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사회주의를 고찰할 때에 그 의의와 오류를 자세히 논의하기로 하자.

그리고 여기에서는 무정부주의의 일반적 본질과 그 사회적·정치적 기능을 간단히 보기로 하자.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1901)라는 레닌의 테제를 그대로 옮김으로써!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

1. 무정부주의는, 그것이 존재해온 (바꾸닌 및 1866년의 인터내셔날 이후) 35-40년 동안 (쉬티르너[Stirner]를 포함하면, 훨씬 더 오랫동안), 착취를 반대하는 일반적인 상투어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산한 바가 없다.

이 공문구(空文句)들은 2000년 이상이나 유행해 왔다. 빠진 것은, (가) 착취의 원인에 대한 이해, (나) 사회주의로 귀결되는 사회 발전에 대한 이해, (다)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창조적 힘으로서의 계급투쟁에 대한 이해이다.

2. 착취의 원인에 대한 이해. 상품경제의 기초로서의 사적소유.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 무정부주의에는 [이러한 것들에 대한 이해가: 인용자] 아무것도 없다.

무정부주의는 뒤집어진 부르주아 개인주의이다. 모든 무정부주의적 세계관의 기초로서의 개인주의.

소소유제 및 토지에서의 소농경제에 대한 수호.

Keine Majorität.18)

정부의 통합하고 조직하는 힘의 否認

 

3. 사회의 발전 ― 대규모 생산의 역할 ― 사회주의로의 자본주의의 발전에 대한 몰이해.

 (무정부주의는 절망의 산물이다.

 불안정한 지식인이나 부랑자(浮浪者)의 심리상태이지,

 프롤레타리아의 그것이 아니다.)

4.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에 대한 몰이해.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정치에 대한 어리석은 부인(副因).

노동자들의 조직화 및 교육에 대한 몰이해.

일면적이고, 연계가 끊어진 수단들로 구성된 만병통치약들.

5. 라틴 국가들에서 한 때 지배적이었던 무정부주의는 현대 유럽 역사에서 어떤 기여를 했는가?

―학리(學理, doctrine), 혁명적 가르침, 혹은 이론의 전무(全無).

―노동자계급 운동의 파편화.

―혁명운동의 실험에서의 완전한 파산(1872년 푸르동주의, 1873년 바꾸닌주의).

― 정치를 부인한다는 구실하의 노동자계급의 부르주아 정치에의 종속.19)

 

5. 현대 ‘복지국가’와 신자유주의 국가

1) 현대 ‘복지국가’

한참 이 글을 작성하는 중에 참으로 기막힌 뉴스를 접했다. 국가기관을 대대적으로 동원한 부정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정상이요,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혹은 노동조건 개선 투쟁을 벌이는 것은 ‘용납할 수 없고, 책임을 물어야 할’ 비정상이라는 사고를 가진 박근혜 대통령 각하님께서 “‘특히 공공기관 노사가 만들어 놓은 이면합의를 놔두고서는 진정한 정상화는 불가능한 만큼 이면합의를 통해 과도한 복지혜택을 제공하는 관행은 이번에 철저히 뿌리 뽑아야 할 것’이라며 복지특혜 축소를 지시했다”20)는 것이다.

그것이 ‘공공기관’의 노동자들이건, 아니면 그냥 민간부문의 노동자들이건, 한국의 노동자들이 서유럽 대륙 국가들이나 북유럽 국가들의 노동자들이 누리고 있는 만큼의 ‘복지혜택’을 누리고 있다면, 저 여자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할까? ― 자못 궁금하기까지 하다.

물론 저들 국가들의 ‘복지제도’를 찬양하려는 게 아니다. 참으로 “과도한” 한국의 그것에 비하면 저들 국가들의 ‘복지제도’는 가히 ‘소양지차(霄壤之差)’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이긴 하지만, 그러한 복지제도를 가능하게 하는 그들 나라와, 그들 나라와 상품 및 자본의 교역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나라들 사이의 바람직스럽지 못한 관계도 관계이거니와 그 ‘복지제도’의 일반적 추세 역시 바람직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은, 바람직스러울 수 없고, 경향적으로 약화·파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복지국가’의 복지제도가 약화·파괴되고 있는 것은 사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본성, 혹은 그 축적의 일반적 법칙을 반영한, 극히 정상적인 추세이다. 그리고 서유럽 및 북유럽의 ‘복지국가’의 성립이야말로 극히 비정상적인 일대 사건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서유럽 및 북유럽에 성립된 현대 ‘복지국가’는, 1930년대의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에 의해서 격발되고, 쏘련에서의 성공적 사회주의 건설에 의해서 고취된 노동자계급의 혁명투쟁에 직면하여, 그 투쟁을 잠재워 그들 노동자들을 자본주의 체제 내로 포섭하기 위한, 그러니까 노동자계급의 혁명을 예방하기 위한 독점부르주아지의 일대 양보조치였고, 그러한 목적을 가진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특수 형태였다. 결국 현대 ‘복지국가’란, 노동자계급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영구화’하고자 하는 독점부르주아지의, 강요받은 국가형태인 것이다.

