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맑스-레닌주의 세계관의 발전관에 대해

 

한동백 | 회원

 

 

머리말

 

1991년 쏘련 붕괴 이후 한국 사회에서 사회구성체에 관한 논쟁은 향후 2년에 걸쳐 사실상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그 논의의 기반을 책임지는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모순의 기본 법칙 및 이 법칙과 직접적 관련을 맺는 발전에 관한 논의 역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한국 사회의 갖가지 운동 내 이러한 기류는 변혁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는데, 위와 같은 대사건은 발전관을 근본에서부터 부정하는 사조를 유행시킨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며, 그것을 떠받치는 논리로 미 제국주의와 그 하수인들이 의식적으로 유포시킨, 극도로 형해화된 형식논리학(분석철학, 기호논리학 등 이른바, ‘현대인식론’이라 불리는 ‘체계’들)을 학계 전반이 더욱 가속화하여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운동의 퇴조기라는 조건 속에서 이 어려움은 오로지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세계관인 맑스-레닌주의를 복원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세계관의 복원은 단순히 과거 1980년대에 번역되었던 쏘련의 일부 입문서의 내용을 반복하는 식으로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변혁 운동은 실제 쏘련과 동부 민주독일 및 기타 현실 사회주의권에서 논의되었던 변증법적 유물론 및 사적 유물론의 쟁점을 세밀하게 연구하고, 그것을 현실에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풀어낸다는 것은 대중에게 설득하는 과정이기도 한데,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와의 이데올로기 투쟁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작업은 일정 현학적 경향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그것은 구체적인 현실로 되돌아와야 할 필요성이 있다. 현재 한국의 변혁 실천에서 어떠한 확정적인 의미를 가지는지, 면밀히 따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결론적으로, 바로 이것이 맑스-레닌주의의 복원에서 웅장한 첫걸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변증법적 총체성을 새기며, 맑스-레닌주의 복원을 위한 첫걸음에 대해 그 주제를 구체적으로 세분화한다면, 우리는 아주 다양한 시도, 작업들로 그 내용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주관-객관 변증법의 내용을 규명하는 일, 현재 학계에서도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인지-인식의 문제를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해석하고, 그것의 과학성을 검증하는 일, 쏘련 학계에서 논의되었던 변증법 연구를 소개하고, 여기에서 논의된 쟁점과 문제점 등을 토의하고, 그 결론을 한국 사회에 맞게 적용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

 

이번에 다룰 주제는 맑스-레닌주의 세계관의 발전관에 대한 것이다. 발전관을 확립하는 것은, 우리의 투쟁 방향이 무엇인지를 확정하는 일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에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발전관 확립은 맑스-레닌주의 발전관의 내용을 알아야만 할 수 있는 작업이다.

 

맑스-레닌주의 발전관의 기원은 맑스와 엥엘스가 헤겔의 발전관을 비판한 데부터 유래된다. 이 시기에는 다소 정리되지 못한 상태의 발전관이 확립되었다. 이후 레닌은 엥엘스가 언급한 변증법의 기본 법칙을 정리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정리된 발전관이 확립된다.

 

맑스-레닌주의 발전관의 핵심 요소는 변증법의 기본 법칙인데, 그중에서도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 법칙과 부정의 부정 법칙이 발전을 다루는 문제에서 핵심으로 여겨지는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 사회주의권의 발전관 논의는 이 두 기본 법칙을 중점으로 이루어졌는데, 양질전화의 법칙은 이 두 가지 기본 법칙에서 전제된 기본 법칙으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발전관 논의에서 양질전화의 법칙에 대한 논쟁점은 사실상 희미했다고 할 수 있었다.

 

논쟁의 대상은 발전의 핵심 역할을 하는 기본 법칙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대표적 견해는 (1)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 법칙을 그 핵으로 놓는 견해, 그리고 (2) 부정의 부정을 그 핵으로 놓는 견해, 그리고 (3) 둘을 절충한 견해, 이 세 가지로 나누어졌으며, 이와 다른 범주로서, 대립물의 상호전화에 발전의 계기성이 항시적인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우리는 논의의 중심에 있는 두 가지 기본 법칙을 간단히 알아볼 것이며, 그 이후에는 현실 사회주의권의 논쟁을 입론적 수준에서 간략하게 설명한 후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떠한 내용이 명확히 되어야 하는지 간단히 따지게 될 것이다. 한편, 이 글을 통해 객관적 조건 속에서 자료와 역량의 부족이라는 한계 또한 독자들은 발견할 수 있을 것인데, 이러한 한계에 대한 인식은 그것을 극복할 계기로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논의되는 내용은 변혁 운동에 긍정적인 효과를 충분히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1. 논의의 기본 틀

 

양질전화,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 부정의 부정의 법칙은 변증법의 기본 법칙 중 하나이다. 발전은 위 기본 법칙을 모두 반영한 것으로,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은 통일로서의 발전을, 그리고 부정의 부정의 법칙은 자기복귀로서의 발전(반복으로서의 발전)의 길을 열어 준다. 두 발전 모두 양적 변화에서 질적 변화로의 전화라는 기본적인 성격을 포섭하고 있다. 이 중에서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 즉 통일로서의 발전은 대립물의 전화, 즉 상호전화가 갖는 발전의 계기성이 성립될 수 있게 해 준다. 논의의 기본 틀을 확인하기 위해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 ▲부정의 부정의 법칙, ▲발전, ▲대립물의 전화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짚고 넘어가 보자.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은 모든 대상 및 현상에는 내적 모순이 항상 내재되어 있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변증법의 기본 법칙으로 여겨진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투쟁, 사멸해 가는 것과, 생겨나는 것 사이의 투쟁 등이 그것이다. 이 투쟁이 제 관계의 양적 변화로부터 질적 변화로의 전화로서 그 내적 내용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양적 변화에서 질적 변화는 각 상이한 입장에 따라 투쟁의 경향에 불과하다는 입장, 따라서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에서 통일은 무조건적으로 질적 변화가 관철되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정식화하는 입장, 또는 통일에서 질적 변화는 일반적으로 관철된다는 입장으로 나눠지는데, 레닌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인 해석은 후자로 되고 있다.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은 발전에 관한 여러 입장을 소개하면서 상세히 다룰 것이다.

 

부정의 부정의 법칙은 발전관 논의에서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보다 훨씬 많은 논란거리를 갖는다. 즉, 가장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쏘련의 ≪철학 교정≫을 포함하여 국내에 번역된 수많은 변증법적 유물론 입문서는 부정의 부정의 법칙에 대해서 설명할 때 일반적으로, 변증법적 부정이 갖는 ‘발전의 법칙’이라는 성격에서 많이 설명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 양질전화의 법칙 및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과 입체적으로 접목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입문서라는 한계로 인해 구체적인 내용상에서 그것은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철학 교정≫은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 대립물의 투쟁의 해결의 합법칙적인 결과로 관철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부정의 부정의 법칙에서 다루어지는 ‘존재의 자기복귀’라는 측면은 헤겔이 ≪대논리학≫에서 제공한 설명과 크게 이질적이지는 않지만, 그러한 설명을 하는 방식을 검토할 경우, 발전에서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이 갖는 역할을 상대적으로 경시했다는 비판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

 

극소수의 철학 입문서는 부정의 부정의 법칙에 관한 설명에서 비로소 발전을 다루는데, 이는 적어도 레닌이 대립물의 투쟁과 통일의 법칙을 다루었을 때, 그것과 연관하여 발전을 다룬 그 비중과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으며, 쓰딸린과 마오쩌뚱의 해석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측면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조는 1950년대 말 이후 형성된 현실 사회주의권 내 수정주의 경향이 강하게 작용하여 생겨난 기조로 보이지만, 1950년대 말 이후에서 현실 사회주의권의 쇠락까지 흔한 경향은 아니었다.

