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맑스의 ≪자본론≫에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2)*

 
일렌코프(Evald Ilyenkov)**
번역 : 노준엽 │ 회원

 

* 이 글은 일렌코프의 저서인 ≪맑스의 ‘자본론’에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을 분량을 나누어 연재하는 것이다. 원문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marxists.org/archive/ilyenkov/works/abstract/index.htm>

 

** 역주: 쏘련의 철학자로 ≪변증법적 논리학의 역사와 이론≫(연구사, 1990) 등의 저서가 있으며, 변증법적 논리학의 문제를 깊이 있게 접근하고 있는 철학자이다.

 

 

제1장 구체에 대한 변증법적 개념과 형이상학적 개념

 

변증법과 형식논리학에서 추상과 구체의 개념 (지난호)

추상과 구체 개념이 역사로부터 (지난호)

맑스에게 있어서 구체의 정의 (이번호)

개념에 대한 관념의 관계에 대하여 (이번호)

 

맑스에게 있어서 구체의 정의

 

맑스는 구체를 ‘다양한 양상들의 통일’로 정의한다. 이 정의는 전통적인 형식논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불합리해 보일지도 모른다: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다양성을 통일로 환원하는 것은, 처음 보기에는 구체적인 것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사물들에 대한 추상적 지식의 과제처럼 보인다. 이러한 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감각적으로 인식된 현상의 다양성에서 통일을 깨닫는 것은, 이 모든 현상들이 담지하고 있는 추상적으로 일반적인, 동일한 요소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일반적 용어를 통해 의식 속에 기록된 이 추상적 통일은 처음 보기에는 논리학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서 바로 그 ‘통일’로 보인다.

정말로, 만약 누군가가 살아있는 관찰와 관념으로부터 개념으로, 인식의 감각적 단계로부터 이성적 단계로의 이행에 대해, 감각적으로 주어진 다양성의 추상적 통일로의 환원이라고만 해석한다면, 맑스의 정의는 의심의 여지없이 ‘논리적’ 용어로 정당화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요점은, 맑스의 관점은 사고, 사고의 목표들과 과제들―낡고 비변증법적인 논리학이 자신의 이론의 기초로 삼는 것과는 매우 상이한―의 개념에 기초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학이 가진 문제들을 해결하는 내용에서만이 아니라 용어법에도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그 점은 불가피하다: ‘어떤 과학의 모든 새로운 양상은 그 과학의 기술적인 용어들을 혁명하는 것을 포함한다.’1)

맑스가 구체를 다양한 양상들의 통일로서 정의할 때, 그는 통일, 다양성, 그리고 그것들의 관계에 대한 변증법적 해석을 가정한다. 변증법에서는, 통일은 무엇보다도 특정한 체계 혹은 덩어리 내에서 상이한 현상들의 연관으로서, 상호연관과 상호작용으로서 해석되고, 그리고 이 현상들의 추상적 유사성이 아닌 것으로서 해석된다. 맑스의 정의는 정확히 ‘통일’이라는 용어에 대한 이러한 변증법적 의미를 띠고 있다.

만약 누군가가 맑스의 다소간의 경구적인 간결한 정식을 펼쳐 놓는다면, 구체에 대한 그의 정의는 말 그대로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구체, 구체성은 먼저 현상들 간의 실제적인 연관, 관념 속에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대상의 모든 측면들과 순간들의 연쇄와 상호작용이다. 구체는 그러므로 대상의 다양한 존재 형식의 내적으로 나누어지는 총체, 오직 주어진 대상에 특징적인 독특한 결합으로서만 해석된다. 이렇게 인식된 통일은 현상들 상호 간의 유사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그것들의 차이 그리고 대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양성(혹은 구체성) 속의 통일이라는 이 개념은, 낡은 논리학이 기원으로 하는 것과 다를 뿐만 아니라 그것의 직접적인 대립물이다. 그 개념은 통합성 혹은 전체성의 개념의 그것에 접근한다. 맑스는 이 용어를, 오직 외적으로, 다소간 우연하게 서로 간에 연결되어 있는, 불변의 구성 요소들의 덩어리라는 그것(대상-역자)에 대한 형이상학적 개념과는 반대로, 대상의 모든 다양한 표현들 속에서 통일되어 있는 통합된 전체로서, 상호 간에 서로 규정하는 현상들의 유기적인 체계로서 대상을 특징지워야만 하는 그런 경우에 사용한다.

맑스의 구체에 대한 정의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우선, 인식하는 주체에게 발생할 수 있는 어떠한 발전들로부터도 완전히 독립적으로 고려되는 사물의 객관적인 특징으로서 다루어진다는 점이다. 대상은, 사고에 의해 인식되거나 혹은 감각기관들에 지각되는 그것의(대상의-역자) 존재와는 독립적으로, 그것 자체로 그리고 자기 본질에 의해 구체적이다. 구체성은 감각적으로 주어진, 즉각적으로 관찰되는 것에 대한 주체에 의한 대상의 반영 과정에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구체’는 먼저 변증법적 유물론의 다른 범주들과 같은, ‘필연’과 ‘우연’, ‘본질’, 그리고 ‘현상’과 같은 종류의 객관적인 범주이다. 그것은 자연, 사회, 그리고 사고의 발전의 보편적인 형태를 표현한다. 맑스의 관점 체계에서는, ‘구체’는 결코 감각적으로 주어진, 즉각적으로 관찰된 것의 동의어가 아니다.

‘구체’가 ‘추상’과 대립하는 한에서, 후자는 맑스에 의해 먼저 객관적으로 취급된다. 맑스에게는, 그것(추상-역자)은 ‘순수한 이념’의, 정신 활동의 산물과 동의어가 아니며, 오직 인간의 뇌에서만 발생하는 주관적 심리적 현상의 동의어가 아니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맑스는 이 용어를, 의식의 밖에 존재하는 실제적인 현상들과 관계들―그것들이 의식 속에서 반영되든, 반영되지 않든지 관계없이―을 특징지우기 위해 사용한다.

