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번역] 일원론적 역사관의 발전(3)

 

게오르기 쁠레하노프(Георгий Плеханов)

번역ㆍ해제: 한동백(회원)

 

* 이 글은, 영국 공산당(CPGB) 출판부인 <Lawrence & Wishart>가 1947년에 출판한 G. V. 쁠레하노프의 ≪일원론적 역사관의 발전(The Development of the Monist View of History)≫(1895. 1.)을 번역한 것입니다. 번역 대본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marxists.org/archive/plekhanov/1895/monist/index.htm>

≪일원론적 역사관의 발전≫은 니꼴라이 미하일로프쓰끼의 기계론 및 인민주의 역사관에 대한 비판을 시작으로 하여 당시 유럽 각국에 걸쳐 있던 관념론적 역사주의자의 학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물론에 대한 변증법적 이해를 재차 확인하며, 맑스주의 유물론을 면밀히 해석하고 있습니다.

 

** G. V. 쁠레하노프는 19세기 말부터 러시아에서 활동한 혁명가이자 이론가입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구체적 형성에 관한 논쟁에서 레닌과 대립되는 입장을 갖고 있었으며, 후일 멘쉐비끼 내 조국방위파의 주도적인 구성원으로 활동했지만, 헤겔 철학의 창조적 발전이자 피착취계급의 해방을 위한 과학적 이데올로기인 맑스주의 철학을 해석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습니다. 유심 철학의 역사관과 속류 유물론으로부터 맑스주의 역사관의 고수가 갖는 이 긍정성은 베라 자쑬리치(Vera Zasulich)에게 보낸 프리드리히 엥엘스의 서신(1895. 1. 30.)과 쁠레하노프에게 보낸 서신(1895. 2. 8.)에서 드러나는 ≪일원론적 역사관의 발전≫ 출판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차례]

제1장. 18세기의 프랑스 유물론

제2장. 반동기의 프랑스 역사가들

제3장. 공상적 사회주의자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1) ㆍㆍㆍ <이번 호에 게재된 부분>

  공상적 사회주의자들(2)

제4장. 독일 관념론 철학

  독일 관념론 철학(1), 독일 관념론 철학(2)

제5장. 현대 유물론

  현대 유물론(1), 현대 유물론(2), 현대 유물론(3), 현대 유물론(4)

결론

부록 I: 또다시 반복되는 미하일로프쓰끼 씨의 “삼위일체론”

부록 II: 우리의 반대자들을 위한 몇 마디

 

 

제3장. 공상적 사회주의자들(1)에 대한 해제

 

프랑스 반동기에 활동한 역사가들의 한계를 지적한 쁠레하노프는 제3장에서 그 연장으로서, 지속적으로 시도된 이른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결함을 지적한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인간 본성이 불변한다는 ‘철의 원칙’에 근거하여, 이 인간 본성의 비밀을 참되게 인식하면, 그 인간 본성과 거미줄로 연결된 것마냥 그것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완벽한 정치사회 조직체를 구상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더 나아가 이러한 구상만 할 수 있다면 그것을 실현하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말 그대로 형이상학적이며, 공상적인 사고에 빠졌다.

 

이러한 틀을 교조로 가진 그들은 일부의 영역에서 비상한 노력을 통해 법칙성에 대한 승인이라는 원칙에 근거한 사회 발전의 법칙을 통섭적인 방식으로 구상하였다. 예를 들어, 쌩씨몽은 산업 발전, 정신 발전 및 정치 체제의 발전의 상호 연관을 면밀히 조사하고, 이것을 자신의 사회주의 이론의 중핵으로 두었다. 그러나 쌩씨몽은 다시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제1의 불변 법칙을 상정하여 형이상학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와 그의 제자는 몇 분야에서 사회 발전에 대한 실증적이고도 과학적인 연구를 통하여 유의미한 자료를 축적해 나가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자료를 통해 통일된 과학적 세계관을 수립하는 대신에, 그 자료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나는 직관적 영감을 한데 모은 다음에, 그것들에서 드러나는 피상적 규칙을 절충하여 그들이 말하는 형이상학적 불변 법칙으로서 인간 본성과 계속 연결 지었다.

 

쁠레하노프는 당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각고한 노력이 갖는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과학적인 견해로까지 나아가지 못한 데 대해서는, 그들이 갖는 모순점을 그대로 들추며 비판한다.

 

쁠레하노프가 밝힌 대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은 경제과학이 발달한 이후부터 서서히 현실적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특히, 앙팡땡이 반동적 부르주아의 선구자였던 맬서스의 학설을 따르는 무리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리카도의 이론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이 갖는 일정한 과학성을 모조리 부정한 데에서 그 한계는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앙팡땡과 그의 동료들은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결국 불변하는 실체, 즉 인간 본성이라고 강변하였으며, 현상의 영역에서 부유하는 경제‘과학’이 온당한 사회를 이끄는 진리로 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막연한 사상을 가졌다. 그리하여 그들은 리카도 지대론에서 나타난 결함을 극복하고, 그것을 발전된 경제과학 체계로 승화하려는 대신, 정치경제학 전반의 과학성을 모조리 부정하고 전통적인 형이상학에서 한 치 앞을 나아가지 않으려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부르주아 경제학의 반동적 축은 경제과학에 대한 주관적이고도, 자의적인 해석을 통해, 승승장구의 나날을 이어 나갔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이 흐름에 대해서 그저 ‘도덕적 질타’를 가할 뿐, 과학적 방식으로 그것을 제지하지는 못하였다. ‘낡은 계몽주의자’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경제과학의 영역에서 결국 이론적 파산을 면치 못하였다.

 

쁠레하노프가 활동했던 19세기 말의 제정 로씨야 지식인 사회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스로를 유물론자 또는 사회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수많은 학자는 이른바, ‘주관주의’ 사회학자였는데, 그들 대부분은 전통적인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움켜쥐었던 ‘법칙성에 대한 승인’을 과감히 내버린 후(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러한 ‘법칙’을 그대로 고수했지만), 프랑스 실증주의의 도식적 방식과, 기존 형이상학을 절충하여 주관적 관념론의 길로 나아갔다. ‘주관주의’ 사회학자들은 그들 스스로가 이전의 전통적 유토피아주의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과학적 방법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유토피아주의와 자신들의 ‘사회과학’을 구분하였다.

 

이들은 로씨야 자본주의 발전을 부정하였으며, 로씨야가 서구 자본주의와는 다른 발전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 진단하였고,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사회와 개인에 관한 주관적이고도 형이상학적 입장을 내놓았다. 예를 들어, 미하일로프쓰끼는 영웅과 군중 사이의 심리적 관계로 사회의 운동 양상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이어서 맑스주의 경제학 가치론 해석에서 형이상학적 오류를 범한 체르늬쉐프쓰끼의 해석(노동이 가치를 산출하기에, 노동이라는 집합에는 가치라는 원소가 반드시 존재한다는)을 “다루어지는 문제의 이론적 측면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해당 문제에 대한 논리적이고 실천적인 결론에 주된 강조점을 두어” 해석해 냈다고 말하는데, 이는 미하일로프쓰끼가 맑스의 가치론을 초보적인 수준에서조차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 주기도 한다. 이어서, 바씰리 보론쪼프는 위와 같은 ‘주관주의’ 사회학의 교리를 되려 객관적 법칙을 밝혀낸 것으로 ‘승화’하였다. 보론쪼프는 기존 ‘주관주의’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그 ‘법칙’에 근거하여, 로씨야 자본주의 형성을 부정하였지만, 자본주의 형성기가 도래하자, 그 ‘법칙’을 그대로 내버린다.

 

한편, ‘주관주의’ 사회학자인 까레예프는 자신 주장이 오류일 수밖에 없는 조건을 취급하면서, ‘사실은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 주장이 오류가 아닐 수밖에 없는 조건’으로 된다고 주장하며, ‘오류일 수밖에 없는 조건’을 ‘오류가 아닌 것’으로 ‘승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어떠한 변증법적 전화를 보여 주지 않는데, 그는 이러한 비과학을 과학으로 포장하고자 했다. 그가 사용한 방식은 전형적인 주관적 관념론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에서, 로씨야 ‘주관주의’ 사회학은 과거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형이상학적 방법론에 경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주관주의’ 사회학자들은 자신이 겪는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이원론으로 추락하였다. 쁠레하노프는 물질과 의식을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취급하는 이원론이 19세기 사회과학에서 극복하려고 했던 주요 주제라는 것을 언급하며, 다음 논의를 이어 간다.

 

 

제3장. 공상적 사회주의자들(1)

 

인간 본성이 불변하고 그 주요 특성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도덕과 사회과학 영역의 원리를 수학적으로 정확히 연역해 낼 수 있고, 인간 본성의 요구에 완전히 부합하는 사회 질서를 창안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연유로 인해 이는 이상적인 사회 질서가 될 것이다. 18세기 유물론자들은 이미 완벽한 법체계(legislation parfaite)에 관한 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계몽주의 문헌의 유토피아[공상: 역자]적 요소(utopian element)를 나타낸다.[1]≪인간론(De l’Homme)≫에 따르면, 이 저서의 저자인 엘베시우스(Helvetius)는 그러한 “완벽한 법체계”에 대해 상세히 계획하고 있다. 이 유토피아를 … Continue reading

 

19세기 전반기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이 연구에 온 열정을 쏟았다.

 

19세기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프랑스 유물론자들의 인류학적 견해를 완전히 공유하였다. 유물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그 주변을 감싼 사회적 환경의 산물[2]“그렇다, 인간은 전지전능한 사회나 전지전능한 교육이 만드는 것이다. 이 말을 가장 넓은 의미로 취한다면, 즉 학교 교육이나 도서 교육뿐만이 … Continue reading로 여기면서도, 인간 본성의 불변하는 특성을 통해 인간 환경의 다양한 특성을 설명하려는 악순환에 빠졌다.