 

발전에 관해서는 쓰딸린 사후 일반적인 입장이 없다고 할 만큼, 과거 현실 사회주의권에서 활발히 토론되었다. 블라지미르 레닌은 “세계의 모든 사건들은 그 자기운동에서, 그 자발적 발전에서, 그 살아 있는 생활에서 인식하는 데 필요한 조건은 그 모든 사건들을 대립물의 통일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발전은 대립물의 투쟁이다. 두 개의 근본적인 발전관은 감소 및 증가로서의, 즉 반복으로서의 발전과, 그리고 다른 하나는 대립물의 통일로서의 발전이다[1]W. I. 레닌, ≪철학 노트≫[1909-1913], 홍영두 역, 논장, 1989, p. 300.라고 하였는데, 레닌은 여기서 ‘반복으로서의 발전’은 발전의 근원을 따지는 데 있어 막연할 뿐이며, 대립물의 통일로서 발전만이 그 근원을 밝혀낼 열쇠라고 하였다. 투쟁과 통일은 영원한 변증법적 운동을 서로 규정해 준다는 점에서, 이는 발전을 대립물의 전화라는 일반적 성격에 의해 규정할 수 있게 해 준다.[2]이러한 입장은 발전에 대해서 헤겔이, 절대자의 자기복귀로서, 부정의 부정으로 정식화한 발전의 변증법적 운동과, 발전과 무관한 상호전화라는 … Continue reading 여기서 반복으로서의 발전이 열쇠로 취급되지 않는다는 입장, 더 나아가서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 발전에 있어 상대적으로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보다 덜 본질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그 근저로, 반복으로서의 발전이 부정의 부정의 법칙과 대응되는 것이라는 점을 연결시킬 수 있는 내용은 엥엘스의 ≪반뒤링론≫에서도 등장한다. 엥엘스는 부정의 부정의 법칙을 반복 또는 복귀의 측면에서의 발전을 설명하는 데 많이 동원한다. 그는 ≪반뒤링론≫에서 부정의 부정의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모든 문화적인 인구 집단은 토지의 공동 소유를 기초로 출발한다. 일정 정도의 원시적 단계를 넘어서면 모든 인구 집단에 있어 이 토지의 공동 소유가 농업 발전 과정의 진행 속에서 생산에 대한 질곡[즉, 공동 소유의 부정으로서: 인용자]으로 변한다. … 토지의 사적 소유는 또 부정되며, 이것을 다시 공유 재산으로 전화시키려는 요구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 그러나, 이는 고대의 원시적 공동 소유의 부활은 아니다. … 현대의 화학적 발견 및 기계적인 발명을 생산에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MEW, Bd. 20, SS. 128-129.)

 

이러한 설명 외 그는 고대 유물론이 부정의 부정을 통해 근대 유물론으로 부활하는 과정도 부정의 부정으로 설명한다(MEW, Bd. 20, S. 129.). 이러한 설명 외, 즉 풍부화된 반복과 복귀로서 부정의 부정을 설명하는 것 이외의 예는 ≪자연변증법≫과 ≪반뒤링론≫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한편으로, 왜 고대의 인구 집단이 공동 소유를 갖는지, 즉 부정의 부정에서 본질에 대응되는 존재가 왜 공동 소유인지에 대해서는, 그리고 왜 최종 발전의 방향이 공동 소유인지에 대해서는 부정의 부정이 모두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대립물의 전화란, 하나의 모순을 이루는 양 대립항의 지위 측면(주요한 측면 또는 부차적 측면) 또는 성질이 전화하는 것을 말한다. 대립물의 전화는 크게 여섯 가지 형태로 나눠진다.

(1) 대립물의 통일을 확보한 상태에서 모순의 주요한 측면과 부차적인 측면의 위치 변화

(2) 대립물의 통일을 확보한 상태에서 양 항의 전화, 이후 두 모순을 이루는 변화

(3) 대립물의 통일을 확보한 상태에서 양 항의 전화, 이후 두 모순을 이루고 다시 하나의 모순으로 복귀하는 변화

(4) 대립물의 투쟁(상호배제)에서 모순의 주요한 측면과 부차적인 측면의 위치 변화

(5) 대립물의 투쟁(상호배제)에서 양 항의 전화, 이후 두 모순을 이루는 변화

(6) 대립물의 투쟁(상호배제)에서 양 항의 전화, 이후 두 모순을 이루고 다시 하나의 모순으로 복귀하는 변화

 

(2), (3), (5), (6)이 그 결과에서 통일에서 투쟁, 또는 투쟁에서 통일로 될 수 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총 열 가지의 형태로 나눠진다고 할 수 있다.

 

상호전화된 양 대립항은 그것 자체로 새롭게 규정된 이질성에 따라 피규정에서의 존재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존재 지위를 갖게 된 양 항(정확히는 양 항 중 하나만 존재 지위를 확보하는 변화가 일어났다)은 대립 조건 속에 들게 되면서, 그 조건에 맞는 항(대립항)과 모순 운동을 하게 된다, 여기서 하나의 대립 단위인 ‘A(존재/본질)-B(본질/존재)’가 두 대립 단위, 즉 ‘A′(존재/본질)-C(본질/존재)’와 ‘B′(존재/본질)-D(본질/존재)’(상호전화된 A는 A′, B는 B′로 된다)로 분화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헤겔은, 이러한 전화를 현상적 층위의 변증법[3]칼 맑스는 헤겔이 ≪법철학≫에서 본질과 현상의 관계를 주어(정치적 심성)와 술어(정치적 체제)의 관계로 일관되게 파악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 Continue reading이라고 규정한 후, 이 전화는 필연적으로 본래 존재에 대한 원환적 복귀를 관철시킨다고 하였으나, 이러한 설명은 절대정신의 불변성과 영원성을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4]엥엘스는 ≪반뒤링론≫에서 헤겔의 ‘무시간적으로 경과한 존재’를 근본적으로 신비주의적 관점이라 비판하는데, 헤겔의 객관적 관념론의 … Continue reading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 만약, 그러한 류의 자기복귀를 인정하게 되면, A는 B와, B는 A와 맞짝을 이루어 영원히 자기복귀의 운동을 하게 될 것이다. 계속되는 모순 운동을 통해, 즉 부정의 부정을 통해 규정된 다른 항이 A와 B와 같은 대립 관계를 구성할 경우, 부정의 부정을 통한 발전이라는 논리적 규정을 받는 항은 고갈될 것이다(그것을 유물론적인 세계관에서 해석하는 한). 그렇다면, 발전 또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변증법적 생명력으로 인해 생성된 다양함은 끊이지 않고 관철되는데, 이러한, 질적 변화라는 발전적 측면으로서만 확립될 수 있는 다양함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가? 헤겔의 견해에 따른다면 그것은 바로 항을 ‘무한히 공급’하는 절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만이 변증법적 부정에서 절대자로 된다. 그리고 절대자의 복귀(절대정신의 복귀)에서 피규정태로서 본질은 원환적인 복귀의 대상이 된다.[5]≪법철학≫에서 상정한 현상(정치적 체제)이 ‘심오한 본질’로서 ‘심성’에 ‘반란’을 일으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것 자체로 … Continue reading 원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절대자가 될 경우, 그것도 절대정신과 같은 지위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설사, 그것이 새롭게 형성된 대립 단위로서, 가능성에 불과했던 자기복귀로서의 변증법적 부정이 현실로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발전의 근원을 탐색하는 두 길 중 하나의 계통으로서, 반복으로서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6]이와 관련해서 엥엘스는 ≪자연변증법≫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고정된 대립물들은 근거와 그 결과, 원인과 그에 대한 작용, 동일성과 차이, … Continue reading 엥엘스는 물질이 존재-본질의 관계에서 존재의 지위를 차지하는 이유로 통일성, 항존성, 무한성을 들었지만, 헤겔의 절대정신에는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검증된 바 없으며, 오로지 인식주관의 구상 속에서나 있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절대정신은 ‘전지전능한’ 공문구에 불과한데, 이러한 것은 피규정 관계에서 본질을 이루는 존재로 될 수 없다.[7]그러나, 헤겔은 자신의 저서 ≪정신현상학≫에서 인식주관(존재)과 그것의 본질로서 대상(확신적 대상, 보편적 대상, 개념, 이념) 사이에서 … Continue reading

