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특집: 전쟁과 평화] 우리는 충분히 보았고, 그래서 고발한다

― 김태우의 ≪냉전의 마녀들≫을 읽고

 

은영지 | 회원

 

* 이 글은, <현장실천 사회변혁 노동자전선(노동전선)>이 발행하는 ≪전선≫ 제132호에 실린 글인데, 본지에 다시 실으며, 약간의 내용을 추가하였습니다.

** 김태우, ≪냉전의 마녀들―한국전쟁과 여성주의 평화운동≫, 창비, 2021.

 

 

1. 전쟁의 참상을 증언하러 조선으로

 

성주군에서도 외진 골짜기에 있는, 밤이면 별이 쏟아져 내린다는 아름다운 마을 소성리는 2017년 4월 불법 미제 사드가 배치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전쟁터가 되어 버렸다. 최근엔 문재인 정부의 국방부가 사드 기지 공사 완성을 위해 군사 작전을 펼치느라 일주일에 두 번씩 수천 명의 경찰 병력이 들쑤셔 놓고 다니는 지옥이 되어 버렸고 주민들은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다운 삶과 자유, 평화를 빼앗긴 채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고 있다. 미국과 문재인 정부는 사드 미사일이 ‘북핵 방어용’이라고 떠벌리지만 중국 포위 봉쇄 전략과 세계 패권을 위해 소성리를 병참 기지화하려는 속셈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주민들은 6년째 저항하며 눈물겨운 아스팔트 농사를 짓고 있다. 군경의 폭력과 난동으로 몸과 마음의 상처가 아물 날이 없지만 골리앗보다 더 센 미국에 맞서 평화지킴이들은 날마다 유서를 쓰는 비장한 심정으로 사드 반대와 평화를 외치고 있다.

 

 

70년 전인 1951년 5월 15일에도 유서를 쓰고 그 다음 날 폭탄이 내리쏟아지는 조선 땅으로 건너간 용감한 여성들이 있었다. 덴마크, 체코슬로바키아, 네덜란드, 영국, 쏘련, 프랑스, 이탈리아, 쿠바 등 18개국에서 온 국제민주여성연맹(이하, 국제여맹) 소속 21명의 조사위원들이다. 그들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미군의 무차별 공중 폭격으로 세계에서 가장 참혹한 전쟁이 되어 버린 한국(조선) 전쟁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빗발치듯 쏟아지는 폭탄을 뚫고 죽기를 각오하고 조선 땅으로 들어갔다. 1940-50년대 교육과 노동 현장의 노골적인 성차별에도 불구하고 변호사, 정치가, 도서관장, 교장, 작가, 저널 편집장, 공기업 대표 등 잘나가는 직업을 가진 이 인텔리 여성들은 열흘간 조선 땅을 조사하고 인민들의 고통과 참상을 정리해 ≪우리는 고발한다≫라는 보고서를 7개 언어로 전 세계에 내놓는 활약을 한다.

 

역사학자 김태우가 최근에 이 보고서를 분석하고 관련 있는 여러 자료를 참고로 하여 ≪냉전의 마녀들≫을 펴냈다. 매카시즘 광풍이 연상되는 다소 섬찟한 제목에 흡입돼 책을 펼쳤다가 미군의 무차별 공습 폭격과 민간인, 특히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인권 유린 실태를 곳곳에서 확인하게 되었다. 안타까운 건, 미군이 점령하여 인종 청소하듯 남북한(남북조선)에서 저지른 야만적인 행위와 그로 인한 민중들의 고통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이 책이 조선에 여성 운동가들을 보낸 국제여맹이 어떤 조직인지 잘 정리하고 있어 흥미롭게 읽었다. “전 세계 다양한 인종과 계급의 여성들이 잔혹했던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전쟁과 파시즘이 여성과 아이들의 일상을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할 수 있는지” 통감하면서 평화와 반파씨즘이라는 절박한 열망 하나로 뭉쳤다. 1945년 이후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전 세계 9,100만 명의 회원을 가진 이 국제 여성 단체는 ‘진보적 좌파 여성주의 국제 우산조직’으로 자리매김하며 폭넓은 활동을 펼쳤다. 무엇보다 그 조직은 기존 여성 운동에서 배제되어 있던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지역의 여성들이나 서구 내의 비(非)백인 여성들까지 포용하는 ‘다양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공산주의보다는 반파씨스트 활동에 힘을 쏟다 보니 식민지 지배를 당하고 있던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의 민족 해방 운동과 반식민지 운동을 하는 여성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많은 토론 끝에 결국 식민지 여성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국제여맹은 결속력을 다지기로 했다. 이러한 활동의 연장선에서 창립된 지 5년 후 전쟁의 참상을 겪고 있는 조선 여성들과 함께하려고 한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2. 미군의 광기를 목격하다