가령, 맑스는 ≪자본론≫에서 추상적 노동을 말한다. 추상성은 여기서 발전된 상품생산,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나타나는 인간 노동의 형태에 대한 객관적 성격을 나타낸다. 다른 경우에도 그는 상이한 종류의 노동을 어떤 차이도 결여된 동일한 단순 노동으로 환원하는 것은, ‘매일 매일의 생산의 사회적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추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것은 ‘모든 유기적 육체가 공기 중으로 분해되는 것과 같은 실제적 (추상)’이다.

추상적 부의 물질적 존재로서 금의 정의는, 자본주의적 구성체라는 유기체에서 그것의 특수한 기능을 표현하는 것이지, 결코 이론가나 실천적 노동자의 의식 속에서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추상’이라는 용어의 이러한 사용은 맑스의 용어상의 변덕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그의 논리적 견해의 본질과, 사고 형태와 객관적 현실의 관계에 대한 변증법적 해석과, 추상적 사고의 진리 규준으로서 실천(대상에 관계되는 감각적 활동)의 관점과 연결되어 있다.

 

더구나 이러한 용법은 ‘헤겔주의로의 후퇴’로 설명될 수 없다: 맑스의 명제는, ‘가장 단순한 경제학적 범주, 예를 들어, 교환가치는 (중략)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구체적인 유기적 전체의 추상적, 일면적인 관계로서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다’라는 취지인데, 이는 헤겔에 반대하는 것이다. [같은 책]

 

이러한 종류의 맥락에서 ‘추상’은, 맑스에게서 매우 자주, ‘단순한’, 발전되지 않은, 일면적인, ‘순수한’ (즉, 어떤 것을 변형시키는 영향에 의해 복잡해지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추상’은 의식의 현상이 아니라, 실제적인 현상의 객관적 성격을 가진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상업민족들―페니키아인들, 카르타고인들―이 이렇게 순수(추상적인 정확성)하게 발전하도록 한 것은 고대 세계에서 농업민족들의 지배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물론 페니키아의 역사를 쓰는 학자들이나 페니키아인들이 가진 ‘사고의 추상적인 힘’이 우세한 결과가 결코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추상’은 결코 사고의 생산물이나 결과가 아니다. 이 사실은 ‘번식의 추상적 법칙이 오직 식물들과 동물들에게만 존재한다’는 상황만큼 사고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맑스에 따르면, ‘추상’은 (그것의 대립물인 ‘구체’와 같이) 자연, 사회 그리고 사고의 발전의 보편적인 형식에 관한 과학인 변증법의 범주이며. 이러한 기초 위에서 논리학의 범주이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또한 맑스주의의 논리학이기 때문이다.

추상 범주에 대한 이러한 객관적인 해석은, 조잡한 형이상학적 방식으로, 객관적 실재의 형식에 대하여 ‘사고의 순수한 형식’을 대립시키는, 모든 종류의 신칸트주의 논리학과 인식론에 반대하는 선봉에 서있다. 이들 논리학의 학파들에게, ‘추상’은 단지 사고의 형식인 반면에, ‘구체’는 감각적으로 주어진 이미지의 형식이다. 논리학에서 밀과 흄주의적인 그리고 칸트주의적인 전통(예를 들면, 러시아의 첼파노프와 브벤덴스키)에서의 이러한 해석은, 논리학으로서 그리고 지식에 대한 이론으로서의 변증법의 본질 자체에 대해 이질적이고 적대적이다.

추상과 구체의 범주에 대한 편협한 인식론적인(즉, 최종적 분석을 해보면 본질적으로 심리학적인 것이다) 해석은 현대 부르주아 철학에 확고히 뿌리내리게 되었다. 여기에 생생한 사례가 있다―막스 에펠과 피터 루츠의 철학사전[베를린 1958]으로부터의 정의:

 

‘추상: 주어진 연관으로부터 분리되고 오직 그 자체로서 생각되는 것. 그러므로 추상은, 관찰에서 주어지는 것과 반대로, 개념상의, 인식상의 의미를 획득한다.’

 

‘추상: 관찰에서 주어진 것으로부터, 특징의 생략을 통해, 일반적 관념으로 상승하는 과정 그리고 주어진 개념으로부터 더 일반적인 것으로 상승하는 과정. 추상은 내용을 감소시키고 양을 늘린다. 제한(determination)에 대립하는 것.’

 

‘구체: 관찰에서 즉각적으로 주어지는 것; 구체적 개념들은 관찰된 것을, 관찰의 개별적 대상들을 가리킨다. 추상에 대립하는 것.’

 

이 일면적인 정의(추상은 물론 다른 것들 사이에서 정신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것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는 사전들마다 차이가 있지만, 그러나 그 차이는 사소한 것이다. 그것은 판을 거듭하면서 윤색되었고 자본주의 나라들의 철학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 점이 그것이 가진 올바름의 증거는 전혀 아니다.

‘구체적인 개념’은 이 정의들에 의해, 감각적으로 관찰된 개별적 사물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단순한 기호 혹은 상징으로 축소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구체’는 단지 사고에서 명목상으로 나타나고, 단지 ‘이름을 가리키는’ 능력으로서 나타날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구체’는 해석되지 않은, 불특정한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의 동의어가 되었다. 이러한 정의들에 따르면, 구체도 추상도 그것의 실제적인 객관적 내용들에 관한 이론적 지식의 성격으로서 쓰일 수 없다. 그것들은 오직 ‘인식의 형식’을 규정한다: ‘구체’, 감각적 인식의 형식, 그리고 ‘추상’, 사고의 형식, 이성적 인식의 형식. 다른 말로 하면, 그것들은 상이한 영역들의 영혼(psyche)에, 상이한 대상들에 속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어떤 것이 있는 곳에서 추상적인 것은 전혀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이 정의들에 있는 전부이다.

구체와 추상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맑스의 관점에서는, 논리학으로서 그리고 지식의 이론으로서의 변증법의 관점에서는 매우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처음에 이 문제는 단지 ‘인식론적인’ 문제, 즉 감각적으로 지각된 이미지에 대한 정신적 추상의 관계에 대한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그것의 실제적 내용은 훨씬 더 넓고 깊다. 그리고 그것은 분석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매우 다른 문제―대상 그 자신과의 관계 문제, 즉, 어떤 구체적 전체 내부에서 상이한 요소들의 관계 문제―에 의해 대체된다. 그것이 문제가 우선적으로 객관적인 변증법―신칸트주의자들이나 실증주의자들처럼 편협한 인식론적 수준이 아니라, 자연, 사회 그리고 사고 자체의 발전에 관한 보편적 형식과 법칙에 대한 가르침―의 틀 내에서 풀리게 되는 이유이다.

