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특집: 쏘련 사회주의에 대하여] 전 연방 공산당(볼), 고쓰쁠란, 그리고 1939-1953년 쏘련에서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에 대한 문제

 

비자이 싱(Vijay Singh)

번역: 김의진(회원)

 

* 이 글의 원제는 “The CPSU(B), Gosplan and the Question of the Transition to Communist Society in the Soviet Union 1939-1953”입니다. 이 논문은 International Centre for the Formation of the Modern Communist Doctrine의 주최로, 1996년 11월 8일-10일 모쓰끄바에서 열린, International Scientific-Practical Conference(주제: 현대 공산주의 운동에서의 계급 분석)에서 발표되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인도에서 발행되는 반년간지 Revolutionary Democracy, Vol. III, No. 1, April 1997에 게재된 것을 대본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원문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revolutionarydemocracy.org/rdv3n1/gosplan.htm>

 

 

맑스주의는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에서, 그리고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기 도중, 산업 노동자계급의 일차적인 역할을 승인한다. 맑스와 엥엘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충돌하는 모든 계급들 중에서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진정한 혁명적 계급이다. 프롤레타리아트를 제외한 계급들은 현대의 산업 사회에서 최종적으로 소멸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산업 사회와 떼놓을 수 없는 특출난 산물이다”라고 말했다. 블라지미르 레닌은 ≪위대한 시작≫에서 도시와 공장의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몰아내고 새로운 사회주의 정권을 창출하기 위해 근로대중과 피착취 인민을 지도할 수 있는 유일한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며 맑스주의적 입장을 피력했다. 사회주의는 생산 수단의 모든 사적 소유에 대한 폐절과 도농 격차의 폐지, 더 나아가 정신노동자와 육체노동자 사이에서 나타났던 간극의 폐지를 촉진하는 계급의 철폐를 필요로 한다. 레닌은 모든 ‘근로인민’이 이러한 역사적 과제들을 균등하게 맡을 수 있다는 논변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는 모든 ‘근로인민’이 사회주의 혁명의 과제를 추진할 수 있다는 주장이 공문구 내지 맑스주의 이전 사회주의자들의 공상에 불과하다고 조소했다. 계급을 폐지할 수 있는 역량은 오직 자본주의의 대규모 생산이라는 물질적 조건에서 성장하며, 이러한 과제를 추진할 만한 계급은 노동자들밖에 없었다. 맑스주의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정의에서, 도시 및 농촌의 소부르주아지와 관료, 정신노동자, 근로대중을 제외시킨다. 노동자계급의 정의를 확대하고 넓히기 위한 러시아 신(新)브레쥐네프주의의 시도들은 역사적으로 소부르주아지를 노동자계급의 범주에 포괄시키려 했던 나로드니끼의 시도들이 볼쉐비끼에 의해 지탄받은 것처럼 반드시 거부되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를 둘러싼 혼선은, 공산당의 성격과 구성,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사활, 사회주의하에서의 계급과 상품 제도의 철폐, 그리고 공산주의로의 이행에 파멸적인 영향을 수반한다.

 

맑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근로인민이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지도할 수 있다는 입장을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레닌은 ≪19세기 말 러시아에서의 농민 문제≫에서 사회주의가 ‘상품 경제의 폐지’를 의미한다고 단호하게 주장했으며, 교환이 남아 있는 한 ‘사회주의에 대한 어떤 논의도 무용지물’이라고 여겼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기 경제학과 정치학≫에서 계급이 철폐될 때까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잔존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사회주의하에서 계급의 철폐는 모두가 노동자로 변하는 과정에서 공장 노동자와 농민들 사이에서 격차의 폐절을 내포한다. 프롤레타리아 당이 ‘전 인민의 당’, 혹은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전 인민 국가’로 등치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쓰딸린 시기에서도 이러한 입장은 줄곧 고수되어 왔다. 쓰딸린은 집산화 이후 시기에 작성된 ≪헌법 초안에 대한 연설≫에서 쏘련이 사회주의 사회의 토대를 일찍이 성공적으로 구축했다고 보고했다. 그럼에도 그는 동시에 전 연방 공산당(볼쉐비끼) 제17차 당 대회 보고에서 보듯, 무계급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 미래의 과제로 여전히 남아 있다는 시각을 견지했다.

