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편집자의 글

 

노동운동의 헤게모니와

변혁의 전략, 그리고 변증법

 

대선 국면이 경과하고 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운동진영은, 노동자 후보, 혹은 사회주의 후보, 나아가 진보 민중진영의 단일후보 등 여러 전술적 선택을 두고 다양한 흐름이 교차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과학적 정세분석에 입각하여 현실을 변혁하는 전술의 성격을 가지기 보다는 운동진영이 위축되고, 후퇴하는 것을 저지하는 일종의 방어 전술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현재 운동에서 변혁적 전술을 구사할 전술적 주체가 부재하다는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 운동은 쏘련 붕괴 후 청산주의의 광풍 속에서 사상적, 정치적 후퇴를 거듭한 끝에 전술적 주체의 부재라는 상태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러한 상태, 즉, 운동의 분해가 일정한 한도에 다다른 상태는, 역으로, 운동의 재건을 위한 전망을 본격적으로 모색해야 하는 반전의 시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1990년대, 그리고 2000년대의 청산주의의 흐름 속에서 마치 대안인 듯이 제기되었던 것이 푸코류의 신좌파적 논리이다. 맑스주의의 사회에 대한 사적 유물론적 접근을 부정한 결과, 사회에 대해 계급적 접근, 즉 사회적 현상과 역사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방법론인 계급의 문제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청산되었다. 대신에 여성운동, 환경운동, 인권운동, 장애인 운동, 성소수자 운동 등 사회에서 억압받는 다양한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운동들이 전개되었다. 이들 운동들은 1980년대 운동이 주목하지 못한 영역이라는 점에서 기존 운동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기존의 운동은 사상적 분해 속에서 점차 변혁성이 거세되고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 운동들을 뒷받침하는 푸코류의 신좌파적 논리는 대안이 되기에는 과학과는 거리가 한참 먼 것이었다. 푸코는 맑스의 사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논리를 부정하며 다양한 운동들의 무차별적 연합을 대안적 전략으로 제시한 바 있다. 그에 따라 노동운동은 자본주의를 변혁할 주도 세력이라는 위상을 상실하고 다양한 운동들 중의 하나로 그 위상이 격하되었다. 그러나 현실의 전개는 신좌파적 논리, 푸코류의 접근의 한계와 오류를 드러내게 되었는데, 여성운동, 환경운동, 인권운동 등이 노동운동과 결합하지 못하면, 그것은 자본주의를 변혁하는 전망을 결코 가질 수 없고, 다양한 부문의 민중들의 변혁성을 소진시키고, 결국 운동의 후퇴를 가져온다는 것이 지난 30여 년의 실천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게 되었다.

노동운동의 헤게모니,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혁명적일 수밖에 없는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를 변혁하는 주도세력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 기초할 때만 자본주의 사회를 변혁할 변혁전략이 성립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략적 인식은 사회에 존재하는 계급세력들의 상호관계를 파악하고 그중에서 변혁의 대상이 되는 계급과 변혁의 주체가 되는 계급을 구분하고, 변혁의 주체 중에서 주도세력, 헤게모니 세력을 정립하고, 그 헤게모니 세력과 여타 세력의 관계, 동맹의 문제 등을 파악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적 사고는 변증법적 논리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사회를 구성하는 계급들의 상호 관계의 문제는, 핵심 고리와 부차적 고리의 구분과 헤게모니 세력과 동맹 세력의 설정은, 그 자체가 변증법적 논리이기 때문이다.

신좌파의 논리를 극복하는 것은 따라서 한국 사회, 나아가 세계 자본주의, 제국주의 질서를 객관적인 대상, 변혁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그 내부에서의 상호 연관과 모순 관계, 대립 속에서의 통일을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변증법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체의 실천, 변혁의 주체의 과학적 실천, 계급투쟁의 과학으로서 전략과 전술의 문제는 객관 대상과 주체의 상호 관계의 문제이라는 점에서, 변증법적 논리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실천, 나아가 계급적 실천은 객관 대상과 주체의 상호작용이며, 모순관계의 운동, 모순의 전개과정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 실천이 단지 즉자적 실천, 변혁성을 소진하는 소모적인 실천이 되지 않고 과학적인 실천, 대자적인 실천, 대안적인 실천이 되기 위해서는 변증법적 인식을 필요로 하고 변증법의 개념과 법칙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신좌파의 논리를 극복하는 것은 지금 시기, 지금의 현실에 맞게 변증법을 발전시키는 것이라는 점이 도출된다. 그것은 여성운동, 환경운동, 인권운동, 시민운동 등의 다양한 운동 부문을 노동운동과의 연합으로 이끄는 것이며, 노동운동 또한 이들 부문운동에게 과학적 논리와 변혁의 전망을 제공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러한 연합을 뒷받침하는 논리로서 다양성을 전제로 하는, ‘다양성 속의 통일’이라는 변증법적 개념을 재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세계, 이 사회의 무한한 다양성을 승인하면서도, 심지어 그러한 다양성이 대립으로까지 나아가더라도, 바로 그러한 대립 때문에 다양성은 통일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론화함으로써, 우리는 신좌파의 논리를 넘어서고 지양하는 변증법적 논리를 전면화 할 수 있다.