더구나 이 양보조치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비약적 성장이라는 조건하에서만 가능했고, 제2차 대전 후 자본주의적 생산의 비약적 성장은 제2차 대전에 의한 거대한 파괴·살육에 의해서 가능해진 것이었다.

그런데 저들 독점부르주아지의 노림이 적중하여 1950년대 중반 이후 노동자계급이 그 ‘복지제도’에 안주하게 되면서 혁명 지향성이 거세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특히 이른바 ‘진보적’·‘맑스주의적’ 지식인들까지를 하수인으로 동원하는 독점자본의 반공·반쏘 이데올로기 공세, 대중조작의 희생물로 전락했다.

게다가 1970년대 이후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생산과 축적은 더 이상 전후(戰後) 60년대까지와 같은 고성장일 수 없었다. 전후 복구기가 끝나면서 오히려 만성적인 과잉생산과, 불안정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그에 따라 자본 간, 국가 간 경쟁이 전례 없이 격화되었다.

노동자계급의 혁명 지향적 투쟁도 존재하지 않고, 자본주의적 생산의 비약적 성장도 불가능해졌을 뿐 아니라 경쟁전이 전례 없이 격화되어 있는 조건하에서, 더구나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붕괴·해체로 대반동이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 조건하에서 이른바 ‘복지국가’가, 아니, 복지제도가,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처럼, ‘개혁’이라는 이름하에 약화되고 파괴돼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사회에는 아직도 ‘복지국가’를 선전·설교하는 ‘진보적’ 지식인들, ‘진보적’ 단체들이 즐비하다! 단순한 소부르주아적 무지일까? 혹시 개중에 노동자계급운동을 거세시키려는 어떤 음모는 없는 것일까?

 

2) 신자유주의 국가

한편, 요즘엔 언제 그랬더냐는 식으로 잠잠하지만, 1990년대 초·중반에는 소위 ‘신자유주의 시대 (국민)국가 약화론’이라고나 해야 할 논의·주장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명색이 내로라하는 ‘진보적’ 지식인들, ‘진보적 학자들’ 사이에서.

GATT, 그러니까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의 ‘우루과이 라운드’의 타결로 WTO(세계무역기구) 체제가 성립되면서 국가 간 상품 및 자본의 신자유무역, 그 신자유 수출입이 확대·강화되는 것을 보면서 전개한 심오한 ‘학설’이었는데, 그야말로 국가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가장 천박한 이해에 기초한 진보적이기 이를 데 없는 논의·주장들이었다. 그들에 의하면, 상품 및 자본의 무역장벽이 낮아지는 것은 국가가 약화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시대 국가, 신자유주의 국가의 특징이다!

그러나 피착취계급에 대한 억압 기능에서 국가의 핵심적 본질을 보는 우리로서는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 국가, 신자유주의 국가의 약화가 아니라 그 파쇼적 억압의 강화를 경험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세계적으로 대체로 혁명 지향성은 잃었지만, 그리고 대체로 전투성도 잃었지만, 아무튼 노동자·인민 대중의 빈곤이 광범하게 확산되며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하여 여기저기에서 노동자·인민 대중의 투쟁이 끊임없이 벌어지면서, 최근 수년 이래의 일부 남부 유럽 국가들에서처럼 그것이 언제 혁명적 투쟁으로 발전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노동자·인민 대중에 대한 억압이 강화되지 않는다면, 즉, 국가 권력의 억압성·폭력성이 강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는 노동자·인민 대중의 빈곤의 확대·심화, 그리고 그에 따른 신자유주의 국가권력의 억압성·폭력성의 강화와 관련하여, 그것들을 갈수록 확대·심화시키고 강화시킬 수밖에 없는 주요한 원인으로서 최근 수십 년 동안 비약적으로 전개되어 왔고, 지금도 비약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과학·기술 혁명’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루지만, 신자유주의 국가 기능과 관련하여 현대 과학기술의 특이한 점 하나를 간단히 지적해보자.

자본주의 사회란 뭐니 뭐니 해도 상품경제 사회이고, 상품경제에서 상품을 사고판다는 것은 그 소유권, 즉 그 상품에 대한 단순한 사용수익권뿐 아니라 그 완전한 처분권까지를 양수(讓受)·양도(讓渡)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상품교환의 사실상 절대적인 법칙이다.