 

레닌의 해석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대립물의 투쟁이 그 투쟁에 따른 필연적 통일로서 새로운 내적 분화라는 가능성(한편으로 현실성과 짝을 이루는)을 추동한다는 것을 레닌이 정확히 이해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헤겔의 전통적 논지 아래에서 동일함을 전제로 한, 발전의 가능성이 관철되지 않는 일(一)에서 다(多), 그리고 다에서 일을 상정하고 투쟁의 논리를 전개하였다면, 통일은 적어도 발전으로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레닌에게서 일중다-다중일은 헤겔적 의미에서 ‘단순화’된 대립물의 전화에 관한 설명에서 상정하는 전제와는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다.[8]이 지점에서 레닌은 발전이 갖는, 양적 변화에서 질적 변화라는 성격과,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관철되는 내적 내용의 내포 크기 증대 및 그에 따른 … Continue reading 돌아와서, “발전은 대립물의 투쟁이다”라는 레닌의 간단한 언급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말에는 대립물의 전화 자체가 본래 상호 피규정이라는 대립 관계 속에서, 부정의 시작점이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은 헤겔 이후 이어진 변증법 체계에서 아주 기본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전화가 발전의 계기를 필연적으로 내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헤겔이 이중적으로 구분하여 발전의 성격을 거세[9]“무기적 자연에 ‘발전’은 없다. 생명체에서는 ‘발전’의 맹아 형태가 보이지만, 본래의 의미에서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정신의 … Continue reading했던 그 ‘전화’에 대해, 레닌은 사실상 그것이 발전의 일반적 성격을 구비한 것과는 다르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10]그러나, 이러한 논법은 언뜻 궤변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우리 앞에 놓인 사과가 썩게 되는 것을 발전이라고 할 수 있는가? 뒤에서 논의하겠지만, … Continue reading 그러나 이러한 입장에 관한 이견은 역시 현실 사회주의권에서 제기되었다. 이 정식에 문제를 제기한 자들은 헤겔적 전통을 중시하여, 본질의 변증법으로서 발전과, 현상의 변증법으로서, 발전적 계기가 전혀 없는 위치 변화로서 그것을 나누고자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탈스탈린’이라 불리는 수정주의화가 이루어진 후에 성장한 관점이었는데, 그것은 당시 경제 지도에서 수정주의화에 따른 성장 동력의 정체를 반영한 것이었다.

 

 

2. 발전에 관한 여러 견해들

 

발전에 관한 견해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졌다. 첫 번째 견해는 발전관에 있어 부정의 부정의 법칙의 독보성을 거부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다. 두 번째 견해는 발전관에 있어 부정의 부정의 법칙의 독보성을 승인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다. 마지막인 세 번째는 둘 사이를 절충한 입장으로 그 내용은 수정주의 영향을 받은 쏘련 내 일부 철학 교과서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세 입장 모두 헤겔의 ≪대논리학≫은 물론이고, 맑스의 ≪경제학-철학 초고≫, 엥엘스의 ≪자연변증법≫ 등에서 나름의 근거를 갖추고 주장되는 것들이며, 부정의 부정의 법칙과 발전관 사이의 연관을 규명한 후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의 성격도 재조명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첫 번째 견해는 블라지미르 레닌(신칸트주의와의 투쟁을 통해), 이오씨프 쓰딸린(멘쉐비끼적 관념론 및 기계론과의 투쟁을 통해), 마오쩌뚱(‘서책주의’로 대표되는 교조주의와의 투쟁을 통해)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레닌의 경우 부정의 부정의 법칙을 존재와 본질이 서로 쌍을 이루며 풍부화를 이룬 자기복귀 측면에서의 발전과 밀접하게 다룬다. 즉, 레닌이 ≪철학 노트≫에서 언급했던, ‘반복으로서의 발전’을 말하는 것인데, 발전의 근원을 찾아가는 두 길(‘두 개의 근본적인 발전관’)에서 이것은 레닌에 의해 ‘죽은, 창백한, 무미건조한’(“발전의 근원에 대한 열쇠인가, 아닌가?”라는 의미에서)으로 언급되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발전의 객관성은 부정되지 않으며, 다만 그것은 대립물의 통일로서 발전에 포섭되는 것으로 취급된다.

 

레닌은 ≪일보 전진 이보 후퇴≫에서 저마다의 발전은 모순의 변증법적인 길로 나아가며, 그 길은 대립물의 위치 교환(전화)을 통해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11]W. I. Lenin, Ein Schritt vorwärts Zwei Schritte zurück(Lenin Werke, Bd. 7), Berlin, 1956, S. 416. (고트프리트 슈틸러, 앞의 책에서 재인용.) 그는 다양한 발전을 언급하였다. (1) 부정의 부정으로 대표될 수 있는 반복하는 발전, (2) 나선형 발전[12]엄밀하게 말하자면, 시종일관 정향(正向)적인 발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발전에는 전진적 발전, 즉 발전의 능동적 측면, 또는 발전으로서의 풍부한 … Continue reading, (3) 비약적이고 격변적이며, 혁명적인 발전(점차성의 중단), (4) 양질전화로서 물체나 현상의 범위 및 사회의 내부에 작용하는 여러 가지 힘 및 그 경향의 경향의 모순 의해 생긴 발전의 내적 충동, (5) 상호침투를 통한 상호의존의 성립 등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와 ≪자본≫에서 생산가격을 가치의 발전으로, 시장가격을 생산가격의 발전으로, 경화를 금인 화폐의 발전으로, 마찬가지로 이윤을 잉여가치의 발전으로 설명하였는데, 이는 발전에 관한 레닌의 내용과 합치된다. 엥엘스의 ≪자연변증법≫과 대조하여도 합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엥엘스는 역학에서 물리학, 물리학에서 화학, 화학에서 생물학, 그리고 생물학 체계 내에서 각 생물 분류 내 진화 과정을 발전이라고 언급한다.[13]프리드리히 엥겔스, ≪자연변증법≫[1872-1883], 윤형식ㆍ한승완ㆍ이재영 역, 중원문화, 1989, p. 28.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엥엘스가 발전 사례로 언급한 것들이 모두 체계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었다는 것이며, 양적 변화에서 질적 변화로의 이행이 하나도 빠짐이 없이 관철되었다는 것이다.

