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기속 위임과 국가 권력

― 의회민주주의의 모순과 그 대안

 

신재길 | 교육위원장

 

* 이 글은, 지난 12월 11일 진행된 ‘<현대사상연구소> 제29기 정규 세미나: 민주주의’의 제8강으로 발표된 것입니다.

 

 

1. 의회민주주의의 위기

 

얼마 전 팬데믹이 한창일 때, 트럼프와 바이든이 대결한 미 대선이 있었다. 선거에서 전통적 자유주의 세력인 바이든은 신극우주의(우파 포퓰리즘)적 성격을 띠는 트럼프에게 팬데믹 사태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승리하였고, 트럼프는 이에 불복하는 소송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2021년 12월 현재, 미국의 현 대통령 바이든보다도 트럼프의 지지율이 더 높다는 말도 들린다.

 

미국 대선은 서구 의회민주주의의 문제점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포퓰리즘에 기반한 신극우 세력이 90년대 이후 서구를 중심으로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며 정권을 잡기까지 하였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트럼프이고, 대선 패배 이후에도 여전히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우파 포퓰리즘의 대두를 민주주의의 위기로 진단하는 경향이 많다. 이런 진단은 야스차 뭉크의 ≪위험한 민주주의≫[1]야스차 뭉크, ≪위험한 민주주의―새로운 위기, 무엇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 함규진 역, 와이즈베리, 2018.에서도 볼 수 있다. 이를 뭉크는 ‘포퓰리스트 모멘트’라고 표현한다.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현상의 원인으로 뭉크는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는 소셜 미디어의 영향, 둘째는 저성장에 들어선 경제, 셋째는 정체성이다. 뭉크는 이런 세 가지 원인으로 자유민주주의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로 분리되어 포퓰리스트가 창궐한다는 진단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을 복원하는 것을 제안한다. 그 방법으로 불평등 해소, 포용적 민족주의로의 전환, 시민 교육의 강화를 든다.

그러나 이런 대안들로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만약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것이라면 이런 대안은 일시적 표피적 방안일 뿐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근본적 모순에 대해 이미 1920년대 칼 슈미트가 지적한 바 있다. 슈미트는 “현대 대중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양자의 불명확한 결합에 기반하고 있다”[2]칼 슈미트,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 나종석 역, 도서출판 길, p. 31.고 말하고, 당시 의회민주주의의 위기를 간파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 대중민주주의는 우선 민주주의 자체의 위기를 초래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인간의 평등으로는 민주주의에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실질적인 평등과 동질성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또 반드시 민주주의의 위기와 구별되어야 하는 의회주의의 위기를 초래한다. 이 두 가지 위기는 오늘날 동시에 나타났고 서로 그 위기를 첨예화하고 있지만, 개념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서로 다르다.” 이렇듯 슈미트는 독일에서 의회주의가 수립되자마자 위기에 봉착한 점을 말할 뿐 아니라 그 원인이 단지 상황적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의회민주주의의 문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첫째, 유권자(소위 국민)의 욕망이나 요구는 조작된다. 이는 뭉크가 지적한 소셜 미디어의 영향이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국민의 욕망과 요구는 관리된다. 둘째, 공직 후보는 복잡한 정책적 대안으로 경쟁하지 않고, 이미지 경쟁을 한다. 선거전이 폭로전으로 귀결되는 것은 이미지 경쟁을 하기 때문이다. 이도 또한 소셜 미디어에 의존한다. 셋째, 특정 정치인이 특정 유권자를 대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욕구의 왜곡뿐만 아니라 욕구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특히 한국과 같은 사실상의 양당 체제로는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넷째, 자유 위임제 대의제에서는 선거 이후 공직 후보 대부분은 자본가 집단의 권력 카르텔을 대변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제어할 수단이 유권자에게는 없다. 자유민주주의(의회민주주의, 민주 공화국)의 위기는 단지 포퓰리즘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회민주주의, 민주 공화국) 자체가 민주주의 원리를 실현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일반적인 의회민주제의 문제점이 최근에는 포퓰리즘으로 나타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용어상 한 가지 언급할 부분은 자유주의, 의회주의, 공화주의는 엄밀히 말해 다른 개념이나 여기서는 자유 위임에 기반한 대의제라는 공통적 특징을 나타내는 말로 혼용할 것이다.

