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특집: 전쟁과 평화] 스페인 내전에 대하여

 

폴리트슈투름(Politsturm)

번역: 전찬범(회원)

 

* 이 글의 원제는 “On the Civil War in Spain”입니다. 원문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us.politsturm.com/on-the-civil-war-in-spain/>

 

 

1936년 6월 17일, 모로코에서 쁘로눈씨아미엔또(pronunciamiento, 스페인어로 군사반란을 의미한다)가 시작되었다. 6월 19일에는 스페인 본토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그렇게 3년간 스페인을 집어삼켰던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스페인뿐만 아니라, 세계의 역사, 그리고 전 세계 공산주의 및 반파씨스트 운동에 있어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가 되었다. 스페인 공산당의 지도자였던 돌로레스 이바루리(Dolores Ibarruri)의 말은 예언이 되었다.

 

만약 파씨스트들이 스페인에서 저지르고 있는 범죄를 방관한다면, 파씨즘은 유럽의 다른 인민들을 덮칠 것입니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투쟁을 위해 전투기와 총이 필요합니다. … 스페인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살기보다는 서서 죽는 것을 택할 것입니다.

 

실제로, 스페인에서 우익 세력이 승리한 이후, 유럽에서는 전쟁이 잇따랐다. 1939년 3월 15일, 독일군이 체코슬로바키아에 입성했다(스페인 내전이 끝나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결과는 이미 정해진 상황이었다); 4월 7일에는 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점령했다; 11월 1일에는 독일군이 폴란드의 영토를 침범했다. 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다.

 

스페인 내전은 일련의 사건들의 결과였다. 스페인 제국의 시대는 이미 저문 지 오래였다. 군대는 약해졌고, 스페인은 아메리카에서 그들이 가진 모든 식민지를 잃었다. 부자와 빈자 간에는 엄청난 격차가 형성되었다: 일반적인 노동자와 소작농의 생활 조건은 매우 가혹했으며, 반란 시도는 군대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다: 1931년 군주제가 결국 전복되었다. 그리하여 스페인 제2공화국이 탄생했다.

 

그러나, 사회는 분열되어 있었다. 스페인인들은 극좌에서 극우에 이르는 다양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스페인의 모든 원주민들이 스페인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바쓰끄나 까딸루냐와 같은 지역은 그들만의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우익 진영은 주로 보수주의자, 팔랑헤주의자, 군주주의자, 카톨릭 등으로 구성되었다. 좌익 진영은 많은 정당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부분은 수는 많으나 조직되어 있지 못한 사회주의자들과, 수는 적으나 잘 조직된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지도자(조직의 모든 구성원은 평등했으므로)나 당은 없으나 아나코-생디칼리즘 사상을 고수하는 스페인인들도 수백만에 달했다.

 

각 진영 간의 투쟁은 1936년도에 극에 달했다. 다음 의회를 위한 선거가 치러지던 때였다. 좌익 정당들은 독일에서 저질렀던 실수, 즉 좌익 정당 간의 분열로 인해 나찌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던 실수를 피하기 위해 인민전선이라는 블록을 형성해 연합했다. 우익 정당들은 국민전선으로 연합했다. 선거는 매우 접전이었다. 인민전선이 적은 차이로 승리를 거두었다(인민전선은 4,176,156표를, 국민전선은 3,783,601표를 얻었다). 우익 세력은 정부에게 부정선거 혐의를 제기했다. 서로 다른 이념의 대표자들 사이에 끊임없는 분쟁이 일어났고, 몇몇은 죽음에 이르렀다. 우익 사상을 대변하는 많은 인물들이 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쿠데타를 계획한 이들이었다. 쿠데타를 주도한 이는 에밀리오 몰라(Emilio Mola) 장군이었다.

 

폭동은 스페인의 유일한 식민지인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시작되었으나, 이틀 후에는 본토로 퍼져 나갔다. 반란은 스페인의 모든 도시와 농촌을 휩쓸었으며, 몇몇 지역에서는 성공했고, 다른 지역에서는 진압되었다. 하지만 반군은 주로 도시만을 점령했다. 주변 지역은 그들의 통제 밖에 있었으며, 때문에 그들은 서로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상황은 재앙에 가까웠고, 때문에 우익은 독일과 이탈리아에 지원을 요청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모두 이러한 행동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전쟁 동안, 그들은 반군에게 막대한 수의 무기와 병사, 수천 대의 전차와 항공기를 지원했다.

 

외세의 지원 덕분에, 반란군은 가장 어려운 시기 동안 견디어 낼 수 있었고, 이후 반란군은 결집해서 그들이 점령하지 못한 도시들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공화국의 방어자들이 인민군, 즉 군사적인 지식이나 경험이 없는 일반 민중으로 이루어진 것에 반해, 그들은 훈련된 군대를 보유했으며 동맹국의 지원으로 충분한 탄약을 가지고 있었기에 승리에 승리를 거듭했다.

