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특집: 쏘련 사회주의에 대하여] 쓰라린 패배를 거울삼아 영웅적 투쟁의 승리로 나아가자!(하)

―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를 읽고

 

김용화 | 편집위원

 

* 바만 아자드,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사회주의 국가 쏘련을 해체시킨 요인들≫(제3판), 채만수 역, 노사과연, 2009.

 

 

 

들어가며

― “쓰라린 패배는 얼마나 맛보는 거야?!”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 이 책의 내용을 발췌ㆍ요약하고 있는 글을 함께 공유하며 글쓰기를 지켜보던 20대 초반에 한 청년, 정확히는 작은 아들이 나에게 묻는 말이었다. 말의 표현이 재미있는 듯하여 순간 웃음이 터졌지만, 우리 노동자계급의 처지가 여전히 힘겹고, 후퇴와 패배를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며 가슴이 먹먹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이 청년에게는 아마도 소용이 없을지도 모를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청년도 가열찬 투쟁의 대열에 함께할 때에 패배는 끝나는 것이다!”

 

이 청년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산자로 발 딛고 서 있는 대다수의 청년 인민들처럼 생존을 위해 취직이라는 정글 속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실업(생존권 위협)이라는 좌절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저들은 실업에 놓여 있는 젊은이들의 우울증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수치를 내기도 하면서 청년 실업 지원금을 주기도 한다. 그 심각한 우울증의 수치마저도 자본주의 사회라서 전반적으로 만연할 수밖에 없는 경제적 빈곤에서 발생하는 대다수 노동자들의 우울증의 일부 중 일부일 것이라는 것을 알기나 할까 싶다. 또한 청년 실업 지원금의 본질은 저들의 과잉생산되어 있는 상품들을 조금이라도 더 소비되게 하려는 심사로 던져 주는 복지라는 허울을 둘러쓴 맛뵈기보다도 적은 비용이다. 이 돈으로는 문화생활은커녕 교통비, 통신비, 하루 한 끼의 밥값 정도 해결하기에도 버겁다는 것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명목상의 물가상승률을 보아도 명백히 알 수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의 복지라는 것은 허울을 둘러쓴 정책으로 표상되는 것이며, 허울뿐인 복지 정책으로라도 ‘국민’을 위한다는 시늉을 내야만 최소한의 경제생활도 보장받지 못하고 막다른 골목에 처한 인민들의 폭동을 방지할 수 있다. 바로 이런 효과가 어쩌면 저들의 더 큰 속내일 것이다.

 

알다시피 고도로 발달한 과학 기술에 기초한 인공지능(AI)ㆍ무인 자동화 생산의 확대로 인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수의 청년들은 노동력을 팔아 임금 노예가 되기도 전에 노동자로서의 용도 폐기 대상으로 예정되게 된다. 다행히 일부의 청년들은 우여곡절 끝에 기업에 취직할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곧바로 임금 노예로서 굴종과 착취의 현실에 놓여진다.

 

이뿐이겠는가! 한국 사회만 보더라도, 자본주의에 내재된 끝없는 이윤 추구와 경쟁 씨스템, 무정부적 생산 때문에, 주기적인 경제 위기(현 시기에는 만성적인 침체와 더불어 주기적인 경제 위기)를 겪고 있고, 만연한 청년 실업뿐만 아니라, 기존 노동자들 또한 살인적인 해고 위협에, 임금 삭감과 노동 조건 악화에 내몰리며, 생활고를 겪고 있다. 저들 또한 제어할 수 없는 경쟁 속에서 이윤을 고수하여 지배계급으로 살아남기 위해 신규 채용은 고사하고 보다 더 노골적이면서도 전면적인 정리 해고를 감행했고, 또 더 많이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임감 삭감, 더 열악한 노동 조건, 더 강도 높은 노동을 우리에게 강요했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가 원흉이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는 노동자계급이 안식할 수 있는 곳은 어느 한 구석조차도 없다고 보면 된다. 그러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처지를 직시하며 억압과 착취만이 있는 이 자본주의 사회를 혁명으로써 폐지하고 노동자 국가를 만들지 않고서는, 이 굴종과 생존 위협의 쇠사슬을 끊을 수 있는 해결 방법은 결코 없다. 그러므로 ‘나의 청년’ 또한 가열찬 투쟁의 대열에 빠르게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이 청년을 포함한 노동자계급과 근로인민들이, 맑스-엥엘스-레닌의 혁명적 이론이 전제가 된 ‘영웅적 투쟁’의 실천으로 보다 광범하게 하루빨리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굴뚝같다. 하지만 이것은 마음처럼 당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이 대열로 그들을 견인하려면, 맑스-엥엘스-레닌의 혁명적 이론을 정통으로 견지하고 있는 우리 노동사회과학연구소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면 노사과연은 수십 년째 노동자계급적 관점에서 실천 투쟁과 더불어 구체적이고 정확한 정세 파악을 통해 통철한 과학적 이론 발전을 해 왔음은 물론이고, 이에 따른 서적도 수십 권 발간하며, 기회주의ㆍ사이비적인 이론에 흔들림 없이 튼튼한 초석으로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확언은 곧 맑스-엥엘스-레닌의 사상을 기초로 혁명적 이론의 학습을 통하여 혁명적 투쟁 실천으로써 노동자계급과 근로인민, 특히 미래의 힘인 청년 등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다짐의 역설(力說)이기도 하다.

 

인류 역사상 실업이 없었던 사회가 존재했다고 하면 믿을 것인가? 더 정확히 말해서 공동의 풍요로운 삶의 사회를 위해서 인간의 본성인 노동을 하고, 또 누구나 다 노동할 권리가 실행이 되었던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 속에 살면서, 그런 사회를 상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 각자의 자질을 살려 적성에 맞는 노동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며, 생존형 일자리에 취직도 어렵고, 전세금, 주택구입비, 학자금, 각종 대출금에 주거관리비, 식료품값, 의료비, 교통과 통신비, 문화생활, 각종 세금 등등 그리고 정리 해고의 위협, 3D업에 종사를 하면서도 최저시급, 혹은 최저시급에도 못 미치는 임금으로는 먹고사는 문제 자체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던 사회를 머릿속에 담을 수조차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착취와 억압을 당하는 것까지 당연한 숙명으로 받아들이면 절대로 안 된다.