맑스가 문제의 인식론적 측면을 다루는 한에 있어서, 그는, 추상을 의식의 대상에 대한 어떤 일면적인, 불완전한, 불균형한 반영으로서, 잘 발전되고, 전면적이고, 포괄적인 지식인 구체적 지식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해석한다. 이 지식이 어떤 주관적인 심리적 형태―감각적으로 지각된 이미지인지 추상적인 언술의 형태인지―로 주체에 의해 ‘경험’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맑스와 레닌의 논리학(변증법)은 경험의 주관적 형식보다는 지식의 객관적 의미에 관하여 그 특징을 정립한다. 빈약한, 불충분한, 불균형한 지식은 감각적 이미지의 형식으로 흡수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논리학은 그것을 ‘추상적’ 지식으로 정의해야 할 것이다―그것의 존재가 감각적으로 주어진 이미지 속에 체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추상적인 언어적 형식은, 공식들에 대한 언어는, 풍부하고, 잘 발달된, 심오하고 포괄적인 지식, 즉, 구체적 지식을 표현할 수도 있다.

‘구체성’은 의식 속에서의 실재의 반영의 감각적-이미지적인 형식의 동의어 혹은 특권이 아니다. 그리고 이 점은 ‘추상성’이 이성적인 이론적 지식의 특수한 특징이 아닌 것과 같다. 확실히 우리는 종종 감각적 이미지의 구체성과 추상적 사고의 구체성에 대해 말한다.

하나의 감각적인 이미지, 하나의 관찰된 이미지는, 또한 종종 매우 추상적일 수도 있다. 그것은 기하학적 형태나 추상화 작업을 생각하면 충분할 것이다. 그 역으로, 개념을 통한 사고는 세계에 대한 충분하고 엄격한 의미로서 구체적일 수 있고 심지어는 구체적이어야만 한다. 추상적 진리는 없으며, 진리는 항상 구체적이라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감각적으로 지각된 이미지, 개별적인 것에 대한 관찰만이 진리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맑스의 정의에 따르면, 사고에 있어서 구체는 또한 수많은 정의들의 조합(종합) 형식으로도 나타난다. 정의들의 논리적으로 일관된 체계는 바로 구체적 진리가 사고 속에서 깨달아지는 ‘자연스런’ 형식이다. 그 체계의 부분을 형성하는 각각의 정의들은 구체적 실재의 단지 하나의 부분, 하나의 파편, 하나의 요소, 하나의 측면을 자연스레 반영한다―그리고 그 점은 그것이 만약 그 자체로서, 다른 정의들로부터 분리되어서 취해진다면, 추상적으로 되는 이유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구체는 사고 속에서 추상을 통하여, 그것 자신의 대립물을 통하여 깨달아지며, 그리고 그런 과정 없이 구체를 깨닫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점은 일반적으로 변증법에서 예외라기보다는 법칙이다. 필연성은 우연성과 바로 그와 같은 동일한 관계에 있고 본질은 현상과 그러한 관계에 있다. 기타 등등

다른 한편으로, 어떤 구체적 과학에서 개념적 체계의 부분을 형성하는 각각의 수많은 개념들은, 그것과 연관된 모든 다른 정의들의 의미로 채워지면서, 자신의 추상적 성격을 잃는다. 독립된 추상적 정의들은 상호적으로 서로를 보충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립적으로 취해진, 그것들 각각의 추상성은 극복된다. 요컨대, 실재에서의 구체성을 반영하는 사고에서의 구체성에 대한 추상의 관계 변증법은 이 점에 있다. 살아있는 관찰 자료에 대한 이론적 처리 과정에서, 그리고 개념들의 용어로 관찰의 결과들과 관념들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의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이 현재의 작업의 주제이다.

물론, 우리는 일반적인 인식의 과정의 모든 단계에서, 반영의 모든 형태로, 추상과 구체의 문제에 대한 철저한 해답을 제공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하나의 사물에 대한 감각적으로 지각된 이미지의 형성은, 매우 복잡한 추상과 구체에 대한 그 자신의 변증법과 연관되고, 그것은 심지어 언어와 단어에 연관된 관념의 형성에 더 해당된다. 인식에서 또한 막대한 역할을 하는 기억은, 또한 구체에 대한 추상의 다소 복잡한 관계를 자신의 구조에 포함하고 있다. 이 범주들은 또한 예술적인 창조성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이 모든 측면들을, 특수한 연구의 주제로서, 고려하지 말 것을 강제당하고 있다.

살아있는 관찰로부터 추상적 사고로 그리고 추상적 사고로부터 실천으로 이어지는 인식의 길은 매우 복잡한 길이다. 구체에서 추상으로 혹은 그 역의 복잡하고 변증법적으로 모순되는 변환이 이 길의 각각의 고리에서 발생한다. 심지어 감각은, 실재의 구체성으로부터 의식에서의 추상성으로의 이행의 요소가 있다는 직접적 인식에서조차, 실재에 대한 더 거친 상을―그것이 실제로 그러한 것보다―제공한다. 살아있는 관찰로부터 추상적 사고로의 이행은 ‘구체로부터 추상으로’의 운동과 동일한 것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이 요소로 결코 축소될 수 없다. 비록 후자가 항상 그것 속에서 나타나지만. 그것은, 오직 구체를 즉각적인 감각적 이미지의 동의어로, 그리고 추상을 정신, 이념, 개념의 동일어로 해석하는 사람들에게만 동일한 것이다.

 

 

관념의 개념에 대한 관계에 대하여

 

인식의 감각적인 경험적인 단계 혹은 형식의, 이성적인 것과의 관계에 대한 변증법적 접근과 거리가 있는 맑스주의 이전의 논리학은, 그것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관념의 개념에 대한 관계의 문제에 대한 깔끔한 해결을 제공할 수 없었다.