 

무계급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에 대한 전망과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점진적인 이행은 1939년 3월에 열린 전 연방 공산당(볼) 제18차 당 대회에서 핵심을 이룬 주제였다. 이는 18차 당 대회 회기 도중 쏘련 공산당 지도부의 연설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18차 당 대회 개회사에서 몰로또프는 쏘련에서 사회주의의 건설이 기본적으로 완수됐다고 말했으며, 향후의 시기는 공산주의로의 이행기에 해당된다고 주장했다. 쓰딸린은 18차 당 대회 보고에서 쏘련이 자본주의 주요 국가들의 공업 성장률과 생산 기술을 초월했다고 말하면서도, 풍족한 재원의 선결 조건으로서, 공산주의의 첫 번째 단계에서 그 다음 단계로의 이행에 있어 중요해질 수밖에 없었던 공산품의 1인당 소비량에서 이들 나라들을 여전히 뛰어넘지 못했다고 밝혔다. 쓰딸린은 쏘비에트 공산주의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쏘비에트 국가의 존속은 지속적으로 필요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자본주의적 포위가 사회주의 국가들에 의한 포위로 대체되지 않는 이상, 외세의 군사적 침략의 위험이 사그라들지 않는 이상 군사 기구와 형벌 기구, 정보 기구는 쏘련의 생존을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했다. 쏘비에트 국가는 가까운 미래에 사멸되지 않을지라도, 국내적 필요와 국제적 필요에 부응하여 변화할 것이었다. 공산주의에서 국가가 사멸될 것이라고 말했던 엥엘스의 제언에 대해 쓰딸린은 주요 국가들에서 공산주의의 승리가 이루어질 때에야 비로소 성사될 것임을 피력했고, 예측했다.

 

≪쏘비에트 연방 국민 경제의 발전을 위한 제3차 5개년 계획 보고≫에서 몰로또프는 신규 계획의 목표를 무계급 사회주의 사회의 완수와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점진적인 이행에 중점적으로 연관시켰다. 제2차 5개년 계획 도중 집산화는 쏘비에트 사회에서 최후의 착취계급으로 기능했던 부농의 기반을 경제적으로 일소시켰다. 꿀라크의 파멸은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에 종언을 고했으며, 집단 농장의 확립을 통해, 10월 혁명으로 창출됐던 국가 소유와 공존하게 된 생산 수단의 조합적 소유관계를 형성했다. 공산주의의 첫 번째 단계는 쏘련에서 일찍이 완수됐다. 제3차 5개년 계획은 완전한 공산주의의 확립을 지향했던 일대 진전으로 인식됐다. 몰로또프는 이 당시 쏘련에 존재했던 사회 내부의 계급들을 분석했다. 노동계급과 집단 농장 농민의 (새롭게 형성된 사회주의적 지식인 계층도 포함했다) 사회적 격차는 국영 기업소와 집단 농장의 소유관계에서 나타나는 성격의 차이점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잔존했다.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기에서 노동자계급은 지도적인 역할을 맡을 것이며, 집단 농장의 농민층도 적극적인 역할을 발휘할 것이다. 이러한 계급들의 선진적인 층위와 후진적인 층위 사이에서 나타나는 간극에 대해 언급하면서 몰로또프는 인구의 다수가 사회의 전반적인 이해와 연관을 맺고 있었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이익이 사적 이익보다 중시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민들 중 일부 층위들에서 개개의 집단 농장과 개인적 이해관계에 더욱 치중하는 경향을 보였던 것처럼, 국가로부터 이익을 강탈하려는 계급적 층위들이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장에서의 쓰따하노프 운동은 제2차 5개년 계획 당시 체계화된 노르마를 확립시켰고, 노동 생산성을 높였으며, 쏘련에 이전보다 더 나은 성취들을 가져다줬다.