 

1936년 가을, 국가주의자들이 마드리드에 도달했다. 그들은 공화주의자들의 저항은 미약하고, 내부에서는 도움을 주기를 기대했다. 4개의 열이 자신과 함께 있으며 다섯 번째 열은 이미 마드리드 안에 있다는 몰라 장군의 오만한 진술에서 나온 제5열이라는 표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마드리드 전투였다. 제5열은 실존했으며 반공화주의자 활동을 했지만, 보통의 시민들은 그들에게 극도로 부정적이었으며 때로는 그들을 잔인하게 다루기도 했다. 국가주의자들의 기대와 달리 마드리드 전투는 매우 치열했다. 마드리드 교외, 예를 들어 대학가는 폐허로 변했고, 각 층과 계단마다 전투가 있었다. 불과 6년 후 쓰딸린그라드에서 세계가 목격한 것과 맞먹었다. 또한 스페인 정부의 수반 라르고 까바예로(Largo Caballero)는 탱크와 항공기, 무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 군사 지휘관들을 스페인에 보내겠다는 쏘련의 지원 제안을 승인했다. 11월 7일까지 도시를 점령하겠다는 국가주의자들의 꿈은 산산조각 났다. 상당한 손실 끝에, 공화국은 가까스로 승리했다. 하지만, 공화국은 성공적인 반격을 계획할 수 없었다. 전쟁의 거의 모든 기간 동안, 국가주의자들은 도시 근처에 있었다.

 

공화국은 1936년에서 1937년 사이의 겨울을 꽤 성공적으로 보냈다. 마드리드에 대한 두 번의 공세는 모두 격퇴되었고, 남부에서는 공화주의자들이 중요한 광산을 방어해 내는 데 성공했다. 이 해에 있었던 일련의 전투에서는, 전쟁이 빨리 끝나지 않을 것이 분명해졌다. 전쟁은 참호전이 되었다.

 

프랑꼬는 패배를 빠르게 극복했다. 그는 봄에 강력한 군대를 스페인 북부와 바쓰끄 지방 쪽으로 모아 공세를 가했다. 많은 요새가 있었지만 병력이 제대로 배치되지 못했기 때문에, “아이언 벨트(iron belt)”라고 불리는 강력한 방어 구조물에도 불구하고, 바쓰끄는 공세를 격퇴해 내지 못했다. 바쓰끄에서의 승리 이후 국가주의자들의 우세가 뚜렷해졌다. 공화주의자는 전세를 뒤집어야 했고, 이것을 위해 떼루엘(Teruel) 작전을 시도했지만, 공화주의자의 일부 함대(육군과 달리 공화주의자에게 충성하는 함대)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공화주의자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1937년 라르고 까바예로가 사임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 쏘련의 영향이 커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자리는 후안 네그린(Juan Negrin)이 이어받았는데, 그는 까바예로보다 훨씬 우호적이었지만, 훨씬 덜 주도적이었다.

 

봄 공세 동안, 국가주의자들은 바르쎌로나와 발렌씨아에 근접했다. 국가주의자들이 새로운 타격을 지시한 때는 1938년의 발렌씨아였다. 공화주의자는 인력과 기술 양쪽 모두 국가주의자들에 비해 열세였지만, “아이언 벨트”에는 미치지 못해도 더 적절한 위치에 설치된 강력한 요새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국가주의자들의 전선을 돌파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그 후 공화주의자들은 쏘련 장교들과 함께 에브로(Ebro) 강에 대한 반격 계획을 수립했다. 그것은 113일 간 지속되었으며 매우 치열했다. 하지만 11월, 야궤(Yagüe) 장군은 공화국 군대를 후퇴시켰다. 이로써 공화국은 발렌씨아를 방어할 수 있었으나, 반격할 힘을 모두 잃어버렸다.

 

마지막 대규모 전투는 바르쎌로나 전투였다. 국가주의자들은 공세를 위해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지원받은 수백 대의 탱크와 항공기, 장갑차를 포함한 막대한 병력을 집결시켰다. 반면에 공화주의자들은, 대부분의 장비를 잃어버렸으며, 쏘련에게서 구입한 새로운 장비들은 뮌헨 협정 이후 독일과의 충돌을 두려워한 프랑스 정부의 결정에 의해 스페인으로 반입되지 못했다. 공화주의자들의 투지는 저조했고, 결국 모든 국제 여단은 해산되었다.