 

맑스, 엥엘스, 레닌의 유물변증법 교의를 계승한 쓰딸린은 “변증법적 방법에서 당장은 확고해 보이지만 이미 쇠퇴하기 시작한 것보다는 비록 당장은 확고해 보이지 않지만 생성 발전하고 있는 것을 무엇보다도 유력한 것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변증법적 방법에서 생성 발전하고 있는 것만이 무적이기 때문이다[14]이오씨프 쓰딸린,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상)”[1938], 신재길 역, ≪정세와 노동≫ 제174호(2021년 9월), 노사과연 참조.라고 하였는데, 이는 변증법적 방법에서 발전의 관철이 일차적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쓰딸린은 “변증법적 방법은 발전 과정을 이미 발생한 것의 단순한 반복이나 순환 운동이 아니라 전진하고 상승하는 운동으로, 낡은 질적 상태에서 새로운 질적 상태로의 전환으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의 발전으로 응당 이해하고 있다. … 그리고 이 대립물의 투쟁 즉 낡은 것과 새 것, 죽어 가는 것과 태어나는 것, 소멸하고 있는 것과 발전하고 있는 것 사이의 투쟁은 발전 과정의 내적 내용,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환이라는 내적 내용을 이룬다.맑스는 변증법적 방법에 의해 밝혀진 현상의 상호연관과 상호의존은 운동하는 물질의 발전 법칙이라고 하였다[15]같은 글.라고 하며 변증법적 발전의 원칙을 재확인 및 정리하였다. 여기서 상호연관 일반과 상호의존 일반은 발전이라는 관점이 제시되었는데, 물질의 상호연관 및 상호의존은 사라질 수 없는 물질의 가장 기본적인 성격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은 물질이 소멸하지 않는 한 항시적이란 점에서 발전의 일반성이 관철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쓰딸린은 “만약 자연의 현상 관계와 상호의존이 자연의 발전 법칙이라면, 결과적으로 사회생활의 현상 관계와 상호의존 역시 사회의 발전 법칙이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16]같은 글.라고 주장하여,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으로서 발전관, 발전의 일반성이 대립물의 전화 그 자체로 관철된다는 것을 확립하였다.

 

마오쩌뚱은 ≪모순론≫에서 대립물의 전화의 일반 법칙이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임을, 그리고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이 발전의 열쇠라는, 그리고 바로 그러하여 전화에서 발전의 일반성이 관철됨을 공고화하였다.

 

유물변증법 우주관은 … 사물의 발전을 사물 내부의 필연적인 자기운동으로 간주하고, 각 사물의 운동은 모두 주변의 다른 사물과 서로 연관되어 있으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물이 발전하는 근본 원인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사물 내부의 모순성에 있다. 모든 사물은 내부에 이러한 모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운동하고 발전한다. 사물 내부의 이러한 모순성은 사물이 발전하는 근본 원인이며, 한 사물과 다른 사물의 상호연관과 상호영향은 사물이 발전하는 두 번째 원인이다.[17]모택동, ≪모순론≫[1937](중국 공산당 중앙문헌편집위 편, ≪모택동 선집 I≫), 이희옥 역, 전인, 1988, pp. 168-169.

 

동부 민주독일의 유물변증법 연구자인 고트프리트 슈틸러(Gottfried Stiehler)는 대립물의 전화가 갖는 발전의 일반성을 연구하였는데, 그 성과는 ≪변증법적 모순≫(1966)에서 드러난다.

 

그는 헤겔이 대립물의 전화에 관해 비일관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의미 있는 학문적 진전을 이룬 것에 대해 언급하며, 엥엘스가 헤겔이 말하는 전화의 신비주의 외피를 걷어 내고 그것을 유물변증법의 전화로, 발전의 일반적 특성을 갖는 전화로 지양 및 발전시켰다는 것을 언급한다. 슈틸러는 맑스와 엥엘스가 말했던 대립물의 전화는 용어상 두 가지 형식으로 나누어진다고 말한다: “한 형태는 한 대립물이 다른 대립물에로 전환(양에서 질로의 전환)되고, 다른 형태는 한 상태로부터 그 대립된 상태에로의 ‘현상’(Erscheinung)의 전환(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 형태로부터 생산력에 대한 족쇄로 바뀜)으로 주장되었다.”[18]고트프리트 슈틸러, 앞의 책, p. 70. 이어서 슈틸러는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의 법칙에 따라 보면, 두 번째 표현 방식은 필연적으로 질적 변화를 다시 불러온다는 점[19]왜냐하면, 특정한 영역에서 양적 변화의 축적은, 그것이 질적 변화로 나아가게 하는 한도에 도달하도록 하기 때문이다.에서 첫 번째 표현 방식이 두 번째 표현 방식의 축약된 형태라고 주장한다.[20]고트프리트 슈틸러, 앞의 책, pp. 70-71. 슈틸러는 대립물의 전화가 갖는 위의 특징을 통해, 형식-규정적으로는 그것이 양에서 질로 이행하는 법칙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보았다.

 

슈틸러는 대립물의 전화는 발전의 성격을 갖는다[21]같은 책, p. 71.고 하였다. 그것은 뚜렷한 발전으로의 추동을 위한 재배열로서, 가능성(발전의 가능성)과 현실성(본래의 현실성)의 위치 교환으로부터, 그리고 그 가능성이 인간을 매개로 하여 현실성으로 됨으로부터, 외적 충돌을 통한 극적인 것으로의 도달, 그리고 그로부터의 발전으로부터 성립된다고 한다.[22]같은 책, p. 72. 그러나 한편, 그러한 위치 교환이 새로운 것을 낡은 것으로 대체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러한 전체 모순 배열에는 새로운 것이 되었다고 하지만, 발전은 조만간은 우연적인 것으로 된다. 이렇게, 대립물의 전화에서 발전은 “있을 수 있는 것’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발전이 우연적으로 관철된다는 것을 그 필연적 근원을 따져서 이해한다면, 대립물의 전화가 오로지 질에서 양으로의 이행이 일반적일 때 그것이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질에서 양으로의 이행(이것의 가장 일반적인 관철은 한도량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이 일반적일 경우엔, 아직은 발전은 현실성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며, 가능성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질에서 양으로의 이행을 통해 관철되는 ‘가능성으로서의 발전’이 실은 ‘현실성으로서의 발전’의 부정으로서, 그것이 실질적으로는 발전을 제약하는(한도로서) 현실성으로 기능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질에서 양으로의 이행은 발전의 한계영역(Grenzbereich) 설정의 근원이다. 슈틸러의 해석은 현실성과 가능성, 필연성과 우연성의 변증법적 이해에 따르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어서 슈틸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대립물의 상호전화는 발전 과정에서 그 자리를 확보함이 밝혀진다. 발전의 내적 추동력은 일련의 극()적 속성들과 특징들이 자리를 바꾸는 데 영향을 미친다. 여기에서 이러한 위치 교환은 보다 높은 발전을 나타낸다.[23]같은 책, p. 84. … 실제적 운동과 발전의 형태 규정성인 대립물의 객관적 변화에서 그것은 다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한’ 방향에서의 대립물의 위치 교환은 ‘대립된 방향’에서의 위치 교환과 대응된다. 이러한 대응은 동시적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 [대립물의 전화의 두 가지 경로 중] 양에서 질로의 전화함에서 대립적인 전화 과정은 동시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즉, 양적 변화는 질적 차이로 이행하고, 이것은 다시금 연결된 계속적인 양적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 … 사회에서 진보적 과정, 상승하는 발전으로 표현되는 전자(자극받고 촉진되는 것)의 과정은 자극되고 촉진되어야 한다. 반면 지나친 양적 변화에 의해 긍정적이고 유용한 것을 부정적이고 해로운 현상으로 되돌리려는 것들은 억제되어야 한다.[24]같은 책, pp. 87-88.