 

니꼴라이 보즈네쎈쓰끼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은 제18차 당 대회 보고 연설에서 공산주의의 건설에 대한 강령의 현실화를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됐던 5대 기본 과제를 제시했다. 첫째, 쏘련이 가장 선진화된 자본주의 국가들을 경제적으로 상회할 때까지 생산력은 발달되어야 했다. 둘째, 노동 생산성은 쏘련이 필요에 기반한 분배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에 충분한 생산물들을 생산할 만큼의 수준으로 올라설 때까지 높아져야만 했다. 셋째, 도농 격차의 잔재들은 일소될 필요가 있었다. 넷째,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괴리를 없애기 위해 노동자들 자신이 기술직과 전문직에 온전히 종사할 때까지 노동자계급의 문화적, 기술적 수준은 지속적으로 상승해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회주의 국가는 자본주의의 포위라는 조건하에서 공산주의를 건설할 때 새로운 형태들을 발전시켜야 했다. 보즈네쎈쓰끼가 공산주의로의 이행기에 사회와 국가에서 요구됐던 변화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면서도, 필수 불가결하며 급진적으로 전개되어야 했던 농업에서의 생산관계의 재구축에 관한 문제를 검토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전 연방 공산당(볼) 제17차 당 대회에서 쓰딸린은 집단적 소유에 기초한 집단 농장으로부터 물자의 풍족한 생산을 위한 초석으로 기능할 예정이었던, 최신 기술과 사회적 소유에 기반한 꼬뮌으로 이행할 필요성을 줄기차게 강조했다. 보즈네쎈쓰끼는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완수하는 문제와 공산주의로의 이행, 더 나아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을 따라잡고 뛰어넘는 과제가 제3차 5개년 계획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다.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20여 년이 쏘련에 역사적으로 요구됐다면,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기간은 그보다도 줄어들 것으로 예측됐다.

 

몰로또프는 제18차 당 대회 연설의 말미에서 냉철한 견해를 표출했다. 자본주의 주요 국가들을 뛰어넘는 전망이 확립됐음에도 불구하고, 쏘비에트 경제의 결점들에 촉각을 기울이는 과제도 역시 중요했다. 쏘비에트 러시아에서 근로대중의 입지가 상승했고, 제3차 5개년 계획 도중에 더욱 진척될 터였으며, 생산 기술의 측면에서 일찍이 서방 국가들을 추월했다고 해도, 1인당 공업 생산량에서 낙후되어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일은 여전히 중차대한 과제였다.

 

​18차 당 대회에서 공표됐던 구상들은 광범위한 파급력을 지녔다. 이는 당 강령의 개정이 긴박한 문제였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1919년 3월 이래로 효력을 공식적으로 발휘해 왔던 기존의 강령은 혁명 이후 1년 반 만에 제8차 당 대회에서 채택됐다. 새 강령은 전시 공산주의와 신경제 정책, 집산화와 산업화 시기의 노선들을 검토하고, 더 나아가 ‘완전한 사회주의’와 ‘완전한 공산주의’를 향한 예정된 노선을 염두에 둘 필요성을 규명할 터였다. 1919년의 강령은 생산 수단의 쏘비에트 공화국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소유로의 이전에 대하여 올바르게 요구했다. 강령은 또한 농업 부문에서 사회화된 대규모 농업을 현실화하기 위해 꼬뮌형 농장의 확립을 촉구했다. 계급의 폐지에 대한 요구는 계급으로서 농민들의 소멸을 명실상부하게 가리켰다. 새 강령은 집단 농장의 집단적 소유에서 전(全) 사회의 완전한 사회적 소유로의 이관에 관한 세부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었다. 제18차 당 대회는 예정된 세 번째 당 강령 초안 작성에 관해 책임권을 부여받은 27인 위원회를 구성했다. 27인 위원회는 쓰딸린과 몰로또프, 까가노비치, 쥐다노프, 베리야, 보즈네쎈쓰끼, 븨쉰쓰끼, 깔리닌, 말렌꼬프, 마누일쓰끼, 흐루쇼프, 미꼬얀, 뽀쓰뻴로프를 포함했다.