 

금세기 전반부의 수많은 유토피아는 모두 인간 본성을 최고의 기준으로 삼아 완벽한 입법 기관을 창안해 내려는 시도에 불과했다. 따라서 푸리에[Charles Fourier]는 인간 열정(human passions)에 대한 분석을 출발지로 삼으며, 로버트 오웬(Robert Owen)은 ≪합리적 사회 체계 개요(Outline of the Rational System of Society)≫에서 “인간 본성의 제1”에서 출발하여 “합리적 정부”의 성립은 무엇보다도 “인간 본성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쌩씨몽주의자들은 그들의 철학이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구상에 기초하고 있다(sur une nouvelle conception de la nature humaine)고 선언[3]“서문(Introduction)”, ≪생산자(Le Producteur)≫[역자 주: 프랑스 쌩씨몽주의 조직이 창간한 주간지] 제1권, Paris, 1825.하고, 푸리에주의자들은 그들의 스승이 창안한 사회 조직이, 인간 본성 불변의 법칙들로부터 제공된 수많은 반박할 수 없는 연역적 결론들(irrefutable deductions)로부터 성립되었다고 말한다.[4]“Mon but est de dormer une Exposition Elémentaire, claire et facilement intelligible, de l’organisation sociale, déduite par Fourier des Lois de la nature humaine.(나의 목표는 푸리에가 … Continue reading

 

당연히, 인간 본성을 최고의 기준으로 보는 견해는 그 본성의 특성을 정의하는 데 있어, 다양한 사회주의 학파가 매우 크게 달라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따라서 쌩씨몽주의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오웬의 계획은 인간 본성의 성향과 너무나도 모순되어 그들이 현재(이 글은 1825년에 쓰여졌다) 분명히 누리고 있는 인기는 언뜻 보기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5]≪생산자≫ 제1권, p. 139. 푸리에의 논쟁적 소책자인 ≪쌩씨몽과 오웬이라는 두 종파의 함정과 사기―협동과 진보를 약속하는 자(Pièges et charlatanisme des deux sectes Saint-Simon et Owenqui promettent lassociation at le progrès)≫에 따르면, 쌩씨몽의 교의가 인간 본성의 모든 경향과 모순된다는 거친 진술을 수없이 볼 수 있다. 이제 꽁도르쎄(Condorcet)[6][역자 주] 니꼴라 드 꽁도르쎄 후작(1743-1794).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정치가. 프랑스 혁명기 입법의회, 국민공회 의원. 1793년 지롱드 헌법 초안을 … Continue reading 시대와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에 대한 정의에 동의하는 것이 기하학적 도형을 정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19세기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인간 본성의 관점을 고수한 만큼, 그들은 18세기 사상가들의 실수를 반복했을 뿐이었는데, 이 오류는 그들이 살았던 동시대의 모든 사회과학에 공통적인 것이었다.[7]우린 이미 반동기의 역사가들을 논하면서 이것을 증명하였다. 경제학자들과 관련해서도 이것을 증명하는 것은 매우 쉬울 것이다. 사회주의자 및 … Continue reading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추상적 구상의 편협한 한계를 깨고 확고한 기반 위에서 스스로의 견해를 취하기 위해 정력적인 노력을 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쌩씨몽의 저작은 이러한 점에서 크게 구별된다.

 

프랑스 계몽주의 작가들은 인류사를 어느 정도의 요행이 가미된, 그러면서도 우연한 사건의 연속[8]이와 관련하여 엘베시우스가 몽떼쓰끼외(Montesquieu)에게 한 비난은 상당히 독특하다. “몽떼쓰끼외는 그의 책에서, 로마 흥망성쇠의 이유에 대해, 그 … Continue reading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잦았지만, 쌩씨몽은 역사에서의 법칙성에 대한 승인을 추구하였다. 인간 사회의 과학은 자연과학만큼 정확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우리는 인류의 진보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밝혀내기 위해 과거 인류의 생활 실상을 연구해야 한다. 과거를 이해한 자만이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 특히, 쌩씨몽은 사회과학의 과제를 이렇게 표현하면서 로마 제국 몰락 이후의 서유럽 역사 연구로 눈을 돌렸다. 그의 제자인 띠에리(Thierry)가 프랑스사 연구에 있어 실질적인 혁명을 불러왔다는 사실은, 그가 갖는 견해의 참신함과 시야를 알 수 있게 한다. 쌩씨몽은 기조(Guizot) 또한 자신의 견해를 차용했다고 생각하였다. 이론적 특성에 대한 문제는 미해결 상태로 남겨 두고, 우리는 쌩씨몽이 그가 살았던 동시대의 전문적인 역사가들보다 유럽 사회 내부 발전의 원동력을 더욱 뛰어나게 추적할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띠에리와 미그네(Mignet) 그리고 마찬가지로 기조가 소유 관계를 사회 질서의 기초로 지목했다면, 현대 유럽에서 이러한 관계의 역사를 처음으로, 가장 생생하게 조명한 쌩씨몽은 한 걸음 더 나아갔으며,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바로 이것들이 다른 어떤 것과 관련 없이 왜 그렇게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인가?” 그의 의견으로는 산업 발전의 필요조건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15세기까지 세속 권력은 귀족의 손아귀에 있었으며, 귀족은 당시 가장 유능한 생산업자였다. 그들은 농경 작업을 지휘했으며, 당시 농경 작업은 유일하고도 중요한 생산 영역이었다.”[9]≪문학적, 철학적, 산업적 견해에 대해(Opinions litteraires, philosoplaiques et induslrielles)≫, Paris, 1825, pp. 144-45. ≪산업자의 정치적 교리문답(Catechisrne politique … Continue reading 생산업의 필요성이 인류의 역사에서 왜 그렇게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지에 대한 질문에, 쌩씨몽은 사회 조직의 목적이 생산(le but de lorganisation sociale cest la production)이기 때문이라고 답하였다. 그는 유용성과 생산적인 것을 동일시하여(lutile, cest la production), 생산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였다. 그는 “la politique … cest la science de la production[정치는 … 생산의 과학이다]”라고 단호히 선언하였다.

 

이와 같은 견해의 논리적 발전으로서, 쌩씨몽은 최종 분석에서 생산 법칙이 사회 발전을 결정짓는 바로 그 법칙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어야 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연구는 미래를 예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상가[쌩씨몽]의 과업으로 반드시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사고를 간헐적으로 내비쳤을 뿐, 일반적인 사고로까지 확장하지는 않았다.

 

