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구체적 보편에 대하여

 

문영찬 │ 연구위원장

 

 

논리학 하면 전문적 학자의 과제라는 인식이 있다. 그리고 실천은 이론적 인식보다 고차적이라는 점에 입각하여 구체적 논리, 이론의 발전보다 일상적 실천에 매몰되는 현상도 있다. 그런데 맑스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을 창시하였고 ≪자본론≫이라는 과학적 경제학의 발전을 이룩하였고, 레닌은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실천은 없다’라고 직설적으로 이론의 중요성을 언급한 바 있다.

현재 우리 운동에서 과학적 이론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실천은 혁명성이 거세된 채로 체제 내의 일부 개량의 획득을 위한 투쟁에 머물거나, 아니면 조합주의적 실천(노동자의 부르주아적 실천!)에 머물고 있는 것이 태반이다. 일부 초좌익적 혁명적 구호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도 이해하지 못한 채, 관념의 세계에서, 협소한 영역에서의 자족적인 활동에 머물고 있다.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과학적이고 원대한 지평은 현재 우리 운동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 실정이다.

현실 세계의 발전 법칙과 주체의 인식에서 과학적 사고의 발전과 통일로서 논리학의 발전, 정확히 말하면 (재)정립은 지금 운동의 난맥상을 타개하기 위해 필요한 주요 고리 중의 하나이다. 전체 운동에서 이론적 사고를 발전시키고,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도모하는 것은 노동자계급 세계관의 주요한 구성요소 중의 하나인 논리학의 재정립과 발전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에서 변증법적 논리학의 주요 개념의 하나인 구체적 보편 개념에 대해 고찰하는 글이다. 구체적 보편 개념은 기존의 운동에 대한 반성, 혹은 이론적 일천함에 대한 반성에서 그 필요성이 나오는 것이다. 1980년대 변혁 운동이 재정립되고 발전하는 와중에서 변증법적 논리학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운동 주체들은 변증법적 논리학을 거의 소화하지 못하고, 형식논리학과 변증법적 논리학을 제대로 구분하지도 못하면서, 단지 변증법이 마치 마법의 요술 방망이인 것처럼, 변증법을 현학적 태도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사례도 왕왕 있었다.

1980년대 운동에서 구체적 보편 개념의 의의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당시 운동을 규정하는 주요 개념의 하나였던 민중 개념은 피억압자로서 착취와 수탈을 당하는 근로 대중이라는 의미로서 파악되었다. 즉, 일종의 추상적 동일성 혹은 추상적 보편성이라는 개념을 매개로 하나의 동질성을 갖는 집단으로서 민중이라는 개념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민중에 대해 형식논리적 동일성이라는 규정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민중 내부의 계급 분석과 각 계급의 상호 연관, 차이를 전제로 한 통일성, 대립하는 세력, 경향들의 통일성, 다양성 속의 통일성으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었고, 그에 따라 운동에서 이론적 발전은 지체되었고, 실천적으로는 당 건설에 성공하지 못하고 운동 세력들은 각각 분리된 정파들로서 존재하는 정파 질서에 머물렀던 것이다.

이러한 것이 구체적 보편 개념에 입각하여 1980년대 운동을 진단한 것이라면, 21세기 지금의 현실에서 구체적 보편 개념은 운동의 질적인 상승과 변혁운동의 재정립을 위해 필수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운동이 변혁운동으로 질적인 상승을 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한국사회를 구성하는 각 세력에 대해 추상적 동질성, 즉, 형식논리적 동일성의 개념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동일성 내의 모순, 대립, 차이를 파악하고, 한국 사회의 변혁과 연관하여 각 계급 세력의 본질적 성격을 내포하는 개념이 필요하다. 바로 구체적 보편 개념이 그러한 인식과 이론적 정립을 가능하게 하는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변혁운동의 노선은 각 계급 세력에 대해 추상적 동질성, 추상적 동일성, 추상적 보편성을 가리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각 계급 세력의 양적 측면만이 아니라 질적 측면을 파악해야 한다. 또한 각 계급 세력들의 상호 연관을 파악하는 가운데, 그 계급 세력의 변혁에서의 계급적 본질을 드러내는 것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즉, 변혁운동의 노선을 정립하는 것은 추상적 동일성 혹은 추상적 보편성이라는 형식논리학의 개념으로는 불가능하며, 추상적 동질성을 넘어서는 대립, 차이, 본질을 드러내고, 다양성 속의 통일을 드러내는 구체적 보편 개념의 도움이 필수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구체적 보편 개념을 매개로 한국 사회에서 변증법적 논리학을 이론적 차원에서 재정립할 것을 제기하고, 과학적 이론에 입각한 실천,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지평을 열어갈 것을 제기하는 것이다.

 

 

1. 논리학이란 무엇인가?

 

논리학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은 단순한 작업이 아니며, 그 자체로 논리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접근할 수 있다. 즉, 학문의 성질, 논리학의 개념에 대해 유물론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논리학이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열쇠가 된다.