그러한 이론과 개념에 따른 실천, 과학적 실천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원대한 지평을 현실화할 수 있다. 노동자계급은 단지 억압받는 계급으로서가 아니라, 변혁의 주체로서, 헤게모니 세력으로서 여타의 민중과 운동부문들을 이끌면서, 여성운동, 환경운동, 시민운동 등과 연합하는 노동운동을 현실화하면서, 자본가계급에 맞서 변혁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이번 ≪노동사회과학≫ 16호는 표제로 ‘부문운동들과 노동운동’을 설정하였고, 그러한 기조 속에서 다양한 글들을 싣고 있다. 먼저 천연옥의 “여성운동의 전선과 전망”은 단지 기존의 페미니즘에 대한 이론적 비판을 넘어서서 본격적으로 운동으로서 여성 문제를 고찰하는 글이다. 기존의 페미니즘은 여성문제를 제기하지만, 그에 대해 계급적 접근, 변혁적 접근이 결여되어 있거나 부족한 것이었는데, 천연옥은 이 글에서 노동운동과 결합하는 여성운동의 전형을 제기하고 있다. 이글에서는 여성 문제의 핵심은 여성 노동자의 문제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일터에서의 성차별과 성폭력, 여성노동자의 비정규직 철폐 투쟁, 모성보호와 가사노동의 사회화 등이 여성 노동운동의 주요 쟁점으로 제기되고 있는데, 이는 여성운동의 발전이 여성노동자의 문제를 중심으로 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천연옥은 엥엘스를 인용하여 ‘남성의 지배와 일부일처제는 다름 아닌 재산의 보존과 상속을 위해 이룩된 것인데, 그들(프롤레타리아트-편집자)은 이러한 재산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남성 지배를 확립하기 위한 아무런 동기도 없다’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여성해방의 길은 오직 노동운동과의 연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방주의 “기후위기, 문제의 인식과 과제―자본주의 체제의 전환 없이 기후붕괴 막을 수 없다”라는 환경운동에서 주요 쟁점인 기후위기의 문제에 대해 그 실상과 극복 전망을 제기하고 있는 글이다. 방주는 현재 지구의 기후변화가 위기의 수준으로, 즉, 기후위기의 상황으로 전화되고 있다는 것을 제기한다. 21세기 안에 지구의 기후가 인간 생존을 거의 불가능하게 할 수준으로 기후위기가 악화되고 있으며, 이는 국부적인 문제가 아니라 지구 자체의 파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후위기의 원인은 자원과 인간을 무한히 소모하는 자본주의적 축적 자체에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기존의 환경운동과 결을 달리하는 것인데, 자본주의 자체를 극복하지 않는 한 기후위기의 극복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부분적 개량, 소위 녹색 자본주의를 주장하는 것과는 상이한 접근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녹색 자본주의는 친환경적인 제품의 생산, 녹색기술의 발전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후위기의 극복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방주는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 자체가 기후위기의 원인이며, 따라서 기후위기의 극복을 위해서는 자본주의 자체를 극복하고 ‘인간과 환경 사이의 합리적인 신진대사’를 이루는 사회를 건설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를 위해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의 연합을 제기하고 있는데, 기후 위기의 극복은 자본주의의 무정부적 생산이 극복되고 계획적인 경제가 이루어질 때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방주의 이러한 문제제기는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의 연합을 위한 이론적 기초가 될 것이다.