 

지금까지의 논지를 일관되게 적용할 경우, 위 설명은 양적 변화에 대해, 그것은 발전의 가능성을 규정하는 이행이라고 할 수 있으나, 동시에 그것은 발전이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전화(규정)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로, 결과적으로는 질적 변화(발전)로서 나아가기까지의 양적 변화의 필요 축적량을 판가름하는 한도량, 그 한도량의 크기를 지나치게 증가시켜서 발전의 방해 요인이 될 수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를 다시 연역한다면, 슈틸러는 양에서 질로의 이행으로서 대립물의 전화를 일반적 의미에서의 발전이라고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발전에 대한 레닌적 교의, 그 이후의 쓰딸린의 교의와 일치한 것이다.

 

슈틸러는 “대립물의 위치 교환은 첫 번째로는 근거에 놓여 있는 현상의 이러한 구체적 동일성을 통하여 대립물들의 통일로 규정되고, 둘째로 이 통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대립물들이 주어진 과정의 극들을 형성한다. 그에 따라 대립물의 통일은 … 시간적 계기(繼起)로 차례대로 현실화된다”[25]같은 책, p. 77.고 하여 전화가 갖는 발전(통일이 갖는 일반적 성격이 발전임을 고려할 때)의 성격을 재확인한다. 그는 둘(대립물의 전화와 대립물의 통일)을 기계적으로 분리하려고 했던 헤겔의 모호한 시도는 맑스, 엥엘스, 레닌의 변증법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하였다.

 

제시된 헤겔의 입장에 대한 맑스의 비판과 레닌의 발전관, 그리고 그 이후 발전에 대한 이론에 따르면, 대립물의 투쟁은 발전의 절대성과 대응되는 것으로서, 그것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내적 내용의 풍부화, 즉 모순 관계에서 각 항이 내포한 내용의 증대와 체계의 유기성 고도화는 물질의 상호연관 및 의존 정도와 비례한다. 가령, 가시적 우주와 관측 가능한 우주라는 구분을 보자. 후자는 디커플링 효과를 통해 광자가 형성 및 분리(를 반복하는)된 시점 이후의 우주인데, 이 우주는 인류가 유의미한 관측 결과를 가질, 그 가능성을 무한히 제공한다. 광자의 형성 및 분리는 그것 자체로 물질의 발전 법칙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빛이라는 새로운 형의 대립물의 통일을 생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빛의 성립은 우리가 관측 가능한 우주를 기준으로 하여, 몇 가지 과학적 수행과 방법에 따라, 지구로부터 몇만 광년 떨어진 거리를 물리학적으로 추론할 수 있게 해 준다. 프리드만 방정식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엥엘스는 더 간단한 예로 마찰불의 성립이 어떻게 인류 발전에 영향을 주었는지 간단히 언급한 바 있다. 이렇게 물질의 발전 법칙에 따른 물질의 발전은 인류의 인식 지평을 확대해 주는 일대 계기로 된다. 상호전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상호전화가 상호침투를 불러와, 통일이라는 질적 변화의 양적 증대를 가져오는 계기로 된다면, 이를 충분히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이 발전의 열쇠라는 입장과, 이에 반대하는 수많은 입장이 공존하던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전반 시기에 행해진 쏘련 철학계의 논쟁에서 첫 대결은 이른바, 이후 ‘멘쉐비끼적 관념론’이라 불리게 되는 데보린 학파[26]데보린 학파는 모순의 범주를 구성함에서 일정 학문적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변증법의 맑스ㆍ엥엘스적 단계와 헤겔 변증법을 절충하였는데, … Continue reading와, 부하린을 필두로 한 ‘균형론’ 학파[27]‘균형론’은 모순을 통한 변증법적 발전을 부정하였으며, 논리적(선차적)으로 짜여진 물질의 제 관계가 그 스스로의 제 관계를 현실에 실현시키는 … Continue reading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이 논쟁은 발전관 외에도 모순 운동의 성격과, 물질-의식 관계까지 논하는, 변증법의 여러 주제를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논쟁이었는데, 이 논쟁에서 부하린 일파의 ‘균형론’이 패배하였다. 이후 1930년대 초입기까지 데보린 학파가 철학계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데보린 학파의 발전관은 헤겔 변증법의 전통적 측면을 그대로 옮겨 붙인 것에 불과했으며, 특히, 물질-의식 관계 문제에 대해선 객관적 관념론의 성격을 띠기도 하였다. 이에 두 번째 대논쟁이 촉발된다. 여기서 아브람 데보린은 패배하였고, 맑스주의 변증법의 레닌적 단계에서 확립된 ‘두 개의 근본적인 발전관’ 및 발전에 관한 레닌의 교의가 지배적인 해석으로 되었다. 이 과정에서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 변증법의 기본 법칙이라는 내용이 새롭게 형성된 볼쉐비끼 당 교정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는데, 이는 어떠한 측면에선 “전화에는 그것이 후진적이라고 보일지라도 발전의 계기가 내포되어 있다”는 발전의 항시성을 강조한 시도일 수는 있겠으나, 발전의 근원 탐색의 두 길 중 하나인 반복(또는 그것의 자기복귀)으로서의 발전, 본질에 의한 피규정으로서 존재의 풍부화된 복귀로서의 발전을 경시할 수 있게 되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는 점에서 비판의 소지가 존재한다.