모든 학문의 구별은 그 학문이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가에 의해 규정된다. 예를 들면 화학은 화학적 원소의 운동법칙에 대한 학문이고, 생물학은 생명 운동에 대한 학문이며, 사회과학은 사회의 발전법칙에 대한 학문이고, 언어학은 언어에 대한 학문이라는 것 등이 그러하다. 그러면 논리학의 대상은 무엇인가? 논리학의 대상은, 아리스토텔레스 당시는 사고가 오류에 빠지지 않고 정확한 사고를 하게 하는 규칙, 즉, 동일률, 모순율 등의 형식적인 논리 규칙이 그 대상이었다. 예를 들면 ‘A는 A이면서 동시에 A가 아닐 수는 없다’라는 모순율은 사고가 논리적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하는 주요한 규칙이었다. 모순율은 ‘A는 A이다’라는 동일률을 뒤집어 놓은 것인데, 사고 혹은 논리가 오류를 범하지 않게 하는 최소한의 규칙이었다. 동일률, 모순율은 사고의 외적 형식을 다루는 것이며, 사고의 실제 내용을 다루는 것은 아니었다. 즉, 인간의 사고는 단지 논리의 형식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내용 또한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저 꽃은 붉은 색이다’라는 명제에서 관철되는 논리는 저 꽃이라는 개별이, 붉은 색이라는 보편에 귀속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그런데 이 명제에 대해 모순율과 동일률은 내용에 관해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다. 즉, 모순율과 동일률이라는 형식논리학의 규칙은 사고의 실제 내용과는 무관한 단지 논리의 형식에만 관계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논리의 형식만이 아니라 사고 대상의 실제 내용을 포함하는 논리학이 모색되었고 일정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헤겔에 의해 변증법적 논리학이 정립되었다.

변증법적 논리학은 질과 양, 질과 양의 통일로서 도량, 대상 내의 대립과 모순, 본질과 현상, 개별성과 보편성의 상호관계, 개별성과 보편성을 매개하는 고리로서 특수 등의 개념을 정립하였다. 그리하여 논리학은 논리 형식만이 아니라 내용을 포괄하는 학문으로 정립되게 되었다. 즉, 변증법적 논리학에 이르러 논리학의 대상은 사고의 외적 형식을 넘어서서 사고의 내용을 포함하는 것으로 전환, 발전되었던 것이다. 정리하면, 논리학의 대상은 인간의 사고이다. 더욱더 정확히 말하면 논리학은 인간의 개념적 사고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논리학이 자신의 고유한 대상을 확립함에 따라 논리학을 하나의 과학으로서 추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형식논리학에 있어서 동일률과 모순율은 단지 논리의 형식을 다루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형식논리학은 현실 세계의 내용, 발전법칙과는 분리되어 있었다. 논리학이 변증법적 논리학으로 발전함에 따라, 즉, 내용을 논리에 포함시킴에 따라 내용을 의미하는 존재의 법칙, 현실 세계의 법칙과 개념적 사고 혹은 사고의 법칙은 어떤 관계인가가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인간의 사고는 존재의 세계, 현실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역으로 인간의 사고는 주체가 현실 세계, 존재의 세계와 결합하게 하는, 나아가 일치하게 하는 매개가 된다. 그에 따라 주체의 사고 내의 규칙은 현실 세계, 존재의 법칙을 반영하는 보편성을 띠게 된다. 사고의 법칙과 존재의 법칙은 동일성을 갖게 되며, 논리학은 존재의 법칙과 사고의 법칙의 일치로서 보편적인 법칙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레닌은 “논리학은 사유의 외적 형식에 관한 학설이 아니라 (중략) 논리학은 세계에 대한 인식의 역사의 총계, 총화, 결론이다.”1)라고 말한 바 있었다. 여기서 레닌은 존재의 법칙과 사고의 법칙의 동일성을 전제하여, 논리학은 세계(존재의 법칙)에 대한 인식의 역사(사고의 법칙)의 총화라고 정식화하고 있다.

여기서 인간 사고의 또 다른 층위에 대한 학문인 심리학과 논리학의 차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심리학은 인간이 자연과 사회, 인간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심리, 외적 세계에 대한 인간의 특수한 반응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즉, 심리학은 외적 세계에 대한 인식의 보편적 규칙, 법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극에 대한 심리적 반응, 특수한 반응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논리학과 심리학은 학문의 대상을 달리하는 것이다. 논리학은 외적 세계, 존재에 대한 인간 사고의 특수성이 아니라 사고의 보편적 법칙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심리학과 구별되는 독자적 성격을 갖는다.

 

 

2. 개념이란 무엇인가?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은 자연과학이고,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은 사회과학이다. 논리학은 자연, 인간사회, 인간정신을 인식하는 인간의 사고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즉, 논리학의 대상은 인간의 사고이며, 따라서 사고를 사고하는 것이 논리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사고는 직관도 있고 개념적 사고도 있다. 또한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인간의 사고의 발전을 감각적 확신, 지각, 오성적 인식, 이성, 정신 등으로 상세히 나누기도 했다. 감각적 확신은 무엇인가 있다, 무엇인가 보았다 하는 확신이며, 지각은 ‘저 꽃은 붉은 색이다’와 같이 개별을 보편과의 관련 속에서 파악하여 구별을 획득하는 인식이다. 오성적 인식은 대상의 본질에 대한 인식에는 도달했지만, 그것을 아직 개념으로까지 상승시키지 못한 인식이다. 이성적 인식은 대상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며, 나아가 정신은 인륜적 본질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헤겔에 따르면 인간의 사고는 다양한 발전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논리학은 이 모든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개념적 사고를 자신의 대상으로 한다. 왜냐하면, 논리학은 존재의 세계, 외적 세계를 인식하는 인간의 사고를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 규칙을 의미하는데, 개념적 사고에 이르러서 비로소 보편성이 획득되기 때문이다.