개념은 수많은 단순 관념들 속에서 일반을 가리키는 언어적 표현으로서, 이름/용어로서(로크, 흄), 단순히 우리의 사고의 하나의 사물에 대한 어떤 관념으로서(크리스티안 울프), 혹은 그것이 일반적인 관념이거나 관찰되는 많은 대상들에 공통적인 하나의 관념인 한에서 관찰에 대립되는 어떤 것으로서(칸트), 혹은 명확하고, 모호하지 않고, 안정되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의미의 관념으로서(지그바르트), 혹은 하나의 관념에 대한 관념으로서(쇼펜하우어) 정의되었다. 오늘날에도 광범한 흐름은 단순히 ‘하나의 용어에 대한 어의적인 의미’―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와 관계없이―로서 개념을 정의한다. 신실증주의자들은 자주 개념과 관념 간의 관계에 대해 다루기를 완전히 거부하고 있는데, 개념에 대한 순수하게 형식적인 정의로 나아가고 있다.―개념을 ‘발언의 기능’, ‘전치사적인 기능’으로 특정하면서, 등등.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 문제는 현대의 부르주아 철학과 논리학에서 극도로 혼란스러운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한 견해는 하인리히 슈미츠의 철학 사전에서 매우 전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개념은 ‘단어들의 의미 있는 내용’으로 정의되었고, 더 엄격한 ‘논리적 의미’에서는, ‘그것이 자신들의 지향으로서 다른 유사한 인식으로 이전될 수 있는 방식으로 중요한 인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하나의 단어의 의미 있는 내용으로서 정의된다. 커크너-미하일(Kirchner-Michaelis)의 기초적 철학 개념 사전에서는 개념과 관념의 동일시를 피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므로 개념은 폐쇄된 일반적 관념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들에게 공통적인 것을 뽑아내거나 그것들의 비교를 통하여 관념들로부터 나타난다.’

칸트의 추종자인, 러시아의 논리학자 브베덴스키는, 하나의 관념은 ‘경험의 심리적 방식’에서 개념과 다른 것이 아니라는 가정으로부터 시작하지만, 그러나 사실상 관념에서 사물들은 ‘어떤 특징들에 관하여’ 고려되는 반면에, 개념은 오직 ‘본질적인 관련해서’만 고려된다. 그러나 그 다음 페이지에서 그는 ‘어떤 것이 한 관점에서 본질적일 수 있으나, 다른 관점에서는 꽤 다른 것’일 수 있다는 특색 있는 주장을 하면서 위와 같은 구분을 버린다. 그러나 어떤 특징이 ‘본질적’인가 혹은 ‘비본질적’인가의 문제는 형식논리학 분야 밖의 어딘가에서 해결되는데, 인식론, 윤리학, 혹은 이러저러한 어떤 분야에서 해결된다. 따라서 논리학은, 브베덴스키에 따르면, 어떤 구두로 기록된 ‘일반적’ 존재를, 그 의미 있는 측면으로부터 고려되는 어떤 용어를, 개념으로서 소박하게 사고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매우 올바르다.

이 주장(비맑스주의, 반변증법적 논리학에서 매우 전형적인)은 최종적 분석에서, 다소간 우회로를 통해서, 하나의 동일한 비난을 초래한다: ‘개념’이라는 용어는, 어떤 구어적으로 표현된 ‘일반’, 감각적으로 주어진 복합체로부터 용어적으로 기록된 어떤 추상, 직접적인 관찰의 많은 대상들에 공통적인 어떤 관념을 의미하기 위해 쓰인다.

다른 말로 하면, 개념에 대한 모든 반변증법적 버전들은 하나의 동일한 고전적인 원천―로크와 칸트의 정의 그리고 때로는 그보다 더 뒤로 돌아가서, 단어와 개념을 전혀 구분하지 않았던 중세의 유명론에 대한 정의로까지 돌아간다―으로 궁극적으로 돌아간다.

로크와 칸트의 개념의 근본적인 약점은, 감각적인 경험적 지식의 형식으로서 관념과 이성적인 지식의 형식으로서 개념을 구분하려는 그 시도가 인식론의 로빈슨 크루소 모델―즉 인식 주체가 사회적 연관의 연쇄로부터 고립되고 ‘그 외의 모든 것’과 대립하는 독립된 개별 인간이라는 점―에 확고히 기초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점이 의식의 객관적 실재에 대한 관계가 여기서 매우 협소한 해석―이 의식의 밖에 놓여 있고 의식의 존재와 의지에 의존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한 (여러 번 반복되는) 개별적 의식의 관계로서만 해석되는 것―으로 주어지는 이유이다.

하지만 개인의 의지와 의식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물질적 자연만이 아니다―인간의, 사회의 물질적 및 정신적 문화의 극히 복잡하고 역사적으로 형성된 영역 또한 그러하다. 사회 속에서 의식적인 삶으로 상승하면서, 개인은 기존의 ‘정신적 환경’을, 객관적으로 수행되는 정신적 문화를 발견하게 된다. 후자는, 개인이 그것의 성격을 매우 객관적인 어떤 것으로 고려하면서 동화시켜야만 하는 특수한 대상으로서, 개인의 의식에 대립한다. 사회적 의식의 형식의 체계는 (가능한 광범위한 의미에서, 사회의 정치조직, 법률, 도덕, 매일의 일상, 그리고 또한 사고의 영역에서 행동의 형식과 규범들, 관념들의 구어적 표현을 위한 문법적 구문론의 규칙들, 미적 취미 등등을 포함하여) 처음부터 개인의 발전하는 의식과 의지를 구조화시키고, 그를 자신의 이미지대로 주조한다. 결국, 개인의 의식 속에서 떠오르는 각각의 독립적인 감각적 인상은 항상, 개인이 전유하는 극도로 복잡한 사회적 의식의 형식의 프리즘을 거친 외적 자극에 대한 반응의 산물이다. ‘이 프리즘’은 사회적 인간으로서 발전한 산물이다. 홀로 자연과 대면한다면, 개인은 이런 프리즘을 가질 수 없다. 그리고 프리즘은 고립된 개인이 자연과 맺는 관계를 분석해서는 이해될 수 없다.