 

1월 26일, 국가주의자들이 바르쎌로나에 입성했다. 반란군을 가장 먼저 진압했던 이 도시는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 반쯤 빈 바르쎌로나에서 국가주의자들은 성대한 퍼레이드를 열었다. 공화국은 여전히 마드리드를 포함해 국가의 상당한 부분을 통제하고 있었지만, 전쟁의 결과는 명약관화했다. 많은 스페인의 장성과 정치인들은 이민을 가거나 평화를 주장했다. 3월 6일의 소요 사태 동안, 네그린 정부는 전복되었고, 쿠데타를 일으킨 장군들은 항복 협상을 시작했다. 3월 26일, 국가주의자들이 다시 공세를 개시했지만, 어디에서도 저항은 없었다. 3월 28일에 그들은 마드리드에 어떠한 전투도 없이 입성했고, 4월 1일에는 성대한 퍼레이드를 벌였다. 그리고 프랑꼬는 엄숙히 발표했다.

 

오늘, 붉은 군대가 포로로 잡히고 무장 해제되었을 때, 국민군은 전쟁에서의 최종적인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스페인인들에게는 1975년 까우디요(caudillo, [정치 군사 지도자에게 붙는 칭호이다. 여기서는 프랑꼬를 지칭한다: 역자])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된 프랑꼬 독재 체제가 시작되었다. 45만 명의 사망자와 60만 명의 이민, 도시, 마을, 도로와 다리의 파괴, 이탈리아와 독일에 대한 의존 등 스페인은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했다. 독일과 쏘련은 모두 전장에서 귀중한 경험을 쌓았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팔랑헤주의자들에 대한 지원과 잘 훈련된 반군 병사 등 스페인 공화국이 전쟁에서 패한 것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하지만 공화국이 패배한 주요 원인은 강력한 단결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쏘련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자들, 뜨로쯔끼주의자들, 아나코-생디칼리스트들, 심지어 공화국으로부터 독립한 스페인 북부를 자신들의 국가로 선언하고, 프랑꼬의 세력이 스페인 북부를 점령한다면 독립에 대한 이야기는 없을 것이라는 납득 가능한 이유로 공화국을 위해 프랑꼬와 맞서 싸운 우익 바쓰끄 민족주의자들까지, 공화국 내부엔 통일된 이데올로기가 없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빠르찌잔(partisans)보다는 도적떼에 가까웠던 흩어진 갱단들이 프랑스군을 격퇴했던 나뽈레옹과의 전쟁 경험을 기억했다. 전 유럽이 그들의 투쟁에 감탄했다. 공화주의자들은 승리하기에 충분한 용기와 믿음이 있기에, 1인의 지휘 없이도 적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프랑꼬주의자들은 생각이 달랐다. 프랑꼬 자신은 러시아에서의 전쟁을 연구했고, 볼쉐비끼의 사례를 통해, 오직 하나의 지도자, 오직 통합된 군대와 1인 지휘만이 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확신했다. 1937년, 그는 마누엘 에딜리아(Manuel Edilia)를 제거하고 군주주의자(까를리스트)들과 “팔랑헤 에쓰빠뇰라(Falange Española)”를 결성했으며, 후에 다른 우익 세력을 추가함으로써 국가주의자들의 유일한 지도자가 되었다. 프랑꼬는 자신의 후방과 대외 관계를 통제할 수 있었다. 소총과 탄약이 항상 국가주의자들에게 공급되었다.

 

이때, 공화주의자들은 후방에서 분열했다. “스페인의 뉴욕”이라 불렸던 까딸루냐의 공업 지대는 공화국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화국은 공장을 통제하지 않았고 종종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는 노동조합과 다양한 노동자 조직에 의해 운영되었다. 공화주의자들에게 특히 강한 타격을 준 것은 1937년 봄 바르쎌로나에서 발생한 POUM당[Partido Obrero de Unificación Marxista,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의 뜨로쯔끼주의자들과 이를 지지하는 아나키스트들의 봉기였다. 인민군 부대는 바르쎌로나로 보내져야 했다. 이로 인해 후방의 분열이 가중되었고, 공화국의 총리인 라르고 까바예로가 사임해야 했다.

 

인민군 병사들의 훈련도 문제가 많았다. 국가주의자들의 병사들이 충분한 훈련을 받은 반면, 공화국 병사들은 단기간 훈련을 받았으며, 훈련 중에는 소총조차 지급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전쟁이 끝나 갈수록 심해졌다.