엥엘스는 변증법을 개념의 본성을 추구하는 것이라 파악한 바 있었다. 헤겔 또한 자신의 ≪논리학≫(대논리학)에서 이념은 개념의 본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2) 따라서 개념의 본성 추구가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가운데, 개념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는 접근할 수 있다. 헤겔은 자신의 ≪논리학≫(대논리학)의 개념론에서 개념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다. 헤겔의 논지의 요점은 개념은 단지 대상을 가리키는 이름, 명칭이 아니라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즉, 헤겔에 따르면 개념은 대상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개념에 대상의 본질이 들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개념이 아니라 단지 관념에 지나지 않게 된다. 개념적 사고를 한다는 것은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여 그것을 주체의 인식 내부에서 고양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또한 헤겔은 개념에 대해 “개념 즉, 상호작용으로부터 발생하는 총체는, 상호작용의 두 개의 실체의 통일이다.”3)라고 파악하고 있다. 헤겔은 같은 책에서 사변적 사유(즉, 변증법)의 본성은 대립하는 두 계기의 통일이라고 규정한 바 있었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 보면, 개념은 대상을 본질에서 파악하는 것이고 이는 대상 내부의 대립하는 두 계기를, 즉, 대상 내부의 대립물을 통일시켜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변증법적) 개념, 개념적 사고라 할 수 있다.

형식논리학의 추상적 동일성은 개념이기는 하되, 대상 내부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나아가 대립하는 두 계기를 통일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변증법적 개념이 아니며, 단지 관념에 지나지 않거나, 단지 형식논리적 개념에 머무르는 것일 따름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개념에 도달하기 위해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헤겔은 자신의 ≪논리학≫(대논리학)에서 이를 위한 방법론으로 관념론적인 개념의 자기 운동이라는 것을 제기하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개념이 개념의 이른바 순수본질에 입각하여 스스로 전개하여 간다는 것으로서 매우 신비적인 방법이고 그에 따라 헤겔 또한 많은 비과학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따라서 헤겔 개념의 자기운동을 변증법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개조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그것은 개념을 자연, 세계, 사회의 반영으로서 파악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개념은 운동하기는 하지만 스스로 자기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세계의 반영으로서 운동하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개념의 순수본질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의 타자들과의 상호 연관과 그 속에서 관철되는 대상의 본질, 그리고 대상의 본질을 이루는 대립하는 계기들을 파악하여 그 계기들을 통일성 속에서 개념화하고 그 개념과 다른 개념과의 상호 연관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찰과 추론, 분석과 종합의 과정은 변증법적 논리학의 많은 개념을 빌어 수행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변증법적 부정과 개념의 운동과의 관련이다. 이 점에 대한 헤겔의 언급을 인용해 보자. “개념은 절대적 부정성이기 때문에, 그것은 자기를 분열시키고, 자신을 자기의 부정성 혹은 자기의 타자로 정립한다.”4) 이것은 헤겔이 개념의 자기운동이라는 관념론적인 방법론에 따라 개념의 부정 운동을 신비하게 파악한 방식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관념론적인 측면을 걸러내고 합리적 핵심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개념이 절대적 부정성이라는 것은 일정하게 타당한 면이 있다. 왜냐하면 ‘모든 규정은 부정’(스피노자)인데, 개념은 규정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규정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파악할 수 있는 합리적 핵심은 개념이 자신 내부의 부정성을 파악하여 새로운 개념으로의 이행을 도모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파악이 가능한 것은 변증법적 개념은 대립하는 두 계기의 통일이기 때문에 운동할 수밖에 없고, 타자로의 이행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석의 요점은 변증법적 개념의 참다운 의미를 파악하고 개념의 역동성, 이행가능성을 파악하는 것은 개념을 부정성 속에서 파악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헤겔은 ≪논리학≫(대논리학)의 개념론의 마지막에서 변증법적 부정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이 부정성은 자신의 부정관계의 단순한 점이고, 일체 활동의 가장 내적인 원천이고, 변증법의 영혼이며, 그것(부정성-필자)을 통하여 진정한 것이 된다.”5) 이와 같이 헤겔에 의하면, (변증법적) 부정성은 일체 활동의 원천이고 변증법의 영혼이다. 이는 변증법적 개념의 전개에 있어서, 부정성이 개념의 운동의 모멘텀이라는 것이며, 심지어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게 하는 변증법적 논리의 정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개념에 대한 헤겔의 논지를 조금 더 살펴보자. “개념은 구체적이고 가장 풍부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있음(有 존재-필자)의 범주와 반성 규정의 근거이고 총체이기 때문이다.”6) 이러한 헤겔의 개념에 대한 규정은 다음을 말한다. 즉, 개념이 대상에 대한 반성적 성찰, 숙고를 통하여 대상의 본질을 담고 있으면, 그것은 깊이가 있으며, 또한 본질의 차원에서 존재에 접근하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풍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헤겔의 접근은 개념을 정립한다는 것은 대상을 단지 추상적 동일성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 기초한 구체성, 다면성,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정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한 헤겔은 개념의 의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한다. “개념은 이념 가운데 자유에 도달했다. 이념 또한 자유를 위하여 자신 중에 가장 강렬한 모순을 갖고 있다.”7) 이러한 헤겔의 논지는 개념이 이념, 즉, 개념과 실재의 통일, 다시 말하면 객관적 진리에 도달할 때, 개념은 자유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개념이 객관적 진리로 상승할 때, 그 개념은 현실 세계에서 광범한 영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과학적 개념이 공간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광범한 영향력을 갖는 많은 현상들을 생각해 볼 때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점이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개념적 사고에 대해 마무리를 해보자. 논리학은 사고에 대한 사고이며, 그것은 개념적 사고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이는 개념적 사고만이 보편적 규칙과 법칙을 내용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쏘련의 철학자 일레코프는 즉자적 사고와 대자적 사고를 나누고 있다. 일레코프에 따르면 즉자적 사고는 논리학의 탐구 대상이 되는 사고이다. 그리고 대자적 사고는 사고 주체가 사고의 작용이 갖는 도식, 원칙, 형식, 법칙을 알고 있고, 의식적으로 그 도식들에 따라 사고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사고는 논리학에서 대자적으로 되었다.”8) 따라서 논리학의 법칙과 도식을 의식적으로 적용하여 사고하는 것은 대자적 사고이며, 흔히 말하는 과학적 사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즉자적 사고와 대자적 사고를 모두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논리학의 규칙과 법칙을 알고 있으면 즉자적 사고에서 대자적 사고로 이행하는 것은 한결 용이할 것이며, 개념의 본성 파악에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3. 형식논리학과 변증법적 논리학의 동일성과 차이성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은 변증법적 논리학이 정립되기 전까지 2000년 동안 지고의 논리로 여겨져 왔다. 어떤 명제가 타당한가 아닌가는 그 명제의 내용을 떠나 논리 형식적으로 모순율에 위배되는가 아닌가로 올바름이 판단되었다. 모순율의 정립은 인간이 사고의 영역에서 과학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의 표지였고, 초보적인 과학의 성립이라는 점에서 거대한 진전이었음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모순율 등 형식논리학은 인간의 실제 사고 과정과는 무관하다는 결정적 한계가 있었다.