 

공산주의의 건설을 향한 이행은 새로운 사회의 물질적, 기술적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목적에 따른 쏘비에트 계획 경제의 장기적인 재구축을 의미하기도 했다. 쏘련 사회과학원의 회원들, 그리고 고쓰쁠란[국가계획위원회]의 관계자들과 담화를 나눈 후 보즈네쎈쓰끼는 쏘비에트 경제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계된 문제들, 그중에서도 경제 부문의 에너지 기반의 확장에 대한 안건을 주된 의제로 상정했던 국가계획위원회 확대회의를 1939년 7월에 소집했다. 고쓰쁠란은 앙가르쓰크 수력 발전소의 건설과 까쓰피해의 해수면을 높이고 볼가강과 쏘련 북부의 강들을 연결하는 과제들에 대한 구상을 실행할 것을 결의했다. 이러한 발전상은 전기화가 공산주의 사회의 관문을 열어젖힐 것이라는 레닌의 관점을 상기시킨다. 공산주의는 레닌에 의하면 쏘비에트 권력 더하기 전국의 전기화로 정식화됐다. 레닌은 일찍이 고엘로[러시아전기화국가위원회]에서 10-15년의 기간보다 넘게 진행될 장기적인 계획을 명확하게 구상할 필요성에 대해 거론했다. 장기적인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고쓰쁠란에 유용한 인재들의 층위를 강화하는 과제와 더불어, 쏘련 과학원의 회원들을 포함한 일군의 학자들은 고쓰쁠란의 주재하에서 대략적인 계획을 예비하기 위해 과학-기술 전문가 회의의 활동에 관여했다. 그로부터 1년 반도 채 지나지 않아 고쓰쁠란은 제3차 5개년 계획의 한도에서 탈피한 쟁점들을 부각시켰던, 장기적인 계획에 대한 구상을 준비했다. 보즈네쎈쓰끼는 1940년 9월 고쓰쁠란 회의에서 낭독됐던 장기 계획에 대한 초안을 쓰딸린과 몰로또프에게 제시했다. 무계급 사회주의 사회와 공산주의의 생산력을 구축하기 위해 구상된 장기적인 경제 계획의 핵심을 이룬 문제들은 철금속과 비철금속 제조업의 건설과 철도 운송업의 완전한 재구축, 꾸이븨쉐프 수력 발전소와 쏠리깜쓰크 수력 발전소, 앙가르쓰크 수력 발전소의 건설, 바이깔-아무르 철도 노선의 건설, 쏘련 북부에서 석유 산업과 철강 공업적 토대의 창조, 그리고 전국 각지의 발전에 있었다. 메모에 따르면 보즈네쎈쓰끼는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1941년 말엽 이내로 상정될 국민 경제 15개년 계획을 고쓰쁠란이 구체화할 수 있도록 허가할 것을 요청했다.

 

장기적인 전망을 갖춘 계획으로 밀접하게 통합됐던 고쓰쁠란의 예비 계획은 에너지 및 천연자원의 산출지와 인접한 장소들에 산업 단지들을 새로이 건설함으로써 생산력의 보다 더 합목적적인 활용이 연계된 지역별 계획에 색다른 방식을 제공했고, 상품의 제조와 설계 과정의 다양한 단계에 부응하여 노동의 경제적 활용을 촉진했다. 보즈네쎈쓰끼는 쏘비에트 전국의 모든 경제 구역(экономический район)들에서 국가 계획의 완수 여부를 검증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고쓰쁠란 감독 기구의 창설을 허가했고, 경제 구역들 내부의 산업 단지들에 대한 개발을 용인했다. 고쓰쁠란의 감독관들은 각 경제 구역들에서 산업용 연료 기지들의 구축과 더불어, 지역마다 전력 생산을 사수하고, 교통망의 비(非)합리적인 혼란상을 일소하며, 식량의 공급망을 조직하고, 경제적 재원들을 활용하는 과제들과 밀접하게 연관됐던 제3차 5개년 계획의 완수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쏘비에트 국가의 다양한 지역들에서 경제의 발전에 부응하기 위해 고쓰쁠란 산하의 기관들 내부에는 특별 부처들이 들어섰다.