 

최첨단의 생산 시설과 각종 기계의 자동화로 인해 전 세계 곳곳에 물품이며 식품이 넘쳐나는 현 상황에서, 특히 이를 다 만들어 내는 당사자인 노동자들은 왜 이렇게 힘든 것이 당연한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건가!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무산자인 노동자계급은 생산 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부르주아 계급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그들에게 받는 임금으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필연적으로 우연히 임노동의 관계로 만나는 것이기에 억압과 착취의 관계가 개개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위치 지워진다. 그러기에 자본의 사회에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권리를 부르주아 계급과 그에 봉사자인 국가에게 억압당하면서, 인간으로서의 필수 조건인 소중한 노동은, 사회와 개인을 풍요롭게 하는 물적 생산, 사용가치만을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닌, 교환가치 즉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이윤을 창출하는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 낭비되고 착취된다. 이렇듯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부르주아 지배계급만의 이윤을 위한 무정부적 생산은 인간의 노동을 낭비하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지구상의 소중한 천연자원 낭비도 동반하면서 온난화 현상 등으로 생태계에 재앙을 일으키고, 지구의 생명 자체를 위협에 빠뜨리는 주범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부르주아 계급의 이윤을 위해 인간의 노동과 자원들이 무차별적으로 낭비되지 않고, 계획적 생산으로 인간의 노동력이 공동의 사회와 인민 자신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노동으로 진행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교육, 교통, 의료, 주택 등등의 무료 써비스가 제공된 진정한 자유의 사회는 있었다. 이 또한 더 정확히 말해 누구인가가 돈이 많아서 선심을 쓴 배려가 무료 써비스로 가능했던 현상들이 아니고,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노동자 정부와 근로인민들이 함께 만들었던 사회가 사실적으로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사회로 똑같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자는 것이 아니라는 걸 다 알거라 여긴다. 다만 어떻게 해서 그 사회가 존재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인류 발전의 도약에 보다 더 든든한 시초가 될 수 있었던 그 소중했던 사회를 왜 지켜내지 못할 수밖에 없었는지? 노동자계급 관점에서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해서 노동 해방의 길에 튼튼한 초석으로 삼자는 것이다.

 

* 아래는 이 책의 주요 내용을 발췌ㆍ요약한 것이며, 모든 강조는 본문을 발췌ㆍ요약한 필자의 것이다.

 

 

 

제4부: 사회주의의 쇄신으로부터 해체로

 

1. 변혁의 초기 단계

 

안드로뽀프 서기장, 쏘련의 경제 조직을 전반적으로 점검

장기간에 걸쳐서 형성되었고, 1970년대에는 이미 분명히 눈에 보이게 된 위기의 근거들은 1980년대에 들어와 마침내 쏘비에트의 지도부로 하여금 문제와 정면으로 대결하여 현실적인 해결 방법을 찾도록 강제하였다. 1982년 11월 12일에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유리 안드로뽀프를 당의 서기장으로 선출한 것이 그러한 접근의 시작이었다. 안드로뽀프는, 경제 효율의 주요한 지표인 노동생산성은 우리가 만족할 수 없는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경제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브레쥐네프의 유명한 말을 즐겨 인용하면서도 이를 성취하기 위한 실천은 거의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는 경영지도부가 아직 많다고 하면서 그는 쏘련의 경제 조직을 전반적으로 점검하도록 요구했다.

 

안드로뽀프는 사회주의 체제의 발목을 잡고 그것을 약화시키고 있는 사회적 문제들의 근본 원인이 노동에 대한 물질적인 동기 부여를 없애버린 소득의 평준화에 있음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임금의 평준화가 사회주의라는 인도적 조직에 기생적 현상을 발생ㆍ성장시켰다고 경고하면서 그는 각자의 노동에 의한 공헌을 정확히 평가하지 않은 채, 공산주의적 분배 형태를 향해서 돌진하려고 하는 어떠한 시도도 필연적으로 불로소득자나 이른바 떠돌이, 빈둥거리는 자, 게으름뱅이, 불량 노동자 등, 사실상 사회의 식객으로서 양심적으로 일하는 다수 사람들의 부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낳게 된다고 강조했다.

 

안드로뽀프는 생산에서 최신 기술을 응용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낮은 수준의 노동생산성을 비난하면서 그는, 공업에서만도 40%에 이르는, 기계화되어 있지 않은 수작업 비율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논거하에 안드로뽀프는, 쏘련이 공산주의의 최고 단계에 접근한 정도에 대한, 파장이 일어날 수 있는 과장을 경고했다. 그리고 강조했다. 우리는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냉정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무 성급히 달리면 실행 불가능한 과제를 제기하게 된다. 달성된 것에 만족해 버리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하지 못하게 된다. 현실적인 움직임 속에서 그 모든 잠재력과 필요를 놓치지 않고 우리 사회를 보는 것 ― 그것이 지금 필요하다.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문제 지적

안드로뽀프는 장기간 무시되어 온 몇 가지 중요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문제를 지적했다. 전체 인민의 국가라고 하는 개념을 지지하면서도 그는 사회주의 확립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고 지적했으며, 최종적으로 공산주의적인 자치로 가는 정치적 발전의 길을 개척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독재라고 강조했다. 안드로뽀프는 제국주의에 의한 심리전을 위시한 많은 요인 때문에 쏘비에트 민주주의는 성장하는 데에 계속 어려움을 겪었고, 또한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솔직히 선언하면서 그 개선을 위해서는 관료주의적인 조직 과잉이나 형식주의 및 대중의 독창성을 꺾거나 잠식하고, 근로인민의 창조적인 사고나 약동적인 행동을 구속하는 모든 것을 일소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안드로뽀프는 사회주의는 모든 모순이나 분쟁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사고를 극단적으로 단순하고 정치적으로 순진하다고 규정하면서, 쏘비에트 사회는 모순도 가지고 있고, 곤란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사회주의 건설은 집권하고 있는 공산당의 정책이 강고한 과학적 기반에 의거하고 있어야만 성공할 수 있으며, 맑스-레닌주의의 과학이나 그 창조적 발전의 역할에 대한 과소평가나, 이 과학의 임무에 대한 협소한 실용주의적 해석, 근본적 문제의 경시, 편의주의의 지배, 혹은 이론에 대한 스콜라적인 태도는 모두 중대한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결과를 내포한다고 그는 지적했다.

 

사회주의의 경제적ㆍ정치적 구조의 개혁

그는, 우리는 갈수록 사회주의의 경제학을 진지하게 연구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 맑스주의는 도그마가 아니라 행동을 위한 유력한 지침이다. 그리고 현실로부터 뒤떨어지지 않도록 공산주의자는 모든 방면에서 맑스의 가르침을 발전시키고 풍부하게 하여야 하며, 그의 유물변증법의 방법을 실천에 창조적으로 적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맑스-레닌의 학설을 좀먹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 순수함을 의해서 투쟁하고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는 것. 그것이 새로운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 길이다라고 했다.