중세 유럽에서 생산력이 발전하고 역학, 천문학 등 과학이 발전하면서, 논리학의 영역에서 모순율의 한계를 넘어서서 논리학을 인간의 실제적 사고과정과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직관적인 변증법이 다시금 고찰되기 시작했고,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이 검토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어서는 논리학을 시도했는데, 그것이 선험적 논리학이었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정립된 칸트의 선험적 논리학의 특징은 기존에 존재론을 의미하는 형이상학의 영역이라 여겨졌던 범주론을 논리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범주를 분량, 성질, 관계, 양상으로 분류하고 그 각각의 하위 범주로 <단일성, 다수성, 전체성>, 그리고 <실재성, 부정성, 제한성>, <속성과 실체, 원인과 의존성, 상호성>, <가능과 불가능성, 현존성과 비존재, 필연과 우연> 등을 칸트는 범주로 제기하였다. 범주는 칸트에게 고유한 것은 아니었고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범주론이 제기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를 논리학으로서가 아니라 존재론을 의미하는 형이상학의 영역으로 제기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형이상학의 혁신’을 목표로 하면서 범주들을 선험적 논리학의 구성요소로 포함시켰던 것이다. 선험적 논리학은 모순율, 동일률 등 논리 형식을 넘어서서 논리의 내용을 포함하는 것으로 되었다. 또한 칸트는 변증법이 단지 궤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임을 제기하여 변증법을 논리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칸트는 주관적 관념론적인 불가지론에 입각하여 객관 세계 자체, 물질 세계 자체, 즉, 물자체에 대해 인간 이성은 알 수 없다는 주장을 기초로 논리적 범주와 개념들은 인간의 경험 이전의 선험적인 것이라고 파악하여 논리학의 토대 자체를 제한했고 논리학과 현실 세계와의 연관을 세울 수 없었다. 또한 칸트는 변증법이 인간 이성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지만 변증법 자체는 불합리한 것으로서 인간의 인식을 이율배반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칸트는 형식논리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논리학, 논리형식을 넘어서서 내용을 포함하는 논리학을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완성할 수 없었다.

헤겔은 칸트를 비판하면서 객관적 관념론의 토대에서 변증법적 논리학을 완성했는데, 칸트의 물자체가 공허한 추상이라는 점에서 개념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을 논증하여 논리학과 세계와의 연관성을 정립했다. 헤겔은 칸트의 이율배반을 비판하며, 대립물의 통일로서 모순이야말로 변증법의 핵심 개념임을 정립했다. 그리하여 개념의 자기운동이라는 신비한 방식이었지만, 헤겔은 포괄적인 변증법적 논리학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존재론, 본질론, 개념론으로 구성되는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학은 맑스가 말한 바와 같이 관념론적 지반 위에 거꾸로 선 것이었고, 그 자체로는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무기가 될 수 없었다. 맑스는 철학이 아니라 경제학에서 혁명의 무기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본론≫을 완성했다. 이러한 과정, 즉, 맑스의 전 생애는 철저하게 헤겔의 관념론적인 변증법을 거꾸로 세우는 과정이었으며,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적 논리학을 실천적으로 극복(지양)하는 과정이었다. 그리하여 레닌은 맑스가 논리학 저서는 남기지 않았으나 ≪자본론≫의 논리학을 남겼다고 평가한 바 있다.

형식논리학은 변증법적 논리학과 마찬가지로 인간 사고의 형식이라는 의미에서 논리학의 한 종류이고 제한된 영역에서이지만 일정하게 과학성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인간 사고의 외적 형식을 넘어선 영역, 사고의 내용에 대해서 형식논리학은 무력했으며, 따라서 인간 사고의 실제적 내용에 대한 논리학으로서 변증법적 논리학이 성립했다.

형식논리학의 동일률과 모순율은 여전히 일정한 영향력이 있는데, 동일률과 모순율을 위배하면 논리 자체가 성립할 수 없고 곧바로 오류에 빠지게 된다. 예를 들면 수학에서 +와 –의 초보적인 대수가 없다면 미분, 적분과 고차방정식을 풀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이다.