 

고쓰쁠란은 1941년 2월 7일을 맞아 5달여 전 보즈네쎈쓰끼에 의해 쓰딸린과 몰로또프에게 전달됐던 15개년 경제 계획에 대한 안건을 구체적으로 추진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아냈다. 전 연방 공산당(볼) 중앙위원회와 쏘브나르꼼[인민위원평의회]은 선철과 강철, 석유, 전력, 설비와 생산 수단들, 기타 필수 품목들의 1인당 생산량에서 자본주의 국가들을 추월하기 위해 고쓰쁠란의 장기 계획에 대한 전망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이는 쏘련에서 과학 및 기술의 독자적인 발전을 필요로 했다. 최신 기술을 통해 국가의 천연자원이 생산의 조직화로 진전하는 방향으로 활용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더 나아가 국민 경제의 기초적인 부문들과 경제 구역들, 생산의 속도와 규모의 발달을 위한 예비적인 절차를 필요로 했다. 전국적인 계획은 사회적, 정치적 관계들과 사회적 차원의 책무들, 노동자들과 집단 농장 노동자들의 숙련도를 기술직 및 전문직 노동자들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방법들상에서 나타난 변화들을 규명해야 했다(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기 경제학과 정치학≫에서의 레닌의 제언대로 계급의 철폐와 산업 노동자계급, 지식인, 그리고 집단 농장 농민들 사이에서 잔존했던 간극의 소멸을 촉진시킬 것이었다).

 

장기 계획에 대한 사업은 1941년 1월과 3월, 그리고 같은 해 4월과 6월 사이에 2단계에 걸쳐 진행됐다. 고쓰쁠란의 기구들은 계획된 절차에 따라 1943-1957년 기본 계획의 원형을 준비했다. 이러한 작업은 사회주의 경제의 발달에 대한 전망과 향후 15년 동안 공산주의적 경제로의 이행 과정에서 부각됐던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한 최초의 대규모 시도였다. 레닌의 포고령에 따른 국가계획위원회의 창설 20주년을 맞아 ≪쁘라브다≫는 1941년 2월 22일에 15개년 신규 장기 계획을 광범위하게 공론화시켰던 일련의 기사들을 개진했다.

 