 

 

2. 자유주의적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검토해 본다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의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전형적으로 보여 준다. 미국 제헌회의의 사상적 배경은 공화주의와 민주주의[3]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유종선, ““공화국과 민주주의는 다르다”―미국 제헌회의의 공화국과 민주주의 논쟁에 대한 고찰”, ≪국제정치연구≫ … Continue reading라 할 수 있다. 이때 신대륙의 지식인들이 생각한 공화제는 고전적이고 이상적인 공화국의 모습, 즉 “목가적인 작은 공동체. 농경 사회. 재산을 가진 건강하고 자립적인 시민, 애국심, 상무 정신”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청교도 혁명 이후 형성된 근대 영국의 공화주의, 즉 “정부의 타락에 대한 경고와 이를 막는 수단으로서의 시민적 덕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권력과 자유의 대립, 본질적으로 공격적인 권력으로부터 수동적인 자유를 지켜 내는 것의 어려움, 강력한 시민적 덕성이 없이는 권력(정부)의 타락과 폭정을 막을 수 없다고 하는 생각 등을 말한다.” 이런 공화주의는 결국 자유주의적 공화주의라 할 수 있다.

 

신대륙의 제헌회의 참가 대표들이 공화주의에 대한 어떤 일관된 입장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대체로 새로운 정부는 공화제여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었으나, 공화제를 형식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형식은 미흡하더라도 원리나 내용을 중심으로 볼 것인가의 논쟁이 있었던 것 같고, 공화제에 대한 부정적 견해도 존재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신대륙에 왕정이나 귀족정의 전통이 없고 사람들 사이에 신분과 재산에서 더 많은 평등이 존재하는 것은 공화국 건설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으로 인식되었다. 사람들의 자립심과 독립심, 자유에 대한 열망이 구대륙 사람들에 비해 훨씬 강하다고 하는 것도 신대륙에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한 유리한 조건으로 보았다.

 