그러나 변혁운동에서 형식논리학을 고수할 경우 중대한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 대상을 과정으로 파악해야 할 때, 고정된 형식을 고수하는 것은 교조주의가 될 수 있다. 또한 어떤 현상 A와 다른 현상 B가 겉으로는 유사성(동일성)이 있으나 내적으로 심각한 모순이 있을 경우에 형식논리학은 A와 B를 동일한 것으로 판단하지만 변증법적 논리학에서는 정반대로 모순 관계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의 차이에 따른 실천의 결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될 것이다.

형식논리학은 대상을 고정시켜서 동일한가 아닌가, 그리고 참인가 거짓인가를 따진다. 변증법적 논리학에서는 이와 달리, 세계 자체가 운동이고 변화이기 때문에 세계의 반영으로서 논리학은 대상을 상호 연관 속에서, 과정으로서 파악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개념이라도 형식논리학에서의 개념과 변증법적 논리학에서의 개념은 내포된 내용이 전혀 다를 수 있고, 심지어는 정반대의 내용일 수도 있다.

 

 

4. 추상적 보편과 구체적 보편

 

쏘련의 철학자 일레코프는 “헤겔의 논리학에서 핵심적인 개념은 구체적 보편이다.”9)라고 하였다. 이러한 일레코프의 정의에 따르면 구체적 보편 개념을 이해하면 변증법적 논리학의 핵심에 접근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레닌은 헤겔의 ≪논리학≫을 분석하면서 변증법의 핵심은 모순 개념이라고 파악한 바 있었다. 따라서 일레코프의 정의와 레닌의 정의는 겉으로는 대립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후 서술의 전개과정에서 드러나겠지만 구체적 보편 개념은 그 안에 대립하는 두 계기의 통일, 즉, 모순 개념을 포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일레코프의 정의와 레닌의 정의는 서로 간에 녹아들고 있고 통일되어 있다.

구체적 보편 개념에 대해 본격적으로 접근하기 전에, 먼저 보편이 무엇인가부터 논해 보자. 헤겔의 ≪논리학≫(대논리학)의 개념론에서 핵심적인 범주는 보편-특수-개별의 범주이다. 여타의 모든 변증법적 개념들은 보편-특수-개별의 범주 아래에 포괄된다. ‘저 꽃은 붉은 색이다’에서 저 꽃이라는 개별은 붉은 색이라는 보편에 귀속된다. 하나의 정의는 이렇게 하나의 개념을 다른 개념에 귀속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보편-특수-개별의 범주가 핵심적 역할을 한다. ‘저 꽃은 붉은 색이다’에 덧붙여 ‘붉은 색 꽃은 식물이다’라고 하면 붉은 색 꽃은 개별이고, 식물이 보편이 된다. 이와 같이 개별과 보편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대적 개념이다. 저 꽃-붉은 색(꽃)-식물의 도식에서는 저 꽃이 개별이고 붉은 색(꽃)이 특수가 되며, 식물이 보편이 된다. 이와 같이 특수 개념은 개별과 보편을 매개하는 개념이 되며, 개별과 보편 개념이 상호 연관 속에서 엄밀한 과학성을 획득하게 하는 고리가 된다. 도식은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주요한 근거로 쓰였던 바 있는데, 이는 변혁 이론의 발전이 변증법적 개념과 범주들과 긴밀한 연관 하에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 보편에 대한 유물론적 접근과 관념론적 접근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헤겔은 객관적 관념론의 지반 위에서 변증법을 완성하였고 그에 따라 헤겔의 보편 개념은 관념론적으로 쓰이고 있다. 이에 대해 일레코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헤겔에서는 일반(보편-필자)만이 자신을 구체적이고 유일한 형태로 외화시키는 특권을 가지며, 반면에 개별은 언제나 보편성의 특수한 ‘양식’이나 산물이 되어 내용적으로 빈약해진다.”10) 여기서 일레코프는 헤겔에 있어서는, 변증법적 개념의 전개가 절대정신의 외화라는 점에 입각하여 개별은 보편의 외화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개별 고유의 내용은 빈약해진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유물론적인 변증법에서는 헤겔과 달리 개별은 단지 보편의 외화인 것만이 아니다. 개별은 자신의 고유한 내용을 갖고 있으며 개별 자신이 보편으로 이행하기도 한다고 파악한다. 일레코프는 ≪자본론≫에서의 맑스의 방법론을 예로 들고 있는데, 하나의 개별 상품에 존재하는 가치 규정이 전체 자본주의 운동을 포괄하는 보편적 규정으로 발전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즉, 개별과 보편 개념의 연관에 있어서 보편이 개별로 이행할 뿐만 아니라 개별이 보편으로 이행하기도 하는 것이다.