로빈슨 크루소의 인식론적 모델은, 정확히 이러한 동화적 상황의 맥락 속에서 의식적인 관념들과 개념들의 생산 메커니즘을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의식적인 관념들을 생산하는 어떠한, 심지어 가장 초보적인 행동의 사회적 성격은 여기에서 처음부터 무시된다. 그리고 개인은 처음에 고립된, 감각적인 인상들을 경험하고, 그리고는 귀납적으로 그것들로부터 일반적인 어떤 것을 추출하고, 그것을 하나의 단어로 가리키고, 그리고는 이 일반적인 것을 향한 ‘반성’의 태도를 취한다. 그 자신의 정신적 행동들과 그것들의 산물들―‘일반적 관념들’(즉, 언어로 기록된 일반적 관념들)을 연구의 특수한 대상으로 간주하면서. 간단히 말하면, 이 문제는, 이 견해의 고전적 대표자이자 설계자인 존 로크가 자신의 저작인 ‘인간오성론’에서 설명한 방식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개인의 의식의 사회적 인간적 성격의 성질―이 이론은 문밖으로 그것을 몰아내었다―은 창문을 통해 되돌아온다. ‘반영’ 즉, 그것들에 대한 정신 활동과 작용(삼단논법들, 개념에만 기초한 추론)의 산물에 대한 고려는, 이 산물들이 제한된 개인의 경험으로부터는 근본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어떤 결과를 포함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사회적 인간의 경험이 여기에서 (전 인류 문화의 역사로서보다) 오직 되풀이되는 개인의 경험으로서만, 독립적 경험들의 단순한 합으로서만 해석되는 한, 오래되고 모순적인 문화의 발전 속에서 성숙한 모든 의식의 형태는 일반적인 경험으로는 설명될 수 없고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과 같다. 그것들이 개인의 경험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연역될 수 있는 길은 없고 그럼에도 그것들은 대부분 이 경험을 능동적으로 결정하고, 그것이 진행되는 형식을 형성한다.

이 개념은 칸트의 ‘선험적 통각의 통일성’이라는 교의에 궁극적으로 체화되어 있는데, 칸트는 그것과 연관지어, 일반적인 관념으로서, 혹은 많은 관찰의 대상에 내재하는 그러한 일반적 요소의 관념으로서, 개념에 대한 자신의 정의를 제시한다. 개념에 대한 칸트의 교의는, 물론 이런 단순한 정의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모든 구조물들의 기초를 이루고 그것들과 완전히 연계를 갖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이 정의는 로크의 개념에 대한 일면적인 경험적 해석과 부합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그렇다. 그러나 협소한 경험주의는 불가피하게 자신의 대립물에 의해 보충된다. 이성에 대한 많은 수의 가장 중요한 개념들의, 범주들의 초경험적, 비경험적 기원에 대한 관념이 그러하다. 인간 사고의 문화가 발전하는 수천 년의 가장 복잡한 산물을 구성하는 이성에 대한 범주들은, 일반적 관념들로서, 개인의 관찰에 주어지는 많은 대상에서의 일반적 요소에 관한 관념들로서, 해석될 수 없다.

보편적 개념들, 범주들(원인, 질, 속성, 양, 가능성 등등)은 ‘많은’ 정도를 넘어, 예외 없이 관찰의 모든 대상을 지시한다. 결과적으로, 그것들은 보편성과 필연성에 대한 보증을, 어떤 모순되는 경우가 미래에 인간의 경험에서 결코 나타나지 않을 것(원인이 없는 현상, 질을 결여한 혹은 양적인 측정을 할 수 없는 사물 등)이라는 보증을 포함해야만 한다. 경험적인 귀납적 추상은 자연스럽게 이러한 보증을 포함할 수 없다―그것은, ‘모든 백조는 하얗다’라는 명제에 일어날 수 있는 불편함과 같은 종류의 것에 의해, 언제나 위협을 당한다.

이런 이유로 칸트는 사실상 ‘일반적 관념’이 아닌 초월적 통각의 선험적 형식으로서, 이 개념들에 대한 근본적으로 상이한 정의를 채택한다. 개념의 개념이 이리하여 이원론에서 빌려오게 된다. 실제로 두 개의 상호 배타적인 정의들이 있다. 한편으로, 개념은 단순히 일반 관념과 동일시된다. 다른 한편으로 개념과 관념은 어떤 간극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 ‘순수한’(‘초월적’) 개념, 이성의 범주는 완전히 선험적인 것으로 입증되고, 반면에 보통의 개념은 단순히 일반 관념으로 축소된다. 그것은, 개념을 어떤 용어의 의미와, 어떤 단어의 의미와 동일시하는 논리학의 어떤 학파도 피할 수 없는 협소한 경험주의에 대한 불가피한 응보이다.

맑스와 엥엘스, 그리고 레닌의 유물론적 변증법은, 그것이 인식에서 경험적 단계의 형식을 포함하여, 인식의 모든 형식과 범주들의 사회적 인간적인, 사회-역사적인 성격을 완전하게 고려함으로써, 개념과 개념의 관념과의 관계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에 대한 훌륭한 해결책을 제공했다.

언어로 인하여, 개인들은 그 자신의 눈뿐만 아니라 수백만의 눈을 통해서 세계를 ‘본다’. 그렇기 때문에 맑스와 엥엘스는 항상 관념을 개인의 기억에 보유되는, 사물의 감각적 이미지 이상의 어떤 것으로 해석했다. 사회적 개인을 중심으로 한 인식론의 관점에서, 하나의 관념은 또한 하나의 사회적 실재이다. 하나의 관념의 내용은, 무엇보다 언어를 통해서 대표되는 이러한 사회적 기억에서, 사회적 기억의 형식 속에서 보유되는 것을 포함한다. 만약 한 개인이 한 사물을 직접적으로 관찰한 다른 개인들로부터 그 사물에 대한 관념을 취득했다면, 그 사물에 대해 취득된 의식의 형식은, 그가 이 사물을 자기 자신의 눈으로 관찰했다면 얻을 수 있었던 바로 그것이다. 관념을 가진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이해된(즉, 언어로 표현되거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관찰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내가 언어를 통해서, 또 다른 개인의 눈을 통해 이 사물을 관찰한다면, 혹은 이 다른 개인이 그 사물을 나의 눈을 통해 관찰한다면, 나와 그 어떤 다른 개인은 모두 어떤 것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지 못한다. 하나의 관념은 정확히 그렇게 언어적으로 표현된 관찰이다.