제헌회의 대표들은 반대로 넓은 영토, 식민지에 만연한 상업주의,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지나친 평등성’은 공화국에 매우 불리한 조건으로 여겼다. 특히 신대륙의 ‘평등성’은 엄격히 말해 공화국에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봤다. 곧, 평등 없이 공화국을 건설할 수는 없지만, 지나친 평등성은 오히려 공화국을 타락시키고 안정을 위협하는, 공화국의 가장 큰 적이 될 수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특히 평등성이 다수 지배의 ‘민주주의’와 결합할 때, 그 위협은 극도로 고조될 수 있다고 두려워했다. 공화국에 대한 열망 못지않게 제헌회의에서 사람들의 생각은 바로 이 민주주의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이를 공화국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 시기에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무산대중의 정치 참여와 이들에 의한 정부 지배라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의미를 담고 있었고, 이는 매우 부정적 의미로 쓰였다. 하지만 독립 전쟁을 거치면서 신대륙에는 민주주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고조된 민주적 분위기는 정치와 사회생활 전반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선거권이 크게 확대되고 많은 주에서 인민의 보통 선거에 의한 인민적 정부가 들어섰다. 그런데 독립 이후 신대륙에 불어닥친 이 민주주의의 열풍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환영보다는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제헌회의 참석자들이 대부분 당시 사회에서 “가장 경험이 많고 지체가 높은 시민들”이었기에, 이들에게 민주주의란 ‘무책임하고’ ‘격정적이며’ ‘쉽게 속아 넘어가는’ ‘무지한’ 대중과 이들을 오도하는 소수의 선동가들의 놀이터에 다름 아니었다. 이들에 의해 지배되는 정부는 ‘최악의 정부’가 될 것이고, 한마디로 “민주주의는 온갖 정치적 해악 가운데 가장 나쁜 것”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신대륙에서 공화국 건설의 요체는 민주주의의 이 같은 해악으로부터 어떻게 공화국을 지켜 낼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는 모순된 상황이다. 자유주의적 공화국을 건설하기에 가장 유리한 조건이 자유주의를 위협하는 민주주의 의식의 고양이었다. 결국, 공화국과 민주주의의 위험한 동거를 모색하게 된다. 즉 민주적 공화제의 모색이다. 인민에게 정부 참여의 자격(재산)이 없다고 해도 정부와 국가의 존속(독립 혁명의 주체)을 위해서는 이들의 참여를 어쩔 수 없이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정말 중요한 질문은 인민에게 참정권을 허용할 것인지의 여부가 아니라 인민이 참여한 정부의 타락을 막을 수 있는 방법, 또는 인민의 참여가 정부의 타락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즉 인민에게 참정권을 허용하되 이로 인한 민주주의의 해악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매디슨은 이 방법을 두 가지로 제안한다. 하나는 인민의 참정권을 인정하지만 선출된 소수에게 그 권리를 위임하는 절차로 참정권을 한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민이 단결하지 못하게 흩어 놓는 것이다. 매디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정과 공화정 간에는 두 가지 큰 차이점이 있다. 첫째, 공화정의 경우 정부는, 나머지 시민들에 의해 선출된 소수의 시민에게 위임된다. 둘째, 공화정은 더 대규모의 시민들, 더 대규모의 국가로 확장될 수 있다.[4]알렉산더 해밀턴ㆍ제임스 매디슨ㆍ존 제이, ≪페더럴리스트≫, 박찬표 역, 후마니타스, 2019, p. 85. (강조는 인용자.)

 

나아가 매디슨은 이를 “인민의 대표에 의해 표명되는 공중의 목소리는, 그 목적으로 소집된 인민 스스로에 의해 표명되는 경우보다, 더 공익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다”[5]같은 곳.라고 하고, “지폐 [발행], 부채 폐기, 재산의 평등한 분배 등을 비롯한 부적절하고 사악한 기획을 향한 열망이 합중국 전체에 스며들 가능성은, 특정 개별 주의 경우에 비해 훨씬 낮을 것이다”[6]같은 책, p. 88.라고 정당화했다.

 

인민의 정부 참여는 현실적 필요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고 하나의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결국 소위 ‘민주 공화국’(의회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은 인민의 주권 참여 형식(선거)을 통해 소수의 재산권을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는 자유주의(재산권)와 민주주의(인민 주권) 간의 모순적 결합이다. 자유주의의 내용과 민주주의 형식의 결합, 즉 자유주의가 실질적 통제권을 갖고, 민주주의인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3. 자유주의(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모순

 

의회주의는 인민 대표제와 군주제 사이의 투쟁에서 인민 대표제를 나타내는 정부이다. 의회주의는 민주주의에 편의성을 가미한 의미를 갖는다. 즉, 인민 전체가 한 장소에 모일 수 없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대표들을 선발해서 위원회를 구성하게 되는데, 그것이 의회다. 여기서 의회는 인민의 대의원이며, 정부는 의회의 위원회가 된다. 그러므로 의회주의는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인 것처럼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트릭이 들어간다. 인민의 대표인 의회 대의원(국회의원)은 인민으로부터 독립적이며 자의적으로 해임될 수 없는 데 반해, 제2 위원회로서의 의회주의적 정부는 의회의 신임에 의존하고 있고 언제든지 해임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자유 위임(재량 위임)을 받지만, 장관 등 정부 고위 관료는 대통령이나 내각에 기속된다.

 

그렇다면 이런 자유 위임의 근거를 어디에서 찾는가? 그것은 공개적 토론과 권력 분립이라는 두 가지 원리이다.

 

슈미트는 의회주의자들이 공개적 토론을 의회주의의 근거로 삼는 주장을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고 있다.