 

25년이 지체된 후에야 겨우 오랜 현안이었던 사회주의의 경제적ㆍ정치적 구조의 개혁이 일정에 올랐다. 안드로뽀프의 단기간의 지도하에 그때까지 방치되어 당의 위신을 손상시켜 왔던 관료주의, 부패, 경제적 기생과의 본격적인 투쟁이 시작되었다. 노동 규율이나 능률의 재확립이 최우선 과제였다. 또한 느슨한 규율이나 태만을 일소하기 위해서 총력을 다하는 한편, 물질적인 동기 부여가 강화되고, 소득의 균등화 전략은 대부분 폐지되었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정치 과정에 대한 대중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체계적인 노력이 이루어졌다. 간부 교육에 관한 당의 방침 등에도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사회주의의 ‘교정’과 비능률의 제거를 결합시킨 이들 조치는 쏘비에트 인민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고, 그들의 낙관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다시 한번 당이 그 역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투여하여, 위기를 확대시키고 있던 조건들을 근절하려 나선 것처럼 보였다.

 

25년의 지체, 역사적 사명 위기 근절 역부족

개혁의 실행을 25년 동안이나 지체시켰기 때문에 정치적ㆍ경제적 상황이 심각히 왜곡되어 당은 수많은 해결 곤란한 문제들에 직면했다. 갈수록 방대해지는 군사 지출이 그에 선행한 경제 정책의 오류와 함께 성장률을 더욱 둔화시켰다. 서방측의 반공 선전의 영향과 맞물리면서 대중 속에 불만이 확산되고, 사람들은 현상과 국가 지도부에 대해 명백히 실망하게 되었다. 게다가 거의 30년에 걸쳐서 당과 국가의 내부에 성장한 테크노크라트관료층의 문제도 있었다. 당에 요구되고 있던 것은 대중의 이익을 기초에 둔 방침을 확고한 과학적 근거와 대중의 참여하에 작성하는 것이었다. 당은 제국주의 국가들과 그 정보 활동에 의한 직접적ㆍ간접적 선전 공세, 파괴 활동, 왜곡에 대항하면서 이를 달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2. 제27차 당 대회

― 사회주의의 발전 가능성의 확대

 

안드로뽀프가 죽은 지 2년 후인 1986년에 소집된 쏘련 공산당 제27차 대회는 경제적ㆍ정치적 구조를 광범하게 재검토할 것을 승인했다. 주요 슬로건은 ‘가속’이었지, 이른바 ‘개방’(글라스노스트)은 아니었다. 채택된 제12차 5개년 계획(1986-1990년)의 세 가지 주제는 경제 계획의 분권화와 생산의 현대화, 물질적 동기 부여의 확립과 확대, 그리고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확대였다. 또한 15개년 계획(1986-2000년)의 대강을 작성했는데, 이 안에서 제12차 5개년 계획 달성 후 20세기 말에 성장률을 가속하기 위한 규정들이 결정되었다. 철저한 사회적 개혁을 수행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경제의 지나친 중앙집권화를 고친다고 하는 목표를 추구하여 정부의 많은 기능이 경제기업체로 인계되었다. 경제기업체에는 생산물의 종류와 양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한이 주어졌고, 이 권한에는 자신들이 선택한 구매처로부터 원재료를 구입하는 결정권도 포함되어 있었다. 피고용자의 임금 수준 및 생산물의 가격을 결정하는 일정한 제한적 자주권도 주어졌으며, 이러한 움직임과 함께 경제기업체의 권한이 확대되었다. 경제기업체는 그 지불 능력을 유지하고 월간 계획 할당량을 결정하여 그것을 달성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확대하기 위한 몇 가지 조치가 제정되었다. 예컨대, 생산된 가치에 기초하여 임금을 결정할 때 기업체와 노동자 집단은 보다 큰 발언권을 갖게 되었고, 1986-1987년에는 수만 명의 공장ㆍ기업체 관리자가 다양한 기회에 노동자의 직접투표에 의해서 선출ㆍ승진ㆍ해고되었다. 노동자의 규율 문제도 마찬가지로 직장대표에게 위임되어서 게으른 사람이나 방종한 사람의 임금이나 수당을 삭감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변화에 이어서 1987년 1월의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회는 관료주의, 특히 당 자신의 내부의 관료주의를 엄중하게 비판했다. 마침내 관료주의의 발흥을 저지할 사회적 환경이 정비되었고, 곧이어 생산영역 전반에 걸쳐서 이러한 새로운 변화의 영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제12차 5개년 계획 개시 후 2년 동안에 생산 수준의 성장은 많은 부문에서 계획된 목표를 초과했다. 그중에서 가장 현저한 성과를 거둔 것은 주택 건설 부문인데, 1987년의 성과는 230만 단위로서 계획 수량을 15%나 초과했다. 1987년 6월 25일 중앙위원회 총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보고가 이루어졌다.

 

평균적으로 최근 2년간의 노동생산성 상승률은 제11차 5개년 계획 기간의 연평균 지표에 비해 공업과 건설에서는 30%, 농업에서는 100%, 그리고 청도운수에서는 200%를 넘었다. … 1985-1986년에 공업 생산의 연평균 성장률은 4.4%, 농업에서는 3%였다. … 금년에는 사회적 영역의 투자 증가율은 국민 경제 전체에 대한 투자 증가율의 3배이다.[1]Reprints from the Soviet press, July 30 / August 15, 1987, p. 6.; 고르바쵸프, “1987년 6월 25일 중앙위원회 총회 보고”.

 

이 모든 것은, 사회주의적 생산에 재차 과학적인 기준을 도입하고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원칙들을 실행하면 당은 단기간에 역사적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맑스-레닌주의로 무장하고 근로인민의 창조적 에너지에 의해서 힘을 얻는 모든 장애를, 아무리 어렵더라도, 해소하고 사회주의의 쇄신으로 전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회의 적극적인 활동분자는 공산당원들만이 아니었다. 긴급히 수행되어야 할 사회주의 체제의 변혁이 25년 동안이나 지연됨으로써 자신의 이해에 지극히 민감하고 그 이해에 따라 행동하는 관료층, 사회주의를 개선하기보다는 오히려 말살하는 것에서 이익을 발견하는 계층이 악성 종양처럼 비대화되었다. 사회주의의 쇄신 과정을 최종적으로 그 파괴와 해체 과정으로 전화시킨 것은 바로 이 계층,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적에게 무조건적으로 지지를 받은 이 계층이었다.