그런데, 현대 과학기술혁명의 대표적 성과 중의 하나인 ‘쏘프트웨어’. 예컨대, 마이크로쏘프트사의 ‘윈도우’나 ‘오피스’, 어도비사의 ‘포토샵’ 등을 보자. 여러분이 그것들을 구매했다고 치자. 그러면 여러분에게는 그것들을 ‘복사’·‘전송’ 등등의 방법으로 여러 사람과 ‘공유하지’ 못할 어떤 기술적 장애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렇게 ‘공유하면’, 어떻게 되는가? 필경 검찰에서 소환장이 날아오고, 벌금이 선고되고, 재수 옴 붙으면 감옥에 갇힐지도 모른다. 그렇게 신자유주의 국가가 억압해온다. 자본주의적 상품교환의 법칙을 전혀 범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국가의 ‘약화’다! 그리고 그 기초에는, 그렇게 비등(沸騰)하게 되는 데에는 더 이상 부르주아적 생산과 양립할 수 없는 고도의 생산력, 현대 과학·기술 혁명에 의한 생산력이 있다! <노사과연>


1) V. I. 레닌, ≪국가와 혁명≫, Lenin Collected Works, Vol. 25, p. 396.

2) F. 엥겔스, 같은 책, MEW, Bd. 21, S. 166. (김대웅 역, pp. 192-93.; 최인호 역, 김세균 감수, p. 189.)

3) 이 “일반적으로”의 원문은 “in der Regel”로서 “예외없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4) F. 엥겔스, 같은 책, MEW, Bd. 21, SS. 166-67. (김대웅 역, p. 193.; 최인호 역, 김세균 감수, p. 189.)

5) F. 엥겔스, 같은 책, MEW, Bd. 21, SS. 167. (김대웅 역, p. 194.; 최인호 역, 김세균 감수, p. 190.); 주의를 위하여 참고로 말하자면, “근대 대의제 국가들의 선거자격(Wahlzensus)에서도 그렇다”라는 언명은 역사적 사실을 인식하는 데에서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김대웅의 번역에는 이 문장이 누락되어 있다.

6) 같은 곳.

7) “주식회사들이 운송뿐 아니라 생산 자체까지도 …”라고 얘기하는 것은, 애초 주식회사가 개인의 자본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 철도 부설이나 운하의 건설 등 대규모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발생했던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8) 같은 곳.

9) K. 맑스·F.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MEW, Bd. 3, S. 46.

10)  F. 엥겔스, 같은 책, MEW, Bd. 21, SS. 168. (김대웅 역, pp. 194-95.; 최인호 역, 김세균 감수, p. 191.)

11) F. 엥겔스, 같은 책, MEW, Bd. 21, SS. 168. (김대웅 역, p. 195.; 최인호 역, 김세균 감수, p. 191.)

12) F.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의 변혁(“반(反) 뒤링론”)≫, MEW, Bd. 20, S. 262. (최인호 역,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의 변혁(반 뒤링)≫,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5권, p. 309.); F. 엥겔스,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MEW, Bd. 19, S. 224. (최인호 역,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5권, p. 470.)

13) F.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의 변혁(“반(反) 뒤링론”)≫, MEW, Bd. 20, S. 263. (최인호 역,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의 변혁(반 뒤링)≫,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5권, p. 310.); F. 엥겔스,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MEWW, Bd. 19, S. 225. (최인호 역,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5권, p. 471.)

14) MEW, Bd. 4, SS. 474-75. (최인호 역, “공산당 선언”,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1권, p. 413.)

15) F.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의 변혁(“반(反) 뒤링론”)≫, MEW, Bd. 20, S. 261. (최인호 역,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의 변혁(반 뒤링)≫,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5권, p. 308.);  F. 엥겔스,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MEW, Bd. 19, S. 223. (최인호 역,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5권, p. 469.)

16) F.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의 변혁(“반(反) 뒤링론”)≫, MEW, Bd. 20, SS. 261-62. (최인호 역,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의 변혁(반 뒤링)≫,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5권, pp. 308-09.);  F. 엥겔스,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MEW, Bd. 19, SS. 223-24. (최인호 역,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5권, pp. 469-70.)

17) V. I. 레닌, ≪국가와 혁명≫, Lenin Collected Works, Vol. 25, pp. 401-02.; 참고로, ‘semi-state’는 사람에 따라서는 ‘반국가(半國家)’로 번역하기도 한다.

18) ‘Keine Majorität’ = ‘어떤 다수결도 인정하지 않는다.’

19) V. I. 레닌,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 Lenin Collected Works, Vol. 5, pp. 327-28.

20) 이영섭 기자, “朴대통령 ‘공공노조, 개혁 방해하면 책임 물으라’”, ≪views&news≫, 2014. 2. 10.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107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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