조남수의 “‘정의로운 산업전환’은 가능한가?”는 최근 노동운동에서 쟁점이 되는 기후위기, 환경문제를 토대로 하는 산업의 전환 혹은 구조조정에 대해 노동자계급의 입장을 모색하는 글이다. ‘정의로운 산업 전환’은 기후위기라는 조건 속에서 화석연료 사용의 감소 내지 중지로 인해 전기차 등으로의 산업 전환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이러한 흐름에 노동자계급이 개입하여 해고없는 ‘정의로운’ 산업 전환 혹은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조남수는 기후위기는 그러한 산업 전환에 의해서는 극복될 수 없으며, 또한 녹색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적 착취와 자본의 무한 증식의 연장일 뿐이라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특히 직접적 쟁점이 되는 것으로서, 그러한 산업 전환 혹은 구조조정을 통해서 해고가 발생하는 것에 대해 정의로운 산업전환론자들은 해고를 수용하는 논리를 보인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가 노동자를 위한 일자리를 책임지는 것은 불가능하고,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독점자본의 축적을 떠받치는 것에 불과하며, 국가가 노동자의 일자리를 보장하여, 실업을 소멸시키는 것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제기하고 있다. 따라서 정의로운 산업 전환은 이른바 녹색 자본주의가 가능하다는 환상 속에서, 환경위기라는 조건에 대한 자본주의의 구조조정과 그에 따른 노동자의 해고 등 희생을 정당화하는 논리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쟁점의 대두는 노동운동이 노동자계급만의 실천이 아니라 환경운동 등 전 민중적 쟁점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대안적 전망을 수립해야 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김태균의 “문재인 정권의 노동정책 평가 및 향후 방향”은 지난 4년여 간 문재인 정권의 노동정책에 대한 총괄적 평가의 글이다. 이는 지금의 대선 국면 속에서 지난 문재인 정권의 노동정책을 총평함으로써 대선 국면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태도 정립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김태균은 문재인 정권이 집권 초반에 이른바 노동존중을 내세웠으나 실제 집행과정에서 급격하게 친자본으로 기울었다고 분석하고 있으며, 그 사례로 최저임금 정책을 들고 있다. 또 집권 초기부터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이른바 사회적 합의주의를 내세워 노동운동 내에서 친정권, 친자본적인 개량주의 세력을 육성함으로써 노동운동을 무력화하고 자본에 포섭하려 했음을 폭로하고 있다. 결국 문재인 정권은 촛불의 열망을 배신한 반민중 정권이며 이에 대해 노동자계급은 문재인 정권에 맞서야 한다는 것을 제기하고 있다. 이를 위해 첫째, 코로나19 방역을 구실로 한 억압에 맞서야 하며, 둘째, 노동시장 유연화에 맞서 노동의 인간화 투쟁을 벌여야 하며, 셋째, 민주노조진영 내부에서 성장하는 기회주의, 개량주의 세력에 맞서야 하고 넷째, 개량주의적인 부르주아 선거 참여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문영찬의 “구체적 보편에 대하여”는 한국 사회운동에서 변증법적 논리학의 재정립을 제기하는 글이다. 이미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저작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으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재정립을 제기한 바 있는 필자는 그러한 세계관의 구성 부분으로서 변증법적 논리학을 재정립하여 노동자계급이 이론과 실천의 통일로 나아갈 것을 제기하고 있다. 논리학이란 무엇인가, 개념이란 무엇인가, 형식논리학과 변증법적 논리학의 동일성과 차이성, 추상적 보편과 구체적 보편 등을 검토하면서, 형식논리학의 추상적 동일성에 기초한 보편 개념을 극복하고 대립물의 통일로서 보편, 다양성 속의 통일로서 보편, 양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질적인 측면을 포괄하는 보편, 대상의 본질을 담아내는 보편 개념으로 나아가는 것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변혁적 노선의 정립의 길을 개척할 것을 제기하고 있다.