 

 

3. 교정으로부터 전면적인 파괴로

― 고르바쵸프의 ‘인간적 사회주의’ 모델

 

새 지도부의 구성, 역사적 후퇴

제27차 대회는 당과 노동자계급을 위한 새로운 경제ㆍ정치 방침을 작성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지만, 대회가 선출한 새 지도부의 구성은 커다란 역사적인 후퇴였다. 왜냐하면 국가 기구 내부에서 성장하고 있던 관료ㆍ테크노크라트 층이 당 지도부의 관건적인 전략적 지위를 점하고 당 기구에서 조직적인 지배권을 장악한 것이 이 대회였기 때문이다. 그들 계층과 그 정치적 대리인, 미하일 고르바쵸프와 그 동반자 집단이 프롤레타리아 계급 권력의 최고사령부, 즉 공산당 지도부에 침입하여 그 실권을 장악하고, 사회주의를 파괴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이익을 촉진하기 위한 효과적인 무기로 전화시키는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오랫동안 이러한 절호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제국주의는 이용 가능한 모든 물질적 수단과 선전 수단을 총동원하여 쏘련 공산당 지도부 내에서 당의 전면적 지배를 꾀하는 이 새로운 정파를 지원했다. 수면 하에서 양성되고 있던 사회적ㆍ경제적 위기가 이제 전면적인 정치적 위기로 전환되었고, 과거의 오류를 교정하고 사회주의를 쇄신하기 위한 투쟁은 갈수록 사회주의 체제 자체의 존속을 둘러싼 결정적 투쟁으로 전화되어갔다. 사회주의하에서의 계급 투쟁이라고 하는, 수십 년 동안 경시되어온 현실이 지금 공산당원들에게 유례없는 엄혹함으로 돌진해 온 것이다.

 

고르바쵸프와 그 동반자 집단의 엄습

공산당원들은 경제 내부의 사회주의적 원칙과 법률을 강화하고, 사회적 차원에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확대할 것을 주장한 반면, 고르바쵸프와 그 동반자들은 이른바 ‘신사고’라고 하는 구실하에 사회주의의 정치적 구조 개편을 조속히 실시하고 쏘비에트 사회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경제를 강제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몰고 가려고 하였다. 이 정파는 사회주의 발전을 ‘가속’하기 위해서 싸우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당의 상층 지도부 내에 착착 발판을 굳혔고, 충실한 지지자를 중요한 지위에 등용하고 있었다. 1987-89년에 당 지도부 내의 공산당원들을 잠식하고, 사태 발전의 방향을 전환시키기 위해서 모든 조직적 수단을 구사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선전 기관은 당 지도부로부터 공산당원의 불법적인 추방 하나하나에 요란한 지지와 갈채를 보냈고, 공산당 내에서 새로 힘을 획득한 ‘민주주의자’에게는 특별한 승인과 ‘정통성’을 부여했다. 이와 더불어, 국민 전체의 운명에 관해서 중요한 결정을 할 권한은 중앙위원회로부터 사전에 박탈되어 갈수록 새로 설치된 관료 조직에 넘겨지고, 국가 업무에 대한 당의 감독은 꾸준히 감축되었다. 당의 역할이 감축됨과 동시에 중앙 계획 체제도 빠르게 해체되었다. 경제 관리를 담당하는 정부 직원의 수는 1987년의 20만 명에서 1989년에는 5만8천 명으로 감축되었다. 이 당파의 권력이 강화됨에 따라서 계획 경제 그리고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파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정치적 공격도 격렬해져 갔다. ‘쓰딸린주의’와의 투쟁이라는 명분하에 이 당파의 대표자들은 사회주의의 모든 역사와 그 성과에 대한, 쏘련 공산당과 사회주의적 생활 양식에 대한, 그리고 그들에게는 ‘민주주의의 결여’를 의미하는 민주집중제 등의 중요한 원칙들에 대한 정면의 공격을 수행하기 위해서 매스컴을 이용했다.

 

사회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ㆍ경제적 공격 개시

고르바쵸프는 중앙 계획과 사회주의 체제가 경제 정체의 주원인이라고 반복하여 비난함으로써 사회주의에 대한 불신과 환멸을 불러일으켰다. 자유 시장 경제를 도입하기 위한 정치적 환경을 조성하고자 이 정파는, 신경제 정책의 포기는 사회주의의 원칙에 대한 역사상 최초의 위반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중앙 계획 경제라는 사회주의 체제를 신경제 정책으로 대치시키기 시작했다. 위로부터의 정치 개혁을 실시하고 서방형의 민주주의를 확립하라는 요구가 차츰차츰 근로인민을 위한 경제 개혁 정책을 대체해 갔다. 이 정파의 정치적 대표자들은 자신들의 정책이 체제의 사회주의적 본질을 옹호하는 조치라며, 모든 노력을 다해서 그 본질을 은폐했다. 가장 충실한 자본주의 옹호자나 반공주의 지지자들조차 공적인 자리에서는 ‘자본주의’라는 말을 발설하지 않도록 주의했고, 말로는 노동자들의 요구에 응하는 것처럼 노력했다. 그러나 쏘련 공산당 제19차 전연방협의회에서 그 정책인 ‘신사고’, ‘개방’ ‘민주주의’를 당 지도부에 강요하는 데에 성공한 후 1988년 후반기 수개월 동안에 상황은 일변했다. 그 이후 쏘련 공산당 제27차 대회의 주요 슬로건, 즉 사회주의 발전의 ‘가속’은 그들 계층의 협소한 이익을 위해서 완전히 포기되었다. 권력을 확고히 장악하고 자신들의 강령을 당 전체에 강요하게 되자 이 정파는 사회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정치적경제적 공격을 공공연하고 전면적으로 개시했다.

 

완전한 배반, 반동

이 당파와 가까운 세력들은 사회주의나 맑스-레닌주의의 기본적 원칙에 반대하는 비열한 선전 활동을 했다. 그리고 맑스의 잉여가치설을 공격했다. 자본가는 노동자로부터의 착취를 통해서 이윤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신노동’을 통해서 획득한다고 주장했고, 그들은 자본주의 열강은 다른 나라들의 수탈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공격했다. 계급 투쟁 및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이라고 하는 현실은 갈수록 부인되는 반면, 사회주의 국가들과 자본주의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한 탈이데올로기화가 끊임없이 요구되었다. 매스컴에는 저명한 서방측 자본가에 의한 사회주의의 경제적ㆍ정치적 구조 ‘개혁’ 처방전이 범람했다. 이러한 반공 선전 활동이 쏘련 공산당 지도부 이름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미국 공산당 의장 거스 홀은 당시에 자행된 반사회주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데올로기 교육이 없었고, 과거 5년 동안 사회주의를 방위하기 위한 투쟁이 전개되지 않았다는 점을 함께 고려하면, 이데올로기 투쟁이 얼마나 일방적이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를 옹호하던 7개의 신문은 모두 침묵을 강요당했다. 대중 매체는 세계의 모든 전 사회주의 단체에 개방되어 있다. 미국의 우익 TV 설교자들이 모두 쏘련의 대도시 방송에 등장하고 있다. 극우 헤리티지 재단을 필두로 CIA가 지원하는 조직들이 쏘련 전역에 방송되는 프로그램들을 소유하고 있다. … 쏘련의 남녀가 하버드나 예일대에 수년씩 머물면서 ‘기업가’가 되는 것을 배우고 있다. 쏘련은 포르노나 선정적인 책을 포함한 외국의 모든 잡지와 신문에 대해서 수문을 개방하는 한편, 해외의 공산주의 신문 구독을 모두 해약했다. 이러한 평범한 이데올로기적 침투가 고르바쵸프와 그의 무리들의 동의하에 진행되고 있다.[2]Gus Hall, “쏘련의 위기(1991년 9월 8일 미국 공산당 전국위원회 특별회의에서의 보고)”.