나치의 침공은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경제적 기반을 예비했던 프로젝트들에 크나큰 지장을 야기했다. 그러나 전쟁[제2차 세계 대전]의 종결은 놀랍게도 전전(戰前)의 계획과 과제들을 다시 한번 부활시켰다. 보즈네쎈쓰끼에 의해 1946년 3월 최고 쏘비에트에 상정됐던 ≪1946-1950년 5개년 계획 보고≫와 ≪5개년 계획의 법칙≫은 전 연방 공산당(볼) 제18차 당 대회에서 무계급 사회주의 사회와 공산주의로의 점차적인 이행을 위해 개괄적으로 논의됐던 노선의 부활을 상징했다. 보즈네쎈쓰끼의 계획은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을 1인당 산업 생산량에서 경제적으로 따라잡고 추월하기 위해 설계됐던 전쟁 이전 당시 기획의 연장선상에 위치하여 있는 것으로 간주됐다. 쓰딸린은 1946년 9월에 쏘련에서 일국 공산주의의 건설에 대한 가능성을 재차 표명했다. 말렌꼬프는 1년 후 1947년 [폴란드의] 츠클라스카 포렘바에서 열린 코민포름 창립 대회에서 기존 당 강령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새로운 강령으로 교체되어야 했던 만큼, 전 연방 공산당(볼) 중앙위원회가 당 강령에 대한 준비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러한 발전상과 궤를 같이하여 장기적인 경제 계획을 구상하기 위해 재개된 시도는 공산주의의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에 초점을 뒀다. 보즈네쎈쓰끼는 1947년 중엽 중앙위원회에 장기 계획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몇 가지 논거들을 들며, 고쓰쁠란의 장기 계획이 필연적으로 실시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피력했다. 첫째, 고쓰쁠란의 장기 계획은 전 연방 공산당(볼)의 신규 강령은 물론 강령적 토대를 바탕으로 구상될 견고한 계획을 추진하기 위한 사전 작업과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있었다. 둘째, 생산력을 확대시키는 과제와 대규모 신축 공사 프로젝트들(철도, 수력 발전소, 철강 공장)은 당대에 실시됐던 5개년 계획의 한도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즈네쎈쓰끼는 1인당 생산량에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을 추월하기 위해 전쟁 이전에 구상됐던 기본 계획의 목표들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면서, 쏘련에서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위한 20개년 계획을 동시에 제시했다. 쓰딸린은, 당 중앙위원회와 장관평의회의 결정서 초안에 대해 지지를 표명하고, 1948년 1월 15일까지 고쓰쁠란에 20개년 기본 계획의 제출 권한을 부여할 것을 요구받았다. 이러한 요청은 1947년 8월 6일에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국민 경제 기본 계획의 초안을 작성하기 위한 활동의 규모는, 경제 부문의 감독관들과 장관급 부서 산하의 기술자들, 그리고 학계 전문가들의 참여를 망라했던 계획의 다양한 측면들을 명확하게 규명하기 위해 고쓰쁠란 의장의 관할로 80개의 소(小) 위원회들이 개설됐다는 사실에서 명실상부하게 판별할 수 있다. 고쓰쁠란은 1947년 가을 쏘련 과학원 경제연구소의 체계를 재점검했고, 쏘비에트 경제의 문제들을 향해 초점을 돌림으로써 운영 구조를 수정했다. 1948년에 고쓰쁠란과 쏘련 과학원, 지역 당 기구와 쏘비에트 조직들은 국가적 경제 구역의 생산력을 점검하기 위해 잇따른 회의들을 개최했으며, 북동부 지역과 중앙 흑토 지대, 꾸즈바쓰, 까자흐스딴, 시베리아 동부, 극동 일대로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장기 계획의 기본 틀은 국민 경제의 다양한 부문들과 쏘련의 상이한 경제 구역들을 대상으로 이와 같은 준비 작업들에 기초하여 정식화됐다. 1951-1970년 기본 계획 초안에 대한 보고는 필수적인 수지 계산과 전 연방 공산당(볼) 중앙위원회, 그리고 쏘련 정부에 제출됐던 기타 재원들의 목록을 바탕으로 준비됐다. 보즈네쎈쓰끼가 감독했던 고쓰쁠란 산하의 특별위원회는 1948년 9월까지 국가 계획에 대한 예비 테제들을 심사했다.

 

그러나 20개년 기본 계획은 비록 혈기 왕성한 시작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로의 이행에 대한 논제가 여전히 전 연방 공산당(볼)의 핵심적인 문제로 간주됐다고 해도 온전하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20개년 계획이 미완에 그친 이유는 사회주의 경제의 근본적인 뿌리를 송두리째 뒤엎는 수준으로 쏘비에트 경제에 상품-화폐 관계를 활용하고자 했던 보즈네쎈쓰끼 고쓰쁠란 의장의 개입이 주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기 작가인 V. V. 꼴로또프의 노력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공산주의로의 이행에 대한 보즈네쎈쓰끼의 관점은 상당히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20개년 계획의 구체화는 공산주의 사회의 기반을 구축하는 과제와 그에 대한 보즈네쎈쓰끼의 관점이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보즈네쎈쓰끼는 공산주의의 확립에 대한 법칙들과,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어떻게 맞물릴지 규명하는 과제를 중요하게 인식했다. 고쓰쁠란 관계자들과의 마지막 회의에서 그는 각각의 사회 구성체가 저마다의 경제 법칙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서로 다른 사회 구성체를 움직이는 법칙들과, 특정한 사회 구성체에 한하여 작동하는 법칙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공산주의적 생산관계하에서도 생산관계와 생산력 사이에 나타날 수 있는 모순을 해명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을 알리는 과제는 필수 불가결한 과제이다. 이는 또한 1951년 11월 경제학자들과의 토론에 대한 쓰딸린의 견해에서 제기됐던 근본적인 문제였다.