 

아주 전형적인 의회주의 사상은 의회주의의 전형적인 대변자인 기조[Guizot]에게서 발견된다. [권력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법에서 출발해 기조는 법의 지배를 보장하는 제도의 본질적인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들고 있다. ⑴ ‘권력’은 항상 토론하도록 강제되고 이를 통해 공동으로 진리를 탐구하도록 항상 강제된다는 점, ⑵ 국가 생활 전체의 공개성은 ‘권력’을 시민의 통제 아래에 두는 것이라는 점, (3) 출판의 자유가 시민들 스스로 진리를 탐구해서 이 진리를 ‘권력’에게 발언하도록 할 것이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의회는 사람들 사이에 흩어져 있고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는 이성의 파편들이 모여 공적인 지배권을 형성해 내는 장소다.[7]칼 슈미트, 앞의 책, pp. 74-75.

 

이는 사적인 개인들의 자유로운 경제적 경쟁에서, 즉 계약의 자유, 거래의 자유, 영업의 자유에서 여러 이익의 사회적 조화와 가능한 한 가장 많은 부가 자연스럽게 생겨난다는 자유주의 사상을 정부에 적용한 것이다. 이때 진리는 여러 견해들이 경쟁한 작용의 결과가 된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집회의 자유, 토론의 자유는 유익하고 합목적적인 사항일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에 근본적이고 사활적 문제가 된다. 이 공개적 토론, 특히 여론의 지배에 부여되는 결정적인 의미 때문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마치 동일한 것 같은 인상이 생겨났다. 비밀 정치와 비밀 외교를 일소하는 것은 모든 정치적인 병폐와 부패에 대한 만병통치약이 되고, 공개성은 절대적으로 효과적인 감독 기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공개성과 토론의 자유가 토론할 능력이 있는 대표자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교양 있고 지식을 갖추고 있으며 영민한 뛰어난 사람이어야 대표자로 될 수 있고, 더 중요한 것은 이 대표자가 재산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자유주의의 자유는 사적 재산을 소유할 자유에 토대하고 있기에 이런 자산이 없다면 자유를 옹호할 의지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존 스튜어트 밀은 이런 공개 토론에 의한 여론의 형성과 다수의 견해는 소수의 의견을 말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심히 우려했다. 다수에 의해 소수의 자유가 침해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우려였다. 다수인 무산자 대중이 민주주의를 통해 다수 여론을 형성하고 소수 자산가의 자유(사유 재산)를 침해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자유주의가 내적 모순을 갖는다는 지적인 셈이다.

 

의회주의에서 여론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두 번째 더욱 조직적인 관념, 즉 여러 국가 활동 및 국가 기관의 분립이나 균형화에 관한 관념과 연결된다. 여기서도 자유 경쟁이 결과를 정당화한다는 자유주의 사상이 녹아 있다. 권력 균형에 대한 주장은 절대주의에 포함된 권력 집중을 권력 분립 제도로써 지양하려 한 시도이다. 권력 분립의 토대는 왕권과 귀족권 그리고 부르주아 시민권의 권력 대립에서 나온 것이다(삼부회). 이를 부르주아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부르주아 내부의 경쟁과 균형의 원리가 되었다(삼권 분립).

 