 

고르바쵸프의 사유화 촉진, 쏘련 헌법 위반

사회주의에 대한 이러한 전면적인 공격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점진적인 그러나 의식적인 해체, 자본주의적 관계에 의한 대체, 그리고 국내에, 새로운 자본가계급을 창출하려는 시도와 결부되어 있었다. 1990년에는 미하일 고르바쵸프 자신이 사회주의의 기본적 원칙들, 즉 생산 수단의 공적 소유와 계획 경제, 기타 쏘련 헌법상의 사회주의적인 규정들을 포기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변화는 단순한 ‘소유 형태의 다양성’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현실적으로는 사적 소유와 국가 기업의 사유화를 촉진하는 것이 이 정파의 최우선 사항이었다.

 

고르바쵸프는 정부 정책의 급격한 전환을 다음과 같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했다. “이 초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시대에 뒤떨어진 이데올로기적 도그마 및 고정 관념과 단호히 결별하고 우리의 세계관과 정책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이다.” 그리하여 생산 수단의 공적 소유는 “시대에 뒤떨어진 이데올로기적 도그마”로 선언되고, 사적 소유가 쏘련에서 ‘현대적 형태’의 소유가 되었다.

 

사유화 방침의 이러한 공식적인 선언은 다름 아니라 위로부터의 친자본주의적 쿠데타의 승리 선언이었는데 그것은 당원증을 가진 1,900만 명의 당원의 의사를 반영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보수파’ 공산당원을 숙청해 버린 중앙위원회의 ‘다수파’의 요구였다. 나아가 이 결의는 쏘련 헌법을 명백히 위반하고 있었다. 헌법은 명확히 “국가의 주요 문제는 전국적인 토의를 거쳐 전 인민이 투표에 부쳐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쏘비에트 인민의 동의 없이는 사회주의로부터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합법적일 수 없었다. 그러나 친자본주의적 쿠데타를 준비한 자들이 인민의 의지를 염두에 둘 리 없었다. 그들은 쏘비에트 인민의 76%가 쏘련의 존속에 찬성표를 던진 1990년의 국민투표를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토지의 사적 소유에 관한 제2차 국민투표는 실시하지도 않았다. 이 국민투표에서도 완전히 패배한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피아적인 신흥 자본가층이 버섯처럼 성장

1990년 말에 고르바쵸프와 그 공모자들은 수백만 명의 공산당원과 근로인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공적 기업의 사유화와 주식거래소 설립을 위한 법률들을 정식으로 통과시켰다. 그들은 서둘러 이들 기업의 소유권을 그것들을 경영하고 있던 관료층에게 양도했다. 인민의 국부가 이 계층에 매도되면서 어제의 경영자는 급조된 자본가로 변신하고, 자본주의 쿠데타는 정치적 영역으로부터 경제적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공적 재산의 횡령과 국가 관료층에 의한 사적 처분은 경제에서 통상적인 일이 되었다. 마피아적인 신흥 자본가층이 버섯처럼 성장하여 근로인민의 등 뒤에서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했다. 고르바쵸프와 그의 동반자들은 메릴린치와 같은 일련의 제국주의 금융 기관들로 하여금 국가 기업의 사유화 과정을 감독ㆍ지도하도록 했고, 그리하여 그들은 쏘비에트 경제의 제국주의적 후견인이 되었다.

 

친자본주의 쿠데타 지도자들이 취한 또 다른 조치는 소비 물자의 분배에 자본주의적 관계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재화와 써비스의 질과 양을 개선한다”는 미명하에 그들은, 쏘비에트의 법률에 반해서 조합원의 노동에만 의거하지 않는 이른바 ‘생산자 협동조합’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주요 도시나 공화국에서 이 정파에 속하는 당국은 공공연히 법률을 무시하고 이 사이비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이들 이른바 ‘생산자 협동조합’은 설립된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89년 말에 이미 500만 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었다. 한편, 진짜 협동조합은 그 기반을 잠식당해 1991년에는 이미 그 수가 전국의 협동조합 총수의 20%로 떨어졌다.

 

근로인민의 곤경 시작

이러한 정책들의 결과 근로인민의 생활필수품의 공급이 진짜 협동조합이나 공영 점포로부터 새로 형성된 자본주의적 ‘협동조합’으로 이전되었는데, 거기에서 가격은 터무니없이 높았고, 많은 경우 판매는 외화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배반적인 정책들이 거듭된 결과, 생산 수준이 급격히 떨어져 근로인민의 생활필수품이 심각하게 부족해졌다. 생산의 위기가 격화되자 고르바쵸프와 그 정부는 경제의 과학적ㆍ기술적 발전이라고 하는 초기의 공약을 내팽개쳤다. 자본재 생산에 대한 투자 기금이 대폭적으로 삭감되었고, 경제의 민간 수요 부문의 연구ㆍ개발 예산은 40억 루블이나 감액되었다. 그 대신에, 암시장과 자본가들이 노골적인 파괴 행위에 의해서 야기된 애로를 메우기 위해서 소비재 부문에 대한 투자에 집중하는 대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예상된 대로, 이들 투자 역시 사적 부문의 밑바닥 없는 호주머니로 사라졌다.

 

쿠데타 지도자들은 생활필수품의 부족을 벌충하기 위해서 소비 물자의 수입으로 방향을 돌렸고, 그 결과 경제의 문호가 넓게 개방되어 서방 국가들의 물자가 홍수처럼 쇄도했다. 이러한 문호 개방적인 수입 정책은 경이적인 수준의 대외 채무와 국제적인 자본주의 은행 및 금융 기관에 대한 종속 심화를 야기했다. 서방측의 추정에 의하면, 쏘비에트 역사에서 일관해서 의도적으로 낮게 억제되어 있던 대외 채무가 1990년에는 순식간에 580억-690억 달러라고 하는 천문학적인 숫자로 치솟았다. 그리하여 국가의 금융신용도가 급락했다. 인플레이션율은 100%나 치솟았고, 다양한 정보원의 보고에 의하면, 쏘련 노동자의 60%가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인민을 더욱 곤경에 빠뜨려 이미 불안정했던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민족적 적대 감정 다시 발생

인민이 직면하게 되는 문제가 증대하고 생활 수준이 저하하면서, 쏘비에트의 성과들에 의해서 과거 70년 동안 성공적으로 극복되어 있던 민족적 적대 감정이 다시 그 추악한 머리를 쳐들기 시작했다. 민족 간의 다양한 분쟁과 군사적 충돌(그 가운데 일부는 쿠데타 지도자들 및 제국주의 세력이 의식적으로 선동한 것이었다)이 일어나면서, 그리고 정부의 정책에 의해서 야기된 상황에 대한 인민의 불만과 항의가 높아지면서 국내의 정치적 위기가 격화되었다. 그 결과, 고르바쵸프의 ‘신사고’에 의해서 이미 야기되어 있던 문제들에 쏘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해체라는 위기가 추가되었다.