한동백의 “알튀세르의 반(反)맑스주의 사조에 대한 비판”은 한국 사회운동 진영을 왜곡하고 맑스주의를 해체하는 길을 걸은 알튀세르주의에 대한 비판의 글이다. 한동백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를 중심으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비판한다. 이 글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의 일차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주관적 관념론적 성격을 폭로하고 있다. 또한 알튀세르의 구조주의가 반역사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어서 운동의 과학성을 침식하고 이론에 대한 잘못된 편향을 조장함을 폭로하고 있다. 그리고 맑스의 사적 유물론을 경제 결정론으로 기계적으로 인식하고, 이른바 최종심급론을 펼친 결과, 계급적 접근에 기초한 노동운동의 과학성을 침식했다는 것을 폭로한다. 결론적으로 맑스-레닌주의 세계관을 학습하고 실천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은영지의 글 “반동 재판에 맞선 아름다운 투쟁과 고뇌의 기록― 엔첸스베르거의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를 읽고라는 서평이다. 세계 혁명가들의 재판에서의 최후 진술을 모은 책이라는 특별한 저서를 읽고 서평한 글이다. 특히 피델 카스트로의 “저에게 유죄판결을 내리십시오.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할 것입니다.”라는 최후진술은 우리 운동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의 운동이라는 점, 그리고 역사가 운동에서의 쟁점과 어려운 순간에서 판단의 기준이라는 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또한 나찌의 제국의회 건물 방화 조작에 맞선 디미트로프의 최후 진술은 20세기 사회주의의 결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어떠한 말살 정책도, 징역형이나 사형선고도 코민테른이 앞에서 끌고 프롤레타리아가 뒤에서 밀고 있는 이 수레바퀴를 멈출 수는 없습니다. 수레바퀴는 지금도 계속 돌 것이며 공산주의가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그날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 혁명가들의 최후진술은 공통적으로 역사의 진보와 인간의 해방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모습인데, 이는 역사와 개인의 통일, 이념과 혁명적 실천의 통일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외에 이번 호에는 3편의 번역 글이 실렸다. 먼저 “개량주의와 노동자계급”은 20세기 쏘련에서 발간되었던 ≪세계경제와 국제관계≫ 제5호에 실렸다가 일본어로 번역된 대본을 기초로 편집부가 번역한 것이다. 이 번역 글은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맑스-레닌주의의 기본적 입장을 보여주는 글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제3세계가 아니라 주로 유럽에서 영향력이 있는데, 이는 산업이 발달한 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민주주의의 주요 기반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노동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의 평화적 발전이 파괴되면서 공산주의라는 혁명적 조류로 전환하기 시작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공산주의자들의 반파시즘 투쟁의 결과 유럽에서 공산당이 사회민주주의 당을 제치고 제1당으로 부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전후 유럽 자본주의의 평화적 발전이 이어지면서 사회민주주의당은 다시 부상했는데, 이 시기 사회민주당의 기반은 전통적 프롤레타리아트에서 기술의 발전과 신산업의 등장으로 인해 사무원, 소부르주아층, 고급기술자 등으로 변화했다는 것이 서술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맑스-레닌주의의 태도는 노동자통일전선의 구축인데 사회민주당이 공산당 세력, 맑스-레닌주의 세력과 연합하여 자본에 맞서는 전선에 설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에게는 개량의 길인가, 혁명의 길인가의 두 가지 길이 제기되고 있는 바, 맑스-레닌주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발전에 조응하는 혁명적 방책과, 통일전선을 다 같이 제기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혁명화를 앞당길 수 있다는 것이 이 글에서 드러나고 있다.

“맑스의 ≪자본론≫에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2)”는 지난 호에 이어지는 번역 글이다. 이 글의 저자인 쏘련의 철학자 일렌코프는 먼저, 구체의 개념을 과학적으로 정립하고 있다. 즉, 흔히 구체는 감각적 인식이고 추상은 대상의 한 측면에 인식이라는 점을 비판하며, 구체는 추상을 거쳐 대상을 개념적으로 재생산하는 과정임을 맑스의 언급 등을 인용하며 논증하고 있다. 그럴 때 구체는 단지 대상에 대한 감각적 인식이 아니라 다면성 속의 통일, 다양성 속의 통일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대상의 본질을 비롯한 풍부함을, 대상에 대한 개념적 재생산을 통해 이끌어내는 것임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일렌코프는 개념이 무엇인가에 대해 엄밀한 과학적 접근을 하고 있다. 일렌코프는 우리가 개념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은 대상을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개념이라 할 수 없고, 단지 관념(the notion)에 지나지 않으며, 개념(the concept)은 헤겔이 말한 대로 대상을 본질에서 파악하는 것이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개념에 대해 엄밀한 인식을 획득한다면, 이 세계에 대해, 그리고 이론적 쟁점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과학성을 획득하고 변증법적 인식을 재고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사회주의 경제: 국가의 계획”은 politsturm.com이라는 사이트의 집단 저작으로 보인다. 21세기 지금의 관점에서 20세기의 쏘련의 사회주의 경제에서 국가의 계획이 어떤 성격이었는지를 탐구하는 글이다. 자본주의에도 국가의 계획이 있으나, 그것은 독점자본들의 계획에 지나지 않으며, 그러한 계획은 자본주의에 고유한 생산의 무정부성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서술되고 있다. 사회주의에서 국가의 계획은 프랙탈(fractal)의 성질을 띠는 계획을 통해, 즉, 밑에서부터 꼭대기까지 동일한 성질을 띠는 계획의 중층적 수립으로 인해 과학적으로, 또 민주주의적으로 수립되고, 집행된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다. 중요한 논점으로 사회주의 사회에도 가치법칙이 작용하지만, 그것은 이미 지배적 법칙은 아니라는 쓰딸린의 언급을 인용하며, 사회주의의 상품 생산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교환에서 분배로 이행하는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또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중공업의 우선적 발전이 사회주의에서 계획의 합리성을 보여주는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의 모순의 심화는, 결국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경제에서의 계획화에 의해 지양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2021년 11월 13일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장 문영찬

문영찬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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