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특집: 전쟁과 평화] 살인적인 폭격의 역사 속에서 계속되는 한국(조선) 전쟁

 

팀 빌(Tim Beal)

번역: 김범수(회원)

 

* 이 글은 Monthly Review, Volume 72, No. 8(January 2021)에 실린 “The Continuing Korean War in the Murderous History of Bombing”을 번역한 것입니다. 원문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monthlyreview.org/2021/01/01/the-continuing-korean-war-in-the-murderous-history-of-bombing>

** 팀 빌(Tim Beal)은 뉴질랜드의 은퇴한 교수로, 특히 한(조선)반도에 중점을 두고, 아시아에 대한 글들을 광범위하게 저술해 왔습니다. 그의 최신작은 ≪팰그레이브 제국주의 및 반제국주의 백과사전(The Palgrave Encyclopedia of Imperialism and Anti-Imperialism)≫(Springer Publishing, 2019)의 한국(조선) 항목입니다.

 

미 5공군 소속의 B-26 경폭격기가 원산항에 폭탄을 투하하고 있는 모습(1951년)

 

폭격은 현대 군사력과 제국주의에 있어서 상징적이고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중세의 기사가 갑옷을 입은 채,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소작농으로 이뤄진 적을 막아 낸다고 생각해 보라. 그가 더욱 부자일수록 갑옷은 더 좋아져서,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을 것 같은 데다 화려하기까지 할 것이다. 유럽의 수많은 대저택과 박물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전쟁 유물이 갑옷이라는 점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폭탄은 다르다. 갑옷으로는 폭탄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 굴을 파고 그 안에 숨어서 피할 수는 있겠다. 하늘 높이 나는 은빛 비행기는 참으로 멋있지만, 그 아래에 있는 불행한 사람들에게 끔찍한 최후를 가져다주는, 무적 같은 최고의 상징이다.

 

20세기 초부터 나타난 다양한 형태의 폭격은 전쟁의 파괴적인 상징이 되었다. 폭격기의 승무원은 지상의 보병대보다 훨씬 더 많은 사상자를 낼 수 있고 더 큰 파괴를 일으킬 수 있다. 총은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고, 전차로는 아예 짓뭉개 버릴 수 있지만 폭격에는, 특히 핵폭탄에 필적할 만한 것은 없다. 항공 폭격의 방식은 시대가 흐르면서 비행기에서 탄도 미사일, 순항 미사일, 무인 항공기 등으로 확장되었지만 가장 효과적인 파괴력이라는 목적은 변하지 않았다. 대규모 파괴를 일으킬 때도 있고, 좀 더 선택적으로 목표물만을 공격할 수도 있지만, 폭격의 목적은 언제나 최소한의 위험 부담을 지고 적을 전멸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폭격의 위협은 19세기의 포함(砲艦)을 대체하여 강압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한국(조선) 전쟁에서, 미국은 테러를 일으키기 위한 핵 폭격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B-29 폭격기 하나를 평양에 보냈다.[1]Gavan McCormack, “Sunshine, Containment, War: Korean Options”, AsiaPacific Journal, Volume 1, Issue 2(2003). 오늘날에 조선과 중국을 위협하고 싶을 때면 또 B-52, B-1, B-2 등의 폭격기를 보내고 있다.[2]“S. Strategic Bombers in Provocative Show of Force”, Zoom in Korea, August 19, 2016.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한국(조선) 전쟁은 전쟁의 도구로서의 폭격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조선) 전쟁은 1950년에 시작된 것도 아니고(1945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끝난 것도 아니지만, 그것은 다른 기회에 할 이야기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2차 세계대전에서 폭격으로 사망했고 그 후 인도차이나에 더 많은 폭격이 가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조선) 전쟁은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우선, 1945년 이후 미국이 제국주의 전쟁에서 핵무기 사용을 진지하게 고려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베트남 전쟁에서는 논의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현 가능성의 문제로 핵무기 사용안은 빠르게 배제되었을 것이다. 베트남 사람들도 진짜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했다. 쏘련은 당시 열핵반전성(熱核反轉性)(수소폭탄과 그 운반 씨스템의 결합)을 이뤄 냈고, 베트남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 또한 기초적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3]Marjorie Cohn, “S. Nearly Used Nukes During Viet Nam War”, CounterPunch, June 11, 2014.; “Telegram from Pyongyang to Bucharest, TOP SECRET, No. 76.047, Regular”, February 19, 1968, available … Continue reading 하지만 한국(조선) 전쟁에서는 중국까지 확전을 시도하려는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있었다. 그는 가히 제국의 아들이라 할 수 있었다(그의 아버지는 미국의 첫 주요 식민지인 필리핀의 총독이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중국과의 전쟁에 대한 그의 열망이 아주 위험한 것이라 생각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의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그의 해고는 1950년대 초반의 주요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사실, 지배계급은 한국(조선)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중국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 보았다. 조선과의 계속되는 대결 국면 역시 지정학적 측면에서는 본질적으로 중국을 향한 것이다. 게다가, 일본과의 전쟁은 중국을 둘러싼 분쟁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이 미국에게 패배한 후, 1949년에 “중국을 잃었다”라는 매카시즘적 비판이 미 국무부에 가해졌듯이 말이다.[4]John Kifner, “John Service, a Purged ‘China Hand,’ Dies at 89”, New York Times, February 4, 1999.