 

정치적 쿠데타 시작, 쏘련 공산당 자체 불법 선언

친자본주의 쿠데타의 지도자들은 대중의 불만이 높아지도록 끊임없이 조장해 왔는데, 그들은 이 불만을 사회주의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데에 이용했다. 당내의 조직적 쿠데타에 성공한 그들은, 사회 수준에서의 경제적 쿠데타에 이어 쏘비에트 국가의 해체 계획에 기초하여 정부 수준에서의 정치적 쿠데타에 착수했다. 맨 먼저 발트 국가들이 쏘련으로부터 탈퇴했고, 1990년 9월에는 옐찐이 쏘련으로부터의 러시아 공화국의 이탈을 발표했다. 러시아에 이어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이 쏘 연방으로부터 이탈한다는 결정을 선언했다. 그리고 실패로 끝난 1991년 8월 사건 후에 옐찐에 의해서 쏘련 공산당 자체가 불법으로 선언되었다. 당의 자산은 모두 몰수되고, 전국에서 당원에 대한 박해와 체포가 시작되었다. 최종적으로 쿠데타 지도자들은 1992년에 쏘련을 불법적으로 해체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궁극적으로 달성했다.

 

이런 식으로, 애초에는 사회주의의 발전을 가속시키기 위해서 시작되었던 과정이 위로부터의 사회주의의 해체와 쏘련에서의 사회주의 체제의 최종적인 파괴 과정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결론: 붕괴는 불가피했는가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 사회주의 체제 자체 모순이 아님

사회주의 파괴로의 의도적인 방향 전환이 결코 쏘련의 노동자계급이나 인민의 바람이 아니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1990년의 인민투표에서 쏘비에트 인민의 절대다수가 쏘련의 존속에 찬성표를 던졌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이러한 전개 모두가 위로부터 그리고 쏘련 공산당의 지도부 내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증명하고 있다. 사회주의적 질서나 사회주의 국가, 혹은 공산당 자체를 반대하는 대중 시위나 인민의 조직적인 사회 운동 사례는 이 기간 전체를 통틀어 하나도 없었다. 쏘련에서의 사회주의의 해체가 아래부터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한편, 대다수 당원도 이러한 상황 전개를 반대했다고 하는 사실 역시 많은 기록이 증명하고 있어 의문의 여지가 없고, 궁극적으로는 파괴로 전환시킨 것과거 당 지도부의 오류와 무관심 때문에 규모와 힘이 성장한 특정한 사회 계층의 음모 행위였다. 이들 계층은 시간이 흐르면서 교묘하게 당 지도부를 장악했고, 위로부터의 자본주의 쿠데타를 수행하기 위해서 제국주의로부터 받은 거대한 물질적ㆍ선전적 지원을 이용했다. 바로 그 때문에, 많은 역사적 사실이 밝혀진 오늘날 우리는, 쏘련에서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된 원인은 사회주의의 위기를 야기했던 객관적인 조건과는 기본적으로 무관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는 사회주의 체제 내부에서 적대적이고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이 전개된 결과가 아니었다. 일부가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이 ‘새로운 지배계급,’ 관료층 등이 사회주의 국가를 탈취한 결과도 아니고, 또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사회주의 체제의 성격이 전체적으로 무언가 다른 체제―‘국가자본주의’ 등과 같은―로 전환된 결과도 아니었다. 오히려 당 지도부 내부의 어떤 분파, 그들의 협소한 이해가 자본가 및 제국주의자들의 이해와 일치하고, 쏘련에서 사회주의를 파괴하는 활동에 대한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무조건적인 지지로부터 거대한 이익을 누린 분파가 저지른 의식적인 파괴 활동의 결과였다. 이러한 반노동자계급적ㆍ반사회주의적 음모의 승리가 처음부터 예정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공산당원들이 만일 방심하지 않고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수백만 노동자를 동원하여 적시에 행동을 취했다면 음모를 좌절시키고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은, 예컨대 다음과 같은, 해명해야 할 많은 문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상황 전개로 인하여 그 객관적인 계급적 이익을 직접적으로 위협받은 쏘비에트의 노동자계급은 왜 사회주의를 방어하기 위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는가? 그리고 당과 다수의 공산당원들은 왜 이 음모를 적시에 폭로하여 그에 대항하는 유효한 저항을 하지 못했는가?

 

 

‘신사고’의 역할

 

이미 닥친 재앙

공산당원과 근로인민을 우유부단하게 만든 주요 요인의 하나는 ‘신사고라고 하는 현상이었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배경은 사회주의 체제의 기존의 비효율을 해결하기 위해서 쏘련 공산당 자신이 취한 일련의 시정 조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오랫동안 근로대중 및 공산당원들에게 신사고의 진정한 본질이 은폐되어 있었다. 특히 반노동자계급적 측면이 서서히 조금씩 시정 조치 속에 도입되었기 때문에 대중은 그 즉각적인 효과를 알아챌 수 없었던 것이다. 동시에 ‘신사고’라고 하는 견해가 당 지도부 자체에 의해서 표명되고 있었다는 사실도 이러한 현상의 진정한 본질을 흐리게 했고, 그에 대하여 대중을 무장 해제시키는 데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10월 혁명 이후 쏘련 인민은 오직 하나의 당과 그 지도부만을 알고 신뢰해 왔다. 무엇보다도 친자본주의적 쿠데타가 위대한 레닌의 당의 이름으로 수행되었기 때문에 인민은 혼란에 빠져 저항하지 못했다. 쏘련 인민은 쏘련 공산당에 대한 역사적 신뢰에 기초하여 변화를 받아들였던 것이고, 재앙이 닥친 후에야 이들 변화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던 것이다.

 

신사고가들의 경제 정책이 유발한 객관적인 효과들 또한 근로인민들 사이에 무관심을 만연시키는 데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빈곤과 실업의 유례없는 증대, 근로인민의 구매력을 심히 저하시켜 그들을 기아와 궁핍으로 몰고 간 급격한 인플레이션과 루블화 가치의 극적인 저하가 인민 사이에 커다란 불만을 조성했고, 사회주의적 성장을 가속화하기 위한 초기의 정책들이 인민대중을 고무시킨 반면, 이러한 정책으로부터의 이탈과 자본주의로의 곤두박질은 인민의 환멸을 사 그들이 당과 그 지도부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그와 동시에, 계속되는 생필품 부족과 대중의 빈곤 악화는 노동자들의 관심을 정치적 동향으로부터 자신과 가족의 어려운 생계를 유지하는 문제로 돌리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인민이 사회적정치적 문제에 대응하지 않게 한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신사고’는 노동자계급의 적들의 수중에서 양날의 검으로 작용했다. 한편으로 그것은 그 사회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사태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인민의 마음에 혼란을 일으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으로 살아남는 것이 일상의 주요 관심사가 되도록 인민의 생활 조건을 악화시킴으로써 그들의 정치적 저항을 무너뜨렸던 것이다. 친자본주의적 쿠데타 지도자들이 성공한 비결은 바로 그들이 이 양날의 검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데에 있었다.