생산에는 노동 도구가 필요한데, 이 도구는 자연에 의해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발명한 것이다. 발명 또는 특정 도구의 간단한 사용은 일정 정도에 이른, 생산자의 지적 발달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생산업”의 발전은 인류의 지적 발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계몽(lumières)”은 바로 여기에서 또한 세계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는 견해처럼 보인다. 생산업이 갖는 역할의 중요성이 명백해질수록, 겉으로 보기에는, 18세기 철학자들의 이러한 견해는 더욱 확고해지는 것 같다. 쌩씨몽은 이러한 견해를 계몽주의 프랑스 작가들보다 훨씬 더 일관되게 주장한다. 그는 관념의 기원에 대한 문제는 감각 속에서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간에 미치는 환경의 영향에 대해 생각할 근거가 거의 없었다.[10][역자 주] 쌩씨몽은 자연에 대한 관조로부터 자유를 찾는 유물론자로서, 아직은 형이상학적 사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쌩씨몽은 유물론과 … Continue reading 그에게 지식의 발전은 곧 역사 진보의 근본 요소로 된다.[11]쌩씨몽은 최종적이자 극단적인 결론으로서 역사에 대한 관념론적 관점에 이른다. 그에게서 사상(“원리”)은 사회적 관계의 궁극적인 기초일 뿐만 … Continue reading 그는 그 발전의 법칙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로 그는 이후 오귀스트 꽁트(Auguste Comte)가 자신의 매우 성공적인 “발견”이라고 발표할 세 단계의 법칙―신학적 단계, 형이상학적 단계, 실증적 단계[12][역자 주] 여기서 언급되는 ‘신학적-, 형이상학적-, 실증적-‘이라는 세 단계의 법칙은 꽁트가 ≪실증주의 서설(Cours de Philosophie Positive)≫에서 주장한, … Continue reading―을 확립하게 되었다.[13]위바르[Nicolas Gustave Hubbard]가 [쌩씨몽의 세 단계의 법칙에 대한] 꽁트의 차용을 지적했을 때, 리트레[Émile Littré]는 위바르의 진술에 대해 강력하게 … Continue reading 그러나 쌩씨몽은 이러한 법칙들 역시, 결국에는 인간 본성의 특성으로 설명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사회는 개인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사회적 이성의 발전은 개인 이성의 발전을 더 큰 규모로 재생산하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이 기본 원칙으로부터 출발하여 개인의 발전 과정에서 사회 발전에 관한 유비를 발견하는 데 성공할 때마다 마침내 사회 발전에 관한 자신의 “법칙”이 확인되고 입증되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그는 사회생활에서 권위의 역할이 시간이 지나면 ()으로 감소할 것이라고 주장한다.[14]이러한 견해는 나중에 쁘루동에 의해 도용되고 왜곡되었다. 쁘루동은 이 견해에 기초하여 무정부 이론을 세웠다. [즉, 그에게서] 권위의 역할의 점진적이면서도 끊임없는 축소는, 인류 발전의 법칙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이 법칙을 증명하였는가? 이 법칙을 지지하는 주요 논거는 인간의 개체적 발전에 대한 언급에서 찾을 수 있다. 초등학교에서 아동은 무조건 연장자에게 순종해야 한다. 중학교 및 고등학교에서 순종의 요소는 점차 뒷전(background)으로 밀려나고, 마침내 성숙기에는 독립적인 행동에 그 자리를 양보하게 된다. [그러나,] “권위”의 역사를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오늘날 모든 사람은 이 지점에서 모든 곳과 마찬가지로 비교가 증거가 아니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특정 개체(개체 발생)의 발생학적 발달은 이 개체가 속한 종의 역사와 많은 유사점을 갖는다. 개체 발생(ontogenesis)[15][역자 주] 특정 생물체의 수정란, 알, 포자 등이 세포 분열 및 조직 분화, 형태 형성을 거쳐 성체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말한다.계통 발생(phylogenesis)[16][역자 주] 특정 생물체 속하는 종족이 그와 같은 특정한 종족이 되기까지에는, 수많은 진화학적 변천이 전제되어 있다. 특정한 종족이 거친 역사적, … Continue reading에 대한 수많은 중요 징후를 제공한다. 그러나 계통 발생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을 개체 발생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생물학자에 대해 이제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현대 생물학은 정반대의 방식으로 이를 설명한다. 즉, 의 역사[계통 발생]를 통해 개체의 발생학적 역사[개체 발생]를 설명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호소는 쌩씨몽 자신과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공식화된 사회 발전의 모든 “법칙”에 매우 독특한 모습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그들을 악순환의 고리로 이끌었다. 그들에 따르면, 인류사는 그 본성에 의해 설명된다. 그러나 인간 본성을 이해하는 열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에 따르면 또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이 순환 안에서 움직인다면 인간 본성이나 역사 둘 다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 현상의 여러 가지 영역과 관련하여 우리는 다소 심오한 개인적 관찰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쌩씨몽은 매우 오묘한 관찰을 하였으며, 때로는 천재성을 지닌 진정한 본능을 발휘했지만, 그의 주요한 목표―“정치”를 위한 확고한 과학적 토대를 발견하는 것―는 달성되지 않았다. 쌩씨몽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인간 이성이 진보하는 최고 법칙은 모든 것을 자신에게 종속시키고 모든 것을 지배한다, 인간은 그것의 도구일 뿐이다. 비록 이 힘[즉, 이 법칙: 영역자]은 우리 자신에게서 발양되지만(dérive de nous), 우리는 그 법칙의 영향에서 벗어나거나 우리에게 복종하게 할 수는 거의 없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변덕에 따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도록 하는 힘의 작용을 바꿀 수 없는 것과 같다. …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대신, 이 법칙(우리의 진정한 섭리)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방향을 깨닫고 의식적으로 순종하는 것일 뿐이다. 바로 이 점이 우리 시대의 철학적 지성이 성취해야 할 웅대한 한 걸음이 될 것이란 것을 유념해야 한다.[17]≪조직자(L’Orgenisateur)≫, p. 119. (쌩씨몽 ≪저작집≫ 제6권, 또는 쌩씨몽과 앙팡땡의 ≪전집≫ 제20권.)

 

따라서 인류는 자신의 지적 발달 법칙에 절대적으로 종속된다. 인류는 법칙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데, 심지어 피하고자 하여도 피할 수 없다. 이 서술을 더 자세히 살펴본 후 세 단계의 법칙을 예로 들어 보자. 인류는 신학적 사상에서 형이상학적 사상으로, 형이상학적 사상에서 실증적 사상으로 이행하였다. 이 법칙은 역학 법칙의 힘으로 작용하였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만, 의문이 생긴다. 인류가 이 법칙의 작용을 바꾸기를 원하더라도 그것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신학적 단계의 막바지에 이르러 실증적 사고의 장점을 깨달았더라도 형이상학 단계는 피할 수 없다는 의미인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렇지 않다면, 법칙으로서 지적 발달의 타당성에 대한 쌩씨몽의 견해는 명확성을 약간 결여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 불분명함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생겨나는가?

 

그것은 법칙과 그것의 작용을 바꾸려는 욕구의 대립에 있다. 이러한 욕구가 일단 인류에게서 나타났다면, 이것은 그 자체로 인류의 지적 발전사에서 하나의 사실이 되는데, 법칙은 이 사실을 포괄해야 하며, 충돌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그러한 충돌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한, 우리는 아직 법칙 자체의 구상을 스스로 명확하게 가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두 가지 극단 중 하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법칙성에 대한 승인이라는 관점을 포기하고 우리가 열망하는 것에 천착하는 관점을 취하거나, 우리의 시각에서 우리가 열망하는 것―또는 한 시대의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을 완전히 배제하여 법칙에 어떠한 신비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법칙성을 일종의 운명으로 변모시킨다. 쌩씨몽과 유토피아주의자들의 저술에 나오는 “법칙”은 일반적으로, 그들이 법칙성에 대한 승인에 대해 말하는 한에서, 운명과 같은 것으로 된다. [한편,] 로씨야의 “주관주의 사회학자들”[18][역자 주] 1860년대 제정 로씨야 내에서 형성된 주관적 관념론(불가지론, 신칸트주의, 프랑스 실증주의 등을 절충한 형태의)에 기초한 사회학자 일군을 … Continue reading이 “인격”, “이상” 및 기타 훌륭한 것을 옹호하기 위해 일어설 때, 그들은 “사물들의 섭리적 과정”이라는 공상적인 동시에 불분명한, 그리고 불완전하며, 따라서 무가치한 교리에 대해 정교한 방식으로 싸우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사회학자들은 사회의 역사적 발전을 뒷받침하는 법칙들에 대한 현대 과학적 구상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 본 바가 없는 것 같다.[19][역자 주] 당대 로씨야 주관주의 사회학자들은 법칙성에 대한 승인이라는 관점을 비난하였으며, 객관적인 법칙성의 승인을 절대적으로 거부하였다. … Continue reading

 

법칙성에 대한 승인이라는 구상에서 유토피아주의자들이 갖는 명확성의 결여는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은 인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우리가 이미 지적한 근본적인 결함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유토피아주의자들만이 갖는 것이 아니다. 인류사는 인간 본성에 의해 설명되었다. 일단 그 본성이 확고해지면, 역사 발전의 법칙도 확고해졌는데, 모든 역사는 헤겔이 말했듯이, 그 자체로(an sich) 주어진 것이다. 인간은 어른이 되기를 멈출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의 발전 과정에 거의 간섭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즉, 발전의 법칙은 섭리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이 지식의 성과―결과적으로 인간의 의식적 활동―를 역사적 진보의 원동력으로 여기는 학설에서 비롯된 역사적 숙명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 없다.

 

역사 이해의 열쇠가 인간 본성에 대한 연구로부터 주어진다면, 나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의 사실에 관한 연구가 아니라, 바로 이 인간 본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갖게 된다면, 나는 현재 실정에 관한 [사회생활을 연구함에서] 흥미를 그대로 잃을 것이며, 인간 본성에 합치하는 사회생활을 찾는 것에 온 관심을 집중하게 될 것이다. 역사의 숙명론은 현실에 대한 공상적 태도를 조금도 방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과학적 탐구의 실마리를 끊음으로써 그 태도를 조장한다. 일반적으로 숙명론은 가장 극단적인 주관주의와 나란히 행진한다. 숙명론은, 흔히(very commonly) 그 자신의 심리 상태를 역사의 불가피한 법칙이라고 선언한다. 이러한 숙명론자들에 대해서는,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Was sie den Geist der Geschichte nennen,

Ist nur der Herren eigner Geist.[20][영역자 주] “그들이 말하는 역사 정신이란, 바로 그 신사들의 정신일 뿐이라네.” (괴테, ≪파우스트≫ 제1부.)

 

쌩씨몽주의자들은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사회적 생산물의 몫이 점차 감소한다고 강변하였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이와 같은 감소가 인류 경제 발전을 관장하는 가장 중요한 법칙이었다. 그 증거로 그들은 이자와 지대가 점진적으로 하락한다는 것을 거론하였다. 이 경우, 그들이 엄밀한 과학적 탐구의 방법을 지켰다면 그들이 지적한 현상의 경제적 원인을 발견했을 것인데, 이 발견을 위해 그들은 상품들의 생산, 재생산 및 유통에 대해 주의 깊게 연구해야 했을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하였다면, 아마 이자의 규모나 지대의 하락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지주의 몫이 감소하고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경제적 “법칙”에 있어, 당연하지만 다른 공식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시도에 관심이 없었다. 인간 본성에서 생겨난 신비한 법칙의 전능성에 대한 확신은, 그들의 지적 활동을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향하게 하였다. 그들은 지금까지 역사를 지배해 온 경향이 오히려 앞으로 더 강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착취자 몫의 끊임없는 감소는 필연이며, 그것의 완전한 소멸로서, 즉 착취계급 자체의 소멸로 끝날 것이다. 이를 예견한 우리는 더 이상 착취자들이 설 자리가 없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 조직을 오늘날에 미리 발명해야 한다. 인간 본성이 다른 특성들에 기인하여, 이러한 사회 조직의 형태들이 다양해야 함은 자명하다… 사회 재조직화 계획은 매우 신속하게 준비되었다. 사회 현상이 법칙에 부합한다는 매우 중요한 과학적 구상은 몇 가지 유토피아적 방안들을 생성해 내었다…

 