 

쓰딸린 사후 쏘련 내 수정주의 경향이 강화되면서 이 입장은 부분적 차원에서 그 지위가 흔들리는 처지로 되었다. 이러한 해로운 경향에 가장 치우쳐진 예는 발전을 설명하는 ‘유일한’ 법칙으로 부정의 부정의 법칙을 꼽는, 즉 그것이 발전을 설명하는 데서 독보성을 갖는다는 의미로서 그것을 변증법의 발전에 관한 기본 법칙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레닌부터 이어진 이러한 발전관은, 수정주의 경향이 심화된 이후에도 현실 사회주의권 내 적지 않은 학자들―대표적으로 오또 꾸우씨넨(Otto Kuusinen), 귄터 클리마젭스키(Günter Klimaszewsky) 및 앞서 언급한 고트프리트 슈틸러 등이 있는데, 언급된 세 철학자들은 모두 부정의 부정의 법칙을 변증법의 기본 법칙으로 다루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선 동의하였다―은 엥엘스, 레닌, 쓰딸린의 발전관에 기초하여 변증법의 기본 법칙 및 그로부터 관철되는 발전에 대해 다루었다. 한편으로, 1950년대 말 이후 레닌과 쓰딸린에 의해 파악된 발전관을 불완전한 내용으로 규정하고, 절충된 방식―까쉬찐쓰끼와 루트께비치의 ‘비가역 발전관’이 대표적이다―의 설명을 제공한 사례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두 번째 견해는 발전의 근원을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으로 보지 않으며, ‘두 개의 근본적인 발전관’을 거부하는 입장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발전은 부정의 부정의 법칙을 통해서만 확립될 수 있으며, 변증법의 기본 법칙상에서 나머지 두 개의 법칙은 모순의 발전의 측면을 설명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 관점은 첫 번째의 관점으로 따진다면, 전화로서 충분히 관철되는 발전의 일반성을 부정하며,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 발전의 유일한 열쇠라고 주장한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초까지 활동한 쏘련의 데보린 학파는 이러한 경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쏘련 유물론 학파 전반에서 이러한 관점을 지닌 경우는 극소수였으며, 1956년 이후 쏘련이 수정주의의 늪으로 빠졌을 때도, 발전에 관한 부정의 부정의 법칙의 독보성을 주장하는 경향은 매우 극소수의 경향에 불과했다.

 

세 번째 견해는 절충적 입장으로, 쓰딸린 사후 몇 부문에서 일반적인 견해로까지 되었다. 절충적 입장은 다종다양했는데, 그 세부적인 입장만 해도 열 가지가 넘었다. 절충론은 간단한 이론부터, 난해한 이론까지, 다양한 양상을 보이며 나타났으며, 수정주의 경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유행하게 된 발전 사조였다. 실례로, 미하일 루트께비치(Михаил Руткевич)는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 전진적 발전을 설명하는 일반성을 표할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법칙에 불과하다는 과도한 입장으로까지 나아간 동시에 발전의 여러 형식이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각 발전의 형식을 형이상학적으로 분리하였다.[28]소연방과학아카데미, ≪맑스주의 변증법의 역사 II≫[1971], 문성원 외 역, 한울림, 1990, pp. 284-285. 이러한 그의 경향은 싸빠 두젤(Савва Дудель)에 의해 옳게 비판되지만, 두젤의 비판은 발전의 여러 형식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인식은 있으나, 운동 개념과 발전 개념을 완전히 분리한 전제가 그 비판의 상위에 전제되었다는 점에 역시 한계가 있었다.[29]같은 책. 한편, 루트께비치는 발전의 유일한 근거로 비가역성을 들었는데, 그는 양에서 질로의 이행, 발전을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체계의 유기적 구성 고도화)으로, 낮은 것으로부터 높은 것(내적 내용의 풍부화)을 발전이라고 규정하는 기존의 발전관에 반대하였다. 심지어 그는 세 발전의 기준을 비판할 때 서로가 독립된 영역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러나, 비가역성을 발전의 기준으로 본다면, 엥엘스가 언급한, 순수 장소 변화적 운동마저 발전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30]岩崎允胤ㆍ宮原將平, ≪자연과학과 변증법≫, 김성연 역, 미래사, 1987, p. 90. 역학 운동은 중력파의 변화와 필연적으로 조우하고 있는데, 열역학적 운동, 더 나아가 자연 세계의 운동에서 엄밀한 의미의 가역적 운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열역학에서는 이론의 성립을 위해 일부 내용에서 그 가역을 가정하고 있을 뿐이며, 이는 부르주아 과학에서도 마지못해 인정하는 과학적 진리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모든 변화는 발전이 되어 버리는데, 이렇게 되면 객관적 운동 연관을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가역적 운동에는 발전의 계기가 없으며, 비가역적 운동만이 발전이다”라는 그의 주장은 비과학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동부 민주독일의 알프레트 코징(Alfred Kosing)은 ≪맑스주의 철학 교정≫에서 세 기본 법칙의 유기적 총체성을 부정하였으며, 세 기본 법칙을 각각 독립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각 기본 법칙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이해를 보여 주었다.[31]Alfred Kosing, Marxistische Philosophie. Lehrbuch, Dietz, 1967, SS. 41-42.

 

맑스-레닌주의 입문서에서 절충론은 그 논의 수준의 얕음이라는 근본적 한계로 인해 크게 드러나 있지는 않다. 쏘련의 ≪철학 교정≫은 그 내용에서 맑스-레닌주의 세계관에서 벗어났다고 할 절충론적 관점이 확인되지는 않는데,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 발전에 대해 갖는 독보성을 승인하지는 않으며,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이 발전의 원천임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부정의 부정의 법칙에서 관철되는 발전에 대해 설명할 때,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이 다른 기본 법칙과 관계하면서 그것의 발전을 어떻게 유기적으로 규정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상세히 나와 있지 않다. 동부 민주독일의 한스 슈토이슬로프(Hans Steußloff)가 감수한 ≪변증법적 유물론≫ 역시 이와 유사한 입장이다. 뾰도르 꼰쓰딴찌노프(Фёдор Константинов)의 ≪맑스-레닌주의 철학의 본질≫ 및 빅또르 아파나씨예쁘(Виктор Афанасьев)의 ≪대중철학≫은 내용의 양적 측면에서 보자면 얕다고 할 수 있으나, 그에 비해서 두 기본 법칙이 발전에서 갖는 양자 유기성을 앞에서 다룬 입문서에 비해 간단히 설명해 놓았으며,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 갖는 발전을 반복과 복귀라는 측면에서 설명해 놓았다.[32]그러나 꼰쓰딴찌노프는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 갖는 특징적인 면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모호한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복귀 및 반복에서 … Continue reading 이러한 점에서 이 저서의 기본 내용은 첫 번째 입장에 매우 근접해 있다. 1980년대 말에 들어설 무렵 고르바쵸프의 이데올로기 부문 지도자인 이반 프롤로프(Иван Фролов)가 감수한 ≪철학 교과서≫는 맑스-레닌주의 세계관을 모든 면에서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으로 후퇴시킨 저서로, 변증법의 기본 법칙에 대한 몰이해를 넘어서, 모든 내용에서 주관적 관념론에 기초한 절충론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앞에 나열된 입문서와 매우 극단적인 내용 차이를 갖는다.

 

 

결론

 

변증법적 발전에 관한 논의는 10월 혁명을 통해 러시아에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끊이질 않았다. 변증법적 발전에 관한 학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성립된 동유럽의 인민정부 및 기존의 사회주의권에서 심도 있게 다루어졌다. 쓰딸린 사후 비록 이 논의는 일부 절충론적 성격을 갖게 되었지만, 그 이론적 고민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발전관에 대한 여러 견해를 확인함으로써 레닌에서 쓰딸린, 쓰딸린에서 마오쩌뚱으로 이어지는 발전관을 부정할 경우, 결국에는 무한한 항을 공급해 주는 지고의 절대이념을 상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이원론적 오류로 빠지는 길을 열어 놓게 됨을 알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1956년 이후 수정주의 경향이 짙어진 쏘련 내에서 맑스-레닌주의 세계관의 발전관이 어떻게 수정되었는지도 알아보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발전관이 어느 한 특정한 관점에만 천착하여 이해될 것이 아니라, 다양한 변증법적 원리를 고려함에 기초하여 이해되어야 함을 알았으며, 그렇지 못하면, 발전을 어느 한 관점이나, 지엽적으로 드러난 하나의 특수에만 골몰하여 해석하게 된다는 것도 파악하였다.