 

 

검은색으로 도색된 미 공군 더글라스 B-26C 폭격기(1953년)

 

토마스 히플러(Thomas Hippler)는 그의 연구 ≪하늘에서 세상을 다스리기: 세계의 항공 폭격의 역사≫에서, 이탈리아의 비행사 줄리오 가보티(Giulio Gavotti)가 리비아의 오스만 제국 진영에 가장 기초적인 폭탄을 투하했던(이때 그는 안전핀을 그의 이로 뽑아야 했다) 19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히플러가 지적했듯이 그 지역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탈리아는 영국과 프랑스의 합의하에 몰락하고 있는 터키 제국으로부터 리비아를 빼앗고 있었다. 100년 후, 히플러가 이 책을 썼을 때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소위 ‘힐러리 전쟁’에서 폭격을 감행하고, 미국은 ‘인도주의적 개입(리차드 홀브룩(Richard Holbrooke)이 고안한 책략)’이라는 미명하에 이탈리아의 ‘문명화’를 대신하는 등 리비아에서 제국주의가 되살아났다. 반향적인 모순은 2011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리비아의 파괴는 수많은 난민들을 유럽으로, 지하디스트들을 시리아로 몰아넣었다. 리비아에서의 지하디스트의 세력화와 시리아로의 추방은 당시 미 국방정보국 국장이었던 마이클 플린(Michael Flynn)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는 그 전쟁 때문에 힐러리 클린턴은 “백악관에는 아니지만, 정부 주택에는” 적임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기득권층과 플린과의 갈등은 플린에 대한 압박으로 나타났고, 2020년에서야 해소되었다.[5]Paul Craig Roberts, “The Case of General Michael Flynn: The Use of Law as a Political Weapon”, Global Research, May 20, 2020. 한편, 터키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신(新)오스만 제국에 대한 야망의 일환으로 리비아로 돌아왔는데, 유인 폭격기가 아닌 드론을 사용하고 있다. 한 세기가 지나는 동안 기술은 발전했지만 추악한 동기는 변하지 않고 있다.