그러한 방안을 다루는 것은, 당시 유토피아주의자들 사이에서 사상가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여겨졌다. 정치경제학의 자잘한 원리는 그 자체로 중요하지 않았는데, 정치경제학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그로부터 도출된 현실적 결론의 관점 때문이었다. [유토피아주의자들의 사고를 따라가 보자:] J. B. 쎄[Jean-Baptiste Say]는 상품의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요인에 대해 리카도[David Ricardo]와 논쟁을 하였다. 아마 이것은 전문가의 관점에선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가치를 결정해야만 한다는 것과 유감스럽게도 전문가들이 이것에 대해 생각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유토피아주의자들이 말하는] 전문가에 대해 알아보자. 인간 본성은 우리에게 자잘한 것들을 분명하게 말해 준다. 일단 우리가 인간 본성의 울림을 듣기 시작하면, 놀랍게도 전문가들의 눈에는 그토록 중요한 주장이 실제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쎄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들을 따라가면, 인간 본성의 요구 사항과 완전히 일치한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리카도에도 동의할 수 있다. 왜냐하면 리카도의 견해 역시 올바르게 해석되고 보완된다면, 결국 인간 본성의 요구를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식으로, 유토피아 사상은 그 의미가 모호하게 남아 있는 이러한 과학적 논쟁에 무례하게 간섭하였다. 예를 들어, 앙팡땡[Barthélemy-Prosper Enfantin]과 같이 천부적으로 재능이 풍부하고 교양이 있는 인물이 당대 정치경제에 관한 논쟁적인 문제를 해결한 방식을 보면, 바로 위와 같은 방법에 기초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앙팡땡은 정치경제학에 관한 많은 연구를 저술하였는데, 이 저술들을 과학에 대한 매우 중요한 기여로 간주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정치경제학 및 사회주의 역사가들이 이룬 것을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그의 저술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앙팡땡의 경제학 저작물은 사회주의 사상 발전사의 흥미로운 양상으로서 그 의의가 있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의 주장에 대한 그의 태도는 다음의 예로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는 리카도의 지대 이론에 대해, 완고하게 이의를 제기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앙팡땡은 진리가 사실 전자의 편에 있으며, 후자의 편에는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리카도의 이론에 이의를 제기한 바도 없었는데, 그는 심지어 이러한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다음과 같은 언급을 통해 모두 드러난다. “지대의 성격과 토지 소유자가 임노동자로부터 얻는[임노동자를 고용한 자본제적 차지농으로부터 얻는] 부분[화폐 또는 현물]의 실제 상대적 상승 또는 하락에 관한 논의는 하나의 질문으로 축소되어야 한다. 사회적 이익을 위해 일선에서 물러난 생산자[이 표현은 앙팡땡이 지주에게 붙인 명칭이었다: 쁠레하노프]와 능동적인 생산자[즉, 농민: 쁠레하노프] 사이에 존재해야 하는 관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러한 관계가 밝혀진다면, 그러한 관계의 수립으로 이어질 수단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를 규명하는 것과 더불어 사회의 현재 상태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할 것인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위의 관계 문제 외: 쁠레하노프] 다른 문제는 부차적이어서, 위에서 언급한 방법을 사용하도록 촉진해야 하는 짝 맞춤을 방해만 할 것이다.”[21]그의 논문, “동산 및 부동산 임대료의 점진적 인하에 대한 고찰(Considérations sur la baisse progressive du loyer des objets mobiliers et immobiliers)”, ≪생산자≫ … Continue reading

 

앙팡땡이 “산업의 철학적 역사”라고 부르고자 하는 정치경제학의 주요 과제는 다양한 생산자 계층 사이의 상호 관계와 다른 사회계급에 대한 전체 생산자계급의 제 관계를 모두 밝혀내는 데 있다. 이러한 시도는 산업계급의 역사적 발전에 대한 연구에 기초해야 하며, 그러한 연구는 “인류에 대한 새로운 이해”, 즉 인간 본성에 기초해야 한다.[22]“정치경제학의 발전에 대한 고찰(Considérations sur les progrès de l’économie politique)”, ≪생산자≫ 제4권.

 

리카도의 지대론에 관한 맬서스의 도전은 오늘날 노동가치론이라고 불리는 학설에 대한 그의 도전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논쟁의 본질을 사실상 탐구하지 않은 앙팡땡은 이 문제를 서둘러 해결하기 위해 리카도의 지대론에 공상적인 견해(또는; 오늘날 로씨야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수정)를 첨가하였다. “만약 우리가 이 이론[리카도의 지대론]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 우리는 노동자가 그들이 누리는 생산 수단의 사용 권리 및 여가에 대해 일부 사람들에게 비용(즉, 임대료의 형태로 지불되는)을 지불한다는 사실을 이 이론에 추가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도 앙팡땡이 말하는 노동자는 주로 자본가적 농민[자본제적 영농]을 의미했다. 그들과 지주와의 관계에 대해, 그가 말한 것은 확실히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수정”은 리카도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던 현상의 더 예리한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 예리한 표현(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가끔 이보다 더 예리하게 말한다)은 가치나 임대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뿐만이 아니라, 앙팡땡의 이론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이러한 논제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미래의 사회 조직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에게서 중요한 것은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독자에게 확신시키는 것이었다. 앙팡땡은 이러한 종류의 실제적인 질문이 없다면, 가치에 관한 모든 학문적 논쟁은 단순한 말다툼에 불과한 논쟁이 될 것이라고 분명히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경제학에 관한 주관적인 방법론에 지나지 않는다.

 

유토피아주의자들은 이 “방법”을 그 어디에서도 직접 추천한 적은 없다. 그러나 이들이 그 주관적인 방법론에 치우쳤다는 것은, 앙팡땡이 맬서스(!)를 과도한 객관성이라는 이유로 비난했다는 사실에 의해 드러난다. 앙팡땡의 의견대로라면, 객관성은 이 작가[맬서스]의 주된 결함이었다. 맬서스의 저작을 아는 사람이라면, ≪인구론≫의 저자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객관성(예를 들어, 리카도에게 매우 특징적으로 보이는)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앙팡땡이 맬서스의 저술을 직접 읽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예를 들어, 리카도에 대한 지식은 프랑스 경제학자들에 의해 발췌된, 발췌본을 통해서만 알려졌는데, 맬서스의 저작에 대해, 앙팡땡 역시 발췌본을 통해서만 접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할 수 있다), 그가 맬서스의 저술을 읽었다고 하더라도, 그 저술에서 드러난 진의를 온전히 평가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 저술이 현실과 모순된다는 것을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새 사회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에 몰두한 앙팡땡에게는, 현실을 주의 깊게 연구할 여유도, 열망도 없었다. “당신의 말이 옳다.” 앙팡땡은 처음으로 만난 자신의 아첨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늘날 사회생활의 사안들은 당신이 설명한 대로 진행되지만, 당신은 지나치게 객관적이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보면, 우리의 사회생활이 새로운 토대 위에서 재건되어야 함을 알게 될 것이다.”

 

공상적 딜레탕티즘(Utopian dilettantism)은 부르주아 질서의 학식 있는 수호자와의 논쟁에서 이론적 파산을 피할 수 없었다. 자신의 무력감으로 인해 올라오는 울분을 달래기 위해 이 유토피아주의자[앙팡땡]는, 상대의 객관성을 책망하며 자신을 위로하였다. “[이 논쟁에서] 당신이 나보다 더 많이 배운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 논쟁에서] 내가 더 신사적이란 것이 드러났다.” 이 유토피아주의자는 부르주아의 학식 있는 수호자들을 논박하지 않았으며, 그저 그들의 이론에 “각주”을 추가하거나, “수정”만을 거듭했을 뿐이었다.

 

사회과학에 대한 공상적 태도와 상당히 비슷한 관점을 취하는, 우리의 “주관적” 사회학자들의 작품의 모든 페이지는 주의 깊은 독자의 눈을 자극한다. [“주관적” 사회학자들의] 이와 같은 태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아직도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관련된 논의로 들어가며, 두 가지의 생생한 예를 인용해 보자.

 

1871년, 고(故) N. 지베르(N. Sieber)[23][영역자 주] Sieber, Nikolai Ivanovich(1844-1888). 로씨야에서 맑스의 경제 이론을 최초로 대중화한 로씨야 경제학자이다.의 논문인 ≪후기 설명을 통해 본 리카도의 가치와 자본 이론(Ricardos theory of value and capital, in the light of later elucidations)≫이 소개되었다. 저자는 서문에서 Y. 쥐꼬프쓰끼(Y. Zhukovsky) 씨[24][영역자 주] Zhukovsky, Yuly Galaktionovich(1822-1907), 부르주아 경제학자 및 공법학자로,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의 반대자였다.의 논문인 “아담 스미스 학파와 경제과학에서의 실증주의(The school of Adam Smith and positivism in economic science)”(이 논문은 1864년 ≪동시대인(Sovremennik, [Современник])≫[25][역자 주] 문학가 알렉싼드르 뿌쉬낀(Александр Пушкин, 1799-1837)이 1836년에 창간한 혁명적 민주주의 성향의 평론 잡지 및 기관지이다. 제정 … Continue reading에 소개되었다)를 호의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짧게 다루었다. 이 짧은 내용에 대해, 미하일로프쓰끼(Mikhailovsky) 씨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나는 “Y. G. 쥐꼬프쓰끼의 저술 활동에 관하여(On the Literary Activity of Y. G. Zhukovsky)”라는 나의 논문에서 내가 우리 경제학자들의 공헌에 대해 훌륭하고 정당한 경의를 표했다는 것을 상기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쥐꼬프쓰끼 씨는 오래전에 과학의 주요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을 위한 모든 자료―현대 정치경제학 교과서에 의해 완전히 왜곡되어 온―를 재구축함으로써 정치경제학의 근원적인 지점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표명한 바 있고, 나는 이 점을 주목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후 칼 맑스의 뛰어난 작업에 의해 그 결실을 맺은 이 생각을 선점할 수 있는, 로씨야 문학에 있어 이 영예로운 권리는 쥐꼬프쓰끼 씨가 아니라 “경제 활동과 입법(Economic Activity and Legislation”(≪동시대인≫, 1859년), “자본과 노동(Capital and Labour)”(1860년), ≪밀에 대한 논평(Comments on Mill)≫ 등과 같은 문헌의 저자[26][영역자 주] 상기한 저술은 모두 N. G. 체르늬쉐프쓰끼 의 저술이다.에게 속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연공서열 외에도 이 작가와 쥐꼬프쓰끼 씨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노동은 가치의 척도이며, 모든 가치는 노동에 의해 산출된다는 것을, 쥐꼬프쓰끼 씨는 철저하고 엄격한 과학적 방식으로, 비록 다소 현학적으로라도 증명한다면, 앞서 언급한 문헌의 저자는 다루어지는 문제의 이론적 측면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해당 문제에 대한 논리적이고 실천적인 결론에 주된 강조점을 둔다. “노동에 의해 산출되고 측정되는(being produced and measured) 모든 가치는 반드시 노동에 속해야 한다.”[27]N. K. 미하일로프쓰끼, ≪저작집(Works)≫ 제2권(2판), St. Petersburg, 1888, pp. 239-40.