맑스는 일반(보편)에 대해 심원한 분석을 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일반은 한편으로는 구별의 정신적 표상에 불과한 반면,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특수한 개별 형태와 나란히 존재하는 특수한 현실적 형태이기도 하다.”11) 이는 일레코프가 자신의 ≪변증법적 논리학의 역사와 이론≫에서 맑스를 인용하면서, 일반(보편)이 그 자체의 독립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특수이기도 하다는 것을 분석하는 내용이다. 즉, 맑스는 자본의 존재 형태에 있어서 개별자본가에게 속하는 개별 자본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본 일반이 독자적 형태로도 존재하는데, 자본 일반은 은행 자본의 형태로 그 자체 특수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분석하고 있다. 이는 일반(보편)에 대해 유물론적인 파악을 하는 것이다. 즉, 보편은 하나의 개별 혹은 특수 내에 존재하는 성질일 뿐만 아니라, 보편이 그 자체로 일정한 특수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보편에 대한 유물론적 변증법적 인식을 기초로 추상적 보편과 구체적 보편에 대해 접근해 보자. 일레코프는 “보편은 어떤 유사성이 아니라 특정한 개체들을 하나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통일의 계기로 전환시키는 규칙적인 연관관계이다.”12)라고 파악하고 있다. 여기서 어떤 유사성 혹은 동일성으로 개체들의 연관을 파악하는 것은 보편을 추상적으로 파악하는 것이고 형식논리학의 동일률을 근거로 보편을 파악하는 것이다. 반면에 개체, 개별들의 연관을 구체적인 통일의 계기, 즉, 대립하는 것들의 통일, 다양성을 전제로 한 통일로 파악하는 것은 보편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여기서 보편의 구체적 개념은 대립하는 계기의 통일이라는 변증법적 모순 개념을 내용으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맑스 또한 구체를 “다양한 측면들의 통일”13)로 파악한다. 이는 맑스가, 구체를 인식한다는 것은 대상들의 다면성, 다양성, 심지어 대립하는 계기들의 통일로 파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레코프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통일은 서로간에 현상의 유사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그것들의 차이와 대립을 통해 실현된다.”14) 일레코프는 맑스가 말한 다양한 측면들의 통일에 대해, 첫째, 현상들 간의 유사성으로 인한 통일이 아니며, 둘째, 그 통일은 현상들 간의 구체적인 상호 연관성 속에서 파악되어야 하며, 그 상호 연관은 차이와 대립을 전제로 하며, 나아가 차이와 대립을 전제로 할 때만 진정한 의미의 통일이 이루어지며, 그때에야 비로소 구체적 보편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을 분석하고 있다. 즉, 구체적 보편을 규정하는 상호 연관성에 대한 인식이 대립의 통일 단계까지 상승할 때 비로소 구체에 대한 전면적 파악, 구체에 대한 보편적 파악이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헤겔 또한 비록 관념론적인 지반 위이기는 하지만 추상적 동일성, 추상적 보편성을 넘어서는 구체적 보편 개념을 개척해간 당사자이다. 헤겔은 자신의 ≪논리학≫(대논리학)에서 “보편은 구체의 영혼”이라고 파악했다. 그리고 헤겔은 또한 직접적으로 보편에 대한 구체적 이해를 다음과 같이 전개한다. “그런데 만약, 개념 중에서 그런 추상을 이용하여 그것들(개념들-필자)을 견지한다면, 만약 보편이라는 것이 비교적 광범한 것이라고 그렇게 인식된다면, 즉, 보편적인 것이 특수한 것과 개별적인 것에 비해 더 많은 것 혹은 더 커다란 양으로 여겨진다면, 그것은 완전히 개념의 본성을 오해하는 것이다. 개념은 절대적 근거로서는, 양적인 것이지만 또한 똑같이 질적 가능성이 있다. 즉, 그것(개념-필자)의 제반의 규정은 곧 질적인 것이 있고 그래서 구별이 있다.”15) 여기서 헤겔은 개념에 대해 추상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비판하며 구체적 보편의 개념에 접근하고 있다. 헤겔의 논지의 요점은 보편이라는 개념은 단지 양적으로 광범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질적 측면에서도 파악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편에 대해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보편을 양과 질의 양 면에서 접근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것이 개념이기 위해서는 반성의 과정을 거쳐서 본질에 도달하여야 하기 때문에, 결국, 헤겔에 있어서 구체적 보편 개념은 양과 질, 그리고 반성을 통한 본질을 담아내는 개념이 된다. 여기서 헤겔은 비록 관념론적 지반 위이기는 하지만, 형식논리학의 동일률, 추상적 유사성(동일성, 동질성)을 기초로 하는 보편에 대한 추상적 파악을 넘어서서, 양과 질, 본질이라는 구체성의 지반 위에서 보편 개념을 전개하고 있다. 헤겔 또한 맑스와 같이 구체를 다양성 속의 통일로 파악하고 있다.

위와 같은 구체적 보편 개념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구체적 보편에 도달하는 방법의 문제에 대해 고찰해 보자. 구체적 보편에 도달하는 방법, 길은 다양할 수 있는데, 주요한 것으로는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의 길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와 논리의 통일의 길이 있다. 그러면 먼저,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의 길에 대해 살펴보자.

 

맑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세포인 개별 상품을 분석하여 추상적 노동 일반의 개념을 끌어내고, 그것을 가치 개념으로 정식화한다. 이후 맑스는 가치 개념을 전개하면서 자본주의의 주요 측면에 대한 구체적 이해를 끌어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맑스의 ≪자본론≫의 전반적인 방법론은 추상에서 구체로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론은 맑스가 ≪자본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명확히 형성되었다. 맑스는 이 방법론을 ≪정치경제학 비판 서설≫에서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고 있다.