 

그러나, 한계도 존재한다. 우리는 ‘발전의 계기를 갖지 않는, 즉 발전이 관철되지 않는 변화’를 면밀히 다루지 못했다. 이에 관한 내용은 현실 사회주의권 내에서 매우 심오한 수준의 논쟁을 낳았다. 현실 사회주의권에서의 활발한 논쟁 속에서 이를 설명하는 이론은 발전을 설명하는 이론보다 훨씬 많은 류의 종류가 있으며, 당연한 것이지만, 이론물리학까지 동원되었다. 엥엘스는 역학적 운동, 즉 순수한 장소 변화적 운동을 발전과 구분되는 변화라고 보았는데, 그는 순수한 장소 변화적 운동을 양적으로만 관철되는 운동에 불과하다고 하였다.[33]프리드리히 엥겔스, 앞의 책, p. 259. 수많은 철학 교정들과 심오한 연구에서 이는 ‘객관적 운동 연관’이라고 하여, ‘발전 연관’과 구분한다. 그러나, 순수 장소 변화적 운동마저 발전의 계기를 갖추고 있다. 장소 변화적 운동은 존재와 비존재의 통일인데, 이러한 통일은 다시 투쟁을 거쳐 물리 법칙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러한 존재와 비존재의 통일이 어떻게 상이한 질이 아니라 양적으로 배열되며 장소 변화를 성립시키는지, 그리고 순수 장소 변화적 운동에는 어떻게 이러한 특수성이 적용되는지에 대한 그 시원적 내용, 과학적 틀을 갖춘 근거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바 없다. 엥엘스는 역학적 운동에서 물리적 운동으로의 발전을 양적 변화에서 질적 변화로, 즉 발전으로 설명하였다. 사실 발전과 변화에 관한 논의는 이와 직결되는 자연과학의 분야인 물리학과는 독립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데, 그런 만큼 이와 관련된 논의는 그 내용에서 상당한 난해함을 자랑한다.

 