 

공산주의 건설의 기본 계획이 비록 빛을 발하지 못했다고 해도, 전전(戰前) 당시 고쓰쁠란의 업무를 바탕으로 추진됐으며, 전기화와 기계화, 자동화, 화학 공업의 성장과 결부됐던 일련의 프로젝트들은 쏘련의 생산력을 확대하기 위해 설계됐고 계획됐다. 국민 경제 전(全) 부문의 전기화는 철강 및 비철강 금속 공업에서 전기화학과 전기야금학의 성장은 물론, 알루미늄과 마그네슘, 그리고 이들 광물들을 이용한 합금업의 고도화를 통해 현실화될 것으로 여겨졌다. 철도 운송의 전기화는 연료와 철도 기관차들을 운용하는 과정에서 바람직한 노선으로 간주됐다. 농업에서 전기는 목축과 탈곡, 경작의 기계화에 광범위하게 활용될 것이었다. 쏘련 공산당 제19차 당 대회의 지침들은 1951년과 1955년 사이에 전력의 증산에 약 80%를 책정했다. 경제의 전기화는 당대에 제시됐던 담론들의 핵심적인 요소였다. 공산주의의 건설을 위한 방대한 규모의 사업들은, 2차 세계 대전 이전에 쏘련에서 생산됐던 전체 전력의 절반이 넘는, 연간 200억 킬로와트시(kWh)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로 설계된 꾸이븨쉐프 수력 발전소와 쓰딸린그라드 수력 발전소의 건설을 포함했다.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임박한 과정에서 생산관계에 필수적으로 요구됐던 변화들에 대한 문제는 쓰딸린의 마지막 저작에서 개괄적으로 다뤄졌다. 확장된 규모의 재생산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전에 비해 빠른 속도로 생산 수단에 대한 생산의 강화를 필요로 했던 사회적 생산의 지속적인 확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쓰딸린은 생산관계 역시 생산력의 성장에 맞게 조응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집단 농장의 집단적 소유와 상품의 유통과 같은 요인들은 일찍부터 국민 경제 전반, 특히 농업 부문에 대한 정부 차원의 계획을 전면화하는 과정에서 장애를 야기했던 만큼 생산력의 강력한 성장에 훼방을 놓고 있었다. 이러한 모순을 없애기 위해서는 집단 농장의 집단적 소유를 점차적으로 공적 소유로 변화시키고, 상품의 유통을 대체하여 생산물의 교환을 점진적으로 도입하는 방편이 절실하게 요구됐다.

 

공산주의를 향한 이행에 걸맞는 생산력의 발전과, 생산관계의 재편을 위한 강령이 쓰딸린 사후에 폐기됐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흐루쇼프 하에서 생산 수단의 생산을 이전보다 빠르게 진전시키는 문제는 더 이상 중대한 요소가 아니었다. 상품의 유통을 생산물의 교환으로 대체하기 위한 전망은 폐기됐다. ‘공산주의 건설’에 대한 새로운 강령은 상품-화폐 관계의 전면화를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집단적 소유와 집단 농장, 상품의 유통은 없어지지 않고 지속될 터였다. 흐루쇼프 이래로 쏘련 공산당은 사회주의하에서 계급들이 철폐되어야 하며, 공장 노동자와 농민의 차이와 도농 격차,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간극이 일소되어야 한다는 레닌주의적 이론으로부터 스스로를 괴리시켰다.

 

전 연방 공산당(볼)의 역사는, 만약 구쏘련에서 진정한 공산당이 건설되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의에 대한 계급적 접근법 문제를, 그리고 맑스-레닌주의적 접근법을 방어할 필요성을 명확히 하는 것이 긴요함을 확인시켜 준다. 오직 이러한 기초 위에서만,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건설되는 것이 가능한데, 그것은 공산주의 사회 건설로의 도정에 있는 사회주의하에서 계급, 그리고 상품 생산 및 교환의 폐지를 위한 결정적인 전제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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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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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 Kozyachenko, “Krupnyi deyatel sotsialisticheskogo planirovaniya”, Planovoe Khozyaistvo, No. 10-12,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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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 Rubinstein, O sozdannii material’no-tekhnichesko bazy Kommunizma, Moscow,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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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 A. Voznesensky, Izbrannye proizvedeniya 1931-1947, Moscow,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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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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