이렇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하여 자유민주주의 공화제가 성립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정치 영역과 생산 영역(경제 영역)의 분리 속에서 대의제를 자유 위임에 한정함으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생산 영역의 요구를 민주적으로 정치에 그대로 반영할 경우 다수인 인민에 의해 자산가들은 권력과 자산을 잃을 것이 분명한 상태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정치 영역에 제한하고 경제 영역에서 분리한 것이다. 이는 대의제의 자유 위임 성격에 의해 보장되게 되었다. 대의제가 자유 위임제로 운영되는 한 ‘탁월성’의 원칙에 따라 대표를 선출하게 되고, 이는 교양 있고 덕을 갖춘 자산가들의 몫이 되는 것은 필연적 귀결이었다. 교양 있고 지식과 덕을 갖춘 대표자들의 토론을 통해서만 진리와 정의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자유주의자들의 생각이었다. 토론 능력이 있는 대표들에 의해 공개적 토론을 하고 이를 통해 균형과 합의에 이르면 이것이 진리와 정의라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와 정의에서 일반의지나 국민의 이름으로 노동자의 요구는 배제된다. 물론 진리와 정의는 사적 재산을 옹호하는 진리와 정의임은 말할 필요가 없겠다. 즉, 형식적으로 정치 영역과 생산 영역을 분리시켜 특정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진리와 정의이다. 이렇듯 자유민주주의 체제(의회주의)는 자본가가 국가 권력을 소유하고 이를 유지하는 정치 체제이다.

 

그러나 생산 영역에서 적대적 모순의 심화는 노동자계급의 요구가 의회의 토론에서 배제되고 있다는 현실을 노동자계급에게 폭로하고, 노동자계급은 의회를 부정하고 폐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의회주의는 경제 영역에서 대립의 한 측면, 즉 자본가의 지배 체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적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자본가들은 의회민주주의의 외피를 벗고 노골적인 자본가 입장을 대변하게 된다. 그러한 현상 중 하나가 우익 포퓰리즘이다. 따라서 우익 포퓰리즘이나 파씨즘 등은 의회민주주의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에 있어서 동일한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의회민주주의가 의회에 대한 불신과 무관심을 유도하여 정치 영역에서 노동자계급을 배제하는 체제라고 한다면, 우익 포퓰리즘이나 파씨즘은 기만과 정체성 선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노동자계급 운동을 오도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이들이 공통으로 추구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요구를 체계적으로 정치 영역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 문제는 국가 권력의 주인이 누구냐의 문제가 된다.

 

 

4. 의회주의의 대안으로서 직접민주주의

 

의회민주주의의 위기가 노골화되자, 의회민주주의를 대의제로 규정하고 그 대안으로 직접민주주의를 주장하거나, 시민의 참여를 넓히는 참여민주주의 등이 논의되고 있다. 또는 선거라는 대표 선출 방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추첨제를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직접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주장들은 의회민주주의가 공화주의적 대의제로 왜곡되었다고 생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대의제 자체를 수정ㆍ보완하거나 직접민주제를 도입하면 해결된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의 도입이 의회민주주의의 위기 내지 병폐를 치유할 수 있을까? 직접민주주의는 국민 발안과 국민 투표가 대표적이다. 국민 투표가 어떻게 독재 권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는지 설명을 길게 할 필요는 없겠다. 그리고 직접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스위스에서 여성 참정권이 1970년대에나 인정된 것은 직접민주주의가 생각만큼 민주적이지 않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예이다.

 

민주주의는 결코 독재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진보를 담보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본질은 무엇인가? 슈미트의 말을 인용해 보자.

 

내려질 모든 결단은 결단한 사람들 자신에 대해서만 유효하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이다.[8]같은 책, p. 57.

 

선거권이 더욱 확대되어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부여된다면, 그것은 국가와 인민의 동일성을 실현하려는 노력의 징후다. 이런 노력의 기저에는 이 동일성을 실재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전제에 대한 특정한 견해가 존재한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모든 민주주의적 논거들이 일련의 동일성에 의존한다는 근본 사상을 바꾸지 않는다. 이런 일련의 동일성에 속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통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일성, 국가적 권위의 주체와 객체의 동일성, 인민과 의회에서의 인민의 대표의 동일성, 국가와 때에 따라 투표하는 인민의 동일성, 국가와 법률의 동일성, 마지막으로 양적인 것(수적인 다수 또는 만장일치)과 질적인 것(법률의 정당성)의 동일성이 그것이다.[9]같은 책, p. 59. (강조는 인용자.)