관찰과 관념은 그러므로, 한 개인의 심리적 상태라기보다는, 감각의, 지식의 경험적 형태의 사회-역사적 성질을 표현하는 범주들로서 나타난다. 관념은 언제나, 내가 자신의 개인적 관찰 속에서 사회적 방식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 즉, 언어를 통해 또 다른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관찰하는 개인으로서 나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있는 것만을 포함한다. 감각적으로 관찰된 사실들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관찰된 것을, 사회적 의식으로서의 관념의 차원으로 이행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개념을 산출할 능력, 관찰과 관념을 개념으로 논리적으로 처리할 능력에 부합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것은 아직, 지식의 최초의, 감각적 단계로부터 논리적 이해의 단계로 나아가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감각적 자료의 이론적 처리 과정을 언급하면서, 맑스는 이 자료 대부분을, 이 논리적 처리 과정을 수행하는 개인이 그의 눈으로 직접 보거나 혹은 그의 손가락으로 직접 만진 것과는 상이한 어떤 것으로 받아들인다. 맑스는 항상 사실적인 경험적 자료의, 사회적으로 수행된 관찰의 전체적 총체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론가들이 이용 가능한 논리적 활동의 자료, 그의 감각적 자료는, 그가 개인으로서 직접적으로 관찰한 것만큼의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대상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직 언어를 통해서, 오직 이미 사회적 관념으로 기록된 수백만의 사실들로 인하여 알게 될 수 있다.

이것은, 사고와 사고의 감각과의 관계에 대한 유명론적 해석의 관점에서 수립될 수 있는 것과는 매우 상이한 인식 과정을 이해하는 접근 방식을 결정한다: 맑스에게 관찰과 관념은 인식에서 오직 최초의, 감각적 단계이다. 그리고 그것은 로크와 엘베시우스의 지지자들에게 특징적인 인식의 감각적 단계의 해석과는 날카롭게 상이하다. 후자의 두 사람은, 인식 주체에 대한 그들의 추상적인 인류학적 개념으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맑스가 관념이라고 부른 의식의 형식을, 반성에서의 이성적, 논리적 단계에 속하는 것으로 돌린다.

개념과, 단어로 표현되는 일반 관념 간의 차이는, 변증법론자인 헤겔에 의해 최초로 분명하게 수립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논리학의 틀(그 이전에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것) 속에서 수행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논리학에서 그의 출발점이 고립된 개인이라기보다는 발전과정에 있는 전체 인류이었기 때문이다.

 

헤겔은, 인식의 과정이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고려된다면, 즉, 그것이 고립된 개인의 머리에서 진행된다면, ‘우리가 감각과 관찰로 시작하고, 지성은 후자의 다양성으로부터 일반적이거나 혹은 추상적인 어떤 것을 뽑아낸다는 이야기를 고집할 수 있다’는 것을 많은 경우에 지적했다. [헤겔, 논리학]

 

발전의 이 국면을 헤겔은 관찰로부터 관념으로의 이행이라고, 즉, 의식의 어떤 견고한 형식, 언어로, 용어로 이름, 표현이 주어지는 추상적인 일반적 이미지라고 불렀다.

그러나 진리를 위해 노력하는 사고는 의식의 이러한 형식을 그것의 목표나 결과로 삼지 않고, 단지 그것의 특수한 활동을 위한 하나의 전제, 자료로 삼을 뿐이다. 헤겔에 의하면, 낡은 논리학은, 개념의 심리학적 전제를 개념 그 자체와 끊임없이 혼동하는데, 어떤 추상적 일반 관념이 하나의 용어, 하나의 단어로, 언어로 표현되기만 하면, 그것을 개념으로 여긴다.

낡은 논리학에게는, 하나의 단어로 기록된 어떤 추상적 일반 관념은 이미 개념이고, 사물에 대한 이성적 인식의 형식이다. 헤겔에게 그것은 단지 어떤 실제적 개념의, 사물의 실제적인 (변증법적) 성질을 표현하는 의식의 이러한 형식의 필요조건일 뿐이다.

 

‘새로운 시대에는, 어떤 개념도 개념 자체보다, 개념 스스로보다 더 나쁘지 않다. 왜냐하면 개념은 생각의 혹은 지적인 사고―사람은 이것들로써 그 자체 구체적인 진리 혹은 미의 전체를 의식이 인식하도록 가져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의 추상적 명확성과 일면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대개 여겨지기 때문이다.’ [헤겔, 미학 강의]

 

헤겔은 더 나아가서, 개념은 이 논리학에서 극단적으로 일면적이거나 불균형하게 해석된다고, 즉, 그것은 대체로 일반적 관념과 개념 모두에서 동등하게 내재되어 있는 측면에서만 고려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틀 속에서, 개념은 단순한 일반 관념과 본질적으로 같게 된다. 그리고 개념이 대상의 구체적 성질을 표현할 수 있다고 증명되게 하는 개념의, 그러한 특수한 모든 특징들은 낡은 논리학의 관심의 영역 밖에 있다.

 

‘사람이 대개 개념이라고 부르는 것들, 그리고 더욱이 명확한 개념들, 예를 들면, 사람, 집, 동물 등은 특히 개념이 아니다. 그것들은 단순한 정의들과 추상적 관념들―개념으로부터 일반성의 요소를 빌어 올뿐이고 특수한 것과 개별적인 것을 빼버리는 추상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바로 개념으로부터의 추상들인 것들―이다.’ [헤겔, §164 Encyclopedia]

 

이러한 구별이 논리학과 인식론에서의 형이상학적 접근에 대한 헤겔의 비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쉽다. 개념이 항상 사물에 대한 감각적으로 구체적인 이미지와 비교되는 추상적인 어떤 것이라는 매우 명백한 사실을 전혀 거부하지 않으면서, 헤겔은 동시에, 어떤 현상들의 전체적인 계열에 내재하는 추상적 동일성,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속성, 특징 혹은 관계의 단순한 표현으로 개념을 축소하는 견해의 천박성을 보여준다. 이 축소는, 대상의 성질을, 관찰과 관념이 그렇게 하는 것보다 더 풍부하게, 정확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반영하는 능력에 대해서 명백히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구체적 사건으로부터 개념 속으로 무엇인가 가져와서 그것이 단지 표시나 기호로 역할 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물론, 아마도, 단지 대상의 감각적인 개별적 정의일 수 있을 뿐이다.’ [헤겔, 논리학]

 

살아있는 관찰의 이미지와 개념의 차이는 이렇게 순수한 양적인 것으로 축소된다. 개념은 오직 현상의 감각적 속성들 중 하나를 표현하거나, 더 정확하게는, 가리킨다. 반면에 감각적 이미지는 그것들의 전체적인 계열을 포함한다. 결국, 개념은 오직 살아있는 관찰의 이미지보다 더 빈약한 어떤 것으로서만―이 이미지의 추상적인 일면적인 표현으로서만―고려된다.