 

“구체적인 것이 구체적인 것은 그것이 많은 제 규정의 총괄이며 따라서 다양한 것의 통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것은, 그것이 현실의 출발점이며 따라서 직관과 표상의 출발점임에도 불구하고 사유에 있어서는 총괄의 과정으로서 나타나며 출발점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제1의 방법에서는 완전한 표상이 증발되어 추상적인 규정이 되고, 제2의 방법에서는 추상적인 사유의 길을 거쳐 구체적인 것의 재생산에 도달한다.”16)

 

여기서 제1의 방법은 구체에서 추상으로의 길이며 구체적인 것에 대한 직관을 통해 분석을 거쳐 추상적 개념을 추출하는 단계이다. 그리고 제2의 방법은 추출된 추상적 개념에 기초하여 다시금 현실의 다면적인 측면들을 분석, 종합하면서 구체를 개념의 총체로서 재생산하는 길이다. 이때에야 비로소 구체는 보편적인 것으로서, 구체적 보편으로서 정립된다. 제1의 방법, 즉, 구체에 대한 직관과 분석을 통해 추상적 개념을 추출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현상들의 구체적 연관 속에서 주요 고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방법론은 현상들의 상호 연관에서 동일한 속성, 유사성을 찾아내는 것(이것은 형식논리학의 동일률에 근거한 것이다)이 아니라 현상들, 개별, 개체들의 발생의 기원의 통일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식물, 동물 등의 생물들이 생명체라는 보편적 성격으로 파악되는 것은 어떤 동일한 성격 때문이라기보다는 최초에 생명체의 발생에서 원시적인 단백질이 지구의 화학적 요소들의 작용으로 인해 형성되고, 이후 그 원시적 단백질이 식물과 동물을 포함하는 모든 생명체의 기원이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즉, 생명체의 본질적 성격은 추상적인 생명이라는 동질성이 아니라 단백질로 이루어지는 운동체라고 파악될 수 있는데, 이는 현 생명체들의 보편적 성격에 대한 파악에 있어서, 추상적 동일성이 아니라 그 발생의 기원의 통일성을 기초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는 맑스의 ≪자본론≫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맑스가 자본주의 사회의 세포인 개별 상품에 대한 분석으로 시작하는 것은 상품 생산과,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원(단순한 물물교환)으로부터 상품 생산과 자본주의적 생산의 보편성을 파악하는 방법론을 채택한 것이었다. 맑스가 말한 제1의 방법론, 즉 구체에서 직관을 통한 추상으로의 길은 이러한 발생 기원의 통일성을 통해 현상들의 본질적 연관을 파악하는 방법론이다. 이에 대해 일레코프는 “여기서 전체의 모든 구성 요소는 하나의 동일한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상호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발생 기원의 통일성 때문에 상호 연관되어 있다”17)고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발생 기원의 통일성에 근거하여 구체에서 추상으로의 길을 따라 일정한 추상적 개념(예를 들면 지구 최초의 원시적 단백질의 생성, 혹은 ≪자본론≫에서 개별 상품의 분석을 통한 가치 개념의 도출 등)을 도출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직 구체적 보편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단지 구체적 보편에 도달하기 위한 출발점에 선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세포에 해당하는 추상적 개념, 발생 기원의 통일성에서 비롯된 추상적 개념을 운동시켜서 구체의 제반의 다양한 측면들을 포괄하여 구체를 개념적으로 재생산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구체적 보편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 보편에 도달하는 또 하나의 방법론은 논리적 과정과 역사적 과정을 통일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추상에서 구체로의 길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 상호 침투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구체에서 추상으로의 길에서 발생 기원의 통일성을 찾아내는 것은 어떤 현상, 혹은 현상들의 상호 연관에 대해 역사적 접근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에서 추상으로, 추상에서 구체로의 길은 추상과 구체라는 대립하는 개념들의 운동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논리적 접근과 역사적 접근의 통일은 이와는 결을 달리하는 것이다.

논리적 접근과 역사적 접근의 통일은 ‘논리는 역사의 반영이다.’라는 명제로 표현된다. 이에 대해서는 맑스도, 레닌도 동일한 인식을 보여준 바 있다. 레닌은 헤겔을 인용, 분석하면서 “나는 “역사에 있어서 여러 철학체계들의 연쇄는, 이념이 갖고 있는 여러 개념 규정들의 논리적 연역에서의 연쇄와 똑같다”고 단언한다.”18)고 파악했다. 즉, 레닌은 논리적 연쇄는 역사에 있어서 연쇄와 동일하다는 헤겔의 파악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이는 레닌이 논리적 과정과 역사적 과정의 통일성을 인식하고 논리가 역사의 반영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식은 맑스도 마찬가지인데, ‘≪정치경제학의 비판을 위한 기본 개요≫의 서설’에서 화폐로부터 자본으로의 발전을 분석하면서 맑스는 “그런 한에서 가장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상승하는 추상적 사유의 행정은 현실적인 역사적 과정에 조응한다 할 것이다.”19)라고 파악하였다. 이는 추상적 사유의 행정, 즉, 어떤 현상에 대한 논리적 접근이 역사적 과정에 조응한다는 것, 다시 말하면 논리는 역사의 반영이라는 것을 맑스가 연구와 분석의 방법론으로 삼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맑스의 이러한 방법론의 생생한 사례는 ≪자본론≫ 제1권의 화폐의 발생사를 논하는 부분이다. 단순한 가치형태에서 전개된 가치형태로, 그리고 일반적 가치형태, 이어서 화폐형태의 발생으로 이어지는 가치형태의 논리적 전개는 실제로는 가치의 운동이 현실에서 화폐의 발생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과정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이 또한 논리의 연쇄가 역사의 과정과 조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적 접근과 역사적 접근의 통일은 보편성이 항상 현실의 구체성에 기반하여 전개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여 보편에 대한 구체적 인식, 구체적 보편에 도달하게 한다. 또한 역사적 과정에서 전개되는 제 현상의 상호 연관과 대립, 그리고 그 대립 속에서의 통일성의 파악은 곧 구체적 보편의 인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5. 구체적 보편 개념의 실천적 의의

 

현재 한국 사회의 운동에서 변혁적 전술을 구사할 주체는 부재한 상태이다. 부르주아 선거에 대한 참여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개량주의 전술은 변혁의 내용과 전망이 부재한 상태에서 부분적인 개량을 목표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참다운 전술이라 할 수 없다. 또한 일부에서 목소리를 높여 초좌익적, 혁명적 어구를 남발하는 것은 현실을 변혁하는 전술이 아니라 단지 선전에 머무르는 것일 따름이다.