 

“≪밀에 대한 논평≫의 저자”가 이후 “맑스의 뛰어난 작업에 의해” 눈부신 발전을 이룬 가치론을 이해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정치경제학에 정통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미하일로프쓰끼 씨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의 역사를 아는 모든 이는 그 저자가 실제로 “문제의 이론적 측면을 놓쳐 버리고”, 정교하게 조정된 사회 내에서는 어떤 기준에 따라 생산물을 교환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명상에 잠겨 길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밀에 대한 논평≫의 저자는 경제적 문제를 유토피아주의 관점으로 다루었다. 이는 당시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미하일로프쓰끼 씨가 대중적인 작품에서도 사실에 대한 보다 정확한 시각을 얻기 쉬웠던 70년대(그리고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었더라면, 그는 자신이 저술한 저작의 최신판에서 자신의 실수를 고쳤을 것이다)에 이러한 견해를 버리지 못했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미하일로프쓰끼 씨는 “≪밀에 대한 논평≫의 저자”가 가치에 대해 서술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것[잘못된 이해]은 그 역시 “문제의 이론적 측면을 간과하고”, 길을 잃고 헤매다가 “그것으로부터의 논리적인 실천적 결론”, 즉 “모든 가치는 반드시 노동에 속해야 한다[28][역자 주] 맑스의 노동가치론에서 가치는 추상적 노동의 객체화로, 재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노동량으로 측정되는, 상품의 정량화된 일자(一者)이다. … Continue reading는 생각에 빠졌기에 생겨난 것이다. 우리는 실천적 결론에 대한 그들의 열정이 유토피아의 이론적 추론에 항상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미하일로프쓰끼를 진실의 길에서 멀어지게 한 “결론”이 1820년대 영국의 유토피아주의자들이 리카도의 가치론을 접하고 도출해 낸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안다면, 그것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미하일로프쓰끼 씨는 유토피아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주의의 역사에마저 관심이 없다.

 

또 다른 예로, V. V.[바씰리 보론쪼프] 씨는 1882년 자신의 저서 ≪로씨야에서 자본주의의 운명(The Destinies of Capitalism in Russia)≫의 출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현재 독자에게 제공되는 저작집은 과거 다양한 언론에 게재된 기사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들을 별도의 저서로 출판하면서, 우리는 이 기사에 외연적 일관성을 부여했으며, 약간 다른 방식으로 자료를 배치하고, 중복된 내용을 제거하였다[중복된 내용을 모든 문서에서 없앤 것은 아니다. 게재된 기사 중 서로 같은 내용을 다루는 수많은, 수많은 중복된 기사들이 바씰리 보론쪼프 씨의 책에 남아 있었다: 쁠레하노프]. 게재된 기사의 내용은 동일하게 유지되었으며, 몇 가지 새로운 사실과 주장이 제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또 한 번 감히 우리의 작업 내용을 발표하자면, 우리는 오직 하나의 목표를 갖는, 즉 제기된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기 위해 우리가 가용할 수 있는(at our command) 모든 무기로 그[기존 독자]의 세계관을 공격하고, 이를 통해 지식인이 그 스스로가 쓴 내용을 뒤집도록 강제하는 것이다[인상적인 계획이다. “그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무기로” 바씰리 보론쪼프 씨의 독자가 가진 세계관을 공격하고, 이에 겁에 질린 지식인을 굴복시키고, 그것으로 주의를 돌리는 등: 쁠레하노프]. 그리고 로씨야 경제 발전의 법칙이 나라 사정과 관련된 모든 현상의 기초를 어떻게 구성하는지 연구하기 위해 자본주의 및 나로디즘[로씨야 인민주의 사조]에 학식이 있는 우리의 전문적 정치평론가들에 도전한다. 이 법칙에 대한 지식 없이는 체계적이고 성공적인 사회 활동이 불가능한데, 우리 사이에 만연해 있는 로씨야의 가까운 미래와 관련된 구상들은 [이 지식 없이는] 사실상 법칙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며[구상들을 법칙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쁠레하노프], 그러한 구상은 실현 가능한 세계관을 위한 확고한 기반을 제공하기 어렵다. (“서문”, p. 1.)

 

이로부터 11년이 지난 1893년이면, 바씰리 보론쪼프 씨는 “전문가”가 될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아!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나로디즘의 “학식이 있는” 정치평론가는 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이제 경제 발전의 법칙이 “나라 사정과 관련된 모든 현상의 기초”를 구성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너무나도 동떨어진 주장을 하는 사람으로 판명되었다. 지금 그는 “모든 무기를 사용”하여 그러한 “관점”을 지닌 사람들의 “세계관”을 공격하며, 이제 이 관점에서, “역사 과정은 인간의 창조물이 아니라 창조하는 힘이 되었고, 인간은 이에 복종하는 도구가 되었다”라고 생각한다.[29]≪우리의 동향(Our Trends)≫, St. Petersburg, 1893, p. 138. 그는 이제 사회적 관계를 “인간의 영적 세계의 피조물”[30]같은 책, pp. 9, 13, 140 외 다수.로 간주하고, 사회 현상의 법칙성에 대한 승인에 기초한 이론을 극도로 회의하면서, 이를 “역사학 교수 N. I. 까레예프(N. I. Kareyev)[31][영역자 주] Kareyev, Nikolai Ivanovich(1850-1931), 자유주의 성향의 로씨야 역사가 및 정치평론가이며, 맑스주의에 반대하였다.의 역사과학철학”에 대립시킨다(이교도들이여 조용히 들으라, 교수님이 친히 우리와 함께하시니라!).[32][영역자 주] 이것은 빈, 빠리, 베를린의 혁명과 관련하여 1848년 니꼴라이 1세가 발표한 선언문을 약간 변형한 문구이다. 원문은 “이교도들이여 조용히 … Continue reading[33]≪우리의 동향(Our Trends)≫, p. 143 이하 참조.

 

하느님의 도움으로! 그는 어떻게 되었고, 그의 어떠한 것이 변했을까? [그것은 뒤에 이어질 내용을 통해 밝혀진다.] 1882년 바씰리 보론쪼프는 “로씨야 경제 발전의 법칙”을 찾고 있었는데, 그 법칙이 자신의 “이상”을 과학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라고 망상하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로씨야 자본주의가 사산(死産)되었다는 “법칙”을 발견했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그 후 11년을 헛되이 살지는 않았다. 비록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사산된 자본주의가 점점 더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이 “로씨야 경제 발전의 법칙”이 되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바씰리 보론쪼프는 서둘러 자신의 “역사철학”을 뒤집어엎었는데, 한때 “법칙”을 추구했던 이 사람은 그러한 탐색이 [이제는] 시간 낭비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로씨야 유토피아주의자들은“법칙”에 의존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그 “법칙”이 자신이 지지하는 “이상”과 상충되면, 베드로가 예수에게 했던 것처럼, 두려워서뿐만 아니라 양심을 위해서 즉시 그것을 버렸다. 그러나, 바씰리 보론쪼프 씨는 지금까지도 그 “법칙”과 언제나 함께한다. “자신의 견해를 체계화하려는 자연스러운 노력이 이 나라 발전의 조건(conditions)과 그 요구 사항(requirements)에 적합한 경제 관계의 발전에 대한 독자적인 전망을 로씨야 지식인이 정교화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아주 가까운 장래에 수행될 것이다.”(≪우리의 동향(Our Trends)≫, p. 114.) 로씨야 지식인은 “독자적인 전망”을 “정교화”하면서 바씰리 보론쪼프 씨가 시도한 것과 같은 작업―그가 ≪자본주의의 운명≫에서 “법칙”을 찾으려 했던 것과 같이―에 열렬히 전념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전망―바씰리 보론쪼프 씨가 가까운 장래에 발견될 것이라고 성서에서 맹세하는―이 밝혀지면, 저자는 성경에서 아버지가 탕자와 화해한 것마냥, 엄숙하게 법칙성에 대한 승인이라는 원칙과 화해하게 될 것이다. 우습다! 바씰리 보론쪼프 씨는 여전히 “법칙”을 찾고 있었지만, 이 말이 사회 현상에 적용될 때 어떠한 의미를 갖게 되는지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20년대 유토피아주의자들이 “법칙”을 생각했던 것처럼, “법칙”을 생각했다. 이것은 그가 로씨야라는 한 나라의 발전 법칙을 발견하기를 바랐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이러함에도, 그는 왜 자신의 사고방식을 로씨야 맑스주의자들의 탓으로 돌리는 것일까? 사회 현상과 법칙의 일치성에 대한 이해에서 로씨야 맑스주의자가 유토피아주의자의 인식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된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바씰리 보론쪼프 씨가 위와 같은 잘못된 생각을 한다는 것은 맑스주의에 반대하는 그의 모든 주장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하는 자가 바씰리 보론쪼프 씨 하나만은 아니다. “역사학 교수” 까레예프 씨도 이와 같이 생각하며, “맑스주의”의 모든 반대자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들은 사회 현상과 법칙의 일치성이라는 공상적 견해를 맑스주의자들의 탓으로 돌린 다음, 이 견해를 다소 어설픈 논증을 통해 무너뜨린다. 이것은 풍차를 창으로 찌르는 실제 사례이다![34][역자 주] 로씨야어 원문 표기로는 “борьба с ветряными мельницами”로 ‘풍차 때리기’로 번역된다. 가상의 적을 상정하고, 그 가상의 … Continue reading

 

더 나아가서, 학식 있는 “역사학 교수”와 관련하여, 그가 인류의 역사 발전에 대한 주관적인 견해를 종용하는 표현은 다음과 같다.