관찰의 이미지로부터 개념으로의 이행은 이리하여 단지 감각적으로 주어진 구체성의 파괴로, 수많은 감각적으로 지각된 속성들을 그것들 중 하나를 위하여 제거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추상은 [헤겔은 이와 관련하여 말한다] 구체보다 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전자로부터 그런 종류의 자료의 많은 것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는, 추상의 과정은 우리의 주관적인 필요를 위해 하나 혹은 또 다른 특징을 구체로부터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그리고 이러한 풍부함을 흡수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은, 그것이 빈약한 추상으로 만족하게 강요하는 것이다.’ [레닌, 헤겔의 논리학에 대한 개요]

 

구체적 관찰로부터 사고의 추상들로의 이행은, 결국, 단지 직접적 관찰에서 주어진 실재로부터의 이탈로서, 사고의 ‘무능력’, 약점의 표현으로서 보인다. 놀랍지 않은 것이, 칸트는, 이 전제에서 출발하여, 사고는 객관적 진리를 얻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레닌은 헤겔의 이 페이지들에 대해 매우 풍부한 노트를 했고,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언급을 했다.

 

‘본질적으로, 헤겔은 칸트의 반대자로서 완벽하게 옳았다. 구체에서 추상으로 진행하는 사고―그것이 올바르다면(NB)(그리고 칸트는, 모든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올바른 사고에 대해 말한다)―는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까워진다.’ [같은 책]

 

다시 말해서, 개념은 감각적으로 지각된 구체성과 비교되는 추상적인 어떤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관찰에 대한 그것의 힘과 장점은 거기에 있지 않다. 감각적으로 관찰된 구체성에서 그것에 대한 추상적 표현으로의 상승은 어떤 더욱 의미 있는 과정―관찰이 파악할 수 없는 진리를 획득하는 과정―이 실현되는 형식일 따름이다. 헤겔에 대해 언급하면서, 레닌은 과학적(즉, 올바르고, 진지하고, 엉터리가 아닌) 추상은 자연을 살아있는 관찰보다 더 깊고 올바르게 반영할 뿐만 아니라 더 충분하게 반영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더욱 충분하게’는 변증법적 논리학의 언어에서, ‘더욱 구체적으로’라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결과적으로 [레닌에 의해 인용된 페이지에서 헤겔은 계속한다] 추상적인 사고는 감각적인 물질적 자료를 제쳐 두는 것―그것의 실재가 그로 인해 낮추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신의 초월이고 그것(단순한 현상으로서)의 본질로의 환원이다. 그리고 그 본질은 스스로를 단지 관념 속에서만 표현한다.’ [같은 책]

 

그 과정에서, 구체는, 칸트가 경험주의자들과 더불어 믿는 것처럼, 사라지는 것이 전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의 실제적인 의미와 내용은 사고에 의해서 나올 수 있다. 그것이 정확히 헤겔이 감각적으로 관찰된 구체성에서 개념으로의 이행을 현상에서 본질로, 결과에서 결과에 앞선 것으로의 운동의 형식으로 간주한 이유이다.

헤겔에 따르면, 하나의 개념은 관찰된 현상의 본질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 본질은 다른 현상에서 추상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고립되어 취해진 각 현상들에서 관찰되는 동일한 요소로 결코 환원될 수 없다. 어떤 대상의 본질은 거의 언제나, 구별되고 대립되는 요소들의 통일 속에, 그것들의 연쇄와 상호 간의 제한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헤겔이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이유이다: ‘이러한 개념의 성질에 관한 한, 개념을 취했을 때, 그것은 실재의 특징들과 대립되는 추상적 통일이 아니다. 하나의 개념으로서 그것은 이미 상이한 특정한 성질들의, 그리하여 구체적 실재의 통일이다. 따라서 “인간”, “파랗다” 등과 같은 관념들은 개념으로 불려서는 안 되며, 추상적인 일반 관념으로 불려야 한다. 그 일반 관념은 그것이 통일 속에서 구별되는 측면들을 포함한다는 것―이것에 의해 그것 내부에서 결정되는 이 통일은 개념을 구성한다―이 드러날 때 비로소 개념이 된다.’ [미학 강의]

만약 인간의 사고가 단지 어떤 대상의 본질적으로 감각적인 구체적 이미지를 추상적인 일면적인 정의로 축소시킨다면, 그것은 개념이 아니라 단지 일반 관념을 생산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관찰에서 관념으로의 이행으로 해석된다면,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그렇지 않은 것으로, 즉, 개념으로의 이행으로 여겨진다면, 이 이행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레닌은 여러 번에 걸쳐 다음과 같은 헤겔의 생각을 강조했다. 즉, 관념에서 개념으로의 이행은 논리학에서 무엇보다도 피상적인 지식에서 더 깊은, 더 완전한, 그리고 더욱 정확한 지식으로의 이행으로서 고려되어야 한다. ‘어떤 존재에 대해 사고와 관념이 결여된 대상은 하나의 이미지 혹은 이름이다: 그것(대상-역자)은 사고와 관념에서 확정되는 그 무엇이다.’라고 헤겔은 말했고 레닌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방주를 달고 있다.

 

‘그 점은 올바르다! 이미지(표상-역자)와 사고, 양자의 발전, nil aliud.’ [레닌, 헤겔의 논리학에 대한 개요]

 

관념의 사고에 대한 관계에 대한 헤겔의 주장을 분석하면서, 레닌은, 헤겔의 관념론이 이 점과 관련하여 명백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간주했다: ‘여기, 시간의 개념에(그리고 감각적인 표현의 사고에 대한 관계에서가 아니라) 헤겔의 관념론이 있다.’ [같은 책]

 

헤겔의 중심 사상은, 지성의 추상들은 인식의 경험적 단계를 넘어서는 의식을 얻지 못하고, 그것들은 엄격한 의미에서 사고라기보다는 감각적인 경험적 의식의 형식들이고 개념이 아니라 관념이라는 점이다. 두 개를 혼동하는 것은, 관념과 개념을 양자가 추상이라는 점에서 동일시하는 것은, 논리학에서 형이상학의, 형이상학적 사고의 가장 특징적인 표지이다.