다른 한계로는, 발전관에 대한 문서의 논의가 한국 사회를 바꾸는 데 직접 기여할 수 있는 형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맑스-레닌주의 세계관의 발전관 및 그 발전에 관한 논의가 어떻게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 현재 논쟁 중인 이른바, 사회구성체론에 어떠한 직접적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은 문서에서 전무한 상태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머리말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발전관에 대한 기초적인, 동시에 이론적인 논의가 변혁 실천에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마냥 긍정적인 효과가 없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모든 변혁 실천의 역량은 맑스-레닌주의 세계관을 철저히 학습하고, 한국 사회가 근본적인 변혁으로 나아갈 수 있게끔 그것을 실천에 철저히 적용해야 할 것이다.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W. I. 레닌, ≪철학 노트≫[1909-1913], 홍영두 역, 논장, 1989, p. 300.
2 이러한 입장은 발전에 대해서 헤겔이, 절대자의 자기복귀로서, 부정의 부정으로 정식화한 발전의 변증법적 운동과, 발전과 무관한 상호전화라는 변증법적 운동을 구분함에 대한 맑스의 근본적인 비판과 관련되어 있을 수 있다. 두 변증법적 운동 모두 헤겔에게서는 피규정을 처음 받는 존재와, 부정으로서 규정하는 본질(존재와 대비되는 본질로서) 사이의 매개로 인식되는데, 전자는 본질(현상과 대비되는 본질로서)로 후자는 현상으로 이분화되는 것으로 서술된다. 맑스는 이러한 헤겔의 서술(구분)이 이원론에 종착하게 될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엥엘스 역시 ≪반뒤링론≫에서 자연 일반, 즉 객관으로서 물질 일반을 현상에 한정된 것으로 취급한 헤겔을 비판하는 논지이다. 엥엘스는 외부 본질의 외현으로서 질료의 생성과 소멸에 반대하고, 물질 그 자체가 본질적 측면과 현상적 측면을 가지며, 현상과 본질, 두 측면은 그것을 가르는 기준, 즉 관념과 물질이라는 이질적 간극 따위는 없다고 보았다. 그는 시원에 연원하는 순수지가 절대지로 복귀하는, 헤겔의 ≪대논리학≫ 서문에서 원환적 복귀라고 한 그러한 측면에서 발전을 논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이념에 의한, 그것의 원환적 복귀로서의 규정을 발전으로 보는 것을 비판하고, 제 사물의 내적 구조의 풍부화를 통해 발전을 설명하였다. 이는 엥엘스가 단백질의 생성과 소멸을 논하는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3 칼 맑스는 헤겔이 ≪법철학≫에서 본질과 현상의 관계를 주어(정치적 심성)와 술어(정치적 체제)의 관계로 일관되게 파악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에게 있어 ‘현상’으로 간주되는 정치적 체제는 객관으로서, 더욱 풍부한 내용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체제는 항상 술어로, 즉 존재와의 짝을 이루는 본질로서만 고찰된다는 점을 비판한다(MEW, Bd. 1, SS. 208-209.). 이러한 전개 방식은 의식적인 것이, 그 부정으로서 현상(다른 말로 물질적인 것, 실재적인 것)적인 것의 피규정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며, 본질적으로는 그 근원에는 절대정신이 있다는 것을 함축하기 위함이라고 비판한다: “헤겔의 주된 오류는 무엇인가? 그가 현상에서는 모순인 것이 본질 및 이념에서는 통일되어 있다고 본 점에 있다. 여기서 모순은 [현상보다: 인용자] 더 심오한 것을 본질[존재와 쌍을 이루는 본질이 아니다]로 갖는다. , 본질상의 모순이 그 본질이다.” (MEW, Bd. 1, SS. 295-296.)
4 엥엘스는 ≪반뒤링론≫에서 헤겔의 ‘무시간적으로 경과한 존재’를 근본적으로 신비주의적 관점이라 비판하는데, 헤겔의 객관적 관념론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절대정신이라는 존재태의 불변성을 확정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MEW, Bd. 20, S. 48.).
5 ≪법철학≫에서 상정한 현상(정치적 체제)이 ‘심오한 본질’로서 ‘심성’에 ‘반란’을 일으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것 자체로 발전할 수 있는 모순이 아니라, 발전 없는 의미에서 ‘특수한 전화’, 즉 원환적인 복귀로서의 전화만 갖는다고 헤겔은 본 것이다.
6 이와 관련해서 엥엘스는 ≪자연변증법≫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고정된 대립물들은 근거와 그 결과, 원인과 그에 대한 작용, 동일성과 차이, 가상과 본질로 그대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대립물의 한 극에 대한 분석은 그것이 이미 다른 극에 현존하고 있음을 증명하며, 한 극의 일정한 점은 다른 극의 점에로 전환된다. 이처럼 모든 논리는 이러한 이행 과정에 있는 대립물들에 의해 발전된다.” (고트프리트 슈틸러, ≪변증법적 모순≫[1966], 양운덕ㆍ김재룡 역, 중원문화, 2009, p. 69에서 재인용.)
7 그러나, 헤겔은 자신의 저서 ≪정신현상학≫에서 인식주관(존재)과 그것의 본질로서 대상(확신적 대상, 보편적 대상, 개념, 이념) 사이에서 상호전화를 발전의 초석으로 놓기도 한다. 비록, 이것이 자기의식에 이르게 되면, ‘자기복귀의 순수’로서 인격적 대상을 생성하는 것으로 되지만, 그도 전화의 발전관을 불완전하게나마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그가 ≪정신현상학≫에서 구사한 이른바, 주인-노예 변증법에서 상세히 다루어지는데, 이는 ≪대논리학≫에서 대립물의 전화를 단지 변증법적 자기-제약으로 다룬 것과는 다른 입장이다.
8 이 지점에서 레닌은 발전이 갖는, 양적 변화에서 질적 변화라는 성격과,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관철되는 내적 내용의 내포 크기 증대 및 그에 따른 모순 체계의 유기적 구성 증대를 한꺼번에 설명하고 있다.
9 무기적 자연에 발전은 없다. 생명체에서는 발전의 맹아 형태가 보이지만, 본래의 의미에서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정신의 세계에서만 관철된다.”(≪역사철학강의≫)라는 헤겔의 언급처럼, 헤겔이 말하는 본질과 현상이라는 쌍은 생각보다 이원적이며, 정신과 질료 사이를 단정적으로 나누는 사고에 기초하여 논의된 것이라는 혐의를 지울 수는 없다.
10 그러나, 이러한 논법은 언뜻 궤변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우리 앞에 놓인 사과가 썩게 되는 것을 발전이라고 할 수 있는가? 뒤에서 논의하겠지만, 그것은 우리가 ‘발전’에 대해 갖는 막연한 편견(정확히는 목적론적 편견)과 관련된다. 발전과 후퇴는 서로 다른 범주에 있는데, 발전에는 전진적 발전과 후진적 발전이 있으며, 둘은 나선형 발전관의 기본 내용을 이룬다.
11 W. I. Lenin, Ein Schritt vorwärts Zwei Schritte zurück(Lenin Werke, Bd. 7), Berlin, 1956, S. 416. (고트프리트 슈틸러, 앞의 책에서 재인용.)
12 엄밀하게 말하자면, 시종일관 정향(正向)적인 발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발전에는 전진적 발전, 즉 발전의 능동적 측면, 또는 발전으로서의 풍부한 동일성이 규정된 발전과, 후진적 발전, 즉 아직은 반성된 동일성으로서의 발전으로 규정되지 못한 발전이 있다. 후진적 발전은 언뜻 복잡성의 감소, 풍부화의 감소, 체계의 유기적 고도화의 감퇴 등을 표현하는 것 같지만, 실은 피규정 속에서 자기정립 중인 발전으로, 그 자체로 발전이라는 규정성을 갖지는 못한 상태이다. 이는 발전이 모순 운동과 필연적으로 관련된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관철되는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엥엘스 역시 전진적 발전과 후진적 발전의 중요성에 대해 ≪반뒤링론≫에서 언급하였다.
13 프리드리히 엥겔스, ≪자연변증법≫[1872-1883], 윤형식ㆍ한승완ㆍ이재영 역, 중원문화, 1989, p. 28.
14 이오씨프 쓰딸린,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상)”[1938], 신재길 역, ≪정세와 노동≫ 제174호(2021년 9월), 노사과연 참조.
15, 16 같은 글.
17 모택동, ≪모순론≫[1937](중국 공산당 중앙문헌편집위 편, ≪모택동 선집 I≫), 이희옥 역, 전인, 1988, pp. 168-169.
18 고트프리트 슈틸러, 앞의 책, p. 70.
19 왜냐하면, 특정한 영역에서 양적 변화의 축적은, 그것이 질적 변화로 나아가게 하는 한도에 도달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20 고트프리트 슈틸러, 앞의 책, pp. 70-71.
21 같은 책, p. 71.
22 같은 책, p. 72.
23 같은 책, p. 84.
24 같은 책, pp. 87-88.
25 같은 책, p. 77.
26 데보린 학파는 모순의 범주를 구성함에서 일정 학문적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변증법의 맑스ㆍ엥엘스적 단계와 헤겔 변증법을 절충하였는데, 부분적으로는 헤겔 변증법에도 합치되지 않았다. 이 학파는 자연변증법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이론 일원론적 관점’에 따라 유물변증법상에서 실천의 중요성과 그에 관한 문제를 부정하였으며, 의식의 상대적인 자립성을 넘어, 그것의 절대적인 자립성을 강조하였다. 데보린 학파는 사물의 발전 과정에서 모순이 처음부터 끝까지 관철되는 것임을 부정하였는데(모택동, 앞의 책, pp. 171-172.), 이 학파는 물질의 심원으로부터 생성되는 비대립물이 일정한 양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 모순이 발생한다는 설을 내세웠다. 이러한 내용을 갖는 데보린 학파의 교의는 명백히 비변증법적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27 ‘균형론’은 모순을 통한 변증법적 발전을 부정하였으며, 논리적(선차적)으로 짜여진 물질의 제 관계가 그 스스로의 제 관계를 현실에 실현시키는 과정을 발전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오히려 모순은 발전이 아니며, 그것은 논리적으로 선차된 물질의 제 관계를 불균형적으로 만드는 요소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균형론자들은 1920년대 말 부농과의 계급 투쟁 노선에 반대하였는데, 이러한 배경은 모순을 통한 발전을 부정하고, 모종의 논리적 제 관계를 현실화하는 것으로서 ‘균형’을 발전으로 본 것에 있다.
28 소연방과학아카데미, ≪맑스주의 변증법의 역사 II≫[1971], 문성원 외 역, 한울림, 1990, pp. 284-285.
29 같은 책.
30 岩崎允胤ㆍ宮原將平, ≪자연과학과 변증법≫, 김성연 역, 미래사, 1987, p. 90.
31 Alfred Kosing, Marxistische Philosophie. Lehrbuch, Dietz, 1967, SS. 41-42.
32 그러나 꼰쓰딴찌노프는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 갖는 특징적인 면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모호한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복귀 및 반복에서 관철되는 전진성을 언급하면서 이를 ‘불가역성(необратимость)’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설명되는 대상에 대한 매우 불명료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33 프리드리히 엥겔스, 앞의 책, p. 259.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2개의 댓글

  • 객관 연관이랑 발전 연관은 사회주의권에서 뜨거운 감자였음 … 두 개념에 관련된 견해도 다들 달라서 픽하기도 어렵지 … 사회주의권이 중간에 망해버려서 객관 연관이랑 발전 연관 연구가 더는 진척되지 않은 문제가 있음 …

연구소 일정

3월

4월 2024

5월
31
1
2
3
4
5
6
4월 일정

1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3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4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5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6

일정이 없습니다
7
8
9
10
11
12
13
4월 일정

7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8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9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0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1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2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3

일정이 없습니다
14
15
16
17
18
19
20
4월 일정

14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5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6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7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8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19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0

일정이 없습니다
21
22
23
24
25
26
27
4월 일정

21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2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3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4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5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6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7

일정이 없습니다
28
29
30
1
2
3
4
4월 일정

28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29

일정이 없습니다
4월 일정

30

일정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