 

국제여맹 조사위원들은 5월 16일 밤 신의주에 도착한 후 열흘 일정으로 조를 나누어 평양, 신의주, 원산, 신천, 안악, 남포, 철원 등으로 흩어져 조사 활동을 했다. 이 책 서술의 중심에는 영국 출신의 조사위원 모니카 펠턴이 등장한다. 그는 영국 최초로 뉴타운 건설을 추진한 스티버니지 개발공사 총재로서 “영국이 유엔군의 일원으로 영국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보내는 것이 옳은 것인지, 사회 보장 계획을 퇴보시키면서 국방비를 증액하는 것이 적절한 선택인지” 논쟁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조선행을 선택했다. 말하자면 그는 ‘진실의 발견’을 조선 방문의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저자 김태우가 그의 시선을 따라간 이유는 귀국 후 펠턴이 조선 방문 기록을 상세히 남기기도 했지만 친미나 친쏘에 치우치지 않은 점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글 중간중간에 펠턴은 조선 주민들의 고통과 아픔을 의심하는 투의 반응을 보이는가 하면 이북 정권의 진정성에 냉소를 보인 태도를 드러내 책 읽기가 거슬렸다. 펠턴 자신은 노동당원으로 정치 활동을 하고 국가 요직을 거쳤지만 자본주의의 풍요로움을 누린 영국인의 한계를 드러냈다. 아니나 다를까, 펠턴을 포함한 몇몇 조사위원들이 이념의 차이로 이북으로 가는 과정에도 불협화음과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우리는 미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행위를 폭로하기 위해 한국에 가는 것에 매우 기쁩니다. … 그리고 우리들 중 서구 국가들로부터 온 조사위원들은 우리 정부의 정책들을 매우 치욕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국 선양의 환영 만찬장에서 캐나다 국적의 조사위원장 노라 로드가 대표로서 이렇게 연설을 했을 때 펠턴을 포함한 몇몇 위원들은 자신들은 한국(조선) 전쟁 발발의 원인과 책임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며 노라의 발언을 문제 삼았다. 펠턴은 이북 정권의 선제 남침 공격을 확신하고 있었고 덴마크 국적의 보수주의 저널리스트인 플레론은 “공산주의자들은 항상 공산주의자처럼 행동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쥐새끼처럼 행동한다”고 노골적인 경멸을 드러내면서 ‘독립적인 참관인’으로 남아 있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서로를 두려워하고 의심하며 회의할 땐 폭발 직전의 화약통이었던 이 낯선 이방인 그룹이 조사 활동을 잘 할 수 있을까 불안했지만 조선에 입국하여 참상을 접한 후에는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이 압록강을 건너가 맨 먼저 목격한 신의주의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미군이 이북을 점령한 초반에는 ‘군사 목표’만을 폭격한다는 원칙을 세웠지만 중국 인민 지원군 개입과 미군과 한국군의 초반 패배에 대한 보복 조치로 맥아더가 ‘초토화 정책’을 선언한 후 신의주 대폭격이 시작되었다. 1950년 11월 8일에 640톤의 폭탄이 적재된 78대의 B-29 폭격기와 87대의 전폭기를 동원해 신의주를 무차별 집중 폭격을 했다. 하루 동안 8만 5,000발의 소이탄이 투하되었다. 공공건물 3,017호 중 2,100호가 파괴되었고, 1만 1,000호의 일반주택 가운데 6,800호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5,000명 이상의 주민이 살해되었는데 그중 4,000명 이상이 여성과 어린이였다. 부상자는 3,155명이었다. 17개의 초등학교 중 16개, 14개 중등학교 중 12개가 소이탄에 의해 불살라졌다. 17개의 교회 가운데 2개만 남았고, 2개의 시립병원은 지붕의 ‘적십자’ 표시에도 불구하고 소이탄에 의해 파괴되었다. 11월 10일-11일 두 차례의 추가적인 폭격 후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 버린 신의주의 참상을 보고 조사위원들 패닉에 빠져 버렸다. 미 극동공군 폭격기사령관 오도넬 소장은 “시가지가 사라졌다”고 보고했을 정도였다.