그러므로 경험적 자료를 개념으로 논리적으로 처리하는 과정(관찰과 관념에서 개념으로의 이행)을 연구하는 과학으로서 논리학의 첫 번째 과제는 개념과 언어적으로 표현된 관념에 대해 엄격하게 객관적인 경계를 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경계를 정하는 것은 결코 이론적 정밀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식론은 물론 교육학에 있어서도 막대한 중요성을 가진다. 추상적인 일반 관념의 형성은 그 자체로 충분히 복잡하고 모순에 차있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논리학에서가 아니라, 특수한 연구의 주제를 형성한다.

과학으로서 논리학의 과제는 (우리를-역자)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현상에 대한 발전하는 인식의 실제적 요구로부터 자라 나온다. 사고하는 인간이 과학으로서 논리학으로 향하게 되는 문제는, 추상들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사람이 감각적으로 주어진 사실들로부터 일반을 추상하는 것을 어떻게 배울 수 있는지의 문제가 전혀 아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논리학자들의 충고를 들을 필요가 전혀 없고, 단지 제나라 언어를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고, 감각적으로 주어진 유사성과 차이들에 대해 자신의 주의를 집중할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된다.

사람을 논리학으로 향하게 하고 그리고 논리학에 의해서만 답을 얻을 수 있는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한 인식론적 과제를 포함하고 있다: 관찰과 관념들에서 주어진 사실들의 객관적 본질을 표현하는 추상을 어떻게 산출해낼 것인가? 수많은 경험적으로 확실한 사실들을 처리하는 과정이 연구되는 대상의 실제적 성질을 표현하는 일반화를 산출하는 방법―이것이 실제적 문제이다. 그리고 그것의 해결은 추상적 일반 관념들과 구분되는 개념이 가진 성질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동일하다.

개념은 본질적으로 일반적인 것의 반영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논리학에서 유물론은, 주체에 본질적인 것(그의 욕망, 열망, 목표 등)과, 주체의 열망과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대상의 성질에 대한 객관적 정의를 위해 어떤 것이 본질적인가 하는 것을 구별하도록 강제한다.

신칸트주의의 논리학은 이 구별을 의식적으로 흐리고 있다. 그러면서 주관적 본질과 대상 자체와 관련하여 어떤 것이 본질적인가 사이를 구별하는 기준은 발견되거나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이 견해는 실용주의와 도구주의의 개념들에서 가장 일관되게 발전되어 있다. 어떤 개념도 감각적으로 주어진 현상의 혼돈된 상태에 대한 주체의 소망, 열망과 자극의 투영으로 해석된다. 명백하게도, 그것은 주관성과 객관성 사이의, 뿐만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는 관념과 개념 사이의, 경험적 인식과 이성적인 논리적 인식 사이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하나의 묘사로서, 추상과 구체라는 주제에 대한 현대의 철학적 사고의 하나의 특징적인 사례―변증법적 범주들의 분야에서 부르주아적 사고의 수준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서독 이론가인 루돌프 슈코틀라엔더의 논문―를 인용해 보자.

그의 접근의 시작과 끝은 두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영역에 속해 있는 범주로서 추상과 구체를 반대하는 것이다. 슈코틀라엔더에게, 추상은 오직 인식 주체의 행동의 방식일 따름이다. 구체는 전체로서 살아있는 관찰의 감각적으로 주어진 이미지와 동일시되는 반면에, 의식 밖에 있는 대상은 그것에 대한 감각적 경험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주체는, 명백히 순수하게 주관적 목적에서 동기가 부여되면서, 구체로부터 어떤 일반적 추상적 특징들을 ‘가져가고’, ‘추출하고’, ‘빼낸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들로부터 하나의 개념을 구성한다. 추상된 그 특징들이 본질적인가 비본질적인가는, 슈코틀라엔더에 따르면, 전적으로 인식 주체의 목표에 의해, 그 사물에 대한 그의 ‘실용적’ 태도에 달려있다. J. 슈코틀라엔더는, ‘스콜라적인 정수’, ‘실제적인 본질’의 입장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누구도 ‘대상 자체의 관점에서’ 본질을 생각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추상과 구체는 두 개의 다른 세계, 즉 ‘인식 주체’의 세계와 ‘인식 대상’의 세계 사이에 형이상학적으로 나뉘고 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슈코틀라엔더는, 주체의 세계를 연구하는 논리학의 문제로서, 추상과 구체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기각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가 논리학을 다루기 시작한 이후로, 그가 추상에 대립시키는 것은 구체가 아니라, 그 목적을 위해 고안된 ‘Subtrahendum’인데, 그것은 말하자면, 추상을 하는 주체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내버려 두는 모든 것, 사물의 감각적으로 지각된 이미지의 풍부함이 사용되지 않은 잔여물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현대의 어의적인 전통의 정신에서, 추상을 ‘Extrahendum’(즉, 개념에서 추출되고 합체된 것)로 이름을 다시 붙이는 것이 편리하다고 믿고 있다.

감각적 이미지의 무한한 충만함에 조응하는 추상에 대한 완전한 종합이 획득 불가능한 만큼, 어떤 추상(the ‘Extrahendum’)은 그 목표와 가치―이것을 위하여 인식 주체는 추출을 한다―를 가리키는 것으로 환원될 수 있다. ‘Extrahendum’을 빼고 사물에 대해 감각적으로, 끼어드는 방식으로 파악된 충만함은 ‘Subtrahendum’이라 불린다. 후자는 인식 주체에 의해 어떤 경우―다른 목적, 가치 혹은 열망의 견지에서, ‘본질’이, 탈출구가 바로 저기에 있다고 드러내는 때―를 대비한 예비로서 저장된다.

노사과연


 

1) Karl Marx, Capital, Vol. I, Progress Publishers, Moscow, 1974, p.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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