 

 

공산당원들의 단호한 대응의 결여

 

재앙에 대한 공산당원들의 무대응

대중이 대응하지 않은 것은 이렇게 그들의 혼란과 생활 조건의 악화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공산당원들이 단호하게 대응하지 않았던 것을 같은 논법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대중은 ‘신사고’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기에는 이론적으로도,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지만, 공산당원들에게는 그 교활한 현상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지식이 결코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사고’ 옹호자들의 모든 노골적인 일탈 행위에도 불구하고 쏘비에트 공산당원들은 의미 있는 저항을 하지 않았고, 이고르 리가쵸프가 말한 것처럼 “자신들의 자원을 동원하여” 음모를 폭로하고 다가올 위험을 대중에게 경고하여 그들이 행동하도록 만들지 못했다. 공산당원들이 이러한 일탈 행위를 적시에 단호하게 거부했다면 재앙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는 실현되지 않았고,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의 적들은 공산당원들의 망설임을 철저히 악용하여 대중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쏘련의 사회주의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무대응의 요인들 추적

‘신사고’와 그 일탈적인 정책들에 대해서 쏘비에트 공산당원들이 경계하거나 단호한 대응을 취하지 않은 근원적인 이유는 아직 더 완전히 분석되어야 하지만, 보다 일반적인 역사적 추세에 기초하여 약간의 요인들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요인, 이 기간 전체를 통해서 공산당원들은 “사회주의 건설 과정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고 하는 잘못된 역사적 전제에 기초하여 행동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에서의 사회주의의 잠재력과 능력, 위대한 성과에 대한 과대평가와, 다른 한편에서의 사회주의의 적들의 파괴력 특히 제국주의 국가들의 그것에 대한 과소평가가 서로 결합하여, 그들로 하여금 사회주의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진정한 위험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둘째 요인, 지난 수십 년 동안 쏘련 공산당의 전망과 기본 정책을 지배했던 ‘전체 인민의 당’이라는 개념은 당의 대열 내부에서 이데올로기적 경계심을 둔화시켰을 뿐 아니라, 비프롤레타리아적 분자들이 침투할 수 있게 문호를 넓게 개방함으로써 당 내부의 비프롤레타리아적 경향에 대항하는 공산당원들의 힘을 상대적으로 약화시켰다. 그 결과 비프롤레타리아적 분자들이 갈수록 당 내부의 의사 결정 과정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고, 당 지도부의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 일탈 행위에 대한 일관되고 단호한 저항이 나타나는 것을 방해했다.

 

셋째 요인, 사회주의적 성장을 ‘가속’하도록 발전을 지도하는 임무가, 애초에는 사회의 모든 근로인민이 광범하게 참여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서서히 당의 지식인과 전문가들의 수중으로 옮겨갔는데, 이러한 상황 전개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계급에 기반하거나 이데올로기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 동기에 의한 것이었고, 실용주의적이었다. 그들은 이 과정에 노동자계급이 참여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의사 결정을 당의 상층 지도부가 배타적으로 지배하도록 제한함으로써 노동자들이 재편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사실상 차단해 버렸다. 재편 과정에서 공산당원들의 위치를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주관주의적이고 편의주의적인 정책들을 채택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신사고가 당의 정책을 최종적으로 지배하도록 하는 길을 열었다.

 

넷째 요인, 공산당이나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어떤 형태의 공개적인 비판도 금기시해 오던, 세계 공산주의 운동 내부의 정치적 현실주의가 다시 쏘련 공산당 지도부에 의해서 수행되던 파괴적인 정책 앞에서 세계의 많은 공산당과 노동자당을 소극적인 침묵으로 몰아넣었다. 이 침묵은 많은 부분 ‘신사고’ 자체가 초래한 혼란에서 연유했지만, 초기에는 세계적 차원에서 당과 당의 관계를 규율하던 이 전통적인 규범이 이들 많은 당으로 하여금 침묵하게 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데에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경험에 의하면, 몇몇 당을 제외하고는 세계적으로 대부분의 공산당과 노동자당들이 “쏘비에트 동무들이 가장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고,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상투어를 되풀이하면서 이러한 일탈 행위에 대해 명확한 반대 입장을 취하는 것을 회피했다. 쏘련 공산당 지도부의 일부가 이들 정책에 대한 반대를 선언한 후에야 그들은 공개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소수였고, 뒤늦었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쿠데타에 대해서 기선을 제압할 기회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

 

더 연구해야 할 다른 많은 역사적 원인들이 있겠지만, 이들 모든 요인들이 쏘련과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의 쇄신 과정을 그 파괴 과정으로 전화시킨 파괴적인 정책들에 대해 공산당원들을 우유부단하게 만들고 시의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결코 사회주의와 공산의의 원칙들을 방어하는 데에 있어서의 공산당원들, 특히 쏘련과 기타 사회주의 진영 공산당원들의 영웅적 투쟁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쏘련 공산당을 금지하고 당의 자산을 몰수하고, 전국적으로 공산당원들을 체포, 박해하고 국가의 의회를 폭격하고 나서야 겨우 쏘련에서 친자본주의적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쏘련 공산당과 공산당원들이 사회주의와 그 위대한 성과를 지키기 위해서 수행한 영웅적 역할을 생생하고 의문의 여지없이 입증하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의 파괴도 어떤 역사적 좌절도 사회주의 국가 및 세계의 근로인민을 위한 지난 80년 동안의 공산당원들의 투쟁의 가치와 거대한 성과를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장래

 

오늘날, 쏘련과 동유럽에서 사회주의 국가들이 해체된 이후 우리가, 10월 혁명은 끝났다고, ‘공산주의는 죽었다’고 맑스-레닌주의는 망했다고, 노동자계급은 그 혁명적 잠재력을 잃었다고, 계급 투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제국주의는 세계적으로 대중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단념했다고 믿기를 바라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역사에 의해서 버림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과학적ㆍ혁명적 이데올로기를 버리고 사회민주주의나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기회주의와 허무주의에 편승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자들의 그러한 선전을 자신의 간판으로 삼았던 자들의 애처로운 운명을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그러한 주장의 어리석음은 입증된다. 사회주의 국가가 해체된 지 10년이 채 안 되었지만, 누가 역사에 의해서 버림받고 있는가는 이미 아주 명백해지고 있다. 역사의 버림을 받고 있는 것은, 꾸준히 그 힘을 다시 획득하고 있는 공산주의자나 맑스-레닌주의자들이 아니라, 노동자계급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10월 혁명과 사회주의에 등을 돌렸던 바로 그 사람들이다. 우리가 지금 할 모든 것은 이렇게 묻는 것이다. “역사는 고르바쵸프, 야꼬블레프, 쉐바르드나제, 옐찐 같은 자들을 어디에 자리매김했는가?”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10년은 대단히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배반하고 인류의 미래에 등을 돌린 자들을 역사가 심판하는 데에는 그 시간으로 충분했다.