 

군수 산업체는 없고, 성냥, 신발, 소금, 젓가락 등을 생산하는 경공업체만 있는 신의주에 이처럼 무차별 공중 폭격을 했다는 건 미군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가를 증명해 주었다. 폭격으로 언제 또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두려움으로 대부분의 인민들은 토굴 속에서 살거나 땅을 파고 그 위에 거적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토막(土幕)에 거주했다. 미군의 공중 폭격에도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을 항공기들이 저공비행 기총 소사를 해서 사살하는 끝없는 잔인함을 보였다. 도시 지역 완전 소각을 위해 “폭격 7-10분 후 폭격 장소에 미 공군 전폭기가 나타나 공중 청소를 실시했다”는 끔찍한 기록도 있었고 소이탄 투하 직후 다량의 시한폭탄을 투하하는 야만성을 보이기도 했다. 미 공군의 ‘시한폭탄 투하’는 화재 진압과 전시 복구 활동을 책임지고 하는 도시 거주민 상당수를 몰살시키는 잔인한 군사 작전이었다.

 

우리는 충분히 보았다.

유일하게 확실한 사실이란 시체가 매일 쌓여 갔다는 것이었다. 조사위원들은 이동하는 곳마다 폭격과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 나가는 여성과 아이들을 끊임없이 목격할 수 있었고 불과 10여 일 만에 거의 중단 없는 폐허의 연속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317쪽.)

 

조사위원 모두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면서 어서 빨리 이 지옥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2차 세계대전 시기 유럽의 군사 작전과는 달리 소도시와 농촌 지역까지 완전히 파괴해 버린 폭격 양상이 한국(조선) 전쟁의 두드러진 성격이었다.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는 ‘촌락’ 또한 군사 목표로 간주하여 완전히 파괴해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신의주, 평양과 같은 대도시에는 미 극동공군 폭격기사령부 소속의 B-29 중폭격기, 소도시와 촌락엔 제5공군 소속의 B-26 경폭격기가 폭격 작전을 수행했다. 경폭격기들은 몇 개의 편대로 분산되어 타깃의 크기를 가리지 않고 작전 구역 전반을 불태워 버리고 사라지곤 했다. 이들은 임무 구역에서 적 병력이나 보급품의 목표물을 발견하지 못하면 해당 구역 내의 마을과 도시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곤 했다. 압록강에서 전선에 이르는 이북 지역 전체를 꼼꼼하고 철저하게 파괴시키는, 그 어떤 전쟁에서도 볼 수 없는 잔인함의 극치를 보였다. 이북 지역 도시와 농촌의 파괴는 2차 세계대전 때 런던 폭격의 강도나 충격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훨씬 더 “광범하고 경악스러운 수준”이었다고 펠턴도 기록을 남겼다.

 

조선의 수도 평양에 대한 공중 폭격도 신의주만큼 파괴적이었다. 한 예로, 1951년 1월 3일에 63대의 B-29기가, 5일에는 60대의 B-29기가 평양에 소이탄을 투하해 온 시가지가 이틀 내내 용광로처럼 불탔으며 그 상황을 미 공군은 “매우 훌륭”한 작전이라고 잔인한 평가를 했다. 조사위원들이 진상 파악을 위해 방문한 어디나 다 끔찍한 상황이었다. 황해도에서만 유엔군 강점 기간 동안 약 12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안악시에서만 1만 9,092명의 주민들이 미군 영국군 남한군에 의해 학살되었다. 전쟁 전의 물류 창고들을 감옥으로 활용,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수백 명씩 한꺼번에 수용하여 수치심을 주거나 죽게 내버려 두는 예도 허다했다. 미군이 보여 준 잔혹성에 대해 김상영 노인의 증언이 잊혀지지 않는다. 미군 점령 후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갔다가 10-12일 후 돌아와 보니 그의 식구 12명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의 아내, 아들 부부, 두 살배기 손자까지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아들 내외는 밧줄로 한데 묶여 있었어. 시신에 아무런 상처가 없었기 때문에 생매장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지.

 

조사위원이 확인한 어느 집단 매장지에는 어린아이들만 묻혀 있었다. 훼손되고 부패한 시신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신발, 머리 다발, 책, 작은 소지품, 밧줄 등이 한데 엉켜 있었다. 미군들은 탄환이 아깝다고 생매장하거나 총검으로 찔러 죽이거나 십자가에 묶어 강물에 던지기도 했고 여성의 젖가슴과 목을 자르는 잔혹함도 국제여맹 보고서 증언을 통해 확인되었다. 13만 명의 강원도 여성 중에서 2,903명이 미군과 남한군에 의해 강간을 당했다. 이를 강하게 저항하자 젖가슴을 도려내고 달군 쇠막대기를 국부에 밀어 넣는가 하면 임신 8개월 된 임산부가 나체 상태로 나무에 묶여 복부가 절개되는 만행을 당한 사례도 있었다. 천경화 목사의 며느리는 강간 후 총살당하는 등 강원도 지역에는 전체 피해의 1/4 이상이 성폭력 관련 증언이었다. 전시 성폭력은 인류 전쟁의 역사에서 끈질지게 자행된 가장 대표적인 범죄 중의 하나였다. 반공, 반북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월남인들 증언을 들어 봐도 “인민군의 경우 강간 사건을 경험한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한국군에게 강간당했다는 증언이 많았고 중국군의 경우 강간은 즉결 처분감이지만 미군은 광범위하게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 강간을 자행하였다”(254쪽)라고 전했다.

 

그러나 펠턴은 이런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학살 장면을 자신의 개인 기록에 싣지 않았다. 잔혹한 일이 사실일 리가 없다고 판단하거나 조선인들이 겪은 잔인한 상황을 영국인들이 과장이나 거짓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서 취한 행동이라고 저자 김태우는 설명하지만 펠턴 자신의 한계도 있으리라 본다. 펠턴은 이북 정권이 고의로 ‘미군 혹은 미군 통제하의 한국군’만을 학살의 가해 주체로 지목했다고 확신하면서 이북 여성들의 진술에 반신반의하기도 했다.

 

저자 김태우도 펠턴의 입장에 동의하며 당시 이북에서 반공 유격대를 조직해 활동하던 우익 청년들의 잔혹 행위를 북 정권이 미군 소행으로 떠넘겼다고 쓰고 있다. 이유는 전쟁 전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던 이남의 이승만 정권에 비해 이북은 사회주의 개혁이 성공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 반공 유격대의 행위를 은폐했다고 의심했다. 그러나 이 반공 청년들의 난동 역시 미군의 지시나 방조하에 이루어졌다고 볼 때 미군이 학살의 주체인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해방 후 미군정 시기의 제주 4ㆍ3 항쟁과 여순 사건에서도 이남 경찰과 토벌대, 서북 청년단에 의해 민중 학살과 가학적인 구타, 성폭력 등의 만행이 저질러졌고 이런 잔혹 행위 역시 미군정의 지시나 묵인하에 이루어졌던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보수적인 저널리스트인 플레론은 학살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을 보이기도 했다. 자신이 방문한 집단 매장지에 매장된 사람들이 미국인이나 남한 사람일 수 있다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저자는 조사위원의 보고서도 영문판과 한글판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이북이 미군의 행동을 더 폭력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한글판에 대해 수정을 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한 예로, “시체들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라는 문장을 “시체에는 상처가 있었으며”로 문장을 바꾸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상처가 있고 없고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조선인들이 미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한 여성의 아이가 울기 시작하자 미군들이 창으로 찔러 죽였다”는 문장이 한글판에는 “어린애 밴 어머니들이 많이 있었는데 애기들이 울기 시작하면 우는 애들을 창으로 찔러 죽였다”는 해석으로 확대된 것을 문제 삼았다. 어떤 식의 표현이든 미군에 의해 아기들이 죽임을 당한 건 사실이고 본질이다. 달을 가리키면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또한, 감옥 내에서 구타용으로 사용한 ‘미군 야구방망이’를 ‘망치’로, ‘뜨개질바늘’을 ‘쇠꼬챙이’로 각색했다고 지적했다. 당시 공포에 질린 조선인들에겐 야구방망이가 ‘망치’로, 뜨개질바늘이 ‘쇠꼬챙이’라는 공포의 물건으로 보여 그렇게 표현했고 들리는 대로 적을 수 있다고 본다. 내 경우에도 소성리에서 사드 철거 투쟁을 할 때 수천 명의 경찰들이 주민들을 밀어내고 제압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방패’도 무시무시하게 보인다. 실제로 경찰들은 평화 시민들을 방패로 찍어 내리기도 했고 충돌 과정에 방패에 부딪혀 몸이 찢기거나 타박상을 입고 통증을 호소하는 주민들도 많았다.