 

빅또르 위고(Victor Hugo)나 웰스(H. G. Wells) 등의 소설가들이 오랫동안 꿈꿔 온 신기술이 개발되면서, 항공 폭격은 전간기의 군사 전략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이는 1차 대전에서의 정적인 참호전을 넘어서서 전쟁의 기동성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두 가지의 더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첫째, 상대방의 경제적 토대와 인민들에게 유례없는 맹렬한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전면전’으로 이어졌다. 둘째, 이는 공식적인 최전선 너머에 있는 인민들도 포함되었다.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 작품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전쟁을 의식하지 못하고 사업에 임했지만, 1940년대 런던과 베를린의 주민들은 이를 확실히 인식을 하고 이에 관여했다. 총력전은 인민의 전쟁으로 비춰졌다. 이러한 이중성은 테러가 적의 사기를 꺾을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던 공군력 옹호자들의 주장을 약하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경우는 그의 반대였다. 그게 유일한 문제는 아니었다. 적은 때로는 폭격의 효과를 제한시키는 데에 능숙해졌다. 런던 사람들은 땅 속 깊은 곳에 있는 지하철역에서 잠을 잤고, 조선인들은 땅 속에 시설을 지었으며(지금도 그렇다), 베트남 사람들은 땅굴을 통해 사람과 자재를 옮겼고(미국이 화학 무기로 이를 파괴하려 했다), 세르비아인들은 미국의 폭격을 막을 유인용(誘引用) 탱크를 생산했다. 방공 씨스템은 비슷한 국력을 지닌 국가 간의 전쟁을 더욱 위험하게 만들었다.

 

조셉 헬러(Joseph Heller)의 ≪캐치-22(Catch-22 )≫에서 폭격기 조종사는 그 임무가 얼마나 위험한지, 미쳐야만 집에 돌아갈 수 있고, 제정신이라서 집에 되돌아가고자 하면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농담이 나온다. 전쟁 초기의 폭격의 효용성 면에서 볼 때 가장 좋은 전쟁은 적에게 방어 수단이 없는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제국이 직면하고 있던 주요 문제는 제국주의자들이 종종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던 예속자들보다 수적으로 훨씬 열세였다는 것이다. 히플러(Hippler)의 표현에 따르면 “하늘에서 다스리는” 공군력은 그들을 통제하는 안전하고 효율적인 방법을 제공하는 것같이 보였다. “미개인”들에게 독가스를 투하하는 것을 선호하는 윈스턴 처칠은 그러한 조치들을 열심히 지지했지만 아주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6]Giles Milton, “Winston Churchill’s Shocking Use of Chemical Weapons”, Guardian, September 1, 2013.

 

스벤 린드크비스트(Sven Lindqvist)는 그의 저서 ≪폭격의 역사≫에서 제국주의적 환상과 현실을 초창기 항공 폭격과 오늘날을 마치 결혼처럼 깔끔하게 결합했다.

 

경찰관 역할의 조종사, 경관봉 역할의 폭탄 ― 이 개념은 헌(R. P. Hearne)의 저서 ≪평화와 전쟁의 비행선≫(1910)에서 일찍이 등장했다. 토벌에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소모된다. 목표에 달하기까지 수개월이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항공 폭격은 효과가 즉각적이고 비용도 덜 소모된다.

 

헌(Hearne)은 “야만의 땅에서 그런 전쟁 도구의 도덕성은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한다. … 비행선의 출현은 원주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일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백인 군대들에게 오는 토벌에 의한 인명의 끔찍한 낭비”를 피할 수 있었다.

 

해군이 바다를 떠다니며 둘러보는 동안 공군은 육지를 손쉽게 순찰할 수 있었다. 폭격기는 필요할 때마다 “가혹하고, 엄하고, 끔찍한 처벌”을 내릴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과거의 토벌 과정보다 인도적일 것이다. 그 폭격은 범법자들에게만 영향을 미치고, 결백한 사람들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순수한 판타지였다. 헌(Hearn)의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 정확성을 요구했다. 1912년에 프랑스가 모로코에 군사력을 행사하기 위해 6대의 비행기를 보냈을 때, 조종사들은 폭격에 실수가 없도록 마을, 시장,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을 목표물로 선택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스페인 사람들이 모로코의 “그들”의 지역을 폭격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폭격의 집중도보다는 가능한 많은 살아 있는 목표물에 피해를 입히기 위해 폭발물과 강철 공으로 채워진 독일제 카르투슈(Cartouche) 폭탄을 사용했다.[7]Sven Lindqvist, A History of Bombing(New York: New Press, 2003), section 75.