이와 같이 우리 운동은 쏘련 붕괴 이후 반동기 속에서 이데올로기와 정치노선, 조직의 현실에서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는 변혁운동의 재정립의 전망을 세워나가는 것은, 단순히 맑스-레닌주의 저작을 학습하고 선전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우리 운동은 이데올로기 자체가 무너져 있다는 점에서 선전의 지속적 강화는 변혁운동의 재정립을 위한 필수적 요소이다. 그러나 현실을 변혁하는 것은 정세분석에 입각한 전술이다. 즉, 변혁적인 정치 활동은 전술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 운동이 이러한 변혁적 전술을 구사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은 운동의 객관적 과제와 주체의 상태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며, 이론과 실천의 통일 속에서 변혁운동이 재정립되는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혁운동은 변혁 노선의 정립 속에서 재정립될 수 있다. 노선을 수립한다는 것은 노동자와 민중의 현실에 근거하여 이루어져야 하며, 나아가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 법칙과 세계 자본주의, 현대 제국주의 체계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기초로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서 운동이 노선의 정립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개념의 측면에서 추상적 동일성, 추상적 보편만으로는 불가능하며, 구체적 보편 개념의 도움을 받아야 비로소 대중을 조직하고 대중을 움직이는 변혁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다.

1980년대 운동에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했던 민중 개념은 실제로는 추상적 동일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피억압자로서 착취받고 수탈받는 대중으로서 민중 개념은 일정한 내용을 갖고 있었지만 그 내부의 연관과 대립 즉, 민중을 구성하는 부분 상호 간의 관계에 대한 계급적 분석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추상적 동일성, 추상적 보편에 머물고 구체적 보편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었다. 물론 민중 중에서 노동자계급을 도출하고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 개념을 정립했지만, 노동자계급에 대한 인식 또한 추상적 동일성에 머물고 구체적 보편으로서의 인식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국 사회의 각 계급들에 대한 분석이 일정하게 있었지만, 그 분석은 현학적이거나 현상적인 분석에 머물고 계급들의 본질을 각 계급들의 상호 연관 속에서 정확하게 분석하지 못했다. 이러한 현실은 1980년대의 운동이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면에서 매우 부족했고, 그로 인해 과학적 사회주의, 맑스-레닌주의와 노동운동의 결합이라는 면에서는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고 당 건설에 성공하지 못하고, 정파 질서 속에서 뿔뿔이 존재하다가, 쏘련 붕괴 이후 운동 자체가 몰락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경과를 볼 때, 21세기 지금의 현실에서 변혁운동을 재정립하고, 맑스-레닌주의와 노동운동의 결합을 이루어내는 것은, 운동이 이론적 차원에서 과학의 수준으로 나아가고,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원대한 지평을 현실화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변증법적 논리학, 구체적 보편의 개념은 한국 사회에서 변혁 노선의 재정립을 가능하게 하고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운동의 무기라 할 수 있다. 운동이 이론과 실천의 통일의 수준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과학적 사회주의, 맑스-레닌주의와 노동운동의 결합은 달성될 것이며, 노동자계급은 전 민중을 이끌고 자본가계급에 맞서 변혁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노사과연


 

1) 레닌, ≪철학노트≫, 홍영두 옮김, 논장, p. 37.

 

2) 헤겔, ≪逻辑学≫下卷,商务印书馆,2020, p. 251.

 

3) 같은 책, p. 245.

 

4) 같은 책, p. 265.

 

5) 같은 책, p. 543.

 

6) 같은 책, p. 286.

 

7) 같은 책, p. 453.

 

8) 일레코프, ≪변증법적 논리학의 역사와 이론≫, 우기동 옮김, 연구사, p. 155.

 

9) 같은 책, p. 146.

 

10) 같은 책, p. 276.

 

11) 맑스, 일레코프의 ≪변증법적 논리학의 역사와 이론≫, 연구사, 1990, p. 269.에서 재인용

 

12) 일레코프, 같은 책, p. 264.

 

13) 맑스, 일레코프의 ≪The Dialetics of The Abstract and The Concrete in Marx’s Capital≫(맑스의 ≪자본론≫에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 Progress Publisher, Moscow, p. 32에서 재인용,

 

14) 일레코프, ≪The Dialetics of The Abstract and The Concrete in Marx’s Capital≫(맑스의 ≪자본론≫에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 Progress Publisher, Moscow, p. 33.

 

15) 헤겔, ≪逻辑学≫下卷,商务印书馆,2020, pp. 286-287.

 

16) 맑스, <정치경제학 비판 서설>, ≪세계철학사≫ 6권, 중원문화, 2009, p. 187.에서 재인용

 

17) 일레코프, ≪변증법적 논리학의 역사와 이론≫, 연구사, 1990, p. 267.

 

18) 레닌, ≪철학노트≫, 홍영두 옮김, 논장, p.199.

 

19) 칼 맑스, “‘정치경제학의 비판을 위한 기본 개요’의 서설”,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1≫, 박종철출판사, p. 463.

문영찬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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