 

역사철학에서 우리가 진보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면, 바로 이 사실이 지식의 본질적 내용과 사실, 그리고 지식의 분류에 대한 선택을 좌우한다. 그러나 그 사실은 지어낸 것 또는 지어낸 연관 속에서 다루어지는 것으로 될 수 없는데[결과적으로 [진보의 문제에 관심을 두면] 선택이나 분류에 임의적인 것이 없어야 하는가? 결과적으로 분류는 객관적인 현실과 완전히 일치해야 하는가? 그렇다!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일단 그냥 들어라!: 쁠레하노프], 특정 관점에서 역사 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결국 그 설명이 진실이라는 의미에서 객관적인 것이 된다. 여기서 또 다른 종류의 주관주의가 등장한다. 창조적 종합은 규범으로서 완전히 이상적인 세계,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서 세계, 참되고 정의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으며, 이 세계는 실제 역사와 비교되어야 할 것인데 실제 역사는 인류의 삶의 본질적인 변화라는 관점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결합된 객관적 묘사이다. 이러한 비교에 기초한 역사 과정에 대한 평가가 발생하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평가는 자의적이지 않아야만 하는 것으로 된다. 분류된 사실들이 우리가 의미를 부여한 것처럼 실제로 의미가 있는지 증명해야만 한다. 우리는 [분류된 사실들에] 한정된 관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평가하는데 한정된 기준을 채택한 것이다.

 

자신의 객관성을 자랑하며 위와 같이 말하곤 했던 “근엄한 모쓰끄바 역사가”에 대해, 쉐드린(Shchedrin)[35][영역자 주] 쉐드린(Shchedrin)은 로씨야의 뛰어난 풍자가이자 혁명적 민주주의자인 M. Y. 쌀띄꼬프(M. Y. Saltykov, 1829-1889)의 필명으로, 쁠레하노프가 … Continue reading은 다음과 같이 썼다. “야로쓸라프(Yaroslav)가 이쟈쓸라프(Izyaslav)를 이기든, 이쟈쓸라프가 야로쓸라프를 이기든, 나에게는 똑같다.” “규범으로서 완전히 이상적인 세계,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서 세계, 참되고 정의로운 세계”를 창조한 까레예프 씨에게서는, 그가 말한 종류의 객관성을 찾을 수 없다. 그는 야로쓸라프에게 동정을 표하고, 자신의 패배가 자신의 승리인 것처럼 표현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사실은 지어낸 것일 수 없다”), 야로쓸라프의 슬픈 운명에 대해서 몇 번은 [더] 눈물을 흘릴 소중한 권리를 가지는데, [한편으로] 그는, 그를 정복한 이쟈쓸라프에게 가해진 저주를 피할 수도 없다.[36][역자 주] 까레예프는 그가 가진 ‘분류된 사실’이 주관적인 기준에서 정초될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분류된 사실’이 사실 주관적이지 않다는 … Continue reading 이러한 “주관주의”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그러나 까레예프 씨가 그것을 무미건조한 것으로 취급하며, [그 모순을 자신의 논리 전개에] 전혀 해가 되지 않는 곤경으로 표현한 것은 헛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전개는 그가 역사 과정의 진실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감상적 어구의 흐름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관적” 사상가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실제 그들에게 있어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서 세계, 참되고 정의로운 세계”가 역사 발전의 객관적 과정과 그 어떠한 관련도 없는 외부에 있다는 사실에 있다. 한쪽에는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이 있고 다른 쪽에는 “현실”이 있으며, 이 두 영역은 완전한 심연으로 경계가 지어진 상태로 분리되어 있다. 이 심연은 물질세계를 영적 세계와 분리하는 심연으로, 이원론자들 사이에서 주장되는 그것과 같다.[37][영역자 주] 미하일로프쓰끼가 정식화한 이원론은 두 가지 진리를 상정하고 있는데, 하나는 실제로 있는 것의 진리로서 “사실의 진리(the truth of … Continue reading 19세기 사회과학의 우선된 과제는 이 명백히 바닥이 없는 심연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 다리를 건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현실에서 눈을 감고 모든 주의를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예를 들어, 쌩씨몽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에 집중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서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을 지체하는 결과만 내오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그러한 태도는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에 대한 정확한 견해를 형성하는 데 방해만 될 뿐이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인간론(De lHomme)≫에 따르면, 이 저서의 저자인 엘베시우스(Helvetius)는 그러한 “완벽한 법체계”에 대해 상세히 계획하고 있다. 이 유토피아를 19세기 전반부의 유토피아와 비교하는 것은 가장 흥미롭고 유익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회주의 역사가들과 철학사가들은 지금까지 그러한 비교를 하려는 생각을 전혀 못 했다. 특히 철학사가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엘베시우스를 지나가는 언급으로써 [얕게 다루며,] 가장 용납할 수 없는 방식으로 대한다고 할 수 있다. 차분하고 온건한 랑에[Friedrich Albert Lange]조차 “피상적인 엘베시우스”라는 말 외에 다른 설명을 하지 않는다. 절대적 관념론자 헤겔이 절대적 유물론자 엘베시우스를 가장 공정한 태도로 대했다.
2 “그렇다, 인간은 전지전능한 사회나 전지전능한 교육이 만드는 것이다. 이 말을 가장 넓은 의미로 취한다면, 즉 학교 교육이나 도서 교육뿐만이 아니라 요람부터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여 잠시도 우리를 떠나지 않는 인간과 사물, 사건과 상황이 우리에게 주는 교육을 의미한다.” (까베[Étienne Cabet], ≪이까리 여행(Voyage en Icarie)≫(1848년 판), p. 402.)

[역자 주] 까베의 인용문에 대한 로씨야어 원문에서 교육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제도권 교육인 ‘образование’가 아닌, 훈육, 양육, 교훈 등의 의미에 가까운 ‘воспитание’라는 단어가 쓰였다. 쁠레하노프가 제시한 까베의 원문이 내포하는 바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교육’이라기보다 사회가 인간에게 작용하는 환경적 작용에 가깝다.
3 “서문(Introduction)”, ≪생산자(Le Producteur)≫[역자 주: 프랑스 쌩씨몽주의 조직이 창간한 주간지] 제1권, Paris, 1825.
4 “Mon but est de dormer une Exposition Elémentaire, claire et facilement intelligible, de l’organisation sociale, déduite par Fourier des Lois de la nature humaine.(나의 목표는 푸리에가 인간 본성의 법칙에서 연역한 사회 조직에 대한 명확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기초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다.)”(V. 꽁씨데랑[Victor Considérant], “선언(Déclaration)”, ≪운명, 사회(Destinée, Sociale)≫ 제1권(3판).; “Il serait temps enfin de s’accorder sur ce point: est-il à propos, avant de faire des lois, de s’enquérir de la véritable nature de l’homme, afin d’harmoniser la loi, qui est par elle-même modifiable, avec la nature, qui est immuable et souveraine?(마침내 다음 사항에 대해 합의할 때가 되었다. 그 자체가 수정될 수 있는 법을 불변하고 최고의 본성과 조화시키기 위해, 법을 만들기 전에 인간의 진정한 본성을 규명하는 것이 더 합당하지 않는가?)”(앙리 고스(Henri Gorsse), ≪푸리에의 사회과학 기본 개념(Notions élémentatres de la science sociale de, Fourier, par lauteur de la Défense du Fouriérisme)≫, Paris, 1844, p. 35.
5 ≪생산자≫ 제1권, p. 139.
6 [역자 주] 니꼴라 드 꽁도르쎄 후작(1743-1794).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정치가. 프랑스 혁명기 입법의회, 국민공회 의원. 1793년 지롱드 헌법 초안을 기초했으나, 의회에서 부결되고, 고발되었다. 체포를 피해 도피 중인 시기에, 계몽주의 역사철학을 집약한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Esquisse dun tableau historique des progrès de lesprit humain)≫를 집필하였다. 이후 자꼬뱅에 의해 체포ㆍ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 음독자살하였다.
7 우린 이미 반동기의 역사가들을 논하면서 이것을 증명하였다. 경제학자들과 관련해서도 이것을 증명하는 것은 매우 쉬울 것이다. 사회주의자 및 [봉건적] 반동배에 대항하여 부르주아 사회 질서를 수호하면서, 경제학자들은 그것을 인간 본성에 가장 적합한 질서라고 옹호하였다. 추상적인 ‘인구 법칙’을 발견하려는 노력―그들이 사회주의자든 부르주아 진영이든 간에―은 ‘인간 본성’을 사회과학의 기본 개념으로 보는 관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것을 확신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맬서스[Thomas Malthus]와 관련된 학설과 고드윈[William Godwin] 또는 ≪밀에 대한 논평(Comments on Mill)≫을 저술한 저자[영역자 주: 저자는 맬서스주의에 대한 비판에 많은 장을 할애한 체르늬쉐프쓰끼이다. (참조: N. G. Chernyshevsky, Collected Works, Vol. IX, Goslitizdat Publishing House, 1949, pp. 251-334.)]의 학설을 비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맬서스와 그의 반대자들은 모두 단 하나의(말하자면 절대적인) 인구 법칙을 동일하게 추구하였다.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학은 그것을 다르게 본다. 사회 발전의 각 단계에는 고유한 인구 법칙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도록 하겠다.