 

사회주의를 위한 계급 투쟁은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 승리는, 현존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을 방어하고 모든 공산당과 노동자계급 정당의 합법적 활동을 방어하기 위한 공산주의자ㆍ노동자계급ㆍ반제국주의자의 광범한 국제적 통일 전선을 다시 구축하는 데에,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와 옛 사회주의 국가 모두에서의 공산주의 운동과 노동자계급 운동의 과거 성과를 지키고 저개발국 근로인민의 반제ㆍ민족 해방 투쟁을 지원하는 데에 달려 있다. 이를 통해서만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 노동자계급 운동은 현재의 좌절을 극복하고, 착취억압받고 있는 전 세계 수십억 근로인민을 마침내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해방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나가며

― 굴종과 좌절의 시대는 더 이상 그만!

사회주의 사회 건설의 기치를 다시 치켜들자!

 

극악무도한 제국주의 및 여타의 자본주의 사회들과 사회주의를 해체시키고자 제국주의와 결탁한 일부 사회주의 지도부들의 이익을 위한 반동으로 인류 발전의 가장 소중한 도약이었던 사회가 해체되었다. 이는 지구상에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전체 인민들의 해방이 늦춰진 것이나 다름없다. 이 얼마나 가슴 치고 통곡할 쓰라린 아픔인가! 아직도 진행 중인 패배에서 벗어나려면 또다시 영웅적 투쟁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한 줌의 부르주아 지배계급에게 휘둘리지 말고 노동자계급의 자존심을 걸고 사회주의 기치를 다시 치켜들며 그 아래 모여야 한다.

 

지금 대선 정국을 맞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또한 노동자계급의 자존심은 여전히 농락당하고 있다. 각 대선 후보자들과 그 조직들은 각각의 이권을 위해 죽일 듯 대적하다가도 법도 마음대로 조정하면서 서로의 범죄를 덮어 주기도 하고, 정 안되면 아예 증거 인멸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따로 개인적인 조사가 필요도 없이 매일같이 떠들어 대는 뉴스를 봐도 알 수 있다. 저들이 정하고 읊어 대는 법대로 한다 해도 일부 후보자들을 비롯해 부르주아 지배계급과 그에 봉사하는 정부, 검찰, 경찰, 각종 행정 기관들은 범죄 집단인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런데 왜 저들은 버젓이 낯짝을 들고 세상 모든 생활고를 다 해결해 줄 것처럼 아양을 떨며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국민’들을 우롱하고 다니는가! 대선 후보들은 자본주의 안에서는 근본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없는 정책들을 마구잡이로 내세우며 보여 주기식으로만 경쟁하고 있다. 정책으로 해결될 것 같았으면 대통령이 뭔 필요가 있겠는가! 실현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는 공약을 내세워 착취자의 우두머리가 되어 보겠다는 것일 게다. 일례로 주택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면서 아파트 공급 계획을 세운 것만 보더라도 어찌 재개발, 재건축으로 마구잡이식으로 하면서 무섭도록 빽빽하게 높게 여기저기 우후죽순처럼 지어 대는 아파트가 ‘국민’을 위한 것인가! 없는 사람들 몰아내는 것이고, 입주를 하게 되더라도 거의 대다수는 은행 대출을 얻어야 한다. 이는 급여는 그대로인 채 은행에 원금과 이자를 내야 하는 처지의 노동자들은 임금이 줄어든 것과 같은 것이기에 저들이 ‘국민’을 위해서 짓는 수많은 아파트 때문에 ‘국민’의 실생활은 더 궁핍해진다. 노동자들은 쾌적하고 시설 좋은 주택에서 사는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는 직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불안과 극도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실태에 더 놓여지게 될 뿐이다. 더구나 수도권에 짓는 아파트는 인구를 더욱 밀집시키므로 부동산값은 더 올라갈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안에서 경쟁하면 값이 올라가는 것은 딱 한 가지 부동산 투기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건축 자본가들의 이권에 관련된 각종 업자 등등의 배만 불려 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저들은 ‘국민’의 안녕은 안중에도 없고, 자본주의 내부 모순으로 발생한 경제 사정까지 노동자계급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뿐만 아니라 가난하게 사는 것을 개개인의 능력의 탓으로 돌린다. 각자가 속한 ‘우리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나아가 ‘우리조국’, ‘우리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사회를 이롭게 하고, 그것이 곧 자신을 위한 행위라고 웬만하면 거의 모든 ‘국민’들은 그렇게 여길 것이다. 이는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물리적 지배와 함께, 그렇게 인식되도록 이데올로기마저 세뇌당해 왔기 때문에 어느 누구라 할 거 없이 그 이로움을 당연한 진리라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정치사상적 자유의 억압과 어려운 경제적인 사정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근로인민, 노동자계급에게 ‘우리회사’, ‘우리나라’, ‘우리조국’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모든 자유에서 박탈되는 것은, 가장 안전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 우리라는 회사, 나라, 조국 안에 근로인민들이 갇혀 있기 때문이다. 뭔가 임시적 복지를 마련한다 해도 따지고 보면 결국은 부르주아 계급을 위한 것이다. 진정으로 노동자계급을 위하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저들은 절대로 할 수가 없다. 근본적 해결이라 함은 자본주의의 폐지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젠 더 이상 저들에게 농락당하고 짓밟히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에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단결 투쟁으로 정치권력까지 쟁취하는 것뿐이다.

 

위에 발췌ㆍ요약에서 여실히 표현되어 있듯이 노동자계급을 대표하는 당의 역할, 특히 지도부의 역할은 너무나 중요하다. 노동자계급이 단결로써 힘을 키워서 이 억압과 착취뿐인 굴종의 자본주의 사회를 없애고자 혁명적으로 나설 때, 인민대중들은 그것이 곧 그들 자신도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되는 것이기 때문에, 선진 노동자들이 선두에 선 그 혁명의 대열에 함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굴종과 좌절의 시대는 더 이상 그만!

사회주의 사회 건설의 기치를 높이 치켜들고, 다시 한번 영웅적 투쟁으로 나아가자!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Reprints from the Soviet press, July 30 / August 15, 1987, p. 6.; 고르바쵸프, “1987년 6월 25일 중앙위원회 총회 보고”.
2 Gus Hall, “쏘련의 위기(1991년 9월 8일 미국 공산당 전국위원회 특별회의에서의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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