 

민주주의의 본질은 인민의 동일성에 기초한다. 자유주의가 인민이나 시민의 차별성에 기초한 사고방식인 것과 근본적인 차이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은 기름과 물의 결합과 같이 완전히 융합될 수 없고 항상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하게 되고, 결국은 자유주의를 실현하는 형식적 수단으로 민주주의가 전락하게 된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동일성은 어떻게 실현되는가? 슈미트는 이를 수평파 지도자 존 릴번의 말을 인용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심정이 올바른 사람들’만이 선거권을 가져야 하며, 이 심정이 올바른 사람들에 의해서 선출된 대표자가 입법을 완전히 장악해야만 하고, 헌법은 이 심정이 올바른 사람들에 의해서 서명된 계약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10]같은 책, p. 61.

 

즉, 민주주의에서 인민의 동일성은 비동일성의 배제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는 노예와 여성, 외국인을 배제하고, 근대 민주주의에서는 노동자와 흑인 그리고 여성을 배제한다. 현대에 와서도 빨갱이(한국에서는 ‘종북’을 포함), 유대인, 이민자들을 배제하는 기제를 통해 인민의 동일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이는 직접민주주의도 예외는 아니다. 어쩌면 직접민주제에서 더욱 강력하게 작동한다고 할 수도 있다. 스위스의 예에서 볼 수 있고, 협동조합 운동에서도 나타난다.

 

노동자민주주의나 인민민주주의도 독점자본가를 배제하는 인민의 생산자로서의 동일성에 기초한다. 민주주의에서 동일성이란 권력의 주인이 누구냐에 의해 결정된다. 민주주의는 다수 독재를 전제로 한 개념이기에 노동자민주주의나 인민민주주의에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된다고 할 수 있겠다. 민주주의는 다수 인민의 동일성에 기초하며, 즉 인민이 권력의 주인일 경우에만 실현되며, 인민의 일반의지가 형성된다. 하지만 자본가가 권력의 주인인 경우는 다수 독재(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기 때문에 일반의지를 형성할 수 없고, 그들이 말하는 국익이나 국민의 이익은 자본가의 의지만을 반영하게 된다. 그리하여 소수 독재(과두제, 자유주의)를 마치 다수 독재(민주주의)인 것처럼 위장한다. 결국,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서는 국가 권력의 주인, 즉 인민의 동일성 문제를 선결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렇다면 자유주의 의회주의의 대안으로 직접민주주의는 어떨까?

직접민주주의는 인민의 일반의지 형성에 문제가 있다. 직접민주주의일수록 인민의 일반의지는 왜곡될 공산이 크다. 생산 영역과 정치 영역이 분리된 상태에서 직접민주주의의 도입과 확장은 민의를 왜곡하기 십상이다. 직접민주주의에서는 개인적 요구와 의지가 직접적으로 일반의지로 표출된다. 하지만 개인적 요구와 의지의 총합이 인민의 일반의지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이는 소위 구성의 오류로 설명 가능하다. 경제학에서 개인적 부의 축적은 절약과 검소한 생활을 통해 가능하다. 그러나 이를 국민 경제 전체 부의 축적에 적용할 경우 정반대의 결과가 도출된다. 즉, 개개인 모두가 개인적 부의 축적을 위해 근검절약하여 소비를 줄인다면 국민 경제는 소비가 줄고 그에 따라 생산도 줄어 부의 축적은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개인적 요구 및 의지의 합과 인민의 일반의지는 다른 것이다. 직접민주주의는 일반의지를 형성하는 기제가 없이 개별적 의지를 총합하게 된다. 따라서 쉽사리 인민의 일반의지는 왜곡된다. 독재자들이 자신의 정당성에 국민 투표를 활용한 것이 그 예이다. 결국, 선결적으로 국가 권력의 주인 문제의 해결을 전제하지 않는 직접민주주의로는 의회민주주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국가 권력은 상부 구조로, 토대와 분리되어서는 인민의 일반의지를 반영할 수 없다. 의회주의에 대한 새로운 대안은, 첫째 정치 영역과 생산 영역을 결합시킬 수 있어야 하고, 둘째 인민의 일반의지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5. 인민의 일반의지 형성을 위한 직능 대표제와 기속 위임제

 

자유주의 의회주의는 형식적으로 민주주의를 표명하나 실질적으로 과두제이며, 직접민주제는 인민의 일반의지를 형성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인민이 참여하면서도 개별적 의지의 단순 총합이 아니라 일반의지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그 방식은 직능 대표제와 기속 위임 대의제이다.