[역자 주] 맬서스의 인구의 법칙이란, 그의 저서 ≪인구론(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에서 등장하는, 인구 증가에 대한 산술기하적 법칙을 말한다. 그는 이 저서에서 식량 증가율은 등차적임에 반해, 인구 증가는 등비적이라 상대적 빈곤의 급격한 증가 및 기타 사회 부조리가 자연스러운 현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맬서스는 ≪인구론≫에서 등비적 인구 급증에 따른 사회 혼란을 막는 방법으로 ‘열등자 배제’, ‘그리스도교적 금욕의 생활화’, ‘빈민 구제의 철폐’ 등을 주장하였다.
8 이와 관련하여 엘베시우스가 몽떼쓰끼외(Montesquieu)에게 한 비난은 상당히 독특하다. “몽떼쓰끼외는 그의 책에서, 로마 흥망성쇠의 이유에 대해, 그 국가의 역사에서 요행의 중요성을 충분히 다루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사상가들이 갖는 과오에 빠졌으며, 인민의 본성을 망각한 채, 불변의 정치적 견해와 한결같은 원칙을 민회의 대표자들에 귀의시키는, 방에 틀어박힌 학자들의 과오에 빠졌다. 그러나, [그가 말한 국가에서는] 종종 한 사람이 자신의 재량에 따라 원로원이라고 하는 중요한 회의를 지휘한다.”(≪사유와 성찰(Pensées et Reflexions)≫(≪전집(Complete Works)≫ 제3권), Paris, 1818, p. 140.) 이것은 독자 여러분에게 현재 로씨야에서 “영웅과 군중”의 이론[영역자 주: 미하일로프쓰끼는 1882년에 같은 제목의 논문에서 “영웅과 군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참조: N. K. Mikhailovsky, Collected Works, Vol. II, St. Petersburg, 1907, pp. 95-190.)]을 상기시키지 않는가? 잠시만 기다려 보자. 앞으로 설명할 내용은 로씨야 “사회학”의 독창성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여러 번 보여 준다.
9 ≪문학적, 철학적, 산업적 견해에 대해(Opinions litteraires, philosoplaiques et induslrielles)≫, Paris, 1825, pp. 144-45. ≪산업자의 정치적 교리문답(Catechisrne politique des industriels)≫도 참조하라.
10 [역자 주] 쌩씨몽은 자연에 대한 관조로부터 자유를 찾는 유물론자로서, 아직은 형이상학적 사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쌩씨몽은 유물론과 관념론 관점을 오간다. 그가 말하는 인간의 합리적 관념, 즉 이성은 무제약적이지만 동시에 대우주의 법칙에 종속되는 것으로, 환경의 작용에서 상대적으로는 자유롭지만, 동시에 법칙의 필연에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이성적이지 못한, 정념에 빠진다는 것을 곧 환경의 외력(外力)에 의해 지배받는, ‘외부로부터의 수동성’과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사회를 이상적으로 조직하는 제1단계의 과정으로서 인간 본성의 두 축을 중시한다. 그는 앞서 설명한 개념을, 이 두 축 중 하나로, 정신적 권위(나머지 하나는 세속적 권위)라고 하였는데, 정신적 권위는 객관 사물의 참된 원리를 관조-통찰하는 것 위에 세워진다. 그는 이것이 과학 및 생산업의 발달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항구적인 물질-정신적 부의 발달의 필수 조건이라 하였다. (욜렌 딜라스-로세리외, ≪미래의 기억 유토피아≫[2000], 김휘석 역, 서해문집, 2007, pp. 130-132. 참조.) 이러한 견해는 필연성에 대한 인식이 곧 자유라는 맑스와 엥엘스의 주장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는 점에서 발전적 경향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쌩씨몽은 환경 작용의 사슬을 끊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자연의 법칙을 관조하는, ‘이성적 인간’을 중시하였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적이었다. 공상적인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해 노력한 그의 일대기로부터 알 수 있는 여러 가지 사회주의 대구상(大構想)의 흔적은 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쌩씨몽의 위와 같은 사상에 기초하여 주가 추가된 문장을 선술한 것처럼 번역하였다. 주가 추가된 내용의 로씨야어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он имеет меньше поводов задумываться о влиянии среды на человека.” 직역하자면, 앞에서 다룬 문제의 해결에서, 쌩씨몽은 “환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덜 숙고했다”로 된다.