 

아나키스트들에 대해서도 말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대부분은 러시아 내전 때 러시아의 아나키스트들이 그랬던 것처럼 끄로뽀뜨낀(Kropotkin)과 바꾸닌(Bakunin)의 사상을 추종했다. 하지만, 그의 군대에서 막강한 권위를 가지고 의심할 여지없는 유일한 지도자였던 마흐노(Makhno)와 달리, 스페인의 아나키스트들은 단결력이 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생디칼리스트였는데, 즉 그들은 어떠한 권위도, 심지어 그들 계급 내에서의 권위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경험이 전혀 없는 아나키스트 군인은 경험 많은 베테랑과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 스페인의 가장 유명한 아나키스트 중 하나로 동료 생디칼리스트들이 그를 따를 정도로 권위 있는 인물이었던 부에나벤뚜라 두루띠(Buenaventura Durruti)는 1936년 마드리드를 방어하던 중 불가사의한 정황 속에서 살해당했는데, 다른 아나키스트의 총에 맞았다는 설이 있다.

 

공화국에서 유일하게 조직된 군대는 PCE[Partido Comunista Español, 스페인 공산당]의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수는 특히 쏘련이 전쟁이 개입한 이후에 급증했다. 우리는 국제주의자 자원병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쏘련 군사고문단의 가치는 훗날 내전에서 최고의 전차라고 불리게 되는 쏘련 T-26 전차의 효과를 보여 준 1936년 마드리드 방어전에서의 승리에서 드러났다.

 

물론, 국가주의자들에 대한 해외의 원조를 잊지 말아야 한다. 국가주의자들은 여러 국가의 지원을 받았다. 포르투갈, 이탈리아(심지어 두체(Duce, [최고통치자를 뜻하는 말로, 여기서는 무쏠리니를 지칭한다])는 스페인에서 그의 국가의 미래를 보았다), 독일 제3제국은 물론, 미국과 영국, 프랑스도 국가주의자들을 인정했다. 전쟁 동안 15만 명의 이탈리아인과 5만 명의 독일인, 2만 명의 포르투갈인이 프랑꼬의 편에서 싸웠다. 이탈리아는 전쟁에 참여해서 약 1,000대의 항공기와 950대의 장갑차, 8,000대의 차량, 2,000문의 포와 수십만 정의 소총을 지원하기 위해 1,400만 리라를 지출했다.

 

독일은 유서 깊은 스페인의 도시 게르니까와 수백 대의 전차와 포, 통신장비 등을 파괴한 악명 높은 콘도르 군단을 보냈다. 바티칸 역시 프랑꼬주의자들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 동시에 독일과 이탈리아는 스페인 문제에 대한 “불간섭”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공화국을 인정하고 지지한 국가는 쏘련과 멕시코뿐이었다. 공화국은 수백 대의 탱크와 항공기, 60대의 장갑차, 1,000문 이상의 대포, 약 50만 정의 소총 등을 공급받았다. 쏘련은 이탈리아나 독일과 달리 “불간섭” 정책을 승인하지 않았다. 쏘련은 독일 제3제국보다 더 많은 양의 무기와 장비를 스페인에게 제공했지만, 이탈리아가 제공한 막대한 양의 무기에 미치지는 못했다. 한편 멕시코는 자체적으로 현대적인 무기를 생산하지 못했으며, 스페인과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멕시코는 쏘련 무기 공급의 공식적인 중개자가 될 수 있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많은 스페인 난민들을 받아들였다.

 

52개 국가의 42,000명의 외국인들이 공화국을 돕기 위해 왔다. 그중 2,000명은 쏘련의 시민들이었다. 미래의 원수인 말리노프쓰끼(Malinovsky)와 네젤린(Nedelin)도 포함되어 있었다. 공화국의 군인들은 영국, 프랑스, 중남미, 쏘련 등 세계의 각지로 이민을 갔다. 조국에 남아 있던 이들은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노동하도록 강요받았다. 15,000명의 공화국 참전 용사들이 국가주의자 군인들을 기념하기 위한 복합시설인 “전몰자의 계곡”을 건설하기 위해 동원되었는데, 지금은 내전에서 죽은 모든 이들을 추모하는 곳이 되었다.

 

많은 공화국의 베테랑 군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1941년 끄레믈(Kremlin)의 방어를 맡은 이들은 스페인인들이었다. 라 빠시오나리아(la Pasionaria, [‘정열의 꽃’이라는 뜻, 여기서는 돌로레스 이바루리 고메쓰를 지칭한다])의 외아들인 루벤 루이쓰 이바루리(Ruben Ruiz Ibarruri)는 1942년 쓰딸린그라드에서 사망했으며, 대조국 전쟁에서 “쏘련 영웅” 훈장을 수여받은 유일한 스페인인이기도 헀다.

 

스페인 내전은 파씨즘에 대한 교훈을 준 최초의 전쟁이었다. 폭격당한 바르쎌로나와 마드리드, 게르니까 등의 도시를 보며 스페인은 파씨즘의 잔혹한 본성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 전쟁은 모든 좌익에게 교훈을 주었다. 전쟁은 용기와 영웅주의가 승리의 유일한 지표가 아니며, 단결된 군대와 1인의 지휘 역시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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