직능 대표제는 생산에서 분리된 정치 영역을 생산 영역과 결합하는 방식이 될 것이고, 기속 위임제는 일반의지를 형성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직능별, 지역별 대표들은 각각의 유권자를 대표해서 보다 넓은 범위의 대표자회의의 주체가 된다. 그러나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기속 위임 대표는 대리자가 아니라 대표자라는 점이다. 대리자는 유권자가 위임한 개인적 집단적 권한 이상의 어떤 권한도 행사할 수 없다. 그러나 대표자는 유권자의 개별적, 집단적 이익을 넘어서는 직능 및 지역과 국민적 일반이익에 대한 권한도 갖는다. 개별적 집단적 이익을 넘어서는 또는 대립하기까지 하는 인민의 일반이익도 대표하는 것이다. 일반의지는 개별적, 집단적 의지의 단순 총합으로 형성될 수 없다. 개인과 집단의 이익 관계의 조율과 국가적 차원의 합의와 통일이 필요하다. 이런 국가적 차원, 인민 일반적 차원은 개별적, 지역적 차원에서 형성되거나 각각의 요구를 총합한다고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보다 넓고 높은 단위에서의 조율과 합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렇게 형성된 내용은 기초 단위의 요구 및 의지와 다를 수 있다. 따라서 대표는 상급 단위에서 형성된 일반의지를 하급 단위와 개별 단위에 설명, 교양할 의무를 지게 된다. 상급위원회에서 논의된 일반의지를 다시 하급 단위와 개별 단위에 내려와 설명하고 추인받아 다시 상급 단위에 가서 전체적으로 합의가 되면 일반의지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기속 위임제는 필연적으로 민주 집중제와 결합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의회주의의 문제점은 정치와 생산을 분리한 것과 인민의 일반의지를 형성할 수 없다는 점이다. 국가 권력의 주인이 자본가인 한 정치와 생산의 분리와 인민의 일반의지에 대한 왜곡은 필연적 현상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민이 국가 권력의 주인이 되어 직능 대표제와 기속 위임제를 실현해야 한다.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야스차 뭉크, ≪위험한 민주주의―새로운 위기, 무엇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 함규진 역, 와이즈베리, 2018.
2 칼 슈미트,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 나종석 역, 도서출판 길, p. 31.
3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유종선, ““공화국과 민주주의는 다르다”―미국 제헌회의의 공화국과 민주주의 논쟁에 대한 고찰”, ≪국제정치연구≫ 제16집 제1호(2013. 6.), 동아시아국제정치학회를 참조하라.
4 알렉산더 해밀턴ㆍ제임스 매디슨ㆍ존 제이, ≪페더럴리스트≫, 박찬표 역, 후마니타스, 2019, p. 85.
5 같은 곳.
6 같은 책, p. 88.
7 칼 슈미트, 앞의 책, pp. 74-75.
8 같은 책, p. 57.
9 같은 책, p. 59.
10 같은 책, p. 61.

신재길 교육위원장

3개의 댓글

김태균에 답글 남기기 답글 취소

  • 역사적인 범주인 사회구성체와, 계급 지배 이래 초역사적인 정치 형식을 갖춘 민주주의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기속 위임제’라는 표현이 낮설다는 생각입니다. 현장에서 일상화 된 표현인 ‘민주 집중제’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자유민주주의’ 또는 ‘의회 민주주의’의 한계와 그리고 대안을 설명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현장 노동자들이 보다 쉽게 접하게 하기 위한 ‘개념의 장벽’을 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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