11 쌩씨몽은 최종적이자 극단적인 결론으로서 역사에 대한 관념론적 관점에 이른다. 그에게서 사상(“원리”)은 사회적 관계의 궁극적인 기초일 뿐만 아니라, 그중에서도 “과학적 사상(scientific ideas)”―즉, “세계의 과학적 체계”―이 주된 역할을 하며, 이것으로부터 순차적으로, 인간의 도덕적 개념을 규정하는 종교적 사상(religious ideas)이 뒤따르게 된다. 이러한 견해는 동시대 독일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유행했지만, 그들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를 취한 주지주의(主知主義)라고 할 수 있다.
12 [역자 주] 여기서 언급되는 ‘신학적-, 형이상학적-, 실증적-‘이라는 세 단계의 법칙은 꽁트가 ≪실증주의 서설(Cours de Philosophie Positive)≫에서 주장한, 인류 문명의 동학으로서 인간 인식의 진화를 말한다. 신학적 단계는 현상을 초자연적 힘의 결과로 보는 단계, 형이상학적 단계는 현상을 단 하나의 본질, 본성으로서, 추상적인 개념으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단계, 실증적 단계는 현상을 관찰-가설 성립-실험-일반화의 과정으로 연구하는 단계이다. (오귀스트 콩트, ≪실증주의 서설≫, 김점석 역, 한길사, 2001. 참조.)
13 위바르[Nicolas Gustave Hubbard]가 [쌩씨몽의 세 단계의 법칙에 대한] 꽁트의 차용을 지적했을 때, 리트레[Émile Littré]는 위바르의 진술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는 [꽁트의 ‘세 단계의 법칙’에 대해서], 쌩씨몽은 신학적 단계 및 과학적 단계라는 ‘두 단계의 법칙’만을 형성했다고 주장하였다. 플린트[Robert Flint]는 리트레의 이와 같은 견해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쌩씨몽의 어떠한 글에도 세 단계의 법칙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그의 말은 옳다.”(≪유럽의 역사철학(The Philosophy of History in Europe)≫, Edinburgh and London, 1874, p. 158.) 우리는 쌩씨몽으로부터의 다음 발췌문을 위 관찰과 대조할 것이다. “어떤 천문학자, 물리학자, 화학자, 생리학자가 인간의 이성이 순전히 신학적 사상에서 실증적 사상으로 나아가기 전에 모든 지식 분야에서 오랫동안 형이상학을 차용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겠는가? 과학의 역사를 연구해 온 모든 사람에게 이 중간 단계가 유용하고 심지어 단계 이행이 진행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라는 확신이 생기지 않겠는가?”(“서문(Preface)”, ≪산업의 체계에 대해(Du systeme industriel)≫, Paris, 1821, pp. vi-vii.) 세 단계의 법칙은 쌩씨몽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했기에, 그는 프랑스 혁명기 전(全) 기간에 “법학자와 형이상학자”의 우위성과 같은, 순전히 정치적인 사건을 이 방식으로 설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플린트가 쌩씨몽의 저작을 주의 깊게 읽었다면, 이를 “발견”하는 것은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 사고의 실제 발전 과정을 연구하는 것보다는, 학습된 인간 사고의 역사를 쓰는 것이 훨씬 쉽다.
14 이러한 견해는 나중에 쁘루동에 의해 도용되고 왜곡되었다. 쁘루동은 이 견해에 기초하여 무정부 이론을 세웠다.
15 [역자 주] 특정 생물체의 수정란, 알, 포자 등이 세포 분열 및 조직 분화, 형태 형성을 거쳐 성체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말한다.
16 [역자 주] 특정 생물체 속하는 종족이 그와 같은 특정한 종족이 되기까지에는, 수많은 진화학적 변천이 전제되어 있다. 특정한 종족이 거친 역사적, 진화학적인 변천의 과정을 계통 발생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현생 인류는 최초의 생명체라 할 수 있는 존재로부터 현생 인류로 되기까지 수많은 진화학적 변천 과정(고대어, 유인원 등)이 존재한다.
17 ≪조직자(L’Orgenisateur)≫, p. 119. (쌩씨몽 ≪저작집≫ 제6권, 또는 쌩씨몽과 앙팡땡의 ≪전집≫ 제20권.)
18 [역자 주] 1860년대 제정 로씨야 내에서 형성된 주관적 관념론(불가지론, 신칸트주의, 프랑스 실증주의 등을 절충한 형태의)에 기초한 사회학자 일군을 말한다. 로씨야 주관주의 사회학(또는 ‘로씨야 주관적 사회학’)은 “사상이 환경을 지배한다”(쁠레하노프의 표현대로)는 견해를 가졌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유토피아주의자와 부분적으로는 공통된 견해(그러나, “사상이 환경을 지배한다”라는 견해에 있어 확고한 입장을 지닌 로씨야 주관주의 사회학과는 달리, 유토피아주의는 정반대의 입장으로의 선회를 반복하기도 하였다)를 지녔지만, 전통적인 유토피아주의자가 상정한 ‘자연의 섭리’ 및 ‘합법칙성’에 대해서는 극도의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들은 각 개인에게서 나타나는 심리적 경향에 따라 그 실증적 연구 방법을 달리해야 하며, 이 방법론에 따른 연구 결과를 절충하면 그 개인들이 구성한 특정한 한 사회의 심리적 경향(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회심리적 관계, 영웅과 군중 사이의 사회심리적 관계, 정치에 접근할 수 있는 시민과 그렇지 못한 시민 사이의 사회심리적 관계 등)을 알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들은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기준하는 제1의 요소에 대해,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각 개인의 합의(개체주관의 총합 또는 총의) 또는 이러한 것과 유사한 정치·사회적 명목 또는 명목들이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주관주의 사회학자 일군은 맑스와 엥엘스의 사적 유물론에 대적하거나, 기껏해야 맑스주의 세계관을 자의적으로 수정하여 절충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에 따르면, 한 사회의 구성체는 각 개체주관의 총합에 근사하여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인류사에 합법칙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에 따라 낙후한 봉건사회인 당시 제정 로씨야가 그 필연적 법칙에 따라 자본주의로 이행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이를 부정하였다. 주관주의 사회학은 로씨야 인민주의 운동의 지배적 사상 조류 중 하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뾰뜨르 라브로프(Пётр Лавров), 니꼴라이 까레예프(Николай Кареев), 니꼴라이 미하일로프쓰끼(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ский) 등이 있다. (소비에트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편, ≪세계철학사≫, 이을호 편역, 1989의 제IV권 제5장, 제VIII권 제1장, 제IX권 제7장 참조.)
19 [역자 주] 당대 로씨야 주관주의 사회학자들은 법칙성에 대한 승인이라는 관점을 비난하였으며, 객관적인 법칙성의 승인을 절대적으로 거부하였다. 앞선 주에 서술한 것처럼 그들은, 사회 발전 법칙을 말하는 대신, 그것을 말소하고 ‘개체주관의 총합’, ‘무한한 개별에 대한 무한한 실증적 연구 방식’이라는 지극히 형이상학적이고도, 주관적인 기준으로 사회의 내용과 형식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쁠레하노프는 당대 로씨야 사회학자들이, 기존 유토피아주의자들이 겪은 모순(형이상학적으로 법칙성을 승인함으로써 생겨나는)을 극복하려고 하는 대신, 새로운 모순적인 관점을 채택함으로써 문제 해결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방식으로 사회과학을 다루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20 [영역자 주] “그들이 말하는 역사 정신이란, 바로 그 신사들의 정신일 뿐이라네.” (괴테, ≪파우스트≫ 제1부.)
21 그의 논문, “동산 및 부동산 임대료의 점진적 인하에 대한 고찰(Considérations sur la baisse progressive du loyer des objets mobiliers et immobiliers)”, ≪생산자≫ 제1권, p. 564.
22 “정치경제학의 발전에 대한 고찰(Considérations sur les progrès de l’économie politique)”, ≪생산자≫ 제4권.
23 [영역자 주] Sieber, Nikolai Ivanovich(1844-1888). 로씨야에서 맑스의 경제 이론을 최초로 대중화한 로씨야 경제학자이다.
24 [영역자 주] Zhukovsky, Yuly Galaktionovich(1822-1907), 부르주아 경제학자 및 공법학자로,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의 반대자였다.
25 [역자 주] 문학가 알렉싼드르 뿌쉬낀(Александр Пушкин, 1799-1837)이 1836년에 창간한 혁명적 민주주의 성향의 평론 잡지 및 기관지이다. 제정 로씨야의 농노 제도를 비판하였으며, 당대 사회에서 진보적인 관점을 수용하고, 적극 선전하였다. 주요 기고자로는 V. G. 벨린쓰끼, N. G. 체르늬쉐프쓰끼 등과 같은 당대 진보적인 활동가가 있었다. 1866년 알렉싼드르 2세 암살 사건 후 짜르 정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다.
26 [영역자 주] 상기한 저술은 모두 N. G. 체르늬쉐프쓰끼 의 저술이다.
27 N. K. 미하일로프쓰끼, ≪저작집(Works)≫ 제2권(2판), St. Petersburg, 1888, pp. 239-40.
28 [역자 주] 맑스의 노동가치론에서 가치는 추상적 노동의 객체화로, 재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노동량으로 측정되는, 상품의 정량화된 일자(一者)이다. 상품이 교환될 때 이것은 교환가치라는 일자로 된다. 그러나 이는 지출되는 사회적 노동력에 가치가 이미 내재해 있어서 가능한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가치는 추상적 노동의 변증법적 전화로 성립·실현되는 것이지, 그 추상적 노동에 개별 원소로서 내재한 가치가 밖으로 나와서 성립·실현되는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추상적 노동에 가치가 원소로서 내재해 있는 것도 전혀 아니다.) 쁠레하노프 역시 체르늬쉐프쓰끼와 같은 가치론 이해가 형이상학적 이해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는데, 오늘날 이른바, ‘맑스주의 경제학의 전형문제’를 주장하는 삐에로 스라파(Piero Sraffa)나 그것을 ‘신해석’으로 해결했다는 제라르 뒤메닐(Gerard Dumenil) 등은 가치론을 대함에서 19세기 체르늬쉐프쓰끼의 형이상학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들은 ‘가격’이라는 집합 또는 대수적 식에는 ‘가치’라는 수학적 변항이 존재해야 한다는, 그리고 ‘노동’이라는 집합 또는 대수적 식에는 ‘가치’라는 수학적 변항이 존재해야 한다는 형이상학적(정확히는 수학적 형식주의) 전제를 상정한다. 이러한 부르주아 ‘경제학’의 형이상학적 사고에 기초한 가치론 해석에 대해서는 일찍이 예발트 일리엔꼬프(Э́вальд Илье́нков)가 지적한 바 있다.
29 ≪우리의 동향(Our Trends)≫, St. Petersburg, 1893, p. 138.
30 같은 책, pp. 9, 13, 140 외 다수.
31 [영역자 주] Kareyev, Nikolai Ivanovich(1850-1931), 자유주의 성향의 로씨야 역사가 및 정치평론가이며, 맑스주의에 반대하였다.
32 [영역자 주] 이것은 빈, 빠리, 베를린의 혁명과 관련하여 1848년 니꼴라이 1세가 발표한 선언문을 약간 변형한 문구이다. 원문은 “이교도들이여 조용히 들으라, 주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하시니라”라고 되어 있다. 선언문을 쓴 목적은, 로씨야 사회에서 발흥하는 자유주의적 요소를 억제하고, 당시 혁명적 유럽을 위협하기 위한 것이었다.
33 ≪우리의 동향(Our Trends)≫, p. 143 이하 참조.
34 [역자 주] 로씨야어 원문 표기로는 “борьба с ветряными мельницами”로 ‘풍차 때리기’로 번역된다. 가상의 적을 상정하고, 그 가상의 적과 싸운다는 서구권의 속담이다.
35 [영역자 주] 쉐드린(Shchedrin)은 로씨야의 뛰어난 풍자가이자 혁명적 민주주의자인 M. Y. 쌀띄꼬프(M. Y. Saltykov, 1829-1889)의 필명으로, 쁠레하노프가 자유롭게 인용·묘사한 “모쓰끄바 역사가”에 대한 글귀(쉐드린은 므쓰찌쓸라프(Mstislav)와 로쓰찌쓸라프(Rostislav)를 언급한다)는 목가 소설인 쉐드린의 ≪현대 목가(Modern Idyll)≫(1883년)에 있는, 12세기와 13세기 로씨야 공작들이 겪은 불화를 묘사한 일부 내용에서 차용된 것이다.
36 [역자 주] 까레예프는 그가 가진 ‘분류된 사실’이 주관적인 기준에서 정초될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분류된 사실’이 사실 주관적이지 않다는 식(“사실은 지어낸 것일 수 없다”)의 전제를 단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 번 그것이 주관적이라 규정한 후, 그러한 ‘분류된 사실’을 검증함에서는 자의적이지 않아야 함을 말한다. 그러나, 그의 논리에 따르면, 그러한 검증 또한 ‘분류된 사실’이 갖는 결함을 포함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처음에 한 번 패배했지만(야로쓸라프처럼), 그것을 그 자체로 패배로 인정하며, 그것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오류를 또 내보일 ‘기회’(“야로쓸라프의 슬픈 운명에 대해서 몇 번은 눈물을 흘릴 소중한 권리”)를 가지는데, 동시에 그는 이쟈쓸라프가 갖는 저주(자기 자신과의 모순과 끊임이 없는 싸움)를 떨쳐 낼 수도 없게 된다.
37 [영역자 주] 미하일로프쓰끼가 정식화한 이원론은 두 가지 진리를 상정하고 있는데, 하나는 실제로 있는 것의 진리로서 “사실의 진리(the truth of verity)”[사실상 육체]이고, 다른 하나는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의 진리로서 “정의의 진리(the truth of justice)”[사실상 영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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