 

 

3. 미군은 아직도 전쟁 중…

 

이 책은 한국(조선) 전쟁기 국제여맹 조사위원들의 활약상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는 사실은 분명하고 그들의 진정성에 존경과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러나 몇 가지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았다. 첫 머리글에 가족들에게 유서를 쓰고 참혹한 조선 땅으로 건너갔다는 서술 방식을 취하여 조사위원들의 ‘영웅적인 행동’에 초점을 맞춘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실제로는 구경꾼 정도의 활동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국제여맹에 ≪우리는 고발한다≫라는 보고서를 제출하여 전 세계인에게 조선에서 일어난 야만적인 전쟁을 알리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그러나 북쪽에서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미군을 성토하거나 야만적인 전쟁이 종식되도록 투쟁을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조선 인민들의 참혹한 현실을 동정하거나 그들을 돕기 위한 모금 활동을 한 인도적인 차원의 도움에 그쳤을 뿐이다.

 

열흘간 조선에 머물다 고국으로 돌아간 조사위원들에게 엄청난 핍박이 기다리고 있는 건 냉전 체제에서 예견된 일이었다. ≪우리는 고발한다≫라는 조사 보고서에 대한 매카시즘적인 공격이 일어나면서 국제여맹은 결국 유엔 내의 모든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고 이후 본부도 빠리에서 동베를린으로 옮겨 가야 했다.

 

저자는 “한국 전쟁 조사 보고서는 소련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어느 여성 단체의 허구적 정치 선전물 취급을 당하면서 반세기가 넘도록 학자들의 분석 대상에서도 완전히 제외되어 있었다”라고, 이 책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조사위원들 모두 끔찍한 정치ㆍ사상적 탄압과 남성들의 조롱, 일부 여성 단체들의 비난을 받아야 했지만 조선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개인적인 캠페인을 이어 나갔다. 펠턴은 하원 공청회에 4시간 지각했다고 ‘무례한’ 행동으로 몰아 총재직에서 해고되었지만, 실제로는 ‘조국(영국)에 대한 배반, 반역’이 해고 이유였다. 그는 결국 5년 후 인도로 망명하여 탈식민주의적 평화 운동과 여성 운동을 하다가 마드라스에서 생을 마쳤는데 조선에서의 활동을 계기로 살아생전 운동가로 성장하여 명성을 누리게 된다.

 

“전쟁이 곧 끝날까요?” 가는 곳마다 울먹이며 이렇게 질문을 했다는 가엾은 조선 인민들.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라고 조사위원들이 말할 수밖에 없었다는 끝 모를 고통이 현재적 통증이 되어 쿡쿡 쑤신다. 국제여맹 조사위원들이 다녀가고 나서도 2년간 파괴적인 전쟁이 더 지속되다가 휴전 협정이 맺어졌지만 이 땅은 전쟁을 ‘잠시 쉬는 중’일 뿐 언제 다시 재개될지 모르는 분단 체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조선) 전쟁기 이북뿐만 아니라 이남에서도 미군에 의한 무수한 폭격과 학살이 있었고, 그 지옥 같은 고통이 언제 다시 이 땅에서 재현될지 모를 일이다. 미국이 수시로 한미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성주 소성리에 사드 영구 배치 공사 강행에 미쳐 있는 꼴을 보니 그 야만의 전쟁을 다시 시작할 속셈인 건 분명하다. 그 파괴적인 전쟁과 미제 식민지를 끝장내기 위해 매일 유서를 쓰는 심정으로 저항해야 할 주체는 우리 민중밖에 없다. 냉전의 마녀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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