 

이런 이야기들은 주로 백인들로 이뤄진 지도자들이 행하는 ‘정밀 폭격’이 ‘위법자’와 ‘무고한 사람’을 구별할 것이라는 게 허구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언론은 미국의 공습이 역사상 가장 정밀하다고 일상적으로 주장하지만, 이는 관측상의 추정뿐 아니라 폭격으로 인한 참사를 담은 사진으로도 반박이 되는 주장이다.[8]Missy Ryan, “After Bloody Insurgent Wars, Pentagon Launches Effort to Prevent Civilian Deaths”, Washington Post, February 4, 2019. 모로코에 살았던 이 사람들은 아마 백 년 후 분쟁 지역인 [이라크의] 모술의 주민들보다 폭격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았을 것이다. 폭격의 파괴력이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는 동안 정밀도는 이에 비해 크게 뒤쳐졌다. 그리고 멀리서 폭격에 의해 살해당하는 수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폭격을 가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안전했다.

 

그러나 1937년과 1945년 사이에 벌어진 일본의 중국 침공 및 식민지 전쟁이 무색하게, 폭격에 가장 관심을 가진 곳은 유럽이었다. 모순적이게도, 1945년 전쟁이 끝날 무렵, 폭격으로 가장 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나온 곳은 일본이었고, 그 다음은 독일이었다. 1937년 스페인의 마을 게르니까에 행해진 독일군의 폭격은 빠블로 피까소의 동명의 그림에 의해 대중의 의식 속에 새로운 테러의 시대를 알렸다. 지상군을 지원하는 공습(당시에는 슈투카[당시 독일 공군의 주력 급강하폭격기]와 전차, 현재에는 이라크와 시리아에서의 IS와 협력자들에 대한 공격)과 달리 이 폭격은 경제적 인프라와 대중의 사기 모두를 파괴하기 위해 적의 배후지를 겨냥했다. 독일은 영국에 대한 공습으로 이를 지속했지만, 머지않아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전략 폭격을 개발한 것은 영국인, 그 다음은 미국인들이었다.

 

게르니까 폭격으로 153명이 사망했지만, 함부르크 폭격(1943년에 6일 동안 행해짐)으로 43,000명, 드레스덴 폭격(1945년에 3일 동안 행해짐)으로 25,000명이 사망했다. 드레스덴은 공포와 전쟁 범죄의 상징이라는 게르니까보다도 끔찍했다. 드레스덴은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의 소설 ≪제5 도살장≫보다도 더 잔인했다. 하지만 그 도시는 군사적으로 크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게다가 유럽에서의 전쟁은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그 폭격은 바로 다음 번을 위한 신호탄이었다. 그것은 쏘련에 대한 미국의 군사력과 무자비한 결단에 대한 메시지였다. 폭력으로 정의되는 “미국의 세기”가 도래했다. 쏘련에 대한 메시지는 몇 달 후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똑같이 나타났다.[9]Gar Alperovitz, “Obama’s Hiroshima Visit Is a Reminder that Atomic Bombs Weren’t What Won the War”, Huffington Post, December 6, 2017. 일본의 패색은 짙었고 항복이 임박했지만, 쏘련군은 얄타 회담에서 주선한 대로 만주를 휩쓸고 일본의 관동군을 소탕한 후 한국(조선)과 일본을 향해 가고 있었다. 가 알페로비츠(Gar Alperovitz) 등의 학자들은 미국이 원자폭탄의 시험을 확보하기 위해 히로히토의 처형과 천황제 폐지 등을 주장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일본의 항복을 지연시켰다는 주장을 해 왔다.[10]Gar Alperovitz, “Hiroshima: Historians Reassess”, Foreign Policy, No. 99(1995). 일단 그 폭탄의 효력이 확인되자, 쏘련이 대일전에 참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 후회되었지만, 너무 늦었다 ― 미국이 그 남쪽을 아시아의 전진 기지로 삼은 한국(조선)의 분할(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은,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로써, 미국이 세계의 지배 패권을 확보한 것으로 보이는 “핵의 시대”가 시작됐다. 하지만 미국의 핵무기 개발이 사실상 미국의 무적의 종말의 전조라는 사실이 당시에는, 그리고 아마도 오늘날에도 널리, 인식되지 않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파괴는 끔찍하고 매우 상징적이었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특히 예전과는 비할 수 없는 파괴를 일으킨 소이탄 폭격과 함께, 재래식 폭격의 맹습의 정점이었다.

 

1945년 봄과 여름 내내 일본에서의 미국의 공중전은 아마 인간 살육의 규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정도였다. 그 순간은 기술적인 돌파구, 미국의 민족주의, 민간인 학살 등과 관련된 도덕적, 정치적 양심의 침식이 결합된 결과물이었고, 태평양 전선에서 구체화된 인종 차별에 의해 심화됐을 것이다.[11]Mark Selden, “A Forgotten Holocaust: US Bombing Strategy, the Destruction of Japanese Cities & the American Way of War from World War II to Iraq”, Asia-Pacific Journal, Volume 5, Issue … Continue reading

 

원자폭탄은, 다른 어떤 장비보다 더 적은 비행기와 조종사를 필요로 하며, 더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었고, 코로나19와 같이 보이지 않는 방사선 후유증의 공포도 더해졌다. 게다가, 본격적인 핵전쟁은 지구를 파괴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종류의 폭격의 희생자들에게, 이러한 고려 사항들은 상관없는 것이다.

 

마크 셀던(Mark Selden) 교수는 처음에는 독일, 일본, 영국과 달리 미국은 군사적 목표물에 집중했지만, 1944년까지 영국과 함께 독일에 대한 폭격에 가담했고, 그 후 그것을 일본에까지 옮겨 갔다고 주장한다.[12]Mark Selden, “American Fire Bombing and Atomic Bombing of Japan in History and Memory”, Asia-Pacific Journal, Volume 14, Issue 23, No. 4(2016). 양심의 가책을 버린 미국은 기술적 우위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규모의 대량 살상 무기를 제공했다. 융단 폭격은 1945년 이후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두 번의 거대한 전쟁에서 미국의 전쟁 방식이 됐다. 이러한 광범위한 융단 폭격은 비용 문제에서 그렇게 효율적이지 않아서 지금은 별로 인기가 없지만, 그 능력은 여전하다.[13]Micah Zenko, “Ted Cruz and the Myth of Carpet Bombing”, Council on Foreign Relations(미국 외교협회), February 29, 2016.

베트남인들이 ‘미국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 전쟁들 중 두 번째 전쟁은 더 큰 관심을 끌었다. 대학살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미국의 패배로 끝났기 때문에 미국은 그 후 소위 ‘베트남 증후군’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 여러 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14]Stephen Zunes, “The US Invasion of Grenada”, Global Policy Forum(글로벌 정책 포럼), October 2003.

 

한국(조선)은 달랐다. 한국(조선) 전쟁은 미국이 이기지 못한 첫 번째 전쟁이었다. 그 전쟁은 오늘까지 계속되는 교착 상태, 즉 휴전 상태이다. 물리적인 충돌은 멈췄지만, 편리하고 단순하게도 일방적인 제재라고 불리는 것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 부끄러운 패배도 아니고 승리도 아닌, 그것은 파묻힌 “잊혀진 전쟁”이 됐다. 히플러조차 베트남에 대해서는 61번이나 언급하지만 한국(조선)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는다. 한국(조선)에서 승리하지 못하자 미국은 몹시 화가 났고, 조선은 증오의 대상이 됐다.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한국(조선)인 사상자의 숫자는 한국(조선) 밖에서는 어느 정도 잊혀지고 있다.

 

폭격 기술의 한계와 방공의 효과 때문에, 유럽의 피해는 막대하긴 하지만 제한적이었다. 심지어 더 취약한 일본에서도 파괴는 완벽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교토는 문화적 중요성 때문에 폭격을 피했고, 원자폭탄의 효능을 시험하기 위한 깨끗한 목표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다른 도시들에는 마수가 뻗치지 않았다. 한국(조선)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한 조선 소식통이 제공하는 통계를 보도록 하자.

 

평양에만 428,000개 이상의 폭탄이 투하됐는데, 이는 당시 평양 시민들보다 많은 숫자였다. 당시 미국은 국제 협약에 의해 금지된 네이팜탄까지 사용하면서,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에 투하된 것보다 3.7배 많은 60만 톤에 이르는 폭탄을 투하해 조선 전 지역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었다.

미국은 3년간의 전쟁 동안 한국(조선) 북부에서 1,231,540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했다.[15]Korean Committee for Solidarity with the World People Societies for Friendship with the Asia-Pacific People, “67th Anniversary of Outbreak of Korean War”, e-mail, Pyongyang, North Korea, June 24, … Continue reading

 

이 수치는 ≪워싱턴 포스트≫에 실린 극단적인 반북 언론인 블레인 하든(Blaine Harden)의 글을 보면 그럴듯하게 확증된다.

 

폭격은 미국의 지도자들에 대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길게, 여유롭게, 무자비하게 자행됐다. 한국(조선) 전쟁 당시 공군 전략사령관을 지낸 커티스 르메이(Curtis Emerson LeMay) 장군은 1984년에 “약 3년간 우리는 인구의 20%를 죽였다”라고 증언했다. 그 전쟁의 지지자이자 훗날 국무장관을 지냈던 딘 러스크(Dean Rusk)는 미국이 “조선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 다른 벽돌 위에 서 있는 모든 벽돌”을 폭격했다고 말했다. 전쟁 말기에 도시의 목표물들이 다 사라진 후, 미국의 폭격기들은 수력발전 및 관개용 댐들을 파괴하여 농경지를 침수시키고 농작물을 파괴했다.[16]Blaine Harden, “The U.S. War Crime North Korea Won’t Forget”, Washington Post, March 24, 2015.

 

존 다우어(John Dower)가 냉소적으로 인용한 것처럼, 커티스 르메이(그의 주문은 “석기 시대로 돌아갈 정도의 폭격”이었다)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러한 관찰 기록을 제공했다: “우리는 남북한(조선)의 거의 모든 도시를 불태웠다. … 우리는 백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죽였고 수백만 명을 집에서 몰아냈고, 피할 수 없는 비극이 더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17]John Dower, “Terror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 TomDispatch, May 4, 2017.; Thomas E. Ricks, “‘Mission with LeMay’: Perhaps the Worst Military Memoir I’ve Ever Encountered”, Foreign … Continue reading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여기에 딱 맞는 유명한 단어가 있다. 비록 명확한 국제 비교 통계는 없지만, 인구 비율을 따져 봤을 때 미국의 폭격이 역사상 가장 치명적이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18]Charles K. Armstrong, “The Destruction and Reconstruction of North Korea, 1950–1960”, Asia-Pacific Journal, Volume 7, Issue 0(2009). 그리고 잔인하게도 이 모든 범죄는 유엔(UN)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당시 쏘련 대표단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보이콧하고 있어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미국이 가로채 갈 수 있었던 유엔의 이름이었다. 중국의 자리는 본토에서 대만섬으로 도망친 장제스가 차지하고 있었다. 다른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들(영국, 프랑스)은 모두 미국의 말에 순종적인 동맹국들이었다. 그 후, 더 최근의 대북 제재와 관련하여, 정의로운 목소리는 현실 정치에 의해 억압되었다. 1950년대 초, 조선 사람들은 오늘날의 대북 제재와 다른 물리적 충돌인 폭격을 받았다. 고폭탄과 네이팜탄 제재만큼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경제 제재는 영양실조 통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전히 큰 고통을 가하고 있다.[19]Edith M. Lederer, “UN Investigator: 11 Million North Koreans Are Undernourished”, Associated Press News, October 22, 2019. 창설 당시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후손들을 구하겠다”고 약속했던 유엔은 곧 조선인들에게 그 위협을 가하는 데에 동조했다.

 

기성 민족 국가 사이 전쟁이 있을 때,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의 경우에도 침략자는 대개 쉽게 알아차릴 수 있지만, 내전은 양측이 영토 전체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기 때문에 돌발적으로 발발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I. F. 스톤(I. F. Stone)의 통념 타파적인 저작 ≪한국(조선) 전쟁 비사≫의 서문에서, 미국이 계획한 도발일 수 있는 가능성에 동의하고, 국무부가 전투가 발발했을 때 유엔을 참여시키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에 주목하지만, 대체로 이것[돌발적 발발]이 1950년 6월 한국(조선)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내전임에도, 한국(조선)은, 미 제국의 팽창과 쏘련 및 이어진 중국에 대한 견제에 수반한 “미국의 세기”의 확립뿐만 아니라, 특히 아시아에서 강하게 일어난 1945년 이후의 반식민지 운동을 포함하는, 더 넓은 지정학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이러한 지정학적 요청은 여전히 미국의 한국(조선)에 관한 정책의 주요 동인(動因)이며, 조 바이든이 한(조선)반도 평화 협정을 받아들일 것 같지 않은,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가 나르시시즘적인 급선회에도 불구하고 어느 쪽도 하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이다.[20]Tim Beal, “The Angler and the Octopus: Kim Jong-un’s Ongoing Peace Offensive,” Monthly Review, Volume 71, No. 6(November 2019).

 

이러한 광범위한 맥락에서, 미국과 조선 간의 특수한 대립은, 역사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아이러니한 결과들 중 하나를, 그리고 우리를 다시 폭격으로 데리고 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이 수십 년 동안 조선을 상대로 벌여 온 여러 형태의 전쟁은 제국주의와 그 희생자들 사이의 권력 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945년 원자폭탄은 가장 강한 자의 특권이었다. 오직 미국만이 과학, 기술, 경제 자원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핵 독점권은 곧 쏘련, 그 다음에는 중국, 그 다음에는 다른 나라들에 의해 사라졌다. 대륙 간 탄도 미사일(ICBM)의 동시 개발은 미국이 더 이상 무적이거나 공격할 수 없는 대상이 아니게 된 것을 의미했다. 독일도 일본도 넓은 바다를 넘어서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는 없었지만, 대륙 간 탄도 미사일이 이를 바꿔 놓았다. [미국에게] 더 나쁜 점은 조선의 핵 개발 능력도 함께 생겼다는 것이다.

 

군사력 차이가 터무니없이 많이 나서 미국을 상대로 진지하게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지만, 공격을 받으면 보복 위협을 할 수 있는 작은 나라가 있다.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파괴를 불러오게 되겠지만, 확실한 보복 가능성을 통해 저지력을 갖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21]Tim Beal, “패권과 저항, 강제와 억지: 북한 ‘위협’ 해체와 미국의 전략적 대안 확인(Hegemony and Resistance, Compellence and Deterrence: Deconstructing the North Korean … Continue reading 케네스 왈츠(Kenneth Waltz)는 이란의 핵무장이 안정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해 왔고, 트럼프의 핵 협정 파기가 있었지만 이란은 그 선택을 따르지 않고 있다.[22]Kenneth N. Waltz, “Why Iran Should Get the Bomb”, Foreign Affairs, Volume 91, No. 4(2012). 하지만 조선의 사례는 강력한 것이다.

 

미국이 핵의 비확산에 대해 온갖 이유를 대지만 실은 인류에 대한 핵무기의 우려가 아닌, 핵무기를 가진 또 다른 동등한 나라가 등장할 수 있다는, 충분히 근거가 있는 두려움 때문이다. 만약 줄리오 가보티가 적이 그의 고향에 폭격을 가해서 복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아마도 단념했을 것이다.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한 세기가 넘는 동안 폭탄 세례를 받아 오고 있는 ‘미개한 부족’들이 그 호의에 보답할 수 있다면 제국주의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그 잠재적인 평등화는 조선을 살인적인 폭격의 역사의 중심에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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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References
1 Gavan McCormack, “Sunshine, Containment, War: Korean Options”, AsiaPacific Journal, Volume 1, Issue 2(2003).
2 “S. Strategic Bombers in Provocative Show of Force”, Zoom in Korea, August 19, 2016.
3 Marjorie Cohn, “S. Nearly Used Nukes During Viet Nam War”, CounterPunch, June 11, 2014.; “Telegram from Pyongyang to Bucharest, TOP SECRET, No. 76.047, Regular”, February 19, 1968, available from the History and Public Policy Program Digital Archive.
4 John Kifner, “John Service, a Purged ‘China Hand,’ Dies at 89”, New York Times, February 4, 1999.
5 Paul Craig Roberts, “The Case of General Michael Flynn: The Use of Law as a Political Weapon”, Global Research, May 20, 2020.
6 Giles Milton, “Winston Churchill’s Shocking Use of Chemical Weapons”, Guardian, September 1, 2013.
7 Sven Lindqvist, A History of Bombing(New York: New Press, 2003), section 75.
8 Missy Ryan, “After Bloody Insurgent Wars, Pentagon Launches Effort to Prevent Civilian Deaths”, Washington Post, February 4, 2019.
9 Gar Alperovitz, “Obama’s Hiroshima Visit Is a Reminder that Atomic Bombs Weren’t What Won the War”, Huffington Post, December 6, 2017.
10 Gar Alperovitz, “Hiroshima: Historians Reassess”, Foreign Policy, No. 99(1995).
11 Mark Selden, “A Forgotten Holocaust: US Bombing Strategy, the Destruction of Japanese Cities & the American Way of War from World War II to Iraq”, Asia-Pacific Journal, Volume 5, Issue 5(2007).
12 Mark Selden, “American Fire Bombing and Atomic Bombing of Japan in History and Memory”, Asia-Pacific Journal, Volume 14, Issue 23, No. 4(2016).
13 Micah Zenko, “Ted Cruz and the Myth of Carpet Bombing”, Council on Foreign Relations(미국 외교협회), February 29, 2016.
14 Stephen Zunes, “The US Invasion of Grenada”, Global Policy Forum(글로벌 정책 포럼), October 2003.
15 Korean Committee for Solidarity with the World People Societies for Friendship with the Asia-Pacific People, “67th Anniversary of Outbreak of Korean War”, e-mail, Pyongyang, North Korea, June 24, 2017, available at timbeal.net.nz.
16 Blaine Harden, “The U.S. War Crime North Korea Won’t Forget”, Washington Post, March 24, 2015.
17 John Dower, “Terror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 TomDispatch, May 4, 2017.; Thomas E. Ricks, “‘Mission with LeMay’: Perhaps the Worst Military Memoir I’ve Ever Encountered”, Foreign Policy, March 28, 2013.
18 Charles K. Armstrong, “The Destruction and Reconstruction of North Korea, 1950–1960”, Asia-Pacific Journal, Volume 7, Issue 0(2009).
19 Edith M. Lederer, “UN Investigator: 11 Million North Koreans Are Undernourished”, Associated Press News, October 22, 2019.
20 Tim Beal, “The Angler and the Octopus: Kim Jong-un’s Ongoing Peace Offensive,” Monthly Review, Volume 71, No. 6(November 2019).
21 Tim Beal, “패권과 저항, 강제와 억지: 북한 ‘위협’ 해체와 미국의 전략적 대안 확인(Hegemony and Resistance, Compellence and Deterrence: Deconstructing the North Korean ‘Threat’ and Identifying America’s Strategic Alternatives)”, ≪정치와 평론(Journal of Political Criticism)≫ 제21집(2017. 12.), 한국정치평론학회.
22 Kenneth N. Waltz, “Why Iran Should Get the Bomb”, Foreign Affairs, Volume